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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와 오늘 - 김인호 교수

출처: 우리 역사와 오늘

글: 김인호교수
펌: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227542

 


 

우리 역사와 오늘 | 김인호 - 교보문고

우리 역사와 오늘 | 역사에세이 제2권. 저자가 경성대학교 인터넷 교양게시판 디지탈 경성에 연재한 '역사와 오늘'이라는 칼럼을 바탕으로 하였다. 과거의 역사를 오늘날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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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수대비는 조선의 릴리스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하면 성종 임금의 어머니로서, 권력을 위해선 피도 눈물도 없었던 모사꾼 또는 청상과부가 된 그 광신적 히스테리에 못 이겨 며느리(연산군의 비 폐비 윤씨)마저 죽게 한 잔인한 여성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인수대비 한씨를 중국의 폭녀 여후(한고조 유방의 비)나 측천무후(당 고종의 비) 혹은 서태후(청 함풍제의 비) 등에 비교하기도 하고 그 패도와 악독한 성품에 대해 조롱한다.

그런데 그러한 한씨의 일화 속에는 현모양처를 강조하는 조선왕조의 유교적 여성관에서 배양된 또 하나의 우리나라 여성에 대한 왜곡된 역사의식이 담겨 있다. 유교적 '현모양처론'에서 본다면 당연히 한석봉의 어머니나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현모의 자애와 양처의 덕성을 두루 겸한 조선 왕조의 표준적 여인상일 것이다. 어쩌면 현모양처(賢母良妻)란 여성의 삶이 철저히 남자의 두 어깨에 달렸을 때 속편하고 싶은 남성들이 찾고자 한 이상적 여성상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그런 현모양처형 인성을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지아비(의경세자)의 죽음에서 비롯된 수많은 좌절과 비애를 전화위복(轉禍爲福)으로 바꾸면서 끝내 자식을 왕위에 올리고 태평 치세를 열게 한 정열적인 왕모(王母)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리고 언해문 간행은 물론이고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중국식 여성 예절 체계를 '조선화(朝鮮化)'한 <<내훈(內訓)>>을 통하여 조선 500년의 여성상의 밑그림을 그려낸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렇다고 인수대비 자신이 <<내훈>>이 바라는 여성형이었는지는 의문스럽다..

물론 자애롭고 덕성 있는 조선의 현모양처상을 고의로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고도 과연 이브는 현모양처였을까? 기원전 15세기 경에 조로아스터교의 천지창조 신화는 묘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즉 아담의 첫 번째 아내는 이름이 '릴리스'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남성 못지 않은 정열과 패기를 가진 용감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사냥과 전쟁을 좋아하고, 자식을 낳기 거절했으며, 그 때문에 남성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가부장적 헤브라이 신화에서는 순종하는 이브 모습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현모양처의 출발부터가 묘한 음모 같은 것이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전근대 세계의 여성들이 역사의 표면에 뛰쳐나오는 일은 무척 힘들고 고달픈 것이었다. 그래도 조선의 인수대비는 역사의 격랑에 몸을 맡긴 몇 안 되는 한국 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씨가 간 길이 역사의 발전 방향에 어느 정도 합치된다는 면에서 조선 최고의 여성으로 아낌없이 추천하는 것이다.

 


▶ 권력의 핵심을 관통했던 인수대비의 정치력

인수대비는 권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권력 추구의 열정은 그녀를 불과 20대의 나이에 조선 정국의 핵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그 발단이 바로 '석실능묘 사건'이었다. 예종 1년(1467년) 9월 어느 날 전직 세자빈 수빈 한씨가 임금 앞으로 난대 없이 주청서를 올렸다. 여기서 수빈 한씨는 예종에게 선대왕 세조의 봉분을 석실(石室: 돌방무덤)로 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던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돌리면...본래 세조는 귀족권을 견제하고, 백성의 살림을 증진하여 이것을 치국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조는 백성에게 많은 부담을 주는 능묘제도를 개혁하려고 했고, '석실 봉분을 만들지 말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세조의 개인적 염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조선왕조가 지향해야 할 위민을 통한 치국이념을 확고히 하려고 후왕들에게 유언한 것이다. 백성에 대한 애정 그것을 조선왕조의 영속을 가져올 요체로 생각했던 세조는 그렇게 유언했고, 그러한 선왕의 유언은 당시로선 곧 법이었고 거부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수빈은 '효'를 빙자하면서 신숙주, 한명회, 박원형 등과 더불어 석실 능묘 축조를 예종에게 강권한 것이었다. 그는 훈구세력의 그늘을 받으며 정계일선에서 왕을 핍박하는 정치적 배반을 시작한 것이었다.

권력의 핵심에서 배제되었던 수빈 한씨가 시동생 예종에게 감히 능묘 형식을 문제 삼았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수빈은 석실 봉분이 제왕의 능묘로서 품위가 있다는 이유를들었다. 하지만 그 것은 세조의 유업을 이으려는 예종 세력과 세조의 왕권주의에 반대한 훈구 세력이 권력의 향배를 놓고 치열하게 대치하는 정국에서 남편의 죽음으로 권력의 일선에서 배제된 수빈 한씨가 훈구 세력을 업고 권력 일선에 복귀하려는 하나의 거사(擧事)였던 것이다. 그러나 훈구세력을 등에 업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수대비가 연산군 같은 패권주의적 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일보후퇴일 뿐이었다.

훈구를 업고 왕권을 빼앗고, 다시 왕권을 통해 훈구를 제거한 희대의 정치가 과연 인수대비는 누구였을까?



▶ 훈구를 제거하라

본래 수빈 한씨는 예종의 형수로서 사가(私家)에 머무는 종실의 한 여성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뒤에는 강대한 훈구 귀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동안 예종은 왕권주의를 유지 계승하고자 젊고 새로운 인물을 조정에 대거 등용하여 훈구를 저지하는데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인륜과 분수를 강조하던 정치 풍토에서 장자(長子)의 부인이자 왕의 형수라는 위치는 훈구가 예종을 견제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수빈과 훈구가 손을 잡는 상황은 예종의 입장을 무척 난처하게 만들었고 두 사람간의 갈등은 증폭되고 있었다.

그러한 갈등은 김초 사건이나 허계지 아내 사건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먼저 김초 사건은 수빈의 아우이자 안동부사였던 한치의가 지체 낮은 가문 출신이었던 경상도 도사 김초에게서 강제로 첩을 빼앗고 능욕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허계지 사건은 수빈 거처에 빈번하게 드나들던 허계지의 아내가 수빈의 후원을 믿고 자기 범죄 사실을 인멸하고 형벌을 적게 받고자 뇌물을 쓴 사건이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수빈 한씨의 형제들은 예종에게서 심하게 견제를 받게 되었다. 물론 예종은 수빈 한씨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다른 종실의 인사청탁을 불허하면서도, 수빈 자손의 가자(加資, 과거 없이 관직을 제수하거나 매관하는 것)를 인정하는 등 유화책을 썼다.

그러나 결국 예종 세력은 강력한 훈구 세력의 지원을 받는 수빈 한씨를 당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이라는 여운을 남기면서 곧바로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제안대군)이 있었음에도 수빈 소생인 자을산군(성종)에게 왕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불과 열 두 살 남짓의 성종에게 왕위를 넘긴 것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권력욕이 개입된 것이지만, 결국 죽음을 앞둔 예종이 자기 아들이 닥칠 운명과 단종의 운명을 함께 머리에 떠올려 본 것은 아닌지.


▶ 인수대비는 시세 장악의 달인

수빈 한씨는 세조 집권 초반까지 시아버지 세조에게서 많은 총애를 입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는 수빈의 소생인 월산군, 자을산군에게 많은 토지와 농기구, 콩 등을 자주 하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처럼 총애를 입던 수빈은 결국 세조의 왕권주의와 다른 길을 가고 말았다. 그것은 남편 의경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수빈 세력은 와해될 위기에 처했고, 권력에서의 배제는 수빈은 자신의 운명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가부장적 유교적 가치관에서 볼 때 왕권에서 배제된 적손 자제가 천수를 다할 가능성은 적었던 것이다.

결국 수빈의 선택은 왕권주의에 저항한 훈구 세력 즉 한명회와 신숙주 등과 결탁하는 것. 이는 세조 말년 훈구와 신진 청년관료 간의 권력투쟁이 서릿발처럼 작열하는 속에서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과 한명회의 딸(공혜왕후)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최고조에 달했고, 그 결과 수빈은 한명회의 정치력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젊은 예종의 충직한 신료를 하나 둘 제거(남이의 옥사)하면서 세조의 유업을 좌절시키고 결국은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 결국 중전도 해보지 못한 그녀는 정치력만으로 대비로 전격 승차하여 왕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단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인수대비는 기왕의 한명회, 신숙주 세력을 배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꾀한다. 그리고 '윤비폐출사건'과 같이 기왕의 훈구 세력이 수세에 몰릴 때는 다시 훈구의 손을 들어 신흥 세력을 퇴출시켰고, 훈구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때는 다시 막강한 왕실의 권위로 훈구의 전횡을 저지했다. 한명회와 결탁이나 그 제거 과정은 그러한 시세와 정국의 변화에 달통한 인수대비의 탁월한 정치력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인수대비가 추구한 길은 절대주의였다. 그것은 인수대비의 엄격한 교육 아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일단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공신전을 폐하는 등 반 귀족정책도 동시에 수행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엽색 스캔들로 귀족의 반격을 받아 그러한 시도는 훗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인수대비의 처세는 패도(覇道)

인수대비는 며느리 윤씨를 죽이는 등 이른바 인륜 배반의 처세에 달통한 여인이었다. 그렇다면 유난히 인수대비에게만 인륜과 인정의 부족을 강조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과연 역사 속에서 인정이란 존재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역사 속에서 감정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개입된다.

물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나 대동법 실시와 같이 왕실 측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실시한 진보적인 민본정책도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반된 민심을 바로 하고, 왕조의 안정을 지속하기 위한 고도의 포석이었다. 그래서 한글이 나오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이 "한글 용비어천가"였고, "삼강행실도"였다. 또한 대동법도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불안한 재정기반을 일원화하여 국고를 늘여주었고, 삼정의 문란은 대동법 이후 더욱 격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인수대비의 처세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선 왕실, 취약한 왕실을 훈구 세력과 동맹을 통하여 구하고, 왕조의 안정적인 지속을 보장하려는 왕실 측의 처세였다. 개인적인 원한에 윤비를 폐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연산군 시대를 만들었고, 결국 절대화한 왕권의 역공으로 죽음에 이른 비범한 정치적 인물이었다.

꼭 진취적인 여성은 정치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는가를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 오랜 세월 온실의 화초처럼 보호받고 대상화된 성으로 버려진 이면에는 그들의 정치적 능력이 제거된 원인도 자리하고 있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이 배워야 할 진정한 조선의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 교수님의 생각이고... 

이 생각 나는 반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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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 이야기♤ / 블로그 / 냐하하하~ / 2006.08.14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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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와 치도가 근본을 이루었던 500년 조선사회에서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대비의 위엄을 누렸던 여인, 소혜왕후. 16살의 어린 나이에 당시 수양대군 이었던 세조의 맏며느리로 들어가, 시아버지 세조와 그 무리들이 지배했던 격동의 세월 속에서 한씨의 처세술은 과연 어떠하였는가.

조선조 가장 학식이 높고 유려했던 정치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소혜왕후의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정치감각●

소혜왕후가 20대에 겪었던 풍파는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뒤, 그의 맏며느리였던 한씨는 당당히 세자빈의 자리에 올라 "폭빈" 이라는 별명까지 받으며 위세를 누렸다.

그러나 결국 지아비 의경세자의 요절과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눈물을 쏟으며 출궁할 수 밖에 없었던 한씨는 '수빈' 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정계의 뒷편으로 쓸쓸히 사라지기에 이른다. 하지만 수빈은 한낱 '세자빈을 잠시 누렸던' 그저 그런 조선의 아낙으로 사라질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미약해진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정계의 수장격이었던 한명회와 신숙주와의 결탁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과의 결탁은 곧 결국 세조조의 격정의 세월을 주도했던 훈구파와의 결탁을 의미했다. 결국 수빈은 둘째 아들 자산군과 한명회의 셋째딸을 혼인시킴으로써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왕권을 짓누르고 정계의 표면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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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저에 나가있는 동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놓은 수빈의 위세는 결국 세조의 승하와 함께 분출된다. 수빈은 이른바 예종조를 뜨겁게 달궜던 "석실 능묘 사건" 으로 권력의 핵심을 간파하며 왕권을 짓누르는 파란을 스스로 연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건은 이러하다.

1467년 조정에 한 여인의 주청서가 날아 들어왔다.

"세조 대왕의 봉분이 초라하고 약하기가 이를데 없으니, 이 어찌 선왕께 황송스러운 일이 아니리까. 마땅히 세조 대왕의 봉분을 석실로 해야 할것입니다." 라는 간략한 주청이었다. 그러나 이 주청서의 주인공이 바로 수빈 한씨 였다는 점에서 조정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세조가 살아 있을 당시 그는 백성들의 생활을 위해서 능묘제도를 개혁하면서 "석실 봉분은 없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며 "내가 죽어도 석실봉분은 없어야 할 것이며, 후대에도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다." 라고 명했었는데 그것을 며느리인 수빈이 뒤집어 엎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예종은 세조의 유지임을 전면에 내세우며 수빈의 청을 완곡하게 물리친다. 그러나 물러설 수빈은 아니었다. 수빈은 한명회, 신숙주 등을 앞세워 다시 한번 예종에게 청을 올리고 무례에 가까울만큼 첨예한 대립을 보여줬다.

당시 세조의 잠저에 나가있던 수빈이 이처럼 무례할 정도로 예종을 몰아붙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조 말년, 세조는 혈육과도 같던 한명회, 신숙주 등을 비롯한 훈구세력들을 전적으로 견제하며, 예종을 위한 포석을 놓기 시작했다. 결국 세조의 이러한 변심으로 이들의 위세는 꺾일 만큼 꺾였고 귀성군 준, 남이, 유자광 등의 신진 세력이 조정의 핵으로 급부상했다.

이 후 남이가 역모사건으로 죽은 뒤에도 불구하고 유자광 등이 훈구세력과 대응할 만큼의 세력권을 키우기 시작하자 훈구파와 결탁했던 수빈으로써는 이들을 저지할 강경책이 필요했다. 그녀는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예종의 형수라는 위치가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지 잘 알고 있었고 '석실 능묘 사건' 을 고의로 연출해내며 훈구파를 전면에 끌어 올리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수빈과 예종과의 갈등은 크게 증폭되었으나, 유약했던 예종이 수빈과 그 뒤를 받치고 있던 거대 정치 세력인 훈구파를 당해 낼리 만무했다. 마침내, 세조의 봉분은 석실로 둘려싸이게 되었고,수빈은 다시 한번 권력의 핵으로 부상하며 예종 말기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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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정희왕후와의 결탁으로 대비가 되다●

이렇듯 수빈과 갈등을 겪던 예종은 결국 20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국가로서는 1년 사이에 세조와 예종의 두 번의 국상을 겪은 것이지만, 수빈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였다. 예종의 아들은 겨우 4살 이었고, 왕권은 안정되지 않았기에 그 당시 대비였던 정희왕후는 강력한 정치권력을 담당했다.

정희왕후는 한명회,신숙주 등 뛰어난 원훈들만이 조정을 안정시킬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세조 말기 한명회 등이 역모 사건으로 핍박 받을 때에도 항상 그들의 편이었던 것도 바로 정희왕후였다. 정희왕후는 수빈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왕위에 올리며 수빈과 한명회로 대표되는 훈구파를 정계의 핵심으로 다시 부각시킨다.

당시 13살이었던 자산군이 왕위에 책봉되자 한명회 등은 정희왕후에게 수렴청정을 권유했고 정희왕후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가 바로 조선조 최초의 '수렴청정' 이었다.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수빈 역시 '대비' 의 지위에 오른다. 법도상으로는 예종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대비의 책봉을 받을 수 없었으나 그 아무도 수빈의 대비책봉에 대해 문제 삼지 못했다. 대쪽같은 성미의 수빈을 건드렸다가는 무슨 보복을 받을 지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정희왕후는 대왕대비로, 예종비는 왕대비로, 수빈은 대비로 책봉이 되면서 내전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권력은 힘●



대비의 자리에 오른 수빈은 '인수대비' 의 칭호를 받으며 정계의 핵으로 당당하게 부상한다. 인수대비는 권력의 핵으로 부상 하자마자, 남은 신진세력의 싹수를 잘라 버리는데 총력을 다한다. 세조 생전에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던 신진세력의 대표격 귀성군 준이 역모사건에 휘말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귀양길을 떠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인수대비의 힘이었다.

정희왕후는 귀성군 준이 종친이고 세조의 총신이었다는 명분하에 그를 제거하지 않으려 했으나 인수대비는 이런 정희왕후에게 정면으로 맞서며 귀성군 준의 처벌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물론 그 뒷배경에는 훈구파가 버티고 있었고, 이는 자신을 이만큼으로 성장시킨 훈구파에 대한 인수대비의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했다.

결국, 정희왕후도 인수대비의 강력한 권고를 뿌리치지 못했고, 30대에 영의정의 위세를 누렸던 귀성군의 인생도 그것으로 끝나게 된다. 귀성군의 몰락은 곧 신진세력의 몰락이었다. 다시 조정은 훈구파의 세상이 됐고 이들은 정희왕후와 인수대비의 비호 아래 그 영화가 극에 다달았다.

그러나 이들이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 때 인수대비는 성종의 '친정' 에 대비할 또 다른 대응책이 필요하다 느꼈다. 인수대비 자신이 권력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파악했던 만큼 그녀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훈구들을 서서히 견제하기 시작했고 아들 '성종' 을 위한 새로운 신진들을 끌어올리는 데에 주력한다.

이것은 세조 말년, 세조가 예종을 위해 훈구를 견제했던 것과도 같은 이유였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친정을 위해서는 왕권을 넘어서는 권신(權臣)들을 강력하게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끝내, 이러한 인수대비의 정책은 제대로 맞아떨어져 성종조에 사림파의 등장을 끌어내며 성공적으로 성종 자신이 훈구를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데 밑거름이 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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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의 기를 꺾어 놓다●

성종 시절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거의 50 : 50의 비율로 서로의 견제 기능을 가장 잘 수행했던 때였다. 그러나 성종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위해서는 훈구파를 억제하고 사림파를 강화해야 한다고 믿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훈구파를 정계의 뒷편으로 밀어내는데 힘을 쏟는다.

그러나 이러한 성종의 정책은 종래에 어머니 인수대비와 대립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사림파의 위세가 등등해지던 그 순간 인수대비는 '윤비 폐출' 을 위해 뒷편으로 밀려나 있던 훈구파를 다시 끌어올리는 수완을 발휘한다.

윤비 폐출 사건은 인수대비의 진두 지휘 아래 직접 진행되었던 사건이었기에 그녀는 한명회, 정창손 등을 다시 끌어올려 폐출을 뒷받침 하도록 지도한다. 윤비폐출을 기화로 인수대비와 훈구의 연대적 결속감이 강해지자 높은 위세를 누렸던 사림파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치욕을 겪는다.

이렇듯 꺾인 사림파의 위세는 "불교 도첩제" 사건으로 다시 한번 수세에 몰리게 된다.

성종 23년, 성리학만을 신봉하는 사림들은 도첩 없는 승려들을 모두 환속시키고 엄중하게 단속할 것을 청하였다. 성종 역시 유교 근본주의에 철저했던 임금이었고 불교를 그저 미신 중 하나로 치부해 버렸기 때문에 이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불교를 믿으며 "불교 열풍" 을 주도했던 인수대비에게 이 정책은 사림파의 정면 도전으로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고 참다 못한 그녀는 긴 장문의 전교를 내려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불교는 세조대왕 때부터 믿어져 왔으며, 정희왕후 께서 믿으셨고, 나 또한 믿고 있는데 정책적으로 불교를 억제하니 이러한 불효가 어디 있는가!" 라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유교를 신봉했던 국가 '조선' 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인수대비' 라는 점에서 성종과 사림파는 한 발 물러서 도첩제를 완화하게 된다.


●왕실의 안정을 추구했던 여걸●

세조, 예종, 성종의 3대의 권력의 핵심을 주도했던 인수대비는 결국 왕권의 강화와 왕실의 안정에 철저했던 정치가 였다. 인수대비는 대부분 훈구파를 전면에 내세우며 힘으로 정치를 다스렸던 여걸이었으나, 절대로 그들이 왕권과 왕실의 권위를 넘어서는 모습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수대비의 정치권력은 철저히 왕실 중심이었고, 아들 성종 중심이었다.

인수대비의 처세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선 왕실, 취약한 왕실을 훈구 세력과 동맹을 통하여 구하고 왕조의 안정적인 지속을 보장하려는 왕실 측의 처세였다. 개인적인 원한에 윤비를 폐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연산군 시대를 만들었고 결국 절대화한 왕권의 역공으로 죽음에 이르른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이 배워야 할 진정한 조선의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


출   처: ♤끄적끄적 이야기♤ / 블로그 / 냐하하하~ / 2006.08.14 [원문보기]

현재는 승복이님이 블로그를 폐쇄한 상태라서 원문을 볼 수가 없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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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일·역사평론가 )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남존여비 강요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즉위한 1455년, 만 열여덟 살의 며느리 한씨도 비로소 세자빈이 됐다. 결혼 당시 남편은 대군 아들에 불과했으나 그녀는 이때 이미 시아버지가 임금이 되기 위한 포석으로 자신을 며느리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수대비(1437~1504)의 아버지 한확(1403~1456)은 조선 제일의 중국통이었다. 태종 17년(1417) 명나라에 공녀로 간 그의 누나가 황제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덕분이었다. 성조는 한확에게도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란 벼슬을 내리고,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했을 때는 조선인인 그를 사신으로 임명해 고명(誥命)을 줄 정도로 총애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한확이 수양 편에 선 것은 딸 때문이었다. 정난 1등 공신에 책봉된 한확은 수양대군의 의도대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즉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한확은 귀국 도중 만주에서 사망했는데,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놀라고 슬퍼”했지만, 세조의 즉위를 왕위 찬탈이라고 본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고, 이런 민심에 그녀는 상처받았다. 남편 의경세자가 세조 3년(1457) 만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더했다.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한 달 전에 죽었는데도 세조가 단종을 죽였기 때문에 단종의 모후 현덕왕비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의경세자의 죽음은 그녀가 꿈꾼 왕비의 길이 좌절됐음을 뜻했으나 10년 후에 기회가 찾아왔다. 세조의 후사인 예종이 1년 2개월의 짧은 재위 끝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 세 살짜리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한씨는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자신이 있었다. 천하의 권신 한명회가 사돈이었다.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기도 했으나 세 살 짜리 손자 대신 열 두 살짜리 사위 자을산군(성종)을 선택했다. 성종보다 세 살 위의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한명회같은 장인이 없었다. 한명회와 밀약한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유명이라는 명분을 댔으나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대비의 말을 반박하고 나올 인물도 없었기에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임금이 될 수 있었다.

