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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왕의 남자, 내시 김처선

 

■ 방송 : 2007. 9. 22 (토) 20:10~21:00 (KBS 1TV)
■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 연출 : 송철훈 PD
■ 작가 : 정종숙


"처(處)자는 김처선의 이름이니
이제부터 모든 문서에
처(處)자를 쓰지 말라."



1505년 4월 1일,
연산군은 내시 김처선을 처참하게 죽이고
'처(處)자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도대체 연산군과 김처선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보필했던 내시 김처선.

그는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왕을
목숨 걸고 지켜내었던
진정한 "왕의 남자"였다.


▣ 영화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연산군의 곁에서 평생을 걸고 눈과 귀어 되어주었던 영화<왕의 남자>의 김처선.
단종부터 연산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며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보필했던 내시 김처선.
그는 왕의 그림자로서 왕을 독살할 수도, 왕의 생명을 지켜낼 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내시부의 최고 수장, 상선내시였다. 지금 '내시 김처선'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 傳"에서는 '조선왕조실록', 내시부 지침서 '내반원기' 등의 사료와 전문가 인터뷰를 바탕으로 내시의 전문 직업적 면모를 파헤치고, 김처선이라는 인물의 실체를 밝혀낸다.


왕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아는 유일한 남자, 김처선

단종부터 연산군까지 다섯 분의 임금을 모셨던 내시, 김처선. 성종과 연산군 대에는 왕의 건강을 돌보고, 그의 지시와 명령을 전하는 상선내시로서 임금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상선내시는 왕의 신임을 받아야만 오를 수 있는 최고위 자리였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신하로서 왕을 대신해 성종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시릉내시로 근무한 김처선. 그는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받는 내시부의 최고 수장이자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왕의 그림자였다.



왕의 독이 될 것인가. 왕의 생명이 될 것인가!

폐비 윤씨 사건 이후 연산군은 기생들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날마다 흥청망청 잔치를 벌였 고,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모질어 벼 수확을 하러 금표(군사훈련지역이나 왕의 사냥터에 세우는 일반인 출입 금지 표지문)안으로 들어왔다가 처형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특히 연산군은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내시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 내시가 승명패를 차고 지나갈 때에는 신분에 상관없이 말에서 내리게 했다. 그래서 권력을 얻은 내시들 중에는 대낮에 공공연히 뇌물을 받는 이도 있었다.

조선왕조 역사상 유례없이 왕이 내시에게 막강한 권력을 실어주는 상황 속에서도 김처선은 변함없이 내신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오늘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하거라."

口是禍之問 舌是斬身刀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연산군은 "신언패"를 관리들의 목에 걸고 다니게 하고, 말을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였다. 왕명에 반하는 말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하들은 연산군의 비행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이 자신의 향락생활을 감추기 위해 궁궐담을 점점 높이 쌓아가는 가운데 김처선은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왕을 위해 마지막 충성의 길을 선택한다. 내시의 본분은 왕을 바른 길로 모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양아들이 있었던 김처선. 1505년 4월 1일, 그는 가족에게 유언을 남긴 채 목숨 걸고 왕의 앞에 선다.

"이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지만은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백성들을 생각하시어 바른 정치를 펴셔야 합니다."




연산군의 광기어린 보복,
      김처선에 대한 모든 흔적을 없애버리다.




[전의면 옛지도
- 김처선의 집을 파헤쳐 연못을 만든 흔적]
왕의 손에 처참하게 죽은 김처선. 그의 직언에 분한 연산군은 김'처'선(金處善)의 '처(處)'자 사용 금지령을 내린다.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사람은 모두 이름을 고쳐야 했고, 공문서에 '처'자를 사용했다가 국문을 당한 이도 있었다.

또한
김처선이 나고 자란 전의현을 조선의 행정구역에서 없애버리고, 그의 고향집을 파헤쳐 연못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연산군은 처절하게 김처선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없애버리고자 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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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29)] 실제 홍길동은 연산군 시절 도적 떼의 두목

고위관리 사칭한 강도 행각 실록에 남아…
당상관 등 비호세력 밝혀지며 조정이 시끌

그림. 이철원.


