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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 쓴 글은 역시 옛날 이야기보다 재미있다. (역사니까 옛날 이야기 맞구나..ㅋ)

 

 

유약한 숙종, 깨방정 숙종... 숙종의 진짜 모습은?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4월 26일 제11부 때부터 전국 시청률 20%대(TNmS 집계 기준)를 돌파한 MBC 드라마 <동이>가 주는 색다른 재미 중 하나는 '숙종의 이미지 변신'이다.

 


 

종래 사극에 나온 숙종과 달리 <동이> 속의 '깨방정 숙종'은 밝고 경쾌한 이미지의 소유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따금씩 장난스러운 말투와 표정을 구사하는 숙종(지진희 분)은 궁녀들에게 손을 흔드는가 하면 동이(한효주 분)에게 등을 밟히기도 하는 등, 파격적인 군주의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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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동이>에서 숙종역을 맡은 배우 지진희.
ⓒ MBC

어쩌면, 드라마 <동이>의 '숙종 이미지 바꾸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파격적으로 전개돼도 무방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기존의 숙종 이미지는, 엄밀히 말하면, 사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숙종의 이미지는 '궁중의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유약한 지아비'의 이미지다. 사실, 이런 이미지는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악하고 시기심 많은 첩인 교씨에게 눈이 멀어 지혜로운 조강지처인 사씨를 내쫓았다가 나중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소설 속 유한림(유연수)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숙종의 이미지와 오버랩 되어 우리의 인식 속에 전해져 왔다.


 

당연한 언급이지만,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다. 당시의 사실관계를 일정 정도 반영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만중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게다가 김만중(1637~1692년)은 46년간에 걸친 숙종(재위 1674~1720년)의 치세 중에서 그 절반도 안 되는 18년밖에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숙종이란 군주를 전체적으로 통찰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런 김만중이 남긴 소설을 근거로 숙종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한 숙종


 

그렇다면 숙종의 올바른 이미지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사료에 드러난 객관적 상황을 근거로 숙종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숙종이 과연 여인천하에 휘둘렸는가?'하는 문제에만 국한하여 숙종의 이미지를 탐색해보기로 하자.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이용했는지를 판단하고자 할 때 가장 과학적인 방법 중 하나는, 양쪽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어느 쪽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 최종적으로 생존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A가 "나는 B를 이용했다"고 주장할지라도 두 사람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B의 목적이 달성되었거나 혹은 B가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면, A가 주관적으로 어떻게 자부하든 간에 둘 중 상대방을 이용한 쪽은 B라고 해석하는 게 가장 객관적인 접근법이 될 것이다.


 

그럼, 숙종과 여인들의 상호작용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어느 쪽일까? 또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어느 쪽일까?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1623년) 이후 51년간 조선의 여당은 기본적으로 서인 당파였다. 인조·효종·현종 시기에 서인이 만년 여당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숙종 즉위년인 1674년에 발생한 제2차 예송논쟁을 통해 남인 당파가 집권에 성공한 이후로 숙종 연간(1674~1720년)에는 집권여당이 수시로 교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1680년에는 경신대출척(경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부활했다가 1689년에는 기사환국으로 남인정권이 기사회생하고, 1694년에는 갑술옥사로 서인정권이 되살아났다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면서 소론정권이 나타나고, 1710년에는 경인환국으로 노·소론 균형 국면이 조성되었다가 1716년 병신처분으로 노론정권이 성립했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일종의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격한 대결의 와중에 어느 일당이 권력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한쪽이 너무 커지기 전에 다른 쪽에 힘을 실어주는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당파에 대한 숙종의 태도'와 '처첩에 대한 숙종의 태도' 사이에 고도의 상호 연관성이 존재했다는 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서인 출신의 인현왕후가 중전이 된 것은 서인이 재집권(1680년)에 성공한 직후의 일이었다. 만약 남인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면, 인현왕후가 인경왕후의 뒤를 이어 1681년에 중전 자리를 차지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인 출신의 새로운 중전은 서인 정권의 부활과 함께 출현했던 것이다.

 

 

 


 

'챔피언' 장옥정의 자리를 불안하게 만든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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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시대 여인천하의 세 주역. 왼쪽부터 최숙빈(한효주 분), 장희빈(이소연 분), 인현왕후(박하선 분).
ⓒ MBC

인현왕후가 중전이고 서인이 여당이던 시기에, 숙종은 남인의 지원을 받는 장옥정(장희빈)의 위상을 계속 높여주었다. 장옥정은 1686년에 종4품 숙원에 책봉되고 1688년에 정2품 소의로 승진한 데 이어 1689년 초에 정1품 빈으로 승격되었다. 서인과 인현왕후가 너무 세지지 못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숙종 쪽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1689년에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서인정권이 붕괴하면서 장옥정과 남인의 세상이 도래했지만, 숙종은 이번에는 장희빈에 맞설 대항마를 서서히 육성했다. <동이>의 주인공인 최 숙빈(숙빈 최씨)이 바로 그 대항마였다. 장옥정이 중전 자리에 있었던 시기에, 최 숙빈은 궁녀에서 후궁으로 뛰어올랐다.


 

인현왕후 대 장희빈의 대결구도로 전개되던 여인천하에 최 숙빈이라는 다크호스가 끼어들게 된 것이다. 전혀 의외의 인물을 등장시켜 여인천하를 복잡하게 만드는 한편 '챔피언' 장옥정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든 인물은 바로 숙종이었던 것이다.


 

1694년에는 인현왕후와 서인정권이 함께 복귀했고 이때 정계에서는 남인정권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장희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세 여인이 궐 내에서 공존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장희빈의 아들인 이윤(훗날 경종)이 무사히 왕위를 잇도록 하기 위한 숙종의 배려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승리한 인현왕후의 힘이 너무 커지지 않게 하는 것에 기여했다.


 

이런 조치는 결과적으로 서인과 인현왕후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상태는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종식된 1701년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당쟁과 여인천하가 상호 맞물려 돌아간 위의 과정을 보노라면, 숙종이 결코 여인천하에 휘둘린 유약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판단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세 여인이 '때때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숙종이 성취한 목적에 비할 것이 못 된다. 숙종은 처첩을 다루는 과정을 통해 '매번' 당쟁의 균형을 조절하는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는가?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끝난 1701년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숙종 27년(1701) 음력 8월 14일에 여인천하의 한 축인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최 숙빈은 "인현왕후 생전에 장 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게 귀띔하여 장 희빈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물론 장 희빈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명분으로 음력 10월 8일에 장 희빈에게 자진(自盡)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여인천하의 세 주역 중 2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최 숙빈이 여인천하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여인천하 안에서의 승리'에 불과했다. 인현왕후·장 희빈의 잇따른 죽음으로 최 숙빈에게도 중전을 노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장 희빈이 죽기 전날인 음력 10월 7일에 숙종이 "앞으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이 될 수 없도록 한다"는 왕명을 내림에 따라 최 숙빈이 혹시라도 품었을지 모르는 '왕후의 꿈'은 순식하게 허망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중전은 못 되더라도 최 숙빈이 그대로 대궐에 남아 있었더라면, 내명부는 최 숙빈의 '독재' 하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을 경계해서였는지 숙종은 1702년에 내명부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새로운 중전인 인원왕후를 맞아들인 데에 이어 세 명의 후궁을 승진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새로운 내명부는 인원왕후 밑에 김 영빈(영빈 김씨), 박 명빈(명빈 박씨), 유 소의(소의 유씨) 등이 포진하는 구도로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 숙빈은 궐을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최 숙빈은 1701~1704년 사이에 숙종 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현왕후·장 희빈·최 숙빈 구도를 끝내고 인원왕후 중심의 새로운 내명부 체제를 만드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여인천하 종결서 드러난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가 종결을 향해 치닫던 1701년에 숙종이 취한 태도를 보노라면, 여인들의 파워가 자신의 파워를 능가하지 못하도록 항상 고심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인현왕후가 죽자 장 희빈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최 숙빈에게도 궐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숙종의 모습에서, 우리는 내명부의 그 어떤 여인도 절대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 했던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이미지를 읽을 수 있다.


 

만약 숙종이 처첩들에게 휘둘리는 신세였다면, 여인천하가 종결되기 전에 그의 권력이 먼저 종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도리어 숙종은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자신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런 숙종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숙종'이 아닌 '여인천하를 이용하는 숙종'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여인천하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숙종의 모습.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는 <사씨남정기>가 만들어낸 숙종의 이미지가 역사적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겉으로는 남에게 휘둘리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영악한 군주'의 모습. 그것이 숙종의 진짜 이미지가 아닐까. 드라마 <동이>에서는 '깨방정 숙종'을 내세워 숙종의 이미지를 바꾸고 있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 각인된 숙종의 이미지는 드라마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파격적으로 탈바꿈되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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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현종 15 / 숙종 즉위년, 甲寅)  
  · 1월
: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 승하
  · 7월 : 대왕대비(장렬왕후)의 인선왕후에 대한 복제를 기년(朞年)으로 정함
  · 8월 : 현종 승하(해시(밤9-11)
  허적을 원상으로 삼음
  왕세자(숙종) 즉위(인정문에서)
  송시열을 서울로 들어오도록 함 - 오지 않음
  · 9월 : (영부사) 송시열에게 능지(묘비문)를 지어 올리도록 명함
  송시열이 사양하는 상소 올림
  정치화를 영부사로 삼고 송시열은 판중추부사(판부사)로 내림
  유생 곽세건이 송시열에게 내린 명이 부당하니 거두어 달라는 상소 올림
  (송시열은 선왕의 적통을 문제 삼은 이다)
  · 10월 : 송시열이 지문 짓기를 사양하자 김석주에게 짓도록 함
  (송시열에 관한 견제가 구체화)
  · 11월 : 이단하가 지어올린 대행왕의 행장을 고쳐 쓰게 함
  (송시열이 효종을 서자라고 썼던 대목이 오인례였음을 명시하라)
  · 12월 : 기해년 의례(儀禮)를 정한 신하들을 추죄함. 송시열(宋時烈)의 관작을 삭탈함
     
  1675년(숙종 1, 己卯)  
  · 1월
: 송시열을 덕원(德源)에 유배.
  · 3월 : 복창군·복평군을 궁녀 간통죄로 유배
  · 4월 : 윤5월 송시열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함
  · 8월 : 윤휴의 건의로 복제를 3년으로 함.
  · 9월 : 비변사에서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을 올림.
  * 김우명(金佑明, 1619-1675) 죽음.
     
  1676년(숙종 2, 丙辰)
 
  · 2월
: 이황을 모신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사액함.
  · 4월 : 대흥산성(大興山城), 개성산성(開城山城)을 수축함.
  · 8월 : 선사진(宣沙鎭)을 가도로 옮김.
  용강(龍岡)에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함
  ·  
  1677년(숙종 3, 丁巳)
 
  · 3월
: 호패법 시행.
  · 9월 : 대흥산성(大興山城), 개성산성(開城山城)을 수축함.
  · 11월 : 선사진(宣沙鎭)을 가도로 옮김.
  용강(龍岡)에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함
  · 12월 : 호포법(戶布法)의 시행을 논의함.
  경상도에 대동법을 시행함
     
  1678년(숙종 4, 戊午)
 
  · 1월
: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유통시킴.
  · 3월 : 청의 사신이 조선의 문적(文籍)을 얻어감.
  · 4월 : 공명첩(空名帖)을 폐지.
  · 6월 : 관서, 호남의 감사(監司) 병사(兵使)에게 주전(鑄錢)을 시킴.
  · 9월 : 각사노비(各司奴婢) 면천(免賤)의 한계를 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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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9년(숙종 5, 己未)  
  · 6월
: 허목(許穆)이 허적(許積)을 논핵함.
  남인이 청남(淸南) 탁남(濁 南)의 나뉨.

 

1680년(숙종 6, 庚申)  
  · 1월
: 외방의 주전(鑄錢)을 금지.
  · 4월 :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남인축출 서인집권. 윤휴 허적 등 남인 (南人)을 유배 보냄.
  서인(西人)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 됨.
  허견(許堅) 등이 복선군(福善君)의 추대를 도모하다 처형됨.
  · 5월 : 허적(許積, 1610-1680), 윤휴(尹휴, 1617-1680)를 사사(賜死)함.
  송시열을 석방함.
  윤8월 오정창(吳挺昌) 정원로(鄭元老) 등을 처형.
  · 10월 : 장옥정이 궁녀로 입궐
  송시열을 등용.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죽음.

  1681년(숙종 7, 辛酉)  
  · 1월
: 새중전의 간택에 관해 논의
  · 2월 : 인경왕후 발인
  · 3월 : 병판 민유중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다.
  민유중을 영돈녕부사 여양부원군으로 삼다.
  어영청(御營廳)에서 주전(鑄錢).
  · 4월 : 어의동의 별궁에서 납채례를 거행하다.
  납채례 : 대궐에서 간택된 왕비의 집에 혼인을 청하는 의식
  · 5월 : 장옥정이 대궐에서 쫓겨나감

  1682년(숙종 8, 壬戌)  
  · 1월
: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을 설치.
  · 5월 :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함.
  · 10월 : 허새(許璽)등을 처형.
  · 11월 : 전라감영에서 주전(鑄錢)함.
  * 허목(許穆, 1595-1682) 죽음.

  1683년(숙종 9, 癸亥)  
  · 3월
: 송시열 치사(致仕)함.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완성.
  장희재가 인조반정 회갑 축하연에서 숙정을 데리고 달아남.
  · 4월 : 폐지된 사군(四郡)을 다시 설치할 것을 결정함.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당.
  · 7월 : 영남의 대동법을 개정함.
  · 12월 :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 죽음.

  1684년(숙종 10, 甲子)  
  · 3월
: 이단하(李端夏)가 사창절목(社倉節目)을 올림.
  무산부(茂山府)를 새로 설치함.
  · 10월 : 중용언해(中庸諺解) 완성.
  * 김석주(金錫胄, 1634-1684) 죽음.

 

1685년(숙종 11, 乙丑)  
  · 1월
: 호패의 지패(紙牌)를 목(木), 각(角)으로 바꾸게함.
  경성부의 사부(士夫)에게도 방역(坊役)을 부과함.
  종각(鐘閣)이 불에 탐.
  · 9월 : 호패 위조자를 사형에 처하기로 함.
  · 11월 : 삼금(蔘禁)범죄의 식(式)을 정함.

  1686년(숙종 12, 丙寅)  
  · 1월
: 안주(安州)에서 주전(鑄錢)하고 차자(車子)를 제조.
  · 7월 : 진도에서 표류한중국인 80여명을 송환.
  · 12월 : 이단하(李端夏)가 사창(社倉) 설치의 다섯가지 이득을 말함.
  ▷ 이징명(李徵明), 상소하여 여총(女寵)을 논함.

  1687년(숙종 13, 丁卯)  
  · 5월
: 명안공주 죽음
  · 6월 : 동평군 이항을 혜민서제조로 봉함.
  · 7월 : 최석정(崔錫鼎)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을 개수함.
  · 8월 :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열조수교(列朝受敎)를 간행.
  · 9월 : 군문(軍門)에 육화진법(六花陣法)을 연습시킴.
  · 12월 : 숙종이 탕평책(蕩平策)을 유시(諭示)함.
  ▷ 만수전(萬壽殿) 불탐.
  * 김만기(金萬基, 1633-1687), 민유중(閔維重, 1630-1687),
  홍우원(洪宇遠, 1605-1687) 죽음.

  1688년(숙종 14, 戊辰)  
  · 2월
: 숙종이 남한산성에 행차.
  · 3월 : 평안도에 1년을 한도로 주전(鑄錢)케함.
  · 7월 : 소론 박세채(朴世采)을 내?i고 남구만 여성제(呂聖齊)를 유배함. 11월에 석방.
  · 8월 : 인조왕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죽음.
  · 10월 : 소의(昭儀) 장씨(張氏)가 왕자(경종)을 출산함.
  · 11월 : 소의 장씨의 어머니가 옥교를 타고 들어오다 욕을 당한 일로 상소가 올라옴

  1689년(숙종 15, 己巳)  
  · 1월
: 왕자를 원자로 정함.
  소의 장씨를 희빈에 봉함
  · 2월 : 기사환국(己巳換局). 서인 실각, 남인 집권.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제주도에 유배 안치(安置), 6월에 사사(賜死)함.
  · 3월 : 홍치상을 유언비어 유포죄로 절도에 위리안치함.
  김수항(金壽恒)의 관작을 삭탈함. 윤3월 사사(賜死).
  김익훈(金益勳) 장(杖)을 맞고 죽음.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서 출향(黜享).
  · 4월 : 귀인 김씨를 폐위해 사가로 돌려보냄.
  홍치상을 교형에 처함
  · 5월

: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위함.
  희빈 장씨의 명호를 정해 비로 삼음
  장형을 옥산부원군, 부인 고씨를 영주부부인, 계실 윤씨를 파산부부인으로 봉작함.
  * 김만중(金萬重)이 구운몽(九雲夢) 등을 지음.
  * 이단하(李端夏, 1625-1689) 죽음.

1690년(숙종 16, 庚午)  
  · 6월
: 원자(元子)를 세자(경종)로 책봉.
  · 9월 : 희빈 장씨가 왕자를 낳음. 열흘 뒤 죽음.
  · 10월 :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왕비로 책봉.
  · 11월 : 진제(賑濟)를 위해 공명첩(空名帖) 2만장을 판매함.
  호적법을 밝히고 지패(紙牌)를 목패(木牌)로 바꿈.
  * 김수흥(金壽興, 1626-1690) 죽음.

  1691년(숙종 17, 辛未)  
  · 7월
: 세자를 위해 ‘한석봉천자문’을 편찬함
  · 10월 : 주전(鑄錢).
  · 12월 : 성삼문 등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림.
  삼남, 서북의 인재를 고루 등용함.
  북한산성의 축성을 결정함.

