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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역사 소개



정조의 비밀편지 299통 첫 공개




과격한 언사·노회한 정치··· 기존의 성군 이미지와 거리
다혈질적 성향 반영하듯 비속어·구어 남발 '눈길'
각 당파 원격조정 등 탕평 구도도 통념과는 차이


정조는 어떤 군주였을까. 그리고 조선 후기 정치구도는 어떻게 짜여 있었을까.



정조 대왕은 조선의 왕 중에서도 몹시 입이 험한 편이었는데
이 사실은 최근에 발견된 비밀 편지 299통으로 밝혀졌다.


조선 22대왕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비밀편지가 발견됐다. 정조의 꼼꼼한 성격, 막후정치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난다.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정조가 친필로 쓴 299통의 편지를 공개했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작성된 편지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지도자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편지다.


정조는 편지를 없애라는 지시를 계속 남겼다. “불에 태워라”, “찢어버려라”, “세초하든지 돌려보내든지 하라”는 등의 문구가 다수 확인된다. 하지만 심환지는 편지를 읽고 나서 즉시 없애라는 정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어찰을 고스란히 보관해 뒀다.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 어찰의 작성 시기도 명확하게 남겼다.


편지를 통해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로 알려진 심환지를 자기 사람로 만들려던 정조의 노력을 엿 볼수 있다. 정조는 자신의 건강 상태 같은 기밀도 편지 첫머리에 써서 알려줘 심환지에게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곽란(癨亂)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며칠 동안 괴롭게 앓고 있다. 정사년(1797) 1월 5일.”

“며칠 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시사(時事)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마다 그저 마음속에 불길이 치솟게 만들 뿐이다. 불은 심장에 속하니, 여기에 따라 眼花가 나을 기미가 없으니 너무나도 안타깝다. 동문(洞門) 무오년(1798) 7월8일.”



격정적인 군주, 정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9일 발굴해 공개한 정조의 비밀 편지는 지금껏 알려져 있던 정조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탕평책을 시행하고 문치(文治)를 내세워 '개혁 군주'이자 '실학(實學) 군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정조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정조가 과격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며, 정치적 공작에도 상당히 능한 임금이었음을 드러낸다. 또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ㆍ다수 강경파)와 대립하면서 남인(南人), 노론 시파(時派ㆍ소수 온건파) 등을 고루 등용했다는 탕평(蕩平)의 정치구도도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심환지에게

"갈수록 입조심을 안하는 생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개에 물린 꿩 신세'(犬囓之雉), '꽁무니 빼다'(拔尻), '마누라 장의'(抹樓下長衣)…. 정조가 우의정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문구들이다. 정조는 이처럼 구어적 표현뿐 아니라 저잣거리의 표현이나 비속어도 가리지 않고 편지에 썼다.



측근으로 알려진 서영보(1757~1824)에게 '호로자식'(胡種子)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김매순(1776~1840)에 대해서는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과 김이영(金履永)처럼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 편지와 발문으로 감히 선배들의 의론에 대해 주둥아리를 놀렸다. 정말 망령된 일이다”면서 비난을 퍼붓는 내용이다.




황인기와 김이수에게

"이놈들이 어떤 놈들이기에 주뒹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서매수에게

"늙고 힘없는"




김의순에게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하고 졸렬한"




이노춘에게

"약하고 물러터진 X"




그외에

개에 물린 꿩 신세’ ‘볼기까고 주먹 맞기’ 등의 속담도 마구 구사하였다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다"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





빡치느라 마구 쓰다보니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다”


이건 마치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 정신없이 천플을 달며 키배를 벌이다 보니 새벽이 된 이치와 같다

편지를 쓰다가 중간에

呵자를 세번 써서 呵呵呵 

이 단어의 의미를 찾자면 껄껄껄 요즘 식으로 하면 "ㅋㅋㅋㅋㅋㅋ"





그는 경연 중에

"경들에게는 더 배울것도 없다." 하며 경연을 폐지하기도 하였으며

신하에게 대놓고

"공부 좀 하시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담배를 정말 사랑하여 신하들의 빗발치는 금연 상소도 물리치고 끝까지 담배를 피웠으며

심지어 조선의 대학자들을 모여놓고 시험 주제로 담배를 내기도 하였다.





우의정 심환지 초상

심지어 한문 편지 한가운데 近日僻類爲뒤 쥭박 쥭之時, 有時有此無根之 라는 부분이 보인다. 즉, 한글로 '뒤쥭박듁'(뒤죽박죽)이라고 갈겨 쓴 부분도 있다.  흥분해서 말하다가 너무 빡쳐서 생각이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안났는지 한글로 뒤 쥭박 쥭이라 적어주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하였다.ㅋ




비밀스러운 편지임을 감안하더라도 정조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 격한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성격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자료에도 정조가 현릉원(사도세자의 묘)을 참배하면서 감정이 북받쳐 우는 부분 등이 묘사돼 있지만,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훨씬 적나라한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담고 있다.



특히 구어를 마구 섞어 쓴 문체는 기존에 알려졌던 문장가 정조의 이미지와 판이하게 다르다. 공식 사서(史書)들은 정조가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에 대해 "글이 순정(醇正)하지 못하다"며 고쳐 쓸 것을 명할 정도로 문체에 있어서 엄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정치공학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정조의 인간적 면모와 더불어 정조의 노련한 정치력, 그리고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후기의 정치구도를 짐작하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편지가 던지는 가장 큰 의문은, 정조가 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던 심환지와 내밀한 서신 교환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노론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드러내놓고 반대했던 세력이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조선 후기 당쟁 구도는 단편적 도식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며 "정조도 1795년부터는 벽파를 중요한 세력으로 인정하고 이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임형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은 "정조는 정치적 수가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며 "심환지를 자기 심복으로 여기지 않았더라도, 친밀감을 담은 편지를 통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편지 중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내는 약품 물목을 적은 것, 심환지의 아들이 과거 시험에 떨어지자 안타까워 하는 것 등도 포함돼 있다.


심환지가 "즉시 불태워버려라"는 정조의 명을 어기고 편지를 파기하지 않은 것은 정조의 정치 의도를 증거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과, 임금의 친필 편지를 버리기 힘든 아쉬움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심환지뿐 아니라 다른 정치세력도 비슷한 방법으로 관리ㆍ조종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백승호 서울대 교수는 "정조는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체제공(1719~1799)과도 비슷한 편지를 주고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정조가 편지를 통해 각 정치세력을 '원격 조종'하는 노회한 정치력을 지녔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편지 가운데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미리 짜고' 상소를 올리게 하는 등 정도를 벗어나는 정치적 술수에도 주저함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심환지는 누구인가

심환지(1730~1802)는 마흔 나이가 넘은 1771년(영조 47년) 문과에 급제해 주로 언관(言官ㆍ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관리)으로 일했다. 직언을 서슴지 않아 여러 차례 유배에 처해졌으나 강직함과 업무 능력, 정치적 리더십을 인정받아 노론 벽파의 영수 자리에 오른다. 정조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 측과 가깝게 지내는 등 정치적으로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다. 말년의 정조가 벽파를 정치적 동반 세력의 하나로 인정한 후에는,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돼 있었다. 벽파의 우두머리라는 상징성 때문에, 후세에 정조 암살설을 제기하는 여러 소설작품이나 영화 등에서 정조 독살의 배후로 지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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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이 시작한 드라마 공주의 남자 때문에 조선시대 역사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공주의 남자'는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역사의 라이벌인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아들과 딸이 사랑을 나눈다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이며, 역사와 허구를 적절히 섞어놨다는 평을 받고 있다.

'공주의 남자'는 알려지다시피 정사가 아닌 야사집인 '금계필담' 속 한 에피소드를 변형시킨 드라마다. (금계필담 속의 공주의 남자 이야기, 역사 속의 결말 보기) 금계필담 속 에피소드는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딸이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결말이 새드엔딩으로 반이상 정해진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 하다. 이 책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야사들이 실려있다. 대부분의 제목이 낯이 익은 느낌이고 제목만 보아도 흥미를 끄는 것들이 다수인데 이들 중 다수는 우리가 어릴 때 보았던 이야기 책에 나온 것들이 아닌가 싶다.


공주의 남자의 한 장면





1873년(고종 10)
서유영(徐有英:1801~?)이 쓴 문헌설화집.


2권 2책. 한문필사본.

이본으로는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에 한문유인본(漢文油印本) 2책, 서울대학교 상백문고(想白文庫)에 한문필사본 1책,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한문필사본 2책 중 1책의 낙질본이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에서 빠진 이야기를 모았다는 뜻인 ‘좌해일사(左海逸事)’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말년에 외로움을 느껴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자 심심풀이[破寂之資]가 될 수 있는 이 책을 쓴다고 했다.

고려대학교본은 원작을 지은 지 두 달 뒤에 저자가 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각 편의 주인공의 신분과 시대순에 따라 작품들을 수록하는 체재로 되어 있다.



제왕과 왕비·문신·이인(異人)·양반층여인·기생·하층여인·무인 및 장사(壯士)의 순으로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배열하고, 풍속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들을 함께 묶어서 끝에다 첨부하였다.

각 인물은 대체로 시대순으로 배열했는데, 단종부터 순조 때까지 걸쳐 있다. 작품에서 다룬 주인공들은 하층인보다 상층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보다 현실에서 소망을 이루지 못한 인물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에 빠진 이야기를 모았다는 뜻인 '좌해일사'(左海逸事)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41편의 설화가 주인공의 신분과 시대순에 따라 실려 있다. 조선 단종부터 순조 때까지의 왕·왕비·문신·이인(異人)·양반층여인·기생·하층여인·무인·장사(壯士)의 차례로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적고, 풍속에 대한 이야기들을 덧붙였다. 주인공들은 하층계급보다 상층계급이 많으며, 현실에서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인물이 많다.


