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들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야사 일부분. 이것들 중 일부는 다른 곳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태종>
태종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가 헛발질한 것도 적음. 태종 그거는 제발 지워라 쪽팔리다 했는데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가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 적음.
하도 사관이 따라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말타고 거기까지 쫓아오는 사관....
<세종>
북방 개척한다고 도망가고, 모친상 핑계로 낙향 조선의 성군(聖君)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격인 새벽 4시 상참(上參)에서 부터 과업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했다. 밤 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들고 나선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나도 독촉하고 소위 '갈궈 대는' 바람에
모친 3년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 하려한다.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더 시킨다.
흔히 청백리라고 알려진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처절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그리고 나름대로 참 비리가 많은 황희
황희가 청렴결백 두루뭉술과는 거리가 멀었다고해요~ 자기 사위가 사고친걸 무마하려다가 파면당하기도 하고, 수령에게 땅을 받고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기도 했다네요 ; 만화로 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알게된 건데 항상 좋은면만 보여주던 사람들이 이런다니까 좀 실망이기도 하고 그래요 ㅋㅋ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을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나라에 큰 일이 있어서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중이었는데
태종임금님이 특별히 충녕[세종대왕] 을 모시는 하인들한테 충녕이는
삼시 세끼 고기 꼭 챙겨먹이라고 안 그럼 밥 안 먹는다고 ㅋㅋ 충녕이에게만 고기 먹는 걸 허락한다고하고
또 밥상에 고기가 없으면 상을 물리고 반찬 다시 가져오라고 하고 결국 고기반찬이 없던 밥상을 먹고 나서는 길에는 기운이 없어서 못 움직인다고 주저 앉아주시는 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랑해요 고기 당신없인 못살아 ㅋㅋㅋㅋㅋㅋ
어쨌든 삼시 세끼 꼬박 고기를 드셔야했던 세종대왕님 ㅋㅋ
친경 한다고,소 끌고 밭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배고픔을 못견뎌, 밭갈던 소를 때려 잡아서 국 끓여 드심
Ⅰ. 역사드라마의 광풍이 불고 있는 요즘이다. 방송사 마다 경쟁적으로 역사드라마를 만들어서 내보낸다. 평생을 그 일에 종사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척도 반갑고 즐거운 노릇이어야 옳지만, 실상은 가슴을 조이면서 걱정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진다는 점은 국사정신의 고양과 나라의 정체성 확립에도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러자니 고증考證이 맞느니, 틀리느니 하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고, 사실史實과 맞느냐, 맞지 않느냐로 격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엄격하게 생각하면 드라마와 사실은 맞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만, 사람들은 역사드라마가 사실과 같기를 희망하고, 역사드라마를 통하여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과욕에 젖어있는 게 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작가가 쓰는 모든 소설이나 드라마가 픽션虛構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드라마나 소설의 경우 있었던 사건, 실제의 인물을 다룰 때는 작가에게 주어진 절대권한이나 다름이 없는 픽션도 제한을 받게 된다는 점에 각별히 유념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여기가 드라마작가나 소설가의 식견과 표준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고려 말의 혼란기를 드라마로 쓰게 되면,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교차하게 하면서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갈등을 그리게 된다. 이 상황 안에서라면 어떤 픽션의 도입도 작가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픽션이라는 권한은 작가에게 주어진 자유방임이 아니라는 사실은 픽션의 구사보다도 더 중하다. 정몽주는 어떤 경우에도 56세에 죽어야 하고, 그 죽음은 반드시 선죽교에서 조영규가 휘든 철퇴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은 작가의 픽션으로 무너뜨릴 수도 없거니와 또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요즘의 역사드라마는 이 엄연한 룰(규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사진은 특정 내용과 상관없음.
Ⅱ.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는 ‘사실’과 얼마간 다를 수가 있겠지만, 그 시대가 지닌 ‘시대정신’은 달라서는 안 되고, 왜곡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의 현대사에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 집권자의 통치신념을 제시하는 포괄적인 시대정신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집권자의 통치이념에 따라서 한 시대, 시대마다 어떤 형식이든 시대정신이 깔리게 마련이고, 바로 그것이 그 시대를 흘러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될 수밖에 없다.
가령 KBS-TV에서 방송되고 있는 <대왕 세종>의 경우라면 태종시대의‘시대적 정신’과 이탈해서는 그 시대를 바로 그려갈 수가 없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아 조선건국의 2인자나 다름이 없었지만, 세자책봉에서 제외되는 좌절을 겪으면서 스스로 집권하기 위한 야망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하여 나이어린 이복동생을 죽였고, 자신의 진로에 방해가 되는 동복형님까지 죽이면서 왕권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아버지 태조(이성계)와 는 상상을 초월하는 갈등을 겪으면서 왕권을 굳혔다.
그는 왕위에 있으면서도 네 사람의 처남에게 사약을 내려서 죽게 하였고, 이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며 항변하는 왕비(원경왕후)에게 거침없이 폐비를 입에 담으면서 10여 년 세월을 같은 궐 안(경복궁)에 살면서도 내왕없이 불목으로 일관하였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 세자(양녕대군)를 폐하여 죄인으로 내치기까지 하였다. 이때까지 조선 왕조의 왕위계승이 장자로 이어지지 않았다하여 듣기 민망한 유언비어가 도는 데도 장자인 세자를 폐하는 태종의 독단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또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왕재로서의 가능성을 보이자 태종은 52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그것은 세종의 새 왕조가 확실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후견인(상왕)이 되어야겠다는 그의 책임감의 발로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북경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세종의 장인이자 국구인 심온沈溫이 ‘왕명이 두 군데서 나오면 정치에 혼란이 있게 된다.’는 당연한 말을 했음에도 그가 압록강을 건너기를 기다려서 체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 할 만큼 단호하고도 혹독한 군왕이었다. 어린 왕비(소헌왕후)는 상왕전의 마당에서 아비를 살려달라는 석고대죄를 올렸어도 태종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태종의 재위 18년과 상왕으로 있은 4년은 태평한 다음시대를 열기 위한 자기희생의 시기였기에 어렸을 때의 친구이자 마치 분신과도 같았던 최측근인 이숙번李淑蕃까지도 “내가 죽고 백년이 지나지 않거든 도성 안에 발을 들여놓게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면서 귀양에 처했다.
태종 이방원의 통치시대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다음 시대의 장애물이될 위험이 있는 자를 가려서 그가 어떤 자일지라도 가차 없이 제거해 버렸던 시대’였기에 자신의 뒤를 이은 22세의 어린 세종에게
"천하의 모든 악명은 내가 짊어지고 갈 것이니, 주상은 성군의 이름을 만세에 남기도록 하라."는 명언을 남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태종시대를 드라마로 그리자면 이같은 시대정신 또는 시대의 정한이 고려되지 않고서는 좋은 드라마로 만들어낼 수가 없게 된다.
Ⅲ.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되는 화두는 세종시대와 세종의 통치철학을 살펴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적절한 시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없다. 그러기에 KBS-TV에서 <대왕 세종>을 제작 방영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대에 담겨진 귀중한 체험과 정신을 외면하거나 왜곡한다면 모처럼의 좋은 뜻도 물거품이 되기가 쉽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 <대왕 세종>이라는 타이틀은 너무 보편적이다. 조선왕조에는 27명의 임금이 있었고, 그 모든 분을 통칭하여 <대왕>이라고 높여서 부른다.
그러나 세종은 단종이나 예종, 혹은 철종과 같은 반열에 두기에는 그분의 인품과 업적이 너무도 크고 자랑스럽기에 일반적으로도 다른 임금들과 구분하여 성군聖君세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드라마의 타이틀은 당연히 <성군 세종>이야 옳다. 성군 세종의 경우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업적을 남겼고, 자신의 몸은 병마에 시달려서 시체로 변해가는 데도 자신의 병구완보다 국사를 살피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엄연한 사실이 왜 드라마의 타이틀에 반영되지 않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드라마의 내용이 꼭 사실史實과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터무니없는 일들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드라마는 기본이 픽션虛構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이 같은 상식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방영 중인 <대왕 세종>에는 허점이 너무 많다. 아직은 방송 초기(12회까지 보고 쓴다)인데도 너무 많은 잘 못을 저지르고 있기에 그 중의 몇 가지를 지적하여 앞으로의 과실을 막아주기를 바란다.
1,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태종이 너무 한가하다. 태종은 태종의 시대를 초강력하게 이끌었고, 그것이 곧 세종시대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엄하게도 세자나 중전, 신료들이 태종의 면전에서까지 임금을 무시하는 듯한 간언諫言을 입에 담는 것을 다반사로 여긴다. 당시의 태종에게는 용납될 일이 아니다.
2, 세자(양녕대군)가 드나드는 방은 어디에 있는 무슨 방인지가 분명치 않다. 당시의 정부기관인 이조, 예조, 병조, 호조 등과 같은 건물은 광화문 밖 육조관아에 위치해 있었고, 임금이 불러야 궁으로 들어갔으므로 거리 감각이 살아 있어야 당연한데도 그저 아무데서나 모이고, 헤치고 하는 것이 민망하기 그지없다.
3, 공무에 임하고 있는 세자의 거처(이 또한 애매하지만)에 궐밖에 있는 충녕대군이 사복 차림으로 들어와 앉아서 감 놔라 대추 놔라고 참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충녕대군의 언동에서 임금이 되고 싶어 하는 기미가 보이는 것은 세종을 잘 못 그리는 단초가 된다.
대왕세종의 충녕대군
4, 더 끔찍한 것은 양녕대군이 큰 아버지(定宗)가 총애하는 기녀 초궁장에게 아우들이 지켜보는 백주대낮에 수작을 거는가 하면, 거처에까지 끌어드린다. 이 불륜不倫이 용납될 수가 있는가. 작가는 폐세자의 빌미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변명하겠지만, 양녕이 폐세자가 되는 과정은 <태종실록>에 절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서둘러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5, 또 세자가 명나라 사신의 술상을 엎는 대목은 당시의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를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되거니와 세자가 외교사절에게 그렇게 해도 무사할 수가 있을까. 만에 하나라도 그런 광태狂態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혼’이라고 생각한다면 치기稚氣에 불과할 뿐이다.
