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서라도 비싼 금액이 나오면 기분은 좋겠지만 한글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블로그얌(blogyam)이 유독 티스토리만 쏙 빼먹은 것에 대한 질투와 서운함이 없진 않겠지요.
그러나 블로그얌(blogyam)에서 네이버, 다음, 이글루스 블로그만 지원되던 블로그 가치평가 서비스를 드디어 티스토리에도 지원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얌군의 블로그얌 이야기에서 세부적인 설명과 함께 서비스 시작을 알리는 글을 올렸더군요.
티스토리 블로그는 설치형 블로그툴인 태터툴즈를 기반으로 위젯, 사이드바, 스킨, 플러그인 등 자유로운 사용자 편집 기능이 가능합니다. 티스토리를 분석 대상에 추가하기 위해서 3개월 이상 준비하였으나 티스토리 블로그 운영자분 중에서 저희가 알지못하는 많은 기능을 추가한 경우 블로그 가치평가가 되지 않을 수 있거나, 결과가 정상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블로그얌(www.blogyam.co.kr)에서 문의메일 또는 신고메일을 보내주시면 해당 블로그를 분석하여서 평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책, '맹꽁이 서당'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기생(인줄 알았어요.) 어우동(어을우동).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국민배우 안성기씨까지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되어 왠만한 사람들도 그 이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테지요.
그래도 안성기씨가 나오는데... 너무 Sex 쪽으로만 중점을 둔 듯한 포스터가 마음에 안듭니다.-_-;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 왕에서 종까지 그녀 품안의 모든 남자는 단지 노리개;;
제작 : 이태원
감독 : 이장호
원작 : 방기환
각색 : 이현화
촬영 : 박승배
음악 : 이종구
출연 : 이보희, 안성기
태흥영화 주식회사 제작
1985년 9월 28일 단성사 개봉
이처럼 주로 '야한 영화의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해서 성종 시대의 다양한 야사 인물 중의 하나려니... 했던 사람인데.. 최근 드라마 '왕과 나'에서 미스코리아 출신 김사랑이 어우동 역으로 나온다고 해서 자료를 한 번 뒤져보니..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입니다.
야한 소설 속의 남자들이 상상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갖춘 여자인 것 같습니다.. 하여튼.. 대단한 여자네요.ㅋ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조선시대 3대 섹스 스캔들의 마지막 주자는 어을우동(혹은 어우동)이다.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유명세를 탄 이 여성의 남성 편력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들여다 보기로 하자.
어을우동은 성종 시절 승문원 관리 박윤창의 딸로서 태강수(수는 왕실 친척에게 내리는 작호) 이동(李仝)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 잘 나가는 집안의 여성이었다. 그런데 바람기가 몹시 심해 버림받은 후 남자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간통하다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교수형으로 일생을 마감한 희대의 음녀(淫女)다.
어을우동 사건은 성종 11년 7월 11일, ‘어을우동이 수많은 남자와 간통하고도 승복하지 않으니 국문해 달라’는 의금부 보고로 시작된다.
9월 2일 실록에는 어을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의 명단이 줄줄이 기재되어 있으니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공무원 이기, 이난, 구전, 공부하는 유생 홍찬과 이승언, 서리(하위직 관원) 오종련과 김의형, 전의감 생도(왕실병원 실습생) 박강창, 평민 이근지, 노비 지거비 등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어을우동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사람과 관계했음을 알 수 있다. 의금부는 어을우동의 형량은 곤장 100대에 유(流) 2000리(서울에서 2000리 떨어진 곳에 유배를 보내는 것)에 해당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 시절에도 음행을 일삼은 어을우동에 대한 강경론과 동정론이 팽팽하게 맞서자 성종은 여러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은 성종 11년 9월 2일 실록.
<정창손:
“어을우동은 종친의 처이며 선비의 딸로서 음욕을 자행한 것이 창기와 같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태종, 세종 때 선비의 부녀로서 음행이 매우 심한 자는 간혹 극형에 처했지만 그 후로는 모두 율에 의해 단죄했으니 어을우동도 율에 의해 단죄해야 합니다.”
김국광·강희맹:
“어우동은 종실의 부녀로서 친척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서로 간통해서 인륜을 손상시켰습니다. 청컨대 중국 조정의 예에 의해 저자에 세워 도읍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서 징계가 되게 한 후에 율에 따라 멀리 유배하소서.”
윤필상:
“어을우동이 강상을 무너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으면 음란한 풍속을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의 정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을 자행하여 춘추시대 정나라, 위나라의 풍속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청컨대 이 여자를 큰 벌에 처하여 후세 사람을 경계하소서.”
홍응·한계희:
“국가에서 죄를 정할 때는 한결같이 율문에 따르고, 임의로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형장을 강등하여 관대한 법전을 따랐으며 법외로 논단한 적은 없었습니다. 어을우동의 추악한 행실은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되나 임금의 은덕은 죽음 중에서도 살릴 길을 구해야 합니다. 청컨대 율에 의해 결정하소서.”
이극배:
“태종조에 승지 윤수의 처가 맹인 하천경과 간통하고, 세종조에 관찰사 이귀산의 처가 승지 조서로와 간통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 후 판관 최중기의 처 유감동이 창기라 칭하면서 음행을 자행했는데, 사형을 감하여 유배를 보냈습니다. 지금 어을우동은 종실의 처로서 음욕을 자행하기를 꺼리는 바가 없었으므로 극형에 처해야 하나 율에 의하면 사형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청컨대 사형을 면하여 먼 곳에 유배하소서.”>
이처럼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하자 임금이 결단을 내렸다.
<어을우동은 음탕하게 방종하기에 꺼림이 없었다. 이런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이 어떻게 징계되겠느냐. 의금부에 명하여 사형시켜라.”>
꼬리쳐서 맞아들여
성종 11년 10월 18일 어을우동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어울우동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녀는 처음에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을 갔는데 행실이 과히 좋지 못했다. 이동이 은장이를 집으로 불러 은그릇을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계집종처럼 가까이 하려 했다. 태강수가 그것을 알고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친정으로 돌아가 슬퍼하며 탄식했다.
그때 한 계집종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련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 관리가 되었고 용모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가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주인을 위해 불러오겠습니다” 하니 어을우동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련을 데리고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했다. 또 방산수 이난의 집 앞을 지나다가 그와 간통했는데 정이 매우 두터웠다. 이난이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이름을 새겼다.
또 단오날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 서쪽에서 그네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 이기와 눈이 맞아 정을 통했다.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내금위(왕궁 수비대) 구전은 어을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을우동이 정원에 있는 것을 보고 담을 뛰어넘어가 간통했다.
생원 이승언이 일찍이 집 앞에 서 있다가 어을우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 아니냐” 하니 계집종이 “그렇습니다” 했다. 이승언이 뒤를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 집에 이르러 침방에 들어가 비파를 가져다 탔다. 어을우동이 성명을 묻자 “이생원이다” 하니 “장안의 이생원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했다. 이승원이 답하기를 “춘양군의 사위 이생원을 누가 모르는가” 하며 마침내 동침했다.
홍찬이 처음 과거에 올라 시내 구경을 하다 방산수의 집을 지날 적에 어을우동이 살며시 엿보고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뒤에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려 홍찬이 마침내 그녀 집에 이르러 간통했다.
서리 김의형은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 그녀를 희롱하며 집까지 따라가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서리를 몹시 사랑하여 이번에는 등에다 이름을 새겼다.
밀성군(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아들)의 종 지거비가 이웃에 살았는데 어느 날 새벽, 어을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하여 “부인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크게 떠들어 이웃에 알리면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오” 하니 어을우동이 두려워해 안으로 불러들여 간통했다.
이때 방산수 이난이 간통사건과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유감동이 많은 간부(奸夫)를 연루시키는 바람에 사형을 면했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 없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간통한 남자를 많이 열거하고 방산수 이난,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정숙지 등을 끌어댔으나 증거가 없어 죄를 면했다.
사람들이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도 음행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그 어미가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간통사건이나 섹스 스캔들에 대해 극형으로 다스리고 유배 보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들도 스캔들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으니, 인간 사이의 욕정 문제는 발본색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연인의 몸에 이름을 문신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나 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편에 어우동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어우동이 방탕하여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잡혀와 국청에서 문초당한다. 이 때 어우동이 관계했다는 수 십 명의 남자들도 국청으로 불러들여 간음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대질을 하는 과정에서 들어난 일인데, 그들 중 세 남자가 어우동과 정이 두터워 정표로 몸에 문신을 했다는 것이다.........
어우동이 미복(변장)을 하고 종실 방산수를 만나 간통하였는데 정호가 매우 두터워서 방산수 난은 자기 팔뚝에 어우동 이름을 먹물로 새기었고, 박강청을 만나 어우동이 그를 가장 사랑하여 그 또한 먹물로 팔뚝에다 어우동 이름을 새기었으며 서리(사관) 김의향을 만나 어우동이 그를 사랑하여 그의 등에다 자기 이름을 새기었다.
이 같은 기록을 보면 당시 사대부집 종들 사이에서, 혹은 평민 계층에서 사랑의 징표로 정인의 몸에 문신을 하는 것이 그 당시 시속(時俗)으로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던 듯 싶다. 하여간 위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풀이하면 어우동은 그와 정분을 맺었다는 그 수많은 남정네들 중에서 세 사람, 종실 방산수와 전의감 생도 박강창 그리고 사관 서리 김의향을 깊이 사랑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우동은 조선시대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 정2품 벼슬인 지사 (知事) 박윤창의 딸로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 이동(李 仝)의 아내다.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양반집 규수가 왕족에게 시집가 귀부인이 되었는데 어쩌다 조선 오백년 역사 중 음행사건으로 당대의 사회에 대 파란을 일으키고 또 오늘날까지 음탕한 여자의 대명사로 불려지고 있을까?
어우동은 역사에 기록된 바 대로 과연 색을 탐하고 색기 넘치는 음탕한 여인이었을까?
여기서 잠시 조선조의 시대상을 유추해 보자. 조선시대는 여성의 인간적인 권위나 사회적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여성에게 있어 완전한 암흑의 시대였다. 여자는 재능이 있어도 그것을 펼 수 없고, 학문에 뜻이 있어 글 배우기를 갈망하여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다만 부덕 (婦德)을 기르는 기초교양에 필요한 정도의 학습을 허용하였다. 여자가 설령 학식이 있다해도 여자의 무식함이 오히려 덕이 된다는 사대부들의 통념에 눌려 여자는 자신의 학식을 들어내 놓고 자랑할 수조차 없었다. 같은 인간이면서 남녀의 귀천을 갈라놓은 남존여비 사상에 물들어 여자에겐 오직 유순과 맹목적인 순종 그리고 정절을 강요했던 시절이었다.
'두 번 시집갔거나 행실이 방정하지 못한 여인의 아들과 손자에게는 분과시험(과거)과 생원시, 진사시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라고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시해 놓았다.
한 여성의 행실에 따라 그 집안의 아들과 손자 대까지 벼슬길에 나가는 관문을 원천봉쇄하겠다는 법 앞에서 과부가 어떻게 재혼할 수 있으며 재혼할 엄두가 나겠는가? 이렇듯 여성에겐 정절을 강요하면서 그 당시 사대부 남자들은 수탉처럼 여러 명의 처첩을 거느리고도 모자라 기방을 출입하며 기녀와의 유희를 즐기면서 그것이 마치 사내 대장부의 풍류인양 미화하였다.
왕족인 종실의 경우는 더 심했다. 왕자로 왕위 계승권에세 일찍이 밀려난 왕자와 왕자의 아들 들은 행동반경에 더욱 규제가 심했다.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고, 도성 밖으로 자유롭게 나가 살 수도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어우동의 남편 태강수 역시 종실로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순응하며 살았다. 어느날 남편이 은세공장이를 집으로 불러 일감을 맡겼다. 어우동은 먼 발치에서 숙련된 솜씨로 집안의 오래된 은붙이를 녹여 새롭게 장신구를 만드는 은세공장이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녹아있는 은물을 틀에 부어 비녀도 만들고 반지도 만드는 세공기술이 신기하고 놀라워서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는 직접 가서 보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탐구심이 강하고 호기심 많은 어우동은 자신의 계집종 옷을 빌려입고 은세공장이의 곁으로 다가가 구경도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세공장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실의 귀부인이 헛간같은 곳에서 외간남자와 마주앉아 있는 그 자체가 법도를 어기는 일인데 그만 그 장면을 남편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태강수는 어우동이 천한 은장이를 좋아하여 가까이 지냈다고 화를 내며 그날로 아내를 친정으로 쫓아보냈다. 친정으로 돌아온 어우동은 어이없는 이유로 남편에게 소박맞은 자기신세를 한탄하며 슬퍼하였다. 남은 여생을 홀로 살아내야 한다는 자신의 운명을 억울해 하고 분해 하다가 문득 남편을 비롯해서 그 시대 모든 사대부 남성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우동은 떨쳐 일어나 외간 남자들을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어우동은 남자를 선택했다.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는 시대에 어우동은 용감하게도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를 스스로 골라 잡았다. 때로는 변장을 하고서 길에 나가 직접 상대를 보고 마음에 드는 남자라면 서슴없이 다가가서 유혹했다 한다.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화를 꽂고 행진하는 홍찬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끌려 홍찬이 지나는 길목을지키고 있다가 그를 유혹하여 정을 통하였다.' 이 대목도 성종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행실은 파다하게 소문이 퍼져 대궐 안까지 날아들었고 이 사실을 알게된 성종은 어우동을 잡아들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어우동은 의금부 나졸이 자신을 잡으러 나온다는 말을 전해 듣고 달아났으나 멀리 가지 못하고 잡혔다.
어전회의에서 어우동의 처벌 문제를 놓고 임금과 신하간에 오랜 논쟁이 벌어졌다. 대명률에 의해 간음죄의 처벌인 곤장 100대를 쳐 멀리 유배보내자는 의견과 사형의 중형을 주장하는 의견이 맞섰는데 종친녀의 음란은 중형으로 다스려서 사회기강을 잡아야 한다는 성종의 의지대로 ( 음행죄는 태형이나 장형이었으나) 사형이 내려졌다. 종실의 처로 근친들과 간음하여 왕실의 위상을 더럽힌 죄가 크기 때문이다.
성종 11년 10월 어우동은 교수형으로 말 많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실록에 명기된 성균관 유생 수십명에, 노비, 조관 등 그 많은 남자들과 그녀는 과연 사랑을 했던 것일까? 사랑의 징표로 팔뚝과 등판에 먹물로 인을 친 세 남자 만을 사랑했던 것일까? 어우동의 남성편력은 단순히 여자의 성품이 음란하여 저지른 음행사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자에게 불평등한 사회, 남성 우위의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유교사회를 향해 몸으로 대항한 처절한 항변이 아니었을까? 생명을 담보로 한.
백마대 빈지 몇해를 지났는고
낙화암 서서 많은 세월 지났네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리
부여회고(扶餘懷古), 라는 이 시는 어우동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다음은 어우동을 찾다가 발견한 다른 주인공, 유감동이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을 만나서인지.. 운이 좋은 것인지, 교수형은 피해갔군요.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같이 자다가 소변을 본다고 핑계하여 김여달에게 도망했습니다.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죄를 저질렀으니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김여달은 1등을 감형하여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으로 귀양을 보낼 것이며, 간통한 최중기의 매부 이효랑은 곤장 100대, 오안로는 자자(얼굴에 칼 자국을 내는 것), 기타 간통한 자들은 곤장 60~100대를 쳐야 합니다.”
조선시대 3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중 하나인 유감동은 길거리에서 굴러먹던 여성이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명예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검한성(檢漢城) 유귀수의 딸로서 빵빵한 집안의 규수였다.
그녀는 나이가 차자 평강 현감 최중기에게 시집을 갔는데, 최중기가 무안 군수로 나갔을 때 함께 부임했다가 병을 핑계로 먼저 서울로 올라와 음란한 행실을 일삼는 바람에 쫓겨난 여인이다.
유감동은 과연 어떤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기에 근엄한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올린 것일까. 유감동 사건이 사회문제로 확산되자 세종은 신하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헌부에서 음부(淫婦) 유감동을 가뒀다는데 간통한 남자는 몇이나 되며, 본 남편은 누구인가” 하자 김자가 답하기를 “간통한 남자는 이승, 황치신, 전수생, 김여달, 이돈 등이며 기타 몰래 간통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본 남편은 평강 현감 최중기입니다.”>
간통한 남자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라, 허허허. 좀 더 정밀한 관찰을 통해 유감동과 정분을 나눈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세종 9년(1427) 8월 20일 사헌부 보고에 의하면 유감동과 간통한 사람은 정효문, 이효랑, 오안로(해주판관), 이곡(전 도사), 장지(수정으로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 최문수(의자 만드는 기술자), 이성(은으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자), 전유성, 변상동 등이 더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사헌부는 “간통한 자 중에서 관리들은 직위해제하고 잡아다 국문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정효문과 이효랑은 직위해제하지 말고 일단 잡아오라”고 명하자 김종서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정효문은 그의 숙부 정탁이 간통한 사실을 알고도 고의로 유감동을 범했으니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이효랑은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간통했으니 두 사람 행실은 짐승과 같습니다. 추궁하여 다스리소서.”>
이에 대한 세종의 답변.
<“이 여자를 더 추국할 필요가 없다. 이미 간통한 남자가 십수 명이 나타났고, 또 재상도 끼어 있으므로 일의 사연은 벌써 다 알려졌으니 이것을 가지고 죄를 결정해도 될 것이다. 다시 더 추국한다 해도 이 여자가 어떻게 다 기억하겠는가.”>
아무 곳에서나 간통하고…
세종 9년 9월 16일 사헌부가 임금에게 올린 보고에는 유감동의 음란행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유감동과 간통한전유성, 주진자, 김유진, 이효례, 이수동, 송복리, 안위 등은 이 여자의 지나온 내력을 살피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간통하고 욕심을 마음대로 부렸습니다.
이자성은 비록 간통하지는 않았으나 간통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황치신은 나루터 아전으로서 지나가는 여자를 불러 간통했는데, 후에는 지나온 내력을 알면서도 계속 간통했습니다.
변상동은 이승이 첩으로 정해 거느리고 살 때 몰래 훔쳐 간통했으니, 그 마음과 행실이 불초할 뿐만 아니라 여러 달 간통했으니 어찌 이 여자의 지나온 내력을 몰랐겠습니까. 이승과 이돈은 사정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간통하면서 유감동의 아버지 집에까지 드나들었으니 그 뻔뻔스러움은 말할 수 없습니다.
오안로는 지나온 내력도 모르는 여자를 관아에 끌어들여 간통하고 관청의 물건까지 팔기도 하고 주기도 했습니다. 전수생도 여러 달 동안 간통했으니 그가 이 여자의 사정을 안 것은 확실합니다. 이효랑은 처남의 정처(正妻)와 간통했으니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권격은 고모부인 이효례가 일찍이 간통한 것을 알면서도 여러 차례 간통했습니다.
김여달은 길 가는 유감동을 만나자 순찰한다고 위협하여 간통하고 음탕한 욕심을 내어 남편 최중기의 집까지 왕래하며 거리낌없이 간통하다 마침내 유감동을 거느리고 도망했습니다.
유감동은 공직자의 아내로서 남편을 버리고 도망하여 거짓으로 창기(娼妓)라 일컬어 서울과 외방에 횡행하면서 밤낮으로 음란한 짓을 하여 추악함이 비할 데가 없으니 크게 징계하여 뒷사람에게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 시절은 유교 사회의 법도와 기강이 강했던 시대인 만큼 남녀 간의 성 문제에 대해서는 법도가 준엄했다. 사헌부는 유감동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엄격하게 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보고했으니, 요즘 용어로 검찰의 구형에 해당하는 대목을 직접 들어보자.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같이 자다가 소변을 본다고 핑계하여 김여달에게 도망했습니다.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죄를 저질렀으니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김여달은 1등을 감형하여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으로 귀양을 보낼 것이며, 간통한 최중기의 매부 이효랑은 곤장 100대, 오안로는 자자(얼굴에 칼 자국을 내는 것), 기타 간통한 자들은 곤장 60~100대를 쳐야 합니다.”>
사헌부는 유감동의 죄가 중한 만큼 교수형을 주장했으나 마음이 너그러웠던 세종은 그녀를 변방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러한 유배조치로 유감동 사건이 막을 내린 것은 아니다. 세종 15년(1433) 12월 4일 지방으로 유배된 유감동은 또다시 일을 벌였다. 이날 사헌부는 ‘임금께서 유감동을 너그럽게 살려주었기 때문에 비슷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며 음행사건에 보다 단호한 조치를 내려 줄 것을 간청했다.
