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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폐비는 폐비 윤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때문에 한꺼번에 폐출당한 고모와 조카: 폐비 신씨, 단경왕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이긴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쫓겨난 중전은 몇 명 더 있었습니다. 

먼저 미친 남편 연산군과 혼인하는 바람에 조용히 살다가 날벼락 맞은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廢妃 愼氏, 거창군 부인. 1472년~1537년)는 연산군의 정비(正妃)로 신승선과 임영대군의 딸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거창.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의 고모입니다.

연산군과 폐비 신씨(거창군 부인)


단경왕후의
아버지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으로 연산군의 처남이었고 할아버지는 당대의 명신이었던 거창부원군 신승선으로 연산군의 장인이기도 했으며 고모는 바로 연산군의 비(妃)로 그녀의 친정 거창 신씨 가문은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문 배경이 그녀의 인생 전반에 걸쳐 막대한 불행을 안겨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수대비는 자기가 폐비 윤씨(제헌왕후)와 연산군에게 한 짓이 무서웠는지 아니면 손자 융(연산군)의 광기를 일찌감치 알아보았기 때문인지 몰라서 신수근의 딸을 진성대군(훗날 중종)의 처로 삼아줍니다. 그녀가 바로 단경왕후입니다. 연산군이 처가하고는 잘 지냈으므로 설마 자기 부인의 조카를 과부로 만들지는 않으리라 예상한 것이지요. 연산군이 완전 싸이코에 가까웠음에도 자신의 가까운 사람과는 살갑게 잘 지냈다는 이런 기록들을 보면 그의 광기는 인수대비한테서 키워진 건 분명한 듯 합니다. 그의 행실을 보면 성군감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적어도 폭군은 안됐을 것 같거든요.

어쨋든 인수대비의 전략은 적절했고, 진성대군은 갑자사화의 피바람 속에서도 목숨을 건집니다. 근데 역사가 참 재미있습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은 중종 반정을 도모하는 패거리들에게 '왕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영특하므로 세자를 믿어보자'고 하며 반정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처가와는 잘 지냈던 연산군에 대한 의리때문일수도 있고, 임금의 처남이 되든, 새 임금(중종)의 장인이 되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괜히 실패할지도 모르는 역적 모의을 일으켜서 자기 집안을 다치게 하기 싫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습니다.


그의 바램과는 달리 중종 반정은 성공했고, 아버지
신수근의 선택으로 그 불똥은 엉뚱하게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에게 떨어집니다. 신수근이 참 불쌍하죠? 만약 찬성했으면 현재 중전인 자기 여동생은 쫓겨나더라도 자기 딸과 집안은 살렸을텐데... 연산군이 쫓겨나는 바람에 여동생도 폐비돼, 자기 집안도 망해, 딸도 반정 성공으로 국모의 자리에 오른지 7일 만에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서인이 되니 말입니다. 반대로 반정공신들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획득하여 왕도 부럽지 않게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았거든요.

반정공신들도 웃긴 넘들이죠. 만약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가 아니었더라면 진성대군은 아예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단경왕후 쫓아내려고 시위대 결성해서 단식투쟁하고(^^;) 난리를 떨었거든요.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겠죠. 뭐. 친정에 멸문지화를 입었으니 단경왕후가 칼갈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불과 몇 년 전에 연산군의 복수로 신언패(牌: 말조심 목걸이)까지 목에 찬 경험이 있으니 복수라는 말만 들어도 온 몸이 떨렸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녀는 폐위된 후 중종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나 공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복위되지 못하고 71세의 나이로 한많은 인생을 쓸쓸히 마칩니다.

단경왕후가 중종에게 보여줄 붉은 치마를 걸어놓았다고 전해지는 치마바위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또한 중종의 임종 직전에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며,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의 야사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군요. 저도 솔직히 그 뒤 중종의 행동으로 보아서 반년도 안되어서 잊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쿨럭~;

결과적으로는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폐비 윤씨, 연산군의 아내인 폐비 신씨(신수근의 누이), 진성대군(중종)의 아내인 단경왕후 폐비 신씨(신수근의 딸)까지 연산군 주위의 여자 3명이 폐비 당했으니.. 연산군 근처에는 얼씬도 말아야겠습니다.ㅋ

도봉산 자락의 연산군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연산은 7년 후 이곳으로 이장했다.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부원군 신씨 묘다


ⓒ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연산은 폭군이었나? 왕권주의자였나?


