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너무 너무 재미있어서 퍼옴. 문제시 삭제 예정.
 


다음 카페 유혁진님의 글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가 드디어 수양대군의 등극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 '왕과 비'는 사실 전작(前作)인 '용의 눈물'의 후광에 힘입어 출발한 기획이었고, 지금까지의 시철률 역시 '용의 눈물'에게서 물려 받은 부분이 상당하다. 그러나 어딘지 전작에 비해 김 빠진 구성과 동어반복적이고, 재탕에 삼탕에 가까운 플롯의 배치로 시청자를 짜증나게 만든 부분으로 인해 전작 만한 카리스마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작중에서 그려지 는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극히 일관되지 못해서 중간에 한두회를 보지 않은 시청자로서는 저 인물들이 왜 갑자기 저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금일(99. 1. 23.) 방영분의 경우 단종의 양위와 관련한 매우 급박한 상황전개가 이뤄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극적 긴장감을 발생시키는 연출에 실패하고 있다.



그냥 저냥 보여주면 보여주는대로 보면 되는(?) 무력한 시청자의 입장이지만,
몇가지 거슬리는 점이나 좀 언급해 보려고 한다.



1. 세종대왕은 정말로 수양대군을 왕재(王才)로 생각했을까?

세조의 왕위찬탈을 다루는 문예작품(영화와 방송을 포함하여)중 최근의 작품들에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신봉승의 '설중매(雪中梅)'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 중반에 드라마화 되고, 영화화가 이뤄진 그의 작품은 무명이던 연극배우 정진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았으며, 드라마 캐스팅 그대로 영화화까지 이뤄질 만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심도있게 파헤친 역작(力作)이었다.


때문에 후작들은 싫건 좋건 '설중매'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학술적 연구가 아닌 드라마나 영화화 될 경우에는 거의 그런 혐의를 피하기 힘들어 진다.



그런데, '왕과 비'는 방영 초반부터 '안티 설중매'의 노력을 곳곳에 드러내고 시작했다.


'계유정난'의 명분을 심화하기 위해 김종서와 황보인의 독단(獨斷)을 부각시키고, 종친들을 심하게 무력해 보이도록 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는 조선의 국법을 조금만 유추해 보아도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부터 조선의 국법상 종친은 관직에 오를수 없다.


조선의 종친인 자로 고위관직에 오른 예는 이방원(태종: 제 1 차 왕자의 난 수습), 이화(태조 이성계의 서제(庶弟 : 태종의 외척 제거), 이유(세조 : 계유정난 수습), 이준(귀성군으로 세조의 조카, 영응대군의 아들 : 이시애의 난 진압) 뿐으로 이는 국초(國初)에 한한다.


때문에 종친은 관직에 오르는 길인 과거를 볼 필요가 없고(자격도 아마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진사나 생원 같은 하위직을 받지도 못한다. 때문에 이들에 대한 호칭은 그의 군호(君號)를 부르거나 '나으리'를 붙여 부르는 것이 예법에 맞다. 대감이나 영감같은 고위직 관리의 존칭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왕과 비'에서는 수양대군을 위시한 대군과 군들에게 '대감'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무지(無知)의 소치인지, 작가의 의도적 시도인지, 아니면 필자의 무식인지 몰라도 적어도 '왕과 비' 이외의 작품에서 **대군'대감'이라는 호칭은 들어본 바가 없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있었다면, 뒤이어 벌어질 사육신 사건(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단종 복위운동 사건)에서 성삼문 등이 세조를 그의 예전 호칭대로 '수양대군 나으리'라고 불러서 세조를 진노케 한 그 유명한 사건을 어떻게 그려낼지 기대된다.


각설하고, 조선의 종친은 관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실권을 가질 수 없고, 종친으로서 왕실 의전과 종묘의 제사에 참석하는 등의 예우만을 받을 뿐이었으나, 세종대왕은 제위 말년에 이르러 세자(문종)를 비롯해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대군등을 국정의 곳곳에 침투시켜 실무를 맡게 한다. 이는 세종의 말년에 유례 없이 이뤄진 일로서 이는 태종으로부터 이어진 관료집단 불신의 가풍(家風)이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세조의 왕재(王才)를 논하는 이들은 이때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가 많은 국정 업무에 참여하여 업적을 쌓았다는 것을 부각시키고자 하지만, 사실 소헌왕후 (세종의 정궁(正宮))의 소생들은 한두명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그 정도 쯤은 되는 업적을 쌓았던 것이다.


다만 세조가 주목 받는 이유는 그가 세종대왕의 브레인 집단이던 집현전 출입담당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을 찾아 보면 태종때부터의 숙원사업이던 국방강화의 최우선 과제인 화포(火砲)의 개량 사업에 금성대군과 임영대군이 총책임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그 실적에 대해 세종께서 크게 치하하며 평가한 육성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문종의 세자 시절 업적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문종이 워낙에 세종이 이양한 국정 전반에 관여하였기 때문이지 수양대군보다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논외로 하더라도 신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대가 아무리 성군 (聖君)이라 불리는 절대적 카리스마의 군주라 하더라도 국가기강을 문란케 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세종 말년에는 절대적으로 국정에 관여할 수 없었던 내관이 화약제조담당업무의 총책임자가 되기도하고, 문종은 한 술 더 떠서 내관의 처우를 대폭 개선한다.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시절이라 평가받 는 세종조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대립이 없었을 뿐이고, 내부적으로는 왕실과 관료집단간의 불신의 골이 그만큼 깊어진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진 사대부(김종서와 황보 인)의 경우는 세종시대에 순전히 자기 능력만(과거에 합격한 것은 아마 태종시대일 것으로 생각된다. 김종서의 측근인 이징옥이 태종조에 급제하기 때문이다.)으로 입신에 성공한 부류로서 세종-문종-단종-세조-예조-성종조를 풍미한 훈구파와는 그 뿌리가 다르던 인물들로서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족벌이나 문벌보다는 군왕에 대한 1:1의 충성심과 성리학의 철학으로 무장한 부류였다.


때문에 왕족의 국정개입이나, 내관의 발호같은 '상식이하'의 처우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왜 이들이 어떤 식으로건 제거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명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육신과 생육신의 이름들이다.


이들은 세종시절 집현전에서 수양대군과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지냈던 사이다. 이들이 수양대군을 왕재로서 평가하지 않는데, 그 누가 그를 왕재라고 감히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반면 이들 집현전 학사들의 마음이 세자(문종)에게 향하고 있었음은 세종실록 곳곳에서 나타난다. 세자의 시가 적힌 종이를 얻기 위해 사대부 체면 다 버리고 몸을 날리기까지 했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뭐가 어찌 됐건 가장 중요한 것은 세종의 마음이 누구에게 가 있었느냐는 점이다. 세종대왕은 누구나 다 알다싶이 조선의 기틀을 확립하기 위해 거의 모든 분야의 국정에서 대대적인 개혁과 창조에 가까운 혁신을 이룩해낸 인물이다.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그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
기 자신의 국정운영철학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 세자(문종)는 세종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합격 정도가 아닌 자신의 또다는 버전업된 인격이었다. 세자책봉 불과 몇 개월만에 국왕이 된 세종은 세자의 지위에서 섭정을 담당하는 '수습'기간이 부족했던 것을 뼈저리게 안타까워했고, 문종이 걸음마를 할 수 있을 무렵부터 각 분야별로 조선 최고의 학자들로 구성된 '드림팀'으로 하여금 세자의 훈육을 담당하게 했다.

