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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복:(주상전하, 돌아오시옵소서)를 외치는 왕과 나의 내시 조치겸


상위복 [上位復] :조선의 국가의례인 오례(五禮)에서 흉례(凶禮)의 절차 가운데 하나인 복(復)을 말함. 상위(上位)란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며, 복은 돌아오라, 회복하라는 뜻.

본문
내시(內侍)가 평상시에 입던 임금의 웃옷을 왼쪽으로 메고, 앞 동쪽 지붕 처마로 올라가서 지붕 한가운데 마룻대 위를 밟고, 왼손으로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옷 허리를 잡고서 북향하여 세 번 상위복이라 불렀음. 동쪽은 생명의 방향을 뜻하며, 북쪽은 죽음의 방향을 뜻하므로 동쪽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외친 것임. 복은 죽음의 길로 가지 말고 돌아오라는 뜻이며, 세 번 부르는 것은 셋을 성스러운 수로 여겼기 때문임. 내상(內喪) 즉 대비나 왕비의 경우라면 중궁복(中宮復)이라고 하였음. 이를 마치면 옷을 앞으로 던지는데 내시가 함으로 이를 받아 들어와서 대행왕(大行王)의 위에 덮고, 덮은 사람은 뒷 서쪽 지붕 처마로 내려갔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실려 있음. 민간의 초혼(招魂) 의식과 같음.

용례
복.<내시가 상시에 입고 있는 상의를 왼쪽에 메고 앞 동쪽 처마로부터 올라가서 왼손으로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허리를 잡고 북쪽을 향하여 세 번 부르기를, “상께서는 돌아오소서.” 하였다.> (원문)復<內侍以常御上服 左荷之 陞自前東霤 左執領 右執腰 北向三呼曰 上位復> [순조실록 권제34, 21장 뒤쪽, 순조 34년 11월 13일(갑술)]


[조선시대 왕의 장례식]

국상은 국가사업에 비견될 정도로 많은 경비와 인력이 소요되는 중대사로, 새로 등극한 왕이 맡게 되는 첫번째 국사이기도 했다. 국상 절차는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행해졌으며 5개월 장으로 지냈다. (기간이 길었던 이유는 왕릉을 조성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 임종과 장례준비

<국조오례의>에는 왕의 임종이 다가오면 법궁인 경복궁의 사정전으로 모셔 왕의 유언의 날조 가능성을 막고자 하였으나 실제로 사정전에서 임종을 맞이한 왕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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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정조실록 中

- 영조 52년 (1776년 병신년) 3월 3일 : 임금의 병환이 악화되다
- 같은 해 3월 5일 :  묘시에 임금이 경희궁의 집경당에서 승하하다
- 같은 해 3월 12일 :  대행 대왕의 시호·묘호·전호·능호를 정하다
- 같은 해 7월 27일 : 유시에 원릉에 장사하다


2. 국휼고명과 촉광례
왕의 병환이 위급해지면 액정서에서 평소 왕이 정사를 돌보던 곳에 휘장을 치고 병풍을 두른 후 왕세자와 대신들을 불러놓고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다는 마지막 왕위를 전하는 유교를 작성하게 하며, 이것을 국휼고명이라고 한다. 숨이 멎으려 하면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돌아가시면 왕의 입과 코 사이에 명주솜(고운 햇솜)을 얹어 놓고 솜이 움직이는 지를 보았다. 이 절차를 촉광례(觸纊禮) 또는 속광이라고 했으며, 솜이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 왕의 몸에서 혼이 완전히 떠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산 영조 사망시 속광(촉광례)


왕의 임종을 지키던 사람들은 임종을 확인하고 나면 이 순간부터 곡(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왕의 혼이 죽은 자의 혼들이 모여 있는 북쪽으로 더 멀리 가기 전에 다시 불러오는 초혼(招魂)의식, 즉 복(復)을 하였다.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간은 5일 이었고, 이 동안은 왕이 계속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세자가 즉위하지 않았다. 5일이 지나도 왕이 되살아 나지 않으면 입관을 하고 세자의 즉위식을 치렀다.

영조 사망시 곡하는 이산 정조


3. 고복(초혼과 발상의식)과 빈소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내시는 복의(죽은 왕이 평상시 입던 옷)를 들고 왕이 승하한 궁의 지붕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왼손으로는 옷의 깃을,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를 잡고 흔들며 '상위복'(왕이여 돌아오소서)을 세번 외치고 돌아와 복의로 왕의 시신을 덮고 곡을 한다. 이를 고복이라 하는데 상위복을 외치는 것은 왕의 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체취가 밴 옷을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 의식이 끝나면 국상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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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왕의 빈소를 마련하고 육신을 떠난 혼을 위해서
혼이 의지할 수 있도록 흰색비단을 묶어 혼백을 만들어 관 앞에 두었다. 왕세자와 대군 이하의 친자, 왕비와 내명부 등은 모두 관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며 비취, 노리개 등의 사치스러운 것을 제거한 뒤 흰옷과 흰 신과 거친 베로 된 버선을 신으며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를 역복불식이라 한다.


