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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붕당(당쟁)의 역사

출처:
디시인싸이드 이산갤러리

수 차례의 사화를 견디고 훈구파의 탄압을 이겨낸 사림 세력들은 사림 출신 스승 밑에서 공부한 선조가 즉위하면서부터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인재를 감당하지 못하는 한정된 관직의 수는 필연적으로 당파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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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인과 서인이 주도한 붕당 성립기

◎동인 VS 서인

붕당의 효시라 할 동인과 서인의 분열은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 즉 을해당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을해당론 ☞ 왕실 외척이 관료추천권이 있는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느냐는 논쟁

1575년(선조8)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림세력들이 이른바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건이다. 이는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의 추천권을 놓고 벌인 싸움인데, 이 때문에 일제 시대 이래 당쟁의 근본 원인이 개인적 감정 싸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왕실 외척이지만 사람들을 보호한 심의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선배 정치인과, 왕실 외척 지위를 이용한 심의겸의 정치적 비리를 용서할 수 없다는 후배 정치인의 대립이었다.


분파 후 정여립 모반사건의 결과 기축옥사로 인해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지만 3년후 정철의 건저의 사건으로 다시 동인(남인,북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기축옥사

1589년(선조22)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통 정여립 옥사, 또는 정여립 반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다.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데도 정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동인 중에서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전라도 지역 서경덕, 조식 학파의 수많은 인물들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이후 심각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정여립이 이씨왕조가 정씨왕조로 바뀐다는 정감록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중반란이라는 설, 선조 임금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일어나게 된 사건이라는 설 등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남인 VS 북인

남인과 북인의 분립은 동인과 서인의 분립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기축옥사로 인해 분립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는 기축옥사 당시 서인(정철)이 정여립 사건의 처리를 주도하면서 북인계 인물을 무고하게 죽였는데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남인계 인물들이 제대로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당이 발생했다고 보고있다. 또한 그로부터 3년 뒤인 정철의 건저의 사건 때 서인의 처리 문제로 분당이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 남인의 중심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이후 화의를 주장하여 실각되자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고 남인은 한동안 몸을 사리게 된다.

◎대북 VS 소북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갈라져 대립한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살해하는 등 소북파를 몰락시킨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서인은 정권을 장악하고 대북파를 몰락시켜 다시는 정치의 무대에 설 수 없게 만들었다. 인조반정 이후 북인은 완전히 와해되어버린 것이다.


2. 서인과 남인의 공존, 붕당 공존기

서인과 남인의 50년에 걸친 붕당정치 시대 - 정치적 평화를 유지한 제도개혁의 시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계 정치가들은 인망이 높은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추대해 사회안정을 도모하는 등 남인을 정치적 동반자로 인정하고, 남인들의 도움으로 주요 정치적 과업을 시행하였다. 인조년간 정치사 연구결과를 보면, 주요 관료집단에서 서인과 남인의 비율은 6:4정도였고 서인과 남인 학통을 이끈 산림들도 거의 대등하게 등용되었다. 이후 인조, 효종, 현종에 이르기까지도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붕당간의 조화로운 공존이 계속되었다. 서인이 주도적인 위치를 지키는 가운데 남인이 이를 견제하는 양당체제, 즉 정치적 평화시대였던 것이다.


3. 일진일퇴의 환국정치, 일당전제기

일당전제기는 1674년 왕실에서 공복을 입는 기간 문제로 일어난 갑인년 복제논쟁을 군주권 강화에 이용한 숙종 즉위년부터, 1729년 영조가 일당전제 정치를 끝장내겠다고 선언한 기유대처분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보통 일진일퇴 정국, 환국에 의한 일당독재, 역모조작과 정탐정치 등으로 표현되는 격렬한 당파싸움의 시기다. 전후 여덟 차례 정도 일진일퇴하는 환국정치에 의해 일당독재가 반복되었다.

◎서인 VS 남인

서인과 남인의 공존은 평화롭기도 했지만 불안정하기도 했다. 그 불안정함이 '폭발'한 것이 바로 예송 논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예송논쟁 ☞ 서인 : 효종은 차남이야. 무조건 1년상! / 남인 : 차남이지만 왕됐으니 장남 대접 받아야 되는거 아니야? 당연히 3년상이지.

왕실에 적용할 상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논쟁으로서, 1659년(현종 즉위년) 논쟁과 1674년(현종 15) 논쟁 두 번이 있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효종과 효종왕비의 상사 때, 어머니 자의대비가 큰아들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둘째 아들 이하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였다. 이는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파견된 분조에서 사실상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는 소군주로서 권한을 행사했지만, 국내에 돌아온 이후 의문 속에 죽음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2차 예송논쟁은 결국 숙종 즉위년부터 남인 주도 정권을 출범시켰다.

예송논쟁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1차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정권에 변동이 없었으나, 2차 논쟁에서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때, 남인은 서인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강경파 청남과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 탁남으로 분열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경신대출척, 즉 경신환국으로 집권한지 몇년만에 쫓겨나게 된다.


■ 경신환국
1680년(숙종6)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남인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위한 새로운 군대인 체부를 설치함으로써, 당시 숙종의 신임을 받던 서인계 외척 김석주의 군사권을 약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노론 VS 소론 VS 남인


그러던 중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리게 되는데,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 바로 임술삼고변이다.

■ 임술삼고변

1682년(숙종8)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다. 훗날 노론이 된 왕실 외척 김석주, 이사명, 김익훈 등이 밀정을 파견하여 남인들에게 역모를 권유한 후 이를 밀고하는 등의 정탐정치를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물의를 야기시킨 사건이다. 당시 서인 영수 송시열은 이를 자신이 스승의 후손들을 잘못 교육시킨 탓이라 하여 결국 정탐정치를 자행한 이들을 변호하려 하였고, 이를 서인 소장파 인물들이 탄핵하고 윤증 학파가 이에 합세함으로써 결국 서인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반대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서인이 분열 된 이후에도 환국은 계속 되는데,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재등용되는 기사환국 이후 왕에 의해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래서 갑술환국 이후로는 노론·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 기사환국

1689년(숙종15) 서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남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장희빈이 아들을 (후일의 경종) 낳자, 곧바로 왕위계승권자로 정하려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함으로써 일어났다. 이로써 서인 영수 송시열은 사사당하였고, 서인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되었으며, 장희빈은 왕후에 봉해졌다.

■ 갑술환국

1694년(숙종20)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정권교체는 서인계와 남인계 일부 집단의 정탐정치 시도에서 발단되었다. 이로써 인현왕후는 복위되었고, 반면에 장희빈은 왕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왕세자(경종)의 보호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그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옥사가 일어나 노론 대신들이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 신임옥사


1721년(경종1) 12월에 노론 주도 정권이 소론 일당정권으로 급변한 신축환국과, 다음해 목호룡이 이른 바 노론 및
연잉군(후일 영조) 측근 인물들의 경종 시해음모를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임인옥사, 이 두 사건을 합쳐서 지칭하는 것이다. 신축환국은 노론당이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 직후, 다시 대리청정을 청함으로써 노론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다가, 소론과 남인의 공격으로 실패함으로써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다. 임인옥사로 당시 노론 최고 지도자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4인이 모두 사형을 당하였으므로, 노론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을 올바른 노론 붕당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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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한맺힌 발언,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영조, 정조, 사도세자 책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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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이야기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이 글을 얼마 전에 발견해서 비공개하고 있다가 지금은 승복이님의 블로그가 아예 사라져 버린 관계로 공개처리했습니다.


이제는 원로 축에 끼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동시에 조선 시대 사극을 들고 오고, 김종학이 판타지 사극을, 정하연이 이방자 여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대극을, KBS에서는 <대조영> 의 후속작으로 <세종대왕> 을 제작할 준비를 마치면서 2007년 하반기와 2008년 상반기는 때 아닌 '사극' 열풍이 불어 닥칠 전망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방송됐던 사극들은 어떠한 인물들을 주로 다뤘을까. 재미로 알아보는 대한민국 사극의 단골 손님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후보 1.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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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극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흥행카드' 라고 한다면 단연 연산군이다.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고 고아와 마찬가지로 자라나며 삐뚤어지기 시작한 연산군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 주위를 둘러 싼 권력 암투와 2번에 걸친 사화, 요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폐륜 등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담아내며 사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갖췄다.  

1962년 영화 <연산군> 에서 신영균이 열연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 이 후로, TV판 '연산군' 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971년 TBC <사모곡> 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때 연산군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배우는 바로 우리에게 <사랑이 뭐길래><딸 부잣집> 등으로 친숙한 배우, 김세윤. 김세윤의 뒤를 이어서는 1985년 MBC <조선왕조 500년-설중매> 에서 임영규가 연기한 바 있고, 1987년에는 영화 <연산군> 에서 배우 이대근이, 1994년 KBS <한명회> 에서는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 이민우가 연산군을 맡아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1년 뒤인 1995년 KBS <장녹수> 에서는 유동근이, 1999년 KBS <왕과 비> 에서는 안재모가 각각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로 안방 극장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가장 최근에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는 영화배우 정진영으로 1000만 관객 돌파의 신화를 낳은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어머니를 잃고 광기 어린 영혼을 소유하게 된 연산군 역을 실감나게 연기해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는 누구일까.

시청률로만 따지고 보자면 <왕과 비> 의 안재모로 그 당시 최고 시청률이 44.3% 를 기록했을 정도. 녹록치 않은 경력을 지닌 연기파 채시라와의 연기대결은 <왕과 비> 의 사상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데 1등 공신이라 할 만하다.


후보 2. 장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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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하면 떠오르는 여자하면 당연히 장녹수다. 연하의 연산군에게 장녹수라는 존재는 아내이자, 첩이었고, 어머니였다. 연산군 시대의 개막과 함께 그를 파멸로 이끌고 결국은 자신까지 돌무더기 무덤 속으로 들어간 시대의 요부.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지금까지도 연산군과 함께 한국 사극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 '요부' 를 실감나게 그려 낸 인물은 누가 있을까. 1971년 <사모곡> 에서 김세윤과 호흡을 맞춘이는 이제 원로 배우 소리를 듣는 고은아이고, MBC <설중매> 에서는 '섹시배우' 이미숙이, 영화 <연산군> 에서는 강수연이 장녹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자타공인 최고의 장녹수는 KBS <장녹수> 의 박지영으로 유동근과의 연기 앙상블이 빛났을 뿐 아니라 장녹수가 살아 돌아온 듯 한 실감나는 연기력으로 대내외적인 찬사를 받았다.

19999년 <왕과 비> 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故 이혜련이 안재모와 호흡을 맞춰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고, 작년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배우 강성연이 '녹수' 역을 맡아 남성 중심의 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뽐내는 등 수많은 스타들이 장녹수라는 캐릭터를 거쳐갔다. 연산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본 것은 장녹수가 아니라 수근비였으나 여전히 장녹수라는 인물은 스타들이 탐을 내는, 연산군과 운명을 같이 한 '매력' 있는 '여성' 인 셈이다.


후보 3. 인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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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이 등장했으니 '인수대비' 가 없을 수 없다.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지만 '폐비 윤씨' 의 사사사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연산군과 인수대비는 조선 500년 역사 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폐륜으로 그 끝을 맺었다. 20대에 청상과부가 되어 잠저로 나온 뒤, 예종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밀어 올리고 훈구파와의 강력한 결탁으로 성종 시대를 안정을 추구했던 한 여걸의 죽음이 그토록 비참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이자 아픔이다.

우리에게 '소혜왕후' 라는 이름보다 '인수대비' 라는 이미지로 더욱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 이 캐릭터는 지금까지 수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거쳐갔다. 이제는 영원한 배우로 기억되는 황정순 선생을 비롯해 영화 <연산군> 에서는 중견배우 정혜선이, <설중매> 에서는 고두심, <장녹수> 에서는 반효정, <한명회> 에서는 김영란, <왕과 비> 에서는 채시라,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윤소정 등이 열연했다. 특이한 점은 정혜선이나 고두심, 채시라 등의 여배우들이 모두 20~3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역을 소화했다는 것.

인수대비의 파란만장한 삶을 20대부터 그려내려다 보니 비교적 젊은 배우를 기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테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으로 보자면 모두 자타공인 '연기파' 들이 이 역을 거쳐갔으니 인수대비야 말로 '연기파 제조기'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에게 지금까지도 소중한 교훈을 남기고 있는 모양이다.


후보 4.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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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최고의 간신이자 사육신과 대비되는 조롱의 대상이면서도 왕권이 약화되던 단종시대를 철인군상과 같은 의지로 뒤엎고 결국은 성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명신(名臣)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린 한명회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평가 되면서 그 역사적 명성을 달리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사육신 띄우기' 로 명성에 흠집을 냈던 한명회는 이제야 제 위치를 찾으며 역사적으로 받아 마땅한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이 유명한 칠삭동이를 맡은 배우들은 정진, 이덕화, 최종원 등. 특히 정진 같은 경우에는 70~80년대 문화를 향유했던 사람들에게 최고의 '한명회' 로 기억되는 인물로 지금 보아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다. 이덕화는 자타공인 가장 유명한 한명회로 회자되는 배우로서 신봉승이 쓰고 그가 타이틀롤을 맡았던 드라마 <한명회> 는 여전히 KBS 가 자랑하는 사극 중 하나로 남아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안목도 달라진다. 미래의 한명회는 우리에게 또 어떤 인물로 기억 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공과' 를 둘째치고서라도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한명회' 라는 이름이 미친 거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리라.


후보 5.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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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여자가 아닌 다음에야 후세에 그 이름이 남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천한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일진대 오직 단 한사람, 명월 '황진이' 는 그러한 평가를 거부한다. 양반 출신의 여성으로 태어나 기생의 길을 택한 여자.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 로 불리우는 조선 최고의 여성 문학가. 벽계수를 골탕 먹이고 지족선사를 파계시키며 세상을 발 밑에 둔 여성. 그것이 바로 기생 황진이의 정체다.

요부의 이미지와 순결한 문학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황진이는 1957년 영화 <황진이> 에서 처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대한민국 최초로 황진이를 연기한 이는 전설의 스타 도금봉. 그 이 후, 강숙희,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 등이 그 뒤를 이으며 이 매력적인 기생 아니, 시인의 일생을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담아내고 있다.

최근 영화 <황진이> 가 개봉되면서 송혜교의 '황진이' 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개인적으로 한마디 덧 붙이자면, 영화 자체의 매력과는 상관 없이 송혜교는 그 위치에서 충분히 잘 해냈다. 송혜교의 황진이가 하지원의 황진이보다 매력적이지 못했던 까닭은 하지원이 송혜교보다 월등히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황진이에 대한 작품의 접근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송혜교는 <황진이> 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 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후보6. 김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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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광해군,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사랑한 여자였던 김개시는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쟁의 역사 속에서 그 요망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선조의 독살설과 인목대비에 대한 핍박, 광해의 실책에 모두 관련되어 있는 김개시는 일개 상궁의 신분으로 대북 정권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정사를 좌지우지한 요화였으니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테지만.

이 요화를 연기한 이는 <회천문> 의 원미경, <서궁> 의 이영애, <천둥소리> 의 이주화, <왕의 여자> 의 박선영 등이고 이들과 함께 광해군을 연기한 이는 이희도, 김규철, 김주승, 지성, 김개시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적 입장에 서 있던 인목대비는 권재희, 이보희, 이현경, 홍수현이 열연했다. 개인적으로 <서궁> 의 이영애와 이보희의 연기는 나름대로 재밌게 본 편이다.


