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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당쟁의 원인을 알고자 한다면 우선 당쟁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당쟁은 조선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익히 들어온 대로, 나라를 쇠망케 한 망국병이기만 했을까?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쓴 <조선시대의 당쟁사>를 보면 조선 중기 이후 정치의 중심이었던 당쟁을 통사적으로 서술해 이런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고있습니다.

조선시대 당쟁사. 1 상세보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펴냄
사림정치와 당쟁의 생생한 기록 <조선시대 당쟁사>는 조선시대의 당쟁을 소개하는 책이다. 광복 이후 우리의 정치사는 전근대적인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잔재를 극복하고 우리 시대에 맞는 정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앞선 조선시대 사림정치의 산물인 당쟁의 속성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당쟁이란 붕당이 갈려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림정치는 세조연간 사림파의 등용에서 기원한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는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젊고 야심찬 사림을 정계에 불러들였다. 주자학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파는 도덕적 수양을 앞세우며 훈구파를 공격했다. 이들의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이 사림파였다. 그 사이 왕권은 약해져 신권에 밀리게 됐다. 그러나 대적할 세력이 없어진 사림은 곧 자기분열해 붕당을 낳고 이들 사이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이었다.”

최초의 붕당은 선조 8년에 관직을 놓고 갈라진 동인과 서인이었다.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 다투었다.

 “당쟁이란 근본이 권력 투쟁이었기 때문에” 자기 당에 유리한 명분·의리를 억지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효종이 죽었을 때 벌어진 예송논쟁이다. 인조의 후취 왕비인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가지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예송 논쟁은 이론을 앞세운 전형적인 권력투쟁이었다.”

예송 논쟁으로 당쟁의 골이 더욱 깊어진 붕당들은 이후 피를 부르는 싸움을 계속하다 “체제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기까지 했다.”  이때 시행된 것이 영· 정조 연간의 탕평책이었다. 그러나 노론/소론, 노론벽파/노론시파의 정쟁을 다독이려던 탕평책은 외척세도정치의 길을 열어주고 말았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순조 이후 정치는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에 완전히 장악됐다.

지은이는 이 시기를 이미 당쟁이 끝나고 일종의 `일당독재'가 행해진 기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무렵 벌어진 수많은 실정과 탐학을 당쟁 그 자체의 산물로 보아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당쟁이 외척세도정치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그 결과만 보고 당쟁 역사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이성무씨의 <조선시대의 당쟁사>中

우선 왜 당파가 나누어졌는가!


출처: 이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을 참조하여 제가 아는 사실과 함께 편집한 것입니다. (약 5년 전에 구한 거라 정확한 출처는 기억이 안나네요.)

동인서인 으로의 붕당
처음으로 당파가 갈린 것은 조식과 퇴계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 동인, 성흔과 율곡 이이를 추종하는 기호학파 서인이었습니다. 동인과 서인의 대결에서 첫 승리자는 동인이었다. 후궁의 손자로서 왕위에 오른 선조는 후궁에서는 아들을 많이 얻었지만 정비인 의인왕후에게서는 딸조차도 얻지 못했다. 서자 컴플렉스가 있던 선조로서는(후궁의 손자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비인 의인왕후에게서 아들을 얻을 때까지 세자 책봉을 미루고 싶은 것이 속마음이었는데, 동인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는 서인의 거두인 정철을 속여 정철로 하여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도록 하여 선조의 진노를 사게 하였다. 이 때 서인들은 쫓겨나고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서인들에 대해 유혈 숙청을 감행하였다.

북인남인의 출현
유혈 숙청의 과정에서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게 된다. 서인들에 대해 사형을 주장하는 과격파들을 북인, 귀양으로 그치자는 온건파들을 남인이라 했다. 북인은 조식의 문하이고 남인은 이황의 문하였다. 서인이 실각한 상태에서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과 남인이 다시 정쟁을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한 남인이 패배하고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대북소북
이렇게 북인이 정권을 잡은 후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는데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지지하던 소북은 광해군의 즉위와 함게 몰락하고 대북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 때 소북은 거의 죽음을 면치 못하고 서인과 남인은 재야세력으로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는데 대북세력은 소북세력뿐만 아니라 서인, 남인 세력을 차례로 제거해 나가기 시작하는 등 대북의 독주가 계속 되었다.

서인남인
그러다가 주로 서인들의 주도하에 인조반정이 이루어지게 되고, 대북은 몰락하게 된다.( 서인과 동인의 대결에서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들이 소북 대북 할 것 없이 모두 몰락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서인과 남인의 대결이 되는 것인데요, 서로에 대한 끝없는 복수가 더욱 치열한 싸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용서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마지막 한 놈까지 적의 씨를 말려죽이자!는 생각으로 정치를 했으니...)

이로부터 한동안 인조의 중립정책으로 인해 서인과 남인은 서로 견제세력으로서 한쪽의 독주를 막으며 정치를 하는 붕당정치의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인조의 둘째아들인 효종이 죽으면서 남인과 서인간에 치열한 예송논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원인은 이러하다.

인조에게는 인렬왕후 한씨라는 왕후가 있었다. 이 왕후는 인조와의 사이에 4명의 아들을 두게 되는데 그 첫째 아들이 소현세자이고 둘째 아들이 효종대왕이며 셋째아들이 인평대군, 넷째가 용성대군이다. 이 왕후는 병자호란이 나기 전에 승하하고 나이어린 장렬왕후가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입궁하게 된다. 소현세자는 청국에 볼모로 잡혀가서 서구의 선진문물을 접하며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흠모하게 된다. 청나라에 원한이 많았던 인조로써는 그런 소현세자가 못마땅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고 돌연 죽어버리는데, 아버지 인조로부터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많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고난 후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모두 귀향보내고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도 폐서인하여 죽여버린다.
그리고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소현세자의 상을 당해 이미 장자의 예로써(첫아들이 죽었을 경우 어머니가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다른 아들들과 다른것이 예법이라고 합니다.) 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다시 효종이 죽었을 때 장렬왕후의 상복입는 기간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서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장렬왕후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같은 예로써 3년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현종이 아직 어릴 때였으니 아무래도 목소리 큰 놈이 이겼겠지요?  이 때만 해도 현종은 예법을 잘 몰랐으므로 서인의 주장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조반정은 당당한 것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왕실이 서인세력에 일종의 빚을 지게 된 셈이었거든요...) 결국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효종의 상을 당해 차남의 예인 1년상을 치르게 된다.

그러다가 8년여 후 다시 효종의 왕후인 인선왕후가 승하하면서 또다시 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된다. 서인과 남인의 싸움은 똑같다. 서인은 인선왕후가 둘째며느리이므로 9개월의 대공설을 내세웠고, 남인은 둘째며느리이긴 하지만 중전을 지냈으므로 큰며느리와 다름이 없다며 1년의 기년설을 내세운다. 이 때는 현종도 많이 장성하여 기반이 확실한 상황이었으므로 자기의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도 둘째로써의 낮은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인의 주장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된다.

그런데 현종이 죽고 숙종이 왕위에 등극한 후 서인측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들이 옳았다고 피력하다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면서 서인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제부터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당파싸움이 계속되는 숙종시대이다. 남인은 이 시기에 망하게 되는 것이다.

숙종은 즉위 직후 아버지인 현종의 뜻에 따라 남인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현종비)는 서인의 딸이었다. 명성왕후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는 예송논쟁에서 일시적으로 남인의 편을 들어 조정의 요직에 기용되어 있었으나 서인측 사람이다.

남인의 영수 허적이 권세를 남용하는 것에 실망을 한 숙종이 훈련대장직을 서인인 김석주에게 넘기면서 남인이 거의 차지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겨주게 된다. 서인들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숙종의 종조부)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숙종의 당숙들 이른바 3복)이 허적의 서자 허견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고 고변하여 남인들을 실각시킨다. 이것이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는 사건이다.

그러다 남인편인 후궁 장씨의 소생 아들로 원자를 삼는 문제로 서인들이 반발하자
(직접적인 원인은 장희빈의 모친을 가마에서 끌어내린 사건입니다.) 숙종은 이를 서인의 딸인 인현왕후에게 원인이 있다고 죄를 물어 폐출하고 서인들을 대거 실각시키며 장씨를 왕후로 올리고 그 아들을 세자로 삼는다.

또 장희빈과 그 아들을 지지하는 남인세력을 다시 집권하게 하며,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그러나 숙종과 장희빈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들의 불화는 정국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숙종과 장희빈의 사이가 벌어지고 또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서인세력은 민씨 복위 운동을 펼친다. 이를 알게 된 남인세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복위운동의 주모자들을 심문하여 사실을 파악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그런데 숙종은 오히려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는 한편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민씨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이 사건으로 남인들은 대거 축출되고.. 그야말로 망하게 되었다
.
(이로써 서인과 대립했던 동인계열은 싸그리 망해버렸습니다. 동인도 그닥 잘한 건 없지만 조선 후기를 깡그리 망친 서인-노론-벽파가 개인적으로 훨씬 더 밉네요. )


노론소론
경종 사망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후일 경종)를 지지하는 세력은 소론, 세자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편에 섰던 숙빈 최씨(최무수리)의 아들인 연잉군(후일 영조)을 지지하는 세력은 노론이 되는 것이다. 세자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숙종이 죽고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얻어 노론을 축출한다.

이 과정에서 소론세력은 노론이 지지했던 연잉군마저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하지만, 효종이래 외아들로만 이어져 내려온 왕실에서 효종의 혈손이라곤 경종 자신과 연잉군 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경종은 동생인 연잉군을 살려준다.
하지만, 소론세력은 어떻게든 노론과 연잉군을 제거하려 하였고, 노론과 연잉군의 입장에서는 서둘러 왕위에 오르지 않고서는 언제 어떻게 죽임을 당하게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돌연 경종이 사망한다. 그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등극하게 되는데 이사람이 바로 영조대왕이다. 영조는 죽을 때까지 형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게 된다.

영조시대 최고의 참극인 사도세자 아사사건의 경우도 이러한 당쟁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조의 입장에서는 분명 소론은 역적이요 노론은 충신이겠으나 사도세자의 시각은 달랐다.

소론세력은 왕인 경종을 지키려 했던 세력이고 노론세력은 왕을 위협했던 세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장차 보위를 이어나갈 세자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고, 영조로써도 수긍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영조는 자신의 정치 기반이었던 노론의 입장에 따라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게 된다.

시파 벽파
이와 함께 소론세력은 영구히 몰락하고 노론은 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뉘게 된다. 시파는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세력이고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대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입장을 가진 세력이었다.

영조가 승하한 이후 왕위를 이은 정조는 이후 시파와 벽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하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정조 이후 어린 왕이 연이어 등극하면서 정권은 당쟁에 의한 것에서 한 집안의 세도에 의해(외척들) 좌지우지 되게 되고 그 유명한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당쟁의 직접적 원인은

당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선조 때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이다. 이조전랑이란 직책은 비록 그 직위는 낮았으나 관리의 임명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래서 그 직책의 임면은 이조판서도 간여를 하지 못하였고 반드시 그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김효원이 그 자리에 추천을 받았는데, 이조참의로 있었던 심의겸이 그를 권력에 아부하는 자라고 하여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김효원의 임기가 다 되어 후임자를 물색할 때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물망에 올랐으나 김효원이 이를 거절하여 서로간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관리와 유생들은 모두 양쪽의 어느 하나에 붙어서 대립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인 건천동에 있다고 하여 동인,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동에 있다고 하여 서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동서분당이 생긴 초기에는 주로 동인 세력이 커서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지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이를 4색 당파라 부르게 되었다.


회니논쟁

당쟁의 의미


"조선시대의 폐단중의 하나가 당쟁이다."

이것이 진실일까요? 물론 당쟁때문에 조선사회가 어려움을 격은것도 사실이지만 그 폐단만을 부각시킨것은 일본인들이 일제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 일제시대때 부각시킨 것입니다.

"조선은 편을갈라 매일 싸우기만한다. 그래서 조선이란 나라는 멸망할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일본이 조선을 바른길로 인도하기위해 조선을 다스려야 한다."

이렇게 조선 백성들을 주눅들게하고 그들의 식민 정책을 타당화 한면이 더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당쟁이 처음에는 학문적인것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권 탈취의 용도로 변질 된것은 사실이지만 당쟁의 장,단점을 확실히 구분하여 우리가 바로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이 글은 몇 년 전에 미니홈피에서 지식인과 제가 보고 있던 책을 참조하여 편집한 것이라서 정확한 원본 출처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문제되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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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4대 사화 - 그 원인과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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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사림파들이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
원래 '사림(士林)의 화'라는 말로서, 사림파의 입장에서 쓴 말이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있다.

사림이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자주 쓰이게 된 것은 학통으로 보아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신진사류가 15세기 후반에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였다.