이 책은 조선 후기에 많이 나오게 된 야담집들과는 달리 다른 문헌을 참고하지 않고, 저자 자신이 직접 들은 이야기만을 수록하였다는 점에서, 공동작인 구비문학이 개인의식을 통해 어떻게 변모되는가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육미당기(六美堂記)와 금계필담(錦溪筆談)의 비교분석을 통한 소설과 야담계 서사체의 관계양상 고찰」(이강옥, 『한국학보』42, 1986)
「육미당기(六美堂記)의 작자 재론(再論)」(장효현, 『고전소설연구의 방향』, 새문사, 1985)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목차
 . 사육신의 피흘린 자취
 . 단종의 원한을 풀어준 사람
 . 현덕왕비의 무덤이야기
 . 정순왕비의 가여운 인생
 . 피눈물로 얽힌 갸륵한 인연
 . 태평성대의 사랑이야기
 . 뜻을 펴지 못하고 간 임금
 . 선조 임금의 신기한 꿈
 . 나라를 구하려는 임금의 노래
 . 백사가 귀양길에 오르면서
 . 말 그림의 임자를 찾아라
 . 도량을 떠보는 거친 행동
 . 임금과 사귄 어리석은 백성
 . 큰 뜻을 펴지 못하고 간 효종
 . 영웅과 짝짓겠다는 여인
 . 남몰래 볼기맞은 재상
 . 청렴결백한 남산골 선비
 . 헤어진 옷 입고 다니는 재상
 . 전복 한 그릇에 벼슬을 내놔
 . 건공탕으로 인한 두 가지 사건
 . 오십년만에 나타난 꿈의 징험
 . 영조의 생모인 숙빈의 참을성
 . 정순왕후의 남다른 총명
 . 치마 밑에 숨어 화를 면한 사람
 . 고향을 그리워하는 비파소리
 . 유기장의 딸이 정경부인이 돼
 . 질투 심한 홍정승의 어머니
 . 종아리를 맞고 돌아간 처녀
 . 사랑에 빠지지 않는 영의정
 . 큰 인물의 일처리는 남과 달라
 . 거지와 인연맺은 유명한 재상
 . 미움을 이겨낸 홍정승의 의리
 . 김정승과 동양위의 우정
 . 임금이 밝으면 신하도 바름
 . 정승될 사람의 인품
 . 사충사의 이야기
 . 영조를 도운 송정승의 꿈
 . 밥 한 말 먹고 백리를 뛴 정승
 . 이정승의 신통한 감별력
 . 김정승의 적선한 이야기
 . 기생의 도움으로 한을 풀어
 . 윤시동의 글짓는 재치
 . 대동강물에 빼앗긴 담뱃대
 . 벼슬아치들의 행동은 신중해
 . 어른 앞에서 말을 삼가야 해
 . 벗을 얻는 방법도 가지가지
 . 말 한 마디에도 복이 깃들어
 . 혼령을 데려온 김정승
 . 세 번 잘못한 하인을 죽여
 . 중요한 문서를 하나 더
 . 홍연천의 재치있는 글
 . 반토막 시에 짝을 채운 이야기
 . 신선이 됐다는 5세 신동 매월당
 . 실정에 알맞은 정치를 해야지
 . 세가지 의리를 어긴 인생
 . 화담선생 이야기
 . 좀더 살려고 애쓰는 사람
 . 죽은 친구를 살린 북창공
 . 십만 정병을 길러야 무사하리
 . 앞 일은 내다 본 토정
 . 양주 송산이 피난처다
 . 왜적은 솔송자가 든 마을은 피해
 . 신선이 되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
 . 안동부사가 된 김치의 옥관자
 . 가난 때문에 절개가 꺽인 선비
 . 아내 덕에 병마사된 사나이
 . 오랑캐의 침략을 미리 아는 중
 . 병자호란을 예언한 박무관
 . 우암에게 준 한 늙은이의 시구
 . 이충정공의 신수에 관한 이야기
 . 금족두리 조각이 사람을 살려
 . 선비의 운명을 알고 있는 여인
 . 신선이 없다는 건 거짓말인지
 . 작은 은덕으로 큰 복을 받다
 . 이평량자라는 사람의 시
 . 앞일을 환히 알고 있는 사람
 . 왜송동 흉가터에 어서각이 선 사연
 . 익사할 신수를 면한 이야기
 .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복을 준다
 . 죽은 아이의 후신이 된 재상
 . 꿈에 본 죽은 아들의 모습
 . 원통하게 죽은 한을 풀어
 . 죽을 고비를 모면한 이야기
 . 마술장이에게 속은 사람들
 . 문 밖에 제사를 차리는 풍속
 . 삼연선생의 오언시이야기
 . 송악산 신령의 싸움이야기
 . 대궐을 집으로 쓴 한 서생
 . 신사임당의 값진 일생
 . 황발부인의 뛰어난 전략
 . 영수각 서부인의 뛰어난 재주
 . 고도령과 박씨부인의 십 년 공적
 . 까치가 울면 기쁜 소식이 와
 . 남편을 돕는 지극한 정성
 . 절개지킨 아내를 오해한 남편
 . 헤어진 가족의 눈물겨운 만남
 . 명필 양봉래의 어머니의 이야기
 . 천재 시인 허난설헌의 죽음
 . 이씨부인의 효성이야기
 . 누명을 벗은 선비와 의로운 여성
 . 옛 주인의 원수를 갚은 하녀이야기
 . 한떨기 꽃이 된 여자
 . 안평대군과 최생의 풍류
 . 황진이와 벽계수
 . 출사표를 부르며 흐느끼는 가련이
 .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
 . 부채하나로 맺어진 인연
 . 의기 논개의 넋을 기리는 노래
 . 원님과 사랑한 어린 기생
 . 무정한 것이 아니라 늙어서 그래
 . 용모는 어미를 문장은 아비를 닮아
 . 고장군을 짝사랑하다 죽은 처녀
 . 박태보를 짝사랑한 하녀
 . 아랑의 원한이 깃든 영남루
 . 이완장군의 대담한 전략
 . 임경업장군의 한맺힌 말
 . 사람의 일생은 꿈같은 것
 . 원통하게 처형된 남이장군
 . 서생이 왜장 일곱명을 죽이다
 . 도둑의 마음을 움직인 이완
 .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 힘 자랑은 우물 안의 개구리
 . 민장사의 놀라운 힘
 . 큰 원한은 도움만으로는 풀기 어려워
 . 사소한 일에도 장수다운 지략
 . 은덕을 못잊어 역적 아들을 살려줘
 . 백학을 황학이라 속인 이야기
 . 속임수로 벼슬길을 도운 어사
 . 금주령에 얽힌 갸륵한 이야기
 . 공사를 분별하는 일처리
 . 심공의 기생놀이로 생긴 일
 . 금강산 유점사를 지은 유래
 . 도끼를 주면 하늘 기둥감을 찍으리라
 . 정월 대보름날 약밥을 먹는 유래
 . 진평왕의 옥대를 찾은 이야기
 . 처용무에 대한 옛날 이야기
 . 김생의 글씨가 세상에 알려져
 . 솔거의 황룡사 노송도
 . 거문고와 가야금의 유래
 . 여원을 풀어주지 않아 화를 입은 최진사
 . 호랑이와 무덤을 지킨 강효자
 索引



2011/07/30 - 공주의 남자로 보는 세조시대 역사, 역사 속의 결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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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세조의 킹메이커,
신 숙 주



▣방송 : 2007. 7. 7(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김현기PD
▣작가 : 윤영수

 


신숙주! 그의 선택이

조선의 왕, 그리고 역사를 바꾼다!

세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조선의 전성기!
그 찬란한 시대에
여섯 임금을 모시며 변신을 거듭해온 인물이 있다. 조선 500년사에 걸쳐 지금까지도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
신.숙.주!

그는 처세에 능한 변절자인가?
혼돈의 왕조를 바로잡은 천재관료인가?


"이 나물을 만두 속으로 넣을 적에 짓이겨 넣는 고로 신숙주 를 이 나물 찧듯 하자고 하여 숙주나물 이 라 하였다"

                  이용기 『조선무쌍요리제법』 中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신숙주는 큰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 하셨다."

                                             『문종실록』中


 

1453년 10월 10일(음), 그들의 선택이 조선의 역사를 바꾼다.

그 때 조정에는 조선건국 이래 최대의 피바람이 몰아친다. 단종 1년, 수양대군은 당시의 권력자였던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와 아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살생계획에 따라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친동생인 안평대군까지 귀양을 보낸다. 치밀하고, 처절했던 조선 초 최대의 쿠데타, 계유정난! 대권을 거머쥔 수양대군의 뒤에는 시대를 넘어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문제의 인물,
                       
신숙주가 있었다.

수양대군! 명관(明官)을 알아본 최고의 선택 - 외교 전문가, 신숙주!

"신숙주는 곧 나의 '위징'이다"
위징(魏徵)'은 당태종의 참모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재상이라 불렸던 인물. 수양대군은 세조 즉위 후 신숙주를 '위징(魏徵)'에 빗대어 총애하였다. 그렇다면, 세조의 남자, 신숙주는 누구인가?

"집현전에서 근무하게 되어 숙직할 때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책을 가져다가 남김없이 모두 열람하였다. 어떤 때에는 동료 대신 숙직을 청하여 밤새도록 잠자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필원잡기 中

그는 세종 때 집현전 8학사였고, 일본에 다녀온 촉망받는 신진 지식인이었다. 또한 몽고어, 일본어, 만주어 등 외국어에 두루 능통한 전문 외교관이기도 했다.

수양대군이 권람에게 중국에 보낼 정관이 될 만 한 자를 물었더니 신숙주를
추천하였다.                               <연려실기술> 연려실기술 동각잡기 中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명나라로부터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 능력 있는 외교 전문가가 필요했던 수양대군! 천재관료 신숙주를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연을 가장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는데...

신숙주! 최고 권력을 향한 최선의 선택 - No.3 수양대군!
수양대군은 왜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일까? 당시 수양대군은 가장 정통성 있는 세력인 단종, 정가의 평판이 좋은 양평대군에 이어 제3세력 이었다.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조카 단종과 친동생 안평대군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종을 보위하며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도 탄탄대로를 걸었을 신숙주. 그는 왜 수양대군과 손을 잡고 시대를 뒤집으려 했을까? 왜 자신을 아꼈던 역대 왕들에게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300년 후, 그의 선택이 비난 받기 시작한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모시며 조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국가경영자 신숙주!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그의 공로는 반대파였던 사림의 시조 '김종직'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단종을 몰아낸 후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를 공신비로 삼았다는 내용이 문헌에 기록될 정도였다. 그러나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를 도운 다른 공신들에 비해 훨씬 청렴하고, 뛰어난 관료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왜 유독 신숙주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변절자의 상징으로 만든 것일까?


신숙주 재발견! 역사적 편견 속 가려져있던 그의 또 다른 면모!

1460년, 8000명의 조선군사가 두만강을 건너 여진 정벌에 나선다. 여진족을 괴멸시키며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적이 불시에 조선군 진영을 기습한다. 당시 조선군의 군장이었던 신숙주. 한 밤중에 벌어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는 가만히 누워서 시를 읊는데...


신숙주는 조선 전기, 문물제도 완성의 총지휘자였다. 한글편찬을 비롯하여 운문, 서예에서 해박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경국대전>, <동국통감> 등의 법전과 역사서 편찬을 주도하였고, 세조실록, 예조실록의 찬수까지 도맡아 했다. 말년에는 벼슬에서 간절히 물러나고 싶어 했지만 나라의 임금이 놓아주지 않아 죽을 때까지 벼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신숙주인 것이다.

 



신숙주는 세조에게 빌붙어서 권력을 잡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진정코 흔들리는 국가를 바로 잡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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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용의 눈물에서 왕과 비,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으로 절정을 이루었던 대하 사극 시대는 무인시대에서 시청률이 크게 하락하면서 점차 쇠락기로 접어들었고, 그 이후로는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이후  불멸의 이순신과 대왕세종이라는 사극이 그나마 대하 사극의 체면의 살려주었지만 그 전만큼의 명성을 드날리지 못한 가운데, 최근에는 퓨전 사극들의 활약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저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공주의 남자'라는 사극인데요, 세종대왕 사후 문종대부터 피 비린내 나는 살육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수양대군 전성시대인 세조대로 넘어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네요.

 


왼쪽부터 김종서, 김승유, 세령, 수양대군(세조)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충신 김종서와 사육신을 죽인 그 이야기야 너무나도 유명해서 익히 다 아시는 스토리일 것이고, 대부분의 분들은 동일인물이 그 전에 나온 드라마에서 어떤 관점으로 그려졌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일단 최근작인 대왕세종부터 살펴보면


모든 불행의 씨앗이자, 비극의 원흉인 수양대군


제목에는 안나오지만 파천무에서 세조 역을 맡으신 유동근씨


(이 분은 워낙 카리스마가 후덜덜하게 있으셔서 항상 강한 역할 만을 맡으시는 것 같다.
 - 파천무: 수양대군(세조), 장녹수: 연산군, 용의 눈물: 태종 이방원, 명성황후: 흥선대원군)

1994년작 한명회에서의 세조(수양대군) - 서인석씨





1998년작 왕과 비에서의 세조(수양대군) - 임동진씨

 

왕과 비 VS 왕과 나에서의 대조적인 수양대군 이미지 - 김병세씨

 


 

대왕세종에서의 너무 미화된 멋있는 수양대군


 

2011년작 공주의 남자에서 수양대군 - 김영철씨

 


 

한명회와 왕과 비에서 둘 다 수양대군이 미화된 바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자기 권력을 위해서 친족들과 충신들을 몰살하면서도 너무 고뇌하는 이미지를 그렸다고나 할까요?

