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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은 낮은데 관심도와 비난받는 양은 국민드라마급인 '장옥정, 사랑에 살다.'

 

제목 그대로입니다.


지금 장옥정이라는 드라마에서 김태희가 욕먹는 이유는 김태희이기 때문입니다.



김태희가 나오니까 관심도는 높으나
그에 맞는 드라마의 질적인 수준이 뒷받침 되지 않으니
드라마의 타이틀롤을 맡은 김태희에게 욕이 집중되는 것이죠.



그런데 드라마를 볼수록 저는 김태희에게 욕이 집중되는 이 현상이 이해가 되질 않아요.
보면 볼수록 김태희는 기대보다 너무 너무 잘 해주고 있거든요.
김태희 때문에 안봐야지..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 잘 해주고 있는 걸로 보여요. 

 - 팬이 아닌 제 눈에도 -


오히려 제가 보기에
이 드라마는 연출, 대본, 편집이 가장 큰 문제에요.


사극 매니아인 저한테 굉장히 거슬리는 점이 있는데 하나 하나 다 들자면 끝도 없지만..
그중에 단 몇 가지만 들어도..



1. 임금의 곤룡포..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붉은 옷이라야 하지 않나요?
세자도 아니고.. 옷 색깔은 또 왜 그렇게 하늘색;; 조선시대 임금옷으로 너무 어색합니다.


2. 조선시대 패션 디자이너 설정도 약간 뭐잉; 했는데 오늘도 보이는 마네킹;



3. 하이힐은 실수로 보였다고 하더라도.. 김태희만 너무 짧은 저고리 ㅡㅡ;;



4. 임금에게 일반 존대어를 쓰면 안되는데... 너무 막 대하는 느낌이에요.
ex) 주상이.. ~ 하셨소 (X) ==> 전하께오서 ~ 하시었소... 등 극존칭을 써야하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임금 앞에서 대신들은 커녕, 낮은 신분의 사람들조차도 너무 조심이 없네요.

원래 임금 앞에는 똑바로 서지도, 얼굴을 들지도 못해야 하지 않나요.

그 모든게 불경죄에 들어가거늘...


5. 명색이 일국의 중전인데..  중전옷이 나인들보다 더 초라한 건 왜일까요?


6. 또한 양반집 규수라는 애들의 말버릇이 너무 교양이 없군요.


감히 대궐에서 중전에게...
"전하는 요즘도 네가지가 없어요?" 라니... 미친 거 아닙니까? ㅡㅡ;;
주리를 트는 정도가 아니라.. 삼족이 멸함을 당할 정도의 말버릇입니다.

 

400년 전의 궁녀가 "기분 째져~" 이런 말을 사용하는 것도 너무 얼척이 없고요..



6. 임금이 자신을 칭할 때 짐(X) ==> 과인(O)으로 해야 합니다.


이 뿐 아니라 임금이 애정행각을 벌일 때 옆에 궁인들 왜 가만 있나요?
다 뒤로 돌아서야죠.. 이런 디테일이 극을 고급스럽게 만들어주는데...


7. 스토리는 왜 그래 중구난방인지.. 장옥정과 이순 위주로 가야할 것 아닌가요.
7회 뒷부분은 재미있긴 재미있었지만.. 30분 넘게 허적의 난.. 어이구..
실제 사건도 아니고 허구의 역모 사건(복선군 말고 허적)으로 30분 간 망나니 씬을 보여주네요.

 

정치 드라마로 가려면 기존의 정치드라마처럼 진지하게 만들든가...
송시열도 등장시키고, 액션도 제대로 시키고,
리얼하게 사극 분위기를 제대로 내든가..

로맨스 사극으로 가려면 정치 분량도 좋지만..  
장옥정 - 이순 사이의 감정 발전을 보여줘야
헤어졌을 때나 장옥정 사약 받을 때 절절할 거 아닙니까??

그래도 8회는 재미있네요.

아.. 역사랑 상관없이 말입니다.


