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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 카페 역사 스페셜  역사 토론 게시물



11월 2일 토론 참고 자료 - 세조에 대한 재평가 (1)



■ 세조 (1417 - 1468, 재위 : 1455-1468)는 어떤 인물이었나?

조선 7대 임금으로 1455년 에서 1468년 까지 약 14년간 왕위에 있었다.
시호는 혜장(명에서 내려준 시호)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 대왕



친형 문종보다 3년 늦은 1417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 자는 수지였다. 처음에는 함평대군이었다가 진평대군에 다시 진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으로 고쳐 봉해 졌다. (1445-세종 27)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친형 문종이 학문에 능했던 데 비해 수양대군은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능하여 성격이 대담했다. 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 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7대 임금에 즉위하니,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세조는 즉위한 뒤 단종을 상왕에 앉혀 우대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좌부승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 사건을 계획한 것이 발각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에 유폐시킨다. 그리고 1457년 9월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다시 한 번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그를 사사시키고 단종도 관원을 시켜 죽였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의정부서사제를 폐지시키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였고, 세종 이후 대표적인 학자 양성소로 자리잡았던 집현전을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폐지시켜 예문관으로 그 기능을 옮기는 한편, 정치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반면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시켰다.


이 밖의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동국통감」을 편찬, 「국조보감」을 편수,「경제육전」을 정비,「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



세조는 역모와 외침을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관제도 대폭 뜯어고쳤다. 영의정부사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이같은 중앙 문신 위주의 정책은 지방 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세조는 민생 안정책으로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농업을 위해「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오륜록」을 찬수해 윤리 기강을 바로 잡았다. 또한 지방민들을 괴롭혀 오던 유향소를 전격 폐지하는 등 민생의 안정에도 주력하였다. 처럼 세조는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 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 운영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도 실력 중심이 아닌 공신들을 주축으로 하는 측근 중신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내용에 상관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이러한 세조 대는 지나칠 정도의 왕권 강화책 덕분으로 왕권이 조선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정치는 왕권 강화에 기여한 면은 있으나 정치 문화에서는 '문치 대화 정치'를 멀리하고 힘을 앞세우는 '무단 강권 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했다.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버린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세자 (예종) 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를 일기로 수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광릉으로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 참고 문헌-



1. 조선왕조 실록 -시디롬- 서울 시스템, 1997

2. 연려실기술 -국역- 민족문화추진회, 1972



3. 임용한, [조선국왕 이야기], 혜안, 1998

4. 신봉승, [성공한 왕, 실패한 왕]. 동방미디어, 2002

5. 이성무, [조선왕조사], 1권 -태조~현종- 동방미디어, 1999

6. 최정용, [조선조 세조의 국정운영]. 신서원, 2000

7. 최정용, [수양대군 다시 읽기]. 학민사, 1995

8. 한영우, [조선전기 사회 경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3

9. 최승희, [조선초기 정치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2

10.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 연구] 일조각, 1988

11. 지두환, [조선전기 정치사] 역사문화, 2002

12.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들녘, 1996

11. 사이트 : 한국의 역대 왕 - www.urinara.com





11월 3일 토론 참고 자료 - 세조에 대한 재평가 (2) 세조 공신들의 횡포


1.
조선 3대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 문종 재위중에는 더 이상의 공신책봉이 없었다. 세종과 문종 재위 기간에는 정변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공신의 존재 자체가 정변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그런데 병약한 세종의 장자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은 또다시 정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모사 한명회의 도움을 받은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 10월 전격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단종을 보위하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륙하고 동생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에 유배한 후 사약을 내려 죽이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명분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것. 그러나 실제 역모를 꾸민 것은 안평대군과 김종서가 아니라 수양대군과 한명회였다. 쿠데타를 성공시켰으니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반란의 주역인 수양대군 자신을 비롯해 한명회, 정인지, 한확 등 43명이 정난공신에 책봉됐다. 정난(靖難)이란 「나라의 위태로운 난리를 평정했다」는 뜻이다.


이는 또다시 막대한 국고가 축나야 함을 의미했다. 수양대군에게는 식읍 1000호와 식실봉 500호, 전 500결, 노비 300구(口) 외에도 별봉(別俸)으로 해마다 600석의 쌀과 금 25냥, 은 100냥 등 막대한 상금이 내려졌다. 한명회, 정인지 등 다른 1등공신에게도 전지 200결과 노비 25구, 구사 7명, 반당(병졸) 10인이 내려졌으며 부모와 처는 3등을 올려 봉증(封贈)하고 직계 아들은 3등을 올려 음직(蔭職)을 제수하고, 아들이 없는 경우 조카와 사위에게 2등을 올려주는 특혜가 주어졌다. 2·3등 공신에게도 각각 전지 150결과 100결이 주어지고 노비 등이 차등있게 배분됐다. 이들 정난공신에게 하사된 전지만 6550결로서 산천을 경계로 했다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농장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헌법에 따라 즉위한 단종이 계속 재위했으면 이런 정치·경제적 특권층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협박해 영의정부사·영집현전·경연·춘추·서운관사·겸판이병조사·중외병마도통사라는 관직을 받았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단종 3년(1455) 윤6월에 드디어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면서 스스로 임금이 됐다.


임금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즉위했으니 또 한 번의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세조 즉위 직후 책봉된 공신은 임금이 되는 것을 도왔다는 뜻의 좌익(佐翼)공신으로 총 46명이었다. 또다시 막대한 국고가 이들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축나야 했다.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왕이 된 대가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치러야 했고 조선은 공신들의 세상이 되어 갔다.


즉위 직후 세조는 양녕·효령대군과 함께 개국·정사·좌명·정난의 4공신을 대동하고 창덕궁으로 상왕 단종을 찾아 공신 명단인 맹족(盟簇)을 바치고 잔치를 베풀었다. 풍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양녕대군이 비파(琵琶)를 연주하니 여러 공신들이 일어나 춤을 추었으며 흥이 난 세조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자신이 왕위를 빼앗은 임금 앞에서 추는 악어들의 잔치였다.


잔치가 파한 후 동생 영응대군의 사저로 거동한 세조는 장난삼아 이구에게 주먹으로 이계전을 때리게 하자 신숙주가 『내가 때리게 되면 명의(名醫)가 좌우에서 구호해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군신 사이에 격식이 없었다. 4공신 회맹이 참석자에게는 새벽 2고(鼓)가 될 때까지 술마시고 춤추며 즐거웠을지 몰라도 이에 끼지 못한 다른 사대부나 백성들에게는 착잡하고 두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임금과 함께 춤추며 농담하는 이들이 치외법권 지대에 있는 특권층임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계유정난의 공신들은 자신들이 법 위에 있음을 국법으로 만들기도 했다. 단종 1년 11월 의정부는 『공신의 지위를 적장자에게 세습도록 하고 자손들을 정안(政案)에 「정난 1등(2등·3등)공신 아무개의 후손」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영원히 용서하게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공신 아무개가 죄를 범해도 용서하라는 주청이 아니라 공신의 후손이 죄를 범해도 영원토록 용서하라는 주청이었으니 공신 당사자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2.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베러 갈 때 함께 갔던 공신 홍윤성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홀로 사는 한 노파의 전재산인 논을 빼앗았는데 노파가 울면서 돌려달라고 호소하자 그 노파를 돌 위에 거꾸로 매달고 모난 돌로 쳐 죽인 후 시신을 길 곁에 두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거두어 장사지내지 못했다.


이조판서로 있을 때 그의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부탁하자 논 20두락을 요구했다. 숙부가 『그대가 옛날 어려울 때 내게 의탁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제 재상이 되었다고 이럴 수 있는가』라고 따지자 홍윤성은 숙부를 박살낸 후 후원에 묻어버렸다. 숙모가 소장을 올렸으나 형조에서는 접수를 거부했으며 사헌부도 듣지 않았다.


세조가 온양의 온궁에 거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숙모는 전날 밤부터 버드나무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어가가 다가오자 나무 위에서 길게 호곡했다. 세조가 관리를 시켜 묻자 그의 아내는 『공신에 관계된 것이므로 한 걸음 사이에도 그 말이 변할 것이니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세조가 직접 어가를 멈추고 말하라고 하자 그때서야 홍윤성의 만행을 호소했다.


세조는 분노했으나 공신이란 이유로 치죄하지 못하고 그의 종을 베는 것으로 대신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이처럼 힘없는 일반 백성들은 물론 판서와 부사직의 아내까지 공신에게 맞아죽어도 국왕이 공신을 보호하는 상황이니 공신들에게 조선은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3.
역사드라마「왕과 비」는 수양대군과 그 수하들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얼마나 가치도착적인가는 정난·익대공신들이 김종서와 사육신 등 단종에게 충성을 바쳤다가 사형당한 인물들의 남은 식구와 유산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보면 극명해진다.



올바른 헌정질서를 지키려는 시대정신에 목숨을 걸었던 이들은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고 아버지와 형제 등 남자들도 연좌돼 모두 죽임을 당했다. 정난·익대공신 세력들은 이들의 사지에서 흘러내린 피가 땅에 채 스며들기도 전에 이들의 부인·딸 등 여자식구들과 재산을 갈취했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의 아내와 딸 및 박팽년의 아내는 정인지가 차지했고,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아내는 이흥상이, 성삼문의 아내와 딸과 이승로의 누이는 박종우가, 성삼고의 아내와 딸은 정창손이, 이현로의 아내와 김유덕의 아내와 딸은 이사철이, 김문기의 아내는 유수가, 김문기의 딸은 최항이, 이해의 아내와 딸과 김유덕의 누이는 박중손이, 최면의 누이와 조완규의 아내와 딸은 신숙주가, 권자신의 아내와 딸은 권준이, 김현석의 아내는 권람이, 김승규의 딸과 권저의 어미는 강곤이, 김승벽의 아내는 홍윤성이, 유성원의 아내와 딸과 이명민의 아내는 한명회가, 민보흠의 아내와 이윤원의 아내는 김질이, 하위지의 아내는 권언이 차지한 것이다.


이들 수백명에 달하는 여인들은 남편들이 시대정신 구현에 인생을 걸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양반가 규수에서 공신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공신들은 사육신들의 토지도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휘의 평산 땅은 양녕대군이 차지했고, 금성대군 이유의 당진 땅과 성삼문의 당진 땅은 이구가, 김문기의 영동 땅은 정인지가, 하위지의 선산 땅은 한확이, 이개의 포천 땅은 정창손이, 유응부의 포천 땅은 신숙주가, 이개의 한산 땅은 홍윤성이 차지하는 등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신들이 탐한 것은 반대파 정치인들의 여인이나 토지뿐이 아니었다. 신숙주가 단종의 왕비 송씨를 내려달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자신이 임금으로 섬기던 군주의 여인까지 탐했던 파렴치한들이었다.



-참고문헌 및 출처자료 -



조선왕조실록 -씨디롬-

연려실기술 - 국역-



1.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9

2. 이덕일 [거칠것이 없어라] -김종서 평전- 김영사. 1999

3. 이덕일 [역사산책 - 조선을 망친 주범은 공신들 ] - 신동아 연재물

4. 최승희 [조선초기 정치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2

5. 한영우 [조선전기 사회경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3

6.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 연구] 일조각, 1988

7. 지두환 [조선전기 정치사] 역사문화,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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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너무 재미있어서 퍼옴. 문제시 삭제 예정.
 


다음 카페 유혁진님의 글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가 드디어 수양대군의 등극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 '왕과 비'는 사실 전작(前作)인 '용의 눈물'의 후광에 힘입어 출발한 기획이었고, 지금까지의 시철률 역시 '용의 눈물'에게서 물려 받은 부분이 상당하다. 그러나 어딘지 전작에 비해 김 빠진 구성과 동어반복적이고, 재탕에 삼탕에 가까운 플롯의 배치로 시청자를 짜증나게 만든 부분으로 인해 전작 만한 카리스마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작중에서 그려지 는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극히 일관되지 못해서 중간에 한두회를 보지 않은 시청자로서는 저 인물들이 왜 갑자기 저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금일(99. 1. 23.) 방영분의 경우 단종의 양위와 관련한 매우 급박한 상황전개가 이뤄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극적 긴장감을 발생시키는 연출에 실패하고 있다.



그냥 저냥 보여주면 보여주는대로 보면 되는(?) 무력한 시청자의 입장이지만,
몇가지 거슬리는 점이나 좀 언급해 보려고 한다.



1. 세종대왕은 정말로 수양대군을 왕재(王才)로 생각했을까?

세조의 왕위찬탈을 다루는 문예작품(영화와 방송을 포함하여)중 최근의 작품들에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신봉승의 '설중매(雪中梅)'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 중반에 드라마화 되고, 영화화가 이뤄진 그의 작품은 무명이던 연극배우 정진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았으며, 드라마 캐스팅 그대로 영화화까지 이뤄질 만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심도있게 파헤친 역작(力作)이었다.


때문에 후작들은 싫건 좋건 '설중매'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학술적 연구가 아닌 드라마나 영화화 될 경우에는 거의 그런 혐의를 피하기 힘들어 진다.



