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노무현 대통령의 독도 관련 명연설 동영상




보다 보면 속이 시원해지고 가슴이 끓어올라서 제가 좋아하는 영상입니다.



다음은 이명박 대통령의 외교술에 대한 영상입니다.

영상이 하도 기발하고 그 안에 제가 찾던 장면이 많아서 가져오긴 했는데 이명박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의도는 아닙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잘못한 것 있잖아요. 하지만 이 영상을 보다 보니... 대통령, 한 국가의 원수가 다른 국가 원수 앞에서 적어도 대한민국이 열등국가인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네요.





동영상 내용처럼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제발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휴...
자존심도 없나봐요...



관련글
2008/03/02 - '독도는 우리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반응형
반응형


영조금보

 

* 금보란?
임금의 인장은 의식용인 어새와 어보, 집무용인 국새와 옥새로 구분된다.
어보는 재질에 따라 금보와 옥보가 있으며,
제왕의 시호諡號, 존호尊號, 묘호廟號, 휘호徽號를 새긴다.

위 금보는 영조가 사용한 금보이다.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사도세자가 8세 때 쓴 글씨

 

사도세자는 3세 때부터 서연교육을 시작했다.
보통 7~8세가 되야 세자교육을 시작하는 전례에 비춰볼 때
사도세자는 조선 왕조 역사상  유례없는 조기교육을 받은 것이다.

영조는 왜 이렇게 일찍 세자에게 조기교육을 시킨 것일까?
 소장처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도세자가 10세 때 장인에게 보낸 안부편지

 
사도세자가 10세 때 혜경궁 홍씨와 혼인한 후 장인에게 보낸 문안편지이다.
그림이 미리 인쇄되어있는 시전지에 편지를 썼다.

처가에 보낸 편지를 통해
아이를 출산한 부인의 건강을 걱정하고, 장인의 생일까지 직접 챙기는 등
사도세자의 자상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병세를 호소하는 편지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
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
                                                                      [1735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 이 서첩은 일제강점기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구입해서 일본에 가져갔고, 최근 서울대 권두환 교수가 이 서첩의 존재사실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영조, 장조(사도세자), 정조 3대의 서첩이 남아있는데, 이 중 사도세자가 처가에 보낸 편지는 총 26통이다.
 소장처   일본 야마구치(山口) 현립도서관


 서시춘방관 (書示春坊官)
 

 영조 23년 (1747), 세자가 13세 때 영조가 세자시강원(춘방) 현판에
걸어둔 친필글씨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평암집 (平庵集)
 
사도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친 설서(說書) 권정침(1710~1767)의 문집.
사도세자가 죽을 때까지 서연(세자교육장)에서 주고받은 문답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나경언이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을 고변한 당일의 상황 등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단서가 기록되어 있다.
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어제사도세자묘지문 (御製思悼世子墓誌文)
 
사도세자가 죽은 해인 1762년, 7월 영조가 직접 구술한 묘지문.
영조는 세자가 죽자 사도(思悼: 안타깝게 생각한다)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지문을 기록하게 했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타일렀으나 제멋대로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는데..."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 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

"어찌 내가 좋아서 했겠는가? 어찌 내가 좋아서 했겠는가?"


글쎄... 과연 이것만이 사도세자를 죽인 진정한 이유였을까?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만인소란?
조선시대 유생들의 집단 상소 가운데 하나인 '만인소(萬人蔬)'
만여명이 함께 서명해서 올리는 상소이기 때문에 그만큼 여론의 파급력이 크다.


영남유생 만여명이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며 왕으로 추존해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는 정조대부터 철종대까지 4차례나 이루어졌다.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은 후일 첨예한 정치적 이슈를 이루었다.
 소장처  안동 한국국학진흥원


※이 중에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영남만인소입니다.
정조가 저것을 받아 보았을 때 얼마나 감동적이었을지..
그때의 광경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 이산에서는 영남만인소가 등장할 지 궁금하네요.
반응형
반응형

영조 계비 정순왕후 간택 일화 -  네가 돌면 되지 않느냐?


이산 정순왕후
조선 제21대 영조께서는 첫째 왕비 정성황후 서씨(貞聖王后 徐氏)와 연잉군(延礽君) 시절 11살 때(1704년)  13살의 달성 서씨와 가례를 올리고 서씨는 혼인한 후 왕위에 뜻이 있던 영조와 동고동락한 사실상의 동지였다.

경종 시절 서씨의 조카 서 덕수가 노론 4대신<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중추부판사 조태채(趙泰采), 중추부영사 이이명(李頤  命)>이 연잉군을 국왕으로 추대했음을 전하고 또 이 때문에 사형까지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서씨의 친정은 영조를 즉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드디어 경종 4년 소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위기를 넘어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히도 정성왕후 서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영조는 결국 세 명의 후궁들에게서 2남 7녀를 낳았느데 제1후궁인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와 두 명의 옹주를, 제2후궁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와 화평옹주, 화순옹주를, 제3후궁인 귀인 조씨가 화유공주를, 마지막 후궁인 숙의 문씨가 화령옹주와 화길옹주 등을 낳았다.

일곱 명의 딸 중 맏딸은 유아기 때 사망했고, 둘째 딸 화순옹주는 남편 월성위가 죽자 그 뒤를 따라 굶어 죽었다. 다섯째 딸 화협용주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첫아들인 효장세자도 영조가 즉위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열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다음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둘째 아들 사도세자였다.

서씨는 후궁들의 몸에서 난 소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도세자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쏟으며 돌보았다. 그러기에 만일 서씨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면했을 지도 모른다.

1757년 2월 왕비 정성왕후가 소생이 없이 66세를 일기로 먼저 세상을 뜨자 영조는 장차 자기도 홍릉[弘陵] 왕비 옆에 묻히고자 에 허우(虛右:오른 쬭에 자리를 비워두는) 제도를 쓰도록 하였을 정도로 애통해했지만,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정순왕후(貞純王后)의 揀擇(간택)에 얽힌 逸話(일화)! 

어린 시절 유명인 이야기에 종종 등장했던 왕비 간택 이야기의 유명한 일화가 악덕 왕비 정순왕후인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녀는 뒤에 악명을 끼쳤지만 머리만큼은 명석했던 모양이다. 후일의 악행이 없었다면 아주 현명한 왕후로 영원히 역사에 남았겠지만 알고 보는 것이라 순수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1.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당시 왕비 후보는 10명.  드디어 간택의 날. 여러 양반가의 처녀들이 선을 보기 위해 궁녀가 안내하는 방에 들어갔다. 방에는 방석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처녀들의 아버지 이름이 쓰여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영조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앉아 있는 여러 처녀 가운데 어찌된 일인지 김한구의  딸만이 앉아 있지 않고 서 있었다. 궁녀들이 다가가서 서 있는 규수의 귀에다 대고 재촉을 하였으나, 그 처녀는 여전히 서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영조는 직접 물었다.
“다른 처자는 아버지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아서 판단하기 좋게 하는데 김한구의 딸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그대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여 앉지를 못하는고?”

그 처녀는 궁녀에게 가만히 귓속말을 하였다.
“아무리 간택하는 자리라고 하지만, 방석 위에 어버이의 성함자(姓銜字)를 써놓았으니 그것을 어떻게 깔고 앉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이름이 수놓인 것은 바로 아버지가 아닌가?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는 불효라는 말이다. 왕비가 안되어도 좋다. 효녀만 되면 된다. 효녀 이름이 밖에 크게 소문나지 아니하여도 딸로서 도리만 다 하면 된다. 왕비 이전에 딸노릇하는 딸이 되겠다는 말이다. 영조는  이것을 알고 묵묵히 있었다. 속으로는 갸륵하기도 하고 맹랑한 대답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2.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이 드는고?

그리하여 다시 간택이 진행되었는데 영조가 규수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넘기 힘든 고개가 무슨 고개인가?”

한 규수는 "대관령고개입니다."
다른 규수는 "추풍령고개입니다."라고 하는 등  높은 산과 고개의 이름을 말하였다.

그러나 김한구 딸은 "보릿고개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답하였다.

이유를 묻자, “봄에 곡식이 떨어져서 보리가 나올 때까지 배고픔을 참고 넘어야 하는 고개인 보릿고개가 가장 힘들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보리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끼, 아니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리고개이니 백성들에게는 그 어떤 고개보다 넘기 힘든 고개가 보리고개일 것이다. 가난을 신물나게 겪어본 사람만이 보리고개가 가장 힘이 든 고개라고 할 것인데 바로 이 김처자가 그리 말을 한 것이다.

(※실제로 그 김규수는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몰락한 양반의 딸로 충청도 서산 당진 홍성 쪽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살다가 못 살아서  서울에 가면 아는 사람 연줄로 좀 벼슬이나 살까 한 아버지 뜻을 따라 가마를 빌려타고 보모랑 같이 서울에 왔는데 도중에 노비와 숙식비가 없어서 갖은 봉변을 다 당하고 급기야는 벼슬을 살러가는 초행원님에게서 돈 좀 얻어  가죽옷도 얻어 입고 한겨울에 상경을 한 적이 얼마 전에 있었다. 그렇게 빈한한 김한구는 어찌어찌하여 벼슬을 살고 마침내 그의 딸이 이 간택에 뽑히게 된 것이다.)

모름지기 나라의 국모인 왕후가 되려면 백성이 겪는 그 고통이라는 대명사인 보리고개를 알아야 할 것이다.
 

3.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제일인고?

영조의 질문이 계속 되었다. “그대들은 무슨 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가?”

이번에도 다른 처자들은 '첫번째 간택 규수는 목련꽃이라고 하고, 두번째 간택규수는 연꽃 등 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꽃을 들었다.

그런데 김한구의 딸은 다른 말을 하였다.
“목화가 가장 좋으니, 옷을 지어 온 백성을 따뜻하게 입힙니다.” 

목화꽃이라? 이 꽃은 화사하고 예쁜 꽃은 결코 아니므로 일반 상식으로는 맞는 답이 아니라고 하겠는데, 그 꽃이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는 왕비라도 백성이 헐벗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왕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4.
영조가 다시 묻기를 “무엇이 가장 깊은가?”라고 하자 대부분의 처녀들은 ‘산’ ‘물’을 들었으나
김한구의 딸은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물건은 깊이를 헤아릴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답을 하였다. 


이리하여 경주 김씨 김한구 딸이 영조대왕 말년에 계비가 되었으니 정순왕후다.
 

<원문>

何物 最深      무엇이 가장 깊은가?

人心 最深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物心 可測      물건의 마음은 헤아릴 수 있으나,

人心不可測也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정순왕후는 왕비로 뽑힌 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 오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말했다고 한다.


열 다섯(!!!) 어린 나이에 왕비의 체통까지 생각할 만큼 만만치 않았던 여인.


1759년(영조35년) 초여름 6월, 창경궁. 66세의 신랑 영조와 1745년 11월 10일 여주 고을에서 태어난 15세의 신부, 오흥 부원군(鰲興 府院君) 김한구(金 漢耉)의 큰 딸, 경주김씨가 혼례를 올리고 정순왕후로 책봉된다.  임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처녀만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법도에 따라 열다섯 꽃다운 처녀가 노인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영조는 1776년 승하하셨으니 그녀는 참 오랫동안 혼자서 여왕과도 같은 지위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그 부인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던 신부.

이 나이 어린 신부는 경주 김씨 정순왕후의 친정은 사도세자에 적대적인 노론 벽파 집안으로 아버지 김한구(漢耉)의 사주를 받아, 나 언경(羅彦景)이 사도세자의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여 사도세자를 서인(庶 人)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하고, 정순왕후는 당연히 사도세자의 아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보위에 오르는데 정순왕후는 정조의 왕권에 심각한 위협이되는 정치적 정적이였다. 정조는 의문사를 당하게 되는데 정순왕후가 독살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당쟁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에 반대하는 벽파 (僻派)를 항상 옹호하였으며, 훗날 정조가 승하하고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소생으로 11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는데 이때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정국의 태풍의 핵으로 등장하게 된다.


1801년 1월 10일 용상 아래에는 모든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용상에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의 11살 난 순조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긴장된 분위기를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렴 뒤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천주교)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과 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려져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
五家作統(클릭)을 닦아 밝히고, 그 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을 시행하여 진멸(盡滅)함으로써 유종이 없도록 하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였다. 김씨는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시작해, 정국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서학(西學)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이는 마치 조선의 신분 체제 를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순왕후 김씨와 뜻을 같이 하는 노론 벽파가 반대당인 남인들과 일부 노론 시파를 탄압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왕권과 다름없는 정치력을 행사, 국왕과 똑같은 권위에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여, 본인 스스로도 여주. 여군, 여자 국왕을 자처할 정도였던 여인! 그 여인이 바로 경주 김씨 가문 출신의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그녀의 행적으로 봐서 권력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부질없는 권력욕 탓에 그녀 사후에 친정가문이 멸문을 당하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순왕후가 죽자 그녀의 친정인 경주 김씨 일문은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안동김씨 집안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안동 김씨 집안의 견제를 받아 곧 멸문지화를 당한다.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1805년{순조 5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정순왕후는 말기 조선이 망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야말로 조선의 진정한 악의 축이었다.

그녀는 반대당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숙청을 하고 천주교도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면서 권력을 굳건히 다져나갔다. 그녀의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정치권력에 대한 야심이 컸고, 사도세자와 정조의 죽음에 까지 깊숙히 개입되었으며, 개혁군주 정조가 이룩한 모든 업적을 파괴를 위해 전력질주했다고 볼 수 있다.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남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 남인들은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였던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신서파라 한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김씨와 손잡고 서학을 뿌리 뽑는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공격했던 노론 벽파 중심의 정치 세력을 공서파라 부른다.

수렴청정하는 동안  벽파인 공서파(攻西派) 등과 결탁, 정치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시파(時派) 등의 신서파(信西派)를 모함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 등 간부들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丁若銓)·약용(若鏞)형제는 전라도 강진 지방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恩彦君=강화도령 철종의 부친)과 그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 되었다.

남인계 시파와 종교상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는데 앞장을 섰는데 특히 천주교도들의 대학살로 몰았던 신유옥사(辛酉獄事) 후에 사교(邪敎)의 뿌리가 뽑혔다고 축배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정조가 길러놓은 인재들을 모두 죽여 버렸고 '조선개국 - 사화, 임진왜란, 병자호란 - 북벌 준비 전념 - 이어지는 영정시대'는 그야말로 문예중흥기였었는데, 그녀 덕분에(?) 실학은 재야로 묻히고 겨우 명맥만 유지할 지경였으렸다. 영조와 함께 찬란한 문화부흥기를 이뤘던 정조의 노력을 그녀는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조선이 급속히 몰락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 게다가 정순황후 이후 수렴청정과 세도정치가 관습처럼 자리 잡아 정치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정순왕후에서 비롯된 세도정치 시대에 왕들은 숨을 죽이고 구석에 숨어있었으며 왕비들은 외척을 앞세워 전권을 휘둘렀다. (정말 화가 나는 대목이다.)

이후에 흥선대원군이 등장하여 수많은 개혁을 이루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지만 이미 조선은 말기암 환자처럼 대수술을 해도 새로이 태어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있었고... 그리하여 우리가 치를 떠는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치욕을 겪게 된다.

참조글 : 
http://cafe.daum.net/apt77/6Fj2/324


관련글
정조 열풍 - '이산, 한성별곡, 정조 암살 미스테리 8일'에서 정조 이미지
조선왕 독살사건(부제; 누가 왕을 죽였는가)

반응형
반응형

폐비 윤씨 VS 인수대비는 정말로 라이벌이었을까?

폐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아니라 성종에게 미움받아서 쫓겨났다!??

인수대비와 폐비 윤씨


연산군을 다룬 그 동안의 많은 작품들에서처럼 인수대비(전인화)는 이번에도 폐비 윤씨와 가장 대립하는 인물로서 폐비를 궁 밖으로 내치는 장본인이며, 흔히 폐비 혹은 연산군과 역사의 라이벌로 비유되기도 한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폐비 윤씨의 강한 성품에 불만을 품었고, 폐비 윤씨를 끊임없이 압박하며 미워했다. 인수대비는 이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그녀를 사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인수대비가 임금 성종과 왕실 최고 어른이자 막후 실력자인 시어머니 정희대비(양미경)를 제치고 며느리와 극단적인 대립각을 세우며 파국을 주도했고, 결국은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폐비를 사사시켰다는 것' 모두를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고, 드라마는 패자의 편이라 양쪽 모두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기에 사건과 기록의 이면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폐비 윤씨를 죽음으로 내몬 역사 속 주인공은 과연 인수대비였을까?

일개 후궁에서 일국의 국모로 승천하다

폐비 윤씨(구혜선) 중전 책봉식


조선 초기 친여식이나 집안 여식을 후궁으로 들이는 것은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로 간주되었다. 때문에 유력한 친지나 집안 권세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입궁한 간택 후궁들은 명문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성종의 간택 후궁으로 가장 먼저 입궁한 폐비 윤씨 역시 고려 시대때부터 꾸준히 벼슬을 해온 양반 가문 출신이다. 폐비 윤씨의 부친 윤기견은 집현전에 출입할 만큼 경서와 문학에 밝았고 판봉상시사의 벼슬까지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윤씨의 어머니 신씨는 윤기견의 둘째 부인으로 태종을 도운 공신 '신숙주'를 배출한 고령신씨 가문의 여식이다. 폐비윤씨가 입궁 당시 내명부 종2품 직위에 해당하는 숙의(淑儀)의 첩지를 받은 것은 '상등급(上等級) 사대부집안' 출신으로 대접받았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

파평윤씨 명문가 출신의 정현왕후 윤씨는 같은 해 6월에 입궐했는데 그때 나이 12살로 통상적인 간택후궁의 나이보다도 더 어렸다. 그녀의 부친 윤호는 당시의 권력을 움켜쥔 실세인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양미경)의 조카뻘이 됐다. 두 숙의 윤씨가 입궐하던 당시 성종에겐 이들보다 앞서 승은을 입은 후궁, 엄귀인과 정소용이 있었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한명회에 의해 간택 후궁으로 등장한다.)


숙의 윤씨(폐비)는 아들을 낳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성종의 후궁인 소용 정씨와 엄씨였다. 소용 정씨는 초계정씨로 역시 명문가의 여식이고, 소용 엄씨는 영월 엄씨로 소용 정씨와는 소꿉친구이며 중인 집안의 여식이었다. 미색으로 따진다면 정소용쪽이 훨씬 더 미려했으며 소용 엄씨는 그저 그런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고 한다. (그럼 집안도 정소용이 좋고 미색도 뛰어난데 왜 엄귀인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는겨?)

그로부터 얼마 후 공혜왕후가 승하하며 교태전 자리가 비자 유일하게 회임 중에 있던 폐비 윤씨가 중전에 오른다. 후궁에서 세자빈이나 중전을 삼을 때 먼저 자식의 유무, 나이의 고하 등을 따져 간택한다는 세종조 관례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때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내린 교서에는 폐비 윤씨의 후덕함과 겸손함이 왕비의 자질에 적합하다고 적었지만 내심 자신의 가문 출신인 정현왕후 윤씨가 중전자리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뒷 이야기는 추후 조사 예정)


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폐비 윤씨는 중전에 오른지 석달만에 원자(연산군)를 낳으며 권력이동의 축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왕의 생모, 대비가 될 사람이라는 것만큼 막강한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일부 사서에선 상등급 사대부집안 출신이지만 자신을 뒷받침해줄 조정 세력이 미미했던 폐비 윤씨가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 과도한 애정과 집착을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폐비 윤씨는 왕비가 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성종 8년 4월 덕종(성종의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숙의권씨 처소에서 왕의 후궁 엄씨와 정씨가 중궁과 왕자를 모해하려 한다는 투서가 발견되면서부터 몰락의 길로 걷기 시작한다. 당시 사건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미진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때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측은 두 후궁을 적극 감싸는 한편 원자를 중전에게서 빼앗아 궁밖으로 보내 버린다. 성종은 중전을 폐비시켜 빈으로 강등시킨다는 교지를 내리지만 대신들은 벌떼같이 달려들어 원자를 낳은 왕비를 폐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라며 반대해 철회된다. 이는 원자를 낳은 지 4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므로, 폐비 윤씨가 권력을 탐해 일어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폐비 윤씨가 대군을 낳은 2년 후 일단락됐던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지며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결국 성종 10년 6월 윤씨는 중전에서 폐출돼 사가로 쫓겨났다.

왕과 나 폐비윤씨(구혜선) 폐출 장면

왕실의 윗전이었던 정희왕후는 원자가 사가에서 폐비와 만나지 못하도록 폐비가 폐출되는 날, 피접을 위해 궁 밖에 나가 있던 원자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한편 아직 100일도 채 되지않아 어미와 유모의 손길이 필요했던 둘째 대군을 손도 쓰지 못하게 해 5일 뒤 사망에 이른다. 성종은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에 숙의 권씨를 새로운 후궁으로 간택하여 입궁시킨다. (정희왕후는 '왕과 나'나 '왕과 비'에서처럼 인정많고 자애로운 시할머니가 아니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인수대비가 폐비 축출에 관여되지 않았다고 볼 순 없지만 당시 권력의 실세인 정희왕후나 성종의 뜻이 컷을 가능성이 많다. 기록을 살펴보아도 인수대비가 여러 사안에 의견을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성정을 간섭한 것은 정희왕후 승하 이후다. 또 왕비의 투기든 후궁들의 이간질 때문이든 왕과 폐비 윤씨 간의 언쟁이 잦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성종-폐비 부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폐비 축출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 역시 실록에 정씨의 오라비를 속량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그 출신이 천민이기에 중전자리를 노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얘기다. 이들이 폐비 윤씨를 향한 성종의 총애를 질투할 순 있지만 중전을 탐탁치않게 여긴 삼대비의 총애를 기반으로 자의든 타의든 중전폐출의 선봉에 섰을 것으로 보여진다.


