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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미니홈피에 있던 글이라서 어디까지가 원글인지, 정확한 출처인지 기억이 안납니다.
문제가 생기면 삭제하겠습니다. 알려주세요.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



폐비윤씨의 비극을 정확히 이해할려면 이야기는 좀 더 위로 올라가야돼.

때는 세조
.(세종의 차남.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지. 왕이되기전엔 수양대군으로 불렸슴)

세조에겐 아들이 둘 있었는데 첫째가 당연히 세자.(조선의 왕위는 장자승계원칙)
그런데 이 세자가 젊어서 병으로 죽고 20대의 세자빈은 애딸린 청상과부가 됐지. 
왕실 법도에 따라 세자빈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그리고
세조의 두번째 왕자가 다시 세자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아.(얘가 예종)

그런데 예종이 왕위를 이어받고 얼마 안되서 죽어.
당연히 다시 왕위를 이어야하는데 (왕위는 하루도 비워둘수 없으니까) 여기서 문제가 발생.
예종 주니어들이 완전 애기들인거야.(걸음마 애기들..)

가문좋고 야심차고 똑똑했던 예전 세자빈(아까 그 청상과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대신들과 타협해서 자기 아들을 왕으로 추대해.
이 여자에게 아들이 둘 있었잖아. 그 중 둘째를 왕으로 올려. 이 소년왕이 성종.

당시 성종의 나이가 12살쯤. 

당연히 직접 통치를 할 수 없으니까 수렴청정(왕의 엄마나 할머니가 어린 왕을 대신해서 통치)을 하게 되지.
(첫째를 왕위에 올리지 않은 것도 이걸 하기 위해서야. 첫째는 이미 성인이 다됐거든.)

세상은 이제 어린 왕의 모후인 대비의 것이 되었지.
반대파를 쳐내면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해.(말했잖아. 이 여자 무척 똑똑하고 야심찬 여자라구.)

그런데 어느새 어린 왕이 자랐어. 성년이 되었지.  
조용히 대비는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모든 실권은 대비의 것이었어.
아직 젊은 왕도 굳이 어머니인 대비에게 반항할 이유가 없었어. 자긴 가만 있어도 엄마가 다 알아서 해주니까.

그런데 최초로 왕이 대비에게 반항하는 사건이 생겨.
바로 왕비를 정하는 일이었지.

조낸 좋은 가문출신인 대비는 당연히 며느리도 좋은 집안에서 구하고 싶었지만
젊은 아들이 엄마 기대와 달리 이쁜 궁녀랑 사랑에 빠진거야.
거기다가 그 궁녀는 아들까지 낳아주었지.
결국 왕의 소원대로 이 궁녀는 왕비가 돼. 이 여자가 윤씨야.

여기까진 좋았지. 그런데 이후 왕이 후궁들을 줄줄이 맞아들여.
당연히 왕비는 질투하게 되고 후궁들 역시 대비의 눈밖에 난 왕비따위 우습게 봤지.
(게다가 후궁들은 대신들이 정략적으로 결혼시킨거라 가문도 좋아. 왕비는 진짜 아무것도 없는 허름한 출신이야.)

하지만 왕비에겐 보장된 미래가 있었어.
지금 대비가 권력을 쥔 이유는 단지 그녀가 왕의 모후이기때문이야.
같은 논리로 미래의 권력은 세자의 모후인  왕비에게 가겠지.
실제 눈치빠른 사람들중엔 의지할 곳 없는 젊은 왕비에게 잘보여 미래에 보상을 받겠다는 생각도 하게되지. 대비와 달리 변변한 친정식구 하나없어도 왕비에겐 세자라는 든든한 언덕이 있었어.
세자의 생모... 이거만큼 막강한 권력도 없거든.

여기서 비극이 발생해.
폐비윤씨의 사건이 단순히 폐비와 후궁들의 갈등, 또는 폐비와 대비의 고부갈등으로 알려졌는데
왕실의 일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모든 권력을 쥔 대비의 입장에서 장차 이 권력을 물려받을 며느리를 어떻게 보는가는 결국 정치적인 문제야.
이건 여염집 고부간의 갈등과는 달라. 훨씬 더 비정해질 수 있지.  

대비의 입장에서
보자.
20대에 남편을 잃고서도 꿋꿋하게 아들 둘을 잘 키우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결국 아들을 왕으로 추대한 대비야.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보통의 왕들과 달리 성종은 사실상 어머니에게서 왕위를 받은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효심깊은 아들이 처음으로 자기 뜻을 주장한게 아내를 정하는 일이었어.
자기가 정해놓은 가문좋고 교육 잘받은 며느리 후보들을 물리치고..
얼마나 대단한가 봤더니 그냥 가난한 집안 먹여살릴려고 궁녀로 들어온 하찮은 어린 여자.

그래도 왕자를 낳아주었으니 참고 봐주었는데 이 며느리가 자신에게 순순히 굽히지도 않아.
게다가 세자가 자랄수록 어제까지 내앞에서 조아리던 신하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며느리쪽에 붙을 기미가 보인다고 상상해봐.

비 윤씨 사건의 핵심은 대비가 왕비를 죽일수 있을 만큼 실권자였다는 이야기야.
대충 구실을 잡고 후궁들과 대비가 모두 왕비를 쫓아내라고 난리치니 결국 왕은 조강지처인 왕비를 쫓아내. 그뒤에도 폐비 윤씨가 죄를 반성하지 않고 세자를 믿고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다는 식으로 모함을 해서 여기에 화가 난 왕이 결국 사약을 내려.

아무리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폐비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적힌 기록이 많아.
궁중에서는 질투로  왕과 다툰 것은 사실이지만 사가로 쫓겨난 후에는 자신때문에 어린 아들 세자까지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검소하게 살면서 남편인 왕이 노여움을 풀고 자신을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렸다고 해.

그러나 폐비의 바램과는 달리 왕은 궁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서찰 대신 사약을 보내.
(세자의 생모를 죽일 수는 없다고 몇몇 용기있는 신하들은 반대를 했어.
하지만 당시 실권자는 대비야. 대비의 가문을 비롯해서 동맹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어.
반대하던 신하들은 귀양을 가고 결국 폐비에게 사약은 내려지지.)