당시 사헌부에는 재상의 딸인 어리가가 고위 공무원들과 떼를 지어 음행을 일삼다 체포되어 수감됐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사헌부는 유감동처럼 너그러이 유배시키면 앞으로 동일한 사건을 바로잡을 수 없다며 극형에 처할 것을 건의했다. 세종이 허락하지 않자 대신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종 15년 12월 8일, 사간원이 다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 중에 유감동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전일에 어리가, 이의산, 허파회 등을 사형에 처하여 뒷사람을 경계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시니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생각하건대 남녀 사이에는 큰 욕심이 있는 것이니, 엄중하게 금하고 방지하지 않으면 요사하고 음란한 무리들을 어찌 경계하겠습니까. 태종께서는 음란 행실을 일삼는 자들을 큰 죄로 징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감동이나 금동, 연생, 동자와 같은 무리가 잇따라 나왔습니다. 만약 어리가의 죄를 관대한 법으로 처리한다면 뒷날 방자한 행위를 하는 자가 끝이 없을 것이 두렵습니다.”>
입력날짜 : 2006-08-17 (10:47)
조선시대 別錢 규방의 성교육용으로 금속판 위에 성행위 장면을 새겼다.
세종 9년(1427) 9월16일자 사헌부의 사건 보고서는 유감동의 자유분방함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유감동은 관리의 정처로서 남편을 버리고 도망하여 거짓으로 창기라고 일컫고 서울과 외방에 횡행하면서 밤낮으로 음란한 짓을 하여 추악함이 비할 데 없다. 이 승과 이 돈은 간통하면서 감동의 아버지의 집에까지 드나들었으며, 오안로는 내력도 모르는 여자를 관청에 끌어들여 간통하고 관청의 물건까지 팔기도 하고 주기도 했으며, 전수생도 여러 달 동안 간통했다.
이효량은 처남의 정처와 간통했으니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며, 김여달은 길에서 피병하러 가는 유감동을 만나자 순찰한다고 위협하여 강간하고, 드디어 음탕한 욕심에 남편 최중기의 집까지 왕래하며 거리낌없이 간통하다 마침내 유감동을 데리고 도망했다.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자다 소변본다고 핑계대고 김여달에게 도망쳤다.’
사헌부는 유감동의 죄가 중한만큼 교수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세종은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어 종친의 아내로서 행동이 문란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요부(妖婦) 어우동(於宇同, 정확하게는 於乙宇同)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때는 성종 시절, 아버지는 승문원 관리 박윤창, 남편은 종실 태강수(泰江守) 이 동(李仝). 일찍이 은장이(銀匠)를 맞이해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처럼 하고 나가 서로 이야기하며 가까이 하려고 했다.
그 사실이 알려져 어을우동은 친정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어느날 어을우동이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자 한 계집종이 이렇게 위로했다.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년이라는 이는 일찍이 사헌부 관리가 되었고 용모가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신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불러 오겠습니다”라고 했다. 어느날 계집종이 오종년을 맞이하여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하였다.
이후 어을우동의 남성 편력은 끝없이 이어진다. 어우동이 미복을 하고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방산수 이 난이 맞아들여 간통했다. 그 정이 매우 두터웠던 모양이다. 이 난이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어우동의 이름을 새길 정도였다. 단오날에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 도성 서쪽에서 그네 타는 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 이 기가 보고 좋아하여 그 계집종에게 물었다.
“뉘 집 여자냐?”
계집종이 대답하기를 “내금위의 첩입니다”라고 해서 서로 정을 통했다. 전의감 생도 박강창 역시 어우동과 놀아났다.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팔뚝에 그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이미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지자 대담해진 어을우동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과거에 합격하여 유가(과거 합격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잡히고 거리를 돌며 좌주·친척 등을 찾아보는 일. 대개 방방후 사흘 동안 하였음)를 하는 홍 찬을 본 어우동은 문득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 후 길에서 홍 찬을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렸다. 이에 홍 찬이 그의 집으로 가 정을 통했다. 그 상대가 반드시 양반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서리 감의향이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자 희롱하며 집까지 따라가 간통하기도 했다. 어을우동이 사랑해 등에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귀천 안 따진 어을우동의 남성편력
삼척 원덕 지방에 지금도 남아 있는 해신당을 재현한 모습.
이 같은 자유분방한 생활은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졌으며,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어을우동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논의가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과 간통했는가 하는 것도 관심사였다. 그 때 방산수 이 난이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감동이 많은 간부로 인하여 중죄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 없이 많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관계를 맺은 간부를 열거하고, 방산수 이 난도 어유소·노공필·김세적·김 칭·김 휘·정숙지 등을 끌어대었다. 문초를 받은 관계자들만 수십 명에 이르렀다.
심 회는 “어을우동의 죄는 율을 상고하면 사형에는 이르지 않으나, 사족의 부녀로서 음행이 이와 같은 것은 강상에 관계되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여 뒷사람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라고 극형을 주장했다.
윤필상도 “어을우동은 강상을 무너뜨렸는데도 죽이지 않으면 음풍이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의 정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을 자행하여 정·위나라의 풍속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이 여자를 극형에 처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소서”라고 했다.
김국광과 강희맹은 의논하기를 “어을우동은 종실의 부녀로서 음욕을 자행하기를 다만 뜻에만 맞게 하여 친척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즐겨 서로 간통하여 이륜(彛倫)을 손상시킨 것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마땅히 조종조의 법에 따라 중벌에 처하여 규문 깊숙한 속의 음탕하고 추잡한 무리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 경계하고 반성하게 함이 옳겠습니다. 중국 조정의 예에 의하여 저잣거리에 세워 도읍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 징계가 되게 한 연후에 율에 따라 멀리 유배하소서.”
결국 어을우동은 성종 11년(1480) 10월1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울러 조선 최대의 음녀(淫女)로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종실의 아내로서 그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고, 유교 윤리를 표방했던 조선사회는 그를 포용할 수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어우동과 간통한 것으로 알려진 남자들에 대한 처벌이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실제로 문초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죄를 면했다. 성종 13년(1482) 8월8일 실록에 의하면, 어을우동과 간통한 자들은 이미 모두 석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요즘도 더러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되는 동성애(同性愛)도 확인된다. 세종 시절, 세종의 아들로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의 두번째 부인 봉씨(奉氏)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세자빈의 동성애 사건을, 세종은 측근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도승지와 동부승지(왕실의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의 관원,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장과 비서관)만 배석시킨 채 논의하고 있다. 세종 18년(1436) 10월26일의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난해 세자가 종학(宗學)에 옮겨 거처할 때 봉씨가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부터 외간 사람을 엿보았다. 또 항상 궁궐 여종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요 근래 봉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 궁인들이 혹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고 한다.
어느날 소쌍이 궁궐 안에서 소제하고 있는데 세자가 갑자기 묻기를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고 하니 소쌍이 깜짝 놀라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듣건대 봉씨가 소쌍을 몹시 사랑하여 잠시라도 그 곁을 떠나기만 하면 원망하고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나는 비록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였고, 소쌍도 다른 사람에게 늘 말하기를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매우 무섭다’고 하였다.
소쌍이 또 권승휘의 사비(私婢) 단지와 서로 좋아하여 혹시 함께 자기도 하였는데, 봉씨가 사비 석가이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라 다니게 하여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하였다.
또 봉씨가 새벽에 일어나면 항상 시중드는 여종들로 하여금 이불과 베개를 거두게 했는데, 소쌍과 함께 자리를 같이한 이후로는 다시는 시중드는 여종을 시키지 아니하고 자기가 이불과 베개를 거두었으며, 또 몰래 그 여종에게 그 이불을 세탁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궁중에서 자못 떠들썩한 까닭으로 내가 중궁과 더불어 소쌍을 불러 그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하였다.”
궁궐 내부의 공공연한 동성애
동성애는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녀와 종비(從婢) 등이 사사로이 서로 좋아해 자리를 같이한다고 하므로, 그것을 매우 미워하여 궁중에 금령을 엄하게 세워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살피는 여관이 아뢰어 곤장 70대를 집행하게 하였고, 그래도 금지하지 못하면 곤장 100대를 더 집행하기도 하였다. 그런 후에야 그 풍습이 조금 그쳐지게 되었다.’
그런데 세종도 이러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걱정되었는지, 세자빈 봉씨가 궁궐의 여종과 동숙한 일은 매우 추잡하므로 교지에 기재할 수 없으니 우선 성질이 질투하며 아들이 없고 또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른 너댓 가지 일을 범죄 행위로 헤아려 교지를 지어 바치게 했다. 결국 봉씨는 그 사건으로 폐출돼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저로 나갔다.
위에서 살펴본 사례들은 두드러지는, 아니 어쩌면 예외적인 것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조선사회 전체가 그러했다는 식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남성들의 성행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면서 여성들에 대해서는 정절을 강조하는 남성 중심의 유교적, 가부장적 질서가 엄연히 존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평가 역시 시대에 따라,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을 가리켜 요부(妖婦) 혹은 음부(淫婦)로 볼 수도 있겠고, 성해방론자 내지 인간해방론자 혹은 남녀평등론자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겠다.
결국 이들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몫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시대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윤리와 도덕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뀔 수밖에 없겠지만, 윤리와 도덕의 존재 그 자체가 없어질 수는 없지 않을까 한다.
출판호수 2004년 01월호
출처 : [자료원 역사탐험]
사족.
어우동, 유감동을 비롯하여, 인수대비, 정순왕후, 문정왕후 등... 조선시대 유명한 여자들은 모두 악명 높은 사람들 밖에 없네요. -_-;; 이것도 남존여비 사회의 편견에서 온 것인지 궁금하군요.
제가 알기로는 성종과 어우동보다 성종과 기생 소춘풍과의 이야기가 더 유명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일단 유명하니까 어우동을 고른 것일까요?
성을 즐겁고 신성한 것이라 여긴 신라시대 여인들이 칠거지악을 내세우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갑갑해서 모두 기생이 됐거나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외국도 그런 것인지 우리 민족이 유달리 성을 사랑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언어에 유독 음담패설과 성 관련 욕설이 많은 걸 보면 조선시대의 악랄한 억압은 강한 것에 대한 더 강한 것을 통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스캔들>이 나오기 전에는 조선시대 스캔들이야 과부가 머슴과 도망가 숨어 살거나 결국 자살을 택하는 것 정도의 고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어우동, 사방지 등 한국형 에로 영화의 소재가 모두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기억하자.
어우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사랑을 나눈 여자이다. 조선 성종 때의 실존 인물인 어우동은 본래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간통 문제가 불거져 이혼당했고 그 이후 노소, 근친을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을 뿌린다. 어우동은 한번 관계를 맺은 남자는 절대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었는데 애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몸에 문신하도록 강요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애정 행각이 구설수에 올라 풍기문란 죄로 처형된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어우동의 형량은 고작 곤장형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연루된 고위 관리들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사형을 고집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책임감없는 행동은 한결같다.
믿기지 않겠지만 500년 조선조 동안 왕실 여인들의 동성연애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궁궐 내 동성연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세종대왕이 이와 관련된 벌칙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 세종대왕이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연애자임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을 충격에 빠뜨린 며느리는 후에 문종이 되는 세자의 둘째 부인인 봉씨. 실록에 의하면 봉씨는 거짓말로 임신과 낙태를 번갈아 하고 술을 즐겨 만취한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물론 이는 봉씨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은 관리들의 악의에 찬 기록일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날 궐내에 여종 소쌍이 세자빈과 같이 잔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왕의 문초를 받던 소쌍은 세자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고백한다. 결론? 물론 세자빈은 폐위됐고 친정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도 자결했다.
드라마 <대장금>의 배경이 되는 중종 때 조정은 백정의 딸을 양반의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로 한바탕 시끄러웠다. 결국 중종이 어려운 시절에 동고동락한 천민의 딸을 양반의 정식 아내로 인정하라는 명령을 내려 일단락된 이 사건은 조선 전체가 들썩거렸던 백정의 딸 양씨 스캔들이다. 폭군 연산군은 예쁜 여자라면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은 이장곤이라는 관리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이에 격분한 이장곤은 홧김에 아내를 죽이고 함경로 도망친다. 도망자 신분의 이장곤은 백정 양씨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정말 괜찮은 그 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도망자 생활 몇 년 만에 중종의 즉위로 조정으로 돌아온 이장곤. 그동안 양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장곤은 동고동락한 아내를 버릴 수 없어 조정에 선처를 부탁한다. 결국 이장곤 덕에 부인 양씨는 정경부인이 되고 친정은 모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정경부인 양씨의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 <임꺽정>에도 등장하는데 임꺽정은 정경부인 양씨의 조카로 설정돼 있다.
언젠가 KBS <역사 스페셜>에서 지독한 사랑으로 소개된 바 있는 홍랑과 김덕창의 스캔들은 이렇다. 김덕창은 함경도 변방에 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시와 음악에 뛰어난 관기 홍랑을 만난다. 서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김덕창의 임지 변경으로 헤어지게 되는데 어느 날 홍랑은 한양에 있는 김덕창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관기는 임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홍랑은 연인을 찾아 한양에 오게 되고, 한양에서 둘은 다시 한번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한양 한복판에 아내까지 있는 양반 관리가 법을 어긴 관기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고 김덕창은 파직 후 객지에서 살해됐다. 사실 개인적이기까지 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세하게 전해지는 이유는 후에 홍랑이 김덕창을 위해 평생 수절했고 결국 김덕창과 나란히 묻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회 금기를 깨고 사랑을 이룬 그녀의 용기가 더 부럽다.
양녕대군은 동생을 위해 일부러 패륜아 행세를 한 꽤 멋진 왕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녕대군을 호탕한 풍류가로만 생각하기에는 입에 담기 민망한 스캔들이 많다. 양녕대군이 일으킨 스캔들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웠던 것은 유부녀인 어리 강간 사건이다. 어리는 한 정승의 첩으로 병이 있고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양녕대군은 그녀를 납치해 강제로 관계를 갖는다. 심지어 양평대군은 어리를 궁궐과 지방 유배지에까지 끌였들이는데 이는 연산군의 스캔들을 제외한 조선시대 최고의 섹스 스캔들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는 이 어리 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됐다는 사실을 들어 당대의 로맨스로 미화하지만 결국 양평대군이 어리를 버리고 왕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어쨌든 그 이후의 어리의 삶은 기록에 전해오지 않는다. 출처 :아름다운 만남의 동행 원문보기
조선시대 각종 스캔들 모음 행복에셋님의 블로그 - 조선시대를 발칵 뒤흔든 섹스스캔들 모음 (양성인간 사방지, 세자빈 봉씨 등... 미성년자 관람 불가-_-;;)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의 주인공, 황진이 다우리(빗방울)님의 블로그 -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
황진이 또한 기생이고, 아름다운 미모로 첫눈에 남자들을 함락시켰다고 하지만 워낙에 도도하고, '성'보다는 시, 화, 거문고로 유명해서인지 이 게시물에 링크시키기는 그녀에게 미안해서 빼버렸다.
이외에 현대에 파문을 일으켰던 스캔들에 연루됐던 주인공들인 '린다 김, 모니카 르윈스키, 마릴린 먼로, 정인숙'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둔 '집아, 고맙다님의 블로그 - 재미있는 지구촌 섹스스켄들[펌]'
영웅은 수많은 미녀들을 취해도 호남으로서의 기개나 풍류로 포장하는데 비해, 여자들은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의 미국에서도 추악한 스캔들의 여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걸 보니 이 또한 남녀차별의 일종인 것 같아서 과히 유쾌하진 않다만.. 나 역시도 그녀들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걸 보면 나도 똑같은 인간인가?
The Road not Taken Robert Frost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속에 난 두 갈래 길
아쉽게도 한 사람 나그네
두 길 갈 수 없어 길 하나
멀리 덤불로 굽어드는 데까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곤 딴 길을 택했다. 똑같이 곱고
풀 우거지고 덜 닳아 보여
그 길이 더 마음을 끌었던 것일까.
하기야 두 길 다 지나간 이들 많아
엇비슷하게 닳은 길이었건만. 그런데 그 아침 두 길은 똑같이
아직 발길에 밟히지 않은 낙엽에 묻혀 있어
아, 나는 첫째 길을 후일로 기약해 두었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법이라
되돌아올 수 없음 알고 있었다. 먼 먼 훗날 어디선가 나는
한숨 지으며 이렇게 말하려나
어느 숲에서 두 갈래 길 만나, 나는--
덜 다닌 길을 갔었노라고
그래서 내 인생 온통 달라졌노라고.
당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보이는 김태희와 옥탑방 고양이 김래원이 함께 나온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라는 대작(?)을 두 배 가량의 시청률로 물리친 기특한 드라마.
'어두운 드라마는 실패한다.'는 방송계의 속설과 달리 연말연시라 시청률 불황이었던 시점에
수도권 시청률 30%, 전국 시청률은 29%를 달성한 기특한 드라마.
- 이런 큰 성공을 가능하게 한 것은 차무혁이라는 캐릭터의 매력과
그것을 완벽하게 소화해준 연기자 소지섭이었다.
약간은 마이너한 느낌이 있었던 소지섭과 임수정을 톱스타로 만들어준 드라마.
인기를 떠나서 사회적인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본다.
장화홍련에서 신인치고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긴 했지만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던 임수정은
이 드라마 한 편으로 온 거리에 은채패션을 유행시키며 (무지개니트 모르는 사람 없을 듯)
연기까지 잘하는 깜찍한 동안스타로 떠올랐고,
소지섭은 '지금은 연애중, 천년지애, 발리에서 생긴 일' 로 열성팬은 확보해 놓았지만 대중적으로는 2% 부족한 배우였다. 그러나 이 드라마 한 편으로 차무혁 신드럼을 불러일으키며
외모, 연기, 몸매에 대한 인정과 함께 인기까지 얻게 되었다.
(거리에 나가면 수많은 폭탄머리 남성들.ㅋㅋㅋ
폭탄머리는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어울린다고 했나~~? ♪♬)
맨 처음에 소지섭의 폭탄 머리 사진을 인터넷에서 보고는 '어이쿠.. 또 유치한 거 하나 유행하나 보다' 생각하곤 넘겼는데 벌써 중반이 지났을 무렵, 호기심에 1회를 본 후 타는 듯한 갈증으로 끝까지 보게 되었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생각나는 드라마이다.
깍뚜기도 못써서 갈치한테 야단맞는 서경(갈치엄마)와 무혁.
둘 다 똑같은 수준에 옆 사람 꺼 보면 뭐하냐. 무혁아.ㅋ
어차피 따라갈 거면서 끝까지 아저씨한테는 안간다고 못박는 은채
무혁은 은채의 상처를, 은채는 무혁의 고통을 먼저 아파하며 서로를 걱정하는 빗 속의 연인들
남아있을 은채 걱정에 돌아눕는 무혁이와 들이대는 은채
갈치의 눈물은 무혁이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내 눈물샘을 터지게 했던 장면....
사랑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어머니..
단 한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요..
어머니.. 낳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은채의 아버지 송대천을 용서할 수 없어서...
은채가 상처받을까봐.. 여러가지 이유로 은채를 피했지만
결국은 마지막 순간 은채에게 전화를 걸어
돌팅아
미안하다
사랑한다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무혁.
은채는 군데군데 과한 설정과 오버스런 연기로 좀 밉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론 무난한 연기와 사랑스러운 캐릭터였다.
무혁이 사진은 어찌 이리 하나같이 다 쓸쓸할까...
살아서도 지독하게 외로웠던 그를...
혼자 둘 수가 없었습니다
내 생에 이번 한 번만 나만 생각하고
나를 위해 살겠습니다
벌 받겠습니다.
-송은채
개에게도 영감을 준 소간지 스따일~ 차무혁 신드럼.ㅋㅋ
차무혁 강아지.ㅋㅋㅋ
아직도 겨울이 되면 미사가 그리워지는군요.
아참. 외과의사 봉달희에서는 안중근(이범수)가 봉달희(이요원)에게 애칭으로 돌대가리라고 불렀다죠?
저는 돌대가리보다는 돌팅이가 조금 사실은 많이;;; 더 마음에 드네요.:-)
우리의 인지구조와 자아에 변화가 옴에 따라 욕구단계가 점차 올라가듯 블로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티스토리에 맞춰서 자신의 단계는 어디쯤인지 체크해보자.
에이브러햄 매슬로 [Abraham H. Maslow, 1908~1970]가 주장한 욕구 5단계설
1. 생존의 욕구 - 초대장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시기.