신출귀몰(神出鬼沒)하면 곧바로 연상되는 인물이 홍길동(洪吉童)이다. 지금도 우리는 동사무소나 구청에 가서 각종 서류양식을 작성하려 할 때 표본서류에서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한국 사람이 가깝게 느끼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홍길동상(像)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이후부터 홍길동은 조선 백성들이 학정(虐政)에 시달릴 때마다 메시아처럼 갈구하는 인물로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사실 실록에 기록된 홍길동은 소설 속 홍길동과 다르다. 광해군 때 허균은 세종 때를 배경으로 해서 홍길동을 썼지만 역사 속 홍길동은 연산군 때 인물이다. 신출귀몰했는지는 모르지만 홍길동은 한낱 도적떼의 두목에 불과했다. 폭정이 도적 떼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임꺽정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이 극에 달한 명종 때 도적이다. 숙종 시대를 폭정기(暴政期)라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잦은 당파 교체로 지방 수령들에 대한 통제가 미약해지면서 백성들에 대한 지방 수령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다는 점에서 장길산의 등장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실록에서 홍길동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연산군6년(1500년) 10월 22일이다. 영의정 한치형을 비롯한 3정승이 홍길동을 체포했다며 “기쁨을 견딜 수 없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이때 3정승은 홍길동을 ‘강도(强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단순 강도라면 국왕과 3정승이 이처럼 흥분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정에서 골치를 앓아야 했던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위관리 사칭이었다. “강도 홍길동은 옥(玉) 달린 모자를 쓰고 홍대(紅帶)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공서를 드나들면서 기탄 없는 행동을 자행했다.” 홍길동을 조사한 한치형의 보고서에 나오는 홍길동의 범죄 행각이다. 중추부 첨지면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다. 홍길동의 활동 무대는 주로 충청도와 한양, 경기도 일대였다.

홍길동 체포로 그의 비호세력들이 속속 밝혀지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엄귀손이었다. 그는 실제로 무인 출신의 당상관이었다. 조사 결과 엄귀손은 홍길동이 도적질한 물건을 관리해주고 집도 사주었다. 조정에서는 약간의 논란도 있었다. 엄귀손의 홍길동 지원이 적극적인 것이었는지 소극적인 것이었는지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어세겸 같은 인물은 “엄귀손이 홍길동의 음식물은 받아 먹었지만 그것은 인정상 흔하게 있는 일이니 허물할 것은 못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치형을 비롯한 3정승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 100대와 3000리 유배 그리고 고신(告身) 박탈이었다. 고신을 박탈한다는 것은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빼앗는다는 뜻이었다. 이 형벌은 조선 때 사형 바로 다음에 해당하는 중한 처벌이었다.

실록만 놓고 본다면 홍길동 사건보다 엄귀손의 홍길동 비호사건이 더 중요하게 다뤄졌다. 결국 한 달여의 조사 끝에 엄귀손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당시 연산군은 3정승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런 인물이 당상관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책임은 당연히 3정승에게 있었다. 그들은 “엄귀손이 당상관이 된 것은 군공(軍功)이 있어서이지 조행(操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라고 변명했다. 조행이란 조신한 행실을 뜻한다. 엄귀손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아래에서 우후(右候)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군공’이라고 함은 그때 국방의 공을 세웠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엄귀손은 품행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동래 현령으로 있을 때는 관물을 마음대로 도용하다가 파면된 일이 있었고, 평안도 우후 때도 공물을 훔쳤다가 퇴출되는 등 좋지 못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런 경우 분명 중앙조정에서 그로부터 뇌물을 받아 엄귀손을 비호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 무관의 관직은 대부분 돈과 뇌물로 결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공보다 뇌물이 엄귀손을 당상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게다가 원래는 노비와 재산이 없었는데 홍길동 사건과 관련되어 조사 받을 당시에는 한양과 지방에 집을 여러 채 갖고 있었고 곡식도 4000석이나 쌓아 두고 있었다고 하니 그것은 ‘대도(大盜)’ 홍길동 덕택이었다고 봐야 한다.