그때 폐비가 어떤 마음으로 죽어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다만, 이제 보호해줄 사람 하나 없이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진거나 마찬가지인 어린 아들에 대한 걱정은 많이 했을 것 같아.

폐비가 죽고나서 왕은 이 일을 영원히 불문에 부치라고 명령을 내려.
그래서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이 비극을 오직 당사자인 세자만 모르게 돼.

그때 세자의 나이가 7살쯤 되었을거야.
그뒤로 새로 왕비가 들어오고 세자는 계모의 손에서 자라게 되지.
계모인 새왕비는 곧 아들을 낳아. 친아들과 의붓아들을 차별없이 잘 키우긴 힘들었겠지.
세자와 동생은 이복형제기에 앞서 왕위의 경쟁자였으니까.

세자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를 길러준 엄마가 생모가 아니라는 건 미리 알고 있었던 걸로 보여.
생모가 죽은건 알았지만 왜+어떻게 죽었는지는 몰랐던거지. 어떤 식으로든 세자는 외로움을 느꼈을거야.

아무튼 세월은 무심하게 흐르고
이후 세자마저 쫓아내려던 대비와 후궁들의 압박에도 왕은 세자만은 보호해.

그리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성종이 마침내 숨을 거두는 순간,
자신을 미워하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후궁들,
수많은 이복형제들과 기세등등한 대신들에게 둘러 싸인채
어머니의 비극을 아직 몰랐던 세자는 다음 대의 왕위를 물려받지.

그가 바로 연산군이야.

좀 더 자세한 이야기

흔히 우리가 폐비(廢妃)라고 말하는 제헌왕후 윤씨는 희대의 악군 연산군의 생모이다.

그녀의 본관은 함안이고, 1445년 출생하여 어릴 때 궁궐로 입궁을 해 당시 자신보다 12살이나 나이가 어렸던 성종의 성총으로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제헌왕후 윤씨의 어버지 윤기견은 집현전에 출입을 할 수 있을 만큼 학문에 밝은 이였고, 판봉상시사라는 벼슬을 하사받았으나 일찍 세상을 떴다. 제헌왕후 윤씨의 생모 신씨는 윤기현의 두번째 부인이었는데 윤씨를 가졌을 때 태몽은 온 집안에 불빛이 환하게 비춰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녀가 악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 된 것이다. 연산군의 생모인 그녀는 후궁이 되기 이전에 검소하고 성실한 성품의 여인었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미색이 아름다워 성종의 성총을 받게 되었고, 내명부 종2품인 숙의로 진봉이 된다.

성종의 첫번째 왕후는 한명회의 작은 딸 공혜왕후 한씨
를 왕후로 맞아들였지만 그녀 나이 17살에 후사를 두지 못하고 성종과 혼례를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후기와는 달리 덕성이 있는 후궁들을 대상으로 왕비로 진봉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조선 초기의 후궁들의 대부분은 명문가의 여식들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연산군의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 역시 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인수대비의 의해 궁궐로 입궁을 하여 숙의의 후궁으로 진봉이 된 사례가 있었고, 세종대왕의 큰 아드님 문종 대왕은 세자시절부터 명문 대가댁의 여식들을 후궁으로 둔 사례가 있었다. 게다가 조선 초기에는 궁녀를 선발할 적에는 명문 대가의 서녀들을 대상으로만 뽑기도 했지만 후기에는 서녀들의 수가 급감하다보니 일반 민가의 여식들을 대상으로 뽑는 경우가 생겼던 것이다.

성종에게는 당시 여러 후궁들이 있었지만 그 중 자신보다 12해나 나이가 많은 숙의 윤씨만을 총애하고 있었다. 숙의의 검소하고 성실한 자태와 뛰어난 미색에 반해있던 성종은 그녀의 처소를 찾는 일이 많아졌고, 결국 그녀는 회임을 하게 된 것이다.


성종에게는
첫아들이었다.

공혜왕후 윤씨가 후사를 낳지 못하고 세상을 뜬 이래 성종은 자신의 혈육이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성종은 윤씨가 회임을 하자 반드시 원자를 낳으라며 원자를 낳으면 숙의를 왕비로 봉할 것이다 라는 약속을 하며 그녀에게 명나라의 고관부인들이나 차고 다닌다는 밀화놀이개를 선물했다.

숙의는 아들을 낳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성종의 후궁인 소용 정씨와 엄씨였다. 소용 정씨는 초계정씨로 역시 명문가의 여식이고, 소용 엄씨는 영월 엄씨로 소용 정씨와는 소꿉친구이며 중인 집안의 여식이었다. 하지만 미색으로 따진다면 정소용쪽이 훨씬 더 미려했으며 소용 엄씨는 그저 그런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는 정소용과 엄소용을 총애했는데 성종이 문안인사를 들러오면 그녀는 자주 정소용의 침실을 찾으라고 할 정도로 그녀들을 총애했다. 그녀들은 인수대비의 후배를 믿고 있었는데 숙의가 먼저 회임을 했다는 소식에 그녀들은 숙의가 일부러 낙태할 수 있겠끔 방술을 부리는 일들이 잦았다.

정소용은 엄소용과 결탁하여 민가에서 용하다는 무당을 몰래 궁궐로 입궁시켜 방술을 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방술이라는 것이 숙의의 처소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불태워베어 낸다면 낙태가 될 것이라 하는 방술이었다. 정소용과 엄소용은 자신의 수족들을 시켜 깊은 새벽 숙의의 처소로 가 나무에 불을 붙혔는데 불을 붙힌 것 까지는 좋았으나 나무를 베어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숙의의 처소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성종은 어느 못된 것들이 한 것이라며 궁녀들을 심하게 나무랐는데 그 때 숙의가 나서서 수라간의 궁녀가 간밤에 일을 하다가 실수로 그런 것 일 것이라며 성종을 달랬다.

하지만 숙의는 이 모든 내막에 대한 심증을 조금은 알고 있는 눈치이다.