성종은 왜 폐비윤씨를 버렸나

성종은 조선조를 통틀어 부인이 가장 많았던 왕 가운데 한명이다. 성종은 공혜왕후 한씨와 폐비윤씨 정현왕후 등 계비 2명, 그리고 9명의 후궁 등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신하들중엔 왕이 후궁을 너무 많이 두는 것에 대한 우려의 상소를 올린 사람도 있을 만큼 여자를 좋아했던 정력가이다. (어우동과의 로맨스에서 이생원이 진짜 성종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성종이 그만큼 여자를 좋아했기에 그런 얘기도 떠도는 것이겠지.) 성종의 이런 성향들이 실제 폐비 윤씨의 투기로 이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가정의 분란을 끊이지 않게 한 원인이 됐고 이는 부부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폐비의 사사가 성종의 의지였는지 인수대비의 뜻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기에 폐비 윤씨를 다룬 사극마다 해석이 분분하다. 이덕화가 주인공인 드라마 한명회(1994년)에서는 인수대비(김영란)도 폐비(장서희)를 싫어했지만 무엇보다 성종(박진성)이 폐비에 대해서 냉정하게 돌아선 것으로 표현했고, 박지영, 유동근 주연의 장녹수(1995년)에서는 성종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지만 인수대비(반효정)의 의견이 강했던 것으로 표현했다.

왕과 비(1998년)에서는 성종(이진우)이 굉장히 미화되어 성종은 폐비, 사사 둘 다 원치 않았으나 인수대비(채시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 폐비를 사사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최근작 왕과 나(2007년)에서도 성종(고주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인수대비의 명을 따른 것으로 나온다.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는 성종은 중전을 폐출시키던 당시 폐비에 대한 증오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폐비가 끝까지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던 방술책 문제에 대해 배후 조사를 청한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중전이 후궁 측을 모함한 것으로 몰아간 비상과 투서에 대해서는 중궁전의 궁녀들을 고문한 끝에 원하는 답을 들은 후 참수했다.

또 성종은 중전의 폐위문제에 대해 대간과 성균관 유생 65명이 죄도 명확하지 않은 중전을 폐비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상소를 올렸음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폐출돼 사가로 나간 폐비에게 일절 도움을 허락하지 않는 냉정함을 보였다. 심지어 폐비 윤씨가 폐출되기도 전 후궁간택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며 윤씨를 사사한 다음날에는 그의 일가 모두를 매우 혹독한 지역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가족과 떨어져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폐비는 기초 식량조차 부족했고 백성들은 가엾다고 그녀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성종은 이조차 금지시키고 벌을 내려 폐비를 내외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다고 하니 폐비 사사에 성종의 뜻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폐비 사사 후에도 성종은 여전히 폐비를 용서하지 못하는 인상을 보여주었는데, <성종실록> 성종 20년, 5월 16일자에 이 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옛날 일을 생각하면 한밤중까지 두려워하며 홀로 앉아 잠못 이룬 날이 그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비록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혼령에게 어찌 원통함이 있겠으며, 내가 어찌 불쌍한 생각이 들겠는가?"

이런 마당에 폐비의 불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오직 인수대비였다는 것은 여자에게 뒤집어 씌우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관들과 이를 무분별하게 영상화한 작품들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성종이 그토록 총애했던 폐비 윤씨를 미워하게 된 연유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용안에 상처를 냈다는 것은 성종 스스로 발표했던 교서에도 없던 내용이며 투기를 심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실록이 분명한 설명을 해주지 못 하고 있다. 비상사건 역시 명확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종은 처음에 그녀를 사랑했으나, 나중에는 열렬히 미워했다는 슬픈 진실이다.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서 필요한 말은 아닐까?



관련글
연산군 때문에 한꺼번에 폐출당한 고모와 조카: 폐비 신씨, 단경왕후 이야기
폐비 윤씨에 대한 단상(부제: 왕과 나의 권력욕 없는 죽음에 대한 불만! )
[펌] 무엇이 인수대비를 20대에 권력의 핵심으로 만들었는가
[드라마의 이해 - 왕과나] '안방의 제왕' 인수대비 - 이덕일
폐비 윤씨 이야기 - 그녀는 왜 폐비가 되었나?
비운의 왕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
연산군 이야기 (성종, 폐비 윤씨 이야기 추가)
반응형
반응형
조선시대 붕당(당쟁)의 역사

출처:
디시인싸이드 이산갤러리

수 차례의 사화를 견디고 훈구파의 탄압을 이겨낸 사림 세력들은 사림 출신 스승 밑에서 공부한 선조가 즉위하면서부터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인재를 감당하지 못하는 한정된 관직의 수는 필연적으로 당파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동인과 서인이 주도한 붕당 성립기

◎동인 VS 서인

붕당의 효시라 할 동인과 서인의 분열은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 즉 을해당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을해당론 ☞ 왕실 외척이 관료추천권이 있는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느냐는 논쟁

1575년(선조8)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림세력들이 이른바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건이다. 이는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의 추천권을 놓고 벌인 싸움인데, 이 때문에 일제 시대 이래 당쟁의 근본 원인이 개인적 감정 싸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왕실 외척이지만 사람들을 보호한 심의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선배 정치인과, 왕실 외척 지위를 이용한 심의겸의 정치적 비리를 용서할 수 없다는 후배 정치인의 대립이었다.


분파 후 정여립 모반사건의 결과 기축옥사로 인해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지만 3년후 정철의 건저의 사건으로 다시 동인(남인,북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기축옥사

1589년(선조22)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통 정여립 옥사, 또는 정여립 반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다.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데도 정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동인 중에서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전라도 지역 서경덕, 조식 학파의 수많은 인물들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이후 심각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정여립이 이씨왕조가 정씨왕조로 바뀐다는 정감록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중반란이라는 설, 선조 임금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일어나게 된 사건이라는 설 등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남인 VS 북인

남인과 북인의 분립은 동인과 서인의 분립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기축옥사로 인해 분립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는 기축옥사 당시 서인(정철)이 정여립 사건의 처리를 주도하면서 북인계 인물을 무고하게 죽였는데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남인계 인물들이 제대로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당이 발생했다고 보고있다. 또한 그로부터 3년 뒤인 정철의 건저의 사건 때 서인의 처리 문제로 분당이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 남인의 중심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이후 화의를 주장하여 실각되자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고 남인은 한동안 몸을 사리게 된다.

◎대북 VS 소북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갈라져 대립한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살해하는 등 소북파를 몰락시킨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서인은 정권을 장악하고 대북파를 몰락시켜 다시는 정치의 무대에 설 수 없게 만들었다. 인조반정 이후 북인은 완전히 와해되어버린 것이다.


2. 서인과 남인의 공존, 붕당 공존기

서인과 남인의 50년에 걸친 붕당정치 시대 - 정치적 평화를 유지한 제도개혁의 시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계 정치가들은 인망이 높은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추대해 사회안정을 도모하는 등 남인을 정치적 동반자로 인정하고, 남인들의 도움으로 주요 정치적 과업을 시행하였다. 인조년간 정치사 연구결과를 보면, 주요 관료집단에서 서인과 남인의 비율은 6:4정도였고 서인과 남인 학통을 이끈 산림들도 거의 대등하게 등용되었다. 이후 인조, 효종, 현종에 이르기까지도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붕당간의 조화로운 공존이 계속되었다. 서인이 주도적인 위치를 지키는 가운데 남인이 이를 견제하는 양당체제, 즉 정치적 평화시대였던 것이다.


3. 일진일퇴의 환국정치, 일당전제기

일당전제기는 1674년 왕실에서 공복을 입는 기간 문제로 일어난 갑인년 복제논쟁을 군주권 강화에 이용한 숙종 즉위년부터, 1729년 영조가 일당전제 정치를 끝장내겠다고 선언한 기유대처분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보통 일진일퇴 정국, 환국에 의한 일당독재, 역모조작과 정탐정치 등으로 표현되는 격렬한 당파싸움의 시기다. 전후 여덟 차례 정도 일진일퇴하는 환국정치에 의해 일당독재가 반복되었다.

◎서인 VS 남인

서인과 남인의 공존은 평화롭기도 했지만 불안정하기도 했다. 그 불안정함이 '폭발'한 것이 바로 예송 논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예송논쟁 ☞ 서인 : 효종은 차남이야. 무조건 1년상! / 남인 : 차남이지만 왕됐으니 장남 대접 받아야 되는거 아니야? 당연히 3년상이지.

왕실에 적용할 상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논쟁으로서, 1659년(현종 즉위년) 논쟁과 1674년(현종 15) 논쟁 두 번이 있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효종과 효종왕비의 상사 때, 어머니 자의대비가 큰아들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둘째 아들 이하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였다. 이는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파견된 분조에서 사실상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는 소군주로서 권한을 행사했지만, 국내에 돌아온 이후 의문 속에 죽음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2차 예송논쟁은 결국 숙종 즉위년부터 남인 주도 정권을 출범시켰다.

예송논쟁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1차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정권에 변동이 없었으나, 2차 논쟁에서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때, 남인은 서인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강경파 청남과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 탁남으로 분열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경신대출척, 즉 경신환국으로 집권한지 몇년만에 쫓겨나게 된다.


■ 경신환국
1680년(숙종6)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남인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위한 새로운 군대인 체부를 설치함으로써, 당시 숙종의 신임을 받던 서인계 외척 김석주의 군사권을 약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노론 VS 소론 VS 남인


그러던 중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리게 되는데,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 바로 임술삼고변이다.

■ 임술삼고변

1682년(숙종8)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다. 훗날 노론이 된 왕실 외척 김석주, 이사명, 김익훈 등이 밀정을 파견하여 남인들에게 역모를 권유한 후 이를 밀고하는 등의 정탐정치를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물의를 야기시킨 사건이다. 당시 서인 영수 송시열은 이를 자신이 스승의 후손들을 잘못 교육시킨 탓이라 하여 결국 정탐정치를 자행한 이들을 변호하려 하였고, 이를 서인 소장파 인물들이 탄핵하고 윤증 학파가 이에 합세함으로써 결국 서인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반대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서인이 분열 된 이후에도 환국은 계속 되는데,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재등용되는 기사환국 이후 왕에 의해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래서 갑술환국 이후로는 노론·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 기사환국

1689년(숙종15) 서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남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장희빈이 아들을 (후일의 경종) 낳자, 곧바로 왕위계승권자로 정하려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함으로써 일어났다. 이로써 서인 영수 송시열은 사사당하였고, 서인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되었으며, 장희빈은 왕후에 봉해졌다.

■ 갑술환국

1694년(숙종20)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정권교체는 서인계와 남인계 일부 집단의 정탐정치 시도에서 발단되었다. 이로써 인현왕후는 복위되었고, 반면에 장희빈은 왕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왕세자(경종)의 보호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그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옥사가 일어나 노론 대신들이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 신임옥사


1721년(경종1) 12월에 노론 주도 정권이 소론 일당정권으로 급변한 신축환국과, 다음해 목호룡이 이른 바 노론 및
연잉군(후일 영조) 측근 인물들의 경종 시해음모를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임인옥사, 이 두 사건을 합쳐서 지칭하는 것이다. 신축환국은 노론당이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 직후, 다시 대리청정을 청함으로써 노론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다가, 소론과 남인의 공격으로 실패함으로써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다. 임인옥사로 당시 노론 최고 지도자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4인이 모두 사형을 당하였으므로, 노론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을 올바른 노론 붕당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관련글
조선시대 당쟁 주요사건 - 예송논쟁,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신임사화, 이인좌의 난까지...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 - 사림정치의 부산물, 예송논쟁에서 출발
정조의 한맺힌 발언,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영조, 정조, 사도세자 책 모음)

반응형
반응형
연산군 1(조선야사실록) 상세보기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펴냄
고 고우영 만화가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재출간된 장편 만화 『연산군』 제1권. 정사(正史)의 뒤안길에 숨겨진 또 하나의 역사인 야사(野史)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다. 신문에 연재되면서 광고 게재로 삭제된 부분과 기존에 출간된 책에서 검열된 부분을 복원하였다. 이 작품은 구어와 비속어를 거침없이 구사하고, 오늘의 갑갑한 현실과 역사에서 입증된 진리 사이를 거리낌없이 가로지른다. 또한 상식을 뒤엎고 편견을

2006년 4월25일 故고우영 화백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고인의 장편 만화 중 『오백년』4권과 『연산군』3권을 묶어 새롭게 『조선야사실록』7권 세트로 제작된 책이다. 연산군의 탄생부터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되 “폭군” 이미지에 치중하던 기존의 이야기와는 달리, 불우한 성장과정에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연산군의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정사보다 더욱 사실적인 야사를 만들어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만화가 고 고우영 작가님의 작품이라서 더욱 기대가 된다. 도서관 갈 때마다 고우영 작가님 작품이 있는지 살펴보아도 없더니..ㅠ  영화 <왕의 남자>와 비교하여 야사(野史) 특유의 감칠맛 나고 숨 막히는 전개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아마 고우영 작가님 특유의 성적 농담과 화끈한 묘사가 많이 나올 것 같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 연산군 중종과 그 신하들) 상세보기
김범 지음 | 역사비평사 펴냄
조선조 사화와 반정의 시대를 재조명하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는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정치 변혁의 시대에 펼쳐진 권력 투쟁을 살펴보는 책이다. 국가 체제를 완성한 성종, 그에 대한 반발과 균열을 보인 연산군, 다시 왕권을 둘러싼 체제 정비를 시도한 중종까지 3대 75년간의 정치 투쟁을 다루었다. 세 왕과 신하들의 권력 관계는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압축한 중요한 특징들을 지녔다. 저자는 세 왕이

이 책 내용에 대한 저자 김범의 자세한 설명 보러가기

이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책이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폭군의 멍에를 벗긴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지식산업사 펴냄
연산군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한 책. 성리학의 기준에 따라 연산군을 평가하는 기존의 평면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연산군을 힘의 논리에 따른 역사적, 이념적 희생자로 보았다. 연산군의 통치 전반을 종합적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 저자 소개 지은이_ 신동준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한겨레》기자. 서울대, 외국어대 강사. 21세기 정치연구소 소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살림 펴냄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말하는 통치 리더십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조선 역사에 묻는다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는 조선의 왕과 신하를 통해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된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조선이 패망한 근본 원인을 왕권이 미약하고 신권이 강한 '군약신강'의 왜


연산군에 대한 호의와, 그의 폭정을 신권과 왕권의 대립에서 보는 관점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인 것 같아서 뒤져보니, 역시.. 같은 저자였다. 역시 사람의 관점이 바뀌긴 쉽지 않나보다.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한명회의 신봉승 작가님이 연산군을 광인으로 보고 이와 반대로 드라마 왕과 비, 장녹수의 정하연 작가님이 연산군을 가엾게 보는 것처럼) 이 분은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도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상당히 구구절절히 펴시더니 이 책에서도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당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분 의견에 100%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연산군 초기에 왕권이 대폭 강화된 건 사실이니 작가의 주장 중 일부는 동의한다. 예전 사극에는 연산군 일기의 내용을 고대로 받아들여서 연산군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인 것으로 나왔지만
연산군이 처음부터 싸이코는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고도 그렇게 밖에 행동 못한 것은 100% 연산군의 책임이다. 이때는 왕권 강화고~ 신권 제압이고~ 이런 건 안중에 없고 이미 정신줄 완전히 놓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리뷰들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몇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중간의 흥미로운 부분만을 발췌했으므로 전체 서평을 보고 싶으면 링크를 눌러서 미디어 리뷰를 확인하시길.)


조선왕조 역사로 보는 `통치 리더십`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시대의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는 조선의 역사는 신하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는 신하들의 눈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봤다는 것. 저자는 실록에 명군으로 기록된 임금들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임금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들은 대부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개혁가들임을 강조한다.

그 예로 신 소장은 패도정치라 불리는 세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왕도와 패도는 적절히 섞어 사용해야하는데, 치세(治世) 시는 패도보다는 왕도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게 되고, 반대로 난세(亂世)의 경우 강력한 리더십을 요하기 때문에 패도 사용이 높게 된다""큰 틀에서 보면 세조가 패도를 구사한 것은 맞지만 시대적 상황(계유정난 등)이 그를 패도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한 저자는 조선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세도정치`를 꼬집고 있다.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정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초기에 비해, 신하가 왕을 바꾼 중종반정 이후, 신권이 왕권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다. 이로써 조선 중기와 후기로 와서 국가는 점점 쇠약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부국강병이 왕과 국가의 목표이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신권이 제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이명박 당선인에게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직면해 있기도 하다.


“조선왕조, 공자의 修身齊家 치중… 治平學에는 소홀”

“평화시에는 왕도정치가 필요하더라도 비상시에는 패도정치가 불가피한데 조선은 중화질서 아래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학문이 수제학으로만 치우치고 치평학의 전통을 망각했습니다. 특히 ‘경연’을 통해 주자학자로 키워진 조선의 국왕에게 이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BOOK책갈피] 조선은 신하들이 말아먹었다며?


역사 상식은 역사책에서만 얻는 게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재미있으라고 각색한 얘기를 그런가 보다 하며 정사로 받아들인다는 점. 이 때 사실과는 동떨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생겨나는 법이다.

영화 ‘왕의 남자’, 소설 『단종애사』(이광수)와 『금삼의 피』(박종화)가 좋은 예다. 세조와 연산군을 여지없이 폭군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신문기자 출신의 정치학자인 저자는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한다. 세조와 연산군 모두 신권(臣權)의 발호를 억누르려다 그 같은 오명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조카의 보위를 찬탈했다는 세조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산군도 사림 세력을 견제하려다 쿠데타로 실각한 비운의 군주로 평가한다.





반응형
반응형

출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이야기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이 글을 얼마 전에 발견해서 비공개하고 있다가 지금은 승복이님의 블로그가 아예 사라져 버린 관계로 공개처리했습니다.


이제는 원로 축에 끼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동시에 조선 시대 사극을 들고 오고, 김종학이 판타지 사극을, 정하연이 이방자 여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대극을, KBS에서는 <대조영> 의 후속작으로 <세종대왕> 을 제작할 준비를 마치면서 2007년 하반기와 2008년 상반기는 때 아닌 '사극' 열풍이 불어 닥칠 전망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방송됐던 사극들은 어떠한 인물들을 주로 다뤘을까. 재미로 알아보는 대한민국 사극의 단골 손님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후보 1. 연산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 사극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흥행카드' 라고 한다면 단연 연산군이다.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고 고아와 마찬가지로 자라나며 삐뚤어지기 시작한 연산군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 주위를 둘러 싼 권력 암투와 2번에 걸친 사화, 요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폐륜 등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담아내며 사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갖췄다.  

1962년 영화 <연산군> 에서 신영균이 열연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 이 후로, TV판 '연산군' 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971년 TBC <사모곡> 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때 연산군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배우는 바로 우리에게 <사랑이 뭐길래><딸 부잣집> 등으로 친숙한 배우, 김세윤. 김세윤의 뒤를 이어서는 1985년 MBC <조선왕조 500년-설중매> 에서 임영규가 연기한 바 있고, 1987년에는 영화 <연산군> 에서 배우 이대근이, 1994년 KBS <한명회> 에서는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 이민우가 연산군을 맡아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1년 뒤인 1995년 KBS <장녹수> 에서는 유동근이, 1999년 KBS <왕과 비> 에서는 안재모가 각각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로 안방 극장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가장 최근에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는 영화배우 정진영으로 1000만 관객 돌파의 신화를 낳은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어머니를 잃고 광기 어린 영혼을 소유하게 된 연산군 역을 실감나게 연기해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는 누구일까.

시청률로만 따지고 보자면 <왕과 비> 의 안재모로 그 당시 최고 시청률이 44.3% 를 기록했을 정도. 녹록치 않은 경력을 지닌 연기파 채시라와의 연기대결은 <왕과 비> 의 사상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데 1등 공신이라 할 만하다.


후보 2. 장녹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산군' 하면 떠오르는 여자하면 당연히 장녹수다. 연하의 연산군에게 장녹수라는 존재는 아내이자, 첩이었고, 어머니였다. 연산군 시대의 개막과 함께 그를 파멸로 이끌고 결국은 자신까지 돌무더기 무덤 속으로 들어간 시대의 요부.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지금까지도 연산군과 함께 한국 사극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 '요부' 를 실감나게 그려 낸 인물은 누가 있을까. 1971년 <사모곡> 에서 김세윤과 호흡을 맞춘이는 이제 원로 배우 소리를 듣는 고은아이고, MBC <설중매> 에서는 '섹시배우' 이미숙이, 영화 <연산군> 에서는 강수연이 장녹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자타공인 최고의 장녹수는 KBS <장녹수> 의 박지영으로 유동근과의 연기 앙상블이 빛났을 뿐 아니라 장녹수가 살아 돌아온 듯 한 실감나는 연기력으로 대내외적인 찬사를 받았다.