이번 새로운 사극인 공주의 왕자에서는 그 부분이 좀 덜할 것 같아요.




그 다음 수양대군 비인 정희왕후 윤씨.

왕과 비에서 한혜숙씨 VS 왕과 나에서의 양미경씨



공주의 남자에서의 김서라씨



- 실제로 남편에게 갑옷을 입히고 채비를 시킨 철의 여인인데,
왕과 비에서는 며느리 인수대비(수빈 한씨)를 두려워하는 부드러운 분으로 나왔죠..

이것도 일종의 역사 왜곡이겠죠?
왕과 나에서는 부드럽고 마음씨 좋은 할머니 역할로...

공주의 남자에서는 큰 역할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수양대군의 장자방이라고 불리는 조선 최고의 모략가 한명회

한명회에서 한명회로 나오신 이덕화씨 - 전형적인 저 표정 아직도 기억납니다.

왕과 비에서의 한명회 역할을 맡으셨던 최종원씨도.. 전형적인 표정입니다.

왕과 비에 비해 너무 순하고 문인 스타일이신 왕과 나의 한명회

상당히 기대가 되는 공주의 남자 한명회 이희도씨






한명회가 행동가라면, 지략가로서 세조 시대의 치하를 빛나게 한, 배신의 아이콘 신숙주역


왕과 비의 신숙주(범옹이라 불림) 이정길씨

대왕세종 때만 해도 젊은 인재였던 신숙주

 

공주의 남자에서는 시작하자 마자 배신을 때린 신숙주



이 들의 철퇴를 맞고 안타깝게 돌아가신 김종서 역할

한명회의 김종서 임동진씨


 (이 분이 그 다음 사극에서 김종서를 죽이는 세조 역할을 하니.. 참 재미있죠?)



무인 김종서의 이미지를 잘 살려준 왕과 비의 김종서 조경환씨

문인 기질이 돋보였던 김종서를 잘 보여주고 계신 역대 최고령의 김종서 역할 이순재 할아버님 :)

이순재씨는 20여년 전의 작품인 파천무에서도 김종서 역할을 맡으셨다고 하네요.
이 작품은 사진을 못구했습니다.



왕과 비의 문종

대왕세종의 문종

공주의 남자의 문종 정동환씨



대왕세종에서는 세종대왕 치세기를 다루다 보니 전체적으로 인물들이 젊군요.

가장 어린 단종 한명회에서부터 단종역할을 맡아오신 정태우씨

 

 

 

 

 



왕과 비에서는 실제 나이와 비슷할 때이고, 연기 경력도 제법 쌓여서인지 슬픈 눈빛의 단종을 보다 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씨 역을 맡은 김민정씨의 미모도 돋보이네요.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공주의 왕자에서의 단종





공주의 왕자는 퓨전 사극이다 보니 그 전의 작품인 조선왕조 오백년의 풍란, 한명회, 왕과 비만큼의 깊이는 보여주지 못할 것 같지만 조연 배우들이 워낙에 후덜덜한 연기력의 소유자들이다 보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건 사실입니다. 어떤 배우가 가장 그 역할에 잘 어울렸는지 또 한창 토론의 장도 열릴 것 같구요.


물론 주요 스토리는 김승유와 세령의 이루지 못할 사랑이야기에 촛점이 맞춰지겠지만 이렇게 많은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니 예전 작품과 비교하면서, 수양대군과 김종서 일파를 어떻게 그려 나갈지 생각해 가면서 보는 것도 작품 보는 쏠쏠한 재미를 더해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중 어떤 작품에서의 누가 가장 마음이 가시나요?





2011/07/30 - 공주의 남자로 보는 세조시대 역사 보기
2008/01/16 - 왕과 나 VS 왕과 비(妃) 비교분석: 역사에로시트콤인가? 새로운 해석인가?
2008/01/27 - 대왕세종 VS 용의 눈물, 실록과의 비교분석
2008/02/27 -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조선왕조 역사/계보 훑어보기
2008/03/11 - 영도교: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이별을 기리는 다리
2008/03/14 - 조선시대 사극, 그 단골손님들 꼽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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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계비 정순왕후 간택 일화 -  네가 돌면 되지 않느냐?


이산 정순왕후
조선 제21대 영조께서는 첫째 왕비 정성황후 서씨(貞聖王后 徐氏)와 연잉군(延礽君) 시절 11살 때(1704년)  13살의 달성 서씨와 가례를 올리고 서씨는 혼인한 후 왕위에 뜻이 있던 영조와 동고동락한 사실상의 동지였다.

경종 시절 서씨의 조카 서 덕수가 노론 4대신<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중추부판사 조태채(趙泰采), 중추부영사 이이명(李頤  命)>이 연잉군을 국왕으로 추대했음을 전하고 또 이 때문에 사형까지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서씨의 친정은 영조를 즉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드디어 경종 4년 소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위기를 넘어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히도 정성왕후 서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영조는 결국 세 명의 후궁들에게서 2남 7녀를 낳았느데 제1후궁인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와 두 명의 옹주를, 제2후궁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와 화평옹주, 화순옹주를, 제3후궁인 귀인 조씨가 화유공주를, 마지막 후궁인 숙의 문씨가 화령옹주와 화길옹주 등을 낳았다.

일곱 명의 딸 중 맏딸은 유아기 때 사망했고, 둘째 딸 화순옹주는 남편 월성위가 죽자 그 뒤를 따라 굶어 죽었다. 다섯째 딸 화협용주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첫아들인 효장세자도 영조가 즉위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열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다음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둘째 아들 사도세자였다.

서씨는 후궁들의 몸에서 난 소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도세자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쏟으며 돌보았다. 그러기에 만일 서씨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면했을 지도 모른다.

1757년 2월 왕비 정성왕후가 소생이 없이 66세를 일기로 먼저 세상을 뜨자 영조는 장차 자기도 홍릉[弘陵] 왕비 옆에 묻히고자 에 허우(虛右:오른 쬭에 자리를 비워두는) 제도를 쓰도록 하였을 정도로 애통해했지만,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정순왕후(貞純王后)의 揀擇(간택)에 얽힌 逸話(일화)! 

어린 시절 유명인 이야기에 종종 등장했던 왕비 간택 이야기의 유명한 일화가 악덕 왕비 정순왕후인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녀는 뒤에 악명을 끼쳤지만 머리만큼은 명석했던 모양이다. 후일의 악행이 없었다면 아주 현명한 왕후로 영원히 역사에 남았겠지만 알고 보는 것이라 순수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1.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당시 왕비 후보는 10명.  드디어 간택의 날. 여러 양반가의 처녀들이 선을 보기 위해 궁녀가 안내하는 방에 들어갔다. 방에는 방석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처녀들의 아버지 이름이 쓰여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영조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앉아 있는 여러 처녀 가운데 어찌된 일인지 김한구의  딸만이 앉아 있지 않고 서 있었다. 궁녀들이 다가가서 서 있는 규수의 귀에다 대고 재촉을 하였으나, 그 처녀는 여전히 서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영조는 직접 물었다.
“다른 처자는 아버지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아서 판단하기 좋게 하는데 김한구의 딸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그대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여 앉지를 못하는고?”

그 처녀는 궁녀에게 가만히 귓속말을 하였다.
“아무리 간택하는 자리라고 하지만, 방석 위에 어버이의 성함자(姓銜字)를 써놓았으니 그것을 어떻게 깔고 앉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이름이 수놓인 것은 바로 아버지가 아닌가?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는 불효라는 말이다. 왕비가 안되어도 좋다. 효녀만 되면 된다. 효녀 이름이 밖에 크게 소문나지 아니하여도 딸로서 도리만 다 하면 된다. 왕비 이전에 딸노릇하는 딸이 되겠다는 말이다. 영조는  이것을 알고 묵묵히 있었다. 속으로는 갸륵하기도 하고 맹랑한 대답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2.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이 드는고?

그리하여 다시 간택이 진행되었는데 영조가 규수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넘기 힘든 고개가 무슨 고개인가?”

한 규수는 "대관령고개입니다."
다른 규수는 "추풍령고개입니다."라고 하는 등  높은 산과 고개의 이름을 말하였다.

그러나 김한구 딸은 "보릿고개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답하였다.

이유를 묻자, “봄에 곡식이 떨어져서 보리가 나올 때까지 배고픔을 참고 넘어야 하는 고개인 보릿고개가 가장 힘들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보리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끼, 아니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리고개이니 백성들에게는 그 어떤 고개보다 넘기 힘든 고개가 보리고개일 것이다. 가난을 신물나게 겪어본 사람만이 보리고개가 가장 힘이 든 고개라고 할 것인데 바로 이 김처자가 그리 말을 한 것이다.

(※실제로 그 김규수는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몰락한 양반의 딸로 충청도 서산 당진 홍성 쪽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살다가 못 살아서  서울에 가면 아는 사람 연줄로 좀 벼슬이나 살까 한 아버지 뜻을 따라 가마를 빌려타고 보모랑 같이 서울에 왔는데 도중에 노비와 숙식비가 없어서 갖은 봉변을 다 당하고 급기야는 벼슬을 살러가는 초행원님에게서 돈 좀 얻어  가죽옷도 얻어 입고 한겨울에 상경을 한 적이 얼마 전에 있었다. 그렇게 빈한한 김한구는 어찌어찌하여 벼슬을 살고 마침내 그의 딸이 이 간택에 뽑히게 된 것이다.)

모름지기 나라의 국모인 왕후가 되려면 백성이 겪는 그 고통이라는 대명사인 보리고개를 알아야 할 것이다.
 

3.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제일인고?

영조의 질문이 계속 되었다. “그대들은 무슨 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가?”

이번에도 다른 처자들은 '첫번째 간택 규수는 목련꽃이라고 하고, 두번째 간택규수는 연꽃 등 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꽃을 들었다.

그런데 김한구의 딸은 다른 말을 하였다.
“목화가 가장 좋으니, 옷을 지어 온 백성을 따뜻하게 입힙니다.” 

목화꽃이라? 이 꽃은 화사하고 예쁜 꽃은 결코 아니므로 일반 상식으로는 맞는 답이 아니라고 하겠는데, 그 꽃이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는 왕비라도 백성이 헐벗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왕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4.
영조가 다시 묻기를 “무엇이 가장 깊은가?”라고 하자 대부분의 처녀들은 ‘산’ ‘물’을 들었으나
김한구의 딸은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물건은 깊이를 헤아릴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답을 하였다. 


이리하여 경주 김씨 김한구 딸이 영조대왕 말년에 계비가 되었으니 정순왕후다.
 

<원문>

何物 最深      무엇이 가장 깊은가?

人心 最深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物心 可測      물건의 마음은 헤아릴 수 있으나,

人心不可測也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정순왕후는 왕비로 뽑힌 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 오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말했다고 한다.


열 다섯(!!!) 어린 나이에 왕비의 체통까지 생각할 만큼 만만치 않았던 여인.


1759년(영조35년) 초여름 6월, 창경궁. 66세의 신랑 영조와 1745년 11월 10일 여주 고을에서 태어난 15세의 신부, 오흥 부원군(鰲興 府院君) 김한구(金 漢耉)의 큰 딸, 경주김씨가 혼례를 올리고 정순왕후로 책봉된다.  임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처녀만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법도에 따라 열다섯 꽃다운 처녀가 노인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영조는 1776년 승하하셨으니 그녀는 참 오랫동안 혼자서 여왕과도 같은 지위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그 부인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던 신부.