실록에 기록된 홍길동 사건은 여기까지다. 흥미로운 것은 그에 관한 처벌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형을 시켰다면 분명 기록되었을 텐데 홍길동을 군기시 앞에서 참형에 처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엄귀손에 준하는 형벌로 남쪽 섬으로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정에서도 홍길동 문제보다 엄귀손 문제를 더 중하게 다룬 것을 보더라도 사형에 처해지지는 않은 듯하다.

홍길동의 ‘증발’ 이후 그에 대한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조정 관리들은 누구를 욕할 때 ‘홍길동 같은 놈’이라고 할 정도였다. 선조 때의 기록이다. 조헌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 홍길동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정승을 잘못 골라 풍속이 탁해지고 강상의 윤리가 무너져 이제는 홍길동을 욕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한마디로 홍길동보다 못한 인물이 정승에 올랐으니 굳이 홍길동을 욕할 일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홍길동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당대의 정치 상황에 따라 바뀌고 있었다. 광해군 때 비운의 혁명아 허균이 조선의 계급적 모순을 정면으로 질타하는 국문소설의 주인공으로 홍길동을 끌어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소설 속 홍길동은 이조판서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였다. 실제 홍길동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지만 아버지가 이조판서와 같은 고위직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실록 어느 한 구석에도 언급이 되었을 것인데 그런 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허균의 상상력이 빛나는 대목은 ‘홍길동 그 후’이다. 현실 속 홍길동이 섬으로 유배를 갔다면 소설 속 홍길동은 체포된 후 병조판서직과 쌀 1000섬을 하사 받고 남쪽 저도라는 섬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병사들을 훈련시켜 율도국을 공략해 율도국의 왕이 된다는 멋진 상상이다. 지금도 율도국이 실존하느냐는 논쟁이 있을 만큼 허균의 상상력은 그럴듯했다.

숙종 때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홍길동과 관련된 아주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겼다. 옛날에 홍길동이라는 도적이 주로 보부상을 습격하였기 때문에 보부상들이 홍길동이라는 이름 자체를 극도로 싫어하였는데 지금은 보부상들이 맹세를 할 때 홍길동의 이름을 걸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연산군 때의 홍길동, 명종 때의 임꺽정, 숙종 때의 장길산을 꼽았다. 홍길동은 조선 때 허균을 만나, 임꺽정은 일제강점기에 홍명희를 만나, 그리고 장길산은 오늘날 황석영을 만나 되살아났다. 이들의 작품화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균은 광해군 때의 폭정을 비판하며 역모를 꾸미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폭정의 시기였으며, 황석영이 장길산을 쓴 때도 군사정권이라는 폭정의 시대였다. 폭정은 평범한 백성을 도적 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도적을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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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26)] 그 많던 왕씨는 어디로 사라졌나?
조선 건국 직후 강화도 등에 강제이주… ‘왕씨 제거’ 기습작전으로 집단 수장돼


왕씨 완전 제거 작전

그 많던 왕(王)씨들은 어디로 갔을까? 당시의 통계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500년 가까이 이어진 고려였기에 조선 건국 당시 왕씨의 수는 대단했을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지 사흘 후인 1392년 7월 20일 태조 이성계는 대사헌 민계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고려왕조의 제사를 받들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왕씨를 강화도와 거제도에 옮겨 살도록 명을 내렸다.

이성계는 물론이고 신하들도 왕씨의 존재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는 명나라로부터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외적으로 불안정 요인이 컸던 것이다. 태조3년(1394년) 1월 21일 사헌부·사간원·형조 등 형률을 맡고 있는 3개 기관이 합동으로 왕씨를 제거해야 한다는 글을 올린 것도 그런 불안감의 발로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윤허하지 않았다. 자칫 민심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는 중대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신하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려 십여 차례에 걸쳐 끈질기게 왕씨 제거를 주장했다.


실상은 분명치 않지만 왕씨들이 연루된 이런저런 모반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이성계는 사헌부에 명을 내려 강화도 등에 거주하고 있는 왕씨들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신하들의 왕씨 제거 주청은 4월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결국 4월 14일 이성계는 도평의사사에 그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한다. 왕씨들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일부 신하는 섬에 유배하는 정도에서 왕씨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지만 소수였고, 절대다수는 왕씨의 완전제거를 역설했다. 결국 왕씨 제사를 담당해야 하는 공양왕의 동생인 왕우 삼부자를 제외한 모든 왕씨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왕우의 딸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했으니 이성계와 왕우는 사돈이어서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이보다 참혹한 순간이 또 있었을까?

