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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왕과 나에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내시를 '궁중에서 왕권을 위협한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중국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환관의 폐해'니 '환관의 농간'이니 하는 표현이 그런 인식을 더욱 더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시제도의 원래의 목적을 알게 된다면 그런 생각은 근거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내시가 왕권을 위협했다는 일부의 통념은 다분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기획 하에서 출발한 것인가를 알아보자.


세계일보 기사 일부 발췌: 원 출처는 제목에 링크

내시들이 정말 왕 독살 주도했을까? SBS 사극 '왕과 나' 계기로 본 환관들의 세계


◆환관이 국왕 독살 주도?=드라마에서 예종은 판내시부사 조치겸(환관 전균을 모델로 한 가상인물)에 의해 독살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예종의 죽음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는 점에서 독살설을 완전 허구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 재야 학자 이덕일씨는 인종, 효종, 현종, 경종, 정조, 고종 등 600년 조선사에서 왕권과 신권 대립이 첨예했던 시기에 특히 국왕 독살 가능성이 높았다고 주장했다.

예종 때 역시 한명회를 비롯한 계유정난 공신들의 전횡이 심했다. 하지만 학계는 독살설은 차치하고 환관이 왕의 독살을 주도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환관이 독약으로 영조(6년)를 살해하려 했던 모반사건을 연구한 조윤선 청주대 교수는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던 사대부 세력이 환관이나 궁녀를 이용해 국왕에게 독약을 먹이는 ‘소급수(小急手)’의 예는 많지만, 환관은 어디까지나 궁궐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다”고 강조했다.

국내 환관 연구를 본격화한 정희흥 대구대 교수 역시 “일정 부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 고려시대 환관과 달리 조선의 내시들은 ‘왕의 노비’에 불과했고 정치적 역할도 철저히 차단됐다”고 말했다.

◇조선 고종황제 폐위를 지켜보는 내시들. 경인문화사 제공

◆김처선과 성종의 관계는=극중 인물 김처선은 단종실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쿠데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단종 3년(1455)에 우호적이던 환관들을 대거 숙청하는데, 김처선 역시 이때 지방 관노로 유배된다. 2년 뒤 복직된 그는 성종 때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을 세워 정2품 자헌대부에까지 이른다. 특히 연산군 11년에 임금의 실정에 대해 바른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모두가 침묵할 때 유일하게 직언한 충신’으로 알려진 김처선의 캐릭터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중종이 반정 성공 후 김처선을 명예회복시켜야 한다는 중신들의 간청을 수차례 거부한 것도 그의 성품이 강직해서가 아니라 당시 만취해 실언한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를 놓고 김처선과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설정된 성종도 사실과는 다소 다르다. 성종은 다른 왕들에 비해 환관을 우대했다고 평가받지만 정치 개입만은 철저히 막았다. 정희흥 교수는 “성종은 승정원으로 일원화된 왕명 출납을 편의상 환관이 대신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등 환관의 정치 금지를 제도화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 이하 생략 -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중국의 환관들과 달리 우리나라의 내시들은 일부 악명높은 이름들(김자원 등)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권력이 미약한 편이었고 왕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후대에 이르러 김처선에 대해서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역사를 아름답게 포장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바램이다. 이는 비단 김처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역사 인물들이 사극의 주인공화 하면서 나오는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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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한맺힌 발언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44 회 / 2월 18일 (월) 밤 9시 55분

정조 드라마가 작년부터 계속적으로 인기를 끄니 영조, 정조 관련 서적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네요.
관련글: 정조 열풍 - '이산, 한성별곡, 정조 암살 미스테리 8일'에서 정조 이미지

시청자들은 극적인 것을 좋아하니 그동안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수없이 만들어졌지만 그 아들 정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저도 정조하면 '탕평책과 규장각'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더라구요.

사도세자의 비극이 크다면 노론의 틈바구니 속에서 세손 자리를 부지한 정조의 아픔 또한 컸을텐데 정조 또한 세종대왕처럼 너무 성군이라서 그런지 드라마와 출판계에서 홀대받아왔습지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천재군주 정조가 많이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조 관련된 서적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제가 못읽은 것도 많습니다..  "지가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무슨 자격으로 소개해?"라고 생각지 마시고 정보라고 생각해 주세요.




정조 중심의 책들입니다.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고즈윈 펴냄
18가지 키워드로 정조와 그의 시대를 해석하다 정조와 18세기 조선을 살펴보는 역사서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역사학자 이덕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철인군주 정조의 희망과 좌절, 성공과 회한, 도전과 꿈의 역사를 풀어낸다. 기존의 연대기식 서술이 아니라, 정조 시대에 있었던 사건들을 반영한 18가지 주제를 통해 정조 시대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아버지 사도세

===>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는 유명한 말이 나오는 책입니다.

이덕일 교수는 이 말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사도세자를 언급할 때마다 이 말을 인용합니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왕 독살사건까지)

영조가 승하한 후 정조의 즉위 초기, 택군(임금을 고름)이 당연시되어 정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노론무리들 속에 쌓인 정조입장에서는  "과인(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꺼내는 것도 대단한 용기였다고 합니다.

정조를 조명하겠다고 나선 드라마 이산에서도 절반 이상이 흐르도록 정조의 세손시절만을 다루는게 아쉬웠는데 이 책에서 그 아쉬움을 덜어줄 것 같네요.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상세보기
김준혁 지음 | 여유당 펴냄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는 정조 전문가가 풀어 쓴 정조와 화성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이다. 정조 시대 정치사를 공부해 온 소장 연구자인 저자가 정조의 사상과 화성 건설의 의미, 그리고 시대 정신을 알려준다. 군왕 정조와 인간 정조를 함께 만날 수 있으며, 정조 시대 개혁 정치의 실체와 정조가 꿈꾸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백성을 위한 국왕 정조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이한우의 군주열전 6) 상세보기
이한우 지음 | 해냄출판사 펴냄
국가 개혁과 인간적 고뇌 사이에서 갈등한 군주, 정조 역사로부터 배우는 리더십 교과서『이한우의 군주열전』시리즈. 조선왕조의 6대 왕을 선정하여 그들의 리더십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조선왕조를 빛낸 군주들의 활약상과 그들의 리더십을 현대적 감각에 맞는 문체로 풀어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흥미진진한 사료들을 추적하고, 그 행간의 의미를 포착하여 역사적 상황을 직조해

영조와 정조의 나라 상세보기
박광용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조 탕평정치의 시대를 일관되게 추적한 저자가 영정조시대 개혁의 참모습과 역사적 지혜를 객관적으 로 조명한 저서. 신세대 정치세력 사림의 진출을 시작으로 도덕군자들의 붕당의 역사, 절대통치자에서 개혁정치가로 탈바꿈한 영,정조와 탕평책 등을 기술했다.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상세보기
신병주 지음 | 효형출판 펴냄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인 저자가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대미를 장식한 반차도를 중심으로 조선 궁중의 예법을 소상히 기록한 책이 출간됐다. 1759년 영조가 정순왕후를 신부로 맞이하여 치른 혼례식의 그림으로 50쪽의 화폭에는 보행인물 797명, 말탄 인물 391명 등 총 1,188명이 조선시대 복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의궤의 자료적 가치에서부터 66세 신랑과 15세 신부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탐구했다.

사도세자의 고백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사도세자의 죽음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책. 저자는 그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사도세자와 관련된 현존하는 모든 기록을 샅샅이 살펴보고, 행간 사이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 그간 갈고 닦아온 역사학의 다양한 해석 기법들을 동원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남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살아서는 물론 죽은 후까지도 저주와 조소, 그리고 동




영정조가 중심 주제는 아니지만 정조/영조/사도세자 관련 이야기가 상당량을 차지하는 책입니다.

조선 왕 독살사건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 펴냄
조선 왕 독살설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수수께끼를 낱낱이 파헤치는 책.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왕들의 독살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특히 잘 알려진 기존의 정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몰랐었던 야사 속에 나타난 사실들까지 총정리하여 살펴본다. 이 책은 인종, 선조, 소현세자, 효종 등 독살설에 휩싸인 왕들의 최후 순간을 되짚어보며 그 속에 숨겨진 권력과 암투, 음모와 배신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

왕을 낳은 후궁들(표정있는역사) 상세보기
최선경 지음 | 김영사 펴냄
후궁들의 삶을 통해 잃어버린 조선의 역사를 복원하다 역사의 다양한 표정을 전해주는『표정있는역사』시리즈. 당대인의 삶의 모습 그 자체, 그 시대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역사를 지향한다. 왕의 표정에서 노비의 표정까지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삶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 여덟 번째 <왕을 낳은 후궁들>은 궁궐 안 깊숙이 감춰진 후궁들의 삶을 조명한 최초의 대중역사서이다. 조선왕조 역사에 비극으로 남

왕의 투쟁 상세보기
함규진 지음 | 페이퍼로드 펴냄
조선의 왕 4인의 정치투쟁을 조명하다 <왕의 투쟁>은 권력의 정점에서 사투를 벌인 조선 왕들의 정치투쟁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500년에 걸친 조선 왕들의 투쟁사를 세종, 연산군, 광해군, 정조라는 네 왕을 통해 보여준다. 성군이라 불리는 왕부터 폭군의 대명사로 유명한 왕까지, 조선 왕들의 투쟁사를 대표하는 네 왕의 생애를 추적하고 그들만의 특징적인 권력 사용법과 그 명암을 알아본다. 1부에서는 세종, 연산군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석필 펴냄
석필 테마 역사 읽기 시리즈 1. 조선의 당쟁사. 영남 지역이 기반인 동인과 남인의 종통 퇴계 이황, 기호지역의 기반인 서인의 종주 율곡 이이, 서인 영수 우계 성혼, 동인 영수 성암 김효원, 북인 대북 영수 아계 이산해 등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선의 당쟁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 책은 글자가 굉장히 작고 촘촘하니까 잘 선택하셔야 됩니다.





어린이용도 땡기는 군요~ 난 만화가 너무 좋아~~

정조(백성을 위해 새 새상을 열어라)(새시대큰인물 27) 상세보기
햇살과 나무꾼 지음 | 어린이중앙 펴냄
21세기 위인전『새시대 큰인물』시리즈 제27권 ≪정조≫. 본 시리즈는 어린이들이 꼭 알아야 할 위인들의 일생을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27권은 <정조>는 조선 시대 22대 임금 정조의 일대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조는 백성들의 생활을 좀더 편안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개정판>

영조대왕과 이산 정조(16대 인조 22대 정조)(만화 조선왕조실록4) 상세보기
허순봉 지음 | 은하수미디어 펴냄
『만화 조선왕조실록』시리즈 제4권《영조대왕과 이산 정조》. 본 시리즈는 조선 시대의 역사를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만화로 풀어내, 416 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술술 읽어나갈 수 있다. 4권 <영조대왕과 이산 정조>에서는 제16대 인조부터 제22대 정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는 영조께서 완전 산신령처럼 나오셨군요. 한국판 산타 할아버지라고 할까요? ㅋ


이산 정조(백성을 사랑한 개혁 군주) 상세보기
김희석 지음 | 능인 펴냄
이 책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인물 만화로,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대왕의 일대기를 소개합니다. 정조대왕은 온갖 위협 속에서도 아버지를 죽게 만든 세력에 꿋꿋이 맞서고, 당파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며, 개혁 정치에 앞장섰습니다. ☞ 이런 점이 좋습니다! 이 책은 가장 역동적인 시대에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정조대왕의 일대기를

정조(웅진 생각쟁이 인물06) 상세보기
김준혁 지음 | 씽크하우스 펴냄
새로운 시선, 새로운 구성으로 바라보는 역사 인물! 『웅진 생각쟁이 인물』시리즈 제6권《정조》. 본 시리즈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인물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하는 인물 위인전이다. 각 권은 기존의 동화 형식의 구성을 탈피하여, 다양한 시사 상식과 역사 정보를 곁들여 구성했다. 수준 높은 일러스트와 풍부한 사진 자료는 독자의 빠른 이해를 돕고 있다. 6권은 '정조 연구'로 박사 학

정조(인물로 보는 한국사 29) 상세보기
표시정 지음 | 파랑새 펴냄
『인물로 보는 한국사』시리즈 제29권《정조》. 본 시리즈는 역사학자 33인이 선정한 인물을 통해 한국사를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책으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꼭 알아야 할 역사적 인물 57인이 소개됐습니다. 각 권은 해당 인물을 깊이있게 연구한 역사학자의 감수를 받았습니다. 29권에는 조선 시대 제22대 왕 정조의 일대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 발전시켜 정치를 안정시키고, 새

 

여러분이 혹시 이 중에 읽고 싶은 책이 있나요? :)
혹은 저한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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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도 벗기지 못한 '혜경궁 홍씨' 의 가면.



"남편을 잃었는데 아들까지 잃겠습니까. 그 때의 아픔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을겁니다."


[이산] 의 '혜경궁 홍씨' 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산] 속 혜경궁의 모습은 강인한 어머니이자 자애로운 부인이고, 당파에 남편을 잃고 아들까지 잃을 뻔한 비운의 여인이다. 그러나 역사 속 혜경궁의 모습은 과연 그러할까. 드라마 [이산] 이 벗기지 못한, 아니 어쩌면 벗기지 않은 혜경궁 홍씨의 '참모습'. [한중록] 으로 만들어 진 혜경궁의 가면을 벗겨보자.


남편을 버리다.


영조 20년 1월 9일. 열살의 '세자빈' 을 앞에 두고 장차 임금의 장인이 되는 홍봉한이 입을 열었다. "궁중에 들어가면 3전 섬김을 삼가고 조심해 효성으로 힘쓰고 동궁 섬김을 반드시 옳을 일로 돕고, 말씀을 더욱 삼가해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어린 세자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라." 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가슴 깊이 새기고 어린 세자빈은 구중궁궐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 사람이 영조와 정조, 순조의 시대를 관통한 여인, 혜경궁 홍씨였다.


이렇게 '집의 복을 닦으라.' 는 아버지 홍봉한의 말 한마디는 혜경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백두의 처지였던 홍봉한이 하루 아침에 세자의 장인이 되고, 숙부인 홍인한이 세도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노론 명가로 일어나기 시작한 풍산 홍씨 가문을 위해 혜경궁은 나라와 남편과 자신을 모두 갖다 바쳐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성공이자, 숙부의 성공이었고 곧 자신의 성공이기도 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 을 잇는 단 하나의 혈육, 그리고 장차 왕통을 이어나가야 할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겉으로 보기엔 '최고의 결합' 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합은 조선 최고의 비극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결합이었다. '소론' 을 지지하는 세자와 '노론' 명가의 세자빈은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혜경궁은 남편을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 에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불편한 몸을 치유하러 나간 온양 행궁에서조차 백성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멀쩡한' 인물이었다. 사도세자가 혜경궁의 말처럼 그저 '미치광이' 에 불과한 정신병자였다면 영조가 10여년 동안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허나 혜경궁은 이상하게도 '일관되게' 사도세자 정신병자설을 고집했다.


혜경궁은 남편의 원대한 꿈을 가장 지척에서 지켜보았다. 사도세자의 꿈은 '노론정권' 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소론정권' 을 세우는 것이었다. 썩을대로 썩어버린 노론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역학구도를 구상하는 사도세자의 꿈은 혜경궁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위협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그녀는 사도세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노론의 '스파이' 로 활약하기로 결심했다. 사도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혜경궁의 입을 통해 궐 밖으로 빠져나갔고 노론은 혜경궁의 도움에 힘입어 사도세자 제거라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아무렇지도 않게 꾸밀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부인이 자신이 아닌 가문을 택했다는 처참한 상황에 영조의 어린 부인인 정순왕후 김씨가 가세하면서 사도세자의 입지는 더더욱 궁색해졌다. 사도세자는 노론이라는 강적이 밖에서 둘러 싸고 있는 위급한 형국에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부인 혜경궁과 법적인 어머니 정순왕후, 생모인 영빈 이씨 모두 바깥에서 이뤄지는 '사도세자 제거 음모' 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베겟머리 송사가 송사 중에 으뜸' 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사도세자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바깥과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공격에 영조와 사도세자는 돌이킬 수 밖에 없는 강을 건넜다. 이것은 혜경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그날,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 목숨이 그 날 마칠 것도 스스로 염려하여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었는데 동궁(사도세자)께서는 생각과 다르게 나더러 하시는 말씀이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하시기에 내가 눈물이 드리워 말없이 허황해서 손을 비비고 앉았더니, 이 때 대조(영조)께서 휘령전으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혜경궁을 향한 사도세자의 원망어린 발언이다. 지금의 말로 풀자면 "나는 죽는데 이상하게도 너는 살 것 같으니 너의 뜻이 참 무섭다." 는 한탄이었다. 이어서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이런 말까지 남긴다. "자네가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휘향을 내게 안 씌우려는 그 심술을 알겠네."


'나는 죽는데 너는 안 죽으니 이상하다.' '참으로 무섭고 흉하다' '내 아들을 데리고 혼자 오래 사려고 한다' '심술이 가득하다' 는 폭언은 10여년 넘게 자신과 함께 살아 온 부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서슴없이 혜경궁에게 그런말을 퍼부었다. 운명의 그 날, 사도세자도 혜경궁도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혜경궁과 부인의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사도세자, 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결합이었던 것이다.






아들의 즉위를 방해하지 마라.


모두가 알다시피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아사했다. 온 몸이 굳고, 손톱이 다 빠질 정도로 뒤주 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지냈던 사도세자는 대처분 8일만에 목숨을 잃었다. 그 시간 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은 뱃놀이를 떠나 있었고, 혜경궁 홍씨는 그런 아버지에게 사도세자를 도운 인물이 소론 영수 조재호임을 고해바쳤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상관없이 그렇게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성심을 다했다. 자신의 가문을 위한 충성의 반 만큼만 혜경궁이 사도세자에게 신경을 썼더라면 사도세자는 아마 그런 식으로 비명에 횡사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사도세자를 죽인 '뒤주' 가 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의 아버지인 홍봉한에 의해 역사 속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훗날 뒤주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힘들어 '일물(一物)' 이라고 불리는 이 뒤주는 홍봉한이 직접 영조에게 귀뜸해 대처분 현장속으로 들여 놓았다. 그러나 혜경궁도, 홍봉한도 이 뒤주의 실체에 관해서는 조금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한중록] 에서 볼 수 있듯 혜경궁은 그 처참한 현장을 지척에서 목격한 듯 구구절절한 변명만을 꺼내 놓을 뿐이다.


그렇게 노론의 '대처분' 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대단한 성과를 얻었다. 혜경궁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혜경궁의 착각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마당에 노론이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까지 죽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연산군의 비극에서 볼 수 있듯 세손이 살아 있는 세상은 노론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결국 노론은 사도세자에 이어 '세손' 까지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택군의 정치' 였다.


"남편을 죽였으니 아들도 죽여라." 노론이 혜경궁에게 요구한 것은 바로 이 한가지였다. 허나 혜경궁은 차마 아들까지 버릴 순 없었다. 혜경궁은 노론과 가문의 '세손 제거 결정' 에 누구보다 강력하게 반발했다. 예상 외로 거센 혜경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론은 세손을 제거해야만 했다. 사도세자가 자신들의 손에 의해 죽은 이상 어차피 세손과 노론은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있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 이었다. 혜경궁의 남편인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 선 것이 아버지 홍봉한이고, 혜경궁의 아들인 세손을 죽이는데 앞장선 것이 숙부 홍인한이라는 사실은 남편이 아닌 가문을 택한 혜경궁의 모순이었다. 사도세자 제거 음모와 달리 혜경궁은 가문의 일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것처럼 세손을 살릴 수 있었던 것도 오직 혜경궁과 영조 뿐이었다.


영조 51년, 영조는 백관들을 불러 놓고 "어린 세손이 노론-소론-남인-소북을 알겠는가? 국사와 조사를 알겠는가? 병조 판서와 이조 판서를 누가 할만한지 알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에게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또한 그것을 보고 싶다." 며 사실상 양위 의사를 밝혔다. 이는 노론에게 용납될 수 없는 '청천벽력' 과 같은 하명이었다. 영조의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대답한 사람이 바로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이었는데 그 대답이 그야말로 명언(?)이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나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국사나 조사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즉, 세손은 나랏일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세손이 절대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즉위를 막고야 말겠다는 노론의 강인한 의지가 담긴 한 마디였다.


홍인한의 이 발언은 훗날 홍인한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데 현장에서 들은 영조와 세손 역시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영조는 "참으로 흉하다. 어찌 국사를 함께 논하겠는가." 라며 자리를 빠져나갔고 숙부의 기가막힌 발언을
들은 혜경궁은 숙부에게 "세손의 즉위를 방해하지 말라." 라는 경고문을 발송했다. 홍인한이 이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나와있는 바가 없으나 아마도 콧방귀를 뀌지 않았을까.


그러나 혜경궁 자신조차 용납할 수 없는 이 발언을 30년이 흐른 뒤 혜경궁은 [한중록] 에서 충성심 어린 발언으로 뒤바꿔 조작해 놨다. 세손이 이 세가지를 모두 안다고 대답하면 영조가 "내가 그리 금하는 당론을 세손이 안단 말이냐?" 라며 역정을 낼까 두려워 홍인한이 구구하게 변명했다는 것이다. [한중록] 의 이 구절을 보다보면 끝끝내 자신의 가문을 버릴 수 없었던 혜경궁의 처지가 절절하게 드러나 보여 한스럽기까지 하다.


이처럼 노론의 세손제거 공작은 대담하고 치밀했다. 다만, 다행인 것 한 가지는 노론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세손의 운명을 결정지을 결정권자 '영조' 가 세손을 지켜냈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삼종의 혈맥의 유일한 종손인 세손을 버릴 수 없었다. 아들의 처참한 죽음과 며느리의 간청을 지켜보며 영조는 끝내 세손에게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었고, 세손은 1777년 조선조 제 22대 왕이 된다. 바로 '명군' 정조의 탄생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무너뜨린 자신의 가문.


정조가 무사히 즉위할 수 있었던데에는 영조와 혜경궁 홍씨의 힘이 지대했다. 정순왕후 김씨를 위시한 외척가문의 발호와 풍산 홍씨 집안의 음모는 혜경궁에 의해 일차적으로 차단됐고, 영조에 의해 최종적으로 마무리됐다. 남편은 버려도 아들은 버리지 못했던 한 어머니의 절절한 모성이었다. 훗날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 번 온 몸을 내 던지지만 적어도 정조의 즉위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의 즉위로 이어지는 비극은 끝나지 않는 비극이었다. 사도세자 제거가 새로운 비극을 불러 일으켰던 것처럼 정조의 즉위는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정조의 즉위 일성은 노론에게도, 혜경궁에게도 가슴 철렁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임금이 된 정조의 첫 마디였고 혜경궁은 그 발언과 함께 자신의 가문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직감했다. 혜경궁의 예상처럼 정조의 '복수' 는 처절하게 감행됐다.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순왕후 가문은 풍비박산 났고, 노론의 주요 대신들이 귀양길에 올랐다. 정조의 조용한 '복수' 의 마지막 타겟은 당연히 '세손은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던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가문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혜경궁이 받은 충격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혜경궁이 정조의 '복수' 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식투쟁' 밖에 없었다. 정순왕후 김씨가 오라비를 살리기 위해 단식을 감행한 것처럼 혜경궁 역시 아버지와 숙부를 살리기 위해 단식을 감행했다. 혜경궁의 단식 때마다 정조는 "아! 내가 있는 것은 곧 자궁(혜경궁)의 덕이니 어찌 자궁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라며 탄식했다. 홍봉한과 홍인한을 죽이는 순간 사도세자에게는 효도가, 혜경궁에게는 불효가 되는 것 역시 정조가 처한 딜레마라면 딜레마였다.


정조조에 이르러 풍산 홍씨 가문은 완전히 몰락했다. '망국동에 망정승' 이라고 불리던 홍봉한-홍인한 형제는 위풍당당한 위세에도 불구하고 손자에 의해 귀양길에 올랐고, 끝내 부활하지 못하고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혜경궁으로서는 가슴을 칠 수 밖에 없는 통탄이었으나 대 놓고 불평할 순 없었다. 이미 혜경궁이 살고 있는 나라 조선은 풍산 홍씨의 나라가 아닌 '정조의 나라' 였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가문의 부활을 꿈꾸다.


혜경궁은 '가문의 부활' 을 23년 동안 꿈꿔왔다. 그러나 아들이 살아 있는 한 가문은 부활할 수 없었다. 아들이 임금이면서 자신의 가문은 몰락한 이 현실은 혜경궁 스스로 남편이 아닌 가문을 택한 것으로 자초한 일이었다. 혜경궁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가문의 부활을 곱씹었다. 그렇게 혜경궁이 꿈 꾼 '가문의 부활' 은 예상치 못하게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1800년 정조 24년 6월 28일, 종기로 투병 중이던 정조를 둘러싸고 치료상의 난맥이 드러난다. 정조 스스로 의학 지식이 뛰어난 군주였고 궁중 의원들이 즐비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치료는 쉽사리 이뤄지지 못했다. 바로 정조의 최대 정적 중 한명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정조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기 대문이다. 궁중의 한낱 아녀자로서 임금의 치료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불경에 가까운 파격이었으나 노론 대신들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른바 '정조 독살설' 의 서막이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병세가 선조 병술년의 증세와 비슷하니 성향정기산이라는 탕약을 올려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정순왕후의 하달을 당시 도제조 이시수가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없는 아녀자의 말 한마디에 임금의 치료가 우왕좌왕 하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정순왕후는 내시를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겠다며 직접 대전에 발을 들여 놓기까지 했다. 말할 나위 없이 사태가 급박했다.