 


8. 위에서 빼먹고 말 안한 게 몇 가지 있었는데요...
동평군, 치수 등이 옥정이랑 엮이는 건... 도대체 언제..??
지금쯤이면 인물들 관계 설정 다 끝나야 되는 회차 아닌가요? 휴..ㅠㅠ



게다가 이순과의 '호색한' 신에서 김태희 얼굴은 위에서 그렇게 클로접;;;
김태희니까 살아남았지.. 왠만한 미녀라도 그 각도에서 잡으면 다 오징어 됩니다ㅠㅠㅠ



이런 저런 것들로 해서 드라마가 좀 유치하고 고급스럽지 못하게 보입니다.
실제로 처음에 가장 우려했던 부분인 김태희의 연기력이라든지,
유아인과의 어울림(이모 - 조카, 큰누나 - 막내동생..) 이런 건 전혀 안거슬려요. (적어도 저한테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요약:  7회 후반부 재미있었고, 8회부터는 제법 흥미진진했습니다.

 

 

이제 대본 상의 미숙함을 연출에서 잘 조절해서 톤 다운해주고,

편집에서 잘 좀 섞어 주면 시청률도 쑥쑥 오를 것 같네요.

 

 

간만에 진짜 숙종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숙종다운 숙종이 나왔는데...

시청률 때문에 다시 우유부단한 숙종과, 밑도 끝도 없이 사악하기만 한 장옥정은 보기 싫거든요.


 

김태희 유아인 잘 하고 있으니 앞으로 연출, 대본, 편집이 정신차리길 빌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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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은 효종 10년(1659)에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현종 10년 아버지 장경(張烱)을 여의고 숙부 장현의 집안에서 자랐다.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의 집 종이었던 관계로 조대비의 사촌동생인 조사석과 조대비의 조카사위인 숭선군, 그 아들인 동평군 집안과 가까웠다.

장희빈이 살았던 시기는 북벌론을 주도하던 효종이 승하하면서, 1차․2차 예송(禮訟)이 벌어지고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이 벌어지는 붕당정치의 격동기였다. 이러한 격동기에 장희빈은 현종 15년 2차 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는 시기에 궁중에 들어가 2살 어린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궁 밖으로 쫓겨났다가, 숙종 9년 모후 명성왕후가 승하하면서 다시 궁으로 들어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숙종 14년 10월 28일 왕자를 낳고 다음 해 1월 11일에 그 아들이 원자로 정해졌다. 곧이어 5월 2일 인현왕후를 내쫓고 5월 13일왕비가 되었다. 숙종 16년 6월 16일에는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와중에 숙종 15년 2월 2일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2월 4일 제주도로 유배가고 6월 8일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5년만인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다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은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 장희빈은 세자를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숙종 27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무고죄를 받아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장희빈은 효종 10년에 태어나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이 종법을 둘러싸고 예송으로 이념논쟁을 벌이던 현종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양반호포제․노비종모법 ․ 대동법을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보수와 개혁의 대결을 벌이던 숙종대에, 남인 세력과 연결된 숙종 후궁으로 등장하여, 뒤에 경종이 되는 아들을 낳아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여인이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노비제도는 서인이 집권하던 현종 10년에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가 노비라도 그 자식은 양인이 되는 노비종모종량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 현종 15년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노비종모종량법이 폐지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다시 노비종모종량법이 제정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면 그 자식은 양인이 되었다가,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을 앞세워 남인이 집권하자 노비종모종량법은 다시 폐지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이렇게 보수적인 정책을 쓰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니 장길산 같은 도적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민심의 이반을 바로 잡기 위해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여 노비종모종량법을 다시 제정하는 등 개혁을 서두르니, 장길산 같은 도적은 저절로 사라지고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모든 제도의 정비가 추진된다. 이처럼 성리학 이념에 따라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반 가정에서도 첩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아들 못 낳은 적처를 내쫓고 적처가 되어 집안을 차지하려는 것은 성리학 이념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었기에, 장희빈은 숙종 27년 이러한 성리학 이념에 어긋났던 보수세력을 대표해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이와 같이 현종, 숙종대 정치사를 일괄해 볼 때, 서인과 남인이 성리학 이념을 놓고 정책 대결을 하는 과정에서 장희빈은 삼강의 하나인 부위부강(夫爲婦綱)에 어긋나는 숙종의 행동을 지지했던 남인의 지지를 받았고 이를 반대했던 서인과 대립하게 되었다. 희대의 요부로 묘사되거나 정치력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거나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성리학 이념을 놓고 정책대결을 하는 붕당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 : 지두환(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참고문헌
지두환, 『장희빈』, 역사문화, 2002.
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원글 출처: http://www.kostma.net/Contents/Dongyi/Default.aspx?Body=14#Topic.