  1692년(숙종 18, 壬申)  
  · 3월
: 장희재를 총융사로 삼음
  · 8월 : 숙종이 창덕궁으로 돌아옴.
  총융청(摠戎廳)의 주전(鑄錢)을 허락함.
  · 10월 : 동(銅)을 북경에서 구입함.
  · 12월 : 8도감사에게 인명(人命) 남살(濫殺)의 폐를 엄금함.
  * 남용익(南龍翼, 1628-1692), 민정중(閔鼎重, 1628-1692),
  김만중(金萬重, 1637-1692) 죽음.

  1693년(숙종 19, 癸酉)  
  · 4월
: 궁인 최씨를 숙원으로 봉함
  · 7월 : 주전(鑄錢)을 호조(戶曹)에 전담시키고 사사로이 주전하는 자는 교형(絞刑)에 처함.
  · 10월 : 소의 최씨가 왕자를 낳음.
  · 12월 : 소의 최씨가 낳은 왕자가 죽음.
  조사석(趙師錫, 1632-1693) 유배지에서 죽음.
  겨울에 대마도주가 본국인의 울릉도 어업의 금지를 요청함.

  1694년(숙종 20, 甲戌)  
  · 3월
: 왕세자가 서연을 시작함.
  갑술옥사(甲戌獄事). 남인 실각, 서인 집권.
  · 4월 : 소론 남구만(南九萬)이 영의정이 됨. 소론 등용.
  폐비 민씨를 왕후로 복위하고, 장씨를 폐위.
  · 5월 :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다시 종사.
  · 6월 : 숙원 최씨를 숙의로 삼음.
  · 8월 : 왜에게 왜인의 울릉도 왕래를 금지할 것을 요구함.
  · 9월 : 숙의 최씨가 왕자를 낳음(연잉군)
  어영청(御營廳)의 주전(鑄錢)을 허락함.

1695년(숙종 21, 乙亥)  
  · 4월
: 경기 충청지방에 도적이 횡행함.
  · 6월 : 서원(書院)의 첩설(疊設)을 금지함.
  · 10월 : 상평청(常平廳)의 주전(鑄錢)을 1년 기한으로 허가함.
  · 12월 : 버린 아이(遺棄兒) 수양(收養)의 법을 제정함.
  * 박세채(朴世采, 1631-1695) 죽음.

  1696년(숙종 22, 丙子)  
  · 1월
: 종묘악장(宗廟樂章)을 바로 고침.
  · 2월 : 사사로이 주전하는 자는 사율(死律)로 처벌함.
  · 4월 : 세자빈을 심호의 딸로 간택함. 세자가 관례를 치름.
  옥산부원군의 비석 파괴 사건으로 업동 등이 잡혀옴
  · 5월 : 세자가 가례를 올림
  · 9월 : 울릉도에서 일본으로 도항한 동래인 안용복(安龍福)을 추문(推問)함.

  1697년(숙종 23, 丁丑)  
  · 2월
: 대마도주가 막부(幕府) 명으로 왜인 울릉도 왕래 금지 통지.
  도성안에 있는 거지들을 각 섬에 보냄.
  · 4월 : 기아민의 구제를 위해 송첩(松帖)을 내줌.
  · 8월 : 중인(中人) 서얼(庶孼)의 통사자(通仕者)는 찰방(察訪)을 거친 후 수령으로 서용함을 허락함.
  · 10월 : 전국에 대기근.

  1698년(숙종 24, 戊寅)  
  · 1월
: 청에서 개시(開市)를 허락하고 속미(粟米) 4만석을 보내옴.
  숙종이 탕평(蕩平)할 것을 내림.
  · 8월 : 궁인 유씨를 숙원에 봉함.
  · 10월 : 사간원에서 지방의 생사(生祠)의 폐단을 규탄함.
  · 11월 : 노산군(魯山君)을 복위.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함.
  상궁 박씨를 숙원에 봉함

  1699년(숙종 25, 己卯)  
  · 6월
: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국조보감속편(國朝寶鑑續編)을 편찬.
  · 7월 : 영월의 단종릉 장릉(莊陵)의 개수도감(改修都監)을 설치함.
  · 9월 : 남형(濫刑)을 엄금함.
  · 10월 : 숙의 최씨를 숙빈에 봉함.
  전염병이 유행하여 25만명이 사망함.
  * 권대운(權大運, 1612-1699) 죽음.

1700년(숙종 26, 庚辰)  
  · 3월
: 유생(儒生) 사제(賜第)의 범위를 정함.
  최석정(崔錫鼎)에게 속록(續錄), 여지승람(輿地勝覽)의 편수를 전담시킴.
  · 8월 : 선원보략(璿源譜略) 완성됨.

  1701년(숙종 27, 辛巳)  
  · 1월
: 문묘에 계성사(啓聖祠)를 세움.
  · 4월 : 청나라 사람이 압록강을 측량함.
  · 8월 :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 죽음.
  · 9월 : 대행왕비를 무고(巫蠱)한 죄인 장희재를 처형하라 명함.
  장희빈을 자진하게 하라는 비망기를 내림.
  · 10월 : 동평군(東平君) 항(杭)을 사사함.
: 빈(嬪)을 후비(后妃)에 올리지 못하게 명함.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사사(賜死)함.
  장희재를 처형함.
  ▷ 무고(巫蠱)의 옥(獄) 일어남.

  1702년(숙종 28, 壬午)  
  · 1월
: 세자가 장씨의 상(喪)에 감.
  희빈 장씨를 양주 인장리에 장사지냄
  · 5월 : 이준명(李浚明) 등이 울릉도 도형(圖形) 및 토산물을 바침.
  · 10월 : 김주신(金柱臣)의 딸을 왕비로 책봉. 인원왕후(仁元王后).
  귀인 김씨를 영빈, 귀인 박씨를 명빈, 숙의 유씨를 소의에 봉함
  · 11월 : 남구만, 유상운(柳尙運)을 유배지에서 석방함.

  1703년(숙종 29, 癸未)  
  · 1월
: 금위영을 폐지했다가 2월에 다시 부활시킴.
  · 7월 : 명빈 박씨가 훙서함.
  · 9월 : 명빈 소생의 왕자 이 헌을 연령군에 봉함.
  청나라에 황당선(荒唐船) 금지에 대해 통지함.
  * 이시백(李時白, 1635-1703),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오도일(吳道一, 1645-1703) 죽음.

  1704년(숙종 30, 甲申)  
  · 2월
: 연잉군이 혼례를 올림.
  · 3월 : 도성 수축을 시작함.
  · 6월 : 서원의 첩설(疊設)을 금지.
  · 8월 : 해서대동시행절목(海西大同施行節目)을 정하게 함.
  · 11월 :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를 단종실록(端宗實錄)으로 고침.
  · 12월 : 대보단(大報壇)이 완공.

1705년(숙종 31, 乙酉)  
  · 3월
: 숙종이 대보단에서 명의 신종(神宗)을 제사함.
  · 10월 : 숙종이 선위(禪位)를 명함.
  · 11월 : 세자가 선위의 명을 거두시기를 세 번째 상소하니 허락함.

  1706년(숙종 32, 丙戌)  
  · 2월
: 최석정이 동국여지승람의 수정을 요청함
  · 5월 : 유생 임부(林溥)등이 동궁모해 혐의로 김춘택을 탄핵하는 상소
  · 6월 : 동궁(東宮) 모해설로 임부(林溥)를 국문함.
  · 8월 : 최석정이 전록통고(典錄通考)를 편찬하여 올림.
  · 10월 : 청에서 칠정력(七政曆)을 수입함.

  1707년(숙종 33, 丁亥)  
  · 1월
: 임보(林溥)가 장을 맞고 죽음.
  · 2월 : 이순신 사우(祠宇)에 현충(顯忠)이라 사액함.
  연령군이 가례를 올림
  · 4월 : 형장(刑杖)을 일체 금지함.
  · 11월 : 숙종이 당론의 폐해를 유시(諭示)함.
  * 신완(申琓, 1646-1707) 죽음.

  1708년(숙종 34, 戊子)  
  · 2월
: 숙종이 당론을 경계함.
  · 4월 :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佛狼機)를 만들게 함.
  · 10월 : 황해도에 대동법을 시행함.
  · 12월 : 서운관(書雲觀)에서 건상도(乾象圖)와 곤여도(坤輿圖) 올림.
  *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죽음.

  1709년(숙종 35, 己丑)  
  · 1월
: 숙종이 노론 소론의 폐해를 유시(諭示)함.
  · 5월 : 서인(庶人) 상례(喪禮)의 제한을 엄격히 정함.
  김창집(金昌集)이 오륜전비언해(五倫全備諺解)를 완성.
  · 8월 : 강화도에 축성(築城)을 명함.

1710년(숙종 36, 庚寅)  
  · 3월 : 최석정(崔錫鼎)의 관직을 삭탈하고, 그가 올린 예기류편(禮記類篇)을 소각함.
  노론이 진출함.
  · 7월 : 왜관의 공작미(公作米)를 5년으로 연장해줌.
  · 10월 : 안정기(安鼎基)가 만든 차자(車子)를 제조함.

  1711년(숙종 37, 辛卯)  
  · 3월 : 북한산성(北漢山城) 축성을 시작하여 10월에 마침.
  · 5월 : 일본에 통신사 파견.
  · 12월 : 왜인의 구은(舊銀, 八星銀) 사용 요청을 허락함.
  비변사에서 양역변통절목(良役變通節目)을 올림.
  * 남구만 죽음

  1712년(숙종 38, 壬辰)  
  · 4월
: 청의 목극등(穆克登) 일행이 후주(厚州)에 이름.
  · 5월 : 총융청에서 북한산성 중성(重城)을 축조함.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움.

  1713년(숙종 39, 癸巳)  
  · 7월
: 서원의 첩설(疊設)을 금단함.
  · 10월 : 북도 친기위(北道 親騎衛)를 설치함.
  · 11월 : 이이명(李이命)이 오례의(五禮儀)의 개정을 논함.

  1714년(숙종 40, 甲午)  
  · 1월
: 팔도에 지진(地震).
  · 2월 : 숭례문 괘서(掛書) 사건이 일어남.
  · 7월 : 강원도의 군보단속절목(軍保團束節目)을 강구함.
  * 윤증(尹拯, 1629-1714) 죽음.

1715년(숙종 41, 乙未)  
  · 2월
: 동으로 도량형기를 주조하여 팔도에 반사함.
  · 4월 : 허원(許遠)이 북경에서 역서(曆書), 측산기계(測算機械), 자명종 (自鳴鐘) 등을 구해옴.
  · 12월 : 윤선거(尹宣擧)의 가례원류(家禮源流) 발문(跋文)으로 노소간의 분쟁이 격화됨.
  * 최석정(崔錫鼎, 1646-1715), 홍만선(洪萬選, 1643-1715) 죽음.

  1716년(숙종 42, 丙申)  
  · 8월
: 윤선거(尹宣擧) 문집의 훼판(毁板)을 명함. 병신처분(丙申處分).
  · 10월 : 윤선거의 선정(先正)의 칭호를 금지함.
  · 12월 : 윤증의 선정(先正)의 칭호를 금지함.

  1717년(숙종 43, 丁酉)  
  · 5월
: 김장생(金長生)을 문묘에 배향함.
  윤선거, 윤증 부자의 관작을 추탈(追奪)함.
  · 7월 : 왕이 이이명과 독대함.
  왕세자가 섭정을 함.

  1718년(숙종 44, 戊戌)  
  · 2월
: 세자빈 심씨가 훙서함.
  인장리의 장씨 묘를 천장하게 함.
  · 4월 : 소현세자빈 강씨의 위호(位號)를 회복시킴.
  · 9월 : 세자빈으로 어씨(魚氏) 책립.
  · 10월 : 마천령(磨天嶺)을 엄격히 막음.

  1719년(숙종 45, 己亥)  
  · 2월
: 숙종이 기로소(耆老所)이 들어감.
  · 7월 : 경상 전라 충청도에 균전사(均田使)를 파견.
  · 10월 : 연령군 죽음.

  1720년(숙종 46 / 경종 즉위년, 庚子)  
  · 6월
: 숙종 승하, 왕세자(경종) 즉위.
  · 10월 : 삼남의 양전을 끝냄.
  · 11월 : 청의 사신이 옴.
  조태구(趙泰耉)가 김창집(金昌集)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림.
  * 최창대(崔昌大, 1669-1720), 민진후(閔鎭厚, 1659-1720)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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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하도 여러번 만들어져서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장희빈 (= 장옥정, 희빈 장씨).


'실록에 기록될 정도의 경국지색의 미모 + 극악무도한 성격 +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패악질이 하늘에 다다라 다시 쫓겨남 +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사약 받고 죽음  + 아들인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성불구로 만듬.' 등의 다양한 전설적인 이야기로 사극의 주인공으로 사랑받아온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선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희빈장씨 [ 禧嬪張氏 ]

[출처] 희빈장씨 | 두산백과


조선 후기 숙종의 빈(嬪). 왕자 윤(景宗)을 낳아 세자에 봉해지자 희빈에 올랐다. 이후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왕비가 되었으나 이를 후회한 숙종이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1659년 8월 9일생이며 본관은 인동(仁同),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다. 아버지는 중인으로 이름은 장형(張炯)이며 아버지는 역관(譯官)이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는 윤씨였다. 어려서 이조판서를 지낸 조사석(趙師錫)과 동평군 이항(李杭)의 주선으로 궁에 들어가 자의대비전(慈懿大妃殿)의 나인이 되었다.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여종이었는데 남편(장형)이 사망하자 조사석의 첩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장옥정은 궁에 나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사석은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했다. 

장옥정은 뛰어난 미모로 젊은 세자(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 사실이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당시 숙종의 5촌인 복선군복창군복평군 3형제가 연루된 역모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들과 친밀하게 지냈던 장현 등도 함께 유배형을 받았다. 하지만 역모사건은 서인 김석주(金錫胄)의 무고로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은 더욱 대립하게되었다. 장현은 역관(譯官) 출신의 재력가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과 가까웠고 장옥정의 5촌이었다. 이때문에 남인의 영향을 염려한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장옥정을 극도로 꺼려하였다. 명성왕후는 부친 김우명(金佑明)과 함께 서인으로 당색이 매우 강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죽자 장옥정은 다시 궁으로 입궐하여 후궁이 되었으며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와 갈등하게 되었다. 당시 장옥정은 남인의 세력에 속해 있었고 인현왕후는 정치 실세였던 서인을 대표하여 두 사람은 정치적 적대관계였다.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장씨와 사이에서 왕자 윤(昀:景宗)을 낳았고 1689년(숙종 15) 1월 윤을 원자로 봉하고 소의 장씨는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원자의 출생은 서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숙종이 윤을 원자로 봉하려 하자 이것이 성급하다고 상소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남원에서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형을 받고 축출되었다. 반면에 남인(南人)인 권대운(權大運) 등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기사환국己巳換局).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인현왕후를 폐출하는 것을 두고 남인들 마저 반대하였지만 숙종은 강행했다.

1690년 9월 장희빈은 둘째 아들을 낳았으나 10개월 만에 죽고말았다. 1693년에 숙종은 무수리 최씨에게서 아들을 낳아 영수(永壽)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그 아들도 출생 2개월에 사망했다. 이즈음에 숙종의 마음은 점차 장희빈에게서 멀어졌다. 1694년에는 숙빈 최씨가 아들(후일 영조로 등극)을 낳아 장희빈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고 장희빈의 후광으로 정치적 실세로 군림하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혐의로 포도대장 직에서 물러났다.

1694년(숙종 20) 서인세력의 재집권을 위해 기회를 찾고있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서인의 집권을 위해 남인들을 역모로 고발하였고 마침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남인세력은 대부분 숙청되거나 유배형을 받아 몰락하였고 소론계 서인이 집권하였다. 이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후궁)으로 강등시켰으며 빈을 후비로 승격하는 일이 없도록 법을 만들었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자 숙빈 최씨의 밀고로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목되었다. 이일로 그해 10월 10일 장희빈은 사사되고 오빠 장희재(張希載)는 처형되었다.

[출처] 희빈장씨 | 두산백과



네이버 인물한국사

희빈 장씨 : 환국 정치의 중심에 섰던 비극적 운명의 왕비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는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명성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은 소설·드라마·영화 같은 대중예술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극적(劇的)이었다.

 

희빈 장씨를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만 해도 <장희빈>(1971, MBC, 윤여정 분), <여인열전 장희빈>(1982, MBC, 이미숙 분), <조선왕조 오백년-인현왕후>(1988, MBC, 전인화 분), <장희빈>(1995, SBS, 정선경 분), <장희빈>(2002, KBS 2, 김혜수 분), <동이>(2010, MBC, 이소연 분) 등 여러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 배역은 당시의 주요한 여배우들이 맡았다.

 

역사와 대중예술에서 그린 희빈 장씨의 이미지는 ‘권력을 지향한 요부(妖婦)’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미지가 그렇듯이, 거기에는 사실과 왜곡이 섞여 있다. 유사 이래 권력의 중심부에는 언제나 음모와 암투가 넘쳤다. 그것은 권력의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떤 일과 사람을 선악의 구도로 재단하는 것은 명쾌하지만, 그만큼 단순화와 왜곡의 위험이 뒤따른다. 이미 깊이 있는 연구가 여럿 나왔고, 이 짧은 글은 상당 부분 거기에 의존해 작성되었다. 그녀가 남다른 권력 의지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당쟁과 환국이라는 급박한 시대적 환경과 그것을 주도한 숙종의 처결과 맞물리면서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출생과 가계

희빈 장씨의 가문은 비빈(妃嬪)의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한미했다. 그녀는 1659년(효종 10) 장경(張烱. 본관 인동. 1623~1669)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장경은 처음에 고씨(1625~1645. 본관 제주. 고성립(高誠立)의 딸)와 혼인했지만 그녀가 일찍 사망하자 윤씨(1626~1698. 본관 파평. 사역원 첨정 윤성립(尹誠立)의 딸)와 재혼했다. 그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희빈 장씨는 막내였다. 그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장희재(張希載, 1651~1701)는 맏아들이자 희빈의 오빠다.