심지어 권위 있는 학자가 없는 분야 같은 경우 스스로 세자의 교육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떡잎을 아예 만들어 버렸다. 어린 세자는 이 같은 부왕의 처절한 학습을 정말 놀랍도록 잘 받아 들여 신료들은 물론 중국의 사신들조차 10살을 갓 넘긴 세자를 접견하고서 '하늘이 조선에 내린 홍복'이라 극찬할 정도였다. 세종대왕의 초인적인 왕업을 계승할 인물로서 세자와 수양대군이 비교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 수양대군의 경우 스스로도 '14세때부터 기방출입을 했다.'고 스스로 밝혔던 것처럼 잡기(?)에 능했다. 사냥 실력도 상당했던 것 같고, 특히 활솜씨를 자랑했다.(이는 세자와의 왕위계승권 분쟁에 대비해 태조 이성계의 카리스마를 계승하려 했던 제스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몸이 세자에 비해 무척 건장했다고 하며, 후일 등극해서 벌인 일련의 불사(佛事)에서 보듯이 불심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학문의 경우에서는 세자에 비할 바는 못되었지만, 어렸을때부터 집현전에 출입하며 신숙주, 성삼문등과 함께 정인지 밑에서 수학했다. 그 정도면 어디 가서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다.



여기까지 쓰면 누군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바로 양녕대군이다.


이런저런 낭설이 많이 있지만 양녕대군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은 결정적으로 태종의 눈밖에 났기 때문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양녕대군을 매우 심한 권력혐오증 환자로 그리고 있지만, 후일 보여준 그의 면모로 봤을 때, 그는 권력혐오증 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빠른 상황판단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면에서 부왕인 태종과 닮아 있다. 그런데 문제는 태종의 의향이다. 태종은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한 세자(양녕) 보다는 자신이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조선을 모든 분야에서 문명대국으로 성장시킬 왕재를 원했고, 그에 부합한 인물이 충녕대군(세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양녕대군이 그것을 눈치 챘을 때, 부왕의 숙청 스타일이 떠올랐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 발호하면, 그는 형과 동생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냉혹했다. 자식의 경우가 예외 일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은 양녕이 세종의 치세에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거든 지체 말고 죽여 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적통이 계승해서 왕 밑에 동생이 줄줄이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세자까지 했던 왕의 친형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은 왕권에 심각한 도전요소가 된다. 부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 왕위를 넘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고, 목숨은 부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절대로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연기를 할 필요가 있다. 양년대군은 파락호의 길을 선택하므로서 광인(狂人)이므로 왕이 될 수 없다고 어필했고, 효령대군은 동방유학의 나라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스님처럼 전국 심산유곡의 사찰만을 배회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만일 그 둘중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세력을 모으는 기미를 보였다면, 지체 없이 태종의 손에 살해 되었을
것이다. 수양대군도 세종 말년에 세자(문종)의 병약함을 보면서 양녕대군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말년의 세종은 종친을 중용하는등 왕실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음 국왕이 문종이라는 전제에서 벌린 일이다. 세종이 덕이 중후한 인군(仁君)으로 아름다운 이미지를 후세에 남기고 있지만, 그도 어디까지나 태종의 아들이고 권력을 어찌 유지해야 하는가, 그리고 자신의 사후 이후의 권력구도를 어찌 가져가야 하는지를 그 명민한 두뇌로 잘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붕어(崩御)직전 가장 강직한 왕당파인 황보인과 김종서를 의정부에 배치하고 행정권은 황보인에게, 군권은 김종서에게 장악시킨 것이다. 심지어 문종의 단명을 예견하고서 세손(단종)의 치세까지를 염두에 둔 고명을 남긴다.


세종은 절대 수양대군이 보위를 이어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태종 - 양녕대군 - 수양대군은 어디까지나 난세(亂世)의 인물로 세종이 이룩해 놓은 태평성대의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웅은 난세에 필요하지, 태평성대에는 사회불안세력일 뿐이다.


어쩌면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는 수양대군측의 주장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세종대왕도 태종이 양녕대군을 자신을 위해 죽이려 했던 것처럼 수양대군이 발호할 기미를 보이면, 군권을 장악한 '충성의 화신' 김종서로 하여금 그를 죽이라고 밀명을 남겼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수양대군도 그쯤은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것을 명민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4세에 기방은 공연히 간 것이 아니다.



2. 수양대군은 문종조와 단종 즉위초에 왕위에 뜻이 없었나?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다. 왕자란 무엇인가? 그것도 정궁(적실이라는 말은 여염의 용어로 왕실에 오면 정궁(正宮)이라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소생의 왕자란 후일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다. 그 호칭에서부터 즉위에의 욕망을 내포하는 신분인 것이다.


그런데 태어나 보니 위로 형이 있는데, 부왕의 총애가 대단하다면, 즉위의 꿈을 단념하고 권력에 대한 불안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부단히 홍보하며 일생을 살아야 하는 기구한 신세가 되어 버린다.


수양대군은 세조 제위시가 아닌 태종 제위시에 태어났다. 형인 문종과는 3살 터울로 사물을 분간하기 시작했을때는 이미 형인 문종이 세자의 자리에 책봉되어 있었다. 철나기 전부터 처세를 생각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성장기를 내내 형의 그늘 밑에서 지내야 했다.


형과 아우가 비교가 되는 상황조차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상술한 바와 같이 형인 문종은 불과 7살의 나이에 세자책봉을 받고서 무려 29년을 세자로 생활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때문에 수양대군이 권력욕을 어설프게 가졌을 때쯤에는 그 꿈을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세종 말년에 이르면, 부왕과 세자가 동시에 신병을 앓는 일이 아주 흔했다. 이때쯤의 국정은 거의 세종과 세자(문종)중에서 약간이라도 덜 아픈 사람이 맡았다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다. 누가 봐도 부왕이나 세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 부왕이 조만간 붕어하고, 세자가 후사 없이 세상을 버린다면, 그 다음의 보위는 당연하게 후보 순위 1번인 수양대군에게 돌아온다.


그것을 알아차린 수양대군은 세종의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석보상절도 편찬에 관여하고, 규표를 바로잡기 위해 삼각산 보현봉에도 몇 번 씩 오른 것이다. 늙고 병든 국왕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자, 신료들은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때 '너희들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잘 보아두라.'는 시위로 태조의 카리스마를 등에 엎기 위해 활솜씨를 자랑하고 다니고 건장한 체구를 과시하며, 자신의 강건한 육체를 드러내기 위해 사냥만 나갔다 하면, 왕자 체면에 팔뚝을 드러내길 즐겼던 것이다.