우선 가입을 하고자 고군분투한다. 블로그 좀 한다~하는 사람들은 다 한다는 티스토리의 초대장이 없는 사람은 설움과 초조함에 북받혀서 여기 저기 이메일주소를 남기고 남은 초대장을 구걸하는 바람에 이들 중 다수는 중복으로 신청하는 경우가 많는데 이 때문에 많은 초대장 소유자들은 그들을 하이에나로 비유하기도 한다.
2. 안전의 욕구 - 이제 초대장을 얻은 상태.
블로거에게 첫 단계인 가입의 욕구를 해결하였으므로 정착하는 단계. 자신의 집주소와 디자인을 정하고 일기글 한 두개를 올리면서 스스로 만족을 얻는 시기이다. 인간은 하위 욕구를 충족해야 상위 욕구를 가지게 되는데, 포털서비스의 가입형 블로그는 첫번째 욕구를 채우지 않고 두번째 단계로 바로 들어서기 때문에 절박함이 없는 경우가 많다.
3.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 메타블로그와 방문자수에 눈을 뜨는 시기.
집도 만들고, 블로그도 꾸미며 혼자 만의 공간으로 만족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글 올려도 댓글 하나 안붙는 자신의 블로그에 불만을 가지게 되는 시기이다. 검색엔진에도 등록을 해보고, 메타 블로그에도 등록을 해가면서 자신의 블로그를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게 되며, 유입 검색어를 늘리기 위해서 뻘글도 써보고, 펌글도 써보고, 자추도 해본다.
어느새 한 명 두 명 늘어나는 방문자와 댓글들, 트랙백을 보며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한다. 역시 블로그는 이 맛에 하는 거라는 도취감에 빠지곤 한다.
4. 존경의 욕구 - 트래픽 폭탄을 맞은 블로그를 질투하게 되는 시기.
서서히 단골 손님도 생기고 조금씩 친분관계를 얻게 되었지만 방문자수는 그 이후로 다시 정체 상태이다. 그래도 소소한 일상을 보고하며, 하루 10명 남짓에서 100명 가까이 늘어난 방문자수에 즐거워하며 블로깅을 한다.
어느날 다른 블로그에 놀러갔다가 매일 자신의 10배 ~ 몇십배 되는 방문자수를 보고 충격을 받고 방문자수와 인기에 연연하게 된다. '내 글도 남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실시간 인기글에 올랐으면 좋겠다, 다음 블로그 뉴스에 올라 추천도 받아보고 싶다' 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슬슬 오기가 생기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바뀌고, '어떻게 하면 인기 블로그가 될까?' 하는 고민에 빠진다.
5. 자아실현욕구 - 해볼 건 다 해보고 해탈의 경지에 오르기 전.
자기 아이디, 남의 아이디, 가족 아이디 동원해서 추천도 해보고, 온갖 자극적인 제목으로 낚시도 해보았지만 실패.. 역시 가장 큰 미끼는 좋은 글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내실 있는 글을 쓰려고 하며, 방문자수에 연연해 하지 않는(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가진 자의 여유' 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RSS 구독자수가 엄청나게 많은 A등급의 블로거이기 때문이다. 이제 고정적인 소비자가 있으므로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내용없는 글은 되도록 쓰지 않고, 정보성의 공적인 글을 올린다.
애드센스를 달아서 수입을 극대화하고, 자신과 방문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블로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욕구단계설
욕구단계설은 1943년에 처음 내놓은 것으로,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려면 단계별로 상승하는 인간의 욕구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욕구는 낮은 단계의 욕구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충족됨에 따라서 차츰 상위 단계로 올라간다. 이러한 매슬로우의 이론은 브랜다이스 대학에 재직할 당시에 집필한 『인간의 동기와 성격(Motivation and Personality)』이라는 책에서 소개되었는데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매슬로우(Maslow)의 욕구 5단계설
▷1 단계: 생리적욕구(Physiological Needs) 욕구단계설의 첫 단계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생리적 욕구이다. 즉, 따뜻함이나 거주지, 먹을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빵 한 조각이 전부인 것이다. 춥고 배고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다른 욕구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2 단계: 안전욕구(Safety Needs)
일단 생리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안전의 욕구가 나타난다. 이 욕구는 근본적으로 신체적 및 감정적인 위험으로부터 보호되고 안전해지기를 바라는 욕구이다. 매슬로우는 안전 욕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사람이 극도로, 또 상시적으로 안전을 추구한다면 그런 인물이야말로 안전만을 위해서 삶을 영위한다고 할 수 있다."
▷3 단계: 소속감과 애정욕구(Belongingness and Love Needs)
일단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소속감이나 애정욕구가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한마디로 집단을 만들고 싶다·동료들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욕구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므로 어디에 소속되거나 자신이 다른 집단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고 동료와 친교를 나누고 싶어하고 또 이성간의 교제나 결혼을 갈구하게 된다.
▷4 단계: 존경욕구(Esteem Needs)
인간은 어디에 속하려는 그의 욕구가 어느 정도 만족되기 시작하면 어느 집단의 단순한 구성원 이상의 것이 되기를 원한다. 이는 내적으로 자존·자율을 성취하려는 욕구(내적 존경욕구) 및 외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주의를 받고, 인정을 받으며, 집단 내에서 어떤 지위를 확보하려는 욕구(외적 존경욕구)이다.
▷5 단계: 자아실현욕구(Self-Actualization Needs)
일단 존경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나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 "자기계발을 계속하고 싶다"는 자아실현욕구가 강력하게 나타난다. 이는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것 혹은 될 수 있는 것을 성취하려는 욕구이다. 즉, 계속적인 자기발전을 통하여 성장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하여 자아를 완성시키려는 욕구이다.
만일 당신이 태왕사신기를 보면서 뭔가 낯익은 느낌인데?, 혹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대사? 느껴본 듯한 성격?이라고 느끼셨다면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자.. 먼저 가장 고난도인 8점 짜리~ 주인공 중 한 명은 유약하지만 자애로운 인상과 공손한 말재주로 눈치 안보고 공짜술을 마실 정도로 사람을 끄는 능력이 있고,
나머지 한 명은 용맹이 하늘을 찌르고 엄청난 힘과 무공을 가지고 있으며, 아끼는 사람이 아프면 같이 마음 아파하고 음식을 보내어 위로할 정도로 인정이 있어 사람들이 따릅니다.
모르시겠습니까?
그럼, 5점짜리 나갑니다~
주인공 중 한 명은 넘치는 덕으로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사, 전쟁을 치뤄도 성은 점령하되, 백성은 살려주고, 그 곳의 성주도 존중해주어, 어떤 성에는 도착하기도 전에 성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어 모든 성을 점령하는데 그 시간이 열흘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무공은 강하지만 가는 족족 다 부수고, 죽이며, 불을 지르고 초토화 시켜서 백성들이 그의 출몰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결사항쟁을 하니 성 하나 하나 점령하기가 매우 힘들고, 시간이 많이 들어 군사들이 지쳐갑니다.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자, 그럼 마지막 2점짜리~
주인공 중 한 명은 원래 술 마시고 여자들이랑 노는 것 외에는 할 줄 모르는 한량이었으나 시대의 흐름에 눈을 뜨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인재들과 협력하여, 결국은 멸망한 진나라 이후 다시 전국 통일의 대업을 이룹니다.
나머지 한 명은 역발산 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의 뛰어난 무장이었으나 한 가지 실수에도 잔인하게 사람을 잘 죽이고, 진정한 충고를 하는 이의 말을 믿지 못하여 마지막 순간에는 패하여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자, 이젠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소설 초한지에서 진나라 말기 난을 일으켜 한나라를 세운 한 고조 유방과, 초 패왕 항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태왕사신기에서 연호개는 항우, 담덕은 유방과 흡사하다는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연호개의 용맹성 또는 잔인함을 보여주는 이런 장면은 항우를 연상하게 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는 황제 담덕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바치려 한다는 것은 유방의 리더십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게다가 태왕사신기 19회를 보다 보니 이런 대사가 나오는 게 아닙니까.
"담덕 폐하가 지나가는 길은 백성들이 성문을 열어놓고 기다려 싸울 필요도 없이 성을 점령하였는데, 연가려의 자제인 연호개장군은 가는 곳마다 불을 지르고 백성을 잔인하게 죽여 모든 이가 두려워하고 있다."
보는 순간 '어? 저건 초한지의 대사인데?'라고 생각한 것은 저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만일 작가가 표절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두 캐릭터는 항우와 유방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들어가지 않고는 저렇게 유명한 작품의 상황과 대사를 거의 똑같이 쓸 수는 없을 테니까요.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나 소설 초한지(楚漢誌)에 보면, 항우와 유방의 그 유명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는데,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후, 15년뒤에 멸망하자, 전국은 난세가 되었고 각지의 소영웅들이 천하를 통일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격전장은 천하 무적의 맹장 항우와 사람 좋은 유방으로 판세가 나뉘었다.
항우는 초나라의 귀족출신이며 산을 뽑을 만한 장사였고, 유방은 평민 출신에 재주라고는 여자 후리는;; 재주 밖에 없던, 내가 싫어하는 역사 인물 중의 한명인 사람이다. 그런데 장수로서도, 학자로서도, 지략가로서도 모자란 그가 어떻게 항우를 이길 수 있었는가?
어딘가 모자라보이는 유방과 장비가 생각나는 항우.
그것은 사람을 모으고 다스릴 줄 아는 그의 리더십 덕분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일화 하나.
어느 날 한나라 고조인 유방이 대장군인 한신에게 물었다. “경이 보기에 짐은 군사를 얼마나 거느릴 수 있다고 생각하오?”
한신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족히 십 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실 수 있으십니다.”
“그럼, 경은 얼마나 거느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 신은 족히 백만대군을 통솔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방이 낯을 붉히며 다시 묻는다. “그러면 어찌해서 경이 짐의 밑에서 대장군으로 있는가?”
이 물음에 한신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수십만 대군을 통솔할수 있는 뛰어난 장수들을 수 백 명 거느리실 수 있으시지만 신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방과 항우는 사람 부리는 기술이 달랐다. 유방이 유수한 장수들과 지략가들을 수하에 두지 못했다면 혼란의 시기에 역사적인 라이벌 항우를 꺾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히 못했을 것이다.
유방은 실수를 해도 너그럽게 봐주었으며, 적이라도 투항을 하면 믿어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었다고 한다. 반면, 항우는 논공행상을 함에 있어서 덕이 없었고, 한 가지 실수를 하면 잔인하게 죽이고야 말았다고 하니 난세에 유방같은 사람 아래에 있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라, 유방은 장량, 한신, 소하 등의 뛰어난 인재들을 두게 되었고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항우가 자살하기 전 남긴 시.
유방의 군사에게 쫓겨 해하(垓下)의 절벽으로 내몰린 항우는 사랑하는 우미인과 부하 장수들과의 마지막 이별의 술자리를 베풀게 된다. 이 자리에서 항우는 자신의 절박한 처지와 우미인의 안전을 걱정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이것이 바로 ‘해하가(垓下歌)’이다.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아낼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만한데
時不利兮騶不逝 형편이 불리하니 오추마도 나아가질 않는구나
騶不逝兮可奈何 오추마가 나아가질 않으니 내 어찌할 것인가
虞兮虞兮奈若何 우미인아 우미인아 너를 어찌할거나
근데 이건 좀 심하다 싶네요. 담덕은 '초한지 유방의 사람끄는 재주 + 삼국지 유비의 자비심 + 원탁의 기사의 정의감 + 백마탄 왕자님의 이미지'까지 갖추고 있으니... 이쯤 되면 이건 사극도 아닌, 환타지 드라마보다 더한 환타지입니다요. 그들은 '광개토대왕의 일대기를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거창한 홍보와는 달리 송지나 작가는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일본 아줌마들을 위한 팬시상품으로서 완벽한 인간형을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이런 방법 밖에 없었을까요?
만인이 우러러 보기 위해서는 이렇게 완벽한 인간형을 만드는 방법 밖에 없었는지... 치밀하고 입체적인 인물을 만드는 것은 무리였을까요? 도대체 담덕의 그 끝도 없는 정의로움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이 사람은 처음부터 귀중한 핏줄로 태어났고, 출생부터가 고귀해서 마음씨 또한 남다르게 곱다는게 이 드라마의 주장입니다. - 이런 설정은 고대 소설에서 자주 나옵니다. -
저는 이 무모할 정도로 착하기만 한 인물에게 매력도 못느끼겠고, 그렇게 고운 마음씨로 어찌 그 광대한 영토를 점령할 수 있었는지 납득이 안갑니다. ㅡㅡ;; 모든 성주들이 담덕의 미소 한방에 마음을 뺏긴 것인지.
(진짜 징기스칸 같은 광개토대왕을 보여주면 일본 아줌마들이 등을 돌릴까봐 그랬겠죠. 어쨋든, 욘사마에서 욘달프, 뒤이어 욘골라스로의 변신은 이야기의 완성도를 떼어놓고 봤을 때는 성공한 것 같네요.)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욘골라스
사신의 각성은 담덕의 포샵을 위한게 아닐까?
얼짱 각도로 완성.
음.. 애초에 배용준이 캐스팅 됐을 때부터 ↓이런 모습↓의 광개토대왕을 기대한 건 저의 오산인 듯 합니다. ㅠ.ㅠ
항우와 유방 책에서 항우 삽화
초한지야 워낙 유명하고, 패왕별희 또한 항우와 우미인을 소재로 한 것일 정도로 인기가 있었으니 그와 비슷한 인물 설정이 나올 수는 있지만,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고, 게다가 초등학생용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내 편 아니면 나쁜 놈' 식의 이분법 말고, 두 명 다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릴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요즘은 초등학생용 위인 전기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기만 한 인물은 나오지 않는데 말입니다.
(한 명은 출신부터, 외모, 심성까지 완벽하고,한 명은 너무 패덕하게 그리면 재미가 없잖아요.-_-; 발리에서 생긴 일의 정재민과 강인욱처럼 각자 다른 매력을 뽐내도록 했으면 좋았을 것을...)
뭐... 어쨋든 제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광개토대왕님을 순정만화의 왕자님 쯤으로 변신시켜놓고, 민족의 자긍심 따위는 흑주작의 날개 속에 감춰버린 태왕사신기에게는 분하고, 제작진들도 화가 나고 섭섭하지만.. 청순담덕의 미모와 화려한 특수 효과를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 간의 재미는 보장하고 있는 드라마이니.. 아무쪼록 일본에 비싼 값에 팔려서 국위 선양(?)하기를 빌어야겠습니다.
한국 사극 역사상 가장 많이 다뤄진 왕은 누구일까? 조선왕조 비운의 왕인 10대 연산군과 14대 광해군, 19대 숙종이다. 세 군주는 모두 장녹수, 김개시, 장희빈이라는 희대의 요부를 만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드라마틱한 소재의 왕으로 각광받아왔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로 어릴적 어머니(폐비 윤씨)를 잃고 외톨이로 자라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2번에 걸친 사화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 또 그로 인한 폐륜 등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실록이 아니라 일기라는 초라한 이름으로 남아있는 연산군 일기
그리하여 역대 연산군에 대해서 써보고 싶은 욕심은 있었으나 차마 엄두가 나지 않던 차에 아주 좋은 게시물 하나를 발견했다. 이글루 블로그의 이준님이 쓰신 '역대 연산군 모음집'이라는 글인데 내가 쓰려던 주제와 제목까지 거의 똑같다.ㅋ 여기에 사진과 영상을 적당히 덧붙여서 보는 재미를 더하고자 한다.
박종화씨의 "금삼의 피" 원작 '폭군 연산'이 있지요. 여기서는 신영균씨가 우리들의 연산군으로 나와서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사실 신영균씨가 의외로 연기를 잘하는데 이쪽은 영 매너리즘이었고 (세트도 압박) 다만 폭군이 된게 어머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이라는 월탄 선생 전통의 해석으로 나갑니다.
처음에 신영균인줄 알고 잘못 가져온 이미지(김진규)
신영균의 연산군
역시 압박중에 하나는 연산군 졸개 내시가 무려 "김희갑"이었고 -_-;;;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낀 연산이 자신이 죽인 모든 사람들을 사면 복권하고 장녹수같은 쪽을 내쫓고 충신들을 다시 쓰려고 마음먹은 바로 그날 중종반정이 일어난다는 설정이지요 -_-;;;; 그래서 반정때 도망가면서 "내일 아침만 된다면.... " 운운하는 대사가 꽤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옛날 영화라, 므흣빵빵은 기대 안하시는게 좋지요 -_-;;;
2. 조선왕조 5백년 "설중매"에서의 연산은 견미리씨의 전남편 임영규씨가 했습니다. -_-;;; 성종은 국영방송판 대조영에서 보장왕을 하시는 길용우씨였지요. 항상 나라위해 머리쓰다 과로사한 성종의 아들인데, 어릴때부터 트라우마에 빠져 있는 쪽으로 나옵니다.
문제는 다음부터 나올- 신영균씨도 마찬가지지만 - 연산처럼 "첨에는 잘 나가다가 나중에 맛이 가는" 타입이 아니라 첨부터 개념 없는 아새퀴로 나와준다는 점이죠. 조선왕조 5백년 사상 - 사실 뭐 광해군 이희도도 꽤 폭군이 아니라 개념있는 임금으로 그렸으니- 최악의 캐릭터로 자리 잡을 정도이지요. 원작(그러니까 신봉승씨의 대하 소설)에 나오는 므흣빵빵은 안 재현했지만 재상들을 졸라 패고, 기생 이름 아니면 "폐비"라는 이름으로 시를 지으라고 협박치는 건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지요.
3. 영화 "연산군"이 제작될때 연산군을 무려 "이대근" -_-;;씨가 한다고 많은 솔로들이 가슴을 설렌적이 있었죠. 그러나 이게 낚시 중에 낚시인게 장녹수가 "강수연"이라는 점입니다. -_-;;; 강수연이야 영화에서 노출을 극히 싫어해서 씨받이 조차도 국내판과 해외판을 따로 편집할 정도였죠. 그러니 뭐 재대로 된 "그림"이 나옵니까 -_-;;;
여기서는 연산이 완전히 "부처님 가운데 도막"인데, 폐비 사사 사건을 수사하는게 무려 "장녹수"이고 그걸 수사하려는데 유력한 증인이 "선왕의 후궁"이 보낸 자객에게 수리검으로 살해당하는 압권도 보여줍니다. -_-;;; 후궁들을 손수 박살은 내는데 나중에 어느 노 대신을 팽형(진짜 삶는게 아니고 삶는 것처럼 하고 그냥 놔두는 형벌) 하려는데 대신이 자살하니까 끌어안고 울부짖습니다. 마지막은 폐위된후 (강화도는 안가고) 모친의 묘 앞에서 통곡하는 변강쇠 연산군...
4. 사실 안 알려졌지만 "연산일기"라는 걸작도 있지요. "왕의 남자"에서의 연산군이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신분들은 이 작을 안봤다고 자수하는 셈입니다. 사실 정진영씨의 연기 이전에 유인촌씨가 이 연기를 했거든요-_-;;; 감독은 무려 임권택 감독입니다. 여기서 앞부분은 "신료의 방해"로 인해서 자기의 큰 뜻을 펼칠수 없는 젊은 쾌남아 연산을, 나이가 들고 비밀을 안 후부터는 조금씩 미쳐가서 결국 칼리귤라 사촌으로 변신하는 모습이 극렬하게 나오지요. 맛이 간후부터는 "후회"라는것도 없지만 뭔가 쫓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진짜 광기 어린 연산군, 유인촌
결국 쫓겨난 후에 아버지의 유령 - 나오지는 않지만 - 에 덜덜 떨면서 화면을 응시하는게 마지막 장면이지요.
이 작 자체의 문제는 "유인촌"씨의 연기에 가린 나머지 다른 사람의 연기가 팍삭 죽었다는 점입니다. 내시 졸개를 무려 "김인문"씨가 했고 - 이 사람은 중종 반정 전에 연산군에게 홧김에 꼬치가 되버립니다.- 장녹수는 소시적 에로배우가 했지요(-_-;;;) 의외로 잔인하기는 잔인해서 참수장면이 그대로 나오고 신하들 모아놓고 방아찧으라는 장면과 찧기 싫으면 내가 찧겠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김처선이 이거 말리다가 죽습니다) 아, 그리고 방아장면은 안 나와도 방에서 돈 없어서 옷을 하나도 안 입은 여햏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춤추는 장면은 나와줍니다.-_-
5. 국영방송 사극에서의 연산군은 이덕화 옹이 주연한 한명회에서의 이민우와 장녹수에서의 유동근씨가 열연했지요. 한명회야 뭐 연산군은 한명회 사후에 나오니까 별 비중은 없고(명령 내릴 때 북치는 압박) 소리 지르는게 일입니다. -_-;;
19세의 어린 나이로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이민우
드라마 장녹수 오프닝
유동근씨는 좀 중후한 연기를 보여주는 편이지만 광기는 유인촌씨에 비해서는 영 아니었죠. 말년에 사이코가 된후에는 자신의 멸망을 항상 생각하는 그런 타입으로 변하지만 "완전히 미친"쪽은 아닙니다.