그런데, '왕과 비'는 방영 초반부터 '안티 설중매'의 노력을 곳곳에 드러내고 시작했다.


'계유정난'의 명분을 심화하기 위해 김종서와 황보인의 독단(獨斷)을 부각시키고, 종친들을 심하게 무력해 보이도록 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는 조선의 국법을 조금만 유추해 보아도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부터 조선의 국법상 종친은 관직에 오를수 없다.


조선의 종친인 자로 고위관직에 오른 예는 이방원(태종: 제 1 차 왕자의 난 수습), 이화(태조 이성계의 서제(庶弟 : 태종의 외척 제거), 이유(세조 : 계유정난 수습), 이준(귀성군으로 세조의 조카, 영응대군의 아들 : 이시애의 난 진압) 뿐으로 이는 국초(國初)에 한한다.


때문에 종친은 관직에 오르는 길인 과거를 볼 필요가 없고(자격도 아마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진사나 생원 같은 하위직을 받지도 못한다. 때문에 이들에 대한 호칭은 그의 군호(君號)를 부르거나 '나으리'를 붙여 부르는 것이 예법에 맞다. 대감이나 영감같은 고위직 관리의 존칭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왕과 비'에서는 수양대군을 위시한 대군과 군들에게 '대감'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무지(無知)의 소치인지, 작가의 의도적 시도인지, 아니면 필자의 무식인지 몰라도 적어도 '왕과 비' 이외의 작품에서 **대군'대감'이라는 호칭은 들어본 바가 없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있었다면, 뒤이어 벌어질 사육신 사건(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단종 복위운동 사건)에서 성삼문 등이 세조를 그의 예전 호칭대로 '수양대군 나으리'라고 불러서 세조를 진노케 한 그 유명한 사건을 어떻게 그려낼지 기대된다.


각설하고, 조선의 종친은 관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실권을 가질 수 없고, 종친으로서 왕실 의전과 종묘의 제사에 참석하는 등의 예우만을 받을 뿐이었으나, 세종대왕은 제위 말년에 이르러 세자(문종)를 비롯해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대군등을 국정의 곳곳에 침투시켜 실무를 맡게 한다. 이는 세종의 말년에 유례 없이 이뤄진 일로서 이는 태종으로부터 이어진 관료집단 불신의 가풍(家風)이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세조의 왕재(王才)를 논하는 이들은 이때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가 많은 국정 업무에 참여하여 업적을 쌓았다는 것을 부각시키고자 하지만, 사실 소헌왕후 (세종의 정궁(正宮))의 소생들은 한두명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그 정도 쯤은 되는 업적을 쌓았던 것이다.


다만 세조가 주목 받는 이유는 그가 세종대왕의 브레인 집단이던 집현전 출입담당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을 찾아 보면 태종때부터의 숙원사업이던 국방강화의 최우선 과제인 화포(火砲)의 개량 사업에 금성대군과 임영대군이 총책임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그 실적에 대해 세종께서 크게 치하하며 평가한 육성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문종의 세자 시절 업적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문종이 워낙에 세종이 이양한 국정 전반에 관여하였기 때문이지 수양대군보다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논외로 하더라도 신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대가 아무리 성군 (聖君)이라 불리는 절대적 카리스마의 군주라 하더라도 국가기강을 문란케 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세종 말년에는 절대적으로 국정에 관여할 수 없었던 내관이 화약제조담당업무의 총책임자가 되기도하고, 문종은 한 술 더 떠서 내관의 처우를 대폭 개선한다.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시절이라 평가받 는 세종조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대립이 없었을 뿐이고, 내부적으로는 왕실과 관료집단간의 불신의 골이 그만큼 깊어진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진 사대부(김종서와 황보 인)의 경우는 세종시대에 순전히 자기 능력만(과거에 합격한 것은 아마 태종시대일 것으로 생각된다. 김종서의 측근인 이징옥이 태종조에 급제하기 때문이다.)으로 입신에 성공한 부류로서 세종-문종-단종-세조-예조-성종조를 풍미한 훈구파와는 그 뿌리가 다르던 인물들로서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족벌이나 문벌보다는 군왕에 대한 1:1의 충성심과 성리학의 철학으로 무장한 부류였다.


때문에 왕족의 국정개입이나, 내관의 발호같은 '상식이하'의 처우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왜 이들이 어떤 식으로건 제거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명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육신과 생육신의 이름들이다.


이들은 세종시절 집현전에서 수양대군과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지냈던 사이다. 이들이 수양대군을 왕재로서 평가하지 않는데, 그 누가 그를 왕재라고 감히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반면 이들 집현전 학사들의 마음이 세자(문종)에게 향하고 있었음은 세종실록 곳곳에서 나타난다. 세자의 시가 적힌 종이를 얻기 위해 사대부 체면 다 버리고 몸을 날리기까지 했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뭐가 어찌 됐건 가장 중요한 것은 세종의 마음이 누구에게 가 있었느냐는 점이다. 세종대왕은 누구나 다 알다싶이 조선의 기틀을 확립하기 위해 거의 모든 분야의 국정에서 대대적인 개혁과 창조에 가까운 혁신을 이룩해낸 인물이다.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그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
기 자신의 국정운영철학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 세자(문종)는 세종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합격 정도가 아닌 자신의 또다는 버전업된 인격이었다. 세자책봉 불과 몇 개월만에 국왕이 된 세종은 세자의 지위에서 섭정을 담당하는 '수습'기간이 부족했던 것을 뼈저리게 안타까워했고, 문종이 걸음마를 할 수 있을 무렵부터 각 분야별로 조선 최고의 학자들로 구성된 '드림팀'으로 하여금 세자의 훈육을 담당하게 했다.

심지어 권위 있는 학자가 없는 분야 같은 경우 스스로 세자의 교육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떡잎을 아예 만들어 버렸다. 어린 세자는 이 같은 부왕의 처절한 학습을 정말 놀랍도록 잘 받아 들여 신료들은 물론 중국의 사신들조차 10살을 갓 넘긴 세자를 접견하고서 '하늘이 조선에 내린 홍복'이라 극찬할 정도였다. 세종대왕의 초인적인 왕업을 계승할 인물로서 세자와 수양대군이 비교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 수양대군의 경우 스스로도 '14세때부터 기방출입을 했다.'고 스스로 밝혔던 것처럼 잡기(?)에 능했다. 사냥 실력도 상당했던 것 같고, 특히 활솜씨를 자랑했다.(이는 세자와의 왕위계승권 분쟁에 대비해 태조 이성계의 카리스마를 계승하려 했던 제스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몸이 세자에 비해 무척 건장했다고 하며, 후일 등극해서 벌인 일련의 불사(佛事)에서 보듯이 불심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학문의 경우에서는 세자에 비할 바는 못되었지만, 어렸을때부터 집현전에 출입하며 신숙주, 성삼문등과 함께 정인지 밑에서 수학했다. 그 정도면 어디 가서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다.



여기까지 쓰면 누군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바로 양녕대군이다.


이런저런 낭설이 많이 있지만 양녕대군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은 결정적으로 태종의 눈밖에 났기 때문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양녕대군을 매우 심한 권력혐오증 환자로 그리고 있지만, 후일 보여준 그의 면모로 봤을 때, 그는 권력혐오증 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빠른 상황판단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면에서 부왕인 태종과 닮아 있다. 그런데 문제는 태종의 의향이다. 태종은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한 세자(양녕) 보다는 자신이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조선을 모든 분야에서 문명대국으로 성장시킬 왕재를 원했고, 그에 부합한 인물이 충녕대군(세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양녕대군이 그것을 눈치 챘을 때, 부왕의 숙청 스타일이 떠올랐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 발호하면, 그는 형과 동생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냉혹했다. 자식의 경우가 예외 일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은 양녕이 세종의 치세에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거든 지체 말고 죽여 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적통이 계승해서 왕 밑에 동생이 줄줄이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세자까지 했던 왕의 친형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은 왕권에 심각한 도전요소가 된다. 부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 왕위를 넘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고, 목숨은 부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절대로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연기를 할 필요가 있다. 양년대군은 파락호의 길을 선택하므로서 광인(狂人)이므로 왕이 될 수 없다고 어필했고, 효령대군은 동방유학의 나라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스님처럼 전국 심산유곡의 사찰만을 배회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만일 그 둘중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세력을 모으는 기미를 보였다면, 지체 없이 태종의 손에 살해 되었을
것이다. 수양대군도 세종 말년에 세자(문종)의 병약함을 보면서 양녕대군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말년의 세종은 종친을 중용하는등 왕실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음 국왕이 문종이라는 전제에서 벌린 일이다. 세종이 덕이 중후한 인군(仁君)으로 아름다운 이미지를 후세에 남기고 있지만, 그도 어디까지나 태종의 아들이고 권력을 어찌 유지해야 하는가, 그리고 자신의 사후 이후의 권력구도를 어찌 가져가야 하는지를 그 명민한 두뇌로 잘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붕어(崩御)직전 가장 강직한 왕당파인 황보인과 김종서를 의정부에 배치하고 행정권은 황보인에게, 군권은 김종서에게 장악시킨 것이다. 심지어 문종의 단명을 예견하고서 세손(단종)의 치세까지를 염두에 둔 고명을 남긴다.


세종은 절대 수양대군이 보위를 이어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태종 - 양녕대군 - 수양대군은 어디까지나 난세(亂世)의 인물로 세종이 이룩해 놓은 태평성대의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웅은 난세에 필요하지, 태평성대에는 사회불안세력일 뿐이다.


어쩌면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는 수양대군측의 주장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세종대왕도 태종이 양녕대군을 자신을 위해 죽이려 했던 것처럼 수양대군이 발호할 기미를 보이면, 군권을 장악한 '충성의 화신' 김종서로 하여금 그를 죽이라고 밀명을 남겼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수양대군도 그쯤은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것을 명민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4세에 기방은 공연히 간 것이 아니다.



2. 수양대군은 문종조와 단종 즉위초에 왕위에 뜻이 없었나?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다. 왕자란 무엇인가? 그것도 정궁(적실이라는 말은 여염의 용어로 왕실에 오면 정궁(正宮)이라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소생의 왕자란 후일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다. 그 호칭에서부터 즉위에의 욕망을 내포하는 신분인 것이다.


그런데 태어나 보니 위로 형이 있는데, 부왕의 총애가 대단하다면, 즉위의 꿈을 단념하고 권력에 대한 불안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부단히 홍보하며 일생을 살아야 하는 기구한 신세가 되어 버린다.


수양대군은 세조 제위시가 아닌 태종 제위시에 태어났다. 형인 문종과는 3살 터울로 사물을 분간하기 시작했을때는 이미 형인 문종이 세자의 자리에 책봉되어 있었다. 철나기 전부터 처세를 생각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성장기를 내내 형의 그늘 밑에서 지내야 했다.


형과 아우가 비교가 되는 상황조차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상술한 바와 같이 형인 문종은 불과 7살의 나이에 세자책봉을 받고서 무려 29년을 세자로 생활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때문에 수양대군이 권력욕을 어설프게 가졌을 때쯤에는 그 꿈을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세종 말년에 이르면, 부왕과 세자가 동시에 신병을 앓는 일이 아주 흔했다. 이때쯤의 국정은 거의 세종과 세자(문종)중에서 약간이라도 덜 아픈 사람이 맡았다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다. 누가 봐도 부왕이나 세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 부왕이 조만간 붕어하고, 세자가 후사 없이 세상을 버린다면, 그 다음의 보위는 당연하게 후보 순위 1번인 수양대군에게 돌아온다.


그것을 알아차린 수양대군은 세종의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석보상절도 편찬에 관여하고, 규표를 바로잡기 위해 삼각산 보현봉에도 몇 번 씩 오른 것이다. 늙고 병든 국왕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자, 신료들은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때 '너희들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잘 보아두라.'는 시위로 태조의 카리스마를 등에 엎기 위해 활솜씨를 자랑하고 다니고 건장한 체구를 과시하며, 자신의 강건한 육체를 드러내기 위해 사냥만 나갔다 하면, 왕자 체면에 팔뚝을 드러내길 즐겼던 것이다.


아마 그런 수양대군을 보며, 다른 경쟁자 안평대군은 냉소를 지으며 난을 치고 시문을 읊조렸을 것이다. 부왕이라면 차라리 동(動)적인 수양대군보다는 정(靜)적이고 문예에 능해 문예 진흥의 가능성이 매우 큰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그런 두 사람에게 정말 안타깝게도 세종 23년에 원손(단종)이 태어난다. 그리고 5년 뒤 5살이 되자마자 세종은 그를 세손으로 책봉해, 자신의 후계구도가 확보부동하게 세자에게 있으며, 여의치 않을 경우 세손이 그 보위를 이어갈 것이라는 장기 구상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집에서 난이나 치고 시인묵객이나 상대한 안평대군은 왕위를 노린다는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거기서 한발만 더 나가서 풍류객이 되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냥다니며 곳곳에서 자신의 왕재를 드러낸 수양대군은 그게 힘들다. 양녕대군처럼 미친척을 할 수도 없고, 안평대군처럼 시인묵객을 만날 수도 없다. 그때 사냥은 요즘처럼 몇몇이 고즈넉히 4WD 자동차에 총이나 하나씩 들고 떠나는 게 아니다.