19999년 <왕과 비> 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故 이혜련이 안재모와 호흡을 맞춰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고, 작년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배우 강성연이 '녹수' 역을 맡아 남성 중심의 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뽐내는 등 수많은 스타들이 장녹수라는 캐릭터를 거쳐갔다. 연산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본 것은 장녹수가 아니라 수근비였으나 여전히 장녹수라는 인물은 스타들이 탐을 내는, 연산군과 운명을 같이 한 '매력' 있는 '여성' 인 셈이다.


후보 3. 인수대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산군' 이 등장했으니 '인수대비' 가 없을 수 없다.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지만 '폐비 윤씨' 의 사사사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연산군과 인수대비는 조선 500년 역사 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폐륜으로 그 끝을 맺었다. 20대에 청상과부가 되어 잠저로 나온 뒤, 예종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밀어 올리고 훈구파와의 강력한 결탁으로 성종 시대를 안정을 추구했던 한 여걸의 죽음이 그토록 비참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이자 아픔이다.

우리에게 '소혜왕후' 라는 이름보다 '인수대비' 라는 이미지로 더욱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 이 캐릭터는 지금까지 수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거쳐갔다. 이제는 영원한 배우로 기억되는 황정순 선생을 비롯해 영화 <연산군> 에서는 중견배우 정혜선이, <설중매> 에서는 고두심, <장녹수> 에서는 반효정, <한명회> 에서는 김영란, <왕과 비> 에서는 채시라,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윤소정 등이 열연했다. 특이한 점은 정혜선이나 고두심, 채시라 등의 여배우들이 모두 20~3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역을 소화했다는 것.

인수대비의 파란만장한 삶을 20대부터 그려내려다 보니 비교적 젊은 배우를 기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테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으로 보자면 모두 자타공인 '연기파' 들이 이 역을 거쳐갔으니 인수대비야 말로 '연기파 제조기'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에게 지금까지도 소중한 교훈을 남기고 있는 모양이다.


후보 4. 한명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선왕조 최고의 간신이자 사육신과 대비되는 조롱의 대상이면서도 왕권이 약화되던 단종시대를 철인군상과 같은 의지로 뒤엎고 결국은 성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명신(名臣)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린 한명회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평가 되면서 그 역사적 명성을 달리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사육신 띄우기' 로 명성에 흠집을 냈던 한명회는 이제야 제 위치를 찾으며 역사적으로 받아 마땅한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이 유명한 칠삭동이를 맡은 배우들은 정진, 이덕화, 최종원 등. 특히 정진 같은 경우에는 70~80년대 문화를 향유했던 사람들에게 최고의 '한명회' 로 기억되는 인물로 지금 보아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다. 이덕화는 자타공인 가장 유명한 한명회로 회자되는 배우로서 신봉승이 쓰고 그가 타이틀롤을 맡았던 드라마 <한명회> 는 여전히 KBS 가 자랑하는 사극 중 하나로 남아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안목도 달라진다. 미래의 한명회는 우리에게 또 어떤 인물로 기억 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공과' 를 둘째치고서라도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한명회' 라는 이름이 미친 거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리라.


후보 5. 황진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왕실의 여자가 아닌 다음에야 후세에 그 이름이 남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천한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일진대 오직 단 한사람, 명월 '황진이' 는 그러한 평가를 거부한다. 양반 출신의 여성으로 태어나 기생의 길을 택한 여자.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 로 불리우는 조선 최고의 여성 문학가. 벽계수를 골탕 먹이고 지족선사를 파계시키며 세상을 발 밑에 둔 여성. 그것이 바로 기생 황진이의 정체다.

요부의 이미지와 순결한 문학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황진이는 1957년 영화 <황진이> 에서 처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대한민국 최초로 황진이를 연기한 이는 전설의 스타 도금봉. 그 이 후, 강숙희,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 등이 그 뒤를 이으며 이 매력적인 기생 아니, 시인의 일생을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담아내고 있다.

최근 영화 <황진이> 가 개봉되면서 송혜교의 '황진이' 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개인적으로 한마디 덧 붙이자면, 영화 자체의 매력과는 상관 없이 송혜교는 그 위치에서 충분히 잘 해냈다. 송혜교의 황진이가 하지원의 황진이보다 매력적이지 못했던 까닭은 하지원이 송혜교보다 월등히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황진이에 대한 작품의 접근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송혜교는 <황진이> 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 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후보6. 김개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선조와 광해군,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사랑한 여자였던 김개시는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쟁의 역사 속에서 그 요망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선조의 독살설과 인목대비에 대한 핍박, 광해의 실책에 모두 관련되어 있는 김개시는 일개 상궁의 신분으로 대북 정권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정사를 좌지우지한 요화였으니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테지만.

이 요화를 연기한 이는 <회천문> 의 원미경, <서궁> 의 이영애, <천둥소리> 의 이주화, <왕의 여자> 의 박선영 등이고 이들과 함께 광해군을 연기한 이는 이희도, 김규철, 김주승, 지성, 김개시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적 입장에 서 있던 인목대비는 권재희, 이보희, 이현경, 홍수현이 열연했다. 개인적으로 <서궁> 의 이영애와 이보희의 연기는 나름대로 재밌게 본 편이다.


후보 7. 장희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희빈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글에서 자주 했고, "역대 장희빈" 에 관한 글까지 이미 쓴 상황에서 더 할 말이 무에 있을까 싶으랴만은 해도 해도, 봐도 봐도 재밌는 것이 바로 '장희빈' 이다. 1대 김지미, 2대 남정임, 3대 윤여정, 4대 이미숙, 5대 전인화, 6대 정선경, 7대 김혜수로 이어지는 장희빈의 역사는 곧 한국 사극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장희빈> 이 만들어 질 때는 항상 '장희빈을 재평가 하겠다.' 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지만 결국은 '현모양처' 인현왕후와 '악녀' 장희빈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시청자의 이목을 끈다는 것. 아직도 장희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악녀와 요부' 라는 차원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장희빈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려 했던 김혜수의 <장희빈> 이 나중에서는 그저 '독한 여자' 로만 기억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장희빈은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이미 역사라는 차원을 넘어서 한국 사극에서 가장 '쓸 만한' 캐릭터로 자리 잡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인물이다. 여자vs여자의 싸움에, 선과 악이라는 극명한 대립을 즐겨하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굳이 거스르면서 바꿀 필요는 없다. 장희빈에 대한 재평가는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학계에서 하면 될 일이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그렇다면 이들과 호흡을 맞춘 인현왕후는 누가 있을까. 1대 도금봉을 시작으로 2대는 태현실, 3대 김민정, 4대 이혜숙, 5대 박순애, 6대 김원희, 7대는 박선영이 맡았다.


후보 8. 혜경궁 홍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선 궁궐 문학의 정수라고 일컬어 지는 <한중록> 의 지은이로 유명한'혜경궁 홍씨' 는 지금껏 정치적인 이유로 남편 사도세자를 여읜 비운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오히려 사도세자의 구원 요청을 차갑게 외면한 것은 바로 혜경궁, 그 자신이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남편에게 -그것도 정략결혼을 한 남자에게- 그녀는 사랑도, 애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버리는 대신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올인'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에도 사도세자의 씨앗인 정조를 그대로 왕위에 올린 이유는 혜경궁 홍씨의 강력한 의견 표명이 단단히 한 몫을 거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버리되 자식까지는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은 정조를 제거하려는 친정 집안의 움직임에 격렬히 반대하고 정치적 공세를 펼침으로써 마침내 '정조시대' 를 열어제쳤다.

정조 시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일에 관련해 자신의 가문인 풍산 홍씨가 풍비박산 나게 되자 그녀가 꺼내든 카드가 바로 그 유명한 <한중록> 임은 이미 유명한 사실. '한가한 날의 기록' 이라는 뜻의 <한중록> 은 끊임없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친정을 옹호함으로써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 돌파구 역할을 했다. 재밌는 것은 <한중록> 을 쓰던 혜경궁 홍씨의 나이는 이미 70 줄이었으니, 그녀야 말로 영조와 정조 시대를 관통하는 진정 노회한 정객이었던 셈이다.

이야기로 잠시 딴데로 새버렸는데 다시 돌아와서 '혜경궁 홍씨' 를 맡은 여배우는 누가 있을까? MBC <안국동 아씨> 의 김영란을 시작으로, <한중록> 의 최명길, <하늘아 하늘아> 의 하희라, <대왕의 길> 의 홍리나 등이 바로 혜경궁을 연기한 배우들이다. 


후보 9. 흥선대원군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개혁' 이라는 빛나는 이름과 '쇄국' 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동시에 쓰고 있는 인물, 흥선 대원군. 상가지구로 시작해 조선말 가장 혁신적인 개혁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의 삶은 드라마로 그려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권불십년' 이라는 말처럼 10년만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끊임없는 정치적 재개로 결국은 을미사변이라는 역사적 책임을 떠 맡을 수 밖에는 없었던 사람. 

대원군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카리스마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로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의 김승호를 비롯하여, <민비> 의 김성원, <풍운> 의 이순재, <대원군> 의 임동진, <찬란한 여명> 의 변희봉, <명성황후> 의 유동근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이순재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연기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바로 <풍운> 을 꼽기도 했는데, 그 만큼 대원군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후보 10. 명성황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아버지가 나왔으니 며느리가 빠질 수 없다. 바로 '명성황후' 가 그 주인공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였던 그녀는 1895년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시해당하기 직전까지 조선 정계를 쥐락펴락 했던 진정한 여걸이었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적에서는 '공' 보다 '과' 를 더 많이 찾을 수 밖에 없겠으나, 그녀의 죽음과 함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은 명성황후라는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영향력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리했고, 드라마에서도 여과없이 반영 됐다. 그러나 대부분 드라마들은 명성황후에게 있어서 '관대한' 시각을 가졌을 뿐더러 미모의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에 앞장 선 편이다.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에서 원로배우 최은희가 김승호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대중문화사에 등장한 '명성황후' 는 <민비> 의 김영애가 그 바통을 이어 받으며 브라운관에 진출했고, 다시 한 번 김영애가 <풍운> 에서 열연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영애 이 후에는 <대원군> 에서 연기파 김희애가, <찬란한 여명> 에서는 하희라, <명성황후> 에서는 이미연, 영화 <한반도> 에서는 강수연이 맡았다.

지금 젊은 층에게 가장 사랑받는 명성황후는 이미연으로서 그 동안의 강인하고 독한 이미지를 순화시키고 마치 멜로물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을 투영함으로써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조선으로.

최근 <주몽><대조영> 의 경향으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를 벗어난 '탈조선화' '반조선화' 현상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고려 시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태조 왕건> 이 후에, <제국의 아침><무인시대><신돈> 등은 고려시대를, <주몽><연개소문><태왕사신기> 등은 고구려를, <대조영> 은 발해를 다룸으로써 조선이라는 시간을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의 움직임을 보면 한국 사극은 다시 '조선' 을 주목하고 있다.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왕과 나>, 정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리려는 <이산 정조>,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등은 이미 편성이 거의 확정 된 상태로 'Come back 조선' 을 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과 비><신돈> 의 정하연과 <내 남자의 여자> 에서 열연중인 김희애가 손을 잡고 <비운의 이방자 여사> 를 준비중이어서 또 다른 근대사의 비극을 보여 줄 참이다. 왜 그들은 다시금 조선에 주목하기 시작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조선' 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시청자들에게 긴밀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연산군, 장녹수, 인수대비, 장희빈, 정난정, 영조, 정조, 혜경궁, 대원군, 명성황후 같은 인물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친숙도는 이미 40여년간 지속되어져 왔으며 그것이 비록 '식상' 하다고 할지라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 올 수 밖엔 없다. 한국 최고의 사극 감독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닳고 달은' 연산군과 정조를 들고 나온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사극들은 조선으로 컴백한 것일뿐 인물에 컴백한 것 같지는 않다. <왕과 나> 도 연산군이 아닌 김처선이 주인공이고, <이산 정조> 도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영조나 사도세자, 혜경궁이 아니라 바로 정조의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기 ?문이다. 친숙한 배경과 신선한 캐릭터로 무장한 2007년 사극들. 그들은 과연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한국 사극의 역사, 그 역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다, 쭉.



관련글

역대 사극 속의 장희빈

[펌] 조선판 마녀사냥, 장희빈의 고정관념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역사 훑어보기
역대 최고의 연산군은 누구? 당신의 투표를 기다립니다 (동영상 비교 가능)
 

반응형
반응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 오랜만에 이산이나 왕과 나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볼 마음이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산이 지겨워서 왕과 나로 돌렸는데... 왕과 나는 지루한데다 유X하기까지 했거든요..ㅡㅡ;


어쨋든 왕과 나...

연산군에 대한 기대감 하나로 욕하기를 늦춰왔는데..
오늘 자 보고 완전 포기... 했습니다.

기대 끝.


왕과 나는 시청률 불패인 연산군을 가지고도 어찌 이리도 재미없게 만드는지... 위기감은 커녕, 드라마로서의 아무 클라이막스도 못 만들어내고.... 정말 지겹더군요.

'왕과 나'팀이랑 SBS 사극팀은 이 드라마 끝나면 1년 간 산에 들어가서 도 좀 닦고 내려왔으면 좋겠네요.

밋밋해빠진 연출,

역사적인 사실까지 다 바꿔서 시작해놓고도 인물에 아무 매력도 없고, 사건에는 개연성도 없고, 기대감조차 없는 지겨운 대본,

눈에 힘만 주면 카리스마 생기는 줄 아는 연기자들,


10년 전의 왕과 비보다도 더 촌스러운 한복 때깔과 디자인,


전부 무릎꿇고 앉아 있어도 오골오골 부딪힐까봐 불안한 조잡한 세트장......


정......... 말............... 대. 략. 난. 감.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연산군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미 익히 보셨으리라 믿습니다만...
제가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이라 왕과 비에서 몇 장면 추려보았습니다.


우선 연산군이 폐비 윤씨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는 장면입니다.

실록에는 연산군이 성종의 묘비문 문제로 우연히 폐비의 존재와, 자신의 생모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적혀져 있습니다. 그전에는 폐비의 일을 100년간 거론치 말라는 성종의 명 때문에 폐비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것이죠. 그 때 얼마나 실망이 컸는지 연산군은 저녁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죠. 지금의 대비(정현왕후)가 자신의 친모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동안 속아서 살았던 것에 대한 억울함, 20년간 자신을 향한 왠지 모를 수근거림, 늘 거리감 느껴지는 성종의 태도, 왠지 모르게 포근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정현왕후의 품, 진성대군만을 이뻐해주던 인수대비의 태도 등...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해답이면서 원통함과 분노가 터져나오는 순간인거죠.


왕과 비에서 폐비 윤씨에 대해서 물어보는 연산군(안재모)

"폐비에겐 아들이 있었다지요.?"
"폐비가 누구냐?"


라는 대사에서는 소름이 쫙~~~~~~ 끼칩니다.

이 짧은 대사에서 안재모가 어찌나 서늘하게 잘 해주시는지 그 당시의 위기감이 고대로 느껴지면서
안재모에게 마구 마구 애정이 솟아납니다.




안재모 뒤에 납작 엎드린 내시가 김자원으로, 지금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난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사는 효령대군 역으로 나오는 분입니다. 정하연 작가님이 쓰신 드라마 장녹수나 왕과 비에서의 김자원은 그리 간신배 같지는 않고, 그냥 주인의 명에 고대로 따르면서 적당히 비위 맞출 줄 아는 귀여운 내시였습니다. 저는 연산군과 김자원의 귀여운 장난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왕과 나에서는 내시 김자원도 너무 비호감으로 그리더군요. 전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것이.. 아무리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지만 그렇게까지 캐릭터를 재수없게 묘사할 필요가 있는지..;; 유동윤 작가님은 도대체 왜 항상 아주 나쁜 놈이 있어야 사건 진행이 가능한 지 모르겠어요. 정상적인 인물들이 필연적으로 엮이면서 사건이 진행되어야 흥미진진할 텐데, 날 때부터 나쁜 놈이 일을 저지르고 나머지 인물들이 속아서 사건이 발생하는 패턴이 50회 째 반복되고 있으니 드라마에 힘이 안생기지요.


그로부터 10년 후,
금삼의 피는 야사에서만 전해지지만 사극에서는 극적 재미를 위한 필수 요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으로 성장하였고,
왕권과 함께 자라지 못한 양심은 폐비 윤씨의 피를 본 순간 시커멓게 변해서 폭발해 버렸습니다.


금삼의 피를 보고 우는 연산군 동영상




확실히 이 장면은 참 표현하기 힘든 장면인 것 같습니다.

안재모의 연기도 놀라웠지만 약간.......은 좀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고...
왕과 나의 정태우는 뉴스에서 하루 종일 '정태우의 광기 연기' 어쩌구 떠들더니..ㅡㅡ;;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피묻은 적삼을 보고 분노와 광기가 일시에 폭발하는 장면은
안보던 사람도 끌어당길 수 있는 부분인데.... 심하게 밋밋하더군요. 광기 연기는 커녕 목소리에 힘을 잔뜩 넣어 억지로 울려고 노력하는게 너무 표시가 많이 나서 시종일관 눈에 힘줄 생기도록 애쓰고 있는 정태우가 불쌍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정태우 광기어린 눈빛 연기
정태우 연산군 광기어린 눈빛 연기


폐비의 마지막 부탁인 금삼의 피를 원자(연산군)에게 전해달라는 유언도 야사에만 전해오는데... 야사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흥미진진한 건 사실입니다.


폐비 윤씨(김성령)가 금삼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는 동영상

"어머니.. 울지 마세요.
원통해도 나는 웃으면서 죽습니다.. "  섬찟한 장면이지요.



이 동영상에서 폐비에게 차마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인물이 불운한 신하 이세좌입니다.


이게 끝.



오늘같이 글짧으면
뭔가약간 찜찜하나
이런날도 있어야지
그래야지 나도살지
쓰는사람 편리하고
독자역시 즐거운글
1 분만에 쓰고읽어
너도나도 시간남네
이런글을 많이늘려
우리같이 놀아보세
남는시간 잘굴려서
어화둥둥 놀아보세
반응형
반응형

‘왕과 나’ 폐비 윤씨의 죽음을 연산군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폐비 윤씨 사사, 과연 역사 속 기록과 드라마 속 그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폐비 윤씨의 죽음이 야사 속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연산군은 어떻게 그녀의 죽음을 알았을까. 정말 금삼의 피를 보고 알게 된 것인가?

정태우 연산군의 광기어린 눈빛 연기


왕과 나(왕과 비) VS 조선왕조실록 및 야사서의 역사기록을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 야사서(기묘록, 송와잡기, 파수편, 아성잡기)의 기록을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서 비교해보아요~
 



1.
폐비는 정말 성종의 얼굴에 흠집을 내었을까?

기묘록
폐비 윤씨와 연산군을 주인공으로 삼은 사극이나 영화 속에서 빠지지 않는 두 가지 사건은?

바로 폐비 윤씨(구혜선)가 성종(고주원)의 '용안에 흠집(손톱자국)을 낸 사건'과 '금삼의 피'로 불리는 피묻은 적삼이 연산군에게 건네진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대한민국 대중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비단이나 적삼은 현재에 남아있지 않다.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에는 '금삼의 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정사에는 없지만 '금삼의 피'는 여러 야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성종 용안에 흠집을 낸 사건은 연려실기술의 기묘록에 기술되어 있다.

기묘록에는 "..여러 후궁들 양가(良家)의 엄씨(嚴氏)와 정씨(鄭氏)를 투기하고 임금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났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크게 노하여..."라고 적혀있다.




2. 폐비에게 사약을 건넨 이세좌 부인의 한탄
"어머니가 죄없이 죽으니 아들이 훗날 보복하지 않겠느냐"


폐비윤씨의 죽음을 다룬 야사서들도 재미있다. 이들 야사서에서는 폐비윤씨의 죽음을 정당하게 표현한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폐비윤씨의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다.

기묘록에는 "윤씨는 폐위되자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궁중에서는 훼방하고 중상함이 날로 더하였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더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그 내시를 시켜, “윤씨가 머리 빗고 낯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대답하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와잡기서에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한 이세좌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세좌가 사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약을 내려 죽였다"고 답하니 그 아내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없이 죽었으니 아들이 훗날 보복을 않겠는가"고 울었다' 고 한다.





3. 김처선이 소화에게 사약을 바쳤다?

드라마 속 김처선(오만석 분)은 평생을 사모한 소화(구혜선)에게 직접 사약을 바쳤다. 어쩔 수 없이 사사를 명한 성종(고주원 분)이 평생의 정인 소화가 가는 마지막 길을 처선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이는 역사와 다르다. 그렇다고 작가가 허무맹랑하게 만들어낸 역사 왜곡은 아닌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성종은 폐비 윤씨를 사사하라는 어명을 좌승지 이세좌에게 내렸다. 그러나 이세좌는 폐비를 사사할 경우 연산군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성종의 명을 따르기를 주저했다. 이세좌는 "나는 폐비의 얼굴을 모른다"라고 핑계를 대며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길 두려워했다. 이세좌의 말에 성종은 이세좌에게 폐비윤씨의 얼굴을 아는 내시 한명과 동행할 것을 허락했고 결국 이세좌는 내시 한 명과 함께 폐비의 사가로 향했고 사약을 건넸다. (참 운도 없지;;)

김처선이 윤씨와 관련하여 사료에 언급된 사례로는 <성종실록> 성종 10년(1479) 6월 3일자 기사를 들 수 있다. 성종이 김처선을 시켜 대비에게 윤씨 폐비에 관해 보고했다는 기록이다. 사료상으로 볼 때, 김처선과 폐비 윤씨가 관련된 사례로는 이 정도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의 기록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정할 수 없다.