이 나이 어린 신부는 경주 김씨 정순왕후의 친정은 사도세자에 적대적인 노론 벽파 집안으로 아버지 김한구(漢耉)의 사주를 받아, 나 언경(羅彦景)이 사도세자의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여 사도세자를 서인(庶 人)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하고, 정순왕후는 당연히 사도세자의 아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보위에 오르는데 정순왕후는 정조의 왕권에 심각한 위협이되는 정치적 정적이였다. 정조는 의문사를 당하게 되는데 정순왕후가 독살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당쟁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에 반대하는 벽파 (僻派)를 항상 옹호하였으며, 훗날 정조가 승하하고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소생으로 11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는데 이때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정국의 태풍의 핵으로 등장하게 된다.


1801년 1월 10일 용상 아래에는 모든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용상에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의 11살 난 순조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긴장된 분위기를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렴 뒤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천주교)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과 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려져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
五家作統(클릭)을 닦아 밝히고, 그 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을 시행하여 진멸(盡滅)함으로써 유종이 없도록 하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였다. 김씨는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시작해, 정국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서학(西學)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이는 마치 조선의 신분 체제 를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순왕후 김씨와 뜻을 같이 하는 노론 벽파가 반대당인 남인들과 일부 노론 시파를 탄압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왕권과 다름없는 정치력을 행사, 국왕과 똑같은 권위에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여, 본인 스스로도 여주. 여군, 여자 국왕을 자처할 정도였던 여인! 그 여인이 바로 경주 김씨 가문 출신의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그녀의 행적으로 봐서 권력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부질없는 권력욕 탓에 그녀 사후에 친정가문이 멸문을 당하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순왕후가 죽자 그녀의 친정인 경주 김씨 일문은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안동김씨 집안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안동 김씨 집안의 견제를 받아 곧 멸문지화를 당한다.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1805년{순조 5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정순왕후는 말기 조선이 망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야말로 조선의 진정한 악의 축이었다.

그녀는 반대당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숙청을 하고 천주교도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면서 권력을 굳건히 다져나갔다. 그녀의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정치권력에 대한 야심이 컸고, 사도세자와 정조의 죽음에 까지 깊숙히 개입되었으며, 개혁군주 정조가 이룩한 모든 업적을 파괴를 위해 전력질주했다고 볼 수 있다.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남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 남인들은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였던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신서파라 한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김씨와 손잡고 서학을 뿌리 뽑는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공격했던 노론 벽파 중심의 정치 세력을 공서파라 부른다.

수렴청정하는 동안  벽파인 공서파(攻西派) 등과 결탁, 정치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시파(時派) 등의 신서파(信西派)를 모함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 등 간부들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丁若銓)·약용(若鏞)형제는 전라도 강진 지방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恩彦君=강화도령 철종의 부친)과 그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 되었다.

남인계 시파와 종교상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는데 앞장을 섰는데 특히 천주교도들의 대학살로 몰았던 신유옥사(辛酉獄事) 후에 사교(邪敎)의 뿌리가 뽑혔다고 축배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정조가 길러놓은 인재들을 모두 죽여 버렸고 '조선개국 - 사화, 임진왜란, 병자호란 - 북벌 준비 전념 - 이어지는 영정시대'는 그야말로 문예중흥기였었는데, 그녀 덕분에(?) 실학은 재야로 묻히고 겨우 명맥만 유지할 지경였으렸다. 영조와 함께 찬란한 문화부흥기를 이뤘던 정조의 노력을 그녀는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조선이 급속히 몰락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 게다가 정순황후 이후 수렴청정과 세도정치가 관습처럼 자리 잡아 정치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정순왕후에서 비롯된 세도정치 시대에 왕들은 숨을 죽이고 구석에 숨어있었으며 왕비들은 외척을 앞세워 전권을 휘둘렀다. (정말 화가 나는 대목이다.)

이후에 흥선대원군이 등장하여 수많은 개혁을 이루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지만 이미 조선은 말기암 환자처럼 대수술을 해도 새로이 태어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있었고... 그리하여 우리가 치를 떠는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치욕을 겪게 된다.

참조글 : 
http://cafe.daum.net/apt77/6Fj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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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교에 얽힌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랑 이야기


영도교에 얽힌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랑 이야기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
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이별을 가슴에 담고 있다. 단종이 정순왕후와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하였는 데 그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못 만났다 하여 두 사람의 슬픈 모습을 지켜 본 사람들이 '영영 이별 다리, 영영 건넌 다리, 영 이별다리, 영이별교'라는 뜻을 담아 라고 말한 것이 현재의 영도교의 유래가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영 이별 다리'로 불렀는데,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로 불리게 되었다.


단종과 정순왕후 - 왕과 비에서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재위 2년만에 병사하자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조선의 6대 임금 단종이다. 단종은 천재군주 세종대왕과 그 뒤를 이은 문종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매우 영특하여 세종과 문종의 기대와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에 보호해 줄 그 어떤 세력도 없이 왕위에 오른 그는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도 잃은 단종이 그 때 의지할 곳은 자신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 밖에 없었을 텐데..  그마저 함께 하지 못하도록 떼어놓은 걸 보면 세조의 잔인함이 어디까지인가 싶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영월로 유배된 후 불과 넉 달 만에 죽음으로써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고 궁궐에서 추방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정순왕후는 초막집에서 시녀 셋과 함께 살며, 시녀들이 동냥해오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근처에 영빈전이라는 집과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끝내 거부하였다. 그리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묻히고 살지 않았다고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단종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왕후는 아침 저녁 이 산봉우리에 있는 바위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비운의 소녀왕비의 곡소리는 온 마을 여인네들의 가슴을 후벼파서 산 아래 온 마을 여인들도 일제히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하였다고 한다. '동망봉'이라는 이름도 정순왕후가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영도교 인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왕비에서 하루아침에 끼니도 잇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한 송비를 동네 아낙네들은 불쌍히 여겼다. 송비(宋妃, 정순왕후 송씨)에게 끼니 때마다 채소를 가져다주려는 한 부녀자들이 많아 긴 행렬을 이룰 정도여서,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지혜를 모아 송비의 초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채소를 파는 척하고 모여들어 송비에게 가져다준 것이 채소시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시.

원통한 새가되어 궁궐에서 나오니
짝잃은 외로운 몸이 깊은 산중에 있구나
밤마다 잠들려도 그럴 겨럴이 없으니
수없이 해가가도 끝남없는 이 한이여
새소리 멎은 새벽  뫼엔 조각달만 밝은데
피눈물 나는 봄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
하늘도 귀가 먹어 슬픈 사연 못 듣는데
수심많은 사람의 귀만 홀로 밝게 듣는고



정순왕후 송씨의 능호인 사릉(思陵)은 동망봉 산봉우리에서 통곡하며, 죽을 때까지 지아비인 단종을 그리워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01








뱀꼬리: 편의상 본문에서는 평어체를 썼습니다. 영도교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슬픈 사연이 있는 다리였네요. 특히 단종이 죽고도 질긴 생명을 몇 십년이나 이어간 정순왕후가 끝끝내 세조의 도움을 거부했다는 것과 소녀왕비의 울음소리에 온 마을 아낙네들이 같이 울었다는 것도 참 감동적입니다. 80 평생 단종을 그리워한 부인이니 남편을 죽인 세조의 도움이 반가울리 없었겠지요. 지아비를 죽인 세조의 도움을 받을 여인이었다면 평생 그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구요.  부모도 부인도 다 잃고 감옥 속에서 짧은 생을 외로이 살다 간 단종,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망향탑을 쌓는 단종의 사연은 정말 많은 백성들을 울릴 만큼 충분히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이 글을 적게 독려해주신 천년목님께 감사드립니다. 천년목님: 여러가지 자료를 다 끼워넣다보니 결론이 없는 요상한 글이 되어버렸네요. 하지만 하나라도 더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랬다는 거 이해해 주실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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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에 의해 희생된 비운의 사도세자



출처:
디씨인싸이드 이산갤러리

1735년 1월 21일, 영조는 영빈 이씨에게서 손꼽아 기다리던 원자 선(後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리고 영조의 나이로 인해 이듬해인 1736년 3월 15일, 원자 선을 2세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세자 선은 2세 때 천(天), 지(地), 부(父), 모(母) 등 63자를 해득할 정도로 조숙했다. 그는 3세 때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때 '동몽선습'을 독파했으며,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10세 때 노론과 소론을 구별하여 두 당파를 비교하기도 했고, 소론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옥사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영특했던 세자 선은 영조의 나이 56세 때인 1749년, 세자의 나이 15세 때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도세자 8세 때 쓴 글씨

사도세자 8세 때 쓴 글씨

사도세자 10세 때 장인에게 쓴 편지


세자 선은 대리청정을 하며 노론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노론은 틈만나면 세자에게 소론을 몰아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지만, 세자는 부왕를 믿고 독단적으로 날뛰는 노론을 배척하며 소론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론은 사도세자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759년 노론 김한구의 딸을 왕후로 들인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더욱 더 심화된다. 


노론은 훗날 세자가 즉위하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판단하고 세자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간다. 노론의 거두인 혜경궁홍씨의 아버지 홍봉한, 숙부 홍인한, 정순왕후의 친오빠 김귀주,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 김상로, 김한록, 정후겸, 그리고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 영조의 총애를 받던 숙의 문씨, 숙의 문씨의 친오빠 문성국, 심지어는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까지 세자를 24시간 감시하고 미행을 시켜 행적을 서로 주고 받는다. 또한 정순왕후와 영빈 이씨, 그리고 영조의 총애를 받던 숙의 문씨는 세자를 무고하였고,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꾸짖었다. 이로 인해 세자는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궁을 빠져나가 관서지역을 유람하기도 했다.


세자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5월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여 영조로 하여금 세자를 폐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둬 8일만에 굶어죽게 하였다. 공교롭게도 그 뒤주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영조에게 제공하였다.


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그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 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고종때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다가 정조 때 수원 화산으로 이전되어 현륭원이라 불렀고 장조로 추존된 뒤에는 융릉으로 불린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사도세자도 영조도 이상하다..
역사가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하다지.

분명한 건 영조는 편집증으로 아들을 미치게 만들었고, 사도세자도 정상은 아니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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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승 작가의 따끔한 질책: 역사드라마가 막가고 있다




Ⅰ. 역사드라마의 광풍이 불고 있는 요즘이다. 방송사 마다 경쟁적으로 역사드라마를 만들어서 내보낸다. 평생을 그 일에 종사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척도 반갑고 즐거운 노릇이어야 옳지만, 실상은 가슴을 조이면서 걱정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진다는 점은 국사정신의 고양과 나라의 정체성 확립에도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러자니 고증考證이 맞느니, 틀리느니 하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고, 사실史實과 맞느냐, 맞지 않느냐로 격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엄격하게 생각하면 드라마와 사실은 맞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만, 사람들은 역사드라마가 사실과 같기를 희망하고, 역사드라마를 통하여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과욕에 젖어있는 게 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작가가 쓰는 모든 소설이나 드라마가 픽션虛構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드라마나 소설의 경우 있었던 사건, 실제의 인물을 다룰 때는 작가에게 주어진 절대권한이나 다름이 없는 픽션도 제한을 받게 된다는 점에 각별히 유념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여기가 드라마작가나 소설가의 식견과 표준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고려 말의 혼란기를 드라마로 쓰게 되면,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교차하게 하면서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갈등을 그리게 된다. 이 상황 안에서라면 어떤 픽션의 도입도 작가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픽션이라는 권한은 작가에게 주어진 자유방임이 아니라는 사실은 픽션의 구사보다도 더 중하다. 정몽주는 어떤 경우에도 56세에 죽어야 하고, 그 죽음은 반드시 선죽교에서 조영규가 휘든 철퇴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은 작가의 픽션으로 무너뜨릴 수도 없거니와 또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요즘의 역사드라마는 이 엄연한 룰(규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사진은 특정 내용과 상관없음.