몰이꾼에 같이 사냥할 장사패등등 수많은 무리를 이끌고 행하는, 약간만 변형하면 군사훈련의 의미까지도 가지게 되는 행위다. 실제로 중국 고대의 예법에는 수렵의라 하여 왕이 사냥하는 의식이 있다. 말이 사냥
이지 그것이 군사훈련과 동원상태를 점검하는 의식인 것을 동방유학의 나라 신료가 모를 리가 없다. 어설프게 나섰다가 제거대상 1호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종으로서도 세자가 후사없이 죽는다면야 어쩔수 없이 수양대군을 선택해 볼 여지가 있었지만, 원손이 태어났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강보에 쌓인 원손을 안고 다니며 정사를 펴고 기회 있을때마다 신료들에게 원손 보기를 자신을 보듯 하라고 말하고 다닌 것은 할아버지의 손주사랑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후계구도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대내외에 과시한 정치적 제스쳐였던 것이다.


세자의 후사가 없었을 때는 수양대군의 발호를 대책 없이 지켜봐야 했겠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아마 이때쯤 김종서에게 유사시 수양대군 제거의 밀명을 내렸다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수양대군이 살 길은 무엇인가. 목숨을 걸고 형인 세자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왕과 비' 초반에 수양대군이 등장만 하면 나왔던 대사인 '형님이신 문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주상전하를 보위한다.'는 말은 거의 입버릇이 되었을 것이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수양대군의 비극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간다. 원손이 태어난 후로도 세종대왕께서 생각보다 장수하신 것이다. 세종이 조금 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문종이 세자시절의 건강상태에서 국왕이 되어 신체적으로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게 되었다면, 문종은 1년 이내에 붕어할 것이고, 그리되면 아무리 세자이어도 10살도 안되는 나이로 국왕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수양대군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 지지만, 단종은 그런 수양대군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고 알 것 아는 나이인 12살(앞서 수양대군이 14살에 기방에 출입한 것을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12살 정도면 나름대로 성숙한 청소년시기가 된다.)에 당당히 즉위한다.


단종의 모후인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고 바로 다음날 사망하긴 하지만, 그때까지의 단종의 옥체는 수양대군파에서 보기엔 후일 장성하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될 정도로 잔병치레 없이 강건했다. 누가 봐도 단종 즉위 초에 그는 장수(長壽)가 예견되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의 왕으로서의 자질 역시 10대 초반의 몇몇 정사처리를 두고 신료들 사이에서 '세종대왕의 부활이
다.'라고 이야기 될 만큼 빼어난 모습을 보였던 모양이다. 그 시기에서 만큼은 세종대왕은 지하에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하며 웃고 있었을 것이다.




3. 계유정난의 명분은 정당한가.


새로 시작된 단종의 치세. 역대 어느 왕의 치세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새 임금이 즉위하면, 정권에 위협요소로 작용할 세력을 숙청한다.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정종과 약간이나마 친분이 있던 모든 관원을 모조리 거세했고, 문종은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다.


세종 조에만 예외라고 생각되지만, 세종조에는 태종이 알아서 다 해줬다. 세조 즉위초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니 말하기도 민망하고, 그의 아들 예종은 남이의 옥사를 일으켰으며, 성종 마저도 세조와 예종의 총애를 받은 친적이며, 세조때 이시애의난을 진압한 공신이며 종친인 귀성군 준을 거세한다. 당연히 숙창당한 남이와 귀성군 준은 군공이 매우 높으며 실력과 학문을 겸비한 인제로 세조가 무척이나 총애한 인물이다. 예종이나 성종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꺼림직 하다.


단종 즉위초, 왕권에 가장 강력한 위협요소는 바로 수양대군이었다.


왕당파 김종서로서는 그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단종의 장성시까지 수양대군을 죽이지 않고 무력화 시키는 선에서 세종조의 무혈통치를 완성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흔히 수양대군파가 말하는 황표정치로 인한 훈구대신의 국정독단은 김종서와 황보인이 훈구파가 아니었다는 전술의 내용으로 설득력을 잃고, 황표정치는 주로 인사문제에서만 사용된 것인데, 즉위초 단종이 관원의 이름을 모두 알지 못해 이뤄진 것은 사실이나 단종이 재빨리 관원의 이름을 숙지한 이루 폐지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훈구파는 세조 즉위시 그를 지지한 세력이다. 권남은 그 이름도 유명한 권근의 손자이며, 한명회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명나라에서 받아온 문열공 한상질의 증손이다. 신숙주는 고령 신씨로서 조선초 드러내 놓고 집안자랑을 해도 무방한 명문가의 후예이다. 수양대군의 측근중의 측근들이 오히려 훈구였던 것이다.


훈구파는 오히려 세종조에 순전히 자신의 능력과 왕에 대한 개인적인 친분과 충성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들의 세력에 눌려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수양대군 즉위 이후 이뤄진 숙청에서 거세당한 훈구파는 한 명도 없는 반면, 집현전을 위시한 신진사대부가 남김 없이 숙청 당한 사실은 훈구대신의 국정 전단이라는 수양대군파의 명분의 설득력을 떨어트리기에 충분하다. 심지어 신진사대부가 육성되고 성장하던 집현전을 '사육신의 난' 이라는 일련의 숙청이벤트 이후 그 뿌리를 뽑아 버린 것만 봐도 그같은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4. 단종이 너무 어려 국정을 맡길수 없었다?


지금의 센스로 생각해 보자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질수도 있지만, 상술한 조선시대청소년의 성숙도(?)를 고려해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금 나이로 코 질질 흘리고 다녀야 하는 어린 아이가 당당히 세자와 세손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시대가 바로 그 시대였다.


약간의 억지일수도 있지만, 어린 단종의 눈에 이제 막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을때부터 세종대왕이 강보에
싸 안고 다니며 이런저런 국정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버지인 문종 또한 세자 생활만 29년을 한 사람이다. 아무리 아이가 어려도 집안의 분위기를 가지고 자랄 수밖에 없다.


단종실록을 마구 난도질한 세조시대의 사관들 조차도 단종의 당당한 왕재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후견인이며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인 김종서 황보인등의 주청에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당한 측면이 있을때는 불윤(不允)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며, '내가 충분히 알아들었소' 라며 버티기까지 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단종(12세 즉위)과 비슷한 연배에 즉위한 자산군 헐(성종 : 13세 즉위)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왕위를 물렸어야 한다. 수양대군파의 논리로 본다면 왕재로서 가장 강력한 왕권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귀성군 준이다.


그러나 귀성군은 거세당해 유배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마쳤고, 성종은 세조의 훈구대신들이 만들어 놓은 '훈구대신의 국정전단'의 체제에서 훌륭히 성장해서 세종대왕 이후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 받는 군주가 되었다. 참 묘한 역사의 순환이다.


강한 군주 다음에 단명한 군주가 나오고 그 다음에 어린 왕이 등극하는데도 결과가 이렇게 다르다.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 금성대군이 혜빈 양씨와 내통해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는 어
쩌면 사실이었을수도 있다.


허나 세조와 그 자신의 공신들이 이후에 벌린 일을 보면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이 얼마나 속빈 강정같은 것이었는지를 스스로 드러낸다. 실제로 세조와 그 공신들은 세조 치세 내내 올미부(나중에 후금(:청나라) 를 새운 누르하지가 바로 이 부족 출신이다.)을 토벌한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업적 없이 자신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말며, 오히려 성종시대에는 정도전이 야심차게 시작한 경국대전의 편찬을 무원칙하게 훈구대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쳐 버림으로서 조선 사회를 매우 경직된 귀족적 사대부들과 그들의 좌장인 국왕이 지배하는, 사실 그들이 그토록 비판해 마지 않던 고려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사회로 퇴락 시키고 만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이 글의 시발이 된 '왕과 비'라는 드라마가 너무 세조 측의 입장에서 은근히 그를 정당화 하려는 시도를 어설프게 하다가 실패한 것에 분개(?)하여 이런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저 평범한 왕들의 뒤를 이은 국왕이라면 세조도 무리 없이 한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국왕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전작인 용의 눈물이 철저하게 쿠데타의 생리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 반면, '왕과 비'는 전작의 이러한 인기 요인을 면밀히 분석하지 못한체 중심 없는 작품으로 남게 되어버린 것이 아쉬운 것이다.


오히려 매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혹은 그러려고 애처로울 정도로 노력한) 세조와 희대의 풍운아이며 마키아벨리즘(혹은 관중(管仲)의 신봉자 한명회, 개국공신의 후예로 세종조에 고려사의 개수로 세종으로부터 고신을 박탈 당해 풍비박산이 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새우려 했던 권남, 최고의 명문가 출신으로 현실적 정치이념을 가진 신숙주등 수세에 몰린 훈구파와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신흥사대부 세력의 갈등으로 빚어진 권력쟁탈의 양상을 그렸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재미와 농도를 갖춘 수준 높은 역사드라마가 되었을 것이라는게 개인적 생각이다.


어설피 전작의 화두였던 '왕권주의 (대통령중심제)와 신권주의(내각책임제)'의 대립을 이어가는 것은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진다. 적어도 지금까지 전개된 '왕과 비'의 갈등 양상은 훈구파와 신흥사대부의 갈등일 뿐이니까 말이다. 아무튼 세조의 왕위찬탈을 '구국의 결단' 인양 묘사하는 것은 역겹기 그지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구국의 결단으로 보위에 힘으로 올라선 자는 동서고금의 역사상 아무도 없다. 차라리 한 인간의 처철한 권력을 향한 욕구를 농도 짖게 표현하는 편이 인기 몰이를 위해서도 바람직 할 것이다.



...써놓고 나니 이걸 왜 썼나 싶네


1999. 1. 24.

유 혁 진




.이 분 글 정말 재미있게 잘 쓰시네..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박식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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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드라마 황진이 캡쳐 사진 가져옴.


 내 언제 무신하여 ∼                 - 황진이 -

                  

 [현대어 풀이]

  • 내 언제 신의 없이 님을 언제 속였길래(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 달도 기운 깊은 밤에 님이 오려는 뜻(기척)이 전혀 없네.(임이 찾아주지 않는 안타까움)
  • 추풍에 떨어지는 잎 소리야 난들 어이하리오.(임이 찾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 지는 닙 → 시적 화자의 외로운 심정을 대변하는 사물.

    * 秋風(추풍) → 쓸쓸한 이미지를 통해 슬픔과 외로움이라는 화자의 정서를 대변

 [이해와 감상]

여류 시조 작가의 대명사인 황진이의 시조로, 소식이 없는 임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원망의 정서를 섬세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아름답게 그려 내고 있다. 가을 밤에 초조하게 임을 기다리며,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를 임의 인기척으로 착각할 정도로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한 여인의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임이 찾아 주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임이 찾아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조는 서화담의 노래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에 화답한 것이라고 한다. 비록 스승과 제자의 사이지만 이성으로서의 애정을 은근히 느끼게 된 것은 황진이나 서화담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그것을 순수한 애정으로 승화시킨 데에 화담의 고매한 덕성과 황진이의 반짝이는 총명이 조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하는 서화담의 은근한 연정을 넌지시 받아서, '가을 바람에 지는 잎 소리야 난들 어이하리오.'라는 구절은 체념하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더욱 간절한 애정을 담고 있다.

 [정 리]

 ◇ 성격 : 평시조, 연정가 - 감상적

 ◇ 주제 : 임을 향한 애타는 그리움



 



동짓달 기나긴 밤을 ~                           - 황진이  -

         


                                                                           
              <청구영언>

 [현대어 풀이]

  • 동짓달의 기나긴 밤(기다림의 시간)의 한가운데를 둘로 나누어서
  • 따뜻한 이불(만남의 시간) 아래에 서리서리 간직해 두었다가
  • 정 둔 임이 오시는 날 밤이면 굽이굽이 펴서 더디게 밤을 새리라.

 [이해와 감상]

 기녀 시조의 본격화를 이루었고, 시조 문학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황진이의 절창 중의 하나이다.

임이 오시지 않는 동짓달의 기나긴 밤을 외로이 홀로 지내는 여인의 마음이, 임이 오시는 짧은 봄밤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동짓달의 기나긴 밤을 보관해 두자는 기발한 착상을 하기에 이른다.

또한 중장과 종장에서는 '서리서리', '구뷔구뷔'와 같은 의태어를 사용하여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을 매우 효과적을 나타낼 수가 있었다.

혼자 임을 기다리며 지내야 하는 긴 '겨울밤'과 낮이 길어 임과 함께 하는 밤이 짧은 '봄'이 서로 대조가 되어, 임과 오래 있고 싶은 화자의 심정이 잘 묘사되어 나타난다. 문학성을 띤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예술적 향취를 풍기는 작품으로, 기교적이면서도 애틋한 정념이 잘 나타나 있다.

