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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기라는 배우의 가치


남자배우가 한 순간 ‘신데렐라’ 가 되는 경우는 그가 멜로물에서 호연을 펼쳤을 때이다. 다른 경우보다, 이 경우가 남자배우를 한 순간 ‘스타’ 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다.

그것은 드라마나 영화의 주요한 타겟이 ‘여성’ 이라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몇몇 특정한 장르의 작품을 제외하고선 대다수의 작품들은 ‘여성’ 을 주 소비층으로 하여 만들어진다. 여성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선, 여주인공은 당대 여성을 반영한 캐릭터여야 하고, 남주인공은 그러한 여성들이 그 시대에서 가장 원하는 남성상이어야 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남자주인공을 보면서 성적 호감을 느껴야 한다. 드라마 혹은 영화를 보는 여성들이 여자주인공에 대한 동일시를 느끼면서 동시에 남자주인공에 대해서 극 중 여주인공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빠져들 때, 그 드라마 혹은 영화는 속된 말로 ‘뜬다’. 그리고 더불어 그 남자 주인공의 역할을 한 배우 역시 뜨게 된다.


이준기는, 이 법칙에서 완벽하게 벗어났음에도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끈 희귀한 경우이다.




이준기가 처음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 끈 이유는 영화 ‘왕의 남자’ 속  ‘공길’ 이란 캐릭터 때문이었다. ‘공길’ 은 남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길은 ‘게이’ 도 아닌 ‘트랜스젠더’ 쪽에 가까운 캐릭터였다. 왕의 남자가 개봉할 당시 ‘게이코드’ 가 QAF같은 미드를 통해서 한국에 소개되면서 2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조금씩 유행을 타고 있던 시기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게이’ 남성에 대한 여성적인 호기심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게이’ 남성들은 ‘쟤가 왜 게이일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성적 매력을 여성들에게 어필한다. QAF에서 여성들의 열렬한 지지가 ‘브라이언’ 에게 쏟아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공길’ 은 그러한 성적 매력을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공길은 몸은 남성이되 내면은 여성인 캐릭터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개인의 성적 취향은 ‘남성’ 보단 ‘여성’ 에 가까운, 그렇게 되도록 길러진 인물이었다. 공길을 보면서 여성들이 ‘동일시’ 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적 매력’ 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극 중에서 ‘장녹수’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과도한 사랑을 받는 공길이란 캐릭터는 잘못 연기할 경우 오히려 여성들의 미움을 받을 가능성이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육갑은 죽고, 녹수와 연산은 상처를 받으며, 장생은 눈이 먼다. 영화 속에서 유일한 여성인 ‘녹수’ 에 여성들이 감정이입을 할 경우 공길은 말 그대로 ‘죽일 놈’ 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영화를 본 그 누구도 육갑의 죽음을, 장생이 눈 먼 것을, 연산과 녹수의 상처받은 일을 공길에게 책임지우지 않는다. 공길의 주변에 있는 사람은 직, 간접적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해를 입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나면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에서 가장 불우하다 생각되는 인물이 ‘공길’ 이 되어버린다.

공길이 가진 ‘남성의 몸, 여성의 마음’ 이라는 특성은 관객들로부터 충분히 ‘비호감’ 일 수 있는 요소였다. 공길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채, 자신의 마음은 전혀 내색하지 않는 모습으로 늘 모든 상황에서 반발쯤, 발을 뺀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길의 ‘모호함’ 은 모두를 오해하게 만들고, 모든 일의 시작은 바로 그러한 공길의 ‘모호함’ 이 발단이 된다.

그런데 대다수의 관객은 공길의 성정체성이나 공길의 태도에 대해서 불쾌해 하지 않았다. 남자의 몸을 한 채 여성을 연기하는 공길에게 불쾌해 하거나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오히려 공길은, 보수적인 한국 남성들조차 영화관으로 오게 만들었다. 그 뿐인가? 멜로물에서 좋은 역할을 연기한 그 어떤 남자배우도 이끌어내지 못한 유례없는 인기를 한 순간에 관객들에게서 얻어냈다. 신드롬이라고 할 만한 그 인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가 한 배역은 여성들로 하여금 선망의 감정을 품게 할 매력적인 ‘남성’ 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성들은 그러한 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그것은 ‘공길’ 이란 캐릭터를 연기한 이준기란 배우의 힘이다.




이준기는 철저하게 자신을 ‘가련하게’ 만들었다. 공길이란 캐릭터가 여러 면에서 가련하지 않을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준기는 그저 ‘존재 자체가 불행한’ 인물을 훌륭하게 연기해 냈다. 그 결과 그는 ‘눈물 흘리는 남자’ 에게 보내는 여성들의 정서를 자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남성’ 을 버림으로써 ‘남성’ 을 획득한다. 공길에게 보낸 여성들의 지지는 결국 당시 유행하던 ‘나쁜 남자 신드롬’ 과 맞물려진 현상이다. 결국 나쁜 남자, 에 여성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그 나쁜 남자의 내면에 숨겨진 아이처럼 여린 모습 때문이다. ‘나쁜 남자’ 가 진실로 ‘나쁜 남자’ 라면 그러한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없다. ‘나쁜 남자’ 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단단한 갑옷을 벗기면 그 누구보다 여린 속살이 드러날 것이라는 여성들의 확신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나쁜 남자’ 에 열광한다. 그것은 단단한 갑옷이 아니라, 그 갑옷 뒤에 숨어있는 아이 같은 내면에 보내는 환호이며, 그의 상처받은 내면에 보내는 따뜻한 애정이다. 공길은 그 아이 같은 내면을 가진 남자였고, 그것을 숨기기보단 그대로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극 중 장생이 되어, 육갑이 되어, 연산이 되어 공길을 보호해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육갑이 공길을 보호하다 죽어도, 장생이 눈이 멀어도, 연산이 상처를 받아도 공길을 탓하지 못한다. 그것은 나쁜 남자가 퍼붓는 독설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그 내면을 바라봐주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심리와 같다. 설혹 자신이 상처를 받을지라도 상대를 보호해주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동정심을 이준기는 공길이란 캐릭터를 통해 여성들에게서 끌어냈다. 그는 모호한 눈빛과 처연한 몸짓으로 매 순간 세상에서 가장 상처받은 인물인  처럼 보이도록 스스로를 만들었다. 숨기지 않고 본연의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순백의 처연함은, 나쁜 남자가 가진 단단한 갑옷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여성들에게 어필했다.



‘나는 이토록이나 연약하며 슬프다’, 라고 온 몸으로 강조하면서 이준기는 여성들의 모성애를 극대화시켰다. 그래서 여성들은 그에게서 ‘남성성’ 을 발견하지 못했어도, 그를 ‘배우자’ 혹은 ‘이상형’ 으로 느끼지 못했어도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것은 여태껏 한국의 남자배우들에게선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요소였다. 한국의 남자배우들이 기껏해야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했던 것은 여태까지 ‘나쁜 남자’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틱틱 거리지만 상처받은 내면을 가지고 있는 ‘싸가지’ 가 그나마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최고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준기는 그러한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서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시켰다. 위악적인 모습을 통해 억지로 상처를 숨기지 않고 모호하게 흐리는 슬픈 ‘공길’ 이란 캐릭터는 가슴 아프게 여성들을 자극한다. 상대에게 다가가 위로받고 싶지만 그것이 자신 없이 쭈삣거리는 아이 같은 모양새를 한 채 그는 말간 눈으로 관객들을 바라보았다.



공길과 수현

이준기의 이러한 캐릭터적 특성은 ‘개와 늑대의 시간’ 의 ‘수현’ 에서도 잘 드러난다. ‘개와 늑대의 시간’ 에 수현이란 캐릭터 역시, 공길과 유사하다. 수현은, 공길처럼 모든 사람이 지켜주지 못해서 안달인 캐릭터이다. 그리고 그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상처 입는다.

점점 드라마 속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변화하면서 이러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캐릭터는 점차 사장되고 있다. 세상에 그런 존재가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젠 ‘착한 캔디형’ 은 오히려 욕을 먹고 있다. 오히려 솔직한 ‘이라이자’ 가 더 호응을 얻는 시대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웃는 캔디나, 그 어떤 상황도 헤쳐 나가는 영웅은 더 이상 재미가 없다.




수현이란 캐릭터는 현대적이기 보단 과거적인 캐릭터이다. 그는 낭중지추처럼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영웅형’ 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산다. 이렇게 잘난 남자면, 누구 하나쯤 시기와 질투로 미워해도 되련만 다들 예뻐한다. (나중에 배상식과 대립하기도 하지만 케이가 배상식을 먼저 자극하지 않았다면 배상식 또한 케이를 그렇게 미워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심지어 같이 일한 시간보다 헤어진 지 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팀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수현의 인생이 기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현에게 쏟아지는 민기, 지우, 마오, 그리고 양부모님의 과도한 애정과 믿음은 신기할 정도이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이토록이나 관계 설정, 애정의 양상이 비정상적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시청자들 또한 극중 다른 인물들처럼 ‘어떻게 하면 수현을 더 잘 지켜줄 수 있을것인가’ 에 대해서 열중했다. 그로 인해서 죽은 아버지나, 그로 인해서 인생이 비틀린 민기에 대해서 애도를 보내긴 했지만, 그것을 ‘수현’ 에게 책임 지우지 않았다.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수현에 대해서 마치 하해와 같이 관대했듯이 시청자들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수현이 ‘영웅’ 에 가깝에 능력이 좋은 인물로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대부분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고 수용했다. 아마도 ‘수현’ 은 최근 드라마 주인공 중 가장 시청자들의 애정을 많이 받은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과도한 사랑을 받고 또한 과도한 능력을 가진, 최근 드라마의 경향으로 보자면 충분히 비정상적인 캐릭터인 ‘수현’ 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힘은 결국 ‘이준기’ 이다. ‘수현’ 이란 캐릭터가 대중들의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면 ‘개와 늑대의 시간’ 이란 드라마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연기력’ 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정서적인 측면’ 이었다. 단순히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변형시킨다고 해서, 단순히 액션연기를 잘한다고 해서 해결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준기는 과거 공길 연기를 하면서 보여줬던 장기를 이 드라마 속에서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아무리 악한 연기를 해도, 또 아무리 딱딱한 연기를 해도, ‘처연함’ 을 잃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처연하게 약한 모습을 기본적으로 가진 채 대중들에게 정서적으로 다가간다. 연기의 기교를 논하기 이전에 이준기는 먼저 대중들의 정서를 사로잡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관객들이 ‘논리적 타당성’ 을 따질 수 없게 만든다. 그는 ‘공길’에서 그러했듯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불행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비난도 할 수 없게 만든다. 금세라도 죽을 것처럼 아픈 사람을 보면서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그는 정서적으로 금세라도 죽을 것처럼 아픈 연기를 했고, 그래서 그의 모든 행동은 대중들에게 설득력을 얻었으며, 그 결과 ‘수현’ 이란 캐릭터는 정당성을 확보한다.