6, 더 놀라운 것은 정인지, 최만리 등이 모여서 정도전의 '삼봉집三峰集'을 읽는 비밀결사를 하는 데, 여기에 세자가 참석한다. 정도전은 태종에 의해 참살된 사람이고, 이로부터 4백 년이 지난 고종 때까지도 그의 이름조차 거명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작가는 알고나 있는지? 더구나 아직 그가 죽은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인지와 같은 지식인들이 장소를 옮겨가면서 ‘三峰集’을 읽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7, 세종조의 명신 윤회尹淮는 시장바닥을 헤매는 주정뱅이로 나오는가 하면, 명나라 사신들이 묵는 태평관의 부엌일 까지 참견한다. 윤회는 태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태종 10년 무렵에는 관직의 꽃인 ‘이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이런 사람이 난전을 떠도는 주정뱅이면 어찌되는가.
8, 중전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기 위해 상궁을 시켜 독살을 기도하는 것은 아무리 드라마라도 말이 되지를 않는다.
9, 장차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자로 성장하게 될 장영실이 반정부군에 몸담으면서 명나라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을 포탄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지의 극치이고도 남는다.
10,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가 아들 경령군을 후사로 만들 욕심으로 이숙번을 찾아가 아들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을 청하는 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숙번은 효빈 김씨의 멱살을 잡고 태종에게 끌고가 패대기를 칠 인물이다. 이숙번은 태종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분신이었다.
11, <대왕 세종>이 국민드라마라면 왜 15세 미만에게 주의를 환기하는가. 중학교 2학년이 15세 인데, 이들이 볼 수 없는 <대왕 세종>을 왜 만들어야 하나.
Ⅳ. MBC-TV의 <이산>의 경우는 비교적 성실하게 잘 만들어지고는 있는 역사드라마임에는 분명하나, 법도에서 벗어나는 몇몇 장면의 과장이 작품천체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역사드라마는 사실과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삼강三綱의 법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이 세 가지를 삼강이라고 한다. 삼강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상존한다. 상하의 관계가 문란해지고, 부자의 관계가 무너지며, 부부의 관계가 깨지면 그 사화가, 그 나라가 천박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21세기를 살면서도 이 법도는 유지되는 것이 우리의 ‘모럴’이다. 역사드라마에서 삼강의 도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을 잘못 호도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1, 정순왕후가 사복을 입고 궐 밖으로 나와서 조정중신들을 몽땅 불러모으는 장소는 대체 누구 집이며,
2, 창덕궁에서 얼마나 떨어진 위치에 있는 지 도무지 석연치 않은데도 정순왕후는 거의 매일 밤 그렇게 나간다. 요즘 식으로 하면 안가인지 모르지만….
3. 그것이 한 번이라도 위험천만한 발상인데 정순왕후는 매회 그런 몰골로 궐 밖을 쏘다니고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는 노릇이고, 어느 날은 ‘주상과 세손 중에서 한 사람을 죽여야 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발설한다. 상식으로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정순왕후의 뜻을 잘 받드는 사람이 대신 말해도 되는 일이 아닌가.
4, 사도세자에 관련된 기사를 세초洗草한답시고, 책을 찢어서 시냇물에 헹구는 데, 인쇄된 것은 세초가 되지를 않는다. 그것을 고치자면 주서朱書로 고치는 것이 정도다. 왕조실록이나 정부 문건은 모두 그렇게 고쳤다.
5, 어느 날 밤에는 영조가 곤룡포와 익선관을 벗어놓고, 창덕궁을 빠져 나갔는데도 아무도 모른다. 궐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뭐하였고, 더구나 세손이 그 사실을 모른다면 대궐이 아닌 여염집의 사정과 무엇이 다른가.
6, 정조의 즉위식에서의 정조의 모습은 사료를 읽지 않은 정형적이 잘 못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생각이 나서 울고, 또 우느라 즉위식에 나오지 않으려 했지만, 대신들의 간청에 못 이겨 늦게 나와서 즉위식이 상당히 미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드라마 보다 사실이 더 빛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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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역사를 학문으로 읽는 역사학자들은 사서史書에 적힌 문자만을 읽는다. 그러므로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역사드라마 작가는 사서의 적힌 문자보다는 그 행간行間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를 흐름으로 읽을 수가 있는 것이 역사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권한이자 행운이다.
역사의 어느 대목만을 끊어서 읽으면 앞뒤의 사정이 맞질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역사의 사실을 확인 할 때도 글자(사실)만을 읽지 말고 앞뒤의 사정을 길게 살필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영월 땅에 부처되어 있던 단종이 죽던 날을 <세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노산군(단종)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 3年 10月 21日자. 이로부터 장장 74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승지 이자화李自華의 발설이 「중종실록」에 실리게 된다.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君으로 강등하였다가 이어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중종실록> 26년의 11월 11일자. 단종이 자살했다고 적힌 <세조실록>과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기사가 같은 실록에 실리기까지는 무려 7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와 같이 드라마작가는 역사의 흐름을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 방송국에서는 시청률에만 의지하여 드라마를 평가하려는 단세포적인 사고가 횡행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설혹 시청률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국사정신을 혼란하게 하였다면 역사드라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작방송사의 위상에 상처를 내게 된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설혹 시청률이 높았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이 국민들(시청자)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었다면 작가나 PD는 큰 죄악을 짓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신봉승 작가: 시, 소설, 평론, 연극 극본, 시나리오, 역사 에세이 등을 집필하며 대학에 출강했으며, 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신 작가는 '사모곡', '풍운', '찬란한 여명' '한명회' 등 수십 편의 사극을 써온 한국 TV 사극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9년간 MBC '조선왕조 500년'의 대본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글을 신문기사에서 읽었다. 안그래도 대왕세종은 아예 말도 안되고, 이산도 좀 미심쩍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목조목 지적해주시니 속이 시원했다. 역시 대작가님은 다르시구나.! 싶었다.
그런데 '신봉승'으로 검색해보니 똑같은 기사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게다가 어떤 건 길고, 어떤 건 짧고 길이도 제각각이다. 이상하다.? 똑같은 기사를 이리 여러 언론사에 보내도 된단 말인가 싶어서 자세히 읽어보니 '신봉승 작가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라는 구절이 있는 기사가 있다. 신봉승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직접 가져와서 필요한 부분만 추려서 기사로 낸 것이었다.!
여러 개의 뉴스를 찾아보았지만 출처가 적힌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자신들은 이렇게 남의 홈페이지에서 무작정 퍼와서 '붙여넣기' 신공으로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바꿔서 기사를 내어놓고 네티즌들에게는 '저작권법'으로 협박을 하다니.. 출처조차도 안밝히면서 저작권 운운하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보다.
방송 삼사의 사극 (SBS - 왕과 나, KBS - 대왕 세종, MBC - 이산) 중, 사극불패 신화를 이어가는 KBS의 대왕 세종이 기대됩니다. 세종대왕은 그동안 너무 평화로운 시대라서 사극에서 다뤄지지 않은 왕인데, 드디어 우리의 위대하신 세종대왕님께서 드라마 주인공으로 납셨습니다.!!!
"니들 정말 너무한거 아니냐??"..고 묻고 계신 세종대왕님
요즘 삼사에서 사극을 앞다투어 그것도 조선 초기(대왕 세종)부터, 조선 초중기(왕과 나), 조선 후기(이산)까지 골고루 보여주니 역사에 관심(만) 많은 저는 행복하기도 하고 챙겨보질 못하니 불행하기도 하네요.
솔직히 저 개인적으로는 양녕대군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이건 양녕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시점에 차차 하기로 하고, 우선 동시대를 다룬 위대한 사극 용의 눈물과의 비교부터 해보도록 합시다. 작품성이나 연기력, OST에 대한 비교도 하고 싶지만 제 깜냥도 그에 모자라고, 또 대왕세종은 아직 초반부이니, 인물들과 설정만 비교하겠습니다.
1. 태종
유동근(용의눈물): 그야말로 태종이 살아있었으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의 완벽한 연기와 캐릭터였습니다. 태종의 인간적인 고뇌, 태종의 결단력, 태종의 잔인성까지 다 보여주며 제목이 왜 용의 눈물인지를 알 수 있는 드라마였죠.
유동근표 태종은 굉장히 명석한 인물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절대로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적을 막다른 골목으로 철저히 고립시킴으로써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으로 상황을 만들어 갔습니다. 조강지처인 원경왕후의 동생 넷을 가히 살인마라 불릴 정도로 잔인하게 다 죽이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듯한 모습은 짐승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들과 흔들리는 조선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악업은 모두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 라고 하지요.
이게 실록에 나오는 말인지 그가 직접 한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태종은 정말 진심으로 죄업은 자신이 지더라도 후대가 평탄할 길을 닦아놓은 듯 합니다. (이전 사극에서도 이 대사가 나왔다는데 아시는 분은 좀 도와주세요.)
자기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악업을 지더라도, 그게 자신의 야심때문만이 아니라, 더 나은 후대를 위해서라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물론 요즘 세상에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케 한다는 말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김영철(대왕세종): 궁예의 말투가 아직도 좀 남아있는 것이 약간 아쉽긴 하지만 이 분도 유동근씨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인상깊었을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기력 외에 대왕세종의 태종에서 아쉬운 것은 현재 냉정함과 까칠함만 보일 뿐, 유동근표 태종에서 보았던 치밀함이 다소 부족해보인다는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충신 정몽주를 도끼로 내려찍은 사건 때문에 굉장히 무식하고 생각없는 인물로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 그는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중 가장 똑똑했고, 그렇기에 태조의 조선 건국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늙은 공신들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정치고수였습니다. 지금 김영철표 태종처럼 대신들에게 소리지르고 윽박지르기보다는 은근슬쩍 질문을 던진 다음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도록 만들어 사건을 지휘해 나가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앞으로 태종의 치밀함을 어떻게 보여줄 지 기대 중입니다.
