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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n't sweat the small stuff and it's all small stuff.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사리에 밝다고 상상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우리 삶에 뛰어든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인내력 실천기간을 정하라.

▶인생은 공정하지 않다.

▶매일 한번 이상 남을 칭찬하라.

▶자신의 한계를 미리 그어놓으면 결국 그렇게 되고 만다.

▶기분이 저조할 때 떠오른 생각에 속지 말라.

▶인생은 단지 시험에 불과하다.

▶때로는 엉뚱한 친절을 베풀어라.

▶행위의 이면을 들여다 보라. 동기의 순수함을 찾아보라.

▶재미삼아 자신에 대한 비판에 동의해본다.

▶타인의 생각에서 티끌만한 진실이라도 찾아보려고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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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는 연산군 제삿날인 걸 알까?
폐주 연산군 묘(1)


▲ 연산군 묘역 입구에서 종친들이 제사를 봉향하러 찾는 손님을 맞고 있다.

연산군의 제사를 보러 폐왕의 묘에 갔던 날은 4월임에도 쌀쌀했다. 다 물러간 추위가 다시 오는 듯 비까지 뿌리고 있어, 정리중인 겨울옷 중 오리털 파카를 다시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연산군(1476~1506) 500주기였던 지난 4월 2일, 청명제(淸明祭)를 지내던 그날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있어 어두웠고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추운 바람이 불었다.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묘(도봉구 방학동)에 올라서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연산군 봉향회, 거창 신씨 대종회에서 참석한 문중 사람들로 붐볐다. 왕릉에서 치르는 왕이나 왕비 기신제에 여러 차례 다녀봤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참석한 것은 처음 본다.

▲ 연산군 묘역은 연산군과 신씨 묘(위). 후궁 궁주 조씨묘(중간) 휘순공주 내외 쌍묘(아래) 등 5기가 있다. 이날 연산군 제사를 지낸 후 후궁 조씨, 휘순공주 내외 제사도 지냈다.

연산군과 부인 신씨 쌍묘가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에 후궁인 궁주(宮主) 조씨 묘가 하단에는 딸 휘순공주 내외의 묘가 있다. 연산군 묘는 폐왕임을 보여주듯 4200여 평 땅에 일반 묘와 다름없는 작은 규모로 조성돼 있다.

"'왕의 남자'는 오늘이 연산군 제삿날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제물을 차리느라 분주한 가운데 종친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한이 하도 깊어서 날씨도 이렇지"

낮 12시가 되자 청명제가 시작됐다. 한 때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제물을 올렸다는 폐군주의 제사는 이제 일반인 제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왕을 상징하는 황색의 봉등 대신 청사초롱을 든 제관이 들어서자 돌연 겨울을 연상케 하는 찬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 청사초롱 봉등을 앞세워 제관들이 청명제를 지내러 연산군 묘에 오르고 있다. 왕과 왕비는 황색 봉등을 쓴다.

제사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매서운 바람이 불었고 비교적 옷을 두툼하게 입었던 동행인들도 추위에 덜덜 떨기 시작했다. 계절을 무시하고 오리털 파카를 입은 용감무쌍한 패션감각으로 나선 나만 추위를 몰랐다. 아무리 날이 흐리다지만 4월인데 이렇게 추울 수가? 카메라를 든 손이 시려 번갈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녹여야 했다.

"한이 하도 깊어서 날씨도 그렇지."

누군가 혀를 찼다. 정말 연산군의 한이 깊어서 갑자기 추운 바람이 부는 것일까. 제물 중엔 백설기가 놓였는데 그 이유는 연산군의 한이 많아 하얀 떡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란다.