하루는 내관들이 불탄 나무가 있으면 보기 흉흉할 것이라며 나무를 베어낼 것을 촉구했지만 숙의는 가만히 놔두는 것이 좋겠다며 그들에게 일을 하지 못하게했다. 일이 실패로 돌아간 그녀들은 숙의의 태아를 낙태하려 그 후에도 못된 방술들을 시행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고, 그런 와중에 숙의는 해산을 앞두고 있었다.

드디어 1494년 희대의 악군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연산군이 탄생되었다.

숙의는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으로 들떠 있었고, 성종 역시도 나라의 경사라며 다소 죄가 가벼운 죄인들을 석방시키는 등의 기쁨을 표했다. 성종은 아들의 이름을 융이라 짓고, 원자로 봉했다. 숙의는 아들을 낳아주어 성종의 약속대로 공식적인 왕후가 되었다. 하지만 인수대비는 그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정소용과 엄소용의 투기 또한 만만치 않아 그녀가 왕후 자리를 지키는 일은 참으로 고되고 힘든 것 중 하나였다.

인수대비는 명문대가의 여식을 왕후로 앉히고 싶어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은 왕후 윤씨의 집은 곤궁했다고 전해진다. 인수대비는 왕실의 인품과 격식에 맞는 많은 혼수품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인수대비의 이런 요구와는 달리 왕후 윤씨의 집에서 마련한 혼수품은 보잘것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정소용과 엄소용이 틈만나면 왕후 윤씨를 대비 앞에서 헐뜯으니 인수대비는 사사건건 왕후 윤씨가 하는 일들을 트집잡았다.

윤씨가 왕후가 되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성종은 다른 후궁들의 처소에 출입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녀가 왕후 책비례를 끝내고 내외명부 후궁이나 부인들에게 인사를 받는 자리에 정소용이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출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후 윤씨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 "감히 왕후에게 문안을 들지 않는 후궁이 있다니 석고 대죄를 하라"라고 정소용에게 명령했다.

그 날 한여름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한여름에 땡볕 아래서 석고대죄를 드리는 정소용의 모습을 본 인수대비는 왕후가 투기를 한다며 정소용의 석고대죄를 왕후의 허락없이 풀어주었고,
이 떄부터 왕후 윤씨와 인수대비의 신경전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성종이 왕후 윤씨의 처소를 출입하는 것이 뜸해지자 왕후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성종은 역사상 가장 많은 후궁을 본 대왕으로 그녀들의 처소를 출입하는 동안 왕후 윤씨의 처소를 까맣게 잊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낳은 아들 융이 허약하게 태어나 병치레가 잦아지자 하는 수 없이 월산대군의 집으로 피접을 가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불안해진 왕후 윤씨는 어머니 신씨와 상의하여 남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술을 시행했는데 어린 아이의 인골을 남편 성종이 잘 출입하는 후궁의 처소 뒤뜰에 묻어두면 그 후궁이 죽는다고 하여 그 방술을 시행했지만 소용 없었고, 또 하나는 사향주머니를 몇 개나 몸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민간요법이 효과를 볼 수 없는 법. 윤씨는 마음의 병을 얻어 신경이 날카로워져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경을 거스라는 궁녀나 후궁이 있으면 엄히 질책하곤 했다.

성종은 문득 왕후에게로 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왕후 윤씨가 있는 서온돌로 발길을 돌렸는데 윤씨는 이런 남편을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기는 커녕 성종을 두고 비아냥 거렸다.

성종은 자신이 찾아주지 않아 야속한 마음이 들었나보다 하는 너그러운 마음에 미안하다며 왕후 윤씨를 껴안으려 했지만 왕후는 자신도 모르게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해 성종을 밀치려다가 며칠간 깎지 않았던 손톱이 화근이 되어
성종의 용안을 긁게 되었다.

후궁이나 승은을 입기로 예정된 궁녀들은 왕을 뫼시기 전에 목욕으로 몸단장을 하고 손톱과 발톱을 깎는 것이 예의이다. 이 것은 손톱 발톱으로 인해 왕의 용안이나 옥체를 상하게 할까 싶어서 그녀들은 자주 이렇게 손발톱을 깎았다.

순간 왕후는 당황하여 성종의 얼굴을 보려 했으나 성종은 필요없다며 서온돌을 나가버렸고, 왕후는 울면서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때였다.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인수대비는 불같이 노하여 왕후 윤씨를 심하게 나무랐다. 게다가 정소용과 엄소용도 이를 놓치지 않고 인수대비 앞에서 왕후 윤씨를 욕하는 일들이 잦았다.

인수대비는 저런 불경스러운 것을 국모로 둬서는 안된다 라고 생각하여 성종에게 폐비를 할 것을 주청드렸으나 성종은 실수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 해달라며 빌었다. 왕후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명빈 김씨와 숙의 하씨등이 대비 앞에서 용서 해달라고 주청을 드렸다.

하지만 대비는 이는 왕후가 주동한 일이라 생각하며 그녀들의 청을 무시했고, 거듭된 인수대비의 주청에 의해 아들 성종은 내키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윤씨는 졸지에 왕후에서 폐비가 된 것이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눈물로 용서를 빌어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는 눈물로 궁궐을 따날 수 밖에 없었고, 아들 융의 얼굴도 재대로 보지 못하고 사가로 방출되었다. 인수대비는 앓던 이가 쏙 빠진 것 마냥 기뻐했다.

정소용과 엄소용도 서로 왕후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 더 인수대비 앞에서 아첨과 뇌물을 주었지만 인수대비는 그녀들의 허를 찌르는 결정적인 선택을 했다. 인수대비는 윤호의 딸 숙의 윤씨를 그녀가 두 살 때부터 옆에서 끼고 그녀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는데 그 때문인지 숙의 윤씨는 정숙하고 기품이 있었다. 인수대비는 숙의 윤씨를 왕후로 진봉하게 성종을 부추겼고, 성종은 제2 계비를 맞이하니 그 분이 바로 정현왕후 윤씨이다.

정현왕후 윤씨의 본관은 파평으로, 슬하에 훗날 중종 임금이 되는 진성대군과 신숙공주를 낳게 된다. 하지만 신숙공주는 어릴 때 병치레를 하다가 죽어 자신의 슬하는 진성대군 밖에 없었다. 왕후가 된 윤씨는 인수대비의 말씀대로 투기를 하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낳은 아들마냥 연산군을 아껴주고 사랑해주었다. 이 점이 성종과 인수대비를 흐뭇하게 만드는 것이다.