후보 7.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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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글에서 자주 했고, "역대 장희빈" 에 관한 글까지 이미 쓴 상황에서 더 할 말이 무에 있을까 싶으랴만은 해도 해도, 봐도 봐도 재밌는 것이 바로 '장희빈' 이다. 1대 김지미, 2대 남정임, 3대 윤여정, 4대 이미숙, 5대 전인화, 6대 정선경, 7대 김혜수로 이어지는 장희빈의 역사는 곧 한국 사극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장희빈> 이 만들어 질 때는 항상 '장희빈을 재평가 하겠다.' 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지만 결국은 '현모양처' 인현왕후와 '악녀' 장희빈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시청자의 이목을 끈다는 것. 아직도 장희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악녀와 요부' 라는 차원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장희빈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려 했던 김혜수의 <장희빈> 이 나중에서는 그저 '독한 여자' 로만 기억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장희빈은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이미 역사라는 차원을 넘어서 한국 사극에서 가장 '쓸 만한' 캐릭터로 자리 잡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인물이다. 여자vs여자의 싸움에, 선과 악이라는 극명한 대립을 즐겨하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굳이 거스르면서 바꿀 필요는 없다. 장희빈에 대한 재평가는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학계에서 하면 될 일이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그렇다면 이들과 호흡을 맞춘 인현왕후는 누가 있을까. 1대 도금봉을 시작으로 2대는 태현실, 3대 김민정, 4대 이혜숙, 5대 박순애, 6대 김원희, 7대는 박선영이 맡았다.


후보 8.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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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 문학의 정수라고 일컬어 지는 <한중록> 의 지은이로 유명한'혜경궁 홍씨' 는 지금껏 정치적인 이유로 남편 사도세자를 여읜 비운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오히려 사도세자의 구원 요청을 차갑게 외면한 것은 바로 혜경궁, 그 자신이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남편에게 -그것도 정략결혼을 한 남자에게- 그녀는 사랑도, 애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버리는 대신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올인'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에도 사도세자의 씨앗인 정조를 그대로 왕위에 올린 이유는 혜경궁 홍씨의 강력한 의견 표명이 단단히 한 몫을 거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버리되 자식까지는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은 정조를 제거하려는 친정 집안의 움직임에 격렬히 반대하고 정치적 공세를 펼침으로써 마침내 '정조시대' 를 열어제쳤다.

정조 시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일에 관련해 자신의 가문인 풍산 홍씨가 풍비박산 나게 되자 그녀가 꺼내든 카드가 바로 그 유명한 <한중록> 임은 이미 유명한 사실. '한가한 날의 기록' 이라는 뜻의 <한중록> 은 끊임없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친정을 옹호함으로써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 돌파구 역할을 했다. 재밌는 것은 <한중록> 을 쓰던 혜경궁 홍씨의 나이는 이미 70 줄이었으니, 그녀야 말로 영조와 정조 시대를 관통하는 진정 노회한 정객이었던 셈이다.

이야기로 잠시 딴데로 새버렸는데 다시 돌아와서 '혜경궁 홍씨' 를 맡은 여배우는 누가 있을까? MBC <안국동 아씨> 의 김영란을 시작으로, <한중록> 의 최명길, <하늘아 하늘아> 의 하희라, <대왕의 길> 의 홍리나 등이 바로 혜경궁을 연기한 배우들이다. 


후보 9.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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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이라는 빛나는 이름과 '쇄국' 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동시에 쓰고 있는 인물, 흥선 대원군. 상가지구로 시작해 조선말 가장 혁신적인 개혁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의 삶은 드라마로 그려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권불십년' 이라는 말처럼 10년만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끊임없는 정치적 재개로 결국은 을미사변이라는 역사적 책임을 떠 맡을 수 밖에는 없었던 사람. 

대원군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카리스마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로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의 김승호를 비롯하여, <민비> 의 김성원, <풍운> 의 이순재, <대원군> 의 임동진, <찬란한 여명> 의 변희봉, <명성황후> 의 유동근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이순재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연기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바로 <풍운> 을 꼽기도 했는데, 그 만큼 대원군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후보 10.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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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가 나왔으니 며느리가 빠질 수 없다. 바로 '명성황후' 가 그 주인공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였던 그녀는 1895년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시해당하기 직전까지 조선 정계를 쥐락펴락 했던 진정한 여걸이었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적에서는 '공' 보다 '과' 를 더 많이 찾을 수 밖에 없겠으나, 그녀의 죽음과 함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은 명성황후라는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영향력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리했고, 드라마에서도 여과없이 반영 됐다. 그러나 대부분 드라마들은 명성황후에게 있어서 '관대한' 시각을 가졌을 뿐더러 미모의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에 앞장 선 편이다.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에서 원로배우 최은희가 김승호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대중문화사에 등장한 '명성황후' 는 <민비> 의 김영애가 그 바통을 이어 받으며 브라운관에 진출했고, 다시 한 번 김영애가 <풍운> 에서 열연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영애 이 후에는 <대원군> 에서 연기파 김희애가, <찬란한 여명> 에서는 하희라, <명성황후> 에서는 이미연, 영화 <한반도> 에서는 강수연이 맡았다.

지금 젊은 층에게 가장 사랑받는 명성황후는 이미연으로서 그 동안의 강인하고 독한 이미지를 순화시키고 마치 멜로물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을 투영함으로써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조선으로.

최근 <주몽><대조영> 의 경향으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를 벗어난 '탈조선화' '반조선화' 현상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고려 시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태조 왕건> 이 후에, <제국의 아침><무인시대><신돈> 등은 고려시대를, <주몽><연개소문><태왕사신기> 등은 고구려를, <대조영> 은 발해를 다룸으로써 조선이라는 시간을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의 움직임을 보면 한국 사극은 다시 '조선' 을 주목하고 있다.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왕과 나>, 정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리려는 <이산 정조>,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등은 이미 편성이 거의 확정 된 상태로 'Come back 조선' 을 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과 비><신돈> 의 정하연과 <내 남자의 여자> 에서 열연중인 김희애가 손을 잡고 <비운의 이방자 여사> 를 준비중이어서 또 다른 근대사의 비극을 보여 줄 참이다. 왜 그들은 다시금 조선에 주목하기 시작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조선' 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시청자들에게 긴밀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연산군, 장녹수, 인수대비, 장희빈, 정난정, 영조, 정조, 혜경궁, 대원군, 명성황후 같은 인물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친숙도는 이미 40여년간 지속되어져 왔으며 그것이 비록 '식상' 하다고 할지라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 올 수 밖엔 없다. 한국 최고의 사극 감독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닳고 달은' 연산군과 정조를 들고 나온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사극들은 조선으로 컴백한 것일뿐 인물에 컴백한 것 같지는 않다. <왕과 나> 도 연산군이 아닌 김처선이 주인공이고, <이산 정조> 도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영조나 사도세자, 혜경궁이 아니라 바로 정조의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기 ?문이다. 친숙한 배경과 신선한 캐릭터로 무장한 2007년 사극들. 그들은 과연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한국 사극의 역사, 그 역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다,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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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우는 왜 매번 비극의 주인공 역할만 맡을까요?


정태우가 왕과 나의 성인 연산군으로 등장한다는 소식은 그간 신문, 뉴스, 인터넷(저 포함)에서 하도 떠들어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드라마 왕과 나 비판을 많이 했지만 정태우가 나온다니 벌써부터 두근두근거리네요~ 으흐흐~~

니들 이제 다 죽었다고 말하는 듯한 무시무시한 연산군 눈빛..


정태우는 '사극하고 싶지 않다, 슬픈 왕 역할은 정말 다시는 하기 싫다'고 합니다. 하긴... 그는 사극이 싫을 만도 합니다. 그동안 맡은 역할 중에 행복한 역할이 없었거든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매번 요절하는 비극적인 왕이나 왕자 역할만 맡았으니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이민우는 한명회에서 연산군, 용의 눈물에서 양녕대군을 맡아 광인(狂人) 역할이라도 해봤으니 그나마 좀 나았습니다. 싸이코 연기는 배우들이 누구나 한 번 해보고 싶어하는 역할이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정태우는 매~~번 죽거나 쫓겨나는 역할이네요. 그것도 이순신처럼 비장하게 죽는 것도 아니고 삼촌한테 쫓겨나서 죽는 노산군(=단종) 역.. 흑.ㅠ


그가 맡은 역할들을 한 번 볼까요?

* 출연작(시대순)

1) 대조영 - 발해 - 검이 역, 2007
2) 태조 왕건 - 통일신라~고려 - 최응 역, 2000
3) 무인시대 - 고려 무신집권기 - 21대 왕 희종 역, 2003
4) 용의 눈물 - 조선 태조 - 이방번, 1996
5)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 - 단종, 1984 (댓글 지적받고 수정)
6) 한명회 - 단종 - 단종 역, 1994
7) 왕과 비 - 단종 - 단종 역, 1998
8) 여인천하 - 중종~명종 - 인종 역, 2001
9) 왕의 여자 - 광해군 - 페세자 질 역, 2003


이중 대부분이 비극적인 왕이나 왕자 역할이었습니다.

태조 왕건 - 통일신라 ~고려 - 최응 역, 2000


무인시대 - 고려 무신집권기 - 21대 왕 희종 역, 2003


용의 눈물 - 조선 태조 - 이방번, 1996


단종(이렇게 어릴 때 쫓겨나진 않았는데; 너무 깜찍하군요ㅋ)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 한명회 - 단종 역, 1994
위의 사진은 조선왕조오백년 설중매 캡쳐인지 한명회 캡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굴이 아기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좀 더 어릴 때인 설중매일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댓글 지적받고 수정했습니다. 드라마 한명회에서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왕과 비 - 단종 - 단종 역, 1998


여인천하 - 중종~명종 - 인종 역, 2001


왕의 여자 - 광해군의 아들 페세자 질 역, 2003


정태우도 참 잘생긴 배우인데 요즘 사람들 취향이 아니라서 큰 스타가 안된 것이 조금 안타깝습니다. 그의 인물은 사극에서 두드러지는데요, 연기력도 타 젊은 배우들과는 천양지차라서 단연 눈에 띕니다. 이 계열의 배우들에는 정태우, 이민우, 안재모 등이 있지요. 이 사람들은 사극 이미지로 굳어질까봐 사극은 더이상 하기 싫다고 하지만 솔직히 사극에 너무 잘 어울리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사극에는 젊은 피가 필요합니다. 제발 사극에서 활약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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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는 지금의 여신적 이미지에 비해서 히트작이 별로 없다.

연기 못한다고 매번 욕먹은 김희선, 고소영조차도 히트작이 있고, 일찌감치 은퇴한 심은하가 히트작을 시리즈로 줄줄 엮어나가는 것과는 비교하면 초라할 지경이다.

※무작위로 생각나는 것만 읊어보면
김희선: 목욕탕집 남자들, 웨딩드레스, 프로포즈, 미스터큐, 토마토, 세상 끝까지, 안녕 내 사랑 등
고소영: 엄마의 바다, 비트, 숙희 (또 있나? ;;)
심은하: 마지막 승부, 미술관 옆 동물원, 텔미섬씽, 8월의 크리스마스, 숙희, M, 청춘의 덫
이영애: 대장금, 친절한 금자씨, 자이CF? 마몽드CF?

JSA는 단독 주연이 아니므로 이영애 출연 히트작은 될 수 있어도 이영애가 주연한 히트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의 한계로 인한 연기력 부재도 있고, 그녀가 작품을 선택하는 취향 때문이기도 하다.
서궁 이영애

나는 대장금으로 대상까지 받은 그녀의 연기에 감동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이영애에 대해서는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연기하기 쉬운 말랑말랑한 소프트 트렌디 드라마로 가지 않고 상당히 위험한 진검승부를 해왔기 때문이다.

90년대만 해도 김희선, 심은하에 가려져 이영애의 미모를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스타의 위치에서 입맛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이 별로 없다'타의에 의해서일 수도 있지만, 자의든 타의든 그녀의 이력을 보면 단순하게 인기를 끌기 위한 작품에만 출연하지는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아.. 어린 분들이라면 '이영애 아줌마가 저 나이에 사극하는게 왜 이상해?'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영애 같이 젊고 생기 펄펄 넘치는 도시적인 이미지를 가진 여성이 (마몽드 CF) 서궁 같은 정통 역사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결정이다. 김재형 피디가 젊은 층을 겨냥해서 상당히 애를 쓴 사극인 '왕과 나'에도 구혜선이나 이진, 전혜빈이 출연한다는 것이 신기했는데 하물며, 서궁 같은 정통 사극에야 말할 것도 없다.


서궁에서 김개시(개똥이) 역을 맡았던 이영애


이렇게 예쁜 여자가 김개시(개똥이)였을리는 없다. (김개시의 얼굴은 약간 반반한 정도였다고 하는데..) 서궁에서도, 대장금에서도 이영애 연기가 마구 어색하진 않았지만 뭔가 녹아드는 느낌은 없었는데 차라리 '연기력보다는 미모가 필요한 폐비 윤씨나 장희빈 역을 이영애가 해줬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란에서는 시청률이 80%가 넘어서 거리에 택시를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대장금
 
대장금이 워낙 메가톤급 빅히트를 치는 바람에 '이영애 = 선한 이미지'로만 남아있지만 데뷔 초기 앙칼져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생각하면 매력있는 악역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녀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로 내 바램을 반만 들어주었다.


지금은 느~무 이미지 관리하시느라 보기 힘든 이영애의 표독스러운 모습과 므흣~한 장면(사극에 꼭 나오는 목욕씬!)까지 나오는 서궁 오프닝 동영상을 만나보자~ (근데 목욕씬을 넣으면 진짜 시청률이 올라가긴 올라가나요?? ㅡ,.ㅡ;;;)

불과 십 여년 전이건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화질과 색감과 디자인을 선보인 서궁 오프닝...

서궁 오프닝 화면 캡쳐

뭐.... 어쨋든 1995년 드라마치고는 그닥 촌스럽지 않은 드라마의 구성이고, 연기이다. 이후에 만들어진 김재형 피디의 작품들(왕의 여자, 왕과 나)보다 연기면에서도 스토리 구성 면에서도 더 완성도가 높다. 김개시(개똥이)라는 인물의 특성 때문에 여기서도 발현되는 김재형 피디의 '모든 것은 음모로부터 시작되었다' 식의 전개는 필수.ㅋㅋ

일본에 DVD로 출시되기도 했다는데...

서궁 DVD 일본 출시

눈이 휘둥그레지는 이영애의 미모!!  

서궁 이영애

그때나 지금이나 도도한 영애씨~


사실 화면상으로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캡쳐가 아니라 기사사진인지라 이렇게 나온 것인데..
화면에서는 상당히 칙칙했고 캡쳐도 마찬가지였다.

서궁 이영애 캡쳐

상궁 주제(?)에 비단옷 입고 설친 도도한 김상궁

이영애

이건 대장금 때인 것 같기도 하고.....



인목대비 역의 이보희 - 더 어린 배우라야 되는데.. 잘못 뽑은 듯.



서궁에서 광해군을 맡았던 김규철과 중전 장서희



역대 광해군들 모음이라는 사진을 어디다 써먹을까 했는데 마침내 써먹게 되었다.
보너스로 역대 광해군들을 살펴보자~

역대 광해군 사진 모음 - 개인적으로는 대왕세종에서 양녕대군 아역을 맡았던 이준이 최고!