시삼촌한테 쫓겨나서 폐비된 단종(=노산군)비 정순왕후, 광해군비 혜장왕후도 있습니다. 그 외에 장희빈도 중궁의 자리에 있다가 쫓겨났지만 궐 밖이 아니라 후궁의 지위에서 사사당했고, 인현왕후도 다시 궐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폐비 계열(?)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단종(정태우)과 함께 폐위 당한 단종비 정순왕후(김민정)



구혜선이 빠진 왕과 나에 정태우가 연산군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극 전문이라 불릴 만큼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서 기대가 되네요. 왕과 비에서 단종 역을 맡았는데 정태우는 어찌 늘 쫓겨나는 역할만 맡게 되네요. 그래도 단종역을 세 번이나 맡았다는데 (한명회, 왕과비, 설중매) 이번에 또 폐위당하는 역입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성질이나 마음껏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요.ㅋ


임금께 사사당하고 아들까지 쫓겨난 폐비 윤씨(제헌왕후), 폭군 남편 덕분에 복위도 되지 못한 거창군부인 폐비 신씨,  남편이 왕이 된 대가로 쫓겨난 또 다른 폐비 신씨(단경왕후)....  남편 잘못 만나서 왕족에서 역적이 되어버린 그녀들이 참 가엽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경왕후 능


쓸쓸히 저 세상으로 떠나갔을 그녀들이 편하게 쉬길 바라며 그녀들의 묘에 술 한 잔 바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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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은 기사 중 일부. 출처는 링크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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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일단 출발점이 되는 성종

성종의 도학 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
(1457-1494, 재위 기간 1469년 11월-1494년 12월, 25년 1개월)

"성종은 치세에 능했다.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 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해나갔다. 그 결과로 그는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뜻의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었을 만큼 조선 개국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 성종이 편전을 장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성종은 우선 조정의 서무 결재에 원로 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또한 2년 뒤인 1478년에는 참판 이하의 모든 문무신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 현상을 막았으며, 임사홍, 유자광 등의 공신 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 출신 신진 세력들의 진로를 열어 주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고려말의 대표적 학자인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진 사림 세력은 왕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이 주축이 된 훈구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조금씩 후퇴하였다. 성종은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또한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성종은 이런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도학 정치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그 일환으로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1489년에는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하다'는 내용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보냈는가 하면, 1492년에는 도승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고, 일정 숫자의 사찰만을 남긴 채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였다. 한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심지어 경학이나 강의에만 능해도 관리로 등용하거나 자신의 벗으로 삼기도 했다."

"성종은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 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였다. 그 결과 조선 초부터 끊임없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조선 백성들은 개국 이래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성종에 대한 좋은평가


"하지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 퇴폐 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 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상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를 알게 해준다."

결국 폐비윤씨-연산군으로 내려오는 비극적인 일들은 성종의 잘못도 크다고 할수있네!!
여자를 너무 밝혔어 ㅡㅡ;

다음은 영화에서 사고사 처리되는 인수대비,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연산군이 머리로 받아서 죽었다는데 머리가 꽤 단단했나 보지 ㅋㅋ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1437-1504)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성종의 계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이 사건으로 후에 연산군이 폐비사건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하자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덕종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다음은 폐비윤씨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에는 극약인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 뻔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었던 적이 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이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 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되고 만다."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계비 정현왕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오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니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위에 기록을 잘보면 인수대비가 윤씨를 모함했다는데 아마 이 여자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때부터 꺼림직했을꺼야 ㅋㅋ 사실 저런상황에서 연산군이 진실을 알면 인수대비는 죽을수밖에 없는거지. 조선왕조를 보면 친족끼리 죽이는건 예사로 있는일이더라구 권력을 위해서라면 내생각인데 아마 인수대비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기전까지 연산군을 제거하거나 최소한 왕자리에는 못앉히게 노력했을꺼같아.

 

다음으론 주인공 연산군

그전에 "성종은 도학을 숭상하고 스스로 군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가 넘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호기는 그의 가족관계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30명에 가까운 자식들을 얻었다. 결국 이런 호기가 평지풍파를 예고하는 불씨를 낳고 말았다. 그 불씨가 바로 희대의 폭군 연산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는다 여자 너무 밝히지말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세자 융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출 당해 사사된 사실을 모르고 자라났다. 융은 윤씨가 폐출될 당시에 불과 네살바기 어린 아이에 불과했고, 또한 성종이 폐비 윤씨에 대한 사건을 일체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자 융은 어머니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인 줄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천륜은 속일 수 없었던지 융은 정현왕후 윤씨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 물론 정현왕후 역시 폐비의 자식에게 사랑을 쏟아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 인수대비는 융에게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이 고울 리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에게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융의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었다." 세자 융이 곧 연산군인데 역시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군 자기 생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다니 참 뭐라 할말이 없다.

아. 그리고 역시 인수대비는 세자책봉에 반대를 했네.