‘수현’ 이란 캐릭터는 공길과는 달리 표면적으로는 좀 더 남성적인 캐릭터였고, 그래서 공길보다는 여성들에게 ‘남자’ 로써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캐릭터이기는 했으나, 이준기가 대중들에게 정서적으로 다가간 방식은 ‘수현’ 과 ‘공길’ 모두 유사하다. 대중들은 ‘수현’ 과 ‘공길’ 모두 ‘감싸주고’ , ‘보호해주고’ 싶어 했다.

관객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이러한 이준기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은 분명 대단한 장점이다. 특히 점점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변해가고, ‘악역’ 조차 캐릭터적인 정당성을 추구하는 지금, 이준기의 대중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특성은 그가 앞으로 연기하게 될 모든 캐릭터에 ‘생명력’ 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 중 캐릭터가 비록 비현실적인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준기는 정서적으로 관객들을 감화시킴으로써, 캐릭터가 가진 비현실성을 현실로 끌고 내려올 수 있다. 이러한 장기는 베테랑 연기자들도 쉽게 가지기 어려운 것이다.



기대되는 미래

이준기는 ‘청승맞지 않게 슬프다’. 분명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슬픈데, 그것으로 인해서 보는 이들은 짜증스럽게 하거나 지치게 하거나 기운 빠지게 만들지 않는다. 분명 슬픈 캐릭터인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울하거나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축 쳐지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는 상대의 기운을 빼지 않으면서, 상대의 정서를 자극한다. 그래서 그 결과,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게’ 만든다. 그가 상대의 정서를 지치게 자극했다면, 다수의 대중들은 그를 긴 시간 지켜보는 것을 힘들어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타인의 정서는 자극하되, 그것을 소모시키진 않게 함으로써 그에게 호감을 가진 대중들의 시선을 오랫동안 묶어둔다. 그래서 결국 그 시선들을 자신의 팬으로 확보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에게 이런 능력이 없었다면 한 순간에 뜬 그의 인기는 한 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여자들이 그에게 느낀 것이 ‘남자로서의 성적 매력’ 이 아닌 이상, 여성들이 보낸 환호가 ‘이준기’ 자체보다는 ‘공길’ 이란 캐릭터의 매력에 기한 것이 더 컸던 이상, 그가 ‘공길’ 이란 캐릭터를 완벽하게 벗어났을 때 보여 지는 모습에서 다수의 대중들이 거부감을 느낄 가능성은 충분했다. 게다가 언론들의 심심풀이 땅콩으로 던져진 순간, 그의 미래는 ‘캐릭터빨’ 로 뜬 대부분의 반짝 스타들의 그것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 또한 한 순간에 추락할 유성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는 긴 호흡으로 대중들의 호기심을 제 것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그는 더 이상 ‘반짝 스타’ 라는 이름으로 그가 가진 가치를 폄하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아마도 그는 ‘공길’ 에 이어 ‘이수현’ 에 쏟아진 대중들의 정서적 호응을 특유의 긴 호흡으로 제 것으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가 어설픈 ‘변신론’ 에 휘말려서 본인이 가진 이 장기를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점이다. 그가 이러한 장기로 인해서, 배우로써 그의 미래는 무척이나 기대된다.

과연 그는 얼마나 성장할 것이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대중을 자신의 것으로 확보하게 될까?

미래를 궁금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타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것 만으로도 배우 ‘이준기’ 의 ‘가치’ 는 너무나 충분하지 않은가.


출처 : 마이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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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거의 6개월간 블로그를 자유(?)라는 이름 아래에 방치 중인 파란토마토입니다.
실은 요즘은 싱싱한 파란 토마토라기 보다는 멍들어 푸르딩딩하게 변해버린 느낌이지요. 음하하...


요즘 바람의 화원에서도 기생 정향이라는 분이 인기던데...

바람의 화원신윤복의 여인, 정향






갑자기 그동안 기생 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누가 있을까 싶어서 찾아보게 되었어요.




작년 한 해에만도 두 명의 황진이가 탄생했으니....
매력적인 기생들이 너무 많아서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네요^^.

다들 아름다운 배우들이지만 예전 배우들 구경도 할 겸,
특히 유명한 역할 혹은 작품에 출연한 분들만 몇 몇 분을 선별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중에 누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본격 기생은 아니었지만 기생이 될 뻔했던 난정이 역할을 맡았던 여인천하의 강수연씨입니다.
(어찌나 동안이신지~)

여인천하의 난정이와 윤원형강수연씨와 이덕화씨



하지만 요건 맛배기구요, 강수연씨는 사극 연기를 상당히 많이 했었고,
실제로 기생 역할을 맡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대근씨와 함께 출연한 영화 연산군에서 기생 출신의 후궁 장녹수 역을 맡으셨죠.
너무 요염하신가요? ㅋ

영화 연산군에서 이대근과 강수연연산군과 장녹수



보너스: 여인천하에서 난정이 친구 옥매향 역을 맡았던 박주미씨입니다.
이 분은 너무 단아하셔서 양반댁 규수 같은데요?

여인천하 기생 옥매향옥매향 역할의 박주미




장녹수 역할은 연산군 만큼이나 매력적인 역할이라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멋진 여배우들이 많이 보입니다.


제가 참으로 즐겁게 보았던 영화 왕의 남자에서 강성연씨입니다.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과 장녹수강성연과 정진영



장녹수 강성연정말 매력적이죠?



한편,  故 유니씨도 멋지고 매력적인 장녹수 역할을 제대로 해주셨습니다.



이때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찌나 맛깔스럽게 연기를 해주시던지...
아직도 깔깔거리던 교태스러운 웃음소리를 잊을 수가 없네요.


드라마 장녹수에서 유동근씨와 짝을 맞추어 연기해주셨던 장녹수다운 장녹수 박지영씨도 빼놓을 수가 없죠^^

박지영 장녹수박지영 장녹수




기생이 장녹수 밖에 없냐구요??


그렇진 않죠^^


아름다운 기생에는 절대 빠질 수 없는 그 이름,
황진이가 남아있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지적이며, 풍류에 예술적인 면모까지 갖추었다던 황진이...
황진이 역을 맡은 분들을 한 번 알아볼까요?


도금봉,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그간 황진이 역을 맡았던 배우들




황진이 포스터황진이 장미희



지금보면 좀 낯 뜨겁고 웃긴 포스터지만..
그 당시에는 도도한 황진이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작품, 영화 황진이에서 장미희씨입니다.

황진이장미희

황진이

황진이




지금에 비하면 여러 모로 꾸밈새가 촌스럽고 포즈가 좀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세련된 미모를 빛내주시는 장미희씨입니다.

황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생 치고는 너무도 도도하고 품격있는 모습이군요.


한편,
작년에 새로이 태어난 예인 황진이, 하지원씨입니다.

황진이하지원



제가 상상하는 황진이와 딱 맞아떨어지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굉장히 매력적인 황진이였다고 생각됩니다.


보너스: 황진이를 질투하는 황진이 친구 부용 역의 왕빛나씨입니다.

부용 왕빛나멋드러진 춤을 추고...

황진이 친구 부용 역의 왕빛나.. 속살이 비치는 한복;;을 입고...

아마도 벽계수를 유혹하는 모양입니다.


이 분 눈이 정말 크고 이쁘시네요.
황진이의 요염함과는 다르면서도 색다른 여성스러움이 흐르는 분입니다.


귀여운 송혜교씨가 황진이를 맡는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던 영화, 황진이입니다.

송혜교의 황진이 포스터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아무리 봐도 귀여운 작은 마님으로 보입니다만...
제 눈에 황진이 역할의 기생으로는 다소 불만족스럽지만 그래도 이쁘긴 이쁘네요.


이 분처럼 다소 어울리지 않는 황진이가 예전에도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너무도 착하게 생긴 선우은숙표 황진이;;

선우은숙 황진이





문득 떠오른 생각입니다...  기생은 아닙니다만...
왠지 이 분도 후보에 넣고 싶어지네요..


왕의 남자 공길이 황진이는 어떠십니까? 좀 징그러운가요? ㅋ



하하하^^;;


여러분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지금 즉시 투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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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 VS 인수대비는 정말로 라이벌이었을까?

폐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아니라 성종에게 미움받아서 쫓겨났다!??

인수대비와 폐비 윤씨


연산군을 다룬 그 동안의 많은 작품들에서처럼 인수대비(전인화)는 이번에도 폐비 윤씨와 가장 대립하는 인물로서 폐비를 궁 밖으로 내치는 장본인이며, 흔히 폐비 혹은 연산군과 역사의 라이벌로 비유되기도 한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폐비 윤씨의 강한 성품에 불만을 품었고, 폐비 윤씨를 끊임없이 압박하며 미워했다. 인수대비는 이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그녀를 사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인수대비가 임금 성종과 왕실 최고 어른이자 막후 실력자인 시어머니 정희대비(양미경)를 제치고 며느리와 극단적인 대립각을 세우며 파국을 주도했고, 결국은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폐비를 사사시켰다는 것' 모두를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고, 드라마는 패자의 편이라 양쪽 모두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기에 사건과 기록의 이면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폐비 윤씨를 죽음으로 내몬 역사 속 주인공은 과연 인수대비였을까?

일개 후궁에서 일국의 국모로 승천하다

폐비 윤씨(구혜선) 중전 책봉식


조선 초기 친여식이나 집안 여식을 후궁으로 들이는 것은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로 간주되었다. 때문에 유력한 친지나 집안 권세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입궁한 간택 후궁들은 명문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성종의 간택 후궁으로 가장 먼저 입궁한 폐비 윤씨 역시 고려 시대때부터 꾸준히 벼슬을 해온 양반 가문 출신이다. 폐비 윤씨의 부친 윤기견은 집현전에 출입할 만큼 경서와 문학에 밝았고 판봉상시사의 벼슬까지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윤씨의 어머니 신씨는 윤기견의 둘째 부인으로 태종을 도운 공신 '신숙주'를 배출한 고령신씨 가문의 여식이다. 폐비윤씨가 입궁 당시 내명부 종2품 직위에 해당하는 숙의(淑儀)의 첩지를 받은 것은 '상등급(上等級) 사대부집안' 출신으로 대접받았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

파평윤씨 명문가 출신의 정현왕후 윤씨는 같은 해 6월에 입궐했는데 그때 나이 12살로 통상적인 간택후궁의 나이보다도 더 어렸다. 그녀의 부친 윤호는 당시의 권력을 움켜쥔 실세인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양미경)의 조카뻘이 됐다. 두 숙의 윤씨가 입궐하던 당시 성종에겐 이들보다 앞서 승은을 입은 후궁, 엄귀인과 정소용이 있었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한명회에 의해 간택 후궁으로 등장한다.)


