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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

정조의 생애와 업적 및 정조시대에 일어난 사건들

by 파란토마토 2008. 2. 19.
출처: 다음 신지식

이름 산. 자 형운. 호 홍재.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1775년(영조 51) 12월 노병이 깊어진 국왕이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이 이를 방해하여 조정이 한때 크게 긴장하였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기대를 모을 위치였으나, 탐포하고 무지한 그를 세손이 비천하게 여겨 멀리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완옹주()의 소생으로 어미와 함께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에게 붙어 세손의 적당이 되었다.

그는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시강원의 궁료 홍국영·정민시 등을 참소하기까지 했으나 세손이 이를 듣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손이 대청의 명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를 극력 반대하면서 대청을 명하는 왕의 하교를 받아쓰려는 승지를 몸으로 가로막기까지 했다.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으로 격을 높였다. 그 다음에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상하고 경모궁이라는 묘호를 내렸다.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이렇게 마친 다음 곧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하고 그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면서
명의록을 지어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혔다. 즉위와 동시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제도를 시행하여 후원에 그 본각인 주합루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어 문치의 왕정을 펼 준비를 다졌다.

세손 때부터 시강원 열서()로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1779년에 누이 원빈이 갑자기 죽은 후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를 내쫓고 정사를 직접 주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재위 5년째인 1781년,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각신()들은 이때부터 문한의 요직들을 겸하면서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인
초계문신() 강제()도 주관하였다.

이 제도는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으로 규장각이 이를 주관하게 하여 왕정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신하들을 확대해 나갔다. 근 20년간 10회 시행하여 100여 명을 배출하였다. 무반의 요직인
선전관() 강시()제도도 함께 시행하여 1783년의 장용위(), 1791년의 장용영() 등 친위군영 창설, 운영의 기초로 삼았다.

정조는 숙종· 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정체제를 강화하여 진정한 위민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1784년에 지은 《황극편()》을 통해 주자·율곡의 시대에는 붕당정치가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을 구분하여 전자가 우세한 정치를 꾀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각 붕당 안에 군자·소인이 뒤섞여 오히려 붕당을 깨서 군자들을 당에서 끌어내어 왕정을 직접 보필하는 신하로 만드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필요하다고 논파하였으며, 편전의 이름을 탕탕평평실()이라고 하여 이를 실현시킬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재위 21년째인 1797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공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였다.

그는 만천에 비치는 밝은 달이 되기 위해 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100회 이상을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그는 재위 3년째에 상언()·격쟁()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
일성록()》과 실록에 실린 상언·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을 넘는다. 재위 13년째인 1789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소()를 수원으로 옮긴 뒤로는 능행의 범위가 한강 남쪽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는 수원도호부 자리에 새 원소를 만들어 현륭원()이라 하고 수원부는 화성()을 새로 쌓아 옮기고, 이곳에 행궁과 장용영 외영을 두었다.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는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었는데 그 횟수가 10회를 넘었다. 재위 9년에 경강(), 즉 한강의 상인들 소유의 배를 편대하여 각 창()별로 분속시켰는데 14년에 주교사()를 세워 그 배들을 이에 소속시켜 전라도 조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면서 행차 때 배다리를 만들게 했다.

정조는 재위 2년째인 1777년에 대고()의 형식으로 자신이 펼 왕정의 중요 분야를 민산()·인재()·융정()·재용() 등 4개 분야로 크게 나누어 제시했다. 민산을 일으키기 위해 민은(), 즉 민의 폐막부터 없애야 한다는 신념 아래 즉위 직후 각 전궁(殿)의 공선정례()를 고쳐 궁방의 법외 납수분을 호조로 돌리고 궁방전의 세납도 궁차징세법()을 폐지하고 본읍에서 거두어 호조에 직납하도록 바꾸어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그리고 2년에는
내수사() 도망노비를 추쇄하는 관직을 혁파하였다. 이렇게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인 다음에 감사·수령들로 하여금 민은을 살피는 행정을 강화하도록 하는 한편 어사 파견을 자주하여 악법을 잘라내고 무고를 펴도록 하였다. 심지어 지방의 상급 향리들까지 소견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물었다.

민산의 대본인 농업 발전을 위해 여러 차례 응지() 상소의 기회를 만들고 생산력 증대에 관한 많은 의견들을 수렴해 보급에 힘썼다. 측우기와 점풍간(竿)을 설치하여 세정의 합리화를 꾀했으며 진휼을 위해 여러 차례 내탕()을 출연했다. 1782년에 서운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달력을 계산하여 천세력()을 미리 편찬·간행하게 했다.

민산은 경계()에서 비롯한다는 견지에서 전제()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나 치세 중에는 실현을 보지 못했다.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1791년에 이른바 신해통공()의 조치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없애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했다.

백성들이 부당한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영조 때 시작된 형정의 쇄신을 계승하여 재위 2년째에 형방승지의금부 형조 등에 급파하여 기준을 어긴 형구()의 실태를 조사해 이를 고치게 하고, 그 기준을 《흠휼전칙()》에 실어 각도에 배포하였다. 책에 실은 자의 길이와 같은 유척()을 만들어 함께 보내면서 준수를 엄명하고 어사들로 하여금 이를 자주 확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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