1469년 성종이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자 한씨도 왕후로 높여지고 동시에 대비가 됐다. 그녀는 조선의 모든 여성을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대비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종 6년(1475) ‘내훈’(內訓)을 펴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나라의 치란(治亂) 흥망(興亡)이 비록 남자에게 달려 있지만 부인의 착하고 그렇지 않음에도 연결돼 있으니 부인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여성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녀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학문은 성리학이었는데, 성리학 이념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녀가 ‘내훈’의 「부부장」에서 “아내가 비록 남편과 똑같다고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예로써 마땅히 공경하고 섬기되 그 아버지를 대하듯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남편이라는 직책은 높은 것이 마땅하고 아내는 낮은 것이니, 혹시 남편이 때리거나 꾸짖는 일이 있어도 당연히 받들어야 할 뿐 어찌 감히 말대답하거나 성을 낼 것인가?”라고도 했다. 그녀의 ‘내훈’은 남녀가 비교적 자유롭고 평등했던 고려시대의 유제가 남아 있던 조선 초기의 여성들을 강하게 억압했고, 때로는 충돌했다. 인수대비와 며느리의 충돌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왕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내훈’에서 말한 “(남편에게는) 오직 순종할 뿐 감히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윤씨는 궁에 들어오기 전에 베를 짜서 팔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의 효녀였지만, 남편 성종의 호색(好色)을 달게 받아들이는 열녀(烈女)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성종의 바람기에 제동을 걸면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전하지만, 정사인 ‘성종실록’에는 오히려 성종이 윤씨의 뺨을 때린 내용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다툼의 진상은 분명치 않다.

그러던 중 후궁들과 성종의 총애를 다투던 왕비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을 바른 곶감이 발견됐다. 곶감을 둘러싼 의혹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인수대비는 성종이 아니면 후궁들을 죽이려는 의도로 단정지으면서 그녀는 위기에 빠졌다. 인수대비는 윤씨를 폐출시키려 했다. 왕비 폐출에 대해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것이 문제였으나 인수대비는 걱정하지 않았다. 고모 한씨가 선제(先帝)의 후궁으로서 황제의 효도를 받는 위치였으므로 사촌 한한을 사신으로 보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윤씨는 비록 쫓겨났으나 원자의 생모였다. 폐출된 지 3년째인 성종 13년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경연에서 윤씨에게 처소를 장만해주자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그녀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대사헌 채수(蔡壽)가 이 주장을 지지하자 성종은 “원자에게 잘 보여 훗날을 기약하려는 것“이라고 분노했으나 사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삼대비(인수대비·정희왕후·안순왕후)는 한글 문서를 조정에 내려 윤씨가 “우리들이 바른말로 책망을 하면,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았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6년 전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며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한데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므로, 삼대비의 총애를 받았다“고 쓴 교명(敎命)과는 정 반대의 내용이었다.

민심은 인수대비의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폐비 윤씨의 억울함을 동정했다. 그러자 인수대비는 이런 여론에 정면으로 맞서 윤씨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결국 윤씨는 인수대비의 주도로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은 재위 10년째 드디어 복수에 나섰다. 성종의 두 후궁을 때려죽인 연산군의 분노는 인수대비에게 향해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고 대들었다. ‘연산군일기’는 그녀가 연산군의 이런 모욕 때문에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었다’고 적고 있다. 연산군은 나아가 삼년상으로 치러야 할 국상을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로 25일만에 마쳐버려 확신으로 가득 찼던 대비의 인생을 조롱했다. 사랑이 최고의 이념인 줄 몰랐던 할머니와 용서가 최고의 무기인 줄 몰랐던 손자의 충돌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모든 것이 부정되면서 그녀의 성리학 이데올로기는 조선 여성들이 받들어야 할 이념이 됐고, 조선은 극심한 남존여비의 나라가 되어 갔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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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고무신처럼 수놓인 꽃신들... 참 이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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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발들의 사연을 아십니까?





EBS 지식채널e, 전족이 아름다운 이유...


EBS 지식채널e 영상에서 '전족이 아름다운 이유'라는 짧은 영상을 본 후 나는 너무 놀라서 5분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냥 묶어서 성장이 안되어서 작은 정도인줄만 알고 있던 나에게 뼈가 부러져서 휠 정도로 꺾인 발은 충격이었고, 성인 여성의 발이 10cm도 안되게 만들었다는 진실은 어떤 공포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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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쏙 들어간 부분을 남자들이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_-;;



처음에는 귀족들의 사치로만 퍼지던 풍습이 나중에는 서민층에게까지 확산되었는데.. 무서운 것은 귀족층 여자들은 그나마 하루종일 하녀들이 일을 해주니 다행이지만 서민층 여자들은 무릎으로 기어다니면서 집안일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저 발을 해가지고는 어딜 갈 수가 없었겠지..
일도 할 수가 없었겠지..

게다가 마을마다 전족 대회가 열려서 누구 발이 더 작은가 점점 더 심한 경쟁을 하고,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발이 아주 크거나 아주 흉측하게 생긴 것으로 소문이 나서 시집도 못가게 되니.. 딸을 사랑할수록 그 어미는 더욱 심한 전족을 시켰다고 한다.

정말.. 무섭다.. 무서워.....ㅠㅠ



중국언론에 실린 중국인들까지도 충격에 몰아넣은 전족 사진들







_M#]




세상에.. 세상에.. ㅜㅜ ㅠㅠ 무서워라..
어쩌면 저런 짓을 했을까...

단순한 성적 유희를 위해서 모든 여자의 뼈를 부러뜨리다니..
저게 1000년이나 유행하다니.....

당대 유명 시인들이 저걸 낭만이랍시고 여성의 미를 예찬하는 시를 수백 수를 남겼더구나.

망할 놈들아.
작은 발이 그렇게 귀여우면 니들 발이나 자르든가.

왜? 니들은 남자니까 큰 게 좋아?
그러면 니들은 늘리면 되겠네!!

다리뼈가 부러지든 말든 다리 늘려서 철심 박지 그랬니?
이 자식들아.!!


현대의 상식으로 보면 끔찍하고 비정상적인 풍습인 전족이 저렇게 유행했다는 것은 중국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으며, 여성을 오직 성적인 도구, 유희의 대상으로서만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과거 유럽에서도 다른 형태의 전족이 있었다.

유럽에서는 과도한 보정 코르셋 때문에 철사에 숨이 막혀 죽거나 갈비뼈가 부러져 죽은 여성들도 있었고, 프랑스 여성들은 연약해 보이기 위해서 겨울에도 속살이 비치는 얇은 옷에 물까지 끼얹고 다니다가 폐렴걸려 죽었다는데..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이 핍박받지 않은 역사가 없구나.....

여자들은 왜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왔을까..ㅜㅜㅠㅠ


지식채널e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러한 악습이 현대의 여성에게도 이어짐을 부인할 수 없다.

뚱뚱한 여성, 혹은 아름답지 않은 여성을 비하와 웃음거리의 대상으로 만드는 수많은 TV프로들, 아름다움만이 여성의 미덕인 것으로 주입시키는 이 시대... 여성에게 미를 강요하는 이 시대가 수많은 거식증 환자들, 다이어트 중독자들, 성형중독자들을 만든 게 아닌가.

여성의 몸은 사랑받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담고 있는 그릇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사람의 눈이 멀면 마음의 눈으로 보려나..  그렇게 되면 목소리 좋은 사람만 선택되려나. 훗.)


티비프로도, 남자분들도, 여자분들도.... 상대방을, 자신을, 눈으로만 판단하지 말길 바라며,  
21세기형 전족이 사라지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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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은 정말 주목할 가치가 있는 문서이다.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대헌장이 불과 6개월 만에 1천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미국인 10명 중 9명은 의사에게 진찰을 받기 위해 5분 기다리는 것을 죽을 죄라고 믿는다. 그런데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1천만 명의(!) 사람들이 읽기도 어려운 찢겨지고 얼룩진 양피지 문서인 대헌장을 아주 잠시 쳐다보기 위해 기꺼이 줄을 서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니, 도무지 놀라울 따름이다.

다른 유명한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대헌장에 대해서도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다. 혹자는 대헌장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원천"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혹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대헌장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원천"이라는 주장은 과연 타당한가?

악명 높은 중세의 관행이었던 결투재판을 아는가? 대헌장에서 그 결투재판은 합법적이었다. 그러면 신성재판은? 이것 또한 합법적이었다(신성재판에서는 피고를 끓는 타르통에 처넣어 살아 남으면 무죄가 입증되었다).

배심재판은 어땠는가? 사람들은 대헌장에 배심재판이 규정되어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1215년의 영국에서 배심재판은 없었다. 용의자들은 증인에게 반대심문할 수 있는 권리도 없었고, 전문증거를 배제할 권리도, 항변할 수 있는 권리도, 또 법정으로 가는 길과 법정에서 얼굴을 가릴 권리마저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동등한 신분의 배심원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는 있었는가? 모든 사람이 항유해야만 하는 이 권리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대헌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중요한 권리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유민들만이 대헌장에 적힌 새로운 권리들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1215년에 영국인 가운데 자유민은 아주 소수로, 인구의 5/6가 농노였다.

그렇다면 대헌장으로 이익을 본 것은 실제로 누구였는가? 그들은 다름아닌 영국의 귀족들이었다. 대헌장은 귀족들이 자신들을 위해 왕에게서 얻어낸 새로운 권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다수의 영국인은 대헌장을 통해 단 하나의 권리도 더 얻어낸 게 없었다.

만약 대헌장이 군주정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면, 보통의 영국인에게도 어느 정도 가치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맥 풀리게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1215년에 보통의 영국인은 군주정에 의해 억압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영국인을 억압했던 것은 군주가 아니라 귀족 영주들이었다.

여하튼 대헌장이 군주정을 견제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영국에 진짜 전제 군주가 생긴 것은 대헌장 이후의 일이었다.

이상의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사람들이 대헌장을 그렇게 찬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수백 년 전 대헌장에 대해 밝히기로 마음 먹은 명석한 영국인 에드워드 코크 경 때문이다. 그는 먼지 낀 낡은 도서관 서가에서 마그나 카르타라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영국인에게 군주가 함부로 박탈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이 다였다. 그날 이후로 영국인은 그들의 모든 권리와 자유가 바로 그 문서, 전에는 들어 본 적도 없는 그 마그나 카르타라는 문서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셰익스피어는 존 왕을 다룬 희곡에서 이 문서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 원주).

마그나 카르타가 발견된 이후로는, 영국의 국왕이 인도에 침을 뱉기만 해도 누군가가 저잣거리를 누비면서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 그것을 지키시오"라고 절규하곤 했다. 마그나 카르타는 국왕으로서 맛볼 수 있는 온갖 즐거움을 빼앗아가 버렸다.

그건 그렇고,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는 마그나 카르타에 왕실의 옥새를 찍게 했다. 그러니 존 왕이 서명하는 모습이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는 잘못되었다. 왕은 서명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서명할 줄도 모르는 왕이 많았따 - 원주).

존이 사악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논란이 되는 것은, 그가 그냥 사악했는가 아니면 진짜로 사악했는가 하는 것이다. 노르망디를 잃고 패배한 전쟁에서 그는 자기 한 몸의 안위를 위해 병사들은 전장에 버려 두고 도망쳤으며, 사촌 아서를 살해했고, 아서의 누이를 40년 동안이나 감옥의 독방에 감금했다. 또한 신하의 부인을 겁탈했으며, 귀족들의 충성을 보장받기 위해 인질들을 잡아두었다. 인질들은 나중에 몸값을 받고 풀어 주거나 죽였다. 단지 재미로 옛 친구의 부인과 아이를 가두어서 굶겨 죽이기도 했다.

반면에 그는 영국 역사살 가장 유능한 행정가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귀족들이 그에게 가장 불만이었던 것은 토지세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해묵은 투쟁이었다. 그는 토지세를 올리기를 원했고, 귀족들은 반대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귀족들이 존 왕에 대항하여 뭉쳤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신의 군대'라고 불렀다. 존의 군대는 그냥 존의 군대였다. 그것은 시작부터가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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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절대 왕정의 전성기를 갖게 한, 여왕 엘리자베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음모와 사랑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튜더의 파란만장한 삶과 열정을 비롯해 국가를 통합해가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선 엘리자베스에 관한 기본적인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


엘리자베스의 삶을 천천히 살펴 보면,,,


엘리자베스 1세

2000년에 뉴욕타임스는 지난 천년간 가장 뛰어 났던 지도자를 선정하였다. 그 중 가장 첫 번째로 꼽힌 인물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였다. 16세기까지만 하여도 영국은 인근의 스페인과 프랑스에 눌려 유럽의 작은 섬나라였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런 영국이 유럽 제1의 국가로 도약할 수 있도록 초석을 닦은 가장 위대한 여왕이었다. 20세기 초반 까지 지속되는 대영제국의 영광은 모두 이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 마련되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공주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훌륭한 여왕이었지만 그러나 개인사적으로는 가장 불운한 여인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불행은 그녀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아들을 원했던 그녀의 아버지 헨리 8세는 '메리'라는 딸 하나밖에 낳지 못한 첫번째 부인 대신에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한다. 그리하여 천년이상 이어온 구교 로마 카톨릭과 즉시 인연을 끊고, 영국을 신교 국가로 만든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사랑하는 여인 앤 볼레인에게서 아들을 얻고 싶어 본처인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과 억지로 이혼하고 앤 볼레인과 결혼한다. 그 여파로 로마의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하고 영국은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하여 국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앤 볼레인이 낳은 것은 딸 하나, 즉 엘리자베스 공주 뿐이었다. 모든 무리를 감수하고 앤 볼레인에게 왕비의 왕관을 씌워줬던 헨리 8세의 불타는 애정은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난 순간, 그대로 식어 버린다. 그는 앤 볼레인을 간통과 반역죄로 몰아 왕비가 된지 3년 만에 도끼로 목을 내려쳐 죽여 버린다.

그 와중에 그의 3살 난 딸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어머니 앤 볼레인과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함에 따라 졸지에 서출이 되어 버린다. 엘리자베스는 햇필드 하우스로 추방당해 외롭게 자라고, 이러한 시기, 세번째 왕비를 맞아 들인 헨리 8세가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얻어 엘리자베스의 존재는 더욱 약해졌다. 이 때부터 엘리자베스 공주는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면서 자라야 했다. 배다른 언니인 메리 공주와 또 다른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 왕자 사이에서 그녀는 불행하고 조심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파란만장한 공주 시절을 딪고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기까지.

엘리자베스는 사실 국왕의 지위와는 상당히 멀어보이는 존재였다. 남동생 에드워드 왕자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는 일생을 공주로서만 살아갈 운명인 것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헨리 8세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에드워드 6세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만다. 이때까지도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는 멀어 보였다. 


헨리 8세의 첫째 부인 캐서린 소생의 메리가 있었고 그 외에도 할아버지 헨리 7세의 적손으로 인정된 많은 왕권 경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같은 서출로 공표되었던 언니 메리가 왕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에 경도되어 열렬한 구교 신봉자였던 메리의 등극은 엘리자베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아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영국 국교회의 신자가 되었던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목숨을 부지하게 위해 메리 여왕 앞에서 구교로 개종할 것을 엄숙히 다짐한다. 이 다짐으로 엘리자베스는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지만 이후 토머스 와이어트의 반란에 연루되어 런던탑에 유폐된다. 그러나 반역 가담에 대한 증거가 나오지 않아 풀려난다.

메리 여왕은 이미 국교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영국을 다시 구교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국교도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시작한다. 그녀의 통치기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 메리 여왕에게는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과격한 메리 여왕도 사랑했던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와의 결혼에 실패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암에 걸려 죽고 만다. 마침내 온갖 비운과 불운을 다 짊어지고 살아 온 듯한 공주, 엘리자베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숙적 메리 스튜어트


메리 여왕의 공포 정치로 숨죽이며 살아왔던 많은 국민들은 타 국가 왕족과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 영국 혈통에, 국교도인 엘리자베스의 여왕 즉위를 환영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왕위 계승을 못마땅해 하는 세력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구교 귀족 세력들로서 엘리자베스보다는 헨리 7세의 적손이면서 프랑스의 왕비였고,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 쪽에 마음이 가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 또한 공식적으로 아무런 의사표시 없이 자신의 문장에 잉글랜드의 왕관을 그려넣었다. 이것은 즉 엘리자베스는 명분상으로는 자격없는 왕이며 사실은 자신이 잉글랜드 왕이라는 것을 공표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사건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혈통적으로 고귀하고 당당했던 메리 스튜어트에게 서출이며 자격없는 왕이라고 놀림을 받은 엘리자베스 1세는 결코 메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후 두 여인의 일생을 건 시기와 질투는 결국 엘리자베스가 메리 스튜어트를 단두대로 보냄으로써 끝이 나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있어 메리 스튜어트는 혈통상으로도, 여성으로서도 일생을 걸고 질투했던 대상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여왕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영국에 신교를 회복시키고, 메리 시절의 유혈 정치를 끝냈다. 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안정과 의회의 안정 등을 꾀하여 국내 상황을 호전시켰다.


국가와 결혼한 여인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하지 않았다. 국가 안정을 위해 속히 결혼하여 아이를 얻어야 한다는 초기 신하들의 권유도 번번히 뿌리쳤다.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인정하고 늘 자신은 국가와 결혼했다고 선언하였지만 불같은 사랑속에서 세 번 결혼하고 왕자를 낳은 메리 스튜어트를 진정으로 부러워하였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명의 애인을 두기는 하였으나 결코 권력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였고, 혹여 애인 중에서 권력욕이 지나친 사람은 런던탑에 유폐하거나 단두대로 보냈다.

영화에서는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인 로버트 더들리 백작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부터의 애인이었던 그는, 훗날 엘리자베스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고 노포크공의 반역 음모에 연루된다. 



아래에 있는 사진은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된 얼마 후, 로버트 더들리 백작과 춤을 추기 전, 인사하는 모습이다. 굉장히 인상깊고 멋졌던 장면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분분하다.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던가, 아버지로 인해 남자를 불신하게 되었다던가, 어린 시절 계모 제인 시모어의 첫 번째 남편으로부터 성적희롱을 당해서라던가 등의 말들이 많다. 그러나 그 무엇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다. 

엘리자베스는 국가와 결혼했다고 스스로 선언한 것에 걸맞게 영국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th)’라는 칭호를 당대에 듣기도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당대에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유럽의 해상권을 제패하였으며, 신대륙으로 길을 열었다. 더불어 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안정과 의회의 안정 등을 꾀하여 국내 상황을 호전시켰다.

또 이 시기에는 많은 문호들이 등장하여 영국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엘리자베스1세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한 세익스피어도 이 시대 사람이다.

여인으로서 우여곡절 많고 불행한 삶이었지만 이를 불안하고 괴팍한 정치운용으로 풀어 내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조심성으로 걸러내 국가를가장 부강하게 만든 여왕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내면을 강철같은 냉정으로 포장하고 개인의 삶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살아간 여인이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대영제국이 있었고 더불어 유럽전체가 함께 성장하였다.

파란만장하고 불운하기도 한 삶을 살았지만, 엘리자베스는 막강한 여왕이었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살아간 여왕이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영국은 대영제국으로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그녀의 시대는 황금기로 불린다.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 는 영화의 마지막, 그녀의 유명한 말이 인상깊다.


마지막 대관식에서 허옇게 분칠하고 빨갛게 볼터치하고 버진퀸임을 말하는 엘리자베스..

 
각종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여준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습.
http://www.themakeupgallery.info/period/c16/elizabeth/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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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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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여섯의 아내

영국 역사에 가장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긴 인물은 바로 ‘헨리 8세’이다. 긴 영국사에서 헨리 8세만큼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도 없었거니와 영국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었으며, 6명의 아내중에서 2명을 사형에 처하는 등 영국 역사에 숱한 뒷이야기를 남긴 헨리 8세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나라에 숙종과 비슷한 임금)


헨리 8세

1509년,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18살의 청년으로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스포츠맨이었고 이 여섯 왕비 모두에게 성병 옮겨준(자식들에게까지 태내 감염됐음) 아주 유명한 바람둥이였다. 그래서 왕자 하나가 태내서부터 성병옮아 태어나 10살도 안돼 어린 나이에 저 세상갔고 또 한 왕자는 성병때문에 머리카락이랑 눈썹이  빠진 모습으로 살기도.........했다고 한다. -_-;

그의 첫 아내는 이미 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였던 에스파냐 왕의 딸 캐서린 공주였다. 이 결혼은 그가 원해서 된 게  아니라 순전해 정치적 이유(에스파냐의 덕을 보기위한) 때문에 신하들의 권유로 결혼하여 ‘메리’라는  딸을 낳았는데  ‘메리’는 나중에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을 사형에 처해 ‘피의 메리’라 불리는 여왕이 된다.

어쨌던 사랑없는 결혼은 오래 못가고 헨리 8세는 까만 눈동자의 시녀 ‘앤 볼레인’을 사랑하게 된다. 이래서 헨리 8세는 앤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캐서린과 이혼을 했어야 했는데 이혼신청은 로마 교황의 권한아래 있었고 로마 교황은 에스파냐의 압력 때문에 이혼을 거절했다.

독실한 카토릭 신자였던 헨리는 캐서린과의 이혼(이혼의 사유-아들을 못 낳는다)과 엔 볼레인과의 결혼을 성공시키기 위해 로마 카톨릭과 단절을 선언하고 영국의 성공회를 탄생시키니 나중에 이 두 종교로인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시작된다. 성공회로 종교를 바꾸지 않는 사람을 처형하는 등 나라는 갑자기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고, 앤 볼레인과의 결혼에 성공하였으나 앤 볼레인을 통해 딸하나와 죽어서 태어난 아들 까닭에 앤은 왕비의 책임을 못다했다는 죄로 목이 잘리고 말았다. 비극의 왕비 ‘앤 볼레인’의 딸, 이가 곧 엘리자베스 공주로 뒷날 세계 제1의 바다의 왕자 영국 함대의 바탕을 이룩한 ‘엘리자베스 1세’가  된다! 

앤 왕비를 사형시키고 며칠후 헨리8세는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머’와 결혼, 드디어 왕자를 낳았으나 며칠만에 왕자가 죽고 얼마안가서 왕비 ‘제인 시머’도 죽는다. 그리고 헨리 8세는도이칠란트와의 친선을 위해 무뚝뚝한 도이치 여자인 앤 공주를 왕비로 맞았으나 금방 이혼을 해버리고 다섯 번째로 ‘캐서린 하워즈’를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이 결혼도 왕비 캐서린 하워즈의 외도 때문에 앤 볼레인과 마찬가지로 목이 잘렸고 여섯 번째로 ‘캐서린 파아’와 결혼하였다.

 
아라곤 왕녀이자 잉글랜드 왕비 카탈리나(캐더린)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5세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 사이의 막내딸
1485년 12월 15일 마드리드에서 출생
1536년 1월 7일 헌팅던 킴볼튼 성에서 사망
피터버러 성당에 묻힘

원래 카탈리나(캐더린)는 헨리 8세의 형인 아더 왕세자와 결혼했으나,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더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카탈리나는 시동생인 헨리 왕자와 재혼하였다. 헨리 왕자는 이후 즉위하여 헨리 8세라 불렸고, 카탈리나와 헨리 8세는 6명 정도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중 오로지 딸 하나만이 살아남았는데, 이 아이가 훗날 '피의 메리'라 불린 메리 1세이다.
왕위를 계승할 아들에 목말라 있던 헨리 8세는 자신의 정부였던 메리 볼린의 여동생이자 카탈리나 왕비의 시녀인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진다.