왕권과 신권의 줄다리기

흔히 연산군이라 하면 폭군으로 대변되고 포악한 성품으로 정사를 그르쳐 쫓겨난 왕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은 거의 정신병자 수준으로 등장한다. 아무리 창작이라지만 이런 영화가 나오는 배경은 연산군에 대한 선입견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폐비 윤씨를 향한 그리움 때문에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던가, 요부 장녹수, 백성을 몰아낸 금표, 황음무도한 행위 등이 부각되어 '연산군=폭군'이라는 등식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연산군 일기가 반정세력에 의해 편찬됐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494년 12월 29일 19세의 젊은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은 등극 이전부터 성종을 위해 불교식 제를 올리는 것에 거세게 반대하는 대신들과 충돌했다. 연산군이 공부를 싫어했다 전하나 성종은 폐비 윤씨 사건을 사후 1백년 간 함구하라는 어명을 내려 다음 왕위를 물려줄 세자를 보호하려 했고 이는 세자로서 총명한 자질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증명이 된다.

연산군은 명필로 이름을 날렸고 조선에 왔던 중국사신들은 왕의 글씨를 얻어 가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왕은 함부로 글씨를 내리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얻지 못했다. 공부에 등한시했다는 연산군이 뛰어난 명필로 중국사신에게까지 인정받았다면 그 설의 진위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 지난 4월 1일 연산군 묘에서 봉향된 폐주 연산군 제사에서 종친들이 절하고 있다.

연산군에게 힘이 되어줄 외가가 궤멸했기에 젊은 왕을 지원해줄 정치세력이 없었다. 할머니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를 죽인 장본인이었고 당시 조정을 장악한 기득권의 대표적 집안의 인물이었다. 또한 성종대부터 등용된 사림은 성리학을 내세워 왕권에 정면도전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 건국 공신인 신진사대부들의 권력이 성종대에 지나치게 증대하자 이를 견제하려 등용한 지방 토호세력이었던 사림은 대부분 사간원과 사헌부 등 언론기관인 삼사에 배치됐다. 중앙 핵심권력은 여전히 훈구파가 독점하고 있었고 정계 진출을 노리는 신진사림과 훈구파의 한 판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으로 일어난 무오사화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기인한다. 성종실록 편찬책임자 이극돈은 실록 편찬 도중,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넣은 '조의제문'을 발견하고 연산군에게 고한다.

'조의제문'이란 김종직이 세조 3년(1457년) 밀양으로 가는 도중 꿈에 나타난 신인(神人)이 하는 말을 듣고 서초패왕 항우를 세조에, 항우에게 죽은 의제(義帝)를 노산군(단종)에 비유해 세조찬위를 비난한 내용이었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이 글을 사초에 넣은 것은 예종, 성종, 연산군으로 이어 내려온 왕권의 정통성을 전면부인하고 나아가 왕위도전에 해당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연산군으로서는 이 사건을 절대로 좌시할 수 없었다. 정통왕권체제를 부인하고 나서는 신진 사림의 도전으로 간주하고 정계에 겨우 발을 디뎠던 사림을 제거한다.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종묘사직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었기에 연산군이 아니라 어느 왕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일이었다.

▲ 연산군 제사를 지내기 전 제물이 한지에 싸여 놓였다.

훈구파인 이극돈의 고변으로 연산군 4년(1498) 일어난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한 김종직의 추존세력으로 이뤄진 사림은 거의 초토화됐다. 이 사초 건으로 연산군은 역사의 기록인 사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집권 후반기에 3년마다 편찬하는 실록을 5년으로 바꿨고 사관이 개인적으로 사초를 작성해 사가에 보관하는 일을 금했다. 사초에 사사건건 간섭했던 연산군은 이로 인해 역사를 말살하려 했다는 비난과 연산군 시대가 역사암흑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잔치를 벌인 일과 흥청과 운평 등 기생과 여자들의 기록들로 도배질돼 있다. 왕은 절대 볼 수 없고 간섭할 수도 없는 사초를 가져다 감시했던 연산군이 이를 적어 놓는 것을 묵인했을까? 역사에 평가되는 일을 제일 두려워했던 연산군이었다. 그런 그가 사관들이 이런 기록을 남겨 놓은 것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 패자의 기록인 <연산군일기>의 진위가 어디까지인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연산군은 왕의 향락으로 국고가 비게 되자 공신에게 지급한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해 이를 보충하려 한다. 공신전이란 건국 초기 개국공신들에게 지급한 영구적으로 후손에게 상속되는 전답이었다.

