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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셜록홈즈님의 블로그 : http://blog.daum.net/s203039/6725428

===> 이게 원 출처인줄 알았지만 그도 또한 아니고, 이 분도 출처를 안밝혀서 원래 출처는 알 수 없음....ㅠㅠ


조선의 3대 요부, 장녹수와 장희빈 그리고 정난정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될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 중 임금의 사랑스러운 애첩이었던 장녹수와 장희빈은 궁궐 깊숙한 곳에서 '왕실 정치' 를 했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비슷한 점을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장녹수와 장희빈, 이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들 중 누가 더 조선조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는가?

왕의 남자 장녹수 강성연



장녹수 - 미천한 출신, 그리고 야망.


장녹수와 장희빈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신분 상승에 대한 지독한 야망을 감추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은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19년에 충청도 문의현령까지 지냈으나 더 이상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었고 신분도 노비출신으로 천인 중 천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면 자녀는 자동으로 천인이 되었으며, 그 자녀의 소유권은 모계를 따라 가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장녹수는 태어날 때부터 '노비의 딸' 로 평생을 노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신분도 미천한데다가 가난하기까지 했던 장녹수의 젊은 시절은 비참하리라만큼 불행했다. 제안대군의 종과 결혼해 아기까지 낳았던 장녹수는 돈을 벌기 위해 여러번 몸을 팔았고 돈에 쪼달리자 가정을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가정을 버린 장녹수는 몸을 파는 천기의 수준에서 벗어나 술과 기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정식으로 기생으로 데뷔했다. 뛰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앳된 외모와 여성스러운 애교를 지니고 있었던 장녹수는 단박에 명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연산군의 눈에 띄어 궁궐로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실록에서 '자못 아름다웠다'라고 전하는 유일한 여인, 장옥정

희빈 장씨 얼굴 상상도.



장희빈 - 숙종을 유혹하다.

극적으로 궁궐에 들어간 장녹수에 비해 장희빈(장옥정)의 입궁은 철저히 계산적이었다. 장옥정의 숙부 장현은 실록에 "국중의 거부" 라고 기록될 정도로 대단한 부를 모은 인물이었지만 어머니가 노비출신이었던 까닭에 그녀는 천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비로서 어미가 겪은 설움과 치욕을 보고 자란 옥정은 천인 딱지를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사회는 '서인'과 '남인' 의 정쟁이 극에 달았던 때였고 남인에 몸을 담고 있던 옥정의 가문은 남인을 위해 옥정을 궁녀로 입궐시킨다.

당시 궁궐은 남인이었던 장렬왕후(대왕대비) 와 서인이었던 명성왕후(대비)의 기 싸움이 한창이었던 때였고 장렬왕후는 옥정을 숙종에게 소개시킴으로써 정권획득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 타고난 미모와 매력을 가지고 있던 옥정은 20살 혈기왕성한 숙종을 유혹하는데 성공했고 그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다.

숙종의 사랑을 받게 된 옥정의 위세는 자못 등등했으나 당시 궁궐 최고의 권력자이자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명성왕후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명성왕후는 옥정을 "요악하고 사악하며, 덕이 없고 천하다." 라는 명목으로 궁궐 밖으로 쫒아냈고 서운해하는 숙종을 위해 민유중의 딸을 중전으로 간택한다.

이가 바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였다.


장녹수 - 왕을 가지고 놀다.

왕의 남자 장녹수, 연산군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연산을 가지고 논 것은 장생과 공길이었지만 실제로 연산을 가지고 놀았던 것은 장녹수였다. 그녀는 왕이라는 자리에, 궁궐의 법도에 지겨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연산을 가장 세속적이고 천박하게 만들어 놓는 특별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연산의 불행한 가정환경을 잘 알고 있던 녹수는 연산에게 '엄마' 와 같은 존재로 다가갔다. 이미 예전부터 그녀는 남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남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지독히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녀는 연산에게 "야, 이놈" 등의 상소리를 해댔고 그를 조롱하기도 했으나 연산은 그런 녹수의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녹수는 연산에게 '첩' 그 이상의 존재였다. 연산의 왕비였던 신씨는 엄숙하며 상당히 정숙한 인물이었고 연산은 그런 신비를 '왕비' 로써 존중했다. 연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일에 광분해 칼을 들고 대비전에 쳐들어 갔음에도 대비를 쳐 죽이지 못했던 것은 대비전 앞에 중전 신씨의 가로막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정숙하고 위엄있는 신씨에 비해 녹수는 과하리만큼 본능에 충실하며 연산의 몸과 마음을 모두 품어냈다. 연산은 어떤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웃었고 그녀에게 놀라울만큼 많은 재물을 하사했다. 녹수의 집을 건축할 때 대간을 보내 감독을 시킨 것이나 내시와 승지 등에게 그녀의 가마를 뒤따르게 했다는 기록은 당시 녹수의 권세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비록 장녹수는 연산의 총애에 비해 인사 청탁에 적극적인 모습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종친과 조정관료들의 굽신거림을 받았고 뇌물과 투기, 재산모으기에는 혈안이 되어 있었다. 천한 출신의 기생이 임금의 비호 아래 갖은 이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조선사회가 용납할 수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서오릉(장희빈의 묘)


장희빈 - 중전의 자리에 오르다.