졸지에 닭쫓던 개가 되어버린 정소용과 엄소용은 대비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인수대비는 그들이 서운해 할 것이라 생각해 그녀들의 직급을 종1품 귀인으로 승격시켜주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세자 융은 커가는데 성종대왕은 아들의 모습을 보자 순간 폐비 된 윤씨가 생각났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불러 들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즈음 윤씨는 폐출 당한 이래 젊은 시절의 검소하고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돌아와 성종의 건강과 아들의 안녕을 빌고 있었다. 그리고 밥도 잡곡밥과 소금으로만 하루 세끼를 먹고 있었고, 옷도 무명옷으로 입고, 화장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녀는 언젠가 성종이 자신을 다시 불러들일 날이 올 것이라며 매일 같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가 사는 곳이 궁금해서 내관 하나를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내관은 성종의 분부 대로 폐비 윤씨가 사는 모습을 보고 드리려 하나 도중에 엄귀인과 정귀인에게 붙들려 인수대비가 있는 곳까지 불려가게되었다.

인수대비는 막대한 돈을 내놓고 아들 성종에게 "폐비가 지난 날의 잘 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다고 전해라." 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자 그 내관은 인수대비가 준 돈을 챙겨들고 성종 앞에 나타나 "폐비마마는 아직도 잘 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있으며 항상 비단 옷에 진한 화장을 하며 아직도 자신이 중전마마인 양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가관이었습니다." 라고 거짓 고변을 하게 된다.

이 말을 들은 성종은 너무도 화가 나 그 순간 품고 있던 폐비 윤씨의 좋은 생각 마져도 지워버리게 되었다. 그는 우선 폐비의 처소로 보내지는 무명과 쌀을 보내는 일들을 중단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인수대비의 부추김으로 사약까지 내리게 된다.

성종은 처음 아들 융이 사약을 받고 죽어간 어미의 일들을 안다면 골치 아파 진다며 어머니 인수대비의 간청을 뿌리쳤으나 여기에 합세한 정귀인과 엄귀인등이 성종을 부추겨 결국에는 1482년 대신들과 상의한 끝에 그녀에게 사약을 내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 일어날 '갑자사화'의 효시가 되는 사건이다.

윤씨는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기 직전 그 곳에 있는 여러 군관들에게 말한다.
"언젠가 내 이 한맺힌 원혼을 나의 아들 융이 대신 갚아 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 그 때 원삼에 피를 일부러 뿌리고 죽었는데 연산군이 이 금삼의 피를 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시행한 것이다.

훗날 정귀인과 엄귀인은 연산군이 모진 고문을 하여 죽었고, 그녀들의 소생인 봉안군, 안양군, 경혜옹주, 공신옹주들이 죽거나 옹주의 작위를 박탈 당해 관노로 전략하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죽게 했으며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과 이복누이 동생 휘숙옹주를 강제로 범하는 등의 폐륜을 저지르게 되는 폭군이 된 것이다.


제헌왕후 윤씨의 모든 것을 빼앗은 정현왕후 윤씨

쫓겨난 윤씨는 어머니 신씨와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궁궐에서 나온 중전의 빈자리를 그냥 둘 수 없어, 다섯명이나 되는 후궁 중에서 한 명을 승격시키기로 하였다. 1480년 10월 정작 승격된 후궁은 윤씨와 다투었던 엄씨나 정씨가 아니라 열살난 숙의 윤씨였다. 엄씨나 정씨를 왕비로 삼을 경우 윤씨의 폐비에 반대했던 신하들이 들고 일어설 수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윤씨가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왕비로 승격된 결정적인 이유는 인수대비의 지지였다. 1462년 6월에 우의정 윤호와 부인 전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현왕후 윤씨는, 제헌왕후와는 달리 두 살 때 궁궐로 들어와 인수대비의 가르침에 절대 복종하고 따랐던 것이다. 윤씨는 이전 왕비가 투기 때문에 쫓겨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성종이 "투기하지 않는 사람이 드문데 다행히 어진 왕비를 얻어 마음이 평안하다" 고 말할 정도로 여성 편력을 못 본 체했다.

윤씨는 진성대군과 신숙공주를 두었는데, 진성대군은 훗날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정현왕후는 제헌왕후의 자리를 빼앗았고, 그녀의 아들은 제헌왕후의 아들 자리를 빼앗은 기묘한 인연인 셈이다. 1530년 8월 예순여덟살까지 천수를 다 누린 정현왕후의 능호는 선릉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성종의 묘와 다른 언덕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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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일단 출발점이 되는 성종

성종의 도학 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
(1457-1494, 재위 기간 1469년 11월-1494년 12월, 25년 1개월)

"성종은 치세에 능했다.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 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해나갔다. 그 결과로 그는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뜻의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었을 만큼 조선 개국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 성종이 편전을 장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성종은 우선 조정의 서무 결재에 원로 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또한 2년 뒤인 1478년에는 참판 이하의 모든 문무신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 현상을 막았으며, 임사홍, 유자광 등의 공신 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 출신 신진 세력들의 진로를 열어 주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고려말의 대표적 학자인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진 사림 세력은 왕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이 주축이 된 훈구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조금씩 후퇴하였다. 성종은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또한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성종은 이런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도학 정치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그 일환으로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1489년에는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하다'는 내용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보냈는가 하면, 1492년에는 도승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고, 일정 숫자의 사찰만을 남긴 채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였다. 한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심지어 경학이나 강의에만 능해도 관리로 등용하거나 자신의 벗으로 삼기도 했다."

"성종은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 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였다. 그 결과 조선 초부터 끊임없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조선 백성들은 개국 이래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성종에 대한 좋은평가

"하지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 퇴폐 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 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상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를 알게 해준다."