사진 소개만 하려던 것인데 몇 마디 보태려다 또 말이 옆으로 새서 줄줄이 길어져 버렸다.  예전 사극 자료를 더 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과 10년 전의 드라마조차 이렇게 귀한 자료가 되어버리니 안타깝다. 어쨋든 이영애의 오래 전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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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BC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

 
-사진 태조-

(1) 태조~태종 :    추동궁 마마 (1983 / 태조 - 김무생, 태종 - 이정길, 원경왕후 - 김영란, 정도전 - 이호재)
(2) 세종 :             뿌리깊은 나무 (1984 / 세종 - 한인수, 양녕대군 - 송기윤, 소현왕후 - 김영애)
(3) 문종~연산군 : 설중매 (1984 / 세조 - 남성우, 성종 - 길용우, 연산군 - 임영규, 인수대비 - 고두심
                           장녹수 - 이미숙, 김종서 - 전운, 한명회 - 정진, 유자광 - 변희봉
                           폐비 윤씨 - 이기선, 김처선 - 박규채)
(4) 중종~명종 :    풍란 (1985 / 중종 - 최상훈, 조광조 - 유인촌, 문정왕후 - 김혜자, 정난정 - 김영란
                           경빈 박씨 - 박원숙)
(5) 선조 :             임진왜란 (1985 / 선조 - 현석, 이순신 - 김무생, 원균 - 신충식)
(6) 광해군 :          화천문 (1986 / 광해군 - 이희도, 개시 - 원미경, 인목대비 - 권재희)
(7) 인조~현종 :    남한산성 (1986 / 인조 - 유인촌, 임경업 - 최상훈, 최명길 - 변희봉)
(8) 숙종 :             인현왕후 (1988 / 숙종 - 강석우, 인현왕후 - 박순애, 장희빈 - 전인화, 숙빈 최씨 - 견미   리)
(9) 영조 :             한중록 (1988 / 영조 - 김성원, 사도세자 - 최수종, 혜경궁 홍씨 - 최명길,
                           정순왕후 - 김용선, 홍국영 - 김동현, 정후겸 - 선우재덕)
(10) 정조 :           파문 (1989 / 정조 - 김용건, 효의왕후 - 김청, 혜경궁 홍씨 - 고두심)
(11) 순조~고종 :   대원군 (1990 / 흥선 대원군 - 임동진, 고종 - 김홍석, 명성황후 - 김희애, 철종 - 최수종)


2. 왕실 역사
 
-사진 세종대왕-

(1) 태조~정종 :    개국 (1983 KBS / 태조 - 임동진, 정도전 - 김홍기)
(2) 태종~세종 :    대왕 세종 (2008 KBS  / 세종 - 김상경, 태종 - 김영철, 양녕대군 - 박상민,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이윤지, 어리 - 오연서)
(3) 문종~연산군 : 왕과 비 (1998 KBS / 세조 - 임동진, 성종 - 이진우, 연산군 - 안재모, 인수대비 - 채시라
                           단종 - 정태우, 장녹수 - 유니, 김종서 - 조경환, 한명회 - 최종원
                           폐비 윤씨 - 김성령, 김처선 - 김성환)
(4) 중종~명종 :    여인 천하 (2001 SBS / 중종 - 최종환, 문정왕후 - 전인화, 정난정 - 강수연,
                           경빈 박씨 - 도지원, 조광조 - 차광수)
(5) 선조~광해군 : 왕의 여자 (2003 SBS / 선조 - 임동진, 광해군 - 지성, 개시 - 박선영, 인목대비 - 홍수현)
(6) 인조~현종 :    대명 (1981 KBS / 효종 - 김홍기)
(7) 숙종 :             장희빈 (2002 KBS / 숙종 - 전광렬, 장희빈 - 김혜수, 인현왕후 - 박선영, 숙빈 최씨 - 박예진)
(8) 영조 :             대왕의 길 (1998 MBC / 영조 - 박근형, 사도세자 - 임호, 혜경궁 홍씨 - 홍리나,
                           정순왕후 - 이인혜, 숙빈 최씨 - 김영애)
(9) 영조 :             하늘아 하늘아 (1987 KBS / 영조 - 김성겸, 사도세자 - 정보석, 혜경궁 홍씨 - 하희라)
(10) 정조 :           이산 (2008 MBC / 정조 - 이서진, 영조 - 이순재, 혜경궁 홍씨 - 견미리,
                           효의왕후 - 박은혜, 정순왕후 - 김여진, 홍국영 - 한상진, 정후겸 - 조연우)
(11) 순조~고종찬란한 여명 (1996 KBS / 흥선 대원군 - 변희봉, 고종 - 조재현, 명성황후 - 하희라)


3. 인물로 보는 조선 역사

 
-사진 정조-

(1) 태조~세종 :    용의 눈물 (1997 KBS / 태조 - 김무생, 태종 - 유동근, 세종 - 안재모, 양녕대군 - 이민우,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도지원, 정도전 - 김홍기, 어리 - 유니)
(2) 문종~성종 :    한명회 (1994 KBS  / 세조 - 서인석, 한명회 - 이덕화, 문종 - 송승환, 단종 - 정태우
                           성종 - 박진성, 연산군 - 이민우, 폐비 윤씨 - 장서희, 김종서 - 임동진, 인수대비 - 김영란)
(3) 연산군 :          장녹수 (1995 KBS / 연산군 - 유동근, 장녹수 - 박지영, 인수대비 - 반효정)
(4) 중종~명종 :    조광조 (1995 KBS / 중종 - 이진우, 조광조 - 유동근, 문정왕후 - 김민정, 경빈박씨 - 김성령)
(5) 선조 :             불멸의 이순신 (2004 KBS / 선조 - 최철호, 이순신 - 김명민, 원균 - 최재성)
(6) 광해군~현종 : 서궁 (1996 KBS / 광해군 - 김규철, 개시 - 이영애, 인목대비 - 이보희)
(7) 숙종 :             장희빈 (1995 SBS / 숙종 - 임호, 장희빈 - 정선경, 인현왕후 - 김원희, 숙빈 최씨 - 남주희)
(8) 영조 :             홍국영 (2001 MBC / 영조 - 최불암, 홍국영 - 김상경, 정후겸 - 정웅인,
                           정순왕후 - 염현희, 혜경궁 홍씨 - 이상숙)
(9) 정조 :             왕도 (1991 KBS / 정조 - 강석우, 홍국영 - 김영철, 효의왕후 - 박순애, 정순왕후 - 김자옥
                           혜경궁 홍씨 - 정영숙)
(10) 정조 :           소설 목민심서 (2000 KBS / 정조 - 김홍기, 정약용 - 이진우)
(11) 순조~고종명성황후 (2001 KBS / 흥선 대원군 - 유동근, 고종 - 이진우, 명성황후 - 이미연 & 최명길)


PS 1. 픽션이 과도한 작품은 피했습니다.
         예를 들면, "왕과 나" (성종~연산군?), "대장금" (중종), "한성별곡" (정조) 등등..
PS 2. 인물의 일대기라도 왕실 역사가 주가 되는 작품 안에서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천둥소리" (광해군), "어사 박문수" (영조), "태양인 이제마" (철종, 고종) 등등은 제외.


출처:
엠파스 지식인
원 출처는 정확히 기재되어 있아 링크 안됨.(디비디프라임 ALEX작성자님 http://dvdprime.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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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폐비는 폐비 윤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때문에 한꺼번에 폐출당한 고모와 조카: 폐비 신씨, 단경왕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이긴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쫓겨난 중전은 몇 명 더 있었습니다. 

먼저 미친 남편 연산군과 혼인하는 바람에 조용히 살다가 날벼락 맞은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廢妃 愼氏, 거창군 부인. 1472년~1537년)는 연산군의 정비(正妃)로 신승선과 임영대군의 딸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거창.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의 고모입니다.

연산군과 폐비 신씨(거창군 부인)


단경왕후의
아버지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으로 연산군의 처남이었고 할아버지는 당대의 명신이었던 거창부원군 신승선으로 연산군의 장인이기도 했으며 고모는 바로 연산군의 비(妃)로 그녀의 친정 거창 신씨 가문은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문 배경이 그녀의 인생 전반에 걸쳐 막대한 불행을 안겨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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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는 자기가 폐비 윤씨(제헌왕후)와 연산군에게 한 짓이 무서웠는지 아니면 손자 융(연산군)의 광기를 일찌감치 알아보았기 때문인지 몰라서 신수근의 딸을 진성대군(훗날 중종)의 처로 삼아줍니다. 그녀가 바로 단경왕후입니다. 연산군이 처가하고는 잘 지냈으므로 설마 자기 부인의 조카를 과부로 만들지는 않으리라 예상한 것이지요. 연산군이 완전 싸이코에 가까웠음에도 자신의 가까운 사람과는 살갑게 잘 지냈다는 이런 기록들을 보면 그의 광기는 인수대비한테서 키워진 건 분명한 듯 합니다. 그의 행실을 보면 성군감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적어도 폭군은 안됐을 것 같거든요.

어쨋든 인수대비의 전략은 적절했고, 진성대군은 갑자사화의 피바람 속에서도 목숨을 건집니다. 근데 역사가 참 재미있습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은 중종 반정을 도모하는 패거리들에게 '왕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영특하므로 세자를 믿어보자'고 하며 반정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처가와는 잘 지냈던 연산군에 대한 의리때문일수도 있고, 임금의 처남이 되든, 새 임금(중종)의 장인이 되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괜히 실패할지도 모르는 역적 모의을 일으켜서 자기 집안을 다치게 하기 싫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습니다.


그의 바램과는 달리 중종 반정은 성공했고, 아버지
신수근의 선택으로 그 불똥은 엉뚱하게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에게 떨어집니다. 신수근이 참 불쌍하죠? 만약 찬성했으면 현재 중전인 자기 여동생은 쫓겨나더라도 자기 딸과 집안은 살렸을텐데... 연산군이 쫓겨나는 바람에 여동생도 폐비돼, 자기 집안도 망해, 딸도 반정 성공으로 국모의 자리에 오른지 7일 만에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서인이 되니 말입니다. 반대로 반정공신들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획득하여 왕도 부럽지 않게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았거든요.

반정공신들도 웃긴 넘들이죠. 만약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가 아니었더라면 진성대군은 아예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단경왕후 쫓아내려고 시위대 결성해서 단식투쟁하고(^^;) 난리를 떨었거든요.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겠죠. 뭐. 친정에 멸문지화를 입었으니 단경왕후가 칼갈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불과 몇 년 전에 연산군의 복수로 신언패(牌: 말조심 목걸이)까지 목에 찬 경험이 있으니 복수라는 말만 들어도 온 몸이 떨렸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녀는 폐위된 후 중종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나 공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복위되지 못하고 71세의 나이로 한많은 인생을 쓸쓸히 마칩니다.

단경왕후가 중종에게 보여줄 붉은 치마를 걸어놓았다고 전해지는 치마바위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또한 중종의 임종 직전에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며,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의 야사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군요. 저도 솔직히 그 뒤 중종의 행동으로 보아서 반년도 안되어서 잊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쿨럭~;

결과적으로는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폐비 윤씨, 연산군의 아내인 폐비 신씨(신수근의 누이), 진성대군(중종)의 아내인 단경왕후 폐비 신씨(신수근의 딸)까지 연산군 주위의 여자 3명이 폐비 당했으니.. 연산군 근처에는 얼씬도 말아야겠습니다.ㅋ

도봉산 자락의 연산군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연산은 7년 후 이곳으로 이장했다.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부원군 신씨 묘다


ⓒ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연산은 폭군이었나? 왕권주의자였나?


시삼촌한테 쫓겨나서 폐비된 단종(=노산군)비 정순왕후, 광해군비 혜장왕후도 있습니다. 그 외에 장희빈도 중궁의 자리에 있다가 쫓겨났지만 궐 밖이 아니라 후궁의 지위에서 사사당했고, 인현왕후도 다시 궐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폐비 계열(?)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단종(정태우)과 함께 폐위 당한 단종비 정순왕후(김민정)



구혜선이 빠진 왕과 나에 정태우가 연산군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극 전문이라 불릴 만큼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서 기대가 되네요. 왕과 비에서 단종 역을 맡았는데 정태우는 어찌 늘 쫓겨나는 역할만 맡게 되네요. 그래도 단종역을 세 번이나 맡았다는데 (한명회, 왕과비, 설중매) 이번에 또 폐위당하는 역입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성질이나 마음껏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요.ㅋ


임금께 사사당하고 아들까지 쫓겨난 폐비 윤씨(제헌왕후), 폭군 남편 덕분에 복위도 되지 못한 거창군부인 폐비 신씨,  남편이 왕이 된 대가로 쫓겨난 또 다른 폐비 신씨(단경왕후)....  남편 잘못 만나서 왕족에서 역적이 되어버린 그녀들이 참 가엽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경왕후 능


쓸쓸히 저 세상으로 떠나갔을 그녀들이 편하게 쉬길 바라며 그녀들의 묘에 술 한 잔 바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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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은 기사 중 일부. 출처는 링크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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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설에 휘말린 조선 임금들 (인종, 선조, 소현세자, 효종, 현종, 경종)


독살설의 시초임금 인종

조선왕조 12대 임금인 인종(재위 1544∼1545년)은 연산군을 쫓아내고 즉위한 중종의 아들이다. 그가 조선의 임금 중 최초로 독살설에 휘말린 데는 후사를 둘러싼 궁중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다.

중종이 반정을 일으키기 전의 잠저(潛邸) 시절 첫 부인은 신씨였다. 신씨의 아버지는 연산군 시절의 우의정 신수근이었는데, 반정공신들은 그를 연산군의 처남이란 이유로 죽여버린다. 신수근을 죽여버린 반정공신들은 후환이 두려워 중종의 첫 부인 신씨를 내쫓고 새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한다. 그녀가 바로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다. 그러나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 10년(1515)에 중종의 첫 아들 호(인종)를 낳았으나 산후 조리에 실패해 25세에 죽어버렸다. 인종은
태어난 지 엿새 만에 어머니를 잃은 것이다.

중종은 2년 후인 1517년 새로운 여자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데 그녀가 조선의 왕후 중 두고 두고 구설에 오르는 문정왕후 윤씨였다. 인종의 독살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인이기도 하다.

파란은 문정왕후가 중종의 둘째 아들 환을 낳으면서 시작된다. 환은 세자 호보다 열아홉살이 어렸다. 따라서 세자 호가 살아 있는 한 문정왕후의 아들 환이 임금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 호가 세자로서 보위를 잇게 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자 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들이 없는 것이었다. 세자의 계모 문정왕후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세자가 후사없이 죽는다면 문정왕후 소생인 환이 즉위하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1544년 38년간 재위한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했다. 나이 서른살의 젊은 왕이었다. 그러나 인종은 보위에 오른 지 불과 9개월 만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역대 조선 임금들 중 가장 짧은 치세 기간이었다. 인종은 왜 그리 빨리 죽었을까?

정사인 『인종실록』은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야사(野史)들은 어김없이 계모 문정왕후가 독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중 한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매번 인종을 핍박하던 대비 문정왕후 윤씨가 하루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떡을 내놓았다. 인종은 계모 윤씨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반겨주는 것에 감격해 그 떡을 먹었는데 그날부터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사실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 독살설은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인종이 죽자마자 사화(士禍)가 재발했기 때문이다. 명종 즉위년에 발생한
을사사화(1545)가 그것이다. 조선 초·중기는 「훈구파」라는 구정치세력과 「사림파」라는 신정치세력의 정권을 둘러싼 각축이 심했다. 사화란 집권당인 훈구파가 야당인 사림파를 공격하는 정치 탄압을 말한다. 그런데 중종 때의 기묘사화 이후 거의 종결됐던 사화가 인종 사망 직후 다시 재연된 것이다. 인종이 승하하고 그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발생한 을사사화는 조선 사림파 사대부들로 하여금 문정왕후의 인종독살설을 사실로 믿게 했다.


그 배경에는 당시 대윤소윤이라 불리는 두 당파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다. 대윤과 소윤은 각각 임금의 외척이었다. 대윤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아우인 윤임이 영수였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윤원로 등이 영수였다. 중종이 살아 있을 때 대윤은 장경왕후 소생인 인종을 지지했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을 지지했다. 또한 대윤은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를 지지한 반면 소윤은 사림파에 적대적이었다. 중종의 뒤를 이어 인종이 즉위한 직후 대윤이 정권을 잡아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다.