숙의 윤씨(폐비)는 아들을 낳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성종의 후궁인 소용 정씨와 엄씨였다. 소용 정씨는 초계정씨로 역시 명문가의 여식이고, 소용 엄씨는 영월 엄씨로 소용 정씨와는 소꿉친구이며 중인 집안의 여식이었다. 미색으로 따진다면 정소용쪽이 훨씬 더 미려했으며 소용 엄씨는 그저 그런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고 한다. (그럼 집안도 정소용이 좋고 미색도 뛰어난데 왜 엄귀인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는겨?)

그로부터 얼마 후 공혜왕후가 승하하며 교태전 자리가 비자 유일하게 회임 중에 있던 폐비 윤씨가 중전에 오른다. 후궁에서 세자빈이나 중전을 삼을 때 먼저 자식의 유무, 나이의 고하 등을 따져 간택한다는 세종조 관례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때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내린 교서에는 폐비 윤씨의 후덕함과 겸손함이 왕비의 자질에 적합하다고 적었지만 내심 자신의 가문 출신인 정현왕후 윤씨가 중전자리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뒷 이야기는 추후 조사 예정)


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폐비 윤씨는 중전에 오른지 석달만에 원자(연산군)를 낳으며 권력이동의 축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왕의 생모, 대비가 될 사람이라는 것만큼 막강한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일부 사서에선 상등급 사대부집안 출신이지만 자신을 뒷받침해줄 조정 세력이 미미했던 폐비 윤씨가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 과도한 애정과 집착을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폐비 윤씨는 왕비가 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성종 8년 4월 덕종(성종의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숙의권씨 처소에서 왕의 후궁 엄씨와 정씨가 중궁과 왕자를 모해하려 한다는 투서가 발견되면서부터 몰락의 길로 걷기 시작한다. 당시 사건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미진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때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측은 두 후궁을 적극 감싸는 한편 원자를 중전에게서 빼앗아 궁밖으로 보내 버린다. 성종은 중전을 폐비시켜 빈으로 강등시킨다는 교지를 내리지만 대신들은 벌떼같이 달려들어 원자를 낳은 왕비를 폐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라며 반대해 철회된다. 이는 원자를 낳은 지 4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므로, 폐비 윤씨가 권력을 탐해 일어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폐비 윤씨가 대군을 낳은 2년 후 일단락됐던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지며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결국 성종 10년 6월 윤씨는 중전에서 폐출돼 사가로 쫓겨났다.

왕과 나 폐비윤씨(구혜선) 폐출 장면

왕실의 윗전이었던 정희왕후는 원자가 사가에서 폐비와 만나지 못하도록 폐비가 폐출되는 날, 피접을 위해 궁 밖에 나가 있던 원자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한편 아직 100일도 채 되지않아 어미와 유모의 손길이 필요했던 둘째 대군을 손도 쓰지 못하게 해 5일 뒤 사망에 이른다. 성종은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에 숙의 권씨를 새로운 후궁으로 간택하여 입궁시킨다. (정희왕후는 '왕과 나'나 '왕과 비'에서처럼 인정많고 자애로운 시할머니가 아니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인수대비가 폐비 축출에 관여되지 않았다고 볼 순 없지만 당시 권력의 실세인 정희왕후나 성종의 뜻이 컷을 가능성이 많다. 기록을 살펴보아도 인수대비가 여러 사안에 의견을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성정을 간섭한 것은 정희왕후 승하 이후다. 또 왕비의 투기든 후궁들의 이간질 때문이든 왕과 폐비 윤씨 간의 언쟁이 잦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성종-폐비 부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폐비 축출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 역시 실록에 정씨의 오라비를 속량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그 출신이 천민이기에 중전자리를 노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얘기다. 이들이 폐비 윤씨를 향한 성종의 총애를 질투할 순 있지만 중전을 탐탁치않게 여긴 삼대비의 총애를 기반으로 자의든 타의든 중전폐출의 선봉에 섰을 것으로 보여진다.


성종은 왜 폐비윤씨를 버렸나

성종은 조선조를 통틀어 부인이 가장 많았던 왕 가운데 한명이다. 성종은 공혜왕후 한씨와 폐비윤씨 정현왕후 등 계비 2명, 그리고 9명의 후궁 등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신하들중엔 왕이 후궁을 너무 많이 두는 것에 대한 우려의 상소를 올린 사람도 있을 만큼 여자를 좋아했던 정력가이다. (어우동과의 로맨스에서 이생원이 진짜 성종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성종이 그만큼 여자를 좋아했기에 그런 얘기도 떠도는 것이겠지.) 성종의 이런 성향들이 실제 폐비 윤씨의 투기로 이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가정의 분란을 끊이지 않게 한 원인이 됐고 이는 부부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폐비의 사사가 성종의 의지였는지 인수대비의 뜻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기에 폐비 윤씨를 다룬 사극마다 해석이 분분하다. 이덕화가 주인공인 드라마 한명회(1994년)에서는 인수대비(김영란)도 폐비(장서희)를 싫어했지만 무엇보다 성종(박진성)이 폐비에 대해서 냉정하게 돌아선 것으로 표현했고, 박지영, 유동근 주연의 장녹수(1995년)에서는 성종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지만 인수대비(반효정)의 의견이 강했던 것으로 표현했다.

왕과 비(1998년)에서는 성종(이진우)이 굉장히 미화되어 성종은 폐비, 사사 둘 다 원치 않았으나 인수대비(채시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 폐비를 사사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최근작 왕과 나(2007년)에서도 성종(고주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인수대비의 명을 따른 것으로 나온다.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는 성종은 중전을 폐출시키던 당시 폐비에 대한 증오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폐비가 끝까지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던 방술책 문제에 대해 배후 조사를 청한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중전이 후궁 측을 모함한 것으로 몰아간 비상과 투서에 대해서는 중궁전의 궁녀들을 고문한 끝에 원하는 답을 들은 후 참수했다.

또 성종은 중전의 폐위문제에 대해 대간과 성균관 유생 65명이 죄도 명확하지 않은 중전을 폐비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상소를 올렸음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폐출돼 사가로 나간 폐비에게 일절 도움을 허락하지 않는 냉정함을 보였다. 심지어 폐비 윤씨가 폐출되기도 전 후궁간택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며 윤씨를 사사한 다음날에는 그의 일가 모두를 매우 혹독한 지역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가족과 떨어져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폐비는 기초 식량조차 부족했고 백성들은 가엾다고 그녀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성종은 이조차 금지시키고 벌을 내려 폐비를 내외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다고 하니 폐비 사사에 성종의 뜻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폐비 사사 후에도 성종은 여전히 폐비를 용서하지 못하는 인상을 보여주었는데, <성종실록> 성종 20년, 5월 16일자에 이 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옛날 일을 생각하면 한밤중까지 두려워하며 홀로 앉아 잠못 이룬 날이 그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비록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혼령에게 어찌 원통함이 있겠으며, 내가 어찌 불쌍한 생각이 들겠는가?"

이런 마당에 폐비의 불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오직 인수대비였다는 것은 여자에게 뒤집어 씌우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관들과 이를 무분별하게 영상화한 작품들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성종이 그토록 총애했던 폐비 윤씨를 미워하게 된 연유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용안에 상처를 냈다는 것은 성종 스스로 발표했던 교서에도 없던 내용이며 투기를 심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실록이 분명한 설명을 해주지 못 하고 있다. 비상사건 역시 명확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종은 처음에 그녀를 사랑했으나, 나중에는 열렬히 미워했다는 슬픈 진실이다.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서 필요한 말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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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1(조선야사실록) 상세보기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펴냄
고 고우영 만화가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재출간된 장편 만화 『연산군』 제1권. 정사(正史)의 뒤안길에 숨겨진 또 하나의 역사인 야사(野史)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다. 신문에 연재되면서 광고 게재로 삭제된 부분과 기존에 출간된 책에서 검열된 부분을 복원하였다. 이 작품은 구어와 비속어를 거침없이 구사하고, 오늘의 갑갑한 현실과 역사에서 입증된 진리 사이를 거리낌없이 가로지른다. 또한 상식을 뒤엎고 편견을

2006년 4월25일 故고우영 화백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고인의 장편 만화 중 『오백년』4권과 『연산군』3권을 묶어 새롭게 『조선야사실록』7권 세트로 제작된 책이다. 연산군의 탄생부터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되 “폭군” 이미지에 치중하던 기존의 이야기와는 달리, 불우한 성장과정에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연산군의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정사보다 더욱 사실적인 야사를 만들어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만화가 고 고우영 작가님의 작품이라서 더욱 기대가 된다. 도서관 갈 때마다 고우영 작가님 작품이 있는지 살펴보아도 없더니..ㅠ  영화 <왕의 남자>와 비교하여 야사(野史) 특유의 감칠맛 나고 숨 막히는 전개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아마 고우영 작가님 특유의 성적 농담과 화끈한 묘사가 많이 나올 것 같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 연산군 중종과 그 신하들) 상세보기
김범 지음 | 역사비평사 펴냄
조선조 사화와 반정의 시대를 재조명하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는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정치 변혁의 시대에 펼쳐진 권력 투쟁을 살펴보는 책이다. 국가 체제를 완성한 성종, 그에 대한 반발과 균열을 보인 연산군, 다시 왕권을 둘러싼 체제 정비를 시도한 중종까지 3대 75년간의 정치 투쟁을 다루었다. 세 왕과 신하들의 권력 관계는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압축한 중요한 특징들을 지녔다. 저자는 세 왕이

이 책 내용에 대한 저자 김범의 자세한 설명 보러가기

이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책이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폭군의 멍에를 벗긴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지식산업사 펴냄
연산군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한 책. 성리학의 기준에 따라 연산군을 평가하는 기존의 평면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연산군을 힘의 논리에 따른 역사적, 이념적 희생자로 보았다. 연산군의 통치 전반을 종합적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 저자 소개 지은이_ 신동준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한겨레》기자. 서울대, 외국어대 강사. 21세기 정치연구소 소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살림 펴냄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말하는 통치 리더십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조선 역사에 묻는다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는 조선의 왕과 신하를 통해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된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조선이 패망한 근본 원인을 왕권이 미약하고 신권이 강한 '군약신강'의 왜


연산군에 대한 호의와, 그의 폭정을 신권과 왕권의 대립에서 보는 관점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인 것 같아서 뒤져보니, 역시.. 같은 저자였다. 역시 사람의 관점이 바뀌긴 쉽지 않나보다.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한명회의 신봉승 작가님이 연산군을 광인으로 보고 이와 반대로 드라마 왕과 비, 장녹수의 정하연 작가님이 연산군을 가엾게 보는 것처럼) 이 분은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도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상당히 구구절절히 펴시더니 이 책에서도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당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분 의견에 100%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연산군 초기에 왕권이 대폭 강화된 건 사실이니 작가의 주장 중 일부는 동의한다. 예전 사극에는 연산군 일기의 내용을 고대로 받아들여서 연산군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인 것으로 나왔지만
연산군이 처음부터 싸이코는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고도 그렇게 밖에 행동 못한 것은 100% 연산군의 책임이다. 이때는 왕권 강화고~ 신권 제압이고~ 이런 건 안중에 없고 이미 정신줄 완전히 놓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리뷰들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몇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중간의 흥미로운 부분만을 발췌했으므로 전체 서평을 보고 싶으면 링크를 눌러서 미디어 리뷰를 확인하시길.)