성종 연간에 처음으로 김종직·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이 정치세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근거지역을 기준으로 영남사림파와 기호사림파로 나누어지기도 하는데, 주로 비거족계(非鉅族系) 재지사족 출신이 주축이 되고 일부의 훈구계 가문 출신이 포함되었다. 이들의 활동시기는 크게 나누어 성종과 연산군 초기에 일어난 무오·갑자 사화에 의하여 축출될 때까지와, 중종반정 이후 점차 세력을 형성했던 중종 연간의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사림파는 기존의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활동을 전개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사상을 실천하고자 했다.

 이에 반해 훈구파는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의 특권을 독차지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그런데 보다 강력한 인신적 지배예속을 매개로 농장과 같은 것을 통하여 토지를 광점하고 농업인구를 독점하고 있었던 훈구파에 대하여, 방천(防川) 등을 통하여 자신의 농지를 확대하면서 소농을 기초로 경제력을 키우고 있었던 사림파는 그러한 행위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기초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사초로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이는 물론 그 글의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유향소 복립 운동을 하면서 훈구파와 대립하고 있었던 사림파가 훈구파가 저지른 각종의 경제적 비리를 비판했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갑자사화는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제거된 상태에서 연산군과 궁금(宮禁) 세력이 훈구파까지 제거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훈구파가 가지고 있던 각종의 재산을 탈취하려는 의도였다고 하지만, 정치세력의 배치로 보면 조선시대의 관료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결과였다. 조선의 관료제는 군주의 권한이 절대적이라든가 전제적일 수 없는 것이었는데, 이미 무오사화를 통하여 관료의 상당 부분이 약화된 상태에서 관료세력에 대한 타격이 군주에 의해서 재차 이루어졌다.

기묘사화는 1515년(중종 10) 왕비 책립 때의 대립을 시작으로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사림파를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으로 제거한 것이다. 중종반정 이후 얼마간은 반정을 주도한 훈구파에 의하여 정국이 운영되었다. 1515년 무렵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파가 정계에 다시 진출하면서 반정공신의 위훈삭제를 계속 주장하는 한편, 천거제인 현량과(賢良科)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여 자파인물을 모으고, 향촌사회에서의 향약실시와 〈소학〉을 강조하면서 군주의 수기(修己)를 역설했다. 그러나 위훈삭제 결정이 있자 곧 사화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기묘사화 이후 향약은 일시 시행이 정지되었으며 〈소학〉은 금서아닌 금서가 되어 감추어지기까지 했다.

을사사화는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尹任)을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이 몰아낸 사건이다. 기묘사화로 사림파는 크게 타격을 받았고 20년이 지난 이후 서서히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사림파를 비호했던 윤임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제거된 것이다. 싸움은 외척간에 벌어졌으나 사림파도 다수 제거되었다.

이밖에도
정미사화(丁未士禍) 등의 작은 사화가 몇 차례 일어났다. 사화는 대개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는 세력간의 다툼이었다. 즉 지배계급 내부의 다툼으로 일어난 정치론의 차이와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갈등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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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의 나라 - 정조가 내친 실력자 홍국영

영조와 정조의 나라 상세보기
박광용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조 탕평정치의 시대를 일관되게 추적한 저자가 영정조시대 개혁의 참모습과 역사적 지혜를 객관적으 로 조명한 저서. 신세대 정치세력 사림의 진출을 시작으로 도덕군자들의 붕당의 역사, 절대통치자에서 개혁정치가로 탈바꿈한 영,정조와 탕평책 등을 기술했다.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tmek&logNo=30005024798

홍국영 , 그는 어떤 사람인가?

얼마 전 18세기 후반 정조년간 정치사를 다룬 TV사극들이 남긴 화두는 '홍국영,그는 어떤 사람인가'이다. MBC-TV의 역사물 '한중록'에서는 홍국영을 권모술수에 능하여 혼자 힘으로 다음 시대 정치판을 만든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전통적인 권모술수론에 따른 평가다.


반면 KBS-TV의 '왕도(王道)'는, 백성들 속에서 직접 생활한 경험을가지고 민중적 입장을 넓게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판을 바꾸어보려 했던 현실개혁적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정감록, 한중록』 등에 적힌 이야기를 홍국영에 가탁하여 쓴 어느 역사소설을 원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역사물들이 방영되던 당시, 당국자들이 '탕평' 국면을 표방한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과연 홍국영은 어떤 인물인가? 구한말 민씨 정권에 대항한 개화파들이, 이른바 19세기 세도정치'가 정조 초년 홍국영의 세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 데서 역사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인물이다. 이런 시각의 연장선 상에서 소설적 허구로 줄거리를 꾸며서 설명한 경우도 있는데 그 이야기는 이렇다.


당시 왕위계승권자는 중국 군주의 통치사인 『통감(通鑑)』을 반드시익혀야 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영조가 아들을 죽인 행위를 빗대어 비난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이 내용을 정조가 어떻게 배우고있는지 알아보라는 불한당들의 참소가 이어져 영조가 불시에 이를 확인해보려 했다.


그때 홍국영은 문제가 되는 부분을 종이로 가려서 내주든가, 칼로 베어버리고 내주었다. 그래서 왕세손(정조)은 할아버지의 깊은 신임을 받아 위기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 일화를 비롯한 홍국영에 관한 이야기들은 정조의 당시 일기기록(尊賢閣 日 記)을 근거로 다시 꾸민 것이다.


정조는 홍인한(洪燐漢)과 정후겸(鄭厚謙) 등 특권 외척들이, 홍국영과 정민시(鄧民始) 등 사태판단에 기민한 측근들과 함께 자신이 어떤공부와 대화를 하는지 항상 염탐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왕위계승권을 위태롭게 했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그렇다면 홍국영은 실제로 어떤 길을 택해서 어떻게 살아간 인물인가? 『한중록』, 『정조실록 『정종기사(正宗記事)』 『명의록(明義錄)』『과심낙수의 자산고(恩波散槁)』 중에 있는 『당역열전(黨逆列傳)』 등을보면, 그런 대로 홍국영의 생애를 재구성해볼 수 있다.서틀에 뿌리틀 둔 쪽권적 문벌가문 臺신의 야심가‥‥홍국영은 1748년(영조 24)에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덕로(德老)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그의 집은 도성 밖인 서강에 있었다.

25세 때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 그의 성격과 행적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을까? 젊었을 때의 그에 대한 기록으로는 혜경궁 홍씨의 기록과 심낙수(沈樂洙)의 기록이 가장 자세한데, 두 기록은 대체로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홍국영은 눈치가 빠르고 민첩했으며 , 얼굴 생김새가 예쁘고 준수했다고 한다. 즉 매력적으로 생긴 데다가 수완이 좋고 두뇌회전이 빨라 임기응변에 능했다는 데 두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만큼 말이 경망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혜경궁 흥씨에 의하면, 재주도 별로 없으면서 글을 잘한다고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여하들 글을 능숙하게 지어서, 늘상 사용하는 시와 문장은 재치 있고 예리하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다음의 일화는 혜경궁이 홍국영을 욕하기 위해 쓴 것이지만, 그의 담대 하고 호기 있는 성격이 잘드러난다 .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주위의 같은 연배의 친구들에게 '천하의 모든 일이 모두 내 손아귀에 었게 되리라' 는 호언장담을 하고 다닌다. 그래서 이런 해괴한 행동거지를 싫어하고 비웃는 동년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혜경궁은 홍국영이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결론내렸다. 이른바 일반 사람들의 도덕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생을 살아간 인물이라는 의미다.

심박수의 기록에 의하면, 홍국영은 성격이 경망하고 방종하여 술과 여색을 좋아하고, 또한 함께 모여 놀거나 이야기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시중 무뢰배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함께 술 마시고 장기두기를 즐겼으며, 시조와 창을 잘했다. 그리하여 장안에 그가 '나비야 나비야 청산가자. 호랑나비야, 너도 또한 가자'라는 창을 잘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질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의 숙부 홍락빈(홍락년)은 심한 질책을 퍼부었으며 , 사대부들은 그와 사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문벌 있는 집안에서는 아예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즉 젊은 시절의 홍국영은 하는 일 없이 잘 놀기만 하는 한량배였다고 평가한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한술 더 떠, 그의 아버지 흥락춘이 『약간 미친 사람』광인이라고 하면서 그런 그가 자식교육인들 제대로 시켰겠는가라고까지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런 글들은 그가 권력의 정상에서 몰락한 뒤에 나온 평가다. 따라서 관점을 달리해서 판단할 만한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 흔히 무뢰배, 곧 시정잡배란 성리학이 아닌 실무적인 지식을 지닌 중간계층, 혹은 양반가문이면서도 사대부로서의 길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잡다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였다 홍국영은 그런 부류들과 어울렀기 때문에 일반 사대부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나쁜 평판을 받은 것이다. 이른바 자신의 포부를 숨기기 위해 여항인(간항인)들과 어울렸다는 흥선대원군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흥선군의 행동은 내심을 감추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홍국영은 포부를 감추지도 않았을 뿐더러 감출 필요조차 없는 좋은 가문 출신이었다. 홍국영의 6대조는 선조 임금의 딸인 정명공주(정명공주)의 남편 영안위(영안귀) 홍주원이다 정명공주는 광해군 때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비명에 죽은 영창대군의 동복 누나로 인목대비 소생이다.


홍주원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학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외교적으로 큰 공을 세운 이정귀(이연구)다. 홍주원은 처신이 깨끗하고 충성심이 뛰어난 인물로, 국왕의 행차를 모시는 데 진력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하여 칭송받 기도 했다. 홍국영의 가문은 왕실과 연흔관계를 맺으면서 오랫동안 서울을 근거 로 뿌리를 내린 가장 유명한 문벌가문 중의 하나다.


당시 오랜기간 정승을 지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흥봉한과 이복동생 흥인한(홍린한)도 같은 가문 사람으로 홍국영에게는 10촌 할아버지가 된다. 또 경주 김씨 김면주(금면주)의 어머니가 흥국영의 종조고(종찬 당고모, 5촌)였다. 김면주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는 8촌, 순조 초년의 실력자 김관주(금관려)와는 4촌 형제지간이다. 김면주는 홍국영이 승지로 등웅된 정조 즉위년 가을, 정조가 직접 시험을 통해 선발한 한림소시(3변』소시)에서 청요직인 사관에 뽑히기도 했다. 요컨대 흥국영은 영조 재위 당시 영조, 혜경궁 홍씨, 정순왕후 김씨와 인척관계였다. 이런 점에서 가깝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조와도 12촌형제로 인척간이 된다.


혜경궁은 그래서인지 영조가 홍국영을 특히 신임하여 수년 동안 사관으로 측근에 두고 '태 손자다'라고까지 하면서 아주 귀여워했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홍국영이 1인 2년(영조 48) 가을 25세의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사실과, 급제하자마자 9월 하순경 왕위계승권자인 정조의 보좌역이라는 좋은 보직을 제수받은 사실은 우연이라거나 권모술수에 의한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그보다는 왕실과 연혼관계를 가진 데다가, 당시의 두 막후실력자 가문인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 모두와 인척관계에있던 가계 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왕세손인 정조와의 만남


홍국영이 1인2년(영조48) 9월,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보좌하는 보직을 맡게 된 것은, 그의 출세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영조 말년 권력의 주도권을 둘러싼 외척간의 대립양상은 대단히 복잡했다. 당시 정조와 가까운 친인척인 흥인한과 정후겸 (사도세자와 함께 선희궁 태생인 화원옹주의 양자)은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사이가 벌어져 대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 가문이 정국을 주도해야 동궁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다는 동궁보호론을 졌다.


그러나 정조는 외척간의대립에 왕세손을 이용하는 그러한 작태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정조는 당시 일기에서 흥인한과 정후겸 세력이 앙앙불락하여 왕세손의 동정을 염탐하고 기회를 엿보면서 동궁의 지위를 흔들려는 책동을 별였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역시 앙앙불락했던 김귀주와 오히려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탕평당 중에 홍상간누간)과 민항열(각각같이 눈에 띄는신진기예들이 홍국영을 멀리하자, 홍국영 역시 굴복해서 그들에게 붙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홍상간은 남양 홍씨 출신으로 영조의 깊은 신 뢰를 받는 노론계의 주역 홍계희의 손자이자 흥술해(홍본측의 아들이다. 그는 홍국영에 앞서 정조의 보좌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민항열은여흥 민씨로숙종의 장인인 민유중(관유중) 이래 노론의 명문가문 출신 이다. 두 가문 모두 영조년간 홍양해 (홍양해)와 민우수(각우수)를 산림 으로 배출하기도 했다.



정조의 깊은 신임을 얻은 이유

정조는 홍국영이 어느 특정 정파를 편들지 않아 친구가 거의 없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를 신뢰하고 도와주려 했고, 홍국영 역시 당시는 곧은 마음으로 정조를 보좌하고 도왔다. 정조의 회상에 따르면, 외척당들은 홍국영을 정조 측근에서 제거하기 위해, 그가 궁철 밖 여염집으로 미행(미행)하고 오입하기도 하는 정조를 보좌했다느니 (이축사), 공부할 때 못된 책을 읽고 토론하도록 권유 했다느니(서료훈작) 하는 유언비어들을 퍼뜨렀다.