이렇게 해서 왕씨의 씨를 말리는 작전이 개시되었다. 당시 왕씨들은 강화도와 거제도 외에 삼척에도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중추원 부사 정남진과 형조의랑 함부림은 삼척, 형조전서 윤방경과 대장군 오몽을은 강화도, 형조전서 손흥종과 첨절제사 심효생은 거제도로 파견되었다. 모두 개국에 큰 공을 세웠던 이성계의 최측근이었다.

작전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바로 다음날 윤방경 등은 왕씨를 모두 색출해 강화나루에 수장(水葬)시켰다. 거제도의 작전은 4월 20일에 이뤄졌다. 마찬가지로 수장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왕족이었고 그 밖의 왕씨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돼 “모두 목을 베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왕씨의 서얼들까지 잡히는 대로 참수했다.

이어 이성계는 고려 때 왕씨 성을 하사 받은 경우에는 본래의 성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왕족이 아닌 경우라도 왕씨 성은 모두 어머니쪽 성으로 바꾸도록 엄명을 내렸다. 왕씨들의 관직진출이 금지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행정력이 미비한 상태였으니 아무리 정부에서 완벽하게 왕씨를 제거했다고 해도 살아남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왕씨 색출작업은 태종 때도 계속된다. 태종13년(1413년) 태종은 의정부에 명을 내려 “사찰에 있는 중들 중에서 나이 15세 이상 40세 이하의 경우 출생지와 조상 계통을 샅샅이 조사해 보고하라”고 했다. 아무래도 사찰은 불교국가였던 고려에 동조하리라고 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면서 태종의 생각은 바뀐다. 당시 왕씨의 후손 한 명이 체포되었다. 신하들은 당연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나섰다. 이때 태종이 말한다.

“역사책을 살펴보니 역성혁명을 하고서도 전조(前朝)의 후손들을 완전히 멸망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 앞으로 나는 왕씨의 후예를 보전하겠다.”

그것은 아버지 이성계의 조치를 뒤집는 발언이었다. 신하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태종은 신하들을 나무란다.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자고 고려 왕실을 박멸하려는 모습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씨가 도(道)가 있으면 백 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이씨가 도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

현실주의자 태종다운 발언이었다. 이어 태종은 “예전에 태조가 왕씨를 제거한 것은 실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로 아버지와의 의견충돌을 무마했다. 그러나 20여년 가까이 왕씨들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심지어 성을 전(全)이나 옥(玉)씨로 바꾼 사람도 많았다.

태종의 이 같은 명이 있은 이후 왕씨에 대한 살육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관직에 진출하는 길은 사실상 막혀 있었다. 아마 단종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그나마 당시 최고위직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문과 급제자는 1453년 왕희걸(王希傑·?~1553년)이 최초였다. 그는 이름 그대로 대단히 보기 드문 인재였을 것이다. 문장?琉?글씨 등에 두루 정통한 그는 홍문관 부제학까지 올라갔다. 또 이황이나 노수신 같은 당대 유명한 유학자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아마도 왕희걸을 바라보는 당시 왕씨 집안 사람들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왕희걸이 역사적 사건과 관련을 맺는 것은 명종 때 을사사화다. 당시 그는 함경도 어사로 있었다. 이때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계림군을 역모로 얽어매려 했는데 계림군이 함경도 쪽으로 도망을 쳤다. 왕희걸의 조사 결과 중 보우(普雨)가 황룡사·석왕사 등지에 계림군을 숨겨주었다는 보고서를 올렸지만 보우의 뒤에는 문정왕후가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명종20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직후 보우는 승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 변협에게 피살되는데 보우의 승적을 박탈할 때 핵심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왕희걸의 장계였다.