조선왕조 역사로 보는 `통치 리더십`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시대의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는 조선의 역사는 신하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는 신하들의 눈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봤다는 것. 저자는 실록에 명군으로 기록된 임금들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임금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들은 대부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개혁가들임을 강조한다.

그 예로 신 소장은 패도정치라 불리는 세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왕도와 패도는 적절히 섞어 사용해야하는데, 치세(治世) 시는 패도보다는 왕도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게 되고, 반대로 난세(亂世)의 경우 강력한 리더십을 요하기 때문에 패도 사용이 높게 된다""큰 틀에서 보면 세조가 패도를 구사한 것은 맞지만 시대적 상황(계유정난 등)이 그를 패도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한 저자는 조선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세도정치`를 꼬집고 있다.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정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초기에 비해, 신하가 왕을 바꾼 중종반정 이후, 신권이 왕권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다. 이로써 조선 중기와 후기로 와서 국가는 점점 쇠약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부국강병이 왕과 국가의 목표이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신권이 제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이명박 당선인에게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직면해 있기도 하다.


“조선왕조, 공자의 修身齊家 치중… 治平學에는 소홀”

“평화시에는 왕도정치가 필요하더라도 비상시에는 패도정치가 불가피한데 조선은 중화질서 아래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학문이 수제학으로만 치우치고 치평학의 전통을 망각했습니다. 특히 ‘경연’을 통해 주자학자로 키워진 조선의 국왕에게 이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BOOK책갈피] 조선은 신하들이 말아먹었다며?


역사 상식은 역사책에서만 얻는 게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재미있으라고 각색한 얘기를 그런가 보다 하며 정사로 받아들인다는 점. 이 때 사실과는 동떨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생겨나는 법이다.

영화 ‘왕의 남자’, 소설 『단종애사』(이광수)와 『금삼의 피』(박종화)가 좋은 예다. 세조와 연산군을 여지없이 폭군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신문기자 출신의 정치학자인 저자는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한다. 세조와 연산군 모두 신권(臣權)의 발호를 억누르려다 그 같은 오명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조카의 보위를 찬탈했다는 세조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산군도 사림 세력을 견제하려다 쿠데타로 실각한 비운의 군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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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이야기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이 글을 얼마 전에 발견해서 비공개하고 있다가 지금은 승복이님의 블로그가 아예 사라져 버린 관계로 공개처리했습니다.


이제는 원로 축에 끼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동시에 조선 시대 사극을 들고 오고, 김종학이 판타지 사극을, 정하연이 이방자 여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대극을, KBS에서는 <대조영> 의 후속작으로 <세종대왕> 을 제작할 준비를 마치면서 2007년 하반기와 2008년 상반기는 때 아닌 '사극' 열풍이 불어 닥칠 전망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방송됐던 사극들은 어떠한 인물들을 주로 다뤘을까. 재미로 알아보는 대한민국 사극의 단골 손님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후보 1.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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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극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흥행카드' 라고 한다면 단연 연산군이다.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고 고아와 마찬가지로 자라나며 삐뚤어지기 시작한 연산군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 주위를 둘러 싼 권력 암투와 2번에 걸친 사화, 요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폐륜 등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담아내며 사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갖췄다.  

1962년 영화 <연산군> 에서 신영균이 열연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 이 후로, TV판 '연산군' 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971년 TBC <사모곡> 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때 연산군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배우는 바로 우리에게 <사랑이 뭐길래><딸 부잣집> 등으로 친숙한 배우, 김세윤. 김세윤의 뒤를 이어서는 1985년 MBC <조선왕조 500년-설중매> 에서 임영규가 연기한 바 있고, 1987년에는 영화 <연산군> 에서 배우 이대근이, 1994년 KBS <한명회> 에서는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 이민우가 연산군을 맡아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1년 뒤인 1995년 KBS <장녹수> 에서는 유동근이, 1999년 KBS <왕과 비> 에서는 안재모가 각각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로 안방 극장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가장 최근에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는 영화배우 정진영으로 1000만 관객 돌파의 신화를 낳은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어머니를 잃고 광기 어린 영혼을 소유하게 된 연산군 역을 실감나게 연기해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는 누구일까.

시청률로만 따지고 보자면 <왕과 비> 의 안재모로 그 당시 최고 시청률이 44.3% 를 기록했을 정도. 녹록치 않은 경력을 지닌 연기파 채시라와의 연기대결은 <왕과 비> 의 사상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데 1등 공신이라 할 만하다.


후보 2. 장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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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하면 떠오르는 여자하면 당연히 장녹수다. 연하의 연산군에게 장녹수라는 존재는 아내이자, 첩이었고, 어머니였다. 연산군 시대의 개막과 함께 그를 파멸로 이끌고 결국은 자신까지 돌무더기 무덤 속으로 들어간 시대의 요부.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지금까지도 연산군과 함께 한국 사극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 '요부' 를 실감나게 그려 낸 인물은 누가 있을까. 1971년 <사모곡> 에서 김세윤과 호흡을 맞춘이는 이제 원로 배우 소리를 듣는 고은아이고, MBC <설중매> 에서는 '섹시배우' 이미숙이, 영화 <연산군> 에서는 강수연이 장녹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자타공인 최고의 장녹수는 KBS <장녹수> 의 박지영으로 유동근과의 연기 앙상블이 빛났을 뿐 아니라 장녹수가 살아 돌아온 듯 한 실감나는 연기력으로 대내외적인 찬사를 받았다.

19999년 <왕과 비> 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故 이혜련이 안재모와 호흡을 맞춰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고, 작년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배우 강성연이 '녹수' 역을 맡아 남성 중심의 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뽐내는 등 수많은 스타들이 장녹수라는 캐릭터를 거쳐갔다. 연산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본 것은 장녹수가 아니라 수근비였으나 여전히 장녹수라는 인물은 스타들이 탐을 내는, 연산군과 운명을 같이 한 '매력' 있는 '여성' 인 셈이다.


후보 3. 인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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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이 등장했으니 '인수대비' 가 없을 수 없다.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지만 '폐비 윤씨' 의 사사사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연산군과 인수대비는 조선 500년 역사 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폐륜으로 그 끝을 맺었다. 20대에 청상과부가 되어 잠저로 나온 뒤, 예종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밀어 올리고 훈구파와의 강력한 결탁으로 성종 시대를 안정을 추구했던 한 여걸의 죽음이 그토록 비참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이자 아픔이다.

우리에게 '소혜왕후' 라는 이름보다 '인수대비' 라는 이미지로 더욱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 이 캐릭터는 지금까지 수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거쳐갔다. 이제는 영원한 배우로 기억되는 황정순 선생을 비롯해 영화 <연산군> 에서는 중견배우 정혜선이, <설중매> 에서는 고두심, <장녹수> 에서는 반효정, <한명회> 에서는 김영란, <왕과 비> 에서는 채시라,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윤소정 등이 열연했다. 특이한 점은 정혜선이나 고두심, 채시라 등의 여배우들이 모두 20~3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역을 소화했다는 것.

인수대비의 파란만장한 삶을 20대부터 그려내려다 보니 비교적 젊은 배우를 기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테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으로 보자면 모두 자타공인 '연기파' 들이 이 역을 거쳐갔으니 인수대비야 말로 '연기파 제조기'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에게 지금까지도 소중한 교훈을 남기고 있는 모양이다.


후보 4.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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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최고의 간신이자 사육신과 대비되는 조롱의 대상이면서도 왕권이 약화되던 단종시대를 철인군상과 같은 의지로 뒤엎고 결국은 성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명신(名臣)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린 한명회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평가 되면서 그 역사적 명성을 달리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사육신 띄우기' 로 명성에 흠집을 냈던 한명회는 이제야 제 위치를 찾으며 역사적으로 받아 마땅한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이 유명한 칠삭동이를 맡은 배우들은 정진, 이덕화, 최종원 등. 특히 정진 같은 경우에는 70~80년대 문화를 향유했던 사람들에게 최고의 '한명회' 로 기억되는 인물로 지금 보아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다. 이덕화는 자타공인 가장 유명한 한명회로 회자되는 배우로서 신봉승이 쓰고 그가 타이틀롤을 맡았던 드라마 <한명회> 는 여전히 KBS 가 자랑하는 사극 중 하나로 남아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안목도 달라진다. 미래의 한명회는 우리에게 또 어떤 인물로 기억 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공과' 를 둘째치고서라도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한명회' 라는 이름이 미친 거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리라.


후보 5.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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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여자가 아닌 다음에야 후세에 그 이름이 남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천한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일진대 오직 단 한사람, 명월 '황진이' 는 그러한 평가를 거부한다. 양반 출신의 여성으로 태어나 기생의 길을 택한 여자.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 로 불리우는 조선 최고의 여성 문학가. 벽계수를 골탕 먹이고 지족선사를 파계시키며 세상을 발 밑에 둔 여성. 그것이 바로 기생 황진이의 정체다.

요부의 이미지와 순결한 문학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황진이는 1957년 영화 <황진이> 에서 처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대한민국 최초로 황진이를 연기한 이는 전설의 스타 도금봉. 그 이 후, 강숙희,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 등이 그 뒤를 이으며 이 매력적인 기생 아니, 시인의 일생을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담아내고 있다.

최근 영화 <황진이> 가 개봉되면서 송혜교의 '황진이' 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개인적으로 한마디 덧 붙이자면, 영화 자체의 매력과는 상관 없이 송혜교는 그 위치에서 충분히 잘 해냈다. 송혜교의 황진이가 하지원의 황진이보다 매력적이지 못했던 까닭은 하지원이 송혜교보다 월등히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황진이에 대한 작품의 접근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송혜교는 <황진이> 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 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후보6. 김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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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광해군,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사랑한 여자였던 김개시는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쟁의 역사 속에서 그 요망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선조의 독살설과 인목대비에 대한 핍박, 광해의 실책에 모두 관련되어 있는 김개시는 일개 상궁의 신분으로 대북 정권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정사를 좌지우지한 요화였으니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테지만.

이 요화를 연기한 이는 <회천문> 의 원미경, <서궁> 의 이영애, <천둥소리> 의 이주화, <왕의 여자> 의 박선영 등이고 이들과 함께 광해군을 연기한 이는 이희도, 김규철, 김주승, 지성, 김개시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적 입장에 서 있던 인목대비는 권재희, 이보희, 이현경, 홍수현이 열연했다. 개인적으로 <서궁> 의 이영애와 이보희의 연기는 나름대로 재밌게 본 편이다.