 [정 리]

▷성격 : 평시조, 연정가(戀情歌)

▷표현 : 의태어의 적절한 사용, 관념(시간)의 시각화

             기발한 착상(긴 기다림의 시간을 잘라서 짧은 만남의 시간을 연장시키겠다고 함.)

             문학적 기교와 애틋한 정서를 잘 조화시켜 예술성을 확보함.

▷주제 : 정든 임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정

 


어져 내 일이야                                  - 황진이 -

         


                                                                           
        <청구영언>

 [현대어 풀이]

  • 아, 내가 한 일이여!  이렇게 그리워 할 줄을 몰랐단 말인가?
  • 있으라고 말씀드리면 임께서 굳이 가셨겠는가?
  • 보내놓고 나서 그리워하는 정은 나도 모르겠구나!

 

 [창작 배경]

 작자가 사대부 황진사의 서녀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여 스스로 시와 서예, 묵화와 음률을 배워 문인을 비롯한 석학들과 교류하였다.

 

 [이해와 감상]

 " 아, 내가 한 짓을 좀 보아라, 이게 무슨 꼴이람. 막상 보내 놓고 나면 이렇게 더욱 그리워질 줄을 미처 몰랐단 말이냐. 제발 나를 버리고 가지 말고, 있으라고 만류하였던들 이렇게 뿌리치고 가 버리지는 않았을  것을. 하필, 말리지 못하고 보내놓고 나서 더욱 그리워하는 이 심정은 또 무엇이란 말이냐. "

당혹해서 마음에도 없는 엉뚱한 행동을 하기가 일쑤인 것이 사랑의 생리임을, 사랑을 해 본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초장과 중장은 임을 보낸 후의 후회를 나타내고 있으며, 종장에서는 떠나 보낸 후에 더욱 간절해지는 임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체념조로 가라앉히고 있다.

문두에 등장하는 '어져'라는 말은 이별을 하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던 그리움을 깨닫게 되었다는 표현과 더불어 생생하게 표현한 신선한 감각이 느껴진다. 특히 이 시조의 표현상의 절조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제 구태여'의 행간 걸림이다. '제 구태여'는 앞과 뒤에 동시에 걸리는 말로서, 앞에 걸려서는 '임이 굳이 가겠는가마는'의 도치형을 만들고, 뒤에 걸려서는 '자기가 구태여 보내고'라는 뜻을 가져 황진이 자기 자신을 일컫게 되기도 한다.

여성의 섬세한 표현이 부드럽고 고운 시어를 구성하고 있으며, 임을 위해 떠나 보낸 뒤 말없이 임을 그리워하는 동양적인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정리]

 □ 성격 : 평시조, 연정가

 □ 표현 : 우리말의 절묘한 구사를 통해 화자의 심리상태를 섬세하고 곡진하게 표현함.

              도치법, 영탄법

 주제 : 임을 그리워하는 회한의 정

 □ 가치 : 고려 속요인 <가시리>, <서경별곡>과 현대의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이어주는 이별시의 절창이라

                  할 수 있음.


 



 청산은 내 뜻이오 ~                           - 황진이 -

         

         
                                                             
          <청구영언, 해동가요,가곡원류>

 [현대어 풀이]

  • 청산은 나의 뜻이요, 녹수(푸른 물)는 님의 정이라.
  • 녹수가 흘러간들 청산의 뜻이야 변할 것인가?
  • 녹수도 청산을 잊지 못해 울면서 흘러 가는구나.

 [이해와 감상]

 '청산'과 '녹수', 변함없는 푸른 산과 자꾸만 흘러가서 한때도 머무르지 않는 물결, 변함없는 작자의 뜻과 변덕스러운 님의 정을 이것들에 비유한 착상이 평범하면서도 신선미가 넘친다.

여기서의 '청산'은 '불변하는 것'이며 곧 '나'와 동일시되고 있다. '녹수'는 '변화하는 것'으로 곧 '님'을 상징하고 있다. 이로써 녹수(님)가 흘러가도 변하지 않을 스스로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녹수의 흘러감'으로 표상되는, 인간이 지니는 숙명적 불안감과 허무감은 사대부들의 자연인식과는 근본적으로 인식을 달리하는 것이다.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녹수'나 '청산'은 다 같이 시간적으로 무한한 영원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사대부의 시에서 변하는 인간과 대비되는 자연물들로서 이 두 소재가 다 함께 채택된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황진이는 녹수의 흘러감, 즉 그 유한성에 주목함으로서 사대부들의 당위론적인 자연 인식과는 다른 이미지를 창출해 내었다.

    결국 나에 대한 임의 사랑이 설령 바뀌었다 하더라도 임에 대한 나의 마음은 영원함을 노래하고 있다. '청산'이 넘치는 애정과 정열에 불타는 내 마음이라면, 그 밑으로 푸르름을 머금고 흐르는 '녹수'는 임이 나에게 속삭여주던 정이라 할 수 있다.

   청산은 녹수가 영원히 자신의 품안에 있기를 원하지만, 녹수는 더 좋은 경치를 향해 떠나간다. 그러나 흘러간 녹수야 지금 있건 없건, 임을 향한 청산의 마음이야 변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리고 저리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아 녹수도 청산을 잊지 못해 눈물을 뿌리고 있는 것이리라.

 [정 리]

 □ 성격 : 평시조, 단시조, 연정가

 □ 표현 : 비유적 표현(은유)

 □ 주제 : 임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






청산리 벽계수 ㅣ야                           - 황진이 -

         


                                                
                               <청구영언, 해동가요>

 [현대어 풀이]

  •  청산에 흐르는 푸른 시냇물아, 빨리 흘러가는 것을 자랑하지 말아라.
  • 한 번 넓은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니,
  • 밝은 달이 텅빈 산에 가득 비추고 있으니 잠시 쉬어간들 어떠하겠는가?

 [창작 배경]

  당시 종친의 한 사람인 벽계수(李渾源)라는 사람이 하도 근엄하여 딴 여자를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높았다. 마침 그 때 그가 개성에 와서 달밤에 나귀를 타고 만월대를 산책할 때에, 소복 차림한 황진이가 이를 시험해 보려고 그에게 다가가 이 노래를 건넸더니, 벽계수는 황진이의 시재(詩才)와 미모에 끌려 자신도 모르게 나귀 등에서 내려서는 하룻밤의 시흥을 돋우었다고 한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중의적인 표현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벽계수'는 흐르는 물과 왕족인 벽계수(碧溪水)를, '명월'은 달과 황진이 자신을 동시에 의미한다.

일차적으로 이 시조는, 아름다운 기녀가 한 강직한 선비를 유혹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벽계수에게 자신과 이 달 밝은 밤의 빈 산에서 함께 어우러져 놀아보자는 유혹의 뜻이 충분히 전달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초장의 '청산'은 영원히 변함없는 자연을 나타내며, '벽계수'는 순간순간 쉬지 않고 변해가는 인간의 삶을 뜻한다. 영원한 자연에 비해 순간적이고 덧없기만 한 인생, 그 허망한 인생을 풍류로 한 번 달래보자는  기녀다운 호소력을 지닌 노래라고도 할 수 있다.

    *청산리 → 푸른 산속
       *벽계수 → 푸른 시냇물, 종친 벽계수를 빗댄 말
       *수이 → 쉽게, 빨리
       *일도창해 → 한번 넓은 바다에 이름
       *명월 → 밝은 달인데, 황진이의 예명이기도 하다. '벽계수'와 아울러 이른 바 중의법으로 표현됨.
       *만공산 → 텅빈 산에 가득 차 있다.

 [정 리]

 ▶ : 평시조, 연정가

  : 중의법.

  : 인생 무상에 대한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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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1(조선야사실록) 상세보기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펴냄
고 고우영 만화가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재출간된 장편 만화 『연산군』 제1권. 정사(正史)의 뒤안길에 숨겨진 또 하나의 역사인 야사(野史)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다. 신문에 연재되면서 광고 게재로 삭제된 부분과 기존에 출간된 책에서 검열된 부분을 복원하였다. 이 작품은 구어와 비속어를 거침없이 구사하고, 오늘의 갑갑한 현실과 역사에서 입증된 진리 사이를 거리낌없이 가로지른다. 또한 상식을 뒤엎고 편견을

2006년 4월25일 故고우영 화백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고인의 장편 만화 중 『오백년』4권과 『연산군』3권을 묶어 새롭게 『조선야사실록』7권 세트로 제작된 책이다. 연산군의 탄생부터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되 “폭군” 이미지에 치중하던 기존의 이야기와는 달리, 불우한 성장과정에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연산군의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정사보다 더욱 사실적인 야사를 만들어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만화가 고 고우영 작가님의 작품이라서 더욱 기대가 된다. 도서관 갈 때마다 고우영 작가님 작품이 있는지 살펴보아도 없더니..ㅠ  영화 <왕의 남자>와 비교하여 야사(野史) 특유의 감칠맛 나고 숨 막히는 전개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아마 고우영 작가님 특유의 성적 농담과 화끈한 묘사가 많이 나올 것 같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 연산군 중종과 그 신하들) 상세보기
김범 지음 | 역사비평사 펴냄
조선조 사화와 반정의 시대를 재조명하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는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정치 변혁의 시대에 펼쳐진 권력 투쟁을 살펴보는 책이다. 국가 체제를 완성한 성종, 그에 대한 반발과 균열을 보인 연산군, 다시 왕권을 둘러싼 체제 정비를 시도한 중종까지 3대 75년간의 정치 투쟁을 다루었다. 세 왕과 신하들의 권력 관계는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압축한 중요한 특징들을 지녔다. 저자는 세 왕이

이 책 내용에 대한 저자 김범의 자세한 설명 보러가기

이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책이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폭군의 멍에를 벗긴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지식산업사 펴냄
연산군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한 책. 성리학의 기준에 따라 연산군을 평가하는 기존의 평면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연산군을 힘의 논리에 따른 역사적, 이념적 희생자로 보았다. 연산군의 통치 전반을 종합적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 저자 소개 지은이_ 신동준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한겨레》기자. 서울대, 외국어대 강사. 21세기 정치연구소 소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살림 펴냄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말하는 통치 리더십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조선 역사에 묻는다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는 조선의 왕과 신하를 통해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된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조선이 패망한 근본 원인을 왕권이 미약하고 신권이 강한 '군약신강'의 왜


연산군에 대한 호의와, 그의 폭정을 신권과 왕권의 대립에서 보는 관점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인 것 같아서 뒤져보니, 역시.. 같은 저자였다. 역시 사람의 관점이 바뀌긴 쉽지 않나보다.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한명회의 신봉승 작가님이 연산군을 광인으로 보고 이와 반대로 드라마 왕과 비, 장녹수의 정하연 작가님이 연산군을 가엾게 보는 것처럼) 이 분은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도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상당히 구구절절히 펴시더니 이 책에서도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당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분 의견에 100%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연산군 초기에 왕권이 대폭 강화된 건 사실이니 작가의 주장 중 일부는 동의한다. 예전 사극에는 연산군 일기의 내용을 고대로 받아들여서 연산군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인 것으로 나왔지만
연산군이 처음부터 싸이코는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고도 그렇게 밖에 행동 못한 것은 100% 연산군의 책임이다. 이때는 왕권 강화고~ 신권 제압이고~ 이런 건 안중에 없고 이미 정신줄 완전히 놓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리뷰들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몇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중간의 흥미로운 부분만을 발췌했으므로 전체 서평을 보고 싶으면 링크를 눌러서 미디어 리뷰를 확인하시길.)


조선왕조 역사로 보는 `통치 리더십`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시대의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는 조선의 역사는 신하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는 신하들의 눈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봤다는 것. 저자는 실록에 명군으로 기록된 임금들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임금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들은 대부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개혁가들임을 강조한다.

그 예로 신 소장은 패도정치라 불리는 세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왕도와 패도는 적절히 섞어 사용해야하는데, 치세(治世) 시는 패도보다는 왕도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게 되고, 반대로 난세(亂世)의 경우 강력한 리더십을 요하기 때문에 패도 사용이 높게 된다""큰 틀에서 보면 세조가 패도를 구사한 것은 맞지만 시대적 상황(계유정난 등)이 그를 패도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한 저자는 조선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세도정치`를 꼬집고 있다.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정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초기에 비해, 신하가 왕을 바꾼 중종반정 이후, 신권이 왕권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다. 이로써 조선 중기와 후기로 와서 국가는 점점 쇠약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부국강병이 왕과 국가의 목표이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신권이 제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이명박 당선인에게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직면해 있기도 하다.


“조선왕조, 공자의 修身齊家 치중… 治平學에는 소홀”

“평화시에는 왕도정치가 필요하더라도 비상시에는 패도정치가 불가피한데 조선은 중화질서 아래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학문이 수제학으로만 치우치고 치평학의 전통을 망각했습니다. 특히 ‘경연’을 통해 주자학자로 키워진 조선의 국왕에게 이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BOOK책갈피] 조선은 신하들이 말아먹었다며?


역사 상식은 역사책에서만 얻는 게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재미있으라고 각색한 얘기를 그런가 보다 하며 정사로 받아들인다는 점. 이 때 사실과는 동떨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생겨나는 법이다.

