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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은 낮은데 관심도와 비난받는 양은 국민드라마급인 '장옥정, 사랑에 살다.'

 

제목 그대로입니다.


지금 장옥정이라는 드라마에서 김태희가 욕먹는 이유는 김태희이기 때문입니다.



김태희가 나오니까 관심도는 높으나
그에 맞는 드라마의 질적인 수준이 뒷받침 되지 않으니
드라마의 타이틀롤을 맡은 김태희에게 욕이 집중되는 것이죠.



그런데 드라마를 볼수록 저는 김태희에게 욕이 집중되는 이 현상이 이해가 되질 않아요.
보면 볼수록 김태희는 기대보다 너무 너무 잘 해주고 있거든요.
김태희 때문에 안봐야지..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 잘 해주고 있는 걸로 보여요. 

 - 팬이 아닌 제 눈에도 -


오히려 제가 보기에
이 드라마는 연출, 대본, 편집이 가장 큰 문제에요.


사극 매니아인 저한테 굉장히 거슬리는 점이 있는데 하나 하나 다 들자면 끝도 없지만..
그중에 단 몇 가지만 들어도..



1. 임금의 곤룡포..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붉은 옷이라야 하지 않나요?
세자도 아니고.. 옷 색깔은 또 왜 그렇게 하늘색;; 조선시대 임금옷으로 너무 어색합니다.


2. 조선시대 패션 디자이너 설정도 약간 뭐잉; 했는데 오늘도 보이는 마네킹;



3. 하이힐은 실수로 보였다고 하더라도.. 김태희만 너무 짧은 저고리 ㅡㅡ;;



4. 임금에게 일반 존대어를 쓰면 안되는데... 너무 막 대하는 느낌이에요.
ex) 주상이.. ~ 하셨소 (X) ==> 전하께오서 ~ 하시었소... 등 극존칭을 써야하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임금 앞에서 대신들은 커녕, 낮은 신분의 사람들조차도 너무 조심이 없네요.

원래 임금 앞에는 똑바로 서지도, 얼굴을 들지도 못해야 하지 않나요.

그 모든게 불경죄에 들어가거늘...


5. 명색이 일국의 중전인데..  중전옷이 나인들보다 더 초라한 건 왜일까요?


6. 또한 양반집 규수라는 애들의 말버릇이 너무 교양이 없군요.


감히 대궐에서 중전에게...
"전하는 요즘도 네가지가 없어요?" 라니... 미친 거 아닙니까? ㅡㅡ;;
주리를 트는 정도가 아니라.. 삼족이 멸함을 당할 정도의 말버릇입니다.

 

400년 전의 궁녀가 "기분 째져~" 이런 말을 사용하는 것도 너무 얼척이 없고요..



6. 임금이 자신을 칭할 때 짐(X) ==> 과인(O)으로 해야 합니다.


이 뿐 아니라 임금이 애정행각을 벌일 때 옆에 궁인들 왜 가만 있나요?
다 뒤로 돌아서야죠.. 이런 디테일이 극을 고급스럽게 만들어주는데...


7. 스토리는 왜 그래 중구난방인지.. 장옥정과 이순 위주로 가야할 것 아닌가요.
7회 뒷부분은 재미있긴 재미있었지만.. 30분 넘게 허적의 난.. 어이구..
실제 사건도 아니고 허구의 역모 사건(복선군 말고 허적)으로 30분 간 망나니 씬을 보여주네요.

 

정치 드라마로 가려면 기존의 정치드라마처럼 진지하게 만들든가...
송시열도 등장시키고, 액션도 제대로 시키고,
리얼하게 사극 분위기를 제대로 내든가..

로맨스 사극으로 가려면 정치 분량도 좋지만..  
장옥정 - 이순 사이의 감정 발전을 보여줘야
헤어졌을 때나 장옥정 사약 받을 때 절절할 거 아닙니까??

그래도 8회는 재미있네요.

아.. 역사랑 상관없이 말입니다.