사실 연산군 시대는 태평성대라고 평가받는 성종대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됐고 국방도 탄탄한 풍요로운 시대였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일은 연산군이 백성에게 가혹한 세금을 물려 보충한 것이 아니라 기득권층인 훈구파의 재산을 몰수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기득권의 반발이 일어나자 이를 이용해 임사홍이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공모해 일으킨 사건이 갑자사화다. 폐비 윤씨의 일을 들춰내어 피바람을 몰고온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궁중 세력,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힘의 대결이었다.

바람과 시와 여자

연산군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와 여인과 풍류다. 조선시대 역대 왕 중에서 연산군보다 많은 시를 쓰고 남긴 왕은 없다. 현재 전하는 130여 편도 왕조실록에 남은 것이고 연산군이 폐위되자 그의 시집와 문집은 전부 불태워졌다.

시를 중요시한 연산군은 과거제도까지 성리학의 경서 중심인 논술에서 시문(詩文)으로 바꿨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사회는 시문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연산군의 이런 조치는 사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에도 당송대에 시문으로 과거 시험을 봤고 인재를 뽑았었다. 반드시 경학만을 고집해서 과거를 봐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 경학 아닌 시문으로 시험을 봐서 인재를 등용해도 다를 것 없다는 그의 이런 파격적 조치는 연산군이 폐위된 후 갑자년 과거 합격자가 모두 취소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연산군이 즐겼던 연회는 사실 성종도 허구한 날 베풀었던 잔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성종대의 태평성대는 잔치와 향락이 유행하는 풍조가 민간에까지 만연됐고 연산군 초기는 오히려 이런 세태를 경계했다. 연산군이 낭비한 국고는 문정왕후가 없앤 국고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왕의 향락을 구실로 반정을 일으킨 명분으로는 빈약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를 비난했던 사림이 주도권을 잡았던 조선 후기에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백성이 먹고살기 어려워 원성이 하늘을 찔렀고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났던 일을 비교해 본다면 반정이란 것도 성리학의 도덕성을 구실로 일으킨 정권교체 쿠데타였을 뿐이다.

▲ 왕릉은 무인석 한 쌍과 문인석 한 쌍이 상설되지만 폐군주의 무덤은 문인석 두 쌍이 왕위를 잃은 연산군을 보필하고 서 있었다.

연산군 12년(1506) 7월 20일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죽는다. 연산군의 도덕성에 후세까지 가장 비난을 받고 있는 일이 큰어머니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겁탈했다는 일이다. 박씨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나이가 연상인 부인을 맞아들인 결혼풍조로 보아 월산대군보다 위일 것으로 추정된다.

1454년생인 월산대군(1454~1489)이 1476년생인 연산군보다 22년 위이고 박씨의 나이는 연산군보다 23년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이 폐위되던 해 죽어 왕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는 박씨 나이는 53세 이상일 것이다. 53세 전후라면 여자로서 폐경기에 달하고 상식적으로도 그 나이에 임신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연산군이 어릴 때부터 손수 길러 어머니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이 때문에 실록에도 십여 차례 연산군이 쌀과 노비 등을 박씨에게 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조실록에 이 사건은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 부인(昇平府夫人)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연산 12년 7월 20일)'는 단 한 줄 기록밖에 없다. 여기서 사실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고 '사람들이' 그랬다는 '카더라'식으로 슬쩍 비켜간 글 행간을 주목해야 한다. 반정 이유에서도 박씨가 양모(養母)라는 이유로 금내(禁內)에 머무르게 했다며 아리송한 소문을 부추기는 말뿐이다.

▲ 연산군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은행나무는 수령 830년 거목이다. 저 나무는 폐왕이 이곳에 묻히는 장면을 목격했으리라.

박씨가 죽고 두 달이 못되어 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폐위됐다. 그리고 역사도 그들의 손에 편찬됐으니 터무니없는 소설이나 소문까지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누가 증명할 것인가.