4.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 설치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에 소렴과 대렴에 입을 옷, 찬궁(관을 설치하는 일), 성복(상복을 입는 일) 등을 맡는 '빈전도감'과 장례기간 동안 제사와 의례(염, 습 등)에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국장도감', 그리고 왕릉 축조를 담당하는 '산릉도감'이 설치되었다. 병조에서는 전국에 계엄령을 내리고 군사들을 동원해 도성의 성문과 대궐을 겹겹이 둘러싸고 통제합니다. (장례가 끝나는 날까지)


5.
목욕례와 습 및 반함  
왕이 임종한 날에 시신을 목욕시키는 목욕례를 행하는데, 머리와 상체는 기장뜨물과 쌀뜨물을, 하체는 단향(향내나는 나무)을 달인 물을 사용하였다. 목욕례 후에는 흰 비단옷을 9겹으로 입히는 을 행하였고, 그 뒤에는 시신의 입에 쌀과 진주를 넣는 반함을 하였다. 입 오른쪽에 쌀을 채우고 진주를 함께 넣은 후 왼쪽과 가운데 부분도 그와 같이 하였다. 이를 반함이라 한다. 내시들이 왕세자·대군·왕비·내명부빈·왕세자빈 등의 위(자리)를 마련하고 각자의 위에 나아가 곡을 하는데 이를 위위곡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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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염과 입관
반함 이후 왕의 시신을 평상에 모셨는데, 그 앞에는 ‘대행왕재궁(大行王梓宮)’이라고 쓴 명정(銘旌)을 설치했다. 죽은 지 2∼3일 내에 하는 소렴(小殮)에는 겹옷, 겹이불로 19겹을 입힌다. 소렴에서는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끈으로 묶지도 않고 얼굴을 덮지도 않았다. 4∼5일 후에 하는 대렴(大殮)에는 90겹의 수의를 입힌 뒤 입관한다.
(5개월이나 되는 긴 장례기간 동안 시신에서 나는 악취를 막기 위한 나름의 지혜일 수도.)

반함 이후에는 왕의 시신을 평상에 모셨는데 평상 밑에는 빙반이라고 하여
석빙고에서 떠온 얼음을 채워 시원하게 했다.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함) 평상 앞에는 붉은 비단에 대행왕재궁이라고 쓴 명정(죽은 자의 관직명을 쓴 깃발)을 설치했다.


7.
성복과 졸곡제
염이 끝나고 입관을 하면 왕과의 관계에 따라 왕세자 이하 모두 상복을 입게 된다. 이를 성복이라 한다. (보통 상이 난 지 나흘 정도 지난 뒤 입게 됩니다) 왕과 부자 관계이면 3년 복, 조손(할아버지와 손자)관계이면 1년 복을 입고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은 흰 소복을 입는다. (관리들의 경우 5일 입었다고 한다) 이후 빈전에 아침과 저녁의 문안과 곡(조석곡전급상식),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예식(삭.망전)이 장례날까지 이어진다.

승하 후 보통 3개월이 지난 뒤 졸곡제를 행하는데 졸곡 전까지 음악과 혼인 및 도살이 금지된다. 왕의 시신이 들어가는 관인 재궁(梓宮)은 안의 ‘벽[稗]’과 바깥의 ‘대관(大棺)’으로 이루어진 이중관이었다.

입관 후 왕은 유교 예법에 따라 5개월 만에 국장(國葬)을 치렀는데, 이 기간동안 시신을 모시는 곳을 빈전(殯殿)이라 하였다. ‘빈(殯)’이란 집안 내에 시신을 가매장한 장소를 뜻하며 빈전은 왕이 임종한 곳에서 편리에 따라 적당한 건물에 설치했다. 이 기간 동안 후계왕은 빈전 옆의 여막에 거처하면서 수시로 찾아와 곡을 함으로써 어버이를 잃은 자식의 슬픔을 다하였다.


8. 사위와 반교서 
성복례가 끝나면 왕이 자리를 비워 둘 수가 없기 때문에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한다.
이때 새 왕의 복장은 즉위시에는 면복(면류관과 곤룡포)을 입고, 졸곡 후 국사를 볼 때 백포(白袍)와 익선관을 사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왕위에 오른 뒤 그 사실을 교서로 대내외에 알리고(반교서) 국정을 처리하였다.

이산 정조 즉위


9. 상시책봉과 장사  
대행 왕의 시호를 책정하여 종묘에 고유한 뒤 빈전에서 상시(죽은 임금에게 묘호를 올리는 것)의 예를 행한다. 이를 상시책봉이라 한다. 장례식은 왕릉이 모두 완성된 후 길일을 골라 행한다.

