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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당쟁의 원인을 알고자 한다면 우선 당쟁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당쟁은 조선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익히 들어온 대로, 나라를 쇠망케 한 망국병이기만 했을까?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쓴 <조선시대의 당쟁사>를 보면 조선 중기 이후 정치의 중심이었던 당쟁을 통사적으로 서술해 이런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고있습니다.

조선시대 당쟁사. 1 상세보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펴냄
사림정치와 당쟁의 생생한 기록 <조선시대 당쟁사>는 조선시대의 당쟁을 소개하는 책이다. 광복 이후 우리의 정치사는 전근대적인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잔재를 극복하고 우리 시대에 맞는 정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앞선 조선시대 사림정치의 산물인 당쟁의 속성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당쟁이란 붕당이 갈려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림정치는 세조연간 사림파의 등용에서 기원한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는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젊고 야심찬 사림을 정계에 불러들였다. 주자학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파는 도덕적 수양을 앞세우며 훈구파를 공격했다. 이들의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이 사림파였다. 그 사이 왕권은 약해져 신권에 밀리게 됐다. 그러나 대적할 세력이 없어진 사림은 곧 자기분열해 붕당을 낳고 이들 사이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이었다.”

최초의 붕당은 선조 8년에 관직을 놓고 갈라진 동인과 서인이었다.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 다투었다.

 “당쟁이란 근본이 권력 투쟁이었기 때문에” 자기 당에 유리한 명분·의리를 억지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효종이 죽었을 때 벌어진 예송논쟁이다. 인조의 후취 왕비인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가지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예송 논쟁은 이론을 앞세운 전형적인 권력투쟁이었다.”

예송 논쟁으로 당쟁의 골이 더욱 깊어진 붕당들은 이후 피를 부르는 싸움을 계속하다 “체제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기까지 했다.”  이때 시행된 것이 영· 정조 연간의 탕평책이었다. 그러나 노론/소론, 노론벽파/노론시파의 정쟁을 다독이려던 탕평책은 외척세도정치의 길을 열어주고 말았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순조 이후 정치는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에 완전히 장악됐다.

지은이는 이 시기를 이미 당쟁이 끝나고 일종의 `일당독재'가 행해진 기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무렵 벌어진 수많은 실정과 탐학을 당쟁 그 자체의 산물로 보아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당쟁이 외척세도정치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그 결과만 보고 당쟁 역사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이성무씨의 <조선시대의 당쟁사>中

우선 왜 당파가 나누어졌는가!


출처: 이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을 참조하여 제가 아는 사실과 함께 편집한 것입니다. (약 5년 전에 구한 거라 정확한 출처는 기억이 안나네요.)

동인서인 으로의 붕당
처음으로 당파가 갈린 것은 조식과 퇴계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 동인, 성흔과 율곡 이이를 추종하는 기호학파 서인이었습니다. 동인과 서인의 대결에서 첫 승리자는 동인이었다. 후궁의 손자로서 왕위에 오른 선조는 후궁에서는 아들을 많이 얻었지만 정비인 의인왕후에게서는 딸조차도 얻지 못했다. 서자 컴플렉스가 있던 선조로서는(후궁의 손자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비인 의인왕후에게서 아들을 얻을 때까지 세자 책봉을 미루고 싶은 것이 속마음이었는데, 동인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는 서인의 거두인 정철을 속여 정철로 하여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도록 하여 선조의 진노를 사게 하였다. 이 때 서인들은 쫓겨나고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서인들에 대해 유혈 숙청을 감행하였다.

북인남인의 출현
유혈 숙청의 과정에서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게 된다. 서인들에 대해 사형을 주장하는 과격파들을 북인, 귀양으로 그치자는 온건파들을 남인이라 했다. 북인은 조식의 문하이고 남인은 이황의 문하였다. 서인이 실각한 상태에서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과 남인이 다시 정쟁을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한 남인이 패배하고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대북소북
이렇게 북인이 정권을 잡은 후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는데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지지하던 소북은 광해군의 즉위와 함게 몰락하고 대북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 때 소북은 거의 죽음을 면치 못하고 서인과 남인은 재야세력으로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는데 대북세력은 소북세력뿐만 아니라 서인, 남인 세력을 차례로 제거해 나가기 시작하는 등 대북의 독주가 계속 되었다.