사태의 급박함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누구보다도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이었다. 정조가 죽어야 가문을 살릴 수 있는 처지였음에도 혜경궁은 아들과 가문을 맞바꿀 정도로 비정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정순왕후가 대전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곤 혜경궁은 그 즉시 "동궁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 라는 전교를 내리고 대전으로 향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처럼 외간의 대신들은 혜경궁의 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 없었으므로 잠시 물러났고 정조를 둘러싼 노론 대신들의 방어벽은 혜경궁에 의해 다시금 허물어졌다. 혜경궁은 동궁을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대전에 들어갔다. 정순왕후 김씨와 혜경궁 홍씨, 정조를 죽여야 하는자와 살리고자 하는 자의 밀고 당기는 기 싸움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혜경궁이 대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정조의 안색을 살핀 혜경궁은 자전과 함께 처소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정순왕후를 견제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기엔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결국 혜경궁이 처소로 돌아간 뒤 정순왕후는 다시 한 번 정조의 치료 전면에 등장했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라는 명과 함께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 둘이 자리잡았다. 투병 중인 임금과 그 임금을 죽여야만 사는 대비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다. 잠시 뒤 방안에서는 정순왕후의 곡소리가 들렸고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것은 정조를 낳은 혜경궁도, 부인인 효의왕후도 아닌 정조의 최대 정적, 정순왕후였다.





끝내 가문을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 홍씨.


정조 사후, 어린 순조를 대신해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했다. 정순왕후는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가문을 살리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하는 한편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을 사사하는 등 풍산홍씨 가문에는 잔혹한 대처분을 내렸다. 외척은 자신의 집안 하나면 된다는 정순왕후의 철저한 개인주의는 다시금 혜경궁 홍씨를 절망에 빠뜨렸다. 훗날 혜경궁이 "흉하도다, 흉하도다." 라고 탄식한 정순왕후의 인품은 바로 이토록 잔혹했다.


혜경궁이 자신의 가문을 살릴 수 있었던 때는 정순왕후가 죽는 그 순간이었다. 정순왕후의 죽음과 함께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과 정조의 죽음의 가장 생생한 목격자임을 자처하며 [한중록] 을 편찬했다. 그리고 순조에게 "내 아버지와 가문의 신원을 회복 시켜달라." 며 이는 "선왕의 유지" 라고 강변했다. 정조도, 혜경궁도, 정순왕후도 모르는 주장이었지만 혜경궁은 일방적으로 이것을 주장하며 자신의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한중록] 에서 펼쳐지는 풍산 홍씨 가문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절절한 변명과 순조에게 펼치는 생떼와 같은 일방적 주장은 어쩌면 사도세자의 비극 조차 외면하려 했던 혜경궁 홍씨의 자기 변명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혜경궁은 한 평생을 가문을 위해 살았다.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가문의 뜻을 저버린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70평생 혜경궁을 옥 죈 것은 '가문의 부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가문을 위해 남편을 버렸고, 가문을 위해 [한중록] 을 지었고, 가문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던졌다. 그 업보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낳았고, 정조의 비극을 낳았고, 결국은 조선을 소통과 변화의 시대에서 폐쇄와 퇴보의 시대로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지금껏 드라마에서의 혜경궁은 남편의 죽음에 눈물 흘리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그려져왔다. 그러나 실제 혜경궁은 강인한 어머니는 되었을지언정 자애로운 부인이나 현명한 여성은 되지 못했다. 혜경궁이 처한 모순이 정조의 모순이었고, 그 모순이 결국 정조의 개혁을 주춤거리게 할 수 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 혜경궁이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더라면 정조의 개혁은 조금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집의 복을 닦으라' 라는 아비의 말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았던 '풍산 홍씨' 의 여인. 그리고 그 운명 때문에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밖에 없었던 잔혹한 여인. [한중록] 과는 전혀 다른 실제 역사 속 혜경궁 홍씨의 슬픈 가면은 지금도 사도세자와 정조의 절절한 삶을 정 반대로 대변하는 살아있는 '역사' 로 숨쉬고 있다.


참고자료 : [이한우 군주열전-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 [이덕일 역사서-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이덕일-사도세자의 고백][신봉승-조선 정쟁사][혜경궁 홍씨-한중록][일성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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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폐비는 폐비 윤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때문에 한꺼번에 폐출당한 고모와 조카: 폐비 신씨, 단경왕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이긴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쫓겨난 중전은 몇 명 더 있었습니다. 

먼저 미친 남편 연산군과 혼인하는 바람에 조용히 살다가 날벼락 맞은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廢妃 愼氏, 거창군 부인. 1472년~1537년)는 연산군의 정비(正妃)로 신승선과 임영대군의 딸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거창.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의 고모입니다.

연산군과 폐비 신씨(거창군 부인)


단경왕후의
아버지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으로 연산군의 처남이었고 할아버지는 당대의 명신이었던 거창부원군 신승선으로 연산군의 장인이기도 했으며 고모는 바로 연산군의 비(妃)로 그녀의 친정 거창 신씨 가문은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문 배경이 그녀의 인생 전반에 걸쳐 막대한 불행을 안겨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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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는 자기가 폐비 윤씨(제헌왕후)와 연산군에게 한 짓이 무서웠는지 아니면 손자 융(연산군)의 광기를 일찌감치 알아보았기 때문인지 몰라서 신수근의 딸을 진성대군(훗날 중종)의 처로 삼아줍니다. 그녀가 바로 단경왕후입니다. 연산군이 처가하고는 잘 지냈으므로 설마 자기 부인의 조카를 과부로 만들지는 않으리라 예상한 것이지요. 연산군이 완전 싸이코에 가까웠음에도 자신의 가까운 사람과는 살갑게 잘 지냈다는 이런 기록들을 보면 그의 광기는 인수대비한테서 키워진 건 분명한 듯 합니다. 그의 행실을 보면 성군감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적어도 폭군은 안됐을 것 같거든요.

어쨋든 인수대비의 전략은 적절했고, 진성대군은 갑자사화의 피바람 속에서도 목숨을 건집니다. 근데 역사가 참 재미있습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은 중종 반정을 도모하는 패거리들에게 '왕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영특하므로 세자를 믿어보자'고 하며 반정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처가와는 잘 지냈던 연산군에 대한 의리때문일수도 있고, 임금의 처남이 되든, 새 임금(중종)의 장인이 되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괜히 실패할지도 모르는 역적 모의을 일으켜서 자기 집안을 다치게 하기 싫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습니다.


그의 바램과는 달리 중종 반정은 성공했고, 아버지
신수근의 선택으로 그 불똥은 엉뚱하게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에게 떨어집니다. 신수근이 참 불쌍하죠? 만약 찬성했으면 현재 중전인 자기 여동생은 쫓겨나더라도 자기 딸과 집안은 살렸을텐데... 연산군이 쫓겨나는 바람에 여동생도 폐비돼, 자기 집안도 망해, 딸도 반정 성공으로 국모의 자리에 오른지 7일 만에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서인이 되니 말입니다. 반대로 반정공신들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획득하여 왕도 부럽지 않게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았거든요.

반정공신들도 웃긴 넘들이죠. 만약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가 아니었더라면 진성대군은 아예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단경왕후 쫓아내려고 시위대 결성해서 단식투쟁하고(^^;) 난리를 떨었거든요.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겠죠. 뭐. 친정에 멸문지화를 입었으니 단경왕후가 칼갈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불과 몇 년 전에 연산군의 복수로 신언패(牌: 말조심 목걸이)까지 목에 찬 경험이 있으니 복수라는 말만 들어도 온 몸이 떨렸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녀는 폐위된 후 중종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나 공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복위되지 못하고 71세의 나이로 한많은 인생을 쓸쓸히 마칩니다.

단경왕후가 중종에게 보여줄 붉은 치마를 걸어놓았다고 전해지는 치마바위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또한 중종의 임종 직전에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며,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의 야사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군요. 저도 솔직히 그 뒤 중종의 행동으로 보아서 반년도 안되어서 잊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쿨럭~;

결과적으로는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폐비 윤씨, 연산군의 아내인 폐비 신씨(신수근의 누이), 진성대군(중종)의 아내인 단경왕후 폐비 신씨(신수근의 딸)까지 연산군 주위의 여자 3명이 폐비 당했으니.. 연산군 근처에는 얼씬도 말아야겠습니다.ㅋ

도봉산 자락의 연산군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연산은 7년 후 이곳으로 이장했다.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부원군 신씨 묘다


ⓒ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연산은 폭군이었나? 왕권주의자였나?


시삼촌한테 쫓겨나서 폐비된 단종(=노산군)비 정순왕후, 광해군비 혜장왕후도 있습니다. 그 외에 장희빈도 중궁의 자리에 있다가 쫓겨났지만 궐 밖이 아니라 후궁의 지위에서 사사당했고, 인현왕후도 다시 궐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폐비 계열(?)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단종(정태우)과 함께 폐위 당한 단종비 정순왕후(김민정)



구혜선이 빠진 왕과 나에 정태우가 연산군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극 전문이라 불릴 만큼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서 기대가 되네요. 왕과 비에서 단종 역을 맡았는데 정태우는 어찌 늘 쫓겨나는 역할만 맡게 되네요. 그래도 단종역을 세 번이나 맡았다는데 (한명회, 왕과비, 설중매) 이번에 또 폐위당하는 역입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성질이나 마음껏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요.ㅋ


임금께 사사당하고 아들까지 쫓겨난 폐비 윤씨(제헌왕후), 폭군 남편 덕분에 복위도 되지 못한 거창군부인 폐비 신씨,  남편이 왕이 된 대가로 쫓겨난 또 다른 폐비 신씨(단경왕후)....  남편 잘못 만나서 왕족에서 역적이 되어버린 그녀들이 참 가엽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경왕후 능


쓸쓸히 저 세상으로 떠나갔을 그녀들이 편하게 쉬길 바라며 그녀들의 묘에 술 한 잔 바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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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연산군에 정태우... 정태우는 또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군요.
역대 최고의 연산군은 누구? 당신의 투표를 기다립니다 (동영상 비교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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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나' 연산군 정태우의 여자로 폐비 신씨(단경왕후) 박하선 발탁 
정태우, '왕과 나'에서 광기어린 성인 연산군 맡는다
(동영상은 기사 중 일부. 출처는 링크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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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이란 무엇이며, 사약의 성분은 무엇인가?

사약이란 왕족 또는 사대부 등 고위층이 죄를 지었을 때 임금이 내리는 극약이다. 옛날부터 사용되어 왔으나 형전(刑典)에 인정된 제도는 아니다. 형전에는 교수(絞首), 참수(斬首)만을 사형제도로 명시하고 있었다. 왕족 또는 사대부는 그들의 신분을 참작하여 교살시키는 대신에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이는 자살을 통해 덜 잔인하고 덜 비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약을 마신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사약을 받을어 마시는 죄인 (사진 출처: 다음 사전)


사약은 임금이 사람을 시켜 본인에게 내리기도 하고, 일단 유배를 보낸 다음 내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개는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의하여 전하여졌다. 죄인은 사약이 든 그릇을 상 위에 정중하게 놓고 왕명을 받드는 예의를 갖춘 뒤 마셨다.

조선시대의 경우 태종 말년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이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았으며, 단종은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그리고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도 친가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중종 때의 선비 조광조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붕당(朋黨)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도 사사되었으며, 그 유명한 장희빈도 사약을 받았다. 정조 이후로는 차츰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모두 “어명이오”라는 외침과 함께 왕의 명을 받은 사자가 가져온 사약을 마신 뒤 피를 토하며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약을 한자로 풀이해 보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이란 뜻의 사약(死藥)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하사(下賜) 받은 약’이라는 의미의 사약(賜藥)이 된다.


사약의 성분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로 ‘비상’이란 성분이 사용됐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비상이란 비소(As)라는 독성 원소와 황(S) 성분이 섞인 독극물로 조금만 섭취해도 중독 증상을 보여 결국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상대방을 독살하는 데 주로 사용됐다.

이에 대한 명확한 문헌자료를 찾기 힘들다. 일설에는 생금(生金)·  생청(生淸)·  부자(附子)·  게의 알(蟹卵) 등을 합하여 조제하였다고 하나, 이것에 즉사시킬만한 독성이 있는지는 의문시된다.


출처: 인터넷 검색 및 다음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참고.


보충자료


옛날에 사약 어떻게 만들었어요?
 


극약을 내려 처형하는 것은 조선의 경우 형전에 따로 그 법이 없었고, 내의원에서 사약을 만들때는 비밀리에 제조하여 기록을 남기지않았기 때문에 사약의 재료도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극약의 재료로 생금(生金), 생청(生淸), 부자(附子), 게의 알, 비상(砒霜), 초오(草烏), 천남성 등를 사약의 재료로 응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비상
은 자연상태의 비소를 원료로 제조됩니다.

비소는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로 물에 잘 녹으며 몸 속에 들어가면 효소단백질 분자과 결합되고, 세포의 호흡을 방해해 세포를 죽게 만듭니다. 비상을 한번에 치사량 이상 흡입하면 구토, 설사, 모세혈관 확장, 혈압감소 등이 일어나며, 중추신경기능이 마비돼 1-2시간 내에 사망하게 됩니다.


부자, 초오 등에서 독작용을 일으키는 성분은 알칼로이드 성분인 ‘아코니틴’으로 몸속에서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저해제로 작용합니다. 아세틸콜린은 신경과 근육을 이어주는 곳에서 분비되는 물질로서, 만일 아코니틴의 작용에 의해 이것의 분비가 부족해지면 근육마비가 일어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짐승을 사냥할 때 화살 끝에 발라서 사용했던 물질도
바로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방해하는 비슷한 종류라고 합니다.


천남성이라는 식물은 산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잎이 넓고 키가 작으며
딸기 비슷한 열매가 열립니다. 천남성에는 ‘코니인’이라는 맹독성 알칼로이드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이 밖에도 생금(生金: 정련하지 않고 캐낸 그대로의 황금)이나 생청(生淸: 불길을 쐬지 아니하고 떠 낸 꿀),
게의 알(蟹卵) 등을 합하여 조제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특히 부자와 함께 인삼도 같이 사용했다는 설이 있는데, 대열대독한 부자에
인삼은 온기의 상승작용을 일으켜 부자의 열독이 더욱 성하여져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약을 받은 죄수를 죽게 하려면 때로 약을 먹인 후 뜨거운 방에 드러누워 있게 하거나
독한 술을 먹여서 약기운을 한껏 발산시키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드라마에선 사약을 먹으면 바로 피를 토하고 죽는 걸로 나오나, 실제로는 3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한 예로 조선조 숙종대에 사사한 송시열의 경우 두사발의 사약을 마셔도 죽지 않아 항문을 막고 사약을 먹게하여 죽고 난 뒤에도 부릅 뜬 눈을 감기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일설에는  독을 더 빨리 돌게 하기 위해 약을 먹인후 구들을 따뜻하게 데운 방안으로 죄인을 몰아 넣기도 했다고 합니다.




◈ 사극에 등장하는 사약의 성분은?

사약의 성분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성분은 비상이다. 비상은 자연상태의 비소를 원료로 제조된다. 비소는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로 몸 속에 들어가면 효소단백질 분자과 결합해 세포의 호흡을 방해해 세포를 죽게 만든다. 비상을 한번에 치사량 이상 흡입하면 구토, 설사, 모세혈관 확장, 혈압감소 등이 일어나며, 중추신경기능이 마비돼 1-2시간 내에 사망하게 된다.

그 외에 초오와 부자도 사약의 성분으로 많이 쓰였으며, 초오, 부자의 주성분인 아코니틴, 아코닌은 중추신경을 초기에는 흥분시켰다가 마비시켜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출처:
KISTI의 과학향기 상식 보기 [제 453 호/200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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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에 대한 단상(부제: 왕과 나의 권력욕 없는 죽음에 대한 불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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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의 폐비 윤씨 죽음에는 중요한 이유가 빠졌다!

폐비 윤씨를 새롭게 조명한 SBS 사극 왕과 나에서 폐비 윤씨(구혜선)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드라마의 완성도나 폐비의 잘못을 떠나 그녀가 처연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우울하던 차에 슬픈 장면 나오면 울어버려야지 작정하고 봤는데... 눈물은 안났다 ㅡㅡ;

폐비의 눈물과 한이 담긴 금삼의 피는 조선 최악의 폭군 연산군을 만들었다

 


왕과 나 OST 임형주 부디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는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국모에까지 올랐다가 사모하는 임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은 그녀의 비극적인 일생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폐비 윤씨의 일생도 돌아볼 겸 사약 마시는 장면을 잠시 돌아보자. (사진 출처는 디씨인사이드 왕과 나 갤러리) 오만석, 구혜선 두 배우가 얼마나 연기에 푹 빠졌는지.. 내 가슴도 아프다.

김처선(오만석)이 따라주는 사약을 받고 죽어가는 폐비 윤씨(소화, 구혜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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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소화)의 한많은 일생과 그녀를 그리워하는 성종(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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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폐비 윤씨 동영상(장화홍련OST 돌이킬 수 없는 걸음)


 
전부터 폐비 윤씨(제헌왕후로 추존)와 연산군에 대한 글을 하나 쓰려고 했는데 잘 써야한다는 부담감에 미루고 미루다 보니 결국은 폐비가 죽는 날까지도 못썼다.ㅋ 우리나라 최악의 폭군 연산군을 만들어 낸 사건이라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워서 짧게나마 쓰기로 했(는데 길어졌)다.

왕과 나의 착해빠진 폐비 윤씨는 역사 왜곡이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폐비 윤씨도 억울한 점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그 깐깐한 사회에서 평민에 가까운 그녀가 왕비가 되었으니 그녀를 핍박하던 세력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안봐도 뻔하다.

왕과 비의 폐비 윤씨(김성령)와 성종(이진우)



솔직히 악독하기로 따지자면 며느리 쫓아내고 사약까지 내려 죽이고 손자까지 구박했던 인수대비, 그 착한 인종을 들들 볶아 죽인(?) 것도 모자라 아들 명종을 허수아비 만들어놓고 20년 동안이나 해먹은 문정왕후, 정조 독살 혐의를 받고 조선 후기를 다 말아먹은 요녀 정순왕후가 으뜸 아닌가.

폐비 윤씨가 성격적으로는 좀 모난 데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여우는 여우이되 남의 눈에 표시 안날 만큼 앞과 뒤가 다른 여우는 아니었나보다. 진짜 여우는 시어머니 비위도 잘 맞추던데...  인수대비(전인화)와 폐비의 문제를 외아들 시어머니의 질투로 인한 고부갈등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수대비가 둘째 며느리 정현왕후(이진)는 아주 이뻐했거든. 제헌왕후가 폐비가 된 것은 그녀의 뻣뻣한 성격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실록에는 폐비가 중전이 된 후 거만하고 투기가 심하며, 윗 어른께도 공경을 다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건 뭐 왕도 쫓아낸 마당에 충분히 지어낼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게 뭐 그리 나쁜 짓이라고 원자의 어미를 사약까지 먹여 죽이냔 말이다. 이렇게까지 된 것은 분명히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지켜줄 친척도 없던 그녀의 가정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폐비 윤씨의 묘, 회릉.


왕과 나에서 폐비를 새롭게 그리겠다는 시도는 좋았다. 하지만 그 권력의 역학관계를 너무 못그려냈다. 유동윤 작가는 정치권력의 교체와 이동이라는 것이 음모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으로 그렸는데.. 이러한 여인천하식 전개는 유동윤 작가의 한계인가 보다. 지금 드라마 왕과 나처럼 모든 주요 인물들이 선한데 음모와 오해에 의해서만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 즐겨 읽었던 장화홍련 수준의 발상이 아닌가 말이다.ㅡㅡ;;

설영(전혜빈)이나 정내관(안재모) 따위의 공작에 의해 나라의 중대 국사가 좌지우지된다는 거 자체가 말도 안된다고 본다. 더욱이 세조에게 갑옷입힌 정희왕후(양미경), 한명회와 사돈 맺어 왕의 모후로 인생역전한 인수대비같은 정치고수들이 '저런 별 것 아닌 이유로 중전을 죽인 후, 대책없이 그 아들을 왕에 올린다'는 건 인수대비 지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게 아닐까?

폐비는 인수대비와 권력욕 때문에 부딪히는 일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왕과 비에서는 이 부분이 잘 그려져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생기는 알력, 그것을 바탕으로 사건이 진행되어야만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왕과 비나 하얀 거탑에서처럼 소름끼치도록 짜릿한 긴장감을 맛보고 싶었는데 많이 아쉽다.


어쨋든 폐비 윤씨가 죽었으니 조금 있으면 성종 죽을 것이고, 그 아들 연산군이 왕이 될 것이고, 무오사화, 갑자사화 일어날 것이고, 연산군이 폐군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왕과 나는 겨우 한 달 후면 끝난다고 한다. 어우동 나오는 걸 두 달이나 보여줬다는데 제일 중요한 연산군은 겨우 한 달?? 용두사미도 이런 용두사미가 없다. 김처선, 성종, 폐비가 주인공이라고 김처선 할아버지 나이를 몇 십년이나 젊게 회춘시켜놓고 김처선이 보여준 게 없다. 50회 내내 울기만 하더니... 김처선이 이제 와서 뭘 보여줄 수 있을까. 폐비 윤씨가 죽을 때 김처선이 너무 가엾고 두 사람의 이루어지지 못할 운명에 시청자들이 가슴 아파해야 나머지 한 달을 버텨 나갈 텐데.. 주인공 김처선이 나와도 흡입력이 있거나 가슴 아프거나 하질 않고, (아, 물론 우는 건 불쌍하고 마음 아팠지),  (성인) 연산군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왕과 나.... 그동안 뭐한거니? 여인천하에서 명종 20년을 10분만에 압축하더니.. 설마 왕과 나에서도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아직은 왕과 나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두 배우가 열연을 보여주었고, 구원투수 (성인) 연산군의 활약(?)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가 악독해도 연산군의 복수는 언제나 흥미진진한데 구혜선은 그 어떤 폐비 윤씨보다 억울하게 죽었으니 연산군이 나와서 피바다를 만들 때의 카타르시스는 어느 때보다 강할 것이다.

왕과 비의 연산군(안재모)와 김자원



이제 남은 한 달간 연산군이 왜 폭군이 되는지라도 잘 보여주어 그간의 평가를 만회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드라마를 살릴 마지막 희망은 (성인) 연산군이다. 연산군, 카리스마를 보여주어요~

미워도 다시 한 번.
왕과 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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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에서 끝까지 왕을 버리지 못한 충신으로 나온 내시 김처선(장항선)


조선시대 내시에 대한 글을 쓰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글쓰는게 부담스러워서 늘 미루다 보니 생각날 때 한꺼번에 올리게 된다. 간략한 책소개를 해놓고 나도 두고 두고 참고해야겠다.

백과사전에는
내시가 조선시대 대궐 안 음식물의 감독, 왕명의 전달, 궐문의 수직, 소제 등의 임무를 맡던 내시부(內侍府)의 관원이라고 나온다. 간단한 설명이지만 대궐 안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은 내시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소개를 하려고 '내시'로 검색을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영화 '내시(eunuch)'가 나온다. 그것도 무려 안성기, 이미숙 주연이다! 영화 소개를 읽어보니 비극은 비극인데 뭔가 웃긴 건 어쩔 수 없다.

eunuch

안성기, 이미숙 주연 영화 내시 포스터


옛날 영화 포스터는 색감도 색감이지만 어찌 이리 칙칙하고 촌스러운지...

밤에 이루어지는 역사,
여자도 남자도 아닌 내시!! 밤이 두려운 내시들의 몸부림
잘려버린 생生, 잘려버린 사死, 그리고 여女
깊고 깊은 구중궁궐에 남자(王)가 하나, 여자가 수백 명
내시들의 서릿발 같은 성, 뜨거운 여자들의 불같은 성..이라니..ㅋㅋㅋ

이건 뭐 야설도 아니고.. 뭐라구 할 말이 없다.ㅋㅋ
그래도 아리따우신 이미숙님과 안성기님께서 나온 영화기에 애정을 가지고 사진 몇 장을 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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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내시는 중국의 환관들처럼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진 않았다. 권력을 가질 수 없었던 원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너무 오래 전에 읽은 내용이라 기억이 안난다.

기존의 사극에서 보여주었던 내시들의 모습은 주로 고개를 숙이고 종종 걸음을 걸으며 가는 목소리로 "마마~" "눼이~" 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내시들은 현재 왕과 나에서 조치겸(조상선) 역을 맡은 전광렬씨의 모습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내시들은 여자도 (제대로 취할 수) 없었고, 자손도 없었으므로 그들이 부와 권력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 물론 권력형 내시들만.


어쨋든 내시 관련 서적들을 몇 권 찾아보니.... 제법 구미가 당기는 책들이 몇 권 있다.