Ⅱ.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는 ‘사실’과 얼마간 다를 수가 있겠지만, 그 시대가 지닌 ‘시대정신’은 달라서는 안 되고, 왜곡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의 현대사에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 집권자의 통치신념을 제시하는 포괄적인 시대정신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집권자의 통치이념에 따라서 한 시대, 시대마다 어떤 형식이든 시대정신이 깔리게 마련이고, 바로 그것이 그 시대를 흘러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될 수밖에 없다.

가령 KBS-TV에서 방송되고 있는 <대왕 세종>의 경우라면 태종시대의‘시대적 정신’과 이탈해서는 그 시대를 바로 그려갈 수가 없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아 조선건국의 2인자나 다름이 없었지만, 세자책봉에서 제외되는 좌절을 겪으면서 스스로 집권하기 위한 야망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하여 나이어린 이복동생을 죽였고, 자신의 진로에 방해가 되는 동복형님까지 죽이면서 왕권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아버지 태조(이성계)와 는 상상을 초월하는 갈등을 겪으면서 왕권을 굳혔다.

그는 왕위에 있으면서도 네 사람의 처남에게 사약을 내려서 죽게 하였고, 이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며 항변하는 왕비(원경왕후)에게 거침없이 폐비를 입에 담으면서 10여 년 세월을 같은 궐 안(경복궁)에 살면서도 내왕없이 불목으로 일관하였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 세자(양녕대군)를 폐하여 죄인으로 내치기까지 하였다. 이때까지 조선 왕조의 왕위계승이 장자로 이어지지 않았다하여 듣기 민망한 유언비어가 도는 데도 장자인 세자를 폐하는 태종의 독단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또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왕재로서의 가능성을 보이자 태종은 52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그것은 세종의 새 왕조가 확실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후견인(상왕)이 되어야겠다는 그의 책임감의 발로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북경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세종의 장인이자 국구인 심온沈溫이 ‘왕명이 두 군데서 나오면 정치에 혼란이 있게 된다.’는 당연한 말을 했음에도 그가 압록강을 건너기를 기다려서 체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 할 만큼 단호하고도 혹독한 군왕이었다. 어린 왕비(소헌왕후)는 상왕전의 마당에서 아비를 살려달라는 석고대죄를 올렸어도 태종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태종의 재위 18년과 상왕으로 있은 4년은 태평한 다음시대를 열기 위한 자기희생의 시기였기에 어렸을 때의 친구이자 마치 분신과도 같았던 최측근인 이숙번李淑蕃까지도 “내가 죽고 백년이 지나지 않거든 도성 안에 발을 들여놓게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면서 귀양에 처했다.

태종 이방원의 통치시대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다음 시대의 장애물이될 위험이 있는 자를 가려서 그가 어떤 자일지라도 가차 없이 제거해 버렸던 시대’였기에 자신의 뒤를 이은 22세의 어린 세종에게

"천하의 모든 악명은 내가 짊어지고 갈 것이니, 주상은 성군의 이름을 만세에 남기도록 하라."는  명언을 남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태종시대를 드라마로 그리자면 이같은 시대정신 또는 시대의 정한이 고려되지 않고서는 좋은 드라마로 만들어낼 수가 없게 된다.


Ⅲ.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되는 화두는 세종시대와 세종의 통치철학을 살펴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적절한 시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없다. 그러기에 KBS-TV에서 <대왕 세종>을 제작 방영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대에 담겨진 귀중한 체험과 정신을 외면하거나 왜곡한다면 모처럼의 좋은 뜻도 물거품이 되기가 쉽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 <대왕 세종>이라는 타이틀은 너무 보편적이다. 조선왕조에는 27명의 임금이 있었고, 그 모든 분을 통칭하여 <대왕>이라고 높여서 부른다.

그러나 세종은 단종이나 예종, 혹은 철종과 같은 반열에 두기에는 그분의 인품과 업적이 너무도 크고 자랑스럽기에 일반적으로도 다른 임금들과 구분하여 성군聖君세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드라마의 타이틀은 당연히 <성군 세종>이야 옳다. 성군 세종의 경우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업적을 남겼고, 자신의 몸은 병마에 시달려서 시체로 변해가는 데도 자신의 병구완보다 국사를 살피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엄연한 사실이 왜 드라마의 타이틀에 반영되지 않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드라마의 내용이 꼭 사실史實과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터무니없는 일들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드라마는 기본이 픽션虛構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이 같은 상식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방영 중인 <대왕 세종>에는 허점이 너무 많다. 아직은 방송 초기(12회까지 보고 쓴다)인데도 너무 많은 잘 못을 저지르고 있기에 그 중의 몇 가지를 지적하여 앞으로의 과실을 막아주기를 바란다.

1,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태종이 너무 한가하다. 태종은 태종의 시대를 초강력하게 이끌었고, 그것이 곧 세종시대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엄하게도 세자나 중전, 신료들이 태종의 면전에서까지 임금을 무시하는 듯한 간언諫言을 입에 담는 것을 다반사로 여긴다. 당시의 태종에게는 용납될 일이 아니다.

2, 세자(양녕대군)가 드나드는 방은 어디에 있는 무슨 방인지가 분명치 않다. 당시의 정부기관인 이조, 예조, 병조, 호조 등과 같은 건물은 광화문 밖 육조관아에 위치해 있었고, 임금이 불러야 궁으로 들어갔으므로 거리 감각이 살아 있어야 당연한데도 그저 아무데서나 모이고, 헤치고 하는 것이 민망하기 그지없다.

3, 공무에 임하고 있는 세자의 거처(이 또한 애매하지만)에 궐밖에 있는 충녕대군이 사복 차림으로 들어와 앉아서 감 놔라 대추 놔라고 참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충녕대군의 언동에서 임금이 되고 싶어 하는 기미가 보이는 것은 세종을 잘 못 그리는 단초가 된다.

대왕세종의 충녕대군


4, 더 끔찍한 것은 양녕대군이 큰 아버지(定宗)가 총애하는 기녀 초궁장에게 아우들이 지켜보는 백주대낮에 수작을 거는가 하면, 거처에까지 끌어드린다. 이 불륜不倫이 용납될 수가 있는가. 작가는 폐세자의 빌미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변명하겠지만, 양녕이 폐세자가 되는 과정은 <태종실록>에 절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서둘러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5, 또 세자가 명나라 사신의 술상을 엎는 대목은 당시의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를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되거니와 세자가 외교사절에게 그렇게 해도 무사할 수가 있을까. 만에 하나라도 그런 광태狂態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혼’이라고 생각한다면 치기稚氣에 불과할 뿐이다.

6, 더 놀라운 것은 정인지, 최만리 등이 모여서 정도전의 '삼봉집三峰集'을 읽는 비밀결사를 하는 데, 여기에 세자가 참석한다. 정도전은 태종에 의해 참살된 사람이고, 이로부터 4백 년이 지난 고종 때까지도 그의 이름조차 거명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작가는 알고나 있는지? 더구나 아직 그가 죽은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인지와 같은 지식인들이 장소를 옮겨가면서 ‘三峰集’을 읽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7, 세종조의 명신 윤회尹淮는 시장바닥을 헤매는 주정뱅이로 나오는가 하면, 명나라 사신들이 묵는 태평관의 부엌일 까지 참견한다. 윤회는 태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태종 10년 무렵에는 관직의 꽃인 ‘이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이런 사람이 난전을 떠도는 주정뱅이면 어찌되는가.

8, 중전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기 위해 상궁을 시켜 독살을 기도하는 것은 아무리 드라마라도 말이 되지를 않는다.

9, 장차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자로 성장하게 될 장영실이 반정부군에 몸담으면서 명나라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을 포탄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지의 극치이고도 남는다.

10,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가 아들 경령군을 후사로 만들 욕심으로 이숙번을 찾아가 아들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을 청하는 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숙번은 효빈 김씨의 멱살을 잡고 태종에게 끌고가 패대기를 칠 인물이다. 이숙번은 태종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분신이었다.

11, <대왕 세종>이 국민드라마라면 왜 15세 미만에게 주의를 환기하는가. 중학교 2학년이 15세 인데, 이들이 볼 수 없는 <대왕 세종>을 왜 만들어야 하나.


Ⅳ.   MBC-TV의 <이산>의 경우는 비교적 성실하게 잘 만들어지고는 있는 역사드라마임에는 분명하나, 법도에서 벗어나는 몇몇 장면의 과장이 작품천체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역사드라마는 사실과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삼강三綱의 법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이 세 가지를 삼강이라고 한다. 삼강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상존한다. 상하의 관계가 문란해지고, 부자의 관계가 무너지며, 부부의 관계가 깨지면 그 사화가, 그 나라가 천박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21세기를 살면서도 이 법도는 유지되는 것이 우리의 ‘모럴’이다. 역사드라마에서 삼강의 도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을 잘못 호도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정순왕후가 사복을 입고 궐 밖으로 나와서 조정중신들을 몽땅 불러모으는 장소는 대체 누구 집이며,

2, 창덕궁에서 얼마나 떨어진 위치에 있는 지 도무지 석연치 않은데도 정순왕후는 거의 매일 밤 그렇게 나간다. 요즘 식으로 하면 안가인지 모르지만….

3. 그것이 한 번이라도 위험천만한 발상인데 정순왕후는 매회 그런 몰골로 궐 밖을 쏘다니고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는 노릇이고, 어느 날은 ‘주상과 세손 중에서 한 사람을 죽여야 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발설한다. 상식으로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정순왕후의 뜻을 잘 받드는 사람이 대신 말해도 되는 일이 아닌가. 
정순왕후 김여진

4, 사도세자에 관련된 기사를 세초洗草한답시고, 책을 찢어서 시냇물에 헹구는 데, 인쇄된 것은 세초가 되지를 않는다. 그것을 고치자면 주서朱書로 고치는 것이 정도다. 왕조실록이나 정부 문건은 모두 그렇게 고쳤다.

5, 어느 날 밤에는 영조가 곤룡포와 익선관을 벗어놓고, 창덕궁을 빠져 나갔는데도 아무도 모른다. 궐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뭐하였고, 더구나 세손이 그 사실을 모른다면 대궐이 아닌 여염집의 사정과 무엇이 다른가.

6, 정조의 즉위식에서의 정조의 모습은 사료를 읽지 않은 정형적이 잘 못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생각이 나서 울고, 또 우느라 즉위식에 나오지 않으려 했지만, 대신들의 간청에 못 이겨 늦게 나와서 즉위식이 상당히 미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드라마 보다 사실이 더 빛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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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역사를 학문으로 읽는 역사학자들은 사서史書에 적힌 문자만을 읽는다. 그러므로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역사드라마 작가는 사서의 적힌 문자보다는 그 행간行間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를 흐름으로 읽을 수가 있는 것이 역사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권한이자 행운이다.

역사의 어느 대목만을 끊어서 읽으면 앞뒤의 사정이 맞질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역사의 사실을 확인 할 때도 글자(사실)만을 읽지 말고 앞뒤의 사정을 길게 살필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영월 땅에 부처되어 있던 단종이 죽던 날을 <세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노산군(단종)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 3年 10月 21日자. 이로부터 장장 74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승지 이자화李自華의 발설이 「중종실록」에 실리게 된다.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君으로 강등하였다가 이어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중종실록> 26년의 11월 11일자. 단종이 자살했다고 적힌 <세조실록>과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기사가 같은 실록에 실리기까지는 무려 7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와 같이 드라마작가는 역사의 흐름을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 방송국에서는 시청률에만 의지하여 드라마를 평가하려는 단세포적인 사고가 횡행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설혹 시청률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국사정신을 혼란하게 하였다면 역사드라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작방송사의 위상에 상처를 내게 된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설혹 시청률이 높았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이 국민들(시청자)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었다면 작가나 PD는 큰 죄악을 짓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신봉승 작가: 시, 소설, 평론, 연극 극본, 시나리오, 역사 에세이 등을 집필하며 대학에 출강했으며, 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신 작가는 '사모곡', '풍운', '찬란한 여명' '한명회' 등 수십 편의 사극을 써온 한국 TV 사극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9년간 MBC '조선왕조 500년'의 대본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글을 신문기사에서 읽었다. 안그래도 대왕세종은 아예 말도 안되고, 이산도 좀 미심쩍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목조목 지적해주시니 속이 시원했다. 역시 대작가님은 다르시구나.! 싶었다.