영화 ‘왕의 남자’, 소설 『단종애사』(이광수)와 『금삼의 피』(박종화)가 좋은 예다. 세조와 연산군을 여지없이 폭군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신문기자 출신의 정치학자인 저자는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한다. 세조와 연산군 모두 신권(臣權)의 발호를 억누르려다 그 같은 오명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조카의 보위를 찬탈했다는 세조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산군도 사림 세력을 견제하려다 쿠데타로 실각한 비운의 군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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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BC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

 
-사진 태조-

(1) 태조~태종 :    추동궁 마마 (1983 / 태조 - 김무생, 태종 - 이정길, 원경왕후 - 김영란, 정도전 - 이호재)
(2) 세종 :             뿌리깊은 나무 (1984 / 세종 - 한인수, 양녕대군 - 송기윤, 소현왕후 - 김영애)
(3) 문종~연산군 : 설중매 (1984 / 세조 - 남성우, 성종 - 길용우, 연산군 - 임영규, 인수대비 - 고두심
                           장녹수 - 이미숙, 김종서 - 전운, 한명회 - 정진, 유자광 - 변희봉
                           폐비 윤씨 - 이기선, 김처선 - 박규채)
(4) 중종~명종 :    풍란 (1985 / 중종 - 최상훈, 조광조 - 유인촌, 문정왕후 - 김혜자, 정난정 - 김영란
                           경빈 박씨 - 박원숙)
(5) 선조 :             임진왜란 (1985 / 선조 - 현석, 이순신 - 김무생, 원균 - 신충식)
(6) 광해군 :          화천문 (1986 / 광해군 - 이희도, 개시 - 원미경, 인목대비 - 권재희)
(7) 인조~현종 :    남한산성 (1986 / 인조 - 유인촌, 임경업 - 최상훈, 최명길 - 변희봉)
(8) 숙종 :             인현왕후 (1988 / 숙종 - 강석우, 인현왕후 - 박순애, 장희빈 - 전인화, 숙빈 최씨 - 견미   리)
(9) 영조 :             한중록 (1988 / 영조 - 김성원, 사도세자 - 최수종, 혜경궁 홍씨 - 최명길,
                           정순왕후 - 김용선, 홍국영 - 김동현, 정후겸 - 선우재덕)
(10) 정조 :           파문 (1989 / 정조 - 김용건, 효의왕후 - 김청, 혜경궁 홍씨 - 고두심)
(11) 순조~고종 :   대원군 (1990 / 흥선 대원군 - 임동진, 고종 - 김홍석, 명성황후 - 김희애, 철종 - 최수종)


2. 왕실 역사
 
-사진 세종대왕-

(1) 태조~정종 :    개국 (1983 KBS / 태조 - 임동진, 정도전 - 김홍기)
(2) 태종~세종 :    대왕 세종 (2008 KBS  / 세종 - 김상경, 태종 - 김영철, 양녕대군 - 박상민,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이윤지, 어리 - 오연서)
(3) 문종~연산군 : 왕과 비 (1998 KBS / 세조 - 임동진, 성종 - 이진우, 연산군 - 안재모, 인수대비 - 채시라
                           단종 - 정태우, 장녹수 - 유니, 김종서 - 조경환, 한명회 - 최종원
                           폐비 윤씨 - 김성령, 김처선 - 김성환)
(4) 중종~명종 :    여인 천하 (2001 SBS / 중종 - 최종환, 문정왕후 - 전인화, 정난정 - 강수연,
                           경빈 박씨 - 도지원, 조광조 - 차광수)
(5) 선조~광해군 : 왕의 여자 (2003 SBS / 선조 - 임동진, 광해군 - 지성, 개시 - 박선영, 인목대비 - 홍수현)
(6) 인조~현종 :    대명 (1981 KBS / 효종 - 김홍기)
(7) 숙종 :             장희빈 (2002 KBS / 숙종 - 전광렬, 장희빈 - 김혜수, 인현왕후 - 박선영, 숙빈 최씨 - 박예진)
(8) 영조 :             대왕의 길 (1998 MBC / 영조 - 박근형, 사도세자 - 임호, 혜경궁 홍씨 - 홍리나,
                           정순왕후 - 이인혜, 숙빈 최씨 - 김영애)
(9) 영조 :             하늘아 하늘아 (1987 KBS / 영조 - 김성겸, 사도세자 - 정보석, 혜경궁 홍씨 - 하희라)
(10) 정조 :           이산 (2008 MBC / 정조 - 이서진, 영조 - 이순재, 혜경궁 홍씨 - 견미리,
                           효의왕후 - 박은혜, 정순왕후 - 김여진, 홍국영 - 한상진, 정후겸 - 조연우)
(11) 순조~고종찬란한 여명 (1996 KBS / 흥선 대원군 - 변희봉, 고종 - 조재현, 명성황후 - 하희라)


3. 인물로 보는 조선 역사

 
-사진 정조-

(1) 태조~세종 :    용의 눈물 (1997 KBS / 태조 - 김무생, 태종 - 유동근, 세종 - 안재모, 양녕대군 - 이민우,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도지원, 정도전 - 김홍기, 어리 - 유니)
(2) 문종~성종 :    한명회 (1994 KBS  / 세조 - 서인석, 한명회 - 이덕화, 문종 - 송승환, 단종 - 정태우
                           성종 - 박진성, 연산군 - 이민우, 폐비 윤씨 - 장서희, 김종서 - 임동진, 인수대비 - 김영란)
(3) 연산군 :          장녹수 (1995 KBS / 연산군 - 유동근, 장녹수 - 박지영, 인수대비 - 반효정)
(4) 중종~명종 :    조광조 (1995 KBS / 중종 - 이진우, 조광조 - 유동근, 문정왕후 - 김민정, 경빈박씨 - 김성령)
(5) 선조 :             불멸의 이순신 (2004 KBS / 선조 - 최철호, 이순신 - 김명민, 원균 - 최재성)
(6) 광해군~현종 : 서궁 (1996 KBS / 광해군 - 김규철, 개시 - 이영애, 인목대비 - 이보희)
(7) 숙종 :             장희빈 (1995 SBS / 숙종 - 임호, 장희빈 - 정선경, 인현왕후 - 김원희, 숙빈 최씨 - 남주희)
(8) 영조 :             홍국영 (2001 MBC / 영조 - 최불암, 홍국영 - 김상경, 정후겸 - 정웅인,
                           정순왕후 - 염현희, 혜경궁 홍씨 - 이상숙)
(9) 정조 :             왕도 (1991 KBS / 정조 - 강석우, 홍국영 - 김영철, 효의왕후 - 박순애, 정순왕후 - 김자옥
                           혜경궁 홍씨 - 정영숙)
(10) 정조 :           소설 목민심서 (2000 KBS / 정조 - 김홍기, 정약용 - 이진우)
(11) 순조~고종명성황후 (2001 KBS / 흥선 대원군 - 유동근, 고종 - 이진우, 명성황후 - 이미연 & 최명길)


PS 1. 픽션이 과도한 작품은 피했습니다.
         예를 들면, "왕과 나" (성종~연산군?), "대장금" (중종), "한성별곡" (정조) 등등..
PS 2. 인물의 일대기라도 왕실 역사가 주가 되는 작품 안에서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천둥소리" (광해군), "어사 박문수" (영조), "태양인 이제마" (철종, 고종) 등등은 제외.


출처:
엠파스 지식인
원 출처는 정확히 기재되어 있아 링크 안됨.(디비디프라임 ALEX작성자님 http://dvdprime.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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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승 작가의 따끔한 질책: 역사드라마가 막가고 있다




Ⅰ. 역사드라마의 광풍이 불고 있는 요즘이다. 방송사 마다 경쟁적으로 역사드라마를 만들어서 내보낸다. 평생을 그 일에 종사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척도 반갑고 즐거운 노릇이어야 옳지만, 실상은 가슴을 조이면서 걱정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진다는 점은 국사정신의 고양과 나라의 정체성 확립에도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러자니 고증考證이 맞느니, 틀리느니 하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고, 사실史實과 맞느냐, 맞지 않느냐로 격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엄격하게 생각하면 드라마와 사실은 맞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만, 사람들은 역사드라마가 사실과 같기를 희망하고, 역사드라마를 통하여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과욕에 젖어있는 게 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작가가 쓰는 모든 소설이나 드라마가 픽션虛構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드라마나 소설의 경우 있었던 사건, 실제의 인물을 다룰 때는 작가에게 주어진 절대권한이나 다름이 없는 픽션도 제한을 받게 된다는 점에 각별히 유념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여기가 드라마작가나 소설가의 식견과 표준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고려 말의 혼란기를 드라마로 쓰게 되면,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교차하게 하면서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갈등을 그리게 된다. 이 상황 안에서라면 어떤 픽션의 도입도 작가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픽션이라는 권한은 작가에게 주어진 자유방임이 아니라는 사실은 픽션의 구사보다도 더 중하다. 정몽주는 어떤 경우에도 56세에 죽어야 하고, 그 죽음은 반드시 선죽교에서 조영규가 휘든 철퇴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은 작가의 픽션으로 무너뜨릴 수도 없거니와 또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요즘의 역사드라마는 이 엄연한 룰(규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사진은 특정 내용과 상관없음.



Ⅱ.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는 ‘사실’과 얼마간 다를 수가 있겠지만, 그 시대가 지닌 ‘시대정신’은 달라서는 안 되고, 왜곡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의 현대사에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 집권자의 통치신념을 제시하는 포괄적인 시대정신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집권자의 통치이념에 따라서 한 시대, 시대마다 어떤 형식이든 시대정신이 깔리게 마련이고, 바로 그것이 그 시대를 흘러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될 수밖에 없다.

가령 KBS-TV에서 방송되고 있는 <대왕 세종>의 경우라면 태종시대의‘시대적 정신’과 이탈해서는 그 시대를 바로 그려갈 수가 없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아 조선건국의 2인자나 다름이 없었지만, 세자책봉에서 제외되는 좌절을 겪으면서 스스로 집권하기 위한 야망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하여 나이어린 이복동생을 죽였고, 자신의 진로에 방해가 되는 동복형님까지 죽이면서 왕권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아버지 태조(이성계)와 는 상상을 초월하는 갈등을 겪으면서 왕권을 굳혔다.

그는 왕위에 있으면서도 네 사람의 처남에게 사약을 내려서 죽게 하였고, 이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며 항변하는 왕비(원경왕후)에게 거침없이 폐비를 입에 담으면서 10여 년 세월을 같은 궐 안(경복궁)에 살면서도 내왕없이 불목으로 일관하였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 세자(양녕대군)를 폐하여 죄인으로 내치기까지 하였다. 이때까지 조선 왕조의 왕위계승이 장자로 이어지지 않았다하여 듣기 민망한 유언비어가 도는 데도 장자인 세자를 폐하는 태종의 독단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또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왕재로서의 가능성을 보이자 태종은 52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그것은 세종의 새 왕조가 확실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후견인(상왕)이 되어야겠다는 그의 책임감의 발로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북경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세종의 장인이자 국구인 심온沈溫이 ‘왕명이 두 군데서 나오면 정치에 혼란이 있게 된다.’는 당연한 말을 했음에도 그가 압록강을 건너기를 기다려서 체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 할 만큼 단호하고도 혹독한 군왕이었다. 어린 왕비(소헌왕후)는 상왕전의 마당에서 아비를 살려달라는 석고대죄를 올렸어도 태종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태종의 재위 18년과 상왕으로 있은 4년은 태평한 다음시대를 열기 위한 자기희생의 시기였기에 어렸을 때의 친구이자 마치 분신과도 같았던 최측근인 이숙번李淑蕃까지도 “내가 죽고 백년이 지나지 않거든 도성 안에 발을 들여놓게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면서 귀양에 처했다.

태종 이방원의 통치시대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다음 시대의 장애물이될 위험이 있는 자를 가려서 그가 어떤 자일지라도 가차 없이 제거해 버렸던 시대’였기에 자신의 뒤를 이은 22세의 어린 세종에게

"천하의 모든 악명은 내가 짊어지고 갈 것이니, 주상은 성군의 이름을 만세에 남기도록 하라."는  명언을 남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태종시대를 드라마로 그리자면 이같은 시대정신 또는 시대의 정한이 고려되지 않고서는 좋은 드라마로 만들어낼 수가 없게 된다.


Ⅲ.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되는 화두는 세종시대와 세종의 통치철학을 살펴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적절한 시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없다. 그러기에 KBS-TV에서 <대왕 세종>을 제작 방영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대에 담겨진 귀중한 체험과 정신을 외면하거나 왜곡한다면 모처럼의 좋은 뜻도 물거품이 되기가 쉽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 <대왕 세종>이라는 타이틀은 너무 보편적이다. 조선왕조에는 27명의 임금이 있었고, 그 모든 분을 통칭하여 <대왕>이라고 높여서 부른다.