 

희빈의 가계에서 언급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張炫)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장현은 거부였고, 남인의 영수인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결탁했던 복평군(福平君) 등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희빈이 남인과 가까웠던 것은 이런 사정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아버지 장경은 희빈이 10세 때 세상을 떠났다(1669, 현종 10).

 

앞서 말한 대로 이런 환경은 한미하며, 불우하기까지 하다. 안온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준다면, 험난한 조건은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을 부여할 수 있다. 그 뒤 나타난 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된다.

 

 

입궁과 총애

이런 배경을 가진 희빈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행운을 제공한 사람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 1660~1701)과 우의정 조사석(趙師錫. 본관 양주. 1632∼1693)이었다.

 

동평군은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 이징(李澂)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가 조사석의 사촌누이였다. 조사석은 관직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대단한 명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었으며, 아들은 영의정까지 오른 조태구(趙泰耉)였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다. 조사석은 동평군에게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그런 요청에 따라 희빈은 나인으로 입궁했다. 희빈은 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687년(숙종 13년) 6월 16일).

 

희빈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기는 21세 때인 1680년(숙종 6)이었다. 그 해 10월 26일 숙종비 인경(仁敬)왕후(1661~1680. 본관 광주. 김만기(金萬基)의 딸)가 승하했는데, 그 뒤에 처음 은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바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대비 명성(明聖)왕후는 당파적 색채가 강했는데, 희빈과 연결되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仁顯)왕후(1667~1701. 본관 여흥. 민유중(閔維重)의 딸)가 계비로 책봉되었다. 나이는 희빈이 8세 위였다.

 

 

영광의 정점

기회는 1683년(숙종 9) 명성왕후가 붕어하면서 찾아왔다. 거리낄 것이 없어진 숙종은 희빈을 불러 총애했다. 희빈의 나이 25세였다.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다. 그녀는 숙원(淑媛. 종4품. 1686)을 거쳐 소의(昭儀. 정2품. 1688)로 승급했다. 그동안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淑正)은 남인과 연합하라고 희빈에게 계속 충고했다. 희빈은 남인과 더욱 가까워졌다.

 

가장 중요한 일은 1688년(숙종 14) 10월 28일 왕자 윤(昀. 뒤의 경종)을 낳았다는 것이다. 희빈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거대한 행운이었다. 이듬해 1월 11일 왕자는 원자로 정호(定號)되었고 그녀도 희빈(정1품)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숙종과 인현왕후는 아직 매우 젊었고(각 28세와 21세), 따라서 대군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국본(國本)을 확정했다는 사실은, 숙종의 총애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상당한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무리한 결정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번졌다. 그것은 기사환국이었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과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영돈녕 김수항(金壽恒) 등은 원자 책봉은 아직 이르다고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동안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숙종의 대응은 성급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다. 우선 권대운(權大運)·목래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삼정승에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남인을 대거 기용했다.

 

서인은 대부분 파직되거나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된 뒤(3월 6일)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사사되었고(6월 8일) 김수항은 영암(靈巖)의 귀양지에서 같은 처분을 받았다(윤3월 28일). 이듬해에 김수흥도 유배지인 장기(長鬐)에서 사망했다(1690년 10월 12일).

 

환국이 원자 정호 때문에 촉발되었으므로 왕실의 교체도 당연히 뒤따랐다. 인현왕후는 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폐출되었고(5월 2일) 나흘 뒤 희빈은 드디어 왕비에 올랐다(5월 6일). 원자의 외가, 그러니까 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아버지 장경은 영의정, 조부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 증조부 장수(張壽)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다.

 

이듬해(1690, 숙종 16) 6월 경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은 정점에 올랐다.

 

 

몰락과 사사

그러나 기사환국 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한 것을 점차 후회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세 번째 환국으로 나타났다. 1694년(숙종 20) 숙종은 서인이 꾸미던 왕비 복위 사건을 조사하던 우의정 민암(閔巖)이 국왕을 속여 옥사를 확대하고 있다면서 대대적인 인사 교체를 단행했다. 그 결과 남인은 축출되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 서인이 등용되었다.

 

기사환국의 본질이 원자 정호와 희빈의 중전 책봉이었듯이, 갑술환국의 핵심은 인현왕후의 복위였다. 숙종은 이전의 조처를 뉘우치면서 인현왕후를 환궁시켰다. 장씨는 별당으로 쫓겨가고 희빈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아버지 장경의 부원군 교지와 그 아내의 부부인(府夫人) 교지는 불태워졌고, 장씨의 왕후 옥보(玉寶- 국새)도 파괴되었다(1694년(숙종 20) 4월 12일). 숙부 장현과 장찬(張燦)도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윤5월 13일). 희빈이 왕비가 된 지 5년 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이때 일어난 중요한 일은 숙의 최씨가 왕자(뒤의 영조)를 출산했다는 것이었다(9월 20일). 희빈의 입지는 점점 더 축소되고 있었다.

 

비극의 종막은 7년 뒤에 내려졌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했는데, 그 직후 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된 것이다.

 

숙종은 대노했다. 장희재는 참형에 처해졌고, 희빈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남구만·최석정 등 소론도 몰락했다. 정계는 노론이 더욱 확고하게 장악했다.

 

결국 희빈에게는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0월 8일). 죄목은 내전을 질투해 모해(謀害- 꾀를 써서 남을 해침)했다는 것이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입궁해 원자를 생산하고 중전까지 올랐지만 결국 사사된 42년의 파란 많은 생애였다.

 

사후의 예우가 부실한 것은 당연했다. 희빈은 1702년(숙종 28) 1월 경기도 양주(楊州) 인장리(茵匠里)에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으로 천장되었다. 앞으로 빈이 왕비가 될 수 없도록 하라는 왕명도 하달되었다(1701년 10월 7일).

 

그나마 일정한 추숭이 이뤄진 것은 아들 경종(景宗)이 즉위한 뒤였다. 경종은 모후의 사당을 건립하고(1722년(경종 2) 1월 10일) 옥산부(玉山府) 대빈(大嬪)으로 추존했다(10월 10일). 대빈궁은 국왕이나 추존된 국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七宮. 지금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재) 안에 있다. 묘소는 1970년 서오릉(西五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으로 옮겨졌다.

 

앞서 말했듯이 희빈이 남다른 정치적 야심과 감각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모략과 암투가 난무한 전근대의 궁중에서 그런 자세는 자연스러우며 필요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갈수록 어떤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짧은 글에서 희빈과 관련해 어떤 의견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우리가 알만한 인물의 다수가 자연적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게 그런 운명이 찾아왔다면 어떻게 대처했을지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김아네스·이장우·정두희·최선혜, [장희빈, 사극의 배반], 소나무, 2004;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숙종실록], 휴머니스트, 2009;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1~3, 역사문화, 2009.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장희빈이 드라마에 묘사된 것처럼 사악한 여자의 극치라서 현명한 군주인 숙종이 그녀에게 벌을 내렸다?는 결론은 상당히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장희빈은 사악하고, 인현왕후는 현숙하고 투기할 줄 모르는 왕비였다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거짓말인데.., 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 인현왕후가 산후 조리 중인 장희빈에게 매일 매질을 가한 것이 적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현왕후 = 이상적인 왕비상'으로 그려놓은 드라마 속의 인현왕후는 인현왕후전에만 나오는 서인들의 조작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장희빈을 숙종이 엄청 미워해서 죽은 후에도 그녀에게 저주를 퍼부었고, 숙빈 최씨만이 그의 마지막, 영원한 사랑이었다는 것 역시도 조작에 가까운데, 그것은 그녀의 최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역시 실록에서 나온 기록이다.)



읽기 쉽게 잘 써놓은 펌글을 하나 가져옴. -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갤러리에서 펌.




장옥정 드라마인 만큼 그녀의 장례절차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단 인현왕후전과 수문록(노론이 쓴 책)은 그녀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어.

'사약을 먹지 않기위해 발악했고,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고자로 만드는 패악을 부리다 억지로 사약이 부어졌다.
드디어 장녀가 죽으니 하늘의 천벌을 받아 시체가 순식간에 썩어 궐내를 진동하는지라 즉시 궁밖에 내다버렸다.'


..................이 얼마나 악의적이고 증오섞인 표현인지....노론이 그만큼 희빈을 증오하고 미워했다는 단적인 증거.  그동안 장희빈 드라마는 이런 인현왕후전과 수문록..등의 내용들로 그려졌어.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희빈장씨는 발악을 했다는 글 한줄 없고, 또한 죄를 짓고 죽은 후궁의 장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장례 절차를 밟아 숙종이 지극하게 장례를 치뤄줬어.

결론부터 말하면 장례기간은 5월상에서 하루를 뺀 기간(112일)
왕세자에게 처음엔 시마복(3개월동안 상복을 입는것)을 입으라 명했으나 다시 3년복상을 하라고 교지를 내림(3년에서 며칠을 뺀 기간) 모든 장례절차를 궁에서 행함.

+참고로 인현왕후는 5월상(114일)


장례절차___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할수있지만 이건 조선시대때 아주 중요한 예법중 하나야. 상복을 몇년 입는가하는 문제로(예송논쟁) 10년을 넘게 서인과 남인이 피터지게 서로 죽고 죽이며 싸우고 그랬으니까.


간단하게 왕실예법을 알아보면_

귀인일수록 장례기간이 길어....보통 100일이 넘으면 국상개념이야.


(장례기간)
왕은 150일(6월장), 왕비는 100일(5월장), 왕세자는 70일이상(4월장), 왕(&세자)의 사친, 세자빈과 왕자녀들 그리고 내명부 정1품 빈은 50일가량(3월장)

3월장,5월장..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만약 xx왕후가 3월에 죽었다면 장례를 5월장을 적용해서 죽은 달 포함해서 다섯번의 달을 지나 7월에 장례를 치룬다는거야.


(상복기간)
=적자로서 아버지의 정실이 죽었을 경우 그 적자는 3년상
  서자(庶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3개월복상)


(실제 사례)

12대 인종 - 재위기간이 1년. 4월장(100일)

장렬왕후 -인조계비. 5월장(110일) 

숙빈최씨 - 내명부 정1품의 예로 3월장(50일), 궁밖에서 장례를 치름, 연잉군이 3개월 복상을 하려 했으나 숙종은 5일만 상복을 입고 벗으라 어명을 내림.

영빈이씨(사도세자의 생모, 당시 세손(정조)의 할머니)- 세자의 사친으로 후궁 제1등의 예로 3월장 (60일), 궁밖에서 장례를 치름, 3개월복상

수빈박씨(순조의 생모) - 3월장(60일), 궁안에서 장례를 치름, 3개월복상

수빈박씨는 생전에 아들이 왕위에 올라 가순궁저하, 수빈저하라는 경칭을 들었던 왕의 생모였다.
그럼에도 저정도의 장례절차를 거쳤어. 아들인 순조가 왕실 가법이 허용하는 최고의 범위로 예를 갖춘 상황 


희빈은 죄를 쓰고 사사되었고, 폐비되어 자리에서 내려온지 8년이 지난 상황이었어.
그런데 숙종이 이같은 장례 절차를 지시하지...당연히 노론측이 엄청나게 반발하지만 그대로 진행했어.

위에서 봤듯이 세자의 생모(왕의 생모)라도 맥시멈 60일 장례, 3월장인데...희빈은 전례가 없는 예우를 받은것.



이후 16년이 지나 숙종이 와병중에 희빈의 묘를 천장(이장)하는데...노론이 그 정도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며 천장을 반대하지만 숙종은 세자가 간절히 원한다는 이유로 천장을 지시하고 예조와 종친, 지관 10명을 보내 1년가까이 좋은 길지를 찾아내게해서 와병중에 직접 천장지를 택해서 천장을 진행해...세자 내외에게 망곡례를 지시하며 천장식도 궁에서 하고...  

희빈 묘역 조성할때 사방 100步 주위에 기존에 있던 왕실 종친들의 묘를 파서 다른곳으로 옮기라 명하기까지 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묘역은 박정희때 이장한 묘역이라 규모가 작아졌지만 당시엔 꽤 컸을거라고 추측할수가 있어.


이러한 여러가지 기록들을 살펴보았을 때 숙종은 장희빈을 엄~~~~청 아꼈던 건 사실인 듯 하다.

사랑? 글쎄.. 16년간 청춘을 다 바친 여인을 특별한 증거도 없이 사약을 먹인 남자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게 있을까?

어쨋든 냉혹한이었던 숙종이 20대를 다 바친 여인이었음은 명확한 사실이니,,, 엄청난 매력이 있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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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붕당(당쟁)의 역사

출처:
디시인싸이드 이산갤러리

수 차례의 사화를 견디고 훈구파의 탄압을 이겨낸 사림 세력들은 사림 출신 스승 밑에서 공부한 선조가 즉위하면서부터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인재를 감당하지 못하는 한정된 관직의 수는 필연적으로 당파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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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인과 서인이 주도한 붕당 성립기

◎동인 VS 서인

붕당의 효시라 할 동인과 서인의 분열은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 즉 을해당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을해당론 ☞ 왕실 외척이 관료추천권이 있는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느냐는 논쟁

1575년(선조8)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림세력들이 이른바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건이다. 이는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의 추천권을 놓고 벌인 싸움인데, 이 때문에 일제 시대 이래 당쟁의 근본 원인이 개인적 감정 싸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왕실 외척이지만 사람들을 보호한 심의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선배 정치인과, 왕실 외척 지위를 이용한 심의겸의 정치적 비리를 용서할 수 없다는 후배 정치인의 대립이었다.


분파 후 정여립 모반사건의 결과 기축옥사로 인해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지만 3년후 정철의 건저의 사건으로 다시 동인(남인,북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기축옥사

1589년(선조22)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통 정여립 옥사, 또는 정여립 반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다.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데도 정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동인 중에서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전라도 지역 서경덕, 조식 학파의 수많은 인물들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이후 심각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정여립이 이씨왕조가 정씨왕조로 바뀐다는 정감록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중반란이라는 설, 선조 임금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일어나게 된 사건이라는 설 등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남인 VS 북인

남인과 북인의 분립은 동인과 서인의 분립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기축옥사로 인해 분립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는 기축옥사 당시 서인(정철)이 정여립 사건의 처리를 주도하면서 북인계 인물을 무고하게 죽였는데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남인계 인물들이 제대로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당이 발생했다고 보고있다. 또한 그로부터 3년 뒤인 정철의 건저의 사건 때 서인의 처리 문제로 분당이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 남인의 중심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이후 화의를 주장하여 실각되자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고 남인은 한동안 몸을 사리게 된다.

◎대북 VS 소북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갈라져 대립한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살해하는 등 소북파를 몰락시킨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서인은 정권을 장악하고 대북파를 몰락시켜 다시는 정치의 무대에 설 수 없게 만들었다. 인조반정 이후 북인은 완전히 와해되어버린 것이다.


2. 서인과 남인의 공존, 붕당 공존기

서인과 남인의 50년에 걸친 붕당정치 시대 - 정치적 평화를 유지한 제도개혁의 시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계 정치가들은 인망이 높은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추대해 사회안정을 도모하는 등 남인을 정치적 동반자로 인정하고, 남인들의 도움으로 주요 정치적 과업을 시행하였다. 인조년간 정치사 연구결과를 보면, 주요 관료집단에서 서인과 남인의 비율은 6:4정도였고 서인과 남인 학통을 이끈 산림들도 거의 대등하게 등용되었다. 이후 인조, 효종, 현종에 이르기까지도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붕당간의 조화로운 공존이 계속되었다. 서인이 주도적인 위치를 지키는 가운데 남인이 이를 견제하는 양당체제, 즉 정치적 평화시대였던 것이다.


3. 일진일퇴의 환국정치, 일당전제기

일당전제기는 1674년 왕실에서 공복을 입는 기간 문제로 일어난 갑인년 복제논쟁을 군주권 강화에 이용한 숙종 즉위년부터, 1729년 영조가 일당전제 정치를 끝장내겠다고 선언한 기유대처분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보통 일진일퇴 정국, 환국에 의한 일당독재, 역모조작과 정탐정치 등으로 표현되는 격렬한 당파싸움의 시기다. 전후 여덟 차례 정도 일진일퇴하는 환국정치에 의해 일당독재가 반복되었다.

◎서인 VS 남인

서인과 남인의 공존은 평화롭기도 했지만 불안정하기도 했다. 그 불안정함이 '폭발'한 것이 바로 예송 논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예송논쟁 ☞ 서인 : 효종은 차남이야. 무조건 1년상! / 남인 : 차남이지만 왕됐으니 장남 대접 받아야 되는거 아니야? 당연히 3년상이지.

왕실에 적용할 상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논쟁으로서, 1659년(현종 즉위년) 논쟁과 1674년(현종 15) 논쟁 두 번이 있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효종과 효종왕비의 상사 때, 어머니 자의대비가 큰아들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둘째 아들 이하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였다. 이는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파견된 분조에서 사실상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는 소군주로서 권한을 행사했지만, 국내에 돌아온 이후 의문 속에 죽음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2차 예송논쟁은 결국 숙종 즉위년부터 남인 주도 정권을 출범시켰다.

예송논쟁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1차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정권에 변동이 없었으나, 2차 논쟁에서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때, 남인은 서인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강경파 청남과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 탁남으로 분열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경신대출척, 즉 경신환국으로 집권한지 몇년만에 쫓겨나게 된다.


■ 경신환국
1680년(숙종6)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남인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위한 새로운 군대인 체부를 설치함으로써, 당시 숙종의 신임을 받던 서인계 외척 김석주의 군사권을 약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노론 VS 소론 VS 남인


그러던 중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리게 되는데,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 바로 임술삼고변이다.

