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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세조의 킹메이커,
신 숙 주



▣방송 : 2007. 7. 7(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김현기PD
▣작가 : 윤영수

 


신숙주! 그의 선택이

조선의 왕, 그리고 역사를 바꾼다!

세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조선의 전성기!
그 찬란한 시대에
여섯 임금을 모시며 변신을 거듭해온 인물이 있다. 조선 500년사에 걸쳐 지금까지도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
신.숙.주!

그는 처세에 능한 변절자인가?
혼돈의 왕조를 바로잡은 천재관료인가?


"이 나물을 만두 속으로 넣을 적에 짓이겨 넣는 고로 신숙주 를 이 나물 찧듯 하자고 하여 숙주나물 이 라 하였다"

                  이용기 『조선무쌍요리제법』 中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신숙주는 큰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 하셨다."

                                             『문종실록』中


 

1453년 10월 10일(음), 그들의 선택이 조선의 역사를 바꾼다.

그 때 조정에는 조선건국 이래 최대의 피바람이 몰아친다. 단종 1년, 수양대군은 당시의 권력자였던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와 아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살생계획에 따라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친동생인 안평대군까지 귀양을 보낸다. 치밀하고, 처절했던 조선 초 최대의 쿠데타, 계유정난! 대권을 거머쥔 수양대군의 뒤에는 시대를 넘어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문제의 인물,
                       
신숙주가 있었다.

수양대군! 명관(明官)을 알아본 최고의 선택 - 외교 전문가, 신숙주!

"신숙주는 곧 나의 '위징'이다"
위징(魏徵)'은 당태종의 참모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재상이라 불렸던 인물. 수양대군은 세조 즉위 후 신숙주를 '위징(魏徵)'에 빗대어 총애하였다. 그렇다면, 세조의 남자, 신숙주는 누구인가?

"집현전에서 근무하게 되어 숙직할 때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책을 가져다가 남김없이 모두 열람하였다. 어떤 때에는 동료 대신 숙직을 청하여 밤새도록 잠자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필원잡기 中

그는 세종 때 집현전 8학사였고, 일본에 다녀온 촉망받는 신진 지식인이었다. 또한 몽고어, 일본어, 만주어 등 외국어에 두루 능통한 전문 외교관이기도 했다.

수양대군이 권람에게 중국에 보낼 정관이 될 만 한 자를 물었더니 신숙주를
추천하였다.                               <연려실기술> 연려실기술 동각잡기 中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명나라로부터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 능력 있는 외교 전문가가 필요했던 수양대군! 천재관료 신숙주를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연을 가장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는데...

신숙주! 최고 권력을 향한 최선의 선택 - No.3 수양대군!
수양대군은 왜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일까? 당시 수양대군은 가장 정통성 있는 세력인 단종, 정가의 평판이 좋은 양평대군에 이어 제3세력 이었다.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조카 단종과 친동생 안평대군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종을 보위하며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도 탄탄대로를 걸었을 신숙주. 그는 왜 수양대군과 손을 잡고 시대를 뒤집으려 했을까? 왜 자신을 아꼈던 역대 왕들에게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300년 후, 그의 선택이 비난 받기 시작한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모시며 조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국가경영자 신숙주!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그의 공로는 반대파였던 사림의 시조 '김종직'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단종을 몰아낸 후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를 공신비로 삼았다는 내용이 문헌에 기록될 정도였다. 그러나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를 도운 다른 공신들에 비해 훨씬 청렴하고, 뛰어난 관료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왜 유독 신숙주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변절자의 상징으로 만든 것일까?


신숙주 재발견! 역사적 편견 속 가려져있던 그의 또 다른 면모!

1460년, 8000명의 조선군사가 두만강을 건너 여진 정벌에 나선다. 여진족을 괴멸시키며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적이 불시에 조선군 진영을 기습한다. 당시 조선군의 군장이었던 신숙주. 한 밤중에 벌어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는 가만히 누워서 시를 읊는데...


신숙주는 조선 전기, 문물제도 완성의 총지휘자였다. 한글편찬을 비롯하여 운문, 서예에서 해박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경국대전>, <동국통감> 등의 법전과 역사서 편찬을 주도하였고, 세조실록, 예조실록의 찬수까지 도맡아 했다. 말년에는 벼슬에서 간절히 물러나고 싶어 했지만 나라의 임금이 놓아주지 않아 죽을 때까지 벼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신숙주인 것이다.