그러나 세종은 단종이나 예종, 혹은 철종과 같은 반열에 두기에는 그분의 인품과 업적이 너무도 크고 자랑스럽기에 일반적으로도 다른 임금들과 구분하여 성군聖君세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드라마의 타이틀은 당연히 <성군 세종>이야 옳다. 성군 세종의 경우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업적을 남겼고, 자신의 몸은 병마에 시달려서 시체로 변해가는 데도 자신의 병구완보다 국사를 살피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엄연한 사실이 왜 드라마의 타이틀에 반영되지 않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드라마의 내용이 꼭 사실史實과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터무니없는 일들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드라마는 기본이 픽션虛構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이 같은 상식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방영 중인 <대왕 세종>에는 허점이 너무 많다. 아직은 방송 초기(12회까지 보고 쓴다)인데도 너무 많은 잘 못을 저지르고 있기에 그 중의 몇 가지를 지적하여 앞으로의 과실을 막아주기를 바란다.

1,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태종이 너무 한가하다. 태종은 태종의 시대를 초강력하게 이끌었고, 그것이 곧 세종시대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엄하게도 세자나 중전, 신료들이 태종의 면전에서까지 임금을 무시하는 듯한 간언諫言을 입에 담는 것을 다반사로 여긴다. 당시의 태종에게는 용납될 일이 아니다.

2, 세자(양녕대군)가 드나드는 방은 어디에 있는 무슨 방인지가 분명치 않다. 당시의 정부기관인 이조, 예조, 병조, 호조 등과 같은 건물은 광화문 밖 육조관아에 위치해 있었고, 임금이 불러야 궁으로 들어갔으므로 거리 감각이 살아 있어야 당연한데도 그저 아무데서나 모이고, 헤치고 하는 것이 민망하기 그지없다.

3, 공무에 임하고 있는 세자의 거처(이 또한 애매하지만)에 궐밖에 있는 충녕대군이 사복 차림으로 들어와 앉아서 감 놔라 대추 놔라고 참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충녕대군의 언동에서 임금이 되고 싶어 하는 기미가 보이는 것은 세종을 잘 못 그리는 단초가 된다.

대왕세종의 충녕대군


4, 더 끔찍한 것은 양녕대군이 큰 아버지(定宗)가 총애하는 기녀 초궁장에게 아우들이 지켜보는 백주대낮에 수작을 거는가 하면, 거처에까지 끌어드린다. 이 불륜不倫이 용납될 수가 있는가. 작가는 폐세자의 빌미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변명하겠지만, 양녕이 폐세자가 되는 과정은 <태종실록>에 절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서둘러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5, 또 세자가 명나라 사신의 술상을 엎는 대목은 당시의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를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되거니와 세자가 외교사절에게 그렇게 해도 무사할 수가 있을까. 만에 하나라도 그런 광태狂態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혼’이라고 생각한다면 치기稚氣에 불과할 뿐이다.

6, 더 놀라운 것은 정인지, 최만리 등이 모여서 정도전의 '삼봉집三峰集'을 읽는 비밀결사를 하는 데, 여기에 세자가 참석한다. 정도전은 태종에 의해 참살된 사람이고, 이로부터 4백 년이 지난 고종 때까지도 그의 이름조차 거명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작가는 알고나 있는지? 더구나 아직 그가 죽은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인지와 같은 지식인들이 장소를 옮겨가면서 ‘三峰集’을 읽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7, 세종조의 명신 윤회尹淮는 시장바닥을 헤매는 주정뱅이로 나오는가 하면, 명나라 사신들이 묵는 태평관의 부엌일 까지 참견한다. 윤회는 태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태종 10년 무렵에는 관직의 꽃인 ‘이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이런 사람이 난전을 떠도는 주정뱅이면 어찌되는가.

8, 중전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기 위해 상궁을 시켜 독살을 기도하는 것은 아무리 드라마라도 말이 되지를 않는다.

9, 장차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자로 성장하게 될 장영실이 반정부군에 몸담으면서 명나라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을 포탄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지의 극치이고도 남는다.

10,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가 아들 경령군을 후사로 만들 욕심으로 이숙번을 찾아가 아들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을 청하는 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숙번은 효빈 김씨의 멱살을 잡고 태종에게 끌고가 패대기를 칠 인물이다. 이숙번은 태종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분신이었다.

11, <대왕 세종>이 국민드라마라면 왜 15세 미만에게 주의를 환기하는가. 중학교 2학년이 15세 인데, 이들이 볼 수 없는 <대왕 세종>을 왜 만들어야 하나.


Ⅳ.   MBC-TV의 <이산>의 경우는 비교적 성실하게 잘 만들어지고는 있는 역사드라마임에는 분명하나, 법도에서 벗어나는 몇몇 장면의 과장이 작품천체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역사드라마는 사실과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삼강三綱의 법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이 세 가지를 삼강이라고 한다. 삼강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상존한다. 상하의 관계가 문란해지고, 부자의 관계가 무너지며, 부부의 관계가 깨지면 그 사화가, 그 나라가 천박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21세기를 살면서도 이 법도는 유지되는 것이 우리의 ‘모럴’이다. 역사드라마에서 삼강의 도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을 잘못 호도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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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순왕후가 사복을 입고 궐 밖으로 나와서 조정중신들을 몽땅 불러모으는 장소는 대체 누구 집이며,

2, 창덕궁에서 얼마나 떨어진 위치에 있는 지 도무지 석연치 않은데도 정순왕후는 거의 매일 밤 그렇게 나간다. 요즘 식으로 하면 안가인지 모르지만….

3. 그것이 한 번이라도 위험천만한 발상인데 정순왕후는 매회 그런 몰골로 궐 밖을 쏘다니고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는 노릇이고, 어느 날은 ‘주상과 세손 중에서 한 사람을 죽여야 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발설한다. 상식으로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정순왕후의 뜻을 잘 받드는 사람이 대신 말해도 되는 일이 아닌가. 
정순왕후 김여진

4, 사도세자에 관련된 기사를 세초洗草한답시고, 책을 찢어서 시냇물에 헹구는 데, 인쇄된 것은 세초가 되지를 않는다. 그것을 고치자면 주서朱書로 고치는 것이 정도다. 왕조실록이나 정부 문건은 모두 그렇게 고쳤다.

5, 어느 날 밤에는 영조가 곤룡포와 익선관을 벗어놓고, 창덕궁을 빠져 나갔는데도 아무도 모른다. 궐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뭐하였고, 더구나 세손이 그 사실을 모른다면 대궐이 아닌 여염집의 사정과 무엇이 다른가.

6, 정조의 즉위식에서의 정조의 모습은 사료를 읽지 않은 정형적이 잘 못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생각이 나서 울고, 또 우느라 즉위식에 나오지 않으려 했지만, 대신들의 간청에 못 이겨 늦게 나와서 즉위식이 상당히 미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드라마 보다 사실이 더 빛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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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역사를 학문으로 읽는 역사학자들은 사서史書에 적힌 문자만을 읽는다. 그러므로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역사드라마 작가는 사서의 적힌 문자보다는 그 행간行間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를 흐름으로 읽을 수가 있는 것이 역사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권한이자 행운이다.

역사의 어느 대목만을 끊어서 읽으면 앞뒤의 사정이 맞질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역사의 사실을 확인 할 때도 글자(사실)만을 읽지 말고 앞뒤의 사정을 길게 살필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영월 땅에 부처되어 있던 단종이 죽던 날을 <세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노산군(단종)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 3年 10月 21日자. 이로부터 장장 74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승지 이자화李自華의 발설이 「중종실록」에 실리게 된다.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君으로 강등하였다가 이어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중종실록> 26년의 11월 11일자. 단종이 자살했다고 적힌 <세조실록>과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기사가 같은 실록에 실리기까지는 무려 7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와 같이 드라마작가는 역사의 흐름을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 방송국에서는 시청률에만 의지하여 드라마를 평가하려는 단세포적인 사고가 횡행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설혹 시청률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국사정신을 혼란하게 하였다면 역사드라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작방송사의 위상에 상처를 내게 된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설혹 시청률이 높았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이 국민들(시청자)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었다면 작가나 PD는 큰 죄악을 짓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신봉승 작가: 시, 소설, 평론, 연극 극본, 시나리오, 역사 에세이 등을 집필하며 대학에 출강했으며, 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신 작가는 '사모곡', '풍운', '찬란한 여명' '한명회' 등 수십 편의 사극을 써온 한국 TV 사극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9년간 MBC '조선왕조 500년'의 대본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글을 신문기사에서 읽었다. 안그래도 대왕세종은 아예 말도 안되고, 이산도 좀 미심쩍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목조목 지적해주시니 속이 시원했다. 역시 대작가님은 다르시구나.! 싶었다.

그런데 '신봉승'으로 검색해보니 똑같은 기사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게다가 어떤 건 길고, 어떤 건 짧고 길이도 제각각이다. 이상하다.? 똑같은 기사를 이리 여러 언론사에 보내도 된단 말인가 싶어서 자세히 읽어보니 '신봉승 작가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라는 구절이 있는 기사가 있다. 신봉승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직접 가져와서 필요한 부분만 추려서 기사로 낸 것이었다.!

여러 개의 뉴스를 찾아보았지만 출처가 적힌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자신들은 이렇게 남의 홈페이지에서 무작정 퍼와서 '붙여넣기' 신공으로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바꿔서 기사를 내어놓고 네티즌들에게는 '저작권법'으로 협박을 하다니.. 출처조차도 안밝히면서 저작권 운운하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보다.


그 기사 마지막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낯익은 문구가 있었다.

저작권자: XXXXX 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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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 오프닝 화면 타이틀


방송 삼사의 사극 (SBS - 왕과 나, KBS - 대왕 세종, MBC - 이산) 중, 사극불패 신화를 이어가는 KBS의 대왕 세종이 기대됩니다. 세종대왕은 그동안 너무 평화로운 시대라서 사극에서 다뤄지지 않은 왕인데, 드디어 우리의 위대하신 세종대왕님께서 드라마 주인공으로 납셨습니다.!!!


"니들 정말 너무한거 아니냐??"..고 묻고 계신 세종대왕님



요즘 삼사에서 사극을 앞다투어 그것도 조선 초기(대왕 세종)부터, 조선 초중기(왕과 나), 조선 후기(이산)까지 골고루 보여주니 역사에 관심(만) 많은 저는 행복하기도 하고 챙겨보질 못하니 불행하기도 하네요.

솔직히 저 개인적으로는 양녕대군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이건 양녕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시점에 차차 하기로 하고, 우선 동시대를 다룬 위대한 사극 용의 눈물과의 비교부터 해보도록 합시다. 작품성이나 연기력, OST에 대한 비교도 하고 싶지만 제 깜냥도 그에 모자라고, 또 대왕세종은 아직 초반부이니, 인물들과 설정만 비교하겠습니다.



1. 태종
유동근 태종과 김영철 태종
 
유동근(용의눈물): 그야말로 태종이 살아있었으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의 완벽한 연기와 캐릭터였습니다. 태종의 인간적인 고뇌, 태종의 결단력, 태종의 잔인성까지 다 보여주며 제목이 왜 용의 눈물인지를 알 수 있는 드라마였죠.

유동근표 태종은 굉장히 명석한 인물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절대로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적을 막다른 골목으로 철저히 고립시킴으로써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으로 상황을 만들어 갔습니다. 조강지처인 원경왕후의 동생 넷을 가히 살인마라 불릴 정도로 잔인하게 다 죽이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듯한 모습은 짐승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들과 흔들리는 조선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악업은 모두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 라고 하지요.

이게 실록에 나오는 말인지 그가 직접 한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태종은 정말 진심으로 죄업은 자신이 지더라도 후대가 평탄할 길을 닦아놓은 듯 합니다. (이전 사극에서도 이 대사가 나왔다는데 아시는 분은 좀 도와주세요.)

자기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악업을 지더라도, 그게 자신의 야심때문만이 아니라,
더 나은 후대를 위해서라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물론 요즘 세상에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케 한다는 말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앞으로도 이보다 더 나은 태종이 나올지 의문입니다.



김영철(대왕세종): 궁예의 말투가 아직도 좀 남아있는 것이 약간 아쉽긴 하지만 이 분도 유동근씨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인상깊었을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기력 외에 대왕세종의 태종에서 아쉬운 것은 현재 냉정함과 까칠함만 보일 뿐, 유동근표 태종에서 보았던 치밀함이 다소 부족해보인다는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충신 정몽주를 도끼로 내려찍은 사건 때문에 굉장히 무식하고 생각없는 인물로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 그는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중 가장 똑똑했고,  그렇기에 태조의 조선 건국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늙은 공신들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정치고수였습니다. 지금 김영철표 태종처럼 대신들에게 소리지르고 윽박지르기보다는  은근슬쩍 질문을 던진 다음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도록 만들어 사건을 지휘해 나가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앞으로 태종의 치밀함을 어떻게 보여줄 지 기대 중입니다.



2. 원경왕후 민씨 : 최명길(용의눈물)최명길(대왕세종) 으로 10년만에 다시 연기.

최명길 원경왕후

이렇게 같은 사람이 같은 역을 두 번 맡는다는게 굉장히 드문 케이스죠. 정말 잘 어울리고, 10년 동안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네요. 캐릭터도 거의 동일한 것 같습니다. 무시무시한 태종에게 지지 않고 대드는 강단있는 모습과 아들을 사랑하는 모습 등이 그대로 보여집니다.