2. 원경왕후 민씨 : 최명길(용의눈물)→최명길(대왕세종) 으로 10년만에 다시 연기.
이렇게 같은 사람이 같은 역을 두 번 맡는다는게 굉장히 드문 케이스죠. 정말 잘 어울리고, 10년 동안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네요. 캐릭터도 거의 동일한 것 같습니다. 무시무시한 태종에게 지지 않고 대드는 강단있는 모습과 아들을 사랑하는 모습 등이 그대로 보여집니다.
3. 세종(충녕대군) :
안재모(용의눈물): 안재모는 여기서 역대 최고의 성군 세종 역을 맡고, 바로 다음 사극인 왕과 비에서는 최악의 폭군 연산군 역을 맡았죠. 어린 나이에도 둘 다 소화를 잘해서 인상 깊었습니다. 현재 왕과 비와 동시대를 다루는 사극 왕과 나에서는 임금에서 내시로 신분이 폭락했지만 연기 하나는 끝내주죠? 그야말로 사극의 젊은 피입니다.
용의 눈물에서는 세종이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특징이 없었죠. 다만 용의 눈물에서는 충녕대군은 왕위에 전혀 욕심이 없었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양녕의 폐세자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왕에 오른 것으로 설정됩니다. (하지만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죠? ^^)
김상경(대왕세종): 용의 눈물에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해 보이던 안재모의 눈빛과는 달리 대왕세종에서는 어린 나이에 벌써 정치와 세상에 뜻을 품은 충녕을 보여주었습니다. 용의 눈물에서는 왕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뛰고 어쩔 줄을 몰라 하지만 실제 충녕은 정치에 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입니다.
이야기 출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 조선왕조실록
그 첫번째 증거로 신하들과의 술자리에서 의령부원군 남재가 슬며시 "임금의 아들이면 누구나 다 왕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슬며시 충녕을 떠봅니다. 이 때 충녕이 화를 내거나 거부해야 목숨이 온전히 보전될 텐데 오히려 이를 아버지 태종한테 일렀습니다. 즉, 아버지의 뜻을 떠본 것이지요. 만약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며 남재를 처단한다면 그는 조용히 뜻을 접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태종은 껄껄 웃으며 농담으로 넘겼다고 하는데... 양녕의 망나니짓에 태종의 어심도 충녕에게 향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두번째 증거로, 하루는 양녕이 좋은 옷을 입고 자랑을 하자, 충녕대군이
"먼저 마음을 바로 잡은 후에 용모를 닦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해 양녕에게 무안을 주었다고 합니다.
충녕은 왜 이리 도발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조선왕조실록: 태종 31권, 16년(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월 9일(임인) 2번째기사
세자가 충녕 대군의 충고를 듣고 부끄러워하다
이날 세자(世子)가 성(盛)한 복장을 하고, 모시는 자를 돌아보며, 하니,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먼저 마음을 바로 잡은 뒤에 용모를 닦으시기 바랍니다.” 하매, 모시는 자가 탄복하였다.
“대군(大君)의 말씀이 정말로 옳습니다. 저하(邸下)께서는 이 말씀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세자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이 뒤에 세자가 모비(母妃)에게 말하였다.
“충녕(忠寧)의 어짊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대사를 장차 함께 의논하겠습니다.”
왕비(王妃)가 이 말을 임금에게 말하니, 주상이 듣고 마음이 편안치 아니하였다.
4. 소헌왕후 심씨 :
도지원(용의눈물): 충녕 배역도 단역인데 세자빈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친정이 몰락할 때외에는 별로 나온 장면이 없습니다. 이 때 도지원은(여인천하의 뭬야~! 도지원 아님) 아주 어린 나이(중 3?)이었다고 하는데 정통 사극에 출연해서 크게 눈에 거슬리지 않는 수준의 연기를 보였습니다.
이윤지(대왕세종): 용의 눈물처럼 까메오 수준이 아닌 배역이라 상당히 큰 배역인데 개인적으로 참 매력없다 생각하는 배우가 캐스팅되어 약간 아쉽네요.
자기 때문에 친정이 몰락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내가 소헌왕후라면 왕이면서도 자신을 구해주지 못한 남편(세종)도 미웠을 것 같은데 그런 원망없이 시아버지를 잘 봉양했고, 조선 왕비 중에 내명부를 가장 잘 다스려, 태종에게 덕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땅에 닿는 여인이라는 칭송까지도 들었다고 합니다.
왕비라는 이유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입은 그녀에게 세종대왕이 해줄 수 있었던 것은 남편으로서의 사랑 밖에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자녀를 많이 두는 것도 중전을 보호해주는 한 가지 방법이었을까요? 어떤 이유에서건 소헌왕후는 세종대왕과의 금슬이 아주 좋았고, 조선 왕비 중에 남편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여인입니다. 자녀가 열이니 임신, 육아 기간만 해도 10년 이상이라 거의 애 낳는 기계였습니다. 늘 배불러 있는 걸로 분장하면 되겠군요.;;
어쨋든 그녀가 세종보다 먼저 세상을 뜬 후에 세종이 크게 슬퍼하여 소헌왕후를 위해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고 하니, 둘 사이가 굉장히 깊었나 봅니다. 젊은 날의 사랑과는 다른 오랜 우정과 믿음, 신뢰, 애착이 합쳐진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겠죠. 집현전 학자들에게도 의지하지 않던 세종에게는 마음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것 같습니다.
5. 양녕대군 :
박상민은 여인천하에서 길상이로 나왔을 때
이민우(용의눈물): 이때 이민우가 20대 초반이었다는데 연기 끝내주죠. 원래는 충녕대군(세종) 역으로 캐스팅이 들어왔는데 이민우가 양녕에 매력을 느껴 배역을 바꾸는 바람에 대본이 수정된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양녕대군이 그렇게 매력있는 인물로 재탄생되었나봅니다.
이유야 어찌됐건, 양녕대군은 지하에서 이민우와 용의 눈물에게 고마워 해야할 것입니다. 망나니 중에 X망나니였던 그를 이렇듯 멋~지구리하게 포장시켜 줬으니 말입니다. 야사에서는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의 피비린내나는 숙청작업과 정치공작에 질려서 동생에게 지 자리를 물려주고 쿨하게~ 떠나준 것으로 전해져온다지만 실록의 여러 기록은 그렇지 않다고 하거든요.
후에 양녕대군에 대해서 따로 적을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적겠지만 어쨋든 양녕이 권력욕이 없어서 동생에게 그
리 깨끗이 왕위를 물려줄 만큼 됨됨이가 된 인간은 아니었다 이겁니다. 용의 눈물에서 인물들을 재해석한 것까지는 좋은데.. 다른 건 다 참겠습니다만... 양녕대군만큼은 심하게 미화되었다는 거죠.
박상민(대왕세종): 대왕세종에서의 양녕은 용의 눈물에서의 양녕처럼 쿨한 느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양녕은 권력에 욕심도 있었구요. 솔직히 용의 눈물의 양녕은 쾌남아 정도도 아니고.. 무슨 도 통한 도사 같지 않나요? 그렇게 세상사에 미련도 없는 사람이 늙어서 목숨 구걸하려고 수양대군(세조)한테 붙어서 알랑방구 끼고 세종 손자인 단종 죽이자고 그 난리를 떨겠냐구요.
그런 게 세상이라지만....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응? ㅋㅋ
6. 효빈김씨 : 두 분 다 88년 미스코리아 진(김성령)과 선(김혜리) 이랍니다
김혜리(용의눈물): 원래 성품이 온순한데다 원경왕후의 몸종이었다가 후궁이 되었고 원경왕후 덕에 목숨까지 건졌기에 원경왕후 앞에서는 꼼짝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저도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
김성령(대왕세종): 분명한 것은 현재 김성령표 효빈처럼 건방지지는 않았을 거에요. 피도 눈물도 없는 태종 앞에서 까불 수 있는 건 조강지처 뿐일텐데... 감히 후궁의 아들을 왕위에 앉힐 욕심을 내다니... 이건 윤선주 작가가 좀 너무 오버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원경왕후도 기가 죽어서 조용히 지냈다지요.)
양녕대군이 폐세자되는 결정적인 사건의 주인공 어리 : 故 이혜련(용의눈물)→오연서(대왕세종)
세자빈 김씨(양녕대군 부인) : 안연홍(용의눈물)→유서진(대왕세종)
남편 잘못 만나 졸지에 한양 밖으로 쫓겨난 세자빈 역 안연홍은 저 때만 해도 이미지가 괜찮았는데 지금은 너무 까불이 이미지에 대출광고까지 찍어서 이미지가 너무 나빠져 버렸습니다. 연기도 잘하는 배우인데 참 아깝네요.
5회부터는 아역에서 성인으로 배우들이 바뀌었던데... 너무 어린 아역배우에서 갑자기 너무 삭은 성인배우로 넘어가니 영 적응이 안되네요. 실제 양녕대군은 쫓겨나고 나면 나올 일도 별로 없을 텐데... 폐세자될 때 나이가 25인데 40에 가까운 박상민씨가 양녕대군으로 나오다니.. 너무합니다.ㅜㅜ 세종대왕 역을 20대만 보여줄 수는 없으니 그랬겠지만 그래도 30대 초반으로는 보여야 할 텐데.. 스물 다섯에 쫓겨난 양녕대군을 40살 아저씨가 연기한다니.. OTL
012
대왕세종은 양녕대군의 미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그의 욕심과 비행, 충녕대군의 왕위에의 욕심과 도전, 그로 인한 두 왕자 사이의 갈등과 알력... 이런게 재밌을 것 같은데 이를 표현하기에 주연 배우들이 너무 나이가 많아서 패기있는 모습이 잘 안드러나는게 좀 아쉽습니다.