 


8. 위에서 빼먹고 말 안한 게 몇 가지 있었는데요...
동평군, 치수 등이 옥정이랑 엮이는 건... 도대체 언제..??
지금쯤이면 인물들 관계 설정 다 끝나야 되는 회차 아닌가요? 휴..ㅠㅠ



게다가 이순과의 '호색한' 신에서 김태희 얼굴은 위에서 그렇게 클로접;;;
김태희니까 살아남았지.. 왠만한 미녀라도 그 각도에서 잡으면 다 오징어 됩니다ㅠㅠㅠ



이런 저런 것들로 해서 드라마가 좀 유치하고 고급스럽지 못하게 보입니다.
실제로 처음에 가장 우려했던 부분인 김태희의 연기력이라든지,
유아인과의 어울림(이모 - 조카, 큰누나 - 막내동생..) 이런 건 전혀 안거슬려요. (적어도 저한테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요약:  7회 후반부 재미있었고, 8회부터는 제법 흥미진진했습니다.

 

 

이제 대본 상의 미숙함을 연출에서 잘 조절해서 톤 다운해주고,

편집에서 잘 좀 섞어 주면 시청률도 쑥쑥 오를 것 같네요.

 

 

간만에 진짜 숙종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숙종다운 숙종이 나왔는데...

시청률 때문에 다시 우유부단한 숙종과, 밑도 끝도 없이 사악하기만 한 장옥정은 보기 싫거든요.


 

김태희 유아인 잘 하고 있으니 앞으로 연출, 대본, 편집이 정신차리길 빌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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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하도 여러번 만들어져서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장희빈 (= 장옥정, 희빈 장씨).


'실록에 기록될 정도의 경국지색의 미모 + 극악무도한 성격 +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패악질이 하늘에 다다라 다시 쫓겨남 +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사약 받고 죽음  + 아들인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성불구로 만듬.' 등의 다양한 전설적인 이야기로 사극의 주인공으로 사랑받아온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선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희빈장씨 [ 禧嬪張氏 ]

[출처] 희빈장씨 | 두산백과


조선 후기 숙종의 빈(嬪). 왕자 윤(景宗)을 낳아 세자에 봉해지자 희빈에 올랐다. 이후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왕비가 되었으나 이를 후회한 숙종이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1659년 8월 9일생이며 본관은 인동(仁同),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다. 아버지는 중인으로 이름은 장형(張炯)이며 아버지는 역관(譯官)이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는 윤씨였다. 어려서 이조판서를 지낸 조사석(趙師錫)과 동평군 이항(李杭)의 주선으로 궁에 들어가 자의대비전(慈懿大妃殿)의 나인이 되었다.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여종이었는데 남편(장형)이 사망하자 조사석의 첩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장옥정은 궁에 나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사석은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했다. 

장옥정은 뛰어난 미모로 젊은 세자(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 사실이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당시 숙종의 5촌인 복선군복창군복평군 3형제가 연루된 역모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들과 친밀하게 지냈던 장현 등도 함께 유배형을 받았다. 하지만 역모사건은 서인 김석주(金錫胄)의 무고로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은 더욱 대립하게되었다. 장현은 역관(譯官) 출신의 재력가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과 가까웠고 장옥정의 5촌이었다. 이때문에 남인의 영향을 염려한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장옥정을 극도로 꺼려하였다. 명성왕후는 부친 김우명(金佑明)과 함께 서인으로 당색이 매우 강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죽자 장옥정은 다시 궁으로 입궐하여 후궁이 되었으며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와 갈등하게 되었다. 당시 장옥정은 남인의 세력에 속해 있었고 인현왕후는 정치 실세였던 서인을 대표하여 두 사람은 정치적 적대관계였다.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장씨와 사이에서 왕자 윤(昀:景宗)을 낳았고 1689년(숙종 15) 1월 윤을 원자로 봉하고 소의 장씨는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원자의 출생은 서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숙종이 윤을 원자로 봉하려 하자 이것이 성급하다고 상소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남원에서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형을 받고 축출되었다. 반면에 남인(南人)인 권대운(權大運) 등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기사환국己巳換局).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인현왕후를 폐출하는 것을 두고 남인들 마저 반대하였지만 숙종은 강행했다.

1690년 9월 장희빈은 둘째 아들을 낳았으나 10개월 만에 죽고말았다. 1693년에 숙종은 무수리 최씨에게서 아들을 낳아 영수(永壽)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그 아들도 출생 2개월에 사망했다. 이즈음에 숙종의 마음은 점차 장희빈에게서 멀어졌다. 1694년에는 숙빈 최씨가 아들(후일 영조로 등극)을 낳아 장희빈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고 장희빈의 후광으로 정치적 실세로 군림하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혐의로 포도대장 직에서 물러났다.