인종은 시종일관 사림파를 옹호했던 군주였다. 그는 왕위에 있는 동안 부왕 중종 때 발생한 기묘사화의 피화자(被禍者)들을 신원(伸寃)할 생각이었다. 인종은 중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조광조·김정 등 기묘사화 피화자들을 신원하려 했으나 갑자기 병색이 짙어지자, 『조광조·김정 등의 복관과 현량과(賢良科) 복과는 선왕 때의 일이므로 서서히 하려 했는데 이제 내 병이 이와 같으니 조광조 등을 신원시켜주고 현량과도 복과하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면서 그들을 신원시켜 주었다.

이렇게 인종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사림파들의 신원을 생각할 정도로 이상적인 사림정치에 대한 열망을 지닌 군주였다. 또 인품이 인자하고 학문도 높아 사림파로서는 기대를 걸 만한 존재였다. 그랬으니 인종의 요절에 대한 사대부들의 분노와 좌절은 더 컸다.

인종이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인물이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이었던 점은 인종 독살설에 더욱 불을 댕겼다. 명종은 당시 12세의 미성년이었으므로 대왕대비 문정왕후나 왕대비 인성왕후(인종비) 중 한 명이 섭정을 해야 했는데, 명종이 인종의 동생이었으므로 『형수와 시숙이 한 자리에서 정사를 볼 수 없다』는 이언적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모후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자마자 사화가 뒤따랐던 것이다.

인종 승하 직후 발생한
을사사화와 함께 상법(喪法)에 어긋나게 치렀던 인종의 장례도 인종독살설에 설득력을 갖게 했다. 인종의 장례는 이른바 「갈장(渴葬:임시로 빨리 장사지내는 것)」으로 집행되었다. 이는 소윤의 주장 때문이었다.

소윤 이기는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빨리 장사지낼 것을 주장했다. 이는 훗날 사가(史家)들이 인종에게 박하게 하는 것으로 문정왕후에게 아부했다고 비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소윤의 윤원형, 이기 등은 인종의 국상중에도 웃는 낯을 보여서 의기 있는 선비인 교리 정황(丁煌)이 『이 역적놈들을 보니 더욱 원통하다』고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분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을사사화란 철퇴가 날아들어 대윤과 함께 사림파가 화를 입게 된다. 을사사화는 윤임, 유관 등 대윤과 앞으로 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한 문정왕후와 소윤의 음모였다. 갓 세상을 떠난 인종의 시신이 궐내에 남아 있는 상황에 사화가 발생했고, 인종의 지지세력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실들이 인종 독살설을 신빙성 있게 만든 것이었다.

을사사화 2년 후에는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쓴 벽서가 나붙은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남은 사림파마저 주륙을 당했다. 이처럼 문정왕후의 섭정 기간은 사림파에게는 암흑의 나날이었고 그 어두운 세월을 횡행한 것은 『선왕(인종)이 독살당했다』라는 은밀한 소문이었다. 그리고 사림파는 문정왕후가 죽는 순간까지 분노를 삭이고 있어야 했다.


광해군과 선조 독살설

인종 독살설 속에서 자신의 아들 명종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한 문정왕후는 왕위를 손자에게까지 잇지는 못했다. 재임 기간 내내 어머니 문정왕후의 그늘에 가려 있던 명종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승하했는데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는 상태였다. 명종의 유일한 아들 순회세자가 13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더 이상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승하는 자연히 후사 문제를 발생시켰다. 선왕의 아들이 없으므로 종친 중에서 한 명을 임금으로 추대해야 했다. 평소 명종 내외와 친밀했던 중종의 서손자(庶孫子) 하성군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그는 중종이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낳은 덕흥군의 세 아들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방계 승통 시대가 열렸고, 그가 바로 선조였다.

자신이 방계 승통이라는 점에 대해 콤플렉스 가지고 있었던 선조는 정비(正妃)에게 낳은 아들로 후사를 잇는 것으로 그 콤플렉스를 메우려 했다. 그러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다. 반면에 후궁들로부터는 무수히 많은 왕자와 옹주를 얻었다. 여섯 명의 후궁에게 얻은 자녀는 총 13남 10녀. 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열세 명의 후궁 소생 아들 중에 누구를 후사로 삼느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런데 당시 선조는 또 다른 후궁인 인빈 김씨에게 빠져 있었고, 인빈의 둘째 아들인 신성군을 유달리 사랑했다. 선조는 어차피 정비 소생 원자가 아니라면 사랑하는 인빈 소생의 신성군에게 보위를 넘기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선조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력 정당이나 정치인들에게도 중요한 화두였다. 서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은 공빈 김씨의 둘째아들 광해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가 선조의 여러 서자들 중 가장 인품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에 정철을 영수로 하는 서인들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지지했다. 특히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은 신하들의 이런 의견을 직접 선조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정철은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됐는데 무슨 말을 하는가』란 선조의 꾸지람만 듣고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여기에는
동인인 영상 이산해의 계략이 있었다. 이산해는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기로 정철과 합의해 놓고서도 한편으로 신성군의 생모 인빈 김씨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 당신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충동질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인빈 김씨가 당일로 선조에게 이 사실을 호소했을 때만 해도 선조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정철이 실제로 신성군이 아닌 광해군을 세자로 주청하자 분노가 폭발해 귀양보낸 것이었다. 이로써 정권은 동인 수중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한해 전인 1591년의 일이었다.

동인임진왜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당이다. 일본의 침략 조짐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파견됐던 조선통신사 일행 중 정사인 황윤길은 『침략할 것 같다』고 보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전혀 침략의 조짐이 없다』고 상반된 보고를 올렸다. 양 의견 중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됐는데, 이는 당시의 집권당이 동인이고 김성일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와중에 권력을 잡는 쪽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이었다. 조식(曺植)을 종주로 모시는 북인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같은 의병장들을 다수 배출하여 명분에서 앞선 결과 집권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겨우 종결되자 집권당인 북인은 선조의 후사 문제를 놓고 또다시
대북소북으로 분열했다. 이는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왕비가 된 인목대비 김씨가 1606년(선조 39년)에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비롯된다. 당연히 후계 문제가 복잡하게 꼬인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선조는 할 수 없이 조정 대신들의 중망을 들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세자 광해군은 조정을 둘로 나누어 맹산, 곡산, 이천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 끝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그 지위를 굳혔다. 이때만 해도 광해군이 보위를 잇는 것은 기정사실로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자국 사정 때문에 광해군의 세자 책봉 추인을 거부하자 선조와 일부 신하들의 생각이 달라지면서 세자 문제는 다시 미궁에 빠졌다.

소북 영수 유영경은 인목대비 김씨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과 손을 잡았다. 광해군을 폐세자시킨 후 영창대군을 세우려고 결탁했던 것이다. 영창대군을 후사로 세우려는 이 구도는 방계 승통을 극복하려는 선조의 열망과 맞물리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결국 이것은 세자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박해로 나타났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선조는 광해군이 문안할 때마다 『명나라의 추인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 행세를 하는가? 다음부터는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그때마다 광해군은 피를 토했다고 한다.


광해군의 승리

선조는 광해군을 내쫓고 영창대군을 세우려 했으나 세월은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선조의 병이 깊어진 재위 40년(1707) 가을, 서른네살의 장성한 세자를 폐하고 두살배기 아이를 세자로 만드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일이었다. 결국 선조는 광해군을 폐출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했다.

선조는 1707년 10월 병석에서 대신들을 불렀다. 광해군에게 전위한다는 교서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소북 영수 유영경은 선조가 자신만 불렀다고 하면서 원임대신(현직 정승)들을 모두 배제한 채 혼자 선조를 만났다. 선조가 광해군에게 전위할 뜻을 밝히자 유영경은 『금일의 전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뜻밖에 나온 거사여서 명령을 받지 못하겠습니다』라면서 명을 받기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소북인 병조판서 박승종과 공모해 군사를 동원해서 대궐을 에워싸기도 했다.

유영경의 이러한 월권 행위에 저격수로 나선 인물이
대북의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유영경이 전교를 거부한 것은 사당(私黨)을 위해 왕사를 버린 것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그러나 선조는 오히려 정인홍을 귀양보냈고 후사를 둘러싼 상황은 여전히 혼돈스러웠다.

후사를 둘러싼 선조의 결심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선조의 병이 재발했다. 선조 마지막 해인 41년 1월부터 다시 병세가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았는데 그해 2월1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어젯밤엔 편히 잠을 잤다』라고 말한 그날 오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죽음이 머리맡에 이른 선조는 광해군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광해군에게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듣지 말라』는 유서를 내렸다.

드디어 광해군이 승리한 것이다. 선조는 죽음에 이르러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말했지만 신하들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고 광해군에게 피를 토하게 한 인물은 바로 선조 자신이었다. 만약 선조가 시종일관 광해군의 지위를 튼튼히 해주었다면, 장남 임해군이나 적자 영창대군 모두 왕자로서 풍족한 삶을 누리다 세상을 뜰 수 있었을 것이다.

즉위한 광해군이 자신을 폐출시키려던 소북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광해군은 소북을 숙청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북에게 정권을 넘겼다. 정권을 장악한 대북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에 대한 강경책을 펴서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해 서궁에 가두었다. 이 와중에 나돈 소문이 선조독살설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당연히 숙청당한 소북과 세를 잃은 서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선조 독살설이 그리 광범하게 유포되지는 않았다. 선조가 죽기 전해부터 병색이 심각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사대부 모두 알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선조독살설이 조선 전역에 유출되고 사실처럼 전해진 것은 광해군이 쫓겨난 이후였다.

정철의 실각 이후 정권에서 소외됐던 서인들은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와 인목대비 폐위 등을 반사대·반윤리적인 행위로 규정짓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인조 반정은 대북 정권에 의해 서궁에 유폐됐던 인목대비를 화려하게 복귀시키는 무대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간 사랑하는 아들 영창대군이 비참하게 저세상으로 가는 비극을 맛보았다. 백년을 씻어도 씻기지 않을 한을 품은 그녀가 다시 대비로 복위한 것이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이 반정을 추인해 달라고 요구하자 인목대비는 광해군 부자를 죽이라고 요구한다.

『역괴(逆魁:광해군)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고, 그 적모(嫡母: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다하였다』

말하자면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민성징이 즉각 『지금 하교하신 사실은 외간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더욱이 선왕을 시해했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한 사실입니다』라고 되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별다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단지 아들을 잃은 여인이 한풀이를 위해 지어낸 말일 뿐이다.

하지만 대비의 입에서 직접 나온 선조 독살설은 서인의 반정 명분을 정당화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서인 편에서 볼 때 선조 독살설의 진위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선조 독살설이 광범하게 유포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인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야 어차피 구중 궁궐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재간이 없었다. 반정 정권은 선조독살설이 정권 기반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조직적으로 유포시켰고, 이것은 하나의 오도된 진실이 되어갔다.


소현세자의 이상한 죽음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 정권은 집권 후 외교노선을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했다. 만주에서 새로이 흥기하는 여진족의 후예들이 세운 후금(後金), 곧 청나라를 배격하고 한족(漢族)의 명나라를 좇자는 정책이 그것이다.

인조반정(1623년)이 일어날 즈음의 만주 정세는 극히 유동적이었다. 인조반정 한 해 전 청(후금)은 만주의 요지인 심양과 요양을 탈취했고 다음해에는 서평보(西平堡)를 장악했다. 청이 이처럼 기세를 올리는 동안 명나라는 내부 분란에 휩싸여 있었다. 귀주와 산동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혼란을 틈타 청은 급격하게 세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만약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정묘· 병자호란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과 청의 분쟁 와중에 조선의 위상과 국익을 한껏 드높였을지도 모른다. 반정 정권이 배청 정책으로 전환하자, 청은 명과 중원을 다투는 일전을 앞두고 조선 문제를 먼저 정리하려고 나섰다. 청군이 중원으로 남하한 틈을 타서 조선군이 공격해 온다면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되기 때문에, 만주를 기반으로 한 청으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처지였다.

이는 결국 두 차례의 침략을 불러왔다.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丁卯胡亂)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그것이다.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는 12월의 혹한이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나라 군사는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강화도는 지리적 요건이 농성할 만한 곳이지만 남한산성은 그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농성의 기본조건은 자급자족 체제인데 산성, 그것도 한겨울의 산성은 농성의 자리가 아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45일 이상을 저항하던 인조는 결국 강화도가 함락돼 비빈·대군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하고 만다. 인조는 지금의 송파구인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삼배고두례를 행했다. 허울뿐인 큰소리 외교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화의의 대가로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야 했다. 삼전도의 치욕은 봉림대군은 물론 소현세자에게도 씻기 어려운 상흔이었다.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의 성리학자인 그들에게 삼전도의 치욕은 반드시 씻어야 할 원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볼모생활 도중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현실인식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이 처한 객관적 현실, 즉 국제관계의 역학을 인정했다. 청은 이제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실력자였고 조선은 그 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 편입돼 있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려면 청과 맞서 이길 힘이 필요했다. 그럴 힘이 없는 이상 청과 대립하는 것은 조선에 이롭지 못한 일이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은 이전의 중국 왕조들이 요구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공으로 대표되는 형식적 주종 관계를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조공 대상이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든 만주족이 세운 왕조든 현실적으로 볼 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원을 청이 장악한 이상 조선은 그 질서 속에 편입된다는 것이 볼모생활에서 바뀐 소현세자의 현실 인식이었다.

소현세자는 당시 심양에 새로운 숙소를 신축해 심양관(瀋陽館)이라 불렀다. 청나라는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려 했다. 인조도 청나라와 직접 접촉을 꺼렸으므로 양국간 현안은 소현세자의 차지였다.

소현세자는 양국의 접점 지역에서 양국의 직접적인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심양관은 주중국 조선대사관이며 소현세자는 그 대사였던 셈이다.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에 대응하는 일이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 중에서 명 정벌에 사용할 군사를 파견해 달라는 것은 가장 난처한 문제였다. 친명 배청을 명분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으로서는 이는 심각한 자기 부정에 해당하므로 상당한 반발이 뒤따랐다. 하지만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정권으로서는 청의 어떠한 요구도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하는 순간 청군의 말발굽이 또다시 조선 국토를 짓밟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임경업장군의 사보타주

인조 18년 임경업이 이끄는 수군 6천명을 파견한 것은 서인 정권의 참담한 자기 부정이었다. 유명한 반청론자인 임경업이 청과 함께 명을 치는 일에 흥이 날 리 없었다. 임경업은 명군을 향해 발포하지도 않고 일부 군사는 일부러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보타주를 벌였다. 이에 격분한 청은 장수 용골대(龍骨大)를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의주로 파견했다. 이들은 조선의 대신들을 의주로 불러 심문하는 이른바 「심옥(瀋獄)」을 벌여 조선은 다시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졌다.

이때 소현세자는 청의 말을 듣는 척하며 양자 사이의 완충역할을 자임했다. 아마 소현세자의 유연한 처신이 없었다면 조선인들은 화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조 20년에 압록강 근처에 명나라 배가 출몰하자 용골대가 평안감사 등을 불러 심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도 소현세자는 시종일관 평안감사를 옹호했다. 이때 용골대는 이렇게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와 같이 비호해 주니 그와 한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소』

세자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구려』

이처럼 소현세자는 양국간 분쟁에서 분명히 조선편을 들면서도 유화적인 몸짓으로 파문의 확산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런 유연한 처신은 조선에 대한 청의 의구심을 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즉위하면 양국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세자빈 강빈도 소현세자 못지않은 수완가였다. 심양관의 안살림을 맡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금이었다. 그녀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했다. 이렇게 생산된 곡식은 심양관 살림에 가장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포로로 잡혀온 조선 사람들도 원수인 청인들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세자 밑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니, 강빈의 이 농업정책은 일거양득의 양책이었다. 강빈은 이렇게 수확한 곡식을 청의 진기한 물건들과 맞바꿔 차액을 남겼다. 또한 조선 사신들이 가져오는 인삼 등을 청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청나라 관리들에 의해 심옥이 한번 벌어지면 막대한 자금이 들었다. 청 관리들은 막대한 뇌물을 받고서야 못 이기는 체 심옥을 종결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금을 마련한 것은 모두 강빈의 수완이었다. 실로 소현세자와 강빈은 조선 역사상 가장 현실적인 세자이자 세자빈이었다.

