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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1(조선야사실록) 상세보기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펴냄
고 고우영 만화가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재출간된 장편 만화 『연산군』 제1권. 정사(正史)의 뒤안길에 숨겨진 또 하나의 역사인 야사(野史)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다. 신문에 연재되면서 광고 게재로 삭제된 부분과 기존에 출간된 책에서 검열된 부분을 복원하였다. 이 작품은 구어와 비속어를 거침없이 구사하고, 오늘의 갑갑한 현실과 역사에서 입증된 진리 사이를 거리낌없이 가로지른다. 또한 상식을 뒤엎고 편견을

2006년 4월25일 故고우영 화백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고인의 장편 만화 중 『오백년』4권과 『연산군』3권을 묶어 새롭게 『조선야사실록』7권 세트로 제작된 책이다. 연산군의 탄생부터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되 “폭군” 이미지에 치중하던 기존의 이야기와는 달리, 불우한 성장과정에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연산군의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정사보다 더욱 사실적인 야사를 만들어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만화가 고 고우영 작가님의 작품이라서 더욱 기대가 된다. 도서관 갈 때마다 고우영 작가님 작품이 있는지 살펴보아도 없더니..ㅠ  영화 <왕의 남자>와 비교하여 야사(野史) 특유의 감칠맛 나고 숨 막히는 전개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아마 고우영 작가님 특유의 성적 농담과 화끈한 묘사가 많이 나올 것 같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 연산군 중종과 그 신하들) 상세보기
김범 지음 | 역사비평사 펴냄
조선조 사화와 반정의 시대를 재조명하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는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정치 변혁의 시대에 펼쳐진 권력 투쟁을 살펴보는 책이다. 국가 체제를 완성한 성종, 그에 대한 반발과 균열을 보인 연산군, 다시 왕권을 둘러싼 체제 정비를 시도한 중종까지 3대 75년간의 정치 투쟁을 다루었다. 세 왕과 신하들의 권력 관계는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압축한 중요한 특징들을 지녔다. 저자는 세 왕이

이 책 내용에 대한 저자 김범의 자세한 설명 보러가기

이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책이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폭군의 멍에를 벗긴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지식산업사 펴냄
연산군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한 책. 성리학의 기준에 따라 연산군을 평가하는 기존의 평면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연산군을 힘의 논리에 따른 역사적, 이념적 희생자로 보았다. 연산군의 통치 전반을 종합적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 저자 소개 지은이_ 신동준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한겨레》기자. 서울대, 외국어대 강사. 21세기 정치연구소 소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살림 펴냄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말하는 통치 리더십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조선 역사에 묻는다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는 조선의 왕과 신하를 통해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된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조선이 패망한 근본 원인을 왕권이 미약하고 신권이 강한 '군약신강'의 왜


연산군에 대한 호의와, 그의 폭정을 신권과 왕권의 대립에서 보는 관점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인 것 같아서 뒤져보니, 역시.. 같은 저자였다. 역시 사람의 관점이 바뀌긴 쉽지 않나보다.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한명회의 신봉승 작가님이 연산군을 광인으로 보고 이와 반대로 드라마 왕과 비, 장녹수의 정하연 작가님이 연산군을 가엾게 보는 것처럼) 이 분은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도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상당히 구구절절히 펴시더니 이 책에서도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당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분 의견에 100%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연산군 초기에 왕권이 대폭 강화된 건 사실이니 작가의 주장 중 일부는 동의한다. 예전 사극에는 연산군 일기의 내용을 고대로 받아들여서 연산군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인 것으로 나왔지만
연산군이 처음부터 싸이코는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고도 그렇게 밖에 행동 못한 것은 100% 연산군의 책임이다. 이때는 왕권 강화고~ 신권 제압이고~ 이런 건 안중에 없고 이미 정신줄 완전히 놓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리뷰들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몇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중간의 흥미로운 부분만을 발췌했으므로 전체 서평을 보고 싶으면 링크를 눌러서 미디어 리뷰를 확인하시길.)


조선왕조 역사로 보는 `통치 리더십`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시대의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는 조선의 역사는 신하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는 신하들의 눈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봤다는 것. 저자는 실록에 명군으로 기록된 임금들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임금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들은 대부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개혁가들임을 강조한다.

그 예로 신 소장은 패도정치라 불리는 세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왕도와 패도는 적절히 섞어 사용해야하는데, 치세(治世) 시는 패도보다는 왕도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게 되고, 반대로 난세(亂世)의 경우 강력한 리더십을 요하기 때문에 패도 사용이 높게 된다""큰 틀에서 보면 세조가 패도를 구사한 것은 맞지만 시대적 상황(계유정난 등)이 그를 패도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한 저자는 조선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세도정치`를 꼬집고 있다.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정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초기에 비해, 신하가 왕을 바꾼 중종반정 이후, 신권이 왕권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다. 이로써 조선 중기와 후기로 와서 국가는 점점 쇠약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부국강병이 왕과 국가의 목표이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신권이 제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이명박 당선인에게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직면해 있기도 하다.


“조선왕조, 공자의 修身齊家 치중… 治平學에는 소홀”

“평화시에는 왕도정치가 필요하더라도 비상시에는 패도정치가 불가피한데 조선은 중화질서 아래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학문이 수제학으로만 치우치고 치평학의 전통을 망각했습니다. 특히 ‘경연’을 통해 주자학자로 키워진 조선의 국왕에게 이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BOOK책갈피] 조선은 신하들이 말아먹었다며?


역사 상식은 역사책에서만 얻는 게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재미있으라고 각색한 얘기를 그런가 보다 하며 정사로 받아들인다는 점. 이 때 사실과는 동떨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생겨나는 법이다.

영화 ‘왕의 남자’, 소설 『단종애사』(이광수)와 『금삼의 피』(박종화)가 좋은 예다. 세조와 연산군을 여지없이 폭군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신문기자 출신의 정치학자인 저자는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한다. 세조와 연산군 모두 신권(臣權)의 발호를 억누르려다 그 같은 오명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조카의 보위를 찬탈했다는 세조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산군도 사림 세력을 견제하려다 쿠데타로 실각한 비운의 군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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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BC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

 
-사진 태조-

(1) 태조~태종 :    추동궁 마마 (1983 / 태조 - 김무생, 태종 - 이정길, 원경왕후 - 김영란, 정도전 - 이호재)
(2) 세종 :             뿌리깊은 나무 (1984 / 세종 - 한인수, 양녕대군 - 송기윤, 소현왕후 - 김영애)
(3) 문종~연산군 : 설중매 (1984 / 세조 - 남성우, 성종 - 길용우, 연산군 - 임영규, 인수대비 - 고두심
                           장녹수 - 이미숙, 김종서 - 전운, 한명회 - 정진, 유자광 - 변희봉
                           폐비 윤씨 - 이기선, 김처선 - 박규채)
(4) 중종~명종 :    풍란 (1985 / 중종 - 최상훈, 조광조 - 유인촌, 문정왕후 - 김혜자, 정난정 - 김영란
                           경빈 박씨 - 박원숙)
(5) 선조 :             임진왜란 (1985 / 선조 - 현석, 이순신 - 김무생, 원균 - 신충식)
(6) 광해군 :          화천문 (1986 / 광해군 - 이희도, 개시 - 원미경, 인목대비 - 권재희)
(7) 인조~현종 :    남한산성 (1986 / 인조 - 유인촌, 임경업 - 최상훈, 최명길 - 변희봉)
(8) 숙종 :             인현왕후 (1988 / 숙종 - 강석우, 인현왕후 - 박순애, 장희빈 - 전인화, 숙빈 최씨 - 견미   리)
(9) 영조 :             한중록 (1988 / 영조 - 김성원, 사도세자 - 최수종, 혜경궁 홍씨 - 최명길,
                           정순왕후 - 김용선, 홍국영 - 김동현, 정후겸 - 선우재덕)
(10) 정조 :           파문 (1989 / 정조 - 김용건, 효의왕후 - 김청, 혜경궁 홍씨 - 고두심)
(11) 순조~고종 :   대원군 (1990 / 흥선 대원군 - 임동진, 고종 - 김홍석, 명성황후 - 김희애, 철종 - 최수종)


2. 왕실 역사
 
-사진 세종대왕-

(1) 태조~정종 :    개국 (1983 KBS / 태조 - 임동진, 정도전 - 김홍기)
(2) 태종~세종 :    대왕 세종 (2008 KBS  / 세종 - 김상경, 태종 - 김영철, 양녕대군 - 박상민,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이윤지, 어리 - 오연서)
(3) 문종~연산군 : 왕과 비 (1998 KBS / 세조 - 임동진, 성종 - 이진우, 연산군 - 안재모, 인수대비 - 채시라
                           단종 - 정태우, 장녹수 - 유니, 김종서 - 조경환, 한명회 - 최종원
                           폐비 윤씨 - 김성령, 김처선 - 김성환)
(4) 중종~명종 :    여인 천하 (2001 SBS / 중종 - 최종환, 문정왕후 - 전인화, 정난정 - 강수연,
                           경빈 박씨 - 도지원, 조광조 - 차광수)
(5) 선조~광해군 : 왕의 여자 (2003 SBS / 선조 - 임동진, 광해군 - 지성, 개시 - 박선영, 인목대비 - 홍수현)
(6) 인조~현종 :    대명 (1981 KBS / 효종 - 김홍기)
(7) 숙종 :             장희빈 (2002 KBS / 숙종 - 전광렬, 장희빈 - 김혜수, 인현왕후 - 박선영, 숙빈 최씨 - 박예진)
(8) 영조 :             대왕의 길 (1998 MBC / 영조 - 박근형, 사도세자 - 임호, 혜경궁 홍씨 - 홍리나,
                           정순왕후 - 이인혜, 숙빈 최씨 - 김영애)
(9) 영조 :             하늘아 하늘아 (1987 KBS / 영조 - 김성겸, 사도세자 - 정보석, 혜경궁 홍씨 - 하희라)
(10) 정조 :           이산 (2008 MBC / 정조 - 이서진, 영조 - 이순재, 혜경궁 홍씨 - 견미리,
                           효의왕후 - 박은혜, 정순왕후 - 김여진, 홍국영 - 한상진, 정후겸 - 조연우)
(11) 순조~고종찬란한 여명 (1996 KBS / 흥선 대원군 - 변희봉, 고종 - 조재현, 명성황후 - 하희라)


3. 인물로 보는 조선 역사

 
-사진 정조-

(1) 태조~세종 :    용의 눈물 (1997 KBS / 태조 - 김무생, 태종 - 유동근, 세종 - 안재모, 양녕대군 - 이민우,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도지원, 정도전 - 김홍기, 어리 - 유니)
(2) 문종~성종 :    한명회 (1994 KBS  / 세조 - 서인석, 한명회 - 이덕화, 문종 - 송승환, 단종 - 정태우
                           성종 - 박진성, 연산군 - 이민우, 폐비 윤씨 - 장서희, 김종서 - 임동진, 인수대비 - 김영란)
(3) 연산군 :          장녹수 (1995 KBS / 연산군 - 유동근, 장녹수 - 박지영, 인수대비 - 반효정)
(4) 중종~명종 :    조광조 (1995 KBS / 중종 - 이진우, 조광조 - 유동근, 문정왕후 - 김민정, 경빈박씨 - 김성령)
(5) 선조 :             불멸의 이순신 (2004 KBS / 선조 - 최철호, 이순신 - 김명민, 원균 - 최재성)
(6) 광해군~현종 : 서궁 (1996 KBS / 광해군 - 김규철, 개시 - 이영애, 인목대비 - 이보희)
(7) 숙종 :             장희빈 (1995 SBS / 숙종 - 임호, 장희빈 - 정선경, 인현왕후 - 김원희, 숙빈 최씨 - 남주희)
(8) 영조 :             홍국영 (2001 MBC / 영조 - 최불암, 홍국영 - 김상경, 정후겸 - 정웅인,
                           정순왕후 - 염현희, 혜경궁 홍씨 - 이상숙)
(9) 정조 :             왕도 (1991 KBS / 정조 - 강석우, 홍국영 - 김영철, 효의왕후 - 박순애, 정순왕후 - 김자옥
                           혜경궁 홍씨 - 정영숙)
(10) 정조 :           소설 목민심서 (2000 KBS / 정조 - 김홍기, 정약용 - 이진우)
(11) 순조~고종명성황후 (2001 KBS / 흥선 대원군 - 유동근, 고종 - 이진우, 명성황후 - 이미연 & 최명길)


PS 1. 픽션이 과도한 작품은 피했습니다.
         예를 들면, "왕과 나" (성종~연산군?), "대장금" (중종), "한성별곡" (정조) 등등..
PS 2. 인물의 일대기라도 왕실 역사가 주가 되는 작품 안에서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천둥소리" (광해군), "어사 박문수" (영조), "태양인 이제마" (철종, 고종) 등등은 제외.


출처:
엠파스 지식인
원 출처는 정확히 기재되어 있아 링크 안됨.(디비디프라임 ALEX작성자님 http://dvdprime.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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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로 보는 연산군(燕山君)의 생애(生涯)


이 분의 블로그에 스크랩글이 많아서 이 글도 이 분이 원본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내가 찾은 곳들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글이므로 이 글을 원본 출처로 링크시켰다. 대부분의 연산군 기록이 그렇듯이 이 글 역시 야사의 기록을 실록과 섞어넣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야사서나 실록의 일부분은 내가 찾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직접 링크를 시켰으며, 연대 또한 틀린 점이 많아서 실록에 맞게 수정 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정확히 남아 확인 가능한 부분은 실록에 링크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고전번역원의 야사서에 링크했다. 앞으로도 조금씩 실제 기록을 찾아서 링크시킬 예정이다.



1476년 성종 7년 (1세)

11월 7일 삼경 오점(0시), 조선왕조 9대 임금 성종(成宗)과 후궁에서 중전이 된 윤씨(尹氏) 사이의 적장자로 탄생. 아이때 부르는 임금은 무작금(無作金). 이름은 융.

성종은 첫 중전이었던 공혜왕후(恭惠王后) 한(韓)씨를 여읜 후 후궁들의 투총 속에서 숙의(淑儀) 윤씨를 중전으로 맞아, 우여곡절 끝에 연산군을 얻었다. 성종의 이때 나이 19세. 보위에 오른 후 이해 봄까지 대왕대비(大王大妃)인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喜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있었고, 예종비(睿宗妃)인 안순왕후(安順王后)가 왕대비(王大妃)로,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있어 정사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특히 인수대비 한씨는, 세조의 세자빈으로서 다음 대의 중전이 될 막강한 자리에 있다가, 세자(德宗으로 추존)가 죽고 그 아우 예종이 보위에 오르자 궐 밖으로 나가 수빈(粹嬪)으로 지낸 뒤,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자 다시 궁 안으로 들어와 아직 어린 성종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477년 성종 8년(2세)

2월 21일. 연산군이 창진(瘡疹)인 듯한 병을 앓자 성종은 종묘(宗廟)·사직(社稷)·목멱산 등에 기도를 드리도록 명했다.  여기서 병의 차도가 없자, 이조판서 강희맹(姜希孟)의 집에 피병(避病)을 갔다. 이때 원자의 피병지가 된 이조판서 강희맹의 집은 명문(名門)인 데다 그의 아내 안(安)씨는 효와 덕으로 알려진 부인이었다. 원자가 실꾸러미를 삼켜 목숨이 위험했을 때 안씨 부인이 구해 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또 원자가 강희맹의 집 정원 소나무 밑에서 놀곤 했었는데 뒷날 왕위에 오른 후 그 소나무에 벼슬을 내렸다. 금띠를 소나무에 둘러 주고,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말에서 내리게 했는데, 그 문의 이름을 피마병문(避馬屛門)이라고 하기도 했다.

3월 14일. 중전 윤씨가 친잠례(親蠶禮)를 행하는 날인데, 이 날 윤씨는 나인을 시켜 자신을 투기하고 성종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후궁을 제거하기 위해 비상(砒霜)과 방양서(方穰書)를 가져오게 했다. 윤씨의 나인 삼월이는 윤씨 일문과 짜고 투서로써 후궁들이 중전과 원자를 해치고 있다고 소문내게 하고, 비상과 방양서를 구해 준다. 비상 바른 곶감과 굿하는 방법이 적힌 방양서를 중전의 침실에서 발견한 성종이 격노하고 이를 안 삼대비 역시 대노하여 윤씨는 폐출 위기까지 몰린다.