흥미로운 것은 왕씨에 대한 이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실에 대한 제사는 줄곧 이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선조 때에 오면 그마저 사람이 별로 없어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었다. 선조22년(1589년) 7월 4일 조정에서는 50년 가까이 왕씨가 아닌 다른 성의 사람이 제사를 주관해 온 것은 문제라며 새롭게 왕씨 중에서 주사자(主祀者)를 선정하는 문제를 놓고 선조와 신하들이 격론을 벌인다. 그것은 왕훈이라는 사람의 호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논란의 핵심은 종손 계통에서 고를 것인지, 벼슬이 높았던 계통에서 고를 것인지였다. 종손의 경우 지방의 말직 정도를 지낸 것이 전부였다. 벼슬이 높았던 계통으로는 당연히 왕희걸의 후손이 거론됐다. 결국 왕씨 제사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왕훈이 숭의전 제사를 모시기로 결정했다. 왕훈은 종손 계통이었다. 숭의전은 왕건을 비롯한 고려 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500년 역사를 통틀어 왕씨를 중용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은 흥선대원군이다. 그의 뜻은 고종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고종8년 3월 6일 고종은 왕건의 현릉에 행차했다가 동부승지 왕정양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씨가 전조의 후손으로서 오랫동안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파묻혀 있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부터는 공부에 힘써 이름을 날리도록 하라.”

즉 조선이 망하기 일보 직전에야 제대로 벼슬길이 열린 것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hwlee@chosun.com)


남효온의 추강냉화

남효온의 추강냉화: 왕씨 제거 작전
남효온의 추강냉화: 왕씨 제거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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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는 연산군 제삿날인 걸 알까?
폐주 연산군 묘(1)


▲ 연산군 묘역 입구에서 종친들이 제사를 봉향하러 찾는 손님을 맞고 있다.

연산군의 제사를 보러 폐왕의 묘에 갔던 날은 4월임에도 쌀쌀했다. 다 물러간 추위가 다시 오는 듯 비까지 뿌리고 있어, 정리중인 겨울옷 중 오리털 파카를 다시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연산군(1476~1506) 500주기였던 지난 4월 2일, 청명제(淸明祭)를 지내던 그날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있어 어두웠고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추운 바람이 불었다.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묘(도봉구 방학동)에 올라서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연산군 봉향회, 거창 신씨 대종회에서 참석한 문중 사람들로 붐볐다. 왕릉에서 치르는 왕이나 왕비 기신제에 여러 차례 다녀봤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참석한 것은 처음 본다.

▲ 연산군 묘역은 연산군과 신씨 묘(위). 후궁 궁주 조씨묘(중간) 휘순공주 내외 쌍묘(아래) 등 5기가 있다. 이날 연산군 제사를 지낸 후 후궁 조씨, 휘순공주 내외 제사도 지냈다.

연산군과 부인 신씨 쌍묘가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에 후궁인 궁주(宮主) 조씨 묘가 하단에는 딸 휘순공주 내외의 묘가 있다. 연산군 묘는 폐왕임을 보여주듯 4200여 평 땅에 일반 묘와 다름없는 작은 규모로 조성돼 있다.

"'왕의 남자'는 오늘이 연산군 제삿날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제물을 차리느라 분주한 가운데 종친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한이 하도 깊어서 날씨도 이렇지"

낮 12시가 되자 청명제가 시작됐다. 한 때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제물을 올렸다는 폐군주의 제사는 이제 일반인 제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왕을 상징하는 황색의 봉등 대신 청사초롱을 든 제관이 들어서자 돌연 겨울을 연상케 하는 찬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 청사초롱 봉등을 앞세워 제관들이 청명제를 지내러 연산군 묘에 오르고 있다. 왕과 왕비는 황색 봉등을 쓴다.

제사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매서운 바람이 불었고 비교적 옷을 두툼하게 입었던 동행인들도 추위에 덜덜 떨기 시작했다. 계절을 무시하고 오리털 파카를 입은 용감무쌍한 패션감각으로 나선 나만 추위를 몰랐다. 아무리 날이 흐리다지만 4월인데 이렇게 추울 수가? 카메라를 든 손이 시려 번갈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녹여야 했다.

"한이 하도 깊어서 날씨도 그렇지."

누군가 혀를 찼다. 정말 연산군의 한이 깊어서 갑자기 추운 바람이 부는 것일까. 제물 중엔 백설기가 놓였는데 그 이유는 연산군의 한이 많아 하얀 떡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란다.