- 나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장희빈은 철저한 희생자라고 본다.

물론 나 역시도 어린 시절에는 장희빈은 죽어 마땅한 악녀라고 생각했으나...  
자라서 역사를 알게 되면서 오히려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으니.. 영원한 진리란 없나보다. 
지금 생각하면 경종, 영조, 정조 때의 비극이 모두 숙종 때문에 일어난 것 같아서 슬프고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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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이자 스승이었던 학문정치의 주역, 정조

출처:
디씨인사이드 이산갤러리

너무 좋은 자료라서 모두 함께 보고 싶어서 디씨 이산갤에서 퍼왔습니다.
(디씨 자료는 아시다시피 검색이 잘 안되거든요.)

정조 (正祖) [1752 ~ 1800] [1776.03 ~ 1800.06]
조선 제 22대 왕

前 왕자, 後 왕세손
휘 : 산(蒜)
자 : 형운(亨運)
태어난 곳 : 1752년 9월 22일 창경궁 경춘전
승하한 곳 : 1800년 6월 28일 창경궁 정침
아버지 : 사도(장헌)세자(후 장조, 영조의 제 2왕자) [1735 ~ 1762]
어머니 : 혜경궁 홍씨(후 헌경왕후) [1735 ~ 1815]



◎정치이념

1.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여 왕권강화
2. 재야의 선비와 백성을 적극 포용하여 지방사회의 동요를 막아 사회통합을 강화함으로써 백성을 중핵에 둔 사민국가를 확립
3. 과학기술과 상공업, 그리고 경쟁적인 시장경제가 발전하던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여 농업과 상공업이 병진하는 전향적인 경제질서를 구축하는 일
4. 스스로 군주이자 스승이기를 자처



◎업적

1777년
: 대고의 형식으로 자신이 펼 왕정의 중요 분야를 민산, 인재, 융정, 재용 등 4개 분야로 크게 나누어 제시함
            민산을 일으키기 위해 민은, 즉 민의 폐막부터 없애야 한다는 신념 아래 즉위 직후 각 전궁의 "공선정례"를 고쳐 궁방의 법외 납수분을 호조로 돌리고, 궁방전의 세납도 "궁차징세법"을 폐지하고 본읍에서 거두어 호조에 직납하도록 바꾸어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임. 또한 감사. 수령들로 하여금 민은을 살피는 행정을 강화하도록 함
            어사 파견을 자주하여 악법을 잘라내고 무고를 펴도록 함
            지방의 상급 향리들까지 소견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물음
            융정은 기존 5군영보다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중심으로 병력을 강화하고 서해의 해방을 위해 교동의 통어영과 강화도 경영에 힘씀      
1781년 :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음
             각신들은 이때부터 문한의 요직들을 겸하면서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인 초계문신 강제도 주관함



초계문신제 : 조정의 37세 이하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 → 규장각이 이를 주관하게 하여 왕정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신하들을 확대해 나감