서인남인
그러다가 주로 서인들의 주도하에 인조반정이 이루어지게 되고, 대북은 몰락하게 된다.( 서인과 동인의 대결에서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들이 소북 대북 할 것 없이 모두 몰락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서인과 남인의 대결이 되는 것인데요, 서로에 대한 끝없는 복수가 더욱 치열한 싸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용서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마지막 한 놈까지 적의 씨를 말려죽이자!는 생각으로 정치를 했으니...)

이로부터 한동안 인조의 중립정책으로 인해 서인과 남인은 서로 견제세력으로서 한쪽의 독주를 막으며 정치를 하는 붕당정치의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인조의 둘째아들인 효종이 죽으면서 남인과 서인간에 치열한 예송논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원인은 이러하다.

인조에게는 인렬왕후 한씨라는 왕후가 있었다. 이 왕후는 인조와의 사이에 4명의 아들을 두게 되는데 그 첫째 아들이 소현세자이고 둘째 아들이 효종대왕이며 셋째아들이 인평대군, 넷째가 용성대군이다. 이 왕후는 병자호란이 나기 전에 승하하고 나이어린 장렬왕후가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입궁하게 된다. 소현세자는 청국에 볼모로 잡혀가서 서구의 선진문물을 접하며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흠모하게 된다. 청나라에 원한이 많았던 인조로써는 그런 소현세자가 못마땅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고 돌연 죽어버리는데, 아버지 인조로부터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많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고난 후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모두 귀향보내고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도 폐서인하여 죽여버린다.
그리고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소현세자의 상을 당해 이미 장자의 예로써(첫아들이 죽었을 경우 어머니가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다른 아들들과 다른것이 예법이라고 합니다.) 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다시 효종이 죽었을 때 장렬왕후의 상복입는 기간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서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장렬왕후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같은 예로써 3년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현종이 아직 어릴 때였으니 아무래도 목소리 큰 놈이 이겼겠지요?  이 때만 해도 현종은 예법을 잘 몰랐으므로 서인의 주장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조반정은 당당한 것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왕실이 서인세력에 일종의 빚을 지게 된 셈이었거든요...) 결국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효종의 상을 당해 차남의 예인 1년상을 치르게 된다.

그러다가 8년여 후 다시 효종의 왕후인 인선왕후가 승하하면서 또다시 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된다. 서인과 남인의 싸움은 똑같다. 서인은 인선왕후가 둘째며느리이므로 9개월의 대공설을 내세웠고, 남인은 둘째며느리이긴 하지만 중전을 지냈으므로 큰며느리와 다름이 없다며 1년의 기년설을 내세운다. 이 때는 현종도 많이 장성하여 기반이 확실한 상황이었으므로 자기의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도 둘째로써의 낮은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인의 주장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된다.

그런데 현종이 죽고 숙종이 왕위에 등극한 후 서인측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들이 옳았다고 피력하다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면서 서인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제부터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당파싸움이 계속되는 숙종시대이다. 남인은 이 시기에 망하게 되는 것이다.

숙종은 즉위 직후 아버지인 현종의 뜻에 따라 남인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현종비)는 서인의 딸이었다. 명성왕후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는 예송논쟁에서 일시적으로 남인의 편을 들어 조정의 요직에 기용되어 있었으나 서인측 사람이다.

남인의 영수 허적이 권세를 남용하는 것에 실망을 한 숙종이 훈련대장직을 서인인 김석주에게 넘기면서 남인이 거의 차지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겨주게 된다. 서인들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숙종의 종조부)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숙종의 당숙들 이른바 3복)이 허적의 서자 허견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고 고변하여 남인들을 실각시킨다. 이것이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는 사건이다.

그러다 남인편인 후궁 장씨의 소생 아들로 원자를 삼는 문제로 서인들이 반발하자
(직접적인 원인은 장희빈의 모친을 가마에서 끌어내린 사건입니다.) 숙종은 이를 서인의 딸인 인현왕후에게 원인이 있다고 죄를 물어 폐출하고 서인들을 대거 실각시키며 장씨를 왕후로 올리고 그 아들을 세자로 삼는다.