오마이뉴스 한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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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길 역에 너무 몰입했는지 생활 속에 보이는 하나 하나의 자태가 전부 공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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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소리 난 후에도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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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전국을 경악하게 만든 문제의 그 장면..ㅋㅋㅋ

이 사진이 퍼짐으로써 '왕의 남자' 관객수가 두배 더 들었다에 백원 건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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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에게 폭군이란 딱지는 누가 붙였을까?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22]실록에 그려진 연산군

▲ 영화 <왕의남자>에서 연산군역을 맡은 정진영.
ⓒ 이글픽처스

왕은 왕이로되 왕이 아닌 왕이 바로 연산군이다. 이러한 연산군이 영화 <왕의 남자>가 뜨자 새로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소설과 연극, 영화,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 등장한 연산은 폭군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번에 뜬 연산군은 마마 콤플렉스에 힘들어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연산군은 폭군이었을까? 그의 재위기간 12년은 실록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연산군일기>로 남아있다. 내용 또한 패악으로 그득하다.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로 학습하고 그것을 자료로 만들어진 소설을 읽고 영화 연극 드라마를 접한 우리들은 그를 폭군으로 기억한다. 이는 <연산군일기>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한데 따른 폐해라 할 수 있다.

조선실록은 그 기록성에 있어서 세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성에 있어서는 미흡한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적자 후손 또는 방계혈통으로 이어지는 왕통의 연결고리에서 냉정한 객관성을 유지하는데 한계점이 있었다.

▲ 연산군이 19세의 나이에 왕으로 등극했던 창덕궁 인정전
ⓒ 이정근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처럼 반정 시 전위자의 기록은 반정을 기정사실화해 반정의 시각으로 기록해야 했다. 즉 성공한 쿠데타이기에 성공자의 눈높이에 맞춘 맞춤형 기록이라는 뜻이다. 또한 실록 자체의 당위성을 검증할 기회를 원천봉쇄했고 후대에 수정보완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 후대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흥미 본위의 긴장감을 극대화 하고 극적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그를 폭군으로 과장하여 그렸다. 실록 어디에도 연산군을 폭군이라 지칭한 말은 없다. 작가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든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일 뿐이다.

1910년대 이후에 발표된 소설에 등장하기 시작한 연산은 폭군 일색이다. 작품성을 위하여 그려진 폭군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셈이다. 하지만 이 시기가 일본 제국주의가 발호하던 시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이라는 국가를 이조(李朝)라 폄하하고 사색당쟁에 패망할 수밖에 없는 국가로 매도하며 자신들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 하려 했다. 자의든 타의든 황국사관에 일조한 셈이다.

▲ 연산군이 반정군에 폐위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될 때 건넜을 갑곶나루터. 연산군은 살아서 이 바다를 건넜고 백골이 되어 이 바다를 건넜다. 현재는 강화대교가 놓여있다.
ⓒ 이정근

우리는 반복되는 학습에 익숙해진 셈이다. 무의식중에 반복되는 교육은 본의 아닌 결론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공산당은 이마에 뿔이 나고 도깨비처럼 생겼을 것이라는 교육을 받고 그럴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만나보니 뿔도 나지 않고 도깨비처럼 생기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반복학습의 결과는 이렇게 황당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다면 <연산군일기>는 누가 썼을까? 그를 권력의 자리에서 밀어낸 반정공신들의 입김이 서린 자들이 썼다. 때문에 그를 폭악무도한 폭군으로 깎아 내리고 인륜을 파괴한 패륜아로 낙인찍어야 자신들의 쿠데타 명분을 얻을 수 있기에 과장하여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대 조선실록 중에서 <연산군일기>만큼 역사적 사실을 작의적으로 기록한 실록도 없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실록의 생명은 객관성이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 사료를 바탕으로 엄선된 인물들이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하지만 <연산군일기>는 그가 반정군에 의하여 권좌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후에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승자의 기록이다. 연산은 패자다. 패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 <연산군일기> 총서 전문
ⓒ 이정근