계빈(발인하기 전날 빈전의 문을 열고 관을 닦고 점검한다)
조전(빈전에 예찬을 갖춘 뒤 왕이 직접 배곡하고 술을 올려 발인할 것을 고하고 관을 빈전에서 상여로 옮긴다)
견전(관을 상여로 옮기기 전에 중문 밖에서 상여로 옮긴다는 사유를 고한다)
발인(상여를 수행할 문무백관의 반차를 정하고 빈전을 출발하여 묘지로 향한다)
노제(발인하여 상여를 운반하는 중로에서 도성을 떠난다는 고유한다)
천전(상여가 장지에 도착하여 관을 현궁(관을 모실 구덩이)으로 운반하고 예찬을 갖추어 술잔을 드린 뒤 하관)

초우제(장사후 첫번째 지내는 제사로 보통 당일날 지냄)
반우제(신주를 모셔 오는 예식을 말합니다)
재우제(두번째 제사)
삼우제(세번째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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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계비 정순왕후 간택 일화 -  네가 돌면 되지 않느냐?


이산 정순왕후
조선 제21대 영조께서는 첫째 왕비 정성황후 서씨(貞聖王后 徐氏)와 연잉군(延礽君) 시절 11살 때(1704년)  13살의 달성 서씨와 가례를 올리고 서씨는 혼인한 후 왕위에 뜻이 있던 영조와 동고동락한 사실상의 동지였다.

경종 시절 서씨의 조카 서 덕수가 노론 4대신<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중추부판사 조태채(趙泰采), 중추부영사 이이명(李頤  命)>이 연잉군을 국왕으로 추대했음을 전하고 또 이 때문에 사형까지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서씨의 친정은 영조를 즉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드디어 경종 4년 소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위기를 넘어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히도 정성왕후 서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영조는 결국 세 명의 후궁들에게서 2남 7녀를 낳았느데 제1후궁인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와 두 명의 옹주를, 제2후궁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와 화평옹주, 화순옹주를, 제3후궁인 귀인 조씨가 화유공주를, 마지막 후궁인 숙의 문씨가 화령옹주와 화길옹주 등을 낳았다.

일곱 명의 딸 중 맏딸은 유아기 때 사망했고, 둘째 딸 화순옹주는 남편 월성위가 죽자 그 뒤를 따라 굶어 죽었다. 다섯째 딸 화협용주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첫아들인 효장세자도 영조가 즉위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열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다음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둘째 아들 사도세자였다.

서씨는 후궁들의 몸에서 난 소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도세자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쏟으며 돌보았다. 그러기에 만일 서씨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면했을 지도 모른다.

1757년 2월 왕비 정성왕후가 소생이 없이 66세를 일기로 먼저 세상을 뜨자 영조는 장차 자기도 홍릉[弘陵] 왕비 옆에 묻히고자 에 허우(虛右:오른 쬭에 자리를 비워두는) 제도를 쓰도록 하였을 정도로 애통해했지만,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정순왕후(貞純王后)의 揀擇(간택)에 얽힌 逸話(일화)! 

어린 시절 유명인 이야기에 종종 등장했던 왕비 간택 이야기의 유명한 일화가 악덕 왕비 정순왕후인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녀는 뒤에 악명을 끼쳤지만 머리만큼은 명석했던 모양이다. 후일의 악행이 없었다면 아주 현명한 왕후로 영원히 역사에 남았겠지만 알고 보는 것이라 순수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1.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당시 왕비 후보는 10명.  드디어 간택의 날. 여러 양반가의 처녀들이 선을 보기 위해 궁녀가 안내하는 방에 들어갔다. 방에는 방석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처녀들의 아버지 이름이 쓰여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영조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앉아 있는 여러 처녀 가운데 어찌된 일인지 김한구의  딸만이 앉아 있지 않고 서 있었다. 궁녀들이 다가가서 서 있는 규수의 귀에다 대고 재촉을 하였으나, 그 처녀는 여전히 서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영조는 직접 물었다.
“다른 처자는 아버지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아서 판단하기 좋게 하는데 김한구의 딸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그대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여 앉지를 못하는고?”

그 처녀는 궁녀에게 가만히 귓속말을 하였다.
“아무리 간택하는 자리라고 하지만, 방석 위에 어버이의 성함자(姓銜字)를 써놓았으니 그것을 어떻게 깔고 앉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이름이 수놓인 것은 바로 아버지가 아닌가?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는 불효라는 말이다. 왕비가 안되어도 좋다. 효녀만 되면 된다. 효녀 이름이 밖에 크게 소문나지 아니하여도 딸로서 도리만 다 하면 된다. 왕비 이전에 딸노릇하는 딸이 되겠다는 말이다. 영조는  이것을 알고 묵묵히 있었다. 속으로는 갸륵하기도 하고 맹랑한 대답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2.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이 드는고?