이러한 정치공작은 정조의 왕위계승권을 흔들기 위해 익명으로 왕세손을 모함하는 투서를 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이로 인해 염탐설, 자객설까지 나돌게 되었다. 외척당의 모함은 그 정도가 날로 심해져 왕세손의 지위가 위험한 수 위에까지 다다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영조가 왕세손에게 대리청 정을 시키거나 왕위 자체를 선양하겠다는 계획을 내비쳤다. 정조는 이 때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에 서서 이러한 모함에 좌절하지 말고 대항하도록 조언하면서 보좌한 사람은 홍국영 1인뿐이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러나 혜경궁은 왕세손을 충실히 보좌하던 당시의 흥국영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내렀다. 홍국영의 자질이 본디 그러하므로 유언비어가 딘무한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결국 영조가 왕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홍인한과 정후겸을 중심으로 한 외척당 세력은 각각 조정과 궁궐 안에서 이를 필사적으로 뒤집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광좌와 이종성을 잇는 소론 준론계의 서명선이 앞장서서 그들을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영조는 비로소 사태의 추이를 정확히 깨닫게 되었다. 결국 대리청정을 막으려 했던 세력들이 제거됨으로써 위기상황은 해소되었다.


서명선의 상소는 실은 정조가 동궁으로서 자신이 직접 올리려 했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서명선이 정민시, 홍국영과의 막후교섭을 통해 이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위험부담을 떠맡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정조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영조가 죽고 즉위하게 되자 자신을 핍박했거나 홍국영을 제거하려던 세력들은 모조리 반역집단으로 처단했다.


홍상간 민항열 이외에도 이경빈 윤약연 이성운 홍찬해 등에 대한 국문기록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홍국영을 죽이려는 계획'을 논의했다는 것이 중요한 죄목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 중 윤약연은, 정후겸을 역적이라고 공격한 반면 홍인한은 정조와 국가를 위했던 인물(국변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상 언급한 인물들은 계동에 살던 적도들로, 홍지해와 윤양후를 지도자로 하는 정파이자 홍인한의 우익세력이기도 했다.


또한 이들뿐만 아니라 호서지방 노론세력의 지도자이자 홍계희와 같은 집안 사람인 산림 홍계능과 이담 김상익도 흥인한을 돕다가 제주도로 유배당했다. 이 옥사는 결국 다음해 홍상범이 궁철에 자객을 보내 정조를 죽이려 한 사건으로까지 이어겼다.


홍국영은 16년 3월 정조가 즉위한 지 며칠 만에 국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측근비서인 승지에 임명되었다. 이 보직은 흥국영이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조의 명령으로 간행된 『명의록』에 의하면,이 조치는 정조를 보호한 의리의 주인(의리주인)으로서의 공로로 내려진 것이라 한다. 이후에도 정조는 홍국영에게 '만약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 라고 자주 말하곤 하였다. 홍국영이 정조의 깊은 신임을 얻은 이유가 이런 공로 때문만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혜경궁이 재미있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즉 홍국영이 궁중에만 박혀 있던 정조에게 세상 여항간의 모든 일을 꾸밈없이 전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궁께서는 (흥국영이) 나이도 서로 비슷하고 얼굴도 예쁘고 눈치 빠르고 민첩하기도 하니, 별써 세상이 어지러웠던 때를 당하여 한 번 보고 크게 좋아하셔서 권우가 깊으셨다. 처음에는 요 작은 놈이 간사한 피를 내어 동궁께 곧게 충고하는 체 하나 실은 다 듣기 좋은 말이라 ‥‥‥ 한 번 국영이 들어오면 외간의 일들을 여룹지 않는 일이 없고, 전하지 않는 말이 없으니 동궁께서 신기하고 귀하게 여기셨으니 ‥‥‥ 마치 사내 대장부가 간사한 첩에게 미혹당한 것과 같으셨다. '


이는 홍국영이 군주의 공부인 강학(강학), 즉 성리학 공부는 안 시키고 쓸데없이 신기한 세상 일만 정조에게 알려주었다는 비난이다. 하지만 이 기록은 정조가 홍국영을 왜 필요로 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즉 홍국영은 정조에게 세상의 일들을 그 모습대로 알려주는 중요한 통로이자 선배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이는 정조가 세상 돌아가는 일상적인일들과 사람을 보는 시야를 갖고, 그 핵심을 볼 수 있는 안목을 높이는중요한 체험이 되었다. 또한 이는 정조가 백성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임금으로 통치하는 데 큰 자원이 되었을 것이다.



노론의 돌격장


정조는 홍국영을 '의리의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은퇴 당일까지 도승지에 두었다. 도승지라는 직책은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 같은 보직이다. 홍국영은 노론계 중에서 청명당계열 정파의 지도자인 김종수,정이환과 합세하여, 노․소론 탕평당계열인 흥인한, 정후겸, 윤양후, 홍계능 세력을 사도세자에 불경하고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제거했다. 동시에 조재한, 이명휘 이덕사 같은 소론, 남인 일부 역시 사도세자를 위한다고 하면서 실은 신임의리를 세운 영조에게 불경하다는 죄목으로 제거했다.


그 다음에는 정조의 외척인 홍봉한 집안을 무차별 공격하여 정치일선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말끔히 제거했다 이때만 해도 경주 김씨 중심의 정파지도자인 김귀주도 흥국영과 함께 홍봉한을 공격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홍봉한을 제거한 후 정조의 뜻을 움직여 정순왕대비의 친동생인 김귀주 계열까지 공격하여,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와해 분산시켰다.



정조의 충직한 대변자

이러한 정국 상황은 홍국영이 주도하였다. 이는 홍국영이, 외척의 정치 간여를 배제해야 정국이 안정될 수 있다고생각한 정조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후에도 외척당 및그들과 연결된 일부 노론 산림 집단의 반발로 여러 번의 옥사가 계속일어났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청명당 정파의 지도자 김종수가 옥사에 깊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들이 드러났지만 이를 사전에 삭제하여 문제되지 않게 처리했다. 이는 청명당과 김귀주 정파의 연결내지 제휴 관계를 차단하려 한 정조와 홍국영이,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따라 행동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혜경궁은 이런 정국운영 방식에 대해, '홍씨의 타코를 의리로 삼은 청명당계의 김종수가 홍국영을 이용하여 자기 가문을 역적으로 만들었다' 고 기록했다. 당시 정순왕대비 역시 자기 가문도 역적으로 몰린 정치적 수순에 대해 혜경궁과 마찬가지로 분노하였을 게 틀림없다.


혜경궁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홍국영 개인의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즉 흥국영이 왕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노론계의 유력한 정파들을 무력화시켜야만 자신이 노론계의 지도적 존재로 부상할 수 있다는개인적인 계산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주 김씨 계열까지 제거해버린 수순을 감안한다면 혜경궁의 판단은 일면적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이는 '열은 또 하나의 열로써 다스리고[懶治熱]' 동시에 '한 쪽의 그릇됨은 다른 쪽의 그릇됨으로,한 쪽의 올바름은 다른 쪽의 올바름으로 대비시켜 다스림으로써, 옳고그름이나 충신과 역적을 대비시켜 처리할 때 나타나는 커다란 희생을줄이겠다』(兩是兩非論)'정조의 통치철학 내지 통치술에서 나온 것이다. 즉 위와 같은 정치적 수순은 사실 정조의 뜻이고, 이것이 노론정파의 주체세력으로 떠오르려는 홍국영의 개인적인 욕구와 맞아 떨어져앞장서게 되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홍국영은 노론계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정조 즉위년부터 실천에 옮겼다.


첫째, 노론계의 주의주장『義理』을 다시 널리 떨치는 작업에 앞장 섰다. 그는 정조가 즉위한 해가 바로 숙종이 노론 송시열의 의리가 옳다고 선언한 병신처분을 내린 지 飾주년 되는 해라는 점을 십분 활웅했다.


그래서 그해 5월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효종의 위패 옆에추가로 배향하여 그 뜻을 기릴 것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결국 정조 2년4윌, 영조 위패 옆에 김창집(金昌集)과 민진원(閣鎭遠)을 배향할 때를 기다려서 송시열을 배향함으로써 이 뜻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그해 7월에는 정조로 하여금 직접 노론당의 신임의리가 옳다는 것을 다시 천명하도록 했다.


12월에는 영조 즉위 직후 최초로 노론의 신임의리를 주장했다가죽음을 당한 이의연(李義洲)의 벼슬을 높여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노론 산림 김창흡(金昌翁) ․이재 등의 벼슬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다시 높였다. 또한 일찍이 노론당의 맹장인 산림학자 중에서 충청지역의 지도자였던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즉위년 5월에 불림), 송환억과 경기지역의 지도자 김종후를 산림으로 불러 올려서 자신이 주도하는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했다.


동시에 노론계 산림인 흥계능, 홍양해 김한록이라든지 송시열 계열의 송능상(宋能相) 등 홍국영에게 적대적인 호서 산림계 일부를 제거하거나 약화시키기도 했다. 또한 영조년간에 폐지된 통청권, 즉 이조낭관이 스스로 후임자를 추천하고 당하관의 천거를 장악하는 제도도 즉위년 5월에 복구했다. 이는 영조가 탕평 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없애버린 제도다. 당시 이러한 정치적 조치는 홍국영이 절대적인 발언권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현재의 의리에 맞는 인재를 대폭 등용하겠다는 의미로 추진된 것이다. 곧 주자 성리학을 토대로 남송적 국가운영체제를 따라야 한다는 노론계의 오랜 강령이 다시 실현된 것이다.


둘째 , 소론당에 대한 대대적 인 탄압국면을 조성하여 소론계가 독립된정파로서 기능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역시 정조가 즉위한지 두 달 만인 5월에 추진되었다. 송시열을 받들어 올린 반면 그 정적이었던 윤선거 ․윤증 부자의 관작을 거슬러 빼앗는 조치를 취했다.


영조는 통치 말년에 노론 중에서도 특히 청명당 정파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탕평책의 일환으로 윤선거 ․윤증의 관작을 되돌려주었다. 그런데 정조가즉위하자마자 이 조치는 영조의 본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뒤집어버린 것이다.


당시 『정조실록  의 기술을 담당했던 사관은 정조의 조치에 홍국영의 건의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기록했다. 정조는 곧이어 8월에 2품 이상의 소론계열 재상급 관료들만을 소집하여, 당으로 군자와 소인을 가를 수는 없지만 의리 측면에서는 노론이옳고 소론이 잘못되었다는 점과, 붕당에 근거한 정치집단을 없애는 탕평을 강조하였다.


이는 소론계 정치인들에게 영조와 노론계의 신임의리를 재확인시키는 조치였다. 이로써 소른 인사들로부터 지금의 소론당은 과거의 소론당과 다르다거나, 이제 소론당은 없다는 등의 반응을유도하였다. 이후 소론계에서도 영조 초반 정승에까지 오른 조문명의사례를 본받아, 이숭호(李崇祿)나 서명응(徐命膚)처럼 노론 산림에게학문을 수업하는 분위기가 강화되었고, 아예 노론으로 전신해버린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홍국영 은퇴 후에 달라졌고 그런세력들은 정조년간에는 대체로 정승으로 임명받지 못하였다.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

셋째 , 홍국영은 1刃8년(정조 2) 당시까지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자기 누이동생을 정조의 측실로 들여보내 정조와 외척관계를 맺었다. 이때의 작호는 원빈(元擴)이었다. 이는 조정뿐 아니라 궁궐 안에도 우군을 만들어놓겠다는 의도였으나, 그보다는 왕위계승권에 깊이 신경을 쓴 행동이었다.


또한 이는'산림세력을 우대하고, 왕실과의 흔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인조 년간 이래 서인의 기본적 입장을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숙종 이후 청풍 김씨(김석주) , 광산 김씨 (김익훈) , 여흥 민씨 (민유중) 등은 모두 왕실과의 혼사를 바탕으로,노론계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한 가문이다.


특히 안동 김씨(김수항)의 경우, 인현왕후 민씨가 후사(後視)가 없자자기 집안의 딸(김수항의 종손녀)을 측실로 들여 보냈는데(김귀인), 이 방식을 홍국영이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을 바탕으로 홍국영은 노론당의 주도세력으로서 정국을 장악하게 되었고, 반대 정파가 존립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후 홍국영은 즉위년부터 시작하여 수어사, 훈련대장 등 5개 군영의 대장을 다거쳤다.


그리고 1777년(정조 1) 초에 궁철에 숙위소가 설치되자, 도승지겸 숙위대장으로 대장패와 전령패를 가지고, 궁철 안에 자유로이 머물면서 숙위군사를 직접 통제하는 둥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실각하기직전에는 도승지로서 정책결정권을 통제하고, 오영도총숙위(五營都總宿衛) 겸 훈련대장으로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정이 그러하니,궁철에 들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먼저 홍국영을 찾아 보아야 했고, 퇴철하여 집에 가면 또한 손넘이 그득하였다고 한다. 당시 노론계의 지도자였던 김종수조차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라고 선언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말은 즉위 직후 정조 자신이 한말이다.