결국 폐비윤씨-연산군으로 내려오는 비극적인 일들은 성종의 잘못도 크다고 할수있네!!
여자를 너무 밝혔어 ㅡㅡ;

다음은 영화에서 사고사 처리되는 인수대비,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연산군이 머리로 받아서 죽었다는데 머리가 꽤 단단했나 보지 ㅋㅋ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1437-1504)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성종의 계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이 사건으로 후에 연산군이 폐비사건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하자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덕종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다음은 폐비윤씨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에는 극약인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 뻔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었던 적이 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이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 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되고 만다."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계비 정현왕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오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니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위에 기록을 잘보면 인수대비가 윤씨를 모함했다는데 아마 이 여자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때부터 꺼림직했을꺼야 ㅋㅋ 사실 저런상황에서 연산군이 진실을 알면 인수대비는 죽을수밖에 없는거지. 조선왕조를 보면 친족끼리 죽이는건 예사로 있는일이더라구 권력을 위해서라면 내생각인데 아마 인수대비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기전까지 연산군을 제거하거나 최소한 왕자리에는 못앉히게 노력했을꺼같아.


다음으론 주인공 연산군

그전에 "성종은 도학을 숭상하고 스스로 군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가 넘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호기는 그의 가족관계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30명에 가까운 자식들을 얻었다. 결국 이런 호기가 평지풍파를 예고하는 불씨를 낳고 말았다. 그 불씨가 바로 희대의 폭군 연산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는다 여자 너무 밝히지말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세자 융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출 당해 사사된 사실을 모르고 자라났다. 융은 윤씨가 폐출될 당시에 불과 네살바기 어린 아이에 불과했고, 또한 성종이 폐비 윤씨에 대한 사건을 일체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자 융은 어머니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인 줄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천륜은 속일 수 없었던지 융은 정현왕후 윤씨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 물론 정현왕후 역시 폐비의 자식에게 사랑을 쏟아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 인수대비는 융에게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이 고울 리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에게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융의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었다." 세자 융이 곧 연산군인데 역시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군 자기 생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다니 참 뭐라 할말이 없다.

아. 그리고 역시 인수대비는 세자책봉에 반대를 했네.

"성종은 이런 성격을 가진 융을 탐탁치않게 여겼지만 1483년 그를 세자로 책봉한다. 이때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그를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행한 어린시절을 겪고 자란지라

"성종과 주위 사람들이
세자의 다소 포악한 성품을 우려했던 일화들이 야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다음의 두 가지다.
 
성종이 어느 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 등을 핥아댔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죽여버렸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이다. 융에게는 허침과 조자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조자서는 엄하고 깐깐한 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융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자주 수업 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자서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조자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자서는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융의 이 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다.
융은 왕위에 오르자 조자서를 가장 먼저 죽여버렸던 것이다."


연산군의 등극과 광적인 폭정
(1476-1506, 재위 기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박원종의 반란으로 폐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연산군도 처음부터 이랬던건 아니란다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 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의 바로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화 정책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심지어는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의 이 같은 사치 행각은 결국 국고를 거덜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하려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이에 반발하여 왕과 대립하며 연회를 줄이고 국고를 아낄 것을 간청한다. 이때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 윤씨 사건을 연산군에게 밀고하게 된다."

임사홍이라는 사람이 연산군한테 폐비윤씨 사건을 밀고했다네. 그럼 그전까지 연산군은 정말 몰랐다는소리??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가 폐비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내막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임사홍의 밀고로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살생극을 자행한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 갑자사화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사람 세력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부당한 공신전 몰수 행위를 비판하며 향락적인 궁중 생활에 제동을 걸었던 중신들이었다. 이때 연산군은 대신들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머리를 받아 절명케 하는가 하면, 윤씨 폐출에 가담한 성종의 후궁들과 그 자손들, 그리고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그는 막상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 이어지자 민심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급기야 1506년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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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여인, 장녹수. 그녀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출처: 네이버 오픈사전

연산군의 여자관계를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여인이 장녹수이다.

포스터는 옹녀+변강쇠해도 되겠다.ㅋㅋ



연산이 분노했던 그대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임금의 황음 내지는 못된 첩이 한 인간과 나라를 망친다는 식의 역사이해를 가져 왔다. 바로 그런 역사관에 의해 연산시대의 악녀로 자리매김된 여인이 장녹수이다.

장녹수는 연산군 8년 3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연산이 승지에게 그녀의 부친 장한필의 내력을 조사시켰다는 기록인데, 이 해부터 장녹수에게 빠졌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이 때쯤 연산과 장녹수가 만났던 것같다.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은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19년에 충청도 문의현령까지 지냈다.

그러나 더 이상 크게 출세하지는 못한 것 같다.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었고 신분도 천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면 자녀는 자동으로 천인이 되었으며, 그 자녀의 소유권은 모계를 따라 가도록 되어 있었다.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종과 결혼하고, 제안대군의 여종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친도 제안대군의 종이 아니었나 싶다.
 
장녹수의 젊은 시절은 불행했다. 가난하고 신분도 천한 여인이라 몸을 팔아서 생활했고 결혼도 여러 번 했다. 그러다가 제안대군의 집 종과 결혼했다. 아들 하나까지 낳았는데, 이 가정도 힘들었던지 다시 생활전선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닥에서 몸을 파는 수준에서 벗어나 노래와 춤을 배워 정식으로 기녀생활을 했다.
 

희대의 바람둥이를 매혹시킨 장녹수의 매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과 장녹수 (정진영, 강성연)


의외로 그녀 탁월한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실록에서는 그녀가 그냥 중간 수준의 얼굴이라고 표현했다.나이도 연산보다 두세 살 이상 많았다. 그러나 30대에도 16세의 앳된 소녀처럼 보일 만큼 동안이었던데다 영리해서 남자의 뜻을 잘 맞추고, 아양 떨고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연산이 남다르게 총애한 여성은 장녹수 외에도 많았다.

그러나 장녹수는 그들 중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별한 역할을 했다. 연산은 장녹수를 거의 아내처럼 대우했다. 연산의 왕비 신씨는 신승(숭)선의 셋째 딸이었다. 연산과 신비의 사이는 좋았다. 연산은 신씨(훗날 폐비됨)를 현모양처요 훌륭한 국모로 인정하고 존중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왕과 왕비의 사이였다. 연산이 국왕이 아닌 세속적 인간으로 돌아올 때는 장녹수가 그의 아내가 되어 주었다.  때로 장녹수는 연산을 어린아이같이 조롱하고 연산을 학대하며 욕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일을 기록한 사람은 혀를 찼지만, 연산은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고, 그런 세계를 맛보고 싶었던 것같다. 