3월 29일. 삼대비의 후원을 받은 성종이 중전 폐출을 명했다. 이때 윤씨는 수빈(壽嬪)으로 강등되고 자수궁(慈壽宮)으로 쫓겨갈 위기에서 승지(承旨) 임사홍(任仕洪) 등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복위된다. 그러나 이 날 이후 윤씨는 말만 중전일 뿐이지 성종과 삼대비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받게 된다. 특히 성종은 아예 중전을 무시하고 생일날에도 연회를 열지 못하게 했으며 원자도 만날 수 없도록 한다. 자신은 다른 후궁들과 시첩의 방만 찾으니 윤씨와의 불화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1479년 성종 10년 (4세)

6월 1일. 원자의 모후 윤씨의 생일이었는데, 연 3년째, 이때도 성종은 하례(賀禮)를 정지하게 했다. 저녁에 성종이 시첩의 방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윤씨가 그 방으로 뛰어든다. 여기서 윤씨는 성종의 얼굴에 상채기를 내는 정도의 대사건을 저지른다.

6월 2일. 마침내 윤씨 폐위를 결정하고 사저로 내쳤다. 윤씨가 궁에 든지 6년이고 곤위에 오른지 4년이었다. 처음엔 윤씨 어머니 신(申)씨와 함께 사는 것만 허락하였다가 뒤에 오라비 삼형제의 출입까지 허락하였다.

이 무렵 원자가 피병을 마치고 환궁한 것으로 보인다.

1480년 성종 11년 (5세)

11월 8일, 윤호(尹壕)의 딸로서 숙의가 되어 있던 윤씨가 중전으로 정식 책봉된다. 이럴 무렵 사저로 내쳐진 윤씨 일문에서 거듭 복위의 꿈을 버리지 않고 여러 가지 행동을 꾸며댄다. 폐비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문, 폐비가 문 밖 출입을 하고 있다는 소문 등이 나돌아, 성종과 삼대비는 여러 번 행실을 조심하라는 언문을 내린다. 윤씨 삼형제를 하옥시키기도 했다.

1482년 성종 13년 (7세)

8월 16일. 마침내 윤씨에게 사사(賜死)를 명했다. 좌승지 이세좌(李世佐)·내관 조진(曺疹) 등이 명을 받들었다. 이때의 사약이 비상이었다. 윤씨 삼형제는 각각 외방에 유배되고, 신씨는 폐비를 건원릉(建元陵) 가는 길에 염장한 뒤 큰아들 구의 유배지 장흥(長興)으로 유배된다. 건원릉은 태조 이성계의 능침이다.

폐비 윤씨 사사에 얽힌 많은 일화 중에, 좌승지 이세좌의 경우를 소개한다. 윤씨의 염장까지 지켜보고 오라는 어명을 행하고 이튿날 늦게서야 집에 돌아온 이세좌에게 부인이 물었다. "조정에서 계속해서 폐비의 죄를 논한다고 하던데 어찌될 것 같습니까?" 이에 세좌는 풀이 죽어 대답했다. "지금 내가 어명을 받들어 사약을 내리고 오는 길입니다." 부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 보복하지 않겠는가. 조정에서 장차 원자를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거조(擧措)를 하는 것입니까!" 하며 통곡했다. 뒷날 폐비 사사에 관련된 자가 모두 화를 입게 되는데 이세좌도 그의 아들과 함께 죽게 된다.

1483년 성종 14년 (8세)

2월 6일.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당대의 정승·학자들이 세자 사부(師傅)·빈객(賓客)이 되어 세자의 학업을 돕는다.

허침(許琛)과 조지서(趙之瑞)는 연산군 세자 시절 각각 필선(弼善)과 보덕(輔德)으로 있었던 사람들이다. 강(講)의 방법이 허침은 부드러워 어린 세자를 융통성있게 가르쳤고 조지서는 강직해서 일체의 나태함도 용서하지 않았다. 세자는 이를 두고 [趙之瑞大小人也 許琛大聖人也]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뒷날 갑자년(甲子年)사화 때 조지서는 베임을 당하고 , 허침은 여러 사람을 구했으나 그 역시 울화로 피를 토하다가 죽고 만다.

3월 30일. 세조비 정희왕후가 죽었다. 성종은 정희왕후 등 삼대비를 편히 모시기 위해 창경궁(昌慶宮)을 새로 짓고, 연회도 자주 열었다. 뒷날 연산군이 주색에 빠지게 된 것이 어릴 때부터 연락(宴樂)과 가까웠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정희왕후가 죽은 다음해 완공된 창경궁은 연산군의 환락의 놀이터가 된다. 기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풍월정(風月亭)은 월산대군의 처 박씨를 찾아 범하게 하는 불륜의 연회장이 되기도 하고, 임사홍의 아들 풍원위(風原尉) 임숭재(任崇載)의 풍광 좋은 집,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 등은 연산군의 잦은 연회지로 제공되어야 했다.

1487년 성종 18년 (12세)

3월 1일. 병조판서 신승선(愼承善)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혼인 때 아침부터 비바람이 일어 모두들 언짢게 여기고 있는데, 성종이 신승선의 집에 어서를 내렸다. [세상의 풍속은 혼인날에 바람이불고 비 오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나 대개 바람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고 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하니 만물이 사는 것은 모두 바람과 비의 공덕이라.] 어서를 내리고 나자 오후부터 비가 개어 무사히 혼례를 마칠 수 있었다. 세자빈 신씨에게는 수근(守勤)·수영(守英)·수겸(守謙) 세 오라비가 있었는데, 아버지 신승선은 성종조에 영의정까지 오르고, 세 오라비는 연산조에 각각 좌의정, 형조판서, 개성 유수를 지내게 된다. 그 세도 부림이 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연산군이 축출될 때 신씨 일문 또한 큰 화를 입는다.

1489년 성종 20년(14세)

5월 20일. 7년 동안 방치해 두었던 폐비 윤씨의 무덤을 <윤씨의 묘>라 칭하고 속절(俗節)에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고는 백 년 뒤에도 명을 고치지 못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윤씨일가가 모두 유배 중이라, 속절이 되어도 제사 지내는 이 없어 연산군 2년 무렵에 가면 윤씨 묘는 허물어질 형국이 되어있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행적 기록은 그다지 많은편이 아니다. 그중 연려실기술의 것을 소개한다.

일찍이 성종이 사향사슴 한 마리를 길렀는데 길이 잘 들어서 항상 곁에 따라다녔다. 어느날 세자가 성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 사슴이 와서 세자를 핥았다. 세자가 발로 사슴을 차니 성종이 불쾌해서 [사람이 좋아 따르는 짐승을 너는 어찌 잔인스럽게 대하느냐!]고 소리쳤다. 뒷날 연산군은 이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

1494년 성종 25년 (19세)

12월 24일. 성종 승하했다. 29일 연산군이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니 조선왕조 10대 임금이다. 임금이 되자마자 연산군은 성종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재(水陸齎)를 올릴 것을 명한다. 불가에서 물, 뭍의 여러 귀신들에게 음식을 차려 올리며 경을 읽는 행사가 수륙재라 성종 밑에서 숭유(崇儒)를 행해온 삼사(三司)에서 반대하고 나선다. 연산군이 이를 묵살하고 재를 강행함으로써 유림이 들고 일어났고, 연산군은 이에 귀양형·장형 등으로 맞섰다.

1495년 연산군 1년 (20세)

3월 16일.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보고 처음으로 자신의 친모가 죄를 짓고, 폐위되어 죽은 것을 안다.
4월 11일, 폐비· 사사· 묘 이름 정할 때의 사실을 모두 알게 된다.
9월 20일, 안치된 폐비 윤씨 어머니 신씨와 윤씨 삼형제를 풀어 주었다.

1496년 연산군 2년 (21세)

윤 3월 13일. 내시를 시켜 폐비 묘를 살펴 보게 하니 [묘소가 무너진 채 여러 해를 수축하지 않아 장차 해골이 나와 여우와 삵에게 먹힐 지경이다]하여 천장(遷葬)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는 성종의 유교를 저버리는 일이라 하여 삼사의 관원·유림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친다.

1497년 연산군 3년 (22세)

4월 9일. 폐비의 묘가 이장되고 신주와 사당이 세워져 그 이름이 효사묘(孝思墓)·회묘(懷墓)로 붙여진 이날까지 반대 상소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만큼 많았다. 여기에 대간들의 미움을 받아 여러 차례 귀양길에 들었던 임사홍을 그 아들 임숭재와 가까웠던 까닭에 중용코자 했으나 또 유림의 세력과 부딪친다.

12월 18일. 원자 황(惶)을 낳자, 사면· 복직령을 내리는데 임사홍의 직급이 따라서 높아졌다. 이무렵 성종 때 탄핵을 받아 중책에 쓸 수 없도록 하명한 바 있는 유자광(柳子光)도 모친상을 마치고 돌아와 충훈부(忠勳部)에 속해 있었다.

1498년 연산군 4년 (23세)

7월 11일.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시작이다. 성종실록 편찬시 성종 때 사관이던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서 세조의 왕위 찬탈, 세조의 불륜 행각과 소릉(단종 어머니의 묘) 복구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초되어 김일손이 붙잡혀 옴으로 피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에 검열된 몇 개의 사초에서 그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고 특히 영남학파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조義帝文)이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사초와 관련있는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조종(祖宗)을 멸시한 대역죄로 몰리게 되었다.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한(漢)의 유방(劉邦)이 초(楚)의 회왕(懷王)을 친 것에 비유한 글이다. 여기에 또한 김일손의 사초에 [정희왕후의 국상 중에 이극돈(李克墩)이 장흥 관기(官妓)를 가까이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좌찬성으로서 실록청 당상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관여하고 있던 이극돈이 이 사실을 접하고 격노하여 그 부분을 삭제코자 함으로써 실록 편찬의 낭청(郎廳)이던 이목(李穆)·권경유(權景裕) 등의 미움을 사는 등 김일손의 사초는 대사건의 불씨가 될 소지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또한 유자광은 사적으로 김종직과 그 제자들에게 멸시받아온 처지인데가 이극돈의 비밀까지 알고 있어 여러모로 권위 회복의 일대 전기를 마련할 시기였다.

연산군은 유자광·윤필상(尹弼商) 등으로부터 사초에 관한 모든 일을 전해 듣고 이때를 신진사류의 기세를 꺾는 최적기로 생각한 듯하다. 죽은 김종직으로부터 그의 제자 김일손·이목·권경유·성중엄(成重奄)·강경서(姜景敍)·이수공(李守恭)·강겸(姜謙)·임희재(任熙載)·허반(許磐) 들은 항상 자신에게 반대만 해온 새파란 말단관리나 신진관리들, 아니면 현실을 모르고 명분만 따진 유생 출신들이었다. 이들을 제거하는 일이 연산군으로서는 더 없이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일에 관련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난 것이지 결코 그 원인이 이극돈의 사감, 유자광의 사감, 연산군의 병적인 폭정 등 단순한 말로써 설명될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7월 26일. 김종직 부관참시,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능지처사, 이목·강겸·허반 등의 주살이 명해졌다. 이어 김종직의 불온 서책, 문제의 사초들을 모두 불태우는 것 등과 이 7월의 사건에 격분하고 모의하던 어린 유생, 즉 유학(幼學) 10여명까지 뒤이어 처형되는 것 등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된다.

이에 반해 유자광·윤필상 등은 연산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으니 무오년에 훈신들에 의해 신진사류가 화를 입었다 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도 하고, 사초가 발단되어 일어난 것이라 하여 무오사화(史禍)라 하기도 한다.

뒷날 사관들은 성종 9년(1478년) 무술년에 유자광· 임사홍이 유배된 일과 이 무오사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무술의 옥은 정류(正類)가 사당(邪黨)을 다스린 것이요, 무오사화는 사당이 정류를 모함한 것이다.]

한편 이때 사호의 여파로 유배길에오르는 임사홍의 둘째아들 임희재는 다음과 같은 시로써 연산군의 폭정을 비난하여 후일 시가 연산군에게 보여져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한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
  재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연산군의 광포한 기질은 무오사화 때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갖가지 고문과 형벌도 이때부터 다양화되어 도적의 무리가 전국에서 창궐하던 연산군 6년을 거쳐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까지 가면 극에 달한다.

12월 23일. 인혜왕대비(예종비) 안순왕후 한씨가 승하했다.

1499년 연산군 5년 (24세)

1월. 원자 황이 천연두를 앓는다. 월산대군의 집에 피병을 간 듯하다.
2월. 무오사화를 전후해서 특진관(特進官)으로서 연산군과 가까이지내며 도총관(都總官)으로 병권을 흔들던 유자광이 뇌물사건과 관련, 탄핵받아 물러난다.

3월. 편찬 과정에서 사화를 불러일으켰던 성종실록이 완성되었다.

5월. 월산대군의 처 박(朴)씨에게 콩 50석 등을 주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인데 풍류를 좋아했다. 풍월정이 그의 집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연회하는 일이 잦았다. 월산대군은 이미 성종 19년(1488년), 연산군 13세 때 죽었고 그 처 박씨가 후사도 없이 혼자 있으면서 피병 온 원자를 간병했다. 전부터 탐할 뜻이 있던 연산군이 박씨를 처음 범한 것이 이 무렵인 듯하다.

이후, 연산군이 박씨를 위하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준다. 재물을 내리고 박씨 동생 박원종(朴元宗)에게도 많은 혜택을 주었다. 대간들이 이를 두고 끈질기게 반대 상소를 올리지만 듣지 않는다. 원자의 피병지가 월산대군의 집이었다는 사실 또한 주목거리다.

연산군의 탐욕 생활이 이때부터 극성스러워진 듯하다.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 연산군에는 숙부가 되는 제안대군(齊安大君) 등이 연산군의 탐욕을 채워주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궐 안의 정자는 연산군의 주연, 기녀들의 알몸놀이장이 되었다.

1500년 연산군 6년 (25세)

1월. 자순대비(慈順大妃)의 장자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신수근의 딸과 혼인하여 사저로 출합(出閤)했다.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에 의해 진성대군이 보호된 셈이다.

이 해 문경 새재 부근에서 도적 홍길동(洪吉童)의 무리가 창궐했다. 6월 21일, 홍길동이 잡히지만, 이후 오랜 세월 홍길동은 도적의 세계에서 신화적인 인물로 기록된다.

1501년 연산군 7년 (26세)

7월.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 어무적(魚無跡)이 시국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어무적은 부(賦)에 뛰어난 문학가였지만 서얼이라 천대받았다. 백성들이 핍박받는 내용의 부를 썼다가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의 글 몇 편이 남아 전해온다.

이 해쯤 연산군은 제안대군 사저의 가비(家婢)였던 장녹수(張綠水)를 궁에 받아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품계를 뛰어넘어 녹수는 내명부의 높은 지위의 후궁이 되어 갖은 세도를 부린다. 이미 색에 눈이 먼 연산군은 장녹수가 행하는 모든 뇌물 사건을 덮어주고 원하는 집은 아무 집이나 장녹수에게 주었다.

1502년 연산군 8년 (27세)

원자 황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까지 황은 월산대군 저에 있다가 돌아온다.

1503년 연산군 9년 (28세)

연산군에게는 약간의 자폐증세(自斃症勢)가 있었던 듯싶다. 창덕궁 후원에서 갖가지 기이한 연회를 벌이다가 궐밖의 가까이 있는 집을 모두 허물게 했고, 도성 밖 인가를 백리 바끙로 내쫓고 그곳을 사냥터로, 연회장으로 활용하는 등 백성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했고, 오직 알몸의 여인들만 옆에 두려 했다. 이때 없어졌다 후에 다시 생긴 고을이 양주(楊州)·파주(坡州)·고양(高陽) 등이다.

내시들이 따라와 바른 소리를 간하는 것이 듣기 싫어 <신언패(愼言牌)>를 목에 걸게도 했다. 신언패의 글은 이렇다.

  口是禍之門   입은 재화를 부르는 문
  舌是斬身刀   혀는 목을 베이는 칼

  연산군 말년에는 중신들도 이 신언패를 차야 했다.

1504년 연산군 10년 (29세)

전국에서 이름난 기생들을 모두 뽑아 궁에 두었으니 궁은 기녀들의 세상이었다. 중신들의 부인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그 중 미모가 나은 부인을 범하기도 했다. 미인을 구하는 일은 임사홍 부자가 주로 담당했는데 그 때문에 대간들의 탄핵 상소에도 불구하고 임사홍 부자는 옛 직위를 회복하여 연산군의 측근에 있게 된다.

