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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와 오늘 - 김인호 교수
출처: 우리 역사와 오늘

글: 김인호교수
펌:
http://eroom.korea.com/eroom/default.aspx?bid=hsp_106045&pid=222064


▶ 인수대비는 조선의 릴리스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하면 성종 임금의 어머니로서, 권력을 위해선 피도 눈물도 없었던 모사꾼 또는 청상과부가 된 그 광신적 히스테리에 못 이겨 며느리(연산군의 비 폐비 윤씨)마저 죽게 한 잔인한 여성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인수대비 한씨를 중국의 폭녀 여후(한고조 유방의 비)나 측천무후(당 고종의 비) 혹은 서태후(청 함풍제의 비) 등에 비교하기도 하고 그 패도와 악독한 성품에 대해 조롱한다.

그런데 그러한 한씨의 일화 속에는 현모양처를 강조하는 조선왕조의 유교적 여성관에서 배양된 또 하나의 우리나라 여성에 대한 왜곡된 역사의식이 담겨 있다. 유교적 '현모양처론'에서 본다면 당연히 한석봉의 어머니나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현모의 자애와 양처의 덕성을 두루 겸한 조선 왕조의 표준적 여인상일 것이다. 어쩌면 현모양처(賢母良妻)란 여성의 삶이 철저히 남자의 두 어깨에 달렸을 때 속편하고 싶은 남성들이 찾고자 한 이상적 여성상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그런 현모양처형 인성을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지아비(의경세자)의 죽음에서 비롯된 수많은 좌절과 비애를 전화위복(轉禍爲福)으로 바꾸면서 끝내 자식을 왕위에 올리고 태평 치세를 열게 한 정열적인 왕모(王母)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리고 언해문 간행은 물론이고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중국식 여성 예절 체계를 '조선화(朝鮮化)'한 <<내훈(內訓)>>을 통하여 조선 500년의 여성상의 밑그림을 그려낸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렇다고 인수대비 자신이 <<내훈>>이 바라는 여성형이었는지는 의문스럽다..

물론 자애롭고 덕성 있는 조선의 현모양처상을 고의로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고도 과연 이브는 현모양처였을까? 기원전 15세기 경에 조로아스터교의 천지창조 신화는 묘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즉 아담의 첫 번째 아내는 이름이 '릴리스'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남성 못지 않은 정열과 패기를 가진 용감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사냥과 전쟁을 좋아하고, 자식을 낳기 거절했으며, 그 때문에 남성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가부장적 헤브라이 신화에서는 순종하는 이브 모습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현모양처의 출발부터가 묘한 음모 같은 것이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전근대 세계의 여성들이 역사의 표면에 뛰쳐나오는 일은 무척 힘들고 고달픈 것이었다. 그래도 조선의 인수대비는 역사의 격랑에 몸을 맡긴 몇 안 되는 한국 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씨가 간 길이 역사의 발전 방향에 어느 정도 합치된다는 면에서 조선 최고의 여성으로 아낌없이 추천하는 것이다.


▶ 권력의 핵심을 관통했던 인수대비의 정치력

인수대비는 권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권력 추구의 열정은 그녀를 불과 20대의 나이에 조선 정국의 핵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그 발단이 바로 '석실능묘 사건'이었다. 예종 1년(1467년) 9월 어느 날 전직 세자빈 수빈 한씨가 임금 앞으로 난대 없이 주청서를 올렸다. 여기서 수빈 한씨는 예종에게 선대왕 세조의 봉분을 석실(石室: 돌방무덤)로 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던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돌리면...본래 세조는 귀족권을 견제하고, 백성의 살림을 증진하여 이것을 치국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조는 백성에게 많은 부담을 주는 능묘제도를 개혁하려고 했고, '석실 봉분을 만들지 말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세조의 개인적 염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조선왕조가 지향해야 할 위민을 통한 치국이념을 확고히 하려고 후왕들에게 유언한 것이다. 백성에 대한 애정 그것을 조선왕조의 영속을 가져올 요체로 생각했던 세조는 그렇게 유언했고, 그러한 선왕의 유언은 당시로선 곧 법이었고 거부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수빈은 '효'를 빙자하면서 신숙주, 한명회, 박원형 등과 더불어 석실 능묘 축조를 예종에게 강권한 것이었다. 그는 훈구세력의 그늘을 받으며 정계일선에서 왕을 핍박하는 정치적 배반을 시작한 것이었다.

권력의 핵심에서 배제되었던 수빈 한씨가 시동생 예종에게 감히 능묘 형식을 문제 삼았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수빈은 석실 봉분이 제왕의 능묘로서 품위가 있다는 이유를들었다. 하지만 그 것은 세조의 유업을 이으려는 예종 세력과 세조의 왕권주의에 반대한 훈구 세력이 권력의 향배를 놓고 치열하게 대치하는 정국에서 남편의 죽음으로 권력의 일선에서 배제된 수빈 한씨가 훈구 세력을 업고 권력 일선에 복귀하려는 하나의 거사(擧事)였던 것이다. 그러나 훈구세력을 등에 업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수대비가 연산군 같은 패권주의적 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일보후퇴일 뿐이었다.

훈구를 업고 왕권을 빼앗고, 다시 왕권을 통해 훈구를 제거한 희대의 정치가 과연 인수대비는 누구였을까?


▶ 훈구를 제거하라

본래 수빈 한씨는 예종의 형수로서 사가(私家)에 머무는 종실의 한 여성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뒤에는 강대한 훈구 귀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동안 예종은 왕권주의를 유지 계승하고자 젊고 새로운 인물을 조정에 대거 등용하여 훈구를 저지하는데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인륜과 분수를 강조하던 정치 풍토에서 장자(長子)의 부인이자 왕의 형수라는 위치는 훈구가 예종을 견제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수빈과 훈구가 손을 잡는 상황은 예종의 입장을 무척 난처하게 만들었고 두 사람간의 갈등은 증폭되고 있었다.