아마 그런 수양대군을 보며, 다른 경쟁자 안평대군은 냉소를 지으며 난을 치고 시문을 읊조렸을 것이다. 부왕이라면 차라리 동(動)적인 수양대군보다는 정(靜)적이고 문예에 능해 문예 진흥의 가능성이 매우 큰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그런 두 사람에게 정말 안타깝게도 세종 23년에 원손(단종)이 태어난다. 그리고 5년 뒤 5살이 되자마자 세종은 그를 세손으로 책봉해, 자신의 후계구도가 확보부동하게 세자에게 있으며, 여의치 않을 경우 세손이 그 보위를 이어갈 것이라는 장기 구상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집에서 난이나 치고 시인묵객이나 상대한 안평대군은 왕위를 노린다는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거기서 한발만 더 나가서 풍류객이 되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냥다니며 곳곳에서 자신의 왕재를 드러낸 수양대군은 그게 힘들다. 양녕대군처럼 미친척을 할 수도 없고, 안평대군처럼 시인묵객을 만날 수도 없다. 그때 사냥은 요즘처럼 몇몇이 고즈넉히 4WD 자동차에 총이나 하나씩 들고 떠나는 게 아니다.


몰이꾼에 같이 사냥할 장사패등등 수많은 무리를 이끌고 행하는, 약간만 변형하면 군사훈련의 의미까지도 가지게 되는 행위다. 실제로 중국 고대의 예법에는 수렵의라 하여 왕이 사냥하는 의식이 있다. 말이 사냥
이지 그것이 군사훈련과 동원상태를 점검하는 의식인 것을 동방유학의 나라 신료가 모를 리가 없다. 어설프게 나섰다가 제거대상 1호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종으로서도 세자가 후사없이 죽는다면야 어쩔수 없이 수양대군을 선택해 볼 여지가 있었지만, 원손이 태어났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강보에 쌓인 원손을 안고 다니며 정사를 펴고 기회 있을때마다 신료들에게 원손 보기를 자신을 보듯 하라고 말하고 다닌 것은 할아버지의 손주사랑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후계구도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대내외에 과시한 정치적 제스쳐였던 것이다.


세자의 후사가 없었을 때는 수양대군의 발호를 대책 없이 지켜봐야 했겠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아마 이때쯤 김종서에게 유사시 수양대군 제거의 밀명을 내렸다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수양대군이 살 길은 무엇인가. 목숨을 걸고 형인 세자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왕과 비' 초반에 수양대군이 등장만 하면 나왔던 대사인 '형님이신 문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주상전하를 보위한다.'는 말은 거의 입버릇이 되었을 것이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수양대군의 비극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간다. 원손이 태어난 후로도 세종대왕께서 생각보다 장수하신 것이다. 세종이 조금 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문종이 세자시절의 건강상태에서 국왕이 되어 신체적으로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게 되었다면, 문종은 1년 이내에 붕어할 것이고, 그리되면 아무리 세자이어도 10살도 안되는 나이로 국왕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수양대군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 지지만, 단종은 그런 수양대군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고 알 것 아는 나이인 12살(앞서 수양대군이 14살에 기방에 출입한 것을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12살 정도면 나름대로 성숙한 청소년시기가 된다.)에 당당히 즉위한다.


단종의 모후인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고 바로 다음날 사망하긴 하지만, 그때까지의 단종의 옥체는 수양대군파에서 보기엔 후일 장성하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될 정도로 잔병치레 없이 강건했다. 누가 봐도 단종 즉위 초에 그는 장수(長壽)가 예견되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의 왕으로서의 자질 역시 10대 초반의 몇몇 정사처리를 두고 신료들 사이에서 '세종대왕의 부활이
다.'라고 이야기 될 만큼 빼어난 모습을 보였던 모양이다. 그 시기에서 만큼은 세종대왕은 지하에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하며 웃고 있었을 것이다.




3. 계유정난의 명분은 정당한가.


새로 시작된 단종의 치세. 역대 어느 왕의 치세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새 임금이 즉위하면, 정권에 위협요소로 작용할 세력을 숙청한다.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정종과 약간이나마 친분이 있던 모든 관원을 모조리 거세했고, 문종은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다.


세종 조에만 예외라고 생각되지만, 세종조에는 태종이 알아서 다 해줬다. 세조 즉위초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니 말하기도 민망하고, 그의 아들 예종은 남이의 옥사를 일으켰으며, 성종 마저도 세조와 예종의 총애를 받은 친적이며, 세조때 이시애의난을 진압한 공신이며 종친인 귀성군 준을 거세한다. 당연히 숙창당한 남이와 귀성군 준은 군공이 매우 높으며 실력과 학문을 겸비한 인제로 세조가 무척이나 총애한 인물이다. 예종이나 성종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꺼림직 하다.


단종 즉위초, 왕권에 가장 강력한 위협요소는 바로 수양대군이었다.


왕당파 김종서로서는 그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단종의 장성시까지 수양대군을 죽이지 않고 무력화 시키는 선에서 세종조의 무혈통치를 완성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흔히 수양대군파가 말하는 황표정치로 인한 훈구대신의 국정독단은 김종서와 황보인이 훈구파가 아니었다는 전술의 내용으로 설득력을 잃고, 황표정치는 주로 인사문제에서만 사용된 것인데, 즉위초 단종이 관원의 이름을 모두 알지 못해 이뤄진 것은 사실이나 단종이 재빨리 관원의 이름을 숙지한 이루 폐지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훈구파는 세조 즉위시 그를 지지한 세력이다. 권남은 그 이름도 유명한 권근의 손자이며, 한명회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명나라에서 받아온 문열공 한상질의 증손이다. 신숙주는 고령 신씨로서 조선초 드러내 놓고 집안자랑을 해도 무방한 명문가의 후예이다. 수양대군의 측근중의 측근들이 오히려 훈구였던 것이다.


훈구파는 오히려 세종조에 순전히 자신의 능력과 왕에 대한 개인적인 친분과 충성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들의 세력에 눌려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수양대군 즉위 이후 이뤄진 숙청에서 거세당한 훈구파는 한 명도 없는 반면, 집현전을 위시한 신진사대부가 남김 없이 숙청 당한 사실은 훈구대신의 국정 전단이라는 수양대군파의 명분의 설득력을 떨어트리기에 충분하다. 심지어 신진사대부가 육성되고 성장하던 집현전을 '사육신의 난' 이라는 일련의 숙청이벤트 이후 그 뿌리를 뽑아 버린 것만 봐도 그같은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4. 단종이 너무 어려 국정을 맡길수 없었다?


지금의 센스로 생각해 보자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질수도 있지만, 상술한 조선시대청소년의 성숙도(?)를 고려해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금 나이로 코 질질 흘리고 다녀야 하는 어린 아이가 당당히 세자와 세손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시대가 바로 그 시대였다.


약간의 억지일수도 있지만, 어린 단종의 눈에 이제 막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을때부터 세종대왕이 강보에
싸 안고 다니며 이런저런 국정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버지인 문종 또한 세자 생활만 29년을 한 사람이다. 아무리 아이가 어려도 집안의 분위기를 가지고 자랄 수밖에 없다.


단종실록을 마구 난도질한 세조시대의 사관들 조차도 단종의 당당한 왕재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후견인이며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인 김종서 황보인등의 주청에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당한 측면이 있을때는 불윤(不允)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며, '내가 충분히 알아들었소' 라며 버티기까지 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단종(12세 즉위)과 비슷한 연배에 즉위한 자산군 헐(성종 : 13세 즉위)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왕위를 물렸어야 한다. 수양대군파의 논리로 본다면 왕재로서 가장 강력한 왕권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귀성군 준이다.


