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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사랑에 살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최정미 (유레카엠앤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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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의 옷을 입은 칙릿 소설 (※Chick Lit; chick + literature)은 젊은 여성을 겨냥한 영미권 소설들을 지칭하는 신조어)

한 여인이 있었다. 신분의 그늘이 재능을 압도하던 시절, 왕비가 되기에는 조금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탁월한 지성과 재능으로 이를 극복한 여자, 장옥정.

역사는 그녀를 아름다움에 의존해 치맛자락을 휘둘러댔던 희대의 요부로 기록했지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장옥정의 내면은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남자들은 <칼의 노래>를 통해 이순신의 리더십을 배우고,
여자들은 <사랑에 살다>를 통해 시대의 알파걸 장희빈의 지성과 열정을 배워야 한다."


장희빈, 역사가 왜곡한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진실 1, 그녀는 뛰어난 지성을 가진 조선 시대의 알파걸이었다

역관의 딸로 태어나 침방나인이 되었고, 훗날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의 어머니였으며, 6년여 동안이나 왕비의 자리에 머물렀으나 희대의 요부 장희빈으로 생을 마감한 여인, 장옥정.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의 계비(繼妃)였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장희빈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사료는 인현왕후의 삶을 그린 '인현왕후전'이 전부. 그런데 이 소설은 인현왕후를 모시던 한 궁녀가 썼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다. 누가 썼든, 아마도 '인현왕후전'은 철저히 그녀의 입장에서 쓰인 승자의 기록임에 틀림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영화로, 책으로, TV 드라마로 그려진 장희빈은 이렇게 편향될 수밖에 없었던 기록에 기대어 세상에 둘도 없는 요부로, 조선시대 최고의 팜므파탈로 박제되었다.


작가 최정미는,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으니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인현왕후전'의 대척점에서 장희빈의 억울했을지 모를 사연을 대변해줘야 공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로서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해설을 기반으로, 장옥정이라는 한 여인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1688년, 이순이 즉위한 지 열네 해째 되던 해,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온 궁궐을 들뜨게 했다. 왕자의 탄생이었고, 훗날 숙종 이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경종의 탄생이었다! 서인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왕자의 출산이 남인들의 복귀를 열어주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사람들은 옥정이 미인계로 단번에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고 치마폭에서 놀게 했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천하의 이순을 모르고 하는 낭설이었다. 오히려 이순에게 옥정은 서인에게 긴장감을 유발시켜 권력 독점을 막는 데 유용한 방패막이일 수 있었다. -p.237


몇 번에 걸쳐 TV 역사드라마로 방영되었던 '장희빈'은 음모와 술수가 능하고 투기가 심한 악녀였던 데 반해 인현왕후는 온화하고 덕이 넘치는 사람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실록에 의하면 악독한 요녀는 오히려 인현왕후였다.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생각컨대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잘못한 바는 단지 투기였는데, 죄상이 드러나자 성종께서 종사를 위해 먼 앞날을 생각하시어 폐출했다. 더욱이 오늘날 민씨는 허물을 지고 범한 것이 윤씨보다 더하고, 윤씨에게 없던 행동까지 했으니 종사에 죄를 얻었다. 이에 폐하여 서인을 삼아 사저로 돌려보낸다."

이 상반된 견해에 대해 작가 최정미는 이렇게 단언한다. 장옥정은 패션 감각과 재능, 영민함으로 왕비에 등극한 조선 최고의 알파걸이었다고. 더불어 이 당당한 여인의 죽음은 한 여자로서 한 남자에게 주었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이순은 복잡한 머리를 털고 편전을 떴다. 옥정과 가볍게 농을 주고받으면 머리가 가벼워지려나. .. 모처럼 응향각에 든 이순이 소주방에 일러 주안상을 내오라 했다. 평소에도 옥정이 영민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룰 수 있을 정도의 소양을 갖췄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근심을 털어놓고자 꺼내놓은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옥정이 알아듣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꺼낸 이야기였다. .. 그런데 옥정은 의외로 말귀를 잘 알아듣고 응수도 제법 잘했다.

이는 김인호 교수의 장희빈에 대한 평가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500년의 조선 역사 중에서 최고의 어머니와 최고의 여성상을 또 한 사람 꼽는다면 그녀는 바로 장옥정 즉 장희빈이다. 특히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가 전혀 보장되지 못하고 정치적 훈련이 전혀 없던 시절, 그래도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남성의 국왕 못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후세에 남긴 장옥정이야말로 오늘날 다시 평가되어야 할 사람이라 보인다."
가난한 역관 아버지와 천민 어머니를 둔 장옥정. 그녀가 왕비의 자리에 등극할 수 있었던 진정한 힘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주관과 특유의 영민함 그리고 국왕 이순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었다.


진실 2, 그녀는 조선 최고의 패셔니스타였다

장희빈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알려진 사실은 그녀가 역관 장현의 종질녀였고, 침방나인으로 궁생활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침방나인에게 주어진 소임은 왕실의 옷과 이불을 만드는 것이었다. 팩션을 써 나가는 데 있어, 장옥정이 침방나인이었던 점에 착안해 옷을 만드는 여인, 즉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을 돌아보게 되었다. 패션은 현대 독자들, 특히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요소다. 조선시대에 디자이너 혹은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바탕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 여인 장옥정.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안에서, 역관인 아버지와 최하층 계급인 천민 노비를 어머니를 두었음에도 신분의 굴레에 함몰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인생을 개척, 당대 최고 지성 집단의 독설과 공격을 온몸으로 받았으면서도 끝내 조선 최고의 여인인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대단한 성공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한 시대를 풍미한 매혹적인 여성에 재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룬 성공스토리는 현대인들에게도 충분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다. 거기에 이렇게 현대적이고 당당한 여성이 지고지순한 사랑 속에서 죽어갔다는 비극성은 그녀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그 비극성이란 그렇게 재기발랄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여인 장옥정이 국왕 이순이라는 최고 권력가를 만나게 되고 진정한 사랑에 빠졌다가, 권력가의 이기에 의해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다.


진실 3, 그녀는 사랑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

"전하는 처첩 간의 갈등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시면서 많은 것을 얻어내셨다. 전하가 잃으신 것은 없으시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한과 모욕을 준신 것도 전하시고, 희빈 장씨에게 역시 광영과 상처를 번갈아 주신 것도 전하시다. 전하는 나와 희빈 장씨를 번갈아 쥐었다 폈다 하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내셨다. 내가 중전의 자리를 다시 찾으면 기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어. 위안이 되는 것은 있지. 가문이 다시 일어서고 왕비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 대신 전하께서는 적절한 시기마다 왕비전의 주인을 바꾸어 환국을 일으키시고, 그 반대급부로 왕권을 극대화하셨지. 희빈 장씨와 나 모두 그분의 희생양인 것이야....."

다시 환궁하여 중전 자리에 오른 인현왕후의 회환 어린 말이다.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 여성은 단순히 숙종의 여인이 아니라 남인과 서인 각파가 벌이는 권력쟁탈의 상징이었다. 권력과 함께 그들의 운명은 부침했고, 그 과정에서 이들 여인들은 모두 권력의 희생양으로 혹독한 업보를 치르고 말았다. 요녀가 아니라 정객으로서, 나아가 미모보다는 시대를 넘보는 재주로서 장옥정은 자식을 왕으로 만들었고, 잠시간 정권 교체라는 신선한 광풍을 역사에 남겨놓았다. 진정 멋진 여성의 운명은 미모보다는 시대와 역사 앞에 얼마나 정열적이었던가에 크게 빚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장옥정의 죽음을 새롭게 바라본다. 옥정이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진정 사랑 때문이었다고. 소설의 마지막 대목은 이순과 옥정의 대화 장면이다. 이순이 옥정에게 죽음을 명한 뒤 옥정이 되묻는다. "그것으로는 죽어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다른 이유를 말씀해주시오! 어찌해서 내가 죽어야 합니까?" 왕은 왕세자를 위해서 죽어달라고 말하지만, 옥정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미 없이 커갈 자식을 두고 눈에 밟혀서 어찌 떠납니까? 그리는 더욱 못해드리겠습니다." 이때 이순이 결정적인 한마디를 내뱉는다. "나를 위해 죽어다오, 옥정아! 내가 너의 죽음을 원한다. 그것이면 되겠느냐?"

시대의 알파걸이었던 옥정은 그 순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다. 이순을 위해 죽어주겠다고. 이것은 시대에 의해 희생된 죽음이 아니라, 사랑 앞에 정열적이었던 한 여인의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장희빈은 정치적 야망 때문에 죽음에 내몰린 것이 아니라 순결한 사랑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 그것뿐이었다.





장희빈 사극의 배반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정두희 외 (소나무,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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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장희빈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미 영화로 2번, 드라마로 5번 제작되어 온갖 음모와 질투의 화신의 이미지에서, 적극적으로 신분상승을 꾀했던 진취적인 여성으로 우리 앞에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원했던 장희빈, 시대가 원했던 장희빈의 실체를 파헤친 이 책은 사극와 역사의 미묘한 관계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장희빈 4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종화 (범우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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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탄 박종화 장편역사소설.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1백여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궁중과 조정의 거유, 석학과 재상, 충신과 모사, 미희와 요녀, 음부 등 온갖 군상의 인물들의 파노라마 속에서 어머니의 정부와 종친인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중에 들어가, 궁녀의 신분에서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희대의 요녀 장희빈을 유장한 문체로 생생하게 형상화했다. KBS에서 방영인 100부작 드라마 장희빈(김혜수 주연)의 원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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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거의 6개월간 블로그를 자유(?)라는 이름 아래에 방치 중인 파란토마토입니다.
실은 요즘은 싱싱한 파란 토마토라기 보다는 멍들어 푸르딩딩하게 변해버린 느낌이지요. 음하하...


요즘 바람의 화원에서도 기생 정향이라는 분이 인기던데...

바람의 화원신윤복의 여인, 정향






갑자기 그동안 기생 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누가 있을까 싶어서 찾아보게 되었어요.




작년 한 해에만도 두 명의 황진이가 탄생했으니....
매력적인 기생들이 너무 많아서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네요^^.

다들 아름다운 배우들이지만 예전 배우들 구경도 할 겸,
특히 유명한 역할 혹은 작품에 출연한 분들만 몇 몇 분을 선별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중에 누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본격 기생은 아니었지만 기생이 될 뻔했던 난정이 역할을 맡았던 여인천하의 강수연씨입니다.
(어찌나 동안이신지~)

여인천하의 난정이와 윤원형강수연씨와 이덕화씨



하지만 요건 맛배기구요, 강수연씨는 사극 연기를 상당히 많이 했었고,
실제로 기생 역할을 맡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대근씨와 함께 출연한 영화 연산군에서 기생 출신의 후궁 장녹수 역을 맡으셨죠.
너무 요염하신가요? ㅋ

영화 연산군에서 이대근과 강수연연산군과 장녹수



보너스: 여인천하에서 난정이 친구 옥매향 역을 맡았던 박주미씨입니다.
이 분은 너무 단아하셔서 양반댁 규수 같은데요?

여인천하 기생 옥매향옥매향 역할의 박주미




장녹수 역할은 연산군 만큼이나 매력적인 역할이라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멋진 여배우들이 많이 보입니다.


제가 참으로 즐겁게 보았던 영화 왕의 남자에서 강성연씨입니다.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과 장녹수강성연과 정진영



장녹수 강성연정말 매력적이죠?



한편,  故 유니씨도 멋지고 매력적인 장녹수 역할을 제대로 해주셨습니다.



이때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찌나 맛깔스럽게 연기를 해주시던지...
아직도 깔깔거리던 교태스러운 웃음소리를 잊을 수가 없네요.


드라마 장녹수에서 유동근씨와 짝을 맞추어 연기해주셨던 장녹수다운 장녹수 박지영씨도 빼놓을 수가 없죠^^

박지영 장녹수박지영 장녹수




기생이 장녹수 밖에 없냐구요??


그렇진 않죠^^


아름다운 기생에는 절대 빠질 수 없는 그 이름,
황진이가 남아있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지적이며, 풍류에 예술적인 면모까지 갖추었다던 황진이...
황진이 역을 맡은 분들을 한 번 알아볼까요?


도금봉,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그간 황진이 역을 맡았던 배우들




황진이 포스터황진이 장미희



지금보면 좀 낯 뜨겁고 웃긴 포스터지만..
그 당시에는 도도한 황진이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작품, 영화 황진이에서 장미희씨입니다.

황진이장미희

황진이

황진이




지금에 비하면 여러 모로 꾸밈새가 촌스럽고 포즈가 좀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세련된 미모를 빛내주시는 장미희씨입니다.

황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생 치고는 너무도 도도하고 품격있는 모습이군요.


한편,
작년에 새로이 태어난 예인 황진이, 하지원씨입니다.

황진이하지원



제가 상상하는 황진이와 딱 맞아떨어지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굉장히 매력적인 황진이였다고 생각됩니다.


보너스: 황진이를 질투하는 황진이 친구 부용 역의 왕빛나씨입니다.

부용 왕빛나멋드러진 춤을 추고...

황진이 친구 부용 역의 왕빛나.. 속살이 비치는 한복;;을 입고...

아마도 벽계수를 유혹하는 모양입니다.


이 분 눈이 정말 크고 이쁘시네요.
황진이의 요염함과는 다르면서도 색다른 여성스러움이 흐르는 분입니다.


귀여운 송혜교씨가 황진이를 맡는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던 영화, 황진이입니다.

송혜교의 황진이 포스터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아무리 봐도 귀여운 작은 마님으로 보입니다만...
제 눈에 황진이 역할의 기생으로는 다소 불만족스럽지만 그래도 이쁘긴 이쁘네요.


이 분처럼 다소 어울리지 않는 황진이가 예전에도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너무도 착하게 생긴 선우은숙표 황진이;;

선우은숙 황진이





문득 떠오른 생각입니다...  기생은 아닙니다만...
왠지 이 분도 후보에 넣고 싶어지네요..


왕의 남자 공길이 황진이는 어떠십니까? 좀 징그러운가요? ㅋ



하하하^^;;


여러분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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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 VS 인수대비는 정말로 라이벌이었을까?

폐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아니라 성종에게 미움받아서 쫓겨났다!??

인수대비와 폐비 윤씨


연산군을 다룬 그 동안의 많은 작품들에서처럼 인수대비(전인화)는 이번에도 폐비 윤씨와 가장 대립하는 인물로서 폐비를 궁 밖으로 내치는 장본인이며, 흔히 폐비 혹은 연산군과 역사의 라이벌로 비유되기도 한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폐비 윤씨의 강한 성품에 불만을 품었고, 폐비 윤씨를 끊임없이 압박하며 미워했다. 인수대비는 이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그녀를 사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인수대비가 임금 성종과 왕실 최고 어른이자 막후 실력자인 시어머니 정희대비(양미경)를 제치고 며느리와 극단적인 대립각을 세우며 파국을 주도했고, 결국은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폐비를 사사시켰다는 것' 모두를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고, 드라마는 패자의 편이라 양쪽 모두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기에 사건과 기록의 이면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폐비 윤씨를 죽음으로 내몬 역사 속 주인공은 과연 인수대비였을까?

일개 후궁에서 일국의 국모로 승천하다

폐비 윤씨(구혜선) 중전 책봉식


조선 초기 친여식이나 집안 여식을 후궁으로 들이는 것은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로 간주되었다. 때문에 유력한 친지나 집안 권세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입궁한 간택 후궁들은 명문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성종의 간택 후궁으로 가장 먼저 입궁한 폐비 윤씨 역시 고려 시대때부터 꾸준히 벼슬을 해온 양반 가문 출신이다. 폐비 윤씨의 부친 윤기견은 집현전에 출입할 만큼 경서와 문학에 밝았고 판봉상시사의 벼슬까지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윤씨의 어머니 신씨는 윤기견의 둘째 부인으로 태종을 도운 공신 '신숙주'를 배출한 고령신씨 가문의 여식이다. 폐비윤씨가 입궁 당시 내명부 종2품 직위에 해당하는 숙의(淑儀)의 첩지를 받은 것은 '상등급(上等級) 사대부집안' 출신으로 대접받았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

파평윤씨 명문가 출신의 정현왕후 윤씨는 같은 해 6월에 입궐했는데 그때 나이 12살로 통상적인 간택후궁의 나이보다도 더 어렸다. 그녀의 부친 윤호는 당시의 권력을 움켜쥔 실세인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양미경)의 조카뻘이 됐다. 두 숙의 윤씨가 입궐하던 당시 성종에겐 이들보다 앞서 승은을 입은 후궁, 엄귀인과 정소용이 있었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한명회에 의해 간택 후궁으로 등장한다.)