후보 7.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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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글에서 자주 했고, "역대 장희빈" 에 관한 글까지 이미 쓴 상황에서 더 할 말이 무에 있을까 싶으랴만은 해도 해도, 봐도 봐도 재밌는 것이 바로 '장희빈' 이다. 1대 김지미, 2대 남정임, 3대 윤여정, 4대 이미숙, 5대 전인화, 6대 정선경, 7대 김혜수로 이어지는 장희빈의 역사는 곧 한국 사극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장희빈> 이 만들어 질 때는 항상 '장희빈을 재평가 하겠다.' 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지만 결국은 '현모양처' 인현왕후와 '악녀' 장희빈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시청자의 이목을 끈다는 것. 아직도 장희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악녀와 요부' 라는 차원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장희빈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려 했던 김혜수의 <장희빈> 이 나중에서는 그저 '독한 여자' 로만 기억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장희빈은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이미 역사라는 차원을 넘어서 한국 사극에서 가장 '쓸 만한' 캐릭터로 자리 잡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인물이다. 여자vs여자의 싸움에, 선과 악이라는 극명한 대립을 즐겨하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굳이 거스르면서 바꿀 필요는 없다. 장희빈에 대한 재평가는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학계에서 하면 될 일이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그렇다면 이들과 호흡을 맞춘 인현왕후는 누가 있을까. 1대 도금봉을 시작으로 2대는 태현실, 3대 김민정, 4대 이혜숙, 5대 박순애, 6대 김원희, 7대는 박선영이 맡았다.


후보 8.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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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 문학의 정수라고 일컬어 지는 <한중록> 의 지은이로 유명한'혜경궁 홍씨' 는 지금껏 정치적인 이유로 남편 사도세자를 여읜 비운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오히려 사도세자의 구원 요청을 차갑게 외면한 것은 바로 혜경궁, 그 자신이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남편에게 -그것도 정략결혼을 한 남자에게- 그녀는 사랑도, 애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버리는 대신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올인'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에도 사도세자의 씨앗인 정조를 그대로 왕위에 올린 이유는 혜경궁 홍씨의 강력한 의견 표명이 단단히 한 몫을 거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버리되 자식까지는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은 정조를 제거하려는 친정 집안의 움직임에 격렬히 반대하고 정치적 공세를 펼침으로써 마침내 '정조시대' 를 열어제쳤다.

정조 시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일에 관련해 자신의 가문인 풍산 홍씨가 풍비박산 나게 되자 그녀가 꺼내든 카드가 바로 그 유명한 <한중록> 임은 이미 유명한 사실. '한가한 날의 기록' 이라는 뜻의 <한중록> 은 끊임없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친정을 옹호함으로써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 돌파구 역할을 했다. 재밌는 것은 <한중록> 을 쓰던 혜경궁 홍씨의 나이는 이미 70 줄이었으니, 그녀야 말로 영조와 정조 시대를 관통하는 진정 노회한 정객이었던 셈이다.

이야기로 잠시 딴데로 새버렸는데 다시 돌아와서 '혜경궁 홍씨' 를 맡은 여배우는 누가 있을까? MBC <안국동 아씨> 의 김영란을 시작으로, <한중록> 의 최명길, <하늘아 하늘아> 의 하희라, <대왕의 길> 의 홍리나 등이 바로 혜경궁을 연기한 배우들이다. 


후보 9.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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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이라는 빛나는 이름과 '쇄국' 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동시에 쓰고 있는 인물, 흥선 대원군. 상가지구로 시작해 조선말 가장 혁신적인 개혁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의 삶은 드라마로 그려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권불십년' 이라는 말처럼 10년만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끊임없는 정치적 재개로 결국은 을미사변이라는 역사적 책임을 떠 맡을 수 밖에는 없었던 사람. 

대원군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카리스마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로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의 김승호를 비롯하여, <민비> 의 김성원, <풍운> 의 이순재, <대원군> 의 임동진, <찬란한 여명> 의 변희봉, <명성황후> 의 유동근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이순재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연기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바로 <풍운> 을 꼽기도 했는데, 그 만큼 대원군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후보 10.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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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가 나왔으니 며느리가 빠질 수 없다. 바로 '명성황후' 가 그 주인공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였던 그녀는 1895년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시해당하기 직전까지 조선 정계를 쥐락펴락 했던 진정한 여걸이었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적에서는 '공' 보다 '과' 를 더 많이 찾을 수 밖에 없겠으나, 그녀의 죽음과 함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은 명성황후라는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영향력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리했고, 드라마에서도 여과없이 반영 됐다. 그러나 대부분 드라마들은 명성황후에게 있어서 '관대한' 시각을 가졌을 뿐더러 미모의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에 앞장 선 편이다.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에서 원로배우 최은희가 김승호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대중문화사에 등장한 '명성황후' 는 <민비> 의 김영애가 그 바통을 이어 받으며 브라운관에 진출했고, 다시 한 번 김영애가 <풍운> 에서 열연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영애 이 후에는 <대원군> 에서 연기파 김희애가, <찬란한 여명> 에서는 하희라, <명성황후> 에서는 이미연, 영화 <한반도> 에서는 강수연이 맡았다.

지금 젊은 층에게 가장 사랑받는 명성황후는 이미연으로서 그 동안의 강인하고 독한 이미지를 순화시키고 마치 멜로물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을 투영함으로써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조선으로.

최근 <주몽><대조영> 의 경향으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를 벗어난 '탈조선화' '반조선화' 현상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고려 시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태조 왕건> 이 후에, <제국의 아침><무인시대><신돈> 등은 고려시대를, <주몽><연개소문><태왕사신기> 등은 고구려를, <대조영> 은 발해를 다룸으로써 조선이라는 시간을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의 움직임을 보면 한국 사극은 다시 '조선' 을 주목하고 있다.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왕과 나>, 정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리려는 <이산 정조>,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등은 이미 편성이 거의 확정 된 상태로 'Come back 조선' 을 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과 비><신돈> 의 정하연과 <내 남자의 여자> 에서 열연중인 김희애가 손을 잡고 <비운의 이방자 여사> 를 준비중이어서 또 다른 근대사의 비극을 보여 줄 참이다. 왜 그들은 다시금 조선에 주목하기 시작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조선' 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시청자들에게 긴밀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연산군, 장녹수, 인수대비, 장희빈, 정난정, 영조, 정조, 혜경궁, 대원군, 명성황후 같은 인물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친숙도는 이미 40여년간 지속되어져 왔으며 그것이 비록 '식상' 하다고 할지라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 올 수 밖엔 없다. 한국 최고의 사극 감독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닳고 달은' 연산군과 정조를 들고 나온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사극들은 조선으로 컴백한 것일뿐 인물에 컴백한 것 같지는 않다. <왕과 나> 도 연산군이 아닌 김처선이 주인공이고, <이산 정조> 도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영조나 사도세자, 혜경궁이 아니라 바로 정조의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기 ?문이다. 친숙한 배경과 신선한 캐릭터로 무장한 2007년 사극들. 그들은 과연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한국 사극의 역사, 그 역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다,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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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조선판 마녀사냥, 장희빈의 고정관념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역사 훑어보기
역대 최고의 연산군은 누구? 당신의 투표를 기다립니다 (동영상 비교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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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폐비 윤씨의 죽음을 연산군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폐비 윤씨 사사, 과연 역사 속 기록과 드라마 속 그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폐비 윤씨의 죽음이 야사 속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연산군은 어떻게 그녀의 죽음을 알았을까. 정말 금삼의 피를 보고 알게 된 것인가?

정태우 연산군의 광기어린 눈빛 연기


왕과 나(왕과 비) VS 조선왕조실록 및 야사서의 역사기록을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 야사서(기묘록, 송와잡기, 파수편, 아성잡기)의 기록을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서 비교해보아요~
 



1.
폐비는 정말 성종의 얼굴에 흠집을 내었을까?

기묘록
폐비 윤씨와 연산군을 주인공으로 삼은 사극이나 영화 속에서 빠지지 않는 두 가지 사건은?

바로 폐비 윤씨(구혜선)가 성종(고주원)의 '용안에 흠집(손톱자국)을 낸 사건'과 '금삼의 피'로 불리는 피묻은 적삼이 연산군에게 건네진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대한민국 대중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비단이나 적삼은 현재에 남아있지 않다.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에는 '금삼의 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정사에는 없지만 '금삼의 피'는 여러 야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성종 용안에 흠집을 낸 사건은 연려실기술의 기묘록에 기술되어 있다.

기묘록에는 "..여러 후궁들 양가(良家)의 엄씨(嚴氏)와 정씨(鄭氏)를 투기하고 임금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났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크게 노하여..."라고 적혀있다.




2. 폐비에게 사약을 건넨 이세좌 부인의 한탄
"어머니가 죄없이 죽으니 아들이 훗날 보복하지 않겠느냐"


폐비윤씨의 죽음을 다룬 야사서들도 재미있다. 이들 야사서에서는 폐비윤씨의 죽음을 정당하게 표현한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폐비윤씨의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다.

기묘록에는 "윤씨는 폐위되자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궁중에서는 훼방하고 중상함이 날로 더하였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더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그 내시를 시켜, “윤씨가 머리 빗고 낯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대답하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와잡기서에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한 이세좌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세좌가 사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약을 내려 죽였다"고 답하니 그 아내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없이 죽었으니 아들이 훗날 보복을 않겠는가"고 울었다' 고 한다.





3. 김처선이 소화에게 사약을 바쳤다?

드라마 속 김처선(오만석 분)은 평생을 사모한 소화(구혜선)에게 직접 사약을 바쳤다. 어쩔 수 없이 사사를 명한 성종(고주원 분)이 평생의 정인 소화가 가는 마지막 길을 처선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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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역사와 다르다. 그렇다고 작가가 허무맹랑하게 만들어낸 역사 왜곡은 아닌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성종은 폐비 윤씨를 사사하라는 어명을 좌승지 이세좌에게 내렸다. 그러나 이세좌는 폐비를 사사할 경우 연산군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성종의 명을 따르기를 주저했다. 이세좌는 "나는 폐비의 얼굴을 모른다"라고 핑계를 대며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길 두려워했다. 이세좌의 말에 성종은 이세좌에게 폐비윤씨의 얼굴을 아는 내시 한명과 동행할 것을 허락했고 결국 이세좌는 내시 한 명과 함께 폐비의 사가로 향했고 사약을 건넸다. (참 운도 없지;;)

김처선이 윤씨와 관련하여 사료에 언급된 사례로는 <성종실록> 성종 10년(1479) 6월 3일자 기사를 들 수 있다. 성종이 김처선을 시켜 대비에게 윤씨 폐비에 관해 보고했다는 기록이다. 사료상으로 볼 때, 김처선과 폐비 윤씨가 관련된 사례로는 이 정도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의 기록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정할 수 없다.

그럼, 김처선이 사약 마신 폐비 윤씨를 등에 업는 <왕과 나> 제51회 장면은 어떻게 된 것인가?