"성종은 이런 성격을 가진 융을 탐탁치않게 여겼지만 1483년 그를 세자로 책봉한다. 이때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그를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행한 어린시절을 겪고 자란지라

"성종과 주위 사람들이
세자의 다소 포악한 성품을 우려했던 일화들이 야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다음의 두 가지다.
 
성종이 어느 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 등을 핥아댔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죽여버렸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이다. 융에게는 허침과 조자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조자서는 엄하고 깐깐한 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융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자주 수업 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자서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조자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자서는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융의 이 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다.
융은 왕위에 오르자 조자서를 가장 먼저 죽여버렸던 것이다."



연산군의 등극과 광적인 폭정
(1476-1506, 재위 기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박원종의 반란으로 폐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연산군도 처음부터 이랬던건 아니란다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 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의 바로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화 정책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심지어는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의 이 같은 사치 행각은 결국 국고를 거덜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하려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이에 반발하여 왕과 대립하며 연회를 줄이고 국고를 아낄 것을 간청한다. 이때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 윤씨 사건을 연산군에게 밀고하게 된다."

임사홍이라는 사람이 연산군한테 폐비윤씨 사건을 밀고했다네. 그럼 그전까지 연산군은 정말 몰랐다는소리??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가 폐비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내막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임사홍의 밀고로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살생극을 자행한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 갑자사화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사람 세력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부당한 공신전 몰수 행위를 비판하며 향락적인 궁중 생활에 제동을 걸었던 중신들이었다. 이때 연산군은 대신들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머리를 받아 절명케 하는가 하면, 윤씨 폐출에 가담한 성종의 후궁들과 그 자손들, 그리고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그는 막상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 이어지자 민심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급기야 1506년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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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왕의남자>에서 연산군역을 맡은 정진영.
ⓒ 이글픽처스

왕은 왕이로되 왕이 아닌 왕이 바로 연산군이다. 이러한 연산군이 영화 <왕의 남자>가 뜨자 새로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소설과 연극, 영화,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 등장한 연산은 폭군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번에 뜬 연산군은 마마 콤플렉스에 힘들어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연산군은 폭군이었을까? 그의 재위기간 12년은 실록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연산군일기>로 남아있다. 내용 또한 패악으로 그득하다.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로 학습하고 그것을 자료로 만들어진 소설을 읽고 영화 연극 드라마를 접한 우리들은 그를 폭군으로 기억한다. 이는 <연산군일기>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한데 따른 폐해라 할 수 있다.

조선실록은 그 기록성에 있어서 세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성에 있어서는 미흡한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적자 후손 또는 방계혈통으로 이어지는 왕통의 연결고리에서 냉정한 객관성을 유지하는데 한계점이 있었다.

▲ 연산군이 19세의 나이에 왕으로 등극했던 창덕궁 인정전
ⓒ 이정근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처럼 반정 시 전위자의 기록은 반정을 기정사실화해 반정의 시각으로 기록해야 했다. 즉 성공한 쿠데타이기에 성공자의 눈높이에 맞춘 맞춤형 기록이라는 뜻이다. 또한 실록 자체의 당위성을 검증할 기회를 원천봉쇄했고 후대에 수정보완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 후대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흥미 본위의 긴장감을 극대화 하고 극적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그를 폭군으로 과장하여 그렸다. 실록 어디에도 연산군을 폭군이라 지칭한 말은 없다. 작가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든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일 뿐이다.

1910년대 이후에 발표된 소설에 등장하기 시작한 연산은 폭군 일색이다. 작품성을 위하여 그려진 폭군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셈이다. 하지만 이 시기가 일본 제국주의가 발호하던 시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이라는 국가를 이조(李朝)라 폄하하고 사색당쟁에 패망할 수밖에 없는 국가로 매도하며 자신들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 하려 했다. 자의든 타의든 황국사관에 일조한 셈이다.

▲ 연산군이 반정군에 폐위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될 때 건넜을 갑곶나루터. 연산군은 살아서 이 바다를 건넜고 백골이 되어 이 바다를 건넜다. 현재는 강화대교가 놓여있다.
ⓒ 이정근

우리는 반복되는 학습에 익숙해진 셈이다. 무의식중에 반복되는 교육은 본의 아닌 결론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공산당은 이마에 뿔이 나고 도깨비처럼 생겼을 것이라는 교육을 받고 그럴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만나보니 뿔도 나지 않고 도깨비처럼 생기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반복학습의 결과는 이렇게 황당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다면 <연산군일기>는 누가 썼을까? 그를 권력의 자리에서 밀어낸 반정공신들의 입김이 서린 자들이 썼다. 때문에 그를 폭악무도한 폭군으로 깎아 내리고 인륜을 파괴한 패륜아로 낙인찍어야 자신들의 쿠데타 명분을 얻을 수 있기에 과장하여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대 조선실록 중에서 <연산군일기>만큼 역사적 사실을 작의적으로 기록한 실록도 없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실록의 생명은 객관성이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 사료를 바탕으로 엄선된 인물들이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하지만 <연산군일기>는 그가 반정군에 의하여 권좌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후에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승자의 기록이다. 연산은 패자다. 패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 <연산군일기> 총서 전문
ⓒ 이정근