숙의 윤씨(폐비)는 아들을 낳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성종의 후궁인 소용 정씨와 엄씨였다. 소용 정씨는 초계정씨로 역시 명문가의 여식이고, 소용 엄씨는 영월 엄씨로 소용 정씨와는 소꿉친구이며 중인 집안의 여식이었다. 미색으로 따진다면 정소용쪽이 훨씬 더 미려했으며 소용 엄씨는 그저 그런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고 한다. (그럼 집안도 정소용이 좋고 미색도 뛰어난데 왜 엄귀인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는겨?)

그로부터 얼마 후 공혜왕후가 승하하며 교태전 자리가 비자 유일하게 회임 중에 있던 폐비 윤씨가 중전에 오른다. 후궁에서 세자빈이나 중전을 삼을 때 먼저 자식의 유무, 나이의 고하 등을 따져 간택한다는 세종조 관례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때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내린 교서에는 폐비 윤씨의 후덕함과 겸손함이 왕비의 자질에 적합하다고 적었지만 내심 자신의 가문 출신인 정현왕후 윤씨가 중전자리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뒷 이야기는 추후 조사 예정)


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폐비 윤씨는 중전에 오른지 석달만에 원자(연산군)를 낳으며 권력이동의 축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왕의 생모, 대비가 될 사람이라는 것만큼 막강한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일부 사서에선 상등급 사대부집안 출신이지만 자신을 뒷받침해줄 조정 세력이 미미했던 폐비 윤씨가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 과도한 애정과 집착을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폐비 윤씨는 왕비가 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성종 8년 4월 덕종(성종의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숙의권씨 처소에서 왕의 후궁 엄씨와 정씨가 중궁과 왕자를 모해하려 한다는 투서가 발견되면서부터 몰락의 길로 걷기 시작한다. 당시 사건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미진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때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측은 두 후궁을 적극 감싸는 한편 원자를 중전에게서 빼앗아 궁밖으로 보내 버린다. 성종은 중전을 폐비시켜 빈으로 강등시킨다는 교지를 내리지만 대신들은 벌떼같이 달려들어 원자를 낳은 왕비를 폐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라며 반대해 철회된다. 이는 원자를 낳은 지 4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므로, 폐비 윤씨가 권력을 탐해 일어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폐비 윤씨가 대군을 낳은 2년 후 일단락됐던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지며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결국 성종 10년 6월 윤씨는 중전에서 폐출돼 사가로 쫓겨났다.

왕과 나 폐비윤씨(구혜선) 폐출 장면

왕실의 윗전이었던 정희왕후는 원자가 사가에서 폐비와 만나지 못하도록 폐비가 폐출되는 날, 피접을 위해 궁 밖에 나가 있던 원자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한편 아직 100일도 채 되지않아 어미와 유모의 손길이 필요했던 둘째 대군을 손도 쓰지 못하게 해 5일 뒤 사망에 이른다. 성종은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에 숙의 권씨를 새로운 후궁으로 간택하여 입궁시킨다. (정희왕후는 '왕과 나'나 '왕과 비'에서처럼 인정많고 자애로운 시할머니가 아니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인수대비가 폐비 축출에 관여되지 않았다고 볼 순 없지만 당시 권력의 실세인 정희왕후나 성종의 뜻이 컷을 가능성이 많다. 기록을 살펴보아도 인수대비가 여러 사안에 의견을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성정을 간섭한 것은 정희왕후 승하 이후다. 또 왕비의 투기든 후궁들의 이간질 때문이든 왕과 폐비 윤씨 간의 언쟁이 잦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성종-폐비 부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폐비 축출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 역시 실록에 정씨의 오라비를 속량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그 출신이 천민이기에 중전자리를 노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얘기다. 이들이 폐비 윤씨를 향한 성종의 총애를 질투할 순 있지만 중전을 탐탁치않게 여긴 삼대비의 총애를 기반으로 자의든 타의든 중전폐출의 선봉에 섰을 것으로 보여진다.


성종은 왜 폐비윤씨를 버렸나

성종은 조선조를 통틀어 부인이 가장 많았던 왕 가운데 한명이다. 성종은 공혜왕후 한씨와 폐비윤씨 정현왕후 등 계비 2명, 그리고 9명의 후궁 등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신하들중엔 왕이 후궁을 너무 많이 두는 것에 대한 우려의 상소를 올린 사람도 있을 만큼 여자를 좋아했던 정력가이다. (어우동과의 로맨스에서 이생원이 진짜 성종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성종이 그만큼 여자를 좋아했기에 그런 얘기도 떠도는 것이겠지.) 성종의 이런 성향들이 실제 폐비 윤씨의 투기로 이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가정의 분란을 끊이지 않게 한 원인이 됐고 이는 부부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폐비의 사사가 성종의 의지였는지 인수대비의 뜻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기에 폐비 윤씨를 다룬 사극마다 해석이 분분하다. 이덕화가 주인공인 드라마 한명회(1994년)에서는 인수대비(김영란)도 폐비(장서희)를 싫어했지만 무엇보다 성종(박진성)이 폐비에 대해서 냉정하게 돌아선 것으로 표현했고, 박지영, 유동근 주연의 장녹수(1995년)에서는 성종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지만 인수대비(반효정)의 의견이 강했던 것으로 표현했다.

왕과 비(1998년)에서는 성종(이진우)이 굉장히 미화되어 성종은 폐비, 사사 둘 다 원치 않았으나 인수대비(채시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 폐비를 사사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최근작 왕과 나(2007년)에서도 성종(고주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인수대비의 명을 따른 것으로 나온다.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는 성종은 중전을 폐출시키던 당시 폐비에 대한 증오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폐비가 끝까지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던 방술책 문제에 대해 배후 조사를 청한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중전이 후궁 측을 모함한 것으로 몰아간 비상과 투서에 대해서는 중궁전의 궁녀들을 고문한 끝에 원하는 답을 들은 후 참수했다.

또 성종은 중전의 폐위문제에 대해 대간과 성균관 유생 65명이 죄도 명확하지 않은 중전을 폐비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상소를 올렸음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폐출돼 사가로 나간 폐비에게 일절 도움을 허락하지 않는 냉정함을 보였다. 심지어 폐비 윤씨가 폐출되기도 전 후궁간택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며 윤씨를 사사한 다음날에는 그의 일가 모두를 매우 혹독한 지역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가족과 떨어져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폐비는 기초 식량조차 부족했고 백성들은 가엾다고 그녀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성종은 이조차 금지시키고 벌을 내려 폐비를 내외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다고 하니 폐비 사사에 성종의 뜻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폐비 사사 후에도 성종은 여전히 폐비를 용서하지 못하는 인상을 보여주었는데, <성종실록> 성종 20년, 5월 16일자에 이 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옛날 일을 생각하면 한밤중까지 두려워하며 홀로 앉아 잠못 이룬 날이 그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비록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혼령에게 어찌 원통함이 있겠으며, 내가 어찌 불쌍한 생각이 들겠는가?"

이런 마당에 폐비의 불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오직 인수대비였다는 것은 여자에게 뒤집어 씌우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관들과 이를 무분별하게 영상화한 작품들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성종이 그토록 총애했던 폐비 윤씨를 미워하게 된 연유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용안에 상처를 냈다는 것은 성종 스스로 발표했던 교서에도 없던 내용이며 투기를 심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실록이 분명한 설명을 해주지 못 하고 있다. 비상사건 역시 명확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종은 처음에 그녀를 사랑했으나, 나중에는 열렬히 미워했다는 슬픈 진실이다.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서 필요한 말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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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1(조선야사실록) 상세보기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펴냄
고 고우영 만화가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재출간된 장편 만화 『연산군』 제1권. 정사(正史)의 뒤안길에 숨겨진 또 하나의 역사인 야사(野史)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다. 신문에 연재되면서 광고 게재로 삭제된 부분과 기존에 출간된 책에서 검열된 부분을 복원하였다. 이 작품은 구어와 비속어를 거침없이 구사하고, 오늘의 갑갑한 현실과 역사에서 입증된 진리 사이를 거리낌없이 가로지른다. 또한 상식을 뒤엎고 편견을

2006년 4월25일 故고우영 화백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고인의 장편 만화 중 『오백년』4권과 『연산군』3권을 묶어 새롭게 『조선야사실록』7권 세트로 제작된 책이다. 연산군의 탄생부터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되 “폭군” 이미지에 치중하던 기존의 이야기와는 달리, 불우한 성장과정에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연산군의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정사보다 더욱 사실적인 야사를 만들어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만화가 고 고우영 작가님의 작품이라서 더욱 기대가 된다. 도서관 갈 때마다 고우영 작가님 작품이 있는지 살펴보아도 없더니..ㅠ  영화 <왕의 남자>와 비교하여 야사(野史) 특유의 감칠맛 나고 숨 막히는 전개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아마 고우영 작가님 특유의 성적 농담과 화끈한 묘사가 많이 나올 것 같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 연산군 중종과 그 신하들) 상세보기
김범 지음 | 역사비평사 펴냄
조선조 사화와 반정의 시대를 재조명하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는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정치 변혁의 시대에 펼쳐진 권력 투쟁을 살펴보는 책이다. 국가 체제를 완성한 성종, 그에 대한 반발과 균열을 보인 연산군, 다시 왕권을 둘러싼 체제 정비를 시도한 중종까지 3대 75년간의 정치 투쟁을 다루었다. 세 왕과 신하들의 권력 관계는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압축한 중요한 특징들을 지녔다. 저자는 세 왕이

이 책 내용에 대한 저자 김범의 자세한 설명 보러가기

이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책이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폭군의 멍에를 벗긴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지식산업사 펴냄
연산군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한 책. 성리학의 기준에 따라 연산군을 평가하는 기존의 평면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연산군을 힘의 논리에 따른 역사적, 이념적 희생자로 보았다. 연산군의 통치 전반을 종합적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 저자 소개 지은이_ 신동준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한겨레》기자. 서울대, 외국어대 강사. 21세기 정치연구소 소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살림 펴냄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말하는 통치 리더십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조선 역사에 묻는다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는 조선의 왕과 신하를 통해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된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조선이 패망한 근본 원인을 왕권이 미약하고 신권이 강한 '군약신강'의 왜


연산군에 대한 호의와, 그의 폭정을 신권과 왕권의 대립에서 보는 관점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인 것 같아서 뒤져보니, 역시.. 같은 저자였다. 역시 사람의 관점이 바뀌긴 쉽지 않나보다.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한명회의 신봉승 작가님이 연산군을 광인으로 보고 이와 반대로 드라마 왕과 비, 장녹수의 정하연 작가님이 연산군을 가엾게 보는 것처럼) 이 분은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도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상당히 구구절절히 펴시더니 이 책에서도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당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분 의견에 100%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연산군 초기에 왕권이 대폭 강화된 건 사실이니 작가의 주장 중 일부는 동의한다. 예전 사극에는 연산군 일기의 내용을 고대로 받아들여서 연산군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인 것으로 나왔지만
연산군이 처음부터 싸이코는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고도 그렇게 밖에 행동 못한 것은 100% 연산군의 책임이다. 이때는 왕권 강화고~ 신권 제압이고~ 이런 건 안중에 없고 이미 정신줄 완전히 놓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리뷰들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몇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중간의 흥미로운 부분만을 발췌했으므로 전체 서평을 보고 싶으면 링크를 눌러서 미디어 리뷰를 확인하시길.)


조선왕조 역사로 보는 `통치 리더십`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시대의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는 조선의 역사는 신하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는 신하들의 눈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봤다는 것. 저자는 실록에 명군으로 기록된 임금들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임금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들은 대부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개혁가들임을 강조한다.

그 예로 신 소장은 패도정치라 불리는 세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왕도와 패도는 적절히 섞어 사용해야하는데, 치세(治世) 시는 패도보다는 왕도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게 되고, 반대로 난세(亂世)의 경우 강력한 리더십을 요하기 때문에 패도 사용이 높게 된다""큰 틀에서 보면 세조가 패도를 구사한 것은 맞지만 시대적 상황(계유정난 등)이 그를 패도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한 저자는 조선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세도정치`를 꼬집고 있다.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정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초기에 비해, 신하가 왕을 바꾼 중종반정 이후, 신권이 왕권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다. 이로써 조선 중기와 후기로 와서 국가는 점점 쇠약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부국강병이 왕과 국가의 목표이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신권이 제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이명박 당선인에게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직면해 있기도 하다.


“조선왕조, 공자의 修身齊家 치중… 治平學에는 소홀”

“평화시에는 왕도정치가 필요하더라도 비상시에는 패도정치가 불가피한데 조선은 중화질서 아래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학문이 수제학으로만 치우치고 치평학의 전통을 망각했습니다. 특히 ‘경연’을 통해 주자학자로 키워진 조선의 국왕에게 이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BOOK책갈피] 조선은 신하들이 말아먹었다며?


역사 상식은 역사책에서만 얻는 게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재미있으라고 각색한 얘기를 그런가 보다 하며 정사로 받아들인다는 점. 이 때 사실과는 동떨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생겨나는 법이다.

영화 ‘왕의 남자’, 소설 『단종애사』(이광수)와 『금삼의 피』(박종화)가 좋은 예다. 세조와 연산군을 여지없이 폭군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신문기자 출신의 정치학자인 저자는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한다. 세조와 연산군 모두 신권(臣權)의 발호를 억누르려다 그 같은 오명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조카의 보위를 찬탈했다는 세조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산군도 사림 세력을 견제하려다 쿠데타로 실각한 비운의 군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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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이야기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이 글을 얼마 전에 발견해서 비공개하고 있다가 지금은 승복이님의 블로그가 아예 사라져 버린 관계로 공개처리했습니다.


이제는 원로 축에 끼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동시에 조선 시대 사극을 들고 오고, 김종학이 판타지 사극을, 정하연이 이방자 여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대극을, KBS에서는 <대조영> 의 후속작으로 <세종대왕> 을 제작할 준비를 마치면서 2007년 하반기와 2008년 상반기는 때 아닌 '사극' 열풍이 불어 닥칠 전망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방송됐던 사극들은 어떠한 인물들을 주로 다뤘을까. 재미로 알아보는 대한민국 사극의 단골 손님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후보 1.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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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극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흥행카드' 라고 한다면 단연 연산군이다.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고 고아와 마찬가지로 자라나며 삐뚤어지기 시작한 연산군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 주위를 둘러 싼 권력 암투와 2번에 걸친 사화, 요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폐륜 등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담아내며 사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갖췄다.  

1962년 영화 <연산군> 에서 신영균이 열연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 이 후로, TV판 '연산군' 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971년 TBC <사모곡> 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때 연산군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배우는 바로 우리에게 <사랑이 뭐길래><딸 부잣집> 등으로 친숙한 배우, 김세윤. 김세윤의 뒤를 이어서는 1985년 MBC <조선왕조 500년-설중매> 에서 임영규가 연기한 바 있고, 1987년에는 영화 <연산군> 에서 배우 이대근이, 1994년 KBS <한명회> 에서는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 이민우가 연산군을 맡아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1년 뒤인 1995년 KBS <장녹수> 에서는 유동근이, 1999년 KBS <왕과 비> 에서는 안재모가 각각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로 안방 극장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가장 최근에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는 영화배우 정진영으로 1000만 관객 돌파의 신화를 낳은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어머니를 잃고 광기 어린 영혼을 소유하게 된 연산군 역을 실감나게 연기해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는 누구일까.

시청률로만 따지고 보자면 <왕과 비> 의 안재모로 그 당시 최고 시청률이 44.3% 를 기록했을 정도. 녹록치 않은 경력을 지닌 연기파 채시라와의 연기대결은 <왕과 비> 의 사상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데 1등 공신이라 할 만하다.


후보 2. 장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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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하면 떠오르는 여자하면 당연히 장녹수다. 연하의 연산군에게 장녹수라는 존재는 아내이자, 첩이었고, 어머니였다. 연산군 시대의 개막과 함께 그를 파멸로 이끌고 결국은 자신까지 돌무더기 무덤 속으로 들어간 시대의 요부.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지금까지도 연산군과 함께 한국 사극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 '요부' 를 실감나게 그려 낸 인물은 누가 있을까. 1971년 <사모곡> 에서 김세윤과 호흡을 맞춘이는 이제 원로 배우 소리를 듣는 고은아이고, MBC <설중매> 에서는 '섹시배우' 이미숙이, 영화 <연산군> 에서는 강수연이 장녹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자타공인 최고의 장녹수는 KBS <장녹수> 의 박지영으로 유동근과의 연기 앙상블이 빛났을 뿐 아니라 장녹수가 살아 돌아온 듯 한 실감나는 연기력으로 대내외적인 찬사를 받았다.