김처선(오만석) 등에 업힌 폐비(구혜선)

<성종실록> 성종 13년(1482) 8월 16일자 기사에 따르면, 성종 임금이 윤씨의 사사 현장에 파견한 내시는 김처선이 아니라 조진이라는 인물이었다. 사료상으로 볼 때에, 김처선이 윤씨의 최후를 목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왕과 나'의 유동윤 작가는 이같은 역사적 사료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극을 만들었다.





4. 조선을 피로 물들인 금삼의 피(피묻은 적삼)는 실제로 있었을까?
야사 속 윤씨 유언 "연산군이 목숨을 보전하면 피묻은 적삼을 보여 내 원통함을 말해달라"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폐비 윤씨(※그녀의 머리모양과 비단옷은 역사 왜곡)


야사 속에는 피묻은 적삼이 연산군에게 전해진 에피소드가 상세히 나와있다.

기묘록에는
'사약을 먹은 폐비 윤씨가 피묻은 수건을 어머니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연산군)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 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폐비 윤씨의 묘인 회릉은 연산군이 거동했던 태조의 묘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이후 어머니 신씨가 나인과 통해 연산군에게 원통함을 호소하며 수건을 올렸더니 연산군이 놀라서 슬퍼했다.

파수편에도 관련된 글이 있다. "윤씨가 죽을 때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하얀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폐주에게 전해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고 적혀있다. 재미있게도 파수편은 폐비윤씨 사사사건을 두고 성종을 꾸짖고 있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5.
어린 연산군은 친어머니인 폐비를 몰랐을까?

동시대를 다룬 드라마인 '왕과 비'를 포함하여 대다수 연산군 드라마들이 '금삼의 피'를 받은 연산군이 그때서야 윤씨의 죽음을 알게된 것으로 그린 반면에 '왕과 나'는 그 시점을 대폭 앞당겼는데 드라마 '왕과 나'는 역사와 다르다.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피묻은 적삼 일화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지 않다. 다만 즉위 후 연산군이 성종의 묘지문 관계로 우연히 폐비 윤씨의 아버지 이름을 듣고 궁금해하다 폐비 윤씨 사사를 알게 됐다고 적었다. 실록(연산군 1년 3월 16일)은 이 때의 연산군을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廢位)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고 전한다.

기묘록이나 파수편 등의 야사서에도 폐비윤씨 사사가 알려진 시점이 연산군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로 기록돼 있다. (※영화 왕의 남자의 연산군 정진영을 제외하고 드라마 한명회의 연산군 이민우, 장녹수의 연산군 유동근, 왕과 비의 연산군 안재모는 폐비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외할머니 신씨에게 피묻은 적삼을 받으면서 폐비 사사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6. 정현왕후와 연산군의 관계는 좋았을까?

조선왕조실록은 폐비윤씨에 이어 중전에 오른 정현왕후(이진)가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보살폈다고 나와있다.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를 친어미로 알고 따랐다고 적고 있다. 이는 별로 믿어지지는 않는 기록이다. 반정의 주역들이  '연산군이 정현왕후나 성종, 인수대비의 구박 때문에 비뚤어졌다'고 적지는 않을 것 아닌가.

재미있는 야사 기록이 있다. 연산군이 어머니가 폐비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다.

아성잡기에는 연산군이 성종에게 거리에 나갔다가 어미 소의 젖을 맛있게 빠는 송아지를 본 일을 고하며 "미물도 저렇게 키워주는 어미가 있는데 어째서 나에게는 나를 키워준 어머니가 안 계신단 말이냐? 송아지가 어미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소가 소리를 하면 송아지도 소리를 내어 응하니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장 부러웠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7. 연산군은 원래 성격이 광폭했을까?

학자에 따라서는 그가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스런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었던 사실에서 찾으려는 경향도 없지는 않다. 연산군이 어머니의 죽음을 안 후 성격이 광폭해졌다고 전하는 야사서도 있다. 파수편에는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죽음을 안 후 성정이 광폭해졌으나 등극 초기엔 총명하고 사리분별이 뛰어난 왕으로 알려졌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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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록의 기록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연산군 일기는 그의 시적 재능까지도 유치하다며 연산군을 깎아내리기는 하지만 사실적인 기록을 살펴보아도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누명(?)을 벗기는 어려워보인다. 애써 그를 비하할 필요도 없을 만큼 연산군의 기행은 무자비하고 엽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이 생모의 비참한 최후를 똑똑히 안 것은 그가 즉위한지 10년이 지난 4월이다.  

비교적 체통을 유지하고 있는 실록 《연산군일기》에서도, 그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능력도 없던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정계와 연산군과의 사이에는 부지불식간에 갈등이 일어났고, 여기서 그는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긴 끝에 경연과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을 하였으며, 기타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버렸다.
왕과 비 연산군(안재모)와 인수대비(채시라)


이처럼 야사는 폐비윤씨에 대해 정사와는 사뭇 다른 시각으로 담고 있다. 대중들이 알고 있는 폐비 윤씨에 대한 이미지는 흥미를 위해 야사를 마구 수용한 작품들의 책임이 크다.

야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 정사가 아무리 승리한 자의기록이라고는 하나 정사를 바탕으로 하고, 야사를 참고로 해야 올바른 역사의 인식이 가능할 것이다. 야사는 시대상이나 생활상을 유추하는데 도움을 받고 풍부한 살을 붙이는데 도움을 주는 사서이다.

그러나 야사에 적힌 기사들을 '진실한 역사'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역사왜곡이 시작된다. 야사는 어디까지나
정사에서 지워지거나 생략된 부분을 보충하는 정도로 그쳐야 한다. 야사는 결과론적으로 그린 이야기가 많고, 또한 책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편협한 시각으로 야사를 100%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역사왜곡의 지름길이다.

폐비 윤씨와 연산군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정사와 야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행간에 숨은 뜻을 잘 찾아내고, 그에게서 교훈을 얻는 것으로 그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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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사극 속의 연산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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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계신 신사숙녀 언니옵하 누나형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드디어 왕과 나에 성인 연산군이 등장합니다.. 제가 이 날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지요.. 흑흑.ㅠㅠ
왕과 나에 연산군이 등장하려고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나봅니다. 
마치 10년 만에 보는 님 보듯 두근두근하는 내 심장 같으니라구~ 음하하..

역대 연산군 모음 - 최고의 연기력과 광기를 보여주는 연산군역 배우들 모음

위에서부터 정진영, 정태우, 임영규, 이민우, 유인촌, 유동근, 안재모, 신영균



연산군은 조선왕조 아니 우리나라 전 역사를 다룬 사극에서 주인공으로 가장 자주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여러 연산군들끼리 연기 비교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실은 역대 연산군으로 투표를 하고 싶었는데 왕과 나 연산군까지 포함을 시켜야한다는 요상한 사명감에 사로잡혀서 여태까지 아기다리고기다리었습니다. (30년도 더 된 유머죠. 눼눼. 죄송합니다.) 다른 작품에서의 내시 김처선과 김자원도 비교해보세요~

우선 객관적인 선택을 위해서는 작품과 캐릭터 성격에 대해서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각자의 매력이  흘러 넘쳐서 고르기 힘듭니다.

먼저 오래전 영화에서 활약해주신 신영균 연산군..
광기는 별로 안보이는 신영균 연산군


당시 사극은 뭐 옷을 찰흙으로 만들었는지.. 왠 한복 색깔이 저리 눈부신 보라색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고증까지 잘 하기가 쉬웠겠습니까? 고증 따윈 필요없어~ 적당히 이해하시면서 봐주시고요.

저 때는 조선왕조실록이 국역 완역되어 있지도 않았고, 지금에 비해서 영화 제작 환경도 나빴기 때문에 고증을 따지는 건 저한테 '이효리 춤 따라하면서 표정까지 뇌쇄적으로 지으라'고 하는 요구와 같다고 봅니다. 어쨋든 이 분의 연산군 연기는 과잉된 듯한 느낌이면서도 확 폭발하는 부분이 없으니 좀 갑갑합니다. 딱히 나쁘다고 생각은 안하지만 특유의 구식 연기 스타일 때문에 몰입은 상당히 힘드네요.


유인촌씨는 왕 역할을 도맡아 하셨던 분인데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라는 영화에서도 활약해주셨고, 저는 잘 모르지만 연극에서도 연산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SBS 드라마 임꺽정 초반부에서도 연산군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다음은 각각 영화 연산일기와 임꺽정에서의 유인촌씨입니다.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에서의 연산군 유인촌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에서의 연산군 유인촌(갑자사화 일으키기 전 문제의 술 따르는 장면이죠.)



연산군 연기 좀 봤다~~ 하시는 분들은 이 연기를 보고 최고라고 감탄에 감탄을 하시더군요.  


자원아, 활을 준비해라. 조선 최고의 활에 독화살을 재어서
우리 어머니를 죽인 원수들의 가슴에 피꽃을 피우자.  피꽃을.

뭬야? 그 놈 초상 끝나는 대로 사약 한 사발 퍼 멕여라.
우리 어머니가 먹고 죽은 펄펄 끓는 부자탕을 그 놈 아가X에 ㅊ넣으란 말이다!

소름이 쫙 끼치는 대사들입니다...


금삼의 피를 보고 통곡하는 안재모 연산군..
(야사서 파수편에는 금삼의 피를 본 임금이 그 천을 부여안고 밤낮으로 통곡했다고 나옵니다.)

저는 좋고 안좋고의 판단은 보시는 분들께 맡기고 제 느낌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유인촌씨의 연기는 감정의 진폭이 굉장히 큽니다. 뒤에 보실 유동근 연산군이 너무 정적이라서 실감이 안나고, 젊은 연산군 이민우(당시 19세), 안재모(당시 20세)의 연기가 너무 폭발적인 쪽에 치우친 느낌이라면 유인촌씨 연기는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진짜 맛이 살짝 간 느낌이라고 할까요? 최근에 연산군 중에서는 정진영씨의 연산군이 유인촌씨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실록에 쓰여진 연산군의 행동들을 토대로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몇 가지만 살펴봐도 갑자사화 당시 그는 이미 제대로 미친 X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자신을 욕할까봐 두려워하여 궁녀들이 웃는 것도 싫어했다고 합니다. 신언패를 채우고, 훈민정음 사용금지를 시킬 정도로 심한 언론 탄압을 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을 아무도 못믿으니 모든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그게 뜻대로 안되면 죽이고.. 어제까지 사랑하던 여인을 그 다음 날 찢어죽이고, 그런 식이죠. (편집증, 경계선 인격장애, 사회성 부족, 자기애적 성격장애, 애정결핍, 의존적 성격장애 등 다수 짐작 가능)

김처선에게 그가 그렇게 가혹했던 것도 그런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릴 때부터 마음 붙일 곳 없던 연산군이 김처선을 믿고 의지했기에 김처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렇게 뼈아팠던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김처선에게 활화산같이 분노를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연산이 장녹수를 그렇게 사랑한 것, 월산대군 부인 박씨에게 의지한 것 등을 보면 그는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연산군을 굉장히 단순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냥 원래 천성이 나쁜 놈, 섹스에 미친 놈 정도로만 몰아갔거든요. 그러나 현대의 사극작가분들은 연산군 행동의 배후 심리를 추측하여 대본을 쓰신 것입니다. 그 당시 연산군이 단순하게 나쁜 놈이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고, 정신병적인 문제가 일시에 폭발하여 그리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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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각에서 보니까 각 작품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더라구요.