그러한 갈등은 김초 사건이나 허계지 아내 사건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먼저 김초 사건은 수빈의 아우이자 안동부사였던 한치의가 지체 낮은 가문 출신이었던 경상도 도사 김초에게서 강제로 첩을 빼앗고 능욕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허계지 사건은 수빈 거처에 빈번하게 드나들던 허계지의 아내가 수빈의 후원을 믿고 자기 범죄 사실을 인멸하고 형벌을 적게 받고자 뇌물을 쓴 사건이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수빈 한씨의 형제들은 예종에게서 심하게 견제를 받게 되었다. 물론 예종은 수빈 한씨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다른 종실의 인사청탁을 불허하면서도, 수빈 자손의 가자(加資, 과거 없이 관직을 제수하거나 매관하는 것)를 인정하는 등 유화책을 썼다.

그러나 결국 예종 세력은 강력한 훈구 세력의 지원을 받는 수빈 한씨를 당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이라는 여운을 남기면서 곧바로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제안대군)이 있었음에도 수빈 소생인 자을산군(성종)에게 왕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불과 열 두 살 남짓의 성종에게 왕위를 넘긴 것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권력욕이 개입된 것이지만, 결국 죽음을 앞둔 예종이 자기 아들이 닥칠 운명과 단종의 운명을 함께 머리에 떠올려 본 것은 아닌지.


▶ 인수대비는 시세 장악의 달인

수빈 한씨는 세조 집권 초반까지 시아버지 세조에게서 많은 총애를 입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는 수빈의 소생인 월산군, 자을산군에게 많은 토지와 농기구, 콩 등을 자주 하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처럼 총애를 입던 수빈은 결국 세조의 왕권주의와 다른 길을 가고 말았다. 그것은 남편 의경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수빈 세력은 와해될 위기에 처했고, 권력에서의 배제는 수빈은 자신의 운명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가부장적 유교적 가치관에서 볼 때 왕권에서 배제된 적손 자제가 천수를 다할 가능성은 적었던 것이다.

결국 수빈의 선택은 왕권주의에 저항한 훈구 세력 즉 한명회와 신숙주 등과 결탁하는 것. 이는 세조 말년 훈구와 신진 청년관료 간의 권력투쟁이 서릿발처럼 작열하는 속에서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과 한명회의 딸(공혜왕후)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최고조에 달했고, 그 결과 수빈은 한명회의 정치력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젊은 예종의 충직한 신료를 하나 둘 제거(남이의 옥사)하면서 세조의 유업을 좌절시키고 결국은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 결국 중전도 해보지 못한 그녀는 정치력만으로 대비로 전격 승차하여 왕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단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인수대비는 기왕의 한명회, 신숙주 세력을 배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꾀한다. 그리고 '윤비폐출사건'과 같이 기왕의 훈구 세력이 수세에 몰릴 때는 다시 훈구의 손을 들어 신흥 세력을 퇴출시켰고, 훈구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때는 다시 막강한 왕실의 권위로 훈구의 전횡을 저지했다. 한명회와 결탁이나 그 제거 과정은 그러한 시세와 정국의 변화에 달통한 인수대비의 탁월한 정치력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인수대비가 추구한 길은 절대주의였다. 그것은 인수대비의 엄격한 교육 아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일단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공신전을 폐하는 등 반 귀족정책도 동시에 수행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엽색 스캔들로 귀족의 반격을 받아 그러한 시도는 훗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인수대비의 처세는 패도(覇道)

인수대비는 며느리 윤씨를 죽이는 등 이른바 인륜 배반의 처세에 달통한 여인이었다. 그렇다면 유난히 인수대비에게만 인륜과 인정의 부족을 강조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과연 역사 속에서 인정이란 존재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역사 속에서 감정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개입된다.

물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나 대동법 실시와 같이 왕실 측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실시한 진보적인 민본정책도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반된 민심을 바로 하고, 왕조의 안정을 지속하기 위한 고도의 포석이었다. 그래서 한글이 나오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이 "한글 용비어천가"였고, "삼강행실도"였다. 또한 대동법도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불안한 재정기반을 일원화하여 국고를 늘여주었고, 삼정의 문란은 대동법 이후 더욱 격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인수대비의 처세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선 왕실, 취약한 왕실을 훈구 세력과 동맹을 통하여 구하고, 왕조의 안정적인 지속을 보장하려는 왕실 측의 처세였다. 개인적인 원한에 윤비를 폐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연산군 시대를 만들었고, 결국 절대화한 왕권의 역공으로 죽음에 이른 비범한 정치적 인물이었다.

꼭 진취적인 여성은 정치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는가를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 오랜 세월 온실의 화초처럼 보호받고 대상화된 성으로 버려진 이면에는 그들의 정치적 능력이 제거된 원인도 자리하고 있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이 배워야 할 진정한 조선의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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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 이야기♤ / 블로그 / 냐하하하~ / 2006.08.14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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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와 치도가 근본을 이루었던 500년 조선사회에서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대비의 위엄을 누렸던 여인, 소혜왕후. 16살의 어린 나이에 당시 수양대군 이었던 세조의 맏며느리로 들어가, 시아버지 세조와 그 무리들이 지배했던 격동의 세월 속에서 한씨의 처세술은 과연 어떠하였는가.

조선조 가장 학식이 높고 유려했던 정치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소혜왕후의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정치감각●

소혜왕후가 20대에 겪었던 풍파는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뒤, 그의 맏며느리였던 한씨는 당당히 세자빈의 자리에 올라 "폭빈" 이라는 별명까지 받으며 위세를 누렸다.

그러나 결국 지아비 의경세자의 요절과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눈물을 쏟으며 출궁할 수 밖에 없었던 한씨는 '수빈' 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정계의 뒷편으로 쓸쓸히 사라지기에 이른다. 하지만 수빈은 한낱 '세자빈을 잠시 누렸던' 그저 그런 조선의 아낙으로 사라질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미약해진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정계의 수장격이었던 한명회와 신숙주와의 결탁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과의 결탁은 곧 결국 세조조의 격정의 세월을 주도했던 훈구파와의 결탁을 의미했다. 결국 수빈은 둘째 아들 자산군과 한명회의 셋째딸을 혼인시킴으로써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왕권을 짓누르고 정계의 표면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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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저에 나가있는 동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놓은 수빈의 위세는 결국 세조의 승하와 함께 분출된다. 수빈은 이른바 예종조를 뜨겁게 달궜던 "석실 능묘 사건" 으로 권력의 핵심을 간파하며 왕권을 짓누르는 파란을 스스로 연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건은 이러하다.

1467년 조정에 한 여인의 주청서가 날아 들어왔다.