19999년 <왕과 비> 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故 이혜련이 안재모와 호흡을 맞춰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고, 작년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배우 강성연이 '녹수' 역을 맡아 남성 중심의 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뽐내는 등 수많은 스타들이 장녹수라는 캐릭터를 거쳐갔다. 연산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본 것은 장녹수가 아니라 수근비였으나 여전히 장녹수라는 인물은 스타들이 탐을 내는, 연산군과 운명을 같이 한 '매력' 있는 '여성' 인 셈이다.


후보 3. 인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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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이 등장했으니 '인수대비' 가 없을 수 없다.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지만 '폐비 윤씨' 의 사사사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연산군과 인수대비는 조선 500년 역사 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폐륜으로 그 끝을 맺었다. 20대에 청상과부가 되어 잠저로 나온 뒤, 예종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밀어 올리고 훈구파와의 강력한 결탁으로 성종 시대를 안정을 추구했던 한 여걸의 죽음이 그토록 비참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이자 아픔이다.

우리에게 '소혜왕후' 라는 이름보다 '인수대비' 라는 이미지로 더욱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 이 캐릭터는 지금까지 수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거쳐갔다. 이제는 영원한 배우로 기억되는 황정순 선생을 비롯해 영화 <연산군> 에서는 중견배우 정혜선이, <설중매> 에서는 고두심, <장녹수> 에서는 반효정, <한명회> 에서는 김영란, <왕과 비> 에서는 채시라,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윤소정 등이 열연했다. 특이한 점은 정혜선이나 고두심, 채시라 등의 여배우들이 모두 20~3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역을 소화했다는 것.

인수대비의 파란만장한 삶을 20대부터 그려내려다 보니 비교적 젊은 배우를 기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테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으로 보자면 모두 자타공인 '연기파' 들이 이 역을 거쳐갔으니 인수대비야 말로 '연기파 제조기'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에게 지금까지도 소중한 교훈을 남기고 있는 모양이다.


후보 4.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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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최고의 간신이자 사육신과 대비되는 조롱의 대상이면서도 왕권이 약화되던 단종시대를 철인군상과 같은 의지로 뒤엎고 결국은 성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명신(名臣)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린 한명회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평가 되면서 그 역사적 명성을 달리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사육신 띄우기' 로 명성에 흠집을 냈던 한명회는 이제야 제 위치를 찾으며 역사적으로 받아 마땅한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이 유명한 칠삭동이를 맡은 배우들은 정진, 이덕화, 최종원 등. 특히 정진 같은 경우에는 70~80년대 문화를 향유했던 사람들에게 최고의 '한명회' 로 기억되는 인물로 지금 보아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다. 이덕화는 자타공인 가장 유명한 한명회로 회자되는 배우로서 신봉승이 쓰고 그가 타이틀롤을 맡았던 드라마 <한명회> 는 여전히 KBS 가 자랑하는 사극 중 하나로 남아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안목도 달라진다. 미래의 한명회는 우리에게 또 어떤 인물로 기억 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공과' 를 둘째치고서라도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한명회' 라는 이름이 미친 거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리라.


후보 5.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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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여자가 아닌 다음에야 후세에 그 이름이 남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천한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일진대 오직 단 한사람, 명월 '황진이' 는 그러한 평가를 거부한다. 양반 출신의 여성으로 태어나 기생의 길을 택한 여자.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 로 불리우는 조선 최고의 여성 문학가. 벽계수를 골탕 먹이고 지족선사를 파계시키며 세상을 발 밑에 둔 여성. 그것이 바로 기생 황진이의 정체다.

요부의 이미지와 순결한 문학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황진이는 1957년 영화 <황진이> 에서 처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대한민국 최초로 황진이를 연기한 이는 전설의 스타 도금봉. 그 이 후, 강숙희,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 등이 그 뒤를 이으며 이 매력적인 기생 아니, 시인의 일생을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담아내고 있다.

최근 영화 <황진이> 가 개봉되면서 송혜교의 '황진이' 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개인적으로 한마디 덧 붙이자면, 영화 자체의 매력과는 상관 없이 송혜교는 그 위치에서 충분히 잘 해냈다. 송혜교의 황진이가 하지원의 황진이보다 매력적이지 못했던 까닭은 하지원이 송혜교보다 월등히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황진이에 대한 작품의 접근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송혜교는 <황진이> 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 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후보6. 김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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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광해군,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사랑한 여자였던 김개시는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쟁의 역사 속에서 그 요망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선조의 독살설과 인목대비에 대한 핍박, 광해의 실책에 모두 관련되어 있는 김개시는 일개 상궁의 신분으로 대북 정권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정사를 좌지우지한 요화였으니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테지만.

이 요화를 연기한 이는 <회천문> 의 원미경, <서궁> 의 이영애, <천둥소리> 의 이주화, <왕의 여자> 의 박선영 등이고 이들과 함께 광해군을 연기한 이는 이희도, 김규철, 김주승, 지성, 김개시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적 입장에 서 있던 인목대비는 권재희, 이보희, 이현경, 홍수현이 열연했다. 개인적으로 <서궁> 의 이영애와 이보희의 연기는 나름대로 재밌게 본 편이다.


후보 7.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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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글에서 자주 했고, "역대 장희빈" 에 관한 글까지 이미 쓴 상황에서 더 할 말이 무에 있을까 싶으랴만은 해도 해도, 봐도 봐도 재밌는 것이 바로 '장희빈' 이다. 1대 김지미, 2대 남정임, 3대 윤여정, 4대 이미숙, 5대 전인화, 6대 정선경, 7대 김혜수로 이어지는 장희빈의 역사는 곧 한국 사극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장희빈> 이 만들어 질 때는 항상 '장희빈을 재평가 하겠다.' 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지만 결국은 '현모양처' 인현왕후와 '악녀' 장희빈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시청자의 이목을 끈다는 것. 아직도 장희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악녀와 요부' 라는 차원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장희빈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려 했던 김혜수의 <장희빈> 이 나중에서는 그저 '독한 여자' 로만 기억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장희빈은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이미 역사라는 차원을 넘어서 한국 사극에서 가장 '쓸 만한' 캐릭터로 자리 잡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인물이다. 여자vs여자의 싸움에, 선과 악이라는 극명한 대립을 즐겨하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굳이 거스르면서 바꿀 필요는 없다. 장희빈에 대한 재평가는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학계에서 하면 될 일이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그렇다면 이들과 호흡을 맞춘 인현왕후는 누가 있을까. 1대 도금봉을 시작으로 2대는 태현실, 3대 김민정, 4대 이혜숙, 5대 박순애, 6대 김원희, 7대는 박선영이 맡았다.


후보 8.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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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 문학의 정수라고 일컬어 지는 <한중록> 의 지은이로 유명한'혜경궁 홍씨' 는 지금껏 정치적인 이유로 남편 사도세자를 여읜 비운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오히려 사도세자의 구원 요청을 차갑게 외면한 것은 바로 혜경궁, 그 자신이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남편에게 -그것도 정략결혼을 한 남자에게- 그녀는 사랑도, 애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버리는 대신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올인'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에도 사도세자의 씨앗인 정조를 그대로 왕위에 올린 이유는 혜경궁 홍씨의 강력한 의견 표명이 단단히 한 몫을 거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버리되 자식까지는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은 정조를 제거하려는 친정 집안의 움직임에 격렬히 반대하고 정치적 공세를 펼침으로써 마침내 '정조시대' 를 열어제쳤다.

정조 시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일에 관련해 자신의 가문인 풍산 홍씨가 풍비박산 나게 되자 그녀가 꺼내든 카드가 바로 그 유명한 <한중록> 임은 이미 유명한 사실. '한가한 날의 기록' 이라는 뜻의 <한중록> 은 끊임없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친정을 옹호함으로써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 돌파구 역할을 했다. 재밌는 것은 <한중록> 을 쓰던 혜경궁 홍씨의 나이는 이미 70 줄이었으니, 그녀야 말로 영조와 정조 시대를 관통하는 진정 노회한 정객이었던 셈이다.

이야기로 잠시 딴데로 새버렸는데 다시 돌아와서 '혜경궁 홍씨' 를 맡은 여배우는 누가 있을까? MBC <안국동 아씨> 의 김영란을 시작으로, <한중록> 의 최명길, <하늘아 하늘아> 의 하희라, <대왕의 길> 의 홍리나 등이 바로 혜경궁을 연기한 배우들이다. 


후보 9.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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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이라는 빛나는 이름과 '쇄국' 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동시에 쓰고 있는 인물, 흥선 대원군. 상가지구로 시작해 조선말 가장 혁신적인 개혁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의 삶은 드라마로 그려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권불십년' 이라는 말처럼 10년만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끊임없는 정치적 재개로 결국은 을미사변이라는 역사적 책임을 떠 맡을 수 밖에는 없었던 사람. 

대원군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카리스마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로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의 김승호를 비롯하여, <민비> 의 김성원, <풍운> 의 이순재, <대원군> 의 임동진, <찬란한 여명> 의 변희봉, <명성황후> 의 유동근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이순재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연기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바로 <풍운> 을 꼽기도 했는데, 그 만큼 대원군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후보 10.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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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가 나왔으니 며느리가 빠질 수 없다. 바로 '명성황후' 가 그 주인공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였던 그녀는 1895년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시해당하기 직전까지 조선 정계를 쥐락펴락 했던 진정한 여걸이었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적에서는 '공' 보다 '과' 를 더 많이 찾을 수 밖에 없겠으나, 그녀의 죽음과 함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은 명성황후라는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영향력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리했고, 드라마에서도 여과없이 반영 됐다. 그러나 대부분 드라마들은 명성황후에게 있어서 '관대한' 시각을 가졌을 뿐더러 미모의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에 앞장 선 편이다.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에서 원로배우 최은희가 김승호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대중문화사에 등장한 '명성황후' 는 <민비> 의 김영애가 그 바통을 이어 받으며 브라운관에 진출했고, 다시 한 번 김영애가 <풍운> 에서 열연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영애 이 후에는 <대원군> 에서 연기파 김희애가, <찬란한 여명> 에서는 하희라, <명성황후> 에서는 이미연, 영화 <한반도> 에서는 강수연이 맡았다.

지금 젊은 층에게 가장 사랑받는 명성황후는 이미연으로서 그 동안의 강인하고 독한 이미지를 순화시키고 마치 멜로물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을 투영함으로써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조선으로.

최근 <주몽><대조영> 의 경향으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를 벗어난 '탈조선화' '반조선화' 현상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고려 시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태조 왕건> 이 후에, <제국의 아침><무인시대><신돈> 등은 고려시대를, <주몽><연개소문><태왕사신기> 등은 고구려를, <대조영> 은 발해를 다룸으로써 조선이라는 시간을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의 움직임을 보면 한국 사극은 다시 '조선' 을 주목하고 있다.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왕과 나>, 정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리려는 <이산 정조>,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등은 이미 편성이 거의 확정 된 상태로 'Come back 조선' 을 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과 비><신돈> 의 정하연과 <내 남자의 여자> 에서 열연중인 김희애가 손을 잡고 <비운의 이방자 여사> 를 준비중이어서 또 다른 근대사의 비극을 보여 줄 참이다. 왜 그들은 다시금 조선에 주목하기 시작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조선' 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시청자들에게 긴밀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연산군, 장녹수, 인수대비, 장희빈, 정난정, 영조, 정조, 혜경궁, 대원군, 명성황후 같은 인물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친숙도는 이미 40여년간 지속되어져 왔으며 그것이 비록 '식상' 하다고 할지라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 올 수 밖엔 없다. 한국 최고의 사극 감독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닳고 달은' 연산군과 정조를 들고 나온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사극들은 조선으로 컴백한 것일뿐 인물에 컴백한 것 같지는 않다. <왕과 나> 도 연산군이 아닌 김처선이 주인공이고, <이산 정조> 도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영조나 사도세자, 혜경궁이 아니라 바로 정조의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기 ?문이다. 친숙한 배경과 신선한 캐릭터로 무장한 2007년 사극들. 그들은 과연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한국 사극의 역사, 그 역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다,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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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사극 속의 장희빈

[펌] 조선판 마녀사냥, 장희빈의 고정관념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역사 훑어보기
역대 최고의 연산군은 누구? 당신의 투표를 기다립니다 (동영상 비교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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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계신 신사숙녀 언니옵하 누나형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드디어 왕과 나에 성인 연산군이 등장합니다.. 제가 이 날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지요.. 흑흑.ㅠㅠ
왕과 나에 연산군이 등장하려고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나봅니다. 
마치 10년 만에 보는 님 보듯 두근두근하는 내 심장 같으니라구~ 음하하..

역대 연산군 모음 - 최고의 연기력과 광기를 보여주는 연산군역 배우들 모음

위에서부터 정진영, 정태우, 임영규, 이민우, 유인촌, 유동근, 안재모, 신영균



연산군은 조선왕조 아니 우리나라 전 역사를 다룬 사극에서 주인공으로 가장 자주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여러 연산군들끼리 연기 비교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실은 역대 연산군으로 투표를 하고 싶었는데 왕과 나 연산군까지 포함을 시켜야한다는 요상한 사명감에 사로잡혀서 여태까지 아기다리고기다리었습니다. (30년도 더 된 유머죠. 눼눼. 죄송합니다.) 다른 작품에서의 내시 김처선과 김자원도 비교해보세요~

우선 객관적인 선택을 위해서는 작품과 캐릭터 성격에 대해서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각자의 매력이  흘러 넘쳐서 고르기 힘듭니다.

먼저 오래전 영화에서 활약해주신 신영균 연산군..
광기는 별로 안보이는 신영균 연산군


당시 사극은 뭐 옷을 찰흙으로 만들었는지.. 왠 한복 색깔이 저리 눈부신 보라색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고증까지 잘 하기가 쉬웠겠습니까? 고증 따윈 필요없어~ 적당히 이해하시면서 봐주시고요.

저 때는 조선왕조실록이 국역 완역되어 있지도 않았고, 지금에 비해서 영화 제작 환경도 나빴기 때문에 고증을 따지는 건 저한테 '이효리 춤 따라하면서 표정까지 뇌쇄적으로 지으라'고 하는 요구와 같다고 봅니다. 어쨋든 이 분의 연산군 연기는 과잉된 듯한 느낌이면서도 확 폭발하는 부분이 없으니 좀 갑갑합니다. 딱히 나쁘다고 생각은 안하지만 특유의 구식 연기 스타일 때문에 몰입은 상당히 힘드네요.


유인촌씨는 왕 역할을 도맡아 하셨던 분인데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라는 영화에서도 활약해주셨고, 저는 잘 모르지만 연극에서도 연산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SBS 드라마 임꺽정 초반부에서도 연산군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다음은 각각 영화 연산일기와 임꺽정에서의 유인촌씨입니다.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에서의 연산군 유인촌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에서의 연산군 유인촌(갑자사화 일으키기 전 문제의 술 따르는 장면이죠.)



연산군 연기 좀 봤다~~ 하시는 분들은 이 연기를 보고 최고라고 감탄에 감탄을 하시더군요.  


자원아, 활을 준비해라. 조선 최고의 활에 독화살을 재어서
우리 어머니를 죽인 원수들의 가슴에 피꽃을 피우자.  피꽃을.

뭬야? 그 놈 초상 끝나는 대로 사약 한 사발 퍼 멕여라.
우리 어머니가 먹고 죽은 펄펄 끓는 부자탕을 그 놈 아가X에 ㅊ넣으란 말이다!

소름이 쫙 끼치는 대사들입니다...


금삼의 피를 보고 통곡하는 안재모 연산군..
(야사서 파수편에는 금삼의 피를 본 임금이 그 천을 부여안고 밤낮으로 통곡했다고 나옵니다.)