내시와 궁녀

내시와 궁녀(제왕의 그림자)
박상진 지음 | 가람기획

우리나라의 내시와 궁녀를 다룬 책.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우리 나라 내시와 궁녀를 최초로 소개하고 있다. 내시의 유래에서부터 내시가 되는 과정과 그들의 결혼생활, 묘지, 일화와 함께 궁녀의 유래, 출궁과 죽음, 궁녀의 선발과 입궁 과정, 등 내시와 궁녀의 삶을 빠짐없이 복원하였다.



관련글:
[펌] "거세당한 자들, 그러나 카리스마가 있었다"
관련글: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와 연산군의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 KBS 한국사전(傳)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 (내시와 궁녀 중보판)
박상진 지음 | 가람기획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는 궁중의 은밀한 존재였던 내시와 궁녀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구중궁궐의 숨은 권력자이자 왕의 수족으로 평생을 살아야만 했던 내시와 궁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2005년에 출간된「내시와 궁녀」의 개정증보판으로, 지금 시기적으로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알려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역사를 바꾼 이인자들
역사를 바꾼 이인자들
송은명 | 시아출판사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이인자의 삶을 조명한다!  
이인자 19인의 인물 열전, 막이 오르면 그들의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진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역사의 숨은 실력가- 이인자. 그들이 만든 역사에 대한 이야기.

이인자로서 닦은 기반을 발판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왕건,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조선판 내각주의자 정도전, 당 태종의 원정을 좌절시킨 고구려의 거인 연개소문,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손꼽히는 한명회 등 역사의 또다른 주인공 19명의 삶을 조명한 책.


내시
내시
이정우 지음 | 관동출판사

일곱 분의 군주를 모신 충신 내시 김처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린 이정우의 역사소설 『내시』상 권. 희대의 폭군 연산왕에게 올바른 군왕이 되기를 수없이 아뢰다가 결국, 연산왕의 칼날아래 목숨이 끊어지면서도 충언을 아뢰었던 내시 김치선의 애환과 삶의 고뇌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관련글:
왕과 나의 김처선 - 실제로는 일곱 임금 거쳐.. 연산군에게 직언했다가 극형



왕과 나 김처선
왕과 나, 김처선
이수광 지음 | 눈과마음

SBS 대하사극 '왕과 나'의 주인공, 김처선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 (왕과 나의 원작이 되는 소설) 조선시대, 숙명적으로 내시가 되어 상처 받은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급변하는 정치 현장에서, 암투가 치열한 구중궁궐에서 비록 자신의 몸은 거세를 당했지만 인생마저 거세당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는 내시들의 학문, 야망, 사랑을 치열하게 다룸으로써 그들의 세계를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관련글: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와 연산군의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 KBS 한국사전(傳)
왕과 나 김처선(오만선), 폐비 윤씨(구혜선)에게 고백장면 동영상


관련기사:
수양대군의 속을 썩인 자유분방한 내시 김처선 
왕과나 연산군 폭군 이끄는 세기의 간신 김자원 등장으로 눈길 
(몇몇 기사에는 김처선의 라이벌이라고 하지만 절대 아님.
김처선은 나이로나, 품계로나 김자원에게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음.)


왕과 나의 김자원...이건 너무 잘생겼잖아;; 전혀 간신배 이미지가 아닌 걸~!!

왕과 비의 연산군(안재모)와 쩔쩔매는 김자원



덧1. 내시와 궁녀는 몇 년전부터 꼭 읽고 싶은 책 중 하나였다. 올해가 가기 전엔 읽을 수 있을까?ㅋ
덧2. 김자원은 권력형 간신이라기보다는 주인 비위 잘 맞추는 개;;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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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 신지식

이름 산. 자 형운. 호 홍재.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1775년(영조 51) 12월 노병이 깊어진 국왕이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이 이를 방해하여 조정이 한때 크게 긴장하였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기대를 모을 위치였으나, 탐포하고 무지한 그를 세손이 비천하게 여겨 멀리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완옹주()의 소생으로 어미와 함께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에게 붙어 세손의 적당이 되었다.

그는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시강원의 궁료 홍국영·정민시 등을 참소하기까지 했으나 세손이 이를 듣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손이 대청의 명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를 극력 반대하면서 대청을 명하는 왕의 하교를 받아쓰려는 승지를 몸으로 가로막기까지 했다.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으로 격을 높였다. 그 다음에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상하고 경모궁이라는 묘호를 내렸다.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이렇게 마친 다음 곧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하고 그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면서
명의록을 지어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혔다. 즉위와 동시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제도를 시행하여 후원에 그 본각인 주합루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어 문치의 왕정을 펼 준비를 다졌다.

세손 때부터 시강원 열서()로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1779년에 누이 원빈이 갑자기 죽은 후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를 내쫓고 정사를 직접 주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재위 5년째인 1781년,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각신()들은 이때부터 문한의 요직들을 겸하면서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인
초계문신() 강제()도 주관하였다.

이 제도는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으로 규장각이 이를 주관하게 하여 왕정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신하들을 확대해 나갔다. 근 20년간 10회 시행하여 100여 명을 배출하였다. 무반의 요직인
선전관() 강시()제도도 함께 시행하여 1783년의 장용위(), 1791년의 장용영() 등 친위군영 창설, 운영의 기초로 삼았다.

정조는 숙종· 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정체제를 강화하여 진정한 위민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1784년에 지은 《황극편()》을 통해 주자·율곡의 시대에는 붕당정치가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을 구분하여 전자가 우세한 정치를 꾀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각 붕당 안에 군자·소인이 뒤섞여 오히려 붕당을 깨서 군자들을 당에서 끌어내어 왕정을 직접 보필하는 신하로 만드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필요하다고 논파하였으며, 편전의 이름을 탕탕평평실()이라고 하여 이를 실현시킬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재위 21년째인 1797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공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였다.

그는 만천에 비치는 밝은 달이 되기 위해 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100회 이상을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그는 재위 3년째에 상언()·격쟁()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
일성록()》과 실록에 실린 상언·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을 넘는다. 재위 13년째인 1789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소()를 수원으로 옮긴 뒤로는 능행의 범위가 한강 남쪽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는 수원도호부 자리에 새 원소를 만들어 현륭원()이라 하고 수원부는 화성()을 새로 쌓아 옮기고, 이곳에 행궁과 장용영 외영을 두었다.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는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었는데 그 횟수가 10회를 넘었다. 재위 9년에 경강(), 즉 한강의 상인들 소유의 배를 편대하여 각 창()별로 분속시켰는데 14년에 주교사()를 세워 그 배들을 이에 소속시켜 전라도 조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면서 행차 때 배다리를 만들게 했다.

정조는 재위 2년째인 1777년에 대고()의 형식으로 자신이 펼 왕정의 중요 분야를 민산()·인재()·융정()·재용() 등 4개 분야로 크게 나누어 제시했다. 민산을 일으키기 위해 민은(), 즉 민의 폐막부터 없애야 한다는 신념 아래 즉위 직후 각 전궁(殿)의 공선정례()를 고쳐 궁방의 법외 납수분을 호조로 돌리고 궁방전의 세납도 궁차징세법()을 폐지하고 본읍에서 거두어 호조에 직납하도록 바꾸어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그리고 2년에는
내수사() 도망노비를 추쇄하는 관직을 혁파하였다. 이렇게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인 다음에 감사·수령들로 하여금 민은을 살피는 행정을 강화하도록 하는 한편 어사 파견을 자주하여 악법을 잘라내고 무고를 펴도록 하였다. 심지어 지방의 상급 향리들까지 소견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물었다.

민산의 대본인 농업 발전을 위해 여러 차례 응지() 상소의 기회를 만들고 생산력 증대에 관한 많은 의견들을 수렴해 보급에 힘썼다. 측우기와 점풍간(竿)을 설치하여 세정의 합리화를 꾀했으며 진휼을 위해 여러 차례 내탕()을 출연했다. 1782년에 서운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달력을 계산하여 천세력()을 미리 편찬·간행하게 했다.

민산은 경계()에서 비롯한다는 견지에서 전제()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나 치세 중에는 실현을 보지 못했다.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1791년에 이른바 신해통공()의 조치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없애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했다.

백성들이 부당한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영조 때 시작된 형정의 쇄신을 계승하여 재위 2년째에 형방승지의금부 형조 등에 급파하여 기준을 어긴 형구()의 실태를 조사해 이를 고치게 하고, 그 기준을 《흠휼전칙()》에 실어 각도에 배포하였다. 책에 실은 자의 길이와 같은 유척()을 만들어 함께 보내면서 준수를 엄명하고 어사들로 하여금 이를 자주 확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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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사망 이후 정조(正祖)가 즉위 100일간 한 일

글: 국양 서울대 연구처장,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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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정조 이산의 생애에 관한 TV 연속극과 책이 인기리에 방영되거나 판매되고 있다. 특히 TV에서는 극작가와 PD의 뛰어난 능력 덕택에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의 전개인데도, 시청자는 매주 궁금한 마음으로 다음 주 이야기를 기다린다.

정조는 즉위 3년 정월 초하룻날,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이미 세 차례나 한서(寒暑)가 바뀌었는데, 자신을 반성해 보건대 성찰과 검속(檢束)이 오히려 부족하게 됐음을 느끼게 되었으니, 사방의 신민들이 머리를 들고 목을 빼어 바라던 심정이 어떠하겠느냐? 이는 대개 과인이 지극한 정성으로 세속을 선도해 가지 못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다스릴 길을 찾지 못해서이니, 오히려 누구를 원망할 일이겠느냐? (중략)

대저 생업이 부요해지게 하고 재물이 유족해지게 하기란 무엇을 줌으로써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온 강역의 우리 민생들에게 농상을 부지런히 하고 요역(요役)과 부세(賦稅)를 가볍게 해줘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 수 있게 하여, 채찍질해 받아내는 고통이 없게 하고 안도하여 편안해지는 낙이 있게 하면, 민산(民産)이 족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자연히 유족해지고, 민심이 안정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자연히 안정되는 것이다”라는 새해인사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정조는 항상 국민을 어려워하며,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했고, 경제에 대해 분배와 생산 증대 중 단순 분배보다는 세금을 줄이고 경제 주체들을 격려해 생산을 늘리면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현대 경제이론을 이미 그 시절 깨달은 것을 알 수 있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해여서 국제적으로도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해 4월 22일(음력 3월 5일) 영조가 붕어하고 5일 뒤 정조가 경희궁의 숭정문에서 즉위한다. 아버지를 불운하게 잃었음에도, 복수심을 키우며 살지만은 않은 것 같다. 세손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 하며 서고를 짓고 문집을 만들며 책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정조실록에서 즉위 뒤 100일 동안을 살펴보면 나흘은 기록이 전혀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행사 없이 쉰 것으로 보이고, 나머지 96일은 매일 정사를 보았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근무하지 않는 현재의 우리와 비교해 보면 부지런한 군주였다.

실록에는 그 기간 294건의 기록이 있다. 그중 세손 시절 본인과 아버지인 사도세자에 대한 모함을 바로잡는 논죄에 대한 기록이 84건으로 가장 많다. 그 다음은 79건의 인사에 관한 기록이다. 약 70명이 파직되고 135명이 새로 임명됐다. 채제공, 홍국영 등을 한 직책에 제수했다가 다른 직책으로 바꾼 사실에서 집권 초 인사의 중요함을 깨닫고 고심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많은 기록은 선행 대왕의 장례에 관한 논의이고, 그 다음은 48건의 행정제도 개선에 관한 기록이다. 선행 대왕 시절 늘어난 궁중 기구와 궁인의 수를 감축하고, 행정 비용을 절감하고, 과도한 예절에 소용되는 비용을 줄이고, 궁중 공사에 소용된 비용 절감을 명하고 있다. 국가 예산을 절약해 새 제도와 사업에 규모 있게 사용해야 한다는 개혁행정의 원칙을 깨달았던 것 같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가장 중요하게 준비한 것은 인재 교육과 문예 부흥, 부패로 무너져 가는 과거제도의 개선이다. 초기 100일 동안 두 차례에 걸친 회의에서 기존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할 대책을 상의해 보고하라고 명하고 있다. 그 결과 집권 초기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을 창덕궁 북원(北苑)에 짓고, 규장각을 통해 학자를 모으고 후일 성리학에서 한 걸음 나아간 실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책을 가까이 하고, 부지런하며, 국민을 어려워하고, 국가 경제의 흐름을 볼 줄 알며, 우수한 인재 육성을 도모하고, 인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신하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정조대왕은 세종대왕, 성종대왕과 함께 조선의 3대 성군으로 존경받고 있다. 대통령 당선인과 당선인을 돕는 이들이 옛일에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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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 오프닝 화면 타이틀


방송 삼사의 사극 (SBS - 왕과 나, KBS - 대왕 세종, MBC - 이산) 중, 사극불패 신화를 이어가는 KBS의 대왕 세종이 기대됩니다. 세종대왕은 그동안 너무 평화로운 시대라서 사극에서 다뤄지지 않은 왕인데, 드디어 우리의 위대하신 세종대왕님께서 드라마 주인공으로 납셨습니다.!!!


"니들 정말 너무한거 아니냐??"..고 묻고 계신 세종대왕님



요즘 삼사에서 사극을 앞다투어 그것도 조선 초기(대왕 세종)부터, 조선 초중기(왕과 나), 조선 후기(이산)까지 골고루 보여주니 역사에 관심(만) 많은 저는 행복하기도 하고 챙겨보질 못하니 불행하기도 하네요.

솔직히 저 개인적으로는 양녕대군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이건 양녕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시점에 차차 하기로 하고, 우선 동시대를 다룬 위대한 사극 용의 눈물과의 비교부터 해보도록 합시다. 작품성이나 연기력, OST에 대한 비교도 하고 싶지만 제 깜냥도 그에 모자라고, 또 대왕세종은 아직 초반부이니, 인물들과 설정만 비교하겠습니다.



1. 태종
유동근 태종과 김영철 태종
 
유동근(용의눈물): 그야말로 태종이 살아있었으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의 완벽한 연기와 캐릭터였습니다. 태종의 인간적인 고뇌, 태종의 결단력, 태종의 잔인성까지 다 보여주며 제목이 왜 용의 눈물인지를 알 수 있는 드라마였죠.

유동근표 태종은 굉장히 명석한 인물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절대로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적을 막다른 골목으로 철저히 고립시킴으로써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으로 상황을 만들어 갔습니다. 조강지처인 원경왕후의 동생 넷을 가히 살인마라 불릴 정도로 잔인하게 다 죽이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듯한 모습은 짐승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들과 흔들리는 조선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악업은 모두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 라고 하지요.

이게 실록에 나오는 말인지 그가 직접 한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태종은 정말 진심으로 죄업은 자신이 지더라도 후대가 평탄할 길을 닦아놓은 듯 합니다. (이전 사극에서도 이 대사가 나왔다는데 아시는 분은 좀 도와주세요.)

자기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악업을 지더라도, 그게 자신의 야심때문만이 아니라,
더 나은 후대를 위해서라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물론 요즘 세상에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케 한다는 말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앞으로도 이보다 더 나은 태종이 나올지 의문입니다.



김영철(대왕세종): 궁예의 말투가 아직도 좀 남아있는 것이 약간 아쉽긴 하지만 이 분도 유동근씨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인상깊었을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기력 외에 대왕세종의 태종에서 아쉬운 것은 현재 냉정함과 까칠함만 보일 뿐, 유동근표 태종에서 보았던 치밀함이 다소 부족해보인다는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충신 정몽주를 도끼로 내려찍은 사건 때문에 굉장히 무식하고 생각없는 인물로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 그는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중 가장 똑똑했고,  그렇기에 태조의 조선 건국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늙은 공신들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정치고수였습니다. 지금 김영철표 태종처럼 대신들에게 소리지르고 윽박지르기보다는  은근슬쩍 질문을 던진 다음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도록 만들어 사건을 지휘해 나가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앞으로 태종의 치밀함을 어떻게 보여줄 지 기대 중입니다.



2. 원경왕후 민씨 : 최명길(용의눈물)최명길(대왕세종) 으로 10년만에 다시 연기.

최명길 원경왕후

이렇게 같은 사람이 같은 역을 두 번 맡는다는게 굉장히 드문 케이스죠. 정말 잘 어울리고, 10년 동안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네요. 캐릭터도 거의 동일한 것 같습니다. 무시무시한 태종에게 지지 않고 대드는 강단있는 모습과 아들을 사랑하는 모습 등이 그대로 보여집니다.



3. 세종(충녕대군) :

안재모 세종과 김상경 세종

안재모(용의눈물): 안재모는 여기서 역대 최고의 성군 세종 역을 맡고, 바로 다음 사극인 왕과 비에서는 최악의 폭군 연산군 역을 맡았죠. 어린 나이에도 둘 다 소화를 잘해서 인상 깊었습니다. 현재 왕과 비와 동시대를 다루는 사극 왕과 나에서는 임금에서 내시로 신분이 폭락했지만 연기 하나는 끝내주죠? 그야말로 사극의 젊은 피입니다.

용의 눈물에서는 세종이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특징이 없었죠. 다만 용의 눈물에서는 충녕대군은 왕위에 전혀 욕심이 없었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양녕의 폐세자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왕에 오른 것으로 설정됩니다. (하지만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죠? ^^)

김상경(대왕세종): 용의 눈물에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해 보이던 안재모의 눈빛과는 달리 대왕세종에서는 어린 나이에 벌써 정치와 세상에 뜻을 품은 충녕을 보여주었습니다. 용의 눈물에서는 왕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뛰고 어쩔 줄을 몰라 하지만 실제 충녕은 정치에 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입니다.



4. 소헌왕후 심씨 :

도지원 소헌왕후와 이윤지 소헌왕후

도지원(용의눈물): 충녕 배역도 단역인데 세자빈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친정이 몰락할 때외에는 별로 나온 장면이 없습니다. 이 때 도지원은(여인천하의 뭬야~! 도지원 아님) 아주 어린 나이(중 3?)이었다고 하는데 정통 사극에 출연해서 크게 눈에 거슬리지 않는 수준의 연기를 보였습니다.

이윤지(대왕세종): 용의 눈물처럼 까메오 수준이 아닌 배역이라 상당히 큰 배역인데 개인적으로 참 매력없다 생각하는 배우가 캐스팅되어 약간 아쉽네요. 

자기 때문에 친정이 몰락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내가 소헌왕후라면 왕이면서도 자신을 구해주지 못한 남편(세종)도 미웠을 것 같은데 그런 원망없이 시아버지를 잘 봉양했고, 조선 왕비 중에 내명부를 가장 잘 다스려, 태종에게 덕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땅에 닿는 여인이라는 칭송까지도 들었다고 합니다. 

왕비라는 이유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입은 그녀에게 세종대왕이 해줄 수 있었던 것은 남편으로서의 사랑 밖에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자녀를 많이 두는 것도 중전을 보호해주는 한 가지 방법이었을까요? 어떤 이유에서건 소헌왕후는 세종대왕과의 금슬이 아주 좋았고, 조선 왕비 중에 남편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여인입니다. 자녀가 열이니 임신, 육아 기간만 해도 10년 이상이라 거의 애 낳는 기계였습니다. 늘 배불러 있는 걸로 분장하면 되겠군요.;;

어쨋든 그녀가 세종보다 먼저 세상을 뜬 후에 세종이 크게 슬퍼하여 소헌왕후를 위해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고 하니, 둘 사이가 굉장히 깊었나 봅니다. 젊은 날의 사랑과는 다른 오랜 우정과 믿음, 신뢰, 애착이 합쳐진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겠죠. 집현전 학자들에게도 의지하지 않던 세종에게는 마음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것 같습니다.




5. 양녕대군 :

이민우 양녕대군과 박상민 양녕대군

박상민은 여인천하에서 길상이로 나왔을 때


이민우(용의눈물): 이때 이민우가 20대 초반이었다는데 연기 끝내주죠. 원래는 충녕대군(세종) 역으로 캐스팅이 들어왔는데 이민우가 양녕에 매력을 느껴 배역을 바꾸는 바람에 대본이 수정된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양녕대군이 그렇게 매력있는 인물로 재탄생되었나봅니다.  

이유야 어찌됐건, 양녕대군은 지하에서 이민우와 용의 눈물에게 고마워 해야할 것입니다. 망나니 중에 X망나니였던 그를 이렇듯 멋~지구리하게 포장시켜 줬으니 말입니다. 야사에서는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의 피비린내나는 숙청작업과 정치공작에 질려서 동생에게 지 자리를 물려주고 쿨하게~ 떠나준 것으로 전해져온다지만 실록의 여러 기록은 그렇지 않다고 하거든요.

후에 양녕대군에 대해서 따로 적을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적겠지만 어쨋든 양녕이 권력욕이 없어서 동생에게 그
리 깨끗이 왕위를 물려줄 만큼 됨됨이가 된 인간은 아니었다 이겁니다. 용의 눈물에서 인물들을 재해석한 것까지는 좋은데.. 다른 건 다 참겠습니다만...  양녕대군만큼은 심하게 미화되었다는 거죠.

박상민(대왕세종): 대왕세종에서의 양녕은 용의 눈물에서의 양녕처럼 쿨한 느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양녕은 권력에 욕심도 있었구요. 솔직히 용의 눈물의 양녕은 쾌남아 정도도 아니고.. 무슨 도 통한 도사 같지 않나요? 그렇게 세상사에 미련도 없는 사람이 늙어서 목숨 구걸하려고 수양대군(세조)한테 붙어서 알랑방구 끼고 세종 손자인 단종 죽이자고 그 난리를 떨겠냐구요. 

그런 게 세상이라지만....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응? ㅋㅋ



6.  효빈김씨 : 두 분 다 88년 미스코리아 진(김성령)과 선(김혜리) 이랍니다

김혜리 효빈과 김성령 효빈

김혜리(용의눈물): 원래 성품이 온순한데다 원경왕후의 몸종이었다가 후궁이 되었고 원경왕후 덕에 목숨까지 건졌기에 원경왕후 앞에서는 꼼짝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저도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

김성령(대왕세종): 분명한 것은 현재 김성령표 효빈처럼 건방지지는 않았을 거에요. 피도 눈물도 없는 태종 앞에서 까불 수 있는 건 조강지처 뿐일텐데... 감히 후궁의 아들을 왕위에 앉힐 욕심을 내다니... 이건 윤선주 작가가 좀 너무 오버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원경왕후도 기가 죽어서 조용히 지냈다지요.)



7. 그 밖의 인물들입니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 정하완(용의눈물)최상훈(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20년을 해먹은 전설적인 정승 황희 : 박진성(용의눈물)김갑수(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태종 이방원의 오른팔이었던 이숙번 : 선동혁(용의눈물)김주영(대왕세종)
김주영씨는 10년전에 용의눈물에서 이방간역으로 나오셨다고 합니다.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태종 이방원의 장자방이었던 하륜 : 임혁(용의눈물)최종원(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양녕대군이 폐세자되는 결정적인 사건의 주인공 어리 : 故 이혜련(용의눈물)오연서(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세자빈 김씨(양녕대군 부인) : 안연홍(용의눈물)유서진(대왕세종) 
남편 잘못 만나 졸지에 한양 밖으로 쫓겨난 세자빈 역 안연홍은 저 때만 해도 이미지가 괜찮았는데 지금은 너무 까불이 이미지에 대출광고까지 찍어서 이미지가 너무 나빠져 버렸습니다. 연기도 잘하는 배우인데 참 아깝네요.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5회부터는 아역에서 성인으로 배우들이 바뀌었던데...  너무 어린 아역배우에서 갑자기 너무 삭은 성인배우로 넘어가니 영 적응이 안되네요. 
실제 양녕대군은 쫓겨나고 나면 나올 일도 별로 없을 텐데... 폐세자될 때 나이가 25인데 40에 가까운 박상민씨가 양녕대군으로 나오다니.. 너무합니다.ㅜㅜ 세종대왕 역을 20대만 보여줄 수는 없으니 그랬겠지만 그래도 30대 초반으로는 보여야 할 텐데.. 스물 다섯에 쫓겨난 양녕대군을 40살 아저씨가 연기한다니..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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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은 양녕대군의 미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그의 욕심과 비행, 충녕대군의 왕위에의 욕심과 도전, 그로 인한 두 왕자 사이의 갈등과 알력... 이런게 재밌을 것 같은데 이를 표현하기에 주연 배우들이 너무 나이가 많아서 패기있는 모습이 잘 안드러나는게 좀 아쉽습니다.

그래도 6회 방영분에서 양녕이 기생을 희롱하는 연기는 잘하시더군요. 나이를 잊고 보면 괜찮습니다. 어린 척하기가 어색했을 텐데 패기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어쨋든 앞으로 양녕대군의 행보가 어찌 그려질지 자못 궁금합니다. 초반의 탄탄한 전개를 유지시켜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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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처럼 가벼운 사극에 부족함을 느끼는 분들!
왕과 나의 궁중 내 여인암투에 질린 분들!

오랜만에 나온 선굵은 조선 사극, 대왕 세종 같이 안하실래요?