3월 20일, 연산군이 임사홍 부자의 도움으로 폐비 윤씨의 생모 신씨를 만나 폐비 때의 일을 얘기듣는다. 다음날 새벽, 폐비 사건 당시 성종의 후궁이었던 정귀인·엄귀인의 투총과 크게 관련이 있었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두 여인을 잡아들여 그 아들들을 시켜 때려 죽이게 했다. 이어 연산군은 몸이 편치 않은 인수대왕대비에게로 달려가 폐비의 일을 격렬하게 항의했다. 연산군의 머리에 받혀 쓰러진 인수대왕대비는 그로부터 한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폐비 사사(賜死)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들추어 처벌하고, 이미 무오사화 때 귀양간 사람들까지 주살당하고, 그 이전에 죽은 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 등도 폐비 사사 때 반대하지 않았다 해서 부관참시 당하는 이 사건. 이것이 갑자사화(甲子士禍)다. 이공으로 임사홍은 병조판서가 되어 막강한 세도를 부린다.

1505년 연산군 11년 (30세)

4월 1일. 내시 김처선(金處善)이 연산군의 추태를 보지 못하고 간하다가 어전에서 연산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김처선은 내시로서 정 2품 벼슬에 있었다. 연산군에게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알지만 주상전하 같으신 분은 처음 보겠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화가 나서 활로 김처선의 갈빗대를 맞혔으나 김처선은 "신은 죽음을 두려워 않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보위에 오래 머물지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했다.

또 연산군의 화살이 몸에 맞아 무릎을 꿇자 연산군이 "일어나 걸어라 이놈!" 했다. "주상전하께선 다리가 부러져도 일어나 다니실 수 있겠습니까?" 라고 김처선이 말하자 연산이 그 혀를 끊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게 했다. 시체를 범에게 주고 <處>자를 못 쓰도록 명했다. 김처선의 아들 이공신(李公信)도 죽이고 가산을 적몰했다.

1506년 연산군 12년· 중종 1년 (31세)

7월 1일. 월산대군 처 박씨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되었으므로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 아우 박원종이 이 무렵 거사를 결심한 듯하다.

여름, 가을 도적의 무리가 창궐하고 귀양간 사람들마저 무리를 이루어 화적떼가 되는 등 해서 도성을 치려 했다. 그 중 대표되는 이가 이장곤(李長坤)이었는데, 이 무리가 클 것이라는 풍문이 있었고, 연산군마저 이장곤에 대한 시를 쓸 정도였다.

9월 1일. 성희안(成希顔)·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보위에 올리는 것을 주골자로 하는 거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며칠 전 연산군은 자신의 종말을 예감이라도 한 듯 [인생은 초로(草露)와 같은 것,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이라는 말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민심이 이미 기울어진 때라 박원종·성희안·신윤무(辛允武)·유순정(柳順汀)·홍경주(洪景舟)·김감(金勘) 등의 혁명 주체 세력들의 움직임은 가는 곳마다 막힘이 없었다.

임사홍이 이름도 없는 민중들의 발길에 죽었고 (임숭재는 그 전에 병으로 죽었다) 신수근 형제와 연산군에게 총애받던 궁녀들의 가인(家人)들도 무차별 참수되었다. 연산군도 옥새를 내놓았고, 진성대군은 그의 어머니 자순대비의 재가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뒤늦게 혁명 세력에 동조한 유순(柳洵)이 영의정이 되었고, 좌이정도 역시 연산군 시절 우의정을 지내면서 많은 살상을 막아왔고 거사 당시에도 다른 뜻 없이 인명 피해를 막는데 더 힘쓴 김수동(金壽童)이 되었으며, 거사의 핵심 박원종이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유자광은 거사 세력에 붙어 반정 1등공신이 되어 마지막 세도를 누렸다.

연산군은 처음에 동궁(東宮)으로 밀려났다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쫓겨나고, 신씨 또한 폐비의 몸이 되어 정청궁(貞淸宮)으로, 폐세자된 황은 강원도 정선으로 각각 쫓겨났다. 진성대군 시절 신수근의 딸인 부인 신씨 덕으로 살아남아 보위에까지 오른 중종은 그 부인이 역신의 딸이라는 이유로 정식 중전 책봉을 하지 않은 채로 폐비시키고 새 중전을 맞아야 했는데, 그 폐비 신씨가 죽을 때까지 중종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살다 간 자리엔 <치마바위>의 이야기가 남아 전하고 있다.

9월 3일. 폐위된 왕을 연산군(燕山君)으로 봉했다.

9월 10일. 중종은 연산군의 재위 시절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연산군의 자제 시집(自製詩集)을 불태우게 했다. 연산군은 임사홍 등으로 하여금 어제시집 간행 도감을 설치했고, 도승지 강혼(姜渾) 등으로 하여금 시를 쓸 때마다 화답하게 하는 등으로 시작에 관심이 많았는데 반정 후 그에 대한 많은 기록과 시들이 불태워져, 간신히 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서만 그의 시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

11월 8일.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된 연산군은 역질에 걸려 중종이 보낸 약을 여러 차례 복용하다가 6일 하직했다. 중종은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장사지내게 했고, 연산군을 수발했던 수행시녀는 3년간, 수행한 방자들에게는 백일 간 상복을 입게 했고, 중종 자신은 3일동안 소선(素膳)을 들었고 경연을 정지했다.

왕조실록에는 강화 교동에서 장사를 치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연산군의 무덤으 그의 아내 신씨의 무덤과 함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해 있다. <燕山君之墓>라고 새겨진 비면 뒤에는 <正德 八年 二月二十日葬>이라 씌어 있다. 정덕 8년이면 1513년이니까, 연산군이 죽은 지 7년만에 이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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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폐비는 폐비 윤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때문에 한꺼번에 폐출당한 고모와 조카: 폐비 신씨, 단경왕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이긴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쫓겨난 중전은 몇 명 더 있었습니다. 

먼저 미친 남편 연산군과 혼인하는 바람에 조용히 살다가 날벼락 맞은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廢妃 愼氏, 거창군 부인. 1472년~1537년)는 연산군의 정비(正妃)로 신승선과 임영대군의 딸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거창.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의 고모입니다.

연산군과 폐비 신씨(거창군 부인)


단경왕후의
아버지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으로 연산군의 처남이었고 할아버지는 당대의 명신이었던 거창부원군 신승선으로 연산군의 장인이기도 했으며 고모는 바로 연산군의 비(妃)로 그녀의 친정 거창 신씨 가문은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문 배경이 그녀의 인생 전반에 걸쳐 막대한 불행을 안겨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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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는 자기가 폐비 윤씨(제헌왕후)와 연산군에게 한 짓이 무서웠는지 아니면 손자 융(연산군)의 광기를 일찌감치 알아보았기 때문인지 몰라서 신수근의 딸을 진성대군(훗날 중종)의 처로 삼아줍니다. 그녀가 바로 단경왕후입니다. 연산군이 처가하고는 잘 지냈으므로 설마 자기 부인의 조카를 과부로 만들지는 않으리라 예상한 것이지요. 연산군이 완전 싸이코에 가까웠음에도 자신의 가까운 사람과는 살갑게 잘 지냈다는 이런 기록들을 보면 그의 광기는 인수대비한테서 키워진 건 분명한 듯 합니다. 그의 행실을 보면 성군감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적어도 폭군은 안됐을 것 같거든요.

어쨋든 인수대비의 전략은 적절했고, 진성대군은 갑자사화의 피바람 속에서도 목숨을 건집니다. 근데 역사가 참 재미있습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은 중종 반정을 도모하는 패거리들에게 '왕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영특하므로 세자를 믿어보자'고 하며 반정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처가와는 잘 지냈던 연산군에 대한 의리때문일수도 있고, 임금의 처남이 되든, 새 임금(중종)의 장인이 되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괜히 실패할지도 모르는 역적 모의을 일으켜서 자기 집안을 다치게 하기 싫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습니다.


그의 바램과는 달리 중종 반정은 성공했고, 아버지
신수근의 선택으로 그 불똥은 엉뚱하게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에게 떨어집니다. 신수근이 참 불쌍하죠? 만약 찬성했으면 현재 중전인 자기 여동생은 쫓겨나더라도 자기 딸과 집안은 살렸을텐데... 연산군이 쫓겨나는 바람에 여동생도 폐비돼, 자기 집안도 망해, 딸도 반정 성공으로 국모의 자리에 오른지 7일 만에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서인이 되니 말입니다. 반대로 반정공신들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획득하여 왕도 부럽지 않게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았거든요.

반정공신들도 웃긴 넘들이죠. 만약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가 아니었더라면 진성대군은 아예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단경왕후 쫓아내려고 시위대 결성해서 단식투쟁하고(^^;) 난리를 떨었거든요.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겠죠. 뭐. 친정에 멸문지화를 입었으니 단경왕후가 칼갈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불과 몇 년 전에 연산군의 복수로 신언패(牌: 말조심 목걸이)까지 목에 찬 경험이 있으니 복수라는 말만 들어도 온 몸이 떨렸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녀는 폐위된 후 중종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나 공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복위되지 못하고 71세의 나이로 한많은 인생을 쓸쓸히 마칩니다.

단경왕후가 중종에게 보여줄 붉은 치마를 걸어놓았다고 전해지는 치마바위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또한 중종의 임종 직전에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며,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의 야사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군요. 저도 솔직히 그 뒤 중종의 행동으로 보아서 반년도 안되어서 잊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쿨럭~;

결과적으로는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폐비 윤씨, 연산군의 아내인 폐비 신씨(신수근의 누이), 진성대군(중종)의 아내인 단경왕후 폐비 신씨(신수근의 딸)까지 연산군 주위의 여자 3명이 폐비 당했으니.. 연산군 근처에는 얼씬도 말아야겠습니다.ㅋ

도봉산 자락의 연산군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연산은 7년 후 이곳으로 이장했다.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부원군 신씨 묘다


ⓒ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연산은 폭군이었나? 왕권주의자였나?


시삼촌한테 쫓겨나서 폐비된 단종(=노산군)비 정순왕후, 광해군비 혜장왕후도 있습니다. 그 외에 장희빈도 중궁의 자리에 있다가 쫓겨났지만 궐 밖이 아니라 후궁의 지위에서 사사당했고, 인현왕후도 다시 궐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폐비 계열(?)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단종(정태우)과 함께 폐위 당한 단종비 정순왕후(김민정)



구혜선이 빠진 왕과 나에 정태우가 연산군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극 전문이라 불릴 만큼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서 기대가 되네요. 왕과 비에서 단종 역을 맡았는데 정태우는 어찌 늘 쫓겨나는 역할만 맡게 되네요. 그래도 단종역을 세 번이나 맡았다는데 (한명회, 왕과비, 설중매) 이번에 또 폐위당하는 역입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성질이나 마음껏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요.ㅋ


임금께 사사당하고 아들까지 쫓겨난 폐비 윤씨(제헌왕후), 폭군 남편 덕분에 복위도 되지 못한 거창군부인 폐비 신씨,  남편이 왕이 된 대가로 쫓겨난 또 다른 폐비 신씨(단경왕후)....  남편 잘못 만나서 왕족에서 역적이 되어버린 그녀들이 참 가엽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경왕후 능


쓸쓸히 저 세상으로 떠나갔을 그녀들이 편하게 쉬길 바라며 그녀들의 묘에 술 한 잔 바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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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연산군에 정태우... 정태우는 또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군요.
역대 최고의 연산군은 누구? 당신의 투표를 기다립니다 (동영상 비교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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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우, '왕과 나'에서 광기어린 성인 연산군 맡는다
(동영상은 기사 중 일부. 출처는 링크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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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이란 무엇이며, 사약의 성분은 무엇인가?

사약이란 왕족 또는 사대부 등 고위층이 죄를 지었을 때 임금이 내리는 극약이다. 옛날부터 사용되어 왔으나 형전(刑典)에 인정된 제도는 아니다. 형전에는 교수(絞首), 참수(斬首)만을 사형제도로 명시하고 있었다. 왕족 또는 사대부는 그들의 신분을 참작하여 교살시키는 대신에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이는 자살을 통해 덜 잔인하고 덜 비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약을 마신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사약을 받을어 마시는 죄인 (사진 출처: 다음 사전)


사약은 임금이 사람을 시켜 본인에게 내리기도 하고, 일단 유배를 보낸 다음 내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개는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의하여 전하여졌다. 죄인은 사약이 든 그릇을 상 위에 정중하게 놓고 왕명을 받드는 예의를 갖춘 뒤 마셨다.

조선시대의 경우 태종 말년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이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았으며, 단종은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그리고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도 친가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중종 때의 선비 조광조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붕당(朋黨)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도 사사되었으며, 그 유명한 장희빈도 사약을 받았다. 정조 이후로는 차츰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모두 “어명이오”라는 외침과 함께 왕의 명을 받은 사자가 가져온 사약을 마신 뒤 피를 토하며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약을 한자로 풀이해 보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이란 뜻의 사약(死藥)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하사(下賜) 받은 약’이라는 의미의 사약(賜藥)이 된다.


사약의 성분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로 ‘비상’이란 성분이 사용됐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비상이란 비소(As)라는 독성 원소와 황(S) 성분이 섞인 독극물로 조금만 섭취해도 중독 증상을 보여 결국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상대방을 독살하는 데 주로 사용됐다.

이에 대한 명확한 문헌자료를 찾기 힘들다. 일설에는 생금(生金)·  생청(生淸)·  부자(附子)·  게의 알(蟹卵) 등을 합하여 조제하였다고 하나, 이것에 즉사시킬만한 독성이 있는지는 의문시된다.


출처: 인터넷 검색 및 다음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참고.


보충자료


옛날에 사약 어떻게 만들었어요?
 


극약을 내려 처형하는 것은 조선의 경우 형전에 따로 그 법이 없었고, 내의원에서 사약을 만들때는 비밀리에 제조하여 기록을 남기지않았기 때문에 사약의 재료도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극약의 재료로 생금(生金), 생청(生淸), 부자(附子), 게의 알, 비상(砒霜), 초오(草烏), 천남성 등를 사약의 재료로 응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비상
은 자연상태의 비소를 원료로 제조됩니다.

비소는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로 물에 잘 녹으며 몸 속에 들어가면 효소단백질 분자과 결합되고, 세포의 호흡을 방해해 세포를 죽게 만듭니다. 비상을 한번에 치사량 이상 흡입하면 구토, 설사, 모세혈관 확장, 혈압감소 등이 일어나며, 중추신경기능이 마비돼 1-2시간 내에 사망하게 됩니다.


부자, 초오 등에서 독작용을 일으키는 성분은 알칼로이드 성분인 ‘아코니틴’으로 몸속에서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저해제로 작용합니다. 아세틸콜린은 신경과 근육을 이어주는 곳에서 분비되는 물질로서, 만일 아코니틴의 작용에 의해 이것의 분비가 부족해지면 근육마비가 일어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짐승을 사냥할 때 화살 끝에 발라서 사용했던 물질도
바로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방해하는 비슷한 종류라고 합니다.


천남성이라는 식물은 산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잎이 넓고 키가 작으며
딸기 비슷한 열매가 열립니다. 천남성에는 ‘코니인’이라는 맹독성 알칼로이드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이 밖에도 생금(生金: 정련하지 않고 캐낸 그대로의 황금)이나 생청(生淸: 불길을 쐬지 아니하고 떠 낸 꿀),
게의 알(蟹卵) 등을 합하여 조제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특히 부자와 함께 인삼도 같이 사용했다는 설이 있는데, 대열대독한 부자에
인삼은 온기의 상승작용을 일으켜 부자의 열독이 더욱 성하여져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약을 받은 죄수를 죽게 하려면 때로 약을 먹인 후 뜨거운 방에 드러누워 있게 하거나
독한 술을 먹여서 약기운을 한껏 발산시키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드라마에선 사약을 먹으면 바로 피를 토하고 죽는 걸로 나오나, 실제로는 3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한 예로 조선조 숙종대에 사사한 송시열의 경우 두사발의 사약을 마셔도 죽지 않아 항문을 막고 사약을 먹게하여 죽고 난 뒤에도 부릅 뜬 눈을 감기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일설에는  독을 더 빨리 돌게 하기 위해 약을 먹인후 구들을 따뜻하게 데운 방안으로 죄인을 몰아 넣기도 했다고 합니다.




◈ 사극에 등장하는 사약의 성분은?

사약의 성분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성분은 비상이다. 비상은 자연상태의 비소를 원료로 제조된다. 비소는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로 몸 속에 들어가면 효소단백질 분자과 결합해 세포의 호흡을 방해해 세포를 죽게 만든다. 비상을 한번에 치사량 이상 흡입하면 구토, 설사, 모세혈관 확장, 혈압감소 등이 일어나며, 중추신경기능이 마비돼 1-2시간 내에 사망하게 된다.