저는 좋고 안좋고의 판단은 보시는 분들께 맡기고 제 느낌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유인촌씨의 연기는 감정의 진폭이 굉장히 큽니다. 뒤에 보실 유동근 연산군이 너무 정적이라서 실감이 안나고, 젊은 연산군 이민우(당시 19세), 안재모(당시 20세)의 연기가 너무 폭발적인 쪽에 치우친 느낌이라면 유인촌씨 연기는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진짜 맛이 살짝 간 느낌이라고 할까요? 최근에 연산군 중에서는 정진영씨의 연산군이 유인촌씨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실록에 쓰여진 연산군의 행동들을 토대로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몇 가지만 살펴봐도 갑자사화 당시 그는 이미 제대로 미친 X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자신을 욕할까봐 두려워하여 궁녀들이 웃는 것도 싫어했다고 합니다. 신언패를 채우고, 훈민정음 사용금지를 시킬 정도로 심한 언론 탄압을 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을 아무도 못믿으니 모든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그게 뜻대로 안되면 죽이고.. 어제까지 사랑하던 여인을 그 다음 날 찢어죽이고, 그런 식이죠. (편집증, 경계선 인격장애, 사회성 부족, 자기애적 성격장애, 애정결핍, 의존적 성격장애 등 다수 짐작 가능)

김처선에게 그가 그렇게 가혹했던 것도 그런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릴 때부터 마음 붙일 곳 없던 연산군이 김처선을 믿고 의지했기에 김처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렇게 뼈아팠던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김처선에게 활화산같이 분노를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연산이 장녹수를 그렇게 사랑한 것, 월산대군 부인 박씨에게 의지한 것 등을 보면 그는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연산군을 굉장히 단순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냥 원래 천성이 나쁜 놈, 섹스에 미친 놈 정도로만 몰아갔거든요. 그러나 현대의 사극작가분들은 연산군 행동의 배후 심리를 추측하여 대본을 쓰신 것입니다. 그 당시 연산군이 단순하게 나쁜 놈이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고, 정신병적인 문제가 일시에 폭발하여 그리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0123


이런 시각에서 보니까 각 작품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더라구요.

유인촌씨의 연산군은 경계선 인격장애 + 자기애적 인격장애, 유동근씨의 연산군은 편집증 + 애정결핍 + 자기애적 성격장애, 이민우, 안재모의 연산군은 편집증 + 경계선 인격장애, 정진영씨의 연산군은 애정결핍 + 사회성 부족 + 의존적 성격장애 + 피해망상증 등이 보였습니다.
(제 눈에는 그랬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전혀' 아닙니다. 이에 대한 토론을 원하시면 댓글을 남겨주세요. 틀린 점 지적이나 올바른 정보 또한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광기어린 눈을 번득이는 안재모 연산군과 김자원


유동근씨는 역시 실망을 시키지 않는 연기자입니다. 얼마 전에도 우연히 재방으로 장녹수를 잠깐 봤는데 10년이 넘은 연기임에도 어색함이 없으시더이다. (※드라마 한명회에서의 성종, 폐비 윤씨, 인수대비 연기, 장녹수에서 박지영씨의 장녹수, 인수대비의 연기는 전 조금 어색했어요. 뭔가 구식 연기라서 민망하더라구요. 다른 배역의 연기와 당시 상황 묘사, 스토리 전개까지 다 따졌을 때 현재 왕과 비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상을 보고 나면 폭군 연산군이 불쌍해보일 것입니다.


유동근의 연산군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외로워하며, 스스로에 대한 불신으로 괴로워하는 연산군입니다. 폐비의 자식이라는 것에서 오는 상처와 열등감, 폐비를 신원시키고 폐비의 복수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마음은 늘 허전합니다. 갑자사화가 끝난 후 평화가 찾아올 줄로 기대한 신하들은 연산군의 향락과 폭력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져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폭발력을 너무 안보여주는게 좀 아쉽습니다. 유동근씨는 무슨 주문을 받았는지 너무 절제를 하십니다.
확~ 폭발해줘야 할 시점에도 조곤 조곤 속삭이면서 타이르듯 말을 하거든요.

늙은 내관의 말처럼 공포가 대궐 안팎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연산 자신이 그 공포의 희생자였으니...

장녹수 보고 있으면 연산군은 성군 같고, 정귀인 엄귀인이 임금한테 바락바락 대들어서 맞은 것 같다니까요. 설마 연산군이 저 장면에서 정귀인한테 곱게 타일렀겠습니까? 이민우, 안재모는 이럴 때 확 폭발을 해주니까 시원하더군요.  위의 동영상과 비슷한 부분입니다. 안재모의 연산군과 유동근 연산군이 거의 똑같은 대본으로 어떻게 표현을 하는지 비교해보세요. 간신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내시 김자원도 여기서는 그닥 나빠보이지 않습니다.

안재모 연산군에게 충언을 고하는 김처선 동영상 (삭제됨.


이민우는 한명회(1994)에서, 안재모는 왕과 비(1998)에서 귀신같은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글 쓰기 전까지는 안재모 연산군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글쓰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안재모, 이민우는 광끼(광기)가 너무 안보였다는 점에서 -1점. 연산군이 너무 정상적으로 보였거든요. 그냥 정상인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길길이 날뛰는 것으로 보였을 뿐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문제적 인간으로는 안보이네요.

한명회에서 엄귀인, 정귀인, 인수대비 찾아가서 행패 부리는 이민우 연산군


한명회 연산군에서 짧게 지나간 장면을 왕과 비에 두 영상으로 나누어 보여드리겠습니다.

 


 


연산군 폭발씬에서 꼭 나오는 세 장면: 금삼의 피 확인, 이세좌한테 술 따뤄주기, 인수대비한테 술 따뤄주기에서 가장 유명한 금삼의 피는 실록에 안나옵니다. 월탄 박종화 작가님의 소설 금삼의 피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이는 야사에만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사극은 정사와 야사를 섞기 때문에 이 장면도 흥미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들어가지만요.

금삼의 피


이 장면 말고 나머지 두 장면은 실록에서도 나옵니다. 인수대비에게 정귀인, 엄귀인의 아들을 끌고 간 연산군이 술을 따르라고 시키면서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 연산군일기에 적혀져 있습니다. 성리학을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알던 조선시대에 저런 짓을 하다니 연산군은 잘잘못을 떠나서 쫓겨날 만 했다고 봅니다. 윗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그의 행동이 결국 자기 무덤을 제 손으로 판 것이죠.


한편, 정진영씨를 보십시다.

왕의 남자 정진영 연산군 강성연 장녹수


저 눈빛 보이시죠?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저 눈빛, 무언가를 찾아헤매는 불안해보이는 행동이 딱 제대로 정신 나간 인간 같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에 이 부분이 너무 적응이 안되서 정진영씨 연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폭군을 왜 정신병자로 만들어놨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ㅋㅋ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그 시점에 연산군은 이미 맛이 갔다고 보는게 정확한 것 같습니다. 정신병 때문이든,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든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의 눈빛 아닙니까?


아.. 한 명을 선택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려.. 흑흑..ㅠㅠ

그래서~~
저같은 괴로움을 겪으실 여러분을 위해서 복수 선택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참고로 하시고 투표도 하시고 결과도 재미있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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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BC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

 
-사진 태조-

(1) 태조~태종 :    추동궁 마마 (1983 / 태조 - 김무생, 태종 - 이정길, 원경왕후 - 김영란, 정도전 - 이호재)
(2) 세종 :             뿌리깊은 나무 (1984 / 세종 - 한인수, 양녕대군 - 송기윤, 소현왕후 - 김영애)
(3) 문종~연산군 : 설중매 (1984 / 세조 - 남성우, 성종 - 길용우, 연산군 - 임영규, 인수대비 - 고두심
                           장녹수 - 이미숙, 김종서 - 전운, 한명회 - 정진, 유자광 - 변희봉
                           폐비 윤씨 - 이기선, 김처선 - 박규채)
(4) 중종~명종 :    풍란 (1985 / 중종 - 최상훈, 조광조 - 유인촌, 문정왕후 - 김혜자, 정난정 - 김영란
                           경빈 박씨 - 박원숙)
(5) 선조 :             임진왜란 (1985 / 선조 - 현석, 이순신 - 김무생, 원균 - 신충식)
(6) 광해군 :          화천문 (1986 / 광해군 - 이희도, 개시 - 원미경, 인목대비 - 권재희)
(7) 인조~현종 :    남한산성 (1986 / 인조 - 유인촌, 임경업 - 최상훈, 최명길 - 변희봉)
(8) 숙종 :             인현왕후 (1988 / 숙종 - 강석우, 인현왕후 - 박순애, 장희빈 - 전인화, 숙빈 최씨 - 견미   리)
(9) 영조 :             한중록 (1988 / 영조 - 김성원, 사도세자 - 최수종, 혜경궁 홍씨 - 최명길,
                           정순왕후 - 김용선, 홍국영 - 김동현, 정후겸 - 선우재덕)
(10) 정조 :           파문 (1989 / 정조 - 김용건, 효의왕후 - 김청, 혜경궁 홍씨 - 고두심)
(11) 순조~고종 :   대원군 (1990 / 흥선 대원군 - 임동진, 고종 - 김홍석, 명성황후 - 김희애, 철종 - 최수종)


2. 왕실 역사
 
-사진 세종대왕-

(1) 태조~정종 :    개국 (1983 KBS / 태조 - 임동진, 정도전 - 김홍기)
(2) 태종~세종 :    대왕 세종 (2008 KBS  / 세종 - 김상경, 태종 - 김영철, 양녕대군 - 박상민,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이윤지, 어리 - 오연서)
(3) 문종~연산군 : 왕과 비 (1998 KBS / 세조 - 임동진, 성종 - 이진우, 연산군 - 안재모, 인수대비 - 채시라
                           단종 - 정태우, 장녹수 - 유니, 김종서 - 조경환, 한명회 - 최종원
                           폐비 윤씨 - 김성령, 김처선 - 김성환)
(4) 중종~명종 :    여인 천하 (2001 SBS / 중종 - 최종환, 문정왕후 - 전인화, 정난정 - 강수연,
                           경빈 박씨 - 도지원, 조광조 - 차광수)
(5) 선조~광해군 : 왕의 여자 (2003 SBS / 선조 - 임동진, 광해군 - 지성, 개시 - 박선영, 인목대비 - 홍수현)
(6) 인조~현종 :    대명 (1981 KBS / 효종 - 김홍기)
(7) 숙종 :             장희빈 (2002 KBS / 숙종 - 전광렬, 장희빈 - 김혜수, 인현왕후 - 박선영, 숙빈 최씨 - 박예진)
(8) 영조 :             대왕의 길 (1998 MBC / 영조 - 박근형, 사도세자 - 임호, 혜경궁 홍씨 - 홍리나,
                           정순왕후 - 이인혜, 숙빈 최씨 - 김영애)
(9) 영조 :             하늘아 하늘아 (1987 KBS / 영조 - 김성겸, 사도세자 - 정보석, 혜경궁 홍씨 - 하희라)
(10) 정조 :           이산 (2008 MBC / 정조 - 이서진, 영조 - 이순재, 혜경궁 홍씨 - 견미리,
                           효의왕후 - 박은혜, 정순왕후 - 김여진, 홍국영 - 한상진, 정후겸 - 조연우)
(11) 순조~고종찬란한 여명 (1996 KBS / 흥선 대원군 - 변희봉, 고종 - 조재현, 명성황후 - 하희라)


3. 인물로 보는 조선 역사

 
-사진 정조-

(1) 태조~세종 :    용의 눈물 (1997 KBS / 태조 - 김무생, 태종 - 유동근, 세종 - 안재모, 양녕대군 - 이민우,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도지원, 정도전 - 김홍기, 어리 - 유니)
(2) 문종~성종 :    한명회 (1994 KBS  / 세조 - 서인석, 한명회 - 이덕화, 문종 - 송승환, 단종 - 정태우
                           성종 - 박진성, 연산군 - 이민우, 폐비 윤씨 - 장서희, 김종서 - 임동진, 인수대비 - 김영란)
(3) 연산군 :          장녹수 (1995 KBS / 연산군 - 유동근, 장녹수 - 박지영, 인수대비 - 반효정)
(4) 중종~명종 :    조광조 (1995 KBS / 중종 - 이진우, 조광조 - 유동근, 문정왕후 - 김민정, 경빈박씨 - 김성령)
(5) 선조 :             불멸의 이순신 (2004 KBS / 선조 - 최철호, 이순신 - 김명민, 원균 - 최재성)
(6) 광해군~현종 : 서궁 (1996 KBS / 광해군 - 김규철, 개시 - 이영애, 인목대비 - 이보희)
(7) 숙종 :             장희빈 (1995 SBS / 숙종 - 임호, 장희빈 - 정선경, 인현왕후 - 김원희, 숙빈 최씨 - 남주희)
(8) 영조 :             홍국영 (2001 MBC / 영조 - 최불암, 홍국영 - 김상경, 정후겸 - 정웅인,
                           정순왕후 - 염현희, 혜경궁 홍씨 - 이상숙)
(9) 정조 :             왕도 (1991 KBS / 정조 - 강석우, 홍국영 - 김영철, 효의왕후 - 박순애, 정순왕후 - 김자옥
                           혜경궁 홍씨 - 정영숙)
(10) 정조 :           소설 목민심서 (2000 KBS / 정조 - 김홍기, 정약용 - 이진우)
(11) 순조~고종명성황후 (2001 KBS / 흥선 대원군 - 유동근, 고종 - 이진우, 명성황후 - 이미연 & 최명길)


PS 1. 픽션이 과도한 작품은 피했습니다.
         예를 들면, "왕과 나" (성종~연산군?), "대장금" (중종), "한성별곡" (정조) 등등..
PS 2. 인물의 일대기라도 왕실 역사가 주가 되는 작품 안에서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천둥소리" (광해군), "어사 박문수" (영조), "태양인 이제마" (철종, 고종) 등등은 제외.


출처:
엠파스 지식인
원 출처는 정확히 기재되어 있아 링크 안됨.(디비디프라임 ALEX작성자님 http://dvdprime.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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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로 보는 연산군(燕山君)의 생애(生涯)


이 분의 블로그에 스크랩글이 많아서 이 글도 이 분이 원본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내가 찾은 곳들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글이므로 이 글을 원본 출처로 링크시켰다. 대부분의 연산군 기록이 그렇듯이 이 글 역시 야사의 기록을 실록과 섞어넣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야사서나 실록의 일부분은 내가 찾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직접 링크를 시켰으며, 연대 또한 틀린 점이 많아서 실록에 맞게 수정 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정확히 남아 확인 가능한 부분은 실록에 링크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고전번역원의 야사서에 링크했다. 앞으로도 조금씩 실제 기록을 찾아서 링크시킬 예정이다.



1476년 성종 7년 (1세)

11월 7일 삼경 오점(0시), 조선왕조 9대 임금 성종(成宗)과 후궁에서 중전이 된 윤씨(尹氏) 사이의 적장자로 탄생. 아이때 부르는 임금은 무작금(無作金). 이름은 융.

성종은 첫 중전이었던 공혜왕후(恭惠王后) 한(韓)씨를 여읜 후 후궁들의 투총 속에서 숙의(淑儀) 윤씨를 중전으로 맞아, 우여곡절 끝에 연산군을 얻었다. 성종의 이때 나이 19세. 보위에 오른 후 이해 봄까지 대왕대비(大王大妃)인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喜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있었고, 예종비(睿宗妃)인 안순왕후(安順王后)가 왕대비(王大妃)로,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있어 정사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특히 인수대비 한씨는, 세조의 세자빈으로서 다음 대의 중전이 될 막강한 자리에 있다가, 세자(德宗으로 추존)가 죽고 그 아우 예종이 보위에 오르자 궐 밖으로 나가 수빈(粹嬪)으로 지낸 뒤,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자 다시 궁 안으로 들어와 아직 어린 성종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477년 성종 8년(2세)

2월 21일. 연산군이 창진(瘡疹)인 듯한 병을 앓자 성종은 종묘(宗廟)·사직(社稷)·목멱산 등에 기도를 드리도록 명했다.  여기서 병의 차도가 없자, 이조판서 강희맹(姜希孟)의 집에 피병(避病)을 갔다. 이때 원자의 피병지가 된 이조판서 강희맹의 집은 명문(名門)인 데다 그의 아내 안(安)씨는 효와 덕으로 알려진 부인이었다. 원자가 실꾸러미를 삼켜 목숨이 위험했을 때 안씨 부인이 구해 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또 원자가 강희맹의 집 정원 소나무 밑에서 놀곤 했었는데 뒷날 왕위에 오른 후 그 소나무에 벼슬을 내렸다. 금띠를 소나무에 둘러 주고,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말에서 내리게 했는데, 그 문의 이름을 피마병문(避馬屛門)이라고 하기도 했다.