"세조 대왕의 봉분이 초라하고 약하기가 이를데 없으니, 이 어찌 선왕께 황송스러운 일이 아니리까. 마땅히 세조 대왕의 봉분을 석실로 해야 할것입니다." 라는 간략한 주청이었다. 그러나 이 주청서의 주인공이 바로 수빈 한씨 였다는 점에서 조정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세조가 살아 있을 당시 그는 백성들의 생활을 위해서 능묘제도를 개혁하면서 "석실 봉분은 없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며 "내가 죽어도 석실봉분은 없어야 할 것이며, 후대에도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다." 라고 명했었는데 그것을 며느리인 수빈이 뒤집어 엎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예종은 세조의 유지임을 전면에 내세우며 수빈의 청을 완곡하게 물리친다. 그러나 물러설 수빈은 아니었다. 수빈은 한명회, 신숙주 등을 앞세워 다시 한번 예종에게 청을 올리고 무례에 가까울만큼 첨예한 대립을 보여줬다.

당시 세조의 잠저에 나가있던 수빈이 이처럼 무례할 정도로 예종을 몰아붙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조 말년, 세조는 혈육과도 같던 한명회, 신숙주 등을 비롯한 훈구세력들을 전적으로 견제하며, 예종을 위한 포석을 놓기 시작했다. 결국 세조의 이러한 변심으로 이들의 위세는 꺾일 만큼 꺾였고 귀성군 준, 남이, 유자광 등의 신진 세력이 조정의 핵으로 급부상했다.

이 후 남이가 역모사건으로 죽은 뒤에도 불구하고 유자광 등이 훈구세력과 대응할 만큼의 세력권을 키우기 시작하자 훈구파와 결탁했던 수빈으로써는 이들을 저지할 강경책이 필요했다. 그녀는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예종의 형수라는 위치가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지 잘 알고 있었고 '석실 능묘 사건' 을 고의로 연출해내며 훈구파를 전면에 끌어 올리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수빈과 예종과의 갈등은 크게 증폭되었으나, 유약했던 예종이 수빈과 그 뒤를 받치고 있던 거대 정치 세력인 훈구파를 당해 낼리 만무했다. 마침내, 세조의 봉분은 석실로 둘려싸이게 되었고,수빈은 다시 한번 권력의 핵으로 부상하며 예종 말기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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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정희왕후와의 결탁으로 대비가 되다●

이렇듯 수빈과 갈등을 겪던 예종은 결국 20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국가로서는 1년 사이에 세조와 예종의 두 번의 국상을 겪은 것이지만, 수빈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였다. 예종의 아들은 겨우 4살 이었고, 왕권은 안정되지 않았기에 그 당시 대비였던 정희왕후는 강력한 정치권력을 담당했다.

정희왕후는 한명회,신숙주 등 뛰어난 원훈들만이 조정을 안정시킬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세조 말기 한명회 등이 역모 사건으로 핍박 받을 때에도 항상 그들의 편이었던 것도 바로 정희왕후였다. 정희왕후는 수빈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왕위에 올리며 수빈과 한명회로 대표되는 훈구파를 정계의 핵심으로 다시 부각시킨다.

당시 13살이었던 자산군이 왕위에 책봉되자 한명회 등은 정희왕후에게 수렴청정을 권유했고 정희왕후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가 바로 조선조 최초의 '수렴청정' 이었다.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수빈 역시 '대비' 의 지위에 오른다. 법도상으로는 예종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대비의 책봉을 받을 수 없었으나 그 아무도 수빈의 대비책봉에 대해 문제 삼지 못했다. 대쪽같은 성미의 수빈을 건드렸다가는 무슨 보복을 받을 지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정희왕후는 대왕대비로, 예종비는 왕대비로, 수빈은 대비로 책봉이 되면서 내전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권력은 힘●


대비의 자리에 오른 수빈은 '인수대비' 의 칭호를 받으며 정계의 핵으로 당당하게 부상한다. 인수대비는 권력의 핵으로 부상 하자마자, 남은 신진세력의 싹수를 잘라 버리는데 총력을 다한다. 세조 생전에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던 신진세력의 대표격 귀성군 준이 역모사건에 휘말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귀양길을 떠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인수대비의 힘이었다.

정희왕후는 귀성군 준이 종친이고 세조의 총신이었다는 명분하에 그를 제거하지 않으려 했으나 인수대비는 이런 정희왕후에게 정면으로 맞서며 귀성군 준의 처벌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물론 그 뒷배경에는 훈구파가 버티고 있었고, 이는 자신을 이만큼으로 성장시킨 훈구파에 대한 인수대비의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했다.

결국, 정희왕후도 인수대비의 강력한 권고를 뿌리치지 못했고, 30대에 영의정의 위세를 누렸던 귀성군의 인생도 그것으로 끝나게 된다. 귀성군의 몰락은 곧 신진세력의 몰락이었다. 다시 조정은 훈구파의 세상이 됐고 이들은 정희왕후와 인수대비의 비호 아래 그 영화가 극에 다달았다.

그러나 이들이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 때 인수대비는 성종의 '친정' 에 대비할 또 다른 대응책이 필요하다 느꼈다. 인수대비 자신이 권력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파악했던 만큼 그녀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훈구들을 서서히 견제하기 시작했고 아들 '성종' 을 위한 새로운 신진들을 끌어올리는 데에 주력한다.

이것은 세조 말년, 세조가 예종을 위해 훈구를 견제했던 것과도 같은 이유였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친정을 위해서는 왕권을 넘어서는 권신(權臣)들을 강력하게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끝내, 이러한 인수대비의 정책은 제대로 맞아떨어져 성종조에 사림파의 등장을 끌어내며 성공적으로 성종 자신이 훈구를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데 밑거름이 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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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의 기를 꺾어 놓다●

성종 시절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거의 50 : 50의 비율로 서로의 견제 기능을 가장 잘 수행했던 때였다. 그러나 성종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위해서는 훈구파를 억제하고 사림파를 강화해야 한다고 믿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훈구파를 정계의 뒷편으로 밀어내는데 힘을 쏟는다.

그러나 이러한 성종의 정책은 종래에 어머니 인수대비와 대립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사림파의 위세가 등등해지던 그 순간 인수대비는 '윤비 폐출' 을 위해 뒷편으로 밀려나 있던 훈구파를 다시 끌어올리는 수완을 발휘한다.