그러나 귀성군은 거세당해 유배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마쳤고, 성종은 세조의 훈구대신들이 만들어 놓은 '훈구대신의 국정전단'의 체제에서 훌륭히 성장해서 세종대왕 이후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 받는 군주가 되었다. 참 묘한 역사의 순환이다.


강한 군주 다음에 단명한 군주가 나오고 그 다음에 어린 왕이 등극하는데도 결과가 이렇게 다르다.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 금성대군이 혜빈 양씨와 내통해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는 어
쩌면 사실이었을수도 있다.


허나 세조와 그 자신의 공신들이 이후에 벌린 일을 보면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이 얼마나 속빈 강정같은 것이었는지를 스스로 드러낸다. 실제로 세조와 그 공신들은 세조 치세 내내 올미부(나중에 후금(:청나라) 를 새운 누르하지가 바로 이 부족 출신이다.)을 토벌한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업적 없이 자신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말며, 오히려 성종시대에는 정도전이 야심차게 시작한 경국대전의 편찬을 무원칙하게 훈구대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쳐 버림으로서 조선 사회를 매우 경직된 귀족적 사대부들과 그들의 좌장인 국왕이 지배하는, 사실 그들이 그토록 비판해 마지 않던 고려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사회로 퇴락 시키고 만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이 글의 시발이 된 '왕과 비'라는 드라마가 너무 세조 측의 입장에서 은근히 그를 정당화 하려는 시도를 어설프게 하다가 실패한 것에 분개(?)하여 이런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저 평범한 왕들의 뒤를 이은 국왕이라면 세조도 무리 없이 한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국왕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전작인 용의 눈물이 철저하게 쿠데타의 생리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 반면, '왕과 비'는 전작의 이러한 인기 요인을 면밀히 분석하지 못한체 중심 없는 작품으로 남게 되어버린 것이 아쉬운 것이다.


오히려 매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혹은 그러려고 애처로울 정도로 노력한) 세조와 희대의 풍운아이며 마키아벨리즘(혹은 관중(管仲)의 신봉자 한명회, 개국공신의 후예로 세종조에 고려사의 개수로 세종으로부터 고신을 박탈 당해 풍비박산이 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새우려 했던 권남, 최고의 명문가 출신으로 현실적 정치이념을 가진 신숙주등 수세에 몰린 훈구파와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신흥사대부 세력의 갈등으로 빚어진 권력쟁탈의 양상을 그렸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재미와 농도를 갖춘 수준 높은 역사드라마가 되었을 것이라는게 개인적 생각이다.


어설피 전작의 화두였던 '왕권주의 (대통령중심제)와 신권주의(내각책임제)'의 대립을 이어가는 것은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진다. 적어도 지금까지 전개된 '왕과 비'의 갈등 양상은 훈구파와 신흥사대부의 갈등일 뿐이니까 말이다. 아무튼 세조의 왕위찬탈을 '구국의 결단' 인양 묘사하는 것은 역겹기 그지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구국의 결단으로 보위에 힘으로 올라선 자는 동서고금의 역사상 아무도 없다. 차라리 한 인간의 처철한 권력을 향한 욕구를 농도 짖게 표현하는 편이 인기 몰이를 위해서도 바람직 할 것이다.



...써놓고 나니 이걸 왜 썼나 싶네


1999. 1. 24.

유 혁 진




.이 분 글 정말 재미있게 잘 쓰시네..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박식하시고...

반응형
반응형

90년대 용의 눈물에서 왕과 비,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으로 절정을 이루었던 대하 사극 시대는 무인시대에서 시청률이 크게 하락하면서 점차 쇠락기로 접어들었고, 그 이후로는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이후  불멸의 이순신과 대왕세종이라는 사극이 그나마 대하 사극의 체면의 살려주었지만 그 전만큼의 명성을 드날리지 못한 가운데, 최근에는 퓨전 사극들의 활약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저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공주의 남자'라는 사극인데요, 세종대왕 사후 문종대부터 피 비린내 나는 살육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수양대군 전성시대인 세조대로 넘어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네요.

 


왼쪽부터 김종서, 김승유, 세령, 수양대군(세조)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충신 김종서와 사육신을 죽인 그 이야기야 너무나도 유명해서 익히 다 아시는 스토리일 것이고, 대부분의 분들은 동일인물이 그 전에 나온 드라마에서 어떤 관점으로 그려졌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일단 최근작인 대왕세종부터 살펴보면


모든 불행의 씨앗이자, 비극의 원흉인 수양대군


제목에는 안나오지만 파천무에서 세조 역을 맡으신 유동근씨


(이 분은 워낙 카리스마가 후덜덜하게 있으셔서 항상 강한 역할 만을 맡으시는 것 같다.
 - 파천무: 수양대군(세조), 장녹수: 연산군, 용의 눈물: 태종 이방원, 명성황후: 흥선대원군)

1994년작 한명회에서의 세조(수양대군) - 서인석씨





1998년작 왕과 비에서의 세조(수양대군) - 임동진씨

 

왕과 비 VS 왕과 나에서의 대조적인 수양대군 이미지 - 김병세씨

 


 

대왕세종에서의 너무 미화된 멋있는 수양대군


 

2011년작 공주의 남자에서 수양대군 - 김영철씨

 


 

한명회와 왕과 비에서 둘 다 수양대군이 미화된 바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자기 권력을 위해서 친족들과 충신들을 몰살하면서도 너무 고뇌하는 이미지를 그렸다고나 할까요?

이번 새로운 사극인 공주의 왕자에서는 그 부분이 좀 덜할 것 같아요.




그 다음 수양대군 비인 정희왕후 윤씨.

왕과 비에서 한혜숙씨 VS 왕과 나에서의 양미경씨



공주의 남자에서의 김서라씨



- 실제로 남편에게 갑옷을 입히고 채비를 시킨 철의 여인인데,
왕과 비에서는 며느리 인수대비(수빈 한씨)를 두려워하는 부드러운 분으로 나왔죠..

이것도 일종의 역사 왜곡이겠죠?
왕과 나에서는 부드럽고 마음씨 좋은 할머니 역할로...

공주의 남자에서는 큰 역할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수양대군의 장자방이라고 불리는 조선 최고의 모략가 한명회

한명회에서 한명회로 나오신 이덕화씨 - 전형적인 저 표정 아직도 기억납니다.

왕과 비에서의 한명회 역할을 맡으셨던 최종원씨도.. 전형적인 표정입니다.

왕과 비에 비해 너무 순하고 문인 스타일이신 왕과 나의 한명회

상당히 기대가 되는 공주의 남자 한명회 이희도씨






한명회가 행동가라면, 지략가로서 세조 시대의 치하를 빛나게 한, 배신의 아이콘 신숙주역


왕과 비의 신숙주(범옹이라 불림) 이정길씨

대왕세종 때만 해도 젊은 인재였던 신숙주

 

공주의 남자에서는 시작하자 마자 배신을 때린 신숙주



이 들의 철퇴를 맞고 안타깝게 돌아가신 김종서 역할

한명회의 김종서 임동진씨


 (이 분이 그 다음 사극에서 김종서를 죽이는 세조 역할을 하니.. 참 재미있죠?)