소현세자가 볼모로 가 있었던 기간은 장장 9년이었다. 인생의 황금기인 20대 중후반과 30대 전반을 이국에서 볼모생활로 보낸 것이었다. 소현세자는 인조 22년(1644) 2월, 34세의 나이로 꿈에도 그리던 고국 조선에 돌아왔다.


아들을 의심하는 아버지

소현세자의 귀국 짐보따리 속에는 많은 종류의 서양 과학서적과 여지구가 들어 있었다. 그는 볼모생활을 하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견식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세상이 더 이상 성리학의 시대가 아님을 심양과 북경에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한 인물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사상과 접하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과 천주교, 그리고 서양의 과학사상이었다. 소현세자는 스스로 아담 샬이 머물고 있던 북경의 남천주당을 찾았다. 푸른 눈의 선교사와 이국의 왕세자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는 특이한 장면이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가져온 과학서적이 훗날 수원성 축성 때 정약용으로 하여금 거중기를 만들게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이 밖에도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들을 데리고 귀국하기도 했다.
 
소현세자는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더 이상 청은 원수가 아니었다. 주자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청은 원수의 나라였지만 주자학의 관점만 버린다면 청은 실리에 따라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상대적인 대상일 뿐이었다. 세상은 주자학만이 아니라 천주학이란 다른 사상도 있었다. 그리고 여지구가 보여주는 대로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새로운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과학기술은 조선을 새롭게 발전시킬 양축이었다.

그러나 가슴 가득 포부를 안고 귀국한 소현세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를 구렁에 빠뜨리려는 음모였다. 부왕 인조에게 있어서 소현세자는 자신을 대신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었다. 소현세자는 자신의 반청 노선에 반기를 든 정적이자 원수인 청의 회유에 넘어간 반역자일 뿐이었다. 소현세자가 볼모지 심양에서 조선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부왕 인조는 세자에 대한 불만만 키워왔던 것이다.

더욱이 인조는 어이없게도 아들인 소현세자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심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공포였다.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임금으로 내세워 자신을 폐출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다. 인조는 쿠데타로 집권한 인물답게 자신의 왕위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했다.

인조가 세자를 의심하는 것을 눈치챈 일부 정치세력이 세자를 모함하고 나섰다.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도 그 중 한 세력이었다. 그녀는 세자와 강빈이 인조를 내쫓고 즉위할 것이라고 참소했다. 세자에 대한 의심과 주위의 참소는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조는 심지어 환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조차도 막을 정도로 그를 냉대했다.

소현세자는 부왕의 이런 냉대에 상심했으나 그 원인을 분석할 만한 여유도 그에겐 없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설고 낯선 이역만리에서 9년간이나 꿋꿋하게 지내던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뒤따랐다.


의혹짙은 소현세자의 주검

세자의 발병일은 인조 23년 4월23일이었다. 병명은 학질이었다. 세자는 발병 3일 후인 4월26일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인조실록』은 그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적었다.

『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소렴 때 시체의 얼굴을 싸는 검은 헝겊)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이 기록은 당시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시신의 이상한 상태를 보고 나와 말한 것을 토대로 적은 것이었다. 그녀는 인열왕후(소현세자의 어머니)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염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한 것이 분명하다면 소현세자를 죽인 인물은 누구일까?

『인조실록』은 세자의 시신이 독살당한 사람 같았다는 사실을 『상(인조)도 모르고 있었다』라고 기록했지만 이는 거짓이다. 소현세자 독살에 인조가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한둘이 아니다. 그 하나가 소현세자를 치료한 의관 이형익(李馨益)에 대한 처리 문제다. 이형익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어미 집에 왕래하던 의사로 세상에 추잡한 소문이 많던 자였다. 세자가 이형익에게 침을 맞은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양사는 이형익을 처벌하자고 주청했다. 『오한이 심하여 몸이 떨리는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는 것이 양사의 탄핵 이유였다. 조선시대에 왕이나 세자가 죽으면 의관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다 해도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인조는 끝내 이형익을 비호하면서 처벌하지 않았다.

인조가 세자 독살에 관련돼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였다. 사망 당시 소현세자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큰 아들 석철은 원손(元孫)이었으므로 당연히 그가 세손으로서 세자를 대신해 인조의 뒤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종법을 어기고 원손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그 중 두 아들이 풍토병으로 죽게 했다.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련됐다는 다른 증거는 세자빈 강빈의 처리 문제였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강빈에게 공격의 화살이 날아왔다. 세자의 장남 석철의 보모 최상궁은 저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 끝에 죽어갔다. 그리고 인조 24년 정월에는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御膳:임금의 수라)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강빈은 후원 별당에 감금되었다. 이미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진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에 독을 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인조와 소용 조씨가 공모해 강빈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내린 인조의 비망기는 자신이 사건의 배후 연출자임을 털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紅錦) 적의(翟衣)를 만들어 놓고 외람되게 내전(內殿:왕비)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인조 스스로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그의 세 아들을 귀양 보낸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인조의 악함은 강빈을 사사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결국 강빈을 폐출하여 사저로 내쫓은 후 사약을 내려 죽여버리고, 교명 죽책(竹冊) 등을 거두어 불태워버렸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빈의 형제들까지도 죄를 씌워 죽여버렸다. 자신의 친아들과 손자, 며느리와 사돈까지 죄없이 죽여버린 이런 인물의 시호에 「어질 인」자를 써 인조(仁祖)라 한 것은, 서인 정권의 역사뒤집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행적을 제대로 표현하면 그는 악조(惡祖)라 불러야 마땅하다.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은 단순히 한 세자의 꿈이 좌절된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꿈이 좌절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을 만난 것은 조선이 개국한 1876년보다 무려 2백32년이나 빠른 1644년의 일이었다. 이때 이미 낡아빠진 성리학을 버리고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그 처참했던 근대사의 아픔은 겪지 않아도 좋았을지도 모른다.


북벌군주 효종의 급서

소현세자가 죽은 4년 후인 1649년 인조도 세상을 떴다. 그 자리를 이은 인물은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생활을 했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었다. 효종에게는 즉위 자체가 하나의 콤플렉스였다. 인조의 뒷자리는 소현세자의 것이지 효종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현세자가 죽었다 해도 그 자리는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의 것이었다. 종법에 따르면 대통은 분명 원손(元孫) 석철의 것이었다. 효종은 소현세자와 석철이라는 두 부자의 대통을 가로챈 셈이었다.

효종이 심양 시절부터 소현세자의 자리를 탐냈다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찾기 어렵다. 심양 시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사이는 그리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소현세자를 사지에 몰아넣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에게 돌아오는 왕위를 거부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즉위 정당성을 북벌(北伐)에서 찾았다.

북벌! 효종에게 있어서 북벌은 시작이자 마지막이며 부분이자 전체였다. 효종은 북벌 군주 그 자체였다. 소현세자가 볼모 생활을 새로운 사상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세계사의 흐름에 적응하는 기간으로 보냈다면, 봉림대군은 원수인 청의 약점을 캐는 기간으로 보냈다. 소현세자가 청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으로 보았다면, 봉림대군은 전력을 다하면 넘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같은 볼모 기간을 보냈으면서도 세계관이 이처럼 완전히 갈리는 것은 서로의 성격탓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무과출신 우대 정책

효종이 북벌에 전념했던 이유는 물론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 소현세자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콤플렉스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북벌은 삼전도의 치욕과 콤플렉스를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길만이 저승에서 소현세자를 떳떳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북벌은 소현세자보다는 효종에게 걸맞은 과제였다. 효종은 강력한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효종은 실로 삼국시대 이래 우리 역사상 거의 유일한 무제(武帝)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이나 고구려의 광개토왕, 그리고 신라의 태종무열왕처럼 무력을 통한 영토확장의 길에 나섰던 무력의 군주였다.

북벌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강력한 군사력이다. 효종은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까지 조선은 문(文)의 나라였다. 과거는 문·무과로 나뉘어 있었으나 무과 출신으로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과 출신들은 문과 출신보다 한 등급 아래의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무과 합격자는 지방 수령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은 무과 우대 정책을 실시했다. 효종은 무과 시험인 관무재(觀武才) 우수 합격자를 지방 수령에 임명했다. 그러자 문신들의 반발이 잇따랐다. 효종이 무과 출신을 지방 수령에 임명한 것은 각 지방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효종은 무과 출신인 유혁연(柳赫然)을 비서격인 승지로 임명하기도 했다. 효종이 전례를 무시하고 무장 출신을 승지로 임명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군사문제에 관한 직할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효종은 지방관을 파견하며 군사문제는 병조판서에게 직보하고, 병판은 무신 승지 유혁연에게 전달하게 했다. 즉 지방의 군사문제를 지방관→병판→무신 승지→효종이라는 신속하고 전문적인 보고 체제를 갖추기 위해 무과 합격자를 수령에, 무신 출신을 승지에 임명한 것이다.

또한 효종 5년 2월에는 지방의 북벌 준비 사업을 관장할 영장(營將) 제도를 복원하고 이화악(李華岳) 신단(申檀) 등을 영장, 부사(府使) 등에 임명해 지방으로 내려 보내기도 했다.

전란 후의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효종의 강력한 군사력 확장 정책은 많은 성과를 거두어 재위 6년에는 사대부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막강해진 조선군의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 세자와 문무백관,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량진 백사장에 나가 1만3천여 조선군의 열병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효종은 제주도에 표류돼온 네덜란드 사람 하멜(Hamel)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조총(鳥銃)을 모방한 새로운 총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친위군인 금군(禁軍)을 늘리고 창덕궁 후원의 담장을 헐어 이들의 기사장(騎射場)을 만들어주었다. 지형이 험준한 우리 나라는 남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기병전의 여지가 그다지 넓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광활한 만주와 중원을 공격할 때 사용할 목적임이 분명하다.

효종의 이런 군비확장책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조선 전기간을 통틀어 전례가 없던 군비확장책은 문신들의 강한 반발을 낳았다. 신속한 군비확장은 집중된 권력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국왕의 권력은 미약했다. 부왕 인조는 서인들이 선택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쿠데타를 준비하던 서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한 명의 종친일 뿐이었다.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조정은 국왕과 서인의 연합정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의 군비확장책은 서인 문신들의 반발을 낳았다.

문신들은 물론 만주족 국가인 청을 증오했다. 그러나 이런 증오심을 극도로 표현하는 길은 기껏해야 삼학사 같은 지사적 처신이지 군사적 대응은 아니었다. 의기만 드높게 선전 교서를 던졌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혹한 속의 산성에서 떨었던 문신들에게 청은 마음속 증오의 대상일 뿐 군사적 정복대상은 아니었다.

군비확장책에 대해 『백성의 생활이 더 급하다』는 안민책(安民策)을 제시한 문신들의 반발 명분이 무조건 폄하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안민의 대계 중 강력한 국방책은 가장 첫머리에 놓여야 할 항목이란 점에서 안민책을 명분삼은 군비확장 반대도 전적인 정당성을 갖기는 어렵다. 심지어 열병식이 청나라의 분쟁거리가 된다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대해 효종은 『이것이 어찌 오랑캐의 주구가 아니겠는가?』라면서 강행했다.


문신들의 노골적 반발

그러나 재위 8년간 거의 독단적으로 군비확장책을 추진하다 보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효종의 치세에 대한 사대부들의 불만을 집약해서 표출한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흔히 송시열을 북벌 이념의 제공자로 알고 있지만, 실제 송시열은 효종의 군비확장책에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다. 송시열은 효종 8년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그간의 치세 전체를 부정하고 나선다.

『전하께서 재위하신 8년 동안 그럭저럭 지나갔을 뿐 한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르렀습니까? 백성들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하며 안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朝夕)에 다다랐습니다』

송시열은 또 『남송의 주자가 처음에는 금나라에 대한 북벌을 주장하다가 20년 후에는 다시 북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북벌을 포기하라는 권고였다. 이는 효종이 전력을 기울인 모든 정책을 포기하라는 말로 효종의 치세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자신을 전면 부인하고 나선 송시열을 처벌하지 못했다. 사대부들이 집단 반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효종은 사대부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타협에 나섰다. 효종은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에 정권을 넘겨주기로 하였다. 대신 송시열·송준길로 대표되는 산당은 적극적인 북벌책을 수행해야 했다. 이처럼 양자가 연합할 수 있는 공통 분모는 북벌이었다.

송시열의 산당이 대외적으로 내건 명분은 「춘추대의」였다. 최고의 춘추대의는 오랑캐의 나라인 청을 정벌하고 중화의 명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 길은 오직 북벌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북벌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소리 높여 춘추대의를 외쳤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춘추대의는 군사를 동원해 산해관을 공격하는 북벌이 아니었다. 그들이 최고로 생각하는 춘추대의는 국력을 길러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망해버린 명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달랐다. 그에게 북벌은 군사를 동원해 만주와 중원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과 효종의 북벌론에는 이론과 실제에 이토록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 같은 산당인 송준길을 병조판서에 임명해 인사와 군사 양방면의 전권을 맡겼다. 효종이 이들에게 정권을 내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들이 소리높여 주창하던 춘추대의를 실제로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춘추대의는 말로써 드높일 수 있었지만 북벌은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북벌은 군사력 확장이란 가시적 성과가 눈에 보여야 했다.


땅에 묻힌 「북벌론」

양송(兩宋)이라 불리던 송시열·송준길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그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자 효종은 재위 10년(1659) 3월에 송시열과 독대한다. 조선에서 임금과 신하가 단 둘이 만나는 독대는 금지돼 있었다. 효종이 국법을 어겨가며 독대한 이유는 보안을 위해서였다. 바로 북벌을 논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기해년의 일이라 하여 「기해독대」로 불리는 이 독대에서 효종은 이렇게 말한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효종의 북벌계획은 군사전략상으로 볼 때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청은 외견상으로 견고해 보여도 구조상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배층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이고 피지배층은 다수 민족인 한족이기 때문이다. 10만 조선정예군이 북벌을 단행하면 만주족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한족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것이 효종의 생각이었다. 효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단성있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효종이 독대까지 해가며 북벌을 주장하자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효종이 산림에 정권을 넘긴 이유는 단 하나 북벌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송시열이 북벌 자체를 반대한다면 효종은 미련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송시열 등 산림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벌을 강력히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북벌은 불가능한 망상이었다.

이때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효종이 급서한 것이다.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한 지 두 달 만이었다. 효종의 사인은 사소한 것이었다. 머리 위에 난 종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종기가 독으로 번지자 어의 신가귀(申可貴)가 종기에 침을 놓고 고름을 조금 짜내니 피가 서너 말이나 솟아나왔다.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이었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그는 수전증으로 손을 떠는 상태였다 한다. 수전증이 있는 의사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신가귀가 현종 즉위 후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수전증의 신가귀가 효종에게 침을 놓은 것도,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도 우연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으로만 돌리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컸기에 고의란 의구심이 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조정에서 북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송시열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북벌은 주장하지 않았다. 효종의 시신과 함께 북벌도 땅속에 묻힌 것이다.