당시 42세로 나이가 많았던 카탈리나 왕비가 건강한 후계자를 낳아줄 가망은 별로 없었다.
이에 헨리 8세는 왕비와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하려 했고, 교황이 이를 인정치 않자 카톨릭과 결별하여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533년 헨리 8세는 카탈리나 왕비와 이혼하였다.

채 다섯달도 안 되는 결혼생활을 한 첫남편보다는 헨리 8세에게 헌신적인 아내였다고 한다.
헨리 8세에게 이혼당했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왕비 앤 볼린(앤 볼레인)

윌트셔 백작 1세 토마스 볼린과 엘리자베스 하워드 사이의 딸
1501년 또는 1507년 노퍽 주 블리클링 홀에서 출생
1536년 5월 19일 타워 그린에서 참수형으로 사망

앤 볼린은 1533년 1월 25일 헨리 8세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헨리 8세가 원하는 후계자는 낳아주지 못했다. 세번째 아이가 아들이긴 했으나 그  만 사산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간통죄로 몰려 유폐된 후 타워 그린에서 참수되었다. 앤 볼린의 첫 아이는 훗날 잉글랜드 여왕이 되었으니 이가 곧 엘리자베스 1세이다.

헨리 8세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그녀의 차가운 도도함에 반해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길 원했고 반대하는 교황청과 관계를 맺으면서 영국 성공회란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

앤 볼레인은 헨리 8세가 간절히 원하는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고 딸을 출산하게 돈다.
공주의 출생은  뜨겁던 사랑이  잔혹하게 변하게 만들었다. 유산, 아들의 사산을 거치면서 헨리의 사랑은 식고  앤과 이혼이 어렵자 앤에게 간통죄의 누명을 씌워 런던타원에 갇워 버리고는 처행을 시킨다.



잉글랜드 왕비 제인 시모어

존 시모어 경과 마저리 웬트워드 사이의 딸
1505년 윌트셔의 울프 홀에서 출생
1537년 10월 24일 리치몬드의 햄프턴 코트 궁에서 사망

제인 시모어는 1536년 5월 20일 요크 궁에서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1537년 헨리 8세의 뒤를 이을 왕자를 출산하였으나,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낳은 아들은 에드워드 6세로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으나 요절하였다. 살아 생전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가  묻힌  윈저 성의 성 조지 교회에 자신의  묘지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이로써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중 유일하게 헨리 8세와 함께 묻힌 아내가 되었다.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세이모어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은 여인이었다고 하는데 헨리 8세는 그녀에게 홀딱 반했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앤불린에게 간통의 누명을 씌워 처형한다. 앤 불린에 대한 열정만큼 제인 세이모어에 대한 사랑도 뜨거웠고
앤이 캐서린의 가슴을 찢었듯 앤의 가슴도 제인 세이모어에 의해 상처받았다.

그녀는 첫 아내 캐서린도  두번째 아내 앤도  낳지 못한 헨리가 그토록 열망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낳지만 출산중에 죽는다. <왕자와 거지>에 나오는 왕자가 바로 에드워드다.
10살에 왕이 되지만 16살에 요절한다.



클레페 공녀이자 잉글랜드 왕비 안나 폰 클레페

윌리히-클레페-베르크의 공작 요한 3세와 마리아 폰 겔데른 사이의 딸
1515년 9월 22일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출생
1557년 7월 16일 첼시 올드 궁에서 사망

안나는 1540년 1월 6일 헨리 8세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직후 이미 헨리 8세는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마음 먹었다. 헨리 8세는 안나가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은 1540년 7월 9일 이혼하였다.

대신 안나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받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앤 볼린의 집이었던
히버 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나는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정략결혼으로 헨리 8세의 네번째 아내가 된 클레브스 공작의 누이 헨리 8세는 그녀에게 금방 싫증을 내게 된다.



잉글랜드 왕비 캐더린 하워드

에드먼드 하워드 경과 조이스 컬페퍼 사이의 딸,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 앤 볼린의 사촌 여동생
1520년 출생
1542년 2월 13일 그린타워에서 참수형

캐더린 하워드는 19살 때 안나 폰 클레페를 모실 시녀로 궁정에 오게 되었다. 이후 헨리 8세는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캐더린의 숙부는 캐더린이 왕의 구애에 응하도록 조장하면서 이를 통해 왕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이 증대되길 바랬던 것 같다. 마침내 안나와 이혼한 헨리 8세는 1540년 6월 28일 캐더린 하워드와 다섯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서른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났다. 49세의 왕과 18세의 캐서린. 왕은 청춘과 행복을 찾는 듯 했다. 헨리 8세는 그의 젊은 아내에게 아낌없이 선물을 주었고, 그녀를 '가시 없는 장미'나 또는 '보석같이 아주 귀한 여성'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결혼한 지 1년이 안 되었을 무렵,  왕비의 결혼 전부터의 문란한 과거와 결혼 후의 불륜행각들에 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크랜머 대주교는 캐더린 왕비의 간통을 왕에게 고발했는데 헨리 8세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믿지 못했지만, 이윽고 이 문제에 관한 조사를 계속 하도록 허락했다. 

이후 캐더린 하워드가 결혼 전에 난잡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했고, 결혼 후에도 시종이나 악사등 여러 남자들과 밀통하며 불륜을 저질렀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충분히 수집되었다. 이것들은 그녀를 처형하기에 충분했다. 캐더린은 결국 유폐되고 런던탑(그린타워)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운명을 맞게 된다. 왕에게는 치욕이자 커다란 상처였다. 






잉글랜드 왕비 캐더린 파

켄달 경 토마스 파와 모드 그린 사이의 딸
1508년(또는 1512년/1520년) 런던에서 출생
1548년 9월 5일 서들리 성에서 사망

캐더린 파는 헨리 8세와 맺어지기 이전에 두 번의 결혼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헨리 8세와 캐더린 파는 1543년 햄프턴 코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것이 헨리 8세의 마지막 결혼이었다.

헨리 8세가 죽고 나서 그녀는 토마스 시모어와 네번째 결혼을 했는데, 토마스는 바로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의 남동생이었다. 캐더린 파는 곧 아이를 갖게 되었고, 1548년 8월 30일 메리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를 출산하였다. 그러나 캐더린은 불행히도 출산 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9월 5일 세상을 떠났으며 서들리 성에 있는 성 메리 교회에 묻혔다.


헨리 8세의 딸 피의 메리

여섯 명의 아내, 그 가운데 두 아내의 목을 자른
헨리 8세, 영국의 종교까지도 앤과의 사랑을 위해 바꿔 버린 헨리 8세, 공포의 전제 군주였으며 지금도 영국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인물,

그의 통치는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피의 통치(카톨릭의 탄압과 화형)였다. 헨리 8세는 6명의 아내로부터 딸 둘과 아들하나를 얻었으나 아들 에드워드는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허약한 체질로 6년만에 병으로 죽고 맏딸 ‘메리’에게로 왕관이 돌아갔다.
메리’는 억울하게 이혼당한 어머니(캐서린, 에스파냐, 철저한 카톨릭)의 운명을 옆에서 함께 겪어야 했고, 아버지 헨리 8세의 무관심속에 에스파니아 유모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다.

헨리 8세는 국교를 카톨릭에서 성공회(영국 교회)로 바꾸었고, 그의 딸 메리 여왕은 다시 카톨릭으로 국교를 바꾸었으며 스페인 황태자와 결혼하니 성공회의 반발로 나라안은 크게 시끄러워졌고, 드디어 반란과 폭동이 일어났다. 메리 여왕은 반란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사형에 처했다.

당시 신교인 ‘청교도’들의 세력도 무시 못할 정도로 왕성했었는데 1555년부터 1558년까지 3년동안 성공회, 청교도에 대한 메리 여왕의 무자비한 탄압이 계속되었었다. 수만명의 신교도가 화형장에서 죽고 화형장의 불길은 하루도 꺼지지않을 정도로 무서운 탄압이였으므로 메리는 나중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악명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그녀도 죽었는데 정신병 환자가 되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외로운 침대에서
 155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1세


그녀가 태어났을 때 그 떠들썩한 이혼을 강행하며 앤 불린에게 후계자를 열망했던
헨리 8세의 실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아기때 어머니는 간통죄로 처형되었기에 왕위 계승권도 박탈되고 런던탑에 유폐되기도 했던 힘든 소녀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남동생인 에드워드, 언니인 메리에 이어 25살에 영국의 여왕이 되는 엘리자베스, 그녀는 영
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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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화 오프닝 장면에서, 공길은 싫은 것이 분명한데도 억지로 양반에게 몸을 팔러 가고, 심지어 무리 중에 어떤 사람은 공길에게 몸을 팔 것을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장생을 빼고는 아무도 공길의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너무 한 것 아닌가요?

A. 남사당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구성된 유랑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상 정확한 설명은 없습니다만 공길에게 몸을 팔 것을 강요한 사람은 공길이 속해 있는 남사당 패의 꼭두쇠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꼭두쇠는 무리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패거리 식구의 처우에 관련된 모든 처결을 할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패거리 중에 섞여 있기 위해서는 누구도 꼭두쇠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공길이 몸을 팔 경우 양반에게서 많은 노자돈과 음식이 나올 것을 장생을 제외한 패거리 전원이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 사실을 다 아는 공길로서는, 싫어도 양반에게 몸을 팔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길이 양반에게 몸을 팔아 그 댓가로 패거리를 먹여 살린 것이 자주 있는 일이라는 것은, 공길이 팔아 먹고 사는 것 이제 좀 그만두라는 장생의 일갈이나 양반에게 팔던 몸뚱이 이젠 왕에게 팔겠다는 거냐는 장생의 빈정거림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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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길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장생을 구타하는 꼭두쇠를 낫으로 찔러 죽이고 맙니다.

당황한 둘은 무리에서 도망쳐 한양으로 가는데요. 남사당패는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조직이었을까요?

A. 그렇지 않습니다. 패거리에서 도망치는 것은 남사당으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동입니다.
남사당의 패거리가 된 자는 몇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 규칙이란 무리 중에서 있었던 일을 다른 곳에 말하고 다니지 말 것, 놀이 중에 얻은 수입을 혼자 빼돌리지 말 것 등인데 그 중 가장 엄하게 다스려진 죄가 패거리에서 무단 이탈하여 함부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남사당 은어로 '망도'라 하며, 잡힐 경우 죽을 수도 있는 중죄에 해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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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남사당에는 공길처럼 여자 역할을 전문으로 맡는 배우가 있었나요?

A. 있었습니다.
남사당에서는 처음 패거리에 들어온 사람(대부분 어린이들입니다)을 삐리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패거리의 가장 말단에 배치되어 잔심부름 및 잡일을 맡아 하였고 자신의 전문 연희가 정해지는 가열로 승급하기 전까지는 치마 저고리에 댕기를 들이고 여장을 하였습니다.

이들 삐리들은 행색만 여자였던 것이 아니라 패거리 중에서도 실제로 여자 노릇을 하였는데, 가열 이상 성인 패거리들과 한 명씩 짝을 지어 남색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이때 가열 이상이 대부분 남자 역할을 맡았으므로 숫동모라 하고, 여자 역할을 맡는 삐리들은 암동모라고 불렀습니다) 삐리의 수는 언제나 가열 이상 성인 패거리의 수보다 모자랐으므로, 패거리 전원이 짝을 지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남사당 내에서 남색에 관한 규율은 매우 엄격하여, 무리의 우두머리인 꼭두쇠라 할지라도 한 사람 이상의 암동모를 거느릴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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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공길이나 장생 같은 광대들의 신분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A.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한 계급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상 광대는 백정, 화척, 기생, 무당 등과 같이 천민에 속하는 계급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사당패는 광대 중에서도 가장 천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남사당패를 일러 흔히 '불가촉(不可觸)의 천민'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양인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정도로 천한 계급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것은 남사당이 유교 사회에서 중시하는 농업 등에 종사하지 않고 남에게 여흥을 팔아 연명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색 및 집단 혼숙 등 당시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패륜을 저지르는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사당은 양인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허가 없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양인들로부터 구타 및 모욕등을 당해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광대들을 핍박한 대부분은 양반이 아닌 농민이나 천민 계급이었다고 합니다.

양인과 거주를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사당패는 전국을 유랑해 다니지 않을 수 없었고, 경기도 안성 및 경남 진양(현재의 밀양) 지역등 일대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그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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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장생이나 공길과 같은 광대들은 여자와는 같이 다니지 않는 것 같은데요.

원래 광대패에는 여자가 없나요?

A. 남사당패에 여자가 거의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남사당이 특별히 여자를 천시해서라기보다는, 유랑이 잦은 남사당의 생활 특성상 남성에 비해 체력이 약한 여자가 무리에 끼어있을 경우 신속한 이동이 힘들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이 독신 남성들로 구성된 패거리에 소수의 여자가 끼어 있을 경우, 그들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에 들면서 남사당패에도 여자가 한 두 명씩 섞이기 시작했는데 이때 여자들이 주로 맡았던 배역은 어름산이(줄광대)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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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화 마지막쯤에서, 장생이 줄 위에 앉아 연산군을 희롱하며 하는 재담 중에 '기생들 요분질도 심드렁해지니 사내놈과 비역질을 일삼는데, 이 비역질이 예사 비역질이 아니라 쌀이 나오고 비단 옷이 나오고 벼슬까지 나오는 비역질이더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비역질이란 정확히 어떤 뜻인가요?

A. 비역, 혹은 비역질이란 남성 간의 성교를 뜻하는 순 우리말입니다. 반대로 여성간의 성교는 밴대질이라고 합니다.

남사당 사이에서는 '비역을 출하다'는 등으로 사용하며, 주로 삐리나 외모가 반반한 남사당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머슴이나 한량 등의 남성에게 몸을 파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때 받는 몸값을 남사당 은어로 허우채(解衣債의 변형)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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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육갑은 조정 중신들의 공길 살해 계획에서 공길을 살려내고 대신 활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 장면을 보면 달구지에 거적으로 덮은 시신을 두 사람이 밀고 나가는 것이 전부더군요. 왕의 총애를 받던 광대인데, 장례는 왜 그렇게 초라한가요?

A. 남사당 및 광대는 장례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광대의 경우는 평장(平葬)이라 하여 봉분을 만들지 않고 땅에 시신을 매장할 수 있었지만, 광대보다도 천대를 받은 남사당의 경우는 땅에 시신을 묻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사당은 대부분 천장(川葬)이라 하여 흐르는 강물에 시신을 띄워 보내거나, 깊은 밤을 틈타 몰래 시신을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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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작중 공길이 연산을 위해 하는 인형놀이가 있습니다.
손가락을 끼워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으로 현대의 인형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더군요. 남사당들은 정말로 그런 인형을 가지고 연희를 했나요?

A. 남사당 놀이 가운데는 '인형극'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남사당 놀이는 풍물(흔히 말하는 농악), 버나(접시돌리기 비슷한 묘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인형극)로 구성되는데, 이 중 덜미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인형극입니다. 특히 그 중에 등장하는 상좌 인형은 작중 공길이 사용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이용해 연희하는 포대괴뢰 형식입니다. 남사당은 놀이에 필요한 모든 소품-인형, 탈 등-을 모두 직접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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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화로 살판 이란?
며칠전 왕의 남자 삭제 장면에 관한 기사를 보니, 화로살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화로살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A. 살판의 한 종류로서, 화로를 안고 넘는 재주를 말합니다
.
남사당의 살판은 현대의 덤블링에 가까운 땅재주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뒷곤두, 앞곤두, 번개곤두 등의 기예를 연희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물건을 들고 재주를 넘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하였는데, 이 때 드는 물건의 종류에 따라 칼살판, 대접살판, 화로살판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화로살판은 벌겋게 불이 붙은 숯불을 담은 화로를 들고 재주를 넘는 것으로, 살판쇠의 기예가 출중하지 않으면 재주를 넘는 중 화로에 담긴 숯불이 쏟아져 큰 화상을 입을 수도 있는 위험한 묘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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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남사당패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조선시대의 남사당은 과연 사람들에게 어느 만큼 인기가 있었을까요?

A. 남사당은 한국적 연예인의 원형입니다.
조선 시대만 해도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보고 웃을 수 있는 오락거리는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그들에게 있어 가끔씩 보는 남사당의 각종 기예들과 재담 등은 실로 신기하고 흥미로운 구경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남사당은 회갑연 등 각종 잔치에 불려가 흥을 돋구기도 하였고 소작농들을 다독거리는 양반 지주의 회유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왕실에서조차도 경사가 있을 때는 가끔 광대를 궁으로 불러 그 놀이를 보며 즐겼다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남사당은 오늘날의 연예인과 비슷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남사당 재인 중 한 사람인 바우덕이의 경우는 그녀가 자주 들렀던 안성 지방 인근에 '사또 이름은 몰라도 바우덕이 이름은 안다'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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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사당에는 절대 여자는 없었다?

X. 사실이 아니다.
원래 남사당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사당패라 하여 남사당이라고 불렀지만 (반대되는 의미에서 여사당이라는 집단도 존재하기는 했다)
조선 후기에 들면서 패거리에 한 두 명의 여자가 끼이는 경우가 있었다.

2. 남사당의 꼭두쇠는 투표로 뽑았다?

O
. 사실이다.
남사당은 신분이 천하기는 해도 매우 민주적인 조직으로서 꼭두쇠는 반드시 패거리 전원의 투표를 통해 뽑았다. 이렇게 선출된 꼭두쇠의 권한은 절대적이었으며 노쇠하거나 패거리의 신임을 잃어 꼭두쇠의 자리를 수행할 수 없을 때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3. 남사당은 모두 여장을 했다?

X
. 사실이 아니다.
노천명 시인의 '남사당'에 나오는 것과 같은 여장은 남사당 패거리 중에서도 신입 단원인 '삐리'들만이 하는 것으로서 삐리들은 여장을 하고 여자가 없는 무리 중에서 여자 노릇을 하였다.

4. 남사당은 죽으면 땅에 묻혔다?

X
. 사실이 아니다.
조선 시대의 남사당은 천민 중에서도 천민이었던 관계로 지주들의 반대가 심하여 죽어서도 땅에 묻힐 수 없었고 천장(川葬)이라 하여 사체를 흐르는 개천에 띄워 보냈다. 남사당이 아닌 재인청 소속의 일반 광대들은 평장(平葬)이라 하여 봉분이 없는 편평한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5. 남사당 내에서는 동성애가 성행하였다?

O
. 사실이다.
남성들로만 조직된 남사당 내에서는 어쩔 수 없는 동성애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신입 단원인 삐리가 여자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여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암동모'라고 하며 남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숫동모'라고 한다) 삐리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절반을 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패거리 전원이 짝을 맺을 수는 없었다고 하며 비록 꼭두쇠라 하더라도 한 명 이상의 암동모를 거느릴 수 없었다.

6. 남사당은 자연발생적인 유랑집단으로, 내부에 아무런 규율이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X
. 사실이 아니다.
남사당의 내부 규율은 몹시 엄하고 일사불란하였으며 이를 지키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무리에서 추방되거나 그에 응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남사당 패거리 내에서 행해지는 벌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잔대미 공사'라는 것으로 잘못을 저지른 자를 멍석에 말고 벅구잽이들이 돌아가며 매를 치는 것이었다.

7. 남사당패는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유동적인 조직이었다?

O
. 사실이다.
놀이 허가가 잘 나지 않고 양식 조달이 여의치 않은 겨울이 되면 아예 무리 자체가 해산하여 각자 구걸 및 걸식으로 연명하다가 다음해 봄에 다시 뭉쳐서 패거리를 재건하는 일이 매우 잦았다고 전한다.


http://blog.naver.com/baudeogifes(
안성바우덕이축제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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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춤과 시로 당대의 문장가들과 세도가들을 무릎  꿇게 했던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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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이기 전에 철학자요, 예술가의 삶을 살았던 그녀는 동서고금을 통해 몇 안되는 여장부였다.

30년을 수행한 지족선사를 하룻밤에 파계시킨 미모, 화담 서경덕과의 우정, 그녀가 그리워한 벽계수, 당대의 가인 송순과의 만남,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무덤에 술을 올렸다 하여 관직헤서 파면당한 벽파...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며 아직도 우리의 마음속에 맴돌고 있다.


황진이가 기녀가 된 까닭

비록 황 진사의 서출로 태어난 그녀였지만 어느 여염집 여자아이보다도 총명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황진이가 집을 뛰쳐나가 기생이 된 까닭은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다. 황진이가 사는 마을의 한 총각이 먼발치에서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는 그만 상사병에 걸려 누워 있다 결국 죽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황진이는 어느 날 집 앞에서 상여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웅성거렸다. 황진이가 사는 집 앞에서 상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상사병에 걸려 죽은 사람은 그 집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벌일세. 그러니..."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황진이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옷장 속에 곱게 접어 둔 적삼과 치마를 꺼내 사람들에게 주었다. 상여꾼들이 그 옷을 관 위에 얹어 놓자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

황진이는 자기 때문에 죽은 자의 상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인생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의 외모 때문에 한 남정네가 죽었다. 내 용모가 사람을 죽인 것이다. 내가 시집을 간다면 다른 남정네들이 또 죽게 될지 모른다.'

황진이는 여러 모로 생각 끝에 기생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 
(이건 좀 너무 유치한데..;;ㅋ)

황진이가 기생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노라 하는 문장가와 풍류객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세상의 풍류객들은 황진이를 만나러 먼 길을 달려 송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황진이를 두고 하늘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온 선녀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황진이가 노래를 하면 모두들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 절조는 처음이라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녀는 시를 잘 지어 시인 판서 소양곡과 사랑을 나누었으며, 노래를 잘 불러 당대 최고의 가인 송순과 친하게 지냈으며, 풍류를 알아 당대의 풍류가인 이사종과 6년 동안 환상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내노라 하는 남정네들이 그녀 앞에선 맥도 못 쓰고 비실거렸다.

그녀는 이제 이런 부류의 남자들말고 색다른 남자들을 농락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은근히 들었다. 자신처럼 아름다운 여자의 유혹을 뿌리칠 남자가 과연 있을까? 결국 그녀는 커다란 모험을 시도하기로 했다.



하룻밤에 파계된 30년 생불 지족선사

황진이 인형
당시 30년 동안 불도를 닦아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지족선사가 그녀의 첫 번째 유혹 대상이었다.

천마산 청량봉 아래에 있는 지족암으로 스님을  찾아간 날, 지족선사는 산 아래에서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알 만한 기생 황진이가 자신을 찾아온 것에 그만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산에서 불공만 드리던 스님은 눈이 부시게 빛나는 황진이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미 스님의 마음을 꿰뚫어본 그녀는 슬슬 스님을 농락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스님. 저로 인해 상사병에 걸려 죽은 총각이 있나이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못 잊어 죽을 수도 있나이까?"
"허허! 나무관세음보살!"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요염한 자태에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다. 제대로 황진이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잘못하다간 30년 수도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판국이었다.