무인 김종서의 이미지를 잘 살려준 왕과 비의 김종서 조경환씨

문인 기질이 돋보였던 김종서를 잘 보여주고 계신 역대 최고령의 김종서 역할 이순재 할아버님 :)

이순재씨는 20여년 전의 작품인 파천무에서도 김종서 역할을 맡으셨다고 하네요.
이 작품은 사진을 못구했습니다.



왕과 비의 문종

대왕세종의 문종

공주의 남자의 문종 정동환씨



대왕세종에서는 세종대왕 치세기를 다루다 보니 전체적으로 인물들이 젊군요.

가장 어린 단종 한명회에서부터 단종역할을 맡아오신 정태우씨

 

 

 

 

 



왕과 비에서는 실제 나이와 비슷할 때이고, 연기 경력도 제법 쌓여서인지 슬픈 눈빛의 단종을 보다 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씨 역을 맡은 김민정씨의 미모도 돋보이네요.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공주의 왕자에서의 단종





공주의 왕자는 퓨전 사극이다 보니 그 전의 작품인 조선왕조 오백년의 풍란, 한명회, 왕과 비만큼의 깊이는 보여주지 못할 것 같지만 조연 배우들이 워낙에 후덜덜한 연기력의 소유자들이다 보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건 사실입니다. 어떤 배우가 가장 그 역할에 잘 어울렸는지 또 한창 토론의 장도 열릴 것 같구요.


물론 주요 스토리는 김승유와 세령의 이루지 못할 사랑이야기에 촛점이 맞춰지겠지만 이렇게 많은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니 예전 작품과 비교하면서, 수양대군과 김종서 일파를 어떻게 그려 나갈지 생각해 가면서 보는 것도 작품 보는 쏠쏠한 재미를 더해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중 어떤 작품에서의 누가 가장 마음이 가시나요?





2011/07/30 - 공주의 남자로 보는 세조시대 역사 보기
2008/01/16 - 왕과 나 VS 왕과 비(妃) 비교분석: 역사에로시트콤인가? 새로운 해석인가?
2008/01/27 - 대왕세종 VS 용의 눈물, 실록과의 비교분석
2008/02/27 -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조선왕조 역사/계보 훑어보기
2008/03/11 - 영도교: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이별을 기리는 다리
2008/03/14 - 조선시대 사극, 그 단골손님들 꼽아보기

반응형
반응형

폐비 윤씨 VS 인수대비는 정말로 라이벌이었을까?

폐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아니라 성종에게 미움받아서 쫓겨났다!??

인수대비와 폐비 윤씨


연산군을 다룬 그 동안의 많은 작품들에서처럼 인수대비(전인화)는 이번에도 폐비 윤씨와 가장 대립하는 인물로서 폐비를 궁 밖으로 내치는 장본인이며, 흔히 폐비 혹은 연산군과 역사의 라이벌로 비유되기도 한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폐비 윤씨의 강한 성품에 불만을 품었고, 폐비 윤씨를 끊임없이 압박하며 미워했다. 인수대비는 이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그녀를 사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인수대비가 임금 성종과 왕실 최고 어른이자 막후 실력자인 시어머니 정희대비(양미경)를 제치고 며느리와 극단적인 대립각을 세우며 파국을 주도했고, 결국은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폐비를 사사시켰다는 것' 모두를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고, 드라마는 패자의 편이라 양쪽 모두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기에 사건과 기록의 이면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폐비 윤씨를 죽음으로 내몬 역사 속 주인공은 과연 인수대비였을까?

일개 후궁에서 일국의 국모로 승천하다

폐비 윤씨(구혜선) 중전 책봉식


조선 초기 친여식이나 집안 여식을 후궁으로 들이는 것은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로 간주되었다. 때문에 유력한 친지나 집안 권세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입궁한 간택 후궁들은 명문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성종의 간택 후궁으로 가장 먼저 입궁한 폐비 윤씨 역시 고려 시대때부터 꾸준히 벼슬을 해온 양반 가문 출신이다. 폐비 윤씨의 부친 윤기견은 집현전에 출입할 만큼 경서와 문학에 밝았고 판봉상시사의 벼슬까지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윤씨의 어머니 신씨는 윤기견의 둘째 부인으로 태종을 도운 공신 '신숙주'를 배출한 고령신씨 가문의 여식이다. 폐비윤씨가 입궁 당시 내명부 종2품 직위에 해당하는 숙의(淑儀)의 첩지를 받은 것은 '상등급(上等級) 사대부집안' 출신으로 대접받았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

파평윤씨 명문가 출신의 정현왕후 윤씨는 같은 해 6월에 입궐했는데 그때 나이 12살로 통상적인 간택후궁의 나이보다도 더 어렸다. 그녀의 부친 윤호는 당시의 권력을 움켜쥔 실세인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양미경)의 조카뻘이 됐다. 두 숙의 윤씨가 입궐하던 당시 성종에겐 이들보다 앞서 승은을 입은 후궁, 엄귀인과 정소용이 있었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한명회에 의해 간택 후궁으로 등장한다.)


숙의 윤씨(폐비)는 아들을 낳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성종의 후궁인 소용 정씨와 엄씨였다. 소용 정씨는 초계정씨로 역시 명문가의 여식이고, 소용 엄씨는 영월 엄씨로 소용 정씨와는 소꿉친구이며 중인 집안의 여식이었다. 미색으로 따진다면 정소용쪽이 훨씬 더 미려했으며 소용 엄씨는 그저 그런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고 한다. (그럼 집안도 정소용이 좋고 미색도 뛰어난데 왜 엄귀인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는겨?)

그로부터 얼마 후 공혜왕후가 승하하며 교태전 자리가 비자 유일하게 회임 중에 있던 폐비 윤씨가 중전에 오른다. 후궁에서 세자빈이나 중전을 삼을 때 먼저 자식의 유무, 나이의 고하 등을 따져 간택한다는 세종조 관례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때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내린 교서에는 폐비 윤씨의 후덕함과 겸손함이 왕비의 자질에 적합하다고 적었지만 내심 자신의 가문 출신인 정현왕후 윤씨가 중전자리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뒷 이야기는 추후 조사 예정)


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폐비 윤씨는 중전에 오른지 석달만에 원자(연산군)를 낳으며 권력이동의 축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왕의 생모, 대비가 될 사람이라는 것만큼 막강한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일부 사서에선 상등급 사대부집안 출신이지만 자신을 뒷받침해줄 조정 세력이 미미했던 폐비 윤씨가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 과도한 애정과 집착을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폐비 윤씨는 왕비가 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성종 8년 4월 덕종(성종의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숙의권씨 처소에서 왕의 후궁 엄씨와 정씨가 중궁과 왕자를 모해하려 한다는 투서가 발견되면서부터 몰락의 길로 걷기 시작한다. 당시 사건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미진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때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측은 두 후궁을 적극 감싸는 한편 원자를 중전에게서 빼앗아 궁밖으로 보내 버린다. 성종은 중전을 폐비시켜 빈으로 강등시킨다는 교지를 내리지만 대신들은 벌떼같이 달려들어 원자를 낳은 왕비를 폐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라며 반대해 철회된다. 이는 원자를 낳은 지 4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므로, 폐비 윤씨가 권력을 탐해 일어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폐비 윤씨가 대군을 낳은 2년 후 일단락됐던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지며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결국 성종 10년 6월 윤씨는 중전에서 폐출돼 사가로 쫓겨났다.