홍국영은 이 시기에 외척이 주도한 탕평당을 와해시켰고, 소론 남인청류당을 견제하는 데 전력을다했으며,노론 산림의 인정을 받는 왕실외척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즉 스스로 노론계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바로 전형적인 노론정권의 행태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조의 입장에서는 양시양비론 또는 이열치열론에입각하여 정치세력을 재편성하는 단계였다. 홍국영은 1刃9년(정조 3) 9월 32세의 나이로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저는 7년 간 국가 일을 담당하였는데 (그동안) 조정의 명령이 대부분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 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흥국영의 길은 정조가 추구했던 탕평정치의 길과는근본적으로 달랐다 홍국영은 갈수록 궤도를 이탈하여 정조의 통치방식에 근본적인 위협을 주었고, 이 때문에 결국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정조 탕평책의 걸림돌로 흑두봉조하가 되다

홍국영이 몰락한 것은 결국 정조의 탕평정치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정국안정을 위해서는, 왕실외척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막아야 한다는 점을 첫 번째 정치원칙으로 강조했다. 그래서 영조 말년에 형성된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 외척당과 생모 혜경궁의 풍산 흥씨 외척당을 모두 제거하여 와해시켜버렀다. 그런데 정조의 으뜸 공신인 홍국영 역시 외척으로서의 정국주도권 장악을 노렸다. 이는 정조의 통치원칙을 전부 무너뜨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상태에서,더 이상 늦기 전에 홍국영을 은퇴시켜버 린 것이다.



왕위계승권에 재입한 죄

홍국영이 은퇴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그가 1刃9년(정조 3) 5월 누이 원빈이 사망한 후, 청명당계열 김시묵(金時黙)의 딸 효의왕후(孝流王店 ;정조비)를 의심하여 핍박한 사건 때문이다. 이는 도덕적으로는 정조를 직접 공격한것과 마찬가지다. 혜경궁은 당시 홍국영이 내전의 나인들을 여럿 잡아다가 칼을 빼들고 혹형을 가하면서, 원빈이 독살당한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멋대로 국문했다고 쓰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홍국영이 원래 제 털끝만 건드려도보복하는 성미라서 자기에게 대항한 사람들을 함부로 무수히 죽였는데이제는 곤전까지 죽이려 한다고 수근거렸다 한다. 어했든 이로 인해 왕대비, 혜경궁, 왕비를 포함한 궁궐 내의 모든 세력이 홍국영을 적으로 규정하고 몰아붙이게 되었다.


정조로서는 이러한 압력을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홍국영이 왕위계승권 문제에 뛰어들어 간섭했다는 사실이다. '원빈'의 '원(元)' 자는 '근본'이라는 뜻으로 왕위계승권을 잇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 후궁은 사용할 수 없는 용어였다.


게다가 원빈이 사망한 후 효의왕후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설과, 효의왕후가원빈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다. 게다가 홍국영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 인의 아들 상계군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이라는 작호를 주었는데, 여기서 '완(完)'은 전주 이씨, '풍(豊)'은 풍산흥씨의 관향을의미한다. 그런데 왕실에서는 작호에 어머니 쪽의 관향을 사용한 경우가 없을 뿐더러, 이작호 역시 정조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붙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후 벽제역에 내용을 알 수 없는 괘서(掛書:대자보)가 붙어 민심이 흥흥해지기도 했다. 이때 노론계 산림 송환억 송덕상은 상소를 을려소론당이 반란을 일으켜 신임의리를 뒤집으려는 기미가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조가 신임하던 소론 청류당 정파의 지도자 서명선 이복원(李福源) 등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정국은 이로 인해 흔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시전상인 일부가 철시하고 피난을 갈 정도로사태가 심각했다고 한다. 송덕상은 이 틈을 타서 다시 상소를 올려, 국세가 외롭고 고단하므로 가시적인 조치 (模樣道理)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구체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았으나, 왕위계승권자를 딸리 책봉하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심낙수는 이상과 같은 시도에 대해 완풍군을 조기에 후계자로 책봉하기 위한 공작의 일환이라고 판단했다.




정조시대의 한신(韓信)

홍국영은 절대적 권력을 가진 상태에서도 소소한 은원관계까지 보복 보상함으로써 마치 한(漢)의 한신(韓信)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숙위대장으로 있을 때 그의 방자함을 담은 일화들이 많은데, 나이 많은 상위직급자가 와도 일어나서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홍국영의 문객 흉내를 내지 않으면 대부분의 관료들도 철저하게 무시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노론 청명당으로서 오랜 동지인 정민시, 소론 청류당 지도자 로서 역시 동지인 서명선, 그리고 청남계 정파를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른바 절대권력을 유지하려다 인간으로서의 도덕성 자체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19년(정조 3)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과 처음 만난 바로 그 날짜에 아무도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홍국영으로 하여금 '신이 한 번 대귈문을 나가서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 ‥‥‥하늘의 신(神)이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정계은퇴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때 홍국영은 그 자신이 말한 대로, 다른 사람 같으면 관료로 임명 되기 위한 예비 시험인 진사(進士)에 급제해도 빠르다고 할 32세의 나이였다.


정조는 즉석에서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이전과 이후 천 년에 걸쳐 이와 같은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언제 있었고, 언제 또다시 있을 수있겠는가', '넷날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지만 혹발의 봉조하(奉朝賀)는 없었는데, 드디어 흑발의 봉조하도 있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흥국영에게 은퇴한 정계원로에게 주는 봉조하의 직함을 수여하고숙위소도 즉시 없애버렀다. 그의 갑작스런 은퇴결정에, 산림 송덕상과 김종후는 이를 만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바로 홍국영이 노론계의 의리를 대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들은 흡날 홍국영을 지지한 데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홍국영의 은퇴를 수수방관한대신과 고위직 관료들을 비난한 호서지역의 지도자 송덕상은, 국왕에대한 의리 문제에 어두웠다는 것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제거되었다. 경기지역의 지도자였던 김종후도 이후 그 명망을 유지하지 못했다. 당시재상으로서 그의 은퇴에 엉거주출한 태도를 취한 김상철(金尙喆) 등도이후 정국에서 배제되었다.


반면 홍국영을 무사히 은퇴시키는 것 자체가 그의 죄악을 덮어두는 은전이므로,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서명선, 정민시, 유언호(兪彦鎬), 이병모(李秉模)는 이후 정조의 신임을 받아 정책결정권의 핵심에까지 도달했다.


홍국영의 가장 강력한 우익이자 개인적으로도 친밀했고 당시 노론계관료세력 사이에서 뚜렷한 지도력을 발휘한 김종수도 마찬가지였다.그는 은퇴한 지 5개월 여가 지난 다음해 2월 홍국영을 만나 위로한 직후.도리어 홍국영의 처별을 요구하는 본격적인 신호가 된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 정치적 위치를 유지하려고 노력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결정적인 원인은, 흥국영이 원빈 사망 후에도왕위계승권 문제에 간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보다는오히려 외척세력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등 정치원척을 투철하게 지키는 인물을 중심으로 탕평정치를 달성하려던 정조의 길에 결정적인 장애가된 것이 근본적인 이유다 홍국영의 세력은 그해 12월 백부인 홍락순마저 정계에서 추방됨으로써 거의 제거되었으며, 홍국영 자신도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는 처벌(t故歸團里1)을 받았고,동시에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정계에서 배제된 근원적 이유

결국 그는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갈 만한 경륜을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은 정치가였다.그래서 이전 시대와 같은 독점적이고 특권적 권력을 추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도덕성마저 파탄나버린 것이다. 즉 언젠가는 정계에서 배제될 운명의 길을 택하여 걸은 것이다.


정계에서 은퇴한 흥국영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경기도 해변가나 동쪽과 서쪽으로 여기저기 분주하게 옮겨 다였다. 그러다가 동쪽바다 강릉 해안에 거처를 정했는데, 거기서 매일 술을 마시고 산에 뛰어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몇 달 만인 다음해 4월 병(울화병인 듯)을 얻어 33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홍국영같이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 그래도 큰 인물이라고 주목하고 합리화시키는 너그러움을 갖고 있는 것같다. 홍국영은 무한권력을 추구하여, 당시 사람들에게는 '도덕성' 자체를 부정당한 인물인데도 말이다. 오늘날의 역사물에서는 왜 도덕성 파탄 같은 주제가 예외 없이 무시되는 것일까?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해서일까? 이러한 걱정이 필자 개인만의 지나친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홍국영과 이산(정조)의 다정한 모습

홍국영과 정조는 이런 사이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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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 사도세자는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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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閑中錄)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 ∼ 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 · 한문본 · 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 洪樂任 )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 洪國榮 )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마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 을축 4월 일 ’ 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 ( 貞純王后 )가 돌아간 해이다. “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 ” 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東宮內人)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暎嬪)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 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 洪鳳漢 )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 ( 時派 )와 벽파 ( 僻派 )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 ” 라며 분노한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해(정조 19)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이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파헤친 일종의 해명서이다. 그 골자가 되는 세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왕비(貞純王后)의 친정 경주 김씨와 전 세자빈의 친정 풍산 홍씨의 정권다툼으로 작자의 아버지와 아들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홍봉한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宮中 煉 史)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후예로 명문가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도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이다.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그가 비빈(妃嬪)이라는 사실에서,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자료가 된다. 임오화변의 이유 및 홍봉한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실기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속 등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 한중록 〉 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치렁치렁한 문체는 옛 귀인 ( 貴人 )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이 작품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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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무인(武人) 정조대왕



▣방송 : 2007. 10. 27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정현모 PD
작가 : 정윤미



태조 이성계를 능가하는
무인(武人) 군주, 정조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키우고
스스로 군권을 거머쥐다.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는가!


 

정조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1.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아온 정조의 모습은 거짓이다!정조의 실제 외모는 어땠을까?
얌전한 학자군주로만 기억되어온 정조의 진실을 밝힌다.
그의 실제 얼굴은 우리가 이제껏 교과서에서 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선 구황실의 족보 <선원보략
>
에 담겨있는 정조의 어진.
문예군주보다는 늠름하고 활달한 무사의 기상이 뿜어져 나온다.
당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조선에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고, 24기예를 집대성해 <무예도보통지>와 진법서<병학통>을 편찬한 그는 무예에 관한 전문가였다.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조직해 직접 군사훈련을 진두지휘하고, 조선의 군권을 장악했던 정조대왕.
그는 조선 최고의 무인(武人)이었다.

                  <정조표준영정>                        <정조의 실제모습>

2. 신기에 가까운 활쏘기 실력, 신궁(神弓) 정조에 관한 진실.

"작은 가죽과녁에 1순을 쏘아 5발을 맞혀 7점을 얻고…
마치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 어사고풍첩 中 >


정조의 활쏘기 실력이 기록되어있는 <어사고풍첩>.
1792년 10월 30일의 기록에는 50발 중 49발을 맞춘 성적이 남아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정조는 과녁뿐 아니라 작은 부채, 곤봉, 편곤까지도 명중시킨 신궁(神弓)이었다.
"한국사 傳"에서는 정조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국 최고의 국궁선수가 활쏘기를 재현해 당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을 검증해보았다.

 

조선 최고의 군사력을 키운 정조.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나!

스스로 조선의 군권을 장악한 임금, 정조.
그는 우선 무예가 출중한 무사들을 직접 선발해, 자신의 호위를 맡을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장용영, 정조의 친위부대였다.
정조는 한.중.일 삼국의 무예를 모은 당대 최고의 무예, '십팔기'를 수련시키고, 무사 개개인의 무사실력을 일일이 확인하며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게 된 장용영. 그것은 정조의 강력한 왕권을 의미했다.

노론들이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조선에서 정조 스스로 절대적인 왕권을 쥐게 된 것이다.


 

신하의 나라'에 선 왕.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정조는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무사(武士)였다.
특히 활쏘기 실력에 있어서만큼은 조선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명중시키기도 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그는 장용영 군사들이 단련한 무예십팔기에 마상무예 6기를 더해 '24기예'를 완성시키고, 이를 <무예도보통지>에 기록하여 많은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스스로 무사의 위용을 갖추고, 군대를 진두지휘하기 시작한 정조대왕.
그가 노론의 뿌리 깊은 권력을 잘라낼 정치적 승부수, 그것은 바로 무예(武藝)였다.


정조가 무사(武士)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어린 시절, 공포와 절망의 기록 『존현각 일기』

"나는 일찍 아비를 여의고 죽었어야 하나 죽지 않은 사람."
-존현각일기 中-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었다.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정조.
그는 아버지의 역적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늘 위협과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세손 시절, 어린 정조의 절박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존현각 일기>. 그 일기 속에는 노론에게 당한 노골적인 협박,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으로 인해 옷을 벗고 잠들지 못하는 불안함, 그리고 궁녀와 내시까지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박함이 드러나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노론대신들의 "손안의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조의 무력시위, 화성행차. 그리고 의문의 죽음...