1694년(숙종 20) 서인세력의 재집권을 위해 기회를 찾고있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서인의 집권을 위해 남인들을 역모로 고발하였고 마침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남인세력은 대부분 숙청되거나 유배형을 받아 몰락하였고 소론계 서인이 집권하였다. 이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후궁)으로 강등시켰으며 빈을 후비로 승격하는 일이 없도록 법을 만들었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자 숙빈 최씨의 밀고로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목되었다. 이일로 그해 10월 10일 장희빈은 사사되고 오빠 장희재(張希載)는 처형되었다.

[출처] 희빈장씨 | 두산백과



네이버 인물한국사

희빈 장씨 : 환국 정치의 중심에 섰던 비극적 운명의 왕비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는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명성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은 소설·드라마·영화 같은 대중예술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극적(劇的)이었다.

 

희빈 장씨를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만 해도 <장희빈>(1971, MBC, 윤여정 분), <여인열전 장희빈>(1982, MBC, 이미숙 분), <조선왕조 오백년-인현왕후>(1988, MBC, 전인화 분), <장희빈>(1995, SBS, 정선경 분), <장희빈>(2002, KBS 2, 김혜수 분), <동이>(2010, MBC, 이소연 분) 등 여러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 배역은 당시의 주요한 여배우들이 맡았다.

 

역사와 대중예술에서 그린 희빈 장씨의 이미지는 ‘권력을 지향한 요부(妖婦)’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미지가 그렇듯이, 거기에는 사실과 왜곡이 섞여 있다. 유사 이래 권력의 중심부에는 언제나 음모와 암투가 넘쳤다. 그것은 권력의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떤 일과 사람을 선악의 구도로 재단하는 것은 명쾌하지만, 그만큼 단순화와 왜곡의 위험이 뒤따른다. 이미 깊이 있는 연구가 여럿 나왔고, 이 짧은 글은 상당 부분 거기에 의존해 작성되었다. 그녀가 남다른 권력 의지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당쟁과 환국이라는 급박한 시대적 환경과 그것을 주도한 숙종의 처결과 맞물리면서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출생과 가계

희빈 장씨의 가문은 비빈(妃嬪)의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한미했다. 그녀는 1659년(효종 10) 장경(張烱. 본관 인동. 1623~1669)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장경은 처음에 고씨(1625~1645. 본관 제주. 고성립(高誠立)의 딸)와 혼인했지만 그녀가 일찍 사망하자 윤씨(1626~1698. 본관 파평. 사역원 첨정 윤성립(尹誠立)의 딸)와 재혼했다. 그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희빈 장씨는 막내였다. 그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장희재(張希載, 1651~1701)는 맏아들이자 희빈의 오빠다.

 

희빈의 가계에서 언급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張炫)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장현은 거부였고, 남인의 영수인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결탁했던 복평군(福平君) 등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희빈이 남인과 가까웠던 것은 이런 사정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아버지 장경은 희빈이 10세 때 세상을 떠났다(1669, 현종 10).

 

앞서 말한 대로 이런 환경은 한미하며, 불우하기까지 하다. 안온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준다면, 험난한 조건은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을 부여할 수 있다. 그 뒤 나타난 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된다.

 

 

입궁과 총애

이런 배경을 가진 희빈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행운을 제공한 사람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 1660~1701)과 우의정 조사석(趙師錫. 본관 양주. 1632∼1693)이었다.

 

동평군은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 이징(李澂)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가 조사석의 사촌누이였다. 조사석은 관직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대단한 명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었으며, 아들은 영의정까지 오른 조태구(趙泰耉)였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다. 조사석은 동평군에게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그런 요청에 따라 희빈은 나인으로 입궁했다. 희빈은 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687년(숙종 13년) 6월 16일).

 

희빈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기는 21세 때인 1680년(숙종 6)이었다. 그 해 10월 26일 숙종비 인경(仁敬)왕후(1661~1680. 본관 광주. 김만기(金萬基)의 딸)가 승하했는데, 그 뒤에 처음 은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바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대비 명성(明聖)왕후는 당파적 색채가 강했는데, 희빈과 연결되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仁顯)왕후(1667~1701. 본관 여흥. 민유중(閔維重)의 딸)가 계비로 책봉되었다. 나이는 희빈이 8세 위였다.