그래도 6회 방영분에서 양녕이 기생을 희롱하는 연기는 잘하시더군요. 나이를 잊고 보면 괜찮습니다. 어린 척하기가 어색했을 텐데 패기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어쨋든 앞으로 양녕대군의 행보가 어찌 그려질지 자못 궁금합니다. 초반의 탄탄한 전개를 유지시켜 주길 바랍니다.
홍길동전은 조선 광해군 때의 문인이며 정치가인 허균(許筠:1569~1618)이 지은 국문소설이다.
경판본 3종, 완판본 1종, 사본 〈김길동전〉이 있다. 조선 인조 때를 배경으로 적서차별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면서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홍판서의 몸종 춘섬의 몸에서 태어난 길동은 서자라는 이유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온갖 차별과 천대를 받는다. 이를 견디다 못한 길동은 집을 나가 산적의 소굴에 들어가 힘을 겨루어 두목이 되고 활빈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면서 전국을 누비고 다닌다. 조정에서는 그가 저지르는 폐단을 견디다 못해 그를 잡으려 하지만 끝내 잡지 못하고, 그의 소원대로 병조판서의 직책을 내린다. 그러나 길동은 즉시 그 자리를 버리고 해외로 나가 율도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다. 거기서 왕이 된 길동은 자신이 이상으로 생각했던 정치를 실현하다가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죽는다.
이 작품은 이식(李植)의 〈택당잡저 澤堂雜著〉를 바탕으로 해서 허균이 지은 것으로 믿어왔으나 근래에 와서 작자와 국문원작설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같은 문제제기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허균의 국문원작설을 완전히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허균의 작품으로 볼 경우에도 현재 전하는 작품이 그의 원작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홍길동전〉에는 현재 30종 가까운 국문본과 후대의 번역으로 보이는 한문본이 하나 있다. 이들 이본들의 내용은 부분적으로는 약간씩의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다. 〈홍길동전〉은 한국 최초의 국문소설이며, 고소설 가운데 작자를 알 수 있는 극소수의 작품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소설의 발생과 작자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이 작품은 당대의 사회현실을 절실하게 반영하면서 탐관오리를 힘으로 응징하고, 억압받는 서민들의 한을 대변함으로써 서민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은 사실 세종 때를 그 배경으로 한다. 홍 판서가 낮에 길몽을 꾼 후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려 한다. 그러나 부인이 거절하자 안방을 나오다 우연히 지나가는 노비 춘섬을 보고 동침한 결과 길동을 낳게 된다. 서자로 태어난 길동의 이야기를 다룬 홍길동전이 왜 하필이면 세종조를 배경으로 한 것일까?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된 후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했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와의 사이에 장남 방우부터 넷째아들 방원에 이르기까지 아들들이 있었지만 태조는 강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결국 1398년 방원을 중심으로 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등 반대파를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죽인다.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로 인해 태조는 신의왕후 소생 가운데 첫째인 방우가 병으로 죽자 둘째인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간다.
실권자였던 방원이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는데 그는 그 이전까지는 없었던 적서의 차별을 제도화 하는 법을 만든다. 후궁인 강씨에 대한 증오가 적서 차별을 제도화 하게 된 계기라 할 수 있다.
결국 태종 때 적서 차별을 제도화함으로써 차별을 받게 된 서얼들의 한이 세종에 이르러 홍길동전으로 나타나기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구전되고 구전되다가 허균에 이르러 한글소설로 정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축첩제도가 금지된 오늘날 적서의 차별이 있을 리 없지만 차별은 도처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순혈주의로 무장한 사람들의 경우 혼혈에 대한 차별이 뿌리깊게 남아 있으며, 지역주의로 무장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다른 지역 출신들에 대한 차별의식이 독버섯처럼 자리하고 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책, '맹꽁이 서당'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기생(인줄 알았어요.) 어우동(어을우동).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국민배우 안성기씨까지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되어 왠만한 사람들도 그 이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테지요.
그래도 안성기씨가 나오는데... 너무 Sex 쪽으로만 중점을 둔 듯한 포스터가 마음에 안듭니다.-_-;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 왕에서 종까지 그녀 품안의 모든 남자는 단지 노리개;;
제작 : 이태원
감독 : 이장호
원작 : 방기환
각색 : 이현화
촬영 : 박승배
음악 : 이종구
출연 : 이보희, 안성기
태흥영화 주식회사 제작
1985년 9월 28일 단성사 개봉
이처럼 주로 '야한 영화의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해서 성종 시대의 다양한 야사 인물 중의 하나려니... 했던 사람인데.. 최근 드라마 '왕과 나'에서 미스코리아 출신 김사랑이 어우동 역으로 나온다고 해서 자료를 한 번 뒤져보니..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입니다.
야한 소설 속의 남자들이 상상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갖춘 여자인 것 같습니다.. 하여튼.. 대단한 여자네요.ㅋ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조선시대 3대 섹스 스캔들의 마지막 주자는 어을우동(혹은 어우동)이다.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유명세를 탄 이 여성의 남성 편력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들여다 보기로 하자.
어을우동은 성종 시절 승문원 관리 박윤창의 딸로서 태강수(수는 왕실 친척에게 내리는 작호) 이동(李仝)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 잘 나가는 집안의 여성이었다. 그런데 바람기가 몹시 심해 버림받은 후 남자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간통하다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교수형으로 일생을 마감한 희대의 음녀(淫女)다.
어을우동 사건은 성종 11년 7월 11일, ‘어을우동이 수많은 남자와 간통하고도 승복하지 않으니 국문해 달라’는 의금부 보고로 시작된다.
9월 2일 실록에는 어을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의 명단이 줄줄이 기재되어 있으니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공무원 이기, 이난, 구전, 공부하는 유생 홍찬과 이승언, 서리(하위직 관원) 오종련과 김의형, 전의감 생도(왕실병원 실습생) 박강창, 평민 이근지, 노비 지거비 등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어을우동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사람과 관계했음을 알 수 있다. 의금부는 어을우동의 형량은 곤장 100대에 유(流) 2000리(서울에서 2000리 떨어진 곳에 유배를 보내는 것)에 해당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 시절에도 음행을 일삼은 어을우동에 대한 강경론과 동정론이 팽팽하게 맞서자 성종은 여러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은 성종 11년 9월 2일 실록.
<정창손:
“어을우동은 종친의 처이며 선비의 딸로서 음욕을 자행한 것이 창기와 같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태종, 세종 때 선비의 부녀로서 음행이 매우 심한 자는 간혹 극형에 처했지만 그 후로는 모두 율에 의해 단죄했으니 어을우동도 율에 의해 단죄해야 합니다.”
김국광·강희맹:
“어우동은 종실의 부녀로서 친척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서로 간통해서 인륜을 손상시켰습니다. 청컨대 중국 조정의 예에 의해 저자에 세워 도읍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서 징계가 되게 한 후에 율에 따라 멀리 유배하소서.”
윤필상:
“어을우동이 강상을 무너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으면 음란한 풍속을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의 정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을 자행하여 춘추시대 정나라, 위나라의 풍속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청컨대 이 여자를 큰 벌에 처하여 후세 사람을 경계하소서.”
홍응·한계희:
“국가에서 죄를 정할 때는 한결같이 율문에 따르고, 임의로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형장을 강등하여 관대한 법전을 따랐으며 법외로 논단한 적은 없었습니다. 어을우동의 추악한 행실은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되나 임금의 은덕은 죽음 중에서도 살릴 길을 구해야 합니다. 청컨대 율에 의해 결정하소서.”
이극배:
“태종조에 승지 윤수의 처가 맹인 하천경과 간통하고, 세종조에 관찰사 이귀산의 처가 승지 조서로와 간통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 후 판관 최중기의 처 유감동이 창기라 칭하면서 음행을 자행했는데, 사형을 감하여 유배를 보냈습니다. 지금 어을우동은 종실의 처로서 음욕을 자행하기를 꺼리는 바가 없었으므로 극형에 처해야 하나 율에 의하면 사형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청컨대 사형을 면하여 먼 곳에 유배하소서.”>
이처럼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하자 임금이 결단을 내렸다.
<어을우동은 음탕하게 방종하기에 꺼림이 없었다. 이런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이 어떻게 징계되겠느냐. 의금부에 명하여 사형시켜라.”>
꼬리쳐서 맞아들여
성종 11년 10월 18일 어을우동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어울우동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녀는 처음에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을 갔는데 행실이 과히 좋지 못했다. 이동이 은장이를 집으로 불러 은그릇을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계집종처럼 가까이 하려 했다. 태강수가 그것을 알고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친정으로 돌아가 슬퍼하며 탄식했다.
그때 한 계집종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련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 관리가 되었고 용모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가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주인을 위해 불러오겠습니다” 하니 어을우동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련을 데리고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했다. 또 방산수 이난의 집 앞을 지나다가 그와 간통했는데 정이 매우 두터웠다. 이난이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이름을 새겼다.
또 단오날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 서쪽에서 그네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 이기와 눈이 맞아 정을 통했다.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내금위(왕궁 수비대) 구전은 어을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을우동이 정원에 있는 것을 보고 담을 뛰어넘어가 간통했다.
생원 이승언이 일찍이 집 앞에 서 있다가 어을우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 아니냐” 하니 계집종이 “그렇습니다” 했다. 이승언이 뒤를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 집에 이르러 침방에 들어가 비파를 가져다 탔다. 어을우동이 성명을 묻자 “이생원이다” 하니 “장안의 이생원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했다. 이승원이 답하기를 “춘양군의 사위 이생원을 누가 모르는가” 하며 마침내 동침했다.
홍찬이 처음 과거에 올라 시내 구경을 하다 방산수의 집을 지날 적에 어을우동이 살며시 엿보고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뒤에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려 홍찬이 마침내 그녀 집에 이르러 간통했다.
서리 김의형은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 그녀를 희롱하며 집까지 따라가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서리를 몹시 사랑하여 이번에는 등에다 이름을 새겼다.