윤비 폐출 사건은 인수대비의 진두 지휘 아래 직접 진행되었던 사건이었기에 그녀는 한명회, 정창손 등을 다시 끌어올려 폐출을 뒷받침 하도록 지도한다. 윤비폐출을 기화로 인수대비와 훈구의 연대적 결속감이 강해지자 높은 위세를 누렸던 사림파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치욕을 겪는다.

이렇듯 꺾인 사림파의 위세는 "불교 도첩제" 사건으로 다시 한번 수세에 몰리게 된다.

성종 23년, 성리학만을 신봉하는 사림들은 도첩 없는 승려들을 모두 환속시키고 엄중하게 단속할 것을 청하였다. 성종 역시 유교 근본주의에 철저했던 임금이었고 불교를 그저 미신 중 하나로 치부해 버렸기 때문에 이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불교를 믿으며 "불교 열풍" 을 주도했던 인수대비에게 이 정책은 사림파의 정면 도전으로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고 참다 못한 그녀는 긴 장문의 전교를 내려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불교는 세조대왕 때부터 믿어져 왔으며, 정희왕후 께서 믿으셨고, 나 또한 믿고 있는데 정책적으로 불교를 억제하니 이러한 불효가 어디 있는가!" 라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유교를 신봉했던 국가 '조선' 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인수대비' 라는 점에서 성종과 사림파는 한 발 물러서 도첩제를 완화하게 된다.


●왕실의 안정을 추구했던 여걸●

세조, 예종, 성종의 3대의 권력의 핵심을 주도했던 인수대비는 결국 왕권의 강화와 왕실의 안정에 철저했던 정치가 였다. 인수대비는 대부분 훈구파를 전면에 내세우며 힘으로 정치를 다스렸던 여걸이었으나, 절대로 그들이 왕권과 왕실의 권위를 넘어서는 모습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수대비의 정치권력은 철저히 왕실 중심이었고, 아들 성종 중심이었다.

인수대비의 처세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선 왕실, 취약한 왕실을 훈구 세력과 동맹을 통하여 구하고 왕조의 안정적인 지속을 보장하려는 왕실 측의 처세였다. 개인적인 원한에 윤비를 폐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연산군 시대를 만들었고 결국 절대화한 왕권의 역공으로 죽음에 이르른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이 배워야 할 진정한 조선의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


출   처: ♤끄적끄적 이야기♤ / 블로그 / 냐하하하~ / 2006.08.14 [원문보기]


현재는 승복이님이 블로그를 폐쇄한 상태라서 원문을 볼 수가 없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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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일·역사평론가 )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남존여비 강요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즉위한 1455년, 만 열여덟 살의 며느리 한씨도 비로소 세자빈이 됐다. 결혼 당시 남편은 대군 아들에 불과했으나 그녀는 이때 이미 시아버지가 임금이 되기 위한 포석으로 자신을 며느리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수대비(1437~1504)의 아버지 한확(1403~1456)은 조선 제일의 중국통이었다. 태종 17년(1417) 명나라에 공녀로 간 그의 누나가 황제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덕분이었다. 성조는 한확에게도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란 벼슬을 내리고,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했을 때는 조선인인 그를 사신으로 임명해 고명(誥命)을 줄 정도로 총애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한확이 수양 편에 선 것은 딸 때문이었다. 정난 1등 공신에 책봉된 한확은 수양대군의 의도대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즉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한확은 귀국 도중 만주에서 사망했는데,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놀라고 슬퍼”했지만, 세조의 즉위를 왕위 찬탈이라고 본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고, 이런 민심에 그녀는 상처받았다. 남편 의경세자가 세조 3년(1457) 만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더했다.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한 달 전에 죽었는데도 세조가 단종을 죽였기 때문에 단종의 모후 현덕왕비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의경세자의 죽음은 그녀가 꿈꾼 왕비의 길이 좌절됐음을 뜻했으나 10년 후에 기회가 찾아왔다. 세조의 후사인 예종이 1년 2개월의 짧은 재위 끝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 세 살짜리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한씨는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자신이 있었다. 천하의 권신 한명회가 사돈이었다.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기도 했으나 세 살 짜리 손자 대신 열 두 살짜리 사위 자을산군(성종)을 선택했다. 성종보다 세 살 위의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한명회같은 장인이 없었다. 한명회와 밀약한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유명이라는 명분을 댔으나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대비의 말을 반박하고 나올 인물도 없었기에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임금이 될 수 있었다.

1469년 성종이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자 한씨도 왕후로 높여지고 동시에 대비가 됐다. 그녀는 조선의 모든 여성을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대비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종 6년(1475) ‘내훈’(內訓)을 펴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나라의 치란(治亂) 흥망(興亡)이 비록 남자에게 달려 있지만 부인의 착하고 그렇지 않음에도 연결돼 있으니 부인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여성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녀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학문은 성리학이었는데, 성리학 이념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녀가 ‘내훈’의 「부부장」에서 “아내가 비록 남편과 똑같다고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예로써 마땅히 공경하고 섬기되 그 아버지를 대하듯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남편이라는 직책은 높은 것이 마땅하고 아내는 낮은 것이니, 혹시 남편이 때리거나 꾸짖는 일이 있어도 당연히 받들어야 할 뿐 어찌 감히 말대답하거나 성을 낼 것인가?”라고도 했다. 그녀의 ‘내훈’은 남녀가 비교적 자유롭고 평등했던 고려시대의 유제가 남아 있던 조선 초기의 여성들을 강하게 억압했고, 때로는 충돌했다. 인수대비와 며느리의 충돌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왕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내훈’에서 말한 “(남편에게는) 오직 순종할 뿐 감히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윤씨는 궁에 들어오기 전에 베를 짜서 팔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의 효녀였지만, 남편 성종의 호색(好色)을 달게 받아들이는 열녀(烈女)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성종의 바람기에 제동을 걸면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전하지만, 정사인 ‘성종실록’에는 오히려 성종이 윤씨의 뺨을 때린 내용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다툼의 진상은 분명치 않다.