그럼, 김처선이 사약 마신 폐비 윤씨를 등에 업는 <왕과 나> 제51회 장면은 어떻게 된 것인가?

김처선(오만석) 등에 업힌 폐비(구혜선)

<성종실록> 성종 13년(1482) 8월 16일자 기사에 따르면, 성종 임금이 윤씨의 사사 현장에 파견한 내시는 김처선이 아니라 조진이라는 인물이었다. 사료상으로 볼 때에, 김처선이 윤씨의 최후를 목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왕과 나'의 유동윤 작가는 이같은 역사적 사료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극을 만들었다.





4. 조선을 피로 물들인 금삼의 피(피묻은 적삼)는 실제로 있었을까?
야사 속 윤씨 유언 "연산군이 목숨을 보전하면 피묻은 적삼을 보여 내 원통함을 말해달라"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폐비 윤씨(※그녀의 머리모양과 비단옷은 역사 왜곡)


야사 속에는 피묻은 적삼이 연산군에게 전해진 에피소드가 상세히 나와있다.

기묘록에는
'사약을 먹은 폐비 윤씨가 피묻은 수건을 어머니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연산군)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 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폐비 윤씨의 묘인 회릉은 연산군이 거동했던 태조의 묘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이후 어머니 신씨가 나인과 통해 연산군에게 원통함을 호소하며 수건을 올렸더니 연산군이 놀라서 슬퍼했다.

파수편에도 관련된 글이 있다. "윤씨가 죽을 때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하얀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폐주에게 전해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고 적혀있다. 재미있게도 파수편은 폐비윤씨 사사사건을 두고 성종을 꾸짖고 있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5.
어린 연산군은 친어머니인 폐비를 몰랐을까?

동시대를 다룬 드라마인 '왕과 비'를 포함하여 대다수 연산군 드라마들이 '금삼의 피'를 받은 연산군이 그때서야 윤씨의 죽음을 알게된 것으로 그린 반면에 '왕과 나'는 그 시점을 대폭 앞당겼는데 드라마 '왕과 나'는 역사와 다르다.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피묻은 적삼 일화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지 않다. 다만 즉위 후 연산군이 성종의 묘지문 관계로 우연히 폐비 윤씨의 아버지 이름을 듣고 궁금해하다 폐비 윤씨 사사를 알게 됐다고 적었다. 실록(연산군 1년 3월 16일)은 이 때의 연산군을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廢位)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고 전한다.

기묘록이나 파수편 등의 야사서에도 폐비윤씨 사사가 알려진 시점이 연산군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로 기록돼 있다. (※영화 왕의 남자의 연산군 정진영을 제외하고 드라마 한명회의 연산군 이민우, 장녹수의 연산군 유동근, 왕과 비의 연산군 안재모는 폐비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외할머니 신씨에게 피묻은 적삼을 받으면서 폐비 사사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6. 정현왕후와 연산군의 관계는 좋았을까?

조선왕조실록은 폐비윤씨에 이어 중전에 오른 정현왕후(이진)가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보살폈다고 나와있다.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를 친어미로 알고 따랐다고 적고 있다. 이는 별로 믿어지지는 않는 기록이다. 반정의 주역들이  '연산군이 정현왕후나 성종, 인수대비의 구박 때문에 비뚤어졌다'고 적지는 않을 것 아닌가.

재미있는 야사 기록이 있다. 연산군이 어머니가 폐비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다.

아성잡기에는 연산군이 성종에게 거리에 나갔다가 어미 소의 젖을 맛있게 빠는 송아지를 본 일을 고하며 "미물도 저렇게 키워주는 어미가 있는데 어째서 나에게는 나를 키워준 어머니가 안 계신단 말이냐? 송아지가 어미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소가 소리를 하면 송아지도 소리를 내어 응하니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장 부러웠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7. 연산군은 원래 성격이 광폭했을까?

학자에 따라서는 그가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스런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었던 사실에서 찾으려는 경향도 없지는 않다. 연산군이 어머니의 죽음을 안 후 성격이 광폭해졌다고 전하는 야사서도 있다. 파수편에는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죽음을 안 후 성정이 광폭해졌으나 등극 초기엔 총명하고 사리분별이 뛰어난 왕으로 알려졌다"고 적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실록의 기록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연산군 일기는 그의 시적 재능까지도 유치하다며 연산군을 깎아내리기는 하지만 사실적인 기록을 살펴보아도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누명(?)을 벗기는 어려워보인다. 애써 그를 비하할 필요도 없을 만큼 연산군의 기행은 무자비하고 엽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이 생모의 비참한 최후를 똑똑히 안 것은 그가 즉위한지 10년이 지난 4월이다.  

비교적 체통을 유지하고 있는 실록 《연산군일기》에서도, 그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능력도 없던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정계와 연산군과의 사이에는 부지불식간에 갈등이 일어났고, 여기서 그는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긴 끝에 경연과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을 하였으며, 기타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버렸다.
왕과 비 연산군(안재모)와 인수대비(채시라)


이처럼 야사는 폐비윤씨에 대해 정사와는 사뭇 다른 시각으로 담고 있다. 대중들이 알고 있는 폐비 윤씨에 대한 이미지는 흥미를 위해 야사를 마구 수용한 작품들의 책임이 크다.

야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 정사가 아무리 승리한 자의기록이라고는 하나 정사를 바탕으로 하고, 야사를 참고로 해야 올바른 역사의 인식이 가능할 것이다. 야사는 시대상이나 생활상을 유추하는데 도움을 받고 풍부한 살을 붙이는데 도움을 주는 사서이다.

그러나 야사에 적힌 기사들을 '진실한 역사'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역사왜곡이 시작된다. 야사는 어디까지나
정사에서 지워지거나 생략된 부분을 보충하는 정도로 그쳐야 한다. 야사는 결과론적으로 그린 이야기가 많고, 또한 책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편협한 시각으로 야사를 100%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역사왜곡의 지름길이다.

폐비 윤씨와 연산군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정사와 야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행간에 숨은 뜻을 잘 찾아내고, 그에게서 교훈을 얻는 것으로 그쳐야 할 것이다.  






관련글
연산군 때문에 한꺼번에 폐출당한 고모와 조카: 폐비 신씨, 단경왕후 이야기
조선시대 내시는 김처선과 김자원 외에도 많았다! (책 모듬 소개)
폐비 윤씨에 대한 단상(부제: 왕과 나의 권력욕 없는 죽음에 대한 불만! )
왕과 나 VS 왕과 비(妃) 비교분석: 역사에로시트콤인가? 새로운 해석인가?
왕과 나의 김처선 - 실제로는 일곱 임금 거쳐.. 연산군에게 직언했다가 극형
역대 사극 속의 연산군 비교
반응형
반응형

영도교에 얽힌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랑 이야기


영도교에 얽힌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랑 이야기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
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이별을 가슴에 담고 있다. 단종이 정순왕후와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하였는 데 그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못 만났다 하여 두 사람의 슬픈 모습을 지켜 본 사람들이 '영영 이별 다리, 영영 건넌 다리, 영 이별다리, 영이별교'라는 뜻을 담아 라고 말한 것이 현재의 영도교의 유래가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영 이별 다리'로 불렀는데,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로 불리게 되었다.


단종과 정순왕후 - 왕과 비에서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재위 2년만에 병사하자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조선의 6대 임금 단종이다. 단종은 천재군주 세종대왕과 그 뒤를 이은 문종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매우 영특하여 세종과 문종의 기대와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에 보호해 줄 그 어떤 세력도 없이 왕위에 오른 그는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도 잃은 단종이 그 때 의지할 곳은 자신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 밖에 없었을 텐데..  그마저 함께 하지 못하도록 떼어놓은 걸 보면 세조의 잔인함이 어디까지인가 싶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영월로 유배된 후 불과 넉 달 만에 죽음으로써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고 궁궐에서 추방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정순왕후는 초막집에서 시녀 셋과 함께 살며, 시녀들이 동냥해오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근처에 영빈전이라는 집과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끝내 거부하였다. 그리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묻히고 살지 않았다고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단종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왕후는 아침 저녁 이 산봉우리에 있는 바위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비운의 소녀왕비의 곡소리는 온 마을 여인네들의 가슴을 후벼파서 산 아래 온 마을 여인들도 일제히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하였다고 한다. '동망봉'이라는 이름도 정순왕후가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영도교 인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왕비에서 하루아침에 끼니도 잇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한 송비를 동네 아낙네들은 불쌍히 여겼다. 송비(宋妃, 정순왕후 송씨)에게 끼니 때마다 채소를 가져다주려는 한 부녀자들이 많아 긴 행렬을 이룰 정도여서,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지혜를 모아 송비의 초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채소를 파는 척하고 모여들어 송비에게 가져다준 것이 채소시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시.

원통한 새가되어 궁궐에서 나오니
짝잃은 외로운 몸이 깊은 산중에 있구나
밤마다 잠들려도 그럴 겨럴이 없으니
수없이 해가가도 끝남없는 이 한이여
새소리 멎은 새벽  뫼엔 조각달만 밝은데
피눈물 나는 봄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
하늘도 귀가 먹어 슬픈 사연 못 듣는데
수심많은 사람의 귀만 홀로 밝게 듣는고



정순왕후 송씨의 능호인 사릉(思陵)은 동망봉 산봉우리에서 통곡하며, 죽을 때까지 지아비인 단종을 그리워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01








뱀꼬리: 편의상 본문에서는 평어체를 썼습니다. 영도교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슬픈 사연이 있는 다리였네요. 특히 단종이 죽고도 질긴 생명을 몇 십년이나 이어간 정순왕후가 끝끝내 세조의 도움을 거부했다는 것과 소녀왕비의 울음소리에 온 마을 아낙네들이 같이 울었다는 것도 참 감동적입니다. 80 평생 단종을 그리워한 부인이니 남편을 죽인 세조의 도움이 반가울리 없었겠지요. 지아비를 죽인 세조의 도움을 받을 여인이었다면 평생 그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구요.  부모도 부인도 다 잃고 감옥 속에서 짧은 생을 외로이 살다 간 단종,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망향탑을 쌓는 단종의 사연은 정말 많은 백성들을 울릴 만큼 충분히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이 글을 적게 독려해주신 천년목님께 감사드립니다. 천년목님: 여러가지 자료를 다 끼워넣다보니 결론이 없는 요상한 글이 되어버렸네요. 하지만 하나라도 더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랬다는 거 이해해 주실 거죠? :)



관련글
연산군 때문에 한꺼번에 폐출당한 고모와 조카: 폐비 신씨, 단경왕후 이야기
왕과 나 연산군에 정태우... 정태우는 또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군요.
반응형
반응형
독도 울릉도
독도는 우리땅??

정말입니까?
진짜입니까??
자신 있습니까??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증거가 없다. 이런 황당할 데가 있나?? 황당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독도는 까딱 잘못하면 일본으로 넘어가게 생겼다. 왜 그럴까??

독도가 우리땅인지 일본땅인지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는 아직도 일본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늘 그렇듯이 일본은 철저한 자료 준비로 치밀하고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아직도 감정이 먼저 앞서서 대응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감정만 앞세워서는 절대 일본에게 이길 수 없다. 우리는 동네 골목대장을 뽑는게 아니기 때문에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그럴려면 확실한 근거를 대어 논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제법상으로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독도를 둘러싼 영토 논쟁은 요즘에만 있는 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인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17세기 말(1693년), 숙종 19년이었다. 당시에도 일본은 독도는 물론, 울롱도까지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관료들은 아무도 독도를 지키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당파 싸움 하느라고 독도에 신경조차 쓰지 않던 때에, 버려진 독도를 지킨 사람은 이름난 학자도, 명재상도, 용맹한 장군도 아닌 경상도 동래(1936년 부산시에 편입)에 살던 평범한
어부 안용복이었다.


평범한 어부인 그가 어떻게 독도를 지킬 수 있었을까?

안용복은 1693년 봄, 다른 어부 40여 명과 함께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하러 떠났다. 안용복은 어부인 동시에 조선 수군에서 노젖기를 담당하던 노군이었는데, 일본과의 교류가 잦은 동래에 살던 관계로 그는 일본어를 매우 잘했다고 한다. 동래에는 일본과 무역교류를 하기 위해서 설치한 왜관이 있었고, 거기에는 일본인들이 상주했기 때문이다.
울릉도 가는길


안용복이 울릉도에 다달았을 때, 울릉도에서 일본 배 7척이 와서 울릉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어부들은 울릉도까지 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고 안용복은 많은 일본 어부들과 맞서 싸웠다. 그러자 일본 어부들은 안용복과 그의 친구 박어둔이 허락없이 고기잡이를 했다면서 그들을 일본의 오키섬(오랑도(五浪島))으로 그들을 납치해갔다.

도주(島主)에게 끌려간 안용복은 거세게 항의했다.

"울릉도는 원래 조선에 속한 땅이다.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다. 내가 내 나라 땅에 와서 마음대로 다니는데 어찌하여 나를 잡아가두고 돌려 보내주지 않는가"라고 당당하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오랑도 도주는 안용복을 백기주도(伯耆州島)라는 섬으로 넘겨버렸다.

백기주도의 도주는 안용복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어본 다음 안용복의 말에 동의를 하고서 에도막부에게 그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안용복의 일을 알게 된 일본 에도막부는 안용복을 돌려보낼 것을 명했다. 특히 막부 장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편지를 한 통 써주었다. 그는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 더 이상 울릉도에 일본인이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서찰까지 담아주었다.

울릉도

안영복은 귀국길에 장기도에 도착했는데 당시 일본은 조선과 교류할 때 반드시 대마도를 통해야 했기 때문에 안용복도 대마도를 거쳐서 귀국해야 했다. 그런데 그곳의 도주는 이번 기회에 울릉도를 아예 대마도의 영토로 만드려는 속셈에 대마도와 작당을 해서 울릉도 침략을 금하는 내용의 문건을 압수하고 안용복을 대마도로 보내버렸고 조선 조정에는 거짓말을 했다. 안용복이 일본 영토를 함부로 침입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안용복은 대마도에서 구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대마도의 보고를 받은 에도막부는 재차 안용복을 돌려보내고 울릉도에 대한 접근을 금한다고 밝혔다.

조선과 일본을 이간질해오던 대마도주는 이번에도 다시 막부의 문건을 빼앗고 안용복을 50일 동안 감금해두었다가 동래부 왜관(倭館)으로 돌려 보낸다. 안용복은 왜관에서도 40일 동안이나 억류돼 있다가 풀려났다. 안용복은 국가를 위해서 일하고 감옥에 갖혔다가 석 달 만에 겨우 풀려났다.

상을 줘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ㅡㅡ;


3년 뒤 안용복은 일본인들이 여전히 울릉도와 독도에 와서 고기잡이를 한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일본으로 가서 담판을 짓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그는 혼자 가지 않고 순천 송광사의 뇌헌 스님, 학자 이인성, 안용복의 아내, 열여섯 명의 다른 어부들과 함께 먼저 울릉도로 떠났다.

울릉도에 도착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일본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안용복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호통을 치자 일본 어부들은
"우리들은 본시 송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를 나왔으며 곧 송도로 돌아갈 것이다" 라고 했다.
"송도는 우산도(독도)인데 그 곳 역시 우리 땅이 아니냐, 어찌 감히 너희들이 송도에 산다 하느냐?"

다음 날 새벽 독도에 가 본 안용복은 어제 만난 일본 어부들이 음식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안용복은 가마솥을 부숴버리고 도망치는 일본 어부들을 뒤쫓아서 오키섬까지 쫓아갔다. 안용복은 몇 년 전의 서찰 내용을 이야기 하며 오키 섬의 관리에게 따졌고, 그래도 소용이 없자 안용복은 직접 태수를 만나러 가게 된다. 그는 푸른 철릭을 입은 관리의 복장으로 꾸미고 태수에게 갔다.

"지난 번에 독도의 일로 막부의 서찰을 받았는데 대마도 도주가 그 서찰을 뺏고 거짓을 고하기까지 했으니 관백(장군)에게 그 죄상을 낱낱이 고하겠다."

안용복의 당당한 기백에 질린 태수는 다시는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고,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조선과 일본의 영토 논쟁을 막을 내릴 수 있었고 조선 철종 때까지는 이에 대한 분쟁이 없었다. 어떤 통신사도 얻어내지 못할 엄청난 외교적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안용복은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

울릉도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것은 안용복의 대담한 행동 덕분이었다.

그러나 안용복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후한 상이 아니라 가혹한 형벌이었다. 강원도 관찰사 심평이 안용복의 보고내용을 조정에 올리자 안용복 일행은 모두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조정에서는 안용복 등이 관리인 척 한 것과, 국경을 침범해 분쟁을 야기시킨 것에 대한 죄를 물어 참형(斬刑)에 처하려 했다. 나라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진 것이 중한 범죄가 되는 희한한 장면이 전개된 것이다. 대부분의 신료가 참형을 주장하자 숙종도 “안용복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며 사형론에 동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구만과 윤지완만 반대를 했다.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땅으로 인정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안용복의 공로이니 사형은 너무 지나치다는 의견이었다.

‘울릉도 수호의 영웅’ 안용복은 이렇게 해서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면사 대신 귀양을 가야 했다. 조선은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고 삼배구고두(세 번 머리를 조아려 절함)의 굴욕을 겪고도 무(武)의 귀중함을 모르고 그렇게 영웅을 역적 취급한 것이다. 귀양간 이후로 안용복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안용복 충혼비


독도를 둘러싼 영토 논쟁이 다시 시작된 것은 안용복의 활약이 있은지 약 250년 뒤인 1952년 이승만 대통령 때였다. 250년 전의 논쟁과 비교하여 달라진 것은 울릉도에서 독도로 표적이 바뀌었다는 점 뿐이었다. 일본은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증거로 1905년에 발표현 '시마네 현 고시'를 내놓았다.

시마네 현 고시는 일본의 법령인데 내용은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키 섬에서 85 해리에 있는 무인도는 다른 나라가 점령하고 있다고 인정할 만한 흔적이 없으므로 일본 영토로 사아 다케시마(죽도)라고 칭하고, 시마네 현 소속 오키 도사의 소관으로 한다."

그런데 시마네 현 고시가 발표된 1905년 당시, 우리나라는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1년 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일본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근거가 참으로 기가 막히다.

'독도는 주인이 없는 무인도이며, 조선보다 일본이 먼저 알고 있었고, 무인도인 독도를 일본이 영토로 만들어 전 세계에 알렸으니 독도가 일본 땅인 것은 합당하며, 국제법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다. (현재 국제법은 주인없는 땅을 먼저 차지할 권리를 인정해주고 있기 때문에 일본은 저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억지 주장을 깨뜨리려면 독도가 무인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조선) 영토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독도는 우리땅이 아니라 동해는 일본해라고 적힌 지도
야 한다.
'시마네 현 고시'가 발표되던 1905년 당시, 독도가 이미 우리 영토라는 것을 국제법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증거를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독도가 예전부터 우리 영토인 증거 ㅡ 옛 지도에 우리 땅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리상으로 우리나라에 더 가깝다, 지질학상 백두산 줄기에 해당한다든지 하는 주장 ㅡ 국제법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독도를 일본땅으로 기록한 지도나 책들도 많기 때문이다.ㅡㅡ;;♨ 부르르~~~~

원통하게도 우리나라는 아직도 국제법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독도 문제는 50년간이나 지속된 논쟁이다. 잊혀질만 하면 다시 살아나는 불씨 같은 것이라고 할까. 일본인들이 저렇게 철저히 우리를 농락하는 동안 우리는 너무 감정적으로만 대응했던 것 같다.

대다수의 우리 국민들이 독도 문제에 분개하여 흥분하지만 정작 학계에서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에 비해 일본 국민은 독도에 거의 관심이 없지만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은 놀랄 만큼 치밀하게 준비해 오고 있다고 한다.

국제 사회에서 독도가 우리 땅임을 인정받으려면 좀 더 차분하고, 꾸준하게, 그러나 치밀한 연구를 통해 제대로 준비해서 누가 보아도 인정할 만한 증거를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지하에서 울지 않도록!!


관련기사 :
CIA "독도는 일본해, 한나라당 대표는 강재수"
독도는 한국땅 美오리건주 홈피… 日 네티즌 협공작전으로 열람중지
반응형
반응형

전국에 계신 신사숙녀 언니옵하 누나형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드디어 왕과 나에 성인 연산군이 등장합니다.. 제가 이 날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지요.. 흑흑.ㅠㅠ
왕과 나에 연산군이 등장하려고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나봅니다. 
마치 10년 만에 보는 님 보듯 두근두근하는 내 심장 같으니라구~ 음하하..

역대 연산군 모음 - 최고의 연기력과 광기를 보여주는 연산군역 배우들 모음

위에서부터 정진영, 정태우, 임영규, 이민우, 유인촌, 유동근, 안재모, 신영균



연산군은 조선왕조 아니 우리나라 전 역사를 다룬 사극에서 주인공으로 가장 자주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여러 연산군들끼리 연기 비교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실은 역대 연산군으로 투표를 하고 싶었는데 왕과 나 연산군까지 포함을 시켜야한다는 요상한 사명감에 사로잡혀서 여태까지 아기다리고기다리었습니다. (30년도 더 된 유머죠. 눼눼. 죄송합니다.) 다른 작품에서의 내시 김처선과 김자원도 비교해보세요~

우선 객관적인 선택을 위해서는 작품과 캐릭터 성격에 대해서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각자의 매력이  흘러 넘쳐서 고르기 힘듭니다.