밀성군(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아들)의 종 지거비가 이웃에 살았는데 어느 날 새벽, 어을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하여 “부인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크게 떠들어 이웃에 알리면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오” 하니 어을우동이 두려워해 안으로 불러들여 간통했다.
이때 방산수 이난이 간통사건과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유감동이 많은 간부(奸夫)를 연루시키는 바람에 사형을 면했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 없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간통한 남자를 많이 열거하고 방산수 이난,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정숙지 등을 끌어댔으나 증거가 없어 죄를 면했다.
사람들이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도 음행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그 어미가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간통사건이나 섹스 스캔들에 대해 극형으로 다스리고 유배 보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들도 스캔들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으니, 인간 사이의 욕정 문제는 발본색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연인의 몸에 이름을 문신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나 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편에 어우동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어우동이 방탕하여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잡혀와 국청에서 문초당한다. 이 때 어우동이 관계했다는 수 십 명의 남자들도 국청으로 불러들여 간음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대질을 하는 과정에서 들어난 일인데, 그들 중 세 남자가 어우동과 정이 두터워 정표로 몸에 문신을 했다는 것이다.........
어우동이 미복(변장)을 하고 종실 방산수를 만나 간통하였는데 정호가 매우 두터워서 방산수 난은 자기 팔뚝에 어우동 이름을 먹물로 새기었고, 박강청을 만나 어우동이 그를 가장 사랑하여 그 또한 먹물로 팔뚝에다 어우동 이름을 새기었으며 서리(사관) 김의향을 만나 어우동이 그를 사랑하여 그의 등에다 자기 이름을 새기었다.
이 같은 기록을 보면 당시 사대부집 종들 사이에서, 혹은 평민 계층에서 사랑의 징표로 정인의 몸에 문신을 하는 것이 그 당시 시속(時俗)으로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던 듯 싶다. 하여간 위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풀이하면 어우동은 그와 정분을 맺었다는 그 수많은 남정네들 중에서 세 사람, 종실 방산수와 전의감 생도 박강창 그리고 사관 서리 김의향을 깊이 사랑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우동은 조선시대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 정2품 벼슬인 지사 (知事) 박윤창의 딸로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 이동(李 仝)의 아내다.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양반집 규수가 왕족에게 시집가 귀부인이 되었는데 어쩌다 조선 오백년 역사 중 음행사건으로 당대의 사회에 대 파란을 일으키고 또 오늘날까지 음탕한 여자의 대명사로 불려지고 있을까?
어우동은 역사에 기록된 바 대로 과연 색을 탐하고 색기 넘치는 음탕한 여인이었을까?
여기서 잠시 조선조의 시대상을 유추해 보자. 조선시대는 여성의 인간적인 권위나 사회적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여성에게 있어 완전한 암흑의 시대였다. 여자는 재능이 있어도 그것을 펼 수 없고, 학문에 뜻이 있어 글 배우기를 갈망하여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다만 부덕 (婦德)을 기르는 기초교양에 필요한 정도의 학습을 허용하였다. 여자가 설령 학식이 있다해도 여자의 무식함이 오히려 덕이 된다는 사대부들의 통념에 눌려 여자는 자신의 학식을 들어내 놓고 자랑할 수조차 없었다. 같은 인간이면서 남녀의 귀천을 갈라놓은 남존여비 사상에 물들어 여자에겐 오직 유순과 맹목적인 순종 그리고 정절을 강요했던 시절이었다.
'두 번 시집갔거나 행실이 방정하지 못한 여인의 아들과 손자에게는 분과시험(과거)과 생원시, 진사시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라고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시해 놓았다.
한 여성의 행실에 따라 그 집안의 아들과 손자 대까지 벼슬길에 나가는 관문을 원천봉쇄하겠다는 법 앞에서 과부가 어떻게 재혼할 수 있으며 재혼할 엄두가 나겠는가? 이렇듯 여성에겐 정절을 강요하면서 그 당시 사대부 남자들은 수탉처럼 여러 명의 처첩을 거느리고도 모자라 기방을 출입하며 기녀와의 유희를 즐기면서 그것이 마치 사내 대장부의 풍류인양 미화하였다.
왕족인 종실의 경우는 더 심했다. 왕자로 왕위 계승권에세 일찍이 밀려난 왕자와 왕자의 아들 들은 행동반경에 더욱 규제가 심했다.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고, 도성 밖으로 자유롭게 나가 살 수도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어우동의 남편 태강수 역시 종실로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순응하며 살았다. 어느날 남편이 은세공장이를 집으로 불러 일감을 맡겼다. 어우동은 먼 발치에서 숙련된 솜씨로 집안의 오래된 은붙이를 녹여 새롭게 장신구를 만드는 은세공장이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녹아있는 은물을 틀에 부어 비녀도 만들고 반지도 만드는 세공기술이 신기하고 놀라워서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는 직접 가서 보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탐구심이 강하고 호기심 많은 어우동은 자신의 계집종 옷을 빌려입고 은세공장이의 곁으로 다가가 구경도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세공장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실의 귀부인이 헛간같은 곳에서 외간남자와 마주앉아 있는 그 자체가 법도를 어기는 일인데 그만 그 장면을 남편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태강수는 어우동이 천한 은장이를 좋아하여 가까이 지냈다고 화를 내며 그날로 아내를 친정으로 쫓아보냈다. 친정으로 돌아온 어우동은 어이없는 이유로 남편에게 소박맞은 자기신세를 한탄하며 슬퍼하였다. 남은 여생을 홀로 살아내야 한다는 자신의 운명을 억울해 하고 분해 하다가 문득 남편을 비롯해서 그 시대 모든 사대부 남성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우동은 떨쳐 일어나 외간 남자들을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어우동은 남자를 선택했다.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는 시대에 어우동은 용감하게도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를 스스로 골라 잡았다. 때로는 변장을 하고서 길에 나가 직접 상대를 보고 마음에 드는 남자라면 서슴없이 다가가서 유혹했다 한다.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화를 꽂고 행진하는 홍찬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끌려 홍찬이 지나는 길목을지키고 있다가 그를 유혹하여 정을 통하였다.' 이 대목도 성종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행실은 파다하게 소문이 퍼져 대궐 안까지 날아들었고 이 사실을 알게된 성종은 어우동을 잡아들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어우동은 의금부 나졸이 자신을 잡으러 나온다는 말을 전해 듣고 달아났으나 멀리 가지 못하고 잡혔다.
어전회의에서 어우동의 처벌 문제를 놓고 임금과 신하간에 오랜 논쟁이 벌어졌다. 대명률에 의해 간음죄의 처벌인 곤장 100대를 쳐 멀리 유배보내자는 의견과 사형의 중형을 주장하는 의견이 맞섰는데 종친녀의 음란은 중형으로 다스려서 사회기강을 잡아야 한다는 성종의 의지대로 ( 음행죄는 태형이나 장형이었으나) 사형이 내려졌다. 종실의 처로 근친들과 간음하여 왕실의 위상을 더럽힌 죄가 크기 때문이다.
성종 11년 10월 어우동은 교수형으로 말 많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실록에 명기된 성균관 유생 수십명에, 노비, 조관 등 그 많은 남자들과 그녀는 과연 사랑을 했던 것일까? 사랑의 징표로 팔뚝과 등판에 먹물로 인을 친 세 남자 만을 사랑했던 것일까? 어우동의 남성편력은 단순히 여자의 성품이 음란하여 저지른 음행사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자에게 불평등한 사회, 남성 우위의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유교사회를 향해 몸으로 대항한 처절한 항변이 아니었을까? 생명을 담보로 한.
백마대 빈지 몇해를 지났는고
낙화암 서서 많은 세월 지났네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리
부여회고(扶餘懷古), 라는 이 시는 어우동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다음은 어우동을 찾다가 발견한 다른 주인공, 유감동이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을 만나서인지.. 운이 좋은 것인지, 교수형은 피해갔군요.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같이 자다가 소변을 본다고 핑계하여 김여달에게 도망했습니다.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죄를 저질렀으니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김여달은 1등을 감형하여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으로 귀양을 보낼 것이며, 간통한 최중기의 매부 이효랑은 곤장 100대, 오안로는 자자(얼굴에 칼 자국을 내는 것), 기타 간통한 자들은 곤장 60~100대를 쳐야 합니다.”
조선시대 3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중 하나인 유감동은 길거리에서 굴러먹던 여성이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명예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검한성(檢漢城) 유귀수의 딸로서 빵빵한 집안의 규수였다.
그녀는 나이가 차자 평강 현감 최중기에게 시집을 갔는데, 최중기가 무안 군수로 나갔을 때 함께 부임했다가 병을 핑계로 먼저 서울로 올라와 음란한 행실을 일삼는 바람에 쫓겨난 여인이다.
유감동은 과연 어떤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기에 근엄한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올린 것일까. 유감동 사건이 사회문제로 확산되자 세종은 신하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헌부에서 음부(淫婦) 유감동을 가뒀다는데 간통한 남자는 몇이나 되며, 본 남편은 누구인가” 하자 김자가 답하기를 “간통한 남자는 이승, 황치신, 전수생, 김여달, 이돈 등이며 기타 몰래 간통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본 남편은 평강 현감 최중기입니다.”>
간통한 남자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라, 허허허. 좀 더 정밀한 관찰을 통해 유감동과 정분을 나눈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세종 9년(1427) 8월 20일 사헌부 보고에 의하면 유감동과 간통한 사람은 정효문, 이효랑, 오안로(해주판관), 이곡(전 도사), 장지(수정으로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 최문수(의자 만드는 기술자), 이성(은으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자), 전유성, 변상동 등이 더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사헌부는 “간통한 자 중에서 관리들은 직위해제하고 잡아다 국문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정효문과 이효랑은 직위해제하지 말고 일단 잡아오라”고 명하자 김종서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정효문은 그의 숙부 정탁이 간통한 사실을 알고도 고의로 유감동을 범했으니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이효랑은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간통했으니 두 사람 행실은 짐승과 같습니다. 추궁하여 다스리소서.”>
이에 대한 세종의 답변.