'과연 빼어난 미모를 가졌구먼.  저 정도의 얼굴이면 상사병이 걸릴 만도 하겠어.'


시간이 흘렀다. 산사의 밤이 깊어지자 지족선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를 덥석 안아 버렸다. 지족선사의 가슴에 안긴 그녀는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본격적으로 유혹했다. 그날 지족선사와 밤을 함께한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새벽녘 암자를 내려왔다. 30년 불공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기녀의 묘한 웃음 뒤에는 허탈감이 느껴졌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화담

지족선사를 화룻밤 사이에 파계시킨 장본인 황진이는 이번에 화담 서경덕에게 화살을 겨눴다. 대학자 서경덕을 만약 유혹할 수 있었다면 사내들은 늙은이고 젊은이고 모두 계집 치마폭에서 놀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그녀는 서경덕 선생을 점찍은 다음부터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시정 잡사를 멀리하고 오로지 초당에 기거하며 학문에 정열을 불태우는화담 선생. 만인의 존경을 받는 대학자를 반드시 자신의 미모로 유혹해 그의 고매한 인격과 높은 학문을 일시에 땅에 떨어뜨려 보겠다는 일종의 오기가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화담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상황은 달랐다.

지족선사는 자신의 미모에 너무 당황해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는데, 화담은 달랐다. 황진이가 큰절 올리자  편히 앉으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황진이의 미모따위엔 전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래, 어쩐 일로 날 만나러 왔소?"
"일찍이 선생님의 고매하신 인격과 높은 학문의 경지를 들었사옵니다. 미천한 제가 선생님의 고매한 정신을 배우기 위해 이렇게 불쑥 찾아뵙게 되었나이다."

황진이와 화담은 서로 학문과 시를 겨루어 보았다.
밤이면 술과 춤으로 화담 선생을 휴혹하려 했으나, 화담은 황진이를 그저 귀여운 어린아이 정도로만 여겼다. 황진이는 오기가 발동해 며칠 동안 화담을 유혹했지만 화담 선생은 전혀 그런 것과는 무관한 표정이었다.

황진이는 생각다 못해 마지막으로 육탄 공세를 취하기로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초저녁부터 황진이는 비를 맞고 돌아 다녔다. 탄력 있는 유방. 가는 허리, 물기를  머금은 그 자태는 한 마리의 학을 연상시켰다. 황진이는 온갖 교태를 다 보이며 드러난 물기 어린 몸으로 화담을 방에 들어갔다.

"선생님. 너무 추워요."

황진이는 화담 선생이 앉아 있는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화담과 그녀의 살갖이  부딪혔다.

"허허, 이런. 온몸이 비에 젖었구려. 어서 옷을벗고 이리 들어오시오."

옷을 벗으라는 화담의 말에 황진이는 옳거니 너도 별수없구나 하며 화담 앞에서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이윽고 눈부신 그녀의 알몸이 드러났다. 그러나 화담은 아무렇지 않은 듯 젖은 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아니, 내 벗은 몸을 보고도 아무런 동요가 일지 않는단 말인가!'

그녀는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화담을 쳐다보았다.

"젖은 몸으로 그대로 있으면 감기가 드니 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있으시게. 내 옷을 말려 줄 터이니."

화담은 알몸인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옷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는 황진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코를 골며 이내 잠이 들었다. 황진이는 저절로 화담의 인격에 고개가 숙여졌다. 한 여자가 남자에게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잠이 든 화담의 못습을 보면서 황진이는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진이는 화담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냈다.

이튿날 그녀는 마른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화담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채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송도의 삼절(三絶)을 아시나이까?"
 "송도삼절? 글세, 그게 무슨 뜻인고?""송도에는 삼절이 있사온데, 하나는 박연폭포이고, 또 하나는 황진이옵고, 나머지는  화담인가 하옵니다."

화담은 대답 대신 미소를 머금고는 황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연에서는 박연폭포이고, 여자 세계에서는 자신이며, 남자 세계에서는 화담이란 말이었다. 송도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황진이는 문장의 대가들과 시를 지으면서도 절대로 뒤떨어지는 법이 없었다고 전한다.


멋진 남자를 그리워한 황진이

그러나 그녀도 여자였으므로 멋진 사내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노라 하는  양반들이 그녀 앞에서 기어다니다시피 하였지만, 마음에 드는 사내가 있으면 언제 그를 다시 만날까 하는 그리움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다. 이렇듯 멋진 사내를 그리워하는 그녀의 외로움은 결국 시가 되어 오늘날 고전문학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더이다.

어져 내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 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치고 유유히 떠나간 사람이 화담말고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벽계수였다. 그는 황진이의 아름다움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아무리 황진이가 유혹을 해 온다 하더라도 절대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하고는 황진이와 풍류를 즐겼다. 황진이는 귀인 벽계수를 유혹하기 위해 별 수단을 다 써 보지만 결국 벽계수는 도도히 흐르는 물처럼 스쳐 지나갔다. 황진이는 벽계수를 그리며 그 외로움을 시심으로 달랬다.

靑 山 裡 碧 溪 水 (청산리벽계수)
莫 誇 易 移 去 (막과이이거)
一 到 滄 海 不 復 還 (일도창해부복환)
明 月 滿 空 山 (명월만공산)
暫 休 且 去 若 何 (잠휴저거이약하)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오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그녀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자를 그리워하며 밤마다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을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임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그녀는 결국 임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그 뜻을 펴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만다. 마흔이 채 못 된 그녀는 그때까지도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눈을 감았다. 생을 마감할 때는 누구나 자신을 뒤돌아보듯이, 황진이 역시 여자로서 살아온 삶에 대한 죄책감을 유언 속에 담았다.

"내가 살아 생전 내 몸을 사랑하지 못했으니 내가 죽은 후에는 관에 넣어 매장하지 말고 동문 밖 모래 틈에 시체를 버려 세상 여인들로 하여 경계하게 하라."

그러나 황진이를 아는 이웃들은 결코 유언을  따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체를 장단 근교 구정고개 남쪽 길가에 고이 묻어 넋을 위로해 주었다. 후에 당대의 문장가 백호 임제가 관의 일로 송도에 왔다가 제일 먼저 황진의 안부를 물었다. 황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 그는 즉시 묘소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때 임제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을 어데 누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양반가의 사람으로 일개 송도 기생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제사를 지내 주었다는 소식이 장안에 퍼져 나갔다. 결국 조정에까지 이 사실이 알려져 그는공직에서 파면을 당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기생 따위의 죽음을 슬퍼하여 넋을 위로하다니. 당장 파면시켜라."

백호는 덤덤한 심정으로 관직을 내팽개쳤다. 당대의 손꼽히는 문장가였기에 그녀의 죽음을 두고 슬퍼했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황진이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은 기녀는 없었다.

그녀는 기녀이기 전에 예술과 철학을 통달한 신화적인 존재였다. 그녀는 가장 완숙한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할 때 세상을 등졌다. 그래서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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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당한 자들, 그러나 카리스마가 있었다"

또다른 '왕의 남자' 내시... 역사학자 박상진씨가 말하는 오해와 진실  최육상(run63) 기자   
 
▲ 영화 <왕의 남자>의 한 장면. 영화에서 처선(장항선 분)은 연산 곁에서 충심을 다하는 내시로 그려진다. ⓒ 이글픽처스
연산: "처선아, 처선아. 내가 왕이 맞느냐? 선왕이 정한 법도에 매여 사는 내가 왕이 맞냔 말이다."
처선: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큰 사냥을 하시기 위해서는 발자국 소리를 죽이는 법이옵니다."
-영화 <왕의 남자> 중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내시는 가늘고 징그러운 목소리를 지닌, 수염도 나지 않은 남자 아닌 남자로 혐오 혹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내시 '처선'은 달랐다.

<왕의 남자>는 가장 비천한 존재인 광대 장생과 공길이 가장 존귀한 임금 연산군을 상대로 벌이는 한판 연희를 풀어낸 영화다. 여기에서 장항선이 연기한 내시 김처선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극을 이끌어 가는, 이른바 '무대총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폭군이지만 자신이 모셔야 하는 임금이기에 떠날 수 없었던 처선은 광대를 궁으로 끌어들이는 모험을 감수하며 연산과 나라를 바로잡기를 시도한다.

비록 그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처선은 자결을 선택하지만 그는 임금을 모시는 데 충실한, 충직한 내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처선으로 분한 배우 장항선의 무게감 있는 연기가 어우러지면서 처선은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점에서 영화 <왕의 남자>는 '예쁜 남자' 이준기의 재발견인 동시에 '카리스마 있는 내시' 장항선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 속 실제 내시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왕을 가장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내시를 흔히 왕 뒤의 숨은 권력자라고 한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왕조 교체기마다 환관이 득세하며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비서실장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하지만 내시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지난 1월 26일, 내시와 궁녀들을 연구한 역사학자 박상진씨를 만나 그 궁금증을 풀어봤다. 박씨는 지난 해 <내시와 궁녀>(가람기획)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다음은 박상진씨와 나눈 일문일답.

"장항선이 연기한 처선, 연산군 때의 실존 내시"

▲ 내시에 대한 연구를 해온 박상진씨.
ⓒ 최육상
- <왕의 남자>에서 장항선씨가 연기한 내시 '김처선'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김처선은 <연산군일기>에 등장하는 실존인물로 대표적인 충신 내시입니다. 어느 날 연산군이 직접 춤을 춘 '처용무'의 내용이 무척이나 음란한 것을 보고, 처선이 '지금껏 네 분의 선대왕을 모셔왔지만, 주상 같이 무도한 임금을 본 적이 없다'고 직언을 했다가 '왕을 능멸하려 든다'며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죠. 영화에서는 자살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기록은 그렇지 않아요."

- 내시와 환관은 어떻게 다른가요?
"내시는 고려 중기 이전까지만 해도 거세한 환관이 아닌, 과거에 급제한 명문가 자제들로 구성된 최고 엘리트 관직이었어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해동공자 최충의 손자 최사추, 주자학을 도입하고 성균관의 진흥을 꾀한 안향, 청백리로 유명한 임개 등이 내시직을 역임한 인물들이죠. 고려 조정에서 내시 출신 관료 중 재상에 오른 인물만 무려 22명이나 되었으니 내시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던 내시가 고려 중기 이후 원나라의 환관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거세된 남자들인 환관들로 대체됐어요. 고려 말인 공민왕 때에는 121명의 정원을 가진 정2품 관아인 독립적인 내시부를 두게 됐고요. 조선에 와서는 인원을 좀 더 늘려 140명의 내시부라는 거대한 관청이 설립될 정도로 내시제도가 번성했죠."

- 내시는 관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네요.
"정리하면 환관(宦官)은 시대를 불문하고 남자의 성이 상실되고 관직에 있는 자이고, 내시는 성 상실과는 관련이 없는 관직을 말합니다. 고려 때는 내시와 환관이 분명히 구분됐는데, 조선에 이르러 내시와 환관이 동일해지는 바람에 개념상의 혼란이 생긴 겁니다. 고려의 내시가 왕명을 받드는 '공식 비서관'이었다면, 조선의 내시는 환관들로 왕의 개인적인 명령을 전하는 '사설 비서관' 성격이었죠."

박상진

1963년 예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한국철학(문학석사)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서울시 사료조사 위원, 은평향토사학회 부회장, 서울문화사학회 회원으로 있으며 꾸준히 우리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짝짓기로 배우는 세계사> <한국의 로맨스> <에피소드로 본 한국사> <베일 속의 한국사> 등이 있고, 역서로는 <평성부원군 충렬공실기> <한성주보> <조선조 영의정 박원종 연구> 등이 있다.
-<내시와 궁녀> 소개글에서
- 중국의 환관제도를 받아들였다고 하셨는데 중국의 환관과 우리의 내시는 어떻게 다른가요?
"중국의 환관은 말 그대로 거세돼 관직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서경>에 의하면 중국에는 국부를 거세하는 궁형(宮刑)이 있었는데, 사형 다음가는 형벌이었어요.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이나 중국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연년 등이 궁형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죠. 많게는 1만3천 명, 적게는 3천 명 정도의 환관이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에게 궁형을 내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의 내시는 고려 때 국왕의 최측근 엘리트 집단에서 출발했죠. 물론 그때도 거세한 환관이 있었는데 불과 10여 명에 불과했어요. 그러데 원나라 간섭기에 원나라에 바쳐진 고려의 환관들이 수완을 발휘하면서 원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죠. 그 후 환관들은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고국인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각종 비리를 일삼으며 교만해집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고려 초의 내시가 고려 중기 이후 환관들로 대체된 겁니다."

충신 내시 김처선, 간신 내시 김자원

▲ 내시들의 일화를 담은 <내반원기> 중 '김처선'과 관련된 내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사본.
ⓒ 최육상
- 내시들이 힘없는 왕 뒤에 숨어서 국정을 뒤흔들었다는 좋지 않은 인식도 있습니다. 내시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나요?
"조선은 조금 덜하지만, 고려 때는 막강했죠. 특히 원나라에 가 있던 고려 출신의 환관들의 세도는 말도 못해요. 황제 다음의 지위에 있던 승상을 마음대로 부릴 정도의 권세를 가진 고용보(高龍普)나 원나라 조정에서 봉사하며 충선왕을 귀양 보낸 고려인 출신의 원나라 환관 '임빠이앤투그스(임백안독고사)'가 대표적이에요."

- 내시 중에도 충신과 간신이 있었을 텐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누가 있나요?
"앞서 말한 대로 김처선은 문무 양반관료들도 하지 못하는 직언을 임금이었던 연산군에게 하는 충신이었습니다. 반대로 김자원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간신 내관이었습니다. 김처선은 임금의 수라상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종 2품 상선 내시였고, 김자원은 왕명 출납 등을 담당하는 정 4품 상전 내시였습니다. 직책은 김처선이 높았지만 영향력은 김자원이 더 컸죠.

선조 때 내시 이봉정은 글씨를 잘 쓰는 명필가로 유명했는데, 선조 곁에 머물면서 선조의 필법을 흉내 내기도 했어요. 선조가 부채에 어필로 직접 쓴 시를 하사 받기도 했으니까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죠."

- 내시들의 일상생활은 어땠나요?
"사람들은 내시가 궁 안에서만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내시들의 관서인 내시부(內侍府)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위치했어요. 또 오늘날 종로구 봉익동, 운니동 일대, 은평구 신사동, 응암동 일대, 서대문구 연희동, 가좌동 일대, 양주, 고양, 남양주, 과천, 용인, 안양, 파주 등 거의 수도권 전역에 걸쳐 거주했어요.

내시는 크게 궁에서 먹고 자는 장번(長番) 내시와 출퇴근하는 출입번(出入番) 내시가 있는데, 장번 내시도 일정 기간 근무하고 나면 나갈 수 있어서 궁 밖에 가정을 두고 일반인들처럼 생활했어요. 내시들의 묘도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도봉구 쌍문동, 노원구 월계동, 고양, 양주, 남양주, 파주 심지어 평안남도 강동, 경상북도 풍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국에 산재해 있는 걸요."

내시도 음경은 있었다, 아내 두고 성관계도

- 사람들이 내시들의 성생활을 무척 궁금해 합니다.
"사람들이 내시는 거세된 자로 아는데, 고환만 없었을 뿐 음경은 있었기 때문에 성관계가 가능했어요. 반면 중국의 환관은 음경과 고환이 모두 없어 불가능했지요. 이는 원로 향토사학자 김동복(77)씨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는데 내시의 성관계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예요.

김씨가 어릴 때 노인들한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고종 34년(1897년) 갑오경장으로 내시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영등포 쪽 '용추'라는 연못 옆에 내시를 양산하는 움막 시술소가 있었다고 해요. 당시 음경은 남겨 놓고 고환만 제거했는데 비명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주로 비 오는 날 천둥번개가 칠 때 했다는 거예요. 김복동씨가 어렸을 때 옆집에 내시의 아내가 살았는데 김씨의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 박상진씨가 2005년 펴낸 <내시와 궁녀>.
ⓒ 가람기획
- 원래 환관은 궁녀들과의 문란한 성생활을 방지하기 위해 거세한 것 아니었나요? 그런 내시가 성관계가 가능했다니 좀 의아하네요.
"내시의 성관계 유무는 당시 내시들이 아내와 첩을 뒀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음경 자체가 없었다면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었겠느냐 이거죠. 김동복씨가 들은 내시 부인들의 대화를 보면 성관계가 가능한 내시들도 사정을 못하는 괴로움 때문에 목덜미와 어깨를 깨물어 아내들이 무척 괴로워했다고 해요. 그래서 내시 아내들 대부분이 6개월을 못 견디고 야반도주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거죠. 내시의 계보를 잇는 양자(養子) 제도는 정자를 생산할 수 없었기에 당연했던 거고요."

- 지난해 <내시와 궁녀>라는 책을 펴내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2003년 북한산에서 내시의 집단묘역 45기를 처음으로 확인하고 세상에 알렸어요. 그 뒤 내시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딜 가도 관련 서적 하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시와 궁녀에 대해 파고든 거죠. 내시의 일화를 담은 <내반원기>와 내시들의 개인문집,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경국대전> 등 정사와 야사, 법전 자료집 등 100여 종의 문헌과 자료를 2년 정도 수집하고 분석했습니다."

연산군에게 죽임당한 김처선 vs 반정 앞두고 도망간 김자원

나라가 어수선할 때 충신과 간신은 둘 다 빛을 발하면서도 명암을 달리한다. 영화 <왕의 남자>의 배경인 연산군 때 공교롭게도 이들을 각각 대표하는 조선의 내시가 모두 등장한다.

극중 연산군의 곁에서 공길과 장생을 돌봤던 김처선은 내시를 대표하는 충신이다. 그는 연산조에 성종릉인 선릉의 시릉관(侍陵官)을 지내고 140명을 통솔하는 내시부의 수장인 판내시부사로 있었다.

어느 날 연산군이 스스로 지어낸 처용놀이를 하며 온갖 음란한 짓을 다하자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연산군에게 바른말로 직언한다.

"전하, 처용무를 중지하시옵소서."
"뭐라, 네 지금 뭐라 했느냐?"
"전하, 이 늙은 놈은 세조대왕으로부터 무려 네 임금을 섬겨왔사옵니다. 또한 경서와 사서를 읽어 대강 통하오니 일찍이 전하와 같은 놀이를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사옵니다. 속히 처용무를 중지하시옵소서."
"뭐라, 고금에 나 같은 자가 없었다? 그래,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로구나. 죽는 게 소원이라면 네 원대로 죽여주마."

화가 치민 연산군은 처선을 향해 활을 당겨, 그를 죽였다.

한편 김자원(金子猿)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인도한 대표적인 간신이다. '원숭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남의 눈치를 잘 살피고 말주변이 뛰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데 능했다.

그는 성종과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아 오랫동안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 내관으로 있을 수 있었다. 비록 품계는 4품에 지나지 않았으나 왕명을 사칭하여 위세를 부리는 일이 종종 있었고, 말 한마디에 벼슬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위세를 떨쳤다. 나주 출신인 그를 위해 나주 관아에선 여러 채의 집을 지어주기까지 하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계집종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처족이 궐내의 각 색장(色掌)에 많이 소속되어 그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 마치 옛날 당나라의 권신 환관 고력사와 같았다고 한다. 결국 반정으로 연산군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한 그는 왕을 속이고 바깥 동정을 살핀다는 핑계로 달아나 숨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그를 <조선왕조실록>은 간신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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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3 15:30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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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장희빈은 영화로는 두 번, 드라마로는 네 번 제작됐다.
한국 영화의 최전성기라는 1960년대에 장희빈을 소재로 한 영화 두 편이 선보였다.


1961년 정창화 감독이 연출한 김지미 김진규 주연의 ‘장희빈’과
1968년 임권택 감독이 큐사인을 낸 남정임 신성일 주연의 ‘요화 장희빈’이다.

드라마로는 1971년 윤여정 주연의 MBC 일일극 ‘장희빈’,
1982년 이미숙 주연의 MBC 드라마 ‘여인열전-장희빈’,
1987년 전인화 주연의 MBC ‘조선왕조 500년-인현왕후’,
1995년 정선경 주연의 SBS ‘장희빈’이다.


장희빈(장옥정) 상상도

실록에서 유일하게 자못 아름다웠다고 전하는 장옥정, 매우 아름다운 장희빈 상상 초상화.


역대 장희빈과 인현왕후역

영화 1대 장희빈(1961) - 김지미 / 인현왕후(1961) - 조미령 / 숙종(1961) - 김진규

김지미 장희빈



영화 2대 장희빈(1968) - 남정임 / 인현왕후(1968) - 태현실 / 숙종(1968) - 신성일

남정임 장희빈


3대 장희빈(1971) - 윤여정 / 인현왕후(1971) - 김민정 / 숙종(1971) - 박근형

윤여정 장희빈



박근형 숙종
(이 사진은 나이가 너무 많아보이는데..
숙종 아닌 다른 왕 배역이 아닌가 싶기도.)



MBC 4대 장희빈(1982) - 이미숙 / 인현왕후(1982) - 이혜숙 / 숙종(1982) - 유인촌

이미숙 장희빈

유인촌 숙종, 이미숙 장희빈

그 이후 모든 장희빈 배역의 이미지와 연기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미숙 장희빈





MBC 5대 장희빈(1988) - 전인화 / 5대 인현왕후(1988) - 박순애 / 숙종(1988) - 강석우

전인화 장희빈
단아한 이미지의 전인화가 맡아서 더욱 화제가 된 장희빈
너무 잘생긴 강석우가 맡아서 인기 있었던 숙종




SBS 6대 장희빈(1995) - 정선경 / 인현왕후(1995) - 김원희 / 숙종(1995) - 임호

정선경 장희빈
정선경 장희빈




KBS 7대 장희빈(2002) - 김혜수 / 인현왕후(2002) - 박선영 / 숙종(2002) - 전광렬

김혜수 장희빈
김혜수 장희빈



그동안 숙빈 최씨 역을 맡았던 배우들 (1대 ~ 3대는 찾을 수 없음.)

숙빈 최씨 이미영, 견미리, 남주희, 박예진



유명한 드라마가 아니라서 알려지지 않은 이재은 장희빈

이재은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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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마녀사냥] '장희빈' 악독한 장희빈과 후덕한 인현왕후 :

초기 영화속의 고정관념장희빈은 악녀와 요부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장희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사극<장희빈>이 거듭 만들어 지면서 사람들의 머리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장희빈역을 한 연기자는 악독함과 섹시함을 무기로 인기를 누렸다, 장희빈은 김지미, 남정임과 같이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연기했다. 윤여정, 이미숙, 전인화, 정선경은 장희빈을 연기 한 뒤 스타로 발돋음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눈가가 매섭게 보이게 화장을 하면서 악녀 장희빈을 열연했다.


장희빈이 악독하면 할수록 시청자의 눈총을 받았으며, 사극의 인기는 높아졌다. 가장 최근에 장희빈을 연기한 김혜수는 잘못된 캐스팅이라는 뒷말을 듣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선량한 눈매와 둥근 얼굴형이 약녀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장희빈은 악녀의 전형으로 그 이미지가고정되어있었다.