왕권과 신권의 줄다리기

흔히 연산군이라 하면 폭군으로 대변되고 포악한 성품으로 정사를 그르쳐 쫓겨난 왕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은 거의 정신병자 수준으로 등장한다. 아무리 창작이라지만 이런 영화가 나오는 배경은 연산군에 대한 선입견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폐비 윤씨를 향한 그리움 때문에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던가, 요부 장녹수, 백성을 몰아낸 금표, 황음무도한 행위 등이 부각되어 '연산군=폭군'이라는 등식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연산군 일기가 반정세력에 의해 편찬됐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494년 12월 29일 19세의 젊은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은 등극 이전부터 성종을 위해 불교식 제를 올리는 것에 거세게 반대하는 대신들과 충돌했다. 연산군이 공부를 싫어했다 전하나 성종은 폐비 윤씨 사건을 사후 1백년 간 함구하라는 어명을 내려 다음 왕위를 물려줄 세자를 보호하려 했고 이는 세자로서 총명한 자질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증명이 된다.

연산군은 명필로 이름을 날렸고 조선에 왔던 중국사신들은 왕의 글씨를 얻어 가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왕은 함부로 글씨를 내리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얻지 못했다. 공부에 등한시했다는 연산군이 뛰어난 명필로 중국사신에게까지 인정받았다면 그 설의 진위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 지난 4월 1일 연산군 묘에서 봉향된 폐주 연산군 제사에서 종친들이 절하고 있다.

연산군에게 힘이 되어줄 외가가 궤멸했기에 젊은 왕을 지원해줄 정치세력이 없었다. 할머니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를 죽인 장본인이었고 당시 조정을 장악한 기득권의 대표적 집안의 인물이었다. 또한 성종대부터 등용된 사림은 성리학을 내세워 왕권에 정면도전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 건국 공신인 신진사대부들의 권력이 성종대에 지나치게 증대하자 이를 견제하려 등용한 지방 토호세력이었던 사림은 대부분 사간원과 사헌부 등 언론기관인 삼사에 배치됐다. 중앙 핵심권력은 여전히 훈구파가 독점하고 있었고 정계 진출을 노리는 신진사림과 훈구파의 한 판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으로 일어난 무오사화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기인한다. 성종실록 편찬책임자 이극돈은 실록 편찬 도중,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넣은 '조의제문'을 발견하고 연산군에게 고한다.

'조의제문'이란 김종직이 세조 3년(1457년) 밀양으로 가는 도중 꿈에 나타난 신인(神人)이 하는 말을 듣고 서초패왕 항우를 세조에, 항우에게 죽은 의제(義帝)를 노산군(단종)에 비유해 세조찬위를 비난한 내용이었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이 글을 사초에 넣은 것은 예종, 성종, 연산군으로 이어 내려온 왕권의 정통성을 전면부인하고 나아가 왕위도전에 해당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연산군으로서는 이 사건을 절대로 좌시할 수 없었다. 정통왕권체제를 부인하고 나서는 신진 사림의 도전으로 간주하고 정계에 겨우 발을 디뎠던 사림을 제거한다.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종묘사직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었기에 연산군이 아니라 어느 왕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일이었다.

▲ 연산군 제사를 지내기 전 제물이 한지에 싸여 놓였다.

훈구파인 이극돈의 고변으로 연산군 4년(1498) 일어난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한 김종직의 추존세력으로 이뤄진 사림은 거의 초토화됐다. 이 사초 건으로 연산군은 역사의 기록인 사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집권 후반기에 3년마다 편찬하는 실록을 5년으로 바꿨고 사관이 개인적으로 사초를 작성해 사가에 보관하는 일을 금했다. 사초에 사사건건 간섭했던 연산군은 이로 인해 역사를 말살하려 했다는 비난과 연산군 시대가 역사암흑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잔치를 벌인 일과 흥청과 운평 등 기생과 여자들의 기록들로 도배질돼 있다. 왕은 절대 볼 수 없고 간섭할 수도 없는 사초를 가져다 감시했던 연산군이 이를 적어 놓는 것을 묵인했을까? 역사에 평가되는 일을 제일 두려워했던 연산군이었다. 그런 그가 사관들이 이런 기록을 남겨 놓은 것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 패자의 기록인 <연산군일기>의 진위가 어디까지인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연산군은 왕의 향락으로 국고가 비게 되자 공신에게 지급한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해 이를 보충하려 한다. 공신전이란 건국 초기 개국공신들에게 지급한 영구적으로 후손에게 상속되는 전답이었다.