그런데 '신봉승'으로 검색해보니 똑같은 기사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게다가 어떤 건 길고, 어떤 건 짧고 길이도 제각각이다. 이상하다.? 똑같은 기사를 이리 여러 언론사에 보내도 된단 말인가 싶어서 자세히 읽어보니 '신봉승 작가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라는 구절이 있는 기사가 있다. 신봉승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직접 가져와서 필요한 부분만 추려서 기사로 낸 것이었다.!

여러 개의 뉴스를 찾아보았지만 출처가 적힌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자신들은 이렇게 남의 홈페이지에서 무작정 퍼와서 '붙여넣기' 신공으로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바꿔서 기사를 내어놓고 네티즌들에게는 '저작권법'으로 협박을 하다니.. 출처조차도 안밝히면서 저작권 운운하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보다.


그 기사 마지막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낯익은 문구가 있었다.

저작권자: XXXXX 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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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한중록]은 '피눈물의 기록'이라는 뜻의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불린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한 여인의 피 어린 기록이라는 의미다.

실제 혜경궁은 그 제목처럼 구절양장 기나긴 목소리로 한을 토해냈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이 그 한 서린 여인의 주장을 진솔하게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혜경궁이 맨 처음 이 책에 붙은 제목은 '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는 뜻의 [閑中錄]이었다. '피눈물의 기록'과 '한가한 날의 기록'. 그 제목의 극단적 차이만큼이나 내용과 진실 사이의 거리도 먼 것은 아닐까?



사실 혜경궁이 [한중록]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한(恨)의 내용은 간단하다. 혜경궁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영조가 자식들을 병적으로 편애하여 세자의 정신병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실제 사도세자 형제들, 아니 영조 일가는 왕족의 일원이었으나 행복한 일생을 보내지는 못했다. 세자의 두 누님인 화평.화협옹주는 세자가 10대 초.중반일 때 요절하였다.그리고 혼자 남게 된 세자의 막냇누이 화완옹주는 훗날 주위의 꾐에 빠져 친오빠인 사도세자와 조카인 세손(정조)의 반대편에 섰다가 끝내 비참한 지경에 빠진다. 이러한 여조 일가의 불행한 삶은 혜경궁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사도세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아무 의심 없이 형성될 트릭이 숨겨져 있다.

혜경궁은 영조가 영빈 이씨 소생 중 큰딸 화평옹주는 매우 사랑했으나, 둘째 딸 화협옹주와 세자는 극도로 미워했다는 점을 가장 애끓게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영조가 옥사 등 불길한 정사를 보고 오면, 꼭 세자를 불러 "밥 먹었느냐?"고 물어 대답을 들은 후, 그 자리에서 귀를 씻고 씻은 물은 화협옹주 집 담장으로 버렸다고 했다. 이 때문에 세자는 화협옹주를 대하면 "우리 남매는 귀를 씻는 차비(差備:사람)로다"라고 자조했다는 것이다.
 
혜경궁은 이처럼 영조를 세자와 화협옹주를 극도로 미워한 부왕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영조실록]은 영조와 그 일가의 관계에 대해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잠깐 검토해보자.


영조가 화평옹주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한중록]과 [영조실록]이 일치한다. 그러나 영조가 불길한 말을 들은 후 씻은 물을 버릴 정도로 저주했다는 화협옹주에 관한 기록은, 한 인물에 대한 기록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두 기록의 내용이 너무나 판이하다.

그렇다면 그토록 미움의 대상이었다는 화협옹주가 병에 걸렸을 때 영조의 거동을 [영조실록]에서 살펴봄으로써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영조 28년(1752) 11월 25일, 영성위(永城尉) 신광수(新光綏)에게 시집간 화협옹주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들은 영조는, 황급히 화협옹주의 사가로 거동하려 했다.

하지만 친딸이라 해도 국왕은 사가로 분병이나 문상을 가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관례이자 법이었다. 게다가 당시 영조 자신이 의원의 치료를 받는 환자이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했고 부교리 채제공도 두 번씩이나 차자를 올려 가지 말도록 간했으나 영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는 호위 군사를 빨리 집결시키지 않았다고 하여 병조판서 김상성과 훈련대장 김성응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고 이들의 부절(符節:군사 지휘권을 뜻하는 표신)을 빼앗으러 간 선전관이 표신(標信:궁중에 급변을 전할 때 사용하던 문표)을 청하지 않았다고 하여 군율을 시행할 정도로 화협옹주의 병환에 당황하며 초조해하였다.

황황히 화협옹주의 사가에 행차한 영조는 밤이 깊도록 환궁하지 않고 그녀의 머리맡을 지켰다. 그러나 문병도 안 되는 판에 임금이 사가에서 밤을 세울 수는 없는 법. 약방은 물론이고 대신들과 승정원 관리들이 모두 영조에게 환궁할 것을 거듭 청했으나 영조는 듣지 않았다.영조가 환궁 준비를 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이틀 후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미명에 화협옹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어둑한 새벽길을 나서려 하였다. 이에 약방 도제조 김약로 등이 영조 자신이 환자임을 상기시키며 만류했으나 영조는 끝내 문상을 고집하였다. 그러자 김약로가 말했다.

"지난해 화평옹주 상사 때 전하께서 적지 않게 몸이 손상되셨으므로 신은 지금까지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영조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내 몸이 손상된 것은 조정 신하들의 당론 때문인데 어찌 딸이 죽어 곡한 것과 연관시키는가?" 

이처럼 [영조실록]은, 영조가 화평옹주는 편애한 반면 화협옹주는 저주했다고 한 혜경궁의 증언과는 명백히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도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화평, 화협 두 옹주를 모두 사랑했다. 물론 영빈 이씨의 첫 소생인 화평옹주를 화협옹주보다 더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영조는 화평옹주에게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의 옛집인 이현궁(梨峴宮)을 주면서 경복궁의 소나무를 베어 수리하게 할 정도로 그녀를 끔찍히 사랑했다. 또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시집간 화평옹주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역시 그녀의 사가로 가서 밤을 새웠다. 화협옹주가 죽기 4년 전인 영조 24년(1748)의 일이다. 영조는 이에 대해 스스로 변명하기도 했다.

"이번만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묘우(廟宇)를 지날 적마다 항상 마음이 답답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부모 마음을 알아주는 자식이 있는 것이니, 며느리 중에서는 현빈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딸 중에서는 화평옹주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갑자기 이 지경을 당했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됨을 애석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다." 

영조는 화평옹주는 물론 화협옹주도 사랑한 자상한 아버지였다. 혜경궁의 묘사대로 "용모도 절숭하고 효성도 있어 아름다운" 화협옹주를 영조가 미워할 이유가 없다. 영조는 화협옹주가 죽은 2년 후 상일(祥日)에도 그녀의 집으로 거동했다. 화협옹주의 명복을 빌면서 이날 하루를 경건하게 지내고 싶었던 영조는, 어가 행차 때 일체의 취타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화협옹주의 옛집에 들러서는 깊은 밤까지 옹주의 명복을 빌다가 신하들이 여러 번 환궁을 간청한 끝인 깊은 밤에야 돌아왔다.

화협옹주의 기일을 경건하게 보내기 위해 세심하게 배려하는 이런 모습 어디에서도, 귀 씻은 물을 담장 너머로 던지며 저주하는 영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영조는 이처럼 다정다감한 성품이었고, 그답게 일가 모두를 사랑했으나 그중에서 첫딸인 화평옹주와 효장세자의 부인이자 큰며느리인 현빈조씨에게 더 마음이 쏠렸음을 솔직히 고백하였다.

실제 영조는 화평옹주 못지않게 현빈 조씨를 무척 사랑했다. 그래서 영조 27년(1751) 11월, 현빈이 세상을 뜨자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무신년(효장세자가 죽은 해) 이후로 내가 의지한 바는 현빈이었는데, 이제 그가 또 세상을 뜨니 슬픈 감회를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영조가 현빈을 이처럼 아낀 것은 어려서 남편을 잃은 현빈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서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행실과 그녀의 친정에 대한 남다른 호의 때문이기도 했다. 영조는 현빈의 행실을 마음에 꼭 들어 했다. 그래서 영의정 김재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내가 일찍이 삶은 밤을 좋아하여, 갑자기 삶은 밤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현빈이 곧바로 진상하였다. 그 뒤에 대비의 하교를 들으니, 현빈이 미처 신을 신을 사이도 없이 곧바로 부엌에 들어가 친히 삶아 왔다고 한다. 이것이 효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친정 어른이 고관이 되면 기뻐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현빈은 그렇지 않았다. 현빈은 영돈녕(領敦寧:현빈의 숙부 조현명)이 대신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우리 숙부는 왜 물러가서 쉬지 않을까?'라고 말했으니 그 성품을 알 수 있다"

현빈의 친정인 풍양 조씨 사신(思愼)파는 시종일관 영조의 탕평택에 호의적이었다. 현빈의 아버지 조문명(趙文命)과 숙부 조현명(趙顯命)은 영조 때 탕평택을 이끌었던 소론 영수이자 탕평 영수였다. 그럼에도 현빈은 척리(戚理:임금의 외척)가 대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현빈과 그 집안의 이런 자세가 영조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문명과 조현명 형제, 그의 아들들은 시종일관 사도세자를 지지했다. 훗날 사도세자와 결탁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 조재호도 바로 사도세자의 형수인 현빈 가문 사람이다.

따라서 혜경궁의 말대로 영조가 화평옹주만 사랑하고 화협옹주는 극도로 미워한 정신병자라면, 현빈 조씨를 사랑한 반면 혜경궁은 극도로 미워했어야 이치에 맞다. 그런데 헤경궁은 영조가 사도세자는 미워했어도 자신은 사랑했다고 구구절절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영조실록]에 영조가 현빈 조씨를 총애했다는 기록은 자주 나오지만 혜경궁을 사랑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한 옹주, 아니 영조 일가에 대한 [한중록]과 [영조실록]의 기록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두 기록 중에서 어느 쪽이 진실, 혹은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영조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이런 성품이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영조는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에 그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했던 애민의 군주였다. 그는 심지어 당시 사회의 가장 최하층인 노비의 처지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사노비의 형편이 말도 못하게 어려워 남종은 장가를 못 가며 여종은 시집을 못 간다. 부부가 있은 후에야 부자가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노비의 세금을 반으로 감면하라"

이처럼 당시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노비이게까지 세심산 배려를 베풀 줄 아는 영조가, 자신의 핏줄인 자식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물며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미워할 까닭이 있었을까?