결과 : 근 20년간 10회 시행하여 100여 명을 배출함

1782년 : 서운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달력을 계산하여 천세력을 미리 편찬, 간행하게 함
1783년 : 장용위을 창설함
1791년 : 장용영을 창설함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 감에 따라 "신해통공"의 조치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없애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함
1792년 : [경림문희록]을 간행함 ; 한성부        
1793년 : 현륭원 참배를 계기로 비변사로 하여금 [원행정례]를 저술하여 원행의 절차, 행렬 규모와 의식 등을 정례화 함
            [교남빈흥록]을 간행함 ; 영남
1794년 2월말 : 수원에 수원화성을 건설하여 국방을 튼튼히 함
                     오늘날 1996년 세계문화유네스코에 선정, 1796년에 완성됨  
1794년 : [관동빈흥록]을 간행함 ; 강원도  
1795년 : 잔치의 모든 사실을 [정리의궤통편]으로 남김
            [탐라빈흥록]을 간행함 ; 제주도
            [풍배빈흥록]을 간행함 ; 함흥
            어머니 회갑연을 아버지의 원소가 있는 화성유수부에서 열어 전국의 노인들에게 두루 혜택이 돌아가는 조치를 내리기도 함
1796년 : 화성 북쪽의 만석거와 대유둔을 축조함, 안양시에 만안제를 축조함        
1797년 : [만천명월주인옹자서]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공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임
1798년 : 화성 남쪽의 만년제를 축조함  
1799년 : 아버지 장헌(사도)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 3책을 남기고 자신의 저술, 강론 등도 수년 전부터 각신들에게 편집을 명하여 생전에 [홍재전서]를 완성함
             화성 서쪽의 축만제를 축조함
1800년 : [관북관서빈흥록]을 간행함 ; 평안도

이처럼 각각의 빈흥록을 간행하여 도과(소과의 별칭)의 새로운 전범으로 삼고자 함, 무과에서도 몇 차례의 경과를 통해 다수의 출신들을 배출하면서 [병학통 1785년], [무예도보통지 1790년] 등 정예병 양성에 필요한 병서들을 편찬, 보급함



◎이 밖의 치적들
 
1792년 : 서울 선비들의 사대주의적 작태와 사치풍조를 막기 위해 "문체반정"을 폄
1795년 ~ 1798년 : 용인, 안산, 진위, 시흥, 과천의 군대 1만 3천여 명을 외영에 합속시켜 일종의 지역방어체제인 협수체제를 구축함
동쪽은 창룡위, 서쪽은 화서위, 남쪽은 팔달위, 북쪽은 장안위, 중앙은 신풍위가 맡아 이 이름들은 모두 화성의 4대문과 행궁의 정문에서 따온 것임
1795년에 화성행차시에 화성에 거의 4,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두 차례나 실시함
→ 국방상의 뜻만 아니라 왕이 화성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로 풀이됨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수원화성을 건설하면서 서울을 호위하는 남방의 요새지를 구축함
북 : 북한산성, 개성일대 : 대흥산성, 서쪽 : 강화도성, 문수산성, 동쪽 : 광주 남한산성 그리고 수원화성을 건설함으로서 서울외곽방어체제의 완결을 의미함

정조는 혜경궁 홍씨 회갑연 때의 화성 행차를 왕실의 내탕금으로 충당했으며 화성의 도시 주변에 모범적인 수리시설과 농장(둔전)의 건설에도 순수 왕의 사유재산인 내탕금을 투자함으로서 백성들에게는 돈 한 푼 내지 않도록 함
재위 중에 치세의 방향 모색과 관련하여 규장각을 통해 어정, 어명으로 저술사업을 벌여 근 150종의 산저술들이 이루어짐

문장에 관한 것으로 [사원영화], [시악화성], [팔자백선]등 다수 저술이 이루어짐
경학에 관한 것으로 [경서정문], [역학계몽집전]등을 저술함
사서로 [송사전], [사기영선]등을 저술함
불서로 [범우고]를 저술함
지리서로 [도리총고]를 저술함
축정서로 [성제도설]를 저술함
왕조의 의례관계로 [속오례의]등 수다한 저술이 이루어짐
[이충무공전서], [김충장유사], [임충민실기], [양대사마실기]등을 편찬,간행함
왕조 전기에 만들어진 [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를 합쳐 [오륜행실도]로 편찬, 간행하게 함
향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각종 의례들을 종합 정리하여 [향례합편]을 펴냄
이렇게 많은 저술들의 출판을 위해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 여러가지 자체의 활자를 80여 만자 이상 만듦
규장각으로 하여금 중요한 정사를 매일 기록하게 하여, [일성록]이라는 새로운 연대기 작성을 시작하게 하고, 경연 석상에서 한 말은 참석자들이 기록하여 [일득록]으로 편집됨