장옥정의 재 입궁은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의 승하 이후에 이루어졌다. 인현왕후는 장옥정을 그리워하는 숙종을 위해 장옥정의 재입궁을 손수 지휘했다. 살아 생전 명성왕후가 했던 "장옥정은 덕이 없고 사악하니 조심해야 할 것이오." 라는 경고를 무시했던 것은 인현왕후의 가장 큰 실수였다.

궁궐에 다시 들어온 장옥정은 놀라우리만큼 초고속 승진을 했다. 석녀였던 인현왕후에 비해 자식복까지 있었던 장옥정은 숙원, 소의의 자리를 거쳐 정 1품 '빈' 의 자리에 올라섰고 자신의 아들을 세자의 위치까지 밀어 올리며 기세 등등한 위엄을 누렸다.

장희빈의 성공은 곧 남인의 성공이었다. 남인은 장희빈의 비호 아래 정권을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곧 서인의 심볼마크 였던 인현왕후를 폐위 시키는데 성공한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와 세자의 어머니라는 이점으로 민비의 뒤를 이어 중궁전 주인자리를 꿰차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장희빈과 오라비인 장희재의 포악함은 극에 다달았다. 장희재의 집 앞은 뇌물과 각종 재물을 바치기 위한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뇌물의 값에 따라 벼슬이 나누어졌다. 인사청탁에 소극적이었던 장녹수에 비한다면 장희빈은 적극적일 정도로 매관매직에 혈안이 되있었다.

이 또한 남인 정권의 묵인이 있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장녹수와 장희빈, 같은 점과 다른 점.

그렇다면 사랑을 이용하여 조선을 자신의 치마폭 속에 놀렸던 장녹수와 장희빈 중 누가 더 권력의 중심에서 조정을 좌지우지 했을까?

여러가지 정황을 살펴볼때, 판정승은 "장녹수" 이다. 장녹수는 혼군인 연산군을 이용해, 임사홍 등과 결탁하여 사화를 일으키고 인수대비를 결국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 당시 최고의 정권자였다. 다만, 장녹수가 그렇게 정권을 뒤흔들 수 있었던 것도, 대궐의 큰 어른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 인수대비를 죽음으로 몰아 간 것도, 모두 연산군이 폭군 이자 광인 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부귀영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장희빈은 숙종을 통해 신분을 초월하고 왕비의 자리에 올라갔지만 장녹수와는 달리 도리어 막판에는 숙종에게 이용당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장희빈은 남인의 거두를 자처하며 정권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는 했으나, 훗날 날이 가면 갈수록 숙종에게 역이용 당해 환국의 구실로 가차없이 버려졌다.

다만, 장희빈 역시 요화인지라 숙종의 총애가 하늘을 찌를 때의 그 부귀와 영화는 장녹수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장녹수가 그저 연산군의 애첩이었다면, 장희빈은 한나라의 국모요, 국왕의 지어미요, 훗날 임금의 어머니로써의 위세 또한 누려 보았으니 궁궐에서의 위세가 권력에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를 위해 정적인 인현왕후를 비롯하여 앞길을 막는 자는 저주나 모함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가차없이 내려친 인물이었다. 이에 비한다면 장녹수는 후궁의 직위나 국모의 자리보다 현재 보장되는 부귀와 영화를 철저히 즐기는 인물이었다.

즉, 장희빈이 철저하게 숙종의 승하 이후를 계산하여 자신의 부귀영화를 길게 계산하는 미래지향적 인물이었다면 장녹수는 미래 보다는 현재의 위세를 더욱 중요시 하는 현재지향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장녹수와 장희빈의 죽음의 결말도 달라졌는데 장녹수는 그렇게도 자신이 철저하게 이용했던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처참하게 칼질을 당하고 그 시체 또한 백성들의 침과 가래, 돌맹이 세례를 받아 까마귀 밥이 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은 그토록 사랑했던 지아비인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아 목숨을 끊었고 그 시체 또한 세자의 모후라는 이유로 대빈묘에 안치되어 끝까지 예의를 갖춘 보살핌을 받게 되었으니 장녹수와 장희빈의 비참한 결말은 이토록 궤도를 달리했다.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묘가 있는 서오릉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미인을 탐낸다고 한다. 뛰어난 여성적 매력으로 한 시대를 휘어잡은 그녀들은 대단한 난세 속에서 최고의 권력자였던 '왕'을 휘어잡았던 단 한명의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비참하게 파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시대는 영웅을 소명하고 시기가 지났을 때 가차없이 버린다." 는 만고불변의 진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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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당론
1575 년(선조8)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림세력들이 이른바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건이다.
이는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의 추천권을 놓고 벌인 싸움인데, 이 때문에 일제 시대 이래 당쟁의 근본 원인이 개인적 감정 싸움이라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왕실 외척이지만 사람들을 보호한 심의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선배 정치인과, 왕실 외척 지위를 이용한 심의겸의 정치적 비리를 용서할 수 없다는 후배 정치인의 대립이었다.