그리하여 다시 간택이 진행되었는데 영조가 규수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넘기 힘든 고개가 무슨 고개인가?”

한 규수는 "대관령고개입니다."
다른 규수는 "추풍령고개입니다."라고 하는 등  높은 산과 고개의 이름을 말하였다.

그러나 김한구 딸은 "보릿고개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답하였다.

이유를 묻자, “봄에 곡식이 떨어져서 보리가 나올 때까지 배고픔을 참고 넘어야 하는 고개인 보릿고개가 가장 힘들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보리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끼, 아니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리고개이니 백성들에게는 그 어떤 고개보다 넘기 힘든 고개가 보리고개일 것이다. 가난을 신물나게 겪어본 사람만이 보리고개가 가장 힘이 든 고개라고 할 것인데 바로 이 김처자가 그리 말을 한 것이다.

(※실제로 그 김규수는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몰락한 양반의 딸로 충청도 서산 당진 홍성 쪽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살다가 못 살아서  서울에 가면 아는 사람 연줄로 좀 벼슬이나 살까 한 아버지 뜻을 따라 가마를 빌려타고 보모랑 같이 서울에 왔는데 도중에 노비와 숙식비가 없어서 갖은 봉변을 다 당하고 급기야는 벼슬을 살러가는 초행원님에게서 돈 좀 얻어  가죽옷도 얻어 입고 한겨울에 상경을 한 적이 얼마 전에 있었다. 그렇게 빈한한 김한구는 어찌어찌하여 벼슬을 살고 마침내 그의 딸이 이 간택에 뽑히게 된 것이다.)

모름지기 나라의 국모인 왕후가 되려면 백성이 겪는 그 고통이라는 대명사인 보리고개를 알아야 할 것이다.
 

3.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제일인고?

영조의 질문이 계속 되었다. “그대들은 무슨 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가?”

이번에도 다른 처자들은 '첫번째 간택 규수는 목련꽃이라고 하고, 두번째 간택규수는 연꽃 등 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꽃을 들었다.

그런데 김한구의 딸은 다른 말을 하였다.
“목화가 가장 좋으니, 옷을 지어 온 백성을 따뜻하게 입힙니다.” 

목화꽃이라? 이 꽃은 화사하고 예쁜 꽃은 결코 아니므로 일반 상식으로는 맞는 답이 아니라고 하겠는데, 그 꽃이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는 왕비라도 백성이 헐벗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왕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4.
영조가 다시 묻기를 “무엇이 가장 깊은가?”라고 하자 대부분의 처녀들은 ‘산’ ‘물’을 들었으나
김한구의 딸은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물건은 깊이를 헤아릴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답을 하였다. 


이리하여 경주 김씨 김한구 딸이 영조대왕 말년에 계비가 되었으니 정순왕후다.
 

<원문>

何物 最深      무엇이 가장 깊은가?

人心 最深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物心 可測      물건의 마음은 헤아릴 수 있으나,

人心不可測也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정순왕후는 왕비로 뽑힌 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 오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말했다고 한다.


열 다섯(!!!) 어린 나이에 왕비의 체통까지 생각할 만큼 만만치 않았던 여인.


1759년(영조35년) 초여름 6월, 창경궁. 66세의 신랑 영조와 1745년 11월 10일 여주 고을에서 태어난 15세의 신부, 오흥 부원군(鰲興 府院君) 김한구(金 漢耉)의 큰 딸, 경주김씨가 혼례를 올리고 정순왕후로 책봉된다.  임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처녀만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법도에 따라 열다섯 꽃다운 처녀가 노인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영조는 1776년 승하하셨으니 그녀는 참 오랫동안 혼자서 여왕과도 같은 지위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그 부인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던 신부.

이 나이 어린 신부는 경주 김씨 정순왕후의 친정은 사도세자에 적대적인 노론 벽파 집안으로 아버지 김한구(漢耉)의 사주를 받아, 나 언경(羅彦景)이 사도세자의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여 사도세자를 서인(庶 人)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하고, 정순왕후는 당연히 사도세자의 아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보위에 오르는데 정순왕후는 정조의 왕권에 심각한 위협이되는 정치적 정적이였다. 정조는 의문사를 당하게 되는데 정순왕후가 독살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당쟁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에 반대하는 벽파 (僻派)를 항상 옹호하였으며, 훗날 정조가 승하하고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소생으로 11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는데 이때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정국의 태풍의 핵으로 등장하게 된다.