유인촌씨의 연산군은 경계선 인격장애 + 자기애적 인격장애, 유동근씨의 연산군은 편집증 + 애정결핍 + 자기애적 성격장애, 이민우, 안재모의 연산군은 편집증 + 경계선 인격장애, 정진영씨의 연산군은 애정결핍 + 사회성 부족 + 의존적 성격장애 + 피해망상증 등이 보였습니다.
(제 눈에는 그랬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전혀' 아닙니다. 이에 대한 토론을 원하시면 댓글을 남겨주세요. 틀린 점 지적이나 올바른 정보 또한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광기어린 눈을 번득이는 안재모 연산군과 김자원


유동근씨는 역시 실망을 시키지 않는 연기자입니다. 얼마 전에도 우연히 재방으로 장녹수를 잠깐 봤는데 10년이 넘은 연기임에도 어색함이 없으시더이다. (※드라마 한명회에서의 성종, 폐비 윤씨, 인수대비 연기, 장녹수에서 박지영씨의 장녹수, 인수대비의 연기는 전 조금 어색했어요. 뭔가 구식 연기라서 민망하더라구요. 다른 배역의 연기와 당시 상황 묘사, 스토리 전개까지 다 따졌을 때 현재 왕과 비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상을 보고 나면 폭군 연산군이 불쌍해보일 것입니다.


유동근의 연산군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외로워하며, 스스로에 대한 불신으로 괴로워하는 연산군입니다. 폐비의 자식이라는 것에서 오는 상처와 열등감, 폐비를 신원시키고 폐비의 복수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마음은 늘 허전합니다. 갑자사화가 끝난 후 평화가 찾아올 줄로 기대한 신하들은 연산군의 향락과 폭력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져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폭발력을 너무 안보여주는게 좀 아쉽습니다. 유동근씨는 무슨 주문을 받았는지 너무 절제를 하십니다.
확~ 폭발해줘야 할 시점에도 조곤 조곤 속삭이면서 타이르듯 말을 하거든요.

늙은 내관의 말처럼 공포가 대궐 안팎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연산 자신이 그 공포의 희생자였으니...

장녹수 보고 있으면 연산군은 성군 같고, 정귀인 엄귀인이 임금한테 바락바락 대들어서 맞은 것 같다니까요. 설마 연산군이 저 장면에서 정귀인한테 곱게 타일렀겠습니까? 이민우, 안재모는 이럴 때 확 폭발을 해주니까 시원하더군요.  위의 동영상과 비슷한 부분입니다. 안재모의 연산군과 유동근 연산군이 거의 똑같은 대본으로 어떻게 표현을 하는지 비교해보세요. 간신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내시 김자원도 여기서는 그닥 나빠보이지 않습니다.

안재모 연산군에게 충언을 고하는 김처선 동영상 (삭제됨.


이민우는 한명회(1994)에서, 안재모는 왕과 비(1998)에서 귀신같은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글 쓰기 전까지는 안재모 연산군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글쓰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안재모, 이민우는 광끼(광기)가 너무 안보였다는 점에서 -1점. 연산군이 너무 정상적으로 보였거든요. 그냥 정상인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길길이 날뛰는 것으로 보였을 뿐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문제적 인간으로는 안보이네요.

한명회에서 엄귀인, 정귀인, 인수대비 찾아가서 행패 부리는 이민우 연산군


한명회 연산군에서 짧게 지나간 장면을 왕과 비에 두 영상으로 나누어 보여드리겠습니다.

 


 


연산군 폭발씬에서 꼭 나오는 세 장면: 금삼의 피 확인, 이세좌한테 술 따뤄주기, 인수대비한테 술 따뤄주기에서 가장 유명한 금삼의 피는 실록에 안나옵니다. 월탄 박종화 작가님의 소설 금삼의 피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이는 야사에만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사극은 정사와 야사를 섞기 때문에 이 장면도 흥미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들어가지만요.

금삼의 피


이 장면 말고 나머지 두 장면은 실록에서도 나옵니다. 인수대비에게 정귀인, 엄귀인의 아들을 끌고 간 연산군이 술을 따르라고 시키면서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 연산군일기에 적혀져 있습니다. 성리학을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알던 조선시대에 저런 짓을 하다니 연산군은 잘잘못을 떠나서 쫓겨날 만 했다고 봅니다. 윗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그의 행동이 결국 자기 무덤을 제 손으로 판 것이죠.


한편, 정진영씨를 보십시다.

왕의 남자 정진영 연산군 강성연 장녹수


저 눈빛 보이시죠?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저 눈빛, 무언가를 찾아헤매는 불안해보이는 행동이 딱 제대로 정신 나간 인간 같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에 이 부분이 너무 적응이 안되서 정진영씨 연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폭군을 왜 정신병자로 만들어놨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ㅋㅋ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그 시점에 연산군은 이미 맛이 갔다고 보는게 정확한 것 같습니다. 정신병 때문이든,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든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의 눈빛 아닙니까?


아.. 한 명을 선택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려.. 흑흑..ㅠㅠ

그래서~~
저같은 괴로움을 겪으실 여러분을 위해서 복수 선택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참고로 하시고 투표도 하시고 결과도 재미있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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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폐비는 폐비 윤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때문에 한꺼번에 폐출당한 고모와 조카: 폐비 신씨, 단경왕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이긴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쫓겨난 중전은 몇 명 더 있었습니다. 

먼저 미친 남편 연산군과 혼인하는 바람에 조용히 살다가 날벼락 맞은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廢妃 愼氏, 거창군 부인. 1472년~1537년)는 연산군의 정비(正妃)로 신승선과 임영대군의 딸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거창.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의 고모입니다.

연산군과 폐비 신씨(거창군 부인)


단경왕후의
아버지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으로 연산군의 처남이었고 할아버지는 당대의 명신이었던 거창부원군 신승선으로 연산군의 장인이기도 했으며 고모는 바로 연산군의 비(妃)로 그녀의 친정 거창 신씨 가문은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문 배경이 그녀의 인생 전반에 걸쳐 막대한 불행을 안겨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수대비는 자기가 폐비 윤씨(제헌왕후)와 연산군에게 한 짓이 무서웠는지 아니면 손자 융(연산군)의 광기를 일찌감치 알아보았기 때문인지 몰라서 신수근의 딸을 진성대군(훗날 중종)의 처로 삼아줍니다. 그녀가 바로 단경왕후입니다. 연산군이 처가하고는 잘 지냈으므로 설마 자기 부인의 조카를 과부로 만들지는 않으리라 예상한 것이지요. 연산군이 완전 싸이코에 가까웠음에도 자신의 가까운 사람과는 살갑게 잘 지냈다는 이런 기록들을 보면 그의 광기는 인수대비한테서 키워진 건 분명한 듯 합니다. 그의 행실을 보면 성군감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적어도 폭군은 안됐을 것 같거든요.

어쨋든 인수대비의 전략은 적절했고, 진성대군은 갑자사화의 피바람 속에서도 목숨을 건집니다. 근데 역사가 참 재미있습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은 중종 반정을 도모하는 패거리들에게 '왕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영특하므로 세자를 믿어보자'고 하며 반정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처가와는 잘 지냈던 연산군에 대한 의리때문일수도 있고, 임금의 처남이 되든, 새 임금(중종)의 장인이 되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괜히 실패할지도 모르는 역적 모의을 일으켜서 자기 집안을 다치게 하기 싫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습니다.


그의 바램과는 달리 중종 반정은 성공했고, 아버지
신수근의 선택으로 그 불똥은 엉뚱하게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에게 떨어집니다. 신수근이 참 불쌍하죠? 만약 찬성했으면 현재 중전인 자기 여동생은 쫓겨나더라도 자기 딸과 집안은 살렸을텐데... 연산군이 쫓겨나는 바람에 여동생도 폐비돼, 자기 집안도 망해, 딸도 반정 성공으로 국모의 자리에 오른지 7일 만에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서인이 되니 말입니다. 반대로 반정공신들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획득하여 왕도 부럽지 않게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았거든요.

반정공신들도 웃긴 넘들이죠. 만약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가 아니었더라면 진성대군은 아예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단경왕후 쫓아내려고 시위대 결성해서 단식투쟁하고(^^;) 난리를 떨었거든요.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겠죠. 뭐. 친정에 멸문지화를 입었으니 단경왕후가 칼갈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불과 몇 년 전에 연산군의 복수로 신언패(牌: 말조심 목걸이)까지 목에 찬 경험이 있으니 복수라는 말만 들어도 온 몸이 떨렸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녀는 폐위된 후 중종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나 공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복위되지 못하고 71세의 나이로 한많은 인생을 쓸쓸히 마칩니다.

단경왕후가 중종에게 보여줄 붉은 치마를 걸어놓았다고 전해지는 치마바위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또한 중종의 임종 직전에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며,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의 야사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군요. 저도 솔직히 그 뒤 중종의 행동으로 보아서 반년도 안되어서 잊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쿨럭~;

결과적으로는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폐비 윤씨, 연산군의 아내인 폐비 신씨(신수근의 누이), 진성대군(중종)의 아내인 단경왕후 폐비 신씨(신수근의 딸)까지 연산군 주위의 여자 3명이 폐비 당했으니.. 연산군 근처에는 얼씬도 말아야겠습니다.ㅋ

도봉산 자락의 연산군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연산은 7년 후 이곳으로 이장했다.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부원군 신씨 묘다


ⓒ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연산은 폭군이었나? 왕권주의자였나?


시삼촌한테 쫓겨나서 폐비된 단종(=노산군)비 정순왕후, 광해군비 혜장왕후도 있습니다. 그 외에 장희빈도 중궁의 자리에 있다가 쫓겨났지만 궐 밖이 아니라 후궁의 지위에서 사사당했고, 인현왕후도 다시 궐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폐비 계열(?)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단종(정태우)과 함께 폐위 당한 단종비 정순왕후(김민정)



구혜선이 빠진 왕과 나에 정태우가 연산군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극 전문이라 불릴 만큼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서 기대가 되네요. 왕과 비에서 단종 역을 맡았는데 정태우는 어찌 늘 쫓겨나는 역할만 맡게 되네요. 그래도 단종역을 세 번이나 맡았다는데 (한명회, 왕과비, 설중매) 이번에 또 폐위당하는 역입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성질이나 마음껏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요.ㅋ


임금께 사사당하고 아들까지 쫓겨난 폐비 윤씨(제헌왕후), 폭군 남편 덕분에 복위도 되지 못한 거창군부인 폐비 신씨,  남편이 왕이 된 대가로 쫓겨난 또 다른 폐비 신씨(단경왕후)....  남편 잘못 만나서 왕족에서 역적이 되어버린 그녀들이 참 가엽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경왕후 능


쓸쓸히 저 세상으로 떠나갔을 그녀들이 편하게 쉬길 바라며 그녀들의 묘에 술 한 잔 바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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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은 기사 중 일부. 출처는 링크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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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의 폐비 윤씨 죽음에는 중요한 이유가 빠졌다!