그러던 중 후궁들과 성종의 총애를 다투던 왕비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을 바른 곶감이 발견됐다. 곶감을 둘러싼 의혹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인수대비는 성종이 아니면 후궁들을 죽이려는 의도로 단정지으면서 그녀는 위기에 빠졌다. 인수대비는 윤씨를 폐출시키려 했다. 왕비 폐출에 대해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것이 문제였으나 인수대비는 걱정하지 않았다. 고모 한씨가 선제(先帝)의 후궁으로서 황제의 효도를 받는 위치였으므로 사촌 한한을 사신으로 보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윤씨는 비록 쫓겨났으나 원자의 생모였다. 폐출된 지 3년째인 성종 13년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경연에서 윤씨에게 처소를 장만해주자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그녀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대사헌 채수(蔡壽)가 이 주장을 지지하자 성종은 “원자에게 잘 보여 훗날을 기약하려는 것“이라고 분노했으나 사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삼대비(인수대비·정희왕후·안순왕후)는 한글 문서를 조정에 내려 윤씨가 “우리들이 바른말로 책망을 하면,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았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6년 전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며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한데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므로, 삼대비의 총애를 받았다“고 쓴 교명(敎命)과는 정 반대의 내용이었다.

민심은 인수대비의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폐비 윤씨의 억울함을 동정했다. 그러자 인수대비는 이런 여론에 정면으로 맞서 윤씨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결국 윤씨는 인수대비의 주도로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은 재위 10년째 드디어 복수에 나섰다. 성종의 두 후궁을 때려죽인 연산군의 분노는 인수대비에게 향해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고 대들었다. ‘연산군일기’는 그녀가 연산군의 이런 모욕 때문에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었다’고 적고 있다. 연산군은 나아가 삼년상으로 치러야 할 국상을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로 25일만에 마쳐버려 확신으로 가득 찼던 대비의 인생을 조롱했다. 사랑이 최고의 이념인 줄 몰랐던 할머니와 용서가 최고의 무기인 줄 몰랐던 손자의 충돌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모든 것이 부정되면서 그녀의 성리학 이데올로기는 조선 여성들이 받들어야 할 이념이 됐고, 조선은 극심한 남존여비의 나라가 되어 갔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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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미니홈피에 있던 글이라서 어디까지가 원글인지, 정확한 출처인지 기억이 안납니다.
문제가 생기면 삭제하겠습니다. 알려주세요.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



폐비윤씨의 비극을 정확히 이해할려면 이야기는 좀 더 위로 올라가야돼.

때는 세조
.(세종의 차남.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지. 왕이되기전엔 수양대군으로 불렸슴)

세조에겐 아들이 둘 있었는데 첫째가 당연히 세자.(조선의 왕위는 장자승계원칙)
그런데 이 세자가 젊어서 병으로 죽고 20대의 세자빈은 애딸린 청상과부가 됐지. 
왕실 법도에 따라 세자빈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그리고
세조의 두번째 왕자가 다시 세자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아.(얘가 예종)

그런데 예종이 왕위를 이어받고 얼마 안되서 죽어.
당연히 다시 왕위를 이어야하는데 (왕위는 하루도 비워둘수 없으니까) 여기서 문제가 발생.
예종 주니어들이 완전 애기들인거야.(걸음마 애기들..)

가문좋고 야심차고 똑똑했던 예전 세자빈(아까 그 청상과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대신들과 타협해서 자기 아들을 왕으로 추대해.
이 여자에게 아들이 둘 있었잖아. 그 중 둘째를 왕으로 올려. 이 소년왕이 성종.

당시 성종의 나이가 12살쯤. 

당연히 직접 통치를 할 수 없으니까 수렴청정(왕의 엄마나 할머니가 어린 왕을 대신해서 통치)을 하게 되지.
(첫째를 왕위에 올리지 않은 것도 이걸 하기 위해서야. 첫째는 이미 성인이 다됐거든.)

세상은 이제 어린 왕의 모후인 대비의 것이 되었지.
반대파를 쳐내면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해.(말했잖아. 이 여자 무척 똑똑하고 야심찬 여자라구.)

그런데 어느새 어린 왕이 자랐어. 성년이 되었지.  
조용히 대비는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모든 실권은 대비의 것이었어.
아직 젊은 왕도 굳이 어머니인 대비에게 반항할 이유가 없었어. 자긴 가만 있어도 엄마가 다 알아서 해주니까.

그런데 최초로 왕이 대비에게 반항하는 사건이 생겨.
바로 왕비를 정하는 일이었지.

조낸 좋은 가문출신인 대비는 당연히 며느리도 좋은 집안에서 구하고 싶었지만
젊은 아들이 엄마 기대와 달리 이쁜 궁녀랑 사랑에 빠진거야.
거기다가 그 궁녀는 아들까지 낳아주었지.
결국 왕의 소원대로 이 궁녀는 왕비가 돼. 이 여자가 윤씨야.

여기까진 좋았지. 그런데 이후 왕이 후궁들을 줄줄이 맞아들여.
당연히 왕비는 질투하게 되고 후궁들 역시 대비의 눈밖에 난 왕비따위 우습게 봤지.
(게다가 후궁들은 대신들이 정략적으로 결혼시킨거라 가문도 좋아. 왕비는 진짜 아무것도 없는 허름한 출신이야.)

하지만 왕비에겐 보장된 미래가 있었어.
지금 대비가 권력을 쥔 이유는 단지 그녀가 왕의 모후이기때문이야.
같은 논리로 미래의 권력은 세자의 모후인  왕비에게 가겠지.
실제 눈치빠른 사람들중엔 의지할 곳 없는 젊은 왕비에게 잘보여 미래에 보상을 받겠다는 생각도 하게되지. 대비와 달리 변변한 친정식구 하나없어도 왕비에겐 세자라는 든든한 언덕이 있었어.
세자의 생모... 이거만큼 막강한 권력도 없거든.

여기서 비극이 발생해.
폐비윤씨의 사건이 단순히 폐비와 후궁들의 갈등, 또는 폐비와 대비의 고부갈등으로 알려졌는데
왕실의 일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모든 권력을 쥔 대비의 입장에서 장차 이 권력을 물려받을 며느리를 어떻게 보는가는 결국 정치적인 문제야.
이건 여염집 고부간의 갈등과는 달라. 훨씬 더 비정해질 수 있지.  