1801년 1월 10일 용상 아래에는 모든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용상에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의 11살 난 순조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긴장된 분위기를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렴 뒤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천주교)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과 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려져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
五家作統(클릭)을 닦아 밝히고, 그 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을 시행하여 진멸(盡滅)함으로써 유종이 없도록 하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였다. 김씨는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시작해, 정국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서학(西學)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이는 마치 조선의 신분 체제 를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순왕후 김씨와 뜻을 같이 하는 노론 벽파가 반대당인 남인들과 일부 노론 시파를 탄압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왕권과 다름없는 정치력을 행사, 국왕과 똑같은 권위에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여, 본인 스스로도 여주. 여군, 여자 국왕을 자처할 정도였던 여인! 그 여인이 바로 경주 김씨 가문 출신의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그녀의 행적으로 봐서 권력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부질없는 권력욕 탓에 그녀 사후에 친정가문이 멸문을 당하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순왕후가 죽자 그녀의 친정인 경주 김씨 일문은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안동김씨 집안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안동 김씨 집안의 견제를 받아 곧 멸문지화를 당한다.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1805년{순조 5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정순왕후는 말기 조선이 망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야말로 조선의 진정한 악의 축이었다.

그녀는 반대당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숙청을 하고 천주교도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면서 권력을 굳건히 다져나갔다. 그녀의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정치권력에 대한 야심이 컸고, 사도세자와 정조의 죽음에 까지 깊숙히 개입되었으며, 개혁군주 정조가 이룩한 모든 업적을 파괴를 위해 전력질주했다고 볼 수 있다.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남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 남인들은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였던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신서파라 한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김씨와 손잡고 서학을 뿌리 뽑는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공격했던 노론 벽파 중심의 정치 세력을 공서파라 부른다.

수렴청정하는 동안  벽파인 공서파(攻西派) 등과 결탁, 정치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시파(時派) 등의 신서파(信西派)를 모함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 등 간부들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丁若銓)·약용(若鏞)형제는 전라도 강진 지방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恩彦君=강화도령 철종의 부친)과 그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 되었다.

남인계 시파와 종교상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는데 앞장을 섰는데 특히 천주교도들의 대학살로 몰았던 신유옥사(辛酉獄事) 후에 사교(邪敎)의 뿌리가 뽑혔다고 축배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정조가 길러놓은 인재들을 모두 죽여 버렸고 '조선개국 - 사화, 임진왜란, 병자호란 - 북벌 준비 전념 - 이어지는 영정시대'는 그야말로 문예중흥기였었는데, 그녀 덕분에(?) 실학은 재야로 묻히고 겨우 명맥만 유지할 지경였으렸다. 영조와 함께 찬란한 문화부흥기를 이뤘던 정조의 노력을 그녀는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조선이 급속히 몰락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 게다가 정순황후 이후 수렴청정과 세도정치가 관습처럼 자리 잡아 정치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정순왕후에서 비롯된 세도정치 시대에 왕들은 숨을 죽이고 구석에 숨어있었으며 왕비들은 외척을 앞세워 전권을 휘둘렀다. (정말 화가 나는 대목이다.)

이후에 흥선대원군이 등장하여 수많은 개혁을 이루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지만 이미 조선은 말기암 환자처럼 대수술을 해도 새로이 태어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있었고... 그리하여 우리가 치를 떠는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치욕을 겪게 된다.

참조글 : 
http://cafe.daum.net/apt77/6Fj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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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엇갈린 정조 평가, 사료로 보면

정적과도 손잡은 '타협의 명인'
노론 독재체제에서 집권… 주자학 유일사상에서 벗어나 사상적 다원화 추구
실용과학에 관심 많아… 이가환과 대화 나누며 “지구는 둥글다” 주장도
일체의 잡기 외면한 채 수양에 힘써… 비단옷 대신 무명옷 입고 백성 걱정


정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정조를 주제로 한 저술·드라마가 잇따르고 있다.

▲ 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 / photo 조선일보 DB

정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정조를 주제로 한 저술·드라마가 잇따르고 있다.

근래 정조(正祖)에 관한 각종 저술, 드라마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에 따라 정조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 일부에선 “시대를 앞서 간 계몽군주”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에선 “저 혼자 잘난 헛똑똑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정조의 참모습일까. 중립적 입장에서 사료에 담긴 기록을 바탕으로, 그러나 사료의 한계도 감안해가며 임금 정조의 실상을 살펴봤다.

정조에 대한 기본적 사료로는 ‘정조실록’을 들 수 있다. 정조가 증자(曾子)의 일일삼성(一日三省)의 뜻을 취해서 작성한 ‘일성록(日省錄)’과 정조가 또한 매일 반성하는 뜻에서 자신의 언행을 기록하게 한 ‘일득록(日得錄)’ 등도 기본 사료이고, 규장각 일기인 ‘내각일력(內閣日曆)’도 기본 사료이다.

그러나 이런 관찬사료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부분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정조실록’은 정조 사후 정치적 반대파인 노론벽파가 집권하면서 작성되었다는 문제점이 있고, ‘일성록’은 일부 내용이 의도적으로 잘려나갔다는 문제점이 있다. 물론 정치적 반대파에 의한 의도적 왜곡이다. 따라서 이런 사료들을 이용할 때는 작성자의 정치적 의도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하며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나 정약용의 저술 같은 개인 기록들로 보충해야 한다. 