초기영화에 나타난 장희빈의 이미지는 사악함과 요염함 그 자체였다. 영화속 장희빈은 빼어난 미모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궁궐의 나인이 일약 왕의 여자가 된 것은 몽땅 요염한 아름다움 때문 이었다. 장희빈은 아양과 교태로 임금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상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자 오만방자해 졌다.

후궁에 봉해지고 왕자를 나은뒤에는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사람됨이 간사하고 악독한 장희빈은 계략을 꾸며 인현왕후를 궁지에 몰았다. 짚 인형에 화살을 꽂아 중전을 장자했던 장희빈은 도리어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임금 앞에서 거짓 눈물을 흘렀다. "소인이 세자를 나은 뒤부터 투기해 숫제 생사람을 잡으려 하옵니다. 함정에 빠진 소인을 꼭 살려 주시어요!" 울음 섞인 장희빈의 애원에 임금의 마음이 흔들렸다. 끝내 숙종은 인현왕후를 의심했고 덕을 잃은 죄를 물어 궁궐에서 내쫓았다. 이렇게 영화속 장희빈은 죄없는 중전을 폐위시키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요사스런 인물로 그려졌다.

장희빈은 왕후가 떠난 빈 자리를 독차지 했다. 왕비로 책봉되어 중전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 뒤에도 악독한 성정은 변하지 않았다. 장희빈은 승은을 입은 궁인이 있다는 말에 분을 참지 못해, 중궁전 뒤뜰에 최무수리를 불러 모진 형벌을 가했다.
시기와 질투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채 머리채를 붙잡고 뺨을 때리며 채찍질을 햇다. 상감의 사랑을 가로챘다는 생각에 분노가 폭팔했다. 때마침 임금에 중궁전을 찾았다가 피투성이가 된 최무수리를 보고 장희빈의 악독함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장희빈은 아랑곳하지았고 임금을 향해 소리쳤다. "아셨거든 앞으로는 시앗을 보지 마시어요. 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 꼴은 못봅니다!" 장희빈은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는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결국 장희빈이 악독한 성품이 들어나자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 시키기에 이른다.

하지만 장희빈은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앙심을 품고 인현왕후를 살해하기 위해 신당을 차리고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화려한 색깔의 비단으로 신당을 장식하고 왕후가 죽기를 빌었다.

마침내 장희빈의 저주로 인현왕후가 죽게 되었다, 하지만 장희빈의 요망한 계책이 발각되자 숙종은 크게 분노했다,
장희빈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진하라는 명을 받았다. 장희빈은 사약을 받아들고 소복차림을 한 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상감을 독차지하기 위해 못하는 일이 없던 장옥정은 처참한 죽음으로 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러면 장희빈은 사극에 그려진 대로 정말 악녀였을까?

사극 <장희빈>에서는 장희빈의 타고난 성품이 사악했다고 보았다. 개인적인 성정에 주목해 표독스러운 장희빈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을 뿐 장희빈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주변의 사정이나 시대적인 배경은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영화 속 장희빈은 가난한 집안으로 배운 것이 없고 덕이 부족했다.
따라서 거친 성정을 타고나서 요약을 일삼는 인물로 그려졌다.

이처럼 개인의 선천적인 품성을 강조하다 보니 초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모호한 사극 영화가 만들어 짐으로서 장희빈이 살던 시대와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옛날 옛적 마음씨 나쁜 여인 한사람이 궐에 들어와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 드라마는 등장인물을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과 더불어 역사적인 임무로 표현해야 하지만 사극 장희빈은 시대적인 배경에 크게 주목하지 않은 나머지 장희빈을 사악한 악녀 이미지로 그려 버렸다.

반면에 영화 속에서 악녀 장희빈에 맞서는 인현왕후는 항상 어질고 후덕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또한 비련의 국모인 인현왕후는 전통적인 인고의 여성상으로 나타났다. 인현왕후역을 맡은 연기자들은 항상 가날픈 목소리와  가련한 모습을 표현했다. 순종적인 이미지의 인현왕후는 김동원 김민정 이혜숙 등이 연기했다.

인현왕후는 궁궐에서쫓겨난 궁인 장옥정을 다시 입궐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당시 장옥정은 숙종의 승은을 입은뒤 명성왕후의 의해 궐 밖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왕후는 장희빈을 그리워하는 숙종의 마음을 헤아렸다.

 "무슨 수를 쓰든 만나게 해 드리겠어요."

어질고 착한 왕후의 천성은 시기나 질투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임금이 총애하는 궁인 장옥정을 입궐하도록 했다. 장차 장희빈 때문에 궁지에 빠질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뒤 장희빈이 왕자를 낳자 인현왕후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다. 장희빈은 지난날의 은혜를 오히려 원수로 갚앗다. 인현왕후는 덕성을 베풀다가 장희빈의 계략에 바졌던 것이다.

1970년에 방송된 엠비씨 일일연속극 <장희빈> 에서는 불쌍한 인현왕후를 구하려는 헤프닝도 있었다,

그 결과  인현왕후는 원래 계획보다 한 달이나 늦게 궐문을 나셨다, 그사이 장희빈의 악독함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장희빈 역의 윤여정은 길거리에서 몰매를 맞기도 하고, 광고 모델 계약이 파기 당하는 수난까지 겪었다. 연속극은 1위를 달리면서 시청자들의 사랑과 미움을 한꺼번에 받았다.

이처럼 인현왕후가 불쌍하면 할수록, 장희빈이 표독하면 할수록, 사극의 인기는 더 높았다.
폐비시절에도 왕후는 참고 기다리며 고단한 나날을 모냈다. 그렇지만 단 한번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참고 또 참음으로써 인고의 상징이 되었고 그 기다림을 헛되지 않았다,

그녀는 국모의 자리를 다시 되찾은 뒤에도 장희빈에게 복수하려는 뜻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장희빈의 아들을 생각해 장희빈에게 죄를 내리지 말라고 하면서 그녀를 도리어 감쌌다. 장희빈의 저주로 병든 인현왕후는 착한심성을 간직한 채 죽음을 맞았다. 왕후의 슬픈 죽음은 연약하고 가련한 이미지를 더욱 밫나게 했다.


그러나 과연 인현왕후는 한없이 어질고 착한기만 한 사람이었을까?

영화속 인현왕후는 당장 폐비가 될 위기에 빠져서도 자신의 결백을 밝히지 않고, 그저 말없이 기다리기만했다고 한다. 그리고 복위한 뒤에도 장희빈에게 큰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원수를 사랑으로 감싸는 온화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현왕후는 천사나 성녀였을 것이다.

그러면 인현왕후는 진짜 천사였을까? 혹, 보통사람이었던 인현왕후를 천사로 치장했던 것은 아닐까?

인현왕후가 천사 이미지를 갖게된 것은 그가 명문가 출신이기 때문에 따라서 착한 성품을 타고 났다는 기록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사극 장희빈을 만드는 데 대본이 될 만한 역사적 기록으로는 [숙종실록]과 [연려실기술], 그리고 [인현왕후전]인 대표적이다.

장희빈을 누르고 마지막 승자가 되었던 인현왕후는 많은 기록에서 칭송을 받았다.
특히 [인현왕후전]의 내용은 인현왕후를 지나치게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이책은 인현왕후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이 글은 정조때 어느 궁녀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 했다고 하기도 하고, 인현왕후 곁에서 모시던 궁인이 옛일을 회상하며 기록했다고도 한다. 어느 것이 사실이든 [인현왕후전]은 적어도 인현왕후의 편에서 있었던 사람을 썻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인현왕후전]의 내용을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 들인다면 인현왕후는 천사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천사로 태어난게 아니라 천사로 만들어 진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어느 궁인이 장희빈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쓴 [희빈 장씨전]이 있다고 치자. 책 속의 장희빈은 여러 궁인들의 우러럼을 받는 왕비였을 것이고, 아름다운 자태와 영민한 두뇌로 숙종을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희빈장씨전] 따위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장희빈이 악녀라는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은, 그녀의 편에서 다룬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애환을 전할 수 있는 기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슬픔이다.
이처럼 지금 남아 있는 기록을 그대로 따른다면 인현왕후는 착한여자의 전형이 될 것이다.

역사 기록이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 기록에 대한 비판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극속 인현왕후는 한결같이 착한 성품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을 비판적으로 읽고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초기의 영화 <장희빈>에서는 도덕적인 기준을 내세워 역사적 인물을 평가했다.  도덕적인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을 기준으로 삼아서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삶을 비추었다. 그 결과 장희빈은 사악하고 표독스런 악녀로 인현왕후는 착하고 어진 천사로 태어났다.


※예전에 미니홈피에 혼자 보려고 지식인(??) 같은 곳에서 퍼온 거라서 정확한 출처를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문제되면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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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셜록홈즈님의 블로그 : http://blog.daum.net/s203039/6725428

===> 이게 원 출처인줄 알았지만 그도 또한 아니고, 이 분도 출처를 안밝혀서 원래 출처는 알 수 없음....ㅠㅠ


조선의 3대 요부, 장녹수와 장희빈 그리고 정난정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될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 중 임금의 사랑스러운 애첩이었던 장녹수와 장희빈은 궁궐 깊숙한 곳에서 '왕실 정치' 를 했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비슷한 점을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장녹수와 장희빈, 이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들 중 누가 더 조선조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는가?

왕의 남자 장녹수 강성연



장녹수 - 미천한 출신, 그리고 야망.


장녹수와 장희빈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신분 상승에 대한 지독한 야망을 감추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은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19년에 충청도 문의현령까지 지냈으나 더 이상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었고 신분도 노비출신으로 천인 중 천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면 자녀는 자동으로 천인이 되었으며, 그 자녀의 소유권은 모계를 따라 가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장녹수는 태어날 때부터 '노비의 딸' 로 평생을 노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신분도 미천한데다가 가난하기까지 했던 장녹수의 젊은 시절은 비참하리라만큼 불행했다. 제안대군의 종과 결혼해 아기까지 낳았던 장녹수는 돈을 벌기 위해 여러번 몸을 팔았고 돈에 쪼달리자 가정을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가정을 버린 장녹수는 몸을 파는 천기의 수준에서 벗어나 술과 기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정식으로 기생으로 데뷔했다. 뛰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앳된 외모와 여성스러운 애교를 지니고 있었던 장녹수는 단박에 명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연산군의 눈에 띄어 궁궐로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실록에서 '자못 아름다웠다'라고 전하는 유일한 여인, 장옥정

희빈 장씨 얼굴 상상도.



장희빈 - 숙종을 유혹하다.

극적으로 궁궐에 들어간 장녹수에 비해 장희빈(장옥정)의 입궁은 철저히 계산적이었다. 장옥정의 숙부 장현은 실록에 "국중의 거부" 라고 기록될 정도로 대단한 부를 모은 인물이었지만 어머니가 노비출신이었던 까닭에 그녀는 천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비로서 어미가 겪은 설움과 치욕을 보고 자란 옥정은 천인 딱지를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사회는 '서인'과 '남인' 의 정쟁이 극에 달았던 때였고 남인에 몸을 담고 있던 옥정의 가문은 남인을 위해 옥정을 궁녀로 입궐시킨다.

당시 궁궐은 남인이었던 장렬왕후(대왕대비) 와 서인이었던 명성왕후(대비)의 기 싸움이 한창이었던 때였고 장렬왕후는 옥정을 숙종에게 소개시킴으로써 정권획득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 타고난 미모와 매력을 가지고 있던 옥정은 20살 혈기왕성한 숙종을 유혹하는데 성공했고 그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다.

숙종의 사랑을 받게 된 옥정의 위세는 자못 등등했으나 당시 궁궐 최고의 권력자이자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명성왕후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명성왕후는 옥정을 "요악하고 사악하며, 덕이 없고 천하다." 라는 명목으로 궁궐 밖으로 쫒아냈고 서운해하는 숙종을 위해 민유중의 딸을 중전으로 간택한다.

이가 바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였다.


장녹수 - 왕을 가지고 놀다.

왕의 남자 장녹수, 연산군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연산을 가지고 논 것은 장생과 공길이었지만 실제로 연산을 가지고 놀았던 것은 장녹수였다. 그녀는 왕이라는 자리에, 궁궐의 법도에 지겨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연산을 가장 세속적이고 천박하게 만들어 놓는 특별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연산의 불행한 가정환경을 잘 알고 있던 녹수는 연산에게 '엄마' 와 같은 존재로 다가갔다. 이미 예전부터 그녀는 남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남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지독히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녀는 연산에게 "야, 이놈" 등의 상소리를 해댔고 그를 조롱하기도 했으나 연산은 그런 녹수의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녹수는 연산에게 '첩' 그 이상의 존재였다. 연산의 왕비였던 신씨는 엄숙하며 상당히 정숙한 인물이었고 연산은 그런 신비를 '왕비' 로써 존중했다. 연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일에 광분해 칼을 들고 대비전에 쳐들어 갔음에도 대비를 쳐 죽이지 못했던 것은 대비전 앞에 중전 신씨의 가로막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정숙하고 위엄있는 신씨에 비해 녹수는 과하리만큼 본능에 충실하며 연산의 몸과 마음을 모두 품어냈다. 연산은 어떤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웃었고 그녀에게 놀라울만큼 많은 재물을 하사했다. 녹수의 집을 건축할 때 대간을 보내 감독을 시킨 것이나 내시와 승지 등에게 그녀의 가마를 뒤따르게 했다는 기록은 당시 녹수의 권세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비록 장녹수는 연산의 총애에 비해 인사 청탁에 적극적인 모습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종친과 조정관료들의 굽신거림을 받았고 뇌물과 투기, 재산모으기에는 혈안이 되어 있었다. 천한 출신의 기생이 임금의 비호 아래 갖은 이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조선사회가 용납할 수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서오릉(장희빈의 묘)


장희빈 - 중전의 자리에 오르다.

장옥정의 재 입궁은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의 승하 이후에 이루어졌다. 인현왕후는 장옥정을 그리워하는 숙종을 위해 장옥정의 재입궁을 손수 지휘했다. 살아 생전 명성왕후가 했던 "장옥정은 덕이 없고 사악하니 조심해야 할 것이오." 라는 경고를 무시했던 것은 인현왕후의 가장 큰 실수였다.

궁궐에 다시 들어온 장옥정은 놀라우리만큼 초고속 승진을 했다. 석녀였던 인현왕후에 비해 자식복까지 있었던 장옥정은 숙원, 소의의 자리를 거쳐 정 1품 '빈' 의 자리에 올라섰고 자신의 아들을 세자의 위치까지 밀어 올리며 기세 등등한 위엄을 누렸다.

장희빈의 성공은 곧 남인의 성공이었다. 남인은 장희빈의 비호 아래 정권을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곧 서인의 심볼마크 였던 인현왕후를 폐위 시키는데 성공한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와 세자의 어머니라는 이점으로 민비의 뒤를 이어 중궁전 주인자리를 꿰차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장희빈과 오라비인 장희재의 포악함은 극에 다달았다. 장희재의 집 앞은 뇌물과 각종 재물을 바치기 위한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뇌물의 값에 따라 벼슬이 나누어졌다. 인사청탁에 소극적이었던 장녹수에 비한다면 장희빈은 적극적일 정도로 매관매직에 혈안이 되있었다.

이 또한 남인 정권의 묵인이 있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장녹수와 장희빈, 같은 점과 다른 점.

그렇다면 사랑을 이용하여 조선을 자신의 치마폭 속에 놀렸던 장녹수와 장희빈 중 누가 더 권력의 중심에서 조정을 좌지우지 했을까?

여러가지 정황을 살펴볼때, 판정승은 "장녹수" 이다. 장녹수는 혼군인 연산군을 이용해, 임사홍 등과 결탁하여 사화를 일으키고 인수대비를 결국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 당시 최고의 정권자였다. 다만, 장녹수가 그렇게 정권을 뒤흔들 수 있었던 것도, 대궐의 큰 어른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 인수대비를 죽음으로 몰아 간 것도, 모두 연산군이 폭군 이자 광인 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부귀영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장희빈은 숙종을 통해 신분을 초월하고 왕비의 자리에 올라갔지만 장녹수와는 달리 도리어 막판에는 숙종에게 이용당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장희빈은 남인의 거두를 자처하며 정권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는 했으나, 훗날 날이 가면 갈수록 숙종에게 역이용 당해 환국의 구실로 가차없이 버려졌다.

다만, 장희빈 역시 요화인지라 숙종의 총애가 하늘을 찌를 때의 그 부귀와 영화는 장녹수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장녹수가 그저 연산군의 애첩이었다면, 장희빈은 한나라의 국모요, 국왕의 지어미요, 훗날 임금의 어머니로써의 위세 또한 누려 보았으니 궁궐에서의 위세가 권력에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를 위해 정적인 인현왕후를 비롯하여 앞길을 막는 자는 저주나 모함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가차없이 내려친 인물이었다. 이에 비한다면 장녹수는 후궁의 직위나 국모의 자리보다 현재 보장되는 부귀와 영화를 철저히 즐기는 인물이었다.

즉, 장희빈이 철저하게 숙종의 승하 이후를 계산하여 자신의 부귀영화를 길게 계산하는 미래지향적 인물이었다면 장녹수는 미래 보다는 현재의 위세를 더욱 중요시 하는 현재지향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장녹수와 장희빈의 죽음의 결말도 달라졌는데 장녹수는 그렇게도 자신이 철저하게 이용했던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처참하게 칼질을 당하고 그 시체 또한 백성들의 침과 가래, 돌맹이 세례를 받아 까마귀 밥이 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은 그토록 사랑했던 지아비인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아 목숨을 끊었고 그 시체 또한 세자의 모후라는 이유로 대빈묘에 안치되어 끝까지 예의를 갖춘 보살핌을 받게 되었으니 장녹수와 장희빈의 비참한 결말은 이토록 궤도를 달리했다.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묘가 있는 서오릉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미인을 탐낸다고 한다. 뛰어난 여성적 매력으로 한 시대를 휘어잡은 그녀들은 대단한 난세 속에서 최고의 권력자였던 '왕'을 휘어잡았던 단 한명의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비참하게 파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시대는 영웅을 소명하고 시기가 지났을 때 가차없이 버린다." 는 만고불변의 진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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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廢妃 尹氏)가 임금의 용안에 흉터자국을 내어 폐비된 사건은 역사에 무지한 사람일 지라도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 야사(野史)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중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즉, 임금의 용안에 상처를 입혀서 폐위된 황후의 이야기가 야사에 전해내려오고 있으니 이를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송나라(960-1279)의 4대 황제는 인종황제(仁宗皇帝 : 재위 1022 - 1063)때의 일이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인종은 명판관 포청천(包靑天)이 활약하던 시대에 통치했던 황제이다. 사극 <포청천>을 보면 알겠지만, 살쾡이 태자의 사건의 이야기로도 유명한 임금이다.(살쾡이 태자의 이야기를 알고 싶으신 분은 네이버에서 검색하시면, 제가 올려놓은 지식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인종은 송나라가 최고 잘나가던 시기에 재위했던 현군(賢君)이었다.


인종의 첫황후는 곽씨(郭氏)였다. 곽황후는 인종이 태자였을 떄 황태자비가 된 어찌보면 조강지처격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곽황후는 원래가 나서기를 좋아하여 항상 조정의 대소사에 관심을 가지고 참견하기를 좋아하였다. 인종이 생모였던 신비 이씨(宸妃 李氏 : 진종의 후궁이었다)를 장의황후(章懿皇后)로 추존할 때, 적모(嫡母)였던 장헌황후 유씨(章獻皇后 劉氏)의 섭정기에 총애를 받았던 재상들을 좌천시켰다. 여기에는 여이간(呂夷簡/978 - 1043)이라는 재상도 포함 되어 있었다. 그런데, 원래 여이간은 장헌황후에게 인종의 생모가 죽었을 당시 후장(厚葬)할 것을 간한 관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좌천된 이유는 곽황후(郭皇后)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여이간은 파면된 이유를 알아보고자 환관 염문응(閻文應)을 사주해서 어떻게 된 내막인지 알아보게 하였고, 곽황후가 인종에게 자신을 좌천시킬 것을 권유했다는 사실을 알고, 염문응과 함꼐 곽황후를 제거하기로 모의했다. 우선 여이간은 자신이 장의황후의 장례를 위해 애쓴 사실을 인종에게 부각시켰는데, 그 공로로 다시 재상의 자리에 복귀할 수 있었다. 여이간은 권력을 다시 잡게 되자 염문응과 더욱 밀착해서 곽황후를 제거하는 일을 추진했다.


바로 이 때 인종의 처첩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는데, 염문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했다. 당시 인종이 가장 총애하던 후궁은 두 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양미인(楊美人)이고, 또 다른 사람은 상미인(尙美人)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인종의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하면서도 곽황후에 대처할 때는 단짝이 되었다. 따라서 곽황후와 두 미인과의 갈등은 점차 깊어갔다. 게다가 곽황후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어서 툭하면 두 미인에게 호통을 쳤다.


한번은 곽황후가 인종 앞에서 상미인을 나무랐는데, 상미인은 인종만 믿고서 곽황후에게 몇 마디 대꾸를 했다. 곽황후는 그만 분통이 터져서 상미인의 빰을 때렸다. 상미인은 감히 맞서지를 못하고 울며불며 인종의 뒤에 몸을 숨겼다. 곽황후는 쫓아가서 손을 날렸는데, 실수로 인종의 목을 때려서 손자국이 생기고, 상처가 크게 났다. 인종이 크게 화를 내자 곽황후도 속이 얼어붙었다. 곽황후가 얼른 사죄하면서 용서를 빌었지만, 인종은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떠났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환관 염문응은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포착하고, 그는 불에 기름을 붓는 식으로 곽황후의 고약한 점을 인종에게 고자질해서 마침내 인종으로 하여금 곽황후를 폐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종은 정이 많고 유약한 사람인지라 황후를 폐할 경우 대신들의 강한 반대에 직면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염문응에게 물었다.

"대신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어찌할 것이냐"

염문응은 당나라때 고종이 왕씨를 폐하고, 측천무후를 세웠던 고사를 들먹이며 그 때 재상이었던 이적(李勣)이 말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황후 폐립은 본래 폐하의 가정일이기 때문에 조정의 대신들은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대신들과 의논하시겠다면 그 또한 영명하신 조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목에 난 상처는 대신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니, 재상 여이간만을 불러서 그가 대표로 확인하도록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재상이 이의가 없다면 다른 대신들도 굳이 만류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인종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즉시 여이간을 궁중으로 불러들었다. 여이간은 이미 염문응과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종의 목에 난 상처를 보자 즉시 마음이 아픈 척 했다. 그리고 옛사례를 들어가면서 곽황후를 폐하라고 권유했으며, 이 일을 반대하는 대신이 있다면, 군신간의 대의를 모르는 자이므로 관직을 파면하라고 말했다.