기축옥사
1589 년(선조22)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통 정여립 옥사, 또는 정여립 반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다.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데도 정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동인 중에서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전라도 지역 서경덕, 조식 학파의 수많은 인물들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이후 심각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정여립이 이씨왕조가 정씨왕조로 바뀐다는 정감록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중반란이라는 설, 선조 임금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일어나게 된 사건이라는 설 등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예송논쟁
왕실에 적용할 상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논쟁으로서, 1659년(현종 즉위년) 논쟁과 1674년(현종 15) 논쟁 두 번이 있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효종과 효종왕비의 상사 때, 어머니 자의대비가 큰아들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둘째 아들 이하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였다. 이는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파견된 분조에서 사실상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는 소군주로서 권한을 행사했지만, 국내에 돌아온 이후 의문 속에 죽음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갑인 복제논쟁은 결국 숙종 즉위년부터 남인 주도 정권을 출범시켰다.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였다. 효종은 아시다시피 인조의 둘째 아들(봉림대군)로 적통이 아닙니다.(적장자는 소현세자) 이 효종이 승하하였는데 문제는 당시 효종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상복을 언제까지 입고 있어야 하는 지가 관건이었다. 서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므로 1년간 입기(기년설)를, 남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지만 왕이므로 3년간 입기(3년설)를 주장하였는데 결국 서인의 1년설이 인정받았다.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 1674년):
효종비인 인선대비가 승하하자 역시 조대비 복제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였다. 서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었기에 그 비인 인선대비 역시 적통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6개월간 상복 입기를 주장(대공설)하였다. 그에 반해 남인은 왕비의 승하이므로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기년설)하였는데 이때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이 때까지만 하여도 서인과 남인은 서로가 정책을 겨루는 붕당정치로 본질을 흐리지 않고 잘 흘러갔다.


경신환국, 경신대출척(1680년):
1680 년(숙종6),  갑인예송 이후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남인 일당정권이 서인에 의해 대규모로 숙청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급격히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 정권교체는 남인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위한 새로운 군대인 체부를 설치함으로써, 당시 숙종의 신임을 받던 서인계 외척 김석주의 군사권을 약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부터는 서로 상대당을 제거하였으며 붕당정치의 본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서인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남인 허견과 왕족 복선군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숙종에 고하여 남인 세력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서인은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분열되여 4색 당파(북인,남인,노론,소론)를 이루었다.


임술삼고변
1682 년(숙종8)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다. 훗날 노론이 된 왕실 외척 김석주, 이사명, 김익훈 등이 밀정을 파견하여 남인들에게 역모를 권유한 후 이를 밀고하는 등의 정탐정치를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물의를 야기시킨 사건이다. 당시 서인 영수 송시열은 이를 자신이 스승의 후손들을 잘못 교육시킨 탓이라 하여 결국 정탐정치를 자행한 이들을 변호하려 하였고, 이를 서인 소장파 인물들이 탄핵하고 윤증 학파가 이에 합세함으로써 결국 서인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반대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기사환국
1689 년(숙종15) 서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남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장희빈이 아들을 (후일의 경종) 낳자, 곧바로 왕위계승권자로 정하려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함으로써 일어났다. 이로써 서인 영수 송시열은 사사당하였고, 서인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되었으며, 장희빈은 왕후에 봉해졌다.

숙종이 희빈 장씨의 소생(연령군)을 세자로 책봉하려하자 서인이 반대하였는데 이에 숙종은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을 재등용하였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하는데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사사되고 많은 서인들이 유배되었다. 숙종은 그 후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렸는데 이에 반대하며 상소를 올린 많은 서인을 숙청시켰다.


갑술환국, 갑술환사
1694 년(숙종20)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정권교체는 서인계와 남인계 일부 집단의 정탐정치 시도에서 발단되었다.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소론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폐비사건을 뉘우치고 있던 숙종은 이 일을 기화로 남인을 숙청하고 소론을 등용하였는데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한다. 폐비되었던 인현왕후가 다시 중전으로 복위되었고, 반면에 장희빈은 왕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기사환국 때 사사된 송시열 등이 복권되었으며 남인은 이 사건 이후 중앙정계로 진출하지 못하였다.