왕과 나 폐비윤씨(구혜선) 폐출 장면

왕실의 윗전이었던 정희왕후는 원자가 사가에서 폐비와 만나지 못하도록 폐비가 폐출되는 날, 피접을 위해 궁 밖에 나가 있던 원자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한편 아직 100일도 채 되지않아 어미와 유모의 손길이 필요했던 둘째 대군을 손도 쓰지 못하게 해 5일 뒤 사망에 이른다. 성종은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에 숙의 권씨를 새로운 후궁으로 간택하여 입궁시킨다. (정희왕후는 '왕과 나'나 '왕과 비'에서처럼 인정많고 자애로운 시할머니가 아니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인수대비가 폐비 축출에 관여되지 않았다고 볼 순 없지만 당시 권력의 실세인 정희왕후나 성종의 뜻이 컷을 가능성이 많다. 기록을 살펴보아도 인수대비가 여러 사안에 의견을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성정을 간섭한 것은 정희왕후 승하 이후다. 또 왕비의 투기든 후궁들의 이간질 때문이든 왕과 폐비 윤씨 간의 언쟁이 잦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성종-폐비 부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폐비 축출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 역시 실록에 정씨의 오라비를 속량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그 출신이 천민이기에 중전자리를 노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얘기다. 이들이 폐비 윤씨를 향한 성종의 총애를 질투할 순 있지만 중전을 탐탁치않게 여긴 삼대비의 총애를 기반으로 자의든 타의든 중전폐출의 선봉에 섰을 것으로 보여진다.


성종은 왜 폐비윤씨를 버렸나

성종은 조선조를 통틀어 부인이 가장 많았던 왕 가운데 한명이다. 성종은 공혜왕후 한씨와 폐비윤씨 정현왕후 등 계비 2명, 그리고 9명의 후궁 등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신하들중엔 왕이 후궁을 너무 많이 두는 것에 대한 우려의 상소를 올린 사람도 있을 만큼 여자를 좋아했던 정력가이다. (어우동과의 로맨스에서 이생원이 진짜 성종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성종이 그만큼 여자를 좋아했기에 그런 얘기도 떠도는 것이겠지.) 성종의 이런 성향들이 실제 폐비 윤씨의 투기로 이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가정의 분란을 끊이지 않게 한 원인이 됐고 이는 부부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폐비의 사사가 성종의 의지였는지 인수대비의 뜻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기에 폐비 윤씨를 다룬 사극마다 해석이 분분하다. 이덕화가 주인공인 드라마 한명회(1994년)에서는 인수대비(김영란)도 폐비(장서희)를 싫어했지만 무엇보다 성종(박진성)이 폐비에 대해서 냉정하게 돌아선 것으로 표현했고, 박지영, 유동근 주연의 장녹수(1995년)에서는 성종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지만 인수대비(반효정)의 의견이 강했던 것으로 표현했다.

왕과 비(1998년)에서는 성종(이진우)이 굉장히 미화되어 성종은 폐비, 사사 둘 다 원치 않았으나 인수대비(채시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 폐비를 사사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최근작 왕과 나(2007년)에서도 성종(고주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인수대비의 명을 따른 것으로 나온다.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는 성종은 중전을 폐출시키던 당시 폐비에 대한 증오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폐비가 끝까지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던 방술책 문제에 대해 배후 조사를 청한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중전이 후궁 측을 모함한 것으로 몰아간 비상과 투서에 대해서는 중궁전의 궁녀들을 고문한 끝에 원하는 답을 들은 후 참수했다.

또 성종은 중전의 폐위문제에 대해 대간과 성균관 유생 65명이 죄도 명확하지 않은 중전을 폐비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상소를 올렸음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폐출돼 사가로 나간 폐비에게 일절 도움을 허락하지 않는 냉정함을 보였다. 심지어 폐비 윤씨가 폐출되기도 전 후궁간택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며 윤씨를 사사한 다음날에는 그의 일가 모두를 매우 혹독한 지역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가족과 떨어져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폐비는 기초 식량조차 부족했고 백성들은 가엾다고 그녀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성종은 이조차 금지시키고 벌을 내려 폐비를 내외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다고 하니 폐비 사사에 성종의 뜻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폐비 사사 후에도 성종은 여전히 폐비를 용서하지 못하는 인상을 보여주었는데, <성종실록> 성종 20년, 5월 16일자에 이 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옛날 일을 생각하면 한밤중까지 두려워하며 홀로 앉아 잠못 이룬 날이 그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비록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혼령에게 어찌 원통함이 있겠으며, 내가 어찌 불쌍한 생각이 들겠는가?"

이런 마당에 폐비의 불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오직 인수대비였다는 것은 여자에게 뒤집어 씌우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관들과 이를 무분별하게 영상화한 작품들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성종이 그토록 총애했던 폐비 윤씨를 미워하게 된 연유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용안에 상처를 냈다는 것은 성종 스스로 발표했던 교서에도 없던 내용이며 투기를 심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실록이 분명한 설명을 해주지 못 하고 있다. 비상사건 역시 명확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종은 처음에 그녀를 사랑했으나, 나중에는 열렬히 미워했다는 슬픈 진실이다.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서 필요한 말은 아닐까?



관련글
연산군 때문에 한꺼번에 폐출당한 고모와 조카: 폐비 신씨, 단경왕후 이야기
폐비 윤씨에 대한 단상(부제: 왕과 나의 권력욕 없는 죽음에 대한 불만! )
[펌] 무엇이 인수대비를 20대에 권력의 핵심으로 만들었는가
[드라마의 이해 - 왕과나] '안방의 제왕' 인수대비 - 이덕일
폐비 윤씨 이야기 - 그녀는 왜 폐비가 되었나?
비운의 왕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
연산군 이야기 (성종, 폐비 윤씨 이야기 추가)
반응형
반응형

출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이야기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이 글을 얼마 전에 발견해서 비공개하고 있다가 지금은 승복이님의 블로그가 아예 사라져 버린 관계로 공개처리했습니다.


이제는 원로 축에 끼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동시에 조선 시대 사극을 들고 오고, 김종학이 판타지 사극을, 정하연이 이방자 여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대극을, KBS에서는 <대조영> 의 후속작으로 <세종대왕> 을 제작할 준비를 마치면서 2007년 하반기와 2008년 상반기는 때 아닌 '사극' 열풍이 불어 닥칠 전망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방송됐던 사극들은 어떠한 인물들을 주로 다뤘을까. 재미로 알아보는 대한민국 사극의 단골 손님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후보 1. 연산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 사극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흥행카드' 라고 한다면 단연 연산군이다.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고 고아와 마찬가지로 자라나며 삐뚤어지기 시작한 연산군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 주위를 둘러 싼 권력 암투와 2번에 걸친 사화, 요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폐륜 등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담아내며 사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갖췄다.  