역시 어린 나이(20세)에 놀라운 연기, 왕과 비의 안재모
6. "왕의 남자"의 정진영씨는 개인적으로 유인촌씨 다음에 가장 연산군 연기를 잘했다고 봅니다.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에서의 해석을 그대로 살려서 서브스토리인 "공길" 이야기를 넣은거에요. 광기와 고민, 사모곡이 적절히 조합된 최고의 연산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태조께서 입으시는 푸른 옷을 입는지는 미스테리) 사실 석류 낭자나 안습 장녹수보다도 연산의 연기가 죽었다면 영화 자체가 훨씬 질이 떨어졌을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PS: 연산이 두 후궁을 죽이는 장면은 실록이나 연려실기술의 "퍼포먼스"가 있지요. 어린이들 보는 책은 정서상 "연산이 손수 박살냈다" 식으로 그립니다. (이대근이 주연한 영화나 왕의 남자 - 뭐 이건 칼이지만 - 는 그렇게 그립니다.) 조선왕조 5백년 부분의 그 장면은 제가 못봤는데 신봉승씨의 원작에서는 죽이고 "다 벗기"고 뼈와 살을 분리시킵니다(말 그대로) 연산일기는 벗기는 걸 빼고는 퍼포먼스를 그대로 합니다.
실록대로 연산군을 찍으면 한국판 칼리귤라가 나올듯 하지요 -_-;;;;
유인촌씨는 서울방송 개념 사극 임꺽정에서도 첫회에 연산군으로 나와서 철퇴로 후궁을 박살내줍니다. (임꺽정의 애인 기생이 장녹수의 딸이라는 설정이 있지요)
의외로 궁중 므흣물은 연산군 이야기가 아니라 이두용 감독의 "내시"이지요. 원래 신상옥 감독이 만든 작품(박노식-신성일이 나옵니다.)인데 감독이 공화국에 간 후에 이두용 감독이 에로 에로로 만들었지요. 여기서 무려 길용우씨가 절대 정력의 왕으로 나와서 이미숙씨에게 허무하게 죽습니다. -_-;;;
왜 연산군마저 살리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기사 역시 "왕권강화"와 실록 운운인데 연산군 미화하는 분들의 공통점은 "실록은 졸라 허술하다"는 겁니다. 실록이나 다른 조선시대 기록을 교차검증 안하시는 건지 뭔지 -_-;;
그리고 박정희는 그렇게 싫어하시는 분들이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이나 할 이야기를 연산군 미화때 동원하는건 뭔지, 이환경씨처럼 제국이면 하악하악인가? - 글구보니 국영방송 장녹수도 좀 이런쪽이었고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연산군 미화 책은 소시적 이x 범의 원균 정론만큼이나 아스트랄의 영역을 넘나드는 책이지요. 두 후궁은 사실 연산이 죽인게 아니라 "자살"했는데(왜?) 후세 사람들과 사관들이 연산이 죽인걸로 조작했다는 - 근데 자살했다는 기록도, 전설도 없잖아? 실록의 일시 추정 - 헉 김전일?!! - 으로 봐서 죽인게 아닌데 죽었으니 자살이라는 논리- 스토리는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듯.
현재 방영 중인 SBS 사극 왕과 나에서 얼마 전에 연산군이 태어났다. 성인 배역을 누가 맡을 지는 모르지만 역대 연산군의 명성에 맞는 연기자가 탄생하길 바란다. 장성한 연산군이면 유인촌 수준, 젊은 연산군에 이민우 수준이면 내 욕심이 너무 과한 건가?
미국 HBO 방송국에서 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도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드라마 섹스앤더시티(Sex and the City). 이 드라마가 끝날 때 쯤에는 먼 타국의 나까지도 서운할 정도였으니 그 인기가 엄청나긴 했다.
집안 좋고, 유능하고, 이성에게 인기도 많은 너무도 잘난 그녀들.
주위 사람들의 열렬한 추천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이 너무 늙고 매력없다며 거부하다가 몇 년 후에야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이다. 내가 처음 본 에피소드의 내용이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캐리의 나레이션이 여성과 남성의 상반된 심리를 너무도 콕콕 집어주는 것과 네 주인공의 우정에 반해서 그 뒤로 빠져들게 되었다.
(말이 4 주인공이지 캐리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다는 것은 공식 홈페이지만 가봐도 알 수 있다.)
증거 자료 ↓↓↓↓↓↓↓↓↓↓
캐리로 도배된 홈페이지
하지만 처음에 캐리를 열렬히 응원하고 동감하던 나는 점차 그녀를 싫어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배역이 아니라 배우까지 미워하게 됐는데 그것은 캐리가 너무도 이기적이고 얄미운데다, 사라 제시카 파커도 철저히 자기 중심적으로 이야기를 꾸려가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내에서 4명의 주인공들은 서로 사이가 아주 좋은 것처럼 보여졌지만 실제로 그녀들은 서로간의 인기에 대한 알력과 캐릭터 묘사에 대한 불만으로 그리 다정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번번이 영화화가 중지된 것도 사라 제시카 파커에 대한 킴 캐트럴의 불만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라가 제작자가 됨에 따라, 캐리는 항상 현명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거의 상반신도 드러내지 않는 조신한 모습만을 보여주는는데 비해 사만다에게는 정말 sex에 미친 것처럼 아무하고나 그 일에만 몰두했고, 걸핏하면 거의 알몸에 가까운 노출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러니 나이도 제일 많고, 인기도 올랐겠다~ 짬밥 좀 쌓인 킴 캐트럴 입장에선 '죽고 싶냐?'-_ㅡ+++ 라는 반발심이 생길 수 밖에.
서론이 좀 길었다만.. 이쯤에서 캐리의 만행을 밝혀보자!!
1. 지는 지 친구들이랑 게이 남자친구한테 맨날 지 이야기 다 퍼부으면서 정작 남이 이야기 하면 관심없이 대충 듣고 반응 나쁜 거
2.미란다 샤워하다 목 다쳤을 때 지가 직접 안가고 욕실 안에서 벌거벗고 있는 미란다한테 인심쓰는 척 에이든 보내는 거. (어떻게 친구가 벌거벗고 있는데 남자친구를 보내냐고?)
3. 미란다가 애기 때매 외출 못하니까 생각해주는 척 하면서 파이 하나 사가지고 가서 결국은 지 이야기만 늘어놓기. (그 파이도 미란다가 좋아하는 소스(?)는 쏙 빠졌음. 왜? 지는 어차피 미란다를 진심으로 위한 게 아니었으므로.)
4.지가 몰라서 컴퓨터 고장난 건데 에이든이 컴퓨터 고쳐줬을 때 만만한 에이든한테 온갖 화풀이 다 하는 거.
5.지가 구두 산다고 돈 다 써놓고 에이든과 헤어진 후 집 살 돈 모자라니까 트레이랑 이혼 후에 아직도 트레이 못잊고 있는 샬롯한테 가서 왜 나한테 돈 안빌려주냐고 따져서 결국 샬롯한테 결혼반지 받아낸 거. (누가 그 돈 다 쓰랬냐?? 니 구두에 쓴거잖아?? 구두 팔아서 안고 살든지??)
6. 그녀가에이든한테 준 수많은 상처들.
에이든 같이 착한 남자는 만만하다는 이유로 요만큼의 배려도 해주지 않고, 에이든과 사귀는 중에 유부남인 빅이랑 몇 번이나 자고 온거, 에이든한테 가서"You must forgive me!!" 라고 울고 불고 매달린다-_-;
에이든이랑 시골에 놀러가서 다람쥐 한 마리 보더니 징그럽다고 소리 꽥꽥 지르며 난리법석을 떨며 화내놓고 (당최 배려를 몰라.) 여자친구랑 헤어진 빅 초대해서 결국 빅이랑 에이든이랑 한판 붙게 만든다-_-;;
자기가 바람펴서 에이든에게 다시 잘해보자고 해서 룰루랄라~~ 잘 나가다가 결혼하자는 에이든에게 또 온갖 짜증을 내더니.. 거절해서 결국 헤어진다.
이런 남자를 차다니..
7. 에이든한테 몇 번 씩이나 그렇게 상처주고 헤어진 후 얼마 되지도 않아서 빅이 뉴욕에 떠난다니까 피자 사들고 가서 플레이보이지 모델을 연상시키는 옷차림으로 가서 살랑 거리고 마지막 기념 섹스할 지 기대하는 거.-_-;; (X욕이 절로 나온 장면.)
이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 좀 잘생기긴 했지만-_-;;
8. 지 책 사인회 때문에 그 먼 곳까지 싸구려 기차로 고생 고생...시키며 사만다를 데리고 그 곳에 갔다가...빅을 만나자,,, 지 섹스하겠다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샤워 중인 사만다를 내쫓은 거..
그러면서 돌아오는 길에도 다시 싸구려 기차 끊네?? 사만다가 비행기표 끊더라ㅡㅡ;;
9. 이외에도 지 이야기 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전화해서 미란다 애가 울든 말든 온갖 이야기 다하고.. 미란다가 그렇게 고생해도 한번도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미란다가 애 울어서 전화 통화 못하겠다고 하면 인상 쓰는 거 등등...
띄엄띄엄 볼 땐 몰랐는데 하도 반복적으로 해주니 예전 것들까지 오버랩 되서 무지하게 얄밉네..ㅡㅡ ;; 나중에 캐리가 잭 버거라는 남자한테 채일 때, 그것도 포스트잇으로 이별을 당할 때 어찌나 고소~하던지.
잭 버거가 남긴 포스트잇.
내 주위에는 캐리가 멋있다며 캐리의 대사를 인용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때의 내 심정은.. "니가 한 번 당해봐-_-++" 였다.
그 중 한 명은 캐리의 행동이 너무나 이해된다며 '자기랑 똑같다.' 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난 결국 그녀들이랑 헤어졌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행동이 진짜 캐리와 똑같았기 때문이다.-_-;;
3. 내 블로그는 얼마나 많이 링크되어 있을까? (Zet님 블로그 참조) 내 블로그가 다른 곳에 링크된 숫자로 순위를 매기는데.. 나는 D등급과 low authority blog의 압박;;을 느꼈지만 '보름도 안된 블로그니까..' 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 D는 기본 등급인줄 알았는데 이것도 최근 6개월 동안에 3~9개의 링크가 되어야 주는 점수니 나름 뿌듯하다. ^^
다음(daum.net)도 7점이 나오는 마당에 무려!! 4점이 나오신 Zet님의 블로그에 존경을..ㅜㅜ (나도 혹시나 해서 예전 운영하던 싸이트를 넣어보니 3점이나 나왔다.)
5. 내 블로그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Zet님 블로그 참조) 이것은 해외 블로거들이 얼마나 구독하는지에 따라 수치가 많이 좌우되므로 크게 상심하지는 말자고 위로하면서.. 점수가 높기를 기대했지만... 형편없이 낮았다. 그래도 며칠 사이에 좀 올랐구나!! 이것 역시 예전 싸이트가 조금 더 높게 나왔는데, 순위 옆의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순위별 목차라면 아래로 내려갈수록 적어져야 하는데 금액이 왜 하향정렬 되지 않는지 궁금하다.
측정 후기. 1. 내 블로그는 아주 형편없이 낮은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변방의 영세 블로그임을 재확인. 2. 대부분의 게시물이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에 맞춰진 잡탕찌개 임을 감안할 때 앞으로도 유명 블로그 되기는 글렀음. 3. 님들도 얼른 해보시고 저와 변방 동아리를 만들어서 해피 투게더 해보아요~♪♬ ^^ㅋㅋ 4. 많은 도움 주신 Zet님 감사합니다. :)
내 블로그에 누가, 어디서, 어떤 경로로, 왜 오는지 궁금했던 나는 그래프를 살피던 중,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대한민국_기타 7.1%와 알 수 없음 2.5%??
대한민국에 모를 곳이 어딨어.
아니.. 이거 뭔가 이상하다??!! 대한민국 내의 기타도 아니고, 대한민국 외의 기타?? 게다가 알 수 없음?? 마침 며칠 후에 구글 Analytics에도 가입했기 때문에 구글로 갔는데... 거기서 뽑아본 리포트는 더 황당하다.
미국, 일본, 중국, 호주... 더 나아가서 체코, 카자흐스탄, 인도네시아;;;;;에서 이 곳을 찾아오다니..
유명하지도 않은, 링크수도 몇 개 없는 이곳을 누가 찾아왔을까?
오..나는 글로벌 네티즌~
아니.. 해외에서 이 블로그에 온 사람이 저렇게 많단 말인가!! 그것도 한 두 나라도 아닌 범 지구촌적인 저 분포를 보라~!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길래... 저 머나먼 곳에서 오셨나요?? 누구세요?? 너무 궁금합니다.ㅜㅜ
혹시라도 다시 찾아올 해외 동포(?) 여러분을 위해 한 마디 해야겠다.!
Who in the world are you (from abroad)? Please leave a message!! Say something or anything please...T.T Would you say the word, "Hello~" to me please??
최근에 정조대왕 사망 당시의 정황을 가공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다룬 드라마 '한성별곡'과, 세손 시절로부터, 영조 사망 이후,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는 과정까지를 포함한 '이산', 케이블 TV CGV에서 10월 말부터 시작한 드라마 '정조 암살 미스테리 8일'(이하 8일)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방영되는 것을 보며, 언론에서는 '정조 열풍'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내면서 열심히 비교하고 있는데 나 역시도 '누가 제일 나을까, 어떤 사람이 잘 어울릴까, 각자 어떻게 다룰까?'에 대해서 궁금했으니 사람 심리는 다들 비슷한가 보다.
한성별곡은 제대로 보지도 않았고, 이산은 진행 중이고, 8일은 이제 막 시작했으니 제대로 된 작품성 비교를 하기에는 이른 것 같고, 단지 주요 인물들의 외형적인 이미지에 대해서 느낀 점만 적어 보련다.
1. 정조
한성별곡 : 안내상씨는 음란서생에서의 찌질한 임금 역과 소문난 칠공주에서의 찌질한 재혼남(왕선택?) 역 때문에 한번도 멋있다는 생각은 안했는데 한성별곡에서는 고뇌하는, 한맺힌 정조 임금을 잘 표현한 것 같다.
8일 : 김상중씨는 늘 좋은 연기자라고 생각했지만 근래 들어서 두사부일체 시리즈 + 내 남자의 여자에서 매일 감자타령, 밥타령하는 바람난 교수 역할 때문에 왠지 모르게 좀 웃겼지만 역시 연기파 답게 뭐든지 잘해내신다. 사진만 봐도 카리스마가 좔좔.
이산 : 이서진씨는 다모에서말고는 한번도 멋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사극 맵시는 역시 기대 이상이다. 안내상씨는 단순히 지적인 문인군주로서의 모습만 보여주었다면, 이서진씨는 다재다능한 무인군주로서의 모습도 손색없이 잘 어울린다.
2. 영조
한성별곡 : 안나오심.
8일 : 한중록에 나온 이미지와 비슷한 변덕스럽고, 치매끼 마저 있는 이미지를 고른 것 같다. 영조는 그간 사극에서 굉장히 정없고 노망끼 넘치는 모습으로만 그려졌는데 이런 인식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
이산 : 내가 상상하던 영조의 모습과 가장 흡사하다. 혈육의 정에 이끌리면서도 경종 독살설이라는 원죄의 중심에 서있는 만큼 권력 앞에서는 냉정한 모습, 신하들 앞에서는 노회한 정객 + 백성을 두루 살피는 어진 임금. 세손 입장에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자 그나마 기댈 곳.
3. 정순왕후
한성별곡 : 내 생각과 좀 달랐다. 정애리씨의 연기나 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었지만 너무 대놓고 사악한 이미지라서 다소 위화감이 들었다.
8일 : 아직 못봤다. 보고 나서 추가 예정.
이산 : 여기서의 김여진씨 모습이나 이미지는 전혀 상상도 못한 이미지인데, 정말 설정을 잘 한 것 같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달랐으니 영조가 확실히 속아 넘어간 게 아닐까.. (이건 작가의 생각인지 이병훈 피디님의 생각인지 궁금하다.)
4. 혜경궁 홍씨
한성별곡 : 안나왔음.
8일 : 정애리씨.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같은 시대를 다룬 사극 한성별곡에서는 정조를 해치려하는 정순왕후로 출연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얼마 전의 드라마에 한 번은 양계조모(양 새 할머니;;)로, 한 번은 정조의 친모로 나오니 이것도 재밌는 인연이다. 그런데 우찌된 것이... 정순왕후로 나올 때랑 별 구분이 안된다. 작가들은 더이상 혜경궁 홍씨가 '하늘아 하늘아'에서 하희라가 맡은 불쌍한 피해자로만 보이지 않는가 보다.
이산 : 대장금의 최고 악역 최상궁으로 나왔던 견미리씨. 그녀는 피해자가 가해자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다. 그저 남편에 대한 태도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세손에 대한 모정만은 살아있는 어머니로 나오는데, 이는 제작진들이 그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5. 정조(세손) 암살 혹은 각종 꿍꿍이를 꾸미기 위한 회합 장면
한성별곡과 이산에서 보여주는 구도가 거의 똑같은데.. 이는 고증인지(우째 알고?) 아니면 우연히 겹친 것인지, 아이디어의 부재로 복제한 것인지 궁금하다. 어쨋든 둘 다 멋있지만 멀리서 보여주는 구도는 한성별곡이 한 수 위, 가까이서 긴장감 조성하는 데는 이산 승.
이산 회합장면
한성별곡 회합장면
6. 드라마 포스터.. 셋 다 멋있다.
얼핏 본 바로는 세 드라마 모두 색감에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아름답고 우아하다. 어두운 시대의 비밀스러운 사건을 다루기에 극의 분위기도 차분하고 잔잔하다. 형광등 켜논 듯한 S사의 사극팀은 이런 것 좀 배워야 할 것 같다.
한성별곡 : 정조가 주인공이 아닌 만큼 사랑하는 세 남녀를 내세운 슬픈 분위기를 보여 주고,
그간 티스토리를 욕하는 글만 무려 3개(씩이나!!!) 올려놓고... 얼마 되지도 않아 '티스토리의 좋은 점'으로 글을 쓰려니 참으로 내가 간사스럽게 느껴지긴 하지만... 옛말에 '채찍과 당근을 두루두루 애용하라'고 했으니, 어쩌겠는가. 이게 사람 사는 이치라고 생각하며 며칠간 느낀 티스토리의 좋은 점을 적어보려고 한다.
뭐.. 내가 이렇다는 건 아닙니다만.쿨럭;;
1. 아시다시피 티스토리는 용량 제한이 없다. 올리고 싶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파일을 무한 업로드 할 수 있다. 파일 숫자도, 파일의 용량도!! (한 파일당 10메가 이하만 지켜주면), 동영상의 길이도 제한이 없다. 하루에 100개를 올려도 좋다.!! 네이버의 하루 20메가, 다음의 사진 갯수 20장 제한에 막혀서 좌절하신 분?? 널리 블로거를 이롭게 하는 티스토리로 오십시오.
2. 티스토리는 도메인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2차 도메인을 만들면 tistory가 표시되지 않아 그야말로 설치형 개인 홈페이지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 도메인으로 등록을 하게 되면 네이버나 구글같은 대형 포털 싸이트에서 검색도 더 잘된다. 게다가 공짜다!! 이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우리 모두 대머리 되지 않는 한도에서 공짜를 마음껏 즐겨보자!!
또한 다음은 한번 블로그 주소를 정하면 바꿀 수 없고, 네이버는 아이디가 자동으로 블로그 주소로 사용되는데, 티스토리는 싸이월드처럼 블로그 주소를 언제라도 바꿀 수 있다. (단, 주소 변경에 따라 검색률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3. 티스토리는 자유롭다. 설치형 블로그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html 태그를 잘 다루는 사람들에게 특히 유용한) 스킨 디자인이나 사이드바, 레이아웃 등의 외형적인 자유로움 외에도, 대형 포털 싸이트의 가입형 블로그처럼 운영자의 간섭을 받지 않으므로 내형적인 자유로움까지 만끽할 수 있다.