마침내 인종은 황후폐립을 공론에 붙였고 대부분의 대신들은 인종과 여이간의 뜻에 영합하였으나, 어사대 간관(諫官)이었던 범중엄(范仲淹/990 - 1053)은 그의 직책상 경망하게 황후를 폐할 것이 아니라고 인종에게 극간하였다. 그러나 여이간은 범중엄을 지방관으로 좌천시켰고, 범중엄에 동조하는 간관들을 범중엄의 도당으로 낙인찍어 모조리 탄압하고 좌천시켜버리는 등의 횡포를 저질렀다. 여이간의 농간에 의해 인종은 어쨌든 곽황후를 폐할 수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곽황후가 임금의 용체에 상처를 입혀서가 아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이 때가 명도 2년(1033년)의 일이다.


곽황후를 폐한 후 염문응은 더욱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후궁의 비빈들도 그에게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특히나 상미인과 양미인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몰라했다. 두 미인은 원래 경박한 자들이어서 곽황후를 폐한 후에는 인종에게 밀착하여 매일같이 인종의 시중을 들었다. 결국 인종은 병상에 드러눕게 되는데(쉽게 말하면,,,매일 두 미인과 방사를 벌린 셈이지요)궁정 안팎에서는 두 미인이 너무 방탕해서 인종을 해쳤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염문응은 황제로부터 더욱 두터운 신임을 얻을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여러차례 인종에게 건강에 유의할 것과 두 미인을 멀리할 것을 권유했다. 인종은 짜증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승낙했다. 염문응은 인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미인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두 미인을 강제로 수레에 실어서 궁전 밖으로 내쳤다. 두 미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했으나 염문응이 인종의 뜻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이튿날 염문응은 인종에게 두 미인을 내쫒은 일을 보고했다. 인종은 깜짝 놀랐서 후회했으나, 이미 쫓아낸 사람을 다시 불러올 수도 없어 현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다.


인종은 건강이 호전되자 염문응의 충성심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고, 조정 안팎에서도 염문응을 나라에 충성하는 환관이라고 했다. 두 미인을 축출한 후 인종은 다시 곽황후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곽황후를 다시 황후로 복위시킬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염문응은 그 소문을 듣고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곽씨가 복귀하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는 적당한 기회를 잡아서 곽황후를 죽이려 했다. 마침 궁중에서 쫓겨나 사가에서 머물던 곽황후가 대수롭지 않은 병에 걸렸는데, 염문응은 의사를 협박하여 병에 맞지 않는 처방을 내리라고 강요했다.
결국 곽씨의 병은 점점 더 악화되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

곽황후를 죽인 염문응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고, 권력을 등에 입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거나 사람을 해쳐서 인망을 잃게 되었고, 결국 어사대 간관의 탄핵을 받아 귀양지인 상주(相州)에서 죽었다.


몇가지 이야기를 덧붙이겠습니다.

1. 곽황후가 그렇게 죽은 뒤 인종은 후궁에 있었던 불미스런 일들을 반성하고, 명문가의 조신한 처녀를 황후로 맞아들였는데, 그녀가 개국공신 조빈(曺彬)의 손녀였던 광헌자성황후 조씨(光獻慈聖皇后 曺氏)였다. 역시나 그녀는 인종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항상 예의와 법도를 잃지 않았다.

2. 여이간이 범중엄을 축출한 이후 벌여져던 10년간의 당쟁을 경력의 당의<慶曆黨議>라고 한다. 1033년 범중엄을 좌천시킴으로써 여이간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이 보였으나 1034년 다시 범중엄은 컴백하여 여전히 여이간을 비평하다가 1036년 다시 여이간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 때 윤수(尹洙), 구양수(歐陽修) 등도 같이 축출되었다. 조정의 한기(韓琦), 부필(富弼) 등은 범중엄의 편에 서고, 여이간의 편에는 왕공진(王拱辰), 하병(夏倂)등이 있었다. 여이간이 10년간의 재상임기를 마치고 병으로 은퇴하자, 조정은 범중엄 파에게 장악되어 갔다. 이 때 구양수가 범중엄의 당을 진붕(眞朋 : 군자의 당), 여이간의 당을 위붕(僞朋 : 소인의 당)이라고 정의하였고, 황제는 위붕을 배척하고 진붕의 당과 같이 정치해야한다고 <붕당론>에서 설파하였다. 이것이 송대 붕당정치의 시작이고, 이것이 후대에 신법-구법당의 대립 더 멀리는 조선시대의 붕당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계속해서 간간히 중국의 역사중에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주제를 중심으로 올려보겠습니다.

내용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
참고 <宋史, 후비열전> http://blog.naver.com/ilove_sungho(본인의 블로그)

=========> 이 사람은 이 글을 퍼갈 때, 반드시 출처를 밝히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네이버에서 탈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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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군의 역사가 파란만장할 수 밖에 없기에 연산군과 광해군은 드라마나, 영화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시대극 소재 중 하나이다.  재미있는 것은 광해군을 배경으로 왕의 여자라는 드라마가, 연산군을 배경으로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각각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장녹수와 김개시에 대해 알아보자. (출처: 파란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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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궁녀들 주에서 명성을 떨친 예는 아무래도 평범한 궁녀로 입궁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후궁이나 왕비의 자리에 올랐거나 후대 왕을 출산한 경우다.

예컨대 숙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경종을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쫓겨난 장희빈, 숙종의 무수리로 들어갔다가 훗날의 영조를 출산한 최숙빈, 고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영친왕을 출사하고 황귀비(皇貴妃)까지 오른 엄비 등이다. 장희빈, 최숙빈, 엄비 등은 궁녀 출신이라고 해도 후대 왕을 출산했으므로 평가가 조심스러웠다.

이에 비해 궁녀로서 왕의 총애만 받고 후대 왕을 낳지 못했던 장녹수(張綠壽)와 김개시(金介屎)는 온갖 비난을 받아야했다. 특시 장녹수와 김개시(개똥이)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기에 그 비난이 더더욱 심했다. 역설적으로 갖은 비난을 받다 보니 장녹수와 김개시는 조선 시대 궁녀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고 한다. 가비란 집안의 여자 종을 말한다. 제안대군의 여자 종이었다는 뜻이니 장녹수는 사노비(私奴婢)였던 셈이다.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가비가 된 내력은 대군의 가노(家奴), 즉 남자 종에게 시집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좀더 생각해 보면 약간 애매한 부분이 나타난다. 장녹수가 원래 노비 출신이었는지, 아니면 남자 종에게 시집가서 노비가 되었는지 불분명하다. 이는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張漢弼)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장한필은 문과에 합격하고 문의 현령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아버지 쪽으로 본다면 엄연히 양반 가문의 딸인 장녹수가 어찌하여 제안대군의 남자 종에게 시집을 갔단 말인가.

실마리는 아무래도 장녹수의 어머니 쪽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장녹수의 친언니 장복수(張福壽)가 내수사의 여자 종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장녹수의 아버지는 양반 관료였지만 어머니는 노비, 그것도 내수사의 노비였다는 얘기가 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내수사의 여자 노비였으므로 그 자손들도 어머니를 따라 자연히 내수사의 노비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녹수도 근본은 내수사 노비였다고 보아야 한다. 장녹수가 다른 곳이 아닌 제안대군의 가노와 결혼한 것도 결국은 장녹수가 내수사 노비였기 때문이다.

제안대군에게 소속된 노비들은 궁방(宮房)노비인데, 궁방 노비는 대부분 내수사의 노비 중에서 충원된다는 사실에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장녹수는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몸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장녹수 자매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장한필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남편도 없이 어린 자매를 데리고 얼마나 어렵게 생활했을지 짐작이 간다.

장녹수는 궁녀로 입궁하기 전에 이미 아들까지 낳은 상태였다. 나이도 서른이 넘은 데다 얼굴이 썩 예쁜 편도 아니었다. (실제 얼굴은 전해지지 않으나 실록에 전함.) 단지 노래와 춤에 능했으며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은 소리를 내는 개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장녹수는 예능 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셈이다.

이런 소문은 연산군에게도 들어갔다.

연산군은 조선 시대의 왕들 중에서 예술적인 기질이 가장 뛰어난 왕이었다. 그랬으니 연산군이 노래와 춤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당연히 장녹수를 만났을 것이다. 실제로 장녹수의 노래와 춤은 연산군을 매료시킬 만큼 뛰어났던 모양이다. 눈에 확 띄는 미녀도 아니고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 그것도 연상인 장녹수를 연산군은 딱 한번 보고 바로 입궁시켰다고 한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연산군 8년(1502년)에 종4품의 숙원(淑媛)이 되었다가 1년 후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으로 올랐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이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매혹되었기에 가능했다. 연산군은 장녹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고, 둘 사이에 영수(靈壽)라는 딸까지 낳았다.

장녹수와 연산군이 그토록 빨리 가까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 두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장녹수와 연산군은 예술적 교감이 가능했다. 춤과 노래에 뛰어난 장녹수와 예술을 사랑하는 연산군. 얼굴, 나이와 신분을 초월하여 두 사람을 이어 준 끈은 바로 이 예술적 교감이었다.

둘째, 모성애에 목말라하는 연산군의 갈망을 장녹수가 체워 주었다. 장녹수는 아버지 없이 자란 반면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랐다. 이렇게 자란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갈구했을 것이다. 특히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난 후 생모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치는 연산군의 모성애를 연상의 장녹수가 채워 주었다.

예컨대 "(장녹수는) 왕을 조롱할 때는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했고, 왕을 욕할 때는 마치 노예를 대하듯 했다. 다 자란 성인인 연산군의 이런 행동이 정신장애로 보이기도 하지만 연상의 연인에게서 모성애를 갈구하는 가엾은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실제로 장녹수의 영향력이 가장 높았던 것은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복수하겠다고 갑자사화를 일으킨 시점이었다.

그런데 장녹수는 왕의 총애로 얻은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무절제하게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으며, 유별나게 재산에 욕심을 부려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던 것이다.

그것이 장녹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보면 뛰어난 예술가로 평가할 수도 있다. 노비의 신분에서 후궁까지 올랐으니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녹수가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권력을 쥐자 사람들은 공인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했다.

이름 없는 노비일 떄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것으로 충분했지만 왕을 좌우하는 권력자가 된 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절제하고 왕의 권력을 절제시켜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녹수는 이런 점에 전혀 무신경했거나 무능력했다.


반면에 김개시는 장녹수와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예술적 재능만 있고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에는 취약했던 장녹수와 전혀 달랐다. 김개시는 노래나 춤이 아니라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게다가 장녹수는 입궁 후 곧바로 후궁이 되었지만 김개시는 어렸을 때 입궁하여 상궁까지 올랐을 뿐 정식 후궁이 되지도 못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하면 김개시는 '천예(賤隸)의 딸' 즉 천한 노예의 딸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김개시는 노비의 딸이었으므로 당연히 노비의 신분이었다. 궁녀로 입궁한 후에도 주로 공노비인 내수사 출신의 궁녀들과 어울렸다. 게다가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고 한『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김개시는 장녹수와 달리 어린 나이에 입궁했다.

김개시가 비숫한 시기에 입궁한 변상궁에게 "우리는 아이 때부터 함께 살다가 우연히 사이가 멀어진 게 아닌가?" 라고 말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김개시는 애초에 훗날의 광해군이 되는 동궁 소속의 궁녀로 입궐했다.

광해군이 열여덟 살 때 세자에 책봉되었으니 김개시는 그보다 어린 나이에 입궁했을 것이다. '아이 때'라는 말로 추정한다면 조선 시대 여자의 성년나이인 열다섯 살 전으로 짐작된다. '아이 때' 동궁 나인으로 입궐한 김개시는 청년 광해군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선조의 나인이 되었다. 글도 잘 알고 문서처리에도 능숙한 김개시의 역량이 발탁 사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김개시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다시 광해군의 지밀 나인으로 옮겼다. 광해군은 자신의 궁녀를 데려온 것이지만 김개시가 아버지 선조를 모셨던 궁녀인 만큼 비난의 소지가 적지 않았다.

광해군이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김개시를 옆에 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째는 세자 시절에 맺은 인연이었다.

둘째는 궁중에서 자신을 위해 성심으로 충성할 궁녀, 그것도 똑똑한 궁녀가 필요해서였다.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만들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제조 상궁으로서 당대의 실력자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당시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한 실세였다.

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권력을 틀어쥔 김개시는 오직 광해군만을 위해 충성했다. 광해군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중에서 온갖 악역을 떠맡은 궁녀가 바로 김개시였다.


당시 광해군을 위협하는 최대의 인물이 인목대비 김씨였는데, 김개시는 인목대비를 무력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인목대비의 궁녀들을 회유하여 첩자로 활용하기도 하고 사건을 조작하여 인목대비에게 덮어 씌우기도 했다.

광해군 5년(1613년)에 계축옥(癸丑獄)으로 인목대비의 친정을 멸문시킨 후 저주 사건(咀呪事件 :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사건)을 제기해 인목대비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간 주동자도  김개시였다.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없애려고 했다. 광해군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악역을 떠맡았다. 김개시의 끈질긴 공작에 의해 인목대비는 기어이 서궁에 유폐되고 말았으며, 그 이후에도 죽음 직전까지 몰리는 수난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김개시는 온갖 술수와 모함을 일삼는 정치꾼으로 변해 버렸다.


출처: 파란 블로그에서 펌.
http://blog.paran.com/desireu/744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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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묘수난의 서삼릉(3)

▲ 서삼릉 비공개 지역에 숨어 있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1445-1482)의 회묘를

서삼릉 비공개 지역에 숨어 있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1445-1482)의 회묘를 볼 때마다 김영임이 부르는 '회심곡'의 구슬픈 가락이 묘 주변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폐비 윤씨 회묘의 겉모습은 왕릉과 다름없다. 오히려 웬만한 왕릉보다 외관상으로는 훨씬 훌륭하다.

▲ 회묘의 문인석과 무인석. 분명히 묘인데 어째서 능의 형식을 갖춘 것일까.

묘에서 능으로, 능에서 다시 묘로 격하된 폐비 윤씨의 슬픈 운명이 죽어서도 서삼릉 비공개 지역 끝자락에 숨어서 이렇게 눈물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 공릉 문화유산해설사 권효숙씨가 올려다 보는 문인석의 높이가 약 3.4m 정도돼 보인다.

연산군의 정성 때문인지 조선전기 양식을 따르고 있는 회묘의 석물은 웅장한 무인석과 문인석, 석호와 석양도 뛰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두 문인석의 얼굴은 한결같이 어둡고 슬픈 표정이다. 마치 폐비 윤씨의 한맺힌 한삼 자락의 슬픔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회묘는 원래 동대문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 10월 25일 경희대학교 학교 공사 때 이곳으로 천묘했다. 회묘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희대학교 경희의료원이 들어 서 있다.

죽어서도 파란만장했던 폐비 윤씨의 묘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일제가 조선왕실의 태실과 왕자 공주묘를 집장하고 후궁들의 묘까지 여기로 옮긴 영향이 미친 게 아닐까 한다.

▲ 슬픔에 찬 문인석의 얼굴에서 비장함 마저 흐른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능을 '품을 회(懷)', '돌이킬 회(懷)'를 써서 회릉(懷陵)이라 한 것은 그리운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다시 안기고 싶었던 사모곡이었을까? 새삼 연산군이 폭군 이전에 시인이었다는 기억을 회릉에서 곰곰 생각해본다.

다른 어느 능의 능호보다 우울한 회릉이라는 능호를 되짚어보고, 회심곡을 폐비 윤씨의 무덤 앞에서 들려줬으면 하는 것은 그들 모자의 비극 때문인지, 아님 회심곡이라도 묘 앞에서 한바탕 속 시원히 불러줘야 폐비의 500년 서린 한이 풀어질 거라는 한낱 내 감상때문인지….

1482년 성종(1457-1494)에게 사약을 받고 한삼에 피를 쏟고 죽은 뒤 묘비조차 없던 윤씨에게 연산군이 즉위 후를 생각한 성종이 1489년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겨우 허락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고부간 갈등 희생자가 폐비 윤씨이고 이 역시 권력에 희생된 여인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의 딸인 윤씨는 아버지 윤기무가 죽자 집안이 궁핍해 어머니에 의해 궁에 들어온다.

폐비 윤씨가 성종보다 12살이나 연상이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진 바가 없다. 빼어난 미모로 성종4년(1473) 숙의에 봉해졌던 윤씨는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자리에 오른다. 성종이 13세 소년왕으로 왕위에 올라 7년간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던 시절이 끝나고 친정으로 들어선 성종7년(1476)년의 일이다.

성종은 어머니 인수대비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상의 여인이자 집안이 별 볼일 없는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고 그해 연산군이 탄생한다. 정희대비, 인수대비, 안순대비의 세 과부 대비들의 비호 아래 성종의 여성 섭렵은 조선조 제왕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화려했다. 힘이 되어줄 마땅한 배경이 없는 윤씨는 명문가를 등에 업은 여성들과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되었다….

다 알고 있는 얘기다. 성종이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으나 지아비에 의해 죽음을 당한 윤씨는 오직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불행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성종이 소년 시절 12살이나 연상이었던 윤씨를 왕비로 책봉할 만큼 사랑한 것은 무엇일까? 소년 시절에 빠졌던 미모였을까? 아니면 절대권력을 가진 제왕이라 그런 나이 차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일까.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불과 8살의 차이에 시샘 당한 여자들의 다툼이었을까.

숙의에서 단숨에 왕비로 오를 정도로 왕의 사랑을 입었지만, 훈구세력의 막강한 명문집안이었던 시어머니 인수대비(1437-1504)와 명문출신이었던 후궁들이 손잡은 세력다툼에 밀려나고 만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사림과 훈구의 대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왕실을 둘러싼 대신들의 정권 알력 속에 희생된 여인들이 한둘이던가.

▲ 난간석과 석물이 조선초기 양식이다.

폐비 윤씨의 회묘가 왕릉의 겉모습 갖게 된 이유가 단순히 연산군의 어머니 추숭 때문만은 아니다.

성종이 1494년 12월24일 창덕궁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29일 연산군이 20세의 젊은 왕으로 즉위한다. 국장기간이던 1495년 3월16일 성종의 능에 묻을 지석(誌石)의 초안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은 비로소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된다.

지석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도, 행적을 숨김없이 적어 상석과 능상 사이에 묻는다. 지석의 초안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무의 이름이 드러나면서, 연산군은 생모로 알았던 윤호의 딸 정현왕후의 아들이 아니고 윤기무의 딸 폐비 윤씨의 아들이 자신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폐비 윤씨가 아들 연산군에 의해 회릉(懷陵)으로 복원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인 연산군 10년(1504)이다.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윤씨의 폐출을 빌미 삼아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을 동시에 제거하려고 벌인 피바람이다.

성종이 사후 1백년간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한 유명을 깨고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유래 없는 사화가 벌어졌다.

연산군의 향락으로 국고가 비게 되자 공신들에게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해 보충하려 한다. 그때까지 폭정을 묵인하면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던 권신들은 태도가 돌변한다. 자신들의 경제기반을 빼앗길 수 없던 권신들은 비로소 왕의 향락을 자제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겉으로 갑자사화는 폐비 윤씨 사건 때문이나, 연산군과 대신들의 대립을 이용해 사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으려는 임사홍의 속셈과 사림을 싫어했던 연산군의 내심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피비린내 나는 갑자사화에서 권신과 사림, 훈구의 거의 모든 세력들이 화를 당했고 중종반종이 일어난 계기가 됐다.

▲ 회묘를 수호하는 석호의 꼬리가 압권이지만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 과정에서 인수대비는 손자에게 머리를 받혀 죽고 시어머니에게 쫓겨나 죽음을 당한 폐비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존되고 회릉으로 격상하게 된다. 이 덕분에 폐비 윤씨는 어느 왕릉 못지 않은 능상과 석물로 단장했으나, 고작 2년 후에 중종반정으로 아들이 쫓겨나고 비참하게 죽게되니 과연 한삼의 피에 서린 원한이 풀렸을지는 의문이다.

1506년 연산군이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됐지만 '무덤을 건드리면 동티난다'는 설을 우리 조상들이 굳게 믿고 있는 덕분에 겉모습은 연산군이 조성한 회릉의 모습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 폐비 윤씨 회묘에서 내려다 본 후궁들의 공동묘지.

폐비 윤씨의 묘에서 나무들 사이로 후궁들의 묘가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일제가 모아들인 후궁묘와 해방 이후 묘의 주변개발 때문에 옮겨온 명종 후궁 경빈 이씨 묘 외 6기를 천묘해 모두 16기의 후궁묘가 있다. 광복 후에 천묘한 묘들도 왜 일제가 만든 묘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는지 알 수 없다.

▲ 조선 왕들의 후궁묘.

폐비 윤씨의 묘에서 내려와 후궁들 묘의 담장을 끼고 돌면 대문이 나온다. 이 후궁들의 묘는 싸구려 공동묘지 같은 왕자와 공주들의 묘보다 봉분도 훨씬 크고 담장을 둘러 그런 대로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일제가 무슨 속셈으로 왕자와 공주 묘보다 후궁들의 묘를 이렇게 크게 만들고 담장까지 둘렀는지 잠시 생각해본다.


▲ 겨울 석양의 그림자가 길게 깔린 대문 틈새로 보이는 후궁묘.

왕실에 들어와 각자의 사연을 지니고 영욕의 세월을 보냈던 여인들이 잠든 묘들을 보자니 겨울 석양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스산하기만 했다.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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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미니홈피에 있던 글이라서 어디까지가 원글인지, 정확한 출처인지 기억이 안납니다.
문제가 생기면 삭제하겠습니다. 알려주세요.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



폐비윤씨의 비극을 정확히 이해할려면 이야기는 좀 더 위로 올라가야돼.

때는 세조
.(세종의 차남.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지. 왕이되기전엔 수양대군으로 불렸슴)

세조에겐 아들이 둘 있었는데 첫째가 당연히 세자.(조선의 왕위는 장자승계원칙)
그런데 이 세자가 젊어서 병으로 죽고 20대의 세자빈은 애딸린 청상과부가 됐지. 
왕실 법도에 따라 세자빈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그리고
세조의 두번째 왕자가 다시 세자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아.(얘가 예종)

그런데 예종이 왕위를 이어받고 얼마 안되서 죽어.
당연히 다시 왕위를 이어야하는데 (왕위는 하루도 비워둘수 없으니까) 여기서 문제가 발생.
예종 주니어들이 완전 애기들인거야.(걸음마 애기들..)

가문좋고 야심차고 똑똑했던 예전 세자빈(아까 그 청상과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대신들과 타협해서 자기 아들을 왕으로 추대해.
이 여자에게 아들이 둘 있었잖아. 그 중 둘째를 왕으로 올려. 이 소년왕이 성종.

당시 성종의 나이가 12살쯤. 

당연히 직접 통치를 할 수 없으니까 수렴청정(왕의 엄마나 할머니가 어린 왕을 대신해서 통치)을 하게 되지.
(첫째를 왕위에 올리지 않은 것도 이걸 하기 위해서야. 첫째는 이미 성인이 다됐거든.)

세상은 이제 어린 왕의 모후인 대비의 것이 되었지.
반대파를 쳐내면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해.(말했잖아. 이 여자 무척 똑똑하고 야심찬 여자라구.)