■ 임술삼고변

1682년(숙종8)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다. 훗날 노론이 된 왕실 외척 김석주, 이사명, 김익훈 등이 밀정을 파견하여 남인들에게 역모를 권유한 후 이를 밀고하는 등의 정탐정치를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물의를 야기시킨 사건이다. 당시 서인 영수 송시열은 이를 자신이 스승의 후손들을 잘못 교육시킨 탓이라 하여 결국 정탐정치를 자행한 이들을 변호하려 하였고, 이를 서인 소장파 인물들이 탄핵하고 윤증 학파가 이에 합세함으로써 결국 서인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반대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서인이 분열 된 이후에도 환국은 계속 되는데,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재등용되는 기사환국 이후 왕에 의해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래서 갑술환국 이후로는 노론·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 기사환국

1689년(숙종15) 서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남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장희빈이 아들을 (후일의 경종) 낳자, 곧바로 왕위계승권자로 정하려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함으로써 일어났다. 이로써 서인 영수 송시열은 사사당하였고, 서인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되었으며, 장희빈은 왕후에 봉해졌다.

■ 갑술환국

1694년(숙종20)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정권교체는 서인계와 남인계 일부 집단의 정탐정치 시도에서 발단되었다. 이로써 인현왕후는 복위되었고, 반면에 장희빈은 왕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왕세자(경종)의 보호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그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옥사가 일어나 노론 대신들이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 신임옥사


1721년(경종1) 12월에 노론 주도 정권이 소론 일당정권으로 급변한 신축환국과, 다음해 목호룡이 이른 바 노론 및
연잉군(후일 영조) 측근 인물들의 경종 시해음모를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임인옥사, 이 두 사건을 합쳐서 지칭하는 것이다. 신축환국은 노론당이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 직후, 다시 대리청정을 청함으로써 노론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다가, 소론과 남인의 공격으로 실패함으로써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다. 임인옥사로 당시 노론 최고 지도자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4인이 모두 사형을 당하였으므로, 노론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을 올바른 노론 붕당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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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의 역사 - 사림정치의 부산물, 예송논쟁에서 출발
정조의 한맺힌 발언,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영조, 정조, 사도세자 책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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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설에 휘말린 조선 임금들 (인종, 선조, 소현세자, 효종, 현종, 경종)


독살설의 시초임금 인종

조선왕조 12대 임금인 인종(재위 1544∼1545년)은 연산군을 쫓아내고 즉위한 중종의 아들이다. 그가 조선의 임금 중 최초로 독살설에 휘말린 데는 후사를 둘러싼 궁중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다.

중종이 반정을 일으키기 전의 잠저(潛邸) 시절 첫 부인은 신씨였다. 신씨의 아버지는 연산군 시절의 우의정 신수근이었는데, 반정공신들은 그를 연산군의 처남이란 이유로 죽여버린다. 신수근을 죽여버린 반정공신들은 후환이 두려워 중종의 첫 부인 신씨를 내쫓고 새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한다. 그녀가 바로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다. 그러나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 10년(1515)에 중종의 첫 아들 호(인종)를 낳았으나 산후 조리에 실패해 25세에 죽어버렸다. 인종은
태어난 지 엿새 만에 어머니를 잃은 것이다.

중종은 2년 후인 1517년 새로운 여자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데 그녀가 조선의 왕후 중 두고 두고 구설에 오르는 문정왕후 윤씨였다. 인종의 독살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인이기도 하다.

파란은 문정왕후가 중종의 둘째 아들 환을 낳으면서 시작된다. 환은 세자 호보다 열아홉살이 어렸다. 따라서 세자 호가 살아 있는 한 문정왕후의 아들 환이 임금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 호가 세자로서 보위를 잇게 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자 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들이 없는 것이었다. 세자의 계모 문정왕후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세자가 후사없이 죽는다면 문정왕후 소생인 환이 즉위하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1544년 38년간 재위한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했다. 나이 서른살의 젊은 왕이었다. 그러나 인종은 보위에 오른 지 불과 9개월 만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역대 조선 임금들 중 가장 짧은 치세 기간이었다. 인종은 왜 그리 빨리 죽었을까?

정사인 『인종실록』은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야사(野史)들은 어김없이 계모 문정왕후가 독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중 한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매번 인종을 핍박하던 대비 문정왕후 윤씨가 하루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떡을 내놓았다. 인종은 계모 윤씨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반겨주는 것에 감격해 그 떡을 먹었는데 그날부터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사실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 독살설은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인종이 죽자마자 사화(士禍)가 재발했기 때문이다. 명종 즉위년에 발생한
을사사화(1545)가 그것이다. 조선 초·중기는 「훈구파」라는 구정치세력과 「사림파」라는 신정치세력의 정권을 둘러싼 각축이 심했다. 사화란 집권당인 훈구파가 야당인 사림파를 공격하는 정치 탄압을 말한다. 그런데 중종 때의 기묘사화 이후 거의 종결됐던 사화가 인종 사망 직후 다시 재연된 것이다. 인종이 승하하고 그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발생한 을사사화는 조선 사림파 사대부들로 하여금 문정왕후의 인종독살설을 사실로 믿게 했다.


그 배경에는 당시 대윤소윤이라 불리는 두 당파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다. 대윤과 소윤은 각각 임금의 외척이었다. 대윤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아우인 윤임이 영수였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윤원로 등이 영수였다. 중종이 살아 있을 때 대윤은 장경왕후 소생인 인종을 지지했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을 지지했다. 또한 대윤은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를 지지한 반면 소윤은 사림파에 적대적이었다. 중종의 뒤를 이어 인종이 즉위한 직후 대윤이 정권을 잡아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다.

인종은 시종일관 사림파를 옹호했던 군주였다. 그는 왕위에 있는 동안 부왕 중종 때 발생한 기묘사화의 피화자(被禍者)들을 신원(伸寃)할 생각이었다. 인종은 중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조광조·김정 등 기묘사화 피화자들을 신원하려 했으나 갑자기 병색이 짙어지자, 『조광조·김정 등의 복관과 현량과(賢良科) 복과는 선왕 때의 일이므로 서서히 하려 했는데 이제 내 병이 이와 같으니 조광조 등을 신원시켜주고 현량과도 복과하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면서 그들을 신원시켜 주었다.

이렇게 인종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사림파들의 신원을 생각할 정도로 이상적인 사림정치에 대한 열망을 지닌 군주였다. 또 인품이 인자하고 학문도 높아 사림파로서는 기대를 걸 만한 존재였다. 그랬으니 인종의 요절에 대한 사대부들의 분노와 좌절은 더 컸다.

인종이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인물이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이었던 점은 인종 독살설에 더욱 불을 댕겼다. 명종은 당시 12세의 미성년이었으므로 대왕대비 문정왕후나 왕대비 인성왕후(인종비) 중 한 명이 섭정을 해야 했는데, 명종이 인종의 동생이었으므로 『형수와 시숙이 한 자리에서 정사를 볼 수 없다』는 이언적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모후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자마자 사화가 뒤따랐던 것이다.

인종 승하 직후 발생한
을사사화와 함께 상법(喪法)에 어긋나게 치렀던 인종의 장례도 인종독살설에 설득력을 갖게 했다. 인종의 장례는 이른바 「갈장(渴葬:임시로 빨리 장사지내는 것)」으로 집행되었다. 이는 소윤의 주장 때문이었다.

소윤 이기는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빨리 장사지낼 것을 주장했다. 이는 훗날 사가(史家)들이 인종에게 박하게 하는 것으로 문정왕후에게 아부했다고 비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소윤의 윤원형, 이기 등은 인종의 국상중에도 웃는 낯을 보여서 의기 있는 선비인 교리 정황(丁煌)이 『이 역적놈들을 보니 더욱 원통하다』고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분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을사사화란 철퇴가 날아들어 대윤과 함께 사림파가 화를 입게 된다. 을사사화는 윤임, 유관 등 대윤과 앞으로 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한 문정왕후와 소윤의 음모였다. 갓 세상을 떠난 인종의 시신이 궐내에 남아 있는 상황에 사화가 발생했고, 인종의 지지세력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실들이 인종 독살설을 신빙성 있게 만든 것이었다.

을사사화 2년 후에는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쓴 벽서가 나붙은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남은 사림파마저 주륙을 당했다. 이처럼 문정왕후의 섭정 기간은 사림파에게는 암흑의 나날이었고 그 어두운 세월을 횡행한 것은 『선왕(인종)이 독살당했다』라는 은밀한 소문이었다. 그리고 사림파는 문정왕후가 죽는 순간까지 분노를 삭이고 있어야 했다.


광해군과 선조 독살설

인종 독살설 속에서 자신의 아들 명종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한 문정왕후는 왕위를 손자에게까지 잇지는 못했다. 재임 기간 내내 어머니 문정왕후의 그늘에 가려 있던 명종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승하했는데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는 상태였다. 명종의 유일한 아들 순회세자가 13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더 이상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승하는 자연히 후사 문제를 발생시켰다. 선왕의 아들이 없으므로 종친 중에서 한 명을 임금으로 추대해야 했다. 평소 명종 내외와 친밀했던 중종의 서손자(庶孫子) 하성군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그는 중종이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낳은 덕흥군의 세 아들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방계 승통 시대가 열렸고, 그가 바로 선조였다.

자신이 방계 승통이라는 점에 대해 콤플렉스 가지고 있었던 선조는 정비(正妃)에게 낳은 아들로 후사를 잇는 것으로 그 콤플렉스를 메우려 했다. 그러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다. 반면에 후궁들로부터는 무수히 많은 왕자와 옹주를 얻었다. 여섯 명의 후궁에게 얻은 자녀는 총 13남 10녀. 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열세 명의 후궁 소생 아들 중에 누구를 후사로 삼느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런데 당시 선조는 또 다른 후궁인 인빈 김씨에게 빠져 있었고, 인빈의 둘째 아들인 신성군을 유달리 사랑했다. 선조는 어차피 정비 소생 원자가 아니라면 사랑하는 인빈 소생의 신성군에게 보위를 넘기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선조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력 정당이나 정치인들에게도 중요한 화두였다. 서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은 공빈 김씨의 둘째아들 광해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가 선조의 여러 서자들 중 가장 인품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에 정철을 영수로 하는 서인들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지지했다. 특히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은 신하들의 이런 의견을 직접 선조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정철은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됐는데 무슨 말을 하는가』란 선조의 꾸지람만 듣고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여기에는
동인인 영상 이산해의 계략이 있었다. 이산해는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기로 정철과 합의해 놓고서도 한편으로 신성군의 생모 인빈 김씨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 당신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충동질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인빈 김씨가 당일로 선조에게 이 사실을 호소했을 때만 해도 선조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정철이 실제로 신성군이 아닌 광해군을 세자로 주청하자 분노가 폭발해 귀양보낸 것이었다. 이로써 정권은 동인 수중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한해 전인 1591년의 일이었다.

동인임진왜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당이다. 일본의 침략 조짐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파견됐던 조선통신사 일행 중 정사인 황윤길은 『침략할 것 같다』고 보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전혀 침략의 조짐이 없다』고 상반된 보고를 올렸다. 양 의견 중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됐는데, 이는 당시의 집권당이 동인이고 김성일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와중에 권력을 잡는 쪽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이었다. 조식(曺植)을 종주로 모시는 북인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같은 의병장들을 다수 배출하여 명분에서 앞선 결과 집권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겨우 종결되자 집권당인 북인은 선조의 후사 문제를 놓고 또다시
대북소북으로 분열했다. 이는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왕비가 된 인목대비 김씨가 1606년(선조 39년)에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비롯된다. 당연히 후계 문제가 복잡하게 꼬인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선조는 할 수 없이 조정 대신들의 중망을 들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세자 광해군은 조정을 둘로 나누어 맹산, 곡산, 이천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 끝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그 지위를 굳혔다. 이때만 해도 광해군이 보위를 잇는 것은 기정사실로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자국 사정 때문에 광해군의 세자 책봉 추인을 거부하자 선조와 일부 신하들의 생각이 달라지면서 세자 문제는 다시 미궁에 빠졌다.

소북 영수 유영경은 인목대비 김씨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과 손을 잡았다. 광해군을 폐세자시킨 후 영창대군을 세우려고 결탁했던 것이다. 영창대군을 후사로 세우려는 이 구도는 방계 승통을 극복하려는 선조의 열망과 맞물리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결국 이것은 세자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박해로 나타났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선조는 광해군이 문안할 때마다 『명나라의 추인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 행세를 하는가? 다음부터는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그때마다 광해군은 피를 토했다고 한다.


광해군의 승리

선조는 광해군을 내쫓고 영창대군을 세우려 했으나 세월은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선조의 병이 깊어진 재위 40년(1707) 가을, 서른네살의 장성한 세자를 폐하고 두살배기 아이를 세자로 만드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일이었다. 결국 선조는 광해군을 폐출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했다.

선조는 1707년 10월 병석에서 대신들을 불렀다. 광해군에게 전위한다는 교서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소북 영수 유영경은 선조가 자신만 불렀다고 하면서 원임대신(현직 정승)들을 모두 배제한 채 혼자 선조를 만났다. 선조가 광해군에게 전위할 뜻을 밝히자 유영경은 『금일의 전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뜻밖에 나온 거사여서 명령을 받지 못하겠습니다』라면서 명을 받기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소북인 병조판서 박승종과 공모해 군사를 동원해서 대궐을 에워싸기도 했다.

유영경의 이러한 월권 행위에 저격수로 나선 인물이
대북의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유영경이 전교를 거부한 것은 사당(私黨)을 위해 왕사를 버린 것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그러나 선조는 오히려 정인홍을 귀양보냈고 후사를 둘러싼 상황은 여전히 혼돈스러웠다.

후사를 둘러싼 선조의 결심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선조의 병이 재발했다. 선조 마지막 해인 41년 1월부터 다시 병세가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았는데 그해 2월1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어젯밤엔 편히 잠을 잤다』라고 말한 그날 오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죽음이 머리맡에 이른 선조는 광해군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광해군에게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듣지 말라』는 유서를 내렸다.

드디어 광해군이 승리한 것이다. 선조는 죽음에 이르러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말했지만 신하들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고 광해군에게 피를 토하게 한 인물은 바로 선조 자신이었다. 만약 선조가 시종일관 광해군의 지위를 튼튼히 해주었다면, 장남 임해군이나 적자 영창대군 모두 왕자로서 풍족한 삶을 누리다 세상을 뜰 수 있었을 것이다.

즉위한 광해군이 자신을 폐출시키려던 소북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광해군은 소북을 숙청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북에게 정권을 넘겼다. 정권을 장악한 대북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에 대한 강경책을 펴서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해 서궁에 가두었다. 이 와중에 나돈 소문이 선조독살설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당연히 숙청당한 소북과 세를 잃은 서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선조 독살설이 그리 광범하게 유포되지는 않았다. 선조가 죽기 전해부터 병색이 심각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사대부 모두 알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선조독살설이 조선 전역에 유출되고 사실처럼 전해진 것은 광해군이 쫓겨난 이후였다.

정철의 실각 이후 정권에서 소외됐던 서인들은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와 인목대비 폐위 등을 반사대·반윤리적인 행위로 규정짓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인조 반정은 대북 정권에 의해 서궁에 유폐됐던 인목대비를 화려하게 복귀시키는 무대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간 사랑하는 아들 영창대군이 비참하게 저세상으로 가는 비극을 맛보았다. 백년을 씻어도 씻기지 않을 한을 품은 그녀가 다시 대비로 복위한 것이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이 반정을 추인해 달라고 요구하자 인목대비는 광해군 부자를 죽이라고 요구한다.

『역괴(逆魁:광해군)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고, 그 적모(嫡母: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다하였다』

말하자면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민성징이 즉각 『지금 하교하신 사실은 외간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더욱이 선왕을 시해했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한 사실입니다』라고 되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별다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단지 아들을 잃은 여인이 한풀이를 위해 지어낸 말일 뿐이다.

하지만 대비의 입에서 직접 나온 선조 독살설은 서인의 반정 명분을 정당화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서인 편에서 볼 때 선조 독살설의 진위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선조 독살설이 광범하게 유포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인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야 어차피 구중 궁궐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재간이 없었다. 반정 정권은 선조독살설이 정권 기반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조직적으로 유포시켰고, 이것은 하나의 오도된 진실이 되어갔다.


소현세자의 이상한 죽음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 정권은 집권 후 외교노선을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했다. 만주에서 새로이 흥기하는 여진족의 후예들이 세운 후금(後金), 곧 청나라를 배격하고 한족(漢族)의 명나라를 좇자는 정책이 그것이다.

인조반정(1623년)이 일어날 즈음의 만주 정세는 극히 유동적이었다. 인조반정 한 해 전 청(후금)은 만주의 요지인 심양과 요양을 탈취했고 다음해에는 서평보(西平堡)를 장악했다. 청이 이처럼 기세를 올리는 동안 명나라는 내부 분란에 휩싸여 있었다. 귀주와 산동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혼란을 틈타 청은 급격하게 세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만약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정묘· 병자호란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과 청의 분쟁 와중에 조선의 위상과 국익을 한껏 드높였을지도 모른다. 반정 정권이 배청 정책으로 전환하자, 청은 명과 중원을 다투는 일전을 앞두고 조선 문제를 먼저 정리하려고 나섰다. 청군이 중원으로 남하한 틈을 타서 조선군이 공격해 온다면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되기 때문에, 만주를 기반으로 한 청으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처지였다.