영조가 극진히 아꼈던 화평옹주는 시종일관 세자의 편을 든 자상한 누이였다고 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 화평옹주가 영조와 세자 사이에서 갈등을 풀어주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도 화평옹주의 사망 시기를 고려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영조의 통곡 속에 화평옹주가 죽은 것은 세자가 대리청정하기 6개월 전인 영조 24년 6월로, 세자 나이 열네살 때였는데, 그때까지 영조와 세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조는 화평옹주가 죽은 6개월 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자는 기품이 뛰어나지만 뒷날 과연 어떻게 행동할 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내가 살아 있을 때 정사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 

이처럼 여조는 세자의 기품이 뛰어나다고 보았다. 실제 두 부자 사이에 영조가 극히 편애했던 화평옹주가 나서서 중재할 만큼의 갈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열네 살짜리 외아들과 쉬흔아홉 살의 늙은 아버지 사이에 갈등이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세자가 "겁이 나서 못 하면 (영조가) 남 보는 좌중에서 꾸중하시고 흉도 보셨다"라고 하여, 영조가 시종 세자를 미워한듯이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영조는 대신들에게 대리청정시키는 또 다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보통 사람도 부형(父兄)이 있으면 타인이 그 자제를 업신여기지 못하는 법이다. 원량이 어떻게 시국의 형편에 따른 편벽한 내용의 상소를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뒤에서 세자의 기반을 세워주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이 세자에게 든든한 반석이 되어주기 위해서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영조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세자에게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부담이 비극적 결과를 가져온 주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혜경궁의 기술 중 또 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선희궁이라 불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 대한 부분이다. 영빈 이씨는 천한 나인(內人)출신이었다. 혜경궁은 세자궁 나인들이, 출신이 미천하다 하여 선희궁을 업신여겼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다른 궁 소속의 궁녀들이라면 몰라도 세자를 모시는 궁녀들이 세자의 생모를 업신여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혜경궁은 [한중록]을 쓸 당시 사랑하는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오열하는 20대 청상과부가 아니었다. 당시 혜경궁은 궁중 깊숙한 곳에서 영조. 정조. 순조 세 임금의 치세 60~70여 년을 지켜본 70대의 노회한 정객이었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후 승승장구해 형제 정승의 지위를 누리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가 되었으나 공교롭게도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혜경궁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직후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이유가 참으로 기구하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이다(이를 '병신처분'이라 한다). 세상의 시각 또한 혜경궁을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惡妻)로 의심하였다. 아마 이 몰락이 없었다면 혜경궁은 [한중록]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


이러한 처지에서 쓰여진 한중록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내포할까??
한중록에서는 영조는 변덕이 심하고 치매 때문에 사람도 못알아봤다고 나오며, 사도세자도 광폭했다고 나오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MBC 사극 이산에서는 한중록의 기곡을 받아들여서 영조가 치매인 걸로 묘사하고 있던데... 과연 그래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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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종조에 살았던 조선 최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 어우동...


제가 아주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책, '맹꽁이 서당'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기생(인줄 알았어요.)
 어우동(어을우동).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국민배우 안성기씨까지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되어 왠만한 사람들도 그 이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테지요.
그래도 안성기씨가 나오는데... 너무 Sex 쪽으로만 중점을 둔 듯한 포스터가 마음에 안듭니다.-_-;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 어우동 완벽 영화화 "왕에서 종까지 그녀의 품안에 모든 남자는 단지 노리개에 불과했다."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 왕에서 종까지 그녀 품안의 모든 남자는 단지 노리개;;


제작 : 이태원
감독 : 이장호
원작 : 방기환
각색 : 이현화
촬영 : 박승배
음악 : 이종구
출연 : 이보희, 안성기
 
태흥영화 주식회사 제작
 
1985년 9월 28일 단성사 개봉


실록에 의한 어우동 일지
어우동 영화 포스터



이처럼 주로 '야한 영화의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해서 성종 시대의 다양한 야사 인물 중의 하나려니... 했던 사람인데.. 최근 드라마 '왕과 나'에서 미스코리아 출신 김사랑이 어우동 역으로 나온다고 해서 자료를 한 번 뒤져보니..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입니다.

야한 소설 속의 남자들이 상상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갖춘 여자인 것 같습니다.. 하여튼.. 대단한 여자네요.ㅋ


조선 오백년 역사에서 풍기문란죄로 사형당한 여인



출처 :  김용삼의 조선왕조 실록

조선의 3대 섹스 스캔들(제 3탄) 
닥치는 대로 간통하다 교수형 당한 어을우동(어우동)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조선시대 3대 섹스 스캔들의 마지막 주자는 어을우동(혹은 어우동)이다.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유명세를 탄 이 여성의 남성 편력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들여다 보기로 하자.


어을우동은 성종 시절 승문원 관리 박윤창의 딸로서 태강수(수는 왕실 친척에게 내리는 작호) 이동(李仝)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 잘 나가는 집안의 여성이었다. 그런데 바람기가 몹시 심해 버림받은 후 남자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간통하다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교수형으로 일생을 마감한 희대의 음녀(淫女)다.

어을우동 사건은 성종 11년 7월 11일, ‘어을우동이 수많은 남자와 간통하고도 승복하지 않으니 국문해 달라’는 의금부 보고로 시작된다.

9월 2일 실록에는 어을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의 명단이 줄줄이 기재되어 있으니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공무원 이기, 이난, 구전, 공부하는 유생 홍찬과 이승언, 서리(하위직 관원) 오종련과 김의형, 전의감 생도(왕실병원 실습생) 박강창, 평민 이근지, 노비 지거비 등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어을우동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사람과 관계했음을 알 수 있다. 의금부는 어을우동의 형량은 곤장 100대에 유(流) 2000리(서울에서 2000리 떨어진 곳에 유배를 보내는 것)에 해당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 시절에도 음행을 일삼은 어을우동에 대한 강경론과 동정론이 팽팽하게 맞서자 성종은 여러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은 성종 11년 9월 2일 실록.

<정창손:
“어을우동은 종친의 처이며 선비의 딸로서 음욕을 자행한 것이 창기와 같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태종, 세종 때 선비의 부녀로서 음행이 매우 심한 자는 간혹 극형에 처했지만 그 후로는 모두 율에 의해 단죄했으니 어을우동도 율에 의해 단죄해야 합니다.”

김국광·강희맹:
“어우동은 종실의 부녀로서 친척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서로 간통해서 인륜을 손상시켰습니다. 청컨대 중국 조정의 예에 의해 저자에 세워 도읍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서 징계가 되게 한 후에 율에 따라 멀리 유배하소서.”

윤필상:
“어을우동이 강상을 무너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으면 음란한 풍속을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의 정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을 자행하여 춘추시대 정나라, 위나라의 풍속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청컨대 이 여자를 큰 벌에 처하여 후세 사람을 경계하소서.”

홍응·한계희:
“국가에서 죄를 정할 때는 한결같이 율문에 따르고, 임의로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형장을 강등하여 관대한 법전을 따랐으며 법외로 논단한 적은 없었습니다. 어을우동의 추악한 행실은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되나 임금의 은덕은 죽음 중에서도 살릴 길을 구해야 합니다. 청컨대 율에 의해 결정하소서.”

이극배:
“태종조에 승지 윤수의 처가 맹인 하천경과 간통하고, 세종조에 관찰사 이귀산의 처가 승지 조서로와 간통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 후 판관 최중기의 처 유감동이 창기라 칭하면서 음행을 자행했는데, 사형을 감하여 유배를 보냈습니다. 지금 어을우동은 종실의 처로서 음욕을 자행하기를 꺼리는 바가 없었으므로 극형에 처해야 하나 율에 의하면 사형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청컨대 사형을 면하여 먼 곳에 유배하소서.”>

이처럼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하자 임금이 결단을 내렸다.

<어을우동은 음탕하게 방종하기에 꺼림이 없었다. 이런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이 어떻게 징계되겠느냐. 의금부에 명하여 사형시켜라.”>


꼬리쳐서 맞아들여

성종 11년 10월 18일 어을우동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어울우동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녀는 처음에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을 갔는데 행실이 과히 좋지 못했다. 이동이 은장이를 집으로 불러 은그릇을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계집종처럼 가까이 하려 했다. 태강수가 그것을 알고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친정으로 돌아가 슬퍼하며 탄식했다.

그때 한 계집종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련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 관리가 되었고 용모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가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주인을 위해 불러오겠습니다” 하니 어을우동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련을 데리고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했다. 또 방산수 이난의 집 앞을 지나다가 그와 간통했는데 정이 매우 두터웠다. 이난이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이름을 새겼다.

또 단오날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 서쪽에서 그네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 이기와 눈이 맞아
정을 통했다.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내금위(왕궁 수비대) 구전은 어을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을우동이 정원에 있는 것을 보고 담을 뛰어넘어가 간통했다.

생원 이승언이 일찍이 집 앞에 서 있다가 어을우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 아니냐” 하니 계집종이 “그렇습니다” 했다. 이승언이 뒤를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 집에 이르러 침방에 들어가 비파를 가져다 탔다. 어을우동이 성명을 묻자 “이생원이다” 하니 “장안의 이생원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했다. 이승원이 답하기를 “춘양군의 사위 이생원을 누가 모르는가” 하며 마침내 동침했다.

홍찬이 처음 과거에 올라 시내 구경을 하다 방산수의 집을 지날 적에 어을우동이 살며시 엿보고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뒤에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려 홍찬이 마침내 그녀 집에 이르러
간통했다.

서리 김의형은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 그녀를 희롱하며 집까지 따라가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서리를 몹시 사랑하여 이번에는 등에다 이름을 새겼다.

밀성군(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아들)의 종 지거비가 이웃에 살았는데 어느 날 새벽, 어을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하여 “부인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크게 떠들어 이웃에 알리면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오” 하니 어을우동이 두려워해 안으로 불러들여
간통했다.

이때 방산수 이난이 간통사건과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유감동이 많은 간부(奸夫)를 연루시키는 바람에 사형을 면했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 없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간통한 남자를 많이 열거하고 방산수 이난,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정숙지 등을 끌어댔으나 증거가 없어 죄를 면했다.

사람들이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도 음행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그 어미가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간통사건이나 섹스 스캔들에 대해 극형으로 다스리고 유배 보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들도 스캔들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으니, 인간 사이의 욕정 문제는 발본색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입력날짜 : 2006-08-21 (11:46)








다음은 어우동을 찾다가 발견한 다른 주인공, 유감동이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을 만나서인지.. 운이 좋은 것인지, 교수형은 피해갔군요.



조선의 3대 섹스 스캔들(제2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남자와 간통한 유감동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같이 자다가 소변을 본다고 핑계하여 김여달에게 도망했습니다.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죄를 저질렀으니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김여달은 1등을 감형하여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으로 귀양을 보낼 것이며, 간통한 최중기의 매부 이효랑은 곤장 100대, 오안로는 자자(얼굴에 칼 자국을 내는 것), 기타 간통한 자들은 곤장 60~100대를 쳐야 합니다.”








사족.

어우동, 유감동을 비롯하여, 인수대비, 정순왕후, 문정왕후 등... 조선시대 유명한 여자들은 모두 악명 높은 사람들 밖에 없네요. -_-;; 이것도 남존여비 사회의 편견에서 온 것인지 궁금하군요.

제가 알기로는 성종과 어우동보다 성종과 기생 소춘풍과의 이야기가 더 유명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일단 유명하니까 어우동을 고른 것일까요?


드라마 왕과 나에서 어우동과 성종의 동침 장면

드라마 왕과 나에서 어우동과 성종의 동침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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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정조대왕 사망 당시의 정황을 가공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다룬 드라마 '한성별곡'과, 세손 시절로부터, 영조 사망 이후,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는 과정까지를 포함한 '이산', 케이블 TV CGV에서 10월 말부터 시작한 드라마 '정조 암살 미스테리 8일'(이하 8일)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방영되는 것을 보며,  언론에서는 '정조 열풍'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내면서 열심히 비교하고 있는데 나 역시도 '누가 제일 나을까, 어떤 사람이 잘 어울릴까, 각자 어떻게 다룰까?'에 대해서 궁금했으니 사람 심리는 다들  비슷한가 보다.