대비의 입장에서
보자.
20대에 남편을 잃고서도 꿋꿋하게 아들 둘을 잘 키우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결국 아들을 왕으로 추대한 대비야.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보통의 왕들과 달리 성종은 사실상 어머니에게서 왕위를 받은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효심깊은 아들이 처음으로 자기 뜻을 주장한게 아내를 정하는 일이었어.
자기가 정해놓은 가문좋고 교육 잘받은 며느리 후보들을 물리치고..
얼마나 대단한가 봤더니 그냥 가난한 집안 먹여살릴려고 궁녀로 들어온 하찮은 어린 여자.

그래도 왕자를 낳아주었으니 참고 봐주었는데 이 며느리가 자신에게 순순히 굽히지도 않아.
게다가 세자가 자랄수록 어제까지 내앞에서 조아리던 신하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며느리쪽에 붙을 기미가 보인다고 상상해봐.

비 윤씨 사건의 핵심은 대비가 왕비를 죽일수 있을 만큼 실권자였다는 이야기야.
대충 구실을 잡고 후궁들과 대비가 모두 왕비를 쫓아내라고 난리치니 결국 왕은 조강지처인 왕비를 쫓아내. 그뒤에도 폐비 윤씨가 죄를 반성하지 않고 세자를 믿고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다는 식으로 모함을 해서 여기에 화가 난 왕이 결국 사약을 내려.

아무리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폐비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적힌 기록이 많아.
궁중에서는 질투로  왕과 다툰 것은 사실이지만 사가로 쫓겨난 후에는 자신때문에 어린 아들 세자까지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검소하게 살면서 남편인 왕이 노여움을 풀고 자신을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렸다고 해.

그러나 폐비의 바램과는 달리 왕은 궁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서찰 대신 사약을 보내.
(세자의 생모를 죽일 수는 없다고 몇몇 용기있는 신하들은 반대를 했어.
하지만 당시 실권자는 대비야. 대비의 가문을 비롯해서 동맹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어.
반대하던 신하들은 귀양을 가고 결국 폐비에게 사약은 내려지지.)

그때 폐비가 어떤 마음으로 죽어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다만, 이제 보호해줄 사람 하나 없이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진거나 마찬가지인 어린 아들에 대한 걱정은 많이 했을 것 같아.

폐비가 죽고나서 왕은 이 일을 영원히 불문에 부치라고 명령을 내려.
그래서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이 비극을 오직 당사자인 세자만 모르게 돼.

그때 세자의 나이가 7살쯤 되었을거야.
그뒤로 새로 왕비가 들어오고 세자는 계모의 손에서 자라게 되지.
계모인 새왕비는 곧 아들을 낳아. 친아들과 의붓아들을 차별없이 잘 키우긴 힘들었겠지.
세자와 동생은 이복형제기에 앞서 왕위의 경쟁자였으니까.

세자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를 길러준 엄마가 생모가 아니라는 건 미리 알고 있었던 걸로 보여.
생모가 죽은건 알았지만 왜+어떻게 죽었는지는 몰랐던거지. 어떤 식으로든 세자는 외로움을 느꼈을거야.

아무튼 세월은 무심하게 흐르고
이후 세자마저 쫓아내려던 대비와 후궁들의 압박에도 왕은 세자만은 보호해.

그리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성종이 마침내 숨을 거두는 순간,
자신을 미워하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후궁들,
수많은 이복형제들과 기세등등한 대신들에게 둘러 싸인채
어머니의 비극을 아직 몰랐던 세자는 다음 대의 왕위를 물려받지.

그가 바로 연산군이야.

좀 더 자세한 이야기

흔히 우리가 폐비(廢妃)라고 말하는 제헌왕후 윤씨는 희대의 악군 연산군의 생모이다.

그녀의 본관은 함안이고, 1445년 출생하여 어릴 때 궁궐로 입궁을 해 당시 자신보다 12살이나 나이가 어렸던 성종의 성총으로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제헌왕후 윤씨의 어버지 윤기견은 집현전에 출입을 할 수 있을 만큼 학문에 밝은 이였고, 판봉상시사라는 벼슬을 하사받았으나 일찍 세상을 떴다. 제헌왕후 윤씨의 생모 신씨는 윤기현의 두번째 부인이었는데 윤씨를 가졌을 때 태몽은 온 집안에 불빛이 환하게 비춰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녀가 악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 된 것이다. 연산군의 생모인 그녀는 후궁이 되기 이전에 검소하고 성실한 성품의 여인었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미색이 아름다워 성종의 성총을 받게 되었고, 내명부 종2품인 숙의로 진봉이 된다.

성종의 첫번째 왕후는 한명회의 작은 딸 공혜왕후 한씨
를 왕후로 맞아들였지만 그녀 나이 17살에 후사를 두지 못하고 성종과 혼례를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후기와는 달리 덕성이 있는 후궁들을 대상으로 왕비로 진봉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조선 초기의 후궁들의 대부분은 명문가의 여식들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연산군의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 역시 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인수대비의 의해 궁궐로 입궁을 하여 숙의의 후궁으로 진봉이 된 사례가 있었고, 세종대왕의 큰 아드님 문종 대왕은 세자시절부터 명문 대가댁의 여식들을 후궁으로 둔 사례가 있었다. 게다가 조선 초기에는 궁녀를 선발할 적에는 명문 대가의 서녀들을 대상으로만 뽑기도 했지만 후기에는 서녀들의 수가 급감하다보니 일반 민가의 여식들을 대상으로 뽑는 경우가 생겼던 것이다.

성종에게는 당시 여러 후궁들이 있었지만 그 중 자신보다 12해나 나이가 많은 숙의 윤씨만을 총애하고 있었다. 숙의의 검소하고 성실한 자태와 뛰어난 미색에 반해있던 성종은 그녀의 처소를 찾는 일이 많아졌고, 결국 그녀는 회임을 하게 된 것이다.


성종에게는
첫아들이었다.

공혜왕후 윤씨가 후사를 낳지 못하고 세상을 뜬 이래 성종은 자신의 혈육이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성종은 윤씨가 회임을 하자 반드시 원자를 낳으라며 원자를 낳으면 숙의를 왕비로 봉할 것이다 라는 약속을 하며 그녀에게 명나라의 고관부인들이나 차고 다닌다는 밀화놀이개를 선물했다.