◎다른 군주들과 달랐던 정조의 즉위 과정

정조가 등극했던 1776년은 바야흐로 당쟁이 격화되었던 시기로 말 그대로 갈때까지 간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정조가 성군 세종,성종과 비슷한 경향으로 르네상스를 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들과는 달리 불안한 형국속에서 정치를 펼쳤다.

왕세제 금이 즉위하면서 탕평책으로 한 때 두 당파를 조절했지만,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다시 노론이 형국을 이룬 상황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들은 그의 아들 세손이 즉위하는걸 막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우선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을 비롯하여, 홍봉한, 정순왕후, 김귀주, 정후겸, 화완옹주 등 세손을 제거하려는 세력이 조정 곳곳에 있었고, 세손은 하루하루를 고통과 불안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아들 세손을 제거하자는 노론의 제의에 반대하면서 세손은 어머니와 할아버지 영조, 그리고 충신을 맹세한 홍국영의 보호속에 운명의 1775년 12월을 맞이한다.

1775년 12월 겨울... 영조가 승하하기 3개월 전이었다. 당시 영조의 나이 82세...더이상 생에 집착할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온갖 풍파를 겪었던 그가 아니던가. 손자 세손의 나이는 어느덧 장성하여 24세가 되었다. 영조는 집경당으로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영조 자신은 힘이 없고 지쳐 세손에게 기대어 누워 있을 정도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던 상태였다.

영조는 이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하고 있었다.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은 신하된 자로서 받들 수 없다며 극구 반대했고, 홍인한 뿐만 아니라 영의정 한익모 등 여러 대신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영조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하겠다고 다시 한번 선언하자 홍인한은 무엄하게도 절대 그 청을 받들 수 없다며 극구 반대했다.

영조는 결국 승지를 불러 전교를 쓰게 했으나 홍인한이 쓰지 못하도록 막았고, 전교를 읽어보라고 하였으나 홍인한은 끝내 거부하였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자 결국 영조는 노련하게 군사들을 동원하겠다고 했고, 영의정 한익모가 반대하자 영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대신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즉시 순감군을 동궁에서 수점하도록 넘겨 세손을 보호했다.

또한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숙부인 홍인한에게 세손의 대리청정을 방해하지 말라는 언문 서찰을 보냈으나, 홍인한은 온갖 방법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세손이 영조의 눈밖에 나도록 할 참이었다.

홍인한을 비롯한 숙의 문씨, 문성국, 정후겸 등은 사도세자 때와 같은 방법으로 세손에 대한 허위사실을 퍼뜨렸고, 이들은 세손을 대신할 소론 계열의 젊고 강직한 부사직 서명선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려 홍인한을 탄핵한다. 그러자 홍인한도 부사직 심상운으로 하여금 상소를 쓰게 하였고, 이제 영조가 어느 편을 들어줄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결국 영조는 세손의 손을 들어주며 심상운을 처벌하고 세손의 대리청정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해 주었다.

세손의 대리청정이 1776년 3월까지 계속될 무렵, 영조는 83세의 나이로 결국 세손 곁에서 승하했다.  11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그가, 이제 어느덧 25살의 건장한 청년이 되어 그만의 철학이 담겨있는 정치를 펼칠 시대가 드디어 오게 된 것이다.