그 외에 초오와 부자도 사약의 성분으로 많이 쓰였으며, 초오, 부자의 주성분인 아코니틴, 아코닌은 중추신경을 초기에는 흥분시켰다가 마비시켜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출처:
KISTI의 과학향기 상식 보기 [제 453 호/200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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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즐겁고 신성한 것이라 여긴 신라시대 여인들이 칠거지악을 내세우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갑갑해서 모두 기생이 됐거나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외국도 그런 것인지 우리 민족이 유달리 성을 사랑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언어에 유독 음담패설과 성 관련 욕설이 많은 걸 보면 조선시대의 악랄한 억압은 강한 것에 대한 더 강한 것을 통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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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으로 님의 블로그 - 섹스의 두 얼굴, 신라와 조선


오늘은 '점잖은(?) 조선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던 섹스 스캔들'들을 모아보려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한 글을 쓰셨고, 이 블로그에도 황진이나 어우동에 대한 글이 있으니, 링크를 통한 소개만으로 내 수고를 덜고자 한다.

↓이 글↓은 카페글이라서 검색을 통한 조회는 되지만, 링크를 따라가면 조회금지로 나와서 원본 출처 명기 후에 표기한 것임.

조선시대 스캔들

영화 <스캔들>이 나오기 전에는 조선시대 스캔들이야 과부가 머슴과 도망가 숨어 살거나 결국 자살을 택하는 것 정도의 고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어우동, 사방지 등 한국형 에로 영화의 소재가 모두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기억하자.


어우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사랑을 나눈 여자이다. 조선 성종 때의 실존 인물인 어우동은 본래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간통 문제가 불거져 이혼당했고 그 이후 노소, 근친을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을 뿌린다. 어우동은 한번 관계를 맺은 남자는 절대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었는데 애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몸에 문신하도록 강요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애정 행각이 구설수에 올라 풍기문란 죄로 처형된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어우동의 형량은 고작 곤장형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연루된 고위 관리들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사형을 고집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책임감없는 행동은 한결같다.



믿기지 않겠지만 500년 조선조 동안 왕실 여인들의 동성연애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궁궐 내 동성연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세종대왕이 이와 관련된 벌칙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 세종대왕이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연애자임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을 충격에 빠뜨린 며느리는 후에 문종이 되는 세자의 둘째 부인인 봉씨. 실록에 의하면 봉씨는 거짓말로 임신과 낙태를 번갈아 하고 술을 즐겨 만취한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물론 이는 봉씨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은 관리들의 악의에 찬 기록일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날 궐내에 여종 소쌍이 세자빈과 같이 잔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왕의 문초를 받던 소쌍은 세자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고백한다. 결론? 물론 세자빈은 폐위됐고 친정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도 자결했다.



드라마 <대장금>의 배경이 되는 중종 때 조정은 백정의 딸을 양반의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로 한바탕 시끄러웠다. 결국 중종이 어려운 시절에 동고동락한 천민의 딸을 양반의 정식 아내로 인정하라는 명령을 내려 일단락된 이 사건은 조선 전체가 들썩거렸던 백정의 딸 양씨 스캔들이다. 폭군 연산군은 예쁜 여자라면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은 이장곤이라는 관리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이에 격분한 이장곤은 홧김에 아내를 죽이고 함경로 도망친다. 도망자 신분의 이장곤은 백정 양씨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정말 괜찮은 그 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도망자 생활 몇 년 만에 중종의 즉위로 조정으로 돌아온 이장곤. 그동안 양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장곤은 동고동락한 아내를 버릴 수 없어 조정에 선처를 부탁한다. 결국 이장곤 덕에 부인 양씨는 정경부인이 되고 친정은 모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정경부인 양씨의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 <임꺽정>에도 등장하는데 임꺽정은 정경부인 양씨의 조카로 설정돼 있다.


언젠가 KBS <역사 스페셜>에서 지독한 사랑으로 소개된 바 있는 홍랑과 김덕창의 스캔들은 이렇다. 김덕창은 함경도 변방에 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시와 음악에 뛰어난 관기 홍랑을 만난다. 서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김덕창의 임지 변경으로 헤어지게 되는데 어느 날 홍랑은 한양에 있는 김덕창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관기는 임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홍랑은 연인을 찾아 한양에 오게 되고, 한양에서 둘은 다시 한번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한양 한복판에 아내까지 있는 양반 관리가 법을 어긴 관기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고 김덕창은 파직 후 객지에서 살해됐다. 사실 개인적이기까지 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세하게 전해지는 이유는 후에 홍랑이 김덕창을 위해 평생 수절했고 결국 김덕창과 나란히 묻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회 금기를 깨고 사랑을 이룬 그녀의 용기가 더 부럽다.


양녕대군은 동생을 위해 일부러 패륜아 행세를 한 꽤 멋진 왕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녕대군을 호탕한 풍류가로만 생각하기에는 입에 담기 민망한 스캔들이 많다. 양녕대군이 일으킨 스캔들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웠던 것은 유부녀인 어리 강간 사건이다. 어리는 한 정승의 첩으로 병이 있고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양녕대군은 그녀를 납치해 강제로 관계를 갖는다. 심지어 양평대군은 어리를 궁궐과 지방 유배지에까지 끌였들이는데 이는 연산군의 스캔들을 제외한 조선시대 최고의 섹스 스캔들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는 이 어리 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됐다는 사실을 들어 당대의 로맨스로 미화하지만 결국 양평대군이 어리를 버리고 왕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어쨌든 그 이후의 어리의 삶은 기록에 전해오지 않는다.

출처
:아름다운 만남의 동행  원문보기





영웅은 수많은 미녀들을 취해도 호남으로서의 기개나 풍류로 포장하는데 비해, 여자들은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의 미국에서도 추악한 스캔들의 여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걸 보니 이 또한 남녀차별의 일종인 것 같아서 과히 유쾌하진 않다만.. 나 역시도 그녀들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걸 보면 나도 똑같은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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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설에 휘말린 조선 임금들 (인종, 선조, 소현세자, 효종, 현종, 경종)


독살설의 시초임금 인종

조선왕조 12대 임금인 인종(재위 1544∼1545년)은 연산군을 쫓아내고 즉위한 중종의 아들이다. 그가 조선의 임금 중 최초로 독살설에 휘말린 데는 후사를 둘러싼 궁중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다.

중종이 반정을 일으키기 전의 잠저(潛邸) 시절 첫 부인은 신씨였다. 신씨의 아버지는 연산군 시절의 우의정 신수근이었는데, 반정공신들은 그를 연산군의 처남이란 이유로 죽여버린다. 신수근을 죽여버린 반정공신들은 후환이 두려워 중종의 첫 부인 신씨를 내쫓고 새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한다. 그녀가 바로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다. 그러나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 10년(1515)에 중종의 첫 아들 호(인종)를 낳았으나 산후 조리에 실패해 25세에 죽어버렸다. 인종은
태어난 지 엿새 만에 어머니를 잃은 것이다.

중종은 2년 후인 1517년 새로운 여자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데 그녀가 조선의 왕후 중 두고 두고 구설에 오르는 문정왕후 윤씨였다. 인종의 독살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인이기도 하다.

파란은 문정왕후가 중종의 둘째 아들 환을 낳으면서 시작된다. 환은 세자 호보다 열아홉살이 어렸다. 따라서 세자 호가 살아 있는 한 문정왕후의 아들 환이 임금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 호가 세자로서 보위를 잇게 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자 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들이 없는 것이었다. 세자의 계모 문정왕후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세자가 후사없이 죽는다면 문정왕후 소생인 환이 즉위하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1544년 38년간 재위한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했다. 나이 서른살의 젊은 왕이었다. 그러나 인종은 보위에 오른 지 불과 9개월 만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역대 조선 임금들 중 가장 짧은 치세 기간이었다. 인종은 왜 그리 빨리 죽었을까?

정사인 『인종실록』은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야사(野史)들은 어김없이 계모 문정왕후가 독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중 한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매번 인종을 핍박하던 대비 문정왕후 윤씨가 하루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떡을 내놓았다. 인종은 계모 윤씨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반겨주는 것에 감격해 그 떡을 먹었는데 그날부터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사실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 독살설은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인종이 죽자마자 사화(士禍)가 재발했기 때문이다. 명종 즉위년에 발생한
을사사화(1545)가 그것이다. 조선 초·중기는 「훈구파」라는 구정치세력과 「사림파」라는 신정치세력의 정권을 둘러싼 각축이 심했다. 사화란 집권당인 훈구파가 야당인 사림파를 공격하는 정치 탄압을 말한다. 그런데 중종 때의 기묘사화 이후 거의 종결됐던 사화가 인종 사망 직후 다시 재연된 것이다. 인종이 승하하고 그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발생한 을사사화는 조선 사림파 사대부들로 하여금 문정왕후의 인종독살설을 사실로 믿게 했다.


그 배경에는 당시 대윤소윤이라 불리는 두 당파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다. 대윤과 소윤은 각각 임금의 외척이었다. 대윤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아우인 윤임이 영수였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윤원로 등이 영수였다. 중종이 살아 있을 때 대윤은 장경왕후 소생인 인종을 지지했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을 지지했다. 또한 대윤은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를 지지한 반면 소윤은 사림파에 적대적이었다. 중종의 뒤를 이어 인종이 즉위한 직후 대윤이 정권을 잡아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다.

인종은 시종일관 사림파를 옹호했던 군주였다. 그는 왕위에 있는 동안 부왕 중종 때 발생한 기묘사화의 피화자(被禍者)들을 신원(伸寃)할 생각이었다. 인종은 중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조광조·김정 등 기묘사화 피화자들을 신원하려 했으나 갑자기 병색이 짙어지자, 『조광조·김정 등의 복관과 현량과(賢良科) 복과는 선왕 때의 일이므로 서서히 하려 했는데 이제 내 병이 이와 같으니 조광조 등을 신원시켜주고 현량과도 복과하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면서 그들을 신원시켜 주었다.

이렇게 인종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사림파들의 신원을 생각할 정도로 이상적인 사림정치에 대한 열망을 지닌 군주였다. 또 인품이 인자하고 학문도 높아 사림파로서는 기대를 걸 만한 존재였다. 그랬으니 인종의 요절에 대한 사대부들의 분노와 좌절은 더 컸다.

인종이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인물이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이었던 점은 인종 독살설에 더욱 불을 댕겼다. 명종은 당시 12세의 미성년이었으므로 대왕대비 문정왕후나 왕대비 인성왕후(인종비) 중 한 명이 섭정을 해야 했는데, 명종이 인종의 동생이었으므로 『형수와 시숙이 한 자리에서 정사를 볼 수 없다』는 이언적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모후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자마자 사화가 뒤따랐던 것이다.

인종 승하 직후 발생한
을사사화와 함께 상법(喪法)에 어긋나게 치렀던 인종의 장례도 인종독살설에 설득력을 갖게 했다. 인종의 장례는 이른바 「갈장(渴葬:임시로 빨리 장사지내는 것)」으로 집행되었다. 이는 소윤의 주장 때문이었다.

소윤 이기는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빨리 장사지낼 것을 주장했다. 이는 훗날 사가(史家)들이 인종에게 박하게 하는 것으로 문정왕후에게 아부했다고 비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소윤의 윤원형, 이기 등은 인종의 국상중에도 웃는 낯을 보여서 의기 있는 선비인 교리 정황(丁煌)이 『이 역적놈들을 보니 더욱 원통하다』고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분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을사사화란 철퇴가 날아들어 대윤과 함께 사림파가 화를 입게 된다. 을사사화는 윤임, 유관 등 대윤과 앞으로 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한 문정왕후와 소윤의 음모였다. 갓 세상을 떠난 인종의 시신이 궐내에 남아 있는 상황에 사화가 발생했고, 인종의 지지세력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실들이 인종 독살설을 신빙성 있게 만든 것이었다.

을사사화 2년 후에는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쓴 벽서가 나붙은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남은 사림파마저 주륙을 당했다. 이처럼 문정왕후의 섭정 기간은 사림파에게는 암흑의 나날이었고 그 어두운 세월을 횡행한 것은 『선왕(인종)이 독살당했다』라는 은밀한 소문이었다. 그리고 사림파는 문정왕후가 죽는 순간까지 분노를 삭이고 있어야 했다.


광해군과 선조 독살설

인종 독살설 속에서 자신의 아들 명종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한 문정왕후는 왕위를 손자에게까지 잇지는 못했다. 재임 기간 내내 어머니 문정왕후의 그늘에 가려 있던 명종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승하했는데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는 상태였다. 명종의 유일한 아들 순회세자가 13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더 이상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승하는 자연히 후사 문제를 발생시켰다. 선왕의 아들이 없으므로 종친 중에서 한 명을 임금으로 추대해야 했다. 평소 명종 내외와 친밀했던 중종의 서손자(庶孫子) 하성군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그는 중종이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낳은 덕흥군의 세 아들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방계 승통 시대가 열렸고, 그가 바로 선조였다.

자신이 방계 승통이라는 점에 대해 콤플렉스 가지고 있었던 선조는 정비(正妃)에게 낳은 아들로 후사를 잇는 것으로 그 콤플렉스를 메우려 했다. 그러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다. 반면에 후궁들로부터는 무수히 많은 왕자와 옹주를 얻었다. 여섯 명의 후궁에게 얻은 자녀는 총 13남 10녀. 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열세 명의 후궁 소생 아들 중에 누구를 후사로 삼느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런데 당시 선조는 또 다른 후궁인 인빈 김씨에게 빠져 있었고, 인빈의 둘째 아들인 신성군을 유달리 사랑했다. 선조는 어차피 정비 소생 원자가 아니라면 사랑하는 인빈 소생의 신성군에게 보위를 넘기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선조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력 정당이나 정치인들에게도 중요한 화두였다. 서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은 공빈 김씨의 둘째아들 광해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가 선조의 여러 서자들 중 가장 인품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에 정철을 영수로 하는 서인들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지지했다. 특히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은 신하들의 이런 의견을 직접 선조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정철은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됐는데 무슨 말을 하는가』란 선조의 꾸지람만 듣고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여기에는
동인인 영상 이산해의 계략이 있었다. 이산해는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기로 정철과 합의해 놓고서도 한편으로 신성군의 생모 인빈 김씨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 당신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충동질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인빈 김씨가 당일로 선조에게 이 사실을 호소했을 때만 해도 선조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정철이 실제로 신성군이 아닌 광해군을 세자로 주청하자 분노가 폭발해 귀양보낸 것이었다. 이로써 정권은 동인 수중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한해 전인 1591년의 일이었다.

동인임진왜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당이다. 일본의 침략 조짐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파견됐던 조선통신사 일행 중 정사인 황윤길은 『침략할 것 같다』고 보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전혀 침략의 조짐이 없다』고 상반된 보고를 올렸다. 양 의견 중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됐는데, 이는 당시의 집권당이 동인이고 김성일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와중에 권력을 잡는 쪽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이었다. 조식(曺植)을 종주로 모시는 북인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같은 의병장들을 다수 배출하여 명분에서 앞선 결과 집권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겨우 종결되자 집권당인 북인은 선조의 후사 문제를 놓고 또다시
대북소북으로 분열했다. 이는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왕비가 된 인목대비 김씨가 1606년(선조 39년)에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비롯된다. 당연히 후계 문제가 복잡하게 꼬인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선조는 할 수 없이 조정 대신들의 중망을 들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세자 광해군은 조정을 둘로 나누어 맹산, 곡산, 이천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 끝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그 지위를 굳혔다. 이때만 해도 광해군이 보위를 잇는 것은 기정사실로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자국 사정 때문에 광해군의 세자 책봉 추인을 거부하자 선조와 일부 신하들의 생각이 달라지면서 세자 문제는 다시 미궁에 빠졌다.

소북 영수 유영경은 인목대비 김씨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과 손을 잡았다. 광해군을 폐세자시킨 후 영창대군을 세우려고 결탁했던 것이다. 영창대군을 후사로 세우려는 이 구도는 방계 승통을 극복하려는 선조의 열망과 맞물리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결국 이것은 세자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박해로 나타났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선조는 광해군이 문안할 때마다 『명나라의 추인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 행세를 하는가? 다음부터는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그때마다 광해군은 피를 토했다고 한다.


광해군의 승리

선조는 광해군을 내쫓고 영창대군을 세우려 했으나 세월은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선조의 병이 깊어진 재위 40년(1707) 가을, 서른네살의 장성한 세자를 폐하고 두살배기 아이를 세자로 만드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일이었다. 결국 선조는 광해군을 폐출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했다.