남자 홀리게 생긴 요부 장녹수의 이미지


그러나 섣불리 연산에게 그런 공간을 연출했다가는 당장 국왕 능멸죄에 걸렸을 것이다. 그 역을 감당하기에는 아주 특별한 매력과 재능이 필요했다. 아마도 장녹수는 오랜 창녀생활을 통해 남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하고 충족시켜 주는 재능을 터득했던 것같다. 연산이 아무리 화가 났다가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며 웃었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는가!

섹시한 강수연씨. 실제 영화 속에서는 아주 조신했다고 함


사적인 청탁과 인정을 배제하기는 불가능한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녹수가 인사나 이권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개입한 것 같지는 않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위에서 하던 부정들은 과거부터 종친과 훈구세력들이 늘 해오던 일들이다. 수령이나 하급관직은 몰라도 녹수의 청탁으로 고위직에 올랐다는 사람도 다 종친이나 관료들이었다.

그녀의 친척 중에서 제일 출세한 사람이라면 형부 김효손인데, 연산군 10년 이전에는 겨우 7품 무관직인 사정(司正)을 받았을 뿐이다. 6품과 7품은 질적 차이가 있어서 7품 이하는 정치적 비중이 거의 없는 단순 행정 또는 실무직에 해당하며, 서리 출신들도 여기까지는 많이 진출했다.

연산군 10년에서 12년 사이에 김효손은 벼락승진을 해서 정3품 당상관까지 올라갔다. 아마도 이 조치에 대해 많은 관료들이 상당히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녹수의 일가로서 출세한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는 점은 고려해 줄 만하다. 녹수의 집을 건축할 때 대간을 보내 감독을 시킨 것이나 내시와 승지 등에게 그녀의 가마를 뒤따르게 한 것 등도 그녀의 청탁이 아니라 연산이 항상 궁리했던 '관료 길들이기'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의 남자 장녹수 이미지

 그러나 관료들은 종친과 고급관료가 천인 출신의 계집에게 굽실거리고, 사족의 집과 땅이 그녀의 손아귀로 들어가며, 그녀의 종들이 자신들의 종을 우습게 보고, 상권, 노비, 토지 등의 이권다툼에서 자신들을 이기고, 자신들의 이권을 앞서서 채가는 현상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행위였고, 왕이나 세상 사람들이 기억해서는 안 되는 전례였다.

그녀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녹수와 전비 등은 당일로 군기시(지금의 서울시청과 서울신문사 사이)앞에 끌려가 처형당했다. 많은 후궁들 중에서 녹수와 전비가 비난과 처형의 대상이 된 것은 그녀들의 재산이 많았던 탓도 있지만(그 중 상당수는 연산이 공신, 관료들로부터 빼앗은 것들이다), 그녀들의 출신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들의 진정한 죄는 자신들의 주제로서는 참여해서는 안 되는 특권에 참여한 죄였을 것이다. 장녹수는 미인도 아니면서,또는 미천한 출생인 집안이였기에 남달리 신분에 대한 애착이 강했을 것이다. 또한 연산군은 어릴 때 자신의 어머니가 비참하게 죽은 것과 할머니를 비롯한 주위에 대한 냉대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이 서로 서로 간에 깊은 관계를 맺을수 있었던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아무튼 연산군은 희대의 폭군이었다.
하지만 녹수는 희대의 악녀도 아니었고, 가슴 깊이 원한 맺을 정도로 사무친 그 무엇도 없다. 다만 천박한 그 자체가 오히려 연산이 바라보는 미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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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장녹수(강성연)과 연산군(정진영)


그 시대는 그 시대 나름대로 특징이 있듯이 연산의 시대의 인물로서 손색함이 없었던 여인이 바로 장녹수가 아닌가 추측한다. 

출처: 네이버 오픈 사전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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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당론
1575 년(선조8)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림세력들이 이른바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건이다.
이는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의 추천권을 놓고 벌인 싸움인데, 이 때문에 일제 시대 이래 당쟁의 근본 원인이 개인적 감정 싸움이라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왕실 외척이지만 사람들을 보호한 심의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선배 정치인과, 왕실 외척 지위를 이용한 심의겸의 정치적 비리를 용서할 수 없다는 후배 정치인의 대립이었다.


기축옥사
1589 년(선조22)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통 정여립 옥사, 또는 정여립 반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다.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데도 정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동인 중에서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전라도 지역 서경덕, 조식 학파의 수많은 인물들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이후 심각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정여립이 이씨왕조가 정씨왕조로 바뀐다는 정감록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중반란이라는 설, 선조 임금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일어나게 된 사건이라는 설 등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예송논쟁
왕실에 적용할 상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논쟁으로서, 1659년(현종 즉위년) 논쟁과 1674년(현종 15) 논쟁 두 번이 있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효종과 효종왕비의 상사 때, 어머니 자의대비가 큰아들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둘째 아들 이하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였다. 이는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파견된 분조에서 사실상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는 소군주로서 권한을 행사했지만, 국내에 돌아온 이후 의문 속에 죽음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갑인 복제논쟁은 결국 숙종 즉위년부터 남인 주도 정권을 출범시켰다.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였다. 효종은 아시다시피 인조의 둘째 아들(봉림대군)로 적통이 아닙니다.(적장자는 소현세자) 이 효종이 승하하였는데 문제는 당시 효종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상복을 언제까지 입고 있어야 하는 지가 관건이었다. 서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므로 1년간 입기(기년설)를, 남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지만 왕이므로 3년간 입기(3년설)를 주장하였는데 결국 서인의 1년설이 인정받았다.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 1674년):
효종비인 인선대비가 승하하자 역시 조대비 복제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였다. 서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었기에 그 비인 인선대비 역시 적통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6개월간 상복 입기를 주장(대공설)하였다. 그에 반해 남인은 왕비의 승하이므로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기년설)하였는데 이때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이 때까지만 하여도 서인과 남인은 서로가 정책을 겨루는 붕당정치로 본질을 흐리지 않고 잘 흘러갔다.