<“이 여자를 더 추국할 필요가 없다. 이미 간통한 남자가 십수 명이 나타났고, 또 재상도 끼어 있으므로 일의 사연은 벌써 다 알려졌으니 이것을 가지고 죄를 결정해도 될 것이다. 다시 더 추국한다 해도 이 여자가 어떻게 다 기억하겠는가.”>
아무 곳에서나 간통하고…
세종 9년 9월 16일 사헌부가 임금에게 올린 보고에는 유감동의 음란행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유감동과 간통한전유성, 주진자, 김유진, 이효례, 이수동, 송복리, 안위 등은 이 여자의 지나온 내력을 살피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간통하고 욕심을 마음대로 부렸습니다.
이자성은 비록 간통하지는 않았으나 간통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황치신은 나루터 아전으로서 지나가는 여자를 불러 간통했는데, 후에는 지나온 내력을 알면서도 계속 간통했습니다.
변상동은 이승이 첩으로 정해 거느리고 살 때 몰래 훔쳐 간통했으니, 그 마음과 행실이 불초할 뿐만 아니라 여러 달 간통했으니 어찌 이 여자의 지나온 내력을 몰랐겠습니까. 이승과 이돈은 사정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간통하면서 유감동의 아버지 집에까지 드나들었으니 그 뻔뻔스러움은 말할 수 없습니다.
오안로는 지나온 내력도 모르는 여자를 관아에 끌어들여 간통하고 관청의 물건까지 팔기도 하고 주기도 했습니다. 전수생도 여러 달 동안 간통했으니 그가 이 여자의 사정을 안 것은 확실합니다. 이효랑은 처남의 정처(正妻)와 간통했으니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권격은 고모부인 이효례가 일찍이 간통한 것을 알면서도 여러 차례 간통했습니다.
김여달은 길 가는 유감동을 만나자 순찰한다고 위협하여 간통하고 음탕한 욕심을 내어 남편 최중기의 집까지 왕래하며 거리낌없이 간통하다 마침내 유감동을 거느리고 도망했습니다.
유감동은 공직자의 아내로서 남편을 버리고 도망하여 거짓으로 창기(娼妓)라 일컬어 서울과 외방에 횡행하면서 밤낮으로 음란한 짓을 하여 추악함이 비할 데가 없으니 크게 징계하여 뒷사람에게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 시절은 유교 사회의 법도와 기강이 강했던 시대인 만큼 남녀 간의 성 문제에 대해서는 법도가 준엄했다. 사헌부는 유감동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엄격하게 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보고했으니, 요즘 용어로 검찰의 구형에 해당하는 대목을 직접 들어보자.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같이 자다가 소변을 본다고 핑계하여 김여달에게 도망했습니다.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죄를 저질렀으니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김여달은 1등을 감형하여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으로 귀양을 보낼 것이며, 간통한 최중기의 매부 이효랑은 곤장 100대, 오안로는 자자(얼굴에 칼 자국을 내는 것), 기타 간통한 자들은 곤장 60~100대를 쳐야 합니다.”>
사헌부는 유감동의 죄가 중한 만큼 교수형을 주장했으나 마음이 너그러웠던 세종은 그녀를 변방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러한 유배조치로 유감동 사건이 막을 내린 것은 아니다. 세종 15년(1433) 12월 4일 지방으로 유배된 유감동은 또다시 일을 벌였다. 이날 사헌부는 ‘임금께서 유감동을 너그럽게 살려주었기 때문에 비슷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며 음행사건에 보다 단호한 조치를 내려 줄 것을 간청했다.
당시 사헌부에는 재상의 딸인 어리가가 고위 공무원들과 떼를 지어 음행을 일삼다 체포되어 수감됐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사헌부는 유감동처럼 너그러이 유배시키면 앞으로 동일한 사건을 바로잡을 수 없다며 극형에 처할 것을 건의했다. 세종이 허락하지 않자 대신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종 15년 12월 8일, 사간원이 다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 중에 유감동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전일에 어리가, 이의산, 허파회 등을 사형에 처하여 뒷사람을 경계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시니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생각하건대 남녀 사이에는 큰 욕심이 있는 것이니, 엄중하게 금하고 방지하지 않으면 요사하고 음란한 무리들을 어찌 경계하겠습니까. 태종께서는 음란 행실을 일삼는 자들을 큰 죄로 징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감동이나 금동, 연생, 동자와 같은 무리가 잇따라 나왔습니다. 만약 어리가의 죄를 관대한 법으로 처리한다면 뒷날 방자한 행위를 하는 자가 끝이 없을 것이 두렵습니다.”>
입력날짜 : 2006-08-17 (10:47)
조선시대 別錢 규방의 성교육용으로 금속판 위에 성행위 장면을 새겼다.
세종 9년(1427) 9월16일자 사헌부의 사건 보고서는 유감동의 자유분방함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유감동은 관리의 정처로서 남편을 버리고 도망하여 거짓으로 창기라고 일컫고 서울과 외방에 횡행하면서 밤낮으로 음란한 짓을 하여 추악함이 비할 데 없다. 이 승과 이 돈은 간통하면서 감동의 아버지의 집에까지 드나들었으며, 오안로는 내력도 모르는 여자를 관청에 끌어들여 간통하고 관청의 물건까지 팔기도 하고 주기도 했으며, 전수생도 여러 달 동안 간통했다.
이효량은 처남의 정처와 간통했으니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며, 김여달은 길에서 피병하러 가는 유감동을 만나자 순찰한다고 위협하여 강간하고, 드디어 음탕한 욕심에 남편 최중기의 집까지 왕래하며 거리낌없이 간통하다 마침내 유감동을 데리고 도망했다.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자다 소변본다고 핑계대고 김여달에게 도망쳤다.’
사헌부는 유감동의 죄가 중한만큼 교수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세종은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어 종친의 아내로서 행동이 문란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요부(妖婦) 어우동(於宇同, 정확하게는 於乙宇同)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때는 성종 시절, 아버지는 승문원 관리 박윤창, 남편은 종실 태강수(泰江守) 이 동(李仝). 일찍이 은장이(銀匠)를 맞이해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처럼 하고 나가 서로 이야기하며 가까이 하려고 했다.
그 사실이 알려져 어을우동은 친정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어느날 어을우동이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자 한 계집종이 이렇게 위로했다.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년이라는 이는 일찍이 사헌부 관리가 되었고 용모가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신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불러 오겠습니다”라고 했다. 어느날 계집종이 오종년을 맞이하여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하였다.
이후 어을우동의 남성 편력은 끝없이 이어진다. 어우동이 미복을 하고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방산수 이 난이 맞아들여 간통했다. 그 정이 매우 두터웠던 모양이다. 이 난이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어우동의 이름을 새길 정도였다. 단오날에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 도성 서쪽에서 그네 타는 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 이 기가 보고 좋아하여 그 계집종에게 물었다.
“뉘 집 여자냐?”
계집종이 대답하기를 “내금위의 첩입니다”라고 해서 서로 정을 통했다. 전의감 생도 박강창 역시 어우동과 놀아났다.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팔뚝에 그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이미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지자 대담해진 어을우동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과거에 합격하여 유가(과거 합격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잡히고 거리를 돌며 좌주·친척 등을 찾아보는 일. 대개 방방후 사흘 동안 하였음)를 하는 홍 찬을 본 어우동은 문득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 후 길에서 홍 찬을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렸다. 이에 홍 찬이 그의 집으로 가 정을 통했다. 그 상대가 반드시 양반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서리 감의향이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자 희롱하며 집까지 따라가 간통하기도 했다. 어을우동이 사랑해 등에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귀천 안 따진 어을우동의 남성편력
삼척 원덕 지방에 지금도 남아 있는 해신당을 재현한 모습.
이 같은 자유분방한 생활은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졌으며,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어을우동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논의가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과 간통했는가 하는 것도 관심사였다. 그 때 방산수 이 난이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감동이 많은 간부로 인하여 중죄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 없이 많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관계를 맺은 간부를 열거하고, 방산수 이 난도 어유소·노공필·김세적·김 칭·김 휘·정숙지 등을 끌어대었다. 문초를 받은 관계자들만 수십 명에 이르렀다.
심 회는 “어을우동의 죄는 율을 상고하면 사형에는 이르지 않으나, 사족의 부녀로서 음행이 이와 같은 것은 강상에 관계되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여 뒷사람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라고 극형을 주장했다.
윤필상도 “어을우동은 강상을 무너뜨렸는데도 죽이지 않으면 음풍이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의 정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을 자행하여 정·위나라의 풍속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이 여자를 극형에 처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소서”라고 했다.
김국광과 강희맹은 의논하기를 “어을우동은 종실의 부녀로서 음욕을 자행하기를 다만 뜻에만 맞게 하여 친척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즐겨 서로 간통하여 이륜(彛倫)을 손상시킨 것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마땅히 조종조의 법에 따라 중벌에 처하여 규문 깊숙한 속의 음탕하고 추잡한 무리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 경계하고 반성하게 함이 옳겠습니다. 중국 조정의 예에 의하여 저잣거리에 세워 도읍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 징계가 되게 한 연후에 율에 따라 멀리 유배하소서.”
결국 어을우동은 성종 11년(1480) 10월1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울러 조선 최대의 음녀(淫女)로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종실의 아내로서 그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고, 유교 윤리를 표방했던 조선사회는 그를 포용할 수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어우동과 간통한 것으로 알려진 남자들에 대한 처벌이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실제로 문초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죄를 면했다. 성종 13년(1482) 8월8일 실록에 의하면, 어을우동과 간통한 자들은 이미 모두 석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요즘도 더러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되는 동성애(同性愛)도 확인된다. 세종 시절, 세종의 아들로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의 두번째 부인 봉씨(奉氏)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세자빈의 동성애 사건을, 세종은 측근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도승지와 동부승지(왕실의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의 관원,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장과 비서관)만 배석시킨 채 논의하고 있다. 세종 18년(1436) 10월26일의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난해 세자가 종학(宗學)에 옮겨 거처할 때 봉씨가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부터 외간 사람을 엿보았다. 또 항상 궁궐 여종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요 근래 봉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 궁인들이 혹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고 한다.