◎다른 군주들과 다른 정조의 업적

* 규장각 설치

당시 조정은 노론세력들로 가득차 있었고, 소론이나 남인 등 소수 정당들은 조정에 나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과거시험은 부정부패로 얼룩져 더이상 시험으로서의 의미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정조는 규장각이라는 새로운 문한기구를 설치하여 종전의 문한기능과 비서실의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강력한 친위문신세력을 양성하고 이를 개혁정치의 선도적 중심기구로 활용하였다.

재위 5년째이던 1781년 이후에는 초계문신 제도에 의해 규장각에서 기성관료들을 재교육시켰다. 정조는 주기적으로 규장각에 나아가 직접 이들을 가르치고, 시험을 치르고, 글을 지어바치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책노선을 따르는 친위세력을 양성하였는데, 정조가 승하 할때까지 초계문신으로 뽑힌 사람은 모두 138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나서 재위 6년 이후이던 1782년 부터는 각 도의 인재들을 현지에서 발탁하는 별시문과를 자주 시행하여 정치권의 대폭적인 물갈이를 시도했다.

* 백성들을 위한 정치

정조처럼 백성을 사랑한 군주도 드물다. 정조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위해 몸소 그들을 만나려고 행차를 즐겼다. 말만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여타 군주와는 달리, 직접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헤아린 군주였던 것이다.

정조는 화성 건설 때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에게 계절에 따라 의복을 하사하고 최신식 공구를 제작하여 배려를 했을 뿐만 아니라 피해가 없도록 최고의 품값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 때문에 민가를 헐게되자 그곳의 백성들 모두에게 충분히 보상까지 해주었다.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때에는 그곳에 사는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고, 가난한 자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으며, 자신이 직접 인재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런 점들을 보면 정조가 얼마나 백성들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 조선 최대의 정치 이벤트 화성 행차와 화성 건설

정조는 화성을 신도시로 건설하였다. 화성 주민에게는 요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하고 주변 상인이나 장인들에게도 여러 가지 혜택을 주어 화성에 모여 살게 하도록 함으로써 상공업 진흥을 촉진시켰다. 이제 화성은 살기 좋은 신흥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화성의 신도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원래 그 자리는 효종의 무덤 자리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남아있다가 후에 정조가 그곳에 대신들의 지지를 얻어 아버지의 묘로 정하면서 이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덤을 옮겨서 화성을 건설한것이 아니라 화성 건설을 미리 생각해두고 무덤을 옮긴 것이다.

또한, 그는 화성행차를 이용해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 3,000여 명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업적과 위용을 백성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노론을 견제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효도까지 하려했던 것이다. 정조의 화성건설과 화성행차는 말 그대로 조선 최고의 정치 이벤트이자 조선 건축기술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역대 군주중 최고의 저작

정조는 국왕이기에 앞서 상당한 수준의 학문을 갖춘 대학자였다. 그의 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은 [홍재전서]이다. 정조의 개인 문집인 이 책은 총 분량이 184권인데, 학문이나 문장으로 명성을 날린 사대부의 문집이 20~30권 정도에 머물렀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의 저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조의 저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조는 청년 시절부터 저술을 시작했는데 평생토록 그가 편찬한 책은 2,500권, 그가 내린 지침에 따라 신하들이 편찬한 책은 1,500권에 이른다. 그렇다면 정조가 이처럼 동서고금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저작을 남길 수 있었던 바탕은 무엇일까.

정조는 어릴 때부터 대학자가 될 소질을 보여주었다. 첫돌을 맞은 정조는 붓과 먹을 가지고 놀고 책 읽는 시늉을 하였으며, 좀더 자라서는 효자와 공자의 일생을 그린 그림을 보며 흉내내기를 좋아했다. 정조의 교육은 네 살때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정조는 날이 밝기전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하고 책을 읽었는데, 그가 얼마나 독서에 열중했던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너무 일찍 일어나지 말라고 타이를 정도였다. 정조는 4살 때 [소학초해]를 금방 끝내버렸다. 어린 손자의 뛰어난 자질을 본 영조는 이례적으로 세손 정조에게 서지수, 김양택을 왕손 교부로 임명하여 [동몽선습]을 가르치게 하는 등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이 결과, 정조가 즉위할 때인 25살인 그는 이미 학문적으로 완숙기에 접어들어 신하들과 인재들을 가르칠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스승이기를 자처했다. 그만큼 정조는 학문에 자신이 있었다. 그야말로 군주가 되기 위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지 않았던가.