다 같이~~ 대세에 빠~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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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 출연자들 사진, 이민우/유동근의 명연기 동영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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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왕과 나는 역사에로시트콤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만큼 실패한 드라마일까?? 이산, 대왕세종, 태왕사신기 모두 정통 사극은 아니라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태왕사신기는 그냥 환타지라는 비난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 중
유독 왕과 나가 욕먹는 이유는 뭘까?
아마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퓨전 사극이라고 보기에는 궁중 암투나 정치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오고, 정통 사극이라고 하기엔 역사왜곡이 너무 심하고, 너무 가벼워서 2% 부족해 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역시 어중간하게 중간을 선택하는 것은 잘하면 중용이지만 못하면 실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절충이 어렵다.

     왕과 나 OST 중 오프닝    VS   용의 눈물, 왕과 비 오프닝


아직 중전 윤소화(구혜선)이 폐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성패를 논하기는 약간 이른 것 같으니,,
동시대를 다룬 사극 드라마
왕과 비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비교해보자.

1. 세조
왕과 비 - 임동진님. 무식한 멧돼지로 여겨졌던 세조를 카리스마 있고 고뇌하는 군주로 바꾸어 놓음.
왕과 나 - 김병세님. 너무 잠시 나와서 이미지 각인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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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희왕후/대비
왕과 비 - 한혜숙님. 세조에게 "나는 며느리가 무섭습니다."라고 했던 대사는 실제 역사 속의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기 위한 거사, 계유정난을 도모할 때 갑옷과 무기를 챙겨줄 정도로 야심차고, 대담했으며,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며 정치에 깊숙히 관여를 한 인물인데 왕과 비에서는 너무 인자하게 나왔다.

왕과 나 - 양미경님. 양미경님의 아름다운 미모는 사극에 출연하신 대비분들 중 최고이나, 대사의 억양이 종종 어색해 보여서 몰입에 방해될 때가 있다. 초반 몇 십회를 며느리인 전인화씨보다 더 젊어보일 정도로 젊고 아름답게 꾸미고 나왔을 때는 연기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해 보여서 안타까웠다.

왕과 나에서 정희왕후 캐릭터는 너무 부드럽고 자애로운 면만 보여주고 있으나, 며느리인 인수대비를 나무라거나 자기 주장을 끝까지 내세우는 모습은 왕과 비보다 더 역사적으로 가까워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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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혜왕후/인수대비
왕과 비 - 채시라님. 그 전에 어떤 드라마를 보아도 악역도 선역도 아닌 인물이 저렇게 강하게 뇌리에 박힌 적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명연기. 젊은 나이에 그 연기를 어찌 하였는지 놀라울 뿐이다. 왕과 비에서는 채시라의 연기력으로도, 캐릭터로서도 인수대비를 아주 잘 표현했다고 본다. 그녀의 권력욕과 아들에 대한 소유욕, 며느리에 대한 질투를 잘 그려내었다. 그러나 인수대비가 시어머니에게 너무 반박하는 듯한 모습은 보기에 좋지 않았다. 비록 그녀의 별명이 폭빈이긴 했으나 그녀는 내훈을 펴낼 정도로 현모양처가 되고자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거리가 멀었을 것임.ㅋ)

왕과 나 - 전인화님. 이런 최상의 연기자를 데려다놓고 왜 저렇게 밖에 이용을 못할까 싶을 정도로 답답하다. 채시라와는 또 다른 인수대비가 탄생할 것을 기대했는데 왕과 나의 인수대비는 판단력이 너무 흐려서 정희왕후보다 더 답답해 보인다. 캐릭터가 너무 단순하다. 남의 말, 비방, 소문을 잘 믿고, 정치적인 통찰력이 부족하다. 권력에 대한 욕심도 전혀 없어 보이는 모습, 또한 정권에 개입하지도 않는 모습.. 이건 좀 아닌데.. 인수대비의 매력이자 단점을 조금만 더 보여준다면 좋으련만.. 안타까운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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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종
왕과 비 - 이진우님. 왕과 비에서는 성종을 정치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너무 미화했다. 폐비 윤씨를 중전에서 내칠 때 성종이 얼마나 고약하게 굴었는데 그리 인정많고 따사로운 사람으로 그리다니. 중전에서 폐서인으로 만든 것도 부족해 가족들 다 원지부처 시키고 식량조차 구할 방법이 없도록 만든 잔인한 사람인데... -_-;; 이런 사람을 몇 번의 오해와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 때문에 왕비를 내친 걸로 그렸다. 이보세요, 유동윤 작가님, 성종은 연산군에게도 '어미를 닮아 그 모양'이라고(이건 숙종인데 제가 착각) 구박을 한 아비라고요!!

왕과 나 - 고주원님. 흠......... 이건 그야말로 찌질이 중에 상찌질이..-_-;; 주인공을 이렇게 매력없게 그려놓으면 어떡하나. 좀 있으면 윤소화는 폐비될텐데 극 후반부를 꽉 쥐고 가야할 사람이 성종인데 고주원의 연기도 어색하지만 인물 자체가 너무 매력이 없다. 오죽하면 왕과 나 팬들조차도 찌질성종, 바람性종, 색종이라고 부르겠나.

감독님, 성종이 엄마 말에 휩쓸려서 오락가락 하긴 했지만.. 연산군을 좀 구박하긴 했지만... 후궁이 좀 심하게 많긴 했지만.. 그래도 찌질이는 아니었거든요.. 제발 정치 좀 시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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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폐비 윤씨/제헌왕후
왕과 비 - 김성령님. 아름답지만 굉장히 사악하다. 이 정도로 악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성깔이 보통이 넘긴 했을 것이다. 처음에 그녀가 소박하다고 좋아했던 대왕대비(정희왕후)도 그녀의 성질머리에 질렸고, 후궁 단속이 보통이 아니었으며, 감히 인수대비한테도 반항을 했으니... 죽으려고 악을 썼다고 봐야지.;

그렇다고 피 토한 적삼을 굳이 아들한테 보여달라고 할 건 뭔가. 아들이 왕 위에 잘 오르기를 비는게 우선 순위지. 하긴 억울하게 누명쓰고 죽으니 그런게 보였을까마는..ㅋ

왕과 나 - 구혜선님. 일단 나잇대부터가 굉장한 왜곡이다. 그녀는 성종보다 12살이나 많았고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8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는데 - 그래서 인수대비가 더 싫어했음 - 성종과 동갑으로 나오니 굉장히 젊어졌다. 일단!! 어린 후궁들과 경쟁력이 생겼으니까 애정전선에서 좀 유리했졌다. 다만, 그녀의 성격이 너무 착하고 곧게 나오는 것이 불만인데 그것을 설정으로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캐릭터의 성격을 유지해주니 그냥 받아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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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현왕후
왕과 비 - 이름 모름. 굉장히 단아하고 귀여운 이미지의 배우분이다. 그녀는 폐비 윤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왕과 비에서는 너무 유순하고 착하게 나온다. 폐비의 폐출 원인이 투기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표시내지 않았다고 보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다고 하지만 당연한 거 아닌가? 계모인 거 들켜봐야 자신과 진성대군(훗날 중종)한테도 유리할 게 없는데.

왕과 나 - 이진님. 음..... 캐릭터에 대한 이미지도, 연기도 정말 적응 안되지만 참는다.;; 폐비 윤씨와 우애가 아주 좋은 것으로 나오는데.. 솔직히 왜곡이라 생각하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니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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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엄귀인과 정귀인
(←엄소용과 정소용에서 후궁첩지 바뀜.)
왕과 비 - 윤유선님과 김정란님. 굉장히 얄밉게 나왔다.ㅋ
왕과 나 - 이름 모름. 젊은 연기자들이라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얄미운 역할에는 딱이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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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명회
왕과 비 - 최종원님. 이덕화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멋진 연기. 굉장히 정치적으로 유능하고 지혜로웠다. 날카로운 이성과 해학을 같이 보여준 인물.
왕과 나 - 김종결님. 정치 밖에 모르지만 그 방면으로도 비상해 보이지도 않고 유머도 없는 매력없는 캐릭터. 실제 한명회가 저 수준이었다면 그토록 오래 재상을 해먹긴 커녕 난세의 칼날에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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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일 중요한 김처선
왕과 비 - 김성환님. 너무 인자해 보였음. 크게 각인되지 않음.
왕과 나 - 오만석님. 심한 역사 왜곡. 7대 임금을 거쳤고, 5대 임금을 모셨던 할아버지인데 완전히 몇 대를 거슬러서 젊어지셨다. 이건 캐릭터 설정이니... 그렇다 치고, 너무 매력없고 답답한 캐릭터. 착하고 지조있는 건 알겠는데... 시청자가 몰입될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한다. 주인공 아닌가. 큰일이다 큰일. 중전 곧 폐비될 것이고, 성종 죽고 나면 극후반에는 혼자 남는데, 이렇게 흡인력이 없어서 극을 어찌 이끌어 갈지.. 어쨋든 외골수같은 모습을 보여줬으니 칼 들고 날뛰는 연산군 앞에서 기 안죽고 끝까지 바른 말하는 인물로는 어울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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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폐비 윤씨의 엄마 신씨
왕과 비 - 여운계님. 불쌍한 모친 역으로 딱.
왕과 나 - 최정원님. 너무 젊고 고와서 불쌍하고 소박한 폐비의 모친으로 안어울린다. 나중에 할머니 역할을 어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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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동근 폭행사건이니, 피디교체니 해서 시끄러운 드라마 왕과 나,

매력적인 아역들의 깜찍한 연기, 두 거장 유동윤 작가, 김재형 피디님의 만남으로 처음에는 이산의 두 배에 가까운 시청률을 올렸던 왕과 나는 현재 20%도 안되게 시청률이 하락하여 초라한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왕과 나는 김처선(오만석)에게 똥 먹이기, 출생의 비밀, 어우동과 성종의 짜릿한 만남 등 온갖 선정적인 설정까지 마다하지 않았지만 시청률 상승은 커녕 많은 사람들로부터 역사에로시트콤 아니냐는 놀림까지 받을 정도로 비웃음을 사고 있고, 하이에나처럼 씹을 거리를 찾아헤매던 찌라시 기자들은 신난 듯이 이 상황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왕과 나는 연기자들의 자질 부족, 무리한  설정, 역사 왜곡 등으로 유치하고 작위적이지만 사극 거장 김재형 피디님의 마지막 작품이 너무 초라해진 것 같아서 나도 안스럽다.

이제 폐비 되고, 연산군 자라서 궁궐 뒤집을 일만 남은 왕과 나,
이제라도 정신차리고 멋진 사극으로 되살아나서 김재형 감독님의 명예를 지켜주길 바란다!


사족>
왕과 비
- 천~~한 피가 흐르고 있음이야.
왕과 나 - 네 어찌 사특한 말로 나를 기망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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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와 왕과 나의 공통점
[펌] "거세당한 자들, 그러나 카리스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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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사극 속의 연산군 비교
역대 최고의 연산군은 누구? 당신의 투표를 기다립니다 (동영상 비교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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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Honggildongjeon.jpg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홍길동전 첫 쪽


홍길동전은 조선 광해군 때의 문인이며 정치가인 허균(許筠:1569~1618)이 지은 국문소설이다.



홍길동의 실제 시대적 배경은 연산군 때라고 하는데 소설 홍길동전은 세종대를 그 배경으로 한다.
조선 후기에 씌어진 소설인데 왜 하필 그 시기를 세종대로 했을까? 여기에 그 설명이 있다.


출처: 순천 시민의 신문, 덧셈의 정치 중 일부 인용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은 사실 세종 때를 그 배경으로 한다. 홍 판서가 낮에 길몽을 꾼 후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려 한다. 그러나 부인이 거절하자 안방을 나오다 우연히 지나가는 노비 춘섬을 보고 동침한 결과 길동을 낳게 된다. 서자로 태어난 길동의 이야기를 다룬 홍길동전이 왜 하필이면 세종조를 배경으로 한 것일까?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된 후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했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와의 사이에 장남 방우부터 넷째아들 방원에 이르기까지 아들들이 있었지만 태조는 강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결국 1398년 방원을 중심으로 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등 반대파를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죽인다.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로 인해 태조는 신의왕후 소생 가운데 첫째인 방우가 병으로 죽자 둘째인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간다.

실권자였던 방원이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는데 그는 그 이전까지는 없었던 적서의 차별을 제도화 하는 법을 만든다. 후궁인 강씨에 대한 증오가 적서 차별을 제도화 하게 된 계기라 할 수 있다.

결국 태종 때 적서 차별을 제도화함으로써 차별을 받게 된 서얼들의 한이 세종에 이르러 홍길동전으로 나타나기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구전되고 구전되다가 허균에 이르러 한글소설로 정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축첩제도가 금지된 오늘날 적서의 차별이 있을 리 없지만 차별은 도처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순혈주의로 무장한 사람들의 경우 혼혈에 대한 차별이 뿌리깊게 남아 있으며, 지역주의로 무장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다른 지역 출신들에 대한 차별의식이 독버섯처럼 자리하고 있다.

  - 이하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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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한중록]은 '피눈물의 기록'이라는 뜻의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불린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한 여인의 피 어린 기록이라는 의미다.

실제 혜경궁은 그 제목처럼 구절양장 기나긴 목소리로 한을 토해냈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이 그 한 서린 여인의 주장을 진솔하게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혜경궁이 맨 처음 이 책에 붙은 제목은 '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는 뜻의 [閑中錄]이었다. '피눈물의 기록'과 '한가한 날의 기록'. 그 제목의 극단적 차이만큼이나 내용과 진실 사이의 거리도 먼 것은 아닐까?



사실 혜경궁이 [한중록]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한(恨)의 내용은 간단하다. 혜경궁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영조가 자식들을 병적으로 편애하여 세자의 정신병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실제 사도세자 형제들, 아니 영조 일가는 왕족의 일원이었으나 행복한 일생을 보내지는 못했다. 세자의 두 누님인 화평.화협옹주는 세자가 10대 초.중반일 때 요절하였다.그리고 혼자 남게 된 세자의 막냇누이 화완옹주는 훗날 주위의 꾐에 빠져 친오빠인 사도세자와 조카인 세손(정조)의 반대편에 섰다가 끝내 비참한 지경에 빠진다. 이러한 여조 일가의 불행한 삶은 혜경궁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사도세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아무 의심 없이 형성될 트릭이 숨겨져 있다.

혜경궁은 영조가 영빈 이씨 소생 중 큰딸 화평옹주는 매우 사랑했으나, 둘째 딸 화협옹주와 세자는 극도로 미워했다는 점을 가장 애끓게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영조가 옥사 등 불길한 정사를 보고 오면, 꼭 세자를 불러 "밥 먹었느냐?"고 물어 대답을 들은 후, 그 자리에서 귀를 씻고 씻은 물은 화협옹주 집 담장으로 버렸다고 했다. 이 때문에 세자는 화협옹주를 대하면 "우리 남매는 귀를 씻는 차비(差備:사람)로다"라고 자조했다는 것이다.
 
혜경궁은 이처럼 영조를 세자와 화협옹주를 극도로 미워한 부왕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영조실록]은 영조와 그 일가의 관계에 대해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잠깐 검토해보자.


영조가 화평옹주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한중록]과 [영조실록]이 일치한다. 그러나 영조가 불길한 말을 들은 후 씻은 물을 버릴 정도로 저주했다는 화협옹주에 관한 기록은, 한 인물에 대한 기록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두 기록의 내용이 너무나 판이하다.

그렇다면 그토록 미움의 대상이었다는 화협옹주가 병에 걸렸을 때 영조의 거동을 [영조실록]에서 살펴봄으로써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영조 28년(1752) 11월 25일, 영성위(永城尉) 신광수(新光綏)에게 시집간 화협옹주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들은 영조는, 황급히 화협옹주의 사가로 거동하려 했다.

하지만 친딸이라 해도 국왕은 사가로 분병이나 문상을 가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관례이자 법이었다. 게다가 당시 영조 자신이 의원의 치료를 받는 환자이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했고 부교리 채제공도 두 번씩이나 차자를 올려 가지 말도록 간했으나 영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는 호위 군사를 빨리 집결시키지 않았다고 하여 병조판서 김상성과 훈련대장 김성응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고 이들의 부절(符節:군사 지휘권을 뜻하는 표신)을 빼앗으러 간 선전관이 표신(標信:궁중에 급변을 전할 때 사용하던 문표)을 청하지 않았다고 하여 군율을 시행할 정도로 화협옹주의 병환에 당황하며 초조해하였다.

황황히 화협옹주의 사가에 행차한 영조는 밤이 깊도록 환궁하지 않고 그녀의 머리맡을 지켰다. 그러나 문병도 안 되는 판에 임금이 사가에서 밤을 세울 수는 없는 법. 약방은 물론이고 대신들과 승정원 관리들이 모두 영조에게 환궁할 것을 거듭 청했으나 영조는 듣지 않았다.영조가 환궁 준비를 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이틀 후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미명에 화협옹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어둑한 새벽길을 나서려 하였다. 이에 약방 도제조 김약로 등이 영조 자신이 환자임을 상기시키며 만류했으나 영조는 끝내 문상을 고집하였다. 그러자 김약로가 말했다.

"지난해 화평옹주 상사 때 전하께서 적지 않게 몸이 손상되셨으므로 신은 지금까지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영조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내 몸이 손상된 것은 조정 신하들의 당론 때문인데 어찌 딸이 죽어 곡한 것과 연관시키는가?" 

이처럼 [영조실록]은, 영조가 화평옹주는 편애한 반면 화협옹주는 저주했다고 한 혜경궁의 증언과는 명백히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도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화평, 화협 두 옹주를 모두 사랑했다. 물론 영빈 이씨의 첫 소생인 화평옹주를 화협옹주보다 더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영조는 화평옹주에게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의 옛집인 이현궁(梨峴宮)을 주면서 경복궁의 소나무를 베어 수리하게 할 정도로 그녀를 끔찍히 사랑했다. 또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시집간 화평옹주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역시 그녀의 사가로 가서 밤을 새웠다. 화협옹주가 죽기 4년 전인 영조 24년(1748)의 일이다. 영조는 이에 대해 스스로 변명하기도 했다.

"이번만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묘우(廟宇)를 지날 적마다 항상 마음이 답답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부모 마음을 알아주는 자식이 있는 것이니, 며느리 중에서는 현빈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딸 중에서는 화평옹주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갑자기 이 지경을 당했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됨을 애석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다." 

영조는 화평옹주는 물론 화협옹주도 사랑한 자상한 아버지였다. 혜경궁의 묘사대로 "용모도 절숭하고 효성도 있어 아름다운" 화협옹주를 영조가 미워할 이유가 없다. 영조는 화협옹주가 죽은 2년 후 상일(祥日)에도 그녀의 집으로 거동했다. 화협옹주의 명복을 빌면서 이날 하루를 경건하게 지내고 싶었던 영조는, 어가 행차 때 일체의 취타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화협옹주의 옛집에 들러서는 깊은 밤까지 옹주의 명복을 빌다가 신하들이 여러 번 환궁을 간청한 끝인 깊은 밤에야 돌아왔다.

화협옹주의 기일을 경건하게 보내기 위해 세심하게 배려하는 이런 모습 어디에서도, 귀 씻은 물을 담장 너머로 던지며 저주하는 영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영조는 이처럼 다정다감한 성품이었고, 그답게 일가 모두를 사랑했으나 그중에서 첫딸인 화평옹주와 효장세자의 부인이자 큰며느리인 현빈조씨에게 더 마음이 쏠렸음을 솔직히 고백하였다.

실제 영조는 화평옹주 못지않게 현빈 조씨를 무척 사랑했다. 그래서 영조 27년(1751) 11월, 현빈이 세상을 뜨자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무신년(효장세자가 죽은 해) 이후로 내가 의지한 바는 현빈이었는데, 이제 그가 또 세상을 뜨니 슬픈 감회를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영조가 현빈을 이처럼 아낀 것은 어려서 남편을 잃은 현빈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서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행실과 그녀의 친정에 대한 남다른 호의 때문이기도 했다. 영조는 현빈의 행실을 마음에 꼭 들어 했다. 그래서 영의정 김재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내가 일찍이 삶은 밤을 좋아하여, 갑자기 삶은 밤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현빈이 곧바로 진상하였다. 그 뒤에 대비의 하교를 들으니, 현빈이 미처 신을 신을 사이도 없이 곧바로 부엌에 들어가 친히 삶아 왔다고 한다. 이것이 효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친정 어른이 고관이 되면 기뻐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현빈은 그렇지 않았다. 현빈은 영돈녕(領敦寧:현빈의 숙부 조현명)이 대신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우리 숙부는 왜 물러가서 쉬지 않을까?'라고 말했으니 그 성품을 알 수 있다"

현빈의 친정인 풍양 조씨 사신(思愼)파는 시종일관 영조의 탕평택에 호의적이었다. 현빈의 아버지 조문명(趙文命)과 숙부 조현명(趙顯命)은 영조 때 탕평택을 이끌었던 소론 영수이자 탕평 영수였다. 그럼에도 현빈은 척리(戚理:임금의 외척)가 대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현빈과 그 집안의 이런 자세가 영조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문명과 조현명 형제, 그의 아들들은 시종일관 사도세자를 지지했다. 훗날 사도세자와 결탁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 조재호도 바로 사도세자의 형수인 현빈 가문 사람이다.

따라서 혜경궁의 말대로 영조가 화평옹주만 사랑하고 화협옹주는 극도로 미워한 정신병자라면, 현빈 조씨를 사랑한 반면 혜경궁은 극도로 미워했어야 이치에 맞다. 그런데 헤경궁은 영조가 사도세자는 미워했어도 자신은 사랑했다고 구구절절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영조실록]에 영조가 현빈 조씨를 총애했다는 기록은 자주 나오지만 혜경궁을 사랑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한 옹주, 아니 영조 일가에 대한 [한중록]과 [영조실록]의 기록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두 기록 중에서 어느 쪽이 진실, 혹은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영조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이런 성품이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영조는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에 그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했던 애민의 군주였다. 그는 심지어 당시 사회의 가장 최하층인 노비의 처지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사노비의 형편이 말도 못하게 어려워 남종은 장가를 못 가며 여종은 시집을 못 간다. 부부가 있은 후에야 부자가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노비의 세금을 반으로 감면하라"

이처럼 당시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노비이게까지 세심산 배려를 베풀 줄 아는 영조가, 자신의 핏줄인 자식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물며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미워할 까닭이 있었을까?

영조가 극진히 아꼈던 화평옹주는 시종일관 세자의 편을 든 자상한 누이였다고 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 화평옹주가 영조와 세자 사이에서 갈등을 풀어주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도 화평옹주의 사망 시기를 고려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영조의 통곡 속에 화평옹주가 죽은 것은 세자가 대리청정하기 6개월 전인 영조 24년 6월로, 세자 나이 열네살 때였는데, 그때까지 영조와 세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조는 화평옹주가 죽은 6개월 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자는 기품이 뛰어나지만 뒷날 과연 어떻게 행동할 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내가 살아 있을 때 정사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 

이처럼 여조는 세자의 기품이 뛰어나다고 보았다. 실제 두 부자 사이에 영조가 극히 편애했던 화평옹주가 나서서 중재할 만큼의 갈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열네 살짜리 외아들과 쉬흔아홉 살의 늙은 아버지 사이에 갈등이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세자가 "겁이 나서 못 하면 (영조가) 남 보는 좌중에서 꾸중하시고 흉도 보셨다"라고 하여, 영조가 시종 세자를 미워한듯이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영조는 대신들에게 대리청정시키는 또 다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보통 사람도 부형(父兄)이 있으면 타인이 그 자제를 업신여기지 못하는 법이다. 원량이 어떻게 시국의 형편에 따른 편벽한 내용의 상소를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뒤에서 세자의 기반을 세워주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이 세자에게 든든한 반석이 되어주기 위해서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영조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세자에게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부담이 비극적 결과를 가져온 주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혜경궁의 기술 중 또 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선희궁이라 불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 대한 부분이다. 영빈 이씨는 천한 나인(內人)출신이었다. 혜경궁은 세자궁 나인들이, 출신이 미천하다 하여 선희궁을 업신여겼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다른 궁 소속의 궁녀들이라면 몰라도 세자를 모시는 궁녀들이 세자의 생모를 업신여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혜경궁은 [한중록]을 쓸 당시 사랑하는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오열하는 20대 청상과부가 아니었다. 당시 혜경궁은 궁중 깊숙한 곳에서 영조. 정조. 순조 세 임금의 치세 60~70여 년을 지켜본 70대의 노회한 정객이었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후 승승장구해 형제 정승의 지위를 누리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가 되었으나 공교롭게도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혜경궁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직후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이유가 참으로 기구하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이다(이를 '병신처분'이라 한다). 세상의 시각 또한 혜경궁을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惡妻)로 의심하였다. 아마 이 몰락이 없었다면 혜경궁은 [한중록]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


이러한 처지에서 쓰여진 한중록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내포할까??
한중록에서는 영조는 변덕이 심하고 치매 때문에 사람도 못알아봤다고 나오며, 사도세자도 광폭했다고 나오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MBC 사극 이산에서는 한중록의 기곡을 받아들여서 영조가 치매인 걸로 묘사하고 있던데... 과연 그래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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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종조에 살았던 조선 최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 어우동...