3월 14일. 중전 윤씨가 친잠례(親蠶禮)를 행하는 날인데, 이 날 윤씨는 나인을 시켜 자신을 투기하고 성종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후궁을 제거하기 위해 비상(砒霜)과 방양서(方穰書)를 가져오게 했다. 윤씨의 나인 삼월이는 윤씨 일문과 짜고 투서로써 후궁들이 중전과 원자를 해치고 있다고 소문내게 하고, 비상과 방양서를 구해 준다. 비상 바른 곶감과 굿하는 방법이 적힌 방양서를 중전의 침실에서 발견한 성종이 격노하고 이를 안 삼대비 역시 대노하여 윤씨는 폐출 위기까지 몰린다.

3월 29일. 삼대비의 후원을 받은 성종이 중전 폐출을 명했다. 이때 윤씨는 수빈(壽嬪)으로 강등되고 자수궁(慈壽宮)으로 쫓겨갈 위기에서 승지(承旨) 임사홍(任仕洪) 등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복위된다. 그러나 이 날 이후 윤씨는 말만 중전일 뿐이지 성종과 삼대비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받게 된다. 특히 성종은 아예 중전을 무시하고 생일날에도 연회를 열지 못하게 했으며 원자도 만날 수 없도록 한다. 자신은 다른 후궁들과 시첩의 방만 찾으니 윤씨와의 불화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1479년 성종 10년 (4세)

6월 1일. 원자의 모후 윤씨의 생일이었는데, 연 3년째, 이때도 성종은 하례(賀禮)를 정지하게 했다. 저녁에 성종이 시첩의 방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윤씨가 그 방으로 뛰어든다. 여기서 윤씨는 성종의 얼굴에 상채기를 내는 정도의 대사건을 저지른다.

6월 2일. 마침내 윤씨 폐위를 결정하고 사저로 내쳤다. 윤씨가 궁에 든지 6년이고 곤위에 오른지 4년이었다. 처음엔 윤씨 어머니 신(申)씨와 함께 사는 것만 허락하였다가 뒤에 오라비 삼형제의 출입까지 허락하였다.

이 무렵 원자가 피병을 마치고 환궁한 것으로 보인다.

1480년 성종 11년 (5세)

11월 8일, 윤호(尹壕)의 딸로서 숙의가 되어 있던 윤씨가 중전으로 정식 책봉된다. 이럴 무렵 사저로 내쳐진 윤씨 일문에서 거듭 복위의 꿈을 버리지 않고 여러 가지 행동을 꾸며댄다. 폐비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문, 폐비가 문 밖 출입을 하고 있다는 소문 등이 나돌아, 성종과 삼대비는 여러 번 행실을 조심하라는 언문을 내린다. 윤씨 삼형제를 하옥시키기도 했다.

1482년 성종 13년 (7세)

8월 16일. 마침내 윤씨에게 사사(賜死)를 명했다. 좌승지 이세좌(李世佐)·내관 조진(曺疹) 등이 명을 받들었다. 이때의 사약이 비상이었다. 윤씨 삼형제는 각각 외방에 유배되고, 신씨는 폐비를 건원릉(建元陵) 가는 길에 염장한 뒤 큰아들 구의 유배지 장흥(長興)으로 유배된다. 건원릉은 태조 이성계의 능침이다.

폐비 윤씨 사사에 얽힌 많은 일화 중에, 좌승지 이세좌의 경우를 소개한다. 윤씨의 염장까지 지켜보고 오라는 어명을 행하고 이튿날 늦게서야 집에 돌아온 이세좌에게 부인이 물었다. "조정에서 계속해서 폐비의 죄를 논한다고 하던데 어찌될 것 같습니까?" 이에 세좌는 풀이 죽어 대답했다. "지금 내가 어명을 받들어 사약을 내리고 오는 길입니다." 부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 보복하지 않겠는가. 조정에서 장차 원자를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거조(擧措)를 하는 것입니까!" 하며 통곡했다. 뒷날 폐비 사사에 관련된 자가 모두 화를 입게 되는데 이세좌도 그의 아들과 함께 죽게 된다.

1483년 성종 14년 (8세)

2월 6일.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당대의 정승·학자들이 세자 사부(師傅)·빈객(賓客)이 되어 세자의 학업을 돕는다.

허침(許琛)과 조지서(趙之瑞)는 연산군 세자 시절 각각 필선(弼善)과 보덕(輔德)으로 있었던 사람들이다. 강(講)의 방법이 허침은 부드러워 어린 세자를 융통성있게 가르쳤고 조지서는 강직해서 일체의 나태함도 용서하지 않았다. 세자는 이를 두고 [趙之瑞大小人也 許琛大聖人也]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뒷날 갑자년(甲子年)사화 때 조지서는 베임을 당하고 , 허침은 여러 사람을 구했으나 그 역시 울화로 피를 토하다가 죽고 만다.

3월 30일. 세조비 정희왕후가 죽었다. 성종은 정희왕후 등 삼대비를 편히 모시기 위해 창경궁(昌慶宮)을 새로 짓고, 연회도 자주 열었다. 뒷날 연산군이 주색에 빠지게 된 것이 어릴 때부터 연락(宴樂)과 가까웠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정희왕후가 죽은 다음해 완공된 창경궁은 연산군의 환락의 놀이터가 된다. 기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풍월정(風月亭)은 월산대군의 처 박씨를 찾아 범하게 하는 불륜의 연회장이 되기도 하고, 임사홍의 아들 풍원위(風原尉) 임숭재(任崇載)의 풍광 좋은 집,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 등은 연산군의 잦은 연회지로 제공되어야 했다.

1487년 성종 18년 (12세)

3월 1일. 병조판서 신승선(愼承善)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혼인 때 아침부터 비바람이 일어 모두들 언짢게 여기고 있는데, 성종이 신승선의 집에 어서를 내렸다. [세상의 풍속은 혼인날에 바람이불고 비 오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나 대개 바람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고 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하니 만물이 사는 것은 모두 바람과 비의 공덕이라.] 어서를 내리고 나자 오후부터 비가 개어 무사히 혼례를 마칠 수 있었다. 세자빈 신씨에게는 수근(守勤)·수영(守英)·수겸(守謙) 세 오라비가 있었는데, 아버지 신승선은 성종조에 영의정까지 오르고, 세 오라비는 연산조에 각각 좌의정, 형조판서, 개성 유수를 지내게 된다. 그 세도 부림이 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연산군이 축출될 때 신씨 일문 또한 큰 화를 입는다.

1489년 성종 20년(14세)

5월 20일. 7년 동안 방치해 두었던 폐비 윤씨의 무덤을 <윤씨의 묘>라 칭하고 속절(俗節)에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고는 백 년 뒤에도 명을 고치지 못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윤씨일가가 모두 유배 중이라, 속절이 되어도 제사 지내는 이 없어 연산군 2년 무렵에 가면 윤씨 묘는 허물어질 형국이 되어있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행적 기록은 그다지 많은편이 아니다. 그중 연려실기술의 것을 소개한다.

일찍이 성종이 사향사슴 한 마리를 길렀는데 길이 잘 들어서 항상 곁에 따라다녔다. 어느날 세자가 성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 사슴이 와서 세자를 핥았다. 세자가 발로 사슴을 차니 성종이 불쾌해서 [사람이 좋아 따르는 짐승을 너는 어찌 잔인스럽게 대하느냐!]고 소리쳤다. 뒷날 연산군은 이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

1494년 성종 25년 (19세)

12월 24일. 성종 승하했다. 29일 연산군이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니 조선왕조 10대 임금이다. 임금이 되자마자 연산군은 성종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재(水陸齎)를 올릴 것을 명한다. 불가에서 물, 뭍의 여러 귀신들에게 음식을 차려 올리며 경을 읽는 행사가 수륙재라 성종 밑에서 숭유(崇儒)를 행해온 삼사(三司)에서 반대하고 나선다. 연산군이 이를 묵살하고 재를 강행함으로써 유림이 들고 일어났고, 연산군은 이에 귀양형·장형 등으로 맞섰다.

1495년 연산군 1년 (20세)

3월 16일.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보고 처음으로 자신의 친모가 죄를 짓고, 폐위되어 죽은 것을 안다.
4월 11일, 폐비· 사사· 묘 이름 정할 때의 사실을 모두 알게 된다.
9월 20일, 안치된 폐비 윤씨 어머니 신씨와 윤씨 삼형제를 풀어 주었다.

1496년 연산군 2년 (21세)

윤 3월 13일. 내시를 시켜 폐비 묘를 살펴 보게 하니 [묘소가 무너진 채 여러 해를 수축하지 않아 장차 해골이 나와 여우와 삵에게 먹힐 지경이다]하여 천장(遷葬)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는 성종의 유교를 저버리는 일이라 하여 삼사의 관원·유림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친다.

1497년 연산군 3년 (22세)

4월 9일. 폐비의 묘가 이장되고 신주와 사당이 세워져 그 이름이 효사묘(孝思墓)·회묘(懷墓)로 붙여진 이날까지 반대 상소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만큼 많았다. 여기에 대간들의 미움을 받아 여러 차례 귀양길에 들었던 임사홍을 그 아들 임숭재와 가까웠던 까닭에 중용코자 했으나 또 유림의 세력과 부딪친다.

12월 18일. 원자 황(惶)을 낳자, 사면· 복직령을 내리는데 임사홍의 직급이 따라서 높아졌다. 이무렵 성종 때 탄핵을 받아 중책에 쓸 수 없도록 하명한 바 있는 유자광(柳子光)도 모친상을 마치고 돌아와 충훈부(忠勳部)에 속해 있었다.

1498년 연산군 4년 (23세)

7월 11일.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시작이다. 성종실록 편찬시 성종 때 사관이던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서 세조의 왕위 찬탈, 세조의 불륜 행각과 소릉(단종 어머니의 묘) 복구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초되어 김일손이 붙잡혀 옴으로 피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에 검열된 몇 개의 사초에서 그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고 특히 영남학파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조義帝文)이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사초와 관련있는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조종(祖宗)을 멸시한 대역죄로 몰리게 되었다.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한(漢)의 유방(劉邦)이 초(楚)의 회왕(懷王)을 친 것에 비유한 글이다. 여기에 또한 김일손의 사초에 [정희왕후의 국상 중에 이극돈(李克墩)이 장흥 관기(官妓)를 가까이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좌찬성으로서 실록청 당상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관여하고 있던 이극돈이 이 사실을 접하고 격노하여 그 부분을 삭제코자 함으로써 실록 편찬의 낭청(郎廳)이던 이목(李穆)·권경유(權景裕) 등의 미움을 사는 등 김일손의 사초는 대사건의 불씨가 될 소지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또한 유자광은 사적으로 김종직과 그 제자들에게 멸시받아온 처지인데가 이극돈의 비밀까지 알고 있어 여러모로 권위 회복의 일대 전기를 마련할 시기였다.

연산군은 유자광·윤필상(尹弼商) 등으로부터 사초에 관한 모든 일을 전해 듣고 이때를 신진사류의 기세를 꺾는 최적기로 생각한 듯하다. 죽은 김종직으로부터 그의 제자 김일손·이목·권경유·성중엄(成重奄)·강경서(姜景敍)·이수공(李守恭)·강겸(姜謙)·임희재(任熙載)·허반(許磐) 들은 항상 자신에게 반대만 해온 새파란 말단관리나 신진관리들, 아니면 현실을 모르고 명분만 따진 유생 출신들이었다. 이들을 제거하는 일이 연산군으로서는 더 없이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일에 관련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난 것이지 결코 그 원인이 이극돈의 사감, 유자광의 사감, 연산군의 병적인 폭정 등 단순한 말로써 설명될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7월 26일. 김종직 부관참시,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능지처사, 이목·강겸·허반 등의 주살이 명해졌다. 이어 김종직의 불온 서책, 문제의 사초들을 모두 불태우는 것 등과 이 7월의 사건에 격분하고 모의하던 어린 유생, 즉 유학(幼學) 10여명까지 뒤이어 처형되는 것 등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된다.

이에 반해 유자광·윤필상 등은 연산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으니 무오년에 훈신들에 의해 신진사류가 화를 입었다 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도 하고, 사초가 발단되어 일어난 것이라 하여 무오사화(史禍)라 하기도 한다.

뒷날 사관들은 성종 9년(1478년) 무술년에 유자광· 임사홍이 유배된 일과 이 무오사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무술의 옥은 정류(正類)가 사당(邪黨)을 다스린 것이요, 무오사화는 사당이 정류를 모함한 것이다.]

한편 이때 사호의 여파로 유배길에오르는 임사홍의 둘째아들 임희재는 다음과 같은 시로써 연산군의 폭정을 비난하여 후일 시가 연산군에게 보여져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한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
  재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연산군의 광포한 기질은 무오사화 때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갖가지 고문과 형벌도 이때부터 다양화되어 도적의 무리가 전국에서 창궐하던 연산군 6년을 거쳐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까지 가면 극에 달한다.

12월 23일. 인혜왕대비(예종비) 안순왕후 한씨가 승하했다.

1499년 연산군 5년 (24세)

1월. 원자 황이 천연두를 앓는다. 월산대군의 집에 피병을 간 듯하다.
2월. 무오사화를 전후해서 특진관(特進官)으로서 연산군과 가까이지내며 도총관(都總官)으로 병권을 흔들던 유자광이 뇌물사건과 관련, 탄핵받아 물러난다.

3월. 편찬 과정에서 사화를 불러일으켰던 성종실록이 완성되었다.

5월. 월산대군의 처 박(朴)씨에게 콩 50석 등을 주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인데 풍류를 좋아했다. 풍월정이 그의 집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연회하는 일이 잦았다. 월산대군은 이미 성종 19년(1488년), 연산군 13세 때 죽었고 그 처 박씨가 후사도 없이 혼자 있으면서 피병 온 원자를 간병했다. 전부터 탐할 뜻이 있던 연산군이 박씨를 처음 범한 것이 이 무렵인 듯하다.

이후, 연산군이 박씨를 위하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준다. 재물을 내리고 박씨 동생 박원종(朴元宗)에게도 많은 혜택을 주었다. 대간들이 이를 두고 끈질기게 반대 상소를 올리지만 듣지 않는다. 원자의 피병지가 월산대군의 집이었다는 사실 또한 주목거리다.

연산군의 탐욕 생활이 이때부터 극성스러워진 듯하다.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 연산군에는 숙부가 되는 제안대군(齊安大君) 등이 연산군의 탐욕을 채워주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궐 안의 정자는 연산군의 주연, 기녀들의 알몸놀이장이 되었다.

1500년 연산군 6년 (25세)

1월. 자순대비(慈順大妃)의 장자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신수근의 딸과 혼인하여 사저로 출합(出閤)했다.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에 의해 진성대군이 보호된 셈이다.

이 해 문경 새재 부근에서 도적 홍길동(洪吉童)의 무리가 창궐했다. 6월 21일, 홍길동이 잡히지만, 이후 오랜 세월 홍길동은 도적의 세계에서 신화적인 인물로 기록된다.

1501년 연산군 7년 (26세)

7월.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 어무적(魚無跡)이 시국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어무적은 부(賦)에 뛰어난 문학가였지만 서얼이라 천대받았다. 백성들이 핍박받는 내용의 부를 썼다가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의 글 몇 편이 남아 전해온다.

이 해쯤 연산군은 제안대군 사저의 가비(家婢)였던 장녹수(張綠水)를 궁에 받아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품계를 뛰어넘어 녹수는 내명부의 높은 지위의 후궁이 되어 갖은 세도를 부린다. 이미 색에 눈이 먼 연산군은 장녹수가 행하는 모든 뇌물 사건을 덮어주고 원하는 집은 아무 집이나 장녹수에게 주었다.

1502년 연산군 8년 (27세)

원자 황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까지 황은 월산대군 저에 있다가 돌아온다.

1503년 연산군 9년 (28세)

연산군에게는 약간의 자폐증세(自斃症勢)가 있었던 듯싶다. 창덕궁 후원에서 갖가지 기이한 연회를 벌이다가 궐밖의 가까이 있는 집을 모두 허물게 했고, 도성 밖 인가를 백리 바끙로 내쫓고 그곳을 사냥터로, 연회장으로 활용하는 등 백성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했고, 오직 알몸의 여인들만 옆에 두려 했다. 이때 없어졌다 후에 다시 생긴 고을이 양주(楊州)·파주(坡州)·고양(高陽) 등이다.

내시들이 따라와 바른 소리를 간하는 것이 듣기 싫어 <신언패(愼言牌)>를 목에 걸게도 했다. 신언패의 글은 이렇다.

  口是禍之門   입은 재화를 부르는 문
  舌是斬身刀   혀는 목을 베이는 칼

  연산군 말년에는 중신들도 이 신언패를 차야 했다.