이는 결국 두 차례의 침략을 불러왔다.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丁卯胡亂)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그것이다.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는 12월의 혹한이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나라 군사는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강화도는 지리적 요건이 농성할 만한 곳이지만 남한산성은 그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농성의 기본조건은 자급자족 체제인데 산성, 그것도 한겨울의 산성은 농성의 자리가 아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45일 이상을 저항하던 인조는 결국 강화도가 함락돼 비빈·대군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하고 만다. 인조는 지금의 송파구인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삼배고두례를 행했다. 허울뿐인 큰소리 외교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화의의 대가로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야 했다. 삼전도의 치욕은 봉림대군은 물론 소현세자에게도 씻기 어려운 상흔이었다.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의 성리학자인 그들에게 삼전도의 치욕은 반드시 씻어야 할 원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볼모생활 도중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현실인식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이 처한 객관적 현실, 즉 국제관계의 역학을 인정했다. 청은 이제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실력자였고 조선은 그 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 편입돼 있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려면 청과 맞서 이길 힘이 필요했다. 그럴 힘이 없는 이상 청과 대립하는 것은 조선에 이롭지 못한 일이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은 이전의 중국 왕조들이 요구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공으로 대표되는 형식적 주종 관계를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조공 대상이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든 만주족이 세운 왕조든 현실적으로 볼 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원을 청이 장악한 이상 조선은 그 질서 속에 편입된다는 것이 볼모생활에서 바뀐 소현세자의 현실 인식이었다.

소현세자는 당시 심양에 새로운 숙소를 신축해 심양관(瀋陽館)이라 불렀다. 청나라는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려 했다. 인조도 청나라와 직접 접촉을 꺼렸으므로 양국간 현안은 소현세자의 차지였다.

소현세자는 양국의 접점 지역에서 양국의 직접적인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심양관은 주중국 조선대사관이며 소현세자는 그 대사였던 셈이다.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에 대응하는 일이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 중에서 명 정벌에 사용할 군사를 파견해 달라는 것은 가장 난처한 문제였다. 친명 배청을 명분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으로서는 이는 심각한 자기 부정에 해당하므로 상당한 반발이 뒤따랐다. 하지만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정권으로서는 청의 어떠한 요구도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하는 순간 청군의 말발굽이 또다시 조선 국토를 짓밟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임경업장군의 사보타주

인조 18년 임경업이 이끄는 수군 6천명을 파견한 것은 서인 정권의 참담한 자기 부정이었다. 유명한 반청론자인 임경업이 청과 함께 명을 치는 일에 흥이 날 리 없었다. 임경업은 명군을 향해 발포하지도 않고 일부 군사는 일부러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보타주를 벌였다. 이에 격분한 청은 장수 용골대(龍骨大)를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의주로 파견했다. 이들은 조선의 대신들을 의주로 불러 심문하는 이른바 「심옥(瀋獄)」을 벌여 조선은 다시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졌다.

이때 소현세자는 청의 말을 듣는 척하며 양자 사이의 완충역할을 자임했다. 아마 소현세자의 유연한 처신이 없었다면 조선인들은 화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조 20년에 압록강 근처에 명나라 배가 출몰하자 용골대가 평안감사 등을 불러 심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도 소현세자는 시종일관 평안감사를 옹호했다. 이때 용골대는 이렇게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와 같이 비호해 주니 그와 한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소』

세자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구려』

이처럼 소현세자는 양국간 분쟁에서 분명히 조선편을 들면서도 유화적인 몸짓으로 파문의 확산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런 유연한 처신은 조선에 대한 청의 의구심을 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즉위하면 양국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세자빈 강빈도 소현세자 못지않은 수완가였다. 심양관의 안살림을 맡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금이었다. 그녀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했다. 이렇게 생산된 곡식은 심양관 살림에 가장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포로로 잡혀온 조선 사람들도 원수인 청인들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세자 밑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니, 강빈의 이 농업정책은 일거양득의 양책이었다. 강빈은 이렇게 수확한 곡식을 청의 진기한 물건들과 맞바꿔 차액을 남겼다. 또한 조선 사신들이 가져오는 인삼 등을 청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청나라 관리들에 의해 심옥이 한번 벌어지면 막대한 자금이 들었다. 청 관리들은 막대한 뇌물을 받고서야 못 이기는 체 심옥을 종결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금을 마련한 것은 모두 강빈의 수완이었다. 실로 소현세자와 강빈은 조선 역사상 가장 현실적인 세자이자 세자빈이었다.

소현세자가 볼모로 가 있었던 기간은 장장 9년이었다. 인생의 황금기인 20대 중후반과 30대 전반을 이국에서 볼모생활로 보낸 것이었다. 소현세자는 인조 22년(1644) 2월, 34세의 나이로 꿈에도 그리던 고국 조선에 돌아왔다.


아들을 의심하는 아버지

소현세자의 귀국 짐보따리 속에는 많은 종류의 서양 과학서적과 여지구가 들어 있었다. 그는 볼모생활을 하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견식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세상이 더 이상 성리학의 시대가 아님을 심양과 북경에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한 인물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사상과 접하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과 천주교, 그리고 서양의 과학사상이었다. 소현세자는 스스로 아담 샬이 머물고 있던 북경의 남천주당을 찾았다. 푸른 눈의 선교사와 이국의 왕세자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는 특이한 장면이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가져온 과학서적이 훗날 수원성 축성 때 정약용으로 하여금 거중기를 만들게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이 밖에도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들을 데리고 귀국하기도 했다.
 
소현세자는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더 이상 청은 원수가 아니었다. 주자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청은 원수의 나라였지만 주자학의 관점만 버린다면 청은 실리에 따라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상대적인 대상일 뿐이었다. 세상은 주자학만이 아니라 천주학이란 다른 사상도 있었다. 그리고 여지구가 보여주는 대로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새로운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과학기술은 조선을 새롭게 발전시킬 양축이었다.

그러나 가슴 가득 포부를 안고 귀국한 소현세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를 구렁에 빠뜨리려는 음모였다. 부왕 인조에게 있어서 소현세자는 자신을 대신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었다. 소현세자는 자신의 반청 노선에 반기를 든 정적이자 원수인 청의 회유에 넘어간 반역자일 뿐이었다. 소현세자가 볼모지 심양에서 조선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부왕 인조는 세자에 대한 불만만 키워왔던 것이다.

더욱이 인조는 어이없게도 아들인 소현세자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심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공포였다.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임금으로 내세워 자신을 폐출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다. 인조는 쿠데타로 집권한 인물답게 자신의 왕위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했다.

인조가 세자를 의심하는 것을 눈치챈 일부 정치세력이 세자를 모함하고 나섰다.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도 그 중 한 세력이었다. 그녀는 세자와 강빈이 인조를 내쫓고 즉위할 것이라고 참소했다. 세자에 대한 의심과 주위의 참소는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조는 심지어 환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조차도 막을 정도로 그를 냉대했다.

소현세자는 부왕의 이런 냉대에 상심했으나 그 원인을 분석할 만한 여유도 그에겐 없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설고 낯선 이역만리에서 9년간이나 꿋꿋하게 지내던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뒤따랐다.


의혹짙은 소현세자의 주검

세자의 발병일은 인조 23년 4월23일이었다. 병명은 학질이었다. 세자는 발병 3일 후인 4월26일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인조실록』은 그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적었다.

『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소렴 때 시체의 얼굴을 싸는 검은 헝겊)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이 기록은 당시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시신의 이상한 상태를 보고 나와 말한 것을 토대로 적은 것이었다. 그녀는 인열왕후(소현세자의 어머니)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염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한 것이 분명하다면 소현세자를 죽인 인물은 누구일까?

『인조실록』은 세자의 시신이 독살당한 사람 같았다는 사실을 『상(인조)도 모르고 있었다』라고 기록했지만 이는 거짓이다. 소현세자 독살에 인조가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한둘이 아니다. 그 하나가 소현세자를 치료한 의관 이형익(李馨益)에 대한 처리 문제다. 이형익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어미 집에 왕래하던 의사로 세상에 추잡한 소문이 많던 자였다. 세자가 이형익에게 침을 맞은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양사는 이형익을 처벌하자고 주청했다. 『오한이 심하여 몸이 떨리는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는 것이 양사의 탄핵 이유였다. 조선시대에 왕이나 세자가 죽으면 의관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다 해도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인조는 끝내 이형익을 비호하면서 처벌하지 않았다.

인조가 세자 독살에 관련돼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였다. 사망 당시 소현세자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큰 아들 석철은 원손(元孫)이었으므로 당연히 그가 세손으로서 세자를 대신해 인조의 뒤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종법을 어기고 원손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그 중 두 아들이 풍토병으로 죽게 했다.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련됐다는 다른 증거는 세자빈 강빈의 처리 문제였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강빈에게 공격의 화살이 날아왔다. 세자의 장남 석철의 보모 최상궁은 저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 끝에 죽어갔다. 그리고 인조 24년 정월에는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御膳:임금의 수라)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강빈은 후원 별당에 감금되었다. 이미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진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에 독을 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인조와 소용 조씨가 공모해 강빈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내린 인조의 비망기는 자신이 사건의 배후 연출자임을 털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紅錦) 적의(翟衣)를 만들어 놓고 외람되게 내전(內殿:왕비)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인조 스스로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그의 세 아들을 귀양 보낸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인조의 악함은 강빈을 사사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결국 강빈을 폐출하여 사저로 내쫓은 후 사약을 내려 죽여버리고, 교명 죽책(竹冊) 등을 거두어 불태워버렸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빈의 형제들까지도 죄를 씌워 죽여버렸다. 자신의 친아들과 손자, 며느리와 사돈까지 죄없이 죽여버린 이런 인물의 시호에 「어질 인」자를 써 인조(仁祖)라 한 것은, 서인 정권의 역사뒤집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행적을 제대로 표현하면 그는 악조(惡祖)라 불러야 마땅하다.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은 단순히 한 세자의 꿈이 좌절된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꿈이 좌절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을 만난 것은 조선이 개국한 1876년보다 무려 2백32년이나 빠른 1644년의 일이었다. 이때 이미 낡아빠진 성리학을 버리고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그 처참했던 근대사의 아픔은 겪지 않아도 좋았을지도 모른다.


북벌군주 효종의 급서

소현세자가 죽은 4년 후인 1649년 인조도 세상을 떴다. 그 자리를 이은 인물은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생활을 했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었다. 효종에게는 즉위 자체가 하나의 콤플렉스였다. 인조의 뒷자리는 소현세자의 것이지 효종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현세자가 죽었다 해도 그 자리는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의 것이었다. 종법에 따르면 대통은 분명 원손(元孫) 석철의 것이었다. 효종은 소현세자와 석철이라는 두 부자의 대통을 가로챈 셈이었다.

효종이 심양 시절부터 소현세자의 자리를 탐냈다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찾기 어렵다. 심양 시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사이는 그리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소현세자를 사지에 몰아넣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에게 돌아오는 왕위를 거부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즉위 정당성을 북벌(北伐)에서 찾았다.

북벌! 효종에게 있어서 북벌은 시작이자 마지막이며 부분이자 전체였다. 효종은 북벌 군주 그 자체였다. 소현세자가 볼모 생활을 새로운 사상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세계사의 흐름에 적응하는 기간으로 보냈다면, 봉림대군은 원수인 청의 약점을 캐는 기간으로 보냈다. 소현세자가 청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으로 보았다면, 봉림대군은 전력을 다하면 넘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같은 볼모 기간을 보냈으면서도 세계관이 이처럼 완전히 갈리는 것은 서로의 성격탓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무과출신 우대 정책

효종이 북벌에 전념했던 이유는 물론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 소현세자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콤플렉스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북벌은 삼전도의 치욕과 콤플렉스를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길만이 저승에서 소현세자를 떳떳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북벌은 소현세자보다는 효종에게 걸맞은 과제였다. 효종은 강력한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효종은 실로 삼국시대 이래 우리 역사상 거의 유일한 무제(武帝)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이나 고구려의 광개토왕, 그리고 신라의 태종무열왕처럼 무력을 통한 영토확장의 길에 나섰던 무력의 군주였다.

북벌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강력한 군사력이다. 효종은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까지 조선은 문(文)의 나라였다. 과거는 문·무과로 나뉘어 있었으나 무과 출신으로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과 출신들은 문과 출신보다 한 등급 아래의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무과 합격자는 지방 수령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은 무과 우대 정책을 실시했다. 효종은 무과 시험인 관무재(觀武才) 우수 합격자를 지방 수령에 임명했다. 그러자 문신들의 반발이 잇따랐다. 효종이 무과 출신을 지방 수령에 임명한 것은 각 지방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효종은 무과 출신인 유혁연(柳赫然)을 비서격인 승지로 임명하기도 했다. 효종이 전례를 무시하고 무장 출신을 승지로 임명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군사문제에 관한 직할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효종은 지방관을 파견하며 군사문제는 병조판서에게 직보하고, 병판은 무신 승지 유혁연에게 전달하게 했다. 즉 지방의 군사문제를 지방관→병판→무신 승지→효종이라는 신속하고 전문적인 보고 체제를 갖추기 위해 무과 합격자를 수령에, 무신 출신을 승지에 임명한 것이다.

또한 효종 5년 2월에는 지방의 북벌 준비 사업을 관장할 영장(營將) 제도를 복원하고 이화악(李華岳) 신단(申檀) 등을 영장, 부사(府使) 등에 임명해 지방으로 내려 보내기도 했다.

전란 후의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효종의 강력한 군사력 확장 정책은 많은 성과를 거두어 재위 6년에는 사대부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막강해진 조선군의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 세자와 문무백관,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량진 백사장에 나가 1만3천여 조선군의 열병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효종은 제주도에 표류돼온 네덜란드 사람 하멜(Hamel)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조총(鳥銃)을 모방한 새로운 총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친위군인 금군(禁軍)을 늘리고 창덕궁 후원의 담장을 헐어 이들의 기사장(騎射場)을 만들어주었다. 지형이 험준한 우리 나라는 남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기병전의 여지가 그다지 넓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광활한 만주와 중원을 공격할 때 사용할 목적임이 분명하다.

효종의 이런 군비확장책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조선 전기간을 통틀어 전례가 없던 군비확장책은 문신들의 강한 반발을 낳았다. 신속한 군비확장은 집중된 권력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국왕의 권력은 미약했다. 부왕 인조는 서인들이 선택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쿠데타를 준비하던 서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한 명의 종친일 뿐이었다.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조정은 국왕과 서인의 연합정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의 군비확장책은 서인 문신들의 반발을 낳았다.

문신들은 물론 만주족 국가인 청을 증오했다. 그러나 이런 증오심을 극도로 표현하는 길은 기껏해야 삼학사 같은 지사적 처신이지 군사적 대응은 아니었다. 의기만 드높게 선전 교서를 던졌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혹한 속의 산성에서 떨었던 문신들에게 청은 마음속 증오의 대상일 뿐 군사적 정복대상은 아니었다.

군비확장책에 대해 『백성의 생활이 더 급하다』는 안민책(安民策)을 제시한 문신들의 반발 명분이 무조건 폄하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안민의 대계 중 강력한 국방책은 가장 첫머리에 놓여야 할 항목이란 점에서 안민책을 명분삼은 군비확장 반대도 전적인 정당성을 갖기는 어렵다. 심지어 열병식이 청나라의 분쟁거리가 된다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대해 효종은 『이것이 어찌 오랑캐의 주구가 아니겠는가?』라면서 강행했다.


문신들의 노골적 반발

그러나 재위 8년간 거의 독단적으로 군비확장책을 추진하다 보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효종의 치세에 대한 사대부들의 불만을 집약해서 표출한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흔히 송시열을 북벌 이념의 제공자로 알고 있지만, 실제 송시열은 효종의 군비확장책에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다. 송시열은 효종 8년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그간의 치세 전체를 부정하고 나선다.

『전하께서 재위하신 8년 동안 그럭저럭 지나갔을 뿐 한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르렀습니까? 백성들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하며 안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朝夕)에 다다랐습니다』

송시열은 또 『남송의 주자가 처음에는 금나라에 대한 북벌을 주장하다가 20년 후에는 다시 북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북벌을 포기하라는 권고였다. 이는 효종이 전력을 기울인 모든 정책을 포기하라는 말로 효종의 치세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자신을 전면 부인하고 나선 송시열을 처벌하지 못했다. 사대부들이 집단 반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효종은 사대부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타협에 나섰다. 효종은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에 정권을 넘겨주기로 하였다. 대신 송시열·송준길로 대표되는 산당은 적극적인 북벌책을 수행해야 했다. 이처럼 양자가 연합할 수 있는 공통 분모는 북벌이었다.

송시열의 산당이 대외적으로 내건 명분은 「춘추대의」였다. 최고의 춘추대의는 오랑캐의 나라인 청을 정벌하고 중화의 명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 길은 오직 북벌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북벌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소리 높여 춘추대의를 외쳤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춘추대의는 군사를 동원해 산해관을 공격하는 북벌이 아니었다. 그들이 최고로 생각하는 춘추대의는 국력을 길러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망해버린 명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달랐다. 그에게 북벌은 군사를 동원해 만주와 중원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과 효종의 북벌론에는 이론과 실제에 이토록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 같은 산당인 송준길을 병조판서에 임명해 인사와 군사 양방면의 전권을 맡겼다. 효종이 이들에게 정권을 내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들이 소리높여 주창하던 춘추대의를 실제로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춘추대의는 말로써 드높일 수 있었지만 북벌은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북벌은 군사력 확장이란 가시적 성과가 눈에 보여야 했다.


땅에 묻힌 「북벌론」

양송(兩宋)이라 불리던 송시열·송준길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그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자 효종은 재위 10년(1659) 3월에 송시열과 독대한다. 조선에서 임금과 신하가 단 둘이 만나는 독대는 금지돼 있었다. 효종이 국법을 어겨가며 독대한 이유는 보안을 위해서였다. 바로 북벌을 논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기해년의 일이라 하여 「기해독대」로 불리는 이 독대에서 효종은 이렇게 말한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효종의 북벌계획은 군사전략상으로 볼 때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청은 외견상으로 견고해 보여도 구조상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배층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이고 피지배층은 다수 민족인 한족이기 때문이다. 10만 조선정예군이 북벌을 단행하면 만주족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한족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것이 효종의 생각이었다. 효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단성있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효종이 독대까지 해가며 북벌을 주장하자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효종이 산림에 정권을 넘긴 이유는 단 하나 북벌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송시열이 북벌 자체를 반대한다면 효종은 미련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송시열 등 산림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벌을 강력히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북벌은 불가능한 망상이었다.