제가 아주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책, '맹꽁이 서당'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기생(인줄 알았어요.)
 어우동(어을우동).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국민배우 안성기씨까지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되어 왠만한 사람들도 그 이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테지요.
그래도 안성기씨가 나오는데... 너무 Sex 쪽으로만 중점을 둔 듯한 포스터가 마음에 안듭니다.-_-;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 어우동 완벽 영화화 "왕에서 종까지 그녀의 품안에 모든 남자는 단지 노리개에 불과했다."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 왕에서 종까지 그녀 품안의 모든 남자는 단지 노리개;;


제작 : 이태원
감독 : 이장호
원작 : 방기환
각색 : 이현화
촬영 : 박승배
음악 : 이종구
출연 : 이보희, 안성기
 
태흥영화 주식회사 제작
 
1985년 9월 28일 단성사 개봉


실록에 의한 어우동 일지
어우동 영화 포스터



이처럼 주로 '야한 영화의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해서 성종 시대의 다양한 야사 인물 중의 하나려니... 했던 사람인데.. 최근 드라마 '왕과 나'에서 미스코리아 출신 김사랑이 어우동 역으로 나온다고 해서 자료를 한 번 뒤져보니..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입니다.

야한 소설 속의 남자들이 상상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갖춘 여자인 것 같습니다.. 하여튼.. 대단한 여자네요.ㅋ


조선 오백년 역사에서 풍기문란죄로 사형당한 여인



출처 :  김용삼의 조선왕조 실록

조선의 3대 섹스 스캔들(제 3탄) 
닥치는 대로 간통하다 교수형 당한 어을우동(어우동)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조선시대 3대 섹스 스캔들의 마지막 주자는 어을우동(혹은 어우동)이다.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유명세를 탄 이 여성의 남성 편력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들여다 보기로 하자.


어을우동은 성종 시절 승문원 관리 박윤창의 딸로서 태강수(수는 왕실 친척에게 내리는 작호) 이동(李仝)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 잘 나가는 집안의 여성이었다. 그런데 바람기가 몹시 심해 버림받은 후 남자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간통하다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교수형으로 일생을 마감한 희대의 음녀(淫女)다.

어을우동 사건은 성종 11년 7월 11일, ‘어을우동이 수많은 남자와 간통하고도 승복하지 않으니 국문해 달라’는 의금부 보고로 시작된다.

9월 2일 실록에는 어을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의 명단이 줄줄이 기재되어 있으니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공무원 이기, 이난, 구전, 공부하는 유생 홍찬과 이승언, 서리(하위직 관원) 오종련과 김의형, 전의감 생도(왕실병원 실습생) 박강창, 평민 이근지, 노비 지거비 등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어을우동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사람과 관계했음을 알 수 있다. 의금부는 어을우동의 형량은 곤장 100대에 유(流) 2000리(서울에서 2000리 떨어진 곳에 유배를 보내는 것)에 해당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 시절에도 음행을 일삼은 어을우동에 대한 강경론과 동정론이 팽팽하게 맞서자 성종은 여러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은 성종 11년 9월 2일 실록.

<정창손:
“어을우동은 종친의 처이며 선비의 딸로서 음욕을 자행한 것이 창기와 같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태종, 세종 때 선비의 부녀로서 음행이 매우 심한 자는 간혹 극형에 처했지만 그 후로는 모두 율에 의해 단죄했으니 어을우동도 율에 의해 단죄해야 합니다.”

김국광·강희맹:
“어우동은 종실의 부녀로서 친척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서로 간통해서 인륜을 손상시켰습니다. 청컨대 중국 조정의 예에 의해 저자에 세워 도읍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서 징계가 되게 한 후에 율에 따라 멀리 유배하소서.”

윤필상:
“어을우동이 강상을 무너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으면 음란한 풍속을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의 정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을 자행하여 춘추시대 정나라, 위나라의 풍속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청컨대 이 여자를 큰 벌에 처하여 후세 사람을 경계하소서.”

홍응·한계희:
“국가에서 죄를 정할 때는 한결같이 율문에 따르고, 임의로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형장을 강등하여 관대한 법전을 따랐으며 법외로 논단한 적은 없었습니다. 어을우동의 추악한 행실은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되나 임금의 은덕은 죽음 중에서도 살릴 길을 구해야 합니다. 청컨대 율에 의해 결정하소서.”

이극배:
“태종조에 승지 윤수의 처가 맹인 하천경과 간통하고, 세종조에 관찰사 이귀산의 처가 승지 조서로와 간통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 후 판관 최중기의 처 유감동이 창기라 칭하면서 음행을 자행했는데, 사형을 감하여 유배를 보냈습니다. 지금 어을우동은 종실의 처로서 음욕을 자행하기를 꺼리는 바가 없었으므로 극형에 처해야 하나 율에 의하면 사형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청컨대 사형을 면하여 먼 곳에 유배하소서.”>

이처럼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하자 임금이 결단을 내렸다.

<어을우동은 음탕하게 방종하기에 꺼림이 없었다. 이런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이 어떻게 징계되겠느냐. 의금부에 명하여 사형시켜라.”>


꼬리쳐서 맞아들여

성종 11년 10월 18일 어을우동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어울우동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녀는 처음에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을 갔는데 행실이 과히 좋지 못했다. 이동이 은장이를 집으로 불러 은그릇을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계집종처럼 가까이 하려 했다. 태강수가 그것을 알고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친정으로 돌아가 슬퍼하며 탄식했다.

그때 한 계집종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련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 관리가 되었고 용모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가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주인을 위해 불러오겠습니다” 하니 어을우동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련을 데리고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했다. 또 방산수 이난의 집 앞을 지나다가 그와 간통했는데 정이 매우 두터웠다. 이난이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이름을 새겼다.

또 단오날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 서쪽에서 그네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 이기와 눈이 맞아
정을 통했다.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내금위(왕궁 수비대) 구전은 어을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을우동이 정원에 있는 것을 보고 담을 뛰어넘어가 간통했다.

생원 이승언이 일찍이 집 앞에 서 있다가 어을우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 아니냐” 하니 계집종이 “그렇습니다” 했다. 이승언이 뒤를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 집에 이르러 침방에 들어가 비파를 가져다 탔다. 어을우동이 성명을 묻자 “이생원이다” 하니 “장안의 이생원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했다. 이승원이 답하기를 “춘양군의 사위 이생원을 누가 모르는가” 하며 마침내 동침했다.

홍찬이 처음 과거에 올라 시내 구경을 하다 방산수의 집을 지날 적에 어을우동이 살며시 엿보고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뒤에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려 홍찬이 마침내 그녀 집에 이르러
간통했다.

서리 김의형은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 그녀를 희롱하며 집까지 따라가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서리를 몹시 사랑하여 이번에는 등에다 이름을 새겼다.

밀성군(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아들)의 종 지거비가 이웃에 살았는데 어느 날 새벽, 어을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하여 “부인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크게 떠들어 이웃에 알리면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오” 하니 어을우동이 두려워해 안으로 불러들여
간통했다.

이때 방산수 이난이 간통사건과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유감동이 많은 간부(奸夫)를 연루시키는 바람에 사형을 면했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 없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간통한 남자를 많이 열거하고 방산수 이난,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정숙지 등을 끌어댔으나 증거가 없어 죄를 면했다.

사람들이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도 음행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그 어미가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간통사건이나 섹스 스캔들에 대해 극형으로 다스리고 유배 보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들도 스캔들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으니, 인간 사이의 욕정 문제는 발본색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입력날짜 : 2006-08-21 (11:46)








다음은 어우동을 찾다가 발견한 다른 주인공, 유감동이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을 만나서인지.. 운이 좋은 것인지, 교수형은 피해갔군요.



조선의 3대 섹스 스캔들(제2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남자와 간통한 유감동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같이 자다가 소변을 본다고 핑계하여 김여달에게 도망했습니다.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죄를 저질렀으니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김여달은 1등을 감형하여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으로 귀양을 보낼 것이며, 간통한 최중기의 매부 이효랑은 곤장 100대, 오안로는 자자(얼굴에 칼 자국을 내는 것), 기타 간통한 자들은 곤장 60~100대를 쳐야 합니다.”








사족.

어우동, 유감동을 비롯하여, 인수대비, 정순왕후, 문정왕후 등... 조선시대 유명한 여자들은 모두 악명 높은 사람들 밖에 없네요. -_-;; 이것도 남존여비 사회의 편견에서 온 것인지 궁금하군요.

제가 알기로는 성종과 어우동보다 성종과 기생 소춘풍과의 이야기가 더 유명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일단 유명하니까 어우동을 고른 것일까요?


드라마 왕과 나에서 어우동과 성종의 동침 장면

드라마 왕과 나에서 어우동과 성종의 동침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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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즐겁고 신성한 것이라 여긴 신라시대 여인들이 칠거지악을 내세우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갑갑해서 모두 기생이 됐거나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외국도 그런 것인지 우리 민족이 유달리 성을 사랑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언어에 유독 음담패설과 성 관련 욕설이 많은 걸 보면 조선시대의 악랄한 억압은 강한 것에 대한 더 강한 것을 통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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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점잖은(?) 조선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던 섹스 스캔들'들을 모아보려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한 글을 쓰셨고, 이 블로그에도 황진이나 어우동에 대한 글이 있으니, 링크를 통한 소개만으로 내 수고를 덜고자 한다.

↓이 글↓은 카페글이라서 검색을 통한 조회는 되지만, 링크를 따라가면 조회금지로 나와서 원본 출처 명기 후에 표기한 것임.

조선시대 스캔들

영화 <스캔들>이 나오기 전에는 조선시대 스캔들이야 과부가 머슴과 도망가 숨어 살거나 결국 자살을 택하는 것 정도의 고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어우동, 사방지 등 한국형 에로 영화의 소재가 모두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기억하자.


어우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사랑을 나눈 여자이다. 조선 성종 때의 실존 인물인 어우동은 본래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간통 문제가 불거져 이혼당했고 그 이후 노소, 근친을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을 뿌린다. 어우동은 한번 관계를 맺은 남자는 절대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었는데 애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몸에 문신하도록 강요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애정 행각이 구설수에 올라 풍기문란 죄로 처형된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어우동의 형량은 고작 곤장형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연루된 고위 관리들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사형을 고집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책임감없는 행동은 한결같다.



믿기지 않겠지만 500년 조선조 동안 왕실 여인들의 동성연애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궁궐 내 동성연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세종대왕이 이와 관련된 벌칙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 세종대왕이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연애자임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을 충격에 빠뜨린 며느리는 후에 문종이 되는 세자의 둘째 부인인 봉씨. 실록에 의하면 봉씨는 거짓말로 임신과 낙태를 번갈아 하고 술을 즐겨 만취한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물론 이는 봉씨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은 관리들의 악의에 찬 기록일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날 궐내에 여종 소쌍이 세자빈과 같이 잔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왕의 문초를 받던 소쌍은 세자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고백한다. 결론? 물론 세자빈은 폐위됐고 친정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도 자결했다.



드라마 <대장금>의 배경이 되는 중종 때 조정은 백정의 딸을 양반의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로 한바탕 시끄러웠다. 결국 중종이 어려운 시절에 동고동락한 천민의 딸을 양반의 정식 아내로 인정하라는 명령을 내려 일단락된 이 사건은 조선 전체가 들썩거렸던 백정의 딸 양씨 스캔들이다. 폭군 연산군은 예쁜 여자라면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은 이장곤이라는 관리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이에 격분한 이장곤은 홧김에 아내를 죽이고 함경로 도망친다. 도망자 신분의 이장곤은 백정 양씨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정말 괜찮은 그 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도망자 생활 몇 년 만에 중종의 즉위로 조정으로 돌아온 이장곤. 그동안 양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장곤은 동고동락한 아내를 버릴 수 없어 조정에 선처를 부탁한다. 결국 이장곤 덕에 부인 양씨는 정경부인이 되고 친정은 모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정경부인 양씨의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 <임꺽정>에도 등장하는데 임꺽정은 정경부인 양씨의 조카로 설정돼 있다.


언젠가 KBS <역사 스페셜>에서 지독한 사랑으로 소개된 바 있는 홍랑과 김덕창의 스캔들은 이렇다. 김덕창은 함경도 변방에 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시와 음악에 뛰어난 관기 홍랑을 만난다. 서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김덕창의 임지 변경으로 헤어지게 되는데 어느 날 홍랑은 한양에 있는 김덕창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관기는 임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홍랑은 연인을 찾아 한양에 오게 되고, 한양에서 둘은 다시 한번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한양 한복판에 아내까지 있는 양반 관리가 법을 어긴 관기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고 김덕창은 파직 후 객지에서 살해됐다. 사실 개인적이기까지 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세하게 전해지는 이유는 후에 홍랑이 김덕창을 위해 평생 수절했고 결국 김덕창과 나란히 묻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회 금기를 깨고 사랑을 이룬 그녀의 용기가 더 부럽다.


양녕대군은 동생을 위해 일부러 패륜아 행세를 한 꽤 멋진 왕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녕대군을 호탕한 풍류가로만 생각하기에는 입에 담기 민망한 스캔들이 많다. 양녕대군이 일으킨 스캔들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웠던 것은 유부녀인 어리 강간 사건이다. 어리는 한 정승의 첩으로 병이 있고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양녕대군은 그녀를 납치해 강제로 관계를 갖는다. 심지어 양평대군은 어리를 궁궐과 지방 유배지에까지 끌였들이는데 이는 연산군의 스캔들을 제외한 조선시대 최고의 섹스 스캔들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는 이 어리 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됐다는 사실을 들어 당대의 로맨스로 미화하지만 결국 양평대군이 어리를 버리고 왕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어쨌든 그 이후의 어리의 삶은 기록에 전해오지 않는다.

출처
:아름다운 만남의 동행  원문보기





영웅은 수많은 미녀들을 취해도 호남으로서의 기개나 풍류로 포장하는데 비해, 여자들은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의 미국에서도 추악한 스캔들의 여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걸 보니 이 또한 남녀차별의 일종인 것 같아서 과히 유쾌하진 않다만.. 나 역시도 그녀들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걸 보면 나도 똑같은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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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극 역사상 가장 많이 다뤄진 왕은 누구일까? 조선왕조 비운의 왕인 10대 연산군과 14대 광해군, 19대 숙종이다. 세 군주는 모두 장녹수, 김개시, 장희빈이라는 희대의 요부를 만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드라마틱한 소재의 왕으로 각광받아왔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로 어릴적 어머니(폐비 윤씨)를 잃고 외톨이로 자라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2번에 걸친 사화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 또 그로 인한 폐륜 등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실록이 아니라 일기라는 초라한 이름으로 남아있는 연산군 일기
01

그리하여 역대 연산군에 대해서 써보고 싶은 욕심은 있었으나 차마 엄두가 나지 않던 차에 아주 좋은 게시물 하나를 발견했다. 이글루 블로그의 이준님이 쓰신 '역대 연산군 모음집'이라는 글인데 내가 쓰려던 주제와 제목까지 거의 똑같다.ㅋ 여기에 사진과 영상을 적당히 덧붙여서 보는 재미를 더하고자 한다.



역대 연산군(?) 모음집 -_-

1. 연산군을 다룬 최초의 괜찮은 작품은
박종화씨의 "금삼의 피" 원작 '폭군 연산'이 있지요. 여기서는 신영균씨가 우리들의 연산군으로 나와서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사실 신영균씨가 의외로 연기를 잘하는데 이쪽은 영 매너리즘이었고 (세트도 압박) 다만 폭군이 된게 어머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이라는 월탄 선생 전통의 해석으로 나갑니다.

처음에 신영균인줄 알고 잘못 가져온 이미지(김진규)

신영균의 연산군


역시 압박중에 하나는 연산군 졸개 내시가 무려 "김희갑"이었고 -_-;;;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낀 연산이 자신이 죽인 모든 사람들을 사면 복권하고 장녹수같은 쪽을 내쫓고 충신들을 다시 쓰려고 마음먹은 바로 그날 중종반정이 일어난다는 설정이지요 -_-;;;; 그래서 반정때 도망가면서 "내일 아침만 된다면.... " 운운하는 대사가 꽤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옛날 영화라, 므흣빵빵은 기대 안하시는게 좋지요 -_-;;;


2. 조선왕조 5백년 "설중매"에서의 연산은 견미리씨의 전남편 임영규씨가 했습니다. -_-;;; 성종은 국영방송판 대조영에서 보장왕을 하시는 길용우씨였지요. 항상 나라위해 머리쓰다 과로사한 성종의 아들인데, 어릴때부터 트라우마에 빠져 있는 쪽으로 나옵니다.

문제는 다음부터 나올- 신영균씨도 마찬가지지만 - 연산처럼 "첨에는 잘 나가다가 나중에 맛이 가는" 타입이 아니라 첨부터 개념 없는 아새퀴로 나와준다는 점이죠. 조선왕조 5백년 사상 - 사실 뭐 광해군 이희도도 꽤 폭군이 아니라 개념있는 임금으로 그렸으니- 최악의 캐릭터로 자리 잡을 정도이지요. 원작(그러니까 신봉승씨의 대하 소설)에 나오는 므흣빵빵은 안 재현했지만 재상들을 졸라 패고, 기생 이름 아니면 "폐비"라는 이름으로 시를 지으라고 협박치는 건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악의 캐릭터


장녹수는 이미숙 아줌마가, 김처선은 박규채 옹이 열연을 했습니다.- 박규채옹이 죽는건 실록을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3. 영화 "연산군"이 제작될때 연산군을 무려 "이대근" -_-;;씨가 한다고 많은 솔로들이 가슴을 설렌적이 있었죠. 그러나 이게 낚시 중에 낚시인게 장녹수가 "강수연"이라는 점입니다. -_-;;; 강수연이야 영화에서 노출을 극히 싫어해서 씨받이 조차도 국내판과 해외판을 따로 편집할 정도였죠. 그러니 뭐 재대로 된 "그림"이 나옵니까 -_-;;;

여기서는 연산이 완전히 "부처님 가운데 도막"인데,  폐비 사사 사건을 수사하는게 무려 "장녹수"이고 그걸 수사하려는데 유력한 증인이 "선왕의 후궁"이 보낸 자객에게 수리검으로 살해당하는 압권도 보여줍니다. -_-;;; 후궁들을 손수 박살은 내는데 나중에 어느 노 대신을 팽형(진짜 삶는게 아니고 삶는 것처럼 하고 그냥 놔두는 형벌) 하려는데 대신이 자살하니까 끌어안고 울부짖습니다. 마지막은 폐위된후 (강화도는 안가고) 모친의 묘 앞에서 통곡하는 변강쇠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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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실 안 알려졌지만 "연산일기"라는 걸작도 있지요. "왕의 남자"에서의 연산군이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신분들은 이 작을 안봤다고 자수하는 셈입니다. 사실 정진영씨의 연기 이전에 유인촌씨가 이 연기를 했거든요-_-;;; 감독은 무려 임권택 감독입니다. 여기서 앞부분은 "신료의 방해"로 인해서 자기의 큰 뜻을 펼칠수 없는 젊은 쾌남아 연산을, 나이가 들고 비밀을 안 후부터는 조금씩 미쳐가서 결국 칼리귤라 사촌으로 변신하는 모습이 극렬하게 나오지요. 맛이 간후부터는 "후회"라는것도 없지만 뭔가 쫓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진짜 광기 어린 연산군, 유인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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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쫓겨난 후에 아버지의 유령 - 나오지는 않지만 - 에 덜덜 떨면서 화면을 응시하는게 마지막 장면이지요.

이 작 자체의 문제는 "유인촌"씨의 연기에 가린 나머지 다른 사람의 연기가 팍삭 죽었다는 점입니다. 내시 졸개를 무려 "김인문"씨가 했고 - 이 사람은 중종 반정 전에 연산군에게 홧김에 꼬치가 되버립니다.- 장녹수는 소시적 에로배우가 했지요(-_-;;;) 의외로 잔인하기는 잔인해서 참수장면이 그대로 나오고 신하들 모아놓고 방아찧으라는 장면과 찧기 싫으면 내가 찧겠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김처선이 이거 말리다가 죽습니다) 아, 그리고 방아장면은 안 나와도 방에서 돈 없어서 옷을 하나도 안 입은 여햏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춤추는 장면은 나와줍니다.-_-


5. 국영방송 사극에서의 연산군은 이덕화 옹이 주연한 한명회에서의 이민우장녹수에서의 유동근씨가 열연했지요. 한명회야 뭐 연산군은 한명회 사후에 나오니까 별 비중은 없고(명령 내릴 때 북치는 압박) 소리 지르는게 일입니다. -_-;;

19세의 어린 나이로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이민우



드라마 장녹수 오프닝
 


유동근씨는 좀 중후한 연기를 보여주는 편이지만 광기는 유인촌씨에 비해서는 영 아니었죠. 말년에 사이코가 된후에는 자신의 멸망을 항상 생각하는 그런 타입으로 변하지만 "완전히 미친"쪽은 아닙니다.

역시 어린 나이(20세)에 놀라운 연기, 왕과 비의 안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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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왕의 남자"의 정진영씨는 개인적으로 유인촌씨 다음에 가장 연산군 연기를 잘했다고 봅니다.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에서의 해석을 그대로 살려서 서브스토리인 "공길" 이야기를 넣은거에요. 광기와 고민, 사모곡이 적절히 조합된 최고의 연산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태조께서 입으시는 푸른 옷을 입는지는 미스테리) 사실 석류 낭자나 안습 장녹수보다도 연산의 연기가 죽었다면 영화 자체가 훨씬 질이 떨어졌을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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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연산이 두 후궁을 죽이는 장면은 실록이나 연려실기술의 "퍼포먼스"가 있지요. 어린이들 보는 책은 정서상 "연산이 손수 박살냈다" 식으로 그립니다. (이대근이 주연한 영화나 왕의 남자 - 뭐 이건 칼이지만 -  는 그렇게 그립니다.) 조선왕조 5백년 부분의 그 장면은 제가 못봤는데 신봉승씨의 원작에서는 죽이고 "다 벗기"고 뼈와 살을 분리시킵니다(말 그대로) 연산일기는 벗기는 걸 빼고는 퍼포먼스를 그대로 합니다.

실록대로 연산군을 찍으면 한국판 칼리귤라가 나올듯 하지요 -_-;;;;

유인촌씨는 서울방송 개념 사극 임꺽정에서도 첫회에 연산군으로 나와서 철퇴로 후궁을 박살내줍니다. (임꺽정의 애인 기생이 장녹수의 딸이라는 설정이 있지요)

의외로 궁중 므흣물은 연산군 이야기가 아니라 이두용 감독의 "내시"이지요. 원래 신상옥 감독이 만든 작품(박노식-신성일이 나옵니다.)인데 감독이 공화국에 간 후에 이두용 감독이 에로 에로로 만들었지요. 여기서 무려 길용우씨가 절대 정력의 왕으로 나와서 이미숙씨에게 허무하게 죽습니다. -_-;;;

왜 연산군마저 살리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기사 역시 "왕권강화"와 실록 운운인데 연산군 미화하는 분들의 공통점은 "실록은 졸라 허술하다"는 겁니다. 실록이나 다른 조선시대 기록을 교차검증 안하시는 건지 뭔지 -_-;;

그리고 박정희는 그렇게 싫어하시는 분들이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이나 할 이야기를 연산군 미화때 동원하는건 뭔지, 이환경씨처럼 제국이면 하악하악인가? - 글구보니 국영방송 장녹수도 좀 이런쪽이었고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연산군 미화 책은 소시적 이x 범의 원균 정론만큼이나 아스트랄의 영역을 넘나드는 책이지요. 두 후궁은 사실 연산이 죽인게 아니라 "자살"했는데(왜?) 후세 사람들과 사관들이 연산이 죽인걸로 조작했다는 - 근데 자살했다는 기록도, 전설도 없잖아? 실록의 일시 추정 - 헉 김전일?!! - 으로 봐서 죽인게 아닌데 죽었으니 자살이라는 논리- 스토리는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듯.



현재 방영 중인 SBS 사극 왕과 나에서 얼마 전에 연산군이 태어났다. 성인 배역을 누가 맡을 지는 모르지만 역대 연산군의 명성에 맞는 연기자가 탄생하길 바란다. 장성한 연산군이면 유인촌 수준, 젊은 연산군에 이민우 수준이면 내 욕심이 너무 과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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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정조대왕 사망 당시의 정황을 가공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다룬 드라마 '한성별곡'과, 세손 시절로부터, 영조 사망 이후,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는 과정까지를 포함한 '이산', 케이블 TV CGV에서 10월 말부터 시작한 드라마 '정조 암살 미스테리 8일'(이하 8일)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방영되는 것을 보며,  언론에서는 '정조 열풍'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내면서 열심히 비교하고 있는데 나 역시도 '누가 제일 나을까, 어떤 사람이 잘 어울릴까, 각자 어떻게 다룰까?'에 대해서 궁금했으니 사람 심리는 다들  비슷한가 보다.


한성별곡은 제대로 보지도 않았고, 이산은 진행 중이고, 8일은 이제 막 시작했으니 제대로 된 작품성 비교를 하기에는 이른 것 같고, 단지 주요 인물들의 외형적인 이미지에 대해서 느낀 점만 적어 보련다.