먼저 정조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도세자 문제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쪽에서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이란 ‘팔자흉언(八字凶言·여덟 자로 된 흉언)’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래서 영조는 세손을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10세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란 허물을 씻어주었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 당일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신 것이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0일)라며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스스로 천명했다.


"과인은 세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노론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정조(출처: MBC 이산 홈페이지)

그러나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벽파를 적대시하는 대신 포용에 나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영조의 유훈 때문이었다. 영조는 죽기 직전 세손 정조에게 “임오년의 일(사도세자가 죽은 사건)은 의리상 충분히 옳은 것 같더라도 이는 곧 나를 모함하는 것으로서, 단지 나에게만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너에게도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1일)라면서 사도세자 문제를 제기하는 자는 “왕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조가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면 노론벽파는 선왕의 유훈을 어긴 것으로 쿠데타의 명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는 사도세자를 살해한 노론벽파 전체를 적으로 돌릴 경우 정상적인 정국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사도세자 사건을 없던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정조는 노론벽파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즉위에 성공했는데,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세력과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이 동일한 정치세력이었다.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나 혜경궁 홍씨의 숙부 홍인한, 대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그래서 정조는 사도세자 문제를 가지고 이들을 처벌하기보다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혐의로 처벌했다. 그래서 소기의 정치적 효과를 거두면서도 선왕 영조의 유훈은 위배하지 않는 운영의 묘를 살린 것이다.

정후겸의 최후 (사진 출처 MBC 이산 홈페이지)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타협하는 것은 초인적 인내가 필요했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병석에 누웠을 때 “두통이 많이 있을 때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가슴의 화기는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얼굴을 맞대고 정치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구선복(具善復)이다. 그는 영조 때부터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른바 숙장(宿將)으로서 사도세자 사건에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를 계속 훈련대장, 병조판서 등 군의 중요 보직에 임명하다가 재위 10년(1786년)에야 다른 역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처형한 후 이렇게 말했다.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經筵)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가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정조실록 16년 윤4월 27일)

정조는 재위 13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소를 수원 화성을 옮겨 현륭원으로 삼고 자주 능행(陵幸)했는데 현륭원에 참배할 때면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조실록 18년 1월 20일)고 할 정도로 부친을 애도했다. 그러나 정조는 부친을 위한 최고의 복수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조실록’이나 ‘일성록’ 등의 관찬사료에는 보이지 않지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정조가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칠순이 되는 갑자년(1804년)에 왕위를 순조에게 물려주고 상왕 자격으로 화성으로 가서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려 했다고 전한다.

▲ 정조의 초상 / photo 조선일보 DB

원래의 소원을 이루어 마마(혜경궁)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평생에 사도세자께 자손으로 이루지 못한 통한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내가 선왕의 하교를 받아 이 일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원통하나 이것 또한 의리요, 왕세자가 나의 부탁을 받아 내 소원을 이루어내어 내가 못한 일을 내 대신 행하는 것이 또한 의리입니다.”(한중록)

정조 자신은 선왕의 유훈을 받았으므로 사도세자 추숭사업에 나설 수 없지만 아들 순조가 할아버지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는 것은 영조의 유훈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또한 정조는 ‘지금 신하들이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안 하는 것도 의리이고, 훗날 신하들이 추숭사업을 하는 것도 의리’라고 말했는데, 이는 사도세자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추숭을 반대하는 세력의 입장도 감안한 것으로서 바로 이 부분이 정조와 집권 노론이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정조는 이런 타협을 통해 조성된 왕권으로 미래를 지향했는데 이 부분이 바로 정조의 진면목이다.

정조 즉위 당시 조정은 노론 일당독재 체제였고, 노론의 정치이념이던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였다. 정조는 일당체제를 다당제로 바꾸고, 주자학 유일사상을 다원적 사상 체제로 바꾸어야 조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조가 다당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호대법(互對法)이었다. 호대법은 이조판서가 노론이면 참판은 소론, 참의는 남인을 임명해 상호 견제하게 하는 인사방식이었다. 그러자 노론은 남인들을 서학(西學·천주교)을 신봉하는 신서파(信西派)로 몰아 제거하려 했다. 서학이 사학(邪學)이라며 국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노론의 논리를 뛰어넘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정학(正學·성리학)이 밝아져서 사학(邪學)이 종식되면 상도(常道)를 벗어난 이런 책들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사람들이 그 책을 연(燕)나라, 초(楚)나라의 잡담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 그러니 근원을 찾아 근본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바로 급선무에 속한다.”(정조실록 12년 8월 6일)

정조는 이처럼 천주교는 국법으로 단죄할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 바로 서면 저절로 소멸된다는 논리로 사상 탄압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조는 조선의 성리학을 약화시키며 다원사상 체제를 지향했다. 정조가 자신을 성리학자로 자처한 것은 실제 그가 성리학자여서가 아니라 노론과의 이념 논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서양 과학지식의 습득을 통해 성리학이 이미 낡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는 재위 16년(1792년) 부친상으로 낙향해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정약용에게 정조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주며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계를 고안해보라고 했다고 전한다. 예수회 선교사이자 과학자였던 테렌츠(Terrenz.J, 중국명 등옥함·鄧玉函)가 지은 ‘기기도설’이 바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역학(力學)의 원리에 관한 책이었다.