 

 

영광의 정점

기회는 1683년(숙종 9) 명성왕후가 붕어하면서 찾아왔다. 거리낄 것이 없어진 숙종은 희빈을 불러 총애했다. 희빈의 나이 25세였다.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다. 그녀는 숙원(淑媛. 종4품. 1686)을 거쳐 소의(昭儀. 정2품. 1688)로 승급했다. 그동안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淑正)은 남인과 연합하라고 희빈에게 계속 충고했다. 희빈은 남인과 더욱 가까워졌다.

 

가장 중요한 일은 1688년(숙종 14) 10월 28일 왕자 윤(昀. 뒤의 경종)을 낳았다는 것이다. 희빈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거대한 행운이었다. 이듬해 1월 11일 왕자는 원자로 정호(定號)되었고 그녀도 희빈(정1품)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숙종과 인현왕후는 아직 매우 젊었고(각 28세와 21세), 따라서 대군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국본(國本)을 확정했다는 사실은, 숙종의 총애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상당한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무리한 결정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번졌다. 그것은 기사환국이었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과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영돈녕 김수항(金壽恒) 등은 원자 책봉은 아직 이르다고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동안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숙종의 대응은 성급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다. 우선 권대운(權大運)·목래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삼정승에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남인을 대거 기용했다.

 

서인은 대부분 파직되거나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된 뒤(3월 6일)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사사되었고(6월 8일) 김수항은 영암(靈巖)의 귀양지에서 같은 처분을 받았다(윤3월 28일). 이듬해에 김수흥도 유배지인 장기(長鬐)에서 사망했다(1690년 10월 12일).

 

환국이 원자 정호 때문에 촉발되었으므로 왕실의 교체도 당연히 뒤따랐다. 인현왕후는 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폐출되었고(5월 2일) 나흘 뒤 희빈은 드디어 왕비에 올랐다(5월 6일). 원자의 외가, 그러니까 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아버지 장경은 영의정, 조부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 증조부 장수(張壽)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다.

 

이듬해(1690, 숙종 16) 6월 경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은 정점에 올랐다.

 

 

몰락과 사사

그러나 기사환국 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한 것을 점차 후회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세 번째 환국으로 나타났다. 1694년(숙종 20) 숙종은 서인이 꾸미던 왕비 복위 사건을 조사하던 우의정 민암(閔巖)이 국왕을 속여 옥사를 확대하고 있다면서 대대적인 인사 교체를 단행했다. 그 결과 남인은 축출되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 서인이 등용되었다.

 

기사환국의 본질이 원자 정호와 희빈의 중전 책봉이었듯이, 갑술환국의 핵심은 인현왕후의 복위였다. 숙종은 이전의 조처를 뉘우치면서 인현왕후를 환궁시켰다. 장씨는 별당으로 쫓겨가고 희빈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아버지 장경의 부원군 교지와 그 아내의 부부인(府夫人) 교지는 불태워졌고, 장씨의 왕후 옥보(玉寶- 국새)도 파괴되었다(1694년(숙종 20) 4월 12일). 숙부 장현과 장찬(張燦)도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윤5월 13일). 희빈이 왕비가 된 지 5년 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이때 일어난 중요한 일은 숙의 최씨가 왕자(뒤의 영조)를 출산했다는 것이었다(9월 20일). 희빈의 입지는 점점 더 축소되고 있었다.

 

비극의 종막은 7년 뒤에 내려졌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했는데, 그 직후 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된 것이다.

 

숙종은 대노했다. 장희재는 참형에 처해졌고, 희빈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남구만·최석정 등 소론도 몰락했다. 정계는 노론이 더욱 확고하게 장악했다.

 

결국 희빈에게는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0월 8일). 죄목은 내전을 질투해 모해(謀害- 꾀를 써서 남을 해침)했다는 것이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입궁해 원자를 생산하고 중전까지 올랐지만 결국 사사된 42년의 파란 많은 생애였다.

 

사후의 예우가 부실한 것은 당연했다. 희빈은 1702년(숙종 28) 1월 경기도 양주(楊州) 인장리(茵匠里)에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으로 천장되었다. 앞으로 빈이 왕비가 될 수 없도록 하라는 왕명도 하달되었다(1701년 10월 7일).