선조는 1707년 10월 병석에서 대신들을 불렀다. 광해군에게 전위한다는 교서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소북 영수 유영경은 선조가 자신만 불렀다고 하면서 원임대신(현직 정승)들을 모두 배제한 채 혼자 선조를 만났다. 선조가 광해군에게 전위할 뜻을 밝히자 유영경은 『금일의 전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뜻밖에 나온 거사여서 명령을 받지 못하겠습니다』라면서 명을 받기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소북인 병조판서 박승종과 공모해 군사를 동원해서 대궐을 에워싸기도 했다.

유영경의 이러한 월권 행위에 저격수로 나선 인물이
대북의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유영경이 전교를 거부한 것은 사당(私黨)을 위해 왕사를 버린 것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그러나 선조는 오히려 정인홍을 귀양보냈고 후사를 둘러싼 상황은 여전히 혼돈스러웠다.

후사를 둘러싼 선조의 결심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선조의 병이 재발했다. 선조 마지막 해인 41년 1월부터 다시 병세가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았는데 그해 2월1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어젯밤엔 편히 잠을 잤다』라고 말한 그날 오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죽음이 머리맡에 이른 선조는 광해군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광해군에게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듣지 말라』는 유서를 내렸다.

드디어 광해군이 승리한 것이다. 선조는 죽음에 이르러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말했지만 신하들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고 광해군에게 피를 토하게 한 인물은 바로 선조 자신이었다. 만약 선조가 시종일관 광해군의 지위를 튼튼히 해주었다면, 장남 임해군이나 적자 영창대군 모두 왕자로서 풍족한 삶을 누리다 세상을 뜰 수 있었을 것이다.

즉위한 광해군이 자신을 폐출시키려던 소북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광해군은 소북을 숙청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북에게 정권을 넘겼다. 정권을 장악한 대북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에 대한 강경책을 펴서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해 서궁에 가두었다. 이 와중에 나돈 소문이 선조독살설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당연히 숙청당한 소북과 세를 잃은 서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선조 독살설이 그리 광범하게 유포되지는 않았다. 선조가 죽기 전해부터 병색이 심각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사대부 모두 알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선조독살설이 조선 전역에 유출되고 사실처럼 전해진 것은 광해군이 쫓겨난 이후였다.

정철의 실각 이후 정권에서 소외됐던 서인들은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와 인목대비 폐위 등을 반사대·반윤리적인 행위로 규정짓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인조 반정은 대북 정권에 의해 서궁에 유폐됐던 인목대비를 화려하게 복귀시키는 무대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간 사랑하는 아들 영창대군이 비참하게 저세상으로 가는 비극을 맛보았다. 백년을 씻어도 씻기지 않을 한을 품은 그녀가 다시 대비로 복위한 것이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이 반정을 추인해 달라고 요구하자 인목대비는 광해군 부자를 죽이라고 요구한다.

『역괴(逆魁:광해군)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고, 그 적모(嫡母: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다하였다』

말하자면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민성징이 즉각 『지금 하교하신 사실은 외간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더욱이 선왕을 시해했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한 사실입니다』라고 되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별다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단지 아들을 잃은 여인이 한풀이를 위해 지어낸 말일 뿐이다.

하지만 대비의 입에서 직접 나온 선조 독살설은 서인의 반정 명분을 정당화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서인 편에서 볼 때 선조 독살설의 진위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선조 독살설이 광범하게 유포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인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야 어차피 구중 궁궐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재간이 없었다. 반정 정권은 선조독살설이 정권 기반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조직적으로 유포시켰고, 이것은 하나의 오도된 진실이 되어갔다.


소현세자의 이상한 죽음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 정권은 집권 후 외교노선을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했다. 만주에서 새로이 흥기하는 여진족의 후예들이 세운 후금(後金), 곧 청나라를 배격하고 한족(漢族)의 명나라를 좇자는 정책이 그것이다.

인조반정(1623년)이 일어날 즈음의 만주 정세는 극히 유동적이었다. 인조반정 한 해 전 청(후금)은 만주의 요지인 심양과 요양을 탈취했고 다음해에는 서평보(西平堡)를 장악했다. 청이 이처럼 기세를 올리는 동안 명나라는 내부 분란에 휩싸여 있었다. 귀주와 산동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혼란을 틈타 청은 급격하게 세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만약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정묘· 병자호란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과 청의 분쟁 와중에 조선의 위상과 국익을 한껏 드높였을지도 모른다. 반정 정권이 배청 정책으로 전환하자, 청은 명과 중원을 다투는 일전을 앞두고 조선 문제를 먼저 정리하려고 나섰다. 청군이 중원으로 남하한 틈을 타서 조선군이 공격해 온다면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되기 때문에, 만주를 기반으로 한 청으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처지였다.

이는 결국 두 차례의 침략을 불러왔다.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丁卯胡亂)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그것이다.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는 12월의 혹한이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나라 군사는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강화도는 지리적 요건이 농성할 만한 곳이지만 남한산성은 그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농성의 기본조건은 자급자족 체제인데 산성, 그것도 한겨울의 산성은 농성의 자리가 아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45일 이상을 저항하던 인조는 결국 강화도가 함락돼 비빈·대군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하고 만다. 인조는 지금의 송파구인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삼배고두례를 행했다. 허울뿐인 큰소리 외교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화의의 대가로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야 했다. 삼전도의 치욕은 봉림대군은 물론 소현세자에게도 씻기 어려운 상흔이었다.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의 성리학자인 그들에게 삼전도의 치욕은 반드시 씻어야 할 원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볼모생활 도중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현실인식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이 처한 객관적 현실, 즉 국제관계의 역학을 인정했다. 청은 이제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실력자였고 조선은 그 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 편입돼 있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려면 청과 맞서 이길 힘이 필요했다. 그럴 힘이 없는 이상 청과 대립하는 것은 조선에 이롭지 못한 일이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은 이전의 중국 왕조들이 요구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공으로 대표되는 형식적 주종 관계를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조공 대상이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든 만주족이 세운 왕조든 현실적으로 볼 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원을 청이 장악한 이상 조선은 그 질서 속에 편입된다는 것이 볼모생활에서 바뀐 소현세자의 현실 인식이었다.

소현세자는 당시 심양에 새로운 숙소를 신축해 심양관(瀋陽館)이라 불렀다. 청나라는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려 했다. 인조도 청나라와 직접 접촉을 꺼렸으므로 양국간 현안은 소현세자의 차지였다.

소현세자는 양국의 접점 지역에서 양국의 직접적인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심양관은 주중국 조선대사관이며 소현세자는 그 대사였던 셈이다.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에 대응하는 일이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 중에서 명 정벌에 사용할 군사를 파견해 달라는 것은 가장 난처한 문제였다. 친명 배청을 명분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으로서는 이는 심각한 자기 부정에 해당하므로 상당한 반발이 뒤따랐다. 하지만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정권으로서는 청의 어떠한 요구도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하는 순간 청군의 말발굽이 또다시 조선 국토를 짓밟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임경업장군의 사보타주

인조 18년 임경업이 이끄는 수군 6천명을 파견한 것은 서인 정권의 참담한 자기 부정이었다. 유명한 반청론자인 임경업이 청과 함께 명을 치는 일에 흥이 날 리 없었다. 임경업은 명군을 향해 발포하지도 않고 일부 군사는 일부러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보타주를 벌였다. 이에 격분한 청은 장수 용골대(龍骨大)를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의주로 파견했다. 이들은 조선의 대신들을 의주로 불러 심문하는 이른바 「심옥(瀋獄)」을 벌여 조선은 다시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졌다.

이때 소현세자는 청의 말을 듣는 척하며 양자 사이의 완충역할을 자임했다. 아마 소현세자의 유연한 처신이 없었다면 조선인들은 화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조 20년에 압록강 근처에 명나라 배가 출몰하자 용골대가 평안감사 등을 불러 심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도 소현세자는 시종일관 평안감사를 옹호했다. 이때 용골대는 이렇게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와 같이 비호해 주니 그와 한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소』

세자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구려』

이처럼 소현세자는 양국간 분쟁에서 분명히 조선편을 들면서도 유화적인 몸짓으로 파문의 확산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런 유연한 처신은 조선에 대한 청의 의구심을 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즉위하면 양국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세자빈 강빈도 소현세자 못지않은 수완가였다. 심양관의 안살림을 맡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금이었다. 그녀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했다. 이렇게 생산된 곡식은 심양관 살림에 가장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포로로 잡혀온 조선 사람들도 원수인 청인들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세자 밑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니, 강빈의 이 농업정책은 일거양득의 양책이었다. 강빈은 이렇게 수확한 곡식을 청의 진기한 물건들과 맞바꿔 차액을 남겼다. 또한 조선 사신들이 가져오는 인삼 등을 청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청나라 관리들에 의해 심옥이 한번 벌어지면 막대한 자금이 들었다. 청 관리들은 막대한 뇌물을 받고서야 못 이기는 체 심옥을 종결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금을 마련한 것은 모두 강빈의 수완이었다. 실로 소현세자와 강빈은 조선 역사상 가장 현실적인 세자이자 세자빈이었다.

소현세자가 볼모로 가 있었던 기간은 장장 9년이었다. 인생의 황금기인 20대 중후반과 30대 전반을 이국에서 볼모생활로 보낸 것이었다. 소현세자는 인조 22년(1644) 2월, 34세의 나이로 꿈에도 그리던 고국 조선에 돌아왔다.


아들을 의심하는 아버지

소현세자의 귀국 짐보따리 속에는 많은 종류의 서양 과학서적과 여지구가 들어 있었다. 그는 볼모생활을 하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견식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세상이 더 이상 성리학의 시대가 아님을 심양과 북경에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한 인물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사상과 접하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과 천주교, 그리고 서양의 과학사상이었다. 소현세자는 스스로 아담 샬이 머물고 있던 북경의 남천주당을 찾았다. 푸른 눈의 선교사와 이국의 왕세자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는 특이한 장면이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가져온 과학서적이 훗날 수원성 축성 때 정약용으로 하여금 거중기를 만들게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이 밖에도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들을 데리고 귀국하기도 했다.
 
소현세자는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더 이상 청은 원수가 아니었다. 주자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청은 원수의 나라였지만 주자학의 관점만 버린다면 청은 실리에 따라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상대적인 대상일 뿐이었다. 세상은 주자학만이 아니라 천주학이란 다른 사상도 있었다. 그리고 여지구가 보여주는 대로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새로운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과학기술은 조선을 새롭게 발전시킬 양축이었다.

그러나 가슴 가득 포부를 안고 귀국한 소현세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를 구렁에 빠뜨리려는 음모였다. 부왕 인조에게 있어서 소현세자는 자신을 대신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었다. 소현세자는 자신의 반청 노선에 반기를 든 정적이자 원수인 청의 회유에 넘어간 반역자일 뿐이었다. 소현세자가 볼모지 심양에서 조선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부왕 인조는 세자에 대한 불만만 키워왔던 것이다.

더욱이 인조는 어이없게도 아들인 소현세자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심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공포였다.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임금으로 내세워 자신을 폐출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다. 인조는 쿠데타로 집권한 인물답게 자신의 왕위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했다.

인조가 세자를 의심하는 것을 눈치챈 일부 정치세력이 세자를 모함하고 나섰다.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도 그 중 한 세력이었다. 그녀는 세자와 강빈이 인조를 내쫓고 즉위할 것이라고 참소했다. 세자에 대한 의심과 주위의 참소는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조는 심지어 환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조차도 막을 정도로 그를 냉대했다.

소현세자는 부왕의 이런 냉대에 상심했으나 그 원인을 분석할 만한 여유도 그에겐 없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설고 낯선 이역만리에서 9년간이나 꿋꿋하게 지내던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뒤따랐다.


의혹짙은 소현세자의 주검

세자의 발병일은 인조 23년 4월23일이었다. 병명은 학질이었다. 세자는 발병 3일 후인 4월26일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인조실록』은 그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적었다.

『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소렴 때 시체의 얼굴을 싸는 검은 헝겊)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이 기록은 당시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시신의 이상한 상태를 보고 나와 말한 것을 토대로 적은 것이었다. 그녀는 인열왕후(소현세자의 어머니)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염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한 것이 분명하다면 소현세자를 죽인 인물은 누구일까?

『인조실록』은 세자의 시신이 독살당한 사람 같았다는 사실을 『상(인조)도 모르고 있었다』라고 기록했지만 이는 거짓이다. 소현세자 독살에 인조가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한둘이 아니다. 그 하나가 소현세자를 치료한 의관 이형익(李馨益)에 대한 처리 문제다. 이형익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어미 집에 왕래하던 의사로 세상에 추잡한 소문이 많던 자였다. 세자가 이형익에게 침을 맞은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양사는 이형익을 처벌하자고 주청했다. 『오한이 심하여 몸이 떨리는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는 것이 양사의 탄핵 이유였다. 조선시대에 왕이나 세자가 죽으면 의관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다 해도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인조는 끝내 이형익을 비호하면서 처벌하지 않았다.

인조가 세자 독살에 관련돼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였다. 사망 당시 소현세자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큰 아들 석철은 원손(元孫)이었으므로 당연히 그가 세손으로서 세자를 대신해 인조의 뒤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종법을 어기고 원손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그 중 두 아들이 풍토병으로 죽게 했다.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련됐다는 다른 증거는 세자빈 강빈의 처리 문제였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강빈에게 공격의 화살이 날아왔다. 세자의 장남 석철의 보모 최상궁은 저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 끝에 죽어갔다. 그리고 인조 24년 정월에는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御膳:임금의 수라)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강빈은 후원 별당에 감금되었다. 이미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진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에 독을 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인조와 소용 조씨가 공모해 강빈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내린 인조의 비망기는 자신이 사건의 배후 연출자임을 털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紅錦) 적의(翟衣)를 만들어 놓고 외람되게 내전(內殿:왕비)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인조 스스로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그의 세 아들을 귀양 보낸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인조의 악함은 강빈을 사사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결국 강빈을 폐출하여 사저로 내쫓은 후 사약을 내려 죽여버리고, 교명 죽책(竹冊) 등을 거두어 불태워버렸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빈의 형제들까지도 죄를 씌워 죽여버렸다. 자신의 친아들과 손자, 며느리와 사돈까지 죄없이 죽여버린 이런 인물의 시호에 「어질 인」자를 써 인조(仁祖)라 한 것은, 서인 정권의 역사뒤집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행적을 제대로 표현하면 그는 악조(惡祖)라 불러야 마땅하다.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은 단순히 한 세자의 꿈이 좌절된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꿈이 좌절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을 만난 것은 조선이 개국한 1876년보다 무려 2백32년이나 빠른 1644년의 일이었다. 이때 이미 낡아빠진 성리학을 버리고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그 처참했던 근대사의 아픔은 겪지 않아도 좋았을지도 모른다.


북벌군주 효종의 급서

소현세자가 죽은 4년 후인 1649년 인조도 세상을 떴다. 그 자리를 이은 인물은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생활을 했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었다. 효종에게는 즉위 자체가 하나의 콤플렉스였다. 인조의 뒷자리는 소현세자의 것이지 효종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현세자가 죽었다 해도 그 자리는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의 것이었다. 종법에 따르면 대통은 분명 원손(元孫) 석철의 것이었다. 효종은 소현세자와 석철이라는 두 부자의 대통을 가로챈 셈이었다.

효종이 심양 시절부터 소현세자의 자리를 탐냈다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찾기 어렵다. 심양 시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사이는 그리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소현세자를 사지에 몰아넣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에게 돌아오는 왕위를 거부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즉위 정당성을 북벌(北伐)에서 찾았다.

북벌! 효종에게 있어서 북벌은 시작이자 마지막이며 부분이자 전체였다. 효종은 북벌 군주 그 자체였다. 소현세자가 볼모 생활을 새로운 사상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세계사의 흐름에 적응하는 기간으로 보냈다면, 봉림대군은 원수인 청의 약점을 캐는 기간으로 보냈다. 소현세자가 청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으로 보았다면, 봉림대군은 전력을 다하면 넘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같은 볼모 기간을 보냈으면서도 세계관이 이처럼 완전히 갈리는 것은 서로의 성격탓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무과출신 우대 정책

효종이 북벌에 전념했던 이유는 물론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 소현세자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콤플렉스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북벌은 삼전도의 치욕과 콤플렉스를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길만이 저승에서 소현세자를 떳떳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북벌은 소현세자보다는 효종에게 걸맞은 과제였다. 효종은 강력한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효종은 실로 삼국시대 이래 우리 역사상 거의 유일한 무제(武帝)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이나 고구려의 광개토왕, 그리고 신라의 태종무열왕처럼 무력을 통한 영토확장의 길에 나섰던 무력의 군주였다.