조선시대 역사적 사료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역대 왕 실록 중 실록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일기로 남아있는 것이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다. 그 <연산군일기>를 한마디로 압축하는 <연산군일기> 첫 장 총서에는 연산군의 실정과 패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사관들이 사초에 근거를 두고 기술하였겠지만 의도된 작의성이 엿보인다. 여기에 <연산군일기> 총서를 그대로 옮겨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연산군, 휘(諱) 융(㦕)은 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 의 맏아들이며,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尹氏),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 의 딸이 성화(成化) 병신년 11월 7일(정미)에 낳았다. 계묘년 2월 6일(기사)에 세자(世子)로 책봉(冊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명회(韓明澮) 등을 북경(北京)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5월 6일(정유)에 황제가 태감(太監) 정동(鄭同) 등을 보내어 칙봉(勅封)을 내렸다.

소시(少時)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로서 공부하기를 권계(勸戒)하는 이가 있으매,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즉위하여서는, 궁안에서의 행실이 흔히 좋지 못했으나, 외정(外庭)에서는 오히려 몰랐다.

만년(晩年)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거의 다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교동(喬桐) 에 옮기고 연산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 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


▲ 상서원 현판. 승정원과 함께 왕명을 출납하던 곳이다. 연산은 승정원에 어제시를 내리고 정원들로 하여금 답시를 올리도록 했다.
ⓒ 이정근

庸質臨臣十載回(용렬한 자질로 위에 있은 지 10년이 되었건만)
未敷寬政愧難裁(너그러운 정사 못하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네)
朝無勉弼思宗社(조정에 보필하고 종사 생각하는 자 없으니)
都自沖吾乏德恢(나이 어린 이 몸이 덕이 없나 보구료)


연산10년 3월에 지은 연산군의 시다. 연산군은 이러한 시를 지으면 혼자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승정원에 내려 보내 정원들로 하여금 답시를 지어 올리게 했다. 자신의 실책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신하들과 교감하고 시적 토론을 하자는 뜻이 담겨있다.

妄節投身熾火中(지나친 절조로 몸을 불 속에 던졌으니)
徒知高義不知通(높은 절의만 알고 변통 모르네)
虛名處理無相亂(헛된 명예 때문에 흐리지 말라)
正似飛蛾赴燭紅(불보고 날아드는 나비 같으니)
深院無人麗景融(심원에 사람 없고 경치만 아름다워)
桃凝香露醉春風(이슬 맺힌 복사꽃 봄바람에 취하였네)
須緣濃雨添嬌蘂(듬뿍 맞은 비로 꽃술이 더 예뻐라)
手折芳枝拭艶紅(꽃다운 가지 꺾어 요염한 꽃 닦아주리)


평제를 독살한 다음에 유자영을 황태자로 세워놓고 자신이 가황제노릇을 하다 찬탈하여 진황제가 되었던 한나라의 효평황후가 반정군에 쫓기어 불속에 몸을 던져 죽었던 고사를 인용하여 연산군이 권좌에서 쫓겨나기 1년 전, 그러니까 연산 11년 11월 5일에 지은 시다. 역사를 모르면 지을 수 없는 시다.

▲ 도봉산 자락에 초라하게 누워있는 연산군.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군부인 신씨다.
ⓒ 이정근

연산군은 태어날 때부터 폭군은 아니었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추앙받는 아버지 성종의 원자로 태어난 연산은 성종이 승하하자 뒤이어 조선 10대 왕에 즉위했다. 즉위 초기에는 정치에 서툴기도 했지만 할머니 인수대비의 말을 잘 따랐다.

심성도 여리고 감성도 풍부했다. 시(詩)도 130여 편을 썼다. 학문의 깊이가 없으면 쓰지 못하는 것이 칠언절구다. 훗날 반정군에 의하여 대부분 불태워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연산군일기에 120여 편의 시가 남아있어 그의 시심(詩心)을 오늘에 전한다.

서모 자순대비(장현왕후)를 친모로 생각하고 깍듯이 모셨다. 훗날 중종으로 즉위한 이복동생 진성대군도 사랑했다. 그가 진성대군을 견제했더라면 진성대군이 중종이라는 용상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살육이 춤추는 광기의 시대에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2006-03-07 16:3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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