4. 티스토리에는 스팸 블로거가 적다. 초대형식으로 가입이 되는 티스토리는 자유롭게 가입이 가능한 포털의 가입형 블로그에 비해 스패머가 훨씬 적다. 물론 초대 받고도 스팸하는 사람 있습니다.-_-;; 이런 사람은 초대한 사람이 신고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 스팸 차단이 비교적 쉽다.
5. 티스토리의 관리자 기능은 매우 독특한 것이 많은데 그 중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 '댓글에 댓글 달기'이다. 이것은 편리한 동시에 댓글 단 사람을 일일이 찾아서 달지 않으면 그 사람만 무시한 것 같아 책임감이 생기게 한다는 단점도 있다. ㅋ 굉장히 편리한 기능인데 다음도 되는 걸 보면 티스토리가 다음에서 배워왔나 싶기도 하다..
다음의 댓글에 댓글 달기
티스토리의 댓글에 댓글 달기
6. 티스토리는 댓글 알리미가 있어서 티스토리나 태터툴즈 블로그라면 자신의 댓글에 답댓글이 붙은 것을 알려준다. 자신의 블로그 관리화면에서 바로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이제나 달렸을까? 저제나 써줬을까?' 안절 부절하며 자신의 행적을 두번 세번 확인할 필요가 없다. 또한 자신의 블로그에 달린 댓글까지도 모두 알려주어 (혹시라도) 댓글이 많을 때 방문자들의 소중하고 고마운 댓글을 못보고 답을 달지 않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게 도와준다.
티스토리의 댓글 알리미
네이버에도 이와 유사한 서비스로 내가 남긴 덧글/안부글 보기 기능이 있지만, 내 댓글에 답글 추가 여부를 알 수 없어서 여러번 확인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으므로 티스토리 댓글 알리미 기능에 비하면 발톱에 때만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의 내가 남긴 덧글
7. 티스토리 관리자 기능은사용자에게 매우 다양한 선택권을 제공한다. 한쪽당 몇개의 글을 보일 것인지, 목록을 몇개 보일 것인지, 댓글과 트랙백 수까지 모두 설정할 수 있다.
8. 티스토리의 관리자 기능 중에 가장 신기했던 것은 바로 유입 키워드와 유입 경로였다. 방문자가 어떤 단어를 검색해서 자신의 블로그에 방문했는지, 어떤 경로(다음, 네이버, 직접 주소 입력 등)로 왔는지까지 다 알려주니 다른 미니홈피를 운영할 때 그간 항상 궁금했던 무엇을 보러 왔을까.라는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9. 티스토리 블로그에서는 자신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블로그 아이콘과 인터넷 익스플로어 주소창의 파비콘을 설정할 수 있다. 큰 장점이라 할 수는 없지만 처음 맛본 사람에게는 매우 신기하다!!
파비콘과 블로그 아이콘이 적용된 모습
10. 티스토리에는 퍼가요~♡ 라는 댓글이 없다.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글쓴이를 열심히 읽고, 열심히 댓글을 단다. 블로그란 싸이의 확대판 미니 홈피 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진지한 댓글 폭탄들은 문화 충격이었다. 물론 무단으로 남의 글을 싹 복사하는 사람들도 많은 마당에 퍼가요.라는 댓글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글에 대한 진지한 댓글을 서로 주고 받는 것이 블로깅의 더 큰 매력이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네이버에서 가장 매너좋은 댓글들
11. 티스토리의 좋은 점 또 하나는 티스토리 운영자가 친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거한 것이니 협소한 시각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최소한 나의 경험 내에서는, 사용자의 불만이 무엇인지 파악에 애쓰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 최소한 적극적으로 노력이라도 하는 모습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12. 광고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티스토리의 많은 파워 블로거들이 구글 애드센스, 다음 애드클릭스 등의 라는 광고를 유치함으로써 수익을 얻고 있으며 티스토리로 옮겨오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외에도 티스토리의 좋은 점이 생각날 때마다 계속 추가할 예정입니다. (계속 수정 중. :)
조선왕조 12대 임금인 인종(재위 1544∼1545년)은 연산군을 쫓아내고 즉위한 중종의 아들이다. 그가 조선의 임금 중 최초로 독살설에 휘말린 데는 후사를 둘러싼 궁중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다.
중종이 반정을 일으키기 전의 잠저(潛邸) 시절 첫 부인은 신씨였다. 신씨의 아버지는 연산군 시절의 우의정 신수근이었는데, 반정공신들은 그를 연산군의 처남이란 이유로 죽여버린다. 신수근을 죽여버린 반정공신들은 후환이 두려워 중종의 첫 부인 신씨를 내쫓고 새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한다. 그녀가 바로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다. 그러나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 10년(1515)에 중종의 첫 아들 호(인종)를 낳았으나 산후 조리에 실패해 25세에 죽어버렸다. 인종은 태어난 지 엿새 만에 어머니를 잃은 것이다.
중종은 2년 후인 1517년 새로운 여자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데 그녀가 조선의 왕후 중 두고 두고 구설에 오르는 문정왕후 윤씨였다. 인종의 독살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인이기도 하다.
파란은 문정왕후가 중종의 둘째 아들 환을 낳으면서 시작된다. 환은 세자 호보다 열아홉살이 어렸다. 따라서 세자 호가 살아 있는 한 문정왕후의 아들 환이 임금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 호가 세자로서 보위를 잇게 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자 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들이 없는 것이었다. 세자의 계모 문정왕후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세자가 후사없이 죽는다면 문정왕후 소생인 환이 즉위하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1544년 38년간 재위한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했다. 나이 서른살의 젊은 왕이었다. 그러나 인종은 보위에 오른 지 불과 9개월 만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역대 조선 임금들 중 가장 짧은 치세 기간이었다. 인종은 왜 그리 빨리 죽었을까?
정사인 『인종실록』은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야사(野史)들은 어김없이 계모 문정왕후가 독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중 한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매번 인종을 핍박하던 대비 문정왕후 윤씨가 하루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떡을 내놓았다. 인종은 계모 윤씨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반겨주는 것에 감격해 그 떡을 먹었는데 그날부터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사실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 독살설은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인종이 죽자마자 사화(士禍)가 재발했기 때문이다. 명종 즉위년에 발생한 을사사화(1545)가 그것이다. 조선 초·중기는 「훈구파」라는 구정치세력과 「사림파」라는 신정치세력의 정권을 둘러싼 각축이 심했다. 사화란 집권당인 훈구파가 야당인 사림파를 공격하는 정치 탄압을 말한다. 그런데 중종 때의 기묘사화 이후 거의 종결됐던 사화가 인종 사망 직후 다시 재연된 것이다. 인종이 승하하고 그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발생한 을사사화는 조선 사림파 사대부들로 하여금 문정왕후의 인종독살설을 사실로 믿게 했다.
그 배경에는 당시 대윤과 소윤이라 불리는 두 당파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다. 대윤과 소윤은 각각 임금의 외척이었다. 대윤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아우인 윤임이 영수였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윤원로 등이 영수였다. 중종이 살아 있을 때 대윤은 장경왕후 소생인 인종을 지지했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을 지지했다. 또한 대윤은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를 지지한 반면 소윤은 사림파에 적대적이었다. 중종의 뒤를 이어 인종이 즉위한 직후 대윤이 정권을 잡아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다.
인종은 시종일관 사림파를 옹호했던 군주였다. 그는 왕위에 있는 동안 부왕 중종 때 발생한 기묘사화의 피화자(被禍者)들을 신원(伸寃)할 생각이었다. 인종은 중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조광조·김정 등 기묘사화 피화자들을 신원하려 했으나 갑자기 병색이 짙어지자, 『조광조·김정 등의 복관과 현량과(賢良科) 복과는 선왕 때의 일이므로 서서히 하려 했는데 이제 내 병이 이와 같으니 조광조 등을 신원시켜주고 현량과도 복과하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면서 그들을 신원시켜 주었다.
이렇게 인종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사림파들의 신원을 생각할 정도로 이상적인 사림정치에 대한 열망을 지닌 군주였다. 또 인품이 인자하고 학문도 높아 사림파로서는 기대를 걸 만한 존재였다. 그랬으니 인종의 요절에 대한 사대부들의 분노와 좌절은 더 컸다.
인종이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인물이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이었던 점은 인종 독살설에 더욱 불을 댕겼다. 명종은 당시 12세의 미성년이었으므로 대왕대비 문정왕후나 왕대비 인성왕후(인종비) 중 한 명이 섭정을 해야 했는데, 명종이 인종의 동생이었으므로 『형수와 시숙이 한 자리에서 정사를 볼 수 없다』는 이언적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모후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자마자 사화가 뒤따랐던 것이다.
인종 승하 직후 발생한 을사사화와 함께 상법(喪法)에 어긋나게 치렀던 인종의 장례도 인종독살설에 설득력을 갖게 했다. 인종의 장례는 이른바 「갈장(渴葬:임시로 빨리 장사지내는 것)」으로 집행되었다. 이는 소윤의 주장 때문이었다.
소윤 이기는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빨리 장사지낼 것을 주장했다. 이는 훗날 사가(史家)들이 인종에게 박하게 하는 것으로 문정왕후에게 아부했다고 비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소윤의 윤원형, 이기 등은 인종의 국상중에도 웃는 낯을 보여서 의기 있는 선비인 교리 정황(丁煌)이 『이 역적놈들을 보니 더욱 원통하다』고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분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을사사화란 철퇴가 날아들어 대윤과 함께 사림파가 화를 입게 된다. 을사사화는 윤임, 유관 등 대윤과 앞으로 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한 문정왕후와 소윤의 음모였다. 갓 세상을 떠난 인종의 시신이 궐내에 남아 있는 상황에 사화가 발생했고, 인종의 지지세력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실들이 인종 독살설을 신빙성 있게 만든 것이었다.
을사사화 2년 후에는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쓴 벽서가 나붙은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남은 사림파마저 주륙을 당했다. 이처럼 문정왕후의 섭정 기간은 사림파에게는 암흑의 나날이었고 그 어두운 세월을 횡행한 것은 『선왕(인종)이 독살당했다』라는 은밀한 소문이었다. 그리고 사림파는 문정왕후가 죽는 순간까지 분노를 삭이고 있어야 했다.
광해군과 선조 독살설
인종 독살설 속에서 자신의 아들 명종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한 문정왕후는 왕위를 손자에게까지 잇지는 못했다. 재임 기간 내내 어머니 문정왕후의 그늘에 가려 있던 명종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승하했는데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는 상태였다. 명종의 유일한 아들 순회세자가 13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더 이상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승하는 자연히 후사 문제를 발생시켰다. 선왕의 아들이 없으므로 종친 중에서 한 명을 임금으로 추대해야 했다. 평소 명종 내외와 친밀했던 중종의 서손자(庶孫子) 하성군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그는 중종이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낳은 덕흥군의 세 아들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방계 승통 시대가 열렸고, 그가 바로 선조였다.
자신이 방계 승통이라는 점에 대해 콤플렉스 가지고 있었던 선조는 정비(正妃)에게 낳은 아들로 후사를 잇는 것으로 그 콤플렉스를 메우려 했다. 그러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다. 반면에 후궁들로부터는 무수히 많은 왕자와 옹주를 얻었다. 여섯 명의 후궁에게 얻은 자녀는 총 13남 10녀. 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열세 명의 후궁 소생 아들 중에 누구를 후사로 삼느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런데 당시 선조는 또 다른 후궁인 인빈 김씨에게 빠져 있었고, 인빈의 둘째 아들인 신성군을 유달리 사랑했다. 선조는 어차피 정비 소생 원자가 아니라면 사랑하는 인빈 소생의 신성군에게 보위를 넘기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선조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력 정당이나 정치인들에게도 중요한 화두였다. 서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은 공빈 김씨의 둘째아들 광해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가 선조의 여러 서자들 중 가장 인품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에 정철을 영수로 하는 서인들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지지했다. 특히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은 신하들의 이런 의견을 직접 선조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정철은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됐는데 무슨 말을 하는가』란 선조의 꾸지람만 듣고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여기에는 동인인 영상 이산해의 계략이 있었다. 이산해는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기로 정철과 합의해 놓고서도 한편으로 신성군의 생모 인빈 김씨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 당신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충동질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인빈 김씨가 당일로 선조에게 이 사실을 호소했을 때만 해도 선조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정철이 실제로 신성군이 아닌 광해군을 세자로 주청하자 분노가 폭발해 귀양보낸 것이었다. 이로써 정권은 동인 수중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한해 전인 1591년의 일이었다.
동인은 임진왜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당이다. 일본의 침략 조짐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파견됐던 조선통신사 일행 중 정사인 황윤길은 『침략할 것 같다』고 보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전혀 침략의 조짐이 없다』고 상반된 보고를 올렸다. 양 의견 중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됐는데, 이는 당시의 집권당이 동인이고 김성일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와중에 권력을 잡는 쪽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이었다. 조식(曺植)을 종주로 모시는 북인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같은 의병장들을 다수 배출하여 명분에서 앞선 결과 집권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겨우 종결되자 집권당인 북인은 선조의 후사 문제를 놓고 또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했다. 이는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왕비가 된 인목대비 김씨가 1606년(선조 39년)에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비롯된다. 당연히 후계 문제가 복잡하게 꼬인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선조는 할 수 없이 조정 대신들의 중망을 들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세자 광해군은 조정을 둘로 나누어 맹산, 곡산, 이천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 끝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그 지위를 굳혔다. 이때만 해도 광해군이 보위를 잇는 것은 기정사실로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자국 사정 때문에 광해군의 세자 책봉 추인을 거부하자 선조와 일부 신하들의 생각이 달라지면서 세자 문제는 다시 미궁에 빠졌다.
소북 영수 유영경은 인목대비 김씨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과 손을 잡았다. 광해군을 폐세자시킨 후 영창대군을 세우려고 결탁했던 것이다. 영창대군을 후사로 세우려는 이 구도는 방계 승통을 극복하려는 선조의 열망과 맞물리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결국 이것은 세자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박해로 나타났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선조는 광해군이 문안할 때마다 『명나라의 추인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 행세를 하는가? 다음부터는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그때마다 광해군은 피를 토했다고 한다.
광해군의 승리
선조는 광해군을 내쫓고 영창대군을 세우려 했으나 세월은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선조의 병이 깊어진 재위 40년(1707) 가을, 서른네살의 장성한 세자를 폐하고 두살배기 아이를 세자로 만드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일이었다. 결국 선조는 광해군을 폐출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했다.
선조는 1707년 10월 병석에서 대신들을 불렀다. 광해군에게 전위한다는 교서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소북 영수 유영경은 선조가 자신만 불렀다고 하면서 원임대신(현직 정승)들을 모두 배제한 채 혼자 선조를 만났다. 선조가 광해군에게 전위할 뜻을 밝히자 유영경은 『금일의 전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뜻밖에 나온 거사여서 명령을 받지 못하겠습니다』라면서 명을 받기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소북인 병조판서 박승종과 공모해 군사를 동원해서 대궐을 에워싸기도 했다.
유영경의 이러한 월권 행위에 저격수로 나선 인물이 대북의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유영경이 전교를 거부한 것은 사당(私黨)을 위해 왕사를 버린 것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그러나 선조는 오히려 정인홍을 귀양보냈고 후사를 둘러싼 상황은 여전히 혼돈스러웠다.
후사를 둘러싼 선조의 결심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선조의 병이 재발했다. 선조 마지막 해인 41년 1월부터 다시 병세가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았는데 그해 2월1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어젯밤엔 편히 잠을 잤다』라고 말한 그날 오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죽음이 머리맡에 이른 선조는 광해군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광해군에게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듣지 말라』는 유서를 내렸다.
드디어 광해군이 승리한 것이다. 선조는 죽음에 이르러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말했지만 신하들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고 광해군에게 피를 토하게 한 인물은 바로 선조 자신이었다. 만약 선조가 시종일관 광해군의 지위를 튼튼히 해주었다면, 장남 임해군이나 적자 영창대군 모두 왕자로서 풍족한 삶을 누리다 세상을 뜰 수 있었을 것이다.
즉위한 광해군이 자신을 폐출시키려던 소북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광해군은 소북을 숙청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북에게 정권을 넘겼다. 정권을 장악한 대북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에 대한 강경책을 펴서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해 서궁에 가두었다. 이 와중에 나돈 소문이 선조독살설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당연히 숙청당한 소북과 세를 잃은 서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선조 독살설이 그리 광범하게 유포되지는 않았다. 선조가 죽기 전해부터 병색이 심각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사대부 모두 알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선조독살설이 조선 전역에 유출되고 사실처럼 전해진 것은 광해군이 쫓겨난 이후였다.
정철의 실각 이후 정권에서 소외됐던 서인들은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와 인목대비 폐위 등을 반사대·반윤리적인 행위로 규정짓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인조 반정은 대북 정권에 의해 서궁에 유폐됐던 인목대비를 화려하게 복귀시키는 무대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간 사랑하는 아들 영창대군이 비참하게 저세상으로 가는 비극을 맛보았다. 백년을 씻어도 씻기지 않을 한을 품은 그녀가 다시 대비로 복위한 것이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이 반정을 추인해 달라고 요구하자 인목대비는 광해군 부자를 죽이라고 요구한다.
『역괴(逆魁:광해군)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고, 그 적모(嫡母: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다하였다』
말하자면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민성징이 즉각 『지금 하교하신 사실은 외간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더욱이 선왕을 시해했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한 사실입니다』라고 되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별다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단지 아들을 잃은 여인이 한풀이를 위해 지어낸 말일 뿐이다.
하지만 대비의 입에서 직접 나온 선조 독살설은 서인의 반정 명분을 정당화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서인 편에서 볼 때 선조 독살설의 진위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선조 독살설이 광범하게 유포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인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야 어차피 구중 궁궐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재간이 없었다. 반정 정권은 선조독살설이 정권 기반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조직적으로 유포시켰고, 이것은 하나의 오도된 진실이 되어갔다.
소현세자의 이상한 죽음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 정권은 집권 후 외교노선을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했다. 만주에서 새로이 흥기하는 여진족의 후예들이 세운 후금(後金), 곧 청나라를 배격하고 한족(漢族)의 명나라를 좇자는 정책이 그것이다.
인조반정(1623년)이 일어날 즈음의 만주 정세는 극히 유동적이었다. 인조반정 한 해 전 청(후금)은 만주의 요지인 심양과 요양을 탈취했고 다음해에는 서평보(西平堡)를 장악했다. 청이 이처럼 기세를 올리는 동안 명나라는 내부 분란에 휩싸여 있었다. 귀주와 산동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혼란을 틈타 청은 급격하게 세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만약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정묘· 병자호란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과 청의 분쟁 와중에 조선의 위상과 국익을 한껏 드높였을지도 모른다. 반정 정권이 배청 정책으로 전환하자, 청은 명과 중원을 다투는 일전을 앞두고 조선 문제를 먼저 정리하려고 나섰다. 청군이 중원으로 남하한 틈을 타서 조선군이 공격해 온다면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되기 때문에, 만주를 기반으로 한 청으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처지였다.
이는 결국 두 차례의 침략을 불러왔다.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丁卯胡亂)과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그것이다.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는 12월의 혹한이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나라 군사는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강화도는 지리적 요건이 농성할 만한 곳이지만 남한산성은 그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농성의 기본조건은 자급자족 체제인데 산성, 그것도 한겨울의 산성은 농성의 자리가 아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45일 이상을 저항하던 인조는 결국 강화도가 함락돼 비빈·대군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하고 만다. 인조는 지금의 송파구인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삼배고두례를 행했다. 허울뿐인 큰소리 외교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화의의 대가로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야 했다. 삼전도의 치욕은 봉림대군은 물론 소현세자에게도 씻기 어려운 상흔이었다.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의 성리학자인 그들에게 삼전도의 치욕은 반드시 씻어야 할 원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볼모생활 도중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현실인식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이 처한 객관적 현실, 즉 국제관계의 역학을 인정했다. 청은 이제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실력자였고 조선은 그 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 편입돼 있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려면 청과 맞서 이길 힘이 필요했다. 그럴 힘이 없는 이상 청과 대립하는 것은 조선에 이롭지 못한 일이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은 이전의 중국 왕조들이 요구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공으로 대표되는 형식적 주종 관계를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조공 대상이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든 만주족이 세운 왕조든 현실적으로 볼 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원을 청이 장악한 이상 조선은 그 질서 속에 편입된다는 것이 볼모생활에서 바뀐 소현세자의 현실 인식이었다.
소현세자는 당시 심양에 새로운 숙소를 신축해 심양관(瀋陽館)이라 불렀다. 청나라는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려 했다. 인조도 청나라와 직접 접촉을 꺼렸으므로 양국간 현안은 소현세자의 차지였다.