또 장희빈과 그 아들을 지지하는 남인세력을 다시 집권하게 하며,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그러나 숙종과 장희빈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들의 불화는 정국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숙종과 장희빈의 사이가 벌어지고 또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서인세력은 민씨 복위 운동을 펼친다. 이를 알게 된 남인세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복위운동의 주모자들을 심문하여 사실을 파악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그런데 숙종은 오히려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는 한편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민씨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이 사건으로 남인들은 대거 축출되고.. 그야말로 망하게 되었다
.
(이로써 서인과 대립했던 동인계열은 싸그리 망해버렸습니다. 동인도 그닥 잘한 건 없지만 조선 후기를 깡그리 망친 서인-노론-벽파가 개인적으로 훨씬 더 밉네요. )


노론소론
경종 사망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후일 경종)를 지지하는 세력은 소론, 세자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편에 섰던 숙빈 최씨(최무수리)의 아들인 연잉군(후일 영조)을 지지하는 세력은 노론이 되는 것이다. 세자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숙종이 죽고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얻어 노론을 축출한다.

이 과정에서 소론세력은 노론이 지지했던 연잉군마저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하지만, 효종이래 외아들로만 이어져 내려온 왕실에서 효종의 혈손이라곤 경종 자신과 연잉군 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경종은 동생인 연잉군을 살려준다.
하지만, 소론세력은 어떻게든 노론과 연잉군을 제거하려 하였고, 노론과 연잉군의 입장에서는 서둘러 왕위에 오르지 않고서는 언제 어떻게 죽임을 당하게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돌연 경종이 사망한다. 그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등극하게 되는데 이사람이 바로 영조대왕이다. 영조는 죽을 때까지 형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게 된다.

영조시대 최고의 참극인 사도세자 아사사건의 경우도 이러한 당쟁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조의 입장에서는 분명 소론은 역적이요 노론은 충신이겠으나 사도세자의 시각은 달랐다.

소론세력은 왕인 경종을 지키려 했던 세력이고 노론세력은 왕을 위협했던 세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장차 보위를 이어나갈 세자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고, 영조로써도 수긍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영조는 자신의 정치 기반이었던 노론의 입장에 따라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게 된다.

시파 벽파
이와 함께 소론세력은 영구히 몰락하고 노론은 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뉘게 된다. 시파는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세력이고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대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입장을 가진 세력이었다.

영조가 승하한 이후 왕위를 이은 정조는 이후 시파와 벽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하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정조 이후 어린 왕이 연이어 등극하면서 정권은 당쟁에 의한 것에서 한 집안의 세도에 의해(외척들) 좌지우지 되게 되고 그 유명한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당쟁의 직접적 원인은

당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선조 때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이다. 이조전랑이란 직책은 비록 그 직위는 낮았으나 관리의 임명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래서 그 직책의 임면은 이조판서도 간여를 하지 못하였고 반드시 그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김효원이 그 자리에 추천을 받았는데, 이조참의로 있었던 심의겸이 그를 권력에 아부하는 자라고 하여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김효원의 임기가 다 되어 후임자를 물색할 때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물망에 올랐으나 김효원이 이를 거절하여 서로간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관리와 유생들은 모두 양쪽의 어느 하나에 붙어서 대립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인 건천동에 있다고 하여 동인,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동에 있다고 하여 서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동서분당이 생긴 초기에는 주로 동인 세력이 커서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지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이를 4색 당파라 부르게 되었다.


회니논쟁

당쟁의 의미


"조선시대의 폐단중의 하나가 당쟁이다."

이것이 진실일까요? 물론 당쟁때문에 조선사회가 어려움을 격은것도 사실이지만 그 폐단만을 부각시킨것은 일본인들이 일제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 일제시대때 부각시킨 것입니다.

"조선은 편을갈라 매일 싸우기만한다. 그래서 조선이란 나라는 멸망할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일본이 조선을 바른길로 인도하기위해 조선을 다스려야 한다."