1. 정조

한성별곡 : 안내상씨는 음란서생에서의 찌질한 임금 역과 소문난 칠공주에서의 찌질한 재혼남(왕선택?) 역 때문에 한번도 멋있다는 생각은 안했는데 한성별곡에서는 고뇌하는, 한맺힌 정조 임금을 잘 표현한 것 같다.

8일  : 김상중씨는 늘 좋은 연기자라고 생각했지만 근래 들어서 두사부일체 시리즈 + 내 남자의 여자에서 매일 감자타령, 밥타령하는 바람난 교수 역할 때문에 왠지 모르게 좀 웃겼지만 역시 연기파 답게 뭐든지 잘해내신다. 사진만 봐도 카리스마가 좔좔.

이산 : 이서진씨는 다모에서말고는 한번도 멋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사극 맵시는 역시 기대 이상이다. 안내상씨는 단순히 지적인 문인군주로서의 모습만 보여주었다면, 이서진씨는 다재다능한 무인군주로서의 모습도 손색없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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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조

한성별곡 : 안나오심.

8일  : 한중록에 나온 이미지와 비슷한 변덕스럽고, 치매끼 마저 있는 이미지를 고른 것 같다. 영조는 그간 사극에서 굉장히 정없고 노망끼 넘치는 모습으로만 그려졌는데 이런 인식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

이산 : 내가 상상하던 영조의 모습과 가장 흡사하다. 혈육의 정에 이끌리면서도 경종 독살설이라는 원죄의 중심에 서있는 만큼 권력 앞에서는 냉정한 모습, 신하들 앞에서는 노회한 정객 + 백성을 두루 살피는 어진 임금. 세손 입장에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자 그나마 기댈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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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순왕후

한성별곡 : 내 생각과 좀 달랐다. 정애리씨의 연기나 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었지만 너무 대놓고 사악한 이미지라서 다소 위화감이 들었다.

8일  :  아직 못봤다. 보고 나서 추가 예정.

이산 :   여기서의 김여진씨 모습이나 이미지는 전혀 상상도 못한 이미지인데, 정말 설정을 잘 한 것 같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달랐으니 영조가 확실히 속아 넘어간 게 아닐까.. (이건 작가의 생각인지 이병훈 피디님의 생각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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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혜경궁 홍씨

한성별곡 : 안나왔음.

8일 : 정애리씨.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같은 시대를 다룬 사극 한성별곡에서는 정조를 해치려하는 정순왕후로 출연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얼마 전의 드라마에 한 번은 양계조모(양 새 할머니;;)로, 한 번은 정조의 친모로 나오니 이것도 재밌는 인연이다. 그런데 우찌된 것이... 정순왕후로 나올 때랑 별 구분이 안된다. 작가들은 더이상 혜경궁 홍씨가 '하늘아 하늘아'에서 하희라가 맡은 불쌍한 피해자로만 보이지 않는가 보다.

이산 : 대장금의 최고 악역 최상궁으로 나왔던 견미리씨. 그녀는 피해자가 가해자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다. 그저 남편에 대한 태도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세손에 대한 모정만은 살아있는 어머니로 나오는데, 이는 제작진들이 그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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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조(세손) 암살 혹은 각종 꿍꿍이를 꾸미기 위한 회합 장면

한성별곡과 이산에서 보여주는 구도가 거의 똑같은데.. 이는 고증인지(우째 알고?) 아니면 우연히 겹친 것인지, 아이디어의 부재로 복제한 것인지 궁금하다. 어쨋든 둘 다 멋있지만 멀리서 보여주는 구도는 한성별곡이 한 수 위, 가까이서 긴장감 조성하는 데는 이산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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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회합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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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별곡 회합장면

 


6. 드라마 포스터.. 셋 다 멋있다.

얼핏 본 바로는 세 드라마 모두 색감에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아름답고 우아하다. 어두운 시대의 비밀스러운 사건을 다루기에 극의 분위기도 차분하고 잔잔하다. 형광등 켜논 듯한 S사의 사극팀은 이런 것 좀 배워야 할 것 같다.

한성별곡 : 정조가 주인공이 아닌 만큼 사랑하는 세 남녀를 내세운 슬픈 분위기를 보여 주고,

8일 : 아직 내용은 모르지만 거대한 음모가 있는 듯한 느낌의 구도이고,

이산 : 대장금을 연출하신 이병훈 감독님 답게 포스터에서 왠지 꿈과 희망이 넘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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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방송사에서 시청자를 놀리는 것인지 계속 작품이 겹치고 있다. 작년에는 황진이, 올해는 정조, 내년에는 일지매랑 세종대왕까지. 골고루 좀 보여주면 어디가 덧나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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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설에 휘말린 조선 임금들 (인종, 선조, 소현세자, 효종, 현종, 경종)


독살설의 시초임금 인종

조선왕조 12대 임금인 인종(재위 1544∼1545년)은 연산군을 쫓아내고 즉위한 중종의 아들이다. 그가 조선의 임금 중 최초로 독살설에 휘말린 데는 후사를 둘러싼 궁중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다.

중종이 반정을 일으키기 전의 잠저(潛邸) 시절 첫 부인은 신씨였다. 신씨의 아버지는 연산군 시절의 우의정 신수근이었는데, 반정공신들은 그를 연산군의 처남이란 이유로 죽여버린다. 신수근을 죽여버린 반정공신들은 후환이 두려워 중종의 첫 부인 신씨를 내쫓고 새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한다. 그녀가 바로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다. 그러나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 10년(1515)에 중종의 첫 아들 호(인종)를 낳았으나 산후 조리에 실패해 25세에 죽어버렸다. 인종은
태어난 지 엿새 만에 어머니를 잃은 것이다.

중종은 2년 후인 1517년 새로운 여자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데 그녀가 조선의 왕후 중 두고 두고 구설에 오르는 문정왕후 윤씨였다. 인종의 독살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인이기도 하다.

파란은 문정왕후가 중종의 둘째 아들 환을 낳으면서 시작된다. 환은 세자 호보다 열아홉살이 어렸다. 따라서 세자 호가 살아 있는 한 문정왕후의 아들 환이 임금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 호가 세자로서 보위를 잇게 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자 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들이 없는 것이었다. 세자의 계모 문정왕후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세자가 후사없이 죽는다면 문정왕후 소생인 환이 즉위하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1544년 38년간 재위한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했다. 나이 서른살의 젊은 왕이었다. 그러나 인종은 보위에 오른 지 불과 9개월 만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역대 조선 임금들 중 가장 짧은 치세 기간이었다. 인종은 왜 그리 빨리 죽었을까?

정사인 『인종실록』은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야사(野史)들은 어김없이 계모 문정왕후가 독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중 한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매번 인종을 핍박하던 대비 문정왕후 윤씨가 하루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떡을 내놓았다. 인종은 계모 윤씨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반겨주는 것에 감격해 그 떡을 먹었는데 그날부터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사실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 독살설은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인종이 죽자마자 사화(士禍)가 재발했기 때문이다. 명종 즉위년에 발생한
을사사화(1545)가 그것이다. 조선 초·중기는 「훈구파」라는 구정치세력과 「사림파」라는 신정치세력의 정권을 둘러싼 각축이 심했다. 사화란 집권당인 훈구파가 야당인 사림파를 공격하는 정치 탄압을 말한다. 그런데 중종 때의 기묘사화 이후 거의 종결됐던 사화가 인종 사망 직후 다시 재연된 것이다. 인종이 승하하고 그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발생한 을사사화는 조선 사림파 사대부들로 하여금 문정왕후의 인종독살설을 사실로 믿게 했다.


그 배경에는 당시 대윤소윤이라 불리는 두 당파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다. 대윤과 소윤은 각각 임금의 외척이었다. 대윤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아우인 윤임이 영수였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윤원로 등이 영수였다. 중종이 살아 있을 때 대윤은 장경왕후 소생인 인종을 지지했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을 지지했다. 또한 대윤은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를 지지한 반면 소윤은 사림파에 적대적이었다. 중종의 뒤를 이어 인종이 즉위한 직후 대윤이 정권을 잡아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다.

인종은 시종일관 사림파를 옹호했던 군주였다. 그는 왕위에 있는 동안 부왕 중종 때 발생한 기묘사화의 피화자(被禍者)들을 신원(伸寃)할 생각이었다. 인종은 중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조광조·김정 등 기묘사화 피화자들을 신원하려 했으나 갑자기 병색이 짙어지자, 『조광조·김정 등의 복관과 현량과(賢良科) 복과는 선왕 때의 일이므로 서서히 하려 했는데 이제 내 병이 이와 같으니 조광조 등을 신원시켜주고 현량과도 복과하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면서 그들을 신원시켜 주었다.

이렇게 인종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사림파들의 신원을 생각할 정도로 이상적인 사림정치에 대한 열망을 지닌 군주였다. 또 인품이 인자하고 학문도 높아 사림파로서는 기대를 걸 만한 존재였다. 그랬으니 인종의 요절에 대한 사대부들의 분노와 좌절은 더 컸다.

인종이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인물이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이었던 점은 인종 독살설에 더욱 불을 댕겼다. 명종은 당시 12세의 미성년이었으므로 대왕대비 문정왕후나 왕대비 인성왕후(인종비) 중 한 명이 섭정을 해야 했는데, 명종이 인종의 동생이었으므로 『형수와 시숙이 한 자리에서 정사를 볼 수 없다』는 이언적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모후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자마자 사화가 뒤따랐던 것이다.

인종 승하 직후 발생한
을사사화와 함께 상법(喪法)에 어긋나게 치렀던 인종의 장례도 인종독살설에 설득력을 갖게 했다. 인종의 장례는 이른바 「갈장(渴葬:임시로 빨리 장사지내는 것)」으로 집행되었다. 이는 소윤의 주장 때문이었다.

소윤 이기는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빨리 장사지낼 것을 주장했다. 이는 훗날 사가(史家)들이 인종에게 박하게 하는 것으로 문정왕후에게 아부했다고 비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소윤의 윤원형, 이기 등은 인종의 국상중에도 웃는 낯을 보여서 의기 있는 선비인 교리 정황(丁煌)이 『이 역적놈들을 보니 더욱 원통하다』고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분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을사사화란 철퇴가 날아들어 대윤과 함께 사림파가 화를 입게 된다. 을사사화는 윤임, 유관 등 대윤과 앞으로 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한 문정왕후와 소윤의 음모였다. 갓 세상을 떠난 인종의 시신이 궐내에 남아 있는 상황에 사화가 발생했고, 인종의 지지세력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실들이 인종 독살설을 신빙성 있게 만든 것이었다.

을사사화 2년 후에는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쓴 벽서가 나붙은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남은 사림파마저 주륙을 당했다. 이처럼 문정왕후의 섭정 기간은 사림파에게는 암흑의 나날이었고 그 어두운 세월을 횡행한 것은 『선왕(인종)이 독살당했다』라는 은밀한 소문이었다. 그리고 사림파는 문정왕후가 죽는 순간까지 분노를 삭이고 있어야 했다.


광해군과 선조 독살설

인종 독살설 속에서 자신의 아들 명종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한 문정왕후는 왕위를 손자에게까지 잇지는 못했다. 재임 기간 내내 어머니 문정왕후의 그늘에 가려 있던 명종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승하했는데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는 상태였다. 명종의 유일한 아들 순회세자가 13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더 이상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승하는 자연히 후사 문제를 발생시켰다. 선왕의 아들이 없으므로 종친 중에서 한 명을 임금으로 추대해야 했다. 평소 명종 내외와 친밀했던 중종의 서손자(庶孫子) 하성군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그는 중종이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낳은 덕흥군의 세 아들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방계 승통 시대가 열렸고, 그가 바로 선조였다.

자신이 방계 승통이라는 점에 대해 콤플렉스 가지고 있었던 선조는 정비(正妃)에게 낳은 아들로 후사를 잇는 것으로 그 콤플렉스를 메우려 했다. 그러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다. 반면에 후궁들로부터는 무수히 많은 왕자와 옹주를 얻었다. 여섯 명의 후궁에게 얻은 자녀는 총 13남 10녀. 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열세 명의 후궁 소생 아들 중에 누구를 후사로 삼느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런데 당시 선조는 또 다른 후궁인 인빈 김씨에게 빠져 있었고, 인빈의 둘째 아들인 신성군을 유달리 사랑했다. 선조는 어차피 정비 소생 원자가 아니라면 사랑하는 인빈 소생의 신성군에게 보위를 넘기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선조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력 정당이나 정치인들에게도 중요한 화두였다. 서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은 공빈 김씨의 둘째아들 광해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가 선조의 여러 서자들 중 가장 인품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에 정철을 영수로 하는 서인들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지지했다. 특히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은 신하들의 이런 의견을 직접 선조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정철은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됐는데 무슨 말을 하는가』란 선조의 꾸지람만 듣고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여기에는
동인인 영상 이산해의 계략이 있었다. 이산해는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기로 정철과 합의해 놓고서도 한편으로 신성군의 생모 인빈 김씨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 당신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충동질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인빈 김씨가 당일로 선조에게 이 사실을 호소했을 때만 해도 선조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정철이 실제로 신성군이 아닌 광해군을 세자로 주청하자 분노가 폭발해 귀양보낸 것이었다. 이로써 정권은 동인 수중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한해 전인 1591년의 일이었다.

동인임진왜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당이다. 일본의 침략 조짐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파견됐던 조선통신사 일행 중 정사인 황윤길은 『침략할 것 같다』고 보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전혀 침략의 조짐이 없다』고 상반된 보고를 올렸다. 양 의견 중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됐는데, 이는 당시의 집권당이 동인이고 김성일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와중에 권력을 잡는 쪽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이었다. 조식(曺植)을 종주로 모시는 북인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같은 의병장들을 다수 배출하여 명분에서 앞선 결과 집권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겨우 종결되자 집권당인 북인은 선조의 후사 문제를 놓고 또다시
대북소북으로 분열했다. 이는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왕비가 된 인목대비 김씨가 1606년(선조 39년)에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비롯된다. 당연히 후계 문제가 복잡하게 꼬인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선조는 할 수 없이 조정 대신들의 중망을 들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세자 광해군은 조정을 둘로 나누어 맹산, 곡산, 이천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 끝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그 지위를 굳혔다. 이때만 해도 광해군이 보위를 잇는 것은 기정사실로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자국 사정 때문에 광해군의 세자 책봉 추인을 거부하자 선조와 일부 신하들의 생각이 달라지면서 세자 문제는 다시 미궁에 빠졌다.

소북 영수 유영경은 인목대비 김씨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과 손을 잡았다. 광해군을 폐세자시킨 후 영창대군을 세우려고 결탁했던 것이다. 영창대군을 후사로 세우려는 이 구도는 방계 승통을 극복하려는 선조의 열망과 맞물리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결국 이것은 세자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박해로 나타났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선조는 광해군이 문안할 때마다 『명나라의 추인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 행세를 하는가? 다음부터는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그때마다 광해군은 피를 토했다고 한다.


광해군의 승리

선조는 광해군을 내쫓고 영창대군을 세우려 했으나 세월은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선조의 병이 깊어진 재위 40년(1707) 가을, 서른네살의 장성한 세자를 폐하고 두살배기 아이를 세자로 만드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일이었다. 결국 선조는 광해군을 폐출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했다.

선조는 1707년 10월 병석에서 대신들을 불렀다. 광해군에게 전위한다는 교서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소북 영수 유영경은 선조가 자신만 불렀다고 하면서 원임대신(현직 정승)들을 모두 배제한 채 혼자 선조를 만났다. 선조가 광해군에게 전위할 뜻을 밝히자 유영경은 『금일의 전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뜻밖에 나온 거사여서 명령을 받지 못하겠습니다』라면서 명을 받기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소북인 병조판서 박승종과 공모해 군사를 동원해서 대궐을 에워싸기도 했다.

유영경의 이러한 월권 행위에 저격수로 나선 인물이
대북의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유영경이 전교를 거부한 것은 사당(私黨)을 위해 왕사를 버린 것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그러나 선조는 오히려 정인홍을 귀양보냈고 후사를 둘러싼 상황은 여전히 혼돈스러웠다.

후사를 둘러싼 선조의 결심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선조의 병이 재발했다. 선조 마지막 해인 41년 1월부터 다시 병세가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았는데 그해 2월1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어젯밤엔 편히 잠을 잤다』라고 말한 그날 오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죽음이 머리맡에 이른 선조는 광해군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광해군에게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듣지 말라』는 유서를 내렸다.

드디어 광해군이 승리한 것이다. 선조는 죽음에 이르러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말했지만 신하들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고 광해군에게 피를 토하게 한 인물은 바로 선조 자신이었다. 만약 선조가 시종일관 광해군의 지위를 튼튼히 해주었다면, 장남 임해군이나 적자 영창대군 모두 왕자로서 풍족한 삶을 누리다 세상을 뜰 수 있었을 것이다.

즉위한 광해군이 자신을 폐출시키려던 소북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광해군은 소북을 숙청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북에게 정권을 넘겼다. 정권을 장악한 대북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에 대한 강경책을 펴서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해 서궁에 가두었다. 이 와중에 나돈 소문이 선조독살설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당연히 숙청당한 소북과 세를 잃은 서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선조 독살설이 그리 광범하게 유포되지는 않았다. 선조가 죽기 전해부터 병색이 심각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사대부 모두 알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선조독살설이 조선 전역에 유출되고 사실처럼 전해진 것은 광해군이 쫓겨난 이후였다.

정철의 실각 이후 정권에서 소외됐던 서인들은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와 인목대비 폐위 등을 반사대·반윤리적인 행위로 규정짓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인조 반정은 대북 정권에 의해 서궁에 유폐됐던 인목대비를 화려하게 복귀시키는 무대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간 사랑하는 아들 영창대군이 비참하게 저세상으로 가는 비극을 맛보았다. 백년을 씻어도 씻기지 않을 한을 품은 그녀가 다시 대비로 복위한 것이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이 반정을 추인해 달라고 요구하자 인목대비는 광해군 부자를 죽이라고 요구한다.

『역괴(逆魁:광해군)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고, 그 적모(嫡母: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다하였다』

말하자면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민성징이 즉각 『지금 하교하신 사실은 외간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더욱이 선왕을 시해했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한 사실입니다』라고 되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별다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단지 아들을 잃은 여인이 한풀이를 위해 지어낸 말일 뿐이다.

하지만 대비의 입에서 직접 나온 선조 독살설은 서인의 반정 명분을 정당화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서인 편에서 볼 때 선조 독살설의 진위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선조 독살설이 광범하게 유포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인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야 어차피 구중 궁궐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재간이 없었다. 반정 정권은 선조독살설이 정권 기반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조직적으로 유포시켰고, 이것은 하나의 오도된 진실이 되어갔다.


소현세자의 이상한 죽음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 정권은 집권 후 외교노선을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했다. 만주에서 새로이 흥기하는 여진족의 후예들이 세운 후금(後金), 곧 청나라를 배격하고 한족(漢族)의 명나라를 좇자는 정책이 그것이다.

인조반정(1623년)이 일어날 즈음의 만주 정세는 극히 유동적이었다. 인조반정 한 해 전 청(후금)은 만주의 요지인 심양과 요양을 탈취했고 다음해에는 서평보(西平堡)를 장악했다. 청이 이처럼 기세를 올리는 동안 명나라는 내부 분란에 휩싸여 있었다. 귀주와 산동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혼란을 틈타 청은 급격하게 세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만약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정묘· 병자호란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과 청의 분쟁 와중에 조선의 위상과 국익을 한껏 드높였을지도 모른다. 반정 정권이 배청 정책으로 전환하자, 청은 명과 중원을 다투는 일전을 앞두고 조선 문제를 먼저 정리하려고 나섰다. 청군이 중원으로 남하한 틈을 타서 조선군이 공격해 온다면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되기 때문에, 만주를 기반으로 한 청으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처지였다.

이는 결국 두 차례의 침략을 불러왔다.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丁卯胡亂)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그것이다.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는 12월의 혹한이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나라 군사는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강화도는 지리적 요건이 농성할 만한 곳이지만 남한산성은 그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농성의 기본조건은 자급자족 체제인데 산성, 그것도 한겨울의 산성은 농성의 자리가 아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45일 이상을 저항하던 인조는 결국 강화도가 함락돼 비빈·대군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하고 만다. 인조는 지금의 송파구인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삼배고두례를 행했다. 허울뿐인 큰소리 외교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화의의 대가로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야 했다. 삼전도의 치욕은 봉림대군은 물론 소현세자에게도 씻기 어려운 상흔이었다.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의 성리학자인 그들에게 삼전도의 치욕은 반드시 씻어야 할 원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볼모생활 도중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현실인식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이 처한 객관적 현실, 즉 국제관계의 역학을 인정했다. 청은 이제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실력자였고 조선은 그 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 편입돼 있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려면 청과 맞서 이길 힘이 필요했다. 그럴 힘이 없는 이상 청과 대립하는 것은 조선에 이롭지 못한 일이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은 이전의 중국 왕조들이 요구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공으로 대표되는 형식적 주종 관계를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조공 대상이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든 만주족이 세운 왕조든 현실적으로 볼 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원을 청이 장악한 이상 조선은 그 질서 속에 편입된다는 것이 볼모생활에서 바뀐 소현세자의 현실 인식이었다.

소현세자는 당시 심양에 새로운 숙소를 신축해 심양관(瀋陽館)이라 불렀다. 청나라는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려 했다. 인조도 청나라와 직접 접촉을 꺼렸으므로 양국간 현안은 소현세자의 차지였다.

소현세자는 양국의 접점 지역에서 양국의 직접적인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심양관은 주중국 조선대사관이며 소현세자는 그 대사였던 셈이다.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에 대응하는 일이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 중에서 명 정벌에 사용할 군사를 파견해 달라는 것은 가장 난처한 문제였다. 친명 배청을 명분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으로서는 이는 심각한 자기 부정에 해당하므로 상당한 반발이 뒤따랐다. 하지만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정권으로서는 청의 어떠한 요구도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하는 순간 청군의 말발굽이 또다시 조선 국토를 짓밟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임경업장군의 사보타주

인조 18년 임경업이 이끄는 수군 6천명을 파견한 것은 서인 정권의 참담한 자기 부정이었다. 유명한 반청론자인 임경업이 청과 함께 명을 치는 일에 흥이 날 리 없었다. 임경업은 명군을 향해 발포하지도 않고 일부 군사는 일부러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보타주를 벌였다. 이에 격분한 청은 장수 용골대(龍骨大)를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의주로 파견했다. 이들은 조선의 대신들을 의주로 불러 심문하는 이른바 「심옥(瀋獄)」을 벌여 조선은 다시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졌다.

이때 소현세자는 청의 말을 듣는 척하며 양자 사이의 완충역할을 자임했다. 아마 소현세자의 유연한 처신이 없었다면 조선인들은 화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조 20년에 압록강 근처에 명나라 배가 출몰하자 용골대가 평안감사 등을 불러 심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도 소현세자는 시종일관 평안감사를 옹호했다. 이때 용골대는 이렇게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와 같이 비호해 주니 그와 한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소』

세자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구려』

이처럼 소현세자는 양국간 분쟁에서 분명히 조선편을 들면서도 유화적인 몸짓으로 파문의 확산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런 유연한 처신은 조선에 대한 청의 의구심을 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즉위하면 양국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세자빈 강빈도 소현세자 못지않은 수완가였다. 심양관의 안살림을 맡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금이었다. 그녀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했다. 이렇게 생산된 곡식은 심양관 살림에 가장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포로로 잡혀온 조선 사람들도 원수인 청인들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세자 밑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니, 강빈의 이 농업정책은 일거양득의 양책이었다. 강빈은 이렇게 수확한 곡식을 청의 진기한 물건들과 맞바꿔 차액을 남겼다. 또한 조선 사신들이 가져오는 인삼 등을 청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청나라 관리들에 의해 심옥이 한번 벌어지면 막대한 자금이 들었다. 청 관리들은 막대한 뇌물을 받고서야 못 이기는 체 심옥을 종결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금을 마련한 것은 모두 강빈의 수완이었다. 실로 소현세자와 강빈은 조선 역사상 가장 현실적인 세자이자 세자빈이었다.

소현세자가 볼모로 가 있었던 기간은 장장 9년이었다. 인생의 황금기인 20대 중후반과 30대 전반을 이국에서 볼모생활로 보낸 것이었다. 소현세자는 인조 22년(1644) 2월, 34세의 나이로 꿈에도 그리던 고국 조선에 돌아왔다.


아들을 의심하는 아버지

소현세자의 귀국 짐보따리 속에는 많은 종류의 서양 과학서적과 여지구가 들어 있었다. 그는 볼모생활을 하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견식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세상이 더 이상 성리학의 시대가 아님을 심양과 북경에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한 인물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사상과 접하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과 천주교, 그리고 서양의 과학사상이었다. 소현세자는 스스로 아담 샬이 머물고 있던 북경의 남천주당을 찾았다. 푸른 눈의 선교사와 이국의 왕세자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는 특이한 장면이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가져온 과학서적이 훗날 수원성 축성 때 정약용으로 하여금 거중기를 만들게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이 밖에도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들을 데리고 귀국하기도 했다.
 