‘정조실록’ 2년(1778년) 2월 14일조에는 정조가 천재로 유명한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 이가환(李家煥)과 논의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수준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일득록’에는 정조가 “땅이 둥글다는 설은 ‘주비경(周?經)’에 처음 보이는데 혼천(渾天)의 논리로 징험해보면 땅이 둥글다는 것이 분명하다. 남쪽으로 200리를 가면 북극이 1도 낮아지고 남쪽의 별이 1도 많이 보이며, 북쪽으로 200리를 가면 북극이 1도 높아지고 남쪽의 별이 1도 적게 보인다. 만일 땅이 둥글지 않다면 어떻게 그러하겠는가”라며 지구가 둥글다고 말한 사실이 전해진다.

정조는 초인적 의지로 자신의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일체의 잡기를 멀리했다.

“나는 음악이나 여색(女色), 사냥 등은 좋아하는 것이 없고, 즐거워할 만한 인간사로는 국정을 하는 여가에 두세 문사(文士)와 경전(經典)을 이야기하고 시(詩)를 말하며, 옛일을 토론하고 지금의 일을 증험하여 심신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일득록)

또한 정조는 검소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대체로 사람은 일용(日用)하는 의복이 한번 화려하게 되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내가 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 사람이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정조의 이런 검소함은 확고한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 각신(閣臣) 김조순(金祖淳)에게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은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정치철학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

“임금 노릇 하는 도리에 대해 여러 성인(聖人)이 말한 것이 지극하다.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고, 둘째는 조상을 본받고, 셋째는 백성을 사랑하고, 넷째는 어진 이를 높이는 이 네 가지 일이 곧 임금으로서의 훌륭한 절조이다.”(일득록)

이 시대 왜 정조가 다시 부각되는지를 잘 말해주는 구절들이 아닐 수 없다.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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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BC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

 
-사진 태조-

(1) 태조~태종 :    추동궁 마마 (1983 / 태조 - 김무생, 태종 - 이정길, 원경왕후 - 김영란, 정도전 - 이호재)
(2) 세종 :             뿌리깊은 나무 (1984 / 세종 - 한인수, 양녕대군 - 송기윤, 소현왕후 - 김영애)
(3) 문종~연산군 : 설중매 (1984 / 세조 - 남성우, 성종 - 길용우, 연산군 - 임영규, 인수대비 - 고두심
                           장녹수 - 이미숙, 김종서 - 전운, 한명회 - 정진, 유자광 - 변희봉
                           폐비 윤씨 - 이기선, 김처선 - 박규채)
(4) 중종~명종 :    풍란 (1985 / 중종 - 최상훈, 조광조 - 유인촌, 문정왕후 - 김혜자, 정난정 - 김영란
                           경빈 박씨 - 박원숙)
(5) 선조 :             임진왜란 (1985 / 선조 - 현석, 이순신 - 김무생, 원균 - 신충식)
(6) 광해군 :          화천문 (1986 / 광해군 - 이희도, 개시 - 원미경, 인목대비 - 권재희)
(7) 인조~현종 :    남한산성 (1986 / 인조 - 유인촌, 임경업 - 최상훈, 최명길 - 변희봉)
(8) 숙종 :             인현왕후 (1988 / 숙종 - 강석우, 인현왕후 - 박순애, 장희빈 - 전인화, 숙빈 최씨 - 견미   리)
(9) 영조 :             한중록 (1988 / 영조 - 김성원, 사도세자 - 최수종, 혜경궁 홍씨 - 최명길,
                           정순왕후 - 김용선, 홍국영 - 김동현, 정후겸 - 선우재덕)
(10) 정조 :           파문 (1989 / 정조 - 김용건, 효의왕후 - 김청, 혜경궁 홍씨 - 고두심)
(11) 순조~고종 :   대원군 (1990 / 흥선 대원군 - 임동진, 고종 - 김홍석, 명성황후 - 김희애, 철종 - 최수종)