예송논쟁 와중에 급서한 현종

효종의 죽음은 조정에 뜻밖의 논란을 불러왔다. 효종의 급서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효종의 장례 때 입을 상복을 두고 벌어진 논란이다. 이것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지는 유명한 「예송논쟁」이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사망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 기간이 얼마여야 하는가를 두고 발생했다.

조선의 상례(喪禮)에 따르면 부모상에 자식은 3년복을 입고, 반대로 장자상(長子喪)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어야 했다. 장자를 부모와 같이 대우한 이유는 종통을 잇는 맏아들을 그만큼 우대했기 때문이다. 장자 아닌 차자(次子) 이하의 상사에는 부모가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다.

예송 논쟁의 논거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효종은 인조의 차자였기 때문이다. 장자는 어디까지나 소현세자였다. 그러나 인조의 왕통을 이은 인물은 효종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왕통을 이은 인물에게 장자냐 차자냐를 따지는 것이 타당한 물음이냐는 반론이 가능한 것이다. 효종이 차자라는 서인의 논거와 왕통을 이은 존재라는 남인의 논거가 부딪친 것이 1차 예송논쟁이었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은 효종이 차자이므로 자의대비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선도로 대표되는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자지만 왕통을 이었으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자칫하면 효종이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 대신 왕위를 이은 것이 정당하냐는 승통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 정국에 피바람을 부를 수도 있는 민감한 문제였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 승통의 정당성을 둘러싼 거대한 정치문제로 비화될 뻔하다가 가까스레 1년설을 주장한 서인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서인이 집권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설을 주장하다 패배한 남인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정치보복은 행해지지 않았다. 형식상 정치논쟁이 아니라 예법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임금에게 야박한 신하들

그러나 15년 후 벌어지는 2차 예송논쟁은 학문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종 15년에 벌어지는 2차 예송논쟁은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함으로써 발생한다. 자의대비가 그때까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효종 장례 때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1차 예송논쟁이 아들 상사 때 어머니의 상복 착용 기간 여부였다면 2차 예송논쟁은 며느리 상사 때의 시어머니의 상복 착용 기간 여부였던 것이다.

장자·차자의 상사 때 부모의 상복 착용 기간이 달랐던 것처럼 장·차자부 상사 때의 상복 착용 기간도 달랐다. 장자부(長子婦)의 상은 1년복을, 차자부(次子婦) 이하의 상은 9개월복을 입었던 것이다. 사망한 사람만 달랐지 그 내용이나 배경은 1차 예송논쟁과 똑같았다. 1차 예송논쟁 때 1년설을 주장했던 서인들은 2차 예송논쟁 때 9개월설을 주장했고, 1차 때 3년설을 주장했던 남인들은 2차 때는 1년설을 주장했다. 즉 서인들은 1차 예송논쟁 때 효종을 차자로 대우한 것처럼 효종비를 차자부로 대우한 것이고 남인들은 왕통을 장·차자 여부보다 높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차자부가 아니라 왕비로 대우한 것이다.

1차 예송논쟁 당시 현종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서른네 살의 장년이 돼 있었다. 국왕인 현종의 자리에서 볼 때 1차 예송논쟁의 결과는 내심 불만이었다. 당시만 해도 송시열과 윤선도 같은 대군 사부들의 논쟁에 판정을 내릴 만한 견식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버지 효종이 누구인가? 바로 국왕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국왕을 장자와 차자로 나누어 차등있게 대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통을 이었으면 그뿐, 나머지 모든 예법은 왕통에 복종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한 직후에 서인들이 자의대비 복제에 혼선을 빚었던 것이 논쟁을 부추겼다. 서인은 처음에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의정했다가 1차 예론에 참여했던 서인 중진들의 말을 듣고 9개월로 고쳐 올렸던 것이다. 현종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당초 1년복으로 의정했다가 왜 9개월복으로 개정했느냐고 추궁하고 나섰다. 서인들은 여러 차례 모여 협의했으나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진퇴양난의 협곡에 빠졌던 것이다. 현종이 원하는 대답은 1차 예송 때 서인들이 주장했던 1년설과 지금의 9개월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시인하면 서인들은 국왕을 능멸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자충수(自充手)에 빠지는 것이었다. 서인들이 대답을 못하고 시간만 끌자 현종은 분노했다. 그리고 1,2차 예론은 모두 서인들이 왕권을 업신 여긴 결과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전의 기해예론(1차 예송)은 3년복으로 고치고 이번의 갑인예론(2차 예송)도 1년복으로 고쳐라. 기해복제를 과인은 국제(國制:국조오례의)를 쓴 것으로 생각했는데 안팎에서는 고례(古禮:중국의 옛법)를 썼다 하니 임금이 하는 일은 가볍고 신하들이 하는 일은 무겁다는 말이냐? 경들이 모두 선왕(효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감히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고 주장하니 신하가 되어 감히 임금에게 야박하게 굴면서 누구에게 두텁게 굴 것인가?』

현종이 말하는 「두텁게 구는 누구」란 1차 예송 논쟁 때 1년설을 이끌었던 송시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서인들에 대한 치죄에 나섰다. 평소 원만했던 현종의 성품으로 보아 이례적인 분노였다. 현종은 드디어 예론을 잘못 이끈 책임을 물어 서인 영상 김수흥을 귀양보내기에 이른다. 귀양가는 서인의 자리는 허적, 윤휴 같은 남인들이 메웠다. 이때가 1674년이었으니 남인들은 1623년의 인조반정 이래 반세기 만에 정권을 잡는 길이었다. 분명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견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현종이 급서했던 것이다. 현종은 왜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것일까? 『현종실록』은 『현종의 기운이 몹시 지쳐 병이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과로라는 뜻이다. 과로로 쇠약해진 몸에 열이 발생했고, 그런 지 열흘 만인 그해 8월 승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의혹을 부추기는 점은 이때가 약방에서 시약청을 설치한 하루 만의 일이라는 점이다. 임금의 병이 조금 심하다 싶으면 서둘러 시약청을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시약청 설치 하루 만에 사망하는 일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당시 현종은 「임금에게 야박하게 구는」 서인들을 한창 몰아세우던 중이었으므로 의혹이 잇따랐다. 그런 의혹을 남긴 채 현종은 가고 15세의 어린 숙종이 뒤를 이었다.


노론에 둘러싸인 소론 임금 경종

숙종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경종의 신산스러운 삶은 「장희빈의 아들」이란 한마디에 포괄돼 있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와 국왕의 총애를 놓고 다투던 숙종 때는 조선 전기간에 걸쳐 당쟁이 가장 심한 때였다. 숙종 때는 서인과 남인 사이에 죽고 죽이는 살육이 거듭됐는데,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가의 여인이었고 희빈 장씨는 남인가의 여인이었다.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의 부상과 몰락은 익히 알려진 대로 현모양처와 악처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리전이었다.

재위 15년 동안이나 후사가 없어 애를 태우던 숙종에게 옥동자를 안겨준 여인이 바로 희빈 장씨였다. 숙종이 이 옥동자를 원자로 정호하려 하자 서인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숙종은 서인 정권을 갈아치운 후 남인에게 정권을 주면서 원자 정호를 강행했고 동시에 인현왕후를 내쫓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그리고 원자로 정호한 옥동자를 세자로 책봉했으니 그가 바로 훗날 경종이다.

그러나 또 다른 후궁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왕자를 낳자 희빈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점차 식어갔는데 서인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희빈 장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남인에 대해 서인이 집요한 공세를 계속한 결과, 희빈 장씨가 왕비에서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고 남인들도 몰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저로 쫓겨났던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가 되었다. 그후 몰락한 남인에 대한 치죄를 둘러싸고 서인들은 둘로 양분된다. 남인들을 강하게 치죄해야 한다는 강경파가 노론이고 유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온건파가 소론이었다.

숙종과 노론이 희빈 장씨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해 사약을 내려 죽이자 그녀 소생인 세자의 처지는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노론은 자신들이 죽여버린 여인의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연산군 시절과 같은 살육이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숙종 또한 모후가 사형당한 한을 품은 아들이 뒤를 잇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숙종과 노론 대신 이이명은 숙종 43년(1717)에 이른바 「정유 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정유독대의 합의사항은 숙종의 와병과 소론의 격렬한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경종이다. 그러자 다급해진 노론은 경종을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경종의 이복동생, 즉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밀었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요구했다. 노론이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청한 까닭은 그녀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노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34세였던 경종은 노론의 이 주장을 받아들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다.

하지만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했다. 이는 세제를 정사에 참여시키라는 말로 사실상 세제에게 정권을 넘기라는 주청이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미성년이 아닌 한 「대리」라는 말은 신하가 입에 담을 수 없는 금언(禁言)이었다. 국왕이 세제에게 대리시키겠다고 해도 신하들은 죽어도 안 된다며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해야 했다. 이런 어마어마한 말을 신하들이 먼저 주청하고 나선 것이다.

경종은 이를 받아들여 세제 대리청정을 허락했으나 소론이 격렬히 반발하고 나섰다.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은 노론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을 역모로 몰았고 경종이 이를 받아들여 정권은 소론에게 돌아갔다. 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 남인가의 인물인 목호룡이 노론쪽에서 경종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이른바 「삼급수 살해 사건」을 고변하면서 조정은 충격에 휩싸인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창집·이이명 등 노론 사대신과 많은 노론가 자제들이 사형당하면서 노론은 몰락하는데 이것이 바로 임인옥사다.


게장과 생감

경종의 사인(死因)이 두고두고 의혹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임인옥사 수사보고서인 임인옥안에 세제 연잉군의 이름도 역적으로 등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노론 사대신을 제거한 소론 강경파의 공세는 이제 세제를 향했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과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는 세제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경종에게 양자를 들여 그를 후사로 삼고 세제를 폐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성사되지 못했다.

경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경종의 급서는 효종·현종의 사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파문을 불러왔다. 경종이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정치적, 의학적 정황 증거는 한둘이 아니었다.

정치적 정황 증거는 소론강경파와 경종비가 노론계인 연잉군 폐출을 계획하던 와중에 발생한 사건이란 점이었다.

의학적 견지의 정황 증거도 많았다. 그 하나가 게장과 생감이었다. 경종의 식욕이 부진하자 노론계인 대비와 연잉군이 게장을 진어하고 곧바로 생감을 올렸다. 그런데 게장과 생감은 의가(醫家)에서 꺼리는 상극이었다고 『경종실록』은 적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가슴이 조이듯이 아파왔던 것이다. 그 후 심각한 병세에 빠진 경종의 처방을 놓고 연잉군은 다시 어의와 다툰다. 연잉군이 인삼차를 올리려 하자 어의(御醫) 이공윤이 『자신이 쓴 강한 처방약과 인삼은 서로 상극』이라면서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나 연잉군은 어의 이공윤을 꾸짖어가며 인삼차를 연달아 세 번이나 올렸는데 그 직후 경종이 세상을 떴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양자 입적 문제, 의학적으로는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진어문제 등이 경종 독살설을 진실로 믿게 만들었다. 더구나 소론과 노론이 격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역안에 등재된 노론계 세제가 어의와 다투어가며 특별 처방을 고집한 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보아도 문제 있는 처신임에는 분명했다.

의혹의 당사자인 연잉군이 즉위하자 전국 각지에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벽서가 나붙었다. 심지어 군사 이천해란 인물은 즉위한 연잉군, 즉 영조가 능에 행차할 때 어가를 가로막으며 영조를 비난하고 나섰다. 영조는 이천해의 말을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며 사관에게 싣지 못하도록 명해서 실록에는 다만 「들을 수 없는 말(不忍之言)」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영조는 이천해는 물론 경종 시절 자신을 핍박했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사형에 처했으나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김일경과 목호룡은 영조가 『네 목을 베어 대행대왕(경종)의 빈전에 바치겠다』라고 꾸짖자 『나도 선왕(경종) 곁에 묻히기를 원하오』라며 반발했다. 경종의 충신은 영조가 아니라 자신들이란 뜻이었다.

급기야 영조 재위 4년에 소론 강경파가 경종의 복수를 내걸고 영남을 중심으로 군사를 일으켜 경종의 복수와 영조 정권 타도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군사는 조석으로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전군이 모여 곡을 했다. 영조의 정통성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했으나 재위 31년에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 투서사건으로 경종독살설은 다시 재연된다. 국문당하던 소론인사가 『나는 갑진년(경종이 사망하는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경종 독살설을 다시 꺼냈기 때문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정계에서 소외된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이 논쟁은 틈만 생기면 재연됐다. 경종 독살설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급기야 사도세자에게까지 여파를 남겨 조선 왕실사상 가장 큰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경종독살설의 한가운데 있던 인물이다. 영조는 비록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태생적 한계상 노론일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분명히 노론이 선택했기에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영조 당시에 논란이 되었던 「택군(擇君)」논쟁이 대표적이다. 영조는 즉위한 후 경종 때의 임인옥안에 자신이 역적으로 등재된 것에 부담을 갖고 이를 뒤집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영조는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노론과 함께 과거 음울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만약 경종의 양자를 들여 후사를 이으려던 소론 강경파의 계획이 성공했으면 그는 왕위는 커녕 사형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부왕과는 처지가 달랐다.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 어느 쪽에도 정치적 부채가 없었다. 사도세자가 보기에 부왕이 세제 시절 노론과 손잡고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것은 분명 역모로 볼 소지가 있었다. 영조와 노론처럼 경종 때의 행위는 숙종과 영조에 대한 충성이었다고 강변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위는 경종의 위치에서 볼 때 분명 역모에 가깝거나 역모였다.

사도세자는 노론에 불만을 느꼈다. 조선은 사실상 노론의 나라란 생각이 들었다. 부왕 영조가 힘겹게 이끌어오는 탕평책은 한계가 보였다. 부왕 자신이 경종 시절 노론에 부채를 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공격했던 소론에 증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조 31년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투서사건으로 영조의 탕평책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두 사건은 소론에 대한 영조의 자제심을 무너뜨렸고 노론은 이 기회를 이용해 소론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였다. 영조 또한 이에 동조해 두 사건을 역모로 처리한 후 그해 10월 『천의소감』이란 책을 편찬하는데 그 내용은 경종 시절부터 두 사건에 이르기까지 노론을 포함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경종독살설의 한 재료인 「게장」은 대비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방에서 올린 것이라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물론 이는 권력자의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편

사도세자는 소론이 연일 죽어나가는 두 사건의 와중에 노론의 사건확대책에 반대했다. 그는 되도록 두 사건을 온건히 처리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러한 처신이 노론의 결정적인 반감을 사게 된다. 부왕 영조가 분노하는 나주벽서사건에서조차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하는 것을 본 노론은 세자의 정치견해가 소론이란 결론을 내리고 세자 제거의 길로 나선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세자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데다 부인 혜빈 홍씨에게마저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극대화된다. 그의 부인 혜빈 홍씨는 누구 못지않은 노론 골수당원이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라고도 불리는 혜빈 홍씨의 친정은 유명한 노론 가문이었다. 그녀의 조상인 홍주원은 선조(宣祖)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난 정명공주의 부마였으니 당연히 서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은 자신의 딸 홍씨를 세자빈으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한 덕택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파격적인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딸이 세자빈이 된 후 김상로 등과 함께 집권당인 노론을 이끄는 실력자가 되었다. 사도세자가 노론으로 처신하든지 아니면 혜경궁 홍씨가 소론으로 처신했으면 최소한 뒤주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인적 기질에다 강한 성격을 지닌 사도세자가 소론의 처신을 보이며 노론과 대립하자 세자의 외척인 풍산 홍씨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세자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당론을 좇아 세자를 제거하느냐였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동생 홍인한은 물론 혜경궁 홍씨까지 세자를 버리기로 했다. 이처럼 세자의 외척까지 세자가 소론이란 이유로 제거의 길로 나서는 판에 여타 노론 중진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한로, 노론 영수 김상로, 홍계희, 윤급 같은 노론 중진 다수가 이에 가담했다.