경신환국, 경신대출척(1680년):
1680 년(숙종6),  갑인예송 이후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남인 일당정권이 서인에 의해 대규모로 숙청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급격히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 정권교체는 남인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위한 새로운 군대인 체부를 설치함으로써, 당시 숙종의 신임을 받던 서인계 외척 김석주의 군사권을 약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부터는 서로 상대당을 제거하였으며 붕당정치의 본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서인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남인 허견과 왕족 복선군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숙종에 고하여 남인 세력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서인은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분열되여 4색 당파(북인,남인,노론,소론)를 이루었다.


임술삼고변
1682 년(숙종8)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다. 훗날 노론이 된 왕실 외척 김석주, 이사명, 김익훈 등이 밀정을 파견하여 남인들에게 역모를 권유한 후 이를 밀고하는 등의 정탐정치를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물의를 야기시킨 사건이다. 당시 서인 영수 송시열은 이를 자신이 스승의 후손들을 잘못 교육시킨 탓이라 하여 결국 정탐정치를 자행한 이들을 변호하려 하였고, 이를 서인 소장파 인물들이 탄핵하고 윤증 학파가 이에 합세함으로써 결국 서인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반대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기사환국
1689 년(숙종15) 서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남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장희빈이 아들을 (후일의 경종) 낳자, 곧바로 왕위계승권자로 정하려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함으로써 일어났다. 이로써 서인 영수 송시열은 사사당하였고, 서인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되었으며, 장희빈은 왕후에 봉해졌다.

숙종이 희빈 장씨의 소생(연령군)을 세자로 책봉하려하자 서인이 반대하였는데 이에 숙종은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을 재등용하였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하는데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사사되고 많은 서인들이 유배되었다. 숙종은 그 후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렸는데 이에 반대하며 상소를 올린 많은 서인을 숙청시켰다.


갑술환국, 갑술환사
1694 년(숙종20)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정권교체는 서인계와 남인계 일부 집단의 정탐정치 시도에서 발단되었다.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소론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폐비사건을 뉘우치고 있던 숙종은 이 일을 기화로 남인을 숙청하고 소론을 등용하였는데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한다. 폐비되었던 인현왕후가 다시 중전으로 복위되었고, 반면에 장희빈은 왕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기사환국 때 사사된 송시열 등이 복권되었으며 남인은 이 사건 이후 중앙정계로 진출하지 못하였다.

또, 인현왕후가 죽은 후 희빈 장씨의 숙소에서 저주하는 물건이 나오자 숙종은 희빈 장씨를 사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소론은 다음 왕의 어머니이므로 사사는 안된다고 주장하였고 노론은 사사됨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숙종은 노론의 의견을 쫓아 장희빈을 사사하고 노론을 중용하기 시작하였는 데 이것이 후에 또 다른 사건을 낳아 이후 왕세자(경종)의 보호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병신처분

1716 년(숙종40) 이른바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에서, 송시열이 옳다고 판정한 숙종의 처분이다. 갑술환국 이후 대체로 소론이 주도하던 정권이 1710년(경인환국) 이후 노, 소 대립 국면이 되었다가, 이 결정으로 노론 일당정권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윤증의 스승 송시열이 이미 죽은 윤증의 아버지를 욕함으로써,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옳으냐, 그래도 스승을 따르는 것이 옳으냐 하는 난해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때문에 이후 현제와 친척, 같은 문하생 사이에서도 당색이 갈라질 정도로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시켰다.


신임옥사
1721년(경종1) 12월에 노론 주도 정권이 소론 일당정권으로 급변한 신축환국과, 다음해 목호룡이 이른 바 노론 및 연잉군(후일 영조) 측근 인물들의 경종 시해음모를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임인옥사, 이 두 사건을 합쳐서 지칭하는 것이다.

신축환국

신축환국은 노론당이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 직후, 다시 대리청정을 청함으로써 노론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다가, 소론과 남인의 공격으로 실패함으로써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다. 숙종이 죽고 경종이 등극하였으나 몸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후사를 잇지 못하였는데 노론은 당시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후에 영조)을 세제로 삼아 만일을 대비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론은 왕이 젊고 건강이야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라 하며 노론의 불충을 따져 탄핵한다.

임인옥사
이 와중에 목호룡의 고변사건이 터졌는데 목호룡은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고 왕세제인 연잉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고 주장한다. 목호룡의 이 고변은 소론에서 사주를 받아서 한 일이 후에 드러났으나 당시 이 사건으로 노론은 많은 인물들이 화를 입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노론의 4대신으로 전 영의정 김창집, 전 좌의정 이이명, 전 좌의정 이건명, 전 중추부판사 조태채로 이들이 모두 사사됨으로써 노론의 세력이 많이 축소되었다. 노론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을 올바른 노론 붕당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을사환국
1725년(영조1) 2월 영조 즉위 직후 소론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노론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자신을 적극 지지하는 노론당을 통하여 강력한 군주권을 세움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영조의 이도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정미환국
1727 년(영조3) 7월 노론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소론이 주도하는 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변화는 소론을 일망타진하려는 데 급급한 노론당을 퇴진시키고, 그대신 온건한 탕평파 정치집단을 키움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영조의 의도 때문에 일어났다.


무신란, 이인좌의 난
1728 년(영조4) 3월에 일어난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대규모 반란이다.
실제 반란군을 지도하여 청주와 거창을 점령한 남인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이인좌의 난 또는 정희량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 반란은 당시 임금인 영조가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전국에 퍼져 소론과 남인의 급진파가 제휴함으로써 일어났다. 그러나 전국적인 규모의 병란으로 발전한 데는 중간층 및 하층민의 적극적인 참여, 전국적 장시망의 이용 같은 새로운 요소들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영조가 등극하자 소론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이에 당시 소론의 과격파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의문사와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다. 정치적으로 배제된 남인 세력 일부가 참여한 이 난은 후에 영조가 노론만을 중용하게 된 원인이 된다.

-> 조선 후기 당쟁은 왕(숙종)에 의한 계획적인 측면도 있었다. 숙종은 서인과 남인 간의 대결을 통해 왕권 확립을 노리기도 하였으나 이런 잦은 당쟁은 결국 조선의 정치가 보수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서로간에 불신만을 간직하고 비방과 폄하만을 일삼음으로써 당시 사회적 변화를 정치가 못 따라간 것이다.