 

그나마 일정한 추숭이 이뤄진 것은 아들 경종(景宗)이 즉위한 뒤였다. 경종은 모후의 사당을 건립하고(1722년(경종 2) 1월 10일) 옥산부(玉山府) 대빈(大嬪)으로 추존했다(10월 10일). 대빈궁은 국왕이나 추존된 국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七宮. 지금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재) 안에 있다. 묘소는 1970년 서오릉(西五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으로 옮겨졌다.

 

앞서 말했듯이 희빈이 남다른 정치적 야심과 감각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모략과 암투가 난무한 전근대의 궁중에서 그런 자세는 자연스러우며 필요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갈수록 어떤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짧은 글에서 희빈과 관련해 어떤 의견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우리가 알만한 인물의 다수가 자연적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게 그런 운명이 찾아왔다면 어떻게 대처했을지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김아네스·이장우·정두희·최선혜, [장희빈, 사극의 배반], 소나무, 2004;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숙종실록], 휴머니스트, 2009;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1~3, 역사문화, 2009.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장희빈이 드라마에 묘사된 것처럼 사악한 여자의 극치라서 현명한 군주인 숙종이 그녀에게 벌을 내렸다?는 결론은 상당히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장희빈은 사악하고, 인현왕후는 현숙하고 투기할 줄 모르는 왕비였다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거짓말인데.., 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 인현왕후가 산후 조리 중인 장희빈에게 매일 매질을 가한 것이 적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현왕후 = 이상적인 왕비상'으로 그려놓은 드라마 속의 인현왕후는 인현왕후전에만 나오는 서인들의 조작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장희빈을 숙종이 엄청 미워해서 죽은 후에도 그녀에게 저주를 퍼부었고, 숙빈 최씨만이 그의 마지막, 영원한 사랑이었다는 것 역시도 조작에 가까운데, 그것은 그녀의 최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역시 실록에서 나온 기록이다.)



읽기 쉽게 잘 써놓은 펌글을 하나 가져옴. -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갤러리에서 펌.




장옥정 드라마인 만큼 그녀의 장례절차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단 인현왕후전과 수문록(노론이 쓴 책)은 그녀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어.

'사약을 먹지 않기위해 발악했고,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고자로 만드는 패악을 부리다 억지로 사약이 부어졌다.
드디어 장녀가 죽으니 하늘의 천벌을 받아 시체가 순식간에 썩어 궐내를 진동하는지라 즉시 궁밖에 내다버렸다.'


..................이 얼마나 악의적이고 증오섞인 표현인지....노론이 그만큼 희빈을 증오하고 미워했다는 단적인 증거.  그동안 장희빈 드라마는 이런 인현왕후전과 수문록..등의 내용들로 그려졌어.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희빈장씨는 발악을 했다는 글 한줄 없고, 또한 죄를 짓고 죽은 후궁의 장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장례 절차를 밟아 숙종이 지극하게 장례를 치뤄줬어.

결론부터 말하면 장례기간은 5월상에서 하루를 뺀 기간(112일)
왕세자에게 처음엔 시마복(3개월동안 상복을 입는것)을 입으라 명했으나 다시 3년복상을 하라고 교지를 내림(3년에서 며칠을 뺀 기간) 모든 장례절차를 궁에서 행함.

+참고로 인현왕후는 5월상(114일)


장례절차___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할수있지만 이건 조선시대때 아주 중요한 예법중 하나야. 상복을 몇년 입는가하는 문제로(예송논쟁) 10년을 넘게 서인과 남인이 피터지게 서로 죽고 죽이며 싸우고 그랬으니까.


간단하게 왕실예법을 알아보면_

귀인일수록 장례기간이 길어....보통 100일이 넘으면 국상개념이야.


(장례기간)
왕은 150일(6월장), 왕비는 100일(5월장), 왕세자는 70일이상(4월장), 왕(&세자)의 사친, 세자빈과 왕자녀들 그리고 내명부 정1품 빈은 50일가량(3월장)

3월장,5월장..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만약 xx왕후가 3월에 죽었다면 장례를 5월장을 적용해서 죽은 달 포함해서 다섯번의 달을 지나 7월에 장례를 치룬다는거야.


(상복기간)
=적자로서 아버지의 정실이 죽었을 경우 그 적자는 3년상
  서자(庶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3개월복상)


(실제 사례)

12대 인종 - 재위기간이 1년. 4월장(100일)

장렬왕후 -인조계비. 5월장(110일) 

숙빈최씨 - 내명부 정1품의 예로 3월장(50일), 궁밖에서 장례를 치름, 연잉군이 3개월 복상을 하려 했으나 숙종은 5일만 상복을 입고 벗으라 어명을 내림.