사실 연산군 시대는 태평성대라고 평가받는 성종대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됐고 국방도 탄탄한 풍요로운 시대였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일은 연산군이 백성에게 가혹한 세금을 물려 보충한 것이 아니라 기득권층인 훈구파의 재산을 몰수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기득권의 반발이 일어나자 이를 이용해 임사홍이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공모해 일으킨 사건이 갑자사화다. 폐비 윤씨의 일을 들춰내어 피바람을 몰고온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궁중 세력,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힘의 대결이었다.

바람과 시와 여자

연산군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와 여인과 풍류다. 조선시대 역대 왕 중에서 연산군보다 많은 시를 쓰고 남긴 왕은 없다. 현재 전하는 130여 편도 왕조실록에 남은 것이고 연산군이 폐위되자 그의 시집와 문집은 전부 불태워졌다.

시를 중요시한 연산군은 과거제도까지 성리학의 경서 중심인 논술에서 시문(詩文)으로 바꿨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사회는 시문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연산군의 이런 조치는 사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에도 당송대에 시문으로 과거 시험을 봤고 인재를 뽑았었다. 반드시 경학만을 고집해서 과거를 봐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 경학 아닌 시문으로 시험을 봐서 인재를 등용해도 다를 것 없다는 그의 이런 파격적 조치는 연산군이 폐위된 후 갑자년 과거 합격자가 모두 취소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연산군이 즐겼던 연회는 사실 성종도 허구한 날 베풀었던 잔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성종대의 태평성대는 잔치와 향락이 유행하는 풍조가 민간에까지 만연됐고 연산군 초기는 오히려 이런 세태를 경계했다. 연산군이 낭비한 국고는 문정왕후가 없앤 국고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왕의 향락을 구실로 반정을 일으킨 명분으로는 빈약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를 비난했던 사림이 주도권을 잡았던 조선 후기에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백성이 먹고살기 어려워 원성이 하늘을 찔렀고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났던 일을 비교해 본다면 반정이란 것도 성리학의 도덕성을 구실로 일으킨 정권교체 쿠데타였을 뿐이다.

▲ 왕릉은 무인석 한 쌍과 문인석 한 쌍이 상설되지만 폐군주의 무덤은 문인석 두 쌍이 왕위를 잃은 연산군을 보필하고 서 있었다.

연산군 12년(1506) 7월 20일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죽는다. 연산군의 도덕성에 후세까지 가장 비난을 받고 있는 일이 큰어머니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겁탈했다는 일이다. 박씨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나이가 연상인 부인을 맞아들인 결혼풍조로 보아 월산대군보다 위일 것으로 추정된다.

1454년생인 월산대군(1454~1489)이 1476년생인 연산군보다 22년 위이고 박씨의 나이는 연산군보다 23년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이 폐위되던 해 죽어 왕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는 박씨 나이는 53세 이상일 것이다. 53세 전후라면 여자로서 폐경기에 달하고 상식적으로도 그 나이에 임신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연산군이 어릴 때부터 손수 길러 어머니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이 때문에 실록에도 십여 차례 연산군이 쌀과 노비 등을 박씨에게 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조실록에 이 사건은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 부인(昇平府夫人)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연산 12년 7월 20일)'는 단 한 줄 기록밖에 없다. 여기서 사실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고 '사람들이' 그랬다는 '카더라'식으로 슬쩍 비켜간 글 행간을 주목해야 한다. 반정 이유에서도 박씨가 양모(養母)라는 이유로 금내(禁內)에 머무르게 했다며 아리송한 소문을 부추기는 말뿐이다.

▲ 연산군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은행나무는 수령 830년 거목이다. 저 나무는 폐왕이 이곳에 묻히는 장면을 목격했으리라.

박씨가 죽고 두 달이 못되어 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폐위됐다. 그리고 역사도 그들의 손에 편찬됐으니 터무니없는 소설이나 소문까지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누가 증명할 것인가.

오마이뉴스 한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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