숙의는 아들을 낳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성종의 후궁인 소용 정씨와 엄씨였다. 소용 정씨는 초계정씨로 역시 명문가의 여식이고, 소용 엄씨는 영월 엄씨로 소용 정씨와는 소꿉친구이며 중인 집안의 여식이었다. 하지만 미색으로 따진다면 정소용쪽이 훨씬 더 미려했으며 소용 엄씨는 그저 그런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는 정소용과 엄소용을 총애했는데 성종이 문안인사를 들러오면 그녀는 자주 정소용의 침실을 찾으라고 할 정도로 그녀들을 총애했다. 그녀들은 인수대비의 후배를 믿고 있었는데 숙의가 먼저 회임을 했다는 소식에 그녀들은 숙의가 일부러 낙태할 수 있겠끔 방술을 부리는 일들이 잦았다.

정소용은 엄소용과 결탁하여 민가에서 용하다는 무당을 몰래 궁궐로 입궁시켜 방술을 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방술이라는 것이 숙의의 처소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불태워베어 낸다면 낙태가 될 것이라 하는 방술이었다. 정소용과 엄소용은 자신의 수족들을 시켜 깊은 새벽 숙의의 처소로 가 나무에 불을 붙혔는데 불을 붙힌 것 까지는 좋았으나 나무를 베어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숙의의 처소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성종은 어느 못된 것들이 한 것이라며 궁녀들을 심하게 나무랐는데 그 때 숙의가 나서서 수라간의 궁녀가 간밤에 일을 하다가 실수로 그런 것 일 것이라며 성종을 달랬다.

하지만 숙의는 이 모든 내막에 대한 심증을 조금은 알고 있는 눈치이다.

하루는 내관들이 불탄 나무가 있으면 보기 흉흉할 것이라며 나무를 베어낼 것을 촉구했지만 숙의는 가만히 놔두는 것이 좋겠다며 그들에게 일을 하지 못하게했다. 일이 실패로 돌아간 그녀들은 숙의의 태아를 낙태하려 그 후에도 못된 방술들을 시행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고, 그런 와중에 숙의는 해산을 앞두고 있었다.

드디어 1494년 희대의 악군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연산군이 탄생되었다.

숙의는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으로 들떠 있었고, 성종 역시도 나라의 경사라며 다소 죄가 가벼운 죄인들을 석방시키는 등의 기쁨을 표했다. 성종은 아들의 이름을 융이라 짓고, 원자로 봉했다. 숙의는 아들을 낳아주어 성종의 약속대로 공식적인 왕후가 되었다. 하지만 인수대비는 그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정소용과 엄소용의 투기 또한 만만치 않아 그녀가 왕후 자리를 지키는 일은 참으로 고되고 힘든 것 중 하나였다.

인수대비는 명문대가의 여식을 왕후로 앉히고 싶어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은 왕후 윤씨의 집은 곤궁했다고 전해진다. 인수대비는 왕실의 인품과 격식에 맞는 많은 혼수품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인수대비의 이런 요구와는 달리 왕후 윤씨의 집에서 마련한 혼수품은 보잘것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정소용과 엄소용이 틈만나면 왕후 윤씨를 대비 앞에서 헐뜯으니 인수대비는 사사건건 왕후 윤씨가 하는 일들을 트집잡았다.

윤씨가 왕후가 되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성종은 다른 후궁들의 처소에 출입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녀가 왕후 책비례를 끝내고 내외명부 후궁이나 부인들에게 인사를 받는 자리에 정소용이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출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후 윤씨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 "감히 왕후에게 문안을 들지 않는 후궁이 있다니 석고 대죄를 하라"라고 정소용에게 명령했다.

그 날 한여름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한여름에 땡볕 아래서 석고대죄를 드리는 정소용의 모습을 본 인수대비는 왕후가 투기를 한다며 정소용의 석고대죄를 왕후의 허락없이 풀어주었고,
이 떄부터 왕후 윤씨와 인수대비의 신경전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성종이 왕후 윤씨의 처소를 출입하는 것이 뜸해지자 왕후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성종은 역사상 가장 많은 후궁을 본 대왕으로 그녀들의 처소를 출입하는 동안 왕후 윤씨의 처소를 까맣게 잊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낳은 아들 융이 허약하게 태어나 병치레가 잦아지자 하는 수 없이 월산대군의 집으로 피접을 가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불안해진 왕후 윤씨는 어머니 신씨와 상의하여 남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술을 시행했는데 어린 아이의 인골을 남편 성종이 잘 출입하는 후궁의 처소 뒤뜰에 묻어두면 그 후궁이 죽는다고 하여 그 방술을 시행했지만 소용 없었고, 또 하나는 사향주머니를 몇 개나 몸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민간요법이 효과를 볼 수 없는 법. 윤씨는 마음의 병을 얻어 신경이 날카로워져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경을 거스라는 궁녀나 후궁이 있으면 엄히 질책하곤 했다.

성종은 문득 왕후에게로 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왕후 윤씨가 있는 서온돌로 발길을 돌렸는데 윤씨는 이런 남편을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기는 커녕 성종을 두고 비아냥 거렸다.

성종은 자신이 찾아주지 않아 야속한 마음이 들었나보다 하는 너그러운 마음에 미안하다며 왕후 윤씨를 껴안으려 했지만 왕후는 자신도 모르게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해 성종을 밀치려다가 며칠간 깎지 않았던 손톱이 화근이 되어
성종의 용안을 긁게 되었다.

후궁이나 승은을 입기로 예정된 궁녀들은 왕을 뫼시기 전에 목욕으로 몸단장을 하고 손톱과 발톱을 깎는 것이 예의이다. 이 것은 손톱 발톱으로 인해 왕의 용안이나 옥체를 상하게 할까 싶어서 그녀들은 자주 이렇게 손발톱을 깎았다.

순간 왕후는 당황하여 성종의 얼굴을 보려 했으나 성종은 필요없다며 서온돌을 나가버렸고, 왕후는 울면서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때였다.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인수대비는 불같이 노하여 왕후 윤씨를 심하게 나무랐다. 게다가 정소용과 엄소용도 이를 놓치지 않고 인수대비 앞에서 왕후 윤씨를 욕하는 일들이 잦았다.