먼저 오래전 영화에서 활약해주신 신영균 연산군..
광기는 별로 안보이는 신영균 연산군


당시 사극은 뭐 옷을 찰흙으로 만들었는지.. 왠 한복 색깔이 저리 눈부신 보라색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고증까지 잘 하기가 쉬웠겠습니까? 고증 따윈 필요없어~ 적당히 이해하시면서 봐주시고요.

저 때는 조선왕조실록이 국역 완역되어 있지도 않았고, 지금에 비해서 영화 제작 환경도 나빴기 때문에 고증을 따지는 건 저한테 '이효리 춤 따라하면서 표정까지 뇌쇄적으로 지으라'고 하는 요구와 같다고 봅니다. 어쨋든 이 분의 연산군 연기는 과잉된 듯한 느낌이면서도 확 폭발하는 부분이 없으니 좀 갑갑합니다. 딱히 나쁘다고 생각은 안하지만 특유의 구식 연기 스타일 때문에 몰입은 상당히 힘드네요.


유인촌씨는 왕 역할을 도맡아 하셨던 분인데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라는 영화에서도 활약해주셨고, 저는 잘 모르지만 연극에서도 연산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SBS 드라마 임꺽정 초반부에서도 연산군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다음은 각각 영화 연산일기와 임꺽정에서의 유인촌씨입니다.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에서의 연산군 유인촌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에서의 연산군 유인촌(갑자사화 일으키기 전 문제의 술 따르는 장면이죠.)



연산군 연기 좀 봤다~~ 하시는 분들은 이 연기를 보고 최고라고 감탄에 감탄을 하시더군요.  


자원아, 활을 준비해라. 조선 최고의 활에 독화살을 재어서
우리 어머니를 죽인 원수들의 가슴에 피꽃을 피우자.  피꽃을.

뭬야? 그 놈 초상 끝나는 대로 사약 한 사발 퍼 멕여라.
우리 어머니가 먹고 죽은 펄펄 끓는 부자탕을 그 놈 아가X에 ㅊ넣으란 말이다!

소름이 쫙 끼치는 대사들입니다...


금삼의 피를 보고 통곡하는 안재모 연산군..
(야사서 파수편에는 금삼의 피를 본 임금이 그 천을 부여안고 밤낮으로 통곡했다고 나옵니다.)

저는 좋고 안좋고의 판단은 보시는 분들께 맡기고 제 느낌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유인촌씨의 연기는 감정의 진폭이 굉장히 큽니다. 뒤에 보실 유동근 연산군이 너무 정적이라서 실감이 안나고, 젊은 연산군 이민우(당시 19세), 안재모(당시 20세)의 연기가 너무 폭발적인 쪽에 치우친 느낌이라면 유인촌씨 연기는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진짜 맛이 살짝 간 느낌이라고 할까요? 최근에 연산군 중에서는 정진영씨의 연산군이 유인촌씨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실록에 쓰여진 연산군의 행동들을 토대로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몇 가지만 살펴봐도 갑자사화 당시 그는 이미 제대로 미친 X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자신을 욕할까봐 두려워하여 궁녀들이 웃는 것도 싫어했다고 합니다. 신언패를 채우고, 훈민정음 사용금지를 시킬 정도로 심한 언론 탄압을 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을 아무도 못믿으니 모든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그게 뜻대로 안되면 죽이고.. 어제까지 사랑하던 여인을 그 다음 날 찢어죽이고, 그런 식이죠. (편집증, 경계선 인격장애, 사회성 부족, 자기애적 성격장애, 애정결핍, 의존적 성격장애 등 다수 짐작 가능)

김처선에게 그가 그렇게 가혹했던 것도 그런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릴 때부터 마음 붙일 곳 없던 연산군이 김처선을 믿고 의지했기에 김처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렇게 뼈아팠던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김처선에게 활화산같이 분노를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연산이 장녹수를 그렇게 사랑한 것, 월산대군 부인 박씨에게 의지한 것 등을 보면 그는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연산군을 굉장히 단순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냥 원래 천성이 나쁜 놈, 섹스에 미친 놈 정도로만 몰아갔거든요. 그러나 현대의 사극작가분들은 연산군 행동의 배후 심리를 추측하여 대본을 쓰신 것입니다. 그 당시 연산군이 단순하게 나쁜 놈이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고, 정신병적인 문제가 일시에 폭발하여 그리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0123


이런 시각에서 보니까 각 작품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더라구요.

유인촌씨의 연산군은 경계선 인격장애 + 자기애적 인격장애, 유동근씨의 연산군은 편집증 + 애정결핍 + 자기애적 성격장애, 이민우, 안재모의 연산군은 편집증 + 경계선 인격장애, 정진영씨의 연산군은 애정결핍 + 사회성 부족 + 의존적 성격장애 + 피해망상증 등이 보였습니다.
(제 눈에는 그랬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전혀' 아닙니다. 이에 대한 토론을 원하시면 댓글을 남겨주세요. 틀린 점 지적이나 올바른 정보 또한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광기어린 눈을 번득이는 안재모 연산군과 김자원


유동근씨는 역시 실망을 시키지 않는 연기자입니다. 얼마 전에도 우연히 재방으로 장녹수를 잠깐 봤는데 10년이 넘은 연기임에도 어색함이 없으시더이다. (※드라마 한명회에서의 성종, 폐비 윤씨, 인수대비 연기, 장녹수에서 박지영씨의 장녹수, 인수대비의 연기는 전 조금 어색했어요. 뭔가 구식 연기라서 민망하더라구요. 다른 배역의 연기와 당시 상황 묘사, 스토리 전개까지 다 따졌을 때 현재 왕과 비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상을 보고 나면 폭군 연산군이 불쌍해보일 것입니다.


유동근의 연산군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외로워하며, 스스로에 대한 불신으로 괴로워하는 연산군입니다. 폐비의 자식이라는 것에서 오는 상처와 열등감, 폐비를 신원시키고 폐비의 복수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마음은 늘 허전합니다. 갑자사화가 끝난 후 평화가 찾아올 줄로 기대한 신하들은 연산군의 향락과 폭력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져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폭발력을 너무 안보여주는게 좀 아쉽습니다. 유동근씨는 무슨 주문을 받았는지 너무 절제를 하십니다.
확~ 폭발해줘야 할 시점에도 조곤 조곤 속삭이면서 타이르듯 말을 하거든요.

늙은 내관의 말처럼 공포가 대궐 안팎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연산 자신이 그 공포의 희생자였으니...

장녹수 보고 있으면 연산군은 성군 같고, 정귀인 엄귀인이 임금한테 바락바락 대들어서 맞은 것 같다니까요. 설마 연산군이 저 장면에서 정귀인한테 곱게 타일렀겠습니까? 이민우, 안재모는 이럴 때 확 폭발을 해주니까 시원하더군요.  위의 동영상과 비슷한 부분입니다. 안재모의 연산군과 유동근 연산군이 거의 똑같은 대본으로 어떻게 표현을 하는지 비교해보세요. 간신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내시 김자원도 여기서는 그닥 나빠보이지 않습니다.

안재모 연산군에게 충언을 고하는 김처선 동영상 (삭제됨.


이민우는 한명회(1994)에서, 안재모는 왕과 비(1998)에서 귀신같은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글 쓰기 전까지는 안재모 연산군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글쓰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안재모, 이민우는 광끼(광기)가 너무 안보였다는 점에서 -1점. 연산군이 너무 정상적으로 보였거든요. 그냥 정상인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길길이 날뛰는 것으로 보였을 뿐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문제적 인간으로는 안보이네요.

한명회에서 엄귀인, 정귀인, 인수대비 찾아가서 행패 부리는 이민우 연산군


한명회 연산군에서 짧게 지나간 장면을 왕과 비에 두 영상으로 나누어 보여드리겠습니다.

 


 


연산군 폭발씬에서 꼭 나오는 세 장면: 금삼의 피 확인, 이세좌한테 술 따뤄주기, 인수대비한테 술 따뤄주기에서 가장 유명한 금삼의 피는 실록에 안나옵니다. 월탄 박종화 작가님의 소설 금삼의 피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이는 야사에만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사극은 정사와 야사를 섞기 때문에 이 장면도 흥미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들어가지만요.

금삼의 피


이 장면 말고 나머지 두 장면은 실록에서도 나옵니다. 인수대비에게 정귀인, 엄귀인의 아들을 끌고 간 연산군이 술을 따르라고 시키면서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 연산군일기에 적혀져 있습니다. 성리학을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알던 조선시대에 저런 짓을 하다니 연산군은 잘잘못을 떠나서 쫓겨날 만 했다고 봅니다. 윗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그의 행동이 결국 자기 무덤을 제 손으로 판 것이죠.


한편, 정진영씨를 보십시다.

왕의 남자 정진영 연산군 강성연 장녹수


저 눈빛 보이시죠?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저 눈빛, 무언가를 찾아헤매는 불안해보이는 행동이 딱 제대로 정신 나간 인간 같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에 이 부분이 너무 적응이 안되서 정진영씨 연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폭군을 왜 정신병자로 만들어놨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ㅋㅋ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그 시점에 연산군은 이미 맛이 갔다고 보는게 정확한 것 같습니다. 정신병 때문이든,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든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의 눈빛 아닙니까?


아.. 한 명을 선택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려.. 흑흑..ㅠㅠ

그래서~~
저같은 괴로움을 겪으실 여러분을 위해서 복수 선택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참고로 하시고 투표도 하시고 결과도 재미있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반응형
반응형

정태우는 왜 매번 비극의 주인공 역할만 맡을까요?


정태우가 왕과 나의 성인 연산군으로 등장한다는 소식은 그간 신문, 뉴스, 인터넷(저 포함)에서 하도 떠들어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드라마 왕과 나 비판을 많이 했지만 정태우가 나온다니 벌써부터 두근두근거리네요~ 으흐흐~~

니들 이제 다 죽었다고 말하는 듯한 무시무시한 연산군 눈빛..


정태우는 '사극하고 싶지 않다, 슬픈 왕 역할은 정말 다시는 하기 싫다'고 합니다. 하긴... 그는 사극이 싫을 만도 합니다. 그동안 맡은 역할 중에 행복한 역할이 없었거든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매번 요절하는 비극적인 왕이나 왕자 역할만 맡았으니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이민우는 한명회에서 연산군, 용의 눈물에서 양녕대군을 맡아 광인(狂人) 역할이라도 해봤으니 그나마 좀 나았습니다. 싸이코 연기는 배우들이 누구나 한 번 해보고 싶어하는 역할이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정태우는 매~~번 죽거나 쫓겨나는 역할이네요. 그것도 이순신처럼 비장하게 죽는 것도 아니고 삼촌한테 쫓겨나서 죽는 노산군(=단종) 역.. 흑.ㅠ


그가 맡은 역할들을 한 번 볼까요?

* 출연작(시대순)

1) 대조영 - 발해 - 검이 역, 2007
2) 태조 왕건 - 통일신라~고려 - 최응 역, 2000
3) 무인시대 - 고려 무신집권기 - 21대 왕 희종 역, 2003
4) 용의 눈물 - 조선 태조 - 이방번, 1996
5)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 - 단종, 1984 (댓글 지적받고 수정)
6) 한명회 - 단종 - 단종 역, 1994
7) 왕과 비 - 단종 - 단종 역, 1998
8) 여인천하 - 중종~명종 - 인종 역, 2001
9) 왕의 여자 - 광해군 - 페세자 질 역, 2003


이중 대부분이 비극적인 왕이나 왕자 역할이었습니다.

태조 왕건 - 통일신라 ~고려 - 최응 역, 2000


무인시대 - 고려 무신집권기 - 21대 왕 희종 역, 2003


용의 눈물 - 조선 태조 - 이방번, 1996


단종(이렇게 어릴 때 쫓겨나진 않았는데; 너무 깜찍하군요ㅋ)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 한명회 - 단종 역, 1994
위의 사진은 조선왕조오백년 설중매 캡쳐인지 한명회 캡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굴이 아기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좀 더 어릴 때인 설중매일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댓글 지적받고 수정했습니다. 드라마 한명회에서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왕과 비 - 단종 - 단종 역, 1998


여인천하 - 중종~명종 - 인종 역, 2001


왕의 여자 - 광해군의 아들 페세자 질 역, 2003


정태우도 참 잘생긴 배우인데 요즘 사람들 취향이 아니라서 큰 스타가 안된 것이 조금 안타깝습니다. 그의 인물은 사극에서 두드러지는데요, 연기력도 타 젊은 배우들과는 천양지차라서 단연 눈에 띕니다. 이 계열의 배우들에는 정태우, 이민우, 안재모 등이 있지요. 이 사람들은 사극 이미지로 굳어질까봐 사극은 더이상 하기 싫다고 하지만 솔직히 사극에 너무 잘 어울리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사극에는 젊은 피가 필요합니다. 제발 사극에서 활약해 주세요~~


관련글
역대 최고의 연산군은 누구? 당신의 투표를 기다립니다 (동영상 비교 가능)
역대 사극 속의 연산군 비교
연산군 때문에 한꺼번에 폐출당한 고모와 조카: 폐비 신씨, 단경왕후 이야기
용의 눈물 출연자들 사진, 이민우/유동근의 소름끼치는 명연기 동영상 모음
폐비 윤씨에 대한 단상(부제: 왕과 나의 권력욕 없는 죽음에 대한 불만! )
왕과 나 VS 왕과 비(妃) 비교분석: 역사에로시트콤인가? 새로운 해석인가?


관련기사
<왕과나> 정태우, 성인 연산군으로 등장
‘왕과나’ 정태우 예고편 등장 “이게 바로 연산군 눈빛”
[사극 특집] 사극 단골 배우 - 정태우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반응형
반응형

당파에 의해 희생된 비운의 사도세자



출처:
디씨인싸이드 이산갤러리

1735년 1월 21일, 영조는 영빈 이씨에게서 손꼽아 기다리던 원자 선(後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리고 영조의 나이로 인해 이듬해인 1736년 3월 15일, 원자 선을 2세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세자 선은 2세 때 천(天), 지(地), 부(父), 모(母) 등 63자를 해득할 정도로 조숙했다. 그는 3세 때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때 '동몽선습'을 독파했으며,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10세 때 노론과 소론을 구별하여 두 당파를 비교하기도 했고, 소론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옥사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영특했던 세자 선은 영조의 나이 56세 때인 1749년, 세자의 나이 15세 때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도세자 8세 때 쓴 글씨

사도세자 8세 때 쓴 글씨

사도세자 10세 때 장인에게 쓴 편지


세자 선은 대리청정을 하며 노론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노론은 틈만나면 세자에게 소론을 몰아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지만, 세자는 부왕를 믿고 독단적으로 날뛰는 노론을 배척하며 소론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론은 사도세자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759년 노론 김한구의 딸을 왕후로 들인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더욱 더 심화된다. 


노론은 훗날 세자가 즉위하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판단하고 세자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간다. 노론의 거두인 혜경궁홍씨의 아버지 홍봉한, 숙부 홍인한, 정순왕후의 친오빠 김귀주,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 김상로, 김한록, 정후겸, 그리고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 영조의 총애를 받던 숙의 문씨, 숙의 문씨의 친오빠 문성국, 심지어는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까지 세자를 24시간 감시하고 미행을 시켜 행적을 서로 주고 받는다. 또한 정순왕후와 영빈 이씨, 그리고 영조의 총애를 받던 숙의 문씨는 세자를 무고하였고,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꾸짖었다. 이로 인해 세자는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궁을 빠져나가 관서지역을 유람하기도 했다.


세자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5월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여 영조로 하여금 세자를 폐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둬 8일만에 굶어죽게 하였다. 공교롭게도 그 뒤주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영조에게 제공하였다.


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그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 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고종때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다가 정조 때 수원 화산으로 이전되어 현륭원이라 불렀고 장조로 추존된 뒤에는 융릉으로 불린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사도세자도 영조도 이상하다..
역사가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하다지.

분명한 건 영조는 편집증으로 아들을 미치게 만들었고, 사도세자도 정상은 아니었다는 거.



관련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 사도세자는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비운의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첫 공개 - 사도세자는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다!
아들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아버지, 영조의 눈물 - KBS 한국사전(傳)
사도세자의 고백 - 영조의 치매, 사도세자의 광기는 사실일까? 혜경궁 홍씨의 진실은?

반응형
반응형
이영애는 지금의 여신적 이미지에 비해서 히트작이 별로 없다.

연기 못한다고 매번 욕먹은 김희선, 고소영조차도 히트작이 있고, 일찌감치 은퇴한 심은하가 히트작을 시리즈로 줄줄 엮어나가는 것과는 비교하면 초라할 지경이다.

※무작위로 생각나는 것만 읊어보면
김희선: 목욕탕집 남자들, 웨딩드레스, 프로포즈, 미스터큐, 토마토, 세상 끝까지, 안녕 내 사랑 등
고소영: 엄마의 바다, 비트, 숙희 (또 있나? ;;)
심은하: 마지막 승부, 미술관 옆 동물원, 텔미섬씽, 8월의 크리스마스, 숙희, M, 청춘의 덫
이영애: 대장금, 친절한 금자씨, 자이CF? 마몽드CF?

JSA는 단독 주연이 아니므로 이영애 출연 히트작은 될 수 있어도 이영애가 주연한 히트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의 한계로 인한 연기력 부재도 있고, 그녀가 작품을 선택하는 취향 때문이기도 하다.
서궁 이영애

나는 대장금으로 대상까지 받은 그녀의 연기에 감동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이영애에 대해서는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연기하기 쉬운 말랑말랑한 소프트 트렌디 드라마로 가지 않고 상당히 위험한 진검승부를 해왔기 때문이다.

90년대만 해도 김희선, 심은하에 가려져 이영애의 미모를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스타의 위치에서 입맛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이 별로 없다'타의에 의해서일 수도 있지만, 자의든 타의든 그녀의 이력을 보면 단순하게 인기를 끌기 위한 작품에만 출연하지는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아.. 어린 분들이라면 '이영애 아줌마가 저 나이에 사극하는게 왜 이상해?'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영애 같이 젊고 생기 펄펄 넘치는 도시적인 이미지를 가진 여성이 (마몽드 CF) 서궁 같은 정통 역사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결정이다. 김재형 피디가 젊은 층을 겨냥해서 상당히 애를 쓴 사극인 '왕과 나'에도 구혜선이나 이진, 전혜빈이 출연한다는 것이 신기했는데 하물며, 서궁 같은 정통 사극에야 말할 것도 없다.


서궁에서 김개시(개똥이) 역을 맡았던 이영애


이렇게 예쁜 여자가 김개시(개똥이)였을리는 없다. (김개시의 얼굴은 약간 반반한 정도였다고 하는데..) 서궁에서도, 대장금에서도 이영애 연기가 마구 어색하진 않았지만 뭔가 녹아드는 느낌은 없었는데 차라리 '연기력보다는 미모가 필요한 폐비 윤씨나 장희빈 역을 이영애가 해줬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란에서는 시청률이 80%가 넘어서 거리에 택시를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대장금
 
대장금이 워낙 메가톤급 빅히트를 치는 바람에 '이영애 = 선한 이미지'로만 남아있지만 데뷔 초기 앙칼져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생각하면 매력있는 악역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녀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로 내 바램을 반만 들어주었다.


지금은 느~무 이미지 관리하시느라 보기 힘든 이영애의 표독스러운 모습과 므흣~한 장면(사극에 꼭 나오는 목욕씬!)까지 나오는 서궁 오프닝 동영상을 만나보자~ (근데 목욕씬을 넣으면 진짜 시청률이 올라가긴 올라가나요?? ㅡ,.ㅡ;;;)

불과 십 여년 전이건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화질과 색감과 디자인을 선보인 서궁 오프닝...

서궁 오프닝 화면 캡쳐

뭐.... 어쨋든 1995년 드라마치고는 그닥 촌스럽지 않은 드라마의 구성이고, 연기이다. 이후에 만들어진 김재형 피디의 작품들(왕의 여자, 왕과 나)보다 연기면에서도 스토리 구성 면에서도 더 완성도가 높다. 김개시(개똥이)라는 인물의 특성 때문에 여기서도 발현되는 김재형 피디의 '모든 것은 음모로부터 시작되었다' 식의 전개는 필수.ㅋㅋ

일본에 DVD로 출시되기도 했다는데...

서궁 DVD 일본 출시

눈이 휘둥그레지는 이영애의 미모!!  

서궁 이영애

그때나 지금이나 도도한 영애씨~


사실 화면상으로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캡쳐가 아니라 기사사진인지라 이렇게 나온 것인데..
화면에서는 상당히 칙칙했고 캡쳐도 마찬가지였다.

서궁 이영애 캡쳐

상궁 주제(?)에 비단옷 입고 설친 도도한 김상궁

이영애

이건 대장금 때인 것 같기도 하고.....



인목대비 역의 이보희 - 더 어린 배우라야 되는데.. 잘못 뽑은 듯.