소현세자는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더 이상 청은 원수가 아니었다. 주자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청은 원수의 나라였지만 주자학의 관점만 버린다면 청은 실리에 따라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상대적인 대상일 뿐이었다. 세상은 주자학만이 아니라 천주학이란 다른 사상도 있었다. 그리고 여지구가 보여주는 대로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새로운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과학기술은 조선을 새롭게 발전시킬 양축이었다.

그러나 가슴 가득 포부를 안고 귀국한 소현세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를 구렁에 빠뜨리려는 음모였다. 부왕 인조에게 있어서 소현세자는 자신을 대신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었다. 소현세자는 자신의 반청 노선에 반기를 든 정적이자 원수인 청의 회유에 넘어간 반역자일 뿐이었다. 소현세자가 볼모지 심양에서 조선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부왕 인조는 세자에 대한 불만만 키워왔던 것이다.

더욱이 인조는 어이없게도 아들인 소현세자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심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공포였다.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임금으로 내세워 자신을 폐출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다. 인조는 쿠데타로 집권한 인물답게 자신의 왕위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했다.

인조가 세자를 의심하는 것을 눈치챈 일부 정치세력이 세자를 모함하고 나섰다.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도 그 중 한 세력이었다. 그녀는 세자와 강빈이 인조를 내쫓고 즉위할 것이라고 참소했다. 세자에 대한 의심과 주위의 참소는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조는 심지어 환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조차도 막을 정도로 그를 냉대했다.

소현세자는 부왕의 이런 냉대에 상심했으나 그 원인을 분석할 만한 여유도 그에겐 없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설고 낯선 이역만리에서 9년간이나 꿋꿋하게 지내던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뒤따랐다.


의혹짙은 소현세자의 주검

세자의 발병일은 인조 23년 4월23일이었다. 병명은 학질이었다. 세자는 발병 3일 후인 4월26일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인조실록』은 그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적었다.

『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소렴 때 시체의 얼굴을 싸는 검은 헝겊)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이 기록은 당시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시신의 이상한 상태를 보고 나와 말한 것을 토대로 적은 것이었다. 그녀는 인열왕후(소현세자의 어머니)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염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한 것이 분명하다면 소현세자를 죽인 인물은 누구일까?

『인조실록』은 세자의 시신이 독살당한 사람 같았다는 사실을 『상(인조)도 모르고 있었다』라고 기록했지만 이는 거짓이다. 소현세자 독살에 인조가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한둘이 아니다. 그 하나가 소현세자를 치료한 의관 이형익(李馨益)에 대한 처리 문제다. 이형익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어미 집에 왕래하던 의사로 세상에 추잡한 소문이 많던 자였다. 세자가 이형익에게 침을 맞은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양사는 이형익을 처벌하자고 주청했다. 『오한이 심하여 몸이 떨리는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는 것이 양사의 탄핵 이유였다. 조선시대에 왕이나 세자가 죽으면 의관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다 해도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인조는 끝내 이형익을 비호하면서 처벌하지 않았다.

인조가 세자 독살에 관련돼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였다. 사망 당시 소현세자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큰 아들 석철은 원손(元孫)이었으므로 당연히 그가 세손으로서 세자를 대신해 인조의 뒤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종법을 어기고 원손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그 중 두 아들이 풍토병으로 죽게 했다.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련됐다는 다른 증거는 세자빈 강빈의 처리 문제였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강빈에게 공격의 화살이 날아왔다. 세자의 장남 석철의 보모 최상궁은 저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 끝에 죽어갔다. 그리고 인조 24년 정월에는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御膳:임금의 수라)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강빈은 후원 별당에 감금되었다. 이미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진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에 독을 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인조와 소용 조씨가 공모해 강빈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내린 인조의 비망기는 자신이 사건의 배후 연출자임을 털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紅錦) 적의(翟衣)를 만들어 놓고 외람되게 내전(內殿:왕비)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인조 스스로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그의 세 아들을 귀양 보낸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인조의 악함은 강빈을 사사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결국 강빈을 폐출하여 사저로 내쫓은 후 사약을 내려 죽여버리고, 교명 죽책(竹冊) 등을 거두어 불태워버렸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빈의 형제들까지도 죄를 씌워 죽여버렸다. 자신의 친아들과 손자, 며느리와 사돈까지 죄없이 죽여버린 이런 인물의 시호에 「어질 인」자를 써 인조(仁祖)라 한 것은, 서인 정권의 역사뒤집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행적을 제대로 표현하면 그는 악조(惡祖)라 불러야 마땅하다.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은 단순히 한 세자의 꿈이 좌절된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꿈이 좌절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을 만난 것은 조선이 개국한 1876년보다 무려 2백32년이나 빠른 1644년의 일이었다. 이때 이미 낡아빠진 성리학을 버리고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그 처참했던 근대사의 아픔은 겪지 않아도 좋았을지도 모른다.


북벌군주 효종의 급서

소현세자가 죽은 4년 후인 1649년 인조도 세상을 떴다. 그 자리를 이은 인물은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생활을 했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었다. 효종에게는 즉위 자체가 하나의 콤플렉스였다. 인조의 뒷자리는 소현세자의 것이지 효종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현세자가 죽었다 해도 그 자리는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의 것이었다. 종법에 따르면 대통은 분명 원손(元孫) 석철의 것이었다. 효종은 소현세자와 석철이라는 두 부자의 대통을 가로챈 셈이었다.

효종이 심양 시절부터 소현세자의 자리를 탐냈다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찾기 어렵다. 심양 시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사이는 그리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소현세자를 사지에 몰아넣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에게 돌아오는 왕위를 거부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즉위 정당성을 북벌(北伐)에서 찾았다.

북벌! 효종에게 있어서 북벌은 시작이자 마지막이며 부분이자 전체였다. 효종은 북벌 군주 그 자체였다. 소현세자가 볼모 생활을 새로운 사상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세계사의 흐름에 적응하는 기간으로 보냈다면, 봉림대군은 원수인 청의 약점을 캐는 기간으로 보냈다. 소현세자가 청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으로 보았다면, 봉림대군은 전력을 다하면 넘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같은 볼모 기간을 보냈으면서도 세계관이 이처럼 완전히 갈리는 것은 서로의 성격탓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무과출신 우대 정책

효종이 북벌에 전념했던 이유는 물론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 소현세자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콤플렉스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북벌은 삼전도의 치욕과 콤플렉스를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길만이 저승에서 소현세자를 떳떳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북벌은 소현세자보다는 효종에게 걸맞은 과제였다. 효종은 강력한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효종은 실로 삼국시대 이래 우리 역사상 거의 유일한 무제(武帝)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이나 고구려의 광개토왕, 그리고 신라의 태종무열왕처럼 무력을 통한 영토확장의 길에 나섰던 무력의 군주였다.

북벌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강력한 군사력이다. 효종은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까지 조선은 문(文)의 나라였다. 과거는 문·무과로 나뉘어 있었으나 무과 출신으로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과 출신들은 문과 출신보다 한 등급 아래의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무과 합격자는 지방 수령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은 무과 우대 정책을 실시했다. 효종은 무과 시험인 관무재(觀武才) 우수 합격자를 지방 수령에 임명했다. 그러자 문신들의 반발이 잇따랐다. 효종이 무과 출신을 지방 수령에 임명한 것은 각 지방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효종은 무과 출신인 유혁연(柳赫然)을 비서격인 승지로 임명하기도 했다. 효종이 전례를 무시하고 무장 출신을 승지로 임명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군사문제에 관한 직할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효종은 지방관을 파견하며 군사문제는 병조판서에게 직보하고, 병판은 무신 승지 유혁연에게 전달하게 했다. 즉 지방의 군사문제를 지방관→병판→무신 승지→효종이라는 신속하고 전문적인 보고 체제를 갖추기 위해 무과 합격자를 수령에, 무신 출신을 승지에 임명한 것이다.

또한 효종 5년 2월에는 지방의 북벌 준비 사업을 관장할 영장(營將) 제도를 복원하고 이화악(李華岳) 신단(申檀) 등을 영장, 부사(府使) 등에 임명해 지방으로 내려 보내기도 했다.

전란 후의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효종의 강력한 군사력 확장 정책은 많은 성과를 거두어 재위 6년에는 사대부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막강해진 조선군의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 세자와 문무백관,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량진 백사장에 나가 1만3천여 조선군의 열병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효종은 제주도에 표류돼온 네덜란드 사람 하멜(Hamel)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조총(鳥銃)을 모방한 새로운 총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친위군인 금군(禁軍)을 늘리고 창덕궁 후원의 담장을 헐어 이들의 기사장(騎射場)을 만들어주었다. 지형이 험준한 우리 나라는 남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기병전의 여지가 그다지 넓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광활한 만주와 중원을 공격할 때 사용할 목적임이 분명하다.

효종의 이런 군비확장책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조선 전기간을 통틀어 전례가 없던 군비확장책은 문신들의 강한 반발을 낳았다. 신속한 군비확장은 집중된 권력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국왕의 권력은 미약했다. 부왕 인조는 서인들이 선택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쿠데타를 준비하던 서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한 명의 종친일 뿐이었다.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조정은 국왕과 서인의 연합정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의 군비확장책은 서인 문신들의 반발을 낳았다.

문신들은 물론 만주족 국가인 청을 증오했다. 그러나 이런 증오심을 극도로 표현하는 길은 기껏해야 삼학사 같은 지사적 처신이지 군사적 대응은 아니었다. 의기만 드높게 선전 교서를 던졌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혹한 속의 산성에서 떨었던 문신들에게 청은 마음속 증오의 대상일 뿐 군사적 정복대상은 아니었다.

군비확장책에 대해 『백성의 생활이 더 급하다』는 안민책(安民策)을 제시한 문신들의 반발 명분이 무조건 폄하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안민의 대계 중 강력한 국방책은 가장 첫머리에 놓여야 할 항목이란 점에서 안민책을 명분삼은 군비확장 반대도 전적인 정당성을 갖기는 어렵다. 심지어 열병식이 청나라의 분쟁거리가 된다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대해 효종은 『이것이 어찌 오랑캐의 주구가 아니겠는가?』라면서 강행했다.


문신들의 노골적 반발

그러나 재위 8년간 거의 독단적으로 군비확장책을 추진하다 보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효종의 치세에 대한 사대부들의 불만을 집약해서 표출한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흔히 송시열을 북벌 이념의 제공자로 알고 있지만, 실제 송시열은 효종의 군비확장책에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다. 송시열은 효종 8년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그간의 치세 전체를 부정하고 나선다.

『전하께서 재위하신 8년 동안 그럭저럭 지나갔을 뿐 한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르렀습니까? 백성들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하며 안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朝夕)에 다다랐습니다』

송시열은 또 『남송의 주자가 처음에는 금나라에 대한 북벌을 주장하다가 20년 후에는 다시 북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북벌을 포기하라는 권고였다. 이는 효종이 전력을 기울인 모든 정책을 포기하라는 말로 효종의 치세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자신을 전면 부인하고 나선 송시열을 처벌하지 못했다. 사대부들이 집단 반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효종은 사대부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타협에 나섰다. 효종은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에 정권을 넘겨주기로 하였다. 대신 송시열·송준길로 대표되는 산당은 적극적인 북벌책을 수행해야 했다. 이처럼 양자가 연합할 수 있는 공통 분모는 북벌이었다.

송시열의 산당이 대외적으로 내건 명분은 「춘추대의」였다. 최고의 춘추대의는 오랑캐의 나라인 청을 정벌하고 중화의 명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 길은 오직 북벌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북벌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소리 높여 춘추대의를 외쳤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춘추대의는 군사를 동원해 산해관을 공격하는 북벌이 아니었다. 그들이 최고로 생각하는 춘추대의는 국력을 길러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망해버린 명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달랐다. 그에게 북벌은 군사를 동원해 만주와 중원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과 효종의 북벌론에는 이론과 실제에 이토록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 같은 산당인 송준길을 병조판서에 임명해 인사와 군사 양방면의 전권을 맡겼다. 효종이 이들에게 정권을 내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들이 소리높여 주창하던 춘추대의를 실제로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춘추대의는 말로써 드높일 수 있었지만 북벌은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북벌은 군사력 확장이란 가시적 성과가 눈에 보여야 했다.


땅에 묻힌 「북벌론」

양송(兩宋)이라 불리던 송시열·송준길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그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자 효종은 재위 10년(1659) 3월에 송시열과 독대한다. 조선에서 임금과 신하가 단 둘이 만나는 독대는 금지돼 있었다. 효종이 국법을 어겨가며 독대한 이유는 보안을 위해서였다. 바로 북벌을 논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기해년의 일이라 하여 「기해독대」로 불리는 이 독대에서 효종은 이렇게 말한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효종의 북벌계획은 군사전략상으로 볼 때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청은 외견상으로 견고해 보여도 구조상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배층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이고 피지배층은 다수 민족인 한족이기 때문이다. 10만 조선정예군이 북벌을 단행하면 만주족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한족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것이 효종의 생각이었다. 효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단성있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효종이 독대까지 해가며 북벌을 주장하자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효종이 산림에 정권을 넘긴 이유는 단 하나 북벌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송시열이 북벌 자체를 반대한다면 효종은 미련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송시열 등 산림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벌을 강력히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북벌은 불가능한 망상이었다.

이때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효종이 급서한 것이다.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한 지 두 달 만이었다. 효종의 사인은 사소한 것이었다. 머리 위에 난 종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종기가 독으로 번지자 어의 신가귀(申可貴)가 종기에 침을 놓고 고름을 조금 짜내니 피가 서너 말이나 솟아나왔다.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이었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그는 수전증으로 손을 떠는 상태였다 한다. 수전증이 있는 의사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신가귀가 현종 즉위 후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수전증의 신가귀가 효종에게 침을 놓은 것도,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도 우연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으로만 돌리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컸기에 고의란 의구심이 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조정에서 북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송시열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북벌은 주장하지 않았다. 효종의 시신과 함께 북벌도 땅속에 묻힌 것이다.


예송논쟁 와중에 급서한 현종

효종의 죽음은 조정에 뜻밖의 논란을 불러왔다. 효종의 급서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효종의 장례 때 입을 상복을 두고 벌어진 논란이다. 이것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지는 유명한 「예송논쟁」이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사망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 기간이 얼마여야 하는가를 두고 발생했다.

조선의 상례(喪禮)에 따르면 부모상에 자식은 3년복을 입고, 반대로 장자상(長子喪)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어야 했다. 장자를 부모와 같이 대우한 이유는 종통을 잇는 맏아들을 그만큼 우대했기 때문이다. 장자 아닌 차자(次子) 이하의 상사에는 부모가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다.

예송 논쟁의 논거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효종은 인조의 차자였기 때문이다. 장자는 어디까지나 소현세자였다. 그러나 인조의 왕통을 이은 인물은 효종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왕통을 이은 인물에게 장자냐 차자냐를 따지는 것이 타당한 물음이냐는 반론이 가능한 것이다. 효종이 차자라는 서인의 논거와 왕통을 이은 존재라는 남인의 논거가 부딪친 것이 1차 예송논쟁이었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은 효종이 차자이므로 자의대비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선도로 대표되는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자지만 왕통을 이었으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자칫하면 효종이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 대신 왕위를 이은 것이 정당하냐는 승통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 정국에 피바람을 부를 수도 있는 민감한 문제였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 승통의 정당성을 둘러싼 거대한 정치문제로 비화될 뻔하다가 가까스레 1년설을 주장한 서인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서인이 집권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설을 주장하다 패배한 남인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정치보복은 행해지지 않았다. 형식상 정치논쟁이 아니라 예법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임금에게 야박한 신하들

그러나 15년 후 벌어지는 2차 예송논쟁은 학문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종 15년에 벌어지는 2차 예송논쟁은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함으로써 발생한다. 자의대비가 그때까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효종 장례 때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1차 예송논쟁이 아들 상사 때 어머니의 상복 착용 기간 여부였다면 2차 예송논쟁은 며느리 상사 때의 시어머니의 상복 착용 기간 여부였던 것이다.

장자·차자의 상사 때 부모의 상복 착용 기간이 달랐던 것처럼 장·차자부 상사 때의 상복 착용 기간도 달랐다. 장자부(長子婦)의 상은 1년복을, 차자부(次子婦) 이하의 상은 9개월복을 입었던 것이다. 사망한 사람만 달랐지 그 내용이나 배경은 1차 예송논쟁과 똑같았다. 1차 예송논쟁 때 1년설을 주장했던 서인들은 2차 예송논쟁 때 9개월설을 주장했고, 1차 때 3년설을 주장했던 남인들은 2차 때는 1년설을 주장했다. 즉 서인들은 1차 예송논쟁 때 효종을 차자로 대우한 것처럼 효종비를 차자부로 대우한 것이고 남인들은 왕통을 장·차자 여부보다 높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차자부가 아니라 왕비로 대우한 것이다.

1차 예송논쟁 당시 현종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서른네 살의 장년이 돼 있었다. 국왕인 현종의 자리에서 볼 때 1차 예송논쟁의 결과는 내심 불만이었다. 당시만 해도 송시열과 윤선도 같은 대군 사부들의 논쟁에 판정을 내릴 만한 견식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버지 효종이 누구인가? 바로 국왕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국왕을 장자와 차자로 나누어 차등있게 대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통을 이었으면 그뿐, 나머지 모든 예법은 왕통에 복종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한 직후에 서인들이 자의대비 복제에 혼선을 빚었던 것이 논쟁을 부추겼다. 서인은 처음에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의정했다가 1차 예론에 참여했던 서인 중진들의 말을 듣고 9개월로 고쳐 올렸던 것이다. 현종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당초 1년복으로 의정했다가 왜 9개월복으로 개정했느냐고 추궁하고 나섰다. 서인들은 여러 차례 모여 협의했으나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진퇴양난의 협곡에 빠졌던 것이다. 현종이 원하는 대답은 1차 예송 때 서인들이 주장했던 1년설과 지금의 9개월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시인하면 서인들은 국왕을 능멸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자충수(自充手)에 빠지는 것이었다. 서인들이 대답을 못하고 시간만 끌자 현종은 분노했다. 그리고 1,2차 예론은 모두 서인들이 왕권을 업신 여긴 결과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전의 기해예론(1차 예송)은 3년복으로 고치고 이번의 갑인예론(2차 예송)도 1년복으로 고쳐라. 기해복제를 과인은 국제(國制:국조오례의)를 쓴 것으로 생각했는데 안팎에서는 고례(古禮:중국의 옛법)를 썼다 하니 임금이 하는 일은 가볍고 신하들이 하는 일은 무겁다는 말이냐? 경들이 모두 선왕(효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감히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고 주장하니 신하가 되어 감히 임금에게 야박하게 굴면서 누구에게 두텁게 굴 것인가?』

현종이 말하는 「두텁게 구는 누구」란 1차 예송 논쟁 때 1년설을 이끌었던 송시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서인들에 대한 치죄에 나섰다. 평소 원만했던 현종의 성품으로 보아 이례적인 분노였다. 현종은 드디어 예론을 잘못 이끈 책임을 물어 서인 영상 김수흥을 귀양보내기에 이른다. 귀양가는 서인의 자리는 허적, 윤휴 같은 남인들이 메웠다. 이때가 1674년이었으니 남인들은 1623년의 인조반정 이래 반세기 만에 정권을 잡는 길이었다. 분명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견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현종이 급서했던 것이다. 현종은 왜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것일까? 『현종실록』은 『현종의 기운이 몹시 지쳐 병이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과로라는 뜻이다. 과로로 쇠약해진 몸에 열이 발생했고, 그런 지 열흘 만인 그해 8월 승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의혹을 부추기는 점은 이때가 약방에서 시약청을 설치한 하루 만의 일이라는 점이다. 임금의 병이 조금 심하다 싶으면 서둘러 시약청을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시약청 설치 하루 만에 사망하는 일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당시 현종은 「임금에게 야박하게 구는」 서인들을 한창 몰아세우던 중이었으므로 의혹이 잇따랐다. 그런 의혹을 남긴 채 현종은 가고 15세의 어린 숙종이 뒤를 이었다.


노론에 둘러싸인 소론 임금 경종

숙종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경종의 신산스러운 삶은 「장희빈의 아들」이란 한마디에 포괄돼 있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와 국왕의 총애를 놓고 다투던 숙종 때는 조선 전기간에 걸쳐 당쟁이 가장 심한 때였다. 숙종 때는 서인과 남인 사이에 죽고 죽이는 살육이 거듭됐는데,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가의 여인이었고 희빈 장씨는 남인가의 여인이었다.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의 부상과 몰락은 익히 알려진 대로 현모양처와 악처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리전이었다.

재위 15년 동안이나 후사가 없어 애를 태우던 숙종에게 옥동자를 안겨준 여인이 바로 희빈 장씨였다. 숙종이 이 옥동자를 원자로 정호하려 하자 서인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숙종은 서인 정권을 갈아치운 후 남인에게 정권을 주면서 원자 정호를 강행했고 동시에 인현왕후를 내쫓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그리고 원자로 정호한 옥동자를 세자로 책봉했으니 그가 바로 훗날 경종이다.

그러나 또 다른 후궁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왕자를 낳자 희빈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점차 식어갔는데 서인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희빈 장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남인에 대해 서인이 집요한 공세를 계속한 결과, 희빈 장씨가 왕비에서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고 남인들도 몰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저로 쫓겨났던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가 되었다. 그후 몰락한 남인에 대한 치죄를 둘러싸고 서인들은 둘로 양분된다. 남인들을 강하게 치죄해야 한다는 강경파가 노론이고 유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온건파가 소론이었다.

숙종과 노론이 희빈 장씨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해 사약을 내려 죽이자 그녀 소생인 세자의 처지는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노론은 자신들이 죽여버린 여인의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연산군 시절과 같은 살육이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숙종 또한 모후가 사형당한 한을 품은 아들이 뒤를 잇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숙종과 노론 대신 이이명은 숙종 43년(1717)에 이른바 「정유 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정유독대의 합의사항은 숙종의 와병과 소론의 격렬한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경종이다. 그러자 다급해진 노론은 경종을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경종의 이복동생, 즉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밀었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요구했다. 노론이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청한 까닭은 그녀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노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34세였던 경종은 노론의 이 주장을 받아들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다.

하지만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했다. 이는 세제를 정사에 참여시키라는 말로 사실상 세제에게 정권을 넘기라는 주청이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미성년이 아닌 한 「대리」라는 말은 신하가 입에 담을 수 없는 금언(禁言)이었다. 국왕이 세제에게 대리시키겠다고 해도 신하들은 죽어도 안 된다며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해야 했다. 이런 어마어마한 말을 신하들이 먼저 주청하고 나선 것이다.

경종은 이를 받아들여 세제 대리청정을 허락했으나 소론이 격렬히 반발하고 나섰다.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은 노론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을 역모로 몰았고 경종이 이를 받아들여 정권은 소론에게 돌아갔다. 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 남인가의 인물인 목호룡이 노론쪽에서 경종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이른바 「삼급수 살해 사건」을 고변하면서 조정은 충격에 휩싸인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창집·이이명 등 노론 사대신과 많은 노론가 자제들이 사형당하면서 노론은 몰락하는데 이것이 바로 임인옥사다.


게장과 생감

경종의 사인(死因)이 두고두고 의혹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임인옥사 수사보고서인 임인옥안에 세제 연잉군의 이름도 역적으로 등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노론 사대신을 제거한 소론 강경파의 공세는 이제 세제를 향했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과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는 세제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경종에게 양자를 들여 그를 후사로 삼고 세제를 폐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성사되지 못했다.

경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경종의 급서는 효종·현종의 사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파문을 불러왔다. 경종이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정치적, 의학적 정황 증거는 한둘이 아니었다.

정치적 정황 증거는 소론강경파와 경종비가 노론계인 연잉군 폐출을 계획하던 와중에 발생한 사건이란 점이었다.

의학적 견지의 정황 증거도 많았다. 그 하나가 게장과 생감이었다. 경종의 식욕이 부진하자 노론계인 대비와 연잉군이 게장을 진어하고 곧바로 생감을 올렸다. 그런데 게장과 생감은 의가(醫家)에서 꺼리는 상극이었다고 『경종실록』은 적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가슴이 조이듯이 아파왔던 것이다. 그 후 심각한 병세에 빠진 경종의 처방을 놓고 연잉군은 다시 어의와 다툰다. 연잉군이 인삼차를 올리려 하자 어의(御醫) 이공윤이 『자신이 쓴 강한 처방약과 인삼은 서로 상극』이라면서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나 연잉군은 어의 이공윤을 꾸짖어가며 인삼차를 연달아 세 번이나 올렸는데 그 직후 경종이 세상을 떴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양자 입적 문제, 의학적으로는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진어문제 등이 경종 독살설을 진실로 믿게 만들었다. 더구나 소론과 노론이 격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역안에 등재된 노론계 세제가 어의와 다투어가며 특별 처방을 고집한 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보아도 문제 있는 처신임에는 분명했다.