영빈이씨(사도세자의 생모, 당시 세손(정조)의 할머니)- 세자의 사친으로 후궁 제1등의 예로 3월장 (60일), 궁밖에서 장례를 치름, 3개월복상

수빈박씨(순조의 생모) - 3월장(60일), 궁안에서 장례를 치름, 3개월복상

수빈박씨는 생전에 아들이 왕위에 올라 가순궁저하, 수빈저하라는 경칭을 들었던 왕의 생모였다.
그럼에도 저정도의 장례절차를 거쳤어. 아들인 순조가 왕실 가법이 허용하는 최고의 범위로 예를 갖춘 상황 


희빈은 죄를 쓰고 사사되었고, 폐비되어 자리에서 내려온지 8년이 지난 상황이었어.
그런데 숙종이 이같은 장례 절차를 지시하지...당연히 노론측이 엄청나게 반발하지만 그대로 진행했어.

위에서 봤듯이 세자의 생모(왕의 생모)라도 맥시멈 60일 장례, 3월장인데...희빈은 전례가 없는 예우를 받은것.



이후 16년이 지나 숙종이 와병중에 희빈의 묘를 천장(이장)하는데...노론이 그 정도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며 천장을 반대하지만 숙종은 세자가 간절히 원한다는 이유로 천장을 지시하고 예조와 종친, 지관 10명을 보내 1년가까이 좋은 길지를 찾아내게해서 와병중에 직접 천장지를 택해서 천장을 진행해...세자 내외에게 망곡례를 지시하며 천장식도 궁에서 하고...  

희빈 묘역 조성할때 사방 100步 주위에 기존에 있던 왕실 종친들의 묘를 파서 다른곳으로 옮기라 명하기까지 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묘역은 박정희때 이장한 묘역이라 규모가 작아졌지만 당시엔 꽤 컸을거라고 추측할수가 있어.


이러한 여러가지 기록들을 살펴보았을 때 숙종은 장희빈을 엄~~~~청 아꼈던 건 사실인 듯 하다.

사랑? 글쎄.. 16년간 청춘을 다 바친 여인을 특별한 증거도 없이 사약을 먹인 남자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게 있을까?

어쨋든 냉혹한이었던 숙종이 20대를 다 바친 여인이었음은 명확한 사실이니,,, 엄청난 매력이 있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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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여느 임금들보다 암행이 잦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옥정, 사랑에 살다 드라마에서 이순이 자꾸 나가는 것도 나름 이해가 되네요.

암튼..  숙종시대 일화 및 숙종의 암행에 대한 일화를 찾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찾았습니다.


#1. 숙종이 명릉에 묻힌 이유는?  

숙종대왕(조선조 19대왕)이, 수원성 고개 아랫쪽 냇가(지금 수원천 부근)를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이 관 하나를 옆에 놔두고 슬피 울면서 땅을 파고 있는게 아닌가. 

상을 당해 묘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파는 족족 물이 스며 나오는 냇가에 묘자리를 파고 있는 더벅머리 총각의 처량한 모습에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희한도 하다'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다가갔다. 

"여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시신입니다"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 (짐짓 알면서 딴청으로 묻는다) 

"묘를 쓰려고 합니다." (짐작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숙종이다.) 

"여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려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이신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 양반나리에게 하소연하듯 아뢰었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하니 갈처사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 자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 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왠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급한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가게 되었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되지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황송하옵기가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 갈처사가 산다는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간 산마루 찌그러져가는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 노인네 행색이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묻는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처사 맞소?"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 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치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 

숙종의 참았던 감정에 어느새 격해져서 목소리가 커졌다. 
갈씨 또한 촌노이지만 낮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디 잠시 두고 보자.') 하고 감정을 억누르며,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처사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 진다.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 가지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 가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님이 찾아올 자리여. 지금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기가 죽은 선비에게 이젠 당당하게 반말까지 하는 갈처사,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해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방 귀퉁이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한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임금을 알아본 것이다. 

"여보게.... 갈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오"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처사가 잡아준 숙종대왕의 왕릉이 지금 서울의 서북쪽의 서오릉(西五陵)에 자리한 "명릉(明陵)"이다. 