이때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효종이 급서한 것이다.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한 지 두 달 만이었다. 효종의 사인은 사소한 것이었다. 머리 위에 난 종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종기가 독으로 번지자 어의 신가귀(申可貴)가 종기에 침을 놓고 고름을 조금 짜내니 피가 서너 말이나 솟아나왔다.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이었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그는 수전증으로 손을 떠는 상태였다 한다. 수전증이 있는 의사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신가귀가 현종 즉위 후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수전증의 신가귀가 효종에게 침을 놓은 것도,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도 우연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으로만 돌리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컸기에 고의란 의구심이 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조정에서 북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송시열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북벌은 주장하지 않았다. 효종의 시신과 함께 북벌도 땅속에 묻힌 것이다.


예송논쟁 와중에 급서한 현종

효종의 죽음은 조정에 뜻밖의 논란을 불러왔다. 효종의 급서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효종의 장례 때 입을 상복을 두고 벌어진 논란이다. 이것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지는 유명한 「예송논쟁」이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사망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 기간이 얼마여야 하는가를 두고 발생했다.

조선의 상례(喪禮)에 따르면 부모상에 자식은 3년복을 입고, 반대로 장자상(長子喪)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어야 했다. 장자를 부모와 같이 대우한 이유는 종통을 잇는 맏아들을 그만큼 우대했기 때문이다. 장자 아닌 차자(次子) 이하의 상사에는 부모가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다.

예송 논쟁의 논거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효종은 인조의 차자였기 때문이다. 장자는 어디까지나 소현세자였다. 그러나 인조의 왕통을 이은 인물은 효종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왕통을 이은 인물에게 장자냐 차자냐를 따지는 것이 타당한 물음이냐는 반론이 가능한 것이다. 효종이 차자라는 서인의 논거와 왕통을 이은 존재라는 남인의 논거가 부딪친 것이 1차 예송논쟁이었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은 효종이 차자이므로 자의대비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선도로 대표되는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자지만 왕통을 이었으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자칫하면 효종이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 대신 왕위를 이은 것이 정당하냐는 승통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 정국에 피바람을 부를 수도 있는 민감한 문제였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 승통의 정당성을 둘러싼 거대한 정치문제로 비화될 뻔하다가 가까스레 1년설을 주장한 서인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서인이 집권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설을 주장하다 패배한 남인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정치보복은 행해지지 않았다. 형식상 정치논쟁이 아니라 예법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임금에게 야박한 신하들

그러나 15년 후 벌어지는 2차 예송논쟁은 학문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종 15년에 벌어지는 2차 예송논쟁은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함으로써 발생한다. 자의대비가 그때까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효종 장례 때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1차 예송논쟁이 아들 상사 때 어머니의 상복 착용 기간 여부였다면 2차 예송논쟁은 며느리 상사 때의 시어머니의 상복 착용 기간 여부였던 것이다.

장자·차자의 상사 때 부모의 상복 착용 기간이 달랐던 것처럼 장·차자부 상사 때의 상복 착용 기간도 달랐다. 장자부(長子婦)의 상은 1년복을, 차자부(次子婦) 이하의 상은 9개월복을 입었던 것이다. 사망한 사람만 달랐지 그 내용이나 배경은 1차 예송논쟁과 똑같았다. 1차 예송논쟁 때 1년설을 주장했던 서인들은 2차 예송논쟁 때 9개월설을 주장했고, 1차 때 3년설을 주장했던 남인들은 2차 때는 1년설을 주장했다. 즉 서인들은 1차 예송논쟁 때 효종을 차자로 대우한 것처럼 효종비를 차자부로 대우한 것이고 남인들은 왕통을 장·차자 여부보다 높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차자부가 아니라 왕비로 대우한 것이다.

1차 예송논쟁 당시 현종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서른네 살의 장년이 돼 있었다. 국왕인 현종의 자리에서 볼 때 1차 예송논쟁의 결과는 내심 불만이었다. 당시만 해도 송시열과 윤선도 같은 대군 사부들의 논쟁에 판정을 내릴 만한 견식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버지 효종이 누구인가? 바로 국왕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국왕을 장자와 차자로 나누어 차등있게 대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통을 이었으면 그뿐, 나머지 모든 예법은 왕통에 복종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한 직후에 서인들이 자의대비 복제에 혼선을 빚었던 것이 논쟁을 부추겼다. 서인은 처음에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의정했다가 1차 예론에 참여했던 서인 중진들의 말을 듣고 9개월로 고쳐 올렸던 것이다. 현종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당초 1년복으로 의정했다가 왜 9개월복으로 개정했느냐고 추궁하고 나섰다. 서인들은 여러 차례 모여 협의했으나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진퇴양난의 협곡에 빠졌던 것이다. 현종이 원하는 대답은 1차 예송 때 서인들이 주장했던 1년설과 지금의 9개월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시인하면 서인들은 국왕을 능멸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자충수(自充手)에 빠지는 것이었다. 서인들이 대답을 못하고 시간만 끌자 현종은 분노했다. 그리고 1,2차 예론은 모두 서인들이 왕권을 업신 여긴 결과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전의 기해예론(1차 예송)은 3년복으로 고치고 이번의 갑인예론(2차 예송)도 1년복으로 고쳐라. 기해복제를 과인은 국제(國制:국조오례의)를 쓴 것으로 생각했는데 안팎에서는 고례(古禮:중국의 옛법)를 썼다 하니 임금이 하는 일은 가볍고 신하들이 하는 일은 무겁다는 말이냐? 경들이 모두 선왕(효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감히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고 주장하니 신하가 되어 감히 임금에게 야박하게 굴면서 누구에게 두텁게 굴 것인가?』

현종이 말하는 「두텁게 구는 누구」란 1차 예송 논쟁 때 1년설을 이끌었던 송시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서인들에 대한 치죄에 나섰다. 평소 원만했던 현종의 성품으로 보아 이례적인 분노였다. 현종은 드디어 예론을 잘못 이끈 책임을 물어 서인 영상 김수흥을 귀양보내기에 이른다. 귀양가는 서인의 자리는 허적, 윤휴 같은 남인들이 메웠다. 이때가 1674년이었으니 남인들은 1623년의 인조반정 이래 반세기 만에 정권을 잡는 길이었다. 분명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견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현종이 급서했던 것이다. 현종은 왜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것일까? 『현종실록』은 『현종의 기운이 몹시 지쳐 병이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과로라는 뜻이다. 과로로 쇠약해진 몸에 열이 발생했고, 그런 지 열흘 만인 그해 8월 승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의혹을 부추기는 점은 이때가 약방에서 시약청을 설치한 하루 만의 일이라는 점이다. 임금의 병이 조금 심하다 싶으면 서둘러 시약청을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시약청 설치 하루 만에 사망하는 일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당시 현종은 「임금에게 야박하게 구는」 서인들을 한창 몰아세우던 중이었으므로 의혹이 잇따랐다. 그런 의혹을 남긴 채 현종은 가고 15세의 어린 숙종이 뒤를 이었다.


노론에 둘러싸인 소론 임금 경종

숙종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경종의 신산스러운 삶은 「장희빈의 아들」이란 한마디에 포괄돼 있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와 국왕의 총애를 놓고 다투던 숙종 때는 조선 전기간에 걸쳐 당쟁이 가장 심한 때였다. 숙종 때는 서인과 남인 사이에 죽고 죽이는 살육이 거듭됐는데,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가의 여인이었고 희빈 장씨는 남인가의 여인이었다.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의 부상과 몰락은 익히 알려진 대로 현모양처와 악처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리전이었다.

재위 15년 동안이나 후사가 없어 애를 태우던 숙종에게 옥동자를 안겨준 여인이 바로 희빈 장씨였다. 숙종이 이 옥동자를 원자로 정호하려 하자 서인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숙종은 서인 정권을 갈아치운 후 남인에게 정권을 주면서 원자 정호를 강행했고 동시에 인현왕후를 내쫓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그리고 원자로 정호한 옥동자를 세자로 책봉했으니 그가 바로 훗날 경종이다.

그러나 또 다른 후궁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왕자를 낳자 희빈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점차 식어갔는데 서인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희빈 장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남인에 대해 서인이 집요한 공세를 계속한 결과, 희빈 장씨가 왕비에서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고 남인들도 몰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저로 쫓겨났던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가 되었다. 그후 몰락한 남인에 대한 치죄를 둘러싸고 서인들은 둘로 양분된다. 남인들을 강하게 치죄해야 한다는 강경파가 노론이고 유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온건파가 소론이었다.

숙종과 노론이 희빈 장씨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해 사약을 내려 죽이자 그녀 소생인 세자의 처지는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노론은 자신들이 죽여버린 여인의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연산군 시절과 같은 살육이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숙종 또한 모후가 사형당한 한을 품은 아들이 뒤를 잇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숙종과 노론 대신 이이명은 숙종 43년(1717)에 이른바 「정유 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정유독대의 합의사항은 숙종의 와병과 소론의 격렬한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경종이다. 그러자 다급해진 노론은 경종을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경종의 이복동생, 즉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밀었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요구했다. 노론이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청한 까닭은 그녀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노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34세였던 경종은 노론의 이 주장을 받아들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다.

하지만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했다. 이는 세제를 정사에 참여시키라는 말로 사실상 세제에게 정권을 넘기라는 주청이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미성년이 아닌 한 「대리」라는 말은 신하가 입에 담을 수 없는 금언(禁言)이었다. 국왕이 세제에게 대리시키겠다고 해도 신하들은 죽어도 안 된다며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해야 했다. 이런 어마어마한 말을 신하들이 먼저 주청하고 나선 것이다.

경종은 이를 받아들여 세제 대리청정을 허락했으나 소론이 격렬히 반발하고 나섰다.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은 노론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을 역모로 몰았고 경종이 이를 받아들여 정권은 소론에게 돌아갔다. 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 남인가의 인물인 목호룡이 노론쪽에서 경종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이른바 「삼급수 살해 사건」을 고변하면서 조정은 충격에 휩싸인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창집·이이명 등 노론 사대신과 많은 노론가 자제들이 사형당하면서 노론은 몰락하는데 이것이 바로 임인옥사다.


게장과 생감

경종의 사인(死因)이 두고두고 의혹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임인옥사 수사보고서인 임인옥안에 세제 연잉군의 이름도 역적으로 등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노론 사대신을 제거한 소론 강경파의 공세는 이제 세제를 향했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과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는 세제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경종에게 양자를 들여 그를 후사로 삼고 세제를 폐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성사되지 못했다.

경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경종의 급서는 효종·현종의 사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파문을 불러왔다. 경종이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정치적, 의학적 정황 증거는 한둘이 아니었다.

정치적 정황 증거는 소론강경파와 경종비가 노론계인 연잉군 폐출을 계획하던 와중에 발생한 사건이란 점이었다.

의학적 견지의 정황 증거도 많았다. 그 하나가 게장과 생감이었다. 경종의 식욕이 부진하자 노론계인 대비와 연잉군이 게장을 진어하고 곧바로 생감을 올렸다. 그런데 게장과 생감은 의가(醫家)에서 꺼리는 상극이었다고 『경종실록』은 적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가슴이 조이듯이 아파왔던 것이다. 그 후 심각한 병세에 빠진 경종의 처방을 놓고 연잉군은 다시 어의와 다툰다. 연잉군이 인삼차를 올리려 하자 어의(御醫) 이공윤이 『자신이 쓴 강한 처방약과 인삼은 서로 상극』이라면서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나 연잉군은 어의 이공윤을 꾸짖어가며 인삼차를 연달아 세 번이나 올렸는데 그 직후 경종이 세상을 떴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양자 입적 문제, 의학적으로는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진어문제 등이 경종 독살설을 진실로 믿게 만들었다. 더구나 소론과 노론이 격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역안에 등재된 노론계 세제가 어의와 다투어가며 특별 처방을 고집한 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보아도 문제 있는 처신임에는 분명했다.

의혹의 당사자인 연잉군이 즉위하자 전국 각지에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벽서가 나붙었다. 심지어 군사 이천해란 인물은 즉위한 연잉군, 즉 영조가 능에 행차할 때 어가를 가로막으며 영조를 비난하고 나섰다. 영조는 이천해의 말을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며 사관에게 싣지 못하도록 명해서 실록에는 다만 「들을 수 없는 말(不忍之言)」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영조는 이천해는 물론 경종 시절 자신을 핍박했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사형에 처했으나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김일경과 목호룡은 영조가 『네 목을 베어 대행대왕(경종)의 빈전에 바치겠다』라고 꾸짖자 『나도 선왕(경종) 곁에 묻히기를 원하오』라며 반발했다. 경종의 충신은 영조가 아니라 자신들이란 뜻이었다.

급기야 영조 재위 4년에 소론 강경파가 경종의 복수를 내걸고 영남을 중심으로 군사를 일으켜 경종의 복수와 영조 정권 타도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군사는 조석으로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전군이 모여 곡을 했다. 영조의 정통성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했으나 재위 31년에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 투서사건으로 경종독살설은 다시 재연된다. 국문당하던 소론인사가 『나는 갑진년(경종이 사망하는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경종 독살설을 다시 꺼냈기 때문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정계에서 소외된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이 논쟁은 틈만 생기면 재연됐다. 경종 독살설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급기야 사도세자에게까지 여파를 남겨 조선 왕실사상 가장 큰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경종독살설의 한가운데 있던 인물이다. 영조는 비록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태생적 한계상 노론일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분명히 노론이 선택했기에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영조 당시에 논란이 되었던 「택군(擇君)」논쟁이 대표적이다. 영조는 즉위한 후 경종 때의 임인옥안에 자신이 역적으로 등재된 것에 부담을 갖고 이를 뒤집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영조는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노론과 함께 과거 음울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만약 경종의 양자를 들여 후사를 이으려던 소론 강경파의 계획이 성공했으면 그는 왕위는 커녕 사형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부왕과는 처지가 달랐다.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 어느 쪽에도 정치적 부채가 없었다. 사도세자가 보기에 부왕이 세제 시절 노론과 손잡고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것은 분명 역모로 볼 소지가 있었다. 영조와 노론처럼 경종 때의 행위는 숙종과 영조에 대한 충성이었다고 강변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위는 경종의 위치에서 볼 때 분명 역모에 가깝거나 역모였다.

사도세자는 노론에 불만을 느꼈다. 조선은 사실상 노론의 나라란 생각이 들었다. 부왕 영조가 힘겹게 이끌어오는 탕평책은 한계가 보였다. 부왕 자신이 경종 시절 노론에 부채를 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공격했던 소론에 증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조 31년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투서사건으로 영조의 탕평책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두 사건은 소론에 대한 영조의 자제심을 무너뜨렸고 노론은 이 기회를 이용해 소론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였다. 영조 또한 이에 동조해 두 사건을 역모로 처리한 후 그해 10월 『천의소감』이란 책을 편찬하는데 그 내용은 경종 시절부터 두 사건에 이르기까지 노론을 포함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경종독살설의 한 재료인 「게장」은 대비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방에서 올린 것이라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물론 이는 권력자의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편

사도세자는 소론이 연일 죽어나가는 두 사건의 와중에 노론의 사건확대책에 반대했다. 그는 되도록 두 사건을 온건히 처리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러한 처신이 노론의 결정적인 반감을 사게 된다. 부왕 영조가 분노하는 나주벽서사건에서조차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하는 것을 본 노론은 세자의 정치견해가 소론이란 결론을 내리고 세자 제거의 길로 나선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세자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데다 부인 혜빈 홍씨에게마저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극대화된다. 그의 부인 혜빈 홍씨는 누구 못지않은 노론 골수당원이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라고도 불리는 혜빈 홍씨의 친정은 유명한 노론 가문이었다. 그녀의 조상인 홍주원은 선조(宣祖)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난 정명공주의 부마였으니 당연히 서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은 자신의 딸 홍씨를 세자빈으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한 덕택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파격적인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딸이 세자빈이 된 후 김상로 등과 함께 집권당인 노론을 이끄는 실력자가 되었다. 사도세자가 노론으로 처신하든지 아니면 혜경궁 홍씨가 소론으로 처신했으면 최소한 뒤주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인적 기질에다 강한 성격을 지닌 사도세자가 소론의 처신을 보이며 노론과 대립하자 세자의 외척인 풍산 홍씨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세자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당론을 좇아 세자를 제거하느냐였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동생 홍인한은 물론 혜경궁 홍씨까지 세자를 버리기로 했다. 이처럼 세자의 외척까지 세자가 소론이란 이유로 제거의 길로 나서는 판에 여타 노론 중진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한로, 노론 영수 김상로, 홍계희, 윤급 같은 노론 중진 다수가 이에 가담했다.

사도세자는 안팎에서 고립됐다. 소조(小朝:세자궁)에서는 혜경궁 홍씨가 노론의 간자(間者) 역할을 했으며 대조(大朝:영조)에서는 정순왕후와 후궁 문씨가 세자를 헐뜯었다. 조정의 노론 대신들은 호시탐탐 세자를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런 포위 속에 위험을 느낀 세자는 자구책으로 병을 위장한다. 미행(微行)을 통해 허점을 보임으로써 노론의 예봉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세자의 자구책은 이런 소극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소론과 연합하는 적극적인 것도 포함돼 있었다. 세자는 우의정을 역임했던 소론 영수 조재호와 비밀리에 연합하는 데 성공한다.