1962년 영화 <연산군> 에서 신영균이 열연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 이 후로, TV판 '연산군' 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971년 TBC <사모곡> 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때 연산군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배우는 바로 우리에게 <사랑이 뭐길래><딸 부잣집> 등으로 친숙한 배우, 김세윤. 김세윤의 뒤를 이어서는 1985년 MBC <조선왕조 500년-설중매> 에서 임영규가 연기한 바 있고, 1987년에는 영화 <연산군> 에서 배우 이대근이, 1994년 KBS <한명회> 에서는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 이민우가 연산군을 맡아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1년 뒤인 1995년 KBS <장녹수> 에서는 유동근이, 1999년 KBS <왕과 비> 에서는 안재모가 각각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로 안방 극장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가장 최근에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는 영화배우 정진영으로 1000만 관객 돌파의 신화를 낳은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어머니를 잃고 광기 어린 영혼을 소유하게 된 연산군 역을 실감나게 연기해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는 누구일까.

시청률로만 따지고 보자면 <왕과 비> 의 안재모로 그 당시 최고 시청률이 44.3% 를 기록했을 정도. 녹록치 않은 경력을 지닌 연기파 채시라와의 연기대결은 <왕과 비> 의 사상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데 1등 공신이라 할 만하다.


후보 2. 장녹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산군' 하면 떠오르는 여자하면 당연히 장녹수다. 연하의 연산군에게 장녹수라는 존재는 아내이자, 첩이었고, 어머니였다. 연산군 시대의 개막과 함께 그를 파멸로 이끌고 결국은 자신까지 돌무더기 무덤 속으로 들어간 시대의 요부.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지금까지도 연산군과 함께 한국 사극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 '요부' 를 실감나게 그려 낸 인물은 누가 있을까. 1971년 <사모곡> 에서 김세윤과 호흡을 맞춘이는 이제 원로 배우 소리를 듣는 고은아이고, MBC <설중매> 에서는 '섹시배우' 이미숙이, 영화 <연산군> 에서는 강수연이 장녹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자타공인 최고의 장녹수는 KBS <장녹수> 의 박지영으로 유동근과의 연기 앙상블이 빛났을 뿐 아니라 장녹수가 살아 돌아온 듯 한 실감나는 연기력으로 대내외적인 찬사를 받았다.

19999년 <왕과 비> 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故 이혜련이 안재모와 호흡을 맞춰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고, 작년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배우 강성연이 '녹수' 역을 맡아 남성 중심의 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뽐내는 등 수많은 스타들이 장녹수라는 캐릭터를 거쳐갔다. 연산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본 것은 장녹수가 아니라 수근비였으나 여전히 장녹수라는 인물은 스타들이 탐을 내는, 연산군과 운명을 같이 한 '매력' 있는 '여성' 인 셈이다.


후보 3. 인수대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산군' 이 등장했으니 '인수대비' 가 없을 수 없다.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지만 '폐비 윤씨' 의 사사사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연산군과 인수대비는 조선 500년 역사 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폐륜으로 그 끝을 맺었다. 20대에 청상과부가 되어 잠저로 나온 뒤, 예종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밀어 올리고 훈구파와의 강력한 결탁으로 성종 시대를 안정을 추구했던 한 여걸의 죽음이 그토록 비참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이자 아픔이다.

우리에게 '소혜왕후' 라는 이름보다 '인수대비' 라는 이미지로 더욱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 이 캐릭터는 지금까지 수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거쳐갔다. 이제는 영원한 배우로 기억되는 황정순 선생을 비롯해 영화 <연산군> 에서는 중견배우 정혜선이, <설중매> 에서는 고두심, <장녹수> 에서는 반효정, <한명회> 에서는 김영란, <왕과 비> 에서는 채시라,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윤소정 등이 열연했다. 특이한 점은 정혜선이나 고두심, 채시라 등의 여배우들이 모두 20~3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역을 소화했다는 것.

인수대비의 파란만장한 삶을 20대부터 그려내려다 보니 비교적 젊은 배우를 기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테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으로 보자면 모두 자타공인 '연기파' 들이 이 역을 거쳐갔으니 인수대비야 말로 '연기파 제조기'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에게 지금까지도 소중한 교훈을 남기고 있는 모양이다.


후보 4. 한명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선왕조 최고의 간신이자 사육신과 대비되는 조롱의 대상이면서도 왕권이 약화되던 단종시대를 철인군상과 같은 의지로 뒤엎고 결국은 성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명신(名臣)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린 한명회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평가 되면서 그 역사적 명성을 달리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사육신 띄우기' 로 명성에 흠집을 냈던 한명회는 이제야 제 위치를 찾으며 역사적으로 받아 마땅한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이 유명한 칠삭동이를 맡은 배우들은 정진, 이덕화, 최종원 등. 특히 정진 같은 경우에는 70~80년대 문화를 향유했던 사람들에게 최고의 '한명회' 로 기억되는 인물로 지금 보아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다. 이덕화는 자타공인 가장 유명한 한명회로 회자되는 배우로서 신봉승이 쓰고 그가 타이틀롤을 맡았던 드라마 <한명회> 는 여전히 KBS 가 자랑하는 사극 중 하나로 남아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안목도 달라진다. 미래의 한명회는 우리에게 또 어떤 인물로 기억 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공과' 를 둘째치고서라도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한명회' 라는 이름이 미친 거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리라.


후보 5. 황진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왕실의 여자가 아닌 다음에야 후세에 그 이름이 남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천한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일진대 오직 단 한사람, 명월 '황진이' 는 그러한 평가를 거부한다. 양반 출신의 여성으로 태어나 기생의 길을 택한 여자.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 로 불리우는 조선 최고의 여성 문학가. 벽계수를 골탕 먹이고 지족선사를 파계시키며 세상을 발 밑에 둔 여성. 그것이 바로 기생 황진이의 정체다.

요부의 이미지와 순결한 문학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황진이는 1957년 영화 <황진이> 에서 처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대한민국 최초로 황진이를 연기한 이는 전설의 스타 도금봉. 그 이 후, 강숙희,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 등이 그 뒤를 이으며 이 매력적인 기생 아니, 시인의 일생을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담아내고 있다.

최근 영화 <황진이> 가 개봉되면서 송혜교의 '황진이' 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개인적으로 한마디 덧 붙이자면, 영화 자체의 매력과는 상관 없이 송혜교는 그 위치에서 충분히 잘 해냈다. 송혜교의 황진이가 하지원의 황진이보다 매력적이지 못했던 까닭은 하지원이 송혜교보다 월등히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황진이에 대한 작품의 접근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송혜교는 <황진이> 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 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후보6. 김개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선조와 광해군,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사랑한 여자였던 김개시는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쟁의 역사 속에서 그 요망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선조의 독살설과 인목대비에 대한 핍박, 광해의 실책에 모두 관련되어 있는 김개시는 일개 상궁의 신분으로 대북 정권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정사를 좌지우지한 요화였으니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테지만.

이 요화를 연기한 이는 <회천문> 의 원미경, <서궁> 의 이영애, <천둥소리> 의 이주화, <왕의 여자> 의 박선영 등이고 이들과 함께 광해군을 연기한 이는 이희도, 김규철, 김주승, 지성, 김개시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적 입장에 서 있던 인목대비는 권재희, 이보희, 이현경, 홍수현이 열연했다. 개인적으로 <서궁> 의 이영애와 이보희의 연기는 나름대로 재밌게 본 편이다.