 



신숙주는 세조에게 빌붙어서 권력을 잡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진정코 흔들리는 국가를 바로 잡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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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정치가였으나 실패한 아버지였던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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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英祖) [1694 ~ 1776] [1724.08 ~ 1776.03] 조선 제 21대 왕

前 연잉군, 後 왕세제
휘 : 금(昑)
자 : 광숙(光叔)
태어난 곳 : 1694년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
승하한 곳 : 1776년 3월 5일 경희궁 집경당  
아버지 : 숙종(肅宗, 조선 제 19대 왕) [1661 ~ 1720]
어머니 :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 ~ 1718]


◎정치이념

극단으로 치닫던 당쟁을 해결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조정을 안정


◎업적

1740년 : 개성부 행차 때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선죽교에 비석을 세우는 등 역사상의 충신들에 대한 추존사업을 실시함
1743년 : [수교집록]을 속편함 , [속대전]을 [속오례의]와 함께 편찬함
1745년 :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3군문이 도성을 분담하여 보수, 관리하게 함
1746년 : [자성편]을 지음
1748년 : 세입, 세출 제도의 확립을 목적으로 [탁지정례]를 편찬함
1749년 : [정훈]을 지음
1751년 : 수성윤음을 내려 도성의 5부 방민이 유사시 삼군문 지휘 아래 방어할 구역을 분담하여 실제 훈련하기도 함
1755년 : [대훈]을 지음
1762년 : [경세문답]을 지음
1764년 : [경세편], [표의록]을 지음   
1765년 : [백행록]을 짓는 등 후세 왕들을 위해 왕자가 걸어할 저술을 많이 남김
1770년 : 세종의 측우기 만드는 법을 터득하여 호조에 명해 양궐 및 서운관에 만들어 설치하게 함
              또한 양도, 팔도에 분송하여 매번 비가 올 때마다 강우량의 척촌을 재서 보고하게 함
1771년 : 전주 경기전에 조경묘를 건립함
1773년 : 개천의 양변에 돌을 쌓아 흙이 내려가지 않도록 함
1773년 : 경희궁 건명문에 신문고를 달게 함
1774년 : 노비 신공 전면 혁파




◎다른 군주와 달랐던 영조만의 업적

국왕이 되기까지 당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경험한 영조는 국정의 기본방향을 모든 당파가 고르게 참여하는 탕평정치로 잡고, 성균관 탕평비문에 그 뜻을 새겨 넣었다.

" 편당을 만들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고,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만드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이것은 노론의 지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던 영조가 노론에 진 부채를 갚지 않겠다는 일종의 독립선언이었다. 이후 영조는 소론과 노론의 강경파들을 축출하면서 탕평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확대에 주력하였다.

탕평책으로 왕권을 강화한 영조는 국가전례를 정비하고, 경제를 개혁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해동지도], [속오례의], [속대전], [동국문헌비고]와 같은 책들은 모두 영조대에 편찬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또한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과도한 부담을 덜어주고, 어머니가 천민일 경우에만 노비가 되게 하는 종모법을 실시하여 많은 노비들을 평민으로 해방시켰다.

영조는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였다. 그는 많은 어제(국왕의 저술)와 어필(국왕의 글씨) 작품을 남겼고, [대학]의 서문을 직접 짓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경연에 대신들을 불러놓고 자신이 직접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이는 삼대 성왕들의 이상적 군주상인 군사(스승으로서의 군주)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영조는 또한 왕세제로 책봉되던 28세부터 승하할때인 83세까지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이런 군주는 세종, 영조,정조가 유일하다. 이러한 영조의 학구열이 손자에게 이어져 마침내 군사를 실현한 국왕 정조가 나타났던 것이다.


영조는 손자인 정조를 가르치기 위해 별도의 교재를 만들기도 했는데, 만년에 만든 [어제조훈]이 그 대표적인 책이다. 영조는 손자인 정조의 자질이 뛰어남을 알고 1756년 세손이 5살 때 서지수,김양택을 왕손 교부로 임명하여 [동몽선습]을 가르치게 했다. 이는 왕손에게 별도의 사부를 두지 않던 관례를 바꾼 것으로, 영조가 정조의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또한 서민적인 것을 좋아하는 검소한 군주였다. 정순왕후와의 결혼도 정성왕후 때의 사치를 근절하고자 역대 군왕 중 가장 간소하게 치뤄졌고 영조 초기까지 이어져 오던 귀빈들이나 왕실 여인들이 머리에 쓴 가채를 1756년부터 금지하였다. 무거운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원래의 이유는 사치를 막고자 함이었다.