노련한 정치인 혜경궁 홍씨

세자가 의문의 관서행에 나선 것도 소론과 결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평안감사 정휘량이 소론이자 사돈 사이였으므로 연합하려 했는데, 정휘량이 홍봉한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수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론에 세자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세자는 관서행을 계기로 자신을 제거하려는 노론의 공세를 신속한 기동력으로 막아낸다. 그러자 노론은 드디어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바로 나경언의 고변이다. 나경언의 고변은 주로 세자의 개인적 비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고변 전후의 사정으로 볼 때 그 핵심 내용은 개인적 비행이 아니라 군사 행동에 관한 내용으로 추측된다. 즉 세자가 군사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역모 고변의 성격을 띤 것이다.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지 29일 후인 영조 38년 윤5월13일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세자는 여드레 동안 뒤주 속에서 신음하다 죽었다. 세자가 죽던 날 영조는 『13일의 일은 종사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개인적 비행이라면 종사까지 들먹였을 리가 없다. 또한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주장한 대로 세자의 정신병 때문이라면 솜씨 있는 어의들을 동원해 치료하거나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휴양을 시켰지 뒤주에 가두어 죽일 이유는 더욱 없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노론의 정치공세에 희생되었다는 점은 세자와 연합한 소론 영수 조재호가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던 셋째 날 『조재호가 세자와 결탁했다』며 영조에게 고해 바친 인물은 다름아닌 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들은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한 정치적 의도를 읽지 못하고 그 내용을 전적인 사실로 받아들였기에 많은 오류를 범했다. 엄밀한 자료 해석과 검증 과정을 생략한 탓에 「영조의 이상 성격과 세자의 정신병 때문에 뒤주의 비극이 발생했다」는 홍씨의 의도적 변명에 말려든 것이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서술한 때는 뒤주의 비극이 발생한 영조 38년(1762) 직후가 아니라 순조 5년(1805) 이후다. 즉 이십 후반의 청상과부로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칠십대의 노회한 정객으로서 『한중록』을 서술했다는 말이다.

홍씨가 『한중록』을 서술한 목적은 단 하나 「친정을 신원시키기 위해서」였다. 홍씨의 친정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그날부터 급전 직하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이유는 바로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이란 이유에서였다. 실제 그녀의 오빠 홍낙임은 정조를 축출하고 은전군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련된다.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가 즉위한 후 그녀의 친정은 대리청정하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다시 한 번 단죄되었는데 그후 정순왕후 김씨가 죽자 비로소 가문의 신원에 나서서 『한중록』을 작성한 것이다. 「현실은 살아남은 자의 것」이란 경구를 입증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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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조선왕독살사건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왕독살사건으로 재판 인종에서 고종까지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의 임금들을 조명한 저서.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 서-제14대 선조,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소현세자, 사라진 북벌의 꿈-효종 등 조선조 9인의 임금과 세자 에게 뒤따라다닌 사인의 의혹과 진실을 파헤친 책.

목차
<누가 왕을 죽였는가> 개정판에 부쳐

1.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제12대 인종) - 이질 증세와 주다례
폐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서른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백돌아! 백돌아!
홀로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존하겠소
문제의 '주다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2.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제14대 선조) - 중풍과 찹쌀떡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주상의 뜻
어젯밤엔 편히 잤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문제의 찹쌀밥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사실처럼 굳어진 독살설

3.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소현세자) - 학질과 의관 이형익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볼모로 가는 두 형제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부정父情 아닌 부정否定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아담 샬과의 만남
비운의 귀국길
인조에게 쏠린 몇 가지 의혹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세자 일가의 비극
조선의 좌절, 세자의 좌절

4. 사라진 북벌의 꿈(제17대 효종) - 종기와 어의 신가귀의 산침
소현세자의 유산
용상에 가려진 효종의 아킬레스건
모든 것은 북벌로
효종의 딜레마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손을 떠는 어의 신가귀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5. 예송시대에 가려진 죽음(제18대 현종) - 복통과 뜸 치료
효종의 모후 자의대비과 입어야 할 복제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4가지 이유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예론을 금하노라
며느리상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의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6. 이복형제의 비극(제20대 경종) -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아이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두 모자의 운명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왕세제를 책봉하소서
경종의 진심
목호룡의 고변
적발하여 정법하라
게장, 생강 그리고 인삼차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

7. 개혁군주의 좌절(제22대 정조) - 홧병과 연훈방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3대 모역 사건
규장각과 장용영 그리고 화성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아서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훈방 처방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정순왕후의 세상

8.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제26대 고종) - 해외 망명 계획과 식혜
홍선군의 아들 명복
고종과 일본의 악연
국내의 혼란과 일본의 내정간섭
일본의 병탄과 고종의 대응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고종의 해외 망명 작전
마지막 군주의 최후
고종이 해외로 망명했다면

조선엔 왜 독살설이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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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누가, 왜 조선의 왕들을 독살했나"

제12대 인종(1515-1545), 제14대 선조(1552-1608), 소현세자(1612-1645), 제17대 효종(1619-1659), 제18대 현종(1641-1674), 제20대 경종(1688-1724), 제22대 정조(1752-1800), 제26대 고종(1852-1919).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왕조에서 독살설에 휘말렸던 임금은 무려 8명이나 된다. 조선왕조가 배출한 왕이 27명인 것을 감안하면 조선은 지구상의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던 왕조였다.


누가, 왜 왕들을 죽였나.

실제로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에겐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는 꼭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했고,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독살설은 또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집중돼 있다.
왜 그럴까?

<사도세자의 고백>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등 숱한 대중적 역사서로 인기몰이를 한 바 있는 이덕일 숭실대 교수는 ''누가 왕을 죽였는가''의 개정증보판으로 내놓은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에서 흥미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 망했어야 할 조선왕조의 기형적인 정치행태 ''독살''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우선 역사가 ''너무'' 장구했다. 세계 역사상 대개의 왕조는 200~300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는데, 조선은 쇠퇴기ㆍ멸망기에 접어든 뒤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라는 것이다.

무릇 한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에서 시련을 극복 못하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야 하는데, 유독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돼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살아 있었다.

이덕일 교수는 조선왕조의 쇠퇴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본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일본의 침략에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을 두고 혼자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부터 조선의 사회체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지배 계급은 군림의 이유를 상실했다는 설명이다. 백성들이 국왕인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지른 행위는 사대부→일반백성→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제 자체를 부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는 사대부들의 권력 획득 방식 ''독살''

개국 초 조선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가리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 국가였다. 그러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포 납부로 군역 면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1488-1544)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포 납부로 군인 고용)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병역의무가 면제됐다.

저자는 "개국 후 200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미 생명 사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고 평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고, ''국왕 독살설''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중 하나다. 독살설이 유독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부터 본격적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약한 왕권(王權)과 명분 없는 신권(臣權)의 합작 ''독살''
 
조선 후기 들어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왕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닌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 신하들은 왕을 적당(敵黨)의 일원으로 봤다.

저자는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로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며 "오히려 끊임없이 신하들의 견제를 받는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임금은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으며, 신하들은 당론에 따라 얼마든지 특정 임금을 배척했다. 신하의 임금 선택을 ''택군(擇君)''이라고 하는데 국왕 독살설이야말로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의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반정(反正)이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 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저자는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독살"이라며 "독살설이야말로 왕조의 말기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 이후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프레시안 2005.07.29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이제서야 소감을 쓴다. 남들처럼 근사한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글솜씨도 없고 길게 쓰는 재주는 더더욱 없어서 미루고 미뤘는데 요즘 MBC 드라마 '이산 (정조)'를 보면서 그때 느꼈던 흥분을 다시 느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책장을 넘기면서 숨이 가쁠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서를 좋아해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시기에 마침 저 책을 읽은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조선왕 독살사건'이랑 '누가 왕을 죽였는가', 둘이 다른 책인 줄 알고 두 권을 다 골랐었는데 알고 보니 전자는 개정판이었다. 처음에 '누가 왕을 죽였는가'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그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좀 점잖게 고쳐서 재판했다.

특히 내가 흥분했던 부분은 인종, 경종, 정조 이야기다. 책 읽기 전부터도 조선의 왕 중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책 읽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숨을 씩씩 몰아쉬곤 했다. - 난 지금도 사극을 보거나, 인수대비나, 문정왕후, 선조, 인조, 정순왕후, 망할 놈의 노론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른다. 몇백년이나 된 일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화를 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ㅋ

불쌍한 정조대왕님.ㅜㅜ 
인생 참 험난하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죽었고, 외할아버지란 사람은 역적들이랑 짜고 사위랑 손자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고, 친할아버지 영조는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맨날 천날 충성심을 시험하질 않나...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의복을 갖추고 잠자리에 들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루 4시간 이상을 잔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을 잇는 천재군주, 만능군주,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대왕께서 그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 역사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ㅜㅜ

정조 사망시에 아니 정조 대왕 승하시에 그 옆에 정순왕후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책을 100% 믿기도 어렵지만 정순왕후 같은 여자면 능히 정조를 독살하고 남았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영조가 정조를 꽤나 아낀 걸로 나오는데... 만약 진짜 드라마 '이산' 같았다면 영조도 참 불쌍한 왕이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뒤늦게 후회를 하니 영조는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오죽 참담했으랴.


이 책은 조선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더욱 즐길 수 있다. 어릴 때 인상깊게 읽었던 왕후 간택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순왕후-_-;;는 알수록 망할 X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것이다.

아..  혈압올라.ㅠ 글쓰다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지네..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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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당론
1575 년(선조8)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림세력들이 이른바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건이다.
이는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의 추천권을 놓고 벌인 싸움인데, 이 때문에 일제 시대 이래 당쟁의 근본 원인이 개인적 감정 싸움이라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왕실 외척이지만 사람들을 보호한 심의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선배 정치인과, 왕실 외척 지위를 이용한 심의겸의 정치적 비리를 용서할 수 없다는 후배 정치인의 대립이었다.


기축옥사
1589 년(선조22)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통 정여립 옥사, 또는 정여립 반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다.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데도 정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동인 중에서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전라도 지역 서경덕, 조식 학파의 수많은 인물들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이후 심각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정여립이 이씨왕조가 정씨왕조로 바뀐다는 정감록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중반란이라는 설, 선조 임금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일어나게 된 사건이라는 설 등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예송논쟁
왕실에 적용할 상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논쟁으로서, 1659년(현종 즉위년) 논쟁과 1674년(현종 15) 논쟁 두 번이 있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효종과 효종왕비의 상사 때, 어머니 자의대비가 큰아들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둘째 아들 이하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였다. 이는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파견된 분조에서 사실상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는 소군주로서 권한을 행사했지만, 국내에 돌아온 이후 의문 속에 죽음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갑인 복제논쟁은 결국 숙종 즉위년부터 남인 주도 정권을 출범시켰다.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였다. 효종은 아시다시피 인조의 둘째 아들(봉림대군)로 적통이 아닙니다.(적장자는 소현세자) 이 효종이 승하하였는데 문제는 당시 효종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상복을 언제까지 입고 있어야 하는 지가 관건이었다. 서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므로 1년간 입기(기년설)를, 남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지만 왕이므로 3년간 입기(3년설)를 주장하였는데 결국 서인의 1년설이 인정받았다.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 1674년):
효종비인 인선대비가 승하하자 역시 조대비 복제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였다. 서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었기에 그 비인 인선대비 역시 적통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6개월간 상복 입기를 주장(대공설)하였다. 그에 반해 남인은 왕비의 승하이므로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기년설)하였는데 이때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이 때까지만 하여도 서인과 남인은 서로가 정책을 겨루는 붕당정치로 본질을 흐리지 않고 잘 흘러갔다.


경신환국, 경신대출척(1680년):
1680 년(숙종6),  갑인예송 이후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남인 일당정권이 서인에 의해 대규모로 숙청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급격히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 정권교체는 남인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위한 새로운 군대인 체부를 설치함으로써, 당시 숙종의 신임을 받던 서인계 외척 김석주의 군사권을 약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부터는 서로 상대당을 제거하였으며 붕당정치의 본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서인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남인 허견과 왕족 복선군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숙종에 고하여 남인 세력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서인은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분열되여 4색 당파(북인,남인,노론,소론)를 이루었다.


임술삼고변
1682 년(숙종8)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다. 훗날 노론이 된 왕실 외척 김석주, 이사명, 김익훈 등이 밀정을 파견하여 남인들에게 역모를 권유한 후 이를 밀고하는 등의 정탐정치를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물의를 야기시킨 사건이다. 당시 서인 영수 송시열은 이를 자신이 스승의 후손들을 잘못 교육시킨 탓이라 하여 결국 정탐정치를 자행한 이들을 변호하려 하였고, 이를 서인 소장파 인물들이 탄핵하고 윤증 학파가 이에 합세함으로써 결국 서인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반대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기사환국
1689 년(숙종15) 서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남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장희빈이 아들을 (후일의 경종) 낳자, 곧바로 왕위계승권자로 정하려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함으로써 일어났다. 이로써 서인 영수 송시열은 사사당하였고, 서인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되었으며, 장희빈은 왕후에 봉해졌다.

숙종이 희빈 장씨의 소생(연령군)을 세자로 책봉하려하자 서인이 반대하였는데 이에 숙종은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을 재등용하였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하는데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사사되고 많은 서인들이 유배되었다. 숙종은 그 후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렸는데 이에 반대하며 상소를 올린 많은 서인을 숙청시켰다.


갑술환국, 갑술환사
1694 년(숙종20)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정권교체는 서인계와 남인계 일부 집단의 정탐정치 시도에서 발단되었다.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소론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폐비사건을 뉘우치고 있던 숙종은 이 일을 기화로 남인을 숙청하고 소론을 등용하였는데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한다. 폐비되었던 인현왕후가 다시 중전으로 복위되었고, 반면에 장희빈은 왕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기사환국 때 사사된 송시열 등이 복권되었으며 남인은 이 사건 이후 중앙정계로 진출하지 못하였다.

또, 인현왕후가 죽은 후 희빈 장씨의 숙소에서 저주하는 물건이 나오자 숙종은 희빈 장씨를 사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소론은 다음 왕의 어머니이므로 사사는 안된다고 주장하였고 노론은 사사됨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숙종은 노론의 의견을 쫓아 장희빈을 사사하고 노론을 중용하기 시작하였는 데 이것이 후에 또 다른 사건을 낳아 이후 왕세자(경종)의 보호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병신처분

1716 년(숙종40) 이른바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에서, 송시열이 옳다고 판정한 숙종의 처분이다. 갑술환국 이후 대체로 소론이 주도하던 정권이 1710년(경인환국) 이후 노, 소 대립 국면이 되었다가, 이 결정으로 노론 일당정권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윤증의 스승 송시열이 이미 죽은 윤증의 아버지를 욕함으로써,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옳으냐, 그래도 스승을 따르는 것이 옳으냐 하는 난해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때문에 이후 현제와 친척, 같은 문하생 사이에서도 당색이 갈라질 정도로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시켰다.


신임옥사
1721년(경종1) 12월에 노론 주도 정권이 소론 일당정권으로 급변한 신축환국과, 다음해 목호룡이 이른 바 노론 및 연잉군(후일 영조) 측근 인물들의 경종 시해음모를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임인옥사, 이 두 사건을 합쳐서 지칭하는 것이다.

신축환국

신축환국은 노론당이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 직후, 다시 대리청정을 청함으로써 노론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다가, 소론과 남인의 공격으로 실패함으로써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다. 숙종이 죽고 경종이 등극하였으나 몸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후사를 잇지 못하였는데 노론은 당시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후에 영조)을 세제로 삼아 만일을 대비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론은 왕이 젊고 건강이야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라 하며 노론의 불충을 따져 탄핵한다.

임인옥사
이 와중에 목호룡의 고변사건이 터졌는데 목호룡은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고 왕세제인 연잉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고 주장한다. 목호룡의 이 고변은 소론에서 사주를 받아서 한 일이 후에 드러났으나 당시 이 사건으로 노론은 많은 인물들이 화를 입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노론의 4대신으로 전 영의정 김창집, 전 좌의정 이이명, 전 좌의정 이건명, 전 중추부판사 조태채로 이들이 모두 사사됨으로써 노론의 세력이 많이 축소되었다. 노론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을 올바른 노론 붕당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을사환국
1725년(영조1) 2월 영조 즉위 직후 소론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노론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자신을 적극 지지하는 노론당을 통하여 강력한 군주권을 세움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영조의 이도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정미환국
1727 년(영조3) 7월 노론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소론이 주도하는 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변화는 소론을 일망타진하려는 데 급급한 노론당을 퇴진시키고, 그대신 온건한 탕평파 정치집단을 키움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영조의 의도 때문에 일어났다.


무신란, 이인좌의 난
1728 년(영조4) 3월에 일어난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대규모 반란이다.
실제 반란군을 지도하여 청주와 거창을 점령한 남인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이인좌의 난 또는 정희량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 반란은 당시 임금인 영조가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전국에 퍼져 소론과 남인의 급진파가 제휴함으로써 일어났다. 그러나 전국적인 규모의 병란으로 발전한 데는 중간층 및 하층민의 적극적인 참여, 전국적 장시망의 이용 같은 새로운 요소들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영조가 등극하자 소론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이에 당시 소론의 과격파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의문사와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다. 정치적으로 배제된 남인 세력 일부가 참여한 이 난은 후에 영조가 노론만을 중용하게 된 원인이 된다.

-> 조선 후기 당쟁은 왕(숙종)에 의한 계획적인 측면도 있었다. 숙종은 서인과 남인 간의 대결을 통해 왕권 확립을 노리기도 하였으나 이런 잦은 당쟁은 결국 조선의 정치가 보수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서로간에 불신만을 간직하고 비방과 폄하만을 일삼음으로써 당시 사회적 변화를 정치가 못 따라간 것이다.


기유대처분
1729 (영조5) 8월 본격적인 탕평정치가 시작됨을 알린 국왕의 대처분이다. 1728년 무신란이 평정된 이후, 임인년 옥사로 죽은 노론 4대신 중에서 자식이 연루되지 않은 이건명과 조태채의 무죄를 선언하고, 노론,소론,남인 붕당 모두에 충신과 역적이 다 있으므로, 이제는 붕당을 타파하고 각 당파 안의 인재를 함께 쓰겠다고 한 선언이다.