정조가 승하하던 1800년, 왕세자 공이 즉위했지만 정국은 또다시 노론 벽파세력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정순왕후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조가 그동안 일구었던 정책들은 또다시 노론의 입맛에 맞게 변하고 말았다. 정조 승하이후 조선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점을 감안하면, 조선 후기 정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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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붕당(당쟁)의 역사

출처:
디시인싸이드 이산갤러리

수 차례의 사화를 견디고 훈구파의 탄압을 이겨낸 사림 세력들은 사림 출신 스승 밑에서 공부한 선조가 즉위하면서부터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인재를 감당하지 못하는 한정된 관직의 수는 필연적으로 당파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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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인과 서인이 주도한 붕당 성립기

◎동인 VS 서인

붕당의 효시라 할 동인과 서인의 분열은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 즉 을해당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을해당론 ☞ 왕실 외척이 관료추천권이 있는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느냐는 논쟁

1575년(선조8)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림세력들이 이른바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건이다. 이는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의 추천권을 놓고 벌인 싸움인데, 이 때문에 일제 시대 이래 당쟁의 근본 원인이 개인적 감정 싸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왕실 외척이지만 사람들을 보호한 심의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선배 정치인과, 왕실 외척 지위를 이용한 심의겸의 정치적 비리를 용서할 수 없다는 후배 정치인의 대립이었다.


분파 후 정여립 모반사건의 결과 기축옥사로 인해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지만 3년후 정철의 건저의 사건으로 다시 동인(남인,북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기축옥사

1589년(선조22)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통 정여립 옥사, 또는 정여립 반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다.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데도 정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동인 중에서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전라도 지역 서경덕, 조식 학파의 수많은 인물들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이후 심각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정여립이 이씨왕조가 정씨왕조로 바뀐다는 정감록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중반란이라는 설, 선조 임금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일어나게 된 사건이라는 설 등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남인 VS 북인

남인과 북인의 분립은 동인과 서인의 분립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기축옥사로 인해 분립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는 기축옥사 당시 서인(정철)이 정여립 사건의 처리를 주도하면서 북인계 인물을 무고하게 죽였는데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남인계 인물들이 제대로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당이 발생했다고 보고있다. 또한 그로부터 3년 뒤인 정철의 건저의 사건 때 서인의 처리 문제로 분당이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 남인의 중심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이후 화의를 주장하여 실각되자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고 남인은 한동안 몸을 사리게 된다.

◎대북 VS 소북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갈라져 대립한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살해하는 등 소북파를 몰락시킨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서인은 정권을 장악하고 대북파를 몰락시켜 다시는 정치의 무대에 설 수 없게 만들었다. 인조반정 이후 북인은 완전히 와해되어버린 것이다.


2. 서인과 남인의 공존, 붕당 공존기

서인과 남인의 50년에 걸친 붕당정치 시대 - 정치적 평화를 유지한 제도개혁의 시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계 정치가들은 인망이 높은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추대해 사회안정을 도모하는 등 남인을 정치적 동반자로 인정하고, 남인들의 도움으로 주요 정치적 과업을 시행하였다. 인조년간 정치사 연구결과를 보면, 주요 관료집단에서 서인과 남인의 비율은 6:4정도였고 서인과 남인 학통을 이끈 산림들도 거의 대등하게 등용되었다. 이후 인조, 효종, 현종에 이르기까지도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붕당간의 조화로운 공존이 계속되었다. 서인이 주도적인 위치를 지키는 가운데 남인이 이를 견제하는 양당체제, 즉 정치적 평화시대였던 것이다.