사도세자는 안팎에서 고립됐다. 소조(小朝:세자궁)에서는 혜경궁 홍씨가 노론의 간자(間者) 역할을 했으며 대조(大朝:영조)에서는 정순왕후와 후궁 문씨가 세자를 헐뜯었다. 조정의 노론 대신들은 호시탐탐 세자를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런 포위 속에 위험을 느낀 세자는 자구책으로 병을 위장한다. 미행(微行)을 통해 허점을 보임으로써 노론의 예봉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세자의 자구책은 이런 소극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소론과 연합하는 적극적인 것도 포함돼 있었다. 세자는 우의정을 역임했던 소론 영수 조재호와 비밀리에 연합하는 데 성공한다.


노련한 정치인 혜경궁 홍씨

세자가 의문의 관서행에 나선 것도 소론과 결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평안감사 정휘량이 소론이자 사돈 사이였으므로 연합하려 했는데, 정휘량이 홍봉한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수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론에 세자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세자는 관서행을 계기로 자신을 제거하려는 노론의 공세를 신속한 기동력으로 막아낸다. 그러자 노론은 드디어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바로 나경언의 고변이다. 나경언의 고변은 주로 세자의 개인적 비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고변 전후의 사정으로 볼 때 그 핵심 내용은 개인적 비행이 아니라 군사 행동에 관한 내용으로 추측된다. 즉 세자가 군사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역모 고변의 성격을 띤 것이다.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지 29일 후인 영조 38년 윤5월13일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세자는 여드레 동안 뒤주 속에서 신음하다 죽었다. 세자가 죽던 날 영조는 『13일의 일은 종사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개인적 비행이라면 종사까지 들먹였을 리가 없다. 또한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주장한 대로 세자의 정신병 때문이라면 솜씨 있는 어의들을 동원해 치료하거나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휴양을 시켰지 뒤주에 가두어 죽일 이유는 더욱 없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노론의 정치공세에 희생되었다는 점은 세자와 연합한 소론 영수 조재호가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던 셋째 날 『조재호가 세자와 결탁했다』며 영조에게 고해 바친 인물은 다름아닌 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들은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한 정치적 의도를 읽지 못하고 그 내용을 전적인 사실로 받아들였기에 많은 오류를 범했다. 엄밀한 자료 해석과 검증 과정을 생략한 탓에 「영조의 이상 성격과 세자의 정신병 때문에 뒤주의 비극이 발생했다」는 홍씨의 의도적 변명에 말려든 것이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서술한 때는 뒤주의 비극이 발생한 영조 38년(1762) 직후가 아니라 순조 5년(1805) 이후다. 즉 이십 후반의 청상과부로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칠십대의 노회한 정객으로서 『한중록』을 서술했다는 말이다.

홍씨가 『한중록』을 서술한 목적은 단 하나 「친정을 신원시키기 위해서」였다. 홍씨의 친정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그날부터 급전 직하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이유는 바로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이란 이유에서였다. 실제 그녀의 오빠 홍낙임은 정조를 축출하고 은전군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련된다.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가 즉위한 후 그녀의 친정은 대리청정하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다시 한 번 단죄되었는데 그후 정순왕후 김씨가 죽자 비로소 가문의 신원에 나서서 『한중록』을 작성한 것이다. 「현실은 살아남은 자의 것」이란 경구를 입증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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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조선왕독살사건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왕독살사건으로 재판 인종에서 고종까지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의 임금들을 조명한 저서.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 서-제14대 선조,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소현세자, 사라진 북벌의 꿈-효종 등 조선조 9인의 임금과 세자 에게 뒤따라다닌 사인의 의혹과 진실을 파헤친 책.

목차
<누가 왕을 죽였는가> 개정판에 부쳐

1.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제12대 인종) - 이질 증세와 주다례
폐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서른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백돌아! 백돌아!
홀로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존하겠소
문제의 '주다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2.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제14대 선조) - 중풍과 찹쌀떡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주상의 뜻
어젯밤엔 편히 잤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문제의 찹쌀밥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사실처럼 굳어진 독살설

3.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소현세자) - 학질과 의관 이형익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볼모로 가는 두 형제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부정父情 아닌 부정否定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아담 샬과의 만남
비운의 귀국길
인조에게 쏠린 몇 가지 의혹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세자 일가의 비극
조선의 좌절, 세자의 좌절

4. 사라진 북벌의 꿈(제17대 효종) - 종기와 어의 신가귀의 산침
소현세자의 유산
용상에 가려진 효종의 아킬레스건
모든 것은 북벌로
효종의 딜레마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손을 떠는 어의 신가귀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5. 예송시대에 가려진 죽음(제18대 현종) - 복통과 뜸 치료
효종의 모후 자의대비과 입어야 할 복제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4가지 이유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예론을 금하노라
며느리상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의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6. 이복형제의 비극(제20대 경종) -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아이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두 모자의 운명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왕세제를 책봉하소서
경종의 진심
목호룡의 고변
적발하여 정법하라
게장, 생강 그리고 인삼차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

7. 개혁군주의 좌절(제22대 정조) - 홧병과 연훈방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3대 모역 사건
규장각과 장용영 그리고 화성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아서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훈방 처방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정순왕후의 세상

8.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제26대 고종) - 해외 망명 계획과 식혜
홍선군의 아들 명복
고종과 일본의 악연
국내의 혼란과 일본의 내정간섭
일본의 병탄과 고종의 대응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고종의 해외 망명 작전
마지막 군주의 최후
고종이 해외로 망명했다면

조선엔 왜 독살설이 많을까

[알라딘 제공]


책소개

"누가, 왜 조선의 왕들을 독살했나"

제12대 인종(1515-1545), 제14대 선조(1552-1608), 소현세자(1612-1645), 제17대 효종(1619-1659), 제18대 현종(1641-1674), 제20대 경종(1688-1724), 제22대 정조(1752-1800), 제26대 고종(1852-1919).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왕조에서 독살설에 휘말렸던 임금은 무려 8명이나 된다. 조선왕조가 배출한 왕이 27명인 것을 감안하면 조선은 지구상의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던 왕조였다.


누가, 왜 왕들을 죽였나.

실제로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에겐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는 꼭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했고,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독살설은 또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집중돼 있다.
왜 그럴까?

<사도세자의 고백>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등 숱한 대중적 역사서로 인기몰이를 한 바 있는 이덕일 숭실대 교수는 ''누가 왕을 죽였는가''의 개정증보판으로 내놓은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에서 흥미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 망했어야 할 조선왕조의 기형적인 정치행태 ''독살''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우선 역사가 ''너무'' 장구했다. 세계 역사상 대개의 왕조는 200~300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는데, 조선은 쇠퇴기ㆍ멸망기에 접어든 뒤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라는 것이다.

무릇 한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에서 시련을 극복 못하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야 하는데, 유독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돼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살아 있었다.

이덕일 교수는 조선왕조의 쇠퇴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본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일본의 침략에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을 두고 혼자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부터 조선의 사회체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지배 계급은 군림의 이유를 상실했다는 설명이다. 백성들이 국왕인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지른 행위는 사대부→일반백성→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제 자체를 부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는 사대부들의 권력 획득 방식 ''독살''

개국 초 조선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가리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 국가였다. 그러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포 납부로 군역 면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1488-1544)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포 납부로 군인 고용)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병역의무가 면제됐다.

저자는 "개국 후 200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미 생명 사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고 평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고, ''국왕 독살설''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중 하나다. 독살설이 유독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부터 본격적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약한 왕권(王權)과 명분 없는 신권(臣權)의 합작 ''독살''
 
조선 후기 들어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왕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닌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 신하들은 왕을 적당(敵黨)의 일원으로 봤다.

저자는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로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며 "오히려 끊임없이 신하들의 견제를 받는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임금은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으며, 신하들은 당론에 따라 얼마든지 특정 임금을 배척했다. 신하의 임금 선택을 ''택군(擇君)''이라고 하는데 국왕 독살설이야말로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의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반정(反正)이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 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저자는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독살"이라며 "독살설이야말로 왕조의 말기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 이후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프레시안 2005.07.29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이제서야 소감을 쓴다. 남들처럼 근사한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글솜씨도 없고 길게 쓰는 재주는 더더욱 없어서 미루고 미뤘는데 요즘 MBC 드라마 '이산 (정조)'를 보면서 그때 느꼈던 흥분을 다시 느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책장을 넘기면서 숨이 가쁠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서를 좋아해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시기에 마침 저 책을 읽은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조선왕 독살사건'이랑 '누가 왕을 죽였는가', 둘이 다른 책인 줄 알고 두 권을 다 골랐었는데 알고 보니 전자는 개정판이었다. 처음에 '누가 왕을 죽였는가'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그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좀 점잖게 고쳐서 재판했다.

특히 내가 흥분했던 부분은 인종, 경종, 정조 이야기다. 책 읽기 전부터도 조선의 왕 중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책 읽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숨을 씩씩 몰아쉬곤 했다. - 난 지금도 사극을 보거나, 인수대비나, 문정왕후, 선조, 인조, 정순왕후, 망할 놈의 노론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른다. 몇백년이나 된 일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화를 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ㅋ

불쌍한 정조대왕님.ㅜㅜ 
인생 참 험난하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죽었고, 외할아버지란 사람은 역적들이랑 짜고 사위랑 손자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고, 친할아버지 영조는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맨날 천날 충성심을 시험하질 않나...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의복을 갖추고 잠자리에 들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루 4시간 이상을 잔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을 잇는 천재군주, 만능군주,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대왕께서 그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 역사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ㅜㅜ

정조 사망시에 아니 정조 대왕 승하시에 그 옆에 정순왕후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책을 100% 믿기도 어렵지만 정순왕후 같은 여자면 능히 정조를 독살하고 남았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영조가 정조를 꽤나 아낀 걸로 나오는데... 만약 진짜 드라마 '이산' 같았다면 영조도 참 불쌍한 왕이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뒤늦게 후회를 하니 영조는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오죽 참담했으랴.


이 책은 조선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더욱 즐길 수 있다. 어릴 때 인상깊게 읽었던 왕후 간택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순왕후-_-;;는 알수록 망할 X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것이다.

아..  혈압올라.ㅠ 글쓰다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지네..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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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군의 역사가 파란만장할 수 밖에 없기에 연산군과 광해군은 드라마나, 영화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시대극 소재 중 하나이다.  재미있는 것은 광해군을 배경으로 왕의 여자라는 드라마가, 연산군을 배경으로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각각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장녹수와 김개시에 대해 알아보자. (출처: 파란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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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궁녀들 주에서 명성을 떨친 예는 아무래도 평범한 궁녀로 입궁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후궁이나 왕비의 자리에 올랐거나 후대 왕을 출산한 경우다.

예컨대 숙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경종을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쫓겨난 장희빈, 숙종의 무수리로 들어갔다가 훗날의 영조를 출산한 최숙빈, 고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영친왕을 출사하고 황귀비(皇貴妃)까지 오른 엄비 등이다. 장희빈, 최숙빈, 엄비 등은 궁녀 출신이라고 해도 후대 왕을 출산했으므로 평가가 조심스러웠다.

이에 비해 궁녀로서 왕의 총애만 받고 후대 왕을 낳지 못했던 장녹수(張綠壽)와 김개시(金介屎)는 온갖 비난을 받아야했다. 특시 장녹수와 김개시(개똥이)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기에 그 비난이 더더욱 심했다. 역설적으로 갖은 비난을 받다 보니 장녹수와 김개시는 조선 시대 궁녀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고 한다. 가비란 집안의 여자 종을 말한다. 제안대군의 여자 종이었다는 뜻이니 장녹수는 사노비(私奴婢)였던 셈이다.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가비가 된 내력은 대군의 가노(家奴), 즉 남자 종에게 시집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좀더 생각해 보면 약간 애매한 부분이 나타난다. 장녹수가 원래 노비 출신이었는지, 아니면 남자 종에게 시집가서 노비가 되었는지 불분명하다. 이는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張漢弼)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장한필은 문과에 합격하고 문의 현령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아버지 쪽으로 본다면 엄연히 양반 가문의 딸인 장녹수가 어찌하여 제안대군의 남자 종에게 시집을 갔단 말인가.

실마리는 아무래도 장녹수의 어머니 쪽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장녹수의 친언니 장복수(張福壽)가 내수사의 여자 종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장녹수의 아버지는 양반 관료였지만 어머니는 노비, 그것도 내수사의 노비였다는 얘기가 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내수사의 여자 노비였으므로 그 자손들도 어머니를 따라 자연히 내수사의 노비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녹수도 근본은 내수사 노비였다고 보아야 한다. 장녹수가 다른 곳이 아닌 제안대군의 가노와 결혼한 것도 결국은 장녹수가 내수사 노비였기 때문이다.

제안대군에게 소속된 노비들은 궁방(宮房)노비인데, 궁방 노비는 대부분 내수사의 노비 중에서 충원된다는 사실에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장녹수는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몸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장녹수 자매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장한필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남편도 없이 어린 자매를 데리고 얼마나 어렵게 생활했을지 짐작이 간다.

장녹수는 궁녀로 입궁하기 전에 이미 아들까지 낳은 상태였다. 나이도 서른이 넘은 데다 얼굴이 썩 예쁜 편도 아니었다. (실제 얼굴은 전해지지 않으나 실록에 전함.) 단지 노래와 춤에 능했으며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은 소리를 내는 개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장녹수는 예능 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셈이다.

이런 소문은 연산군에게도 들어갔다.

연산군은 조선 시대의 왕들 중에서 예술적인 기질이 가장 뛰어난 왕이었다. 그랬으니 연산군이 노래와 춤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당연히 장녹수를 만났을 것이다. 실제로 장녹수의 노래와 춤은 연산군을 매료시킬 만큼 뛰어났던 모양이다. 눈에 확 띄는 미녀도 아니고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 그것도 연상인 장녹수를 연산군은 딱 한번 보고 바로 입궁시켰다고 한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연산군 8년(1502년)에 종4품의 숙원(淑媛)이 되었다가 1년 후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으로 올랐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이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매혹되었기에 가능했다. 연산군은 장녹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고, 둘 사이에 영수(靈壽)라는 딸까지 낳았다.

장녹수와 연산군이 그토록 빨리 가까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 두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장녹수와 연산군은 예술적 교감이 가능했다. 춤과 노래에 뛰어난 장녹수와 예술을 사랑하는 연산군. 얼굴, 나이와 신분을 초월하여 두 사람을 이어 준 끈은 바로 이 예술적 교감이었다.

둘째, 모성애에 목말라하는 연산군의 갈망을 장녹수가 체워 주었다. 장녹수는 아버지 없이 자란 반면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랐다. 이렇게 자란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갈구했을 것이다. 특히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난 후 생모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치는 연산군의 모성애를 연상의 장녹수가 채워 주었다.

예컨대 "(장녹수는) 왕을 조롱할 때는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했고, 왕을 욕할 때는 마치 노예를 대하듯 했다. 다 자란 성인인 연산군의 이런 행동이 정신장애로 보이기도 하지만 연상의 연인에게서 모성애를 갈구하는 가엾은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실제로 장녹수의 영향력이 가장 높았던 것은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복수하겠다고 갑자사화를 일으킨 시점이었다.

그런데 장녹수는 왕의 총애로 얻은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무절제하게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으며, 유별나게 재산에 욕심을 부려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던 것이다.

그것이 장녹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보면 뛰어난 예술가로 평가할 수도 있다. 노비의 신분에서 후궁까지 올랐으니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녹수가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권력을 쥐자 사람들은 공인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했다.