소현세자는 양국의 접점 지역에서 양국의 직접적인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심양관은 주중국 조선대사관이며 소현세자는 그 대사였던 셈이다.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에 대응하는 일이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 중에서 명 정벌에 사용할 군사를 파견해 달라는 것은 가장 난처한 문제였다. 친명 배청을 명분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으로서는 이는 심각한 자기 부정에 해당하므로 상당한 반발이 뒤따랐다. 하지만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정권으로서는 청의 어떠한 요구도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하는 순간 청군의 말발굽이 또다시 조선 국토를 짓밟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임경업장군의 사보타주
인조 18년 임경업이 이끄는 수군 6천명을 파견한 것은 서인 정권의 참담한 자기 부정이었다. 유명한 반청론자인 임경업이 청과 함께 명을 치는 일에 흥이 날 리 없었다. 임경업은 명군을 향해 발포하지도 않고 일부 군사는 일부러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보타주를 벌였다. 이에 격분한 청은 장수 용골대(龍骨大)를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의주로 파견했다. 이들은 조선의 대신들을 의주로 불러 심문하는 이른바 「심옥(瀋獄)」을 벌여 조선은 다시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졌다.
이때 소현세자는 청의 말을 듣는 척하며 양자 사이의 완충역할을 자임했다. 아마 소현세자의 유연한 처신이 없었다면 조선인들은 화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조 20년에 압록강 근처에 명나라 배가 출몰하자 용골대가 평안감사 등을 불러 심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도 소현세자는 시종일관 평안감사를 옹호했다. 이때 용골대는 이렇게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와 같이 비호해 주니 그와 한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소』
세자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구려』
이처럼 소현세자는 양국간 분쟁에서 분명히 조선편을 들면서도 유화적인 몸짓으로 파문의 확산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런 유연한 처신은 조선에 대한 청의 의구심을 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즉위하면 양국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세자빈 강빈도 소현세자 못지않은 수완가였다. 심양관의 안살림을 맡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금이었다. 그녀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했다. 이렇게 생산된 곡식은 심양관 살림에 가장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포로로 잡혀온 조선 사람들도 원수인 청인들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세자 밑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니, 강빈의 이 농업정책은 일거양득의 양책이었다. 강빈은 이렇게 수확한 곡식을 청의 진기한 물건들과 맞바꿔 차액을 남겼다. 또한 조선 사신들이 가져오는 인삼 등을 청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청나라 관리들에 의해 심옥이 한번 벌어지면 막대한 자금이 들었다. 청 관리들은 막대한 뇌물을 받고서야 못 이기는 체 심옥을 종결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금을 마련한 것은 모두 강빈의 수완이었다. 실로 소현세자와 강빈은 조선 역사상 가장 현실적인 세자이자 세자빈이었다.
소현세자가 볼모로 가 있었던 기간은 장장 9년이었다. 인생의 황금기인 20대 중후반과 30대 전반을 이국에서 볼모생활로 보낸 것이었다. 소현세자는 인조 22년(1644) 2월, 34세의 나이로 꿈에도 그리던 고국 조선에 돌아왔다.
아들을 의심하는 아버지
소현세자의 귀국 짐보따리 속에는 많은 종류의 서양 과학서적과 여지구가 들어 있었다. 그는 볼모생활을 하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견식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세상이 더 이상 성리학의 시대가 아님을 심양과 북경에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한 인물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사상과 접하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과 천주교, 그리고 서양의 과학사상이었다. 소현세자는 스스로 아담 샬이 머물고 있던 북경의 남천주당을 찾았다. 푸른 눈의 선교사와 이국의 왕세자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는 특이한 장면이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가져온 과학서적이 훗날 수원성 축성 때 정약용으로 하여금 거중기를 만들게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이 밖에도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들을 데리고 귀국하기도 했다.
소현세자는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더 이상 청은 원수가 아니었다. 주자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청은 원수의 나라였지만 주자학의 관점만 버린다면 청은 실리에 따라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상대적인 대상일 뿐이었다. 세상은 주자학만이 아니라 천주학이란 다른 사상도 있었다. 그리고 여지구가 보여주는 대로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새로운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과학기술은 조선을 새롭게 발전시킬 양축이었다.
그러나 가슴 가득 포부를 안고 귀국한 소현세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를 구렁에 빠뜨리려는 음모였다. 부왕 인조에게 있어서 소현세자는 자신을 대신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었다. 소현세자는 자신의 반청 노선에 반기를 든 정적이자 원수인 청의 회유에 넘어간 반역자일 뿐이었다. 소현세자가 볼모지 심양에서 조선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부왕 인조는 세자에 대한 불만만 키워왔던 것이다.
더욱이 인조는 어이없게도 아들인 소현세자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심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공포였다.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임금으로 내세워 자신을 폐출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다. 인조는 쿠데타로 집권한 인물답게 자신의 왕위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했다.
인조가 세자를 의심하는 것을 눈치챈 일부 정치세력이 세자를 모함하고 나섰다.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도 그 중 한 세력이었다. 그녀는 세자와 강빈이 인조를 내쫓고 즉위할 것이라고 참소했다. 세자에 대한 의심과 주위의 참소는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조는 심지어 환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조차도 막을 정도로 그를 냉대했다.
소현세자는 부왕의 이런 냉대에 상심했으나 그 원인을 분석할 만한 여유도 그에겐 없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설고 낯선 이역만리에서 9년간이나 꿋꿋하게 지내던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뒤따랐다.
의혹짙은 소현세자의 주검
세자의 발병일은 인조 23년 4월23일이었다. 병명은 학질이었다. 세자는 발병 3일 후인 4월26일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인조실록』은 그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적었다.
『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소렴 때 시체의 얼굴을 싸는 검은 헝겊)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이 기록은 당시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시신의 이상한 상태를 보고 나와 말한 것을 토대로 적은 것이었다. 그녀는 인열왕후(소현세자의 어머니)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염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한 것이 분명하다면 소현세자를 죽인 인물은 누구일까?
『인조실록』은 세자의 시신이 독살당한 사람 같았다는 사실을 『상(인조)도 모르고 있었다』라고 기록했지만 이는 거짓이다. 소현세자 독살에 인조가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한둘이 아니다. 그 하나가 소현세자를 치료한 의관 이형익(李馨益)에 대한 처리 문제다. 이형익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어미 집에 왕래하던 의사로 세상에 추잡한 소문이 많던 자였다. 세자가 이형익에게 침을 맞은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양사는 이형익을 처벌하자고 주청했다. 『오한이 심하여 몸이 떨리는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는 것이 양사의 탄핵 이유였다. 조선시대에 왕이나 세자가 죽으면 의관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다 해도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인조는 끝내 이형익을 비호하면서 처벌하지 않았다.
인조가 세자 독살에 관련돼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였다. 사망 당시 소현세자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큰 아들 석철은 원손(元孫)이었으므로 당연히 그가 세손으로서 세자를 대신해 인조의 뒤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종법을 어기고 원손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그 중 두 아들이 풍토병으로 죽게 했다.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련됐다는 다른 증거는 세자빈 강빈의 처리 문제였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강빈에게 공격의 화살이 날아왔다. 세자의 장남 석철의 보모 최상궁은 저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 끝에 죽어갔다. 그리고 인조 24년 정월에는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御膳:임금의 수라)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강빈은 후원 별당에 감금되었다. 이미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진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에 독을 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인조와 소용 조씨가 공모해 강빈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내린 인조의 비망기는 자신이 사건의 배후 연출자임을 털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紅錦) 적의(翟衣)를 만들어 놓고 외람되게 내전(內殿:왕비)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인조 스스로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그의 세 아들을 귀양 보낸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인조의 악함은 강빈을 사사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결국 강빈을 폐출하여 사저로 내쫓은 후 사약을 내려 죽여버리고, 교명 죽책(竹冊) 등을 거두어 불태워버렸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빈의 형제들까지도 죄를 씌워 죽여버렸다. 자신의 친아들과 손자, 며느리와 사돈까지 죄없이 죽여버린 이런 인물의 시호에 「어질 인」자를 써 인조(仁祖)라 한 것은, 서인 정권의 역사뒤집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행적을 제대로 표현하면 그는 악조(惡祖)라 불러야 마땅하다.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은 단순히 한 세자의 꿈이 좌절된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꿈이 좌절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을 만난 것은 조선이 개국한 1876년보다 무려 2백32년이나 빠른 1644년의 일이었다. 이때 이미 낡아빠진 성리학을 버리고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그 처참했던 근대사의 아픔은 겪지 않아도 좋았을지도 모른다.
북벌군주 효종의 급서
소현세자가 죽은 4년 후인 1649년 인조도 세상을 떴다. 그 자리를 이은 인물은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생활을 했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었다. 효종에게는 즉위 자체가 하나의 콤플렉스였다. 인조의 뒷자리는 소현세자의 것이지 효종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현세자가 죽었다 해도 그 자리는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의 것이었다. 종법에 따르면 대통은 분명 원손(元孫) 석철의 것이었다. 효종은 소현세자와 석철이라는 두 부자의 대통을 가로챈 셈이었다.
효종이 심양 시절부터 소현세자의 자리를 탐냈다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찾기 어렵다. 심양 시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사이는 그리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소현세자를 사지에 몰아넣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에게 돌아오는 왕위를 거부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즉위 정당성을 북벌(北伐)에서 찾았다.
북벌! 효종에게 있어서 북벌은 시작이자 마지막이며 부분이자 전체였다. 효종은 북벌 군주 그 자체였다. 소현세자가 볼모 생활을 새로운 사상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세계사의 흐름에 적응하는 기간으로 보냈다면, 봉림대군은 원수인 청의 약점을 캐는 기간으로 보냈다. 소현세자가 청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으로 보았다면, 봉림대군은 전력을 다하면 넘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같은 볼모 기간을 보냈으면서도 세계관이 이처럼 완전히 갈리는 것은 서로의 성격탓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무과출신 우대 정책
효종이 북벌에 전념했던 이유는 물론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 소현세자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콤플렉스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북벌은 삼전도의 치욕과 콤플렉스를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길만이 저승에서 소현세자를 떳떳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북벌은 소현세자보다는 효종에게 걸맞은 과제였다. 효종은 강력한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효종은 실로 삼국시대 이래 우리 역사상 거의 유일한 무제(武帝)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이나 고구려의 광개토왕, 그리고 신라의 태종무열왕처럼 무력을 통한 영토확장의 길에 나섰던 무력의 군주였다.
북벌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강력한 군사력이다. 효종은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까지 조선은 문(文)의 나라였다. 과거는 문·무과로 나뉘어 있었으나 무과 출신으로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과 출신들은 문과 출신보다 한 등급 아래의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무과 합격자는 지방 수령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은 무과 우대 정책을 실시했다. 효종은 무과 시험인 관무재(觀武才) 우수 합격자를 지방 수령에 임명했다. 그러자 문신들의 반발이 잇따랐다. 효종이 무과 출신을 지방 수령에 임명한 것은 각 지방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효종은 무과 출신인 유혁연(柳赫然)을 비서격인 승지로 임명하기도 했다. 효종이 전례를 무시하고 무장 출신을 승지로 임명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군사문제에 관한 직할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효종은 지방관을 파견하며 군사문제는 병조판서에게 직보하고, 병판은 무신 승지 유혁연에게 전달하게 했다. 즉 지방의 군사문제를 지방관→병판→무신 승지→효종이라는 신속하고 전문적인 보고 체제를 갖추기 위해 무과 합격자를 수령에, 무신 출신을 승지에 임명한 것이다.
또한 효종 5년 2월에는 지방의 북벌 준비 사업을 관장할 영장(營將) 제도를 복원하고 이화악(李華岳) 신단(申檀) 등을 영장, 부사(府使) 등에 임명해 지방으로 내려 보내기도 했다.
전란 후의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효종의 강력한 군사력 확장 정책은 많은 성과를 거두어 재위 6년에는 사대부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막강해진 조선군의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 세자와 문무백관,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량진 백사장에 나가 1만3천여 조선군의 열병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효종은 제주도에 표류돼온 네덜란드 사람 하멜(Hamel)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조총(鳥銃)을 모방한 새로운 총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친위군인 금군(禁軍)을 늘리고 창덕궁 후원의 담장을 헐어 이들의 기사장(騎射場)을 만들어주었다. 지형이 험준한 우리 나라는 남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기병전의 여지가 그다지 넓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광활한 만주와 중원을 공격할 때 사용할 목적임이 분명하다.
효종의 이런 군비확장책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조선 전기간을 통틀어 전례가 없던 군비확장책은 문신들의 강한 반발을 낳았다. 신속한 군비확장은 집중된 권력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국왕의 권력은 미약했다. 부왕 인조는 서인들이 선택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쿠데타를 준비하던 서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한 명의 종친일 뿐이었다.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조정은 국왕과 서인의 연합정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의 군비확장책은 서인 문신들의 반발을 낳았다.
문신들은 물론 만주족 국가인 청을 증오했다. 그러나 이런 증오심을 극도로 표현하는 길은 기껏해야 삼학사 같은 지사적 처신이지 군사적 대응은 아니었다. 의기만 드높게 선전 교서를 던졌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혹한 속의 산성에서 떨었던 문신들에게 청은 마음속 증오의 대상일 뿐 군사적 정복대상은 아니었다.
군비확장책에 대해 『백성의 생활이 더 급하다』는 안민책(安民策)을 제시한 문신들의 반발 명분이 무조건 폄하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안민의 대계 중 강력한 국방책은 가장 첫머리에 놓여야 할 항목이란 점에서 안민책을 명분삼은 군비확장 반대도 전적인 정당성을 갖기는 어렵다. 심지어 열병식이 청나라의 분쟁거리가 된다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대해 효종은 『이것이 어찌 오랑캐의 주구가 아니겠는가?』라면서 강행했다.
문신들의 노골적 반발
그러나 재위 8년간 거의 독단적으로 군비확장책을 추진하다 보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효종의 치세에 대한 사대부들의 불만을 집약해서 표출한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흔히 송시열을 북벌 이념의 제공자로 알고 있지만, 실제 송시열은 효종의 군비확장책에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다. 송시열은 효종 8년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그간의 치세 전체를 부정하고 나선다.
『전하께서 재위하신 8년 동안 그럭저럭 지나갔을 뿐 한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르렀습니까? 백성들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하며 안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朝夕)에 다다랐습니다』
송시열은 또 『남송의 주자가 처음에는 금나라에 대한 북벌을 주장하다가 20년 후에는 다시 북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북벌을 포기하라는 권고였다. 이는 효종이 전력을 기울인 모든 정책을 포기하라는 말로 효종의 치세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자신을 전면 부인하고 나선 송시열을 처벌하지 못했다. 사대부들이 집단 반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효종은 사대부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타협에 나섰다. 효종은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에 정권을 넘겨주기로 하였다. 대신 송시열·송준길로 대표되는 산당은 적극적인 북벌책을 수행해야 했다. 이처럼 양자가 연합할 수 있는 공통 분모는 북벌이었다.
송시열의 산당이 대외적으로 내건 명분은 「춘추대의」였다. 최고의 춘추대의는 오랑캐의 나라인 청을 정벌하고 중화의 명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 길은 오직 북벌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북벌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소리 높여 춘추대의를 외쳤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춘추대의는 군사를 동원해 산해관을 공격하는 북벌이 아니었다. 그들이 최고로 생각하는 춘추대의는 국력을 길러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망해버린 명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달랐다. 그에게 북벌은 군사를 동원해 만주와 중원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과 효종의 북벌론에는 이론과 실제에 이토록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 같은 산당인 송준길을 병조판서에 임명해 인사와 군사 양방면의 전권을 맡겼다. 효종이 이들에게 정권을 내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들이 소리높여 주창하던 춘추대의를 실제로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춘추대의는 말로써 드높일 수 있었지만 북벌은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북벌은 군사력 확장이란 가시적 성과가 눈에 보여야 했다.
땅에 묻힌 「북벌론」
양송(兩宋)이라 불리던 송시열·송준길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그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자 효종은 재위 10년(1659) 3월에 송시열과 독대한다. 조선에서 임금과 신하가 단 둘이 만나는 독대는 금지돼 있었다. 효종이 국법을 어겨가며 독대한 이유는 보안을 위해서였다. 바로 북벌을 논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기해년의 일이라 하여 「기해독대」로 불리는 이 독대에서 효종은 이렇게 말한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효종의 북벌계획은 군사전략상으로 볼 때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청은 외견상으로 견고해 보여도 구조상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배층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이고 피지배층은 다수 민족인 한족이기 때문이다. 10만 조선정예군이 북벌을 단행하면 만주족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한족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것이 효종의 생각이었다. 효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단성있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효종이 독대까지 해가며 북벌을 주장하자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효종이 산림에 정권을 넘긴 이유는 단 하나 북벌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송시열이 북벌 자체를 반대한다면 효종은 미련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송시열 등 산림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벌을 강력히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북벌은 불가능한 망상이었다.
이때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효종이 급서한 것이다.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한 지 두 달 만이었다. 효종의 사인은 사소한 것이었다. 머리 위에 난 종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종기가 독으로 번지자 어의 신가귀(申可貴)가 종기에 침을 놓고 고름을 조금 짜내니 피가 서너 말이나 솟아나왔다.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이었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그는 수전증으로 손을 떠는 상태였다 한다. 수전증이 있는 의사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신가귀가 현종 즉위 후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수전증의 신가귀가 효종에게 침을 놓은 것도,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도 우연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으로만 돌리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컸기에 고의란 의구심이 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조정에서 북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송시열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북벌은 주장하지 않았다. 효종의 시신과 함께 북벌도 땅속에 묻힌 것이다.
예송논쟁 와중에 급서한 현종
효종의 죽음은 조정에 뜻밖의 논란을 불러왔다. 효종의 급서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효종의 장례 때 입을 상복을 두고 벌어진 논란이다. 이것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지는 유명한 「예송논쟁」이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사망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 기간이 얼마여야 하는가를 두고 발생했다.
조선의 상례(喪禮)에 따르면 부모상에 자식은 3년복을 입고, 반대로 장자상(長子喪)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어야 했다. 장자를 부모와 같이 대우한 이유는 종통을 잇는 맏아들을 그만큼 우대했기 때문이다. 장자 아닌 차자(次子) 이하의 상사에는 부모가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다.
예송 논쟁의 논거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효종은 인조의 차자였기 때문이다. 장자는 어디까지나 소현세자였다. 그러나 인조의 왕통을 이은 인물은 효종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왕통을 이은 인물에게 장자냐 차자냐를 따지는 것이 타당한 물음이냐는 반론이 가능한 것이다. 효종이 차자라는 서인의 논거와 왕통을 이은 존재라는 남인의 논거가 부딪친 것이 1차 예송논쟁이었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은 효종이 차자이므로 자의대비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선도로 대표되는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자지만 왕통을 이었으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자칫하면 효종이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 대신 왕위를 이은 것이 정당하냐는 승통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 정국에 피바람을 부를 수도 있는 민감한 문제였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 승통의 정당성을 둘러싼 거대한 정치문제로 비화될 뻔하다가 가까스레 1년설을 주장한 서인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서인이 집권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설을 주장하다 패배한 남인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정치보복은 행해지지 않았다. 형식상 정치논쟁이 아니라 예법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임금에게 야박한 신하들
그러나 15년 후 벌어지는 2차 예송논쟁은 학문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종 15년에 벌어지는 2차 예송논쟁은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함으로써 발생한다. 자의대비가 그때까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효종 장례 때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1차 예송논쟁이 아들 상사 때 어머니의 상복 착용 기간 여부였다면 2차 예송논쟁은 며느리 상사 때의 시어머니의 상복 착용 기간 여부였던 것이다.
장자·차자의 상사 때 부모의 상복 착용 기간이 달랐던 것처럼 장·차자부 상사 때의 상복 착용 기간도 달랐다. 장자부(長子婦)의 상은 1년복을, 차자부(次子婦) 이하의 상은 9개월복을 입었던 것이다. 사망한 사람만 달랐지 그 내용이나 배경은 1차 예송논쟁과 똑같았다. 1차 예송논쟁 때 1년설을 주장했던 서인들은 2차 예송논쟁 때 9개월설을 주장했고, 1차 때 3년설을 주장했던 남인들은 2차 때는 1년설을 주장했다. 즉 서인들은 1차 예송논쟁 때 효종을 차자로 대우한 것처럼 효종비를 차자부로 대우한 것이고 남인들은 왕통을 장·차자 여부보다 높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차자부가 아니라 왕비로 대우한 것이다.