어느날 소쌍이 궁궐 안에서 소제하고 있는데 세자가 갑자기 묻기를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고 하니 소쌍이 깜짝 놀라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듣건대 봉씨가 소쌍을 몹시 사랑하여 잠시라도 그 곁을 떠나기만 하면 원망하고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나는 비록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였고, 소쌍도 다른 사람에게 늘 말하기를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매우 무섭다’고 하였다.
소쌍이 또 권승휘의 사비(私婢) 단지와 서로 좋아하여 혹시 함께 자기도 하였는데, 봉씨가 사비 석가이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라 다니게 하여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하였다.
또 봉씨가 새벽에 일어나면 항상 시중드는 여종들로 하여금 이불과 베개를 거두게 했는데, 소쌍과 함께 자리를 같이한 이후로는 다시는 시중드는 여종을 시키지 아니하고 자기가 이불과 베개를 거두었으며, 또 몰래 그 여종에게 그 이불을 세탁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궁중에서 자못 떠들썩한 까닭으로 내가 중궁과 더불어 소쌍을 불러 그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하였다.”
궁궐 내부의 공공연한 동성애
동성애는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녀와 종비(從婢) 등이 사사로이 서로 좋아해 자리를 같이한다고 하므로, 그것을 매우 미워하여 궁중에 금령을 엄하게 세워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살피는 여관이 아뢰어 곤장 70대를 집행하게 하였고, 그래도 금지하지 못하면 곤장 100대를 더 집행하기도 하였다. 그런 후에야 그 풍습이 조금 그쳐지게 되었다.’
그런데 세종도 이러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걱정되었는지, 세자빈 봉씨가 궁궐의 여종과 동숙한 일은 매우 추잡하므로 교지에 기재할 수 없으니 우선 성질이 질투하며 아들이 없고 또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른 너댓 가지 일을 범죄 행위로 헤아려 교지를 지어 바치게 했다. 결국 봉씨는 그 사건으로 폐출돼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저로 나갔다.
위에서 살펴본 사례들은 두드러지는, 아니 어쩌면 예외적인 것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조선사회 전체가 그러했다는 식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남성들의 성행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면서 여성들에 대해서는 정절을 강조하는 남성 중심의 유교적, 가부장적 질서가 엄연히 존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평가 역시 시대에 따라,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을 가리켜 요부(妖婦) 혹은 음부(淫婦)로 볼 수도 있겠고, 성해방론자 내지 인간해방론자 혹은 남녀평등론자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겠다.
결국 이들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몫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시대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윤리와 도덕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뀔 수밖에 없겠지만, 윤리와 도덕의 존재 그 자체가 없어질 수는 없지 않을까 한다.
출판호수 2004년 01월호
출처 : [자료원 역사탐험]
사족.
어우동, 유감동을 비롯하여, 인수대비, 정순왕후, 문정왕후 등... 조선시대 유명한 여자들은 모두 악명 높은 사람들 밖에 없네요. -_-;; 이것도 남존여비 사회의 편견에서 온 것인지 궁금하군요.
제가 알기로는 성종과 어우동보다 성종과 기생 소춘풍과의 이야기가 더 유명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일단 유명하니까 어우동을 고른 것일까요?
성을 즐겁고 신성한 것이라 여긴 신라시대 여인들이 칠거지악을 내세우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갑갑해서 모두 기생이 됐거나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외국도 그런 것인지 우리 민족이 유달리 성을 사랑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언어에 유독 음담패설과 성 관련 욕설이 많은 걸 보면 조선시대의 악랄한 억압은 강한 것에 대한 더 강한 것을 통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스캔들>이 나오기 전에는 조선시대 스캔들이야 과부가 머슴과 도망가 숨어 살거나 결국 자살을 택하는 것 정도의 고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어우동, 사방지 등 한국형 에로 영화의 소재가 모두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기억하자.
어우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사랑을 나눈 여자이다. 조선 성종 때의 실존 인물인 어우동은 본래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간통 문제가 불거져 이혼당했고 그 이후 노소, 근친을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을 뿌린다. 어우동은 한번 관계를 맺은 남자는 절대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었는데 애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몸에 문신하도록 강요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애정 행각이 구설수에 올라 풍기문란 죄로 처형된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어우동의 형량은 고작 곤장형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연루된 고위 관리들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사형을 고집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책임감없는 행동은 한결같다.
믿기지 않겠지만 500년 조선조 동안 왕실 여인들의 동성연애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궁궐 내 동성연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세종대왕이 이와 관련된 벌칙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 세종대왕이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연애자임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을 충격에 빠뜨린 며느리는 후에 문종이 되는 세자의 둘째 부인인 봉씨. 실록에 의하면 봉씨는 거짓말로 임신과 낙태를 번갈아 하고 술을 즐겨 만취한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물론 이는 봉씨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은 관리들의 악의에 찬 기록일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날 궐내에 여종 소쌍이 세자빈과 같이 잔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왕의 문초를 받던 소쌍은 세자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고백한다. 결론? 물론 세자빈은 폐위됐고 친정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도 자결했다.
드라마 <대장금>의 배경이 되는 중종 때 조정은 백정의 딸을 양반의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로 한바탕 시끄러웠다. 결국 중종이 어려운 시절에 동고동락한 천민의 딸을 양반의 정식 아내로 인정하라는 명령을 내려 일단락된 이 사건은 조선 전체가 들썩거렸던 백정의 딸 양씨 스캔들이다. 폭군 연산군은 예쁜 여자라면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은 이장곤이라는 관리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이에 격분한 이장곤은 홧김에 아내를 죽이고 함경로 도망친다. 도망자 신분의 이장곤은 백정 양씨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정말 괜찮은 그 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도망자 생활 몇 년 만에 중종의 즉위로 조정으로 돌아온 이장곤. 그동안 양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장곤은 동고동락한 아내를 버릴 수 없어 조정에 선처를 부탁한다. 결국 이장곤 덕에 부인 양씨는 정경부인이 되고 친정은 모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정경부인 양씨의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 <임꺽정>에도 등장하는데 임꺽정은 정경부인 양씨의 조카로 설정돼 있다.
언젠가 KBS <역사 스페셜>에서 지독한 사랑으로 소개된 바 있는 홍랑과 김덕창의 스캔들은 이렇다. 김덕창은 함경도 변방에 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시와 음악에 뛰어난 관기 홍랑을 만난다. 서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김덕창의 임지 변경으로 헤어지게 되는데 어느 날 홍랑은 한양에 있는 김덕창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관기는 임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홍랑은 연인을 찾아 한양에 오게 되고, 한양에서 둘은 다시 한번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한양 한복판에 아내까지 있는 양반 관리가 법을 어긴 관기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고 김덕창은 파직 후 객지에서 살해됐다. 사실 개인적이기까지 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세하게 전해지는 이유는 후에 홍랑이 김덕창을 위해 평생 수절했고 결국 김덕창과 나란히 묻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회 금기를 깨고 사랑을 이룬 그녀의 용기가 더 부럽다.
양녕대군은 동생을 위해 일부러 패륜아 행세를 한 꽤 멋진 왕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녕대군을 호탕한 풍류가로만 생각하기에는 입에 담기 민망한 스캔들이 많다. 양녕대군이 일으킨 스캔들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웠던 것은 유부녀인 어리 강간 사건이다. 어리는 한 정승의 첩으로 병이 있고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양녕대군은 그녀를 납치해 강제로 관계를 갖는다. 심지어 양평대군은 어리를 궁궐과 지방 유배지에까지 끌였들이는데 이는 연산군의 스캔들을 제외한 조선시대 최고의 섹스 스캔들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는 이 어리 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됐다는 사실을 들어 당대의 로맨스로 미화하지만 결국 양평대군이 어리를 버리고 왕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어쨌든 그 이후의 어리의 삶은 기록에 전해오지 않는다. 출처 :아름다운 만남의 동행 원문보기
조선시대 각종 스캔들 모음 행복에셋님의 블로그 - 조선시대를 발칵 뒤흔든 섹스스캔들 모음 (양성인간 사방지, 세자빈 봉씨 등... 미성년자 관람 불가-_-;;)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의 주인공, 황진이 다우리(빗방울)님의 블로그 -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
황진이 또한 기생이고, 아름다운 미모로 첫눈에 남자들을 함락시켰다고 하지만 워낙에 도도하고, '성'보다는 시, 화, 거문고로 유명해서인지 이 게시물에 링크시키기는 그녀에게 미안해서 빼버렸다.
이외에 현대에 파문을 일으켰던 스캔들에 연루됐던 주인공들인 '린다 김, 모니카 르윈스키, 마릴린 먼로, 정인숙'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둔 '집아, 고맙다님의 블로그 - 재미있는 지구촌 섹스스켄들[펌]'
영웅은 수많은 미녀들을 취해도 호남으로서의 기개나 풍류로 포장하는데 비해, 여자들은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의 미국에서도 추악한 스캔들의 여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걸 보니 이 또한 남녀차별의 일종인 것 같아서 과히 유쾌하진 않다만.. 나 역시도 그녀들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걸 보면 나도 똑같은 인간인가?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하면 성종 임금의 어머니로서, 권력을 위해선 피도 눈물도 없었던 모사꾼 또는 청상과부가 된 그 광신적 히스테리에 못 이겨 며느리(연산군의 비 폐비 윤씨)마저 죽게 한 잔인한 여성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인수대비 한씨를 중국의 폭녀 여후(한고조 유방의 비)나 측천무후(당 고종의 비) 혹은 서태후(청 함풍제의 비) 등에 비교하기도 하고 그 패도와 악독한 성품에 대해 조롱한다.