서궁에서 광해군을 맡았던 김규철과 중전 장서희



역대 광해군들 모음이라는 사진을 어디다 써먹을까 했는데 마침내 써먹게 되었다.
보너스로 역대 광해군들을 살펴보자~

역대 광해군 사진 모음 - 개인적으로는 대왕세종에서 양녕대군 아역을 맡았던 이준이 최고!


사진 소개만 하려던 것인데 몇 마디 보태려다 또 말이 옆으로 새서 줄줄이 길어져 버렸다.  예전 사극 자료를 더 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과 10년 전의 드라마조차 이렇게 귀한 자료가 되어버리니 안타깝다. 어쨋든 이영애의 오래 전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구나!



관련글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 - 사림정치의 부산물, 예송논쟁에서 출발
폐군의 여인들: 장녹수와 김개시 - 공통점과 차이점은? 장녹수는 연산군을 어떻게 사로잡았나?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역사 훑어보기

반응형
반응형

[역사] 엇갈린 정조 평가, 사료로 보면

정적과도 손잡은 '타협의 명인'
노론 독재체제에서 집권… 주자학 유일사상에서 벗어나 사상적 다원화 추구
실용과학에 관심 많아… 이가환과 대화 나누며 “지구는 둥글다” 주장도
일체의 잡기 외면한 채 수양에 힘써… 비단옷 대신 무명옷 입고 백성 걱정


정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정조를 주제로 한 저술·드라마가 잇따르고 있다.

▲ 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 / photo 조선일보 DB

정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정조를 주제로 한 저술·드라마가 잇따르고 있다.

근래 정조(正祖)에 관한 각종 저술, 드라마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에 따라 정조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 일부에선 “시대를 앞서 간 계몽군주”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에선 “저 혼자 잘난 헛똑똑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정조의 참모습일까. 중립적 입장에서 사료에 담긴 기록을 바탕으로, 그러나 사료의 한계도 감안해가며 임금 정조의 실상을 살펴봤다.

정조에 대한 기본적 사료로는 ‘정조실록’을 들 수 있다. 정조가 증자(曾子)의 일일삼성(一日三省)의 뜻을 취해서 작성한 ‘일성록(日省錄)’과 정조가 또한 매일 반성하는 뜻에서 자신의 언행을 기록하게 한 ‘일득록(日得錄)’ 등도 기본 사료이고, 규장각 일기인 ‘내각일력(內閣日曆)’도 기본 사료이다.

그러나 이런 관찬사료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부분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정조실록’은 정조 사후 정치적 반대파인 노론벽파가 집권하면서 작성되었다는 문제점이 있고, ‘일성록’은 일부 내용이 의도적으로 잘려나갔다는 문제점이 있다. 물론 정치적 반대파에 의한 의도적 왜곡이다. 따라서 이런 사료들을 이용할 때는 작성자의 정치적 의도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하며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나 정약용의 저술 같은 개인 기록들로 보충해야 한다. 

먼저 정조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도세자 문제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쪽에서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이란 ‘팔자흉언(八字凶言·여덟 자로 된 흉언)’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래서 영조는 세손을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10세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란 허물을 씻어주었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 당일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신 것이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0일)라며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스스로 천명했다.


"과인은 세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노론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정조(출처: MBC 이산 홈페이지)

그러나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벽파를 적대시하는 대신 포용에 나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영조의 유훈 때문이었다. 영조는 죽기 직전 세손 정조에게 “임오년의 일(사도세자가 죽은 사건)은 의리상 충분히 옳은 것 같더라도 이는 곧 나를 모함하는 것으로서, 단지 나에게만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너에게도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1일)라면서 사도세자 문제를 제기하는 자는 “왕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조가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면 노론벽파는 선왕의 유훈을 어긴 것으로 쿠데타의 명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는 사도세자를 살해한 노론벽파 전체를 적으로 돌릴 경우 정상적인 정국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사도세자 사건을 없던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정조는 노론벽파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즉위에 성공했는데,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세력과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이 동일한 정치세력이었다.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나 혜경궁 홍씨의 숙부 홍인한, 대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그래서 정조는 사도세자 문제를 가지고 이들을 처벌하기보다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혐의로 처벌했다. 그래서 소기의 정치적 효과를 거두면서도 선왕 영조의 유훈은 위배하지 않는 운영의 묘를 살린 것이다.

정후겸의 최후 (사진 출처 MBC 이산 홈페이지)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타협하는 것은 초인적 인내가 필요했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병석에 누웠을 때 “두통이 많이 있을 때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가슴의 화기는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얼굴을 맞대고 정치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구선복(具善復)이다. 그는 영조 때부터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른바 숙장(宿將)으로서 사도세자 사건에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를 계속 훈련대장, 병조판서 등 군의 중요 보직에 임명하다가 재위 10년(1786년)에야 다른 역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처형한 후 이렇게 말했다.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經筵)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가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정조실록 16년 윤4월 27일)

정조는 재위 13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소를 수원 화성을 옮겨 현륭원으로 삼고 자주 능행(陵幸)했는데 현륭원에 참배할 때면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조실록 18년 1월 20일)고 할 정도로 부친을 애도했다. 그러나 정조는 부친을 위한 최고의 복수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조실록’이나 ‘일성록’ 등의 관찬사료에는 보이지 않지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정조가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칠순이 되는 갑자년(1804년)에 왕위를 순조에게 물려주고 상왕 자격으로 화성으로 가서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려 했다고 전한다.

▲ 정조의 초상 / photo 조선일보 DB

원래의 소원을 이루어 마마(혜경궁)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평생에 사도세자께 자손으로 이루지 못한 통한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내가 선왕의 하교를 받아 이 일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원통하나 이것 또한 의리요, 왕세자가 나의 부탁을 받아 내 소원을 이루어내어 내가 못한 일을 내 대신 행하는 것이 또한 의리입니다.”(한중록)

정조 자신은 선왕의 유훈을 받았으므로 사도세자 추숭사업에 나설 수 없지만 아들 순조가 할아버지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는 것은 영조의 유훈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또한 정조는 ‘지금 신하들이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안 하는 것도 의리이고, 훗날 신하들이 추숭사업을 하는 것도 의리’라고 말했는데, 이는 사도세자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추숭을 반대하는 세력의 입장도 감안한 것으로서 바로 이 부분이 정조와 집권 노론이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정조는 이런 타협을 통해 조성된 왕권으로 미래를 지향했는데 이 부분이 바로 정조의 진면목이다.

정조 즉위 당시 조정은 노론 일당독재 체제였고, 노론의 정치이념이던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였다. 정조는 일당체제를 다당제로 바꾸고, 주자학 유일사상을 다원적 사상 체제로 바꾸어야 조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조가 다당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호대법(互對法)이었다. 호대법은 이조판서가 노론이면 참판은 소론, 참의는 남인을 임명해 상호 견제하게 하는 인사방식이었다. 그러자 노론은 남인들을 서학(西學·천주교)을 신봉하는 신서파(信西派)로 몰아 제거하려 했다. 서학이 사학(邪學)이라며 국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노론의 논리를 뛰어넘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정학(正學·성리학)이 밝아져서 사학(邪學)이 종식되면 상도(常道)를 벗어난 이런 책들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사람들이 그 책을 연(燕)나라, 초(楚)나라의 잡담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 그러니 근원을 찾아 근본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바로 급선무에 속한다.”(정조실록 12년 8월 6일)

정조는 이처럼 천주교는 국법으로 단죄할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 바로 서면 저절로 소멸된다는 논리로 사상 탄압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조는 조선의 성리학을 약화시키며 다원사상 체제를 지향했다. 정조가 자신을 성리학자로 자처한 것은 실제 그가 성리학자여서가 아니라 노론과의 이념 논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서양 과학지식의 습득을 통해 성리학이 이미 낡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는 재위 16년(1792년) 부친상으로 낙향해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정약용에게 정조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주며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계를 고안해보라고 했다고 전한다. 예수회 선교사이자 과학자였던 테렌츠(Terrenz.J, 중국명 등옥함·鄧玉函)가 지은 ‘기기도설’이 바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역학(力學)의 원리에 관한 책이었다.

‘정조실록’ 2년(1778년) 2월 14일조에는 정조가 천재로 유명한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 이가환(李家煥)과 논의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수준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일득록’에는 정조가 “땅이 둥글다는 설은 ‘주비경(周?經)’에 처음 보이는데 혼천(渾天)의 논리로 징험해보면 땅이 둥글다는 것이 분명하다. 남쪽으로 200리를 가면 북극이 1도 낮아지고 남쪽의 별이 1도 많이 보이며, 북쪽으로 200리를 가면 북극이 1도 높아지고 남쪽의 별이 1도 적게 보인다. 만일 땅이 둥글지 않다면 어떻게 그러하겠는가”라며 지구가 둥글다고 말한 사실이 전해진다.

정조는 초인적 의지로 자신의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일체의 잡기를 멀리했다.

“나는 음악이나 여색(女色), 사냥 등은 좋아하는 것이 없고, 즐거워할 만한 인간사로는 국정을 하는 여가에 두세 문사(文士)와 경전(經典)을 이야기하고 시(詩)를 말하며, 옛일을 토론하고 지금의 일을 증험하여 심신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일득록)

또한 정조는 검소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대체로 사람은 일용(日用)하는 의복이 한번 화려하게 되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내가 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 사람이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정조의 이런 검소함은 확고한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 각신(閣臣) 김조순(金祖淳)에게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은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정치철학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

“임금 노릇 하는 도리에 대해 여러 성인(聖人)이 말한 것이 지극하다.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고, 둘째는 조상을 본받고, 셋째는 백성을 사랑하고, 넷째는 어진 이를 높이는 이 네 가지 일이 곧 임금으로서의 훌륭한 절조이다.”(일득록)

이 시대 왜 정조가 다시 부각되는지를 잘 말해주는 구절들이 아닐 수 없다.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관련글
신봉승 '대왕세종' '이산' 맹비판 - 사극이 막가고 있다!
정조의 한맺힌 발언,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영조, 정조, 사도세자 책 모음)
정조의 생애와 업적 및 정조시대에 일어난 사건들
영조 사망 이후 정조(正祖)가 즉위 100일간 한 일
태조 이성계를 능가하는 무인(武人)군주, 정조대왕 - KBS 한국사전(傳)
정조 열풍 - '이산, 한성별곡, 정조 암살 미스테리 8일'에서 정조 이미지
조선왕 독살사건(부제; 누가 왕을 죽였는가)

반응형
반응형


1. MBC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

 
-사진 태조-

(1) 태조~태종 :    추동궁 마마 (1983 / 태조 - 김무생, 태종 - 이정길, 원경왕후 - 김영란, 정도전 - 이호재)
(2) 세종 :             뿌리깊은 나무 (1984 / 세종 - 한인수, 양녕대군 - 송기윤, 소현왕후 - 김영애)
(3) 문종~연산군 : 설중매 (1984 / 세조 - 남성우, 성종 - 길용우, 연산군 - 임영규, 인수대비 - 고두심
                           장녹수 - 이미숙, 김종서 - 전운, 한명회 - 정진, 유자광 - 변희봉
                           폐비 윤씨 - 이기선, 김처선 - 박규채)
(4) 중종~명종 :    풍란 (1985 / 중종 - 최상훈, 조광조 - 유인촌, 문정왕후 - 김혜자, 정난정 - 김영란
                           경빈 박씨 - 박원숙)
(5) 선조 :             임진왜란 (1985 / 선조 - 현석, 이순신 - 김무생, 원균 - 신충식)
(6) 광해군 :          화천문 (1986 / 광해군 - 이희도, 개시 - 원미경, 인목대비 - 권재희)
(7) 인조~현종 :    남한산성 (1986 / 인조 - 유인촌, 임경업 - 최상훈, 최명길 - 변희봉)
(8) 숙종 :             인현왕후 (1988 / 숙종 - 강석우, 인현왕후 - 박순애, 장희빈 - 전인화, 숙빈 최씨 - 견미   리)
(9) 영조 :             한중록 (1988 / 영조 - 김성원, 사도세자 - 최수종, 혜경궁 홍씨 - 최명길,
                           정순왕후 - 김용선, 홍국영 - 김동현, 정후겸 - 선우재덕)
(10) 정조 :           파문 (1989 / 정조 - 김용건, 효의왕후 - 김청, 혜경궁 홍씨 - 고두심)
(11) 순조~고종 :   대원군 (1990 / 흥선 대원군 - 임동진, 고종 - 김홍석, 명성황후 - 김희애, 철종 - 최수종)


2. 왕실 역사
 
-사진 세종대왕-

(1) 태조~정종 :    개국 (1983 KBS / 태조 - 임동진, 정도전 - 김홍기)
(2) 태종~세종 :    대왕 세종 (2008 KBS  / 세종 - 김상경, 태종 - 김영철, 양녕대군 - 박상민,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이윤지, 어리 - 오연서)
(3) 문종~연산군 : 왕과 비 (1998 KBS / 세조 - 임동진, 성종 - 이진우, 연산군 - 안재모, 인수대비 - 채시라
                           단종 - 정태우, 장녹수 - 유니, 김종서 - 조경환, 한명회 - 최종원
                           폐비 윤씨 - 김성령, 김처선 - 김성환)
(4) 중종~명종 :    여인 천하 (2001 SBS / 중종 - 최종환, 문정왕후 - 전인화, 정난정 - 강수연,
                           경빈 박씨 - 도지원, 조광조 - 차광수)
(5) 선조~광해군 : 왕의 여자 (2003 SBS / 선조 - 임동진, 광해군 - 지성, 개시 - 박선영, 인목대비 - 홍수현)
(6) 인조~현종 :    대명 (1981 KBS / 효종 - 김홍기)
(7) 숙종 :             장희빈 (2002 KBS / 숙종 - 전광렬, 장희빈 - 김혜수, 인현왕후 - 박선영, 숙빈 최씨 - 박예진)
(8) 영조 :             대왕의 길 (1998 MBC / 영조 - 박근형, 사도세자 - 임호, 혜경궁 홍씨 - 홍리나,
                           정순왕후 - 이인혜, 숙빈 최씨 - 김영애)
(9) 영조 :             하늘아 하늘아 (1987 KBS / 영조 - 김성겸, 사도세자 - 정보석, 혜경궁 홍씨 - 하희라)
(10) 정조 :           이산 (2008 MBC / 정조 - 이서진, 영조 - 이순재, 혜경궁 홍씨 - 견미리,
                           효의왕후 - 박은혜, 정순왕후 - 김여진, 홍국영 - 한상진, 정후겸 - 조연우)
(11) 순조~고종찬란한 여명 (1996 KBS / 흥선 대원군 - 변희봉, 고종 - 조재현, 명성황후 - 하희라)


3. 인물로 보는 조선 역사

 
-사진 정조-

(1) 태조~세종 :    용의 눈물 (1997 KBS / 태조 - 김무생, 태종 - 유동근, 세종 - 안재모, 양녕대군 - 이민우,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도지원, 정도전 - 김홍기, 어리 - 유니)
(2) 문종~성종 :    한명회 (1994 KBS  / 세조 - 서인석, 한명회 - 이덕화, 문종 - 송승환, 단종 - 정태우
                           성종 - 박진성, 연산군 - 이민우, 폐비 윤씨 - 장서희, 김종서 - 임동진, 인수대비 - 김영란)
(3) 연산군 :          장녹수 (1995 KBS / 연산군 - 유동근, 장녹수 - 박지영, 인수대비 - 반효정)
(4) 중종~명종 :    조광조 (1995 KBS / 중종 - 이진우, 조광조 - 유동근, 문정왕후 - 김민정, 경빈박씨 - 김성령)
(5) 선조 :             불멸의 이순신 (2004 KBS / 선조 - 최철호, 이순신 - 김명민, 원균 - 최재성)
(6) 광해군~현종 : 서궁 (1996 KBS / 광해군 - 김규철, 개시 - 이영애, 인목대비 - 이보희)
(7) 숙종 :             장희빈 (1995 SBS / 숙종 - 임호, 장희빈 - 정선경, 인현왕후 - 김원희, 숙빈 최씨 - 남주희)
(8) 영조 :             홍국영 (2001 MBC / 영조 - 최불암, 홍국영 - 김상경, 정후겸 - 정웅인,
                           정순왕후 - 염현희, 혜경궁 홍씨 - 이상숙)
(9) 정조 :             왕도 (1991 KBS / 정조 - 강석우, 홍국영 - 김영철, 효의왕후 - 박순애, 정순왕후 - 김자옥
                           혜경궁 홍씨 - 정영숙)
(10) 정조 :           소설 목민심서 (2000 KBS / 정조 - 김홍기, 정약용 - 이진우)
(11) 순조~고종명성황후 (2001 KBS / 흥선 대원군 - 유동근, 고종 - 이진우, 명성황후 - 이미연 & 최명길)


PS 1. 픽션이 과도한 작품은 피했습니다.
         예를 들면, "왕과 나" (성종~연산군?), "대장금" (중종), "한성별곡" (정조) 등등..
PS 2. 인물의 일대기라도 왕실 역사가 주가 되는 작품 안에서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천둥소리" (광해군), "어사 박문수" (영조), "태양인 이제마" (철종, 고종) 등등은 제외.


출처:
엠파스 지식인
원 출처는 정확히 기재되어 있아 링크 안됨.(디비디프라임 ALEX작성자님 http://dvdprime.paran.com )

반응형
반응형

연보(年譜)로 보는 연산군(燕山君)의 생애(生涯)


이 분의 블로그에 스크랩글이 많아서 이 글도 이 분이 원본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내가 찾은 곳들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글이므로 이 글을 원본 출처로 링크시켰다. 대부분의 연산군 기록이 그렇듯이 이 글 역시 야사의 기록을 실록과 섞어넣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야사서나 실록의 일부분은 내가 찾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직접 링크를 시켰으며, 연대 또한 틀린 점이 많아서 실록에 맞게 수정 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정확히 남아 확인 가능한 부분은 실록에 링크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고전번역원의 야사서에 링크했다. 앞으로도 조금씩 실제 기록을 찾아서 링크시킬 예정이다.



1476년 성종 7년 (1세)

11월 7일 삼경 오점(0시), 조선왕조 9대 임금 성종(成宗)과 후궁에서 중전이 된 윤씨(尹氏) 사이의 적장자로 탄생. 아이때 부르는 임금은 무작금(無作金). 이름은 융.

성종은 첫 중전이었던 공혜왕후(恭惠王后) 한(韓)씨를 여읜 후 후궁들의 투총 속에서 숙의(淑儀) 윤씨를 중전으로 맞아, 우여곡절 끝에 연산군을 얻었다. 성종의 이때 나이 19세. 보위에 오른 후 이해 봄까지 대왕대비(大王大妃)인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喜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있었고, 예종비(睿宗妃)인 안순왕후(安順王后)가 왕대비(王大妃)로,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있어 정사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특히 인수대비 한씨는, 세조의 세자빈으로서 다음 대의 중전이 될 막강한 자리에 있다가, 세자(德宗으로 추존)가 죽고 그 아우 예종이 보위에 오르자 궐 밖으로 나가 수빈(粹嬪)으로 지낸 뒤,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자 다시 궁 안으로 들어와 아직 어린 성종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477년 성종 8년(2세)

2월 21일. 연산군이 창진(瘡疹)인 듯한 병을 앓자 성종은 종묘(宗廟)·사직(社稷)·목멱산 등에 기도를 드리도록 명했다.  여기서 병의 차도가 없자, 이조판서 강희맹(姜希孟)의 집에 피병(避病)을 갔다. 이때 원자의 피병지가 된 이조판서 강희맹의 집은 명문(名門)인 데다 그의 아내 안(安)씨는 효와 덕으로 알려진 부인이었다. 원자가 실꾸러미를 삼켜 목숨이 위험했을 때 안씨 부인이 구해 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또 원자가 강희맹의 집 정원 소나무 밑에서 놀곤 했었는데 뒷날 왕위에 오른 후 그 소나무에 벼슬을 내렸다. 금띠를 소나무에 둘러 주고,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말에서 내리게 했는데, 그 문의 이름을 피마병문(避馬屛門)이라고 하기도 했다.

3월 14일. 중전 윤씨가 친잠례(親蠶禮)를 행하는 날인데, 이 날 윤씨는 나인을 시켜 자신을 투기하고 성종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후궁을 제거하기 위해 비상(砒霜)과 방양서(方穰書)를 가져오게 했다. 윤씨의 나인 삼월이는 윤씨 일문과 짜고 투서로써 후궁들이 중전과 원자를 해치고 있다고 소문내게 하고, 비상과 방양서를 구해 준다. 비상 바른 곶감과 굿하는 방법이 적힌 방양서를 중전의 침실에서 발견한 성종이 격노하고 이를 안 삼대비 역시 대노하여 윤씨는 폐출 위기까지 몰린다.

3월 29일. 삼대비의 후원을 받은 성종이 중전 폐출을 명했다. 이때 윤씨는 수빈(壽嬪)으로 강등되고 자수궁(慈壽宮)으로 쫓겨갈 위기에서 승지(承旨) 임사홍(任仕洪) 등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복위된다. 그러나 이 날 이후 윤씨는 말만 중전일 뿐이지 성종과 삼대비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받게 된다. 특히 성종은 아예 중전을 무시하고 생일날에도 연회를 열지 못하게 했으며 원자도 만날 수 없도록 한다. 자신은 다른 후궁들과 시첩의 방만 찾으니 윤씨와의 불화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1479년 성종 10년 (4세)

6월 1일. 원자의 모후 윤씨의 생일이었는데, 연 3년째, 이때도 성종은 하례(賀禮)를 정지하게 했다. 저녁에 성종이 시첩의 방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윤씨가 그 방으로 뛰어든다. 여기서 윤씨는 성종의 얼굴에 상채기를 내는 정도의 대사건을 저지른다.