2. 왕실 역사
 
-사진 세종대왕-

(1) 태조~정종 :    개국 (1983 KBS / 태조 - 임동진, 정도전 - 김홍기)
(2) 태종~세종 :    대왕 세종 (2008 KBS  / 세종 - 김상경, 태종 - 김영철, 양녕대군 - 박상민,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이윤지, 어리 - 오연서)
(3) 문종~연산군 : 왕과 비 (1998 KBS / 세조 - 임동진, 성종 - 이진우, 연산군 - 안재모, 인수대비 - 채시라
                           단종 - 정태우, 장녹수 - 유니, 김종서 - 조경환, 한명회 - 최종원
                           폐비 윤씨 - 김성령, 김처선 - 김성환)
(4) 중종~명종 :    여인 천하 (2001 SBS / 중종 - 최종환, 문정왕후 - 전인화, 정난정 - 강수연,
                           경빈 박씨 - 도지원, 조광조 - 차광수)
(5) 선조~광해군 : 왕의 여자 (2003 SBS / 선조 - 임동진, 광해군 - 지성, 개시 - 박선영, 인목대비 - 홍수현)
(6) 인조~현종 :    대명 (1981 KBS / 효종 - 김홍기)
(7) 숙종 :             장희빈 (2002 KBS / 숙종 - 전광렬, 장희빈 - 김혜수, 인현왕후 - 박선영, 숙빈 최씨 - 박예진)
(8) 영조 :             대왕의 길 (1998 MBC / 영조 - 박근형, 사도세자 - 임호, 혜경궁 홍씨 - 홍리나,
                           정순왕후 - 이인혜, 숙빈 최씨 - 김영애)
(9) 영조 :             하늘아 하늘아 (1987 KBS / 영조 - 김성겸, 사도세자 - 정보석, 혜경궁 홍씨 - 하희라)
(10) 정조 :           이산 (2008 MBC / 정조 - 이서진, 영조 - 이순재, 혜경궁 홍씨 - 견미리,
                           효의왕후 - 박은혜, 정순왕후 - 김여진, 홍국영 - 한상진, 정후겸 - 조연우)
(11) 순조~고종찬란한 여명 (1996 KBS / 흥선 대원군 - 변희봉, 고종 - 조재현, 명성황후 - 하희라)


3. 인물로 보는 조선 역사

 
-사진 정조-

(1) 태조~세종 :    용의 눈물 (1997 KBS / 태조 - 김무생, 태종 - 유동근, 세종 - 안재모, 양녕대군 - 이민우,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도지원, 정도전 - 김홍기, 어리 - 유니)
(2) 문종~성종 :    한명회 (1994 KBS  / 세조 - 서인석, 한명회 - 이덕화, 문종 - 송승환, 단종 - 정태우
                           성종 - 박진성, 연산군 - 이민우, 폐비 윤씨 - 장서희, 김종서 - 임동진, 인수대비 - 김영란)
(3) 연산군 :          장녹수 (1995 KBS / 연산군 - 유동근, 장녹수 - 박지영, 인수대비 - 반효정)
(4) 중종~명종 :    조광조 (1995 KBS / 중종 - 이진우, 조광조 - 유동근, 문정왕후 - 김민정, 경빈박씨 - 김성령)
(5) 선조 :             불멸의 이순신 (2004 KBS / 선조 - 최철호, 이순신 - 김명민, 원균 - 최재성)
(6) 광해군~현종 : 서궁 (1996 KBS / 광해군 - 김규철, 개시 - 이영애, 인목대비 - 이보희)
(7) 숙종 :             장희빈 (1995 SBS / 숙종 - 임호, 장희빈 - 정선경, 인현왕후 - 김원희, 숙빈 최씨 - 남주희)
(8) 영조 :             홍국영 (2001 MBC / 영조 - 최불암, 홍국영 - 김상경, 정후겸 - 정웅인,
                           정순왕후 - 염현희, 혜경궁 홍씨 - 이상숙)
(9) 정조 :             왕도 (1991 KBS / 정조 - 강석우, 홍국영 - 김영철, 효의왕후 - 박순애, 정순왕후 - 김자옥
                           혜경궁 홍씨 - 정영숙)
(10) 정조 :           소설 목민심서 (2000 KBS / 정조 - 김홍기, 정약용 - 이진우)
(11) 순조~고종명성황후 (2001 KBS / 흥선 대원군 - 유동근, 고종 - 이진우, 명성황후 - 이미연 & 최명길)


PS 1. 픽션이 과도한 작품은 피했습니다.
         예를 들면, "왕과 나" (성종~연산군?), "대장금" (중종), "한성별곡" (정조) 등등..
PS 2. 인물의 일대기라도 왕실 역사가 주가 되는 작품 안에서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천둥소리" (광해군), "어사 박문수" (영조), "태양인 이제마" (철종, 고종) 등등은 제외.


출처:
엠파스 지식인
원 출처는 정확히 기재되어 있아 링크 안됨.(디비디프라임 ALEX작성자님 http://dvdprime.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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