1795년, 정조는 3천여 명의 장용영 군사를 포함한 6천여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화성을 향했다. 여전히 노론 세력이 우세한 서울을 떠나 화성에서 새로운 조선을 일으키고 싶었던 정조. 그는 갑옷을 입고 밤낮으로 군사훈련을 벌였다. 이는 노론을 향한 무력시위였다. 노론신하들은 정조의 행보에 치를 떨며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고, 혈서를 쓰기까지 했다.
정조와 노론의 대립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무렵, 정조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오회연교를 내린 지 채 한달도 되지 않은때였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
정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은 사라져버린 것일까?

          <정조가 12세 때 쓴 친필
"선을 지키고 악을 막는 게 공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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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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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2007. 7. 21(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윤한용PD
▣작가 : 정윤미



“3살 때부터 시작된 조기교육!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는 아들의 정신질환을 일으킨다.”
 


애민군주, 중흥군주,
18세기 조선 르네상스의 기반 마련,

왕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영조.

과연 아버지로서는 어땠을까?
조선 왕조의 비극적 사건,
사도세자의 죽음!

역사 속에서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
영조와 사도세자.

그들을 통해 이 시대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아들을 바라본다.





아들을 크게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 조기교육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당쟁의 한 가운데서 겪은 수많은 정치적 위기.
영조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딛고 평생 '근신'이란 두 글자를 실천한 애민군주였다.
신문고를 설치해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균역법을 통해 공역 부담을 줄였다.

조선 왕조의 입지전적인 임금, 영조.

영조 나이 마흔에 얻은 조선 왕통의 유일한 후계자, 사도세자. 그리고 세 살 때부터 시작된 유례없는 왕세자 조기교육. 영조는 세자교육관을 직접 선발하고, 구체적인 공부내용과 방법을 지시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문답하여 세자의 능력을 시험하곤 하였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제자성록>, <어제상훈> 등의 교재를 직접 저술하기까지 했다.


대리청정으로 인해 만사가 탈이 났다 <한중록中>


영조는 즉위 때부터 노론에 의해 선택된 '노론의 임금'이란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과 같이 당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던 아버지, 영조. 1749년, 15세의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옥좌에 앉게 된다. 당쟁해소를 위한 영조의 승부수, 대리청정!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성격차이를 넘어 정치적 입장까지 갈라지기 시작한다.

1755년, 결정적으로 부자 갈등의 씨앗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승정원일기>를 보면 당시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지워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화의 단절, 아버지와 아들사이를 가로막은 벽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멀어진 가운데 직접 만나는 기회조차 줄어들게 된다. 아들이 부왕의 문안을 미루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 왕과 왕세자 사이의 멀어진 틈.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력이 있었다.
노론은 소론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연일 상소를 올렸지만 세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부종(不從: 따르지 않겠다)"
이 때 부터 노론은 세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부자의 관계가 멀어진 가운데 왕세자가 낙선당에 불을 지르고, 궁녀를 죽이는 등 온갖 비행들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온다. 게다가 이 모두가 아들의 정신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실망시킬까 불안했고, 그 지독한 꾸짖음이 두려웠다.


"동궁께서 평상시에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서 벌벌 떨며 비록 쉽게 알고 있는 일이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너무 엄외한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영조33(1757)

아버지를 뵙고 물러나오던 중 까무라쳐서 기절한 사건도 있었다.
특히 노론, 소론과 맞대면하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마다 옷을 찢어버리는 등의 돌출행동을 보인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는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러나 아픈 와중에도 장인에게 남한형지와 양향군무도서(한강 이남의 군사, 지도 등에 관한 책)와 같은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군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그는 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1755년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아버지는 왜 아들을 죽여야만 했는가?

"아무래도 내가 오늘 죽는가 보오..."
1762년 5월 13일,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창경궁 앞뜰로 간 아들의 눈에 비친 것은 나무뒤주.

궁궐문을 봉쇄하고, 조정 대신들조차 출입하지 못한 사도세자 죽음의 현장!
당시 바로 그 곳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가 있었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세자시강원설서, 권정침! "한국사 傳"에서는 임오화변의 목격자, 권정침의 문집 <평암집>을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보았다.
<평암집> 그 날, 창경궁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아버지, 영조

아들은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고 만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그는 아들이 죽은 뒤 내린 시호. 사도(思悼)... '안타깝게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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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첫 공개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사도세자가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내용을 담아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들이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사도세자의 병세와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명확히 설명해 주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권두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도쿄()대에서 조선시대 영조 장조 정조 3대의 편지를 촬영한 흑백사진 자료 11첩을 발견해 ‘장조’인 사도세자의 편지 내용을 번역했다고 14일 밝혔다.

현재 남아 있는 사도세자의 편지는 거의 없으며 알려진 자료도 개인적 고백이 아닌 공식 문서가 대부분이다.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권 교수에 따르면 1910년대 초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홍봉한의 5대손인 홍승두 집안의 원본을 거간꾼에게서 구입해 일본에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원본은 야마구치()현립도서관에 보관돼 있고 도쿄대 동양사학과 다가와 고조() 교수가 이를 사진으로 촬영해 1965년부터 이 대학에 보관해 오다 퇴직 후 유품으로 남겼다.

권 교수는 “혜경궁 홍씨가 ‘친정에 있는 3대 임금의 서적과 서찰을 첩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하라’고 밝혔다는 홍씨 가문의 글이 이 편지가 사도세자의 친필임을 보여 주는 명확한 증거”라고 전했다.

비운의 주인공인 사도세자는 1735년에 태어나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 27세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아들 정조가 장헌()이란 이름을 올렸고 1899년 고종 때 다시 장조()로 추존됐다. 아내인 혜경궁 홍씨는 조선왕실 여인의 회고록으로 유명한 ‘한중록’에서 남편의 비화를 소개했다.


○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불만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


사도세자가 만 14세인 1749년 어느 날 장인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미친 듯합니다” 탄식▼

권 교수는 “사도세자는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하지 못하니 자신이 세자인지 자격지심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도 이 같은 내용이 전하지만 이 편지는 사도세자가 직접 고백하는 내용이므로 아버지와의 갈등을 더 정확히 보여 준다는 설명이다. 안대회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사도세자에 관해 아들 정조가 만든 문집은 있지만 개인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며 “이 편지가 사도세자의 친필이 맞는다면 역사의 모호한 부분을 해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묘

경기 화성시 태안읍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 융릉. 동아일보 자료 사진.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1756년 2월 29일 21세의 사도세자는 장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의 고백이다.

이에 대해 권 교수는 “궁내에서 의관에게 자신의 병세를 전하면 갈등을 빚고 있는 아버지 영조에게 전해질 것이 두려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사도세자가 자신의 병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도 역력히 나타난다.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1754년 10월 또는 11월 모일로 추정)

특히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합니다”라는 내용은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네 번 정도 반복됐다.


○ 끊임없는 국정에 대한 관심

사도세자는 편지를 통해 병중에도 나라살림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나타냈다. 사도세자는 병을 앓을 때는 불안한 심리를 보이다가도 이성을 되찾을 때는 합리적으로 국정에 임할 것에 대비했음을 알 수 있다.

“(보내 주신) 지도를 자세히 펴 보니 팔도의 산하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인이 말한 바 ‘서너 걸음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강남 수천리가 다하였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할 길이 없어 삼가 표피 1영을 보내니 웃으며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1755년 11월 회일)

사도세자는 편지 여러 통을 장인에게 보내 국가의 제도와 규칙이 설명된 서적과 지도를 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권 교수는 15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술발표회에서 번역 내용과 편지 고증 과정을 발표한 뒤 학자들과 자료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토론한다. 권 교수는 사도세자가 아내의 출산을 걱정하는 내용, 장모에게 바친 제문 등도 번역해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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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조선이야기] 일곱 임금 거친 환관 김처선의 비극

세종 말년부터 연산군 때까지 세력다툼에 치여 죽을 고비 수없이 넘겨
연산군 폭정에 맞서 직언했다 사지 찢기는 극형… 최근 드라마로 부활


최근 한 공중파 방송에서 조선 초 환관 김처선(金處善)의 스토리를 극화한 드라마를 시작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배우 장항선씨가 연기했던 바로 그 환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극용 인물로는 대단히 성공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실제 행적도 흥미진진한 데다가 생존시기도 세종 말년부터 연산군 때까지 파란만장했던 격동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극적 상상력이 적절하게 가미될 경우 우리는 오랜만에 멋진 팩션을 만나게 될 듯하다.

실록에 김처선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단종 1년(1453년) 10월 13일자다. “경상도 영해에 귀양 가 있던 김처선을 석방하라.” 이때는 수양대군과 한명회·권람 등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직후였다. 이를 통해 볼 때 김처선은 김종서 등과는 반대쪽에 섰던 인물로 보인다. 4개월 후인 단종 2년 2월 19일 김처선은 고신(告身)을 돌려받아 환관에 복귀했다. 고신이란 일종의 관리자격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1년 후인 단종 3년(1455년) 2월 27일 김처선은 수양의 동생 금성대군 이유가 단종복위운동을 펼친 데 참여했다가 발각돼 고신을 빼앗기고 고향인 전의(全義)의 관노(官奴)로 전락한다. 그러나 처형을 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 열성적인 가담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만 해도 환관 중에서는 엄자치가 가장 유명했다. 엄자치는 세종으로부터 가장 큰 총애를 받은 환관이었다. 이후 계유정난에 참여해 공신에 책록됐던 엄자치는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며 사육신과 같은 길을 걷다가 세조에 의해 죽게 된다. 김처선은 2년 후인 세조 3년(1457년) 8월 18일 세조의 특명으로 관노의 신분에서 벗어났고 세조 6년(1460년) 5월 25일에는 뒤늦게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된다. 큰 공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계유정난에 김처선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조와 김처선은 서로 궁합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제대로 시종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국문을 당하거나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세조 11년에는 희한한 사건에 연루돼 목숨을 잃을 뻔했다. 덕중(德中)이라는 궁녀가 남몰래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 이영의 아들 구성군 이준을 흠모하다가 환관 최호와 김중호를 통해 한글로 된 언문연서(諺文戀書)를 보냈다가 임영대군과 구성군의 밀고로 발각되는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덕중은 말할 것도 없고 최호와 김중호까지 사형을 당했다. 이때 김처선도 간접적으로 연루된 듯하다. 그러나 죄가 중하지는 않았는지 세조는 용서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종이 즉위해 본격적으로 친정(親政)을 시작한 성종 8년(1477년) 다시 김처선이라는 이름이 실록에 등장한다. 이때부터 김처선은 주로 왕명을 비밀리에 받드는 중책을 맡았다. 김처선은 품계가 계속 올라 자헌대부에까지 올랐다. 자헌대부는 정2품에 해당하는 대단히 높은 관작이다.

1494년(성종 25년) 성종이 승하했을 때 김처선은 내시 중에서는 최고위직인 시릉내시를 맡았다. 시릉내시란 왕의 무덤을 돌보는 내시를 뜻하는 것으로 살아 있을 때 성종의 무한총애를 받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만 따져도 김처선은 그 사이에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 여섯 임금을 모셨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세종 말이나 문종 때 대궐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김처선은 어려서부터 성장과정을 곁에서 모두 지켜보았던 연산군을 모시게 된다.


연산군이 폭군화하는 것은 대략 재위 10년을 넘기면서부터였다. 그 때문인지 10년간 김처선에 관한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가 연산군 10년(1504년) 7월 16일 연산군은 “내관 김처선을 하옥하라”는 명을 내린다. “김처선은 무례한 일이 있었으므로 죄를 주어야 하나 도설리가 없으니 우선 장100대로 대신하라.” 도설리(都薛里)는 내시부 소속으로 궁궐의 음식을 맡아보던 설리를 관리감독하는 우두머리를 뜻한다. 중벌을 범했으나 일단 궁궐의 음식을 주관해야 하니 곤장100대로 대신하겠다는 뜻이다.

정확히 김처선의 ‘무례(無禮)’가 어떤 행위를 말하는지는 실록에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맥락으로 볼 때 광기를 보이기 시작하던 연산군에게 직언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김처선으로서는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살펴야 하는 본분에 충직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리고 9개월이 지난 연산군 11년 4월 1일 ‘환관 김처선을 궐내에서 죽이고 아울러 그의 양자 이공신도 죽였다’는 짤막한 문장이 나온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김처선은 폭군 연산군의 미움을 사 죽게 된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산군이 내린 가혹한 후속조치들을 보면 김처선은 죽기를 각오하고 연산군의 광폭한 행동에 제동을 걸려 했음이 분명하다.