◎영조가 실패한 것들

영조는 탕평책을 추진했지만 그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즉위 초 영조는 소론이 퍼뜨린 경종독살설과 이인좌의 난을 겪는 등 많은 난관에 부딪쳤으나, 다행히 지속적으로 탕평책을 유지하여 당쟁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영조가 70세를 넘기고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을 때 당쟁은 다시 격화되었다.

특히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서는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했다. 25세 때 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본 효장세자(後 진종)가 어린 나이로 사망하자 1735년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전까지 무려 7년간 후사가 비어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영조의 나이 42세 때인 1735년 1월 21일, 영빈 이씨에게서 드디어  원자 선(後 사도세자)를 얻었고, 그 이듬해인 1736년 3월 15일 원자 선을 2세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영조의 나이 56세 때인 1749년, 열다섯살의 사도세자에게 국정을 맡기게 된다. 그러나 틈만나면 노론세력들과 충돌했던 세자는 결국 붕당정치의 희생양으로 뒤주 속에 갖혀 죽게 된다.

결국, 영조가 지향하고자 했던 탕평책은 사도세자사건을 계기로 1762년부터 영조 말년까지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하지만 다행인것은 영조가 인조처럼 후손은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인뒤 세손 석철, 석린, 석견 등 손자들까지도 제주도로 유배시켜 죽였으나,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에 뉘우치고 세손에게 정성을 다하여 성군이 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있던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평생을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고, 선왕 경종을 독살했다고 오해까지 받은 상황과,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사이에서 탕평책과 잦은 선위파동을 일으키면서까지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영조... 비록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긴 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검소하고 이뤄냈던 업적들은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참... 영조는 애증이 가는 문제적인 군주이다.
정치만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지만... 사도세자에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무서운 사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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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 독살사건(부제; 누가 왕을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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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부터 남성의 상징이 죽........ 늘어져 있는 곳이 있다.

이 곳은 아프리카 오지나 미개한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 강원도 삼척의 (무려) 공원이기까지 한 곳이다.
약간 민망하긴 하지만 편견을 벗고 옛 전설을 이해하면 참 재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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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야사 일부분.
이것들 중 일부는 다른 곳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태종>

태종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가 헛발질한 것도 적음. 태종 그거는 제발 지워라 쪽팔리다 했는데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가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 적음.


하도 사관이 따라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말타고 거기까지  쫓아오는 사관....



<세종>


북방 개척한다고 도망가고, 모친상 핑계로 낙향
조선의 성군(聖君)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격인 새벽 4시 상참(上參)에서 부터 과업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했다.
밤 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들고 나선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나도 독촉하고 소위 '갈궈 대는' 바람에

모친 3년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 하려한다.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더 시킨다.


흔히 청백리라고 알려진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처절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그리고 나름대로 참 비리가 많은 황희

황희가 청렴결백 두루뭉술과는 거리가 멀었다고해요~
자기 사위가 사고친걸 무마하려다가 파면당하기도 하고,
수령에게 땅을 받고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기도 했다네요 ;
만화로 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알게된 건데
항상 좋은면만 보여주던 사람들이 이런다니까 좀 실망이기도 하고 그래요 ㅋㅋ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을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나라에 큰 일이 있어서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중이었는데

태종임금님이 특별히
충녕[세종대왕] 을 모시는 하인들한테 충녕이는

삼시 세끼 고기 꼭 챙겨먹이라고 안 그럼 밥 안 먹는다고 ㅋㅋ
충녕이에게만 고기 먹는 걸 허락한다고하고

또 밥상에 고기가 없으면 상을 물리고 반찬 다시 가져오라고 하고
결국 고기반찬이 없던 밥상을 먹고 나서는 길에는 기운이 없어서 못 움직인다고
주저 앉아주시는 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랑해요 고기 당신없인 못살아 ㅋㅋㅋㅋㅋㅋ

어쨌든 삼시 세끼 꼬박 고기를 드셔야했던 세종대왕님 ㅋㅋ


친경 한다고,소 끌고 밭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배고픔을 못견뎌,
밭갈던 소를 때려 잡아서 국 끓여 드심



<문종>



문종은 부인 복이 정말 없었음.