이렇게 조선 백성들을 주눅들게하고 그들의 식민 정책을 타당화 한면이 더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당쟁이 처음에는 학문적인것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권 탈취의 용도로 변질 된것은 사실이지만 당쟁의 장,단점을 확실히 구분하여 우리가 바로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이 글은 몇 년 전에 미니홈피에서 지식인과 제가 보고 있던 책을 참조하여 편집한 것이라서 정확한 원본 출처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문제되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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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 주요사건
조선시대 4대 사화 - 그 원인과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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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閑中錄)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 ∼ 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 · 한문본 · 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 洪樂任 )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 洪國榮 )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마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 을축 4월 일 ’ 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 ( 貞純王后 )가 돌아간 해이다. “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 ” 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東宮內人)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暎嬪)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 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 洪鳳漢 )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 ( 時派 )와 벽파 ( 僻派 )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 ” 라며 분노한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해(정조 19)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이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파헤친 일종의 해명서이다. 그 골자가 되는 세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왕비(貞純王后)의 친정 경주 김씨와 전 세자빈의 친정 풍산 홍씨의 정권다툼으로 작자의 아버지와 아들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홍봉한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宮中 煉 史)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후예로 명문가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도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이다.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그가 비빈(妃嬪)이라는 사실에서,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자료가 된다. 임오화변의 이유 및 홍봉한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실기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속 등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 한중록 〉 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치렁치렁한 문체는 옛 귀인 ( 貴人 )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이 작품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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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혜경궁 홍씨, 이산 온화한母 vs 8일 카리스마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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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무인(武人) 정조대왕



▣방송 : 2007. 10. 27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정현모 PD
작가 : 정윤미



태조 이성계를 능가하는
무인(武人) 군주, 정조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키우고
스스로 군권을 거머쥐다.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는가!


 

정조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1.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아온 정조의 모습은 거짓이다!정조의 실제 외모는 어땠을까?
얌전한 학자군주로만 기억되어온 정조의 진실을 밝힌다.
그의 실제 얼굴은 우리가 이제껏 교과서에서 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선 구황실의 족보 <선원보략
>
에 담겨있는 정조의 어진.
문예군주보다는 늠름하고 활달한 무사의 기상이 뿜어져 나온다.
당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조선에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고, 24기예를 집대성해 <무예도보통지>와 진법서<병학통>을 편찬한 그는 무예에 관한 전문가였다.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조직해 직접 군사훈련을 진두지휘하고, 조선의 군권을 장악했던 정조대왕.
그는 조선 최고의 무인(武人)이었다.

                  <정조표준영정>                        <정조의 실제모습>

2. 신기에 가까운 활쏘기 실력, 신궁(神弓) 정조에 관한 진실.

"작은 가죽과녁에 1순을 쏘아 5발을 맞혀 7점을 얻고…
마치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 어사고풍첩 中 >


정조의 활쏘기 실력이 기록되어있는 <어사고풍첩>.
1792년 10월 30일의 기록에는 50발 중 49발을 맞춘 성적이 남아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정조는 과녁뿐 아니라 작은 부채, 곤봉, 편곤까지도 명중시킨 신궁(神弓)이었다.
"한국사 傳"에서는 정조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국 최고의 국궁선수가 활쏘기를 재현해 당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을 검증해보았다.

 

조선 최고의 군사력을 키운 정조.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나!

스스로 조선의 군권을 장악한 임금, 정조.
그는 우선 무예가 출중한 무사들을 직접 선발해, 자신의 호위를 맡을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장용영, 정조의 친위부대였다.
정조는 한.중.일 삼국의 무예를 모은 당대 최고의 무예, '십팔기'를 수련시키고, 무사 개개인의 무사실력을 일일이 확인하며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게 된 장용영. 그것은 정조의 강력한 왕권을 의미했다.

노론들이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조선에서 정조 스스로 절대적인 왕권을 쥐게 된 것이다.


 

신하의 나라'에 선 왕.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정조는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무사(武士)였다.
특히 활쏘기 실력에 있어서만큼은 조선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명중시키기도 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그는 장용영 군사들이 단련한 무예십팔기에 마상무예 6기를 더해 '24기예'를 완성시키고, 이를 <무예도보통지>에 기록하여 많은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스스로 무사의 위용을 갖추고, 군대를 진두지휘하기 시작한 정조대왕.
그가 노론의 뿌리 깊은 권력을 잘라낼 정치적 승부수, 그것은 바로 무예(武藝)였다.


정조가 무사(武士)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어린 시절, 공포와 절망의 기록 『존현각 일기』

"나는 일찍 아비를 여의고 죽었어야 하나 죽지 않은 사람."
-존현각일기 中-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었다.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정조.
그는 아버지의 역적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늘 위협과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세손 시절, 어린 정조의 절박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존현각 일기>. 그 일기 속에는 노론에게 당한 노골적인 협박,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으로 인해 옷을 벗고 잠들지 못하는 불안함, 그리고 궁녀와 내시까지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박함이 드러나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노론대신들의 "손안의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조의 무력시위, 화성행차. 그리고 의문의 죽음...