그런데 그러한 한씨의 일화 속에는 현모양처를 강조하는 조선왕조의 유교적 여성관에서 배양된 또 하나의 우리나라 여성에 대한 왜곡된 역사의식이 담겨 있다. 유교적 '현모양처론'에서 본다면 당연히 한석봉의 어머니나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현모의 자애와 양처의 덕성을 두루 겸한 조선 왕조의 표준적 여인상일 것이다. 어쩌면 현모양처(賢母良妻)란 여성의 삶이 철저히 남자의 두 어깨에 달렸을 때 속편하고 싶은 남성들이 찾고자 한 이상적 여성상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그런 현모양처형 인성을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지아비(의경세자)의 죽음에서 비롯된 수많은 좌절과 비애를 전화위복(轉禍爲福)으로 바꾸면서 끝내 자식을 왕위에 올리고 태평 치세를 열게 한 정열적인 왕모(王母)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리고 언해문 간행은 물론이고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중국식 여성 예절 체계를 '조선화(朝鮮化)'한 <<내훈(內訓)>>을 통하여 조선 500년의 여성상의 밑그림을 그려낸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렇다고 인수대비 자신이 <<내훈>>이 바라는 여성형이었는지는 의문스럽다..
물론 자애롭고 덕성 있는 조선의 현모양처상을 고의로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고도 과연 이브는 현모양처였을까? 기원전 15세기 경에 조로아스터교의 천지창조 신화는 묘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즉 아담의 첫 번째 아내는 이름이 '릴리스'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남성 못지 않은 정열과 패기를 가진 용감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사냥과 전쟁을 좋아하고, 자식을 낳기 거절했으며, 그 때문에 남성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가부장적 헤브라이 신화에서는 순종하는 이브 모습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현모양처의 출발부터가 묘한 음모 같은 것이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전근대 세계의 여성들이 역사의 표면에 뛰쳐나오는 일은 무척 힘들고 고달픈 것이었다. 그래도 조선의 인수대비는 역사의 격랑에 몸을 맡긴 몇 안 되는 한국 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씨가 간 길이 역사의 발전 방향에 어느 정도 합치된다는 면에서 조선 최고의 여성으로 아낌없이 추천하는 것이다.
▶ 권력의 핵심을 관통했던 인수대비의 정치력
인수대비는 권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권력 추구의 열정은 그녀를 불과 20대의 나이에 조선 정국의 핵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그 발단이 바로 '석실능묘 사건'이었다. 예종 1년(1467년) 9월 어느 날 전직 세자빈 수빈 한씨가 임금 앞으로 난대 없이 주청서를 올렸다. 여기서 수빈 한씨는 예종에게 선대왕 세조의 봉분을 석실(石室: 돌방무덤)로 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던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돌리면...본래 세조는 귀족권을 견제하고, 백성의 살림을 증진하여 이것을 치국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조는 백성에게 많은 부담을 주는 능묘제도를 개혁하려고 했고, '석실 봉분을 만들지 말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세조의 개인적 염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조선왕조가 지향해야 할 위민을 통한 치국이념을 확고히 하려고 후왕들에게 유언한 것이다. 백성에 대한 애정 그것을 조선왕조의 영속을 가져올 요체로 생각했던 세조는 그렇게 유언했고, 그러한 선왕의 유언은 당시로선 곧 법이었고 거부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수빈은 '효'를 빙자하면서 신숙주, 한명회, 박원형 등과 더불어 석실 능묘 축조를 예종에게 강권한 것이었다. 그는 훈구세력의 그늘을 받으며 정계일선에서 왕을 핍박하는 정치적 배반을 시작한 것이었다.
권력의 핵심에서 배제되었던 수빈 한씨가 시동생 예종에게 감히 능묘 형식을 문제 삼았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수빈은 석실 봉분이 제왕의 능묘로서 품위가 있다는 이유를들었다. 하지만 그 것은 세조의 유업을 이으려는 예종 세력과 세조의 왕권주의에 반대한 훈구 세력이 권력의 향배를 놓고 치열하게 대치하는 정국에서 남편의 죽음으로 권력의 일선에서 배제된 수빈 한씨가 훈구 세력을 업고 권력 일선에 복귀하려는 하나의 거사(擧事)였던 것이다. 그러나 훈구세력을 등에 업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수대비가 연산군 같은 패권주의적 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일보후퇴일 뿐이었다.
훈구를 업고 왕권을 빼앗고, 다시 왕권을 통해 훈구를 제거한 희대의 정치가 과연 인수대비는 누구였을까?
▶ 훈구를 제거하라
본래 수빈 한씨는 예종의 형수로서 사가(私家)에 머무는 종실의 한 여성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뒤에는 강대한 훈구 귀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동안 예종은 왕권주의를 유지 계승하고자 젊고 새로운 인물을 조정에 대거 등용하여 훈구를 저지하는데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인륜과 분수를 강조하던 정치 풍토에서 장자(長子)의 부인이자 왕의 형수라는 위치는 훈구가 예종을 견제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수빈과 훈구가 손을 잡는 상황은 예종의 입장을 무척 난처하게 만들었고 두 사람간의 갈등은 증폭되고 있었다.
그러한 갈등은 김초 사건이나 허계지 아내 사건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먼저 김초 사건은 수빈의 아우이자 안동부사였던 한치의가 지체 낮은 가문 출신이었던 경상도 도사 김초에게서 강제로 첩을 빼앗고 능욕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허계지 사건은 수빈 거처에 빈번하게 드나들던 허계지의 아내가 수빈의 후원을 믿고 자기 범죄 사실을 인멸하고 형벌을 적게 받고자 뇌물을 쓴 사건이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수빈 한씨의 형제들은 예종에게서 심하게 견제를 받게 되었다. 물론 예종은 수빈 한씨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다른 종실의 인사청탁을 불허하면서도, 수빈 자손의 가자(加資, 과거 없이 관직을 제수하거나 매관하는 것)를 인정하는 등 유화책을 썼다.
그러나 결국 예종 세력은 강력한 훈구 세력의 지원을 받는 수빈 한씨를 당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이라는 여운을 남기면서 곧바로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제안대군)이 있었음에도 수빈 소생인 자을산군(성종)에게 왕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불과 열 두 살 남짓의 성종에게 왕위를 넘긴 것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권력욕이 개입된 것이지만, 결국 죽음을 앞둔 예종이 자기 아들이 닥칠 운명과 단종의 운명을 함께 머리에 떠올려 본 것은 아닌지.
▶ 인수대비는 시세 장악의 달인
수빈 한씨는 세조 집권 초반까지 시아버지 세조에게서 많은 총애를 입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는 수빈의 소생인 월산군, 자을산군에게 많은 토지와 농기구, 콩 등을 자주 하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처럼 총애를 입던 수빈은 결국 세조의 왕권주의와 다른 길을 가고 말았다. 그것은 남편 의경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수빈 세력은 와해될 위기에 처했고, 권력에서의 배제는 수빈은 자신의 운명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가부장적 유교적 가치관에서 볼 때 왕권에서 배제된 적손 자제가 천수를 다할 가능성은 적었던 것이다.
결국 수빈의 선택은 왕권주의에 저항한 훈구 세력 즉 한명회와 신숙주 등과 결탁하는 것. 이는 세조 말년 훈구와 신진 청년관료 간의 권력투쟁이 서릿발처럼 작열하는 속에서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과 한명회의 딸(공혜왕후)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최고조에 달했고, 그 결과 수빈은 한명회의 정치력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젊은 예종의 충직한 신료를 하나 둘 제거(남이의 옥사)하면서 세조의 유업을 좌절시키고 결국은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 결국 중전도 해보지 못한 그녀는 정치력만으로 대비로 전격 승차하여 왕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단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인수대비는 기왕의 한명회, 신숙주 세력을 배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꾀한다. 그리고 '윤비폐출사건'과 같이 기왕의 훈구 세력이 수세에 몰릴 때는 다시 훈구의 손을 들어 신흥 세력을 퇴출시켰고, 훈구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때는 다시 막강한 왕실의 권위로 훈구의 전횡을 저지했다. 한명회와 결탁이나 그 제거 과정은 그러한 시세와 정국의 변화에 달통한 인수대비의 탁월한 정치력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인수대비가 추구한 길은 절대주의였다. 그것은 인수대비의 엄격한 교육 아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일단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공신전을 폐하는 등 반 귀족정책도 동시에 수행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엽색 스캔들로 귀족의 반격을 받아 그러한 시도는 훗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인수대비의 처세는 패도(覇道)
인수대비는 며느리 윤씨를 죽이는 등 이른바 인륜 배반의 처세에 달통한 여인이었다. 그렇다면 유난히 인수대비에게만 인륜과 인정의 부족을 강조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과연 역사 속에서 인정이란 존재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역사 속에서 감정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개입된다.
물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나 대동법 실시와 같이 왕실 측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실시한 진보적인 민본정책도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반된 민심을 바로 하고, 왕조의 안정을 지속하기 위한 고도의 포석이었다. 그래서 한글이 나오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이 "한글 용비어천가"였고, "삼강행실도"였다. 또한 대동법도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불안한 재정기반을 일원화하여 국고를 늘여주었고, 삼정의 문란은 대동법 이후 더욱 격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인수대비의 처세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선 왕실, 취약한 왕실을 훈구 세력과 동맹을 통하여 구하고, 왕조의 안정적인 지속을 보장하려는 왕실 측의 처세였다. 개인적인 원한에 윤비를 폐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연산군 시대를 만들었고, 결국 절대화한 왕권의 역공으로 죽음에 이른 비범한 정치적 인물이었다.
꼭 진취적인 여성은 정치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는가를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 오랜 세월 온실의 화초처럼 보호받고 대상화된 성으로 버려진 이면에는 그들의 정치적 능력이 제거된 원인도 자리하고 있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이 배워야 할 진정한 조선의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