3. 세종(충녕대군) :

안재모 세종과 김상경 세종

안재모(용의눈물): 안재모는 여기서 역대 최고의 성군 세종 역을 맡고, 바로 다음 사극인 왕과 비에서는 최악의 폭군 연산군 역을 맡았죠. 어린 나이에도 둘 다 소화를 잘해서 인상 깊었습니다. 현재 왕과 비와 동시대를 다루는 사극 왕과 나에서는 임금에서 내시로 신분이 폭락했지만 연기 하나는 끝내주죠? 그야말로 사극의 젊은 피입니다.

용의 눈물에서는 세종이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특징이 없었죠. 다만 용의 눈물에서는 충녕대군은 왕위에 전혀 욕심이 없었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양녕의 폐세자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왕에 오른 것으로 설정됩니다. (하지만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죠? ^^)

김상경(대왕세종): 용의 눈물에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해 보이던 안재모의 눈빛과는 달리 대왕세종에서는 어린 나이에 벌써 정치와 세상에 뜻을 품은 충녕을 보여주었습니다. 용의 눈물에서는 왕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뛰고 어쩔 줄을 몰라 하지만 실제 충녕은 정치에 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입니다.



4. 소헌왕후 심씨 :

도지원 소헌왕후와 이윤지 소헌왕후

도지원(용의눈물): 충녕 배역도 단역인데 세자빈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친정이 몰락할 때외에는 별로 나온 장면이 없습니다. 이 때 도지원은(여인천하의 뭬야~! 도지원 아님) 아주 어린 나이(중 3?)이었다고 하는데 정통 사극에 출연해서 크게 눈에 거슬리지 않는 수준의 연기를 보였습니다.

이윤지(대왕세종): 용의 눈물처럼 까메오 수준이 아닌 배역이라 상당히 큰 배역인데 개인적으로 참 매력없다 생각하는 배우가 캐스팅되어 약간 아쉽네요. 

자기 때문에 친정이 몰락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내가 소헌왕후라면 왕이면서도 자신을 구해주지 못한 남편(세종)도 미웠을 것 같은데 그런 원망없이 시아버지를 잘 봉양했고, 조선 왕비 중에 내명부를 가장 잘 다스려, 태종에게 덕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땅에 닿는 여인이라는 칭송까지도 들었다고 합니다. 

왕비라는 이유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입은 그녀에게 세종대왕이 해줄 수 있었던 것은 남편으로서의 사랑 밖에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자녀를 많이 두는 것도 중전을 보호해주는 한 가지 방법이었을까요? 어떤 이유에서건 소헌왕후는 세종대왕과의 금슬이 아주 좋았고, 조선 왕비 중에 남편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여인입니다. 자녀가 열이니 임신, 육아 기간만 해도 10년 이상이라 거의 애 낳는 기계였습니다. 늘 배불러 있는 걸로 분장하면 되겠군요.;;

어쨋든 그녀가 세종보다 먼저 세상을 뜬 후에 세종이 크게 슬퍼하여 소헌왕후를 위해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고 하니, 둘 사이가 굉장히 깊었나 봅니다. 젊은 날의 사랑과는 다른 오랜 우정과 믿음, 신뢰, 애착이 합쳐진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겠죠. 집현전 학자들에게도 의지하지 않던 세종에게는 마음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것 같습니다.




5. 양녕대군 :

이민우 양녕대군과 박상민 양녕대군

박상민은 여인천하에서 길상이로 나왔을 때


이민우(용의눈물): 이때 이민우가 20대 초반이었다는데 연기 끝내주죠. 원래는 충녕대군(세종) 역으로 캐스팅이 들어왔는데 이민우가 양녕에 매력을 느껴 배역을 바꾸는 바람에 대본이 수정된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양녕대군이 그렇게 매력있는 인물로 재탄생되었나봅니다.  

이유야 어찌됐건, 양녕대군은 지하에서 이민우와 용의 눈물에게 고마워 해야할 것입니다. 망나니 중에 X망나니였던 그를 이렇듯 멋~지구리하게 포장시켜 줬으니 말입니다. 야사에서는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의 피비린내나는 숙청작업과 정치공작에 질려서 동생에게 지 자리를 물려주고 쿨하게~ 떠나준 것으로 전해져온다지만 실록의 여러 기록은 그렇지 않다고 하거든요.

후에 양녕대군에 대해서 따로 적을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적겠지만 어쨋든 양녕이 권력욕이 없어서 동생에게 그
리 깨끗이 왕위를 물려줄 만큼 됨됨이가 된 인간은 아니었다 이겁니다. 용의 눈물에서 인물들을 재해석한 것까지는 좋은데.. 다른 건 다 참겠습니다만...  양녕대군만큼은 심하게 미화되었다는 거죠.

박상민(대왕세종): 대왕세종에서의 양녕은 용의 눈물에서의 양녕처럼 쿨한 느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양녕은 권력에 욕심도 있었구요. 솔직히 용의 눈물의 양녕은 쾌남아 정도도 아니고.. 무슨 도 통한 도사 같지 않나요? 그렇게 세상사에 미련도 없는 사람이 늙어서 목숨 구걸하려고 수양대군(세조)한테 붙어서 알랑방구 끼고 세종 손자인 단종 죽이자고 그 난리를 떨겠냐구요. 

그런 게 세상이라지만....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응? ㅋㅋ



6.  효빈김씨 : 두 분 다 88년 미스코리아 진(김성령)과 선(김혜리) 이랍니다

김혜리 효빈과 김성령 효빈

김혜리(용의눈물): 원래 성품이 온순한데다 원경왕후의 몸종이었다가 후궁이 되었고 원경왕후 덕에 목숨까지 건졌기에 원경왕후 앞에서는 꼼짝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저도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

김성령(대왕세종): 분명한 것은 현재 김성령표 효빈처럼 건방지지는 않았을 거에요. 피도 눈물도 없는 태종 앞에서 까불 수 있는 건 조강지처 뿐일텐데... 감히 후궁의 아들을 왕위에 앉힐 욕심을 내다니... 이건 윤선주 작가가 좀 너무 오버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원경왕후도 기가 죽어서 조용히 지냈다지요.)



7. 그 밖의 인물들입니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 정하완(용의눈물)최상훈(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20년을 해먹은 전설적인 정승 황희 : 박진성(용의눈물)김갑수(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태종 이방원의 오른팔이었던 이숙번 : 선동혁(용의눈물)김주영(대왕세종)
김주영씨는 10년전에 용의눈물에서 이방간역으로 나오셨다고 합니다.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태종 이방원의 장자방이었던 하륜 : 임혁(용의눈물)최종원(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양녕대군이 폐세자되는 결정적인 사건의 주인공 어리 : 故 이혜련(용의눈물)오연서(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세자빈 김씨(양녕대군 부인) : 안연홍(용의눈물)유서진(대왕세종) 
남편 잘못 만나 졸지에 한양 밖으로 쫓겨난 세자빈 역 안연홍은 저 때만 해도 이미지가 괜찮았는데 지금은 너무 까불이 이미지에 대출광고까지 찍어서 이미지가 너무 나빠져 버렸습니다. 연기도 잘하는 배우인데 참 아깝네요.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5회부터는 아역에서 성인으로 배우들이 바뀌었던데...  너무 어린 아역배우에서 갑자기 너무 삭은 성인배우로 넘어가니 영 적응이 안되네요. 
실제 양녕대군은 쫓겨나고 나면 나올 일도 별로 없을 텐데... 폐세자될 때 나이가 25인데 40에 가까운 박상민씨가 양녕대군으로 나오다니.. 너무합니다.ㅜㅜ 세종대왕 역을 20대만 보여줄 수는 없으니 그랬겠지만 그래도 30대 초반으로는 보여야 할 텐데.. 스물 다섯에 쫓겨난 양녕대군을 40살 아저씨가 연기한다니.. OTL 


012


대왕세종은 양녕대군의 미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그의 욕심과 비행, 충녕대군의 왕위에의 욕심과 도전, 그로 인한 두 왕자 사이의 갈등과 알력... 이런게 재밌을 것 같은데 이를 표현하기에 주연 배우들이 너무 나이가 많아서 패기있는 모습이 잘 안드러나는게 좀 아쉽습니다.

그래도 6회 방영분에서 양녕이 기생을 희롱하는 연기는 잘하시더군요. 나이를 잊고 보면 괜찮습니다. 어린 척하기가 어색했을 텐데 패기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어쨋든 앞으로 양녕대군의 행보가 어찌 그려질지 자못 궁금합니다. 초반의 탄탄한 전개를 유지시켜 주길 바랍니다.

01234


이산처럼 가벼운 사극에 부족함을 느끼는 분들!
왕과 나의 궁중 내 여인암투에 질린 분들!

오랜만에 나온 선굵은 조선 사극, 대왕 세종 같이 안하실래요?

다 같이~~ 대세에 빠~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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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종조에 살았던 조선 최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 어우동...


제가 아주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책, '맹꽁이 서당'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기생(인줄 알았어요.)
 어우동(어을우동).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국민배우 안성기씨까지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되어 왠만한 사람들도 그 이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테지요.
그래도 안성기씨가 나오는데... 너무 Sex 쪽으로만 중점을 둔 듯한 포스터가 마음에 안듭니다.-_-;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 어우동 완벽 영화화 "왕에서 종까지 그녀의 품안에 모든 남자는 단지 노리개에 불과했다."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 왕에서 종까지 그녀 품안의 모든 남자는 단지 노리개;;


제작 : 이태원
감독 : 이장호
원작 : 방기환
각색 : 이현화
촬영 : 박승배
음악 : 이종구
출연 : 이보희, 안성기
 
태흥영화 주식회사 제작
 
1985년 9월 28일 단성사 개봉


실록에 의한 어우동 일지
어우동 영화 포스터



이처럼 주로 '야한 영화의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해서 성종 시대의 다양한 야사 인물 중의 하나려니... 했던 사람인데.. 최근 드라마 '왕과 나'에서 미스코리아 출신 김사랑이 어우동 역으로 나온다고 해서 자료를 한 번 뒤져보니..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입니다.

야한 소설 속의 남자들이 상상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갖춘 여자인 것 같습니다.. 하여튼.. 대단한 여자네요.ㅋ


조선 오백년 역사에서 풍기문란죄로 사형당한 여인



출처 :  김용삼의 조선왕조 실록

조선의 3대 섹스 스캔들(제 3탄) 
닥치는 대로 간통하다 교수형 당한 어을우동(어우동)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조선시대 3대 섹스 스캔들의 마지막 주자는 어을우동(혹은 어우동)이다.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유명세를 탄 이 여성의 남성 편력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들여다 보기로 하자.


어을우동은 성종 시절 승문원 관리 박윤창의 딸로서 태강수(수는 왕실 친척에게 내리는 작호) 이동(李仝)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 잘 나가는 집안의 여성이었다. 그런데 바람기가 몹시 심해 버림받은 후 남자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간통하다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교수형으로 일생을 마감한 희대의 음녀(淫女)다.

어을우동 사건은 성종 11년 7월 11일, ‘어을우동이 수많은 남자와 간통하고도 승복하지 않으니 국문해 달라’는 의금부 보고로 시작된다.

9월 2일 실록에는 어을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의 명단이 줄줄이 기재되어 있으니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공무원 이기, 이난, 구전, 공부하는 유생 홍찬과 이승언, 서리(하위직 관원) 오종련과 김의형, 전의감 생도(왕실병원 실습생) 박강창, 평민 이근지, 노비 지거비 등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어을우동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사람과 관계했음을 알 수 있다. 의금부는 어을우동의 형량은 곤장 100대에 유(流) 2000리(서울에서 2000리 떨어진 곳에 유배를 보내는 것)에 해당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 시절에도 음행을 일삼은 어을우동에 대한 강경론과 동정론이 팽팽하게 맞서자 성종은 여러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은 성종 11년 9월 2일 실록.

<정창손:
“어을우동은 종친의 처이며 선비의 딸로서 음욕을 자행한 것이 창기와 같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태종, 세종 때 선비의 부녀로서 음행이 매우 심한 자는 간혹 극형에 처했지만 그 후로는 모두 율에 의해 단죄했으니 어을우동도 율에 의해 단죄해야 합니다.”

김국광·강희맹:
“어우동은 종실의 부녀로서 친척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서로 간통해서 인륜을 손상시켰습니다. 청컨대 중국 조정의 예에 의해 저자에 세워 도읍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서 징계가 되게 한 후에 율에 따라 멀리 유배하소서.”

윤필상:
“어을우동이 강상을 무너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으면 음란한 풍속을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의 정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을 자행하여 춘추시대 정나라, 위나라의 풍속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청컨대 이 여자를 큰 벌에 처하여 후세 사람을 경계하소서.”

홍응·한계희:
“국가에서 죄를 정할 때는 한결같이 율문에 따르고, 임의로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형장을 강등하여 관대한 법전을 따랐으며 법외로 논단한 적은 없었습니다. 어을우동의 추악한 행실은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되나 임금의 은덕은 죽음 중에서도 살릴 길을 구해야 합니다. 청컨대 율에 의해 결정하소서.”