1795년, 정조는 3천여 명의 장용영 군사를 포함한 6천여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화성을 향했다. 여전히 노론 세력이 우세한 서울을 떠나 화성에서 새로운 조선을 일으키고 싶었던 정조. 그는 갑옷을 입고 밤낮으로 군사훈련을 벌였다. 이는 노론을 향한 무력시위였다. 노론신하들은 정조의 행보에 치를 떨며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고, 혈서를 쓰기까지 했다.
정조와 노론의 대립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무렵, 정조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오회연교를 내린 지 채 한달도 되지 않은때였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
정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은 사라져버린 것일까?

          <정조가 12세 때 쓴 친필
"선을 지키고 악을 막는 게 공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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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2007. 7. 21(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윤한용PD
▣작가 : 정윤미



“3살 때부터 시작된 조기교육!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는 아들의 정신질환을 일으킨다.”
 


애민군주, 중흥군주,
18세기 조선 르네상스의 기반 마련,

왕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영조.

과연 아버지로서는 어땠을까?
조선 왕조의 비극적 사건,
사도세자의 죽음!

역사 속에서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
영조와 사도세자.

그들을 통해 이 시대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아들을 바라본다.





아들을 크게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 조기교육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당쟁의 한 가운데서 겪은 수많은 정치적 위기.
영조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딛고 평생 '근신'이란 두 글자를 실천한 애민군주였다.
신문고를 설치해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균역법을 통해 공역 부담을 줄였다.

조선 왕조의 입지전적인 임금, 영조.

영조 나이 마흔에 얻은 조선 왕통의 유일한 후계자, 사도세자. 그리고 세 살 때부터 시작된 유례없는 왕세자 조기교육. 영조는 세자교육관을 직접 선발하고, 구체적인 공부내용과 방법을 지시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문답하여 세자의 능력을 시험하곤 하였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제자성록>, <어제상훈> 등의 교재를 직접 저술하기까지 했다.


대리청정으로 인해 만사가 탈이 났다 <한중록中>


영조는 즉위 때부터 노론에 의해 선택된 '노론의 임금'이란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과 같이 당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던 아버지, 영조. 1749년, 15세의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옥좌에 앉게 된다. 당쟁해소를 위한 영조의 승부수, 대리청정!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성격차이를 넘어 정치적 입장까지 갈라지기 시작한다.

1755년, 결정적으로 부자 갈등의 씨앗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승정원일기>를 보면 당시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지워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화의 단절, 아버지와 아들사이를 가로막은 벽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멀어진 가운데 직접 만나는 기회조차 줄어들게 된다. 아들이 부왕의 문안을 미루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 왕과 왕세자 사이의 멀어진 틈.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력이 있었다.
노론은 소론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연일 상소를 올렸지만 세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부종(不從: 따르지 않겠다)"
이 때 부터 노론은 세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부자의 관계가 멀어진 가운데 왕세자가 낙선당에 불을 지르고, 궁녀를 죽이는 등 온갖 비행들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온다. 게다가 이 모두가 아들의 정신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실망시킬까 불안했고, 그 지독한 꾸짖음이 두려웠다.


"동궁께서 평상시에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서 벌벌 떨며 비록 쉽게 알고 있는 일이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너무 엄외한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영조33(1757)

아버지를 뵙고 물러나오던 중 까무라쳐서 기절한 사건도 있었다.
특히 노론, 소론과 맞대면하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마다 옷을 찢어버리는 등의 돌출행동을 보인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는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러나 아픈 와중에도 장인에게 남한형지와 양향군무도서(한강 이남의 군사, 지도 등에 관한 책)와 같은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군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그는 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1755년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아버지는 왜 아들을 죽여야만 했는가?

"아무래도 내가 오늘 죽는가 보오..."
1762년 5월 13일,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창경궁 앞뜰로 간 아들의 눈에 비친 것은 나무뒤주.

궁궐문을 봉쇄하고, 조정 대신들조차 출입하지 못한 사도세자 죽음의 현장!
당시 바로 그 곳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가 있었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세자시강원설서, 권정침! "한국사 傳"에서는 임오화변의 목격자, 권정침의 문집 <평암집>을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보았다.
<평암집> 그 날, 창경궁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아버지, 영조

아들은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고 만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그는 아들이 죽은 뒤 내린 시호. 사도(思悼)... '안타깝게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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