3. 일진일퇴의 환국정치, 일당전제기

일당전제기는 1674년 왕실에서 공복을 입는 기간 문제로 일어난 갑인년 복제논쟁을 군주권 강화에 이용한 숙종 즉위년부터, 1729년 영조가 일당전제 정치를 끝장내겠다고 선언한 기유대처분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보통 일진일퇴 정국, 환국에 의한 일당독재, 역모조작과 정탐정치 등으로 표현되는 격렬한 당파싸움의 시기다. 전후 여덟 차례 정도 일진일퇴하는 환국정치에 의해 일당독재가 반복되었다.

◎서인 VS 남인

서인과 남인의 공존은 평화롭기도 했지만 불안정하기도 했다. 그 불안정함이 '폭발'한 것이 바로 예송 논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예송논쟁 ☞ 서인 : 효종은 차남이야. 무조건 1년상! / 남인 : 차남이지만 왕됐으니 장남 대접 받아야 되는거 아니야? 당연히 3년상이지.

왕실에 적용할 상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논쟁으로서, 1659년(현종 즉위년) 논쟁과 1674년(현종 15) 논쟁 두 번이 있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효종과 효종왕비의 상사 때, 어머니 자의대비가 큰아들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둘째 아들 이하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였다. 이는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파견된 분조에서 사실상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는 소군주로서 권한을 행사했지만, 국내에 돌아온 이후 의문 속에 죽음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2차 예송논쟁은 결국 숙종 즉위년부터 남인 주도 정권을 출범시켰다.

예송논쟁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1차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정권에 변동이 없었으나, 2차 논쟁에서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때, 남인은 서인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강경파 청남과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 탁남으로 분열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경신대출척, 즉 경신환국으로 집권한지 몇년만에 쫓겨나게 된다.


■ 경신환국
1680년(숙종6)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남인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위한 새로운 군대인 체부를 설치함으로써, 당시 숙종의 신임을 받던 서인계 외척 김석주의 군사권을 약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노론 VS 소론 VS 남인


그러던 중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리게 되는데,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 바로 임술삼고변이다.

■ 임술삼고변

1682년(숙종8)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다. 훗날 노론이 된 왕실 외척 김석주, 이사명, 김익훈 등이 밀정을 파견하여 남인들에게 역모를 권유한 후 이를 밀고하는 등의 정탐정치를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물의를 야기시킨 사건이다. 당시 서인 영수 송시열은 이를 자신이 스승의 후손들을 잘못 교육시킨 탓이라 하여 결국 정탐정치를 자행한 이들을 변호하려 하였고, 이를 서인 소장파 인물들이 탄핵하고 윤증 학파가 이에 합세함으로써 결국 서인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반대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서인이 분열 된 이후에도 환국은 계속 되는데,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재등용되는 기사환국 이후 왕에 의해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래서 갑술환국 이후로는 노론·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 기사환국

1689년(숙종15) 서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남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장희빈이 아들을 (후일의 경종) 낳자, 곧바로 왕위계승권자로 정하려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함으로써 일어났다. 이로써 서인 영수 송시열은 사사당하였고, 서인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되었으며, 장희빈은 왕후에 봉해졌다.

■ 갑술환국

1694년(숙종20)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정권교체는 서인계와 남인계 일부 집단의 정탐정치 시도에서 발단되었다. 이로써 인현왕후는 복위되었고, 반면에 장희빈은 왕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왕세자(경종)의 보호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그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옥사가 일어나 노론 대신들이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 신임옥사


1721년(경종1) 12월에 노론 주도 정권이 소론 일당정권으로 급변한 신축환국과, 다음해 목호룡이 이른 바 노론 및
연잉군(후일 영조) 측근 인물들의 경종 시해음모를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임인옥사, 이 두 사건을 합쳐서 지칭하는 것이다. 신축환국은 노론당이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 직후, 다시 대리청정을 청함으로써 노론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다가, 소론과 남인의 공격으로 실패함으로써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다. 임인옥사로 당시 노론 최고 지도자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4인이 모두 사형을 당하였으므로, 노론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을 올바른 노론 붕당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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