경신처분
1740 년(영조16) 1월에 임인년 옥사로 죽은 노론 4대신 모두는 영조의 왕위승계를 위해 노력했을 뿐이므로 아무 죄도 없다고 결정한 영조 임금의 처분을 말한다. 이와 동시에 4색당파를 모두 등용하는 대탕평이 제창되었고, 사림정치의 상징인 청요직이 혁파되었으며, 세 군영에 의한 도성 수비체제가 완성되는 등 국가 관료체제가 개혁되었다. 이후 김재로, 송인명, 조현명의 탕평파 3상정권이 장기간 유지되는 등, 정국이 안정되었다.


을해옥사
1755 년(영조31) 2월에서 5월까지 당시 영조를 비난한 나주의 괘서사건과 뒤이은 심정연의 과거답안지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소론계 명문 가문과 학자들을 일망타진한 정치적 사건을 말한다.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정치적 사건이 대개 그렇듯이 나주 괘서 사건도 실제 작성자 등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의문투성인데다가, 이를 계기로 지나치게 많은 소론 인물들이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정치적 조작의 가능성도 많다고 지적된다.


임오화변
1762 (영조38) 5월 당시 대리청정중이던 왕세자를 아버지 영조가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을 말한다. 이를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임오화변이라고 호칭하였다. 사건의 원인은 사도세자의 울화병(정신병)에 있었다고 하지만, 직접적인 발단은 석 달 동안 허락 없이 평안도를 여행한 데 있었다. 이 사건은 부자간 갈등의 비극적인 결말 때문에 특히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실제 내막은 아주 복잡하다.


신해통공
1791 년(정조15) 봄, 몇 달 전에 출범한 남인 채제공 독상 정권을 위기에 빠뜨린 서울의 물가폭등과 생필품 품귀 사태 해결을 위해, 채제공이 건의하고 정조가 강력하게 후원하여 밀어붙인 경제구조 개혁조치를 말한다. 당시 국가기관에 일정한 경비를 납부하는 대신 특정 상품의 독점판매권을 가졌던 시전의 특권을 폐지하여 동등하게 판매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서울에서 넓게는 지주들, 좁게는 기득권층의 생산물을 취급하는 대가로 독점판매권을 누리던 시전상인들의 특권이 박탈되고, 농민들의 생산물을 취급해온 도시와 그 주변 소상인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상품유통구조의 변혁이 일어났다.


영남만인소
1792 년(정조16) 4월 사도세자 사망 30주기를 맞아서 영남 지방 사대부 만 여 명이 연명하여 올린 상소문이다. 상소문 하나에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사례는 조선왕조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내용은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충성했을 뿐 실은 아무 죄도 없었음을 선포함으로써, 정조의 군주권을 강화하여 강력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문체반정운동
1792 년(정조16) 10월, 11월에 청나라 패관소품의 경박한 문체를 쓴 노론계 신진기예 남공철, 심상규, 김조순과 소론계 이상황, 그리고 그들의 스승이자 북학파의 지도자 박지원을 지목하여 견책을 내리고, 올바르고 순수한 문체를 공부하여 올리도록 함으로써, 전체 사대부의 문풍을 쇄신하려 한 운동을 말한다. 정치적으로는 노론들이 공격했던 남인들의 서양학 운동 역시 청나라 패관소품의 영향이니, 올바른 학문인 정학이라는 입장에서는 노론과 남인 학문 모두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상호 비방과 공격을 중지시킨 이른바 이열치열의 통치술에 해당한다.


금등사건
1793 년(정조17) 5월
수원 유수로 있던 채제공이 영의정에 임명된 후 '사도세자의 원수를 없애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일어난 시파와 벽파의 격렬한 정쟁을 해소하기 위해, 정조가 신하들에게 보여준 영조의 친필 쪽지를 금등이라고 한다. 영조가 자신을 위하여 죽은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을 후회하는 내용으로서, 영조가 사도세자의 법적 어머니인 정성왕후 위패 아래에 숨겨둔 것이다. 이를 알고 있던 사람은 영조, 정조, 채제공 3인뿐이었다 한다. 이 금등이 공개됨으로써 시파의 정치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지만, 이후 정국은 시파와 벽파의 격렬한 정쟁 상황으로 돌입하였다.


오회연교
1800 년(정조24) 5월 회일에 탕평정치 추진을 위한 자신의 통치술을 신하들에게 자세하게 밝힌 정조의 교시를 말한다. 당시 정조는 정치원칙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영조가 옳다고 처분한 노론의 정치원칙도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또한 다음번 재상은 노론이 기피하는 남인 강경파 중에서 나올 것임도 암시하였다. 그런데 회일은 곧 달이 없는 캄캄한 날이고, 그후 이십 여 일만에 군주인 정조가 사망했으므로, 이를 임금의 죽음과 연관시켜 보통 오회연교라고 한다.


신유사옥
1801 년(순조1) 천주교 신봉자 처단을 구실로 정조가 키워놓은 남인 청류당 인물들을 정계에서 철저하게 제거한 정변을 말한다. 당시 노론 강경파 심환지와 정순왕대비의 인척 김관주 등이 주도한 노론 벽파정권은 천주교 신자들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사도세자의 후손, 혜경궁 홍씨의 친척, 정조의 측근 신하인 노론 시파, 북학파들까지 다수 제거하였다.


을해당론 ~ 신임옥사 까지는 붕당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이고
을사환국 ~ 오회연교 까지는 영 · 정조시대의 주요 정치 사건이며
신유사옥은 정조 사후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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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당쟁의 원인을 알고자 한다면 우선 당쟁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당쟁은 조선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익히 들어온 대로, 나라를 쇠망케 한 망국병이기만 했을까?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쓴 <조선시대의 당쟁사>를 보면 조선 중기 이후 정치의 중심이었던 당쟁을 통사적으로 서술해 이런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고있습니다.

조선시대 당쟁사. 1 상세보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펴냄
사림정치와 당쟁의 생생한 기록 <조선시대 당쟁사>는 조선시대의 당쟁을 소개하는 책이다. 광복 이후 우리의 정치사는 전근대적인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잔재를 극복하고 우리 시대에 맞는 정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앞선 조선시대 사림정치의 산물인 당쟁의 속성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당쟁이란 붕당이 갈려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림정치는 세조연간 사림파의 등용에서 기원한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는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젊고 야심찬 사림을 정계에 불러들였다. 주자학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파는 도덕적 수양을 앞세우며 훈구파를 공격했다. 이들의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이 사림파였다. 그 사이 왕권은 약해져 신권에 밀리게 됐다. 그러나 대적할 세력이 없어진 사림은 곧 자기분열해 붕당을 낳고 이들 사이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이었다.”

최초의 붕당은 선조 8년에 관직을 놓고 갈라진 동인과 서인이었다.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 다투었다.

 “당쟁이란 근본이 권력 투쟁이었기 때문에” 자기 당에 유리한 명분·의리를 억지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효종이 죽었을 때 벌어진 예송논쟁이다. 인조의 후취 왕비인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가지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예송 논쟁은 이론을 앞세운 전형적인 권력투쟁이었다.”

예송 논쟁으로 당쟁의 골이 더욱 깊어진 붕당들은 이후 피를 부르는 싸움을 계속하다 “체제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기까지 했다.”  이때 시행된 것이 영· 정조 연간의 탕평책이었다. 그러나 노론/소론, 노론벽파/노론시파의 정쟁을 다독이려던 탕평책은 외척세도정치의 길을 열어주고 말았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순조 이후 정치는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에 완전히 장악됐다.

지은이는 이 시기를 이미 당쟁이 끝나고 일종의 `일당독재'가 행해진 기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무렵 벌어진 수많은 실정과 탐학을 당쟁 그 자체의 산물로 보아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당쟁이 외척세도정치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그 결과만 보고 당쟁 역사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이성무씨의 <조선시대의 당쟁사>中

우선 왜 당파가 나누어졌는가!


출처: 이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을 참조하여 제가 아는 사실과 함께 편집한 것입니다. (약 5년 전에 구한 거라 정확한 출처는 기억이 안나네요.)

동인서인 으로의 붕당
처음으로 당파가 갈린 것은 조식과 퇴계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 동인, 성흔과 율곡 이이를 추종하는 기호학파 서인이었습니다. 동인과 서인의 대결에서 첫 승리자는 동인이었다. 후궁의 손자로서 왕위에 오른 선조는 후궁에서는 아들을 많이 얻었지만 정비인 의인왕후에게서는 딸조차도 얻지 못했다. 서자 컴플렉스가 있던 선조로서는(후궁의 손자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비인 의인왕후에게서 아들을 얻을 때까지 세자 책봉을 미루고 싶은 것이 속마음이었는데, 동인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는 서인의 거두인 정철을 속여 정철로 하여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도록 하여 선조의 진노를 사게 하였다. 이 때 서인들은 쫓겨나고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서인들에 대해 유혈 숙청을 감행하였다.

북인남인의 출현
유혈 숙청의 과정에서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게 된다. 서인들에 대해 사형을 주장하는 과격파들을 북인, 귀양으로 그치자는 온건파들을 남인이라 했다. 북인은 조식의 문하이고 남인은 이황의 문하였다. 서인이 실각한 상태에서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과 남인이 다시 정쟁을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한 남인이 패배하고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대북소북
이렇게 북인이 정권을 잡은 후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는데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지지하던 소북은 광해군의 즉위와 함게 몰락하고 대북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 때 소북은 거의 죽음을 면치 못하고 서인과 남인은 재야세력으로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는데 대북세력은 소북세력뿐만 아니라 서인, 남인 세력을 차례로 제거해 나가기 시작하는 등 대북의 독주가 계속 되었다.

서인남인
그러다가 주로 서인들의 주도하에 인조반정이 이루어지게 되고, 대북은 몰락하게 된다.( 서인과 동인의 대결에서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들이 소북 대북 할 것 없이 모두 몰락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서인과 남인의 대결이 되는 것인데요, 서로에 대한 끝없는 복수가 더욱 치열한 싸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용서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마지막 한 놈까지 적의 씨를 말려죽이자!는 생각으로 정치를 했으니...)

이로부터 한동안 인조의 중립정책으로 인해 서인과 남인은 서로 견제세력으로서 한쪽의 독주를 막으며 정치를 하는 붕당정치의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인조의 둘째아들인 효종이 죽으면서 남인과 서인간에 치열한 예송논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원인은 이러하다.

인조에게는 인렬왕후 한씨라는 왕후가 있었다. 이 왕후는 인조와의 사이에 4명의 아들을 두게 되는데 그 첫째 아들이 소현세자이고 둘째 아들이 효종대왕이며 셋째아들이 인평대군, 넷째가 용성대군이다. 이 왕후는 병자호란이 나기 전에 승하하고 나이어린 장렬왕후가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입궁하게 된다. 소현세자는 청국에 볼모로 잡혀가서 서구의 선진문물을 접하며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흠모하게 된다. 청나라에 원한이 많았던 인조로써는 그런 소현세자가 못마땅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고 돌연 죽어버리는데, 아버지 인조로부터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많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고난 후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모두 귀향보내고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도 폐서인하여 죽여버린다.
그리고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소현세자의 상을 당해 이미 장자의 예로써(첫아들이 죽었을 경우 어머니가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다른 아들들과 다른것이 예법이라고 합니다.) 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다시 효종이 죽었을 때 장렬왕후의 상복입는 기간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서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장렬왕후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같은 예로써 3년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현종이 아직 어릴 때였으니 아무래도 목소리 큰 놈이 이겼겠지요?  이 때만 해도 현종은 예법을 잘 몰랐으므로 서인의 주장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조반정은 당당한 것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왕실이 서인세력에 일종의 빚을 지게 된 셈이었거든요...) 결국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효종의 상을 당해 차남의 예인 1년상을 치르게 된다.

그러다가 8년여 후 다시 효종의 왕후인 인선왕후가 승하하면서 또다시 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된다. 서인과 남인의 싸움은 똑같다. 서인은 인선왕후가 둘째며느리이므로 9개월의 대공설을 내세웠고, 남인은 둘째며느리이긴 하지만 중전을 지냈으므로 큰며느리와 다름이 없다며 1년의 기년설을 내세운다. 이 때는 현종도 많이 장성하여 기반이 확실한 상황이었으므로 자기의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도 둘째로써의 낮은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인의 주장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된다.

그런데 현종이 죽고 숙종이 왕위에 등극한 후 서인측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들이 옳았다고 피력하다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면서 서인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제부터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당파싸움이 계속되는 숙종시대이다. 남인은 이 시기에 망하게 되는 것이다.

숙종은 즉위 직후 아버지인 현종의 뜻에 따라 남인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현종비)는 서인의 딸이었다. 명성왕후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는 예송논쟁에서 일시적으로 남인의 편을 들어 조정의 요직에 기용되어 있었으나 서인측 사람이다.

남인의 영수 허적이 권세를 남용하는 것에 실망을 한 숙종이 훈련대장직을 서인인 김석주에게 넘기면서 남인이 거의 차지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겨주게 된다. 서인들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숙종의 종조부)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숙종의 당숙들 이른바 3복)이 허적의 서자 허견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고 고변하여 남인들을 실각시킨다. 이것이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는 사건이다.

그러다 남인편인 후궁 장씨의 소생 아들로 원자를 삼는 문제로 서인들이 반발하자
(직접적인 원인은 장희빈의 모친을 가마에서 끌어내린 사건입니다.) 숙종은 이를 서인의 딸인 인현왕후에게 원인이 있다고 죄를 물어 폐출하고 서인들을 대거 실각시키며 장씨를 왕후로 올리고 그 아들을 세자로 삼는다.

또 장희빈과 그 아들을 지지하는 남인세력을 다시 집권하게 하며,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그러나 숙종과 장희빈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들의 불화는 정국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숙종과 장희빈의 사이가 벌어지고 또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서인세력은 민씨 복위 운동을 펼친다. 이를 알게 된 남인세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복위운동의 주모자들을 심문하여 사실을 파악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그런데 숙종은 오히려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는 한편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민씨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이 사건으로 남인들은 대거 축출되고.. 그야말로 망하게 되었다
.
(이로써 서인과 대립했던 동인계열은 싸그리 망해버렸습니다. 동인도 그닥 잘한 건 없지만 조선 후기를 깡그리 망친 서인-노론-벽파가 개인적으로 훨씬 더 밉네요. )


노론소론
경종 사망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후일 경종)를 지지하는 세력은 소론, 세자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편에 섰던 숙빈 최씨(최무수리)의 아들인 연잉군(후일 영조)을 지지하는 세력은 노론이 되는 것이다. 세자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숙종이 죽고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얻어 노론을 축출한다.

이 과정에서 소론세력은 노론이 지지했던 연잉군마저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하지만, 효종이래 외아들로만 이어져 내려온 왕실에서 효종의 혈손이라곤 경종 자신과 연잉군 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경종은 동생인 연잉군을 살려준다.
하지만, 소론세력은 어떻게든 노론과 연잉군을 제거하려 하였고, 노론과 연잉군의 입장에서는 서둘러 왕위에 오르지 않고서는 언제 어떻게 죽임을 당하게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돌연 경종이 사망한다. 그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등극하게 되는데 이사람이 바로 영조대왕이다. 영조는 죽을 때까지 형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게 된다.

영조시대 최고의 참극인 사도세자 아사사건의 경우도 이러한 당쟁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조의 입장에서는 분명 소론은 역적이요 노론은 충신이겠으나 사도세자의 시각은 달랐다.

소론세력은 왕인 경종을 지키려 했던 세력이고 노론세력은 왕을 위협했던 세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장차 보위를 이어나갈 세자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고, 영조로써도 수긍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영조는 자신의 정치 기반이었던 노론의 입장에 따라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게 된다.

시파 벽파
이와 함께 소론세력은 영구히 몰락하고 노론은 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뉘게 된다. 시파는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세력이고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대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입장을 가진 세력이었다.

영조가 승하한 이후 왕위를 이은 정조는 이후 시파와 벽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하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정조 이후 어린 왕이 연이어 등극하면서 정권은 당쟁에 의한 것에서 한 집안의 세도에 의해(외척들) 좌지우지 되게 되고 그 유명한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당쟁의 직접적 원인은

당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선조 때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이다. 이조전랑이란 직책은 비록 그 직위는 낮았으나 관리의 임명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래서 그 직책의 임면은 이조판서도 간여를 하지 못하였고 반드시 그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김효원이 그 자리에 추천을 받았는데, 이조참의로 있었던 심의겸이 그를 권력에 아부하는 자라고 하여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김효원의 임기가 다 되어 후임자를 물색할 때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물망에 올랐으나 김효원이 이를 거절하여 서로간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관리와 유생들은 모두 양쪽의 어느 하나에 붙어서 대립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인 건천동에 있다고 하여 동인,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동에 있다고 하여 서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동서분당이 생긴 초기에는 주로 동인 세력이 커서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지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이를 4색 당파라 부르게 되었다.


회니논쟁

당쟁의 의미


"조선시대의 폐단중의 하나가 당쟁이다."

이것이 진실일까요? 물론 당쟁때문에 조선사회가 어려움을 격은것도 사실이지만 그 폐단만을 부각시킨것은 일본인들이 일제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 일제시대때 부각시킨 것입니다.

"조선은 편을갈라 매일 싸우기만한다. 그래서 조선이란 나라는 멸망할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일본이 조선을 바른길로 인도하기위해 조선을 다스려야 한다."

이렇게 조선 백성들을 주눅들게하고 그들의 식민 정책을 타당화 한면이 더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당쟁이 처음에는 학문적인것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권 탈취의 용도로 변질 된것은 사실이지만 당쟁의 장,단점을 확실히 구분하여 우리가 바로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이 글은 몇 년 전에 미니홈피에서 지식인과 제가 보고 있던 책을 참조하여 편집한 것이라서 정확한 원본 출처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문제되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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