북벌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강력한 군사력이다. 효종은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까지 조선은 문(文)의 나라였다. 과거는 문·무과로 나뉘어 있었으나 무과 출신으로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과 출신들은 문과 출신보다 한 등급 아래의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무과 합격자는 지방 수령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은 무과 우대 정책을 실시했다. 효종은 무과 시험인 관무재(觀武才) 우수 합격자를 지방 수령에 임명했다. 그러자 문신들의 반발이 잇따랐다. 효종이 무과 출신을 지방 수령에 임명한 것은 각 지방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효종은 무과 출신인 유혁연(柳赫然)을 비서격인 승지로 임명하기도 했다. 효종이 전례를 무시하고 무장 출신을 승지로 임명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군사문제에 관한 직할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효종은 지방관을 파견하며 군사문제는 병조판서에게 직보하고, 병판은 무신 승지 유혁연에게 전달하게 했다. 즉 지방의 군사문제를 지방관→병판→무신 승지→효종이라는 신속하고 전문적인 보고 체제를 갖추기 위해 무과 합격자를 수령에, 무신 출신을 승지에 임명한 것이다.

또한 효종 5년 2월에는 지방의 북벌 준비 사업을 관장할 영장(營將) 제도를 복원하고 이화악(李華岳) 신단(申檀) 등을 영장, 부사(府使) 등에 임명해 지방으로 내려 보내기도 했다.

전란 후의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효종의 강력한 군사력 확장 정책은 많은 성과를 거두어 재위 6년에는 사대부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막강해진 조선군의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 세자와 문무백관,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량진 백사장에 나가 1만3천여 조선군의 열병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효종은 제주도에 표류돼온 네덜란드 사람 하멜(Hamel)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조총(鳥銃)을 모방한 새로운 총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친위군인 금군(禁軍)을 늘리고 창덕궁 후원의 담장을 헐어 이들의 기사장(騎射場)을 만들어주었다. 지형이 험준한 우리 나라는 남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기병전의 여지가 그다지 넓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광활한 만주와 중원을 공격할 때 사용할 목적임이 분명하다.

효종의 이런 군비확장책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조선 전기간을 통틀어 전례가 없던 군비확장책은 문신들의 강한 반발을 낳았다. 신속한 군비확장은 집중된 권력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국왕의 권력은 미약했다. 부왕 인조는 서인들이 선택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쿠데타를 준비하던 서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한 명의 종친일 뿐이었다.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조정은 국왕과 서인의 연합정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의 군비확장책은 서인 문신들의 반발을 낳았다.

문신들은 물론 만주족 국가인 청을 증오했다. 그러나 이런 증오심을 극도로 표현하는 길은 기껏해야 삼학사 같은 지사적 처신이지 군사적 대응은 아니었다. 의기만 드높게 선전 교서를 던졌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혹한 속의 산성에서 떨었던 문신들에게 청은 마음속 증오의 대상일 뿐 군사적 정복대상은 아니었다.

군비확장책에 대해 『백성의 생활이 더 급하다』는 안민책(安民策)을 제시한 문신들의 반발 명분이 무조건 폄하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안민의 대계 중 강력한 국방책은 가장 첫머리에 놓여야 할 항목이란 점에서 안민책을 명분삼은 군비확장 반대도 전적인 정당성을 갖기는 어렵다. 심지어 열병식이 청나라의 분쟁거리가 된다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대해 효종은 『이것이 어찌 오랑캐의 주구가 아니겠는가?』라면서 강행했다.


문신들의 노골적 반발

그러나 재위 8년간 거의 독단적으로 군비확장책을 추진하다 보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효종의 치세에 대한 사대부들의 불만을 집약해서 표출한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흔히 송시열을 북벌 이념의 제공자로 알고 있지만, 실제 송시열은 효종의 군비확장책에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다. 송시열은 효종 8년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그간의 치세 전체를 부정하고 나선다.

『전하께서 재위하신 8년 동안 그럭저럭 지나갔을 뿐 한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르렀습니까? 백성들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하며 안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朝夕)에 다다랐습니다』

송시열은 또 『남송의 주자가 처음에는 금나라에 대한 북벌을 주장하다가 20년 후에는 다시 북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북벌을 포기하라는 권고였다. 이는 효종이 전력을 기울인 모든 정책을 포기하라는 말로 효종의 치세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자신을 전면 부인하고 나선 송시열을 처벌하지 못했다. 사대부들이 집단 반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효종은 사대부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타협에 나섰다. 효종은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에 정권을 넘겨주기로 하였다. 대신 송시열·송준길로 대표되는 산당은 적극적인 북벌책을 수행해야 했다. 이처럼 양자가 연합할 수 있는 공통 분모는 북벌이었다.

송시열의 산당이 대외적으로 내건 명분은 「춘추대의」였다. 최고의 춘추대의는 오랑캐의 나라인 청을 정벌하고 중화의 명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 길은 오직 북벌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북벌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소리 높여 춘추대의를 외쳤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춘추대의는 군사를 동원해 산해관을 공격하는 북벌이 아니었다. 그들이 최고로 생각하는 춘추대의는 국력을 길러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망해버린 명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달랐다. 그에게 북벌은 군사를 동원해 만주와 중원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과 효종의 북벌론에는 이론과 실제에 이토록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 같은 산당인 송준길을 병조판서에 임명해 인사와 군사 양방면의 전권을 맡겼다. 효종이 이들에게 정권을 내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들이 소리높여 주창하던 춘추대의를 실제로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춘추대의는 말로써 드높일 수 있었지만 북벌은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북벌은 군사력 확장이란 가시적 성과가 눈에 보여야 했다.


땅에 묻힌 「북벌론」

양송(兩宋)이라 불리던 송시열·송준길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그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자 효종은 재위 10년(1659) 3월에 송시열과 독대한다. 조선에서 임금과 신하가 단 둘이 만나는 독대는 금지돼 있었다. 효종이 국법을 어겨가며 독대한 이유는 보안을 위해서였다. 바로 북벌을 논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기해년의 일이라 하여 「기해독대」로 불리는 이 독대에서 효종은 이렇게 말한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효종의 북벌계획은 군사전략상으로 볼 때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청은 외견상으로 견고해 보여도 구조상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배층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이고 피지배층은 다수 민족인 한족이기 때문이다. 10만 조선정예군이 북벌을 단행하면 만주족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한족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것이 효종의 생각이었다. 효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단성있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효종이 독대까지 해가며 북벌을 주장하자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효종이 산림에 정권을 넘긴 이유는 단 하나 북벌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송시열이 북벌 자체를 반대한다면 효종은 미련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송시열 등 산림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벌을 강력히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북벌은 불가능한 망상이었다.

이때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효종이 급서한 것이다.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한 지 두 달 만이었다. 효종의 사인은 사소한 것이었다. 머리 위에 난 종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종기가 독으로 번지자 어의 신가귀(申可貴)가 종기에 침을 놓고 고름을 조금 짜내니 피가 서너 말이나 솟아나왔다.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이었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그는 수전증으로 손을 떠는 상태였다 한다. 수전증이 있는 의사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신가귀가 현종 즉위 후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수전증의 신가귀가 효종에게 침을 놓은 것도,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도 우연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으로만 돌리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컸기에 고의란 의구심이 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조정에서 북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송시열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북벌은 주장하지 않았다. 효종의 시신과 함께 북벌도 땅속에 묻힌 것이다.


예송논쟁 와중에 급서한 현종

효종의 죽음은 조정에 뜻밖의 논란을 불러왔다. 효종의 급서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효종의 장례 때 입을 상복을 두고 벌어진 논란이다. 이것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지는 유명한 「예송논쟁」이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사망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 기간이 얼마여야 하는가를 두고 발생했다.

조선의 상례(喪禮)에 따르면 부모상에 자식은 3년복을 입고, 반대로 장자상(長子喪)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어야 했다. 장자를 부모와 같이 대우한 이유는 종통을 잇는 맏아들을 그만큼 우대했기 때문이다. 장자 아닌 차자(次子) 이하의 상사에는 부모가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다.

예송 논쟁의 논거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효종은 인조의 차자였기 때문이다. 장자는 어디까지나 소현세자였다. 그러나 인조의 왕통을 이은 인물은 효종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왕통을 이은 인물에게 장자냐 차자냐를 따지는 것이 타당한 물음이냐는 반론이 가능한 것이다. 효종이 차자라는 서인의 논거와 왕통을 이은 존재라는 남인의 논거가 부딪친 것이 1차 예송논쟁이었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은 효종이 차자이므로 자의대비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선도로 대표되는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자지만 왕통을 이었으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자칫하면 효종이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 대신 왕위를 이은 것이 정당하냐는 승통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 정국에 피바람을 부를 수도 있는 민감한 문제였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 승통의 정당성을 둘러싼 거대한 정치문제로 비화될 뻔하다가 가까스레 1년설을 주장한 서인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서인이 집권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설을 주장하다 패배한 남인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정치보복은 행해지지 않았다. 형식상 정치논쟁이 아니라 예법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임금에게 야박한 신하들

그러나 15년 후 벌어지는 2차 예송논쟁은 학문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종 15년에 벌어지는 2차 예송논쟁은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함으로써 발생한다. 자의대비가 그때까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효종 장례 때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1차 예송논쟁이 아들 상사 때 어머니의 상복 착용 기간 여부였다면 2차 예송논쟁은 며느리 상사 때의 시어머니의 상복 착용 기간 여부였던 것이다.

장자·차자의 상사 때 부모의 상복 착용 기간이 달랐던 것처럼 장·차자부 상사 때의 상복 착용 기간도 달랐다. 장자부(長子婦)의 상은 1년복을, 차자부(次子婦) 이하의 상은 9개월복을 입었던 것이다. 사망한 사람만 달랐지 그 내용이나 배경은 1차 예송논쟁과 똑같았다. 1차 예송논쟁 때 1년설을 주장했던 서인들은 2차 예송논쟁 때 9개월설을 주장했고, 1차 때 3년설을 주장했던 남인들은 2차 때는 1년설을 주장했다. 즉 서인들은 1차 예송논쟁 때 효종을 차자로 대우한 것처럼 효종비를 차자부로 대우한 것이고 남인들은 왕통을 장·차자 여부보다 높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차자부가 아니라 왕비로 대우한 것이다.

1차 예송논쟁 당시 현종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서른네 살의 장년이 돼 있었다. 국왕인 현종의 자리에서 볼 때 1차 예송논쟁의 결과는 내심 불만이었다. 당시만 해도 송시열과 윤선도 같은 대군 사부들의 논쟁에 판정을 내릴 만한 견식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버지 효종이 누구인가? 바로 국왕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국왕을 장자와 차자로 나누어 차등있게 대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통을 이었으면 그뿐, 나머지 모든 예법은 왕통에 복종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한 직후에 서인들이 자의대비 복제에 혼선을 빚었던 것이 논쟁을 부추겼다. 서인은 처음에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의정했다가 1차 예론에 참여했던 서인 중진들의 말을 듣고 9개월로 고쳐 올렸던 것이다. 현종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당초 1년복으로 의정했다가 왜 9개월복으로 개정했느냐고 추궁하고 나섰다. 서인들은 여러 차례 모여 협의했으나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진퇴양난의 협곡에 빠졌던 것이다. 현종이 원하는 대답은 1차 예송 때 서인들이 주장했던 1년설과 지금의 9개월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시인하면 서인들은 국왕을 능멸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자충수(自充手)에 빠지는 것이었다. 서인들이 대답을 못하고 시간만 끌자 현종은 분노했다. 그리고 1,2차 예론은 모두 서인들이 왕권을 업신 여긴 결과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전의 기해예론(1차 예송)은 3년복으로 고치고 이번의 갑인예론(2차 예송)도 1년복으로 고쳐라. 기해복제를 과인은 국제(國制:국조오례의)를 쓴 것으로 생각했는데 안팎에서는 고례(古禮:중국의 옛법)를 썼다 하니 임금이 하는 일은 가볍고 신하들이 하는 일은 무겁다는 말이냐? 경들이 모두 선왕(효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감히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고 주장하니 신하가 되어 감히 임금에게 야박하게 굴면서 누구에게 두텁게 굴 것인가?』

현종이 말하는 「두텁게 구는 누구」란 1차 예송 논쟁 때 1년설을 이끌었던 송시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서인들에 대한 치죄에 나섰다. 평소 원만했던 현종의 성품으로 보아 이례적인 분노였다. 현종은 드디어 예론을 잘못 이끈 책임을 물어 서인 영상 김수흥을 귀양보내기에 이른다. 귀양가는 서인의 자리는 허적, 윤휴 같은 남인들이 메웠다. 이때가 1674년이었으니 남인들은 1623년의 인조반정 이래 반세기 만에 정권을 잡는 길이었다. 분명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견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현종이 급서했던 것이다. 현종은 왜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것일까? 『현종실록』은 『현종의 기운이 몹시 지쳐 병이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과로라는 뜻이다. 과로로 쇠약해진 몸에 열이 발생했고, 그런 지 열흘 만인 그해 8월 승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의혹을 부추기는 점은 이때가 약방에서 시약청을 설치한 하루 만의 일이라는 점이다. 임금의 병이 조금 심하다 싶으면 서둘러 시약청을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시약청 설치 하루 만에 사망하는 일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당시 현종은 「임금에게 야박하게 구는」 서인들을 한창 몰아세우던 중이었으므로 의혹이 잇따랐다. 그런 의혹을 남긴 채 현종은 가고 15세의 어린 숙종이 뒤를 이었다.


노론에 둘러싸인 소론 임금 경종

숙종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경종의 신산스러운 삶은 「장희빈의 아들」이란 한마디에 포괄돼 있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와 국왕의 총애를 놓고 다투던 숙종 때는 조선 전기간에 걸쳐 당쟁이 가장 심한 때였다. 숙종 때는 서인과 남인 사이에 죽고 죽이는 살육이 거듭됐는데,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가의 여인이었고 희빈 장씨는 남인가의 여인이었다.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의 부상과 몰락은 익히 알려진 대로 현모양처와 악처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리전이었다.

재위 15년 동안이나 후사가 없어 애를 태우던 숙종에게 옥동자를 안겨준 여인이 바로 희빈 장씨였다. 숙종이 이 옥동자를 원자로 정호하려 하자 서인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숙종은 서인 정권을 갈아치운 후 남인에게 정권을 주면서 원자 정호를 강행했고 동시에 인현왕후를 내쫓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그리고 원자로 정호한 옥동자를 세자로 책봉했으니 그가 바로 훗날 경종이다.

그러나 또 다른 후궁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왕자를 낳자 희빈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점차 식어갔는데 서인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희빈 장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남인에 대해 서인이 집요한 공세를 계속한 결과, 희빈 장씨가 왕비에서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고 남인들도 몰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저로 쫓겨났던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가 되었다. 그후 몰락한 남인에 대한 치죄를 둘러싸고 서인들은 둘로 양분된다. 남인들을 강하게 치죄해야 한다는 강경파가 노론이고 유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온건파가 소론이었다.

숙종과 노론이 희빈 장씨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해 사약을 내려 죽이자 그녀 소생인 세자의 처지는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노론은 자신들이 죽여버린 여인의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연산군 시절과 같은 살육이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숙종 또한 모후가 사형당한 한을 품은 아들이 뒤를 잇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숙종과 노론 대신 이이명은 숙종 43년(1717)에 이른바 「정유 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정유독대의 합의사항은 숙종의 와병과 소론의 격렬한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경종이다. 그러자 다급해진 노론은 경종을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경종의 이복동생, 즉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밀었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요구했다. 노론이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청한 까닭은 그녀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노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34세였던 경종은 노론의 이 주장을 받아들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다.

하지만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했다. 이는 세제를 정사에 참여시키라는 말로 사실상 세제에게 정권을 넘기라는 주청이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미성년이 아닌 한 「대리」라는 말은 신하가 입에 담을 수 없는 금언(禁言)이었다. 국왕이 세제에게 대리시키겠다고 해도 신하들은 죽어도 안 된다며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해야 했다. 이런 어마어마한 말을 신하들이 먼저 주청하고 나선 것이다.

경종은 이를 받아들여 세제 대리청정을 허락했으나 소론이 격렬히 반발하고 나섰다.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은 노론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을 역모로 몰았고 경종이 이를 받아들여 정권은 소론에게 돌아갔다. 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 남인가의 인물인 목호룡이 노론쪽에서 경종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이른바 「삼급수 살해 사건」을 고변하면서 조정은 충격에 휩싸인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창집·이이명 등 노론 사대신과 많은 노론가 자제들이 사형당하면서 노론은 몰락하는데 이것이 바로 임인옥사다.