또, 인현왕후가 죽은 후 희빈 장씨의 숙소에서 저주하는 물건이 나오자 숙종은 희빈 장씨를 사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소론은 다음 왕의 어머니이므로 사사는 안된다고 주장하였고 노론은 사사됨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숙종은 노론의 의견을 쫓아 장희빈을 사사하고 노론을 중용하기 시작하였는 데 이것이 후에 또 다른 사건을 낳아 이후 왕세자(경종)의 보호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병신처분

1716 년(숙종40) 이른바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에서, 송시열이 옳다고 판정한 숙종의 처분이다. 갑술환국 이후 대체로 소론이 주도하던 정권이 1710년(경인환국) 이후 노, 소 대립 국면이 되었다가, 이 결정으로 노론 일당정권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윤증의 스승 송시열이 이미 죽은 윤증의 아버지를 욕함으로써,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옳으냐, 그래도 스승을 따르는 것이 옳으냐 하는 난해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때문에 이후 현제와 친척, 같은 문하생 사이에서도 당색이 갈라질 정도로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시켰다.


신임옥사
1721년(경종1) 12월에 노론 주도 정권이 소론 일당정권으로 급변한 신축환국과, 다음해 목호룡이 이른 바 노론 및 연잉군(후일 영조) 측근 인물들의 경종 시해음모를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임인옥사, 이 두 사건을 합쳐서 지칭하는 것이다.

신축환국

신축환국은 노론당이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 직후, 다시 대리청정을 청함으로써 노론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다가, 소론과 남인의 공격으로 실패함으로써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다. 숙종이 죽고 경종이 등극하였으나 몸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후사를 잇지 못하였는데 노론은 당시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후에 영조)을 세제로 삼아 만일을 대비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론은 왕이 젊고 건강이야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라 하며 노론의 불충을 따져 탄핵한다.

임인옥사
이 와중에 목호룡의 고변사건이 터졌는데 목호룡은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고 왕세제인 연잉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고 주장한다. 목호룡의 이 고변은 소론에서 사주를 받아서 한 일이 후에 드러났으나 당시 이 사건으로 노론은 많은 인물들이 화를 입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노론의 4대신으로 전 영의정 김창집, 전 좌의정 이이명, 전 좌의정 이건명, 전 중추부판사 조태채로 이들이 모두 사사됨으로써 노론의 세력이 많이 축소되었다. 노론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을 올바른 노론 붕당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을사환국
1725년(영조1) 2월 영조 즉위 직후 소론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노론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자신을 적극 지지하는 노론당을 통하여 강력한 군주권을 세움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영조의 이도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정미환국
1727 년(영조3) 7월 노론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소론이 주도하는 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변화는 소론을 일망타진하려는 데 급급한 노론당을 퇴진시키고, 그대신 온건한 탕평파 정치집단을 키움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영조의 의도 때문에 일어났다.


무신란, 이인좌의 난
1728 년(영조4) 3월에 일어난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대규모 반란이다.
실제 반란군을 지도하여 청주와 거창을 점령한 남인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이인좌의 난 또는 정희량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 반란은 당시 임금인 영조가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전국에 퍼져 소론과 남인의 급진파가 제휴함으로써 일어났다. 그러나 전국적인 규모의 병란으로 발전한 데는 중간층 및 하층민의 적극적인 참여, 전국적 장시망의 이용 같은 새로운 요소들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영조가 등극하자 소론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이에 당시 소론의 과격파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의문사와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다. 정치적으로 배제된 남인 세력 일부가 참여한 이 난은 후에 영조가 노론만을 중용하게 된 원인이 된다.

-> 조선 후기 당쟁은 왕(숙종)에 의한 계획적인 측면도 있었다. 숙종은 서인과 남인 간의 대결을 통해 왕권 확립을 노리기도 하였으나 이런 잦은 당쟁은 결국 조선의 정치가 보수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서로간에 불신만을 간직하고 비방과 폄하만을 일삼음으로써 당시 사회적 변화를 정치가 못 따라간 것이다.


기유대처분
1729 (영조5) 8월 본격적인 탕평정치가 시작됨을 알린 국왕의 대처분이다. 1728년 무신란이 평정된 이후, 임인년 옥사로 죽은 노론 4대신 중에서 자식이 연루되지 않은 이건명과 조태채의 무죄를 선언하고, 노론,소론,남인 붕당 모두에 충신과 역적이 다 있으므로, 이제는 붕당을 타파하고 각 당파 안의 인재를 함께 쓰겠다고 한 선언이다.