1504년 연산군 10년 (29세)

전국에서 이름난 기생들을 모두 뽑아 궁에 두었으니 궁은 기녀들의 세상이었다. 중신들의 부인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그 중 미모가 나은 부인을 범하기도 했다. 미인을 구하는 일은 임사홍 부자가 주로 담당했는데 그 때문에 대간들의 탄핵 상소에도 불구하고 임사홍 부자는 옛 직위를 회복하여 연산군의 측근에 있게 된다.

3월 20일, 연산군이 임사홍 부자의 도움으로 폐비 윤씨의 생모 신씨를 만나 폐비 때의 일을 얘기듣는다. 다음날 새벽, 폐비 사건 당시 성종의 후궁이었던 정귀인·엄귀인의 투총과 크게 관련이 있었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두 여인을 잡아들여 그 아들들을 시켜 때려 죽이게 했다. 이어 연산군은 몸이 편치 않은 인수대왕대비에게로 달려가 폐비의 일을 격렬하게 항의했다. 연산군의 머리에 받혀 쓰러진 인수대왕대비는 그로부터 한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폐비 사사(賜死)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들추어 처벌하고, 이미 무오사화 때 귀양간 사람들까지 주살당하고, 그 이전에 죽은 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 등도 폐비 사사 때 반대하지 않았다 해서 부관참시 당하는 이 사건. 이것이 갑자사화(甲子士禍)다. 이공으로 임사홍은 병조판서가 되어 막강한 세도를 부린다.

1505년 연산군 11년 (30세)

4월 1일. 내시 김처선(金處善)이 연산군의 추태를 보지 못하고 간하다가 어전에서 연산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김처선은 내시로서 정 2품 벼슬에 있었다. 연산군에게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알지만 주상전하 같으신 분은 처음 보겠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화가 나서 활로 김처선의 갈빗대를 맞혔으나 김처선은 "신은 죽음을 두려워 않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보위에 오래 머물지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했다.

또 연산군의 화살이 몸에 맞아 무릎을 꿇자 연산군이 "일어나 걸어라 이놈!" 했다. "주상전하께선 다리가 부러져도 일어나 다니실 수 있겠습니까?" 라고 김처선이 말하자 연산이 그 혀를 끊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게 했다. 시체를 범에게 주고 <處>자를 못 쓰도록 명했다. 김처선의 아들 이공신(李公信)도 죽이고 가산을 적몰했다.

1506년 연산군 12년· 중종 1년 (31세)

7월 1일. 월산대군 처 박씨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되었으므로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 아우 박원종이 이 무렵 거사를 결심한 듯하다.

여름, 가을 도적의 무리가 창궐하고 귀양간 사람들마저 무리를 이루어 화적떼가 되는 등 해서 도성을 치려 했다. 그 중 대표되는 이가 이장곤(李長坤)이었는데, 이 무리가 클 것이라는 풍문이 있었고, 연산군마저 이장곤에 대한 시를 쓸 정도였다.

9월 1일. 성희안(成希顔)·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보위에 올리는 것을 주골자로 하는 거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며칠 전 연산군은 자신의 종말을 예감이라도 한 듯 [인생은 초로(草露)와 같은 것,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이라는 말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민심이 이미 기울어진 때라 박원종·성희안·신윤무(辛允武)·유순정(柳順汀)·홍경주(洪景舟)·김감(金勘) 등의 혁명 주체 세력들의 움직임은 가는 곳마다 막힘이 없었다.

임사홍이 이름도 없는 민중들의 발길에 죽었고 (임숭재는 그 전에 병으로 죽었다) 신수근 형제와 연산군에게 총애받던 궁녀들의 가인(家人)들도 무차별 참수되었다. 연산군도 옥새를 내놓았고, 진성대군은 그의 어머니 자순대비의 재가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뒤늦게 혁명 세력에 동조한 유순(柳洵)이 영의정이 되었고, 좌이정도 역시 연산군 시절 우의정을 지내면서 많은 살상을 막아왔고 거사 당시에도 다른 뜻 없이 인명 피해를 막는데 더 힘쓴 김수동(金壽童)이 되었으며, 거사의 핵심 박원종이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유자광은 거사 세력에 붙어 반정 1등공신이 되어 마지막 세도를 누렸다.

연산군은 처음에 동궁(東宮)으로 밀려났다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쫓겨나고, 신씨 또한 폐비의 몸이 되어 정청궁(貞淸宮)으로, 폐세자된 황은 강원도 정선으로 각각 쫓겨났다. 진성대군 시절 신수근의 딸인 부인 신씨 덕으로 살아남아 보위에까지 오른 중종은 그 부인이 역신의 딸이라는 이유로 정식 중전 책봉을 하지 않은 채로 폐비시키고 새 중전을 맞아야 했는데, 그 폐비 신씨가 죽을 때까지 중종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살다 간 자리엔 <치마바위>의 이야기가 남아 전하고 있다.

9월 3일. 폐위된 왕을 연산군(燕山君)으로 봉했다.

9월 10일. 중종은 연산군의 재위 시절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연산군의 자제 시집(自製詩集)을 불태우게 했다. 연산군은 임사홍 등으로 하여금 어제시집 간행 도감을 설치했고, 도승지 강혼(姜渾) 등으로 하여금 시를 쓸 때마다 화답하게 하는 등으로 시작에 관심이 많았는데 반정 후 그에 대한 많은 기록과 시들이 불태워져, 간신히 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서만 그의 시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

11월 8일.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된 연산군은 역질에 걸려 중종이 보낸 약을 여러 차례 복용하다가 6일 하직했다. 중종은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장사지내게 했고, 연산군을 수발했던 수행시녀는 3년간, 수행한 방자들에게는 백일 간 상복을 입게 했고, 중종 자신은 3일동안 소선(素膳)을 들었고 경연을 정지했다.

왕조실록에는 강화 교동에서 장사를 치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연산군의 무덤으 그의 아내 신씨의 무덤과 함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해 있다. <燕山君之墓>라고 새겨진 비면 뒤에는 <正德 八年 二月二十日葬>이라 씌어 있다. 정덕 8년이면 1513년이니까, 연산군이 죽은 지 7년만에 이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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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즐겁고 신성한 것이라 여긴 신라시대 여인들이 칠거지악을 내세우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갑갑해서 모두 기생이 됐거나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외국도 그런 것인지 우리 민족이 유달리 성을 사랑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언어에 유독 음담패설과 성 관련 욕설이 많은 걸 보면 조선시대의 악랄한 억압은 강한 것에 대한 더 강한 것을 통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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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으로 님의 블로그 - 섹스의 두 얼굴, 신라와 조선


오늘은 '점잖은(?) 조선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던 섹스 스캔들'들을 모아보려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한 글을 쓰셨고, 이 블로그에도 황진이나 어우동에 대한 글이 있으니, 링크를 통한 소개만으로 내 수고를 덜고자 한다.

↓이 글↓은 카페글이라서 검색을 통한 조회는 되지만, 링크를 따라가면 조회금지로 나와서 원본 출처 명기 후에 표기한 것임.

조선시대 스캔들

영화 <스캔들>이 나오기 전에는 조선시대 스캔들이야 과부가 머슴과 도망가 숨어 살거나 결국 자살을 택하는 것 정도의 고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어우동, 사방지 등 한국형 에로 영화의 소재가 모두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기억하자.


어우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사랑을 나눈 여자이다. 조선 성종 때의 실존 인물인 어우동은 본래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간통 문제가 불거져 이혼당했고 그 이후 노소, 근친을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을 뿌린다. 어우동은 한번 관계를 맺은 남자는 절대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었는데 애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몸에 문신하도록 강요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애정 행각이 구설수에 올라 풍기문란 죄로 처형된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어우동의 형량은 고작 곤장형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연루된 고위 관리들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사형을 고집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책임감없는 행동은 한결같다.



믿기지 않겠지만 500년 조선조 동안 왕실 여인들의 동성연애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궁궐 내 동성연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세종대왕이 이와 관련된 벌칙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 세종대왕이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연애자임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을 충격에 빠뜨린 며느리는 후에 문종이 되는 세자의 둘째 부인인 봉씨. 실록에 의하면 봉씨는 거짓말로 임신과 낙태를 번갈아 하고 술을 즐겨 만취한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물론 이는 봉씨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은 관리들의 악의에 찬 기록일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날 궐내에 여종 소쌍이 세자빈과 같이 잔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왕의 문초를 받던 소쌍은 세자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고백한다. 결론? 물론 세자빈은 폐위됐고 친정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도 자결했다.



드라마 <대장금>의 배경이 되는 중종 때 조정은 백정의 딸을 양반의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로 한바탕 시끄러웠다. 결국 중종이 어려운 시절에 동고동락한 천민의 딸을 양반의 정식 아내로 인정하라는 명령을 내려 일단락된 이 사건은 조선 전체가 들썩거렸던 백정의 딸 양씨 스캔들이다. 폭군 연산군은 예쁜 여자라면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은 이장곤이라는 관리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이에 격분한 이장곤은 홧김에 아내를 죽이고 함경로 도망친다. 도망자 신분의 이장곤은 백정 양씨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정말 괜찮은 그 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도망자 생활 몇 년 만에 중종의 즉위로 조정으로 돌아온 이장곤. 그동안 양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장곤은 동고동락한 아내를 버릴 수 없어 조정에 선처를 부탁한다. 결국 이장곤 덕에 부인 양씨는 정경부인이 되고 친정은 모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정경부인 양씨의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 <임꺽정>에도 등장하는데 임꺽정은 정경부인 양씨의 조카로 설정돼 있다.


언젠가 KBS <역사 스페셜>에서 지독한 사랑으로 소개된 바 있는 홍랑과 김덕창의 스캔들은 이렇다. 김덕창은 함경도 변방에 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시와 음악에 뛰어난 관기 홍랑을 만난다. 서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김덕창의 임지 변경으로 헤어지게 되는데 어느 날 홍랑은 한양에 있는 김덕창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관기는 임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홍랑은 연인을 찾아 한양에 오게 되고, 한양에서 둘은 다시 한번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한양 한복판에 아내까지 있는 양반 관리가 법을 어긴 관기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고 김덕창은 파직 후 객지에서 살해됐다. 사실 개인적이기까지 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세하게 전해지는 이유는 후에 홍랑이 김덕창을 위해 평생 수절했고 결국 김덕창과 나란히 묻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회 금기를 깨고 사랑을 이룬 그녀의 용기가 더 부럽다.


양녕대군은 동생을 위해 일부러 패륜아 행세를 한 꽤 멋진 왕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녕대군을 호탕한 풍류가로만 생각하기에는 입에 담기 민망한 스캔들이 많다. 양녕대군이 일으킨 스캔들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웠던 것은 유부녀인 어리 강간 사건이다. 어리는 한 정승의 첩으로 병이 있고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양녕대군은 그녀를 납치해 강제로 관계를 갖는다. 심지어 양평대군은 어리를 궁궐과 지방 유배지에까지 끌였들이는데 이는 연산군의 스캔들을 제외한 조선시대 최고의 섹스 스캔들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는 이 어리 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됐다는 사실을 들어 당대의 로맨스로 미화하지만 결국 양평대군이 어리를 버리고 왕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어쨌든 그 이후의 어리의 삶은 기록에 전해오지 않는다.

출처
:아름다운 만남의 동행  원문보기





영웅은 수많은 미녀들을 취해도 호남으로서의 기개나 풍류로 포장하는데 비해, 여자들은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의 미국에서도 추악한 스캔들의 여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걸 보니 이 또한 남녀차별의 일종인 것 같아서 과히 유쾌하진 않다만.. 나 역시도 그녀들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걸 보면 나도 똑같은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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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극 역사상 가장 많이 다뤄진 왕은 누구일까? 조선왕조 비운의 왕인 10대 연산군과 14대 광해군, 19대 숙종이다. 세 군주는 모두 장녹수, 김개시, 장희빈이라는 희대의 요부를 만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드라마틱한 소재의 왕으로 각광받아왔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로 어릴적 어머니(폐비 윤씨)를 잃고 외톨이로 자라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2번에 걸친 사화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 또 그로 인한 폐륜 등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실록이 아니라 일기라는 초라한 이름으로 남아있는 연산군 일기
01

그리하여 역대 연산군에 대해서 써보고 싶은 욕심은 있었으나 차마 엄두가 나지 않던 차에 아주 좋은 게시물 하나를 발견했다. 이글루 블로그의 이준님이 쓰신 '역대 연산군 모음집'이라는 글인데 내가 쓰려던 주제와 제목까지 거의 똑같다.ㅋ 여기에 사진과 영상을 적당히 덧붙여서 보는 재미를 더하고자 한다.



역대 연산군(?) 모음집 -_-

1. 연산군을 다룬 최초의 괜찮은 작품은
박종화씨의 "금삼의 피" 원작 '폭군 연산'이 있지요. 여기서는 신영균씨가 우리들의 연산군으로 나와서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사실 신영균씨가 의외로 연기를 잘하는데 이쪽은 영 매너리즘이었고 (세트도 압박) 다만 폭군이 된게 어머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이라는 월탄 선생 전통의 해석으로 나갑니다.

처음에 신영균인줄 알고 잘못 가져온 이미지(김진규)

신영균의 연산군


역시 압박중에 하나는 연산군 졸개 내시가 무려 "김희갑"이었고 -_-;;;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낀 연산이 자신이 죽인 모든 사람들을 사면 복권하고 장녹수같은 쪽을 내쫓고 충신들을 다시 쓰려고 마음먹은 바로 그날 중종반정이 일어난다는 설정이지요 -_-;;;; 그래서 반정때 도망가면서 "내일 아침만 된다면.... " 운운하는 대사가 꽤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옛날 영화라, 므흣빵빵은 기대 안하시는게 좋지요 -_-;;;


2. 조선왕조 5백년 "설중매"에서의 연산은 견미리씨의 전남편 임영규씨가 했습니다. -_-;;; 성종은 국영방송판 대조영에서 보장왕을 하시는 길용우씨였지요. 항상 나라위해 머리쓰다 과로사한 성종의 아들인데, 어릴때부터 트라우마에 빠져 있는 쪽으로 나옵니다.

문제는 다음부터 나올- 신영균씨도 마찬가지지만 - 연산처럼 "첨에는 잘 나가다가 나중에 맛이 가는" 타입이 아니라 첨부터 개념 없는 아새퀴로 나와준다는 점이죠. 조선왕조 5백년 사상 - 사실 뭐 광해군 이희도도 꽤 폭군이 아니라 개념있는 임금으로 그렸으니- 최악의 캐릭터로 자리 잡을 정도이지요. 원작(그러니까 신봉승씨의 대하 소설)에 나오는 므흣빵빵은 안 재현했지만 재상들을 졸라 패고, 기생 이름 아니면 "폐비"라는 이름으로 시를 지으라고 협박치는 건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악의 캐릭터


장녹수는 이미숙 아줌마가, 김처선은 박규채 옹이 열연을 했습니다.- 박규채옹이 죽는건 실록을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3. 영화 "연산군"이 제작될때 연산군을 무려 "이대근" -_-;;씨가 한다고 많은 솔로들이 가슴을 설렌적이 있었죠. 그러나 이게 낚시 중에 낚시인게 장녹수가 "강수연"이라는 점입니다. -_-;;; 강수연이야 영화에서 노출을 극히 싫어해서 씨받이 조차도 국내판과 해외판을 따로 편집할 정도였죠. 그러니 뭐 재대로 된 "그림"이 나옵니까 -_-;;;

여기서는 연산이 완전히 "부처님 가운데 도막"인데,  폐비 사사 사건을 수사하는게 무려 "장녹수"이고 그걸 수사하려는데 유력한 증인이 "선왕의 후궁"이 보낸 자객에게 수리검으로 살해당하는 압권도 보여줍니다. -_-;;; 후궁들을 손수 박살은 내는데 나중에 어느 노 대신을 팽형(진짜 삶는게 아니고 삶는 것처럼 하고 그냥 놔두는 형벌) 하려는데 대신이 자살하니까 끌어안고 울부짖습니다. 마지막은 폐위된후 (강화도는 안가고) 모친의 묘 앞에서 통곡하는 변강쇠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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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실 안 알려졌지만 "연산일기"라는 걸작도 있지요. "왕의 남자"에서의 연산군이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신분들은 이 작을 안봤다고 자수하는 셈입니다. 사실 정진영씨의 연기 이전에 유인촌씨가 이 연기를 했거든요-_-;;; 감독은 무려 임권택 감독입니다. 여기서 앞부분은 "신료의 방해"로 인해서 자기의 큰 뜻을 펼칠수 없는 젊은 쾌남아 연산을, 나이가 들고 비밀을 안 후부터는 조금씩 미쳐가서 결국 칼리귤라 사촌으로 변신하는 모습이 극렬하게 나오지요. 맛이 간후부터는 "후회"라는것도 없지만 뭔가 쫓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진짜 광기 어린 연산군, 유인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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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쫓겨난 후에 아버지의 유령 - 나오지는 않지만 - 에 덜덜 떨면서 화면을 응시하는게 마지막 장면이지요.