그 후 숙종대왕은 갈처사에게 3천냥을 하사하였으나, 노자로 30냥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 


신묘 하도다 갈처사여 
냇가에 묘를 쓰고 산마루 언덕에 초막을 지으니 

음택 명당이 냇가에 있고, 

양택 명당은 산마루에도 있구나. 


임금을 호통 치면서도 죄가 되지 않으니 

풍수의 조화는 국법도 넘어가네. 


볼품없는 초라한 몸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하고 
나랏님께 충성하노니 

그 이름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유리성.拜 

.............................................................. 



#2. 

조선시대 숙종 임금의 암행(暗行)에 관한 일화는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백성들의 민심을 파악하고자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암행을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고래등같은 어느 관료의 집에 다가갔습니다. 인적이 끊어지고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았습니다. 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다 쓰러져 가는 집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는데, 어느 움막에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요. 기와집이 즐비한 부자 동네에서도 듣지 못 했던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웃음소리에 숙종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숙종은 그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움막에 들어가 주인에게 물 한 사발을 청했습니다. 

그 사이 문틈으로 방안을 살펴보니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는 새끼를 꼬면서 손주와 이야기 하고 있고, 할머니는 짚을 고르며 거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만들다가 놓은 망태기가 한편에 있고, 부인은 옷을 깁고 있었습니다. 올망졸망한 어린 아이들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얼굴이 어찌나 밝고 맑은지 도무지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숙종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밖에서 들으니 이곳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더이다." 


주인은 희색을 띈 얼굴로 
“빚 갚으며 저축하면서 부자로 삽니다. 그래서 저절로 웃음이 나는가 봅니다." 



궁궐로 돌아온 숙종은 금방 쓰러질듯 한 움막에서 살며 빚도 갚고 저축도 한다는 말이 의아해 몰래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조사결과 그 집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숙종은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주인에게 예전에 했던 말의 뜻을 물었습니다. 

주인은 웃으면서 대답했지요. 


"부모님 봉양하는 것이 곧 빚 갚는 것이고, 제가 늙어서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니 이게 바로 저축 아니요. 어떻게 이 보다 더 부자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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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하면서 제일 힘든게 인간관계이다.

이걸 잘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누군가가 '우리 아빠에게서 온 인맥관리 17계명'이라는 글을 

유투브에서 보았는데 너무 공감이 되어서 가져왔다.






1.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지금 힘이 없는 사람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나중에 큰 코 다칠 수 있다.




2. 평소에 잘 해라.

평소에 쌓아둔 공덕은 위기 때 빛을 발한다.




3. 내 밥값은 내가 내고, 남의 밥값도 내가 내라. 

남이 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라.




4. 고마우면 고맙다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큰 소리로 말해라.

입은 말하라고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 고맙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사가 아니다. 

남이 내 마음 속까지 읽을 만큼 한가하지는 않다.




5. 남을 도와줄 때는 화끈하게 도와줘라.

도와주는지 안도와주는지 흐지부지 하거나 조건을 달지 마라.

괜히 품만 팔고 욕만 먹는다.




6. 남의 험담을 하지 마라.

그럴 시간 있으면 팔 굽혀 펴기나 하라.




7. 직장 바깥 사람들도 많이 사귀어라.

직장 사람들하고만 놀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

직장 그만 두면 너는 고아가 된다. 




8. 불필요한 논쟁, 지나친 고집을 부리지 마라.

직장은 학교가 아니다.



9. 직장 돈이라고 함부로 쓰지 마라. 

사실은 모두가 다 보고 있다. 




10. 가능한 한 옷을 잘 입어라.

외모는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할인점 가서 열 벌 살 돈으로 좋은 옷 한 벌 사입어라.




11. 남의 기획을 비판하지 마라.

내가 쓴 기획서를 떠올려 봐라.




12. 조의금을 많이 내라.

부모님을 잃은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사람이다.

사람이 슬프면 조그만 일에도 예민해진다.




13. 조금의 금액이라도 기부하라.

마음이 넉넉해지고 얼굴이 핀다.




14. 수위 아저씨, 청소부 아줌마, 음식점 종업원에게 잘 해라.

정보의 발신지이자 소문의 근원이다.




15. 옛 친구들을 챙기라.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드느라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재산을 소홀히 하지 마라.




16. 너 자신을 발견하라.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




17.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은 나중에 네 인생에 가장 좋은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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