경신처분
1740 년(영조16) 1월에 임인년 옥사로 죽은 노론 4대신 모두는 영조의 왕위승계를 위해 노력했을 뿐이므로 아무 죄도 없다고 결정한 영조 임금의 처분을 말한다. 이와 동시에 4색당파를 모두 등용하는 대탕평이 제창되었고, 사림정치의 상징인 청요직이 혁파되었으며, 세 군영에 의한 도성 수비체제가 완성되는 등 국가 관료체제가 개혁되었다. 이후 김재로, 송인명, 조현명의 탕평파 3상정권이 장기간 유지되는 등, 정국이 안정되었다.


을해옥사
1755 년(영조31) 2월에서 5월까지 당시 영조를 비난한 나주의 괘서사건과 뒤이은 심정연의 과거답안지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소론계 명문 가문과 학자들을 일망타진한 정치적 사건을 말한다.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정치적 사건이 대개 그렇듯이 나주 괘서 사건도 실제 작성자 등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의문투성인데다가, 이를 계기로 지나치게 많은 소론 인물들이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정치적 조작의 가능성도 많다고 지적된다.


임오화변
1762 (영조38) 5월 당시 대리청정중이던 왕세자를 아버지 영조가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을 말한다. 이를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임오화변이라고 호칭하였다. 사건의 원인은 사도세자의 울화병(정신병)에 있었다고 하지만, 직접적인 발단은 석 달 동안 허락 없이 평안도를 여행한 데 있었다. 이 사건은 부자간 갈등의 비극적인 결말 때문에 특히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실제 내막은 아주 복잡하다.


신해통공
1791 년(정조15) 봄, 몇 달 전에 출범한 남인 채제공 독상 정권을 위기에 빠뜨린 서울의 물가폭등과 생필품 품귀 사태 해결을 위해, 채제공이 건의하고 정조가 강력하게 후원하여 밀어붙인 경제구조 개혁조치를 말한다. 당시 국가기관에 일정한 경비를 납부하는 대신 특정 상품의 독점판매권을 가졌던 시전의 특권을 폐지하여 동등하게 판매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서울에서 넓게는 지주들, 좁게는 기득권층의 생산물을 취급하는 대가로 독점판매권을 누리던 시전상인들의 특권이 박탈되고, 농민들의 생산물을 취급해온 도시와 그 주변 소상인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상품유통구조의 변혁이 일어났다.


영남만인소
1792 년(정조16) 4월 사도세자 사망 30주기를 맞아서 영남 지방 사대부 만 여 명이 연명하여 올린 상소문이다. 상소문 하나에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사례는 조선왕조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내용은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충성했을 뿐 실은 아무 죄도 없었음을 선포함으로써, 정조의 군주권을 강화하여 강력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문체반정운동
1792 년(정조16) 10월, 11월에 청나라 패관소품의 경박한 문체를 쓴 노론계 신진기예 남공철, 심상규, 김조순과 소론계 이상황, 그리고 그들의 스승이자 북학파의 지도자 박지원을 지목하여 견책을 내리고, 올바르고 순수한 문체를 공부하여 올리도록 함으로써, 전체 사대부의 문풍을 쇄신하려 한 운동을 말한다. 정치적으로는 노론들이 공격했던 남인들의 서양학 운동 역시 청나라 패관소품의 영향이니, 올바른 학문인 정학이라는 입장에서는 노론과 남인 학문 모두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상호 비방과 공격을 중지시킨 이른바 이열치열의 통치술에 해당한다.


금등사건
1793 년(정조17) 5월
수원 유수로 있던 채제공이 영의정에 임명된 후 '사도세자의 원수를 없애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일어난 시파와 벽파의 격렬한 정쟁을 해소하기 위해, 정조가 신하들에게 보여준 영조의 친필 쪽지를 금등이라고 한다. 영조가 자신을 위하여 죽은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을 후회하는 내용으로서, 영조가 사도세자의 법적 어머니인 정성왕후 위패 아래에 숨겨둔 것이다. 이를 알고 있던 사람은 영조, 정조, 채제공 3인뿐이었다 한다. 이 금등이 공개됨으로써 시파의 정치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지만, 이후 정국은 시파와 벽파의 격렬한 정쟁 상황으로 돌입하였다.


오회연교
1800 년(정조24) 5월 회일에 탕평정치 추진을 위한 자신의 통치술을 신하들에게 자세하게 밝힌 정조의 교시를 말한다. 당시 정조는 정치원칙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영조가 옳다고 처분한 노론의 정치원칙도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또한 다음번 재상은 노론이 기피하는 남인 강경파 중에서 나올 것임도 암시하였다. 그런데 회일은 곧 달이 없는 캄캄한 날이고, 그후 이십 여 일만에 군주인 정조가 사망했으므로, 이를 임금의 죽음과 연관시켜 보통 오회연교라고 한다.