다행스럽게 죽게 된 이유와 관련해 딱 한 줄 나온다. “술에 몹시 취해 임금을 꾸짖었다.” 그 대가는 컸다. “왕이 직접 그의 팔다리를 자르고 활을 쏘아 죽였다.” 가산을 몰수당했고 고향 전의도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7촌까지의 친척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김처선을 죽인 연산군은 이틀 후 ‘어제시(御製詩)’까지 지었다. 그 중에 자신이 김처선에게 당한 봉변은 “바닷물에 씻어도 한이 남으리”라고 썼다. 그런 광기는 6월 16일 “관리와 무신 중에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자는 모두 고치도록 하라”는 명에서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7월 14일에는 절기를 나타내는 처서(處暑)에도 김처선의 처(處)자가 있다는 이유로 조서(暑)로 바꿔 부르도록 명했다. 술을 먹고 자신에게 직간(直諫)한 김처선을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7월 19일에는 모든 문서에서 ‘처(處)’ 자를 쓰지 말할 것을 명했다. 선(善)자는 워낙 많이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처 자만 쓰지 못하도록 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해 12월 오늘날의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사인(舍人) 성몽정이 문서에 처(處)를 썼다는 이유로 잡혀와 국문을 당했다. 다행히 성몽정이 그 글자를 쓴 때가 7월 19일 이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성몽정은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성담년의 아들인 성몽정은 이 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4등에 책록되고 훗날 대사헌에까지 오른다.

연산군은 생각할수록 김처선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듬해인 연산군 12년 3월 12일 “김처선의 집을 흔적도 없이 파내고 그곳에 못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의 죄명을 바윗돌에 새겨 땅속에 파묻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해 9월 연산군은 반정으로 왕위에서 내쫓겼다. 그리고 중종이 즉위했다.

그해 11월 24일 사헌부 헌납 강중진이 글을 올려 “모두가 폐주에게 아부 아첨할 때 김처선 홀로 직언을 하다가 죽었으니 포상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중종은 왜 김처선의 ‘복권’과 명예회복에 반대한 것일까? 중종 7년 12월 4일 ‘삼강행실’ 속편을 편찬하던 찬집청에서 김처선의 사례를 삼강행실 속편에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를 묻자 중종은 이렇게 답한다.
“김처선은 바른말을 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술에 취해 실언을 한 것이기 때문에 수록할 필요가 없다.”


김처선의 명예회복은 250년이 지난 1751년(영조 27년) 2월 3일 영조에 의해 이뤄진다. 영조는 이날 “내관 김처선이 충간(忠諫)을 하다가 죽게 됐다는 것은 내 일찍이 아주 익숙히 들었다”며 정문(旌門)을 세워 그의 뜻을 기리도록 하라”고 명한다. 이런 생애를 살았던 역사 속 김처선이 드라마 속에서는 어떻게 그려질지 벌써 궁금하다.



세계사 연표
1455 세조, 단종 몰아내고 즉위
  영국, 장미전쟁 발발
1456 성삼문ㆍ박팽년 등 사육신 처형
1479 에스파냐 왕국 성립
1485 성종, ‘경국대전’ 완성
1492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1494 연산군 즉위
1498 바스코 다 가마, 인도 항로 개척
1506 중종반정


/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대우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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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왕의 남자, 내시 김처선

 

■ 방송 : 2007. 9. 22 (토) 20:10~21:00 (KBS 1TV)
■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 연출 : 송철훈 PD
■ 작가 : 정종숙


"처(處)자는 김처선의 이름이니
이제부터 모든 문서에
처(處)자를 쓰지 말라."



1505년 4월 1일,
연산군은 내시 김처선을 처참하게 죽이고
'처(處)자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도대체 연산군과 김처선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보필했던 내시 김처선.

그는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왕을
목숨 걸고 지켜내었던
진정한 "왕의 남자"였다.


▣ 영화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연산군의 곁에서 평생을 걸고 눈과 귀어 되어주었던 영화<왕의 남자>의 김처선.
단종부터 연산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며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보필했던 내시 김처선.
그는 왕의 그림자로서 왕을 독살할 수도, 왕의 생명을 지켜낼 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내시부의 최고 수장, 상선내시였다. 지금 '내시 김처선'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 傳"에서는 '조선왕조실록', 내시부 지침서 '내반원기' 등의 사료와 전문가 인터뷰를 바탕으로 내시의 전문 직업적 면모를 파헤치고, 김처선이라는 인물의 실체를 밝혀낸다.


왕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아는 유일한 남자, 김처선

단종부터 연산군까지 다섯 분의 임금을 모셨던 내시, 김처선. 성종과 연산군 대에는 왕의 건강을 돌보고, 그의 지시와 명령을 전하는 상선내시로서 임금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상선내시는 왕의 신임을 받아야만 오를 수 있는 최고위 자리였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신하로서 왕을 대신해 성종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시릉내시로 근무한 김처선. 그는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받는 내시부의 최고 수장이자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왕의 그림자였다.



왕의 독이 될 것인가. 왕의 생명이 될 것인가!

폐비 윤씨 사건 이후 연산군은 기생들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날마다 흥청망청 잔치를 벌였 고,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모질어 벼 수확을 하러 금표(군사훈련지역이나 왕의 사냥터에 세우는 일반인 출입 금지 표지문)안으로 들어왔다가 처형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특히 연산군은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내시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 내시가 승명패를 차고 지나갈 때에는 신분에 상관없이 말에서 내리게 했다. 그래서 권력을 얻은 내시들 중에는 대낮에 공공연히 뇌물을 받는 이도 있었다.

조선왕조 역사상 유례없이 왕이 내시에게 막강한 권력을 실어주는 상황 속에서도 김처선은 변함없이 내신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오늘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하거라."

口是禍之問 舌是斬身刀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연산군은 "신언패"를 관리들의 목에 걸고 다니게 하고, 말을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였다. 왕명에 반하는 말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하들은 연산군의 비행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이 자신의 향락생활을 감추기 위해 궁궐담을 점점 높이 쌓아가는 가운데 김처선은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왕을 위해 마지막 충성의 길을 선택한다. 내시의 본분은 왕을 바른 길로 모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양아들이 있었던 김처선. 1505년 4월 1일, 그는 가족에게 유언을 남긴 채 목숨 걸고 왕의 앞에 선다.

"이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지만은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백성들을 생각하시어 바른 정치를 펴셔야 합니다."




연산군의 광기어린 보복,
      김처선에 대한 모든 흔적을 없애버리다.




[전의면 옛지도
- 김처선의 집을 파헤쳐 연못을 만든 흔적]
왕의 손에 처참하게 죽은 김처선. 그의 직언에 분한 연산군은 김'처'선(金處善)의 '처(處)'자 사용 금지령을 내린다.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사람은 모두 이름을 고쳐야 했고, 공문서에 '처'자를 사용했다가 국문을 당한 이도 있었다.

또한
김처선이 나고 자란 전의현을 조선의 행정구역에서 없애버리고, 그의 고향집을 파헤쳐 연못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연산군은 처절하게 김처선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없애버리고자 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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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29)] 실제 홍길동은 연산군 시절 도적 떼의 두목

고위관리 사칭한 강도 행각 실록에 남아…
당상관 등 비호세력 밝혀지며 조정이 시끌

그림. 이철원.


신출귀몰(神出鬼沒)하면 곧바로 연상되는 인물이 홍길동(洪吉童)이다. 지금도 우리는 동사무소나 구청에 가서 각종 서류양식을 작성하려 할 때 표본서류에서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한국 사람이 가깝게 느끼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홍길동상(像)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이후부터 홍길동은 조선 백성들이 학정(虐政)에 시달릴 때마다 메시아처럼 갈구하는 인물로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사실 실록에 기록된 홍길동은 소설 속 홍길동과 다르다. 광해군 때 허균은 세종 때를 배경으로 해서 홍길동을 썼지만 역사 속 홍길동은 연산군 때 인물이다. 신출귀몰했는지는 모르지만 홍길동은 한낱 도적떼의 두목에 불과했다. 폭정이 도적 떼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임꺽정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이 극에 달한 명종 때 도적이다. 숙종 시대를 폭정기(暴政期)라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잦은 당파 교체로 지방 수령들에 대한 통제가 미약해지면서 백성들에 대한 지방 수령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다는 점에서 장길산의 등장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실록에서 홍길동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연산군6년(1500년) 10월 22일이다. 영의정 한치형을 비롯한 3정승이 홍길동을 체포했다며 “기쁨을 견딜 수 없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이때 3정승은 홍길동을 ‘강도(强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단순 강도라면 국왕과 3정승이 이처럼 흥분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정에서 골치를 앓아야 했던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위관리 사칭이었다. “강도 홍길동은 옥(玉) 달린 모자를 쓰고 홍대(紅帶)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공서를 드나들면서 기탄 없는 행동을 자행했다.” 홍길동을 조사한 한치형의 보고서에 나오는 홍길동의 범죄 행각이다. 중추부 첨지면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다. 홍길동의 활동 무대는 주로 충청도와 한양, 경기도 일대였다.

홍길동 체포로 그의 비호세력들이 속속 밝혀지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엄귀손이었다. 그는 실제로 무인 출신의 당상관이었다. 조사 결과 엄귀손은 홍길동이 도적질한 물건을 관리해주고 집도 사주었다. 조정에서는 약간의 논란도 있었다. 엄귀손의 홍길동 지원이 적극적인 것이었는지 소극적인 것이었는지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어세겸 같은 인물은 “엄귀손이 홍길동의 음식물은 받아 먹었지만 그것은 인정상 흔하게 있는 일이니 허물할 것은 못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치형을 비롯한 3정승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 100대와 3000리 유배 그리고 고신(告身) 박탈이었다. 고신을 박탈한다는 것은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빼앗는다는 뜻이었다. 이 형벌은 조선 때 사형 바로 다음에 해당하는 중한 처벌이었다.

실록만 놓고 본다면 홍길동 사건보다 엄귀손의 홍길동 비호사건이 더 중요하게 다뤄졌다. 결국 한 달여의 조사 끝에 엄귀손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당시 연산군은 3정승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런 인물이 당상관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책임은 당연히 3정승에게 있었다. 그들은 “엄귀손이 당상관이 된 것은 군공(軍功)이 있어서이지 조행(操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라고 변명했다. 조행이란 조신한 행실을 뜻한다. 엄귀손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아래에서 우후(右候)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군공’이라고 함은 그때 국방의 공을 세웠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엄귀손은 품행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동래 현령으로 있을 때는 관물을 마음대로 도용하다가 파면된 일이 있었고, 평안도 우후 때도 공물을 훔쳤다가 퇴출되는 등 좋지 못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런 경우 분명 중앙조정에서 그로부터 뇌물을 받아 엄귀손을 비호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 무관의 관직은 대부분 돈과 뇌물로 결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공보다 뇌물이 엄귀손을 당상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게다가 원래는 노비와 재산이 없었는데 홍길동 사건과 관련되어 조사 받을 당시에는 한양과 지방에 집을 여러 채 갖고 있었고 곡식도 4000석이나 쌓아 두고 있었다고 하니 그것은 ‘대도(大盜)’ 홍길동 덕택이었다고 봐야 한다.

실록에 기록된 홍길동 사건은 여기까지다. 흥미로운 것은 그에 관한 처벌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형을 시켰다면 분명 기록되었을 텐데 홍길동을 군기시 앞에서 참형에 처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엄귀손에 준하는 형벌로 남쪽 섬으로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정에서도 홍길동 문제보다 엄귀손 문제를 더 중하게 다룬 것을 보더라도 사형에 처해지지는 않은 듯하다.

홍길동의 ‘증발’ 이후 그에 대한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조정 관리들은 누구를 욕할 때 ‘홍길동 같은 놈’이라고 할 정도였다. 선조 때의 기록이다. 조헌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 홍길동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정승을 잘못 골라 풍속이 탁해지고 강상의 윤리가 무너져 이제는 홍길동을 욕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한마디로 홍길동보다 못한 인물이 정승에 올랐으니 굳이 홍길동을 욕할 일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홍길동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당대의 정치 상황에 따라 바뀌고 있었다. 광해군 때 비운의 혁명아 허균이 조선의 계급적 모순을 정면으로 질타하는 국문소설의 주인공으로 홍길동을 끌어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소설 속 홍길동은 이조판서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였다. 실제 홍길동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지만 아버지가 이조판서와 같은 고위직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실록 어느 한 구석에도 언급이 되었을 것인데 그런 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허균의 상상력이 빛나는 대목은 ‘홍길동 그 후’이다. 현실 속 홍길동이 섬으로 유배를 갔다면 소설 속 홍길동은 체포된 후 병조판서직과 쌀 1000섬을 하사 받고 남쪽 저도라는 섬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병사들을 훈련시켜 율도국을 공략해 율도국의 왕이 된다는 멋진 상상이다. 지금도 율도국이 실존하느냐는 논쟁이 있을 만큼 허균의 상상력은 그럴듯했다.