1차 예송논쟁 당시 현종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서른네 살의 장년이 돼 있었다. 국왕인 현종의 자리에서 볼 때 1차 예송논쟁의 결과는 내심 불만이었다. 당시만 해도 송시열과 윤선도 같은 대군 사부들의 논쟁에 판정을 내릴 만한 견식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버지 효종이 누구인가? 바로 국왕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국왕을 장자와 차자로 나누어 차등있게 대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통을 이었으면 그뿐, 나머지 모든 예법은 왕통에 복종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한 직후에 서인들이 자의대비 복제에 혼선을 빚었던 것이 논쟁을 부추겼다. 서인은 처음에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의정했다가 1차 예론에 참여했던 서인 중진들의 말을 듣고 9개월로 고쳐 올렸던 것이다. 현종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당초 1년복으로 의정했다가 왜 9개월복으로 개정했느냐고 추궁하고 나섰다. 서인들은 여러 차례 모여 협의했으나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진퇴양난의 협곡에 빠졌던 것이다. 현종이 원하는 대답은 1차 예송 때 서인들이 주장했던 1년설과 지금의 9개월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시인하면 서인들은 국왕을 능멸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자충수(自充手)에 빠지는 것이었다. 서인들이 대답을 못하고 시간만 끌자 현종은 분노했다. 그리고 1,2차 예론은 모두 서인들이 왕권을 업신 여긴 결과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전의 기해예론(1차 예송)은 3년복으로 고치고 이번의 갑인예론(2차 예송)도 1년복으로 고쳐라. 기해복제를 과인은 국제(國制:국조오례의)를 쓴 것으로 생각했는데 안팎에서는 고례(古禮:중국의 옛법)를 썼다 하니 임금이 하는 일은 가볍고 신하들이 하는 일은 무겁다는 말이냐? 경들이 모두 선왕(효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감히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고 주장하니 신하가 되어 감히 임금에게 야박하게 굴면서 누구에게 두텁게 굴 것인가?』
현종이 말하는 「두텁게 구는 누구」란 1차 예송 논쟁 때 1년설을 이끌었던 송시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서인들에 대한 치죄에 나섰다. 평소 원만했던 현종의 성품으로 보아 이례적인 분노였다. 현종은 드디어 예론을 잘못 이끈 책임을 물어 서인 영상 김수흥을 귀양보내기에 이른다. 귀양가는 서인의 자리는 허적, 윤휴 같은 남인들이 메웠다. 이때가 1674년이었으니 남인들은 1623년의 인조반정 이래 반세기 만에 정권을 잡는 길이었다. 분명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견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현종이 급서했던 것이다. 현종은 왜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것일까? 『현종실록』은 『현종의 기운이 몹시 지쳐 병이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과로라는 뜻이다. 과로로 쇠약해진 몸에 열이 발생했고, 그런 지 열흘 만인 그해 8월 승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의혹을 부추기는 점은 이때가 약방에서 시약청을 설치한 하루 만의 일이라는 점이다. 임금의 병이 조금 심하다 싶으면 서둘러 시약청을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시약청 설치 하루 만에 사망하는 일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당시 현종은 「임금에게 야박하게 구는」 서인들을 한창 몰아세우던 중이었으므로 의혹이 잇따랐다. 그런 의혹을 남긴 채 현종은 가고 15세의 어린 숙종이 뒤를 이었다.
노론에 둘러싸인 소론 임금 경종
숙종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경종의 신산스러운 삶은 「장희빈의 아들」이란 한마디에 포괄돼 있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와 국왕의 총애를 놓고 다투던 숙종 때는 조선 전기간에 걸쳐 당쟁이 가장 심한 때였다. 숙종 때는 서인과 남인 사이에 죽고 죽이는 살육이 거듭됐는데,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가의 여인이었고 희빈 장씨는 남인가의 여인이었다.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의 부상과 몰락은 익히 알려진 대로 현모양처와 악처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리전이었다.
재위 15년 동안이나 후사가 없어 애를 태우던 숙종에게 옥동자를 안겨준 여인이 바로 희빈 장씨였다. 숙종이 이 옥동자를 원자로 정호하려 하자 서인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숙종은 서인 정권을 갈아치운 후 남인에게 정권을 주면서 원자 정호를 강행했고 동시에 인현왕후를 내쫓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그리고 원자로 정호한 옥동자를 세자로 책봉했으니 그가 바로 훗날 경종이다.
그러나 또 다른 후궁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왕자를 낳자 희빈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점차 식어갔는데 서인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희빈 장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남인에 대해 서인이 집요한 공세를 계속한 결과, 희빈 장씨가 왕비에서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고 남인들도 몰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저로 쫓겨났던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가 되었다. 그후 몰락한 남인에 대한 치죄를 둘러싸고 서인들은 둘로 양분된다. 남인들을 강하게 치죄해야 한다는 강경파가 노론이고 유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온건파가 소론이었다.
숙종과 노론이 희빈 장씨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해 사약을 내려 죽이자 그녀 소생인 세자의 처지는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노론은 자신들이 죽여버린 여인의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연산군 시절과 같은 살육이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숙종 또한 모후가 사형당한 한을 품은 아들이 뒤를 잇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숙종과 노론 대신 이이명은 숙종 43년(1717)에 이른바 「정유 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정유독대의 합의사항은 숙종의 와병과 소론의 격렬한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경종이다. 그러자 다급해진 노론은 경종을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경종의 이복동생, 즉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밀었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요구했다. 노론이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청한 까닭은 그녀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노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34세였던 경종은 노론의 이 주장을 받아들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다.
하지만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했다. 이는 세제를 정사에 참여시키라는 말로 사실상 세제에게 정권을 넘기라는 주청이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미성년이 아닌 한 「대리」라는 말은 신하가 입에 담을 수 없는 금언(禁言)이었다. 국왕이 세제에게 대리시키겠다고 해도 신하들은 죽어도 안 된다며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해야 했다. 이런 어마어마한 말을 신하들이 먼저 주청하고 나선 것이다.
경종은 이를 받아들여 세제 대리청정을 허락했으나 소론이 격렬히 반발하고 나섰다.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은 노론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을 역모로 몰았고 경종이 이를 받아들여 정권은 소론에게 돌아갔다. 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 남인가의 인물인 목호룡이 노론쪽에서 경종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이른바 「삼급수 살해 사건」을 고변하면서 조정은 충격에 휩싸인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창집·이이명 등 노론 사대신과 많은 노론가 자제들이 사형당하면서 노론은 몰락하는데 이것이 바로 임인옥사다.
게장과 생감
경종의 사인(死因)이 두고두고 의혹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임인옥사 수사보고서인 임인옥안에 세제 연잉군의 이름도 역적으로 등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노론 사대신을 제거한 소론 강경파의 공세는 이제 세제를 향했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과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는 세제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경종에게 양자를 들여 그를 후사로 삼고 세제를 폐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성사되지 못했다.
경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경종의 급서는 효종·현종의 사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파문을 불러왔다. 경종이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정치적, 의학적 정황 증거는 한둘이 아니었다.
정치적 정황 증거는 소론강경파와 경종비가 노론계인 연잉군 폐출을 계획하던 와중에 발생한 사건이란 점이었다.
의학적 견지의 정황 증거도 많았다. 그 하나가 게장과 생감이었다. 경종의 식욕이 부진하자 노론계인 대비와 연잉군이 게장을 진어하고 곧바로 생감을 올렸다. 그런데 게장과 생감은 의가(醫家)에서 꺼리는 상극이었다고 『경종실록』은 적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가슴이 조이듯이 아파왔던 것이다. 그 후 심각한 병세에 빠진 경종의 처방을 놓고 연잉군은 다시 어의와 다툰다. 연잉군이 인삼차를 올리려 하자 어의(御醫) 이공윤이 『자신이 쓴 강한 처방약과 인삼은 서로 상극』이라면서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나 연잉군은 어의 이공윤을 꾸짖어가며 인삼차를 연달아 세 번이나 올렸는데 그 직후 경종이 세상을 떴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양자 입적 문제, 의학적으로는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진어문제 등이 경종 독살설을 진실로 믿게 만들었다. 더구나 소론과 노론이 격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역안에 등재된 노론계 세제가 어의와 다투어가며 특별 처방을 고집한 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보아도 문제 있는 처신임에는 분명했다.
의혹의 당사자인 연잉군이 즉위하자 전국 각지에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벽서가 나붙었다. 심지어 군사 이천해란 인물은 즉위한 연잉군, 즉 영조가 능에 행차할 때 어가를 가로막으며 영조를 비난하고 나섰다. 영조는 이천해의 말을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며 사관에게 싣지 못하도록 명해서 실록에는 다만 「들을 수 없는 말(不忍之言)」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영조는 이천해는 물론 경종 시절 자신을 핍박했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사형에 처했으나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김일경과 목호룡은 영조가 『네 목을 베어 대행대왕(경종)의 빈전에 바치겠다』라고 꾸짖자 『나도 선왕(경종) 곁에 묻히기를 원하오』라며 반발했다. 경종의 충신은 영조가 아니라 자신들이란 뜻이었다.
급기야 영조 재위 4년에 소론 강경파가 경종의 복수를 내걸고 영남을 중심으로 군사를 일으켜 경종의 복수와 영조 정권 타도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군사는 조석으로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전군이 모여 곡을 했다. 영조의 정통성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했으나 재위 31년에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 투서사건으로 경종독살설은 다시 재연된다. 국문당하던 소론인사가 『나는 갑진년(경종이 사망하는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경종 독살설을 다시 꺼냈기 때문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정계에서 소외된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이 논쟁은 틈만 생기면 재연됐다. 경종 독살설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급기야 사도세자에게까지 여파를 남겨 조선 왕실사상 가장 큰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경종독살설의 한가운데 있던 인물이다. 영조는 비록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태생적 한계상 노론일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분명히 노론이 선택했기에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영조 당시에 논란이 되었던 「택군(擇君)」논쟁이 대표적이다. 영조는 즉위한 후 경종 때의 임인옥안에 자신이 역적으로 등재된 것에 부담을 갖고 이를 뒤집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영조는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노론과 함께 과거 음울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만약 경종의 양자를 들여 후사를 이으려던 소론 강경파의 계획이 성공했으면 그는 왕위는 커녕 사형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부왕과는 처지가 달랐다.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 어느 쪽에도 정치적 부채가 없었다. 사도세자가 보기에 부왕이 세제 시절 노론과 손잡고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것은 분명 역모로 볼 소지가 있었다. 영조와 노론처럼 경종 때의 행위는 숙종과 영조에 대한 충성이었다고 강변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위는 경종의 위치에서 볼 때 분명 역모에 가깝거나 역모였다.
사도세자는 노론에 불만을 느꼈다. 조선은 사실상 노론의 나라란 생각이 들었다. 부왕 영조가 힘겹게 이끌어오는 탕평책은 한계가 보였다. 부왕 자신이 경종 시절 노론에 부채를 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공격했던 소론에 증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조 31년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투서사건으로 영조의 탕평책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두 사건은 소론에 대한 영조의 자제심을 무너뜨렸고 노론은 이 기회를 이용해 소론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였다. 영조 또한 이에 동조해 두 사건을 역모로 처리한 후 그해 10월 『천의소감』이란 책을 편찬하는데 그 내용은 경종 시절부터 두 사건에 이르기까지 노론을 포함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경종독살설의 한 재료인 「게장」은 대비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방에서 올린 것이라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물론 이는 권력자의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편
사도세자는 소론이 연일 죽어나가는 두 사건의 와중에 노론의 사건확대책에 반대했다. 그는 되도록 두 사건을 온건히 처리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러한 처신이 노론의 결정적인 반감을 사게 된다. 부왕 영조가 분노하는 나주벽서사건에서조차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하는 것을 본 노론은 세자의 정치견해가 소론이란 결론을 내리고 세자 제거의 길로 나선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세자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데다 부인 혜빈 홍씨에게마저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극대화된다. 그의 부인 혜빈 홍씨는 누구 못지않은 노론 골수당원이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라고도 불리는 혜빈 홍씨의 친정은 유명한 노론 가문이었다. 그녀의 조상인 홍주원은 선조(宣祖)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난 정명공주의 부마였으니 당연히 서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은 자신의 딸 홍씨를 세자빈으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한 덕택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파격적인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딸이 세자빈이 된 후 김상로 등과 함께 집권당인 노론을 이끄는 실력자가 되었다. 사도세자가 노론으로 처신하든지 아니면 혜경궁 홍씨가 소론으로 처신했으면 최소한 뒤주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인적 기질에다 강한 성격을 지닌 사도세자가 소론의 처신을 보이며 노론과 대립하자 세자의 외척인 풍산 홍씨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세자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당론을 좇아 세자를 제거하느냐였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동생 홍인한은 물론 혜경궁 홍씨까지 세자를 버리기로 했다. 이처럼 세자의 외척까지 세자가 소론이란 이유로 제거의 길로 나서는 판에 여타 노론 중진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한로, 노론 영수 김상로, 홍계희, 윤급 같은 노론 중진 다수가 이에 가담했다.
사도세자는 안팎에서 고립됐다. 소조(小朝:세자궁)에서는 혜경궁 홍씨가 노론의 간자(間者) 역할을 했으며 대조(大朝:영조)에서는 정순왕후와 후궁 문씨가 세자를 헐뜯었다. 조정의 노론 대신들은 호시탐탐 세자를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런 포위 속에 위험을 느낀 세자는 자구책으로 병을 위장한다. 미행(微行)을 통해 허점을 보임으로써 노론의 예봉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세자의 자구책은 이런 소극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소론과 연합하는 적극적인 것도 포함돼 있었다. 세자는 우의정을 역임했던 소론 영수 조재호와 비밀리에 연합하는 데 성공한다.
노련한 정치인 혜경궁 홍씨
세자가 의문의 관서행에 나선 것도 소론과 결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평안감사 정휘량이 소론이자 사돈 사이였으므로 연합하려 했는데, 정휘량이 홍봉한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수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론에 세자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세자는 관서행을 계기로 자신을 제거하려는 노론의 공세를 신속한 기동력으로 막아낸다. 그러자 노론은 드디어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바로 나경언의 고변이다. 나경언의 고변은 주로 세자의 개인적 비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고변 전후의 사정으로 볼 때 그 핵심 내용은 개인적 비행이 아니라 군사 행동에 관한 내용으로 추측된다. 즉 세자가 군사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역모 고변의 성격을 띤 것이다.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지 29일 후인 영조 38년 윤5월13일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세자는 여드레 동안 뒤주 속에서 신음하다 죽었다. 세자가 죽던 날 영조는 『13일의 일은 종사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개인적 비행이라면 종사까지 들먹였을 리가 없다. 또한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주장한 대로 세자의 정신병 때문이라면 솜씨 있는 어의들을 동원해 치료하거나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휴양을 시켰지 뒤주에 가두어 죽일 이유는 더욱 없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노론의 정치공세에 희생되었다는 점은 세자와 연합한 소론 영수 조재호가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던 셋째 날 『조재호가 세자와 결탁했다』며 영조에게 고해 바친 인물은 다름아닌 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들은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한 정치적 의도를 읽지 못하고 그 내용을 전적인 사실로 받아들였기에 많은 오류를 범했다. 엄밀한 자료 해석과 검증 과정을 생략한 탓에 「영조의 이상 성격과 세자의 정신병 때문에 뒤주의 비극이 발생했다」는 홍씨의 의도적 변명에 말려든 것이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서술한 때는 뒤주의 비극이 발생한 영조 38년(1762) 직후가 아니라 순조 5년(1805) 이후다. 즉 이십 후반의 청상과부로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칠십대의 노회한 정객으로서 『한중록』을 서술했다는 말이다.
홍씨가 『한중록』을 서술한 목적은 단 하나 「친정을 신원시키기 위해서」였다. 홍씨의 친정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그날부터 급전 직하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이유는 바로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이란 이유에서였다. 실제 그녀의 오빠 홍낙임은 정조를 축출하고 은전군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련된다.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가 즉위한 후 그녀의 친정은 대리청정하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다시 한 번 단죄되었는데 그후 정순왕후 김씨가 죽자 비로소 가문의 신원에 나서서 『한중록』을 작성한 것이다. 「현실은 살아남은 자의 것」이란 경구를 입증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요즘 최고의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환타지 사극 드라마 태왕사신기와 '달릴 뻔' 했던 코믹 사극 드라마 왕과 나의 드라마 진행상황과 스토리 진행 방식, 플롯의 치밀성, 캐릭터의 일관성 및 입체성에 대한 다각적이고 심층적인 전문 리뷰......는 못쓰겠고...;;; ㅋㅋ
간단명료한 공통점
1. 요즘 최고의 훈훈한 청소년, 유승호군이 나왔다. 태왕사신기에서는 담덕(광개토대왕)으로, 왕과 나에서는 성종으로.
2. 아역배우들이 끝내주게 잘했다. 이 놀라운 매칭을 보라.
3. 성인 배우들 중에 연기나 이미지가 배역에 안어울린다고 욕먹는 사람이 있다. 누군지는 말 안하련다.
4. 주인공들이 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 긴 사연이 있었다.
태왕사신기는 2천년 전 욘달프(환웅)와 세오(수지니)의 사랑과 그를 바라보는 가진(기하)의 질투, 왕과 나는 궁에 들어오기 전 자을산군(성종)과 소화(폐비 윤씨)의 사랑과 그를 바라보는 천동(김처선)
태왕사신기 기하 전생
왕과나 궁에 들어가기 전 인연
5. 화면 때깔에 돈이 많이 들었다. 태왕사신기는 무려 4백억을 투자한 한국 드라마 사상 최대의 블록버스터이고, 왕과 나는 중전 책봉식 한 장면에 1억원 이상이 들어간 드라마이다.
태왕사신기 사신들
왕과 나 중전 책봉식
왕과 나 중전 하례
6. 제작자를 실망시켰다. 시청률이 기대에 못미친다. 태왕사신기는 '모래시계'의 김종학 피디, 송지나 작가 콤비에 배용준 주연, 엄청난 CG처리를 한 최대 블럭버스터급이라서 제작자 측에서는 50% 정도의 시청률을 기대했을 것이나 24회 중 19회까지 진행된 후에도 30%도 몇 번 못 넘었다. 왕과 나는 '용의 눈물"의 김재형 피디, (여인천하의) 유동윤 작가 콤비에 조연급이 전인화, 전광렬, 양미경이라는 호화캐스팅에, 초반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상승세도 불구하고 30%를 못넘었다.
7. 시청자를 실망시켰다. 작품성이 기대보다 불만족스럽다. 태왕사신기는 광개토대왕의 대륙 정복 이야기를 예상했던 (나같은) 사람은 19회가 지난 지금까지도 사신이야기에 촛점이 맞춰진 이야기 구성과 느린 전개 때문에 실망했다. 왕과 나는 폐비 윤씨의 새로운 모습과,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시들의 뒷 이야기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에게 여인천하 스타일의 궁중암투만을 반복함으로써 많은 시청자들을 실망시켰다.
8. 역사 왜곡이 심하다. 태왕사신기는 담덕이 왕에 오르는 과정을 강조하려다 보니 아버지 고국양왕을 너무 유약하게 그렸다. 왕과 나는 처선과 성종, 폐비 윤씨를 억지로 연결시키려다 보니 김처선의 나이가 엄청나게(세대를 뛰어넘어) 어려졌고 폐비 윤씨의 나이도 많이 어려졌다. 또한 연산군은 소화가 중전이 되고 나서 태어났다.
9. 주인공을 보면 왠지 전작이 떠오른다. 이는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비슷한 이미지의 배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태왕사신기에서 배용준을 봐도 겨울연가가 연상된다.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담사마라 불러야 할 것같다. 왕과 나에서 전인화를 보면 지엄한 인수대비가 아니라 자꾸만 여인천하의 문정왕후가 떠오른다.
조선왕독살사건으로 재판 인종에서 고종까지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의 임금들을 조명한 저서.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 서-제14대 선조,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소현세자, 사라진 북벌의 꿈-효종 등 조선조 9인의 임금과 세자 에게 뒤따라다닌 사인의 의혹과 진실을 파헤친 책.
목차
<누가 왕을 죽였는가> 개정판에 부쳐
1.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제12대 인종) - 이질 증세와 주다례
폐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서른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백돌아! 백돌아!