인수대비는 저런 불경스러운 것을 국모로 둬서는 안된다 라고 생각하여 성종에게 폐비를 할 것을 주청드렸으나 성종은 실수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 해달라며 빌었다. 왕후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명빈 김씨와 숙의 하씨등이 대비 앞에서 용서 해달라고 주청을 드렸다.

하지만 대비는 이는 왕후가 주동한 일이라 생각하며 그녀들의 청을 무시했고, 거듭된 인수대비의 주청에 의해 아들 성종은 내키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윤씨는 졸지에 왕후에서 폐비가 된 것이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눈물로 용서를 빌어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는 눈물로 궁궐을 따날 수 밖에 없었고, 아들 융의 얼굴도 재대로 보지 못하고 사가로 방출되었다. 인수대비는 앓던 이가 쏙 빠진 것 마냥 기뻐했다.

정소용과 엄소용도 서로 왕후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 더 인수대비 앞에서 아첨과 뇌물을 주었지만 인수대비는 그녀들의 허를 찌르는 결정적인 선택을 했다. 인수대비는 윤호의 딸 숙의 윤씨를 그녀가 두 살 때부터 옆에서 끼고 그녀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는데 그 때문인지 숙의 윤씨는 정숙하고 기품이 있었다. 인수대비는 숙의 윤씨를 왕후로 진봉하게 성종을 부추겼고, 성종은 제2 계비를 맞이하니 그 분이 바로 정현왕후 윤씨이다.

정현왕후 윤씨의 본관은 파평으로, 슬하에 훗날 중종 임금이 되는 진성대군과 신숙공주를 낳게 된다. 하지만 신숙공주는 어릴 때 병치레를 하다가 죽어 자신의 슬하는 진성대군 밖에 없었다. 왕후가 된 윤씨는 인수대비의 말씀대로 투기를 하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낳은 아들마냥 연산군을 아껴주고 사랑해주었다. 이 점이 성종과 인수대비를 흐뭇하게 만드는 것이다.

졸지에 닭쫓던 개가 되어버린 정소용과 엄소용은 대비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인수대비는 그들이 서운해 할 것이라 생각해 그녀들의 직급을 종1품 귀인으로 승격시켜주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세자 융은 커가는데 성종대왕은 아들의 모습을 보자 순간 폐비 된 윤씨가 생각났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불러 들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즈음 윤씨는 폐출 당한 이래 젊은 시절의 검소하고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돌아와 성종의 건강과 아들의 안녕을 빌고 있었다. 그리고 밥도 잡곡밥과 소금으로만 하루 세끼를 먹고 있었고, 옷도 무명옷으로 입고, 화장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녀는 언젠가 성종이 자신을 다시 불러들일 날이 올 것이라며 매일 같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가 사는 곳이 궁금해서 내관 하나를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내관은 성종의 분부 대로 폐비 윤씨가 사는 모습을 보고 드리려 하나 도중에 엄귀인과 정귀인에게 붙들려 인수대비가 있는 곳까지 불려가게되었다.

인수대비는 막대한 돈을 내놓고 아들 성종에게 "폐비가 지난 날의 잘 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다고 전해라." 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자 그 내관은 인수대비가 준 돈을 챙겨들고 성종 앞에 나타나 "폐비마마는 아직도 잘 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있으며 항상 비단 옷에 진한 화장을 하며 아직도 자신이 중전마마인 양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가관이었습니다." 라고 거짓 고변을 하게 된다.

이 말을 들은 성종은 너무도 화가 나 그 순간 품고 있던 폐비 윤씨의 좋은 생각 마져도 지워버리게 되었다. 그는 우선 폐비의 처소로 보내지는 무명과 쌀을 보내는 일들을 중단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인수대비의 부추김으로 사약까지 내리게 된다.

성종은 처음 아들 융이 사약을 받고 죽어간 어미의 일들을 안다면 골치 아파 진다며 어머니 인수대비의 간청을 뿌리쳤으나 여기에 합세한 정귀인과 엄귀인등이 성종을 부추겨 결국에는 1482년 대신들과 상의한 끝에 그녀에게 사약을 내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 일어날 '갑자사화'의 효시가 되는 사건이다.

윤씨는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기 직전 그 곳에 있는 여러 군관들에게 말한다.
"언젠가 내 이 한맺힌 원혼을 나의 아들 융이 대신 갚아 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 그 때 원삼에 피를 일부러 뿌리고 죽었는데 연산군이 이 금삼의 피를 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시행한 것이다.

훗날 정귀인과 엄귀인은 연산군이 모진 고문을 하여 죽었고, 그녀들의 소생인 봉안군, 안양군, 경혜옹주, 공신옹주들이 죽거나 옹주의 작위를 박탈 당해 관노로 전략하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죽게 했으며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과 이복누이 동생 휘숙옹주를 강제로 범하는 등의 폐륜을 저지르게 되는 폭군이 된 것이다.


제헌왕후 윤씨의 모든 것을 빼앗은 정현왕후 윤씨

쫓겨난 윤씨는 어머니 신씨와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궁궐에서 나온 중전의 빈자리를 그냥 둘 수 없어, 다섯명이나 되는 후궁 중에서 한 명을 승격시키기로 하였다. 1480년 10월 정작 승격된 후궁은 윤씨와 다투었던 엄씨나 정씨가 아니라 열살난 숙의 윤씨였다. 엄씨나 정씨를 왕비로 삼을 경우 윤씨의 폐비에 반대했던 신하들이 들고 일어설 수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윤씨가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왕비로 승격된 결정적인 이유는 인수대비의 지지였다. 1462년 6월에 우의정 윤호와 부인 전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현왕후 윤씨는, 제헌왕후와는 달리 두 살 때 궁궐로 들어와 인수대비의 가르침에 절대 복종하고 따랐던 것이다. 윤씨는 이전 왕비가 투기 때문에 쫓겨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성종이 "투기하지 않는 사람이 드문데 다행히 어진 왕비를 얻어 마음이 평안하다" 고 말할 정도로 여성 편력을 못 본 체했다.

윤씨는 진성대군과 신숙공주를 두었는데, 진성대군은 훗날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정현왕후는 제헌왕후의 자리를 빼앗았고, 그녀의 아들은 제헌왕후의 아들 자리를 빼앗은 기묘한 인연인 셈이다. 1530년 8월 예순여덟살까지 천수를 다 누린 정현왕후의 능호는 선릉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성종의 묘와 다른 언덕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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