게장과 생감

경종의 사인(死因)이 두고두고 의혹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임인옥사 수사보고서인 임인옥안에 세제 연잉군의 이름도 역적으로 등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노론 사대신을 제거한 소론 강경파의 공세는 이제 세제를 향했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과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는 세제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경종에게 양자를 들여 그를 후사로 삼고 세제를 폐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성사되지 못했다.

경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경종의 급서는 효종·현종의 사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파문을 불러왔다. 경종이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정치적, 의학적 정황 증거는 한둘이 아니었다.

정치적 정황 증거는 소론강경파와 경종비가 노론계인 연잉군 폐출을 계획하던 와중에 발생한 사건이란 점이었다.

의학적 견지의 정황 증거도 많았다. 그 하나가 게장과 생감이었다. 경종의 식욕이 부진하자 노론계인 대비와 연잉군이 게장을 진어하고 곧바로 생감을 올렸다. 그런데 게장과 생감은 의가(醫家)에서 꺼리는 상극이었다고 『경종실록』은 적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가슴이 조이듯이 아파왔던 것이다. 그 후 심각한 병세에 빠진 경종의 처방을 놓고 연잉군은 다시 어의와 다툰다. 연잉군이 인삼차를 올리려 하자 어의(御醫) 이공윤이 『자신이 쓴 강한 처방약과 인삼은 서로 상극』이라면서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나 연잉군은 어의 이공윤을 꾸짖어가며 인삼차를 연달아 세 번이나 올렸는데 그 직후 경종이 세상을 떴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양자 입적 문제, 의학적으로는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진어문제 등이 경종 독살설을 진실로 믿게 만들었다. 더구나 소론과 노론이 격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역안에 등재된 노론계 세제가 어의와 다투어가며 특별 처방을 고집한 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보아도 문제 있는 처신임에는 분명했다.

의혹의 당사자인 연잉군이 즉위하자 전국 각지에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벽서가 나붙었다. 심지어 군사 이천해란 인물은 즉위한 연잉군, 즉 영조가 능에 행차할 때 어가를 가로막으며 영조를 비난하고 나섰다. 영조는 이천해의 말을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며 사관에게 싣지 못하도록 명해서 실록에는 다만 「들을 수 없는 말(不忍之言)」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영조는 이천해는 물론 경종 시절 자신을 핍박했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사형에 처했으나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김일경과 목호룡은 영조가 『네 목을 베어 대행대왕(경종)의 빈전에 바치겠다』라고 꾸짖자 『나도 선왕(경종) 곁에 묻히기를 원하오』라며 반발했다. 경종의 충신은 영조가 아니라 자신들이란 뜻이었다.

급기야 영조 재위 4년에 소론 강경파가 경종의 복수를 내걸고 영남을 중심으로 군사를 일으켜 경종의 복수와 영조 정권 타도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군사는 조석으로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전군이 모여 곡을 했다. 영조의 정통성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했으나 재위 31년에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 투서사건으로 경종독살설은 다시 재연된다. 국문당하던 소론인사가 『나는 갑진년(경종이 사망하는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경종 독살설을 다시 꺼냈기 때문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정계에서 소외된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이 논쟁은 틈만 생기면 재연됐다. 경종 독살설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급기야 사도세자에게까지 여파를 남겨 조선 왕실사상 가장 큰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경종독살설의 한가운데 있던 인물이다. 영조는 비록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태생적 한계상 노론일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분명히 노론이 선택했기에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영조 당시에 논란이 되었던 「택군(擇君)」논쟁이 대표적이다. 영조는 즉위한 후 경종 때의 임인옥안에 자신이 역적으로 등재된 것에 부담을 갖고 이를 뒤집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영조는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노론과 함께 과거 음울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만약 경종의 양자를 들여 후사를 이으려던 소론 강경파의 계획이 성공했으면 그는 왕위는 커녕 사형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부왕과는 처지가 달랐다.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 어느 쪽에도 정치적 부채가 없었다. 사도세자가 보기에 부왕이 세제 시절 노론과 손잡고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것은 분명 역모로 볼 소지가 있었다. 영조와 노론처럼 경종 때의 행위는 숙종과 영조에 대한 충성이었다고 강변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위는 경종의 위치에서 볼 때 분명 역모에 가깝거나 역모였다.

사도세자는 노론에 불만을 느꼈다. 조선은 사실상 노론의 나라란 생각이 들었다. 부왕 영조가 힘겹게 이끌어오는 탕평책은 한계가 보였다. 부왕 자신이 경종 시절 노론에 부채를 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공격했던 소론에 증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조 31년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투서사건으로 영조의 탕평책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두 사건은 소론에 대한 영조의 자제심을 무너뜨렸고 노론은 이 기회를 이용해 소론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였다. 영조 또한 이에 동조해 두 사건을 역모로 처리한 후 그해 10월 『천의소감』이란 책을 편찬하는데 그 내용은 경종 시절부터 두 사건에 이르기까지 노론을 포함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경종독살설의 한 재료인 「게장」은 대비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방에서 올린 것이라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물론 이는 권력자의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편

사도세자는 소론이 연일 죽어나가는 두 사건의 와중에 노론의 사건확대책에 반대했다. 그는 되도록 두 사건을 온건히 처리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러한 처신이 노론의 결정적인 반감을 사게 된다. 부왕 영조가 분노하는 나주벽서사건에서조차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하는 것을 본 노론은 세자의 정치견해가 소론이란 결론을 내리고 세자 제거의 길로 나선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세자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데다 부인 혜빈 홍씨에게마저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극대화된다. 그의 부인 혜빈 홍씨는 누구 못지않은 노론 골수당원이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라고도 불리는 혜빈 홍씨의 친정은 유명한 노론 가문이었다. 그녀의 조상인 홍주원은 선조(宣祖)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난 정명공주의 부마였으니 당연히 서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은 자신의 딸 홍씨를 세자빈으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한 덕택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파격적인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딸이 세자빈이 된 후 김상로 등과 함께 집권당인 노론을 이끄는 실력자가 되었다. 사도세자가 노론으로 처신하든지 아니면 혜경궁 홍씨가 소론으로 처신했으면 최소한 뒤주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인적 기질에다 강한 성격을 지닌 사도세자가 소론의 처신을 보이며 노론과 대립하자 세자의 외척인 풍산 홍씨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세자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당론을 좇아 세자를 제거하느냐였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동생 홍인한은 물론 혜경궁 홍씨까지 세자를 버리기로 했다. 이처럼 세자의 외척까지 세자가 소론이란 이유로 제거의 길로 나서는 판에 여타 노론 중진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한로, 노론 영수 김상로, 홍계희, 윤급 같은 노론 중진 다수가 이에 가담했다.

사도세자는 안팎에서 고립됐다. 소조(小朝:세자궁)에서는 혜경궁 홍씨가 노론의 간자(間者) 역할을 했으며 대조(大朝:영조)에서는 정순왕후와 후궁 문씨가 세자를 헐뜯었다. 조정의 노론 대신들은 호시탐탐 세자를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런 포위 속에 위험을 느낀 세자는 자구책으로 병을 위장한다. 미행(微行)을 통해 허점을 보임으로써 노론의 예봉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세자의 자구책은 이런 소극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소론과 연합하는 적극적인 것도 포함돼 있었다. 세자는 우의정을 역임했던 소론 영수 조재호와 비밀리에 연합하는 데 성공한다.


노련한 정치인 혜경궁 홍씨

세자가 의문의 관서행에 나선 것도 소론과 결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평안감사 정휘량이 소론이자 사돈 사이였으므로 연합하려 했는데, 정휘량이 홍봉한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수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론에 세자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세자는 관서행을 계기로 자신을 제거하려는 노론의 공세를 신속한 기동력으로 막아낸다. 그러자 노론은 드디어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바로 나경언의 고변이다. 나경언의 고변은 주로 세자의 개인적 비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고변 전후의 사정으로 볼 때 그 핵심 내용은 개인적 비행이 아니라 군사 행동에 관한 내용으로 추측된다. 즉 세자가 군사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역모 고변의 성격을 띤 것이다.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지 29일 후인 영조 38년 윤5월13일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세자는 여드레 동안 뒤주 속에서 신음하다 죽었다. 세자가 죽던 날 영조는 『13일의 일은 종사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개인적 비행이라면 종사까지 들먹였을 리가 없다. 또한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주장한 대로 세자의 정신병 때문이라면 솜씨 있는 어의들을 동원해 치료하거나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휴양을 시켰지 뒤주에 가두어 죽일 이유는 더욱 없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노론의 정치공세에 희생되었다는 점은 세자와 연합한 소론 영수 조재호가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던 셋째 날 『조재호가 세자와 결탁했다』며 영조에게 고해 바친 인물은 다름아닌 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들은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한 정치적 의도를 읽지 못하고 그 내용을 전적인 사실로 받아들였기에 많은 오류를 범했다. 엄밀한 자료 해석과 검증 과정을 생략한 탓에 「영조의 이상 성격과 세자의 정신병 때문에 뒤주의 비극이 발생했다」는 홍씨의 의도적 변명에 말려든 것이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서술한 때는 뒤주의 비극이 발생한 영조 38년(1762) 직후가 아니라 순조 5년(1805) 이후다. 즉 이십 후반의 청상과부로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칠십대의 노회한 정객으로서 『한중록』을 서술했다는 말이다.

홍씨가 『한중록』을 서술한 목적은 단 하나 「친정을 신원시키기 위해서」였다. 홍씨의 친정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그날부터 급전 직하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이유는 바로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이란 이유에서였다. 실제 그녀의 오빠 홍낙임은 정조를 축출하고 은전군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련된다.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가 즉위한 후 그녀의 친정은 대리청정하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다시 한 번 단죄되었는데 그후 정순왕후 김씨가 죽자 비로소 가문의 신원에 나서서 『한중록』을 작성한 것이다. 「현실은 살아남은 자의 것」이란 경구를 입증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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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조선왕독살사건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왕독살사건으로 재판 인종에서 고종까지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의 임금들을 조명한 저서.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 서-제14대 선조,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소현세자, 사라진 북벌의 꿈-효종 등 조선조 9인의 임금과 세자 에게 뒤따라다닌 사인의 의혹과 진실을 파헤친 책.

목차
<누가 왕을 죽였는가> 개정판에 부쳐

1.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제12대 인종) - 이질 증세와 주다례
폐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서른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백돌아! 백돌아!
홀로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존하겠소
문제의 '주다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2.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제14대 선조) - 중풍과 찹쌀떡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주상의 뜻
어젯밤엔 편히 잤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문제의 찹쌀밥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사실처럼 굳어진 독살설

3.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소현세자) - 학질과 의관 이형익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볼모로 가는 두 형제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부정父情 아닌 부정否定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아담 샬과의 만남
비운의 귀국길
인조에게 쏠린 몇 가지 의혹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세자 일가의 비극
조선의 좌절, 세자의 좌절

4. 사라진 북벌의 꿈(제17대 효종) - 종기와 어의 신가귀의 산침
소현세자의 유산
용상에 가려진 효종의 아킬레스건
모든 것은 북벌로
효종의 딜레마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손을 떠는 어의 신가귀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5. 예송시대에 가려진 죽음(제18대 현종) - 복통과 뜸 치료
효종의 모후 자의대비과 입어야 할 복제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4가지 이유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예론을 금하노라
며느리상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의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6. 이복형제의 비극(제20대 경종) -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아이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두 모자의 운명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왕세제를 책봉하소서
경종의 진심
목호룡의 고변
적발하여 정법하라
게장, 생강 그리고 인삼차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

7. 개혁군주의 좌절(제22대 정조) - 홧병과 연훈방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3대 모역 사건
규장각과 장용영 그리고 화성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아서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훈방 처방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정순왕후의 세상

8.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제26대 고종) - 해외 망명 계획과 식혜
홍선군의 아들 명복
고종과 일본의 악연
국내의 혼란과 일본의 내정간섭
일본의 병탄과 고종의 대응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고종의 해외 망명 작전
마지막 군주의 최후
고종이 해외로 망명했다면

조선엔 왜 독살설이 많을까

[알라딘 제공]


책소개

"누가, 왜 조선의 왕들을 독살했나"

제12대 인종(1515-1545), 제14대 선조(1552-1608), 소현세자(1612-1645), 제17대 효종(1619-1659), 제18대 현종(1641-1674), 제20대 경종(1688-1724), 제22대 정조(1752-1800), 제26대 고종(1852-1919).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왕조에서 독살설에 휘말렸던 임금은 무려 8명이나 된다. 조선왕조가 배출한 왕이 27명인 것을 감안하면 조선은 지구상의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던 왕조였다.


누가, 왜 왕들을 죽였나.

실제로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에겐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는 꼭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했고,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독살설은 또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집중돼 있다.
왜 그럴까?

<사도세자의 고백>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등 숱한 대중적 역사서로 인기몰이를 한 바 있는 이덕일 숭실대 교수는 ''누가 왕을 죽였는가''의 개정증보판으로 내놓은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에서 흥미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 망했어야 할 조선왕조의 기형적인 정치행태 ''독살''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우선 역사가 ''너무'' 장구했다. 세계 역사상 대개의 왕조는 200~300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는데, 조선은 쇠퇴기ㆍ멸망기에 접어든 뒤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라는 것이다.

무릇 한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에서 시련을 극복 못하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야 하는데, 유독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돼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살아 있었다.

이덕일 교수는 조선왕조의 쇠퇴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본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일본의 침략에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을 두고 혼자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부터 조선의 사회체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지배 계급은 군림의 이유를 상실했다는 설명이다. 백성들이 국왕인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지른 행위는 사대부→일반백성→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제 자체를 부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는 사대부들의 권력 획득 방식 ''독살''

개국 초 조선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가리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 국가였다. 그러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포 납부로 군역 면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1488-1544)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포 납부로 군인 고용)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병역의무가 면제됐다.

저자는 "개국 후 200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미 생명 사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고 평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고, ''국왕 독살설''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중 하나다. 독살설이 유독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부터 본격적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약한 왕권(王權)과 명분 없는 신권(臣權)의 합작 ''독살''
 
조선 후기 들어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왕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닌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 신하들은 왕을 적당(敵黨)의 일원으로 봤다.

저자는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로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며 "오히려 끊임없이 신하들의 견제를 받는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임금은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으며, 신하들은 당론에 따라 얼마든지 특정 임금을 배척했다. 신하의 임금 선택을 ''택군(擇君)''이라고 하는데 국왕 독살설이야말로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의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반정(反正)이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 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저자는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독살"이라며 "독살설이야말로 왕조의 말기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 이후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프레시안 2005.07.29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이제서야 소감을 쓴다. 남들처럼 근사한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글솜씨도 없고 길게 쓰는 재주는 더더욱 없어서 미루고 미뤘는데 요즘 MBC 드라마 '이산 (정조)'를 보면서 그때 느꼈던 흥분을 다시 느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책장을 넘기면서 숨이 가쁠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서를 좋아해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시기에 마침 저 책을 읽은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조선왕 독살사건'이랑 '누가 왕을 죽였는가', 둘이 다른 책인 줄 알고 두 권을 다 골랐었는데 알고 보니 전자는 개정판이었다. 처음에 '누가 왕을 죽였는가'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그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좀 점잖게 고쳐서 재판했다.

특히 내가 흥분했던 부분은 인종, 경종, 정조 이야기다. 책 읽기 전부터도 조선의 왕 중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책 읽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숨을 씩씩 몰아쉬곤 했다. - 난 지금도 사극을 보거나, 인수대비나, 문정왕후, 선조, 인조, 정순왕후, 망할 놈의 노론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른다. 몇백년이나 된 일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화를 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ㅋ

불쌍한 정조대왕님.ㅜㅜ 
인생 참 험난하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죽었고, 외할아버지란 사람은 역적들이랑 짜고 사위랑 손자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고, 친할아버지 영조는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맨날 천날 충성심을 시험하질 않나...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의복을 갖추고 잠자리에 들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루 4시간 이상을 잔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을 잇는 천재군주, 만능군주,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대왕께서 그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 역사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ㅜㅜ

정조 사망시에 아니 정조 대왕 승하시에 그 옆에 정순왕후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책을 100% 믿기도 어렵지만 정순왕후 같은 여자면 능히 정조를 독살하고 남았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영조가 정조를 꽤나 아낀 걸로 나오는데... 만약 진짜 드라마 '이산' 같았다면 영조도 참 불쌍한 왕이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뒤늦게 후회를 하니 영조는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오죽 참담했으랴.


이 책은 조선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더욱 즐길 수 있다. 어릴 때 인상깊게 읽었던 왕후 간택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순왕후-_-;;는 알수록 망할 X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것이다.