홀로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존하겠소
문제의 '주다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2.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제14대 선조) - 중풍과 찹쌀떡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주상의 뜻
어젯밤엔 편히 잤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문제의 찹쌀밥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사실처럼 굳어진 독살설
3.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소현세자) - 학질과 의관 이형익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볼모로 가는 두 형제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부정父情 아닌 부정否定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아담 샬과의 만남
비운의 귀국길
인조에게 쏠린 몇 가지 의혹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세자 일가의 비극
조선의 좌절, 세자의 좌절
4. 사라진 북벌의 꿈(제17대 효종) - 종기와 어의 신가귀의 산침
소현세자의 유산
용상에 가려진 효종의 아킬레스건
모든 것은 북벌로
효종의 딜레마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손을 떠는 어의 신가귀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5. 예송시대에 가려진 죽음(제18대 현종) - 복통과 뜸 치료
효종의 모후 자의대비과 입어야 할 복제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4가지 이유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예론을 금하노라
며느리상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의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6. 이복형제의 비극(제20대 경종) -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아이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두 모자의 운명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왕세제를 책봉하소서
경종의 진심
목호룡의 고변
적발하여 정법하라
게장, 생강 그리고 인삼차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
7. 개혁군주의 좌절(제22대 정조) - 홧병과 연훈방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3대 모역 사건
규장각과 장용영 그리고 화성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아서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훈방 처방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정순왕후의 세상
8.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제26대 고종) - 해외 망명 계획과 식혜
홍선군의 아들 명복
고종과 일본의 악연
국내의 혼란과 일본의 내정간섭
일본의 병탄과 고종의 대응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고종의 해외 망명 작전
마지막 군주의 최후
고종이 해외로 망명했다면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왕조에서 독살설에 휘말렸던 임금은 무려 8명이나 된다. 조선왕조가 배출한 왕이 27명인 것을 감안하면 조선은 지구상의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던 왕조였다.
누가, 왜 왕들을 죽였나.
실제로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에겐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는 꼭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했고,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독살설은 또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집중돼 있다.
왜 그럴까?
<사도세자의 고백>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등 숱한 대중적 역사서로 인기몰이를 한 바 있는 이덕일 숭실대 교수는 ''누가 왕을 죽였는가''의 개정증보판으로 내놓은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에서 흥미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 망했어야 할 조선왕조의 기형적인 정치행태 ''독살''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우선 역사가 ''너무'' 장구했다. 세계 역사상 대개의 왕조는 200~300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는데, 조선은 쇠퇴기ㆍ멸망기에 접어든 뒤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라는 것이다.
무릇 한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에서 시련을 극복 못하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야 하는데, 유독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돼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살아 있었다.
이덕일 교수는 조선왕조의 쇠퇴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본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일본의 침략에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을 두고 혼자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부터 조선의 사회체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지배 계급은 군림의 이유를 상실했다는 설명이다. 백성들이 국왕인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지른 행위는 사대부→일반백성→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제 자체를 부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는 사대부들의 권력 획득 방식 ''독살''
개국 초 조선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가리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 국가였다. 그러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포 납부로 군역 면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1488-1544)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포 납부로 군인 고용)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병역의무가 면제됐다.
저자는 "개국 후 200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미 생명 사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고 평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고, ''국왕 독살설''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중 하나다. 독살설이 유독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부터 본격적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약한 왕권(王權)과 명분 없는 신권(臣權)의 합작 ''독살''
조선 후기 들어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왕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닌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 신하들은 왕을 적당(敵黨)의 일원으로 봤다.
저자는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로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며 "오히려 끊임없이 신하들의 견제를 받는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임금은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으며, 신하들은 당론에 따라 얼마든지 특정 임금을 배척했다. 신하의 임금 선택을 ''택군(擇君)''이라고 하는데 국왕 독살설이야말로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의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반정(反正)이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 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저자는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독살"이라며 "독살설이야말로 왕조의 말기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 이후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프레시안 2005.07.29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이제서야 소감을 쓴다. 남들처럼 근사한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글솜씨도 없고 길게 쓰는 재주는 더더욱 없어서 미루고 미뤘는데 요즘 MBC 드라마 '이산 (정조)'를 보면서 그때 느꼈던 흥분을 다시 느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책장을 넘기면서 숨이 가쁠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서를 좋아해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시기에 마침 저 책을 읽은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조선왕 독살사건'이랑 '누가 왕을 죽였는가', 둘이 다른 책인 줄 알고 두 권을 다 골랐었는데 알고 보니 전자는 개정판이었다. 처음에 '누가 왕을 죽였는가'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그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좀 점잖게 고쳐서 재판했다.
특히 내가 흥분했던 부분은 인종, 경종, 정조 이야기다. 책 읽기 전부터도 조선의 왕 중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책 읽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숨을 씩씩 몰아쉬곤 했다. - 난 지금도 사극을 보거나, 인수대비나, 문정왕후, 선조, 인조, 정순왕후, 망할 놈의 노론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른다. 몇백년이나 된 일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화를 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ㅋ
불쌍한 정조대왕님.ㅜㅜ 인생 참 험난하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죽었고, 외할아버지란 사람은 역적들이랑 짜고 사위랑 손자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고, 친할아버지 영조는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맨날 천날 충성심을 시험하질 않나...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의복을 갖추고 잠자리에 들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루 4시간 이상을 잔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을 잇는 천재군주, 만능군주,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대왕께서 그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 역사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ㅜㅜ
정조 사망시에 아니 정조 대왕 승하시에 그 옆에 정순왕후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책을 100% 믿기도 어렵지만 정순왕후 같은 여자면 능히 정조를 독살하고 남았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영조가 정조를 꽤나 아낀 걸로 나오는데... 만약 진짜 드라마 '이산' 같았다면 영조도 참 불쌍한 왕이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뒤늦게 후회를 하니 영조는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오죽 참담했으랴.
이 책은 조선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더욱 즐길 수 있다. 어릴 때 인상깊게 읽었던 왕후 간택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순왕후-_-;;는 알수록 망할 X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것이다.
하도 유명해서 예전 살림 정리하고 힘들여 이사 중인 티스토리 블로그에.. 안타깝게도 참 불편한 점이 많다. 글을 몇개밖에 안옮겼을 때는 몰랐던 사실인데 제일 덩치 큰 게시물들을 몇개 옮긴 지금에 와서는 차마 다음 블로그에 새 살림을 꾸릴 엄두는 안나고.. 다음 블로그를 개설할 걸 그랬나. 하는 속상함도 있지만... 아쉬운 김에 티스토리에 대한 불평 및 건의 사항을 좀 써보고자 한다.
다행히 티스토리 운영자가 꾸준히 개선 시도를 하는 것 같으니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뭔가 빨리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으로 - 우는 아이 젖준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라는 속담도 있지요. 흐흐. - 이 글을 쓴다.
티스토리 버그 또는 불편한 점.
1. 제일 먼저 느꼈던 점. (2007/11/07) 기본으로 제공되는 스킨이 다양하지 않고, 디자인도 촌스러운 편이다. 설치형(태터툴즈?) 블로그답게 자유롭게 (?) 운영가능한 사용자 수정팁이 있지만 HTML 을 잘 다루는 IT관련 업종 종사자들 외에 나같이 무지한 평민들은 뭐가 뭔지.. 학교 다닐 때 읽던 전공책보다 더 어려운 수준의 용어들로 구성된 메뉴들이라 스킨 수정이 그다지 자유롭지 않다;;;
2. 그나마 스킨 형태를 골라서 스킨 수정을 하고 나서 본문글이나 사진 크기가 스킨의 형태에 맞게 변하지 않아서 뒤죽박죽이다. (어떤 사진은 옆구리가 짤린 상태로 나타난다.ㅡ.ㅜ) 또한 스킨 위자드를 이용해서 수정 후 다시 접속을 했을 때 스킨에 올린 그림이 나타나지 않고, 그림이 모두 삭제된 밋밋한 (벗은) 스킨이 뜬다.
3. 관리자 메뉴에서 스킨 수정이나, 다른 곳을 건드렸는데도, 모두 초기화가 되어버리니, 글 목록만 보기에서 글 내용과 목록 보기로 뒤죽박죽 변해서 컴퓨터 정지 먹은 적이 여러번 있다.
난 널 건드리지 않았건만...
4. 서버 문제인지 로딩 속도가 너무 느리다!! 관리화면에서 글씨들과 아이콘들이 너무 느리게 움직여서 같은 메뉴를 몇번이나 재클릭한 적 있다. 글쓰기 할 때 나타나는 속도가 내가 친 속도에 비해서 너무 느릴 때가 많다.!! (으~~.. 답답해.)
5. 다른 블로그로 이동하면 자동으로 로그인이 풀린다.(2007/11/09)
6. 목록보기가 되지 않는다. (첫 페이지에서 다시 들어가야함.)
7. 모든 글은 목록만 보기, 모든 글 내용까지 다보기만 선택 가능하고 요약 보기 기능은 없다. (3번 그림 참조 - 요약보기 기능 자체가 없다.)
사랑스러운 요약보기♡♥
8. 폴더별 글보기 기능이 없다. 어떤 글을 선택해서 읽고 다음을 누르면 폴더 내의 다음 글이 아니라 전체 글목록에서 다음글이 나오는 쓸모없는 기능이다. (누가 주제와 관련도 없이 모든 글을 다 읽겠냐고요.)
9. 다음이나 네이버처럼 모르는 것을 물어볼 데가 없다. (혼자서 낑낑거리거나 다른 블로그의 글을 찾아야 함;;)
10. 플러그인 기능 중에 유입 키워드라는게 신기해서 자주 찾아보는데 볼 때마다 숫자와 날짜가 바뀐다. 유입키워드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갑자기 몇십개가 확 줄어드는 것은 분명히 버그다.)
11. more | less 기능에서 more | less 대신 넣을 글자를 쳐도 more 상자로 돌아오면 다시 more.. | less.. 바뀐다.
12. 댓글 알리미에서 특정 인물이나 단어로 검색했을 때 1페이지 밖에 볼 수 없다. 2페이지를 누르면 처음 목록이 쏟아진다.
(한 두 가지 느낄 때는 잘 몰랐는데 모아놓고 보니 너무 불편해서 무지하게 화딱지 나는 것들이네ㅡㅡ;; 티스토리는 베타 서비스도 그렇게 길게 했으면서 왜 이런 것들을 하나도 해결하지 않고 정식 오픈했을까? -_ㅡ;;)
티스토리 개선사항/건의사항/희망사항
1. 공개/비공개와 폴더 수정처럼 이올린에 글올리기도 한꺼번에 선택하여 지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얼떨결에 글 여러개를 공개에서 비공개로 바꿨다가 이올린에 글올리기는 하나 하나 클릭해서 재지정한 적이 있다.
이올린에 발행하기는 왜 한꺼번에 지정이 안되는걸까?
2. 글쓰기 버튼 찾기가 쉬웠으면 좋겠다. 이건 조금만 자세히 보면 되는 거지만 폴더 내에서도 글쓰기가 되면 폴더를 헤깔려서 잘못 지정하는 일은 없을 텐데...
3. 어떤 글을 읽고 있을 때 다음글과 이전글이 화살표와 함께 제목으로 표시되었으면 좋겠다.
4. 방명록이나 댓글 수정을 할 때 싸이월드에서처럼 작은 창이 뜨는데 이는 본래 크기와 달라서 엉뚱한데서 줄 내리기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냥 글 상자 자체에서 댓글 작성이나 수정이 가능했으면 좋겠다.(2007/11/10)
5. 나도 모르게 댓글이 스팸으로 분류되어 휴지통에 가있는 경우가 있는데.. 주인이 알 수 있는 방법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6. 여러개의 글에 동시에 태그를 잘못 달았거나 안달았을 때를 위해서 일일이 글 수정이 아니라 한꺼번에 태그 수정이나 태그 삭제가 가능했으면 좋겠다. (다음은 글 밖에서 태그 추가 등도 있던데...)
7. 이미지를 한꺼번에 여러장 올리는 것은 되지만 일괄적인 크기 조정이 되지않아 삐뚤빼뚤하여 보기에 흉하다. 다음이나 네이버 블로그처럼 이미지 관련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8. 사진 등 첨부파일을 올릴 때 맨 위나 맨 아래에 임의로 올려지는 경우가 잦던데, 커서가 있는 곳에 안정적으로 들어갔으면 한다. (2007/11/11)
9. 블로그에 자신의 생각만을 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처럼 미니홈피 대용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일부 글은 특정인에게만 공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사진을 누구라도 다 보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우니까.
10. 태터데스크라는 것을 해보았는데 첫글을 자신이 고를 수 있고, 많은 최신글 목록을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생각보다 불편하다. 미리보기가 없어서 다시 확인을 하는 것도 귀찮고, 무엇보다도 첫글을 골라도 글박스가 너무 조그맣게 나와서 나같이 사진이든, 글 본문이든 큼지막한게 좋아서 블로그 쓰는 사람에겐 답답하게 느껴진다. 글 박스의 노출 크기도 (큼지막하게) 지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07/11/12)
11. 방명록에 새글이 등록되면 알려줬으면 좋겠다. 나만해도 모르고 지나친 적이 있는데 손님에게 보이는 것이 미관상 지저분하다면 관리자에게만이라도 보였으면 한다.
12. 글을 수정하고 나면 무조건 전체 글 목록 첫 화면이 나타나는데 날짜 오래된 게시물이라든지, 특정 폴더의 게시물을 수정해도 첫 화면이 나오니 다시 찾아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너무 불편하므로 수정하기 직전의 게시물 목록이 나왔으면 좋겠다.
수정 전의 화면.
수정 후의 화면.
13. 카테고리 수정이 너무 불편하다. 카테고리 위치 조정시 왜'제일 위, 제일 아래'가 없는걸까? '위로'를 몇번이나 눌러야 되는지 모른다.
14. 카테고리 밑에 들여넣기만 있고 펼치기가 없다. 카테고리 밑에 숨은 메뉴를 숨기지 않고 보여주고 싶다. 구분선 대신에 카테고리 제목을 만들 수 있는 기능이 있었으면 한다.
- 내가 쓴 것 외에도 많은 이용자들이 좋은 의견을 많이 올렸는데 그런 글들이 트랙백에 등록되어 다른 이용자들도 참고했으면 좋겠다만... 내 블로그는 거의 휴면 블로그라서 누가 트랙백을 걸어주려나..??? ㅋ
인터넷에서 블로그 서비스 제공한 지가 강산도 변할 세월(진짜??)이라 왠만큼 컴퓨터랑 웹페이지에 일가견 있는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고 있는 태터툴즈 블로그를 이제서야 써본다.
물론 인터넷이나 컴퓨터랑 세세세~하고 놀거나 은둔형 외톨이(ㅋㅋ) 생활을 즐기는 나이기에 이전에도 여러가지 서비스를 사용해보긴 했으나 그게 뭐 검색 서비스를 사용하는 수준이지 싸이나 블로그 안쓰는 내 친구들과 큰 차이는 없는 수준이라 모르는 것 투성이다.
우선 간단히 그간의 내 블로그 역사를 말해보자면,, (간단한 비교쯤 되겠다.)
1. 제일 먼저 알게 된 건 역시 그 명성도 찬란하신 싸이월드 미니홈피. 인터넷 사용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싸이, 싸이 타령을 하길래 보아하니 분명히 가수 싸이는 아닌데.. 설마.. 내가 가입한 그 네이트와 유동 서비스를 펼치는 그 싸이인가..?? 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나는 싸이의 그 조그만 화면과 한 게시물에 사진 한장 밖에 못올리는 답답함과, 지들이 뭔데 떡~하니 폴더메뉴까지 미리 다 정해논 친절함이 싫었다. 게다가 도토리값은 완전 사기꾼 수준이다!! 다음과 네이버도 처음에는 아이템이 고가였지만 지금은 전부 무료가 아닌가. 또 연예인들이 많이 한다는 이유로 이 사람 저 사람 가입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올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안들어서 싸이를 외면했다.
지금 내 싸이월드 미니홈피 상태ㅋㅋㅋ
2. 그 다음이 네이버.네이버 블로그는 당시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그런데 이메일을 다음으로 쓰는 나는 네이버 블로그를 쓰기가 영 껄끄러웠다. 게다가 첫 화면에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내가 가입한 카페, 내가 사는 지역, 내 성별 등이 공개되어 있다는게 아주 불쾌했다. 그 뒤로 놀라서 모두 비공개로 수정하긴 했지만 네이버의 행태는 여전히 불쾌하다.
아래 사진은 어떤 사람의 네이버 프로필. 지들 맘대로 알려준다.
네이버 프로필. 내껀 아님.
3. 그러던 중 다음에서도 미니 홈피 서비스(다음 플래닛)를 개설한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다음에서 미니 홈피를 개설했는데, 답답한 싸이홈피와는 달리 상당히 내 자유가 있고, 올릴 수 있는 사진 숫자도 많고(30장), 크기도 싸이보다 훨씬 큰 다음 플래닛은 그런대로 내 맘에 들었고, 조카들과 찍은 사진을 제일 먼저 올렸다.
요즘은 다음 플래닛은 블로그랑 모양이 거의 비슷하고, 사진 올리기도 수월하며(큰 사진도 업로드 가능) 기능 면에서는 더 편리해졌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ㅠㅠ.. 이것이 더 큰 문제였다. 차라리 싸이처럼 완전히 꾸졌다면 곧 다른데로 이사를 갔을텐데..
정말 블로그와 비슷하지 않은가?
모르는 사람은 다들 블로그로 착각하게 만드는 다음 미니홈피 플래닛.
쑥쑥 커가는 네이버에 위기를 느낀 다음이 비슷하게 생긴 블로그에는 엄청나게 친절하고, 연구에 연구를 계속하여 날이 갈수록 번창하는데.. 플래닛은 있던 서비스도 없어지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다음 플래닛은 다음 초기 화면에도 나오지 않고, 다음 자체적인 검색에서도 제외된다. 다음이 만든 서비스가 다음에서조차 검색이 안된다는게 말이 되냐고요-_-;; 그 악조건 속에서 버티다가 혈압 올라서 결국 플래닛을 버리게 되었다.
4. 다음 블로그? 에잇. 성질 나쁜 나는 다음 블로그로 내 집을 옮겨볼까 고민했다. 아직은 전문자료는 거의 없으니까 지금 옮겨도 크게 늦지는 않을거야.. 그러나 이미 십오만명을 훌쩍 넘긴 내 다음 미니홈피의 방문자 수에 대한 미련과, 자료 옮기는 것에 대한 막막함, 잠시 사용해본 다음 블로그의 불편함 때문에 이것도 역시 포기.
나는 다음 플래닛과 블로그를 비슷한 시기에 (1년 내외) 열었는데 초기에는 다음 블로그 서비스가 아주 불편했다. 지금은 개선됐지만 처음 다음 블로그 사용할 때는 목록 보기가 안됐다. 아. 물론 첫 페이지에서는 목록 보기가 되지만 둘째 페이지에서 글을 보다가 그 앞, 뒤의 글을 볼 수가 없었다. 목록보기를 누르면 다시 첫페이지로 돌아가기 때문에 거기서 다시 읽고 싶은 페이지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건 태그를 누르거나, 저장소(폴더)를 직접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아후. 속터져. ㅜ.ㅠ♨
그래도 이것 저것 따져보니 역시 정든 다음 미니홈피가 차라리 낫다고 위안했지만.. 어느새 나는 다음 미니홈피에 대한 불만, 아니 다음에 대한 불만으로 폭발할 지경에 이러렀는데.. 그것은 고객센터에 문의해도 답도 제대로 오지 않고, 대답 내용도 형편없이 무성의하며, 그나마 온 답변조차도 "(고객님의 제안사항은 곧 반영하겠습니다.)" 절대로 지켜지지 않는 다음의 행태에 더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5. 초대장 받아서 개설은 했지만 내버려뒀던 티스토리. 어휴!!!!!. 이젠 정말 도저히 안되겠다.는 심정으로 블로그를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칭찬을 받고 있는 티스토리 블로그로 옮기기로 결심. 실행에 옮기는데 어찌나 힘든지 계속 낑낑거리면서 이사 중이다. 홈피에 올렸던 정보글의 대부분을 삭제하고, 개인적인 내용이나 정말 아까운 것들 - 애써 온갖 싸이트 돌아다니며 모은 사진들 - 은 하나씩 퍼오고 있는데 글이야 싹 복사해오면 되지만 사진은 일일이 원본 보기를 해서 저장해서, 다시 여기서도 사진 업로드를 통해서 올려야 하니 여간 일이 아니다.
아직 이사 중이라 휑~한 내 티스토리 블로그...ㅡㅜ
그런데 너무 고생을 했더니 하루 한 명도 안오는 이 블로그가 괜히 미워지는 것이다. 처음에 미니홈피를 만들 때만 해도 자기 만족 수준이었는데 확실히 사람은 자기 고생을 남이 알아주길 바라나 보다.
너무 멋진 풍경으로 모아놓은 바탕화면 게시물이라도 검색 싸이트에 올라갔으면 하는 심정??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