이 작 자체의 문제는 "유인촌"씨의 연기에 가린 나머지 다른 사람의 연기가 팍삭 죽었다는 점입니다. 내시 졸개를 무려 "김인문"씨가 했고 - 이 사람은 중종 반정 전에 연산군에게 홧김에 꼬치가 되버립니다.- 장녹수는 소시적 에로배우가 했지요(-_-;;;) 의외로 잔인하기는 잔인해서 참수장면이 그대로 나오고 신하들 모아놓고 방아찧으라는 장면과 찧기 싫으면 내가 찧겠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김처선이 이거 말리다가 죽습니다) 아, 그리고 방아장면은 안 나와도 방에서 돈 없어서 옷을 하나도 안 입은 여햏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춤추는 장면은 나와줍니다.-_-


5. 국영방송 사극에서의 연산군은 이덕화 옹이 주연한 한명회에서의 이민우장녹수에서의 유동근씨가 열연했지요. 한명회야 뭐 연산군은 한명회 사후에 나오니까 별 비중은 없고(명령 내릴 때 북치는 압박) 소리 지르는게 일입니다. -_-;;

19세의 어린 나이로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이민우



드라마 장녹수 오프닝
 


유동근씨는 좀 중후한 연기를 보여주는 편이지만 광기는 유인촌씨에 비해서는 영 아니었죠. 말년에 사이코가 된후에는 자신의 멸망을 항상 생각하는 그런 타입으로 변하지만 "완전히 미친"쪽은 아닙니다.

역시 어린 나이(20세)에 놀라운 연기, 왕과 비의 안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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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왕의 남자"의 정진영씨는 개인적으로 유인촌씨 다음에 가장 연산군 연기를 잘했다고 봅니다.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에서의 해석을 그대로 살려서 서브스토리인 "공길" 이야기를 넣은거에요. 광기와 고민, 사모곡이 적절히 조합된 최고의 연산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태조께서 입으시는 푸른 옷을 입는지는 미스테리) 사실 석류 낭자나 안습 장녹수보다도 연산의 연기가 죽었다면 영화 자체가 훨씬 질이 떨어졌을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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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연산이 두 후궁을 죽이는 장면은 실록이나 연려실기술의 "퍼포먼스"가 있지요. 어린이들 보는 책은 정서상 "연산이 손수 박살냈다" 식으로 그립니다. (이대근이 주연한 영화나 왕의 남자 - 뭐 이건 칼이지만 -  는 그렇게 그립니다.) 조선왕조 5백년 부분의 그 장면은 제가 못봤는데 신봉승씨의 원작에서는 죽이고 "다 벗기"고 뼈와 살을 분리시킵니다(말 그대로) 연산일기는 벗기는 걸 빼고는 퍼포먼스를 그대로 합니다.

실록대로 연산군을 찍으면 한국판 칼리귤라가 나올듯 하지요 -_-;;;;

유인촌씨는 서울방송 개념 사극 임꺽정에서도 첫회에 연산군으로 나와서 철퇴로 후궁을 박살내줍니다. (임꺽정의 애인 기생이 장녹수의 딸이라는 설정이 있지요)

의외로 궁중 므흣물은 연산군 이야기가 아니라 이두용 감독의 "내시"이지요. 원래 신상옥 감독이 만든 작품(박노식-신성일이 나옵니다.)인데 감독이 공화국에 간 후에 이두용 감독이 에로 에로로 만들었지요. 여기서 무려 길용우씨가 절대 정력의 왕으로 나와서 이미숙씨에게 허무하게 죽습니다. -_-;;;

왜 연산군마저 살리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기사 역시 "왕권강화"와 실록 운운인데 연산군 미화하는 분들의 공통점은 "실록은 졸라 허술하다"는 겁니다. 실록이나 다른 조선시대 기록을 교차검증 안하시는 건지 뭔지 -_-;;

그리고 박정희는 그렇게 싫어하시는 분들이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이나 할 이야기를 연산군 미화때 동원하는건 뭔지, 이환경씨처럼 제국이면 하악하악인가? - 글구보니 국영방송 장녹수도 좀 이런쪽이었고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연산군 미화 책은 소시적 이x 범의 원균 정론만큼이나 아스트랄의 영역을 넘나드는 책이지요. 두 후궁은 사실 연산이 죽인게 아니라 "자살"했는데(왜?) 후세 사람들과 사관들이 연산이 죽인걸로 조작했다는 - 근데 자살했다는 기록도, 전설도 없잖아? 실록의 일시 추정 - 헉 김전일?!! - 으로 봐서 죽인게 아닌데 죽었으니 자살이라는 논리- 스토리는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듯.



현재 방영 중인 SBS 사극 왕과 나에서 얼마 전에 연산군이 태어났다. 성인 배역을 누가 맡을 지는 모르지만 역대 연산군의 명성에 맞는 연기자가 탄생하길 바란다. 장성한 연산군이면 유인촌 수준, 젊은 연산군에 이민우 수준이면 내 욕심이 너무 과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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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여인, 장녹수 - 실제로 엄청난 미인형 얼굴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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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장희빈은 영화로는 두 번, 드라마로는 네 번 제작됐다.
한국 영화의 최전성기라는 1960년대에 장희빈을 소재로 한 영화 두 편이 선보였다.


1961년 정창화 감독이 연출한 김지미 김진규 주연의 ‘장희빈’과
1968년 임권택 감독이 큐사인을 낸 남정임 신성일 주연의 ‘요화 장희빈’이다.

드라마로는 1971년 윤여정 주연의 MBC 일일극 ‘장희빈’,
1982년 이미숙 주연의 MBC 드라마 ‘여인열전-장희빈’,
1987년 전인화 주연의 MBC ‘조선왕조 500년-인현왕후’,
1995년 정선경 주연의 SBS ‘장희빈’이다.


장희빈(장옥정) 상상도

실록에서 유일하게 자못 아름다웠다고 전하는 장옥정, 매우 아름다운 장희빈 상상 초상화.


역대 장희빈과 인현왕후역

영화 1대 장희빈(1961) - 김지미 / 인현왕후(1961) - 조미령 / 숙종(1961) - 김진규

김지미 장희빈



영화 2대 장희빈(1968) - 남정임 / 인현왕후(1968) - 태현실 / 숙종(1968) - 신성일

남정임 장희빈


3대 장희빈(1971) - 윤여정 / 인현왕후(1971) - 김민정 / 숙종(1971) - 박근형

윤여정 장희빈



박근형 숙종
(이 사진은 나이가 너무 많아보이는데..
숙종 아닌 다른 왕 배역이 아닌가 싶기도.)



MBC 4대 장희빈(1982) - 이미숙 / 인현왕후(1982) - 이혜숙 / 숙종(1982) - 유인촌

이미숙 장희빈

유인촌 숙종, 이미숙 장희빈

그 이후 모든 장희빈 배역의 이미지와 연기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미숙 장희빈





MBC 5대 장희빈(1988) - 전인화 / 5대 인현왕후(1988) - 박순애 / 숙종(1988) - 강석우

전인화 장희빈
단아한 이미지의 전인화가 맡아서 더욱 화제가 된 장희빈
너무 잘생긴 강석우가 맡아서 인기 있었던 숙종




SBS 6대 장희빈(1995) - 정선경 / 인현왕후(1995) - 김원희 / 숙종(1995) - 임호

정선경 장희빈
정선경 장희빈




KBS 7대 장희빈(2002) - 김혜수 / 인현왕후(2002) - 박선영 / 숙종(2002) - 전광렬

김혜수 장희빈
김혜수 장희빈



그동안 숙빈 최씨 역을 맡았던 배우들 (1대 ~ 3대는 찾을 수 없음.)

숙빈 최씨 이미영, 견미리, 남주희, 박예진



유명한 드라마가 아니라서 알려지지 않은 이재은 장희빈

이재은 장희빈
이재은 장희빈
이재은 장희빈

이재은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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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셜록홈즈님의 블로그 : http://blog.daum.net/s203039/6725428

===> 이게 원 출처인줄 알았지만 그도 또한 아니고, 이 분도 출처를 안밝혀서 원래 출처는 알 수 없음....ㅠㅠ


조선의 3대 요부, 장녹수와 장희빈 그리고 정난정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될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 중 임금의 사랑스러운 애첩이었던 장녹수와 장희빈은 궁궐 깊숙한 곳에서 '왕실 정치' 를 했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비슷한 점을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장녹수와 장희빈, 이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들 중 누가 더 조선조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는가?

왕의 남자 장녹수 강성연



장녹수 - 미천한 출신, 그리고 야망.


장녹수와 장희빈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신분 상승에 대한 지독한 야망을 감추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은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19년에 충청도 문의현령까지 지냈으나 더 이상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었고 신분도 노비출신으로 천인 중 천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면 자녀는 자동으로 천인이 되었으며, 그 자녀의 소유권은 모계를 따라 가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장녹수는 태어날 때부터 '노비의 딸' 로 평생을 노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신분도 미천한데다가 가난하기까지 했던 장녹수의 젊은 시절은 비참하리라만큼 불행했다. 제안대군의 종과 결혼해 아기까지 낳았던 장녹수는 돈을 벌기 위해 여러번 몸을 팔았고 돈에 쪼달리자 가정을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가정을 버린 장녹수는 몸을 파는 천기의 수준에서 벗어나 술과 기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정식으로 기생으로 데뷔했다. 뛰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앳된 외모와 여성스러운 애교를 지니고 있었던 장녹수는 단박에 명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연산군의 눈에 띄어 궁궐로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실록에서 '자못 아름다웠다'라고 전하는 유일한 여인, 장옥정

희빈 장씨 얼굴 상상도.



장희빈 - 숙종을 유혹하다.

극적으로 궁궐에 들어간 장녹수에 비해 장희빈(장옥정)의 입궁은 철저히 계산적이었다. 장옥정의 숙부 장현은 실록에 "국중의 거부" 라고 기록될 정도로 대단한 부를 모은 인물이었지만 어머니가 노비출신이었던 까닭에 그녀는 천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비로서 어미가 겪은 설움과 치욕을 보고 자란 옥정은 천인 딱지를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사회는 '서인'과 '남인' 의 정쟁이 극에 달았던 때였고 남인에 몸을 담고 있던 옥정의 가문은 남인을 위해 옥정을 궁녀로 입궐시킨다.

당시 궁궐은 남인이었던 장렬왕후(대왕대비) 와 서인이었던 명성왕후(대비)의 기 싸움이 한창이었던 때였고 장렬왕후는 옥정을 숙종에게 소개시킴으로써 정권획득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 타고난 미모와 매력을 가지고 있던 옥정은 20살 혈기왕성한 숙종을 유혹하는데 성공했고 그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다.

숙종의 사랑을 받게 된 옥정의 위세는 자못 등등했으나 당시 궁궐 최고의 권력자이자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명성왕후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명성왕후는 옥정을 "요악하고 사악하며, 덕이 없고 천하다." 라는 명목으로 궁궐 밖으로 쫒아냈고 서운해하는 숙종을 위해 민유중의 딸을 중전으로 간택한다.

이가 바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였다.


장녹수 - 왕을 가지고 놀다.

왕의 남자 장녹수, 연산군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연산을 가지고 논 것은 장생과 공길이었지만 실제로 연산을 가지고 놀았던 것은 장녹수였다. 그녀는 왕이라는 자리에, 궁궐의 법도에 지겨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연산을 가장 세속적이고 천박하게 만들어 놓는 특별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연산의 불행한 가정환경을 잘 알고 있던 녹수는 연산에게 '엄마' 와 같은 존재로 다가갔다. 이미 예전부터 그녀는 남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남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지독히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녀는 연산에게 "야, 이놈" 등의 상소리를 해댔고 그를 조롱하기도 했으나 연산은 그런 녹수의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녹수는 연산에게 '첩' 그 이상의 존재였다. 연산의 왕비였던 신씨는 엄숙하며 상당히 정숙한 인물이었고 연산은 그런 신비를 '왕비' 로써 존중했다. 연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일에 광분해 칼을 들고 대비전에 쳐들어 갔음에도 대비를 쳐 죽이지 못했던 것은 대비전 앞에 중전 신씨의 가로막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정숙하고 위엄있는 신씨에 비해 녹수는 과하리만큼 본능에 충실하며 연산의 몸과 마음을 모두 품어냈다. 연산은 어떤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웃었고 그녀에게 놀라울만큼 많은 재물을 하사했다. 녹수의 집을 건축할 때 대간을 보내 감독을 시킨 것이나 내시와 승지 등에게 그녀의 가마를 뒤따르게 했다는 기록은 당시 녹수의 권세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비록 장녹수는 연산의 총애에 비해 인사 청탁에 적극적인 모습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종친과 조정관료들의 굽신거림을 받았고 뇌물과 투기, 재산모으기에는 혈안이 되어 있었다. 천한 출신의 기생이 임금의 비호 아래 갖은 이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조선사회가 용납할 수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서오릉(장희빈의 묘)


장희빈 - 중전의 자리에 오르다.

장옥정의 재 입궁은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의 승하 이후에 이루어졌다. 인현왕후는 장옥정을 그리워하는 숙종을 위해 장옥정의 재입궁을 손수 지휘했다. 살아 생전 명성왕후가 했던 "장옥정은 덕이 없고 사악하니 조심해야 할 것이오." 라는 경고를 무시했던 것은 인현왕후의 가장 큰 실수였다.

궁궐에 다시 들어온 장옥정은 놀라우리만큼 초고속 승진을 했다. 석녀였던 인현왕후에 비해 자식복까지 있었던 장옥정은 숙원, 소의의 자리를 거쳐 정 1품 '빈' 의 자리에 올라섰고 자신의 아들을 세자의 위치까지 밀어 올리며 기세 등등한 위엄을 누렸다.

장희빈의 성공은 곧 남인의 성공이었다. 남인은 장희빈의 비호 아래 정권을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곧 서인의 심볼마크 였던 인현왕후를 폐위 시키는데 성공한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와 세자의 어머니라는 이점으로 민비의 뒤를 이어 중궁전 주인자리를 꿰차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장희빈과 오라비인 장희재의 포악함은 극에 다달았다. 장희재의 집 앞은 뇌물과 각종 재물을 바치기 위한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뇌물의 값에 따라 벼슬이 나누어졌다. 인사청탁에 소극적이었던 장녹수에 비한다면 장희빈은 적극적일 정도로 매관매직에 혈안이 되있었다.

이 또한 남인 정권의 묵인이 있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장녹수와 장희빈, 같은 점과 다른 점.

그렇다면 사랑을 이용하여 조선을 자신의 치마폭 속에 놀렸던 장녹수와 장희빈 중 누가 더 권력의 중심에서 조정을 좌지우지 했을까?

여러가지 정황을 살펴볼때, 판정승은 "장녹수" 이다. 장녹수는 혼군인 연산군을 이용해, 임사홍 등과 결탁하여 사화를 일으키고 인수대비를 결국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 당시 최고의 정권자였다. 다만, 장녹수가 그렇게 정권을 뒤흔들 수 있었던 것도, 대궐의 큰 어른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 인수대비를 죽음으로 몰아 간 것도, 모두 연산군이 폭군 이자 광인 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부귀영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장희빈은 숙종을 통해 신분을 초월하고 왕비의 자리에 올라갔지만 장녹수와는 달리 도리어 막판에는 숙종에게 이용당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장희빈은 남인의 거두를 자처하며 정권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는 했으나, 훗날 날이 가면 갈수록 숙종에게 역이용 당해 환국의 구실로 가차없이 버려졌다.

다만, 장희빈 역시 요화인지라 숙종의 총애가 하늘을 찌를 때의 그 부귀와 영화는 장녹수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장녹수가 그저 연산군의 애첩이었다면, 장희빈은 한나라의 국모요, 국왕의 지어미요, 훗날 임금의 어머니로써의 위세 또한 누려 보았으니 궁궐에서의 위세가 권력에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를 위해 정적인 인현왕후를 비롯하여 앞길을 막는 자는 저주나 모함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가차없이 내려친 인물이었다. 이에 비한다면 장녹수는 후궁의 직위나 국모의 자리보다 현재 보장되는 부귀와 영화를 철저히 즐기는 인물이었다.