후보 7. 장희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희빈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글에서 자주 했고, "역대 장희빈" 에 관한 글까지 이미 쓴 상황에서 더 할 말이 무에 있을까 싶으랴만은 해도 해도, 봐도 봐도 재밌는 것이 바로 '장희빈' 이다. 1대 김지미, 2대 남정임, 3대 윤여정, 4대 이미숙, 5대 전인화, 6대 정선경, 7대 김혜수로 이어지는 장희빈의 역사는 곧 한국 사극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장희빈> 이 만들어 질 때는 항상 '장희빈을 재평가 하겠다.' 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지만 결국은 '현모양처' 인현왕후와 '악녀' 장희빈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시청자의 이목을 끈다는 것. 아직도 장희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악녀와 요부' 라는 차원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장희빈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려 했던 김혜수의 <장희빈> 이 나중에서는 그저 '독한 여자' 로만 기억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장희빈은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이미 역사라는 차원을 넘어서 한국 사극에서 가장 '쓸 만한' 캐릭터로 자리 잡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인물이다. 여자vs여자의 싸움에, 선과 악이라는 극명한 대립을 즐겨하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굳이 거스르면서 바꿀 필요는 없다. 장희빈에 대한 재평가는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학계에서 하면 될 일이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그렇다면 이들과 호흡을 맞춘 인현왕후는 누가 있을까. 1대 도금봉을 시작으로 2대는 태현실, 3대 김민정, 4대 이혜숙, 5대 박순애, 6대 김원희, 7대는 박선영이 맡았다.


후보 8. 혜경궁 홍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선 궁궐 문학의 정수라고 일컬어 지는 <한중록> 의 지은이로 유명한'혜경궁 홍씨' 는 지금껏 정치적인 이유로 남편 사도세자를 여읜 비운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오히려 사도세자의 구원 요청을 차갑게 외면한 것은 바로 혜경궁, 그 자신이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남편에게 -그것도 정략결혼을 한 남자에게- 그녀는 사랑도, 애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버리는 대신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올인'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에도 사도세자의 씨앗인 정조를 그대로 왕위에 올린 이유는 혜경궁 홍씨의 강력한 의견 표명이 단단히 한 몫을 거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버리되 자식까지는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은 정조를 제거하려는 친정 집안의 움직임에 격렬히 반대하고 정치적 공세를 펼침으로써 마침내 '정조시대' 를 열어제쳤다.

정조 시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일에 관련해 자신의 가문인 풍산 홍씨가 풍비박산 나게 되자 그녀가 꺼내든 카드가 바로 그 유명한 <한중록> 임은 이미 유명한 사실. '한가한 날의 기록' 이라는 뜻의 <한중록> 은 끊임없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친정을 옹호함으로써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 돌파구 역할을 했다. 재밌는 것은 <한중록> 을 쓰던 혜경궁 홍씨의 나이는 이미 70 줄이었으니, 그녀야 말로 영조와 정조 시대를 관통하는 진정 노회한 정객이었던 셈이다.

이야기로 잠시 딴데로 새버렸는데 다시 돌아와서 '혜경궁 홍씨' 를 맡은 여배우는 누가 있을까? MBC <안국동 아씨> 의 김영란을 시작으로, <한중록> 의 최명길, <하늘아 하늘아> 의 하희라, <대왕의 길> 의 홍리나 등이 바로 혜경궁을 연기한 배우들이다. 


후보 9. 흥선대원군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개혁' 이라는 빛나는 이름과 '쇄국' 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동시에 쓰고 있는 인물, 흥선 대원군. 상가지구로 시작해 조선말 가장 혁신적인 개혁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의 삶은 드라마로 그려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권불십년' 이라는 말처럼 10년만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끊임없는 정치적 재개로 결국은 을미사변이라는 역사적 책임을 떠 맡을 수 밖에는 없었던 사람. 

대원군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카리스마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로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의 김승호를 비롯하여, <민비> 의 김성원, <풍운> 의 이순재, <대원군> 의 임동진, <찬란한 여명> 의 변희봉, <명성황후> 의 유동근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이순재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연기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바로 <풍운> 을 꼽기도 했는데, 그 만큼 대원군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후보 10. 명성황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아버지가 나왔으니 며느리가 빠질 수 없다. 바로 '명성황후' 가 그 주인공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였던 그녀는 1895년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시해당하기 직전까지 조선 정계를 쥐락펴락 했던 진정한 여걸이었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적에서는 '공' 보다 '과' 를 더 많이 찾을 수 밖에 없겠으나, 그녀의 죽음과 함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은 명성황후라는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영향력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리했고, 드라마에서도 여과없이 반영 됐다. 그러나 대부분 드라마들은 명성황후에게 있어서 '관대한' 시각을 가졌을 뿐더러 미모의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에 앞장 선 편이다.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에서 원로배우 최은희가 김승호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대중문화사에 등장한 '명성황후' 는 <민비> 의 김영애가 그 바통을 이어 받으며 브라운관에 진출했고, 다시 한 번 김영애가 <풍운> 에서 열연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영애 이 후에는 <대원군> 에서 연기파 김희애가, <찬란한 여명> 에서는 하희라, <명성황후> 에서는 이미연, 영화 <한반도> 에서는 강수연이 맡았다.

지금 젊은 층에게 가장 사랑받는 명성황후는 이미연으로서 그 동안의 강인하고 독한 이미지를 순화시키고 마치 멜로물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을 투영함으로써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조선으로.

최근 <주몽><대조영> 의 경향으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를 벗어난 '탈조선화' '반조선화' 현상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고려 시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태조 왕건> 이 후에, <제국의 아침><무인시대><신돈> 등은 고려시대를, <주몽><연개소문><태왕사신기> 등은 고구려를, <대조영> 은 발해를 다룸으로써 조선이라는 시간을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의 움직임을 보면 한국 사극은 다시 '조선' 을 주목하고 있다.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왕과 나>, 정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리려는 <이산 정조>,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등은 이미 편성이 거의 확정 된 상태로 'Come back 조선' 을 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과 비><신돈> 의 정하연과 <내 남자의 여자> 에서 열연중인 김희애가 손을 잡고 <비운의 이방자 여사> 를 준비중이어서 또 다른 근대사의 비극을 보여 줄 참이다. 왜 그들은 다시금 조선에 주목하기 시작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조선' 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시청자들에게 긴밀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연산군, 장녹수, 인수대비, 장희빈, 정난정, 영조, 정조, 혜경궁, 대원군, 명성황후 같은 인물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친숙도는 이미 40여년간 지속되어져 왔으며 그것이 비록 '식상' 하다고 할지라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 올 수 밖엔 없다. 한국 최고의 사극 감독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닳고 달은' 연산군과 정조를 들고 나온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사극들은 조선으로 컴백한 것일뿐 인물에 컴백한 것 같지는 않다. <왕과 나> 도 연산군이 아닌 김처선이 주인공이고, <이산 정조> 도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영조나 사도세자, 혜경궁이 아니라 바로 정조의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기 ?문이다. 친숙한 배경과 신선한 캐릭터로 무장한 2007년 사극들. 그들은 과연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한국 사극의 역사, 그 역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다, 쭉.



관련글

역대 사극 속의 장희빈

[펌] 조선판 마녀사냥, 장희빈의 고정관념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역사 훑어보기
역대 최고의 연산군은 누구? 당신의 투표를 기다립니다 (동영상 비교 가능)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