그런데 어느새 어린 왕이 자랐어. 성년이 되었지.  
조용히 대비는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모든 실권은 대비의 것이었어.
아직 젊은 왕도 굳이 어머니인 대비에게 반항할 이유가 없었어. 자긴 가만 있어도 엄마가 다 알아서 해주니까.

그런데 최초로 왕이 대비에게 반항하는 사건이 생겨.
바로 왕비를 정하는 일이었지.

조낸 좋은 가문출신인 대비는 당연히 며느리도 좋은 집안에서 구하고 싶었지만
젊은 아들이 엄마 기대와 달리 이쁜 궁녀랑 사랑에 빠진거야.
거기다가 그 궁녀는 아들까지 낳아주었지.
결국 왕의 소원대로 이 궁녀는 왕비가 돼. 이 여자가 윤씨야.

여기까진 좋았지. 그런데 이후 왕이 후궁들을 줄줄이 맞아들여.
당연히 왕비는 질투하게 되고 후궁들 역시 대비의 눈밖에 난 왕비따위 우습게 봤지.
(게다가 후궁들은 대신들이 정략적으로 결혼시킨거라 가문도 좋아. 왕비는 진짜 아무것도 없는 허름한 출신이야.)

하지만 왕비에겐 보장된 미래가 있었어.
지금 대비가 권력을 쥔 이유는 단지 그녀가 왕의 모후이기때문이야.
같은 논리로 미래의 권력은 세자의 모후인  왕비에게 가겠지.
실제 눈치빠른 사람들중엔 의지할 곳 없는 젊은 왕비에게 잘보여 미래에 보상을 받겠다는 생각도 하게되지. 대비와 달리 변변한 친정식구 하나없어도 왕비에겐 세자라는 든든한 언덕이 있었어.
세자의 생모... 이거만큼 막강한 권력도 없거든.

여기서 비극이 발생해.
폐비윤씨의 사건이 단순히 폐비와 후궁들의 갈등, 또는 폐비와 대비의 고부갈등으로 알려졌는데
왕실의 일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모든 권력을 쥔 대비의 입장에서 장차 이 권력을 물려받을 며느리를 어떻게 보는가는 결국 정치적인 문제야.
이건 여염집 고부간의 갈등과는 달라. 훨씬 더 비정해질 수 있지.  

대비의 입장에서
보자.
20대에 남편을 잃고서도 꿋꿋하게 아들 둘을 잘 키우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결국 아들을 왕으로 추대한 대비야.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보통의 왕들과 달리 성종은 사실상 어머니에게서 왕위를 받은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효심깊은 아들이 처음으로 자기 뜻을 주장한게 아내를 정하는 일이었어.
자기가 정해놓은 가문좋고 교육 잘받은 며느리 후보들을 물리치고..
얼마나 대단한가 봤더니 그냥 가난한 집안 먹여살릴려고 궁녀로 들어온 하찮은 어린 여자.

그래도 왕자를 낳아주었으니 참고 봐주었는데 이 며느리가 자신에게 순순히 굽히지도 않아.
게다가 세자가 자랄수록 어제까지 내앞에서 조아리던 신하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며느리쪽에 붙을 기미가 보인다고 상상해봐.

비 윤씨 사건의 핵심은 대비가 왕비를 죽일수 있을 만큼 실권자였다는 이야기야.
대충 구실을 잡고 후궁들과 대비가 모두 왕비를 쫓아내라고 난리치니 결국 왕은 조강지처인 왕비를 쫓아내. 그뒤에도 폐비 윤씨가 죄를 반성하지 않고 세자를 믿고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다는 식으로 모함을 해서 여기에 화가 난 왕이 결국 사약을 내려.

아무리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폐비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적힌 기록이 많아.
궁중에서는 질투로  왕과 다툰 것은 사실이지만 사가로 쫓겨난 후에는 자신때문에 어린 아들 세자까지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검소하게 살면서 남편인 왕이 노여움을 풀고 자신을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렸다고 해.

그러나 폐비의 바램과는 달리 왕은 궁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서찰 대신 사약을 보내.
(세자의 생모를 죽일 수는 없다고 몇몇 용기있는 신하들은 반대를 했어.
하지만 당시 실권자는 대비야. 대비의 가문을 비롯해서 동맹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어.
반대하던 신하들은 귀양을 가고 결국 폐비에게 사약은 내려지지.)

그때 폐비가 어떤 마음으로 죽어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다만, 이제 보호해줄 사람 하나 없이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진거나 마찬가지인 어린 아들에 대한 걱정은 많이 했을 것 같아.

폐비가 죽고나서 왕은 이 일을 영원히 불문에 부치라고 명령을 내려.
그래서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이 비극을 오직 당사자인 세자만 모르게 돼.

그때 세자의 나이가 7살쯤 되었을거야.
그뒤로 새로 왕비가 들어오고 세자는 계모의 손에서 자라게 되지.
계모인 새왕비는 곧 아들을 낳아. 친아들과 의붓아들을 차별없이 잘 키우긴 힘들었겠지.
세자와 동생은 이복형제기에 앞서 왕위의 경쟁자였으니까.

세자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를 길러준 엄마가 생모가 아니라는 건 미리 알고 있었던 걸로 보여.
생모가 죽은건 알았지만 왜+어떻게 죽었는지는 몰랐던거지. 어떤 식으로든 세자는 외로움을 느꼈을거야.

아무튼 세월은 무심하게 흐르고
이후 세자마저 쫓아내려던 대비와 후궁들의 압박에도 왕은 세자만은 보호해.

그리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성종이 마침내 숨을 거두는 순간,
자신을 미워하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후궁들,
수많은 이복형제들과 기세등등한 대신들에게 둘러 싸인채
어머니의 비극을 아직 몰랐던 세자는 다음 대의 왕위를 물려받지.

그가 바로 연산군이야.

좀 더 자세한 이야기

흔히 우리가 폐비(廢妃)라고 말하는 제헌왕후 윤씨는 희대의 악군 연산군의 생모이다.

그녀의 본관은 함안이고, 1445년 출생하여 어릴 때 궁궐로 입궁을 해 당시 자신보다 12살이나 나이가 어렸던 성종의 성총으로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제헌왕후 윤씨의 어버지 윤기견은 집현전에 출입을 할 수 있을 만큼 학문에 밝은 이였고, 판봉상시사라는 벼슬을 하사받았으나 일찍 세상을 떴다. 제헌왕후 윤씨의 생모 신씨는 윤기현의 두번째 부인이었는데 윤씨를 가졌을 때 태몽은 온 집안에 불빛이 환하게 비춰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녀가 악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 된 것이다. 연산군의 생모인 그녀는 후궁이 되기 이전에 검소하고 성실한 성품의 여인었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미색이 아름다워 성종의 성총을 받게 되었고, 내명부 종2품인 숙의로 진봉이 된다.

성종의 첫번째 왕후는 한명회의 작은 딸 공혜왕후 한씨
를 왕후로 맞아들였지만 그녀 나이 17살에 후사를 두지 못하고 성종과 혼례를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후기와는 달리 덕성이 있는 후궁들을 대상으로 왕비로 진봉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조선 초기의 후궁들의 대부분은 명문가의 여식들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연산군의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 역시 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인수대비의 의해 궁궐로 입궁을 하여 숙의의 후궁으로 진봉이 된 사례가 있었고, 세종대왕의 큰 아드님 문종 대왕은 세자시절부터 명문 대가댁의 여식들을 후궁으로 둔 사례가 있었다. 게다가 조선 초기에는 궁녀를 선발할 적에는 명문 대가의 서녀들을 대상으로만 뽑기도 했지만 후기에는 서녀들의 수가 급감하다보니 일반 민가의 여식들을 대상으로 뽑는 경우가 생겼던 것이다.

성종에게는 당시 여러 후궁들이 있었지만 그 중 자신보다 12해나 나이가 많은 숙의 윤씨만을 총애하고 있었다. 숙의의 검소하고 성실한 자태와 뛰어난 미색에 반해있던 성종은 그녀의 처소를 찾는 일이 많아졌고, 결국 그녀는 회임을 하게 된 것이다.


성종에게는
첫아들이었다.

공혜왕후 윤씨가 후사를 낳지 못하고 세상을 뜬 이래 성종은 자신의 혈육이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성종은 윤씨가 회임을 하자 반드시 원자를 낳으라며 원자를 낳으면 숙의를 왕비로 봉할 것이다 라는 약속을 하며 그녀에게 명나라의 고관부인들이나 차고 다닌다는 밀화놀이개를 선물했다.

숙의는 아들을 낳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성종의 후궁인 소용 정씨와 엄씨였다. 소용 정씨는 초계정씨로 역시 명문가의 여식이고, 소용 엄씨는 영월 엄씨로 소용 정씨와는 소꿉친구이며 중인 집안의 여식이었다. 하지만 미색으로 따진다면 정소용쪽이 훨씬 더 미려했으며 소용 엄씨는 그저 그런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는 정소용과 엄소용을 총애했는데 성종이 문안인사를 들러오면 그녀는 자주 정소용의 침실을 찾으라고 할 정도로 그녀들을 총애했다. 그녀들은 인수대비의 후배를 믿고 있었는데 숙의가 먼저 회임을 했다는 소식에 그녀들은 숙의가 일부러 낙태할 수 있겠끔 방술을 부리는 일들이 잦았다.

정소용은 엄소용과 결탁하여 민가에서 용하다는 무당을 몰래 궁궐로 입궁시켜 방술을 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방술이라는 것이 숙의의 처소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불태워베어 낸다면 낙태가 될 것이라 하는 방술이었다. 정소용과 엄소용은 자신의 수족들을 시켜 깊은 새벽 숙의의 처소로 가 나무에 불을 붙혔는데 불을 붙힌 것 까지는 좋았으나 나무를 베어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숙의의 처소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성종은 어느 못된 것들이 한 것이라며 궁녀들을 심하게 나무랐는데 그 때 숙의가 나서서 수라간의 궁녀가 간밤에 일을 하다가 실수로 그런 것 일 것이라며 성종을 달랬다.

하지만 숙의는 이 모든 내막에 대한 심증을 조금은 알고 있는 눈치이다.

하루는 내관들이 불탄 나무가 있으면 보기 흉흉할 것이라며 나무를 베어낼 것을 촉구했지만 숙의는 가만히 놔두는 것이 좋겠다며 그들에게 일을 하지 못하게했다. 일이 실패로 돌아간 그녀들은 숙의의 태아를 낙태하려 그 후에도 못된 방술들을 시행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고, 그런 와중에 숙의는 해산을 앞두고 있었다.

드디어 1494년 희대의 악군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연산군이 탄생되었다.

숙의는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으로 들떠 있었고, 성종 역시도 나라의 경사라며 다소 죄가 가벼운 죄인들을 석방시키는 등의 기쁨을 표했다. 성종은 아들의 이름을 융이라 짓고, 원자로 봉했다. 숙의는 아들을 낳아주어 성종의 약속대로 공식적인 왕후가 되었다. 하지만 인수대비는 그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정소용과 엄소용의 투기 또한 만만치 않아 그녀가 왕후 자리를 지키는 일은 참으로 고되고 힘든 것 중 하나였다.

인수대비는 명문대가의 여식을 왕후로 앉히고 싶어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은 왕후 윤씨의 집은 곤궁했다고 전해진다. 인수대비는 왕실의 인품과 격식에 맞는 많은 혼수품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인수대비의 이런 요구와는 달리 왕후 윤씨의 집에서 마련한 혼수품은 보잘것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정소용과 엄소용이 틈만나면 왕후 윤씨를 대비 앞에서 헐뜯으니 인수대비는 사사건건 왕후 윤씨가 하는 일들을 트집잡았다.

윤씨가 왕후가 되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성종은 다른 후궁들의 처소에 출입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녀가 왕후 책비례를 끝내고 내외명부 후궁이나 부인들에게 인사를 받는 자리에 정소용이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출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후 윤씨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 "감히 왕후에게 문안을 들지 않는 후궁이 있다니 석고 대죄를 하라"라고 정소용에게 명령했다.

그 날 한여름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한여름에 땡볕 아래서 석고대죄를 드리는 정소용의 모습을 본 인수대비는 왕후가 투기를 한다며 정소용의 석고대죄를 왕후의 허락없이 풀어주었고,
이 떄부터 왕후 윤씨와 인수대비의 신경전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성종이 왕후 윤씨의 처소를 출입하는 것이 뜸해지자 왕후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성종은 역사상 가장 많은 후궁을 본 대왕으로 그녀들의 처소를 출입하는 동안 왕후 윤씨의 처소를 까맣게 잊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낳은 아들 융이 허약하게 태어나 병치레가 잦아지자 하는 수 없이 월산대군의 집으로 피접을 가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불안해진 왕후 윤씨는 어머니 신씨와 상의하여 남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술을 시행했는데 어린 아이의 인골을 남편 성종이 잘 출입하는 후궁의 처소 뒤뜰에 묻어두면 그 후궁이 죽는다고 하여 그 방술을 시행했지만 소용 없었고, 또 하나는 사향주머니를 몇 개나 몸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민간요법이 효과를 볼 수 없는 법. 윤씨는 마음의 병을 얻어 신경이 날카로워져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경을 거스라는 궁녀나 후궁이 있으면 엄히 질책하곤 했다.

성종은 문득 왕후에게로 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왕후 윤씨가 있는 서온돌로 발길을 돌렸는데 윤씨는 이런 남편을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기는 커녕 성종을 두고 비아냥 거렸다.

성종은 자신이 찾아주지 않아 야속한 마음이 들었나보다 하는 너그러운 마음에 미안하다며 왕후 윤씨를 껴안으려 했지만 왕후는 자신도 모르게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해 성종을 밀치려다가 며칠간 깎지 않았던 손톱이 화근이 되어
성종의 용안을 긁게 되었다.

후궁이나 승은을 입기로 예정된 궁녀들은 왕을 뫼시기 전에 목욕으로 몸단장을 하고 손톱과 발톱을 깎는 것이 예의이다. 이 것은 손톱 발톱으로 인해 왕의 용안이나 옥체를 상하게 할까 싶어서 그녀들은 자주 이렇게 손발톱을 깎았다.

순간 왕후는 당황하여 성종의 얼굴을 보려 했으나 성종은 필요없다며 서온돌을 나가버렸고, 왕후는 울면서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때였다.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인수대비는 불같이 노하여 왕후 윤씨를 심하게 나무랐다. 게다가 정소용과 엄소용도 이를 놓치지 않고 인수대비 앞에서 왕후 윤씨를 욕하는 일들이 잦았다.

인수대비는 저런 불경스러운 것을 국모로 둬서는 안된다 라고 생각하여 성종에게 폐비를 할 것을 주청드렸으나 성종은 실수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 해달라며 빌었다. 왕후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명빈 김씨와 숙의 하씨등이 대비 앞에서 용서 해달라고 주청을 드렸다.

하지만 대비는 이는 왕후가 주동한 일이라 생각하며 그녀들의 청을 무시했고, 거듭된 인수대비의 주청에 의해 아들 성종은 내키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윤씨는 졸지에 왕후에서 폐비가 된 것이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눈물로 용서를 빌어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는 눈물로 궁궐을 따날 수 밖에 없었고, 아들 융의 얼굴도 재대로 보지 못하고 사가로 방출되었다. 인수대비는 앓던 이가 쏙 빠진 것 마냥 기뻐했다.

정소용과 엄소용도 서로 왕후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 더 인수대비 앞에서 아첨과 뇌물을 주었지만 인수대비는 그녀들의 허를 찌르는 결정적인 선택을 했다. 인수대비는 윤호의 딸 숙의 윤씨를 그녀가 두 살 때부터 옆에서 끼고 그녀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는데 그 때문인지 숙의 윤씨는 정숙하고 기품이 있었다. 인수대비는 숙의 윤씨를 왕후로 진봉하게 성종을 부추겼고, 성종은 제2 계비를 맞이하니 그 분이 바로 정현왕후 윤씨이다.

정현왕후 윤씨의 본관은 파평으로, 슬하에 훗날 중종 임금이 되는 진성대군과 신숙공주를 낳게 된다. 하지만 신숙공주는 어릴 때 병치레를 하다가 죽어 자신의 슬하는 진성대군 밖에 없었다. 왕후가 된 윤씨는 인수대비의 말씀대로 투기를 하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낳은 아들마냥 연산군을 아껴주고 사랑해주었다. 이 점이 성종과 인수대비를 흐뭇하게 만드는 것이다.

졸지에 닭쫓던 개가 되어버린 정소용과 엄소용은 대비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인수대비는 그들이 서운해 할 것이라 생각해 그녀들의 직급을 종1품 귀인으로 승격시켜주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세자 융은 커가는데 성종대왕은 아들의 모습을 보자 순간 폐비 된 윤씨가 생각났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불러 들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즈음 윤씨는 폐출 당한 이래 젊은 시절의 검소하고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돌아와 성종의 건강과 아들의 안녕을 빌고 있었다. 그리고 밥도 잡곡밥과 소금으로만 하루 세끼를 먹고 있었고, 옷도 무명옷으로 입고, 화장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녀는 언젠가 성종이 자신을 다시 불러들일 날이 올 것이라며 매일 같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가 사는 곳이 궁금해서 내관 하나를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내관은 성종의 분부 대로 폐비 윤씨가 사는 모습을 보고 드리려 하나 도중에 엄귀인과 정귀인에게 붙들려 인수대비가 있는 곳까지 불려가게되었다.

인수대비는 막대한 돈을 내놓고 아들 성종에게 "폐비가 지난 날의 잘 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다고 전해라." 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자 그 내관은 인수대비가 준 돈을 챙겨들고 성종 앞에 나타나 "폐비마마는 아직도 잘 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있으며 항상 비단 옷에 진한 화장을 하며 아직도 자신이 중전마마인 양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가관이었습니다." 라고 거짓 고변을 하게 된다.

이 말을 들은 성종은 너무도 화가 나 그 순간 품고 있던 폐비 윤씨의 좋은 생각 마져도 지워버리게 되었다. 그는 우선 폐비의 처소로 보내지는 무명과 쌀을 보내는 일들을 중단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인수대비의 부추김으로 사약까지 내리게 된다.

성종은 처음 아들 융이 사약을 받고 죽어간 어미의 일들을 안다면 골치 아파 진다며 어머니 인수대비의 간청을 뿌리쳤으나 여기에 합세한 정귀인과 엄귀인등이 성종을 부추겨 결국에는 1482년 대신들과 상의한 끝에 그녀에게 사약을 내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 일어날 '갑자사화'의 효시가 되는 사건이다.

윤씨는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기 직전 그 곳에 있는 여러 군관들에게 말한다.
"언젠가 내 이 한맺힌 원혼을 나의 아들 융이 대신 갚아 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 그 때 원삼에 피를 일부러 뿌리고 죽었는데 연산군이 이 금삼의 피를 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시행한 것이다.

훗날 정귀인과 엄귀인은 연산군이 모진 고문을 하여 죽었고, 그녀들의 소생인 봉안군, 안양군, 경혜옹주, 공신옹주들이 죽거나 옹주의 작위를 박탈 당해 관노로 전략하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죽게 했으며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과 이복누이 동생 휘숙옹주를 강제로 범하는 등의 폐륜을 저지르게 되는 폭군이 된 것이다.


제헌왕후 윤씨의 모든 것을 빼앗은 정현왕후 윤씨

쫓겨난 윤씨는 어머니 신씨와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궁궐에서 나온 중전의 빈자리를 그냥 둘 수 없어, 다섯명이나 되는 후궁 중에서 한 명을 승격시키기로 하였다. 1480년 10월 정작 승격된 후궁은 윤씨와 다투었던 엄씨나 정씨가 아니라 열살난 숙의 윤씨였다. 엄씨나 정씨를 왕비로 삼을 경우 윤씨의 폐비에 반대했던 신하들이 들고 일어설 수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윤씨가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왕비로 승격된 결정적인 이유는 인수대비의 지지였다. 1462년 6월에 우의정 윤호와 부인 전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현왕후 윤씨는, 제헌왕후와는 달리 두 살 때 궁궐로 들어와 인수대비의 가르침에 절대 복종하고 따랐던 것이다. 윤씨는 이전 왕비가 투기 때문에 쫓겨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성종이 "투기하지 않는 사람이 드문데 다행히 어진 왕비를 얻어 마음이 평안하다" 고 말할 정도로 여성 편력을 못 본 체했다.

윤씨는 진성대군과 신숙공주를 두었는데, 진성대군은 훗날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정현왕후는 제헌왕후의 자리를 빼앗았고, 그녀의 아들은 제헌왕후의 아들 자리를 빼앗은 기묘한 인연인 셈이다. 1530년 8월 예순여덟살까지 천수를 다 누린 정현왕후의 능호는 선릉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성종의 묘와 다른 언덕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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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일단 출발점이 되는 성종

성종의 도학 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
(1457-1494, 재위 기간 1469년 11월-1494년 12월, 25년 1개월)

"성종은 치세에 능했다.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 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해나갔다. 그 결과로 그는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뜻의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었을 만큼 조선 개국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 성종이 편전을 장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성종은 우선 조정의 서무 결재에 원로 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또한 2년 뒤인 1478년에는 참판 이하의 모든 문무신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 현상을 막았으며, 임사홍, 유자광 등의 공신 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 출신 신진 세력들의 진로를 열어 주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고려말의 대표적 학자인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진 사림 세력은 왕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이 주축이 된 훈구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조금씩 후퇴하였다. 성종은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또한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성종은 이런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도학 정치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그 일환으로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1489년에는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하다'는 내용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보냈는가 하면, 1492년에는 도승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고, 일정 숫자의 사찰만을 남긴 채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였다. 한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심지어 경학이나 강의에만 능해도 관리로 등용하거나 자신의 벗으로 삼기도 했다."

"성종은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 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였다. 그 결과 조선 초부터 끊임없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조선 백성들은 개국 이래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성종에 대한 좋은평가


"하지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 퇴폐 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 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상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를 알게 해준다."

결국 폐비윤씨-연산군으로 내려오는 비극적인 일들은 성종의 잘못도 크다고 할수있네!!
여자를 너무 밝혔어 ㅡㅡ;

다음은 영화에서 사고사 처리되는 인수대비,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연산군이 머리로 받아서 죽었다는데 머리가 꽤 단단했나 보지 ㅋㅋ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1437-1504)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성종의 계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이 사건으로 후에 연산군이 폐비사건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하자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덕종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다음은 폐비윤씨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에는 극약인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 뻔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었던 적이 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이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 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되고 만다."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계비 정현왕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오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니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위에 기록을 잘보면 인수대비가 윤씨를 모함했다는데 아마 이 여자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때부터 꺼림직했을꺼야 ㅋㅋ 사실 저런상황에서 연산군이 진실을 알면 인수대비는 죽을수밖에 없는거지. 조선왕조를 보면 친족끼리 죽이는건 예사로 있는일이더라구 권력을 위해서라면 내생각인데 아마 인수대비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기전까지 연산군을 제거하거나 최소한 왕자리에는 못앉히게 노력했을꺼같아.