즉, 장희빈이 철저하게 숙종의 승하 이후를 계산하여 자신의 부귀영화를 길게 계산하는 미래지향적 인물이었다면 장녹수는 미래 보다는 현재의 위세를 더욱 중요시 하는 현재지향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장녹수와 장희빈의 죽음의 결말도 달라졌는데 장녹수는 그렇게도 자신이 철저하게 이용했던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처참하게 칼질을 당하고 그 시체 또한 백성들의 침과 가래, 돌맹이 세례를 받아 까마귀 밥이 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은 그토록 사랑했던 지아비인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아 목숨을 끊었고 그 시체 또한 세자의 모후라는 이유로 대빈묘에 안치되어 끝까지 예의를 갖춘 보살핌을 받게 되었으니 장녹수와 장희빈의 비참한 결말은 이토록 궤도를 달리했다.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묘가 있는 서오릉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미인을 탐낸다고 한다. 뛰어난 여성적 매력으로 한 시대를 휘어잡은 그녀들은 대단한 난세 속에서 최고의 권력자였던 '왕'을 휘어잡았던 단 한명의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비참하게 파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시대는 영웅을 소명하고 시기가 지났을 때 가차없이 버린다." 는 만고불변의 진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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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군의 역사가 파란만장할 수 밖에 없기에 연산군과 광해군은 드라마나, 영화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시대극 소재 중 하나이다.  재미있는 것은 광해군을 배경으로 왕의 여자라는 드라마가, 연산군을 배경으로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각각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장녹수와 김개시에 대해 알아보자. (출처: 파란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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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궁녀들 주에서 명성을 떨친 예는 아무래도 평범한 궁녀로 입궁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후궁이나 왕비의 자리에 올랐거나 후대 왕을 출산한 경우다.

예컨대 숙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경종을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쫓겨난 장희빈, 숙종의 무수리로 들어갔다가 훗날의 영조를 출산한 최숙빈, 고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영친왕을 출사하고 황귀비(皇貴妃)까지 오른 엄비 등이다. 장희빈, 최숙빈, 엄비 등은 궁녀 출신이라고 해도 후대 왕을 출산했으므로 평가가 조심스러웠다.

이에 비해 궁녀로서 왕의 총애만 받고 후대 왕을 낳지 못했던 장녹수(張綠壽)와 김개시(金介屎)는 온갖 비난을 받아야했다. 특시 장녹수와 김개시(개똥이)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기에 그 비난이 더더욱 심했다. 역설적으로 갖은 비난을 받다 보니 장녹수와 김개시는 조선 시대 궁녀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고 한다. 가비란 집안의 여자 종을 말한다. 제안대군의 여자 종이었다는 뜻이니 장녹수는 사노비(私奴婢)였던 셈이다.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가비가 된 내력은 대군의 가노(家奴), 즉 남자 종에게 시집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좀더 생각해 보면 약간 애매한 부분이 나타난다. 장녹수가 원래 노비 출신이었는지, 아니면 남자 종에게 시집가서 노비가 되었는지 불분명하다. 이는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張漢弼)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장한필은 문과에 합격하고 문의 현령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아버지 쪽으로 본다면 엄연히 양반 가문의 딸인 장녹수가 어찌하여 제안대군의 남자 종에게 시집을 갔단 말인가.

실마리는 아무래도 장녹수의 어머니 쪽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장녹수의 친언니 장복수(張福壽)가 내수사의 여자 종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장녹수의 아버지는 양반 관료였지만 어머니는 노비, 그것도 내수사의 노비였다는 얘기가 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내수사의 여자 노비였으므로 그 자손들도 어머니를 따라 자연히 내수사의 노비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녹수도 근본은 내수사 노비였다고 보아야 한다. 장녹수가 다른 곳이 아닌 제안대군의 가노와 결혼한 것도 결국은 장녹수가 내수사 노비였기 때문이다.

제안대군에게 소속된 노비들은 궁방(宮房)노비인데, 궁방 노비는 대부분 내수사의 노비 중에서 충원된다는 사실에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장녹수는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몸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장녹수 자매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장한필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남편도 없이 어린 자매를 데리고 얼마나 어렵게 생활했을지 짐작이 간다.

장녹수는 궁녀로 입궁하기 전에 이미 아들까지 낳은 상태였다. 나이도 서른이 넘은 데다 얼굴이 썩 예쁜 편도 아니었다. (실제 얼굴은 전해지지 않으나 실록에 전함.) 단지 노래와 춤에 능했으며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은 소리를 내는 개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장녹수는 예능 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셈이다.

이런 소문은 연산군에게도 들어갔다.

연산군은 조선 시대의 왕들 중에서 예술적인 기질이 가장 뛰어난 왕이었다. 그랬으니 연산군이 노래와 춤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당연히 장녹수를 만났을 것이다. 실제로 장녹수의 노래와 춤은 연산군을 매료시킬 만큼 뛰어났던 모양이다. 눈에 확 띄는 미녀도 아니고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 그것도 연상인 장녹수를 연산군은 딱 한번 보고 바로 입궁시켰다고 한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연산군 8년(1502년)에 종4품의 숙원(淑媛)이 되었다가 1년 후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으로 올랐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이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매혹되었기에 가능했다. 연산군은 장녹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고, 둘 사이에 영수(靈壽)라는 딸까지 낳았다.

장녹수와 연산군이 그토록 빨리 가까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 두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장녹수와 연산군은 예술적 교감이 가능했다. 춤과 노래에 뛰어난 장녹수와 예술을 사랑하는 연산군. 얼굴, 나이와 신분을 초월하여 두 사람을 이어 준 끈은 바로 이 예술적 교감이었다.

둘째, 모성애에 목말라하는 연산군의 갈망을 장녹수가 체워 주었다. 장녹수는 아버지 없이 자란 반면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랐다. 이렇게 자란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갈구했을 것이다. 특히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난 후 생모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치는 연산군의 모성애를 연상의 장녹수가 채워 주었다.

예컨대 "(장녹수는) 왕을 조롱할 때는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했고, 왕을 욕할 때는 마치 노예를 대하듯 했다. 다 자란 성인인 연산군의 이런 행동이 정신장애로 보이기도 하지만 연상의 연인에게서 모성애를 갈구하는 가엾은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실제로 장녹수의 영향력이 가장 높았던 것은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복수하겠다고 갑자사화를 일으킨 시점이었다.

그런데 장녹수는 왕의 총애로 얻은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무절제하게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으며, 유별나게 재산에 욕심을 부려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던 것이다.

그것이 장녹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보면 뛰어난 예술가로 평가할 수도 있다. 노비의 신분에서 후궁까지 올랐으니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녹수가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권력을 쥐자 사람들은 공인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했다.

이름 없는 노비일 떄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것으로 충분했지만 왕을 좌우하는 권력자가 된 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절제하고 왕의 권력을 절제시켜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녹수는 이런 점에 전혀 무신경했거나 무능력했다.


반면에 김개시는 장녹수와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예술적 재능만 있고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에는 취약했던 장녹수와 전혀 달랐다. 김개시는 노래나 춤이 아니라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게다가 장녹수는 입궁 후 곧바로 후궁이 되었지만 김개시는 어렸을 때 입궁하여 상궁까지 올랐을 뿐 정식 후궁이 되지도 못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하면 김개시는 '천예(賤隸)의 딸' 즉 천한 노예의 딸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김개시는 노비의 딸이었으므로 당연히 노비의 신분이었다. 궁녀로 입궁한 후에도 주로 공노비인 내수사 출신의 궁녀들과 어울렸다. 게다가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고 한『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김개시는 장녹수와 달리 어린 나이에 입궁했다.

김개시가 비숫한 시기에 입궁한 변상궁에게 "우리는 아이 때부터 함께 살다가 우연히 사이가 멀어진 게 아닌가?" 라고 말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김개시는 애초에 훗날의 광해군이 되는 동궁 소속의 궁녀로 입궐했다.

광해군이 열여덟 살 때 세자에 책봉되었으니 김개시는 그보다 어린 나이에 입궁했을 것이다. '아이 때'라는 말로 추정한다면 조선 시대 여자의 성년나이인 열다섯 살 전으로 짐작된다. '아이 때' 동궁 나인으로 입궐한 김개시는 청년 광해군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선조의 나인이 되었다. 글도 잘 알고 문서처리에도 능숙한 김개시의 역량이 발탁 사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김개시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다시 광해군의 지밀 나인으로 옮겼다. 광해군은 자신의 궁녀를 데려온 것이지만 김개시가 아버지 선조를 모셨던 궁녀인 만큼 비난의 소지가 적지 않았다.

광해군이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김개시를 옆에 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째는 세자 시절에 맺은 인연이었다.

둘째는 궁중에서 자신을 위해 성심으로 충성할 궁녀, 그것도 똑똑한 궁녀가 필요해서였다.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만들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제조 상궁으로서 당대의 실력자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당시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한 실세였다.

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권력을 틀어쥔 김개시는 오직 광해군만을 위해 충성했다. 광해군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중에서 온갖 악역을 떠맡은 궁녀가 바로 김개시였다.


당시 광해군을 위협하는 최대의 인물이 인목대비 김씨였는데, 김개시는 인목대비를 무력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인목대비의 궁녀들을 회유하여 첩자로 활용하기도 하고 사건을 조작하여 인목대비에게 덮어 씌우기도 했다.

광해군 5년(1613년)에 계축옥(癸丑獄)으로 인목대비의 친정을 멸문시킨 후 저주 사건(咀呪事件 :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사건)을 제기해 인목대비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간 주동자도  김개시였다.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없애려고 했다. 광해군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악역을 떠맡았다. 김개시의 끈질긴 공작에 의해 인목대비는 기어이 서궁에 유폐되고 말았으며, 그 이후에도 죽음 직전까지 몰리는 수난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김개시는 온갖 술수와 모함을 일삼는 정치꾼으로 변해 버렸다.


출처: 파란 블로그에서 펌.
http://blog.paran.com/desireu/744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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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여인, 장녹수. 그녀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출처: 네이버 오픈사전

연산군의 여자관계를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여인이 장녹수이다.

포스터는 옹녀+변강쇠해도 되겠다.ㅋㅋ



연산이 분노했던 그대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임금의 황음 내지는 못된 첩이 한 인간과 나라를 망친다는 식의 역사이해를 가져 왔다. 바로 그런 역사관에 의해 연산시대의 악녀로 자리매김된 여인이 장녹수이다.

장녹수는 연산군 8년 3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연산이 승지에게 그녀의 부친 장한필의 내력을 조사시켰다는 기록인데, 이 해부터 장녹수에게 빠졌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이 때쯤 연산과 장녹수가 만났던 것같다.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은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19년에 충청도 문의현령까지 지냈다.

그러나 더 이상 크게 출세하지는 못한 것 같다.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었고 신분도 천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면 자녀는 자동으로 천인이 되었으며, 그 자녀의 소유권은 모계를 따라 가도록 되어 있었다.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종과 결혼하고, 제안대군의 여종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친도 제안대군의 종이 아니었나 싶다.
 
장녹수의 젊은 시절은 불행했다. 가난하고 신분도 천한 여인이라 몸을 팔아서 생활했고 결혼도 여러 번 했다. 그러다가 제안대군의 집 종과 결혼했다. 아들 하나까지 낳았는데, 이 가정도 힘들었던지 다시 생활전선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닥에서 몸을 파는 수준에서 벗어나 노래와 춤을 배워 정식으로 기녀생활을 했다.
 

희대의 바람둥이를 매혹시킨 장녹수의 매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과 장녹수 (정진영, 강성연)


의외로 그녀 탁월한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실록에서는 그녀가 그냥 중간 수준의 얼굴이라고 표현했다.나이도 연산보다 두세 살 이상 많았다. 그러나 30대에도 16세의 앳된 소녀처럼 보일 만큼 동안이었던데다 영리해서 남자의 뜻을 잘 맞추고, 아양 떨고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연산이 남다르게 총애한 여성은 장녹수 외에도 많았다.

그러나 장녹수는 그들 중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별한 역할을 했다. 연산은 장녹수를 거의 아내처럼 대우했다. 연산의 왕비 신씨는 신승(숭)선의 셋째 딸이었다. 연산과 신비의 사이는 좋았다. 연산은 신씨(훗날 폐비됨)를 현모양처요 훌륭한 국모로 인정하고 존중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왕과 왕비의 사이였다. 연산이 국왕이 아닌 세속적 인간으로 돌아올 때는 장녹수가 그의 아내가 되어 주었다.  때로 장녹수는 연산을 어린아이같이 조롱하고 연산을 학대하며 욕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일을 기록한 사람은 혀를 찼지만, 연산은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고, 그런 세계를 맛보고 싶었던 것같다. 

남자 홀리게 생긴 요부 장녹수의 이미지


그러나 섣불리 연산에게 그런 공간을 연출했다가는 당장 국왕 능멸죄에 걸렸을 것이다. 그 역을 감당하기에는 아주 특별한 매력과 재능이 필요했다. 아마도 장녹수는 오랜 창녀생활을 통해 남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하고 충족시켜 주는 재능을 터득했던 것같다. 연산이 아무리 화가 났다가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며 웃었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는가!

섹시한 강수연씨. 실제 영화 속에서는 아주 조신했다고 함


사적인 청탁과 인정을 배제하기는 불가능한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녹수가 인사나 이권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개입한 것 같지는 않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위에서 하던 부정들은 과거부터 종친과 훈구세력들이 늘 해오던 일들이다. 수령이나 하급관직은 몰라도 녹수의 청탁으로 고위직에 올랐다는 사람도 다 종친이나 관료들이었다.

그녀의 친척 중에서 제일 출세한 사람이라면 형부 김효손인데, 연산군 10년 이전에는 겨우 7품 무관직인 사정(司正)을 받았을 뿐이다. 6품과 7품은 질적 차이가 있어서 7품 이하는 정치적 비중이 거의 없는 단순 행정 또는 실무직에 해당하며, 서리 출신들도 여기까지는 많이 진출했다.

연산군 10년에서 12년 사이에 김효손은 벼락승진을 해서 정3품 당상관까지 올라갔다. 아마도 이 조치에 대해 많은 관료들이 상당히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녹수의 일가로서 출세한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는 점은 고려해 줄 만하다. 녹수의 집을 건축할 때 대간을 보내 감독을 시킨 것이나 내시와 승지 등에게 그녀의 가마를 뒤따르게 한 것 등도 그녀의 청탁이 아니라 연산이 항상 궁리했던 '관료 길들이기'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의 남자 장녹수 이미지

 그러나 관료들은 종친과 고급관료가 천인 출신의 계집에게 굽실거리고, 사족의 집과 땅이 그녀의 손아귀로 들어가며, 그녀의 종들이 자신들의 종을 우습게 보고, 상권, 노비, 토지 등의 이권다툼에서 자신들을 이기고, 자신들의 이권을 앞서서 채가는 현상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행위였고, 왕이나 세상 사람들이 기억해서는 안 되는 전례였다.

그녀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녹수와 전비 등은 당일로 군기시(지금의 서울시청과 서울신문사 사이)앞에 끌려가 처형당했다. 많은 후궁들 중에서 녹수와 전비가 비난과 처형의 대상이 된 것은 그녀들의 재산이 많았던 탓도 있지만(그 중 상당수는 연산이 공신, 관료들로부터 빼앗은 것들이다), 그녀들의 출신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들의 진정한 죄는 자신들의 주제로서는 참여해서는 안 되는 특권에 참여한 죄였을 것이다. 장녹수는 미인도 아니면서,또는 미천한 출생인 집안이였기에 남달리 신분에 대한 애착이 강했을 것이다. 또한 연산군은 어릴 때 자신의 어머니가 비참하게 죽은 것과 할머니를 비롯한 주위에 대한 냉대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이 서로 서로 간에 깊은 관계를 맺을수 있었던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아무튼 연산군은 희대의 폭군이었다.
하지만 녹수는 희대의 악녀도 아니었고, 가슴 깊이 원한 맺을 정도로 사무친 그 무엇도 없다. 다만 천박한 그 자체가 오히려 연산이 바라보는 미였는지도 모른다.

클릭하면 크게 나와요~

왕의 남자 장녹수(강성연)과 연산군(정진영)


그 시대는 그 시대 나름대로 특징이 있듯이 연산의 시대의 인물로서 손색함이 없었던 여인이 바로 장녹수가 아닌가 추측한다. 

출처: 네이버 오픈 사전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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