신유사옥
1801 년(순조1) 천주교 신봉자 처단을 구실로 정조가 키워놓은 남인 청류당 인물들을 정계에서 철저하게 제거한 정변을 말한다. 당시 노론 강경파 심환지와 정순왕대비의 인척 김관주 등이 주도한 노론 벽파정권은 천주교 신자들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사도세자의 후손, 혜경궁 홍씨의 친척, 정조의 측근 신하인 노론 시파, 북학파들까지 다수 제거하였다.


을해당론 ~ 신임옥사 까지는 붕당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이고
을사환국 ~ 오회연교 까지는 영 · 정조시대의 주요 정치 사건이며
신유사옥은 정조 사후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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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의 역사
조선시대 4대 사화 - 그 원인과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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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당쟁의 원인을 알고자 한다면 우선 당쟁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당쟁은 조선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익히 들어온 대로, 나라를 쇠망케 한 망국병이기만 했을까?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쓴 <조선시대의 당쟁사>를 보면 조선 중기 이후 정치의 중심이었던 당쟁을 통사적으로 서술해 이런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고있습니다.

조선시대 당쟁사. 1 상세보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펴냄
사림정치와 당쟁의 생생한 기록 <조선시대 당쟁사>는 조선시대의 당쟁을 소개하는 책이다. 광복 이후 우리의 정치사는 전근대적인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잔재를 극복하고 우리 시대에 맞는 정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앞선 조선시대 사림정치의 산물인 당쟁의 속성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당쟁이란 붕당이 갈려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림정치는 세조연간 사림파의 등용에서 기원한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는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젊고 야심찬 사림을 정계에 불러들였다. 주자학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파는 도덕적 수양을 앞세우며 훈구파를 공격했다. 이들의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이 사림파였다. 그 사이 왕권은 약해져 신권에 밀리게 됐다. 그러나 대적할 세력이 없어진 사림은 곧 자기분열해 붕당을 낳고 이들 사이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이었다.”

최초의 붕당은 선조 8년에 관직을 놓고 갈라진 동인과 서인이었다.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 다투었다.

 “당쟁이란 근본이 권력 투쟁이었기 때문에” 자기 당에 유리한 명분·의리를 억지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효종이 죽었을 때 벌어진 예송논쟁이다. 인조의 후취 왕비인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가지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예송 논쟁은 이론을 앞세운 전형적인 권력투쟁이었다.”

예송 논쟁으로 당쟁의 골이 더욱 깊어진 붕당들은 이후 피를 부르는 싸움을 계속하다 “체제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기까지 했다.”  이때 시행된 것이 영· 정조 연간의 탕평책이었다. 그러나 노론/소론, 노론벽파/노론시파의 정쟁을 다독이려던 탕평책은 외척세도정치의 길을 열어주고 말았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순조 이후 정치는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에 완전히 장악됐다.

지은이는 이 시기를 이미 당쟁이 끝나고 일종의 `일당독재'가 행해진 기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무렵 벌어진 수많은 실정과 탐학을 당쟁 그 자체의 산물로 보아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당쟁이 외척세도정치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그 결과만 보고 당쟁 역사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이성무씨의 <조선시대의 당쟁사>中

우선 왜 당파가 나누어졌는가!


출처: 이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을 참조하여 제가 아는 사실과 함께 편집한 것입니다. (약 5년 전에 구한 거라 정확한 출처는 기억이 안나네요.)

동인서인 으로의 붕당
처음으로 당파가 갈린 것은 조식과 퇴계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 동인, 성흔과 율곡 이이를 추종하는 기호학파 서인이었습니다. 동인과 서인의 대결에서 첫 승리자는 동인이었다. 후궁의 손자로서 왕위에 오른 선조는 후궁에서는 아들을 많이 얻었지만 정비인 의인왕후에게서는 딸조차도 얻지 못했다. 서자 컴플렉스가 있던 선조로서는(후궁의 손자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비인 의인왕후에게서 아들을 얻을 때까지 세자 책봉을 미루고 싶은 것이 속마음이었는데, 동인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는 서인의 거두인 정철을 속여 정철로 하여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도록 하여 선조의 진노를 사게 하였다. 이 때 서인들은 쫓겨나고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서인들에 대해 유혈 숙청을 감행하였다.

북인남인의 출현
유혈 숙청의 과정에서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게 된다. 서인들에 대해 사형을 주장하는 과격파들을 북인, 귀양으로 그치자는 온건파들을 남인이라 했다. 북인은 조식의 문하이고 남인은 이황의 문하였다. 서인이 실각한 상태에서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과 남인이 다시 정쟁을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한 남인이 패배하고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대북소북
이렇게 북인이 정권을 잡은 후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는데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지지하던 소북은 광해군의 즉위와 함게 몰락하고 대북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 때 소북은 거의 죽음을 면치 못하고 서인과 남인은 재야세력으로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는데 대북세력은 소북세력뿐만 아니라 서인, 남인 세력을 차례로 제거해 나가기 시작하는 등 대북의 독주가 계속 되었다.