이름 없는 노비일 떄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것으로 충분했지만 왕을 좌우하는 권력자가 된 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절제하고 왕의 권력을 절제시켜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녹수는 이런 점에 전혀 무신경했거나 무능력했다.


반면에 김개시는 장녹수와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예술적 재능만 있고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에는 취약했던 장녹수와 전혀 달랐다. 김개시는 노래나 춤이 아니라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게다가 장녹수는 입궁 후 곧바로 후궁이 되었지만 김개시는 어렸을 때 입궁하여 상궁까지 올랐을 뿐 정식 후궁이 되지도 못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하면 김개시는 '천예(賤隸)의 딸' 즉 천한 노예의 딸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김개시는 노비의 딸이었으므로 당연히 노비의 신분이었다. 궁녀로 입궁한 후에도 주로 공노비인 내수사 출신의 궁녀들과 어울렸다. 게다가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고 한『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김개시는 장녹수와 달리 어린 나이에 입궁했다.

김개시가 비숫한 시기에 입궁한 변상궁에게 "우리는 아이 때부터 함께 살다가 우연히 사이가 멀어진 게 아닌가?" 라고 말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김개시는 애초에 훗날의 광해군이 되는 동궁 소속의 궁녀로 입궐했다.

광해군이 열여덟 살 때 세자에 책봉되었으니 김개시는 그보다 어린 나이에 입궁했을 것이다. '아이 때'라는 말로 추정한다면 조선 시대 여자의 성년나이인 열다섯 살 전으로 짐작된다. '아이 때' 동궁 나인으로 입궐한 김개시는 청년 광해군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선조의 나인이 되었다. 글도 잘 알고 문서처리에도 능숙한 김개시의 역량이 발탁 사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김개시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다시 광해군의 지밀 나인으로 옮겼다. 광해군은 자신의 궁녀를 데려온 것이지만 김개시가 아버지 선조를 모셨던 궁녀인 만큼 비난의 소지가 적지 않았다.

광해군이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김개시를 옆에 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째는 세자 시절에 맺은 인연이었다.

둘째는 궁중에서 자신을 위해 성심으로 충성할 궁녀, 그것도 똑똑한 궁녀가 필요해서였다.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만들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제조 상궁으로서 당대의 실력자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당시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한 실세였다.

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권력을 틀어쥔 김개시는 오직 광해군만을 위해 충성했다. 광해군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중에서 온갖 악역을 떠맡은 궁녀가 바로 김개시였다.


당시 광해군을 위협하는 최대의 인물이 인목대비 김씨였는데, 김개시는 인목대비를 무력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인목대비의 궁녀들을 회유하여 첩자로 활용하기도 하고 사건을 조작하여 인목대비에게 덮어 씌우기도 했다.

광해군 5년(1613년)에 계축옥(癸丑獄)으로 인목대비의 친정을 멸문시킨 후 저주 사건(咀呪事件 :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사건)을 제기해 인목대비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간 주동자도  김개시였다.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없애려고 했다. 광해군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악역을 떠맡았다. 김개시의 끈질긴 공작에 의해 인목대비는 기어이 서궁에 유폐되고 말았으며, 그 이후에도 죽음 직전까지 몰리는 수난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김개시는 온갖 술수와 모함을 일삼는 정치꾼으로 변해 버렸다.


출처: 파란 블로그에서 펌.
http://blog.paran.com/desireu/744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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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당쟁의 원인을 알고자 한다면 우선 당쟁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당쟁은 조선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익히 들어온 대로, 나라를 쇠망케 한 망국병이기만 했을까?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쓴 <조선시대의 당쟁사>를 보면 조선 중기 이후 정치의 중심이었던 당쟁을 통사적으로 서술해 이런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고있습니다.

조선시대 당쟁사. 1 상세보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펴냄
사림정치와 당쟁의 생생한 기록 <조선시대 당쟁사>는 조선시대의 당쟁을 소개하는 책이다. 광복 이후 우리의 정치사는 전근대적인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잔재를 극복하고 우리 시대에 맞는 정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앞선 조선시대 사림정치의 산물인 당쟁의 속성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당쟁이란 붕당이 갈려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림정치는 세조연간 사림파의 등용에서 기원한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는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젊고 야심찬 사림을 정계에 불러들였다. 주자학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파는 도덕적 수양을 앞세우며 훈구파를 공격했다. 이들의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이 사림파였다. 그 사이 왕권은 약해져 신권에 밀리게 됐다. 그러나 대적할 세력이 없어진 사림은 곧 자기분열해 붕당을 낳고 이들 사이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이었다.”

최초의 붕당은 선조 8년에 관직을 놓고 갈라진 동인과 서인이었다.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 다투었다.

 “당쟁이란 근본이 권력 투쟁이었기 때문에” 자기 당에 유리한 명분·의리를 억지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효종이 죽었을 때 벌어진 예송논쟁이다. 인조의 후취 왕비인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가지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예송 논쟁은 이론을 앞세운 전형적인 권력투쟁이었다.”

예송 논쟁으로 당쟁의 골이 더욱 깊어진 붕당들은 이후 피를 부르는 싸움을 계속하다 “체제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기까지 했다.”  이때 시행된 것이 영· 정조 연간의 탕평책이었다. 그러나 노론/소론, 노론벽파/노론시파의 정쟁을 다독이려던 탕평책은 외척세도정치의 길을 열어주고 말았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순조 이후 정치는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에 완전히 장악됐다.

지은이는 이 시기를 이미 당쟁이 끝나고 일종의 `일당독재'가 행해진 기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무렵 벌어진 수많은 실정과 탐학을 당쟁 그 자체의 산물로 보아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당쟁이 외척세도정치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그 결과만 보고 당쟁 역사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이성무씨의 <조선시대의 당쟁사>中

우선 왜 당파가 나누어졌는가!


출처: 이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을 참조하여 제가 아는 사실과 함께 편집한 것입니다. (약 5년 전에 구한 거라 정확한 출처는 기억이 안나네요.)

동인서인 으로의 붕당
처음으로 당파가 갈린 것은 조식과 퇴계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 동인, 성흔과 율곡 이이를 추종하는 기호학파 서인이었습니다. 동인과 서인의 대결에서 첫 승리자는 동인이었다. 후궁의 손자로서 왕위에 오른 선조는 후궁에서는 아들을 많이 얻었지만 정비인 의인왕후에게서는 딸조차도 얻지 못했다. 서자 컴플렉스가 있던 선조로서는(후궁의 손자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비인 의인왕후에게서 아들을 얻을 때까지 세자 책봉을 미루고 싶은 것이 속마음이었는데, 동인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는 서인의 거두인 정철을 속여 정철로 하여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도록 하여 선조의 진노를 사게 하였다. 이 때 서인들은 쫓겨나고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서인들에 대해 유혈 숙청을 감행하였다.

북인남인의 출현
유혈 숙청의 과정에서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게 된다. 서인들에 대해 사형을 주장하는 과격파들을 북인, 귀양으로 그치자는 온건파들을 남인이라 했다. 북인은 조식의 문하이고 남인은 이황의 문하였다. 서인이 실각한 상태에서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과 남인이 다시 정쟁을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한 남인이 패배하고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대북소북
이렇게 북인이 정권을 잡은 후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는데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지지하던 소북은 광해군의 즉위와 함게 몰락하고 대북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 때 소북은 거의 죽음을 면치 못하고 서인과 남인은 재야세력으로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는데 대북세력은 소북세력뿐만 아니라 서인, 남인 세력을 차례로 제거해 나가기 시작하는 등 대북의 독주가 계속 되었다.

서인남인
그러다가 주로 서인들의 주도하에 인조반정이 이루어지게 되고, 대북은 몰락하게 된다.( 서인과 동인의 대결에서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들이 소북 대북 할 것 없이 모두 몰락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서인과 남인의 대결이 되는 것인데요, 서로에 대한 끝없는 복수가 더욱 치열한 싸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용서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마지막 한 놈까지 적의 씨를 말려죽이자!는 생각으로 정치를 했으니...)

이로부터 한동안 인조의 중립정책으로 인해 서인과 남인은 서로 견제세력으로서 한쪽의 독주를 막으며 정치를 하는 붕당정치의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인조의 둘째아들인 효종이 죽으면서 남인과 서인간에 치열한 예송논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원인은 이러하다.

인조에게는 인렬왕후 한씨라는 왕후가 있었다. 이 왕후는 인조와의 사이에 4명의 아들을 두게 되는데 그 첫째 아들이 소현세자이고 둘째 아들이 효종대왕이며 셋째아들이 인평대군, 넷째가 용성대군이다. 이 왕후는 병자호란이 나기 전에 승하하고 나이어린 장렬왕후가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입궁하게 된다. 소현세자는 청국에 볼모로 잡혀가서 서구의 선진문물을 접하며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흠모하게 된다. 청나라에 원한이 많았던 인조로써는 그런 소현세자가 못마땅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고 돌연 죽어버리는데, 아버지 인조로부터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많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고난 후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모두 귀향보내고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도 폐서인하여 죽여버린다.
그리고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소현세자의 상을 당해 이미 장자의 예로써(첫아들이 죽었을 경우 어머니가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다른 아들들과 다른것이 예법이라고 합니다.) 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다시 효종이 죽었을 때 장렬왕후의 상복입는 기간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서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장렬왕후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같은 예로써 3년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현종이 아직 어릴 때였으니 아무래도 목소리 큰 놈이 이겼겠지요?  이 때만 해도 현종은 예법을 잘 몰랐으므로 서인의 주장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조반정은 당당한 것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왕실이 서인세력에 일종의 빚을 지게 된 셈이었거든요...) 결국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효종의 상을 당해 차남의 예인 1년상을 치르게 된다.

그러다가 8년여 후 다시 효종의 왕후인 인선왕후가 승하하면서 또다시 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된다. 서인과 남인의 싸움은 똑같다. 서인은 인선왕후가 둘째며느리이므로 9개월의 대공설을 내세웠고, 남인은 둘째며느리이긴 하지만 중전을 지냈으므로 큰며느리와 다름이 없다며 1년의 기년설을 내세운다. 이 때는 현종도 많이 장성하여 기반이 확실한 상황이었으므로 자기의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도 둘째로써의 낮은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인의 주장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된다.

그런데 현종이 죽고 숙종이 왕위에 등극한 후 서인측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들이 옳았다고 피력하다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면서 서인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제부터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당파싸움이 계속되는 숙종시대이다. 남인은 이 시기에 망하게 되는 것이다.

숙종은 즉위 직후 아버지인 현종의 뜻에 따라 남인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현종비)는 서인의 딸이었다. 명성왕후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는 예송논쟁에서 일시적으로 남인의 편을 들어 조정의 요직에 기용되어 있었으나 서인측 사람이다.

남인의 영수 허적이 권세를 남용하는 것에 실망을 한 숙종이 훈련대장직을 서인인 김석주에게 넘기면서 남인이 거의 차지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겨주게 된다. 서인들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숙종의 종조부)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숙종의 당숙들 이른바 3복)이 허적의 서자 허견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고 고변하여 남인들을 실각시킨다. 이것이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는 사건이다.

그러다 남인편인 후궁 장씨의 소생 아들로 원자를 삼는 문제로 서인들이 반발하자
(직접적인 원인은 장희빈의 모친을 가마에서 끌어내린 사건입니다.) 숙종은 이를 서인의 딸인 인현왕후에게 원인이 있다고 죄를 물어 폐출하고 서인들을 대거 실각시키며 장씨를 왕후로 올리고 그 아들을 세자로 삼는다.

또 장희빈과 그 아들을 지지하는 남인세력을 다시 집권하게 하며,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그러나 숙종과 장희빈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들의 불화는 정국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숙종과 장희빈의 사이가 벌어지고 또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서인세력은 민씨 복위 운동을 펼친다. 이를 알게 된 남인세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복위운동의 주모자들을 심문하여 사실을 파악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그런데 숙종은 오히려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는 한편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민씨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이 사건으로 남인들은 대거 축출되고.. 그야말로 망하게 되었다
.
(이로써 서인과 대립했던 동인계열은 싸그리 망해버렸습니다. 동인도 그닥 잘한 건 없지만 조선 후기를 깡그리 망친 서인-노론-벽파가 개인적으로 훨씬 더 밉네요. )


노론소론
경종 사망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후일 경종)를 지지하는 세력은 소론, 세자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편에 섰던 숙빈 최씨(최무수리)의 아들인 연잉군(후일 영조)을 지지하는 세력은 노론이 되는 것이다. 세자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숙종이 죽고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얻어 노론을 축출한다.

이 과정에서 소론세력은 노론이 지지했던 연잉군마저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하지만, 효종이래 외아들로만 이어져 내려온 왕실에서 효종의 혈손이라곤 경종 자신과 연잉군 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경종은 동생인 연잉군을 살려준다.
하지만, 소론세력은 어떻게든 노론과 연잉군을 제거하려 하였고, 노론과 연잉군의 입장에서는 서둘러 왕위에 오르지 않고서는 언제 어떻게 죽임을 당하게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돌연 경종이 사망한다. 그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등극하게 되는데 이사람이 바로 영조대왕이다. 영조는 죽을 때까지 형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게 된다.

영조시대 최고의 참극인 사도세자 아사사건의 경우도 이러한 당쟁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조의 입장에서는 분명 소론은 역적이요 노론은 충신이겠으나 사도세자의 시각은 달랐다.

소론세력은 왕인 경종을 지키려 했던 세력이고 노론세력은 왕을 위협했던 세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장차 보위를 이어나갈 세자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고, 영조로써도 수긍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영조는 자신의 정치 기반이었던 노론의 입장에 따라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게 된다.

시파 벽파
이와 함께 소론세력은 영구히 몰락하고 노론은 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뉘게 된다. 시파는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세력이고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대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입장을 가진 세력이었다.

영조가 승하한 이후 왕위를 이은 정조는 이후 시파와 벽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하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정조 이후 어린 왕이 연이어 등극하면서 정권은 당쟁에 의한 것에서 한 집안의 세도에 의해(외척들) 좌지우지 되게 되고 그 유명한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당쟁의 직접적 원인은

당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선조 때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이다. 이조전랑이란 직책은 비록 그 직위는 낮았으나 관리의 임명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래서 그 직책의 임면은 이조판서도 간여를 하지 못하였고 반드시 그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김효원이 그 자리에 추천을 받았는데, 이조참의로 있었던 심의겸이 그를 권력에 아부하는 자라고 하여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김효원의 임기가 다 되어 후임자를 물색할 때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물망에 올랐으나 김효원이 이를 거절하여 서로간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관리와 유생들은 모두 양쪽의 어느 하나에 붙어서 대립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인 건천동에 있다고 하여 동인,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동에 있다고 하여 서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동서분당이 생긴 초기에는 주로 동인 세력이 커서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지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이를 4색 당파라 부르게 되었다.


회니논쟁

당쟁의 의미


"조선시대의 폐단중의 하나가 당쟁이다."

이것이 진실일까요? 물론 당쟁때문에 조선사회가 어려움을 격은것도 사실이지만 그 폐단만을 부각시킨것은 일본인들이 일제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 일제시대때 부각시킨 것입니다.

"조선은 편을갈라 매일 싸우기만한다. 그래서 조선이란 나라는 멸망할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일본이 조선을 바른길로 인도하기위해 조선을 다스려야 한다."

이렇게 조선 백성들을 주눅들게하고 그들의 식민 정책을 타당화 한면이 더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당쟁이 처음에는 학문적인것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권 탈취의 용도로 변질 된것은 사실이지만 당쟁의 장,단점을 확실히 구분하여 우리가 바로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이 글은 몇 년 전에 미니홈피에서 지식인과 제가 보고 있던 책을 참조하여 편집한 것이라서 정확한 원본 출처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문제되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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