6월 2일. 마침내 윤씨 폐위를 결정하고 사저로 내쳤다. 윤씨가 궁에 든지 6년이고 곤위에 오른지 4년이었다. 처음엔 윤씨 어머니 신(申)씨와 함께 사는 것만 허락하였다가 뒤에 오라비 삼형제의 출입까지 허락하였다.

이 무렵 원자가 피병을 마치고 환궁한 것으로 보인다.

1480년 성종 11년 (5세)

11월 8일, 윤호(尹壕)의 딸로서 숙의가 되어 있던 윤씨가 중전으로 정식 책봉된다. 이럴 무렵 사저로 내쳐진 윤씨 일문에서 거듭 복위의 꿈을 버리지 않고 여러 가지 행동을 꾸며댄다. 폐비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문, 폐비가 문 밖 출입을 하고 있다는 소문 등이 나돌아, 성종과 삼대비는 여러 번 행실을 조심하라는 언문을 내린다. 윤씨 삼형제를 하옥시키기도 했다.

1482년 성종 13년 (7세)

8월 16일. 마침내 윤씨에게 사사(賜死)를 명했다. 좌승지 이세좌(李世佐)·내관 조진(曺疹) 등이 명을 받들었다. 이때의 사약이 비상이었다. 윤씨 삼형제는 각각 외방에 유배되고, 신씨는 폐비를 건원릉(建元陵) 가는 길에 염장한 뒤 큰아들 구의 유배지 장흥(長興)으로 유배된다. 건원릉은 태조 이성계의 능침이다.

폐비 윤씨 사사에 얽힌 많은 일화 중에, 좌승지 이세좌의 경우를 소개한다. 윤씨의 염장까지 지켜보고 오라는 어명을 행하고 이튿날 늦게서야 집에 돌아온 이세좌에게 부인이 물었다. "조정에서 계속해서 폐비의 죄를 논한다고 하던데 어찌될 것 같습니까?" 이에 세좌는 풀이 죽어 대답했다. "지금 내가 어명을 받들어 사약을 내리고 오는 길입니다." 부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 보복하지 않겠는가. 조정에서 장차 원자를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거조(擧措)를 하는 것입니까!" 하며 통곡했다. 뒷날 폐비 사사에 관련된 자가 모두 화를 입게 되는데 이세좌도 그의 아들과 함께 죽게 된다.

1483년 성종 14년 (8세)

2월 6일.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당대의 정승·학자들이 세자 사부(師傅)·빈객(賓客)이 되어 세자의 학업을 돕는다.

허침(許琛)과 조지서(趙之瑞)는 연산군 세자 시절 각각 필선(弼善)과 보덕(輔德)으로 있었던 사람들이다. 강(講)의 방법이 허침은 부드러워 어린 세자를 융통성있게 가르쳤고 조지서는 강직해서 일체의 나태함도 용서하지 않았다. 세자는 이를 두고 [趙之瑞大小人也 許琛大聖人也]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뒷날 갑자년(甲子年)사화 때 조지서는 베임을 당하고 , 허침은 여러 사람을 구했으나 그 역시 울화로 피를 토하다가 죽고 만다.

3월 30일. 세조비 정희왕후가 죽었다. 성종은 정희왕후 등 삼대비를 편히 모시기 위해 창경궁(昌慶宮)을 새로 짓고, 연회도 자주 열었다. 뒷날 연산군이 주색에 빠지게 된 것이 어릴 때부터 연락(宴樂)과 가까웠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정희왕후가 죽은 다음해 완공된 창경궁은 연산군의 환락의 놀이터가 된다. 기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풍월정(風月亭)은 월산대군의 처 박씨를 찾아 범하게 하는 불륜의 연회장이 되기도 하고, 임사홍의 아들 풍원위(風原尉) 임숭재(任崇載)의 풍광 좋은 집,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 등은 연산군의 잦은 연회지로 제공되어야 했다.

1487년 성종 18년 (12세)

3월 1일. 병조판서 신승선(愼承善)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혼인 때 아침부터 비바람이 일어 모두들 언짢게 여기고 있는데, 성종이 신승선의 집에 어서를 내렸다. [세상의 풍속은 혼인날에 바람이불고 비 오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나 대개 바람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고 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하니 만물이 사는 것은 모두 바람과 비의 공덕이라.] 어서를 내리고 나자 오후부터 비가 개어 무사히 혼례를 마칠 수 있었다. 세자빈 신씨에게는 수근(守勤)·수영(守英)·수겸(守謙) 세 오라비가 있었는데, 아버지 신승선은 성종조에 영의정까지 오르고, 세 오라비는 연산조에 각각 좌의정, 형조판서, 개성 유수를 지내게 된다. 그 세도 부림이 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연산군이 축출될 때 신씨 일문 또한 큰 화를 입는다.

1489년 성종 20년(14세)

5월 20일. 7년 동안 방치해 두었던 폐비 윤씨의 무덤을 <윤씨의 묘>라 칭하고 속절(俗節)에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고는 백 년 뒤에도 명을 고치지 못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윤씨일가가 모두 유배 중이라, 속절이 되어도 제사 지내는 이 없어 연산군 2년 무렵에 가면 윤씨 묘는 허물어질 형국이 되어있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행적 기록은 그다지 많은편이 아니다. 그중 연려실기술의 것을 소개한다.

일찍이 성종이 사향사슴 한 마리를 길렀는데 길이 잘 들어서 항상 곁에 따라다녔다. 어느날 세자가 성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 사슴이 와서 세자를 핥았다. 세자가 발로 사슴을 차니 성종이 불쾌해서 [사람이 좋아 따르는 짐승을 너는 어찌 잔인스럽게 대하느냐!]고 소리쳤다. 뒷날 연산군은 이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

1494년 성종 25년 (19세)

12월 24일. 성종 승하했다. 29일 연산군이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니 조선왕조 10대 임금이다. 임금이 되자마자 연산군은 성종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재(水陸齎)를 올릴 것을 명한다. 불가에서 물, 뭍의 여러 귀신들에게 음식을 차려 올리며 경을 읽는 행사가 수륙재라 성종 밑에서 숭유(崇儒)를 행해온 삼사(三司)에서 반대하고 나선다. 연산군이 이를 묵살하고 재를 강행함으로써 유림이 들고 일어났고, 연산군은 이에 귀양형·장형 등으로 맞섰다.

1495년 연산군 1년 (20세)

3월 16일.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보고 처음으로 자신의 친모가 죄를 짓고, 폐위되어 죽은 것을 안다.
4월 11일, 폐비· 사사· 묘 이름 정할 때의 사실을 모두 알게 된다.
9월 20일, 안치된 폐비 윤씨 어머니 신씨와 윤씨 삼형제를 풀어 주었다.

1496년 연산군 2년 (21세)

윤 3월 13일. 내시를 시켜 폐비 묘를 살펴 보게 하니 [묘소가 무너진 채 여러 해를 수축하지 않아 장차 해골이 나와 여우와 삵에게 먹힐 지경이다]하여 천장(遷葬)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는 성종의 유교를 저버리는 일이라 하여 삼사의 관원·유림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친다.

1497년 연산군 3년 (22세)

4월 9일. 폐비의 묘가 이장되고 신주와 사당이 세워져 그 이름이 효사묘(孝思墓)·회묘(懷墓)로 붙여진 이날까지 반대 상소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만큼 많았다. 여기에 대간들의 미움을 받아 여러 차례 귀양길에 들었던 임사홍을 그 아들 임숭재와 가까웠던 까닭에 중용코자 했으나 또 유림의 세력과 부딪친다.

12월 18일. 원자 황(惶)을 낳자, 사면· 복직령을 내리는데 임사홍의 직급이 따라서 높아졌다. 이무렵 성종 때 탄핵을 받아 중책에 쓸 수 없도록 하명한 바 있는 유자광(柳子光)도 모친상을 마치고 돌아와 충훈부(忠勳部)에 속해 있었다.

1498년 연산군 4년 (23세)

7월 11일.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시작이다. 성종실록 편찬시 성종 때 사관이던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서 세조의 왕위 찬탈, 세조의 불륜 행각과 소릉(단종 어머니의 묘) 복구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초되어 김일손이 붙잡혀 옴으로 피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에 검열된 몇 개의 사초에서 그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고 특히 영남학파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조義帝文)이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사초와 관련있는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조종(祖宗)을 멸시한 대역죄로 몰리게 되었다.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한(漢)의 유방(劉邦)이 초(楚)의 회왕(懷王)을 친 것에 비유한 글이다. 여기에 또한 김일손의 사초에 [정희왕후의 국상 중에 이극돈(李克墩)이 장흥 관기(官妓)를 가까이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좌찬성으로서 실록청 당상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관여하고 있던 이극돈이 이 사실을 접하고 격노하여 그 부분을 삭제코자 함으로써 실록 편찬의 낭청(郎廳)이던 이목(李穆)·권경유(權景裕) 등의 미움을 사는 등 김일손의 사초는 대사건의 불씨가 될 소지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또한 유자광은 사적으로 김종직과 그 제자들에게 멸시받아온 처지인데가 이극돈의 비밀까지 알고 있어 여러모로 권위 회복의 일대 전기를 마련할 시기였다.

연산군은 유자광·윤필상(尹弼商) 등으로부터 사초에 관한 모든 일을 전해 듣고 이때를 신진사류의 기세를 꺾는 최적기로 생각한 듯하다. 죽은 김종직으로부터 그의 제자 김일손·이목·권경유·성중엄(成重奄)·강경서(姜景敍)·이수공(李守恭)·강겸(姜謙)·임희재(任熙載)·허반(許磐) 들은 항상 자신에게 반대만 해온 새파란 말단관리나 신진관리들, 아니면 현실을 모르고 명분만 따진 유생 출신들이었다. 이들을 제거하는 일이 연산군으로서는 더 없이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일에 관련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난 것이지 결코 그 원인이 이극돈의 사감, 유자광의 사감, 연산군의 병적인 폭정 등 단순한 말로써 설명될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7월 26일. 김종직 부관참시,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능지처사, 이목·강겸·허반 등의 주살이 명해졌다. 이어 김종직의 불온 서책, 문제의 사초들을 모두 불태우는 것 등과 이 7월의 사건에 격분하고 모의하던 어린 유생, 즉 유학(幼學) 10여명까지 뒤이어 처형되는 것 등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된다.

이에 반해 유자광·윤필상 등은 연산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으니 무오년에 훈신들에 의해 신진사류가 화를 입었다 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도 하고, 사초가 발단되어 일어난 것이라 하여 무오사화(史禍)라 하기도 한다.

뒷날 사관들은 성종 9년(1478년) 무술년에 유자광· 임사홍이 유배된 일과 이 무오사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무술의 옥은 정류(正類)가 사당(邪黨)을 다스린 것이요, 무오사화는 사당이 정류를 모함한 것이다.]

한편 이때 사호의 여파로 유배길에오르는 임사홍의 둘째아들 임희재는 다음과 같은 시로써 연산군의 폭정을 비난하여 후일 시가 연산군에게 보여져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한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
  재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연산군의 광포한 기질은 무오사화 때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갖가지 고문과 형벌도 이때부터 다양화되어 도적의 무리가 전국에서 창궐하던 연산군 6년을 거쳐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까지 가면 극에 달한다.

12월 23일. 인혜왕대비(예종비) 안순왕후 한씨가 승하했다.

1499년 연산군 5년 (24세)

1월. 원자 황이 천연두를 앓는다. 월산대군의 집에 피병을 간 듯하다.
2월. 무오사화를 전후해서 특진관(特進官)으로서 연산군과 가까이지내며 도총관(都總官)으로 병권을 흔들던 유자광이 뇌물사건과 관련, 탄핵받아 물러난다.

3월. 편찬 과정에서 사화를 불러일으켰던 성종실록이 완성되었다.

5월. 월산대군의 처 박(朴)씨에게 콩 50석 등을 주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인데 풍류를 좋아했다. 풍월정이 그의 집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연회하는 일이 잦았다. 월산대군은 이미 성종 19년(1488년), 연산군 13세 때 죽었고 그 처 박씨가 후사도 없이 혼자 있으면서 피병 온 원자를 간병했다. 전부터 탐할 뜻이 있던 연산군이 박씨를 처음 범한 것이 이 무렵인 듯하다.

이후, 연산군이 박씨를 위하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준다. 재물을 내리고 박씨 동생 박원종(朴元宗)에게도 많은 혜택을 주었다. 대간들이 이를 두고 끈질기게 반대 상소를 올리지만 듣지 않는다. 원자의 피병지가 월산대군의 집이었다는 사실 또한 주목거리다.

연산군의 탐욕 생활이 이때부터 극성스러워진 듯하다.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 연산군에는 숙부가 되는 제안대군(齊安大君) 등이 연산군의 탐욕을 채워주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궐 안의 정자는 연산군의 주연, 기녀들의 알몸놀이장이 되었다.

1500년 연산군 6년 (25세)

1월. 자순대비(慈順大妃)의 장자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신수근의 딸과 혼인하여 사저로 출합(出閤)했다.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에 의해 진성대군이 보호된 셈이다.

이 해 문경 새재 부근에서 도적 홍길동(洪吉童)의 무리가 창궐했다. 6월 21일, 홍길동이 잡히지만, 이후 오랜 세월 홍길동은 도적의 세계에서 신화적인 인물로 기록된다.

1501년 연산군 7년 (26세)

7월.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 어무적(魚無跡)이 시국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어무적은 부(賦)에 뛰어난 문학가였지만 서얼이라 천대받았다. 백성들이 핍박받는 내용의 부를 썼다가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의 글 몇 편이 남아 전해온다.

이 해쯤 연산군은 제안대군 사저의 가비(家婢)였던 장녹수(張綠水)를 궁에 받아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품계를 뛰어넘어 녹수는 내명부의 높은 지위의 후궁이 되어 갖은 세도를 부린다. 이미 색에 눈이 먼 연산군은 장녹수가 행하는 모든 뇌물 사건을 덮어주고 원하는 집은 아무 집이나 장녹수에게 주었다.

1502년 연산군 8년 (27세)

원자 황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까지 황은 월산대군 저에 있다가 돌아온다.

1503년 연산군 9년 (28세)

연산군에게는 약간의 자폐증세(自斃症勢)가 있었던 듯싶다. 창덕궁 후원에서 갖가지 기이한 연회를 벌이다가 궐밖의 가까이 있는 집을 모두 허물게 했고, 도성 밖 인가를 백리 바끙로 내쫓고 그곳을 사냥터로, 연회장으로 활용하는 등 백성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했고, 오직 알몸의 여인들만 옆에 두려 했다. 이때 없어졌다 후에 다시 생긴 고을이 양주(楊州)·파주(坡州)·고양(高陽) 등이다.

내시들이 따라와 바른 소리를 간하는 것이 듣기 싫어 <신언패(愼言牌)>를 목에 걸게도 했다. 신언패의 글은 이렇다.

  口是禍之門   입은 재화를 부르는 문
  舌是斬身刀   혀는 목을 베이는 칼

  연산군 말년에는 중신들도 이 신언패를 차야 했다.

1504년 연산군 10년 (29세)

전국에서 이름난 기생들을 모두 뽑아 궁에 두었으니 궁은 기녀들의 세상이었다. 중신들의 부인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그 중 미모가 나은 부인을 범하기도 했다. 미인을 구하는 일은 임사홍 부자가 주로 담당했는데 그 때문에 대간들의 탄핵 상소에도 불구하고 임사홍 부자는 옛 직위를 회복하여 연산군의 측근에 있게 된다.

3월 20일, 연산군이 임사홍 부자의 도움으로 폐비 윤씨의 생모 신씨를 만나 폐비 때의 일을 얘기듣는다. 다음날 새벽, 폐비 사건 당시 성종의 후궁이었던 정귀인·엄귀인의 투총과 크게 관련이 있었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두 여인을 잡아들여 그 아들들을 시켜 때려 죽이게 했다. 이어 연산군은 몸이 편치 않은 인수대왕대비에게로 달려가 폐비의 일을 격렬하게 항의했다. 연산군의 머리에 받혀 쓰러진 인수대왕대비는 그로부터 한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폐비 사사(賜死)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들추어 처벌하고, 이미 무오사화 때 귀양간 사람들까지 주살당하고, 그 이전에 죽은 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 등도 폐비 사사 때 반대하지 않았다 해서 부관참시 당하는 이 사건. 이것이 갑자사화(甲子士禍)다. 이공으로 임사홍은 병조판서가 되어 막강한 세도를 부린다.

1505년 연산군 11년 (30세)

4월 1일. 내시 김처선(金處善)이 연산군의 추태를 보지 못하고 간하다가 어전에서 연산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김처선은 내시로서 정 2품 벼슬에 있었다. 연산군에게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알지만 주상전하 같으신 분은 처음 보겠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화가 나서 활로 김처선의 갈빗대를 맞혔으나 김처선은 "신은 죽음을 두려워 않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보위에 오래 머물지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했다.

또 연산군의 화살이 몸에 맞아 무릎을 꿇자 연산군이 "일어나 걸어라 이놈!" 했다. "주상전하께선 다리가 부러져도 일어나 다니실 수 있겠습니까?" 라고 김처선이 말하자 연산이 그 혀를 끊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게 했다. 시체를 범에게 주고 <處>자를 못 쓰도록 명했다. 김처선의 아들 이공신(李公信)도 죽이고 가산을 적몰했다.

1506년 연산군 12년· 중종 1년 (31세)

7월 1일. 월산대군 처 박씨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되었으므로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 아우 박원종이 이 무렵 거사를 결심한 듯하다.

여름, 가을 도적의 무리가 창궐하고 귀양간 사람들마저 무리를 이루어 화적떼가 되는 등 해서 도성을 치려 했다. 그 중 대표되는 이가 이장곤(李長坤)이었는데, 이 무리가 클 것이라는 풍문이 있었고, 연산군마저 이장곤에 대한 시를 쓸 정도였다.

9월 1일. 성희안(成希顔)·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보위에 올리는 것을 주골자로 하는 거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며칠 전 연산군은 자신의 종말을 예감이라도 한 듯 [인생은 초로(草露)와 같은 것,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이라는 말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민심이 이미 기울어진 때라 박원종·성희안·신윤무(辛允武)·유순정(柳順汀)·홍경주(洪景舟)·김감(金勘) 등의 혁명 주체 세력들의 움직임은 가는 곳마다 막힘이 없었다.

임사홍이 이름도 없는 민중들의 발길에 죽었고 (임숭재는 그 전에 병으로 죽었다) 신수근 형제와 연산군에게 총애받던 궁녀들의 가인(家人)들도 무차별 참수되었다. 연산군도 옥새를 내놓았고, 진성대군은 그의 어머니 자순대비의 재가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뒤늦게 혁명 세력에 동조한 유순(柳洵)이 영의정이 되었고, 좌이정도 역시 연산군 시절 우의정을 지내면서 많은 살상을 막아왔고 거사 당시에도 다른 뜻 없이 인명 피해를 막는데 더 힘쓴 김수동(金壽童)이 되었으며, 거사의 핵심 박원종이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유자광은 거사 세력에 붙어 반정 1등공신이 되어 마지막 세도를 누렸다.

연산군은 처음에 동궁(東宮)으로 밀려났다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쫓겨나고, 신씨 또한 폐비의 몸이 되어 정청궁(貞淸宮)으로, 폐세자된 황은 강원도 정선으로 각각 쫓겨났다. 진성대군 시절 신수근의 딸인 부인 신씨 덕으로 살아남아 보위에까지 오른 중종은 그 부인이 역신의 딸이라는 이유로 정식 중전 책봉을 하지 않은 채로 폐비시키고 새 중전을 맞아야 했는데, 그 폐비 신씨가 죽을 때까지 중종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살다 간 자리엔 <치마바위>의 이야기가 남아 전하고 있다.

9월 3일. 폐위된 왕을 연산군(燕山君)으로 봉했다.

9월 10일. 중종은 연산군의 재위 시절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연산군의 자제 시집(自製詩集)을 불태우게 했다. 연산군은 임사홍 등으로 하여금 어제시집 간행 도감을 설치했고, 도승지 강혼(姜渾) 등으로 하여금 시를 쓸 때마다 화답하게 하는 등으로 시작에 관심이 많았는데 반정 후 그에 대한 많은 기록과 시들이 불태워져, 간신히 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서만 그의 시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

11월 8일.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된 연산군은 역질에 걸려 중종이 보낸 약을 여러 차례 복용하다가 6일 하직했다. 중종은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장사지내게 했고, 연산군을 수발했던 수행시녀는 3년간, 수행한 방자들에게는 백일 간 상복을 입게 했고, 중종 자신은 3일동안 소선(素膳)을 들었고 경연을 정지했다.