기유대처분
1729 (영조5) 8월 본격적인 탕평정치가 시작됨을 알린 국왕의 대처분이다. 1728년 무신란이 평정된 이후, 임인년 옥사로 죽은 노론 4대신 중에서 자식이 연루되지 않은 이건명과 조태채의 무죄를 선언하고, 노론,소론,남인 붕당 모두에 충신과 역적이 다 있으므로, 이제는 붕당을 타파하고 각 당파 안의 인재를 함께 쓰겠다고 한 선언이다.


경신처분
1740 년(영조16) 1월에 임인년 옥사로 죽은 노론 4대신 모두는 영조의 왕위승계를 위해 노력했을 뿐이므로 아무 죄도 없다고 결정한 영조 임금의 처분을 말한다. 이와 동시에 4색당파를 모두 등용하는 대탕평이 제창되었고, 사림정치의 상징인 청요직이 혁파되었으며, 세 군영에 의한 도성 수비체제가 완성되는 등 국가 관료체제가 개혁되었다. 이후 김재로, 송인명, 조현명의 탕평파 3상정권이 장기간 유지되는 등, 정국이 안정되었다.


을해옥사
1755 년(영조31) 2월에서 5월까지 당시 영조를 비난한 나주의 괘서사건과 뒤이은 심정연의 과거답안지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소론계 명문 가문과 학자들을 일망타진한 정치적 사건을 말한다.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정치적 사건이 대개 그렇듯이 나주 괘서 사건도 실제 작성자 등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의문투성인데다가, 이를 계기로 지나치게 많은 소론 인물들이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정치적 조작의 가능성도 많다고 지적된다.


임오화변
1762 (영조38) 5월 당시 대리청정중이던 왕세자를 아버지 영조가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을 말한다. 이를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임오화변이라고 호칭하였다. 사건의 원인은 사도세자의 울화병(정신병)에 있었다고 하지만, 직접적인 발단은 석 달 동안 허락 없이 평안도를 여행한 데 있었다. 이 사건은 부자간 갈등의 비극적인 결말 때문에 특히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실제 내막은 아주 복잡하다.


신해통공
1791 년(정조15) 봄, 몇 달 전에 출범한 남인 채제공 독상 정권을 위기에 빠뜨린 서울의 물가폭등과 생필품 품귀 사태 해결을 위해, 채제공이 건의하고 정조가 강력하게 후원하여 밀어붙인 경제구조 개혁조치를 말한다. 당시 국가기관에 일정한 경비를 납부하는 대신 특정 상품의 독점판매권을 가졌던 시전의 특권을 폐지하여 동등하게 판매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서울에서 넓게는 지주들, 좁게는 기득권층의 생산물을 취급하는 대가로 독점판매권을 누리던 시전상인들의 특권이 박탈되고, 농민들의 생산물을 취급해온 도시와 그 주변 소상인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상품유통구조의 변혁이 일어났다.


영남만인소
1792 년(정조16) 4월 사도세자 사망 30주기를 맞아서 영남 지방 사대부 만 여 명이 연명하여 올린 상소문이다. 상소문 하나에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사례는 조선왕조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내용은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충성했을 뿐 실은 아무 죄도 없었음을 선포함으로써, 정조의 군주권을 강화하여 강력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문체반정운동
1792 년(정조16) 10월, 11월에 청나라 패관소품의 경박한 문체를 쓴 노론계 신진기예 남공철, 심상규, 김조순과 소론계 이상황, 그리고 그들의 스승이자 북학파의 지도자 박지원을 지목하여 견책을 내리고, 올바르고 순수한 문체를 공부하여 올리도록 함으로써, 전체 사대부의 문풍을 쇄신하려 한 운동을 말한다. 정치적으로는 노론들이 공격했던 남인들의 서양학 운동 역시 청나라 패관소품의 영향이니, 올바른 학문인 정학이라는 입장에서는 노론과 남인 학문 모두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상호 비방과 공격을 중지시킨 이른바 이열치열의 통치술에 해당한다.


금등사건
1793 년(정조17) 5월
수원 유수로 있던 채제공이 영의정에 임명된 후 '사도세자의 원수를 없애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일어난 시파와 벽파의 격렬한 정쟁을 해소하기 위해, 정조가 신하들에게 보여준 영조의 친필 쪽지를 금등이라고 한다. 영조가 자신을 위하여 죽은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을 후회하는 내용으로서, 영조가 사도세자의 법적 어머니인 정성왕후 위패 아래에 숨겨둔 것이다. 이를 알고 있던 사람은 영조, 정조, 채제공 3인뿐이었다 한다. 이 금등이 공개됨으로써 시파의 정치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지만, 이후 정국은 시파와 벽파의 격렬한 정쟁 상황으로 돌입하였다.


오회연교
1800 년(정조24) 5월 회일에 탕평정치 추진을 위한 자신의 통치술을 신하들에게 자세하게 밝힌 정조의 교시를 말한다. 당시 정조는 정치원칙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영조가 옳다고 처분한 노론의 정치원칙도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또한 다음번 재상은 노론이 기피하는 남인 강경파 중에서 나올 것임도 암시하였다. 그런데 회일은 곧 달이 없는 캄캄한 날이고, 그후 이십 여 일만에 군주인 정조가 사망했으므로, 이를 임금의 죽음과 연관시켜 보통 오회연교라고 한다.


신유사옥
1801 년(순조1) 천주교 신봉자 처단을 구실로 정조가 키워놓은 남인 청류당 인물들을 정계에서 철저하게 제거한 정변을 말한다. 당시 노론 강경파 심환지와 정순왕대비의 인척 김관주 등이 주도한 노론 벽파정권은 천주교 신자들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사도세자의 후손, 혜경궁 홍씨의 친척, 정조의 측근 신하인 노론 시파, 북학파들까지 다수 제거하였다.


을해당론 ~ 신임옥사 까지는 붕당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이고
을사환국 ~ 오회연교 까지는 영 · 정조시대의 주요 정치 사건이며
신유사옥은 정조 사후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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