 

다음으론 주인공 연산군

그전에 "성종은 도학을 숭상하고 스스로 군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가 넘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호기는 그의 가족관계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30명에 가까운 자식들을 얻었다. 결국 이런 호기가 평지풍파를 예고하는 불씨를 낳고 말았다. 그 불씨가 바로 희대의 폭군 연산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는다 여자 너무 밝히지말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세자 융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출 당해 사사된 사실을 모르고 자라났다. 융은 윤씨가 폐출될 당시에 불과 네살바기 어린 아이에 불과했고, 또한 성종이 폐비 윤씨에 대한 사건을 일체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자 융은 어머니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인 줄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천륜은 속일 수 없었던지 융은 정현왕후 윤씨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 물론 정현왕후 역시 폐비의 자식에게 사랑을 쏟아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 인수대비는 융에게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이 고울 리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에게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융의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었다." 세자 융이 곧 연산군인데 역시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군 자기 생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다니 참 뭐라 할말이 없다.

아. 그리고 역시 인수대비는 세자책봉에 반대를 했네.

"성종은 이런 성격을 가진 융을 탐탁치않게 여겼지만 1483년 그를 세자로 책봉한다. 이때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그를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행한 어린시절을 겪고 자란지라

"성종과 주위 사람들이
세자의 다소 포악한 성품을 우려했던 일화들이 야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다음의 두 가지다.
 
성종이 어느 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 등을 핥아댔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죽여버렸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이다. 융에게는 허침과 조자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조자서는 엄하고 깐깐한 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융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자주 수업 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자서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조자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자서는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융의 이 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다.
융은 왕위에 오르자 조자서를 가장 먼저 죽여버렸던 것이다."



연산군의 등극과 광적인 폭정
(1476-1506, 재위 기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박원종의 반란으로 폐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연산군도 처음부터 이랬던건 아니란다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 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의 바로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화 정책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심지어는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의 이 같은 사치 행각은 결국 국고를 거덜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하려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이에 반발하여 왕과 대립하며 연회를 줄이고 국고를 아낄 것을 간청한다. 이때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 윤씨 사건을 연산군에게 밀고하게 된다."

임사홍이라는 사람이 연산군한테 폐비윤씨 사건을 밀고했다네. 그럼 그전까지 연산군은 정말 몰랐다는소리??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가 폐비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내막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임사홍의 밀고로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살생극을 자행한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 갑자사화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사람 세력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부당한 공신전 몰수 행위를 비판하며 향락적인 궁중 생활에 제동을 걸었던 중신들이었다. 이때 연산군은 대신들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머리를 받아 절명케 하는가 하면, 윤씨 폐출에 가담한 성종의 후궁들과 그 자손들, 그리고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그는 막상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 이어지자 민심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급기야 1506년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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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여인, 장녹수. 그녀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출처: 네이버 오픈사전

연산군의 여자관계를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여인이 장녹수이다.

포스터는 옹녀+변강쇠해도 되겠다.ㅋㅋ



연산이 분노했던 그대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임금의 황음 내지는 못된 첩이 한 인간과 나라를 망친다는 식의 역사이해를 가져 왔다. 바로 그런 역사관에 의해 연산시대의 악녀로 자리매김된 여인이 장녹수이다.

장녹수는 연산군 8년 3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연산이 승지에게 그녀의 부친 장한필의 내력을 조사시켰다는 기록인데, 이 해부터 장녹수에게 빠졌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이 때쯤 연산과 장녹수가 만났던 것같다.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은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19년에 충청도 문의현령까지 지냈다.

그러나 더 이상 크게 출세하지는 못한 것 같다.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었고 신분도 천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면 자녀는 자동으로 천인이 되었으며, 그 자녀의 소유권은 모계를 따라 가도록 되어 있었다.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종과 결혼하고, 제안대군의 여종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친도 제안대군의 종이 아니었나 싶다.
 
장녹수의 젊은 시절은 불행했다. 가난하고 신분도 천한 여인이라 몸을 팔아서 생활했고 결혼도 여러 번 했다. 그러다가 제안대군의 집 종과 결혼했다. 아들 하나까지 낳았는데, 이 가정도 힘들었던지 다시 생활전선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닥에서 몸을 파는 수준에서 벗어나 노래와 춤을 배워 정식으로 기녀생활을 했다.
 

희대의 바람둥이를 매혹시킨 장녹수의 매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과 장녹수 (정진영, 강성연)


의외로 그녀 탁월한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실록에서는 그녀가 그냥 중간 수준의 얼굴이라고 표현했다.나이도 연산보다 두세 살 이상 많았다. 그러나 30대에도 16세의 앳된 소녀처럼 보일 만큼 동안이었던데다 영리해서 남자의 뜻을 잘 맞추고, 아양 떨고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연산이 남다르게 총애한 여성은 장녹수 외에도 많았다.

그러나 장녹수는 그들 중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별한 역할을 했다. 연산은 장녹수를 거의 아내처럼 대우했다. 연산의 왕비 신씨는 신승(숭)선의 셋째 딸이었다. 연산과 신비의 사이는 좋았다. 연산은 신씨(훗날 폐비됨)를 현모양처요 훌륭한 국모로 인정하고 존중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왕과 왕비의 사이였다. 연산이 국왕이 아닌 세속적 인간으로 돌아올 때는 장녹수가 그의 아내가 되어 주었다.  때로 장녹수는 연산을 어린아이같이 조롱하고 연산을 학대하며 욕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일을 기록한 사람은 혀를 찼지만, 연산은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고, 그런 세계를 맛보고 싶었던 것같다. 

남자 홀리게 생긴 요부 장녹수의 이미지


그러나 섣불리 연산에게 그런 공간을 연출했다가는 당장 국왕 능멸죄에 걸렸을 것이다. 그 역을 감당하기에는 아주 특별한 매력과 재능이 필요했다. 아마도 장녹수는 오랜 창녀생활을 통해 남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하고 충족시켜 주는 재능을 터득했던 것같다. 연산이 아무리 화가 났다가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며 웃었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는가!

섹시한 강수연씨. 실제 영화 속에서는 아주 조신했다고 함


사적인 청탁과 인정을 배제하기는 불가능한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녹수가 인사나 이권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개입한 것 같지는 않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위에서 하던 부정들은 과거부터 종친과 훈구세력들이 늘 해오던 일들이다. 수령이나 하급관직은 몰라도 녹수의 청탁으로 고위직에 올랐다는 사람도 다 종친이나 관료들이었다.

그녀의 친척 중에서 제일 출세한 사람이라면 형부 김효손인데, 연산군 10년 이전에는 겨우 7품 무관직인 사정(司正)을 받았을 뿐이다. 6품과 7품은 질적 차이가 있어서 7품 이하는 정치적 비중이 거의 없는 단순 행정 또는 실무직에 해당하며, 서리 출신들도 여기까지는 많이 진출했다.

연산군 10년에서 12년 사이에 김효손은 벼락승진을 해서 정3품 당상관까지 올라갔다. 아마도 이 조치에 대해 많은 관료들이 상당히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녹수의 일가로서 출세한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는 점은 고려해 줄 만하다. 녹수의 집을 건축할 때 대간을 보내 감독을 시킨 것이나 내시와 승지 등에게 그녀의 가마를 뒤따르게 한 것 등도 그녀의 청탁이 아니라 연산이 항상 궁리했던 '관료 길들이기'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의 남자 장녹수 이미지

 그러나 관료들은 종친과 고급관료가 천인 출신의 계집에게 굽실거리고, 사족의 집과 땅이 그녀의 손아귀로 들어가며, 그녀의 종들이 자신들의 종을 우습게 보고, 상권, 노비, 토지 등의 이권다툼에서 자신들을 이기고, 자신들의 이권을 앞서서 채가는 현상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행위였고, 왕이나 세상 사람들이 기억해서는 안 되는 전례였다.

그녀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녹수와 전비 등은 당일로 군기시(지금의 서울시청과 서울신문사 사이)앞에 끌려가 처형당했다. 많은 후궁들 중에서 녹수와 전비가 비난과 처형의 대상이 된 것은 그녀들의 재산이 많았던 탓도 있지만(그 중 상당수는 연산이 공신, 관료들로부터 빼앗은 것들이다), 그녀들의 출신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들의 진정한 죄는 자신들의 주제로서는 참여해서는 안 되는 특권에 참여한 죄였을 것이다. 장녹수는 미인도 아니면서,또는 미천한 출생인 집안이였기에 남달리 신분에 대한 애착이 강했을 것이다. 또한 연산군은 어릴 때 자신의 어머니가 비참하게 죽은 것과 할머니를 비롯한 주위에 대한 냉대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이 서로 서로 간에 깊은 관계를 맺을수 있었던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아무튼 연산군은 희대의 폭군이었다.
하지만 녹수는 희대의 악녀도 아니었고, 가슴 깊이 원한 맺을 정도로 사무친 그 무엇도 없다. 다만 천박한 그 자체가 오히려 연산이 바라보는 미였는지도 모른다.

클릭하면 크게 나와요~

왕의 남자 장녹수(강성연)과 연산군(정진영)


그 시대는 그 시대 나름대로 특징이 있듯이 연산의 시대의 인물로서 손색함이 없었던 여인이 바로 장녹수가 아닌가 추측한다. 

출처: 네이버 오픈 사전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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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당론
1575 년(선조8)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림세력들이 이른바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건이다.
이는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의 추천권을 놓고 벌인 싸움인데, 이 때문에 일제 시대 이래 당쟁의 근본 원인이 개인적 감정 싸움이라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왕실 외척이지만 사람들을 보호한 심의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선배 정치인과, 왕실 외척 지위를 이용한 심의겸의 정치적 비리를 용서할 수 없다는 후배 정치인의 대립이었다.


기축옥사
1589 년(선조22)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통 정여립 옥사, 또는 정여립 반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다.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데도 정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동인 중에서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전라도 지역 서경덕, 조식 학파의 수많은 인물들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이후 심각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정여립이 이씨왕조가 정씨왕조로 바뀐다는 정감록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중반란이라는 설, 선조 임금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일어나게 된 사건이라는 설 등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예송논쟁
왕실에 적용할 상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논쟁으로서, 1659년(현종 즉위년) 논쟁과 1674년(현종 15) 논쟁 두 번이 있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효종과 효종왕비의 상사 때, 어머니 자의대비가 큰아들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둘째 아들 이하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였다. 이는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파견된 분조에서 사실상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는 소군주로서 권한을 행사했지만, 국내에 돌아온 이후 의문 속에 죽음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갑인 복제논쟁은 결국 숙종 즉위년부터 남인 주도 정권을 출범시켰다.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였다. 효종은 아시다시피 인조의 둘째 아들(봉림대군)로 적통이 아닙니다.(적장자는 소현세자) 이 효종이 승하하였는데 문제는 당시 효종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상복을 언제까지 입고 있어야 하는 지가 관건이었다. 서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므로 1년간 입기(기년설)를, 남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지만 왕이므로 3년간 입기(3년설)를 주장하였는데 결국 서인의 1년설이 인정받았다.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 1674년):
효종비인 인선대비가 승하하자 역시 조대비 복제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였다. 서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었기에 그 비인 인선대비 역시 적통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6개월간 상복 입기를 주장(대공설)하였다. 그에 반해 남인은 왕비의 승하이므로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기년설)하였는데 이때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이 때까지만 하여도 서인과 남인은 서로가 정책을 겨루는 붕당정치로 본질을 흐리지 않고 잘 흘러갔다.


경신환국, 경신대출척(1680년):
1680 년(숙종6),  갑인예송 이후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남인 일당정권이 서인에 의해 대규모로 숙청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급격히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 정권교체는 남인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위한 새로운 군대인 체부를 설치함으로써, 당시 숙종의 신임을 받던 서인계 외척 김석주의 군사권을 약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부터는 서로 상대당을 제거하였으며 붕당정치의 본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서인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남인 허견과 왕족 복선군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숙종에 고하여 남인 세력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서인은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분열되여 4색 당파(북인,남인,노론,소론)를 이루었다.


임술삼고변
1682 년(숙종8)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다. 훗날 노론이 된 왕실 외척 김석주, 이사명, 김익훈 등이 밀정을 파견하여 남인들에게 역모를 권유한 후 이를 밀고하는 등의 정탐정치를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물의를 야기시킨 사건이다. 당시 서인 영수 송시열은 이를 자신이 스승의 후손들을 잘못 교육시킨 탓이라 하여 결국 정탐정치를 자행한 이들을 변호하려 하였고, 이를 서인 소장파 인물들이 탄핵하고 윤증 학파가 이에 합세함으로써 결국 서인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반대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기사환국
1689 년(숙종15) 서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남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장희빈이 아들을 (후일의 경종) 낳자, 곧바로 왕위계승권자로 정하려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함으로써 일어났다. 이로써 서인 영수 송시열은 사사당하였고, 서인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되었으며, 장희빈은 왕후에 봉해졌다.

숙종이 희빈 장씨의 소생(연령군)을 세자로 책봉하려하자 서인이 반대하였는데 이에 숙종은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을 재등용하였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하는데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사사되고 많은 서인들이 유배되었다. 숙종은 그 후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렸는데 이에 반대하며 상소를 올린 많은 서인을 숙청시켰다.


갑술환국, 갑술환사
1694 년(숙종20)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정권교체는 서인계와 남인계 일부 집단의 정탐정치 시도에서 발단되었다.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소론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폐비사건을 뉘우치고 있던 숙종은 이 일을 기화로 남인을 숙청하고 소론을 등용하였는데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한다. 폐비되었던 인현왕후가 다시 중전으로 복위되었고, 반면에 장희빈은 왕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기사환국 때 사사된 송시열 등이 복권되었으며 남인은 이 사건 이후 중앙정계로 진출하지 못하였다.

또, 인현왕후가 죽은 후 희빈 장씨의 숙소에서 저주하는 물건이 나오자 숙종은 희빈 장씨를 사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소론은 다음 왕의 어머니이므로 사사는 안된다고 주장하였고 노론은 사사됨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숙종은 노론의 의견을 쫓아 장희빈을 사사하고 노론을 중용하기 시작하였는 데 이것이 후에 또 다른 사건을 낳아 이후 왕세자(경종)의 보호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병신처분

1716 년(숙종40) 이른바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에서, 송시열이 옳다고 판정한 숙종의 처분이다. 갑술환국 이후 대체로 소론이 주도하던 정권이 1710년(경인환국) 이후 노, 소 대립 국면이 되었다가, 이 결정으로 노론 일당정권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윤증의 스승 송시열이 이미 죽은 윤증의 아버지를 욕함으로써,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옳으냐, 그래도 스승을 따르는 것이 옳으냐 하는 난해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때문에 이후 현제와 친척, 같은 문하생 사이에서도 당색이 갈라질 정도로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시켰다.


신임옥사
1721년(경종1) 12월에 노론 주도 정권이 소론 일당정권으로 급변한 신축환국과, 다음해 목호룡이 이른 바 노론 및 연잉군(후일 영조) 측근 인물들의 경종 시해음모를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임인옥사, 이 두 사건을 합쳐서 지칭하는 것이다.

신축환국

신축환국은 노론당이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 직후, 다시 대리청정을 청함으로써 노론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다가, 소론과 남인의 공격으로 실패함으로써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다. 숙종이 죽고 경종이 등극하였으나 몸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후사를 잇지 못하였는데 노론은 당시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후에 영조)을 세제로 삼아 만일을 대비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론은 왕이 젊고 건강이야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라 하며 노론의 불충을 따져 탄핵한다.

임인옥사
이 와중에 목호룡의 고변사건이 터졌는데 목호룡은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고 왕세제인 연잉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고 주장한다. 목호룡의 이 고변은 소론에서 사주를 받아서 한 일이 후에 드러났으나 당시 이 사건으로 노론은 많은 인물들이 화를 입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노론의 4대신으로 전 영의정 김창집, 전 좌의정 이이명, 전 좌의정 이건명, 전 중추부판사 조태채로 이들이 모두 사사됨으로써 노론의 세력이 많이 축소되었다. 노론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을 올바른 노론 붕당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을사환국
1725년(영조1) 2월 영조 즉위 직후 소론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노론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자신을 적극 지지하는 노론당을 통하여 강력한 군주권을 세움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영조의 이도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정미환국
1727 년(영조3) 7월 노론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소론이 주도하는 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변화는 소론을 일망타진하려는 데 급급한 노론당을 퇴진시키고, 그대신 온건한 탕평파 정치집단을 키움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영조의 의도 때문에 일어났다.


무신란, 이인좌의 난
1728 년(영조4) 3월에 일어난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대규모 반란이다.
실제 반란군을 지도하여 청주와 거창을 점령한 남인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이인좌의 난 또는 정희량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 반란은 당시 임금인 영조가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전국에 퍼져 소론과 남인의 급진파가 제휴함으로써 일어났다. 그러나 전국적인 규모의 병란으로 발전한 데는 중간층 및 하층민의 적극적인 참여, 전국적 장시망의 이용 같은 새로운 요소들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영조가 등극하자 소론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이에 당시 소론의 과격파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의문사와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다. 정치적으로 배제된 남인 세력 일부가 참여한 이 난은 후에 영조가 노론만을 중용하게 된 원인이 된다.

-> 조선 후기 당쟁은 왕(숙종)에 의한 계획적인 측면도 있었다. 숙종은 서인과 남인 간의 대결을 통해 왕권 확립을 노리기도 하였으나 이런 잦은 당쟁은 결국 조선의 정치가 보수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서로간에 불신만을 간직하고 비방과 폄하만을 일삼음으로써 당시 사회적 변화를 정치가 못 따라간 것이다.


기유대처분
1729 (영조5) 8월 본격적인 탕평정치가 시작됨을 알린 국왕의 대처분이다. 1728년 무신란이 평정된 이후, 임인년 옥사로 죽은 노론 4대신 중에서 자식이 연루되지 않은 이건명과 조태채의 무죄를 선언하고, 노론,소론,남인 붕당 모두에 충신과 역적이 다 있으므로, 이제는 붕당을 타파하고 각 당파 안의 인재를 함께 쓰겠다고 한 선언이다.


경신처분
1740 년(영조16) 1월에 임인년 옥사로 죽은 노론 4대신 모두는 영조의 왕위승계를 위해 노력했을 뿐이므로 아무 죄도 없다고 결정한 영조 임금의 처분을 말한다. 이와 동시에 4색당파를 모두 등용하는 대탕평이 제창되었고, 사림정치의 상징인 청요직이 혁파되었으며, 세 군영에 의한 도성 수비체제가 완성되는 등 국가 관료체제가 개혁되었다. 이후 김재로, 송인명, 조현명의 탕평파 3상정권이 장기간 유지되는 등, 정국이 안정되었다.


을해옥사
1755 년(영조31) 2월에서 5월까지 당시 영조를 비난한 나주의 괘서사건과 뒤이은 심정연의 과거답안지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소론계 명문 가문과 학자들을 일망타진한 정치적 사건을 말한다.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정치적 사건이 대개 그렇듯이 나주 괘서 사건도 실제 작성자 등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의문투성인데다가, 이를 계기로 지나치게 많은 소론 인물들이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정치적 조작의 가능성도 많다고 지적된다.


임오화변
1762 (영조38) 5월 당시 대리청정중이던 왕세자를 아버지 영조가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을 말한다. 이를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임오화변이라고 호칭하였다. 사건의 원인은 사도세자의 울화병(정신병)에 있었다고 하지만, 직접적인 발단은 석 달 동안 허락 없이 평안도를 여행한 데 있었다. 이 사건은 부자간 갈등의 비극적인 결말 때문에 특히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실제 내막은 아주 복잡하다.


신해통공
1791 년(정조15) 봄, 몇 달 전에 출범한 남인 채제공 독상 정권을 위기에 빠뜨린 서울의 물가폭등과 생필품 품귀 사태 해결을 위해, 채제공이 건의하고 정조가 강력하게 후원하여 밀어붙인 경제구조 개혁조치를 말한다. 당시 국가기관에 일정한 경비를 납부하는 대신 특정 상품의 독점판매권을 가졌던 시전의 특권을 폐지하여 동등하게 판매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서울에서 넓게는 지주들, 좁게는 기득권층의 생산물을 취급하는 대가로 독점판매권을 누리던 시전상인들의 특권이 박탈되고, 농민들의 생산물을 취급해온 도시와 그 주변 소상인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상품유통구조의 변혁이 일어났다.


영남만인소
1792 년(정조16) 4월 사도세자 사망 30주기를 맞아서 영남 지방 사대부 만 여 명이 연명하여 올린 상소문이다. 상소문 하나에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사례는 조선왕조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내용은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충성했을 뿐 실은 아무 죄도 없었음을 선포함으로써, 정조의 군주권을 강화하여 강력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문체반정운동
1792 년(정조16) 10월, 11월에 청나라 패관소품의 경박한 문체를 쓴 노론계 신진기예 남공철, 심상규, 김조순과 소론계 이상황, 그리고 그들의 스승이자 북학파의 지도자 박지원을 지목하여 견책을 내리고, 올바르고 순수한 문체를 공부하여 올리도록 함으로써, 전체 사대부의 문풍을 쇄신하려 한 운동을 말한다. 정치적으로는 노론들이 공격했던 남인들의 서양학 운동 역시 청나라 패관소품의 영향이니, 올바른 학문인 정학이라는 입장에서는 노론과 남인 학문 모두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상호 비방과 공격을 중지시킨 이른바 이열치열의 통치술에 해당한다.


금등사건
1793 년(정조17) 5월
수원 유수로 있던 채제공이 영의정에 임명된 후 '사도세자의 원수를 없애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일어난 시파와 벽파의 격렬한 정쟁을 해소하기 위해, 정조가 신하들에게 보여준 영조의 친필 쪽지를 금등이라고 한다. 영조가 자신을 위하여 죽은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을 후회하는 내용으로서, 영조가 사도세자의 법적 어머니인 정성왕후 위패 아래에 숨겨둔 것이다. 이를 알고 있던 사람은 영조, 정조, 채제공 3인뿐이었다 한다. 이 금등이 공개됨으로써 시파의 정치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지만, 이후 정국은 시파와 벽파의 격렬한 정쟁 상황으로 돌입하였다.


오회연교
1800 년(정조24) 5월 회일에 탕평정치 추진을 위한 자신의 통치술을 신하들에게 자세하게 밝힌 정조의 교시를 말한다. 당시 정조는 정치원칙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영조가 옳다고 처분한 노론의 정치원칙도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또한 다음번 재상은 노론이 기피하는 남인 강경파 중에서 나올 것임도 암시하였다. 그런데 회일은 곧 달이 없는 캄캄한 날이고, 그후 이십 여 일만에 군주인 정조가 사망했으므로, 이를 임금의 죽음과 연관시켜 보통 오회연교라고 한다.


신유사옥
1801 년(순조1) 천주교 신봉자 처단을 구실로 정조가 키워놓은 남인 청류당 인물들을 정계에서 철저하게 제거한 정변을 말한다. 당시 노론 강경파 심환지와 정순왕대비의 인척 김관주 등이 주도한 노론 벽파정권은 천주교 신자들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사도세자의 후손, 혜경궁 홍씨의 친척, 정조의 측근 신하인 노론 시파, 북학파들까지 다수 제거하였다.


을해당론 ~ 신임옥사 까지는 붕당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이고
을사환국 ~ 오회연교 까지는 영 · 정조시대의 주요 정치 사건이며
신유사옥은 정조 사후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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