왕조실록에는 강화 교동에서 장사를 치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연산군의 무덤으 그의 아내 신씨의 무덤과 함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해 있다. <燕山君之墓>라고 새겨진 비면 뒤에는 <正德 八年 二月二十日葬>이라 씌어 있다. 정덕 8년이면 1513년이니까, 연산군이 죽은 지 7년만에 이장했다는 것이다.
반응형
반응형

[이한우의 朝鮮이야기(12)]
안용복 “일본인은 울릉도 접근말라” 에도 막부와 약속

숙종 때 노를 젓는 병사였다가 울릉도 수호신이 돼…
사공을 규합해 왜적의 침입 막아내
상은 커녕 국경 침범ㆍ관직 사칭으로 사형당할 뻔…
이익 “안용복은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



우리 역사를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치를 하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지’ 자탄을 하게 되는 장면이 많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럴 때마다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 그나마 나라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발적으로 나선 의병이 그런 경우다.

독도문제로 지금 일본과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울릉도도 방치하다시피 해서 일본인이 수시로 점령을 하곤 했다. 실록에 그대로 나온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런 일이 훨씬 잦았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울릉도도 대마도처럼 일본땅이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숙종 때 사람 안용복(安龍福)이라는 민초의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따질 것 없이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안용복은 경상도 동래부의 전함에서 노를 젓는 병사인 노군(櫓軍)이었다. 일본인 거주지인 왜관에 드나들면서 일본어를 익혔다고 한다. 숙종 19년(1693) 여름에 안용복은 표류를 하다가 울릉도에 다달랐다. 그런데 이때 울릉도에서 일본 배 7척이 와서 울릉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안용복은 그에 맞서다가 일본인에게 납치되어 오랑도(五浪島)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 그림·안영태

도주(島主)에게 끌려간 안용복은 “울릉도는 원래 조선에 속한 땅이다.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다. 그런데 왜 나를 잡아가두고 돌려보내주지 않는가”라고 당당하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오랑도 도주는 안용복을 백기주도(伯耆州島)라는 섬으로 넘겨버렸다.

백기주도의 도주는 안용복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어본 다음 안용복의 말에 동의를 하고서 에도막부에게 그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에도막부는 안용복을 돌려보낼 것을 명했다. 특히 막부는 더 이상 울릉도에 일본인이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까지 담아주었다.

귀국길에 장기도()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도주가 대마도와 작당을 해서 울릉도 침략을 금하는 내용의 문건을 압수하고 안용복은 대마도로 보냈다. 안용복은 대마도에서 구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대마도의 보고를 받은 에도막부는 재차 안용복을 돌려보내고 울릉도에 대한 접근을 금한다고 밝혔다.

조선과 일본을 이간질해오던 대마도주는 이번에도 다시 막부의 문건을 빼앗고 안용복을 50일 동안 감금해두었다가 동래부 왜관(倭館)으로 돌려 보낸다. 안용복은 왜관에서도 40일 동안이나 억류돼 있다가 풀려났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안용복이 이상의 일을 상세하게 동래부에 보고하자 동래부사는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국경을 침범했다는 죄목을 걸어 2년의 형벌을 내렸다. 상을 줘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옥에서 풀려난 안용복은 울릉도 사수의 전사(戰士)로 다시 태어났다. 숙종 21년 여름 안용복은 떠돌이 중 5명과 사공 6명을 규합해 울릉도로 향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필요가 있다. 중 5명은 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이고 사공 6명은 흥해 사람 유일부, 영해 사람 유봉석, 평산포 사람 이인성, 낙안 사람 김성길, 연안사람 김순립이다. 때마침 일본 어선들이 울릉도로 들어왔다. 안용복은 당시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왔던 조선 선원과 함께 일본인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인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안용복은 배를 몰아 이들을 끝까지 따라갔다.

그렇게 해서 이른 곳이 다시 백기주도였다. 이번에는 안용복이 울릉도 수포장(搜捕將)을 자처했다. 말 그대로 범인을 수색하여 체포하는 장수라는 뜻인데 그런 직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안용복은 그만큼 담대한 인물이었다. 안용복은 당초 조선 정부와 에도막부 사이에 맺은 계약내용을 명시한 다음 중간에서 대마도 도주가 얼마나 떼먹었는지를 조목조목 따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백기주도의 도주로부터 앞으로 울릉도를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그 어떤 통신사도 얻어내지 못할 엄청난 외교적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안용복은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이 아니라 벌이었다. 강원도 관찰사 심평이 안용복의 보고내용을 조정에 올리자 안용복 일행은 모두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조정에서는 안용복 등이 국경을 침범해 분쟁을 야기시켰다며 참형(斬刑)에 처하려 했다. 나라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진 것이 중한 범죄가 되는 희한한 장면이 전개된 것이다.

돈녕부 영사 윤지완이 나서지 않았던들 안용복 일행은 참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윤지완은 1682년에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에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윤지완은 “안용복이 죄를 짓기는 했지만 대마도가 옛날부터 중간에서 사기를 쳐온 것은 우리가 직접 에도막부와 통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안용복으로 인해 직접 통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공도 있다”고 밝혔다.

흥미롭게도 안용복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이끈 장본인은 윤지완의 친형이자 좌의정 윤지선이었다. 형은 죽이자고 했고 동생은 살려야 한다고 했다. 윤지완의 논리는 이번 일로 대마도가 크게 자극받을 것이기 때문에 안용복을 죽여 그들을 달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관직을 사칭한 죄도 포함됐을 것이다. 대부분의 신료가 참형을 주장하자 숙종도 “안용복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며 사형론에 동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지완이 나섰던 것이다. 그제서야 중추부 영사 남구만이 나서서 상책 중책 하책을 나눠서 제시한다. 상책은 안용복의 죄에 대한 판결은 일단 보류하고 우선 조정의 이름으로 대마도에 경고하는 편지를 보내자는 방안이다. 에도막부에 특별사신을 보내 그동안 대마도가 중간에서 사기친 전반적인 내용을 점검해보겠다는 것이다. 중책은 조정이 아니라 동래부에서 같은 내용의 편지를 대마도에 보내는 것이었고 하책은 대마도에는 따지지 않고 안용복만 처형하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상당한 논란 끝에 중책을 채택했다. ‘울릉도 수호의 영웅’ 안용복은 이렇게 해서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대신 귀양을 가야 했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에도 안용복이 귀양을 가게 된 것은 식자층 사이에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실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상의 사실을 이례적으로 상세하게 정리한 다음 안용복의 공을 이렇게 요약했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국가를 위해 강한 적과 대항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했다.”

조정의 일처리에 대한 그의 비판은 준열하다. “이런 일은 걸출한 자가 아니면 능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게 상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형에 처하려다가 뒤에 귀양을 보냈다. 그의 기상을 꺾어버리기에 겨를이 없었으니 애통한 일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서도 무(武)의 가치를 존중할 줄 몰랐던 ‘문치(文治)의 나라’ 조선에서 일어난 서글픈 사건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

반응형
반응형

신봉승 작가의 따끔한 질책: 역사드라마가 막가고 있다




Ⅰ. 역사드라마의 광풍이 불고 있는 요즘이다. 방송사 마다 경쟁적으로 역사드라마를 만들어서 내보낸다. 평생을 그 일에 종사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척도 반갑고 즐거운 노릇이어야 옳지만, 실상은 가슴을 조이면서 걱정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진다는 점은 국사정신의 고양과 나라의 정체성 확립에도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러자니 고증考證이 맞느니, 틀리느니 하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고, 사실史實과 맞느냐, 맞지 않느냐로 격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엄격하게 생각하면 드라마와 사실은 맞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만, 사람들은 역사드라마가 사실과 같기를 희망하고, 역사드라마를 통하여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과욕에 젖어있는 게 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작가가 쓰는 모든 소설이나 드라마가 픽션虛構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드라마나 소설의 경우 있었던 사건, 실제의 인물을 다룰 때는 작가에게 주어진 절대권한이나 다름이 없는 픽션도 제한을 받게 된다는 점에 각별히 유념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여기가 드라마작가나 소설가의 식견과 표준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고려 말의 혼란기를 드라마로 쓰게 되면,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교차하게 하면서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갈등을 그리게 된다. 이 상황 안에서라면 어떤 픽션의 도입도 작가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픽션이라는 권한은 작가에게 주어진 자유방임이 아니라는 사실은 픽션의 구사보다도 더 중하다. 정몽주는 어떤 경우에도 56세에 죽어야 하고, 그 죽음은 반드시 선죽교에서 조영규가 휘든 철퇴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은 작가의 픽션으로 무너뜨릴 수도 없거니와 또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요즘의 역사드라마는 이 엄연한 룰(규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사진은 특정 내용과 상관없음.



Ⅱ.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는 ‘사실’과 얼마간 다를 수가 있겠지만, 그 시대가 지닌 ‘시대정신’은 달라서는 안 되고, 왜곡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의 현대사에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 집권자의 통치신념을 제시하는 포괄적인 시대정신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집권자의 통치이념에 따라서 한 시대, 시대마다 어떤 형식이든 시대정신이 깔리게 마련이고, 바로 그것이 그 시대를 흘러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될 수밖에 없다.

가령 KBS-TV에서 방송되고 있는 <대왕 세종>의 경우라면 태종시대의‘시대적 정신’과 이탈해서는 그 시대를 바로 그려갈 수가 없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아 조선건국의 2인자나 다름이 없었지만, 세자책봉에서 제외되는 좌절을 겪으면서 스스로 집권하기 위한 야망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하여 나이어린 이복동생을 죽였고, 자신의 진로에 방해가 되는 동복형님까지 죽이면서 왕권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아버지 태조(이성계)와 는 상상을 초월하는 갈등을 겪으면서 왕권을 굳혔다.

그는 왕위에 있으면서도 네 사람의 처남에게 사약을 내려서 죽게 하였고, 이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며 항변하는 왕비(원경왕후)에게 거침없이 폐비를 입에 담으면서 10여 년 세월을 같은 궐 안(경복궁)에 살면서도 내왕없이 불목으로 일관하였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 세자(양녕대군)를 폐하여 죄인으로 내치기까지 하였다. 이때까지 조선 왕조의 왕위계승이 장자로 이어지지 않았다하여 듣기 민망한 유언비어가 도는 데도 장자인 세자를 폐하는 태종의 독단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또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왕재로서의 가능성을 보이자 태종은 52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그것은 세종의 새 왕조가 확실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후견인(상왕)이 되어야겠다는 그의 책임감의 발로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북경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세종의 장인이자 국구인 심온沈溫이 ‘왕명이 두 군데서 나오면 정치에 혼란이 있게 된다.’는 당연한 말을 했음에도 그가 압록강을 건너기를 기다려서 체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 할 만큼 단호하고도 혹독한 군왕이었다. 어린 왕비(소헌왕후)는 상왕전의 마당에서 아비를 살려달라는 석고대죄를 올렸어도 태종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태종의 재위 18년과 상왕으로 있은 4년은 태평한 다음시대를 열기 위한 자기희생의 시기였기에 어렸을 때의 친구이자 마치 분신과도 같았던 최측근인 이숙번李淑蕃까지도 “내가 죽고 백년이 지나지 않거든 도성 안에 발을 들여놓게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면서 귀양에 처했다.

태종 이방원의 통치시대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다음 시대의 장애물이될 위험이 있는 자를 가려서 그가 어떤 자일지라도 가차 없이 제거해 버렸던 시대’였기에 자신의 뒤를 이은 22세의 어린 세종에게

"천하의 모든 악명은 내가 짊어지고 갈 것이니, 주상은 성군의 이름을 만세에 남기도록 하라."는  명언을 남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태종시대를 드라마로 그리자면 이같은 시대정신 또는 시대의 정한이 고려되지 않고서는 좋은 드라마로 만들어낼 수가 없게 된다.


Ⅲ.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되는 화두는 세종시대와 세종의 통치철학을 살펴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적절한 시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없다. 그러기에 KBS-TV에서 <대왕 세종>을 제작 방영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대에 담겨진 귀중한 체험과 정신을 외면하거나 왜곡한다면 모처럼의 좋은 뜻도 물거품이 되기가 쉽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 <대왕 세종>이라는 타이틀은 너무 보편적이다. 조선왕조에는 27명의 임금이 있었고, 그 모든 분을 통칭하여 <대왕>이라고 높여서 부른다.

그러나 세종은 단종이나 예종, 혹은 철종과 같은 반열에 두기에는 그분의 인품과 업적이 너무도 크고 자랑스럽기에 일반적으로도 다른 임금들과 구분하여 성군聖君세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드라마의 타이틀은 당연히 <성군 세종>이야 옳다. 성군 세종의 경우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업적을 남겼고, 자신의 몸은 병마에 시달려서 시체로 변해가는 데도 자신의 병구완보다 국사를 살피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엄연한 사실이 왜 드라마의 타이틀에 반영되지 않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드라마의 내용이 꼭 사실史實과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터무니없는 일들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드라마는 기본이 픽션虛構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이 같은 상식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방영 중인 <대왕 세종>에는 허점이 너무 많다. 아직은 방송 초기(12회까지 보고 쓴다)인데도 너무 많은 잘 못을 저지르고 있기에 그 중의 몇 가지를 지적하여 앞으로의 과실을 막아주기를 바란다.

1,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태종이 너무 한가하다. 태종은 태종의 시대를 초강력하게 이끌었고, 그것이 곧 세종시대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엄하게도 세자나 중전, 신료들이 태종의 면전에서까지 임금을 무시하는 듯한 간언諫言을 입에 담는 것을 다반사로 여긴다. 당시의 태종에게는 용납될 일이 아니다.

2, 세자(양녕대군)가 드나드는 방은 어디에 있는 무슨 방인지가 분명치 않다. 당시의 정부기관인 이조, 예조, 병조, 호조 등과 같은 건물은 광화문 밖 육조관아에 위치해 있었고, 임금이 불러야 궁으로 들어갔으므로 거리 감각이 살아 있어야 당연한데도 그저 아무데서나 모이고, 헤치고 하는 것이 민망하기 그지없다.

3, 공무에 임하고 있는 세자의 거처(이 또한 애매하지만)에 궐밖에 있는 충녕대군이 사복 차림으로 들어와 앉아서 감 놔라 대추 놔라고 참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충녕대군의 언동에서 임금이 되고 싶어 하는 기미가 보이는 것은 세종을 잘 못 그리는 단초가 된다.

대왕세종의 충녕대군


4, 더 끔찍한 것은 양녕대군이 큰 아버지(定宗)가 총애하는 기녀 초궁장에게 아우들이 지켜보는 백주대낮에 수작을 거는가 하면, 거처에까지 끌어드린다. 이 불륜不倫이 용납될 수가 있는가. 작가는 폐세자의 빌미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변명하겠지만, 양녕이 폐세자가 되는 과정은 <태종실록>에 절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서둘러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5, 또 세자가 명나라 사신의 술상을 엎는 대목은 당시의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를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되거니와 세자가 외교사절에게 그렇게 해도 무사할 수가 있을까. 만에 하나라도 그런 광태狂態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혼’이라고 생각한다면 치기稚氣에 불과할 뿐이다.

6, 더 놀라운 것은 정인지, 최만리 등이 모여서 정도전의 '삼봉집三峰集'을 읽는 비밀결사를 하는 데, 여기에 세자가 참석한다. 정도전은 태종에 의해 참살된 사람이고, 이로부터 4백 년이 지난 고종 때까지도 그의 이름조차 거명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작가는 알고나 있는지? 더구나 아직 그가 죽은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인지와 같은 지식인들이 장소를 옮겨가면서 ‘三峰集’을 읽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7, 세종조의 명신 윤회尹淮는 시장바닥을 헤매는 주정뱅이로 나오는가 하면, 명나라 사신들이 묵는 태평관의 부엌일 까지 참견한다. 윤회는 태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태종 10년 무렵에는 관직의 꽃인 ‘이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이런 사람이 난전을 떠도는 주정뱅이면 어찌되는가.

8, 중전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기 위해 상궁을 시켜 독살을 기도하는 것은 아무리 드라마라도 말이 되지를 않는다.

9, 장차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자로 성장하게 될 장영실이 반정부군에 몸담으면서 명나라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을 포탄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지의 극치이고도 남는다.

10,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가 아들 경령군을 후사로 만들 욕심으로 이숙번을 찾아가 아들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을 청하는 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숙번은 효빈 김씨의 멱살을 잡고 태종에게 끌고가 패대기를 칠 인물이다. 이숙번은 태종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분신이었다.

11, <대왕 세종>이 국민드라마라면 왜 15세 미만에게 주의를 환기하는가. 중학교 2학년이 15세 인데, 이들이 볼 수 없는 <대왕 세종>을 왜 만들어야 하나.


Ⅳ.   MBC-TV의 <이산>의 경우는 비교적 성실하게 잘 만들어지고는 있는 역사드라마임에는 분명하나, 법도에서 벗어나는 몇몇 장면의 과장이 작품천체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역사드라마는 사실과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삼강三綱의 법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이 세 가지를 삼강이라고 한다. 삼강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상존한다. 상하의 관계가 문란해지고, 부자의 관계가 무너지며, 부부의 관계가 깨지면 그 사화가, 그 나라가 천박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21세기를 살면서도 이 법도는 유지되는 것이 우리의 ‘모럴’이다. 역사드라마에서 삼강의 도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을 잘못 호도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정순왕후가 사복을 입고 궐 밖으로 나와서 조정중신들을 몽땅 불러모으는 장소는 대체 누구 집이며,

2, 창덕궁에서 얼마나 떨어진 위치에 있는 지 도무지 석연치 않은데도 정순왕후는 거의 매일 밤 그렇게 나간다. 요즘 식으로 하면 안가인지 모르지만….

3. 그것이 한 번이라도 위험천만한 발상인데 정순왕후는 매회 그런 몰골로 궐 밖을 쏘다니고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는 노릇이고, 어느 날은 ‘주상과 세손 중에서 한 사람을 죽여야 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발설한다. 상식으로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정순왕후의 뜻을 잘 받드는 사람이 대신 말해도 되는 일이 아닌가. 
정순왕후 김여진

4, 사도세자에 관련된 기사를 세초洗草한답시고, 책을 찢어서 시냇물에 헹구는 데, 인쇄된 것은 세초가 되지를 않는다. 그것을 고치자면 주서朱書로 고치는 것이 정도다. 왕조실록이나 정부 문건은 모두 그렇게 고쳤다.

5, 어느 날 밤에는 영조가 곤룡포와 익선관을 벗어놓고, 창덕궁을 빠져 나갔는데도 아무도 모른다. 궐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뭐하였고, 더구나 세손이 그 사실을 모른다면 대궐이 아닌 여염집의 사정과 무엇이 다른가.

6, 정조의 즉위식에서의 정조의 모습은 사료를 읽지 않은 정형적이 잘 못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생각이 나서 울고, 또 우느라 즉위식에 나오지 않으려 했지만, 대신들의 간청에 못 이겨 늦게 나와서 즉위식이 상당히 미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드라마 보다 사실이 더 빛나지 않은가.
0123456789

Ⅴ. 역사를 학문으로 읽는 역사학자들은 사서史書에 적힌 문자만을 읽는다. 그러므로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역사드라마 작가는 사서의 적힌 문자보다는 그 행간行間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를 흐름으로 읽을 수가 있는 것이 역사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권한이자 행운이다.

역사의 어느 대목만을 끊어서 읽으면 앞뒤의 사정이 맞질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역사의 사실을 확인 할 때도 글자(사실)만을 읽지 말고 앞뒤의 사정을 길게 살필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영월 땅에 부처되어 있던 단종이 죽던 날을 <세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노산군(단종)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 3年 10月 21日자. 이로부터 장장 74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승지 이자화李自華의 발설이 「중종실록」에 실리게 된다.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君으로 강등하였다가 이어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중종실록> 26년의 11월 11일자. 단종이 자살했다고 적힌 <세조실록>과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기사가 같은 실록에 실리기까지는 무려 7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와 같이 드라마작가는 역사의 흐름을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 방송국에서는 시청률에만 의지하여 드라마를 평가하려는 단세포적인 사고가 횡행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설혹 시청률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국사정신을 혼란하게 하였다면 역사드라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작방송사의 위상에 상처를 내게 된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설혹 시청률이 높았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이 국민들(시청자)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었다면 작가나 PD는 큰 죄악을 짓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신봉승 작가: 시, 소설, 평론, 연극 극본, 시나리오, 역사 에세이 등을 집필하며 대학에 출강했으며, 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신 작가는 '사모곡', '풍운', '찬란한 여명' '한명회' 등 수십 편의 사극을 써온 한국 TV 사극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9년간 MBC '조선왕조 500년'의 대본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글을 신문기사에서 읽었다. 안그래도 대왕세종은 아예 말도 안되고, 이산도 좀 미심쩍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목조목 지적해주시니 속이 시원했다. 역시 대작가님은 다르시구나.! 싶었다.

그런데 '신봉승'으로 검색해보니 똑같은 기사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게다가 어떤 건 길고, 어떤 건 짧고 길이도 제각각이다. 이상하다.? 똑같은 기사를 이리 여러 언론사에 보내도 된단 말인가 싶어서 자세히 읽어보니 '신봉승 작가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라는 구절이 있는 기사가 있다. 신봉승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직접 가져와서 필요한 부분만 추려서 기사로 낸 것이었다.!

여러 개의 뉴스를 찾아보았지만 출처가 적힌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자신들은 이렇게 남의 홈페이지에서 무작정 퍼와서 '붙여넣기' 신공으로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바꿔서 기사를 내어놓고 네티즌들에게는 '저작권법'으로 협박을 하다니.. 출처조차도 안밝히면서 저작권 운운하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보다.


그 기사 마지막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낯익은 문구가 있었다.

저작권자: XXXXX 신문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