서인남인
그러다가 주로 서인들의 주도하에 인조반정이 이루어지게 되고, 대북은 몰락하게 된다.( 서인과 동인의 대결에서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들이 소북 대북 할 것 없이 모두 몰락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서인과 남인의 대결이 되는 것인데요, 서로에 대한 끝없는 복수가 더욱 치열한 싸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용서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마지막 한 놈까지 적의 씨를 말려죽이자!는 생각으로 정치를 했으니...)

이로부터 한동안 인조의 중립정책으로 인해 서인과 남인은 서로 견제세력으로서 한쪽의 독주를 막으며 정치를 하는 붕당정치의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인조의 둘째아들인 효종이 죽으면서 남인과 서인간에 치열한 예송논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원인은 이러하다.

인조에게는 인렬왕후 한씨라는 왕후가 있었다. 이 왕후는 인조와의 사이에 4명의 아들을 두게 되는데 그 첫째 아들이 소현세자이고 둘째 아들이 효종대왕이며 셋째아들이 인평대군, 넷째가 용성대군이다. 이 왕후는 병자호란이 나기 전에 승하하고 나이어린 장렬왕후가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입궁하게 된다. 소현세자는 청국에 볼모로 잡혀가서 서구의 선진문물을 접하며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흠모하게 된다. 청나라에 원한이 많았던 인조로써는 그런 소현세자가 못마땅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고 돌연 죽어버리는데, 아버지 인조로부터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많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고난 후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모두 귀향보내고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도 폐서인하여 죽여버린다.
그리고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소현세자의 상을 당해 이미 장자의 예로써(첫아들이 죽었을 경우 어머니가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다른 아들들과 다른것이 예법이라고 합니다.) 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다시 효종이 죽었을 때 장렬왕후의 상복입는 기간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서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장렬왕후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같은 예로써 3년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현종이 아직 어릴 때였으니 아무래도 목소리 큰 놈이 이겼겠지요?  이 때만 해도 현종은 예법을 잘 몰랐으므로 서인의 주장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조반정은 당당한 것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왕실이 서인세력에 일종의 빚을 지게 된 셈이었거든요...) 결국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효종의 상을 당해 차남의 예인 1년상을 치르게 된다.

그러다가 8년여 후 다시 효종의 왕후인 인선왕후가 승하하면서 또다시 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된다. 서인과 남인의 싸움은 똑같다. 서인은 인선왕후가 둘째며느리이므로 9개월의 대공설을 내세웠고, 남인은 둘째며느리이긴 하지만 중전을 지냈으므로 큰며느리와 다름이 없다며 1년의 기년설을 내세운다. 이 때는 현종도 많이 장성하여 기반이 확실한 상황이었으므로 자기의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도 둘째로써의 낮은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인의 주장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된다.

그런데 현종이 죽고 숙종이 왕위에 등극한 후 서인측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들이 옳았다고 피력하다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면서 서인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제부터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당파싸움이 계속되는 숙종시대이다. 남인은 이 시기에 망하게 되는 것이다.

숙종은 즉위 직후 아버지인 현종의 뜻에 따라 남인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현종비)는 서인의 딸이었다. 명성왕후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는 예송논쟁에서 일시적으로 남인의 편을 들어 조정의 요직에 기용되어 있었으나 서인측 사람이다.

남인의 영수 허적이 권세를 남용하는 것에 실망을 한 숙종이 훈련대장직을 서인인 김석주에게 넘기면서 남인이 거의 차지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겨주게 된다. 서인들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숙종의 종조부)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숙종의 당숙들 이른바 3복)이 허적의 서자 허견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고 고변하여 남인들을 실각시킨다. 이것이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는 사건이다.

그러다 남인편인 후궁 장씨의 소생 아들로 원자를 삼는 문제로 서인들이 반발하자
(직접적인 원인은 장희빈의 모친을 가마에서 끌어내린 사건입니다.) 숙종은 이를 서인의 딸인 인현왕후에게 원인이 있다고 죄를 물어 폐출하고 서인들을 대거 실각시키며 장씨를 왕후로 올리고 그 아들을 세자로 삼는다.

또 장희빈과 그 아들을 지지하는 남인세력을 다시 집권하게 하며,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그러나 숙종과 장희빈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들의 불화는 정국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숙종과 장희빈의 사이가 벌어지고 또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서인세력은 민씨 복위 운동을 펼친다. 이를 알게 된 남인세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복위운동의 주모자들을 심문하여 사실을 파악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그런데 숙종은 오히려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는 한편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민씨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이 사건으로 남인들은 대거 축출되고.. 그야말로 망하게 되었다
.
(이로써 서인과 대립했던 동인계열은 싸그리 망해버렸습니다. 동인도 그닥 잘한 건 없지만 조선 후기를 깡그리 망친 서인-노론-벽파가 개인적으로 훨씬 더 밉네요. )


노론소론
경종 사망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후일 경종)를 지지하는 세력은 소론, 세자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편에 섰던 숙빈 최씨(최무수리)의 아들인 연잉군(후일 영조)을 지지하는 세력은 노론이 되는 것이다. 세자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숙종이 죽고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얻어 노론을 축출한다.