숙종 때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홍길동과 관련된 아주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겼다. 옛날에 홍길동이라는 도적이 주로 보부상을 습격하였기 때문에 보부상들이 홍길동이라는 이름 자체를 극도로 싫어하였는데 지금은 보부상들이 맹세를 할 때 홍길동의 이름을 걸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연산군 때의 홍길동, 명종 때의 임꺽정, 숙종 때의 장길산을 꼽았다. 홍길동은 조선 때 허균을 만나, 임꺽정은 일제강점기에 홍명희를 만나, 그리고 장길산은 오늘날 황석영을 만나 되살아났다. 이들의 작품화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균은 광해군 때의 폭정을 비판하며 역모를 꾸미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폭정의 시기였으며, 황석영이 장길산을 쓴 때도 군사정권이라는 폭정의 시대였다. 폭정은 평범한 백성을 도적 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도적을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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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26)] 그 많던 왕씨는 어디로 사라졌나?
조선 건국 직후 강화도 등에 강제이주… ‘왕씨 제거’ 기습작전으로 집단 수장돼


왕씨 완전 제거 작전

그 많던 왕(王)씨들은 어디로 갔을까? 당시의 통계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500년 가까이 이어진 고려였기에 조선 건국 당시 왕씨의 수는 대단했을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지 사흘 후인 1392년 7월 20일 태조 이성계는 대사헌 민계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고려왕조의 제사를 받들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왕씨를 강화도와 거제도에 옮겨 살도록 명을 내렸다.

이성계는 물론이고 신하들도 왕씨의 존재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는 명나라로부터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외적으로 불안정 요인이 컸던 것이다. 태조3년(1394년) 1월 21일 사헌부·사간원·형조 등 형률을 맡고 있는 3개 기관이 합동으로 왕씨를 제거해야 한다는 글을 올린 것도 그런 불안감의 발로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윤허하지 않았다. 자칫 민심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는 중대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신하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려 십여 차례에 걸쳐 끈질기게 왕씨 제거를 주장했다.


실상은 분명치 않지만 왕씨들이 연루된 이런저런 모반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이성계는 사헌부에 명을 내려 강화도 등에 거주하고 있는 왕씨들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신하들의 왕씨 제거 주청은 4월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결국 4월 14일 이성계는 도평의사사에 그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한다. 왕씨들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일부 신하는 섬에 유배하는 정도에서 왕씨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지만 소수였고, 절대다수는 왕씨의 완전제거를 역설했다. 결국 왕씨 제사를 담당해야 하는 공양왕의 동생인 왕우 삼부자를 제외한 모든 왕씨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왕우의 딸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했으니 이성계와 왕우는 사돈이어서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이보다 참혹한 순간이 또 있었을까?

이렇게 해서 왕씨의 씨를 말리는 작전이 개시되었다. 당시 왕씨들은 강화도와 거제도 외에 삼척에도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중추원 부사 정남진과 형조의랑 함부림은 삼척, 형조전서 윤방경과 대장군 오몽을은 강화도, 형조전서 손흥종과 첨절제사 심효생은 거제도로 파견되었다. 모두 개국에 큰 공을 세웠던 이성계의 최측근이었다.

작전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바로 다음날 윤방경 등은 왕씨를 모두 색출해 강화나루에 수장(水葬)시켰다. 거제도의 작전은 4월 20일에 이뤄졌다. 마찬가지로 수장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왕족이었고 그 밖의 왕씨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돼 “모두 목을 베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왕씨의 서얼들까지 잡히는 대로 참수했다.

이어 이성계는 고려 때 왕씨 성을 하사 받은 경우에는 본래의 성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왕족이 아닌 경우라도 왕씨 성은 모두 어머니쪽 성으로 바꾸도록 엄명을 내렸다. 왕씨들의 관직진출이 금지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행정력이 미비한 상태였으니 아무리 정부에서 완벽하게 왕씨를 제거했다고 해도 살아남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왕씨 색출작업은 태종 때도 계속된다. 태종13년(1413년) 태종은 의정부에 명을 내려 “사찰에 있는 중들 중에서 나이 15세 이상 40세 이하의 경우 출생지와 조상 계통을 샅샅이 조사해 보고하라”고 했다. 아무래도 사찰은 불교국가였던 고려에 동조하리라고 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면서 태종의 생각은 바뀐다. 당시 왕씨의 후손 한 명이 체포되었다. 신하들은 당연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나섰다. 이때 태종이 말한다.

“역사책을 살펴보니 역성혁명을 하고서도 전조(前朝)의 후손들을 완전히 멸망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 앞으로 나는 왕씨의 후예를 보전하겠다.”

그것은 아버지 이성계의 조치를 뒤집는 발언이었다. 신하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태종은 신하들을 나무란다.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자고 고려 왕실을 박멸하려는 모습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씨가 도(道)가 있으면 백 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이씨가 도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

현실주의자 태종다운 발언이었다. 이어 태종은 “예전에 태조가 왕씨를 제거한 것은 실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로 아버지와의 의견충돌을 무마했다. 그러나 20여년 가까이 왕씨들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심지어 성을 전(全)이나 옥(玉)씨로 바꾼 사람도 많았다.

태종의 이 같은 명이 있은 이후 왕씨에 대한 살육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관직에 진출하는 길은 사실상 막혀 있었다. 아마 단종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그나마 당시 최고위직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문과 급제자는 1453년 왕희걸(王希傑·?~1553년)이 최초였다. 그는 이름 그대로 대단히 보기 드문 인재였을 것이다. 문장?琉?글씨 등에 두루 정통한 그는 홍문관 부제학까지 올라갔다. 또 이황이나 노수신 같은 당대 유명한 유학자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아마도 왕희걸을 바라보는 당시 왕씨 집안 사람들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왕희걸이 역사적 사건과 관련을 맺는 것은 명종 때 을사사화다. 당시 그는 함경도 어사로 있었다. 이때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계림군을 역모로 얽어매려 했는데 계림군이 함경도 쪽으로 도망을 쳤다. 왕희걸의 조사 결과 중 보우(普雨)가 황룡사·석왕사 등지에 계림군을 숨겨주었다는 보고서를 올렸지만 보우의 뒤에는 문정왕후가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명종20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직후 보우는 승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 변협에게 피살되는데 보우의 승적을 박탈할 때 핵심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왕희걸의 장계였다.


흥미로운 것은 왕씨에 대한 이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실에 대한 제사는 줄곧 이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선조 때에 오면 그마저 사람이 별로 없어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었다. 선조22년(1589년) 7월 4일 조정에서는 50년 가까이 왕씨가 아닌 다른 성의 사람이 제사를 주관해 온 것은 문제라며 새롭게 왕씨 중에서 주사자(主祀者)를 선정하는 문제를 놓고 선조와 신하들이 격론을 벌인다. 그것은 왕훈이라는 사람의 호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논란의 핵심은 종손 계통에서 고를 것인지, 벼슬이 높았던 계통에서 고를 것인지였다. 종손의 경우 지방의 말직 정도를 지낸 것이 전부였다. 벼슬이 높았던 계통으로는 당연히 왕희걸의 후손이 거론됐다. 결국 왕씨 제사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왕훈이 숭의전 제사를 모시기로 결정했다. 왕훈은 종손 계통이었다. 숭의전은 왕건을 비롯한 고려 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500년 역사를 통틀어 왕씨를 중용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은 흥선대원군이다. 그의 뜻은 고종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고종8년 3월 6일 고종은 왕건의 현릉에 행차했다가 동부승지 왕정양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씨가 전조의 후손으로서 오랫동안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파묻혀 있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부터는 공부에 힘써 이름을 날리도록 하라.”

즉 조선이 망하기 일보 직전에야 제대로 벼슬길이 열린 것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hwlee@chosun.com)


남효온의 추강냉화

남효온의 추강냉화: 왕씨 제거 작전
남효온의 추강냉화: 왕씨 제거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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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는 연산군 제삿날인 걸 알까?
폐주 연산군 묘(1)


▲ 연산군 묘역 입구에서 종친들이 제사를 봉향하러 찾는 손님을 맞고 있다.

연산군의 제사를 보러 폐왕의 묘에 갔던 날은 4월임에도 쌀쌀했다. 다 물러간 추위가 다시 오는 듯 비까지 뿌리고 있어, 정리중인 겨울옷 중 오리털 파카를 다시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연산군(1476~1506) 500주기였던 지난 4월 2일, 청명제(淸明祭)를 지내던 그날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있어 어두웠고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추운 바람이 불었다.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묘(도봉구 방학동)에 올라서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연산군 봉향회, 거창 신씨 대종회에서 참석한 문중 사람들로 붐볐다. 왕릉에서 치르는 왕이나 왕비 기신제에 여러 차례 다녀봤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참석한 것은 처음 본다.

▲ 연산군 묘역은 연산군과 신씨 묘(위). 후궁 궁주 조씨묘(중간) 휘순공주 내외 쌍묘(아래) 등 5기가 있다. 이날 연산군 제사를 지낸 후 후궁 조씨, 휘순공주 내외 제사도 지냈다.

연산군과 부인 신씨 쌍묘가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에 후궁인 궁주(宮主) 조씨 묘가 하단에는 딸 휘순공주 내외의 묘가 있다. 연산군 묘는 폐왕임을 보여주듯 4200여 평 땅에 일반 묘와 다름없는 작은 규모로 조성돼 있다.

"'왕의 남자'는 오늘이 연산군 제삿날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제물을 차리느라 분주한 가운데 종친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한이 하도 깊어서 날씨도 이렇지"

낮 12시가 되자 청명제가 시작됐다. 한 때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제물을 올렸다는 폐군주의 제사는 이제 일반인 제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왕을 상징하는 황색의 봉등 대신 청사초롱을 든 제관이 들어서자 돌연 겨울을 연상케 하는 찬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 청사초롱 봉등을 앞세워 제관들이 청명제를 지내러 연산군 묘에 오르고 있다. 왕과 왕비는 황색 봉등을 쓴다.

제사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매서운 바람이 불었고 비교적 옷을 두툼하게 입었던 동행인들도 추위에 덜덜 떨기 시작했다. 계절을 무시하고 오리털 파카를 입은 용감무쌍한 패션감각으로 나선 나만 추위를 몰랐다. 아무리 날이 흐리다지만 4월인데 이렇게 추울 수가? 카메라를 든 손이 시려 번갈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녹여야 했다.

"한이 하도 깊어서 날씨도 그렇지."

누군가 혀를 찼다. 정말 연산군의 한이 깊어서 갑자기 추운 바람이 부는 것일까. 제물 중엔 백설기가 놓였는데 그 이유는 연산군의 한이 많아 하얀 떡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란다.

왕권과 신권의 줄다리기

흔히 연산군이라 하면 폭군으로 대변되고 포악한 성품으로 정사를 그르쳐 쫓겨난 왕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은 거의 정신병자 수준으로 등장한다. 아무리 창작이라지만 이런 영화가 나오는 배경은 연산군에 대한 선입견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폐비 윤씨를 향한 그리움 때문에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던가, 요부 장녹수, 백성을 몰아낸 금표, 황음무도한 행위 등이 부각되어 '연산군=폭군'이라는 등식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연산군 일기가 반정세력에 의해 편찬됐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494년 12월 29일 19세의 젊은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은 등극 이전부터 성종을 위해 불교식 제를 올리는 것에 거세게 반대하는 대신들과 충돌했다. 연산군이 공부를 싫어했다 전하나 성종은 폐비 윤씨 사건을 사후 1백년 간 함구하라는 어명을 내려 다음 왕위를 물려줄 세자를 보호하려 했고 이는 세자로서 총명한 자질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증명이 된다.

연산군은 명필로 이름을 날렸고 조선에 왔던 중국사신들은 왕의 글씨를 얻어 가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왕은 함부로 글씨를 내리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얻지 못했다. 공부에 등한시했다는 연산군이 뛰어난 명필로 중국사신에게까지 인정받았다면 그 설의 진위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 지난 4월 1일 연산군 묘에서 봉향된 폐주 연산군 제사에서 종친들이 절하고 있다.

연산군에게 힘이 되어줄 외가가 궤멸했기에 젊은 왕을 지원해줄 정치세력이 없었다. 할머니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를 죽인 장본인이었고 당시 조정을 장악한 기득권의 대표적 집안의 인물이었다. 또한 성종대부터 등용된 사림은 성리학을 내세워 왕권에 정면도전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 건국 공신인 신진사대부들의 권력이 성종대에 지나치게 증대하자 이를 견제하려 등용한 지방 토호세력이었던 사림은 대부분 사간원과 사헌부 등 언론기관인 삼사에 배치됐다. 중앙 핵심권력은 여전히 훈구파가 독점하고 있었고 정계 진출을 노리는 신진사림과 훈구파의 한 판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으로 일어난 무오사화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기인한다. 성종실록 편찬책임자 이극돈은 실록 편찬 도중,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넣은 '조의제문'을 발견하고 연산군에게 고한다.

'조의제문'이란 김종직이 세조 3년(1457년) 밀양으로 가는 도중 꿈에 나타난 신인(神人)이 하는 말을 듣고 서초패왕 항우를 세조에, 항우에게 죽은 의제(義帝)를 노산군(단종)에 비유해 세조찬위를 비난한 내용이었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이 글을 사초에 넣은 것은 예종, 성종, 연산군으로 이어 내려온 왕권의 정통성을 전면부인하고 나아가 왕위도전에 해당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연산군으로서는 이 사건을 절대로 좌시할 수 없었다. 정통왕권체제를 부인하고 나서는 신진 사림의 도전으로 간주하고 정계에 겨우 발을 디뎠던 사림을 제거한다.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종묘사직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었기에 연산군이 아니라 어느 왕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일이었다.