의혹의 당사자인 연잉군이 즉위하자 전국 각지에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벽서가 나붙었다. 심지어 군사 이천해란 인물은 즉위한 연잉군, 즉 영조가 능에 행차할 때 어가를 가로막으며 영조를 비난하고 나섰다. 영조는 이천해의 말을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며 사관에게 싣지 못하도록 명해서 실록에는 다만 「들을 수 없는 말(不忍之言)」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영조는 이천해는 물론 경종 시절 자신을 핍박했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사형에 처했으나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김일경과 목호룡은 영조가 『네 목을 베어 대행대왕(경종)의 빈전에 바치겠다』라고 꾸짖자 『나도 선왕(경종) 곁에 묻히기를 원하오』라며 반발했다. 경종의 충신은 영조가 아니라 자신들이란 뜻이었다.

급기야 영조 재위 4년에 소론 강경파가 경종의 복수를 내걸고 영남을 중심으로 군사를 일으켜 경종의 복수와 영조 정권 타도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군사는 조석으로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전군이 모여 곡을 했다. 영조의 정통성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했으나 재위 31년에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 투서사건으로 경종독살설은 다시 재연된다. 국문당하던 소론인사가 『나는 갑진년(경종이 사망하는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경종 독살설을 다시 꺼냈기 때문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정계에서 소외된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이 논쟁은 틈만 생기면 재연됐다. 경종 독살설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급기야 사도세자에게까지 여파를 남겨 조선 왕실사상 가장 큰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경종독살설의 한가운데 있던 인물이다. 영조는 비록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태생적 한계상 노론일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분명히 노론이 선택했기에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영조 당시에 논란이 되었던 「택군(擇君)」논쟁이 대표적이다. 영조는 즉위한 후 경종 때의 임인옥안에 자신이 역적으로 등재된 것에 부담을 갖고 이를 뒤집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영조는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노론과 함께 과거 음울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만약 경종의 양자를 들여 후사를 이으려던 소론 강경파의 계획이 성공했으면 그는 왕위는 커녕 사형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부왕과는 처지가 달랐다.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 어느 쪽에도 정치적 부채가 없었다. 사도세자가 보기에 부왕이 세제 시절 노론과 손잡고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것은 분명 역모로 볼 소지가 있었다. 영조와 노론처럼 경종 때의 행위는 숙종과 영조에 대한 충성이었다고 강변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위는 경종의 위치에서 볼 때 분명 역모에 가깝거나 역모였다.

사도세자는 노론에 불만을 느꼈다. 조선은 사실상 노론의 나라란 생각이 들었다. 부왕 영조가 힘겹게 이끌어오는 탕평책은 한계가 보였다. 부왕 자신이 경종 시절 노론에 부채를 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공격했던 소론에 증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조 31년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투서사건으로 영조의 탕평책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두 사건은 소론에 대한 영조의 자제심을 무너뜨렸고 노론은 이 기회를 이용해 소론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였다. 영조 또한 이에 동조해 두 사건을 역모로 처리한 후 그해 10월 『천의소감』이란 책을 편찬하는데 그 내용은 경종 시절부터 두 사건에 이르기까지 노론을 포함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경종독살설의 한 재료인 「게장」은 대비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방에서 올린 것이라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물론 이는 권력자의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편

사도세자는 소론이 연일 죽어나가는 두 사건의 와중에 노론의 사건확대책에 반대했다. 그는 되도록 두 사건을 온건히 처리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러한 처신이 노론의 결정적인 반감을 사게 된다. 부왕 영조가 분노하는 나주벽서사건에서조차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하는 것을 본 노론은 세자의 정치견해가 소론이란 결론을 내리고 세자 제거의 길로 나선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세자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데다 부인 혜빈 홍씨에게마저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극대화된다. 그의 부인 혜빈 홍씨는 누구 못지않은 노론 골수당원이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라고도 불리는 혜빈 홍씨의 친정은 유명한 노론 가문이었다. 그녀의 조상인 홍주원은 선조(宣祖)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난 정명공주의 부마였으니 당연히 서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은 자신의 딸 홍씨를 세자빈으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한 덕택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파격적인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딸이 세자빈이 된 후 김상로 등과 함께 집권당인 노론을 이끄는 실력자가 되었다. 사도세자가 노론으로 처신하든지 아니면 혜경궁 홍씨가 소론으로 처신했으면 최소한 뒤주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인적 기질에다 강한 성격을 지닌 사도세자가 소론의 처신을 보이며 노론과 대립하자 세자의 외척인 풍산 홍씨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세자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당론을 좇아 세자를 제거하느냐였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동생 홍인한은 물론 혜경궁 홍씨까지 세자를 버리기로 했다. 이처럼 세자의 외척까지 세자가 소론이란 이유로 제거의 길로 나서는 판에 여타 노론 중진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한로, 노론 영수 김상로, 홍계희, 윤급 같은 노론 중진 다수가 이에 가담했다.

사도세자는 안팎에서 고립됐다. 소조(小朝:세자궁)에서는 혜경궁 홍씨가 노론의 간자(間者) 역할을 했으며 대조(大朝:영조)에서는 정순왕후와 후궁 문씨가 세자를 헐뜯었다. 조정의 노론 대신들은 호시탐탐 세자를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런 포위 속에 위험을 느낀 세자는 자구책으로 병을 위장한다. 미행(微行)을 통해 허점을 보임으로써 노론의 예봉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세자의 자구책은 이런 소극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소론과 연합하는 적극적인 것도 포함돼 있었다. 세자는 우의정을 역임했던 소론 영수 조재호와 비밀리에 연합하는 데 성공한다.


노련한 정치인 혜경궁 홍씨

세자가 의문의 관서행에 나선 것도 소론과 결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평안감사 정휘량이 소론이자 사돈 사이였으므로 연합하려 했는데, 정휘량이 홍봉한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수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론에 세자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세자는 관서행을 계기로 자신을 제거하려는 노론의 공세를 신속한 기동력으로 막아낸다. 그러자 노론은 드디어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바로 나경언의 고변이다. 나경언의 고변은 주로 세자의 개인적 비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고변 전후의 사정으로 볼 때 그 핵심 내용은 개인적 비행이 아니라 군사 행동에 관한 내용으로 추측된다. 즉 세자가 군사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역모 고변의 성격을 띤 것이다.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지 29일 후인 영조 38년 윤5월13일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세자는 여드레 동안 뒤주 속에서 신음하다 죽었다. 세자가 죽던 날 영조는 『13일의 일은 종사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개인적 비행이라면 종사까지 들먹였을 리가 없다. 또한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주장한 대로 세자의 정신병 때문이라면 솜씨 있는 어의들을 동원해 치료하거나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휴양을 시켰지 뒤주에 가두어 죽일 이유는 더욱 없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노론의 정치공세에 희생되었다는 점은 세자와 연합한 소론 영수 조재호가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던 셋째 날 『조재호가 세자와 결탁했다』며 영조에게 고해 바친 인물은 다름아닌 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들은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한 정치적 의도를 읽지 못하고 그 내용을 전적인 사실로 받아들였기에 많은 오류를 범했다. 엄밀한 자료 해석과 검증 과정을 생략한 탓에 「영조의 이상 성격과 세자의 정신병 때문에 뒤주의 비극이 발생했다」는 홍씨의 의도적 변명에 말려든 것이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서술한 때는 뒤주의 비극이 발생한 영조 38년(1762) 직후가 아니라 순조 5년(1805) 이후다. 즉 이십 후반의 청상과부로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칠십대의 노회한 정객으로서 『한중록』을 서술했다는 말이다.

홍씨가 『한중록』을 서술한 목적은 단 하나 「친정을 신원시키기 위해서」였다. 홍씨의 친정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그날부터 급전 직하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이유는 바로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이란 이유에서였다. 실제 그녀의 오빠 홍낙임은 정조를 축출하고 은전군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련된다.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가 즉위한 후 그녀의 친정은 대리청정하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다시 한 번 단죄되었는데 그후 정순왕후 김씨가 죽자 비로소 가문의 신원에 나서서 『한중록』을 작성한 것이다. 「현실은 살아남은 자의 것」이란 경구를 입증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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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조선왕독살사건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왕독살사건으로 재판 인종에서 고종까지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의 임금들을 조명한 저서.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 서-제14대 선조,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소현세자, 사라진 북벌의 꿈-효종 등 조선조 9인의 임금과 세자 에게 뒤따라다닌 사인의 의혹과 진실을 파헤친 책.

목차
<누가 왕을 죽였는가> 개정판에 부쳐

1.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제12대 인종) - 이질 증세와 주다례
폐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서른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백돌아! 백돌아!
홀로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존하겠소
문제의 '주다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2.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제14대 선조) - 중풍과 찹쌀떡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주상의 뜻
어젯밤엔 편히 잤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문제의 찹쌀밥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사실처럼 굳어진 독살설

3.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소현세자) - 학질과 의관 이형익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볼모로 가는 두 형제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부정父情 아닌 부정否定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아담 샬과의 만남
비운의 귀국길
인조에게 쏠린 몇 가지 의혹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세자 일가의 비극
조선의 좌절, 세자의 좌절

4. 사라진 북벌의 꿈(제17대 효종) - 종기와 어의 신가귀의 산침
소현세자의 유산
용상에 가려진 효종의 아킬레스건
모든 것은 북벌로
효종의 딜레마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손을 떠는 어의 신가귀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5. 예송시대에 가려진 죽음(제18대 현종) - 복통과 뜸 치료
효종의 모후 자의대비과 입어야 할 복제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4가지 이유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예론을 금하노라
며느리상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의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6. 이복형제의 비극(제20대 경종) -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아이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두 모자의 운명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왕세제를 책봉하소서
경종의 진심
목호룡의 고변
적발하여 정법하라
게장, 생강 그리고 인삼차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

7. 개혁군주의 좌절(제22대 정조) - 홧병과 연훈방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3대 모역 사건
규장각과 장용영 그리고 화성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아서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훈방 처방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정순왕후의 세상

8.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제26대 고종) - 해외 망명 계획과 식혜
홍선군의 아들 명복
고종과 일본의 악연
국내의 혼란과 일본의 내정간섭
일본의 병탄과 고종의 대응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고종의 해외 망명 작전
마지막 군주의 최후
고종이 해외로 망명했다면

조선엔 왜 독살설이 많을까

[알라딘 제공]


책소개

"누가, 왜 조선의 왕들을 독살했나"

제12대 인종(1515-1545), 제14대 선조(1552-1608), 소현세자(1612-1645), 제17대 효종(1619-1659), 제18대 현종(1641-1674), 제20대 경종(1688-1724), 제22대 정조(1752-1800), 제26대 고종(1852-1919).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왕조에서 독살설에 휘말렸던 임금은 무려 8명이나 된다. 조선왕조가 배출한 왕이 27명인 것을 감안하면 조선은 지구상의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던 왕조였다.


누가, 왜 왕들을 죽였나.

실제로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에겐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는 꼭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했고,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독살설은 또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집중돼 있다.
왜 그럴까?

<사도세자의 고백>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등 숱한 대중적 역사서로 인기몰이를 한 바 있는 이덕일 숭실대 교수는 ''누가 왕을 죽였는가''의 개정증보판으로 내놓은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에서 흥미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 망했어야 할 조선왕조의 기형적인 정치행태 ''독살''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우선 역사가 ''너무'' 장구했다. 세계 역사상 대개의 왕조는 200~300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는데, 조선은 쇠퇴기ㆍ멸망기에 접어든 뒤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라는 것이다.

무릇 한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에서 시련을 극복 못하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야 하는데, 유독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돼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살아 있었다.

이덕일 교수는 조선왕조의 쇠퇴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본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일본의 침략에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을 두고 혼자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부터 조선의 사회체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지배 계급은 군림의 이유를 상실했다는 설명이다. 백성들이 국왕인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지른 행위는 사대부→일반백성→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제 자체를 부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는 사대부들의 권력 획득 방식 ''독살''

개국 초 조선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가리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 국가였다. 그러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포 납부로 군역 면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1488-1544)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포 납부로 군인 고용)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병역의무가 면제됐다.

저자는 "개국 후 200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미 생명 사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고 평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고, ''국왕 독살설''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중 하나다. 독살설이 유독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부터 본격적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약한 왕권(王權)과 명분 없는 신권(臣權)의 합작 ''독살''
 
조선 후기 들어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왕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닌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 신하들은 왕을 적당(敵黨)의 일원으로 봤다.

저자는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로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며 "오히려 끊임없이 신하들의 견제를 받는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임금은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으며, 신하들은 당론에 따라 얼마든지 특정 임금을 배척했다. 신하의 임금 선택을 ''택군(擇君)''이라고 하는데 국왕 독살설이야말로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의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반정(反正)이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 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저자는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독살"이라며 "독살설이야말로 왕조의 말기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 이후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프레시안 2005.07.29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이제서야 소감을 쓴다. 남들처럼 근사한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글솜씨도 없고 길게 쓰는 재주는 더더욱 없어서 미루고 미뤘는데 요즘 MBC 드라마 '이산 (정조)'를 보면서 그때 느꼈던 흥분을 다시 느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책장을 넘기면서 숨이 가쁠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서를 좋아해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시기에 마침 저 책을 읽은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조선왕 독살사건'이랑 '누가 왕을 죽였는가', 둘이 다른 책인 줄 알고 두 권을 다 골랐었는데 알고 보니 전자는 개정판이었다. 처음에 '누가 왕을 죽였는가'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그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좀 점잖게 고쳐서 재판했다.

특히 내가 흥분했던 부분은 인종, 경종, 정조 이야기다. 책 읽기 전부터도 조선의 왕 중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책 읽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숨을 씩씩 몰아쉬곤 했다. - 난 지금도 사극을 보거나, 인수대비나, 문정왕후, 선조, 인조, 정순왕후, 망할 놈의 노론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른다. 몇백년이나 된 일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화를 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ㅋ

불쌍한 정조대왕님.ㅜㅜ 
인생 참 험난하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죽었고, 외할아버지란 사람은 역적들이랑 짜고 사위랑 손자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고, 친할아버지 영조는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맨날 천날 충성심을 시험하질 않나...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의복을 갖추고 잠자리에 들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루 4시간 이상을 잔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을 잇는 천재군주, 만능군주,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대왕께서 그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 역사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ㅜㅜ

정조 사망시에 아니 정조 대왕 승하시에 그 옆에 정순왕후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책을 100% 믿기도 어렵지만 정순왕후 같은 여자면 능히 정조를 독살하고 남았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영조가 정조를 꽤나 아낀 걸로 나오는데... 만약 진짜 드라마 '이산' 같았다면 영조도 참 불쌍한 왕이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뒤늦게 후회를 하니 영조는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오죽 참담했으랴.


이 책은 조선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더욱 즐길 수 있다. 어릴 때 인상깊게 읽었던 왕후 간택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순왕후-_-;;는 알수록 망할 X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것이다.

아..  혈압올라.ㅠ 글쓰다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지네..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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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와 오늘 - 김인호 교수

출처: 우리 역사와 오늘

글: 김인호교수
펌: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227542

 


 

우리 역사와 오늘 | 김인호 - 교보문고

우리 역사와 오늘 | 역사에세이 제2권. 저자가 경성대학교 인터넷 교양게시판 디지탈 경성에 연재한 '역사와 오늘'이라는 칼럼을 바탕으로 하였다. 과거의 역사를 오늘날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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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수대비는 조선의 릴리스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하면 성종 임금의 어머니로서, 권력을 위해선 피도 눈물도 없었던 모사꾼 또는 청상과부가 된 그 광신적 히스테리에 못 이겨 며느리(연산군의 비 폐비 윤씨)마저 죽게 한 잔인한 여성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인수대비 한씨를 중국의 폭녀 여후(한고조 유방의 비)나 측천무후(당 고종의 비) 혹은 서태후(청 함풍제의 비) 등에 비교하기도 하고 그 패도와 악독한 성품에 대해 조롱한다.

그런데 그러한 한씨의 일화 속에는 현모양처를 강조하는 조선왕조의 유교적 여성관에서 배양된 또 하나의 우리나라 여성에 대한 왜곡된 역사의식이 담겨 있다. 유교적 '현모양처론'에서 본다면 당연히 한석봉의 어머니나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현모의 자애와 양처의 덕성을 두루 겸한 조선 왕조의 표준적 여인상일 것이다. 어쩌면 현모양처(賢母良妻)란 여성의 삶이 철저히 남자의 두 어깨에 달렸을 때 속편하고 싶은 남성들이 찾고자 한 이상적 여성상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그런 현모양처형 인성을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지아비(의경세자)의 죽음에서 비롯된 수많은 좌절과 비애를 전화위복(轉禍爲福)으로 바꾸면서 끝내 자식을 왕위에 올리고 태평 치세를 열게 한 정열적인 왕모(王母)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리고 언해문 간행은 물론이고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중국식 여성 예절 체계를 '조선화(朝鮮化)'한 <<내훈(內訓)>>을 통하여 조선 500년의 여성상의 밑그림을 그려낸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렇다고 인수대비 자신이 <<내훈>>이 바라는 여성형이었는지는 의문스럽다..

물론 자애롭고 덕성 있는 조선의 현모양처상을 고의로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고도 과연 이브는 현모양처였을까? 기원전 15세기 경에 조로아스터교의 천지창조 신화는 묘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즉 아담의 첫 번째 아내는 이름이 '릴리스'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남성 못지 않은 정열과 패기를 가진 용감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사냥과 전쟁을 좋아하고, 자식을 낳기 거절했으며, 그 때문에 남성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가부장적 헤브라이 신화에서는 순종하는 이브 모습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현모양처의 출발부터가 묘한 음모 같은 것이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전근대 세계의 여성들이 역사의 표면에 뛰쳐나오는 일은 무척 힘들고 고달픈 것이었다. 그래도 조선의 인수대비는 역사의 격랑에 몸을 맡긴 몇 안 되는 한국 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씨가 간 길이 역사의 발전 방향에 어느 정도 합치된다는 면에서 조선 최고의 여성으로 아낌없이 추천하는 것이다.

 


▶ 권력의 핵심을 관통했던 인수대비의 정치력

인수대비는 권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권력 추구의 열정은 그녀를 불과 20대의 나이에 조선 정국의 핵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그 발단이 바로 '석실능묘 사건'이었다. 예종 1년(1467년) 9월 어느 날 전직 세자빈 수빈 한씨가 임금 앞으로 난대 없이 주청서를 올렸다. 여기서 수빈 한씨는 예종에게 선대왕 세조의 봉분을 석실(石室: 돌방무덤)로 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던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돌리면...본래 세조는 귀족권을 견제하고, 백성의 살림을 증진하여 이것을 치국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조는 백성에게 많은 부담을 주는 능묘제도를 개혁하려고 했고, '석실 봉분을 만들지 말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세조의 개인적 염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조선왕조가 지향해야 할 위민을 통한 치국이념을 확고히 하려고 후왕들에게 유언한 것이다. 백성에 대한 애정 그것을 조선왕조의 영속을 가져올 요체로 생각했던 세조는 그렇게 유언했고, 그러한 선왕의 유언은 당시로선 곧 법이었고 거부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수빈은 '효'를 빙자하면서 신숙주, 한명회, 박원형 등과 더불어 석실 능묘 축조를 예종에게 강권한 것이었다. 그는 훈구세력의 그늘을 받으며 정계일선에서 왕을 핍박하는 정치적 배반을 시작한 것이었다.

권력의 핵심에서 배제되었던 수빈 한씨가 시동생 예종에게 감히 능묘 형식을 문제 삼았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수빈은 석실 봉분이 제왕의 능묘로서 품위가 있다는 이유를들었다. 하지만 그 것은 세조의 유업을 이으려는 예종 세력과 세조의 왕권주의에 반대한 훈구 세력이 권력의 향배를 놓고 치열하게 대치하는 정국에서 남편의 죽음으로 권력의 일선에서 배제된 수빈 한씨가 훈구 세력을 업고 권력 일선에 복귀하려는 하나의 거사(擧事)였던 것이다. 그러나 훈구세력을 등에 업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수대비가 연산군 같은 패권주의적 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일보후퇴일 뿐이었다.

훈구를 업고 왕권을 빼앗고, 다시 왕권을 통해 훈구를 제거한 희대의 정치가 과연 인수대비는 누구였을까?



▶ 훈구를 제거하라

본래 수빈 한씨는 예종의 형수로서 사가(私家)에 머무는 종실의 한 여성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뒤에는 강대한 훈구 귀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동안 예종은 왕권주의를 유지 계승하고자 젊고 새로운 인물을 조정에 대거 등용하여 훈구를 저지하는데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인륜과 분수를 강조하던 정치 풍토에서 장자(長子)의 부인이자 왕의 형수라는 위치는 훈구가 예종을 견제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수빈과 훈구가 손을 잡는 상황은 예종의 입장을 무척 난처하게 만들었고 두 사람간의 갈등은 증폭되고 있었다.

그러한 갈등은 김초 사건이나 허계지 아내 사건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먼저 김초 사건은 수빈의 아우이자 안동부사였던 한치의가 지체 낮은 가문 출신이었던 경상도 도사 김초에게서 강제로 첩을 빼앗고 능욕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허계지 사건은 수빈 거처에 빈번하게 드나들던 허계지의 아내가 수빈의 후원을 믿고 자기 범죄 사실을 인멸하고 형벌을 적게 받고자 뇌물을 쓴 사건이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수빈 한씨의 형제들은 예종에게서 심하게 견제를 받게 되었다. 물론 예종은 수빈 한씨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다른 종실의 인사청탁을 불허하면서도, 수빈 자손의 가자(加資, 과거 없이 관직을 제수하거나 매관하는 것)를 인정하는 등 유화책을 썼다.

그러나 결국 예종 세력은 강력한 훈구 세력의 지원을 받는 수빈 한씨를 당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이라는 여운을 남기면서 곧바로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제안대군)이 있었음에도 수빈 소생인 자을산군(성종)에게 왕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불과 열 두 살 남짓의 성종에게 왕위를 넘긴 것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권력욕이 개입된 것이지만, 결국 죽음을 앞둔 예종이 자기 아들이 닥칠 운명과 단종의 운명을 함께 머리에 떠올려 본 것은 아닌지.


▶ 인수대비는 시세 장악의 달인

수빈 한씨는 세조 집권 초반까지 시아버지 세조에게서 많은 총애를 입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는 수빈의 소생인 월산군, 자을산군에게 많은 토지와 농기구, 콩 등을 자주 하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처럼 총애를 입던 수빈은 결국 세조의 왕권주의와 다른 길을 가고 말았다. 그것은 남편 의경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수빈 세력은 와해될 위기에 처했고, 권력에서의 배제는 수빈은 자신의 운명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가부장적 유교적 가치관에서 볼 때 왕권에서 배제된 적손 자제가 천수를 다할 가능성은 적었던 것이다.

결국 수빈의 선택은 왕권주의에 저항한 훈구 세력 즉 한명회와 신숙주 등과 결탁하는 것. 이는 세조 말년 훈구와 신진 청년관료 간의 권력투쟁이 서릿발처럼 작열하는 속에서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과 한명회의 딸(공혜왕후)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최고조에 달했고, 그 결과 수빈은 한명회의 정치력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젊은 예종의 충직한 신료를 하나 둘 제거(남이의 옥사)하면서 세조의 유업을 좌절시키고 결국은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 결국 중전도 해보지 못한 그녀는 정치력만으로 대비로 전격 승차하여 왕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단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인수대비는 기왕의 한명회, 신숙주 세력을 배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꾀한다. 그리고 '윤비폐출사건'과 같이 기왕의 훈구 세력이 수세에 몰릴 때는 다시 훈구의 손을 들어 신흥 세력을 퇴출시켰고, 훈구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때는 다시 막강한 왕실의 권위로 훈구의 전횡을 저지했다. 한명회와 결탁이나 그 제거 과정은 그러한 시세와 정국의 변화에 달통한 인수대비의 탁월한 정치력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인수대비가 추구한 길은 절대주의였다. 그것은 인수대비의 엄격한 교육 아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일단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공신전을 폐하는 등 반 귀족정책도 동시에 수행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엽색 스캔들로 귀족의 반격을 받아 그러한 시도는 훗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인수대비의 처세는 패도(覇道)

인수대비는 며느리 윤씨를 죽이는 등 이른바 인륜 배반의 처세에 달통한 여인이었다. 그렇다면 유난히 인수대비에게만 인륜과 인정의 부족을 강조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과연 역사 속에서 인정이란 존재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역사 속에서 감정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개입된다.

물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나 대동법 실시와 같이 왕실 측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실시한 진보적인 민본정책도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반된 민심을 바로 하고, 왕조의 안정을 지속하기 위한 고도의 포석이었다. 그래서 한글이 나오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이 "한글 용비어천가"였고, "삼강행실도"였다. 또한 대동법도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불안한 재정기반을 일원화하여 국고를 늘여주었고, 삼정의 문란은 대동법 이후 더욱 격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인수대비의 처세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선 왕실, 취약한 왕실을 훈구 세력과 동맹을 통하여 구하고, 왕조의 안정적인 지속을 보장하려는 왕실 측의 처세였다. 개인적인 원한에 윤비를 폐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연산군 시대를 만들었고, 결국 절대화한 왕권의 역공으로 죽음에 이른 비범한 정치적 인물이었다.

꼭 진취적인 여성은 정치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는가를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 오랜 세월 온실의 화초처럼 보호받고 대상화된 성으로 버려진 이면에는 그들의 정치적 능력이 제거된 원인도 자리하고 있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이 배워야 할 진정한 조선의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 교수님의 생각이고... 

이 생각 나는 반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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