조선시대 역사적 사료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역대 왕 실록 중 실록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일기로 남아있는 것이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다. 그 <연산군일기>를 한마디로 압축하는 <연산군일기> 첫 장 총서에는 연산군의 실정과 패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사관들이 사초에 근거를 두고 기술하였겠지만 의도된 작의성이 엿보인다. 여기에 <연산군일기> 총서를 그대로 옮겨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연산군, 휘(諱) 융(㦕)은 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 의 맏아들이며,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尹氏),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 의 딸이 성화(成化) 병신년 11월 7일(정미)에 낳았다. 계묘년 2월 6일(기사)에 세자(世子)로 책봉(冊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명회(韓明澮) 등을 북경(北京)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5월 6일(정유)에 황제가 태감(太監) 정동(鄭同) 등을 보내어 칙봉(勅封)을 내렸다.

소시(少時)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로서 공부하기를 권계(勸戒)하는 이가 있으매,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즉위하여서는, 궁안에서의 행실이 흔히 좋지 못했으나, 외정(外庭)에서는 오히려 몰랐다.

만년(晩年)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거의 다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교동(喬桐) 에 옮기고 연산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 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


▲ 상서원 현판. 승정원과 함께 왕명을 출납하던 곳이다. 연산은 승정원에 어제시를 내리고 정원들로 하여금 답시를 올리도록 했다.
ⓒ 이정근

庸質臨臣十載回(용렬한 자질로 위에 있은 지 10년이 되었건만)
未敷寬政愧難裁(너그러운 정사 못하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네)
朝無勉弼思宗社(조정에 보필하고 종사 생각하는 자 없으니)
都自沖吾乏德恢(나이 어린 이 몸이 덕이 없나 보구료)


연산10년 3월에 지은 연산군의 시다. 연산군은 이러한 시를 지으면 혼자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승정원에 내려 보내 정원들로 하여금 답시를 지어 올리게 했다. 자신의 실책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신하들과 교감하고 시적 토론을 하자는 뜻이 담겨있다.

妄節投身熾火中(지나친 절조로 몸을 불 속에 던졌으니)
徒知高義不知通(높은 절의만 알고 변통 모르네)
虛名處理無相亂(헛된 명예 때문에 흐리지 말라)
正似飛蛾赴燭紅(불보고 날아드는 나비 같으니)
深院無人麗景融(심원에 사람 없고 경치만 아름다워)
桃凝香露醉春風(이슬 맺힌 복사꽃 봄바람에 취하였네)
須緣濃雨添嬌蘂(듬뿍 맞은 비로 꽃술이 더 예뻐라)
手折芳枝拭艶紅(꽃다운 가지 꺾어 요염한 꽃 닦아주리)


평제를 독살한 다음에 유자영을 황태자로 세워놓고 자신이 가황제노릇을 하다 찬탈하여 진황제가 되었던 한나라의 효평황후가 반정군에 쫓기어 불속에 몸을 던져 죽었던 고사를 인용하여 연산군이 권좌에서 쫓겨나기 1년 전, 그러니까 연산 11년 11월 5일에 지은 시다. 역사를 모르면 지을 수 없는 시다.

▲ 도봉산 자락에 초라하게 누워있는 연산군.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군부인 신씨다.
ⓒ 이정근

연산군은 태어날 때부터 폭군은 아니었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추앙받는 아버지 성종의 원자로 태어난 연산은 성종이 승하하자 뒤이어 조선 10대 왕에 즉위했다. 즉위 초기에는 정치에 서툴기도 했지만 할머니 인수대비의 말을 잘 따랐다.

심성도 여리고 감성도 풍부했다. 시(詩)도 130여 편을 썼다. 학문의 깊이가 없으면 쓰지 못하는 것이 칠언절구다. 훗날 반정군에 의하여 대부분 불태워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연산군일기에 120여 편의 시가 남아있어 그의 시심(詩心)을 오늘에 전한다.

서모 자순대비(장현왕후)를 친모로 생각하고 깍듯이 모셨다. 훗날 중종으로 즉위한 이복동생 진성대군도 사랑했다. 그가 진성대군을 견제했더라면 진성대군이 중종이라는 용상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살육이 춤추는 광기의 시대에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2006-03-07 16:3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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