한성별곡은 제대로 보지도 않았고, 이산은 진행 중이고, 8일은 이제 막 시작했으니 제대로 된 작품성 비교를 하기에는 이른 것 같고, 단지 주요 인물들의 외형적인 이미지에 대해서 느낀 점만 적어 보련다.


1. 정조

한성별곡 : 안내상씨는 음란서생에서의 찌질한 임금 역과 소문난 칠공주에서의 찌질한 재혼남(왕선택?) 역 때문에 한번도 멋있다는 생각은 안했는데 한성별곡에서는 고뇌하는, 한맺힌 정조 임금을 잘 표현한 것 같다.

8일  : 김상중씨는 늘 좋은 연기자라고 생각했지만 근래 들어서 두사부일체 시리즈 + 내 남자의 여자에서 매일 감자타령, 밥타령하는 바람난 교수 역할 때문에 왠지 모르게 좀 웃겼지만 역시 연기파 답게 뭐든지 잘해내신다. 사진만 봐도 카리스마가 좔좔.

이산 : 이서진씨는 다모에서말고는 한번도 멋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사극 맵시는 역시 기대 이상이다. 안내상씨는 단순히 지적인 문인군주로서의 모습만 보여주었다면, 이서진씨는 다재다능한 무인군주로서의 모습도 손색없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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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조

한성별곡 : 안나오심.

8일  : 한중록에 나온 이미지와 비슷한 변덕스럽고, 치매끼 마저 있는 이미지를 고른 것 같다. 영조는 그간 사극에서 굉장히 정없고 노망끼 넘치는 모습으로만 그려졌는데 이런 인식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

이산 : 내가 상상하던 영조의 모습과 가장 흡사하다. 혈육의 정에 이끌리면서도 경종 독살설이라는 원죄의 중심에 서있는 만큼 권력 앞에서는 냉정한 모습, 신하들 앞에서는 노회한 정객 + 백성을 두루 살피는 어진 임금. 세손 입장에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자 그나마 기댈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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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순왕후

한성별곡 : 내 생각과 좀 달랐다. 정애리씨의 연기나 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었지만 너무 대놓고 사악한 이미지라서 다소 위화감이 들었다.

8일  :  아직 못봤다. 보고 나서 추가 예정.

이산 :   여기서의 김여진씨 모습이나 이미지는 전혀 상상도 못한 이미지인데, 정말 설정을 잘 한 것 같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달랐으니 영조가 확실히 속아 넘어간 게 아닐까.. (이건 작가의 생각인지 이병훈 피디님의 생각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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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혜경궁 홍씨

한성별곡 : 안나왔음.

8일 : 정애리씨.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같은 시대를 다룬 사극 한성별곡에서는 정조를 해치려하는 정순왕후로 출연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얼마 전의 드라마에 한 번은 양계조모(양 새 할머니;;)로, 한 번은 정조의 친모로 나오니 이것도 재밌는 인연이다. 그런데 우찌된 것이... 정순왕후로 나올 때랑 별 구분이 안된다. 작가들은 더이상 혜경궁 홍씨가 '하늘아 하늘아'에서 하희라가 맡은 불쌍한 피해자로만 보이지 않는가 보다.

이산 : 대장금의 최고 악역 최상궁으로 나왔던 견미리씨. 그녀는 피해자가 가해자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다. 그저 남편에 대한 태도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세손에 대한 모정만은 살아있는 어머니로 나오는데, 이는 제작진들이 그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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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조(세손) 암살 혹은 각종 꿍꿍이를 꾸미기 위한 회합 장면

한성별곡과 이산에서 보여주는 구도가 거의 똑같은데.. 이는 고증인지(우째 알고?) 아니면 우연히 겹친 것인지, 아이디어의 부재로 복제한 것인지 궁금하다. 어쨋든 둘 다 멋있지만 멀리서 보여주는 구도는 한성별곡이 한 수 위, 가까이서 긴장감 조성하는 데는 이산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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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회합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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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별곡 회합장면

 


6. 드라마 포스터.. 셋 다 멋있다.

얼핏 본 바로는 세 드라마 모두 색감에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아름답고 우아하다. 어두운 시대의 비밀스러운 사건을 다루기에 극의 분위기도 차분하고 잔잔하다. 형광등 켜논 듯한 S사의 사극팀은 이런 것 좀 배워야 할 것 같다.

한성별곡 : 정조가 주인공이 아닌 만큼 사랑하는 세 남녀를 내세운 슬픈 분위기를 보여 주고,

8일 : 아직 내용은 모르지만 거대한 음모가 있는 듯한 느낌의 구도이고,

이산 : 대장금을 연출하신 이병훈 감독님 답게 포스터에서 왠지 꿈과 희망이 넘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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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방송사에서 시청자를 놀리는 것인지 계속 작품이 겹치고 있다. 작년에는 황진이, 올해는 정조, 내년에는 일지매랑 세종대왕까지. 골고루 좀 보여주면 어디가 덧나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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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조선왕독살사건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왕독살사건으로 재판 인종에서 고종까지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의 임금들을 조명한 저서.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 서-제14대 선조,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소현세자, 사라진 북벌의 꿈-효종 등 조선조 9인의 임금과 세자 에게 뒤따라다닌 사인의 의혹과 진실을 파헤친 책.

목차
<누가 왕을 죽였는가> 개정판에 부쳐

1.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제12대 인종) - 이질 증세와 주다례
폐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서른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백돌아! 백돌아!
홀로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존하겠소
문제의 '주다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2.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제14대 선조) - 중풍과 찹쌀떡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주상의 뜻
어젯밤엔 편히 잤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문제의 찹쌀밥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사실처럼 굳어진 독살설

3.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소현세자) - 학질과 의관 이형익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볼모로 가는 두 형제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부정父情 아닌 부정否定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아담 샬과의 만남
비운의 귀국길
인조에게 쏠린 몇 가지 의혹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세자 일가의 비극
조선의 좌절, 세자의 좌절

4. 사라진 북벌의 꿈(제17대 효종) - 종기와 어의 신가귀의 산침
소현세자의 유산
용상에 가려진 효종의 아킬레스건
모든 것은 북벌로
효종의 딜레마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손을 떠는 어의 신가귀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5. 예송시대에 가려진 죽음(제18대 현종) - 복통과 뜸 치료
효종의 모후 자의대비과 입어야 할 복제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4가지 이유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예론을 금하노라
며느리상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의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6. 이복형제의 비극(제20대 경종) -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아이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두 모자의 운명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왕세제를 책봉하소서
경종의 진심
목호룡의 고변
적발하여 정법하라
게장, 생강 그리고 인삼차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

7. 개혁군주의 좌절(제22대 정조) - 홧병과 연훈방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3대 모역 사건
규장각과 장용영 그리고 화성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아서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훈방 처방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정순왕후의 세상

8.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제26대 고종) - 해외 망명 계획과 식혜
홍선군의 아들 명복
고종과 일본의 악연
국내의 혼란과 일본의 내정간섭
일본의 병탄과 고종의 대응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고종의 해외 망명 작전
마지막 군주의 최후
고종이 해외로 망명했다면

조선엔 왜 독살설이 많을까

[알라딘 제공]


책소개

"누가, 왜 조선의 왕들을 독살했나"

제12대 인종(1515-1545), 제14대 선조(1552-1608), 소현세자(1612-1645), 제17대 효종(1619-1659), 제18대 현종(1641-1674), 제20대 경종(1688-1724), 제22대 정조(1752-1800), 제26대 고종(1852-1919).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왕조에서 독살설에 휘말렸던 임금은 무려 8명이나 된다. 조선왕조가 배출한 왕이 27명인 것을 감안하면 조선은 지구상의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던 왕조였다.


누가, 왜 왕들을 죽였나.

실제로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에겐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는 꼭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했고,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독살설은 또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집중돼 있다.
왜 그럴까?

<사도세자의 고백>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등 숱한 대중적 역사서로 인기몰이를 한 바 있는 이덕일 숭실대 교수는 ''누가 왕을 죽였는가''의 개정증보판으로 내놓은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에서 흥미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 망했어야 할 조선왕조의 기형적인 정치행태 ''독살''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우선 역사가 ''너무'' 장구했다. 세계 역사상 대개의 왕조는 200~300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는데, 조선은 쇠퇴기ㆍ멸망기에 접어든 뒤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라는 것이다.

무릇 한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에서 시련을 극복 못하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야 하는데, 유독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돼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살아 있었다.

이덕일 교수는 조선왕조의 쇠퇴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본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일본의 침략에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을 두고 혼자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부터 조선의 사회체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지배 계급은 군림의 이유를 상실했다는 설명이다. 백성들이 국왕인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지른 행위는 사대부→일반백성→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제 자체를 부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는 사대부들의 권력 획득 방식 ''독살''

개국 초 조선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가리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 국가였다. 그러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포 납부로 군역 면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1488-1544)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포 납부로 군인 고용)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병역의무가 면제됐다.

저자는 "개국 후 200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미 생명 사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고 평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고, ''국왕 독살설''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중 하나다. 독살설이 유독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부터 본격적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약한 왕권(王權)과 명분 없는 신권(臣權)의 합작 ''독살''
 
조선 후기 들어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왕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닌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 신하들은 왕을 적당(敵黨)의 일원으로 봤다.

저자는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로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며 "오히려 끊임없이 신하들의 견제를 받는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임금은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으며, 신하들은 당론에 따라 얼마든지 특정 임금을 배척했다. 신하의 임금 선택을 ''택군(擇君)''이라고 하는데 국왕 독살설이야말로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의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반정(反正)이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 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저자는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독살"이라며 "독살설이야말로 왕조의 말기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 이후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프레시안 2005.07.29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이제서야 소감을 쓴다. 남들처럼 근사한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글솜씨도 없고 길게 쓰는 재주는 더더욱 없어서 미루고 미뤘는데 요즘 MBC 드라마 '이산 (정조)'를 보면서 그때 느꼈던 흥분을 다시 느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책장을 넘기면서 숨이 가쁠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서를 좋아해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시기에 마침 저 책을 읽은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조선왕 독살사건'이랑 '누가 왕을 죽였는가', 둘이 다른 책인 줄 알고 두 권을 다 골랐었는데 알고 보니 전자는 개정판이었다. 처음에 '누가 왕을 죽였는가'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그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좀 점잖게 고쳐서 재판했다.

특히 내가 흥분했던 부분은 인종, 경종, 정조 이야기다. 책 읽기 전부터도 조선의 왕 중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책 읽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숨을 씩씩 몰아쉬곤 했다. - 난 지금도 사극을 보거나, 인수대비나, 문정왕후, 선조, 인조, 정순왕후, 망할 놈의 노론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른다. 몇백년이나 된 일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화를 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ㅋ

불쌍한 정조대왕님.ㅜㅜ 
인생 참 험난하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죽었고, 외할아버지란 사람은 역적들이랑 짜고 사위랑 손자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고, 친할아버지 영조는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맨날 천날 충성심을 시험하질 않나...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의복을 갖추고 잠자리에 들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루 4시간 이상을 잔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을 잇는 천재군주, 만능군주,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대왕께서 그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 역사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ㅜㅜ

정조 사망시에 아니 정조 대왕 승하시에 그 옆에 정순왕후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책을 100% 믿기도 어렵지만 정순왕후 같은 여자면 능히 정조를 독살하고 남았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영조가 정조를 꽤나 아낀 걸로 나오는데... 만약 진짜 드라마 '이산' 같았다면 영조도 참 불쌍한 왕이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뒤늦게 후회를 하니 영조는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오죽 참담했으랴.


이 책은 조선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더욱 즐길 수 있다. 어릴 때 인상깊게 읽었던 왕후 간택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순왕후-_-;;는 알수록 망할 X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것이다.

아..  혈압올라.ㅠ 글쓰다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지네..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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