이극배:
“태종조에 승지 윤수의 처가 맹인 하천경과 간통하고, 세종조에 관찰사 이귀산의 처가 승지 조서로와 간통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 후 판관 최중기의 처 유감동이 창기라 칭하면서 음행을 자행했는데, 사형을 감하여 유배를 보냈습니다. 지금 어을우동은 종실의 처로서 음욕을 자행하기를 꺼리는 바가 없었으므로 극형에 처해야 하나 율에 의하면 사형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청컨대 사형을 면하여 먼 곳에 유배하소서.”>

이처럼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하자 임금이 결단을 내렸다.

<어을우동은 음탕하게 방종하기에 꺼림이 없었다. 이런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이 어떻게 징계되겠느냐. 의금부에 명하여 사형시켜라.”>


꼬리쳐서 맞아들여

성종 11년 10월 18일 어을우동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어울우동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녀는 처음에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을 갔는데 행실이 과히 좋지 못했다. 이동이 은장이를 집으로 불러 은그릇을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계집종처럼 가까이 하려 했다. 태강수가 그것을 알고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친정으로 돌아가 슬퍼하며 탄식했다.

그때 한 계집종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련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 관리가 되었고 용모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가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주인을 위해 불러오겠습니다” 하니 어을우동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련을 데리고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했다. 또 방산수 이난의 집 앞을 지나다가 그와 간통했는데 정이 매우 두터웠다. 이난이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이름을 새겼다.

또 단오날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 서쪽에서 그네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 이기와 눈이 맞아
정을 통했다.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내금위(왕궁 수비대) 구전은 어을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을우동이 정원에 있는 것을 보고 담을 뛰어넘어가 간통했다.

생원 이승언이 일찍이 집 앞에 서 있다가 어을우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 아니냐” 하니 계집종이 “그렇습니다” 했다. 이승언이 뒤를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 집에 이르러 침방에 들어가 비파를 가져다 탔다. 어을우동이 성명을 묻자 “이생원이다” 하니 “장안의 이생원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했다. 이승원이 답하기를 “춘양군의 사위 이생원을 누가 모르는가” 하며 마침내 동침했다.

홍찬이 처음 과거에 올라 시내 구경을 하다 방산수의 집을 지날 적에 어을우동이 살며시 엿보고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뒤에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려 홍찬이 마침내 그녀 집에 이르러
간통했다.

서리 김의형은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 그녀를 희롱하며 집까지 따라가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서리를 몹시 사랑하여 이번에는 등에다 이름을 새겼다.

밀성군(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아들)의 종 지거비가 이웃에 살았는데 어느 날 새벽, 어을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하여 “부인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크게 떠들어 이웃에 알리면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오” 하니 어을우동이 두려워해 안으로 불러들여
간통했다.

이때 방산수 이난이 간통사건과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유감동이 많은 간부(奸夫)를 연루시키는 바람에 사형을 면했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 없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간통한 남자를 많이 열거하고 방산수 이난,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정숙지 등을 끌어댔으나 증거가 없어 죄를 면했다.

사람들이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도 음행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그 어미가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간통사건이나 섹스 스캔들에 대해 극형으로 다스리고 유배 보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들도 스캔들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으니, 인간 사이의 욕정 문제는 발본색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입력날짜 : 2006-08-21 (11:46)








다음은 어우동을 찾다가 발견한 다른 주인공, 유감동이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을 만나서인지.. 운이 좋은 것인지, 교수형은 피해갔군요.



조선의 3대 섹스 스캔들(제2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남자와 간통한 유감동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같이 자다가 소변을 본다고 핑계하여 김여달에게 도망했습니다.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죄를 저질렀으니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김여달은 1등을 감형하여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으로 귀양을 보낼 것이며, 간통한 최중기의 매부 이효랑은 곤장 100대, 오안로는 자자(얼굴에 칼 자국을 내는 것), 기타 간통한 자들은 곤장 60~100대를 쳐야 합니다.”








사족.

어우동, 유감동을 비롯하여, 인수대비, 정순왕후, 문정왕후 등... 조선시대 유명한 여자들은 모두 악명 높은 사람들 밖에 없네요. -_-;; 이것도 남존여비 사회의 편견에서 온 것인지 궁금하군요.

제가 알기로는 성종과 어우동보다 성종과 기생 소춘풍과의 이야기가 더 유명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일단 유명하니까 어우동을 고른 것일까요?


드라마 왕과 나에서 어우동과 성종의 동침 장면

드라마 왕과 나에서 어우동과 성종의 동침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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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즐겁고 신성한 것이라 여긴 신라시대 여인들이 칠거지악을 내세우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갑갑해서 모두 기생이 됐거나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외국도 그런 것인지 우리 민족이 유달리 성을 사랑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언어에 유독 음담패설과 성 관련 욕설이 많은 걸 보면 조선시대의 악랄한 억압은 강한 것에 대한 더 강한 것을 통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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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점잖은(?) 조선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던 섹스 스캔들'들을 모아보려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한 글을 쓰셨고, 이 블로그에도 황진이나 어우동에 대한 글이 있으니, 링크를 통한 소개만으로 내 수고를 덜고자 한다.

↓이 글↓은 카페글이라서 검색을 통한 조회는 되지만, 링크를 따라가면 조회금지로 나와서 원본 출처 명기 후에 표기한 것임.

조선시대 스캔들

영화 <스캔들>이 나오기 전에는 조선시대 스캔들이야 과부가 머슴과 도망가 숨어 살거나 결국 자살을 택하는 것 정도의 고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어우동, 사방지 등 한국형 에로 영화의 소재가 모두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기억하자.


어우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사랑을 나눈 여자이다. 조선 성종 때의 실존 인물인 어우동은 본래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간통 문제가 불거져 이혼당했고 그 이후 노소, 근친을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을 뿌린다. 어우동은 한번 관계를 맺은 남자는 절대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었는데 애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몸에 문신하도록 강요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애정 행각이 구설수에 올라 풍기문란 죄로 처형된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어우동의 형량은 고작 곤장형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연루된 고위 관리들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사형을 고집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책임감없는 행동은 한결같다.



믿기지 않겠지만 500년 조선조 동안 왕실 여인들의 동성연애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궁궐 내 동성연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세종대왕이 이와 관련된 벌칙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 세종대왕이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연애자임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을 충격에 빠뜨린 며느리는 후에 문종이 되는 세자의 둘째 부인인 봉씨. 실록에 의하면 봉씨는 거짓말로 임신과 낙태를 번갈아 하고 술을 즐겨 만취한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물론 이는 봉씨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은 관리들의 악의에 찬 기록일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날 궐내에 여종 소쌍이 세자빈과 같이 잔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왕의 문초를 받던 소쌍은 세자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고백한다. 결론? 물론 세자빈은 폐위됐고 친정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도 자결했다.



드라마 <대장금>의 배경이 되는 중종 때 조정은 백정의 딸을 양반의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로 한바탕 시끄러웠다. 결국 중종이 어려운 시절에 동고동락한 천민의 딸을 양반의 정식 아내로 인정하라는 명령을 내려 일단락된 이 사건은 조선 전체가 들썩거렸던 백정의 딸 양씨 스캔들이다. 폭군 연산군은 예쁜 여자라면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은 이장곤이라는 관리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이에 격분한 이장곤은 홧김에 아내를 죽이고 함경로 도망친다. 도망자 신분의 이장곤은 백정 양씨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정말 괜찮은 그 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도망자 생활 몇 년 만에 중종의 즉위로 조정으로 돌아온 이장곤. 그동안 양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장곤은 동고동락한 아내를 버릴 수 없어 조정에 선처를 부탁한다. 결국 이장곤 덕에 부인 양씨는 정경부인이 되고 친정은 모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정경부인 양씨의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 <임꺽정>에도 등장하는데 임꺽정은 정경부인 양씨의 조카로 설정돼 있다.


언젠가 KBS <역사 스페셜>에서 지독한 사랑으로 소개된 바 있는 홍랑과 김덕창의 스캔들은 이렇다. 김덕창은 함경도 변방에 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시와 음악에 뛰어난 관기 홍랑을 만난다. 서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김덕창의 임지 변경으로 헤어지게 되는데 어느 날 홍랑은 한양에 있는 김덕창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관기는 임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홍랑은 연인을 찾아 한양에 오게 되고, 한양에서 둘은 다시 한번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한양 한복판에 아내까지 있는 양반 관리가 법을 어긴 관기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고 김덕창은 파직 후 객지에서 살해됐다. 사실 개인적이기까지 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세하게 전해지는 이유는 후에 홍랑이 김덕창을 위해 평생 수절했고 결국 김덕창과 나란히 묻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회 금기를 깨고 사랑을 이룬 그녀의 용기가 더 부럽다.


양녕대군은 동생을 위해 일부러 패륜아 행세를 한 꽤 멋진 왕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녕대군을 호탕한 풍류가로만 생각하기에는 입에 담기 민망한 스캔들이 많다. 양녕대군이 일으킨 스캔들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웠던 것은 유부녀인 어리 강간 사건이다. 어리는 한 정승의 첩으로 병이 있고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양녕대군은 그녀를 납치해 강제로 관계를 갖는다. 심지어 양평대군은 어리를 궁궐과 지방 유배지에까지 끌였들이는데 이는 연산군의 스캔들을 제외한 조선시대 최고의 섹스 스캔들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는 이 어리 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됐다는 사실을 들어 당대의 로맨스로 미화하지만 결국 양평대군이 어리를 버리고 왕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어쨌든 그 이후의 어리의 삶은 기록에 전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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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만남의 동행  원문보기





영웅은 수많은 미녀들을 취해도 호남으로서의 기개나 풍류로 포장하는데 비해, 여자들은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의 미국에서도 추악한 스캔들의 여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걸 보니 이 또한 남녀차별의 일종인 것 같아서 과히 유쾌하진 않다만.. 나 역시도 그녀들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걸 보면 나도 똑같은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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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故 김무생님



신덕왕후 강씨, 김영란님.



신덕왕후의 큰아들 방번,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함. 불쌍한 정태우는 불우한 왕자 역할만 몇번 째냐.



태종 이방원 유동근,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대단한 왕



원경왕후 민씨 최명길님, 이 드세던 여자가 멸문지화를 입은 이후 10여년간 갖혀살며 심하게 마음 고생을 함.



선빈 안씨 이보희님.



효빈 김씨 김혜리, 태종이 왕에 오르기 전 사가에서 눈에 들었다고 함.



소빈 노씨 하지원의 앳된(?) 모습. 태종의 용포에 음식을 쏟아서 관심을 삼.ㅋㅋ


양녕대군 이제 이민우, 용의 눈물에서는 일부러 미친 척(?)한 것으로 묘사됐으나 행동을 보면 진짜 미친 놈임.
어쨋든 연기 하나는 끝내주는 이민우. 유동근 = 태종 이방원인 것처럼 이민우 = 양녕대군 공식을 세움.


세자빈 김씨 - 안연홍, 중전될 팔자에서 X망나니 남편 덕분에 졸지에 한양에서도 쫓겨나
평생 바람둥이 남편 등만 보고 산 박복한 여인



양녕대군이 폐세자 되는데 결정타를 날린 여인, 어리
故 이혜련의 연기는 후속작 왕과 비의 장녹수에서 진가를 알 수 있음.



효령대군 이보 장나라의 오빠인데 정말 잘 생겼고 연기도 잘하던데 왜 안나오는지..


충녕대군 이도 안재모, 수염 낫을 때가 훨씬 나은데.. 왕과 비에서 연산군역으로 열연함.
수염 붙이고 나온 순간부터 전국의 처자들을 울림.


 
성녕대군 이종. 늦둥이로 총명하고 착해서 사랑을 듬뿍 받으나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일찍 세상을 뜸.



이숙번의 처 정씨 송윤아.. 아. 정말 예쁘네.
원경왕후와 절친한 사이였으나 후궁 선빈을 소개해주는 바람에 원경왕후와 멀어짐.




태조 이성계가 죽은 후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까지를 회상하는 태종.
참 사람 많이도 죽였다ㅡㅡ;; 이건 인간 백정도 아니고..




용의 눈물에서 절에서 사슴고기 구워먹은 양녕을 미친 놈이라고 욕하는 태종과
그래도 뭘 잘했다고 뻔뻔하게 대드는 양녕대군 이민우





양녕대군의 서찰, 마치 왕위를 충녕에게 양보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과연 그럴까?



양녕대군을 폐세자 시키면서 괴로워하는 태종...
적장자에게 물려줘야 아들들끼리 골육상쟁의 비극이 안일어난다고 생각했을텐데..
세자를 위해, 아들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살육을 하고, 그 많은 말썽을 다 참아줬건만.



원경왕후의 최후... 이제서야 용서를 구하는 태종과의 대화..
두 분의 소름끼치는 연기력과 이야기... 찡하다.




용의 눈물은 다시 봐도 참 멋진 드라마이다.
앞으로 이런 명품 사극을 다시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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