이 과정에서 소론세력은 노론이 지지했던 연잉군마저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하지만, 효종이래 외아들로만 이어져 내려온 왕실에서 효종의 혈손이라곤 경종 자신과 연잉군 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경종은 동생인 연잉군을 살려준다.
하지만, 소론세력은 어떻게든 노론과 연잉군을 제거하려 하였고, 노론과 연잉군의 입장에서는 서둘러 왕위에 오르지 않고서는 언제 어떻게 죽임을 당하게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돌연 경종이 사망한다. 그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등극하게 되는데 이사람이 바로 영조대왕이다. 영조는 죽을 때까지 형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게 된다.

영조시대 최고의 참극인 사도세자 아사사건의 경우도 이러한 당쟁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조의 입장에서는 분명 소론은 역적이요 노론은 충신이겠으나 사도세자의 시각은 달랐다.

소론세력은 왕인 경종을 지키려 했던 세력이고 노론세력은 왕을 위협했던 세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장차 보위를 이어나갈 세자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고, 영조로써도 수긍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영조는 자신의 정치 기반이었던 노론의 입장에 따라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게 된다.

시파 벽파
이와 함께 소론세력은 영구히 몰락하고 노론은 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뉘게 된다. 시파는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세력이고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대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입장을 가진 세력이었다.

영조가 승하한 이후 왕위를 이은 정조는 이후 시파와 벽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하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정조 이후 어린 왕이 연이어 등극하면서 정권은 당쟁에 의한 것에서 한 집안의 세도에 의해(외척들) 좌지우지 되게 되고 그 유명한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당쟁의 직접적 원인은

당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선조 때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이다. 이조전랑이란 직책은 비록 그 직위는 낮았으나 관리의 임명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래서 그 직책의 임면은 이조판서도 간여를 하지 못하였고 반드시 그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김효원이 그 자리에 추천을 받았는데, 이조참의로 있었던 심의겸이 그를 권력에 아부하는 자라고 하여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김효원의 임기가 다 되어 후임자를 물색할 때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물망에 올랐으나 김효원이 이를 거절하여 서로간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관리와 유생들은 모두 양쪽의 어느 하나에 붙어서 대립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인 건천동에 있다고 하여 동인,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동에 있다고 하여 서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동서분당이 생긴 초기에는 주로 동인 세력이 커서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지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이를 4색 당파라 부르게 되었다.


회니논쟁

당쟁의 의미


"조선시대의 폐단중의 하나가 당쟁이다."

이것이 진실일까요? 물론 당쟁때문에 조선사회가 어려움을 격은것도 사실이지만 그 폐단만을 부각시킨것은 일본인들이 일제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 일제시대때 부각시킨 것입니다.

"조선은 편을갈라 매일 싸우기만한다. 그래서 조선이란 나라는 멸망할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일본이 조선을 바른길로 인도하기위해 조선을 다스려야 한다."

이렇게 조선 백성들을 주눅들게하고 그들의 식민 정책을 타당화 한면이 더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당쟁이 처음에는 학문적인것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권 탈취의 용도로 변질 된것은 사실이지만 당쟁의 장,단점을 확실히 구분하여 우리가 바로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이 글은 몇 년 전에 미니홈피에서 지식인과 제가 보고 있던 책을 참조하여 편집한 것이라서 정확한 원본 출처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문제되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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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閑中錄)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 ∼ 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 · 한문본 · 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 洪樂任 )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 洪國榮 )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마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 을축 4월 일 ’ 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 ( 貞純王后 )가 돌아간 해이다. “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 ” 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東宮內人)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暎嬪)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 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 洪鳳漢 )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 ( 時派 )와 벽파 ( 僻派 )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 ” 라며 분노한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해(정조 19)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이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파헤친 일종의 해명서이다. 그 골자가 되는 세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왕비(貞純王后)의 친정 경주 김씨와 전 세자빈의 친정 풍산 홍씨의 정권다툼으로 작자의 아버지와 아들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홍봉한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宮中 煉 史)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후예로 명문가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도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이다.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그가 비빈(妃嬪)이라는 사실에서,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자료가 된다. 임오화변의 이유 및 홍봉한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실기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속 등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 한중록 〉 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치렁치렁한 문체는 옛 귀인 ( 貴人 )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이 작품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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