문종의 부인은 용모가 그리 예쁘지 않아서 당시 세자였던 문종의 마음을 얻지 못헀는데

자나깨나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골몰하던 그녀가 쓴 방법은 주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의 신발을 베어다 태워 가루로 만든 다음

그 가루를 술에 타 남자에게 먹이기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 간직하기 등등......  그러다 걸려서 폐출당했음.


근데 좀 불쌍 ㅠㅠㅠ 그리고 그 후에 또 고른 봉씨는 너무 다혈질이라

세자와 성격이 안맞았고,


그 후에 세명의 후실을 들였는데 그중 권씨와 겨우 아이가 생겼음

근데 문제는 다혈질 봉씨로, 임신사실을 알고 나서 부터 자기도 임신했다고 거짓말하고

외간남자 엿보고 대낮부터 술주정등등 문제가 많이 생김.

그래도 두번이나 폐출시킬순 없어서 그냥 세종이 눈감아주고 있었는데 일이 터짐

궁녀중 동성애자인 궁녀를 불러들여서 사부작사부작 한거임...... ㄷㄷㄷ 결국 걸려서 폐출됨.



<세조>



세조가 왕이 되기전에 문종이 죽은지 나흘 뒤에,

단종의 즉위식이 있었던 날 (당시에는 수양대군이라 불림) 세조는

"대행의 은덕을 어찌 말로 다 할수 있으랴? 나더러 바르고 충성스러우며 지식이 남다르다고

항상 더불어 의논하셨지. 진법을 만들었더니'제갈량인들 수양보다 나을까?' 이러시는거야.

또 칭찬하기를 '수양은 비상한 사람이야'하셨어. 형제간의 정이 이와 같았거늘 흐규긓그그"

........... 음. 조,좋은 자기 칭찬이다 !!  


하루는 신숙주 한명회(세조의 오른팔격)와 술을 마시다가 신숙주의 팔을 비틀고는

아프냐며 자기팔도 비틀어보라 했는데 진짜 했는데 일단 술자리가 끝난뒤 생각해보니

괘씸해서 신숙주가 뭐하고 있는지 몰래 알아보라고 했는데 이미 신숙주는 한명회가

그대가 가지고 있는 밤에 책을 보는 습관을 오늘도 한다면 그대의 목숨이 위험해지리라

는것을 전해들어 불을 끄고 자고 있어서 화를 면할수 있었다는 이야기.

(이건 너무 간단히 쓰여있어서 제가 좀더 자세하게 고쳤어요)


세조는 후궁이 단 한명 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조선의 왕비가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고 나와있었음.

정희왕후는 좀 여장부인듯.



<연산군>



성종이랑 연산군이랑 오랜만에 밖에 바람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했다고...


엄청 꽃미남이었다고 함 여리여리한 미소년


연산군은 시를 좋아하고 노래와 춤을 즐겼는데

연산이 처용무를 추면 다들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고.

그가 우는 연기라고 할라치면 기생들도 모두 따라울어

연회장이 통곡의자리가 되기도 했다고한다.



<중종>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오면 눈물흘림.
버선발로 뛰어남감



<명종>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하나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고 명종은 그거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본투 댄싱 ㅋㅋㅋㅋㅋㅋ  

꾀병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 받음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임.



<효종>



나르시즘에 빠져서  항상 거울을 보고 웃음 [한마디로 왕자병]


인조를 닮아 얼굴이 예뻤는데 지 예쁜거 알았다고 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울을 끼고 자기 얼굴보며 만족하며 웃었대요.



<숙종>



따뜻한 온돌방에서 신하들이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려서 얼음장에서 일하게 만들었음




<정조>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저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했으나 오래도록 계속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실험정신이 참 투철하시군녀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해 숙제 내줘 숙제 제대로 안하면 개망신 줘

술 못마시는 신하한테 술마시라고 강요 기절할 때까지 마셔

활 못 쏘는 신하한테 활 연습시켜

술을 무진장 좋아라 해서.
정약용에게,필통에 술 한가득 부어서 원샷을 강요
그래서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함.
그때당시 필통에 술붓기라면..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거랑 맞먹는것.


학식, 인품, 외모 딸리는건 건강이 약한것 밖에 없음



출처 : 엽혹진 '병풍뒤향냄새'님이 쭉빵에서 퍼오신 글
         http://blog.naver.com/khs9182/80107049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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