아..  혈압올라.ㅠ 글쓰다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지네..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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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이해 - 왕과나]'안방의 제왕' 인수대비 

( 이덕일·역사평론가 )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남존여비 강요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즉위한 1455년, 만 열여덟 살의 며느리 한씨도 비로소 세자빈이 됐다. 결혼 당시 남편은 대군 아들에 불과했으나 그녀는 이때 이미 시아버지가 임금이 되기 위한 포석으로 자신을 며느리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수대비(1437~1504)의 아버지 한확(1403~1456)은 조선 제일의 중국통이었다. 태종 17년(1417) 명나라에 공녀로 간 그의 누나가 황제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덕분이었다. 성조는 한확에게도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란 벼슬을 내리고,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했을 때는 조선인인 그를 사신으로 임명해 고명(誥命)을 줄 정도로 총애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한확이 수양 편에 선 것은 딸 때문이었다. 정난 1등 공신에 책봉된 한확은 수양대군의 의도대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즉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한확은 귀국 도중 만주에서 사망했는데,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놀라고 슬퍼”했지만, 세조의 즉위를 왕위 찬탈이라고 본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고, 이런 민심에 그녀는 상처받았다. 남편 의경세자가 세조 3년(1457) 만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더했다.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한 달 전에 죽었는데도 세조가 단종을 죽였기 때문에 단종의 모후 현덕왕비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의경세자의 죽음은 그녀가 꿈꾼 왕비의 길이 좌절됐음을 뜻했으나 10년 후에 기회가 찾아왔다. 세조의 후사인 예종이 1년 2개월의 짧은 재위 끝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 세 살짜리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한씨는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자신이 있었다. 천하의 권신 한명회가 사돈이었다.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기도 했으나 세 살 짜리 손자 대신 열 두 살짜리 사위 자을산군(성종)을 선택했다. 성종보다 세 살 위의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한명회같은 장인이 없었다. 한명회와 밀약한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유명이라는 명분을 댔으나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대비의 말을 반박하고 나올 인물도 없었기에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임금이 될 수 있었다.

1469년 성종이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자 한씨도 왕후로 높여지고 동시에 대비가 됐다. 그녀는 조선의 모든 여성을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대비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종 6년(1475) ‘내훈’(內訓)을 펴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나라의 치란(治亂) 흥망(興亡)이 비록 남자에게 달려 있지만 부인의 착하고 그렇지 않음에도 연결돼 있으니 부인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여성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녀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학문은 성리학이었는데, 성리학 이념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녀가 ‘내훈’의 「부부장」에서 “아내가 비록 남편과 똑같다고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예로써 마땅히 공경하고 섬기되 그 아버지를 대하듯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남편이라는 직책은 높은 것이 마땅하고 아내는 낮은 것이니, 혹시 남편이 때리거나 꾸짖는 일이 있어도 당연히 받들어야 할 뿐 어찌 감히 말대답하거나 성을 낼 것인가?”라고도 했다. 그녀의 ‘내훈’은 남녀가 비교적 자유롭고 평등했던 고려시대의 유제가 남아 있던 조선 초기의 여성들을 강하게 억압했고, 때로는 충돌했다. 인수대비와 며느리의 충돌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왕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내훈’에서 말한 “(남편에게는) 오직 순종할 뿐 감히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윤씨는 궁에 들어오기 전에 베를 짜서 팔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의 효녀였지만, 남편 성종의 호색(好色)을 달게 받아들이는 열녀(烈女)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성종의 바람기에 제동을 걸면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전하지만, 정사인 ‘성종실록’에는 오히려 성종이 윤씨의 뺨을 때린 내용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다툼의 진상은 분명치 않다.

그러던 중 후궁들과 성종의 총애를 다투던 왕비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을 바른 곶감이 발견됐다. 곶감을 둘러싼 의혹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인수대비는 성종이 아니면 후궁들을 죽이려는 의도로 단정지으면서 그녀는 위기에 빠졌다. 인수대비는 윤씨를 폐출시키려 했다. 왕비 폐출에 대해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것이 문제였으나 인수대비는 걱정하지 않았다. 고모 한씨가 선제(先帝)의 후궁으로서 황제의 효도를 받는 위치였으므로 사촌 한한을 사신으로 보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윤씨는 비록 쫓겨났으나 원자의 생모였다. 폐출된 지 3년째인 성종 13년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경연에서 윤씨에게 처소를 장만해주자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그녀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대사헌 채수(蔡壽)가 이 주장을 지지하자 성종은 “원자에게 잘 보여 훗날을 기약하려는 것“이라고 분노했으나 사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삼대비(인수대비·정희왕후·안순왕후)는 한글 문서를 조정에 내려 윤씨가 “우리들이 바른말로 책망을 하면,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았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6년 전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며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한데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므로, 삼대비의 총애를 받았다“고 쓴 교명(敎命)과는 정 반대의 내용이었다.

민심은 인수대비의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폐비 윤씨의 억울함을 동정했다. 그러자 인수대비는 이런 여론에 정면으로 맞서 윤씨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결국 윤씨는 인수대비의 주도로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은 재위 10년째 드디어 복수에 나섰다. 성종의 두 후궁을 때려죽인 연산군의 분노는 인수대비에게 향해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고 대들었다. ‘연산군일기’는 그녀가 연산군의 이런 모욕 때문에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었다’고 적고 있다. 연산군은 나아가 삼년상으로 치러야 할 국상을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로 25일만에 마쳐버려 확신으로 가득 찼던 대비의 인생을 조롱했다. 사랑이 최고의 이념인 줄 몰랐던 할머니와 용서가 최고의 무기인 줄 몰랐던 손자의 충돌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모든 것이 부정되면서 그녀의 성리학 이데올로기는 조선 여성들이 받들어야 할 이념이 됐고, 조선은 극심한 남존여비의 나라가 되어 갔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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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사림파들이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
원래 '사림(士林)의 화'라는 말로서, 사림파의 입장에서 쓴 말이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있다.

사림이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자주 쓰이게 된 것은 학통으로 보아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신진사류가 15세기 후반에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였다.


성종 연간에 처음으로 김종직·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이 정치세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근거지역을 기준으로 영남사림파와 기호사림파로 나누어지기도 하는데, 주로 비거족계(非鉅族系) 재지사족 출신이 주축이 되고 일부의 훈구계 가문 출신이 포함되었다. 이들의 활동시기는 크게 나누어 성종과 연산군 초기에 일어난 무오·갑자 사화에 의하여 축출될 때까지와, 중종반정 이후 점차 세력을 형성했던 중종 연간의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사림파는 기존의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활동을 전개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사상을 실천하고자 했다.

 이에 반해 훈구파는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의 특권을 독차지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그런데 보다 강력한 인신적 지배예속을 매개로 농장과 같은 것을 통하여 토지를 광점하고 농업인구를 독점하고 있었던 훈구파에 대하여, 방천(防川) 등을 통하여 자신의 농지를 확대하면서 소농을 기초로 경제력을 키우고 있었던 사림파는 그러한 행위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기초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사초로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이는 물론 그 글의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유향소 복립 운동을 하면서 훈구파와 대립하고 있었던 사림파가 훈구파가 저지른 각종의 경제적 비리를 비판했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갑자사화는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제거된 상태에서 연산군과 궁금(宮禁) 세력이 훈구파까지 제거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훈구파가 가지고 있던 각종의 재산을 탈취하려는 의도였다고 하지만, 정치세력의 배치로 보면 조선시대의 관료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결과였다. 조선의 관료제는 군주의 권한이 절대적이라든가 전제적일 수 없는 것이었는데, 이미 무오사화를 통하여 관료의 상당 부분이 약화된 상태에서 관료세력에 대한 타격이 군주에 의해서 재차 이루어졌다.

기묘사화는 1515년(중종 10) 왕비 책립 때의 대립을 시작으로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사림파를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으로 제거한 것이다. 중종반정 이후 얼마간은 반정을 주도한 훈구파에 의하여 정국이 운영되었다. 1515년 무렵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파가 정계에 다시 진출하면서 반정공신의 위훈삭제를 계속 주장하는 한편, 천거제인 현량과(賢良科)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여 자파인물을 모으고, 향촌사회에서의 향약실시와 〈소학〉을 강조하면서 군주의 수기(修己)를 역설했다. 그러나 위훈삭제 결정이 있자 곧 사화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기묘사화 이후 향약은 일시 시행이 정지되었으며 〈소학〉은 금서아닌 금서가 되어 감추어지기까지 했다.

을사사화는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尹任)을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이 몰아낸 사건이다. 기묘사화로 사림파는 크게 타격을 받았고 20년이 지난 이후 서서히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사림파를 비호했던 윤임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제거된 것이다. 싸움은 외척간에 벌어졌으나 사림파도 다수 제거되었다.

이밖에도
정미사화(丁未士禍) 등의 작은 사화가 몇 차례 일어났다. 사화는 대개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는 세력간의 다툼이었다. 즉 지배계급 내부의 다툼으로 일어난 정치론의 차이와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갈등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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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에게 폭군이란 딱지는 누가 붙였을까?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22]실록에 그려진 연산군

▲ 영화 <왕의남자>에서 연산군역을 맡은 정진영.
ⓒ 이글픽처스

왕은 왕이로되 왕이 아닌 왕이 바로 연산군이다. 이러한 연산군이 영화 <왕의 남자>가 뜨자 새로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소설과 연극, 영화,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 등장한 연산은 폭군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번에 뜬 연산군은 마마 콤플렉스에 힘들어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연산군은 폭군이었을까? 그의 재위기간 12년은 실록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연산군일기>로 남아있다. 내용 또한 패악으로 그득하다.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로 학습하고 그것을 자료로 만들어진 소설을 읽고 영화 연극 드라마를 접한 우리들은 그를 폭군으로 기억한다. 이는 <연산군일기>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한데 따른 폐해라 할 수 있다.

조선실록은 그 기록성에 있어서 세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성에 있어서는 미흡한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적자 후손 또는 방계혈통으로 이어지는 왕통의 연결고리에서 냉정한 객관성을 유지하는데 한계점이 있었다.

▲ 연산군이 19세의 나이에 왕으로 등극했던 창덕궁 인정전
ⓒ 이정근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처럼 반정 시 전위자의 기록은 반정을 기정사실화해 반정의 시각으로 기록해야 했다. 즉 성공한 쿠데타이기에 성공자의 눈높이에 맞춘 맞춤형 기록이라는 뜻이다. 또한 실록 자체의 당위성을 검증할 기회를 원천봉쇄했고 후대에 수정보완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 후대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흥미 본위의 긴장감을 극대화 하고 극적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그를 폭군으로 과장하여 그렸다. 실록 어디에도 연산군을 폭군이라 지칭한 말은 없다. 작가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든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일 뿐이다.

1910년대 이후에 발표된 소설에 등장하기 시작한 연산은 폭군 일색이다. 작품성을 위하여 그려진 폭군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셈이다. 하지만 이 시기가 일본 제국주의가 발호하던 시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이라는 국가를 이조(李朝)라 폄하하고 사색당쟁에 패망할 수밖에 없는 국가로 매도하며 자신들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 하려 했다. 자의든 타의든 황국사관에 일조한 셈이다.

▲ 연산군이 반정군에 폐위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될 때 건넜을 갑곶나루터. 연산군은 살아서 이 바다를 건넜고 백골이 되어 이 바다를 건넜다. 현재는 강화대교가 놓여있다.
ⓒ 이정근

우리는 반복되는 학습에 익숙해진 셈이다. 무의식중에 반복되는 교육은 본의 아닌 결론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공산당은 이마에 뿔이 나고 도깨비처럼 생겼을 것이라는 교육을 받고 그럴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만나보니 뿔도 나지 않고 도깨비처럼 생기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반복학습의 결과는 이렇게 황당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다면 <연산군일기>는 누가 썼을까? 그를 권력의 자리에서 밀어낸 반정공신들의 입김이 서린 자들이 썼다. 때문에 그를 폭악무도한 폭군으로 깎아 내리고 인륜을 파괴한 패륜아로 낙인찍어야 자신들의 쿠데타 명분을 얻을 수 있기에 과장하여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대 조선실록 중에서 <연산군일기>만큼 역사적 사실을 작의적으로 기록한 실록도 없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실록의 생명은 객관성이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 사료를 바탕으로 엄선된 인물들이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하지만 <연산군일기>는 그가 반정군에 의하여 권좌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후에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승자의 기록이다. 연산은 패자다. 패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 <연산군일기> 총서 전문
ⓒ 이정근

조선시대 역사적 사료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역대 왕 실록 중 실록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일기로 남아있는 것이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다. 그 <연산군일기>를 한마디로 압축하는 <연산군일기> 첫 장 총서에는 연산군의 실정과 패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사관들이 사초에 근거를 두고 기술하였겠지만 의도된 작의성이 엿보인다. 여기에 <연산군일기> 총서를 그대로 옮겨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연산군, 휘(諱) 융(㦕)은 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 의 맏아들이며,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尹氏),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 의 딸이 성화(成化) 병신년 11월 7일(정미)에 낳았다. 계묘년 2월 6일(기사)에 세자(世子)로 책봉(冊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명회(韓明澮) 등을 북경(北京)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5월 6일(정유)에 황제가 태감(太監) 정동(鄭同) 등을 보내어 칙봉(勅封)을 내렸다.

소시(少時)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로서 공부하기를 권계(勸戒)하는 이가 있으매,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즉위하여서는, 궁안에서의 행실이 흔히 좋지 못했으나, 외정(外庭)에서는 오히려 몰랐다.

만년(晩年)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거의 다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교동(喬桐) 에 옮기고 연산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 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


▲ 상서원 현판. 승정원과 함께 왕명을 출납하던 곳이다. 연산은 승정원에 어제시를 내리고 정원들로 하여금 답시를 올리도록 했다.
ⓒ 이정근

庸質臨臣十載回(용렬한 자질로 위에 있은 지 10년이 되었건만)
未敷寬政愧難裁(너그러운 정사 못하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네)
朝無勉弼思宗社(조정에 보필하고 종사 생각하는 자 없으니)
都自沖吾乏德恢(나이 어린 이 몸이 덕이 없나 보구료)


연산10년 3월에 지은 연산군의 시다. 연산군은 이러한 시를 지으면 혼자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승정원에 내려 보내 정원들로 하여금 답시를 지어 올리게 했다. 자신의 실책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신하들과 교감하고 시적 토론을 하자는 뜻이 담겨있다.

妄節投身熾火中(지나친 절조로 몸을 불 속에 던졌으니)
徒知高義不知通(높은 절의만 알고 변통 모르네)
虛名處理無相亂(헛된 명예 때문에 흐리지 말라)
正似飛蛾赴燭紅(불보고 날아드는 나비 같으니)
深院無人麗景融(심원에 사람 없고 경치만 아름다워)
桃凝香露醉春風(이슬 맺힌 복사꽃 봄바람에 취하였네)
須緣濃雨添嬌蘂(듬뿍 맞은 비로 꽃술이 더 예뻐라)
手折芳枝拭艶紅(꽃다운 가지 꺾어 요염한 꽃 닦아주리)


평제를 독살한 다음에 유자영을 황태자로 세워놓고 자신이 가황제노릇을 하다 찬탈하여 진황제가 되었던 한나라의 효평황후가 반정군에 쫓기어 불속에 몸을 던져 죽었던 고사를 인용하여 연산군이 권좌에서 쫓겨나기 1년 전, 그러니까 연산 11년 11월 5일에 지은 시다. 역사를 모르면 지을 수 없는 시다.

▲ 도봉산 자락에 초라하게 누워있는 연산군.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군부인 신씨다.
ⓒ 이정근

연산군은 태어날 때부터 폭군은 아니었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추앙받는 아버지 성종의 원자로 태어난 연산은 성종이 승하하자 뒤이어 조선 10대 왕에 즉위했다. 즉위 초기에는 정치에 서툴기도 했지만 할머니 인수대비의 말을 잘 따랐다.

심성도 여리고 감성도 풍부했다. 시(詩)도 130여 편을 썼다. 학문의 깊이가 없으면 쓰지 못하는 것이 칠언절구다. 훗날 반정군에 의하여 대부분 불태워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연산군일기에 120여 편의 시가 남아있어 그의 시심(詩心)을 오늘에 전한다.

서모 자순대비(장현왕후)를 친모로 생각하고 깍듯이 모셨다. 훗날 중종으로 즉위한 이복동생 진성대군도 사랑했다. 그가 진성대군을 견제했더라면 진성대군이 중종이라는 용상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살육이 춤추는 광기의 시대에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2006-03-07 16:3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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