▲ 연산군 제사를 지내기 전 제물이 한지에 싸여 놓였다.

훈구파인 이극돈의 고변으로 연산군 4년(1498) 일어난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한 김종직의 추존세력으로 이뤄진 사림은 거의 초토화됐다. 이 사초 건으로 연산군은 역사의 기록인 사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집권 후반기에 3년마다 편찬하는 실록을 5년으로 바꿨고 사관이 개인적으로 사초를 작성해 사가에 보관하는 일을 금했다. 사초에 사사건건 간섭했던 연산군은 이로 인해 역사를 말살하려 했다는 비난과 연산군 시대가 역사암흑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잔치를 벌인 일과 흥청과 운평 등 기생과 여자들의 기록들로 도배질돼 있다. 왕은 절대 볼 수 없고 간섭할 수도 없는 사초를 가져다 감시했던 연산군이 이를 적어 놓는 것을 묵인했을까? 역사에 평가되는 일을 제일 두려워했던 연산군이었다. 그런 그가 사관들이 이런 기록을 남겨 놓은 것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 패자의 기록인 <연산군일기>의 진위가 어디까지인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연산군은 왕의 향락으로 국고가 비게 되자 공신에게 지급한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해 이를 보충하려 한다. 공신전이란 건국 초기 개국공신들에게 지급한 영구적으로 후손에게 상속되는 전답이었다.

사실 연산군 시대는 태평성대라고 평가받는 성종대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됐고 국방도 탄탄한 풍요로운 시대였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일은 연산군이 백성에게 가혹한 세금을 물려 보충한 것이 아니라 기득권층인 훈구파의 재산을 몰수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기득권의 반발이 일어나자 이를 이용해 임사홍이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공모해 일으킨 사건이 갑자사화다. 폐비 윤씨의 일을 들춰내어 피바람을 몰고온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궁중 세력,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힘의 대결이었다.

바람과 시와 여자

연산군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와 여인과 풍류다. 조선시대 역대 왕 중에서 연산군보다 많은 시를 쓰고 남긴 왕은 없다. 현재 전하는 130여 편도 왕조실록에 남은 것이고 연산군이 폐위되자 그의 시집와 문집은 전부 불태워졌다.

시를 중요시한 연산군은 과거제도까지 성리학의 경서 중심인 논술에서 시문(詩文)으로 바꿨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사회는 시문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연산군의 이런 조치는 사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에도 당송대에 시문으로 과거 시험을 봤고 인재를 뽑았었다. 반드시 경학만을 고집해서 과거를 봐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 경학 아닌 시문으로 시험을 봐서 인재를 등용해도 다를 것 없다는 그의 이런 파격적 조치는 연산군이 폐위된 후 갑자년 과거 합격자가 모두 취소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연산군이 즐겼던 연회는 사실 성종도 허구한 날 베풀었던 잔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성종대의 태평성대는 잔치와 향락이 유행하는 풍조가 민간에까지 만연됐고 연산군 초기는 오히려 이런 세태를 경계했다. 연산군이 낭비한 국고는 문정왕후가 없앤 국고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왕의 향락을 구실로 반정을 일으킨 명분으로는 빈약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를 비난했던 사림이 주도권을 잡았던 조선 후기에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백성이 먹고살기 어려워 원성이 하늘을 찔렀고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났던 일을 비교해 본다면 반정이란 것도 성리학의 도덕성을 구실로 일으킨 정권교체 쿠데타였을 뿐이다.

▲ 왕릉은 무인석 한 쌍과 문인석 한 쌍이 상설되지만 폐군주의 무덤은 문인석 두 쌍이 왕위를 잃은 연산군을 보필하고 서 있었다.

연산군 12년(1506) 7월 20일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죽는다. 연산군의 도덕성에 후세까지 가장 비난을 받고 있는 일이 큰어머니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겁탈했다는 일이다. 박씨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나이가 연상인 부인을 맞아들인 결혼풍조로 보아 월산대군보다 위일 것으로 추정된다.

1454년생인 월산대군(1454~1489)이 1476년생인 연산군보다 22년 위이고 박씨의 나이는 연산군보다 23년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이 폐위되던 해 죽어 왕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는 박씨 나이는 53세 이상일 것이다. 53세 전후라면 여자로서 폐경기에 달하고 상식적으로도 그 나이에 임신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연산군이 어릴 때부터 손수 길러 어머니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이 때문에 실록에도 십여 차례 연산군이 쌀과 노비 등을 박씨에게 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조실록에 이 사건은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 부인(昇平府夫人)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연산 12년 7월 20일)'는 단 한 줄 기록밖에 없다. 여기서 사실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고 '사람들이' 그랬다는 '카더라'식으로 슬쩍 비켜간 글 행간을 주목해야 한다. 반정 이유에서도 박씨가 양모(養母)라는 이유로 금내(禁內)에 머무르게 했다며 아리송한 소문을 부추기는 말뿐이다.

▲ 연산군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은행나무는 수령 830년 거목이다. 저 나무는 폐왕이 이곳에 묻히는 장면을 목격했으리라.

박씨가 죽고 두 달이 못되어 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폐위됐다. 그리고 역사도 그들의 손에 편찬됐으니 터무니없는 소설이나 소문까지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누가 증명할 것인가.

오마이뉴스 한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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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에게 폭군이란 딱지는 누가 붙였을까?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22]실록에 그려진 연산군

▲ 영화 <왕의남자>에서 연산군역을 맡은 정진영.
ⓒ 이글픽처스

왕은 왕이로되 왕이 아닌 왕이 바로 연산군이다. 이러한 연산군이 영화 <왕의 남자>가 뜨자 새로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소설과 연극, 영화,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 등장한 연산은 폭군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번에 뜬 연산군은 마마 콤플렉스에 힘들어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연산군은 폭군이었을까? 그의 재위기간 12년은 실록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연산군일기>로 남아있다. 내용 또한 패악으로 그득하다.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로 학습하고 그것을 자료로 만들어진 소설을 읽고 영화 연극 드라마를 접한 우리들은 그를 폭군으로 기억한다. 이는 <연산군일기>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한데 따른 폐해라 할 수 있다.

조선실록은 그 기록성에 있어서 세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성에 있어서는 미흡한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적자 후손 또는 방계혈통으로 이어지는 왕통의 연결고리에서 냉정한 객관성을 유지하는데 한계점이 있었다.

▲ 연산군이 19세의 나이에 왕으로 등극했던 창덕궁 인정전
ⓒ 이정근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처럼 반정 시 전위자의 기록은 반정을 기정사실화해 반정의 시각으로 기록해야 했다. 즉 성공한 쿠데타이기에 성공자의 눈높이에 맞춘 맞춤형 기록이라는 뜻이다. 또한 실록 자체의 당위성을 검증할 기회를 원천봉쇄했고 후대에 수정보완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 후대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흥미 본위의 긴장감을 극대화 하고 극적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그를 폭군으로 과장하여 그렸다. 실록 어디에도 연산군을 폭군이라 지칭한 말은 없다. 작가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든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일 뿐이다.

1910년대 이후에 발표된 소설에 등장하기 시작한 연산은 폭군 일색이다. 작품성을 위하여 그려진 폭군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셈이다. 하지만 이 시기가 일본 제국주의가 발호하던 시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이라는 국가를 이조(李朝)라 폄하하고 사색당쟁에 패망할 수밖에 없는 국가로 매도하며 자신들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 하려 했다. 자의든 타의든 황국사관에 일조한 셈이다.

▲ 연산군이 반정군에 폐위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될 때 건넜을 갑곶나루터. 연산군은 살아서 이 바다를 건넜고 백골이 되어 이 바다를 건넜다. 현재는 강화대교가 놓여있다.
ⓒ 이정근

우리는 반복되는 학습에 익숙해진 셈이다. 무의식중에 반복되는 교육은 본의 아닌 결론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공산당은 이마에 뿔이 나고 도깨비처럼 생겼을 것이라는 교육을 받고 그럴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만나보니 뿔도 나지 않고 도깨비처럼 생기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반복학습의 결과는 이렇게 황당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다면 <연산군일기>는 누가 썼을까? 그를 권력의 자리에서 밀어낸 반정공신들의 입김이 서린 자들이 썼다. 때문에 그를 폭악무도한 폭군으로 깎아 내리고 인륜을 파괴한 패륜아로 낙인찍어야 자신들의 쿠데타 명분을 얻을 수 있기에 과장하여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대 조선실록 중에서 <연산군일기>만큼 역사적 사실을 작의적으로 기록한 실록도 없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실록의 생명은 객관성이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 사료를 바탕으로 엄선된 인물들이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하지만 <연산군일기>는 그가 반정군에 의하여 권좌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후에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승자의 기록이다. 연산은 패자다. 패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 <연산군일기> 총서 전문
ⓒ 이정근

조선시대 역사적 사료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역대 왕 실록 중 실록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일기로 남아있는 것이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다. 그 <연산군일기>를 한마디로 압축하는 <연산군일기> 첫 장 총서에는 연산군의 실정과 패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사관들이 사초에 근거를 두고 기술하였겠지만 의도된 작의성이 엿보인다. 여기에 <연산군일기> 총서를 그대로 옮겨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연산군, 휘(諱) 융(㦕)은 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 의 맏아들이며,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尹氏),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 의 딸이 성화(成化) 병신년 11월 7일(정미)에 낳았다. 계묘년 2월 6일(기사)에 세자(世子)로 책봉(冊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명회(韓明澮) 등을 북경(北京)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5월 6일(정유)에 황제가 태감(太監) 정동(鄭同) 등을 보내어 칙봉(勅封)을 내렸다.

소시(少時)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로서 공부하기를 권계(勸戒)하는 이가 있으매,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즉위하여서는, 궁안에서의 행실이 흔히 좋지 못했으나, 외정(外庭)에서는 오히려 몰랐다.

만년(晩年)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거의 다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교동(喬桐) 에 옮기고 연산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 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


▲ 상서원 현판. 승정원과 함께 왕명을 출납하던 곳이다. 연산은 승정원에 어제시를 내리고 정원들로 하여금 답시를 올리도록 했다.
ⓒ 이정근

庸質臨臣十載回(용렬한 자질로 위에 있은 지 10년이 되었건만)
未敷寬政愧難裁(너그러운 정사 못하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네)
朝無勉弼思宗社(조정에 보필하고 종사 생각하는 자 없으니)
都自沖吾乏德恢(나이 어린 이 몸이 덕이 없나 보구료)


연산10년 3월에 지은 연산군의 시다. 연산군은 이러한 시를 지으면 혼자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승정원에 내려 보내 정원들로 하여금 답시를 지어 올리게 했다. 자신의 실책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신하들과 교감하고 시적 토론을 하자는 뜻이 담겨있다.

妄節投身熾火中(지나친 절조로 몸을 불 속에 던졌으니)
徒知高義不知通(높은 절의만 알고 변통 모르네)
虛名處理無相亂(헛된 명예 때문에 흐리지 말라)
正似飛蛾赴燭紅(불보고 날아드는 나비 같으니)
深院無人麗景融(심원에 사람 없고 경치만 아름다워)
桃凝香露醉春風(이슬 맺힌 복사꽃 봄바람에 취하였네)
須緣濃雨添嬌蘂(듬뿍 맞은 비로 꽃술이 더 예뻐라)
手折芳枝拭艶紅(꽃다운 가지 꺾어 요염한 꽃 닦아주리)


평제를 독살한 다음에 유자영을 황태자로 세워놓고 자신이 가황제노릇을 하다 찬탈하여 진황제가 되었던 한나라의 효평황후가 반정군에 쫓기어 불속에 몸을 던져 죽었던 고사를 인용하여 연산군이 권좌에서 쫓겨나기 1년 전, 그러니까 연산 11년 11월 5일에 지은 시다. 역사를 모르면 지을 수 없는 시다.

▲ 도봉산 자락에 초라하게 누워있는 연산군.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군부인 신씨다.
ⓒ 이정근

연산군은 태어날 때부터 폭군은 아니었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추앙받는 아버지 성종의 원자로 태어난 연산은 성종이 승하하자 뒤이어 조선 10대 왕에 즉위했다. 즉위 초기에는 정치에 서툴기도 했지만 할머니 인수대비의 말을 잘 따랐다.

심성도 여리고 감성도 풍부했다. 시(詩)도 130여 편을 썼다. 학문의 깊이가 없으면 쓰지 못하는 것이 칠언절구다. 훗날 반정군에 의하여 대부분 불태워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연산군일기에 120여 편의 시가 남아있어 그의 시심(詩心)을 오늘에 전한다.

서모 자순대비(장현왕후)를 친모로 생각하고 깍듯이 모셨다. 훗날 중종으로 즉위한 이복동생 진성대군도 사랑했다. 그가 진성대군을 견제했더라면 진성대군이 중종이라는 용상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살육이 춤추는 광기의 시대에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2006-03-07 16:3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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