폐비 윤씨를 새롭게 조명한 SBS 사극 왕과 나에서 폐비 윤씨(구혜선)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드라마의 완성도나 폐비의 잘못을 떠나 그녀가 처연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우울하던 차에 슬픈 장면 나오면 울어버려야지 작정하고 봤는데... 눈물은 안났다 ㅡㅡ;

폐비의 눈물과 한이 담긴 금삼의 피는 조선 최악의 폭군 연산군을 만들었다

 


왕과 나 OST 임형주 부디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는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국모에까지 올랐다가 사모하는 임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은 그녀의 비극적인 일생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폐비 윤씨의 일생도 돌아볼 겸 사약 마시는 장면을 잠시 돌아보자. (사진 출처는 디씨인사이드 왕과 나 갤러리) 오만석, 구혜선 두 배우가 얼마나 연기에 푹 빠졌는지.. 내 가슴도 아프다.

김처선(오만석)이 따라주는 사약을 받고 죽어가는 폐비 윤씨(소화, 구혜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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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소화)의 한많은 일생과 그녀를 그리워하는 성종(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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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폐비 윤씨 동영상(장화홍련OST 돌이킬 수 없는 걸음)


 
전부터 폐비 윤씨(제헌왕후로 추존)와 연산군에 대한 글을 하나 쓰려고 했는데 잘 써야한다는 부담감에 미루고 미루다 보니 결국은 폐비가 죽는 날까지도 못썼다.ㅋ 우리나라 최악의 폭군 연산군을 만들어 낸 사건이라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워서 짧게나마 쓰기로 했(는데 길어졌)다.

왕과 나의 착해빠진 폐비 윤씨는 역사 왜곡이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폐비 윤씨도 억울한 점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그 깐깐한 사회에서 평민에 가까운 그녀가 왕비가 되었으니 그녀를 핍박하던 세력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안봐도 뻔하다.

왕과 비의 폐비 윤씨(김성령)와 성종(이진우)



솔직히 악독하기로 따지자면 며느리 쫓아내고 사약까지 내려 죽이고 손자까지 구박했던 인수대비, 그 착한 인종을 들들 볶아 죽인(?) 것도 모자라 아들 명종을 허수아비 만들어놓고 20년 동안이나 해먹은 문정왕후, 정조 독살 혐의를 받고 조선 후기를 다 말아먹은 요녀 정순왕후가 으뜸 아닌가.

폐비 윤씨가 성격적으로는 좀 모난 데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여우는 여우이되 남의 눈에 표시 안날 만큼 앞과 뒤가 다른 여우는 아니었나보다. 진짜 여우는 시어머니 비위도 잘 맞추던데...  인수대비(전인화)와 폐비의 문제를 외아들 시어머니의 질투로 인한 고부갈등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수대비가 둘째 며느리 정현왕후(이진)는 아주 이뻐했거든. 제헌왕후가 폐비가 된 것은 그녀의 뻣뻣한 성격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실록에는 폐비가 중전이 된 후 거만하고 투기가 심하며, 윗 어른께도 공경을 다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건 뭐 왕도 쫓아낸 마당에 충분히 지어낼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게 뭐 그리 나쁜 짓이라고 원자의 어미를 사약까지 먹여 죽이냔 말이다. 이렇게까지 된 것은 분명히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지켜줄 친척도 없던 그녀의 가정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폐비 윤씨의 묘, 회릉.


왕과 나에서 폐비를 새롭게 그리겠다는 시도는 좋았다. 하지만 그 권력의 역학관계를 너무 못그려냈다. 유동윤 작가는 정치권력의 교체와 이동이라는 것이 음모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으로 그렸는데.. 이러한 여인천하식 전개는 유동윤 작가의 한계인가 보다. 지금 드라마 왕과 나처럼 모든 주요 인물들이 선한데 음모와 오해에 의해서만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 즐겨 읽었던 장화홍련 수준의 발상이 아닌가 말이다.ㅡㅡ;;

설영(전혜빈)이나 정내관(안재모) 따위의 공작에 의해 나라의 중대 국사가 좌지우지된다는 거 자체가 말도 안된다고 본다. 더욱이 세조에게 갑옷입힌 정희왕후(양미경), 한명회와 사돈 맺어 왕의 모후로 인생역전한 인수대비같은 정치고수들이 '저런 별 것 아닌 이유로 중전을 죽인 후, 대책없이 그 아들을 왕에 올린다'는 건 인수대비 지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게 아닐까?

폐비는 인수대비와 권력욕 때문에 부딪히는 일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왕과 비에서는 이 부분이 잘 그려져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생기는 알력, 그것을 바탕으로 사건이 진행되어야만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왕과 비나 하얀 거탑에서처럼 소름끼치도록 짜릿한 긴장감을 맛보고 싶었는데 많이 아쉽다.


어쨋든 폐비 윤씨가 죽었으니 조금 있으면 성종 죽을 것이고, 그 아들 연산군이 왕이 될 것이고, 무오사화, 갑자사화 일어날 것이고, 연산군이 폐군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왕과 나는 겨우 한 달 후면 끝난다고 한다. 어우동 나오는 걸 두 달이나 보여줬다는데 제일 중요한 연산군은 겨우 한 달?? 용두사미도 이런 용두사미가 없다. 김처선, 성종, 폐비가 주인공이라고 김처선 할아버지 나이를 몇 십년이나 젊게 회춘시켜놓고 김처선이 보여준 게 없다. 50회 내내 울기만 하더니... 김처선이 이제 와서 뭘 보여줄 수 있을까. 폐비 윤씨가 죽을 때 김처선이 너무 가엾고 두 사람의 이루어지지 못할 운명에 시청자들이 가슴 아파해야 나머지 한 달을 버텨 나갈 텐데.. 주인공 김처선이 나와도 흡입력이 있거나 가슴 아프거나 하질 않고, (아, 물론 우는 건 불쌍하고 마음 아팠지),  (성인) 연산군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왕과 나.... 그동안 뭐한거니? 여인천하에서 명종 20년을 10분만에 압축하더니.. 설마 왕과 나에서도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아직은 왕과 나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두 배우가 열연을 보여주었고, 구원투수 (성인) 연산군의 활약(?)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가 악독해도 연산군의 복수는 언제나 흥미진진한데 구혜선은 그 어떤 폐비 윤씨보다 억울하게 죽었으니 연산군이 나와서 피바다를 만들 때의 카타르시스는 어느 때보다 강할 것이다.

왕과 비의 연산군(안재모)와 김자원



이제 남은 한 달간 연산군이 왜 폭군이 되는지라도 잘 보여주어 그간의 평가를 만회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드라마를 살릴 마지막 희망은 (성인) 연산군이다. 연산군, 카리스마를 보여주어요~

미워도 다시 한 번.
왕과 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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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에서 끝까지 왕을 버리지 못한 충신으로 나온 내시 김처선(장항선)


조선시대 내시에 대한 글을 쓰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글쓰는게 부담스러워서 늘 미루다 보니 생각날 때 한꺼번에 올리게 된다. 간략한 책소개를 해놓고 나도 두고 두고 참고해야겠다.

백과사전에는
내시가 조선시대 대궐 안 음식물의 감독, 왕명의 전달, 궐문의 수직, 소제 등의 임무를 맡던 내시부(內侍府)의 관원이라고 나온다. 간단한 설명이지만 대궐 안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은 내시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소개를 하려고 '내시'로 검색을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영화 '내시(eunuch)'가 나온다. 그것도 무려 안성기, 이미숙 주연이다! 영화 소개를 읽어보니 비극은 비극인데 뭔가 웃긴 건 어쩔 수 없다.

eunuch

안성기, 이미숙 주연 영화 내시 포스터


옛날 영화 포스터는 색감도 색감이지만 어찌 이리 칙칙하고 촌스러운지...

밤에 이루어지는 역사,
여자도 남자도 아닌 내시!! 밤이 두려운 내시들의 몸부림
잘려버린 생生, 잘려버린 사死, 그리고 여女
깊고 깊은 구중궁궐에 남자(王)가 하나, 여자가 수백 명
내시들의 서릿발 같은 성, 뜨거운 여자들의 불같은 성..이라니..ㅋㅋㅋ

이건 뭐 야설도 아니고.. 뭐라구 할 말이 없다.ㅋㅋ
그래도 아리따우신 이미숙님과 안성기님께서 나온 영화기에 애정을 가지고 사진 몇 장을 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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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내시는 중국의 환관들처럼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진 않았다. 권력을 가질 수 없었던 원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너무 오래 전에 읽은 내용이라 기억이 안난다.

기존의 사극에서 보여주었던 내시들의 모습은 주로 고개를 숙이고 종종 걸음을 걸으며 가는 목소리로 "마마~" "눼이~" 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내시들은 현재 왕과 나에서 조치겸(조상선) 역을 맡은 전광렬씨의 모습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내시들은 여자도 (제대로 취할 수) 없었고, 자손도 없었으므로 그들이 부와 권력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 물론 권력형 내시들만.


어쨋든 내시 관련 서적들을 몇 권 찾아보니.... 제법 구미가 당기는 책들이 몇 권 있다.

내시와 궁녀

내시와 궁녀(제왕의 그림자)
박상진 지음 | 가람기획

우리나라의 내시와 궁녀를 다룬 책.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우리 나라 내시와 궁녀를 최초로 소개하고 있다. 내시의 유래에서부터 내시가 되는 과정과 그들의 결혼생활, 묘지, 일화와 함께 궁녀의 유래, 출궁과 죽음, 궁녀의 선발과 입궁 과정, 등 내시와 궁녀의 삶을 빠짐없이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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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 (내시와 궁녀 중보판)
박상진 지음 | 가람기획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는 궁중의 은밀한 존재였던 내시와 궁녀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구중궁궐의 숨은 권력자이자 왕의 수족으로 평생을 살아야만 했던 내시와 궁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2005년에 출간된「내시와 궁녀」의 개정증보판으로, 지금 시기적으로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알려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역사를 바꾼 이인자들
역사를 바꾼 이인자들
송은명 | 시아출판사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이인자의 삶을 조명한다!  
이인자 19인의 인물 열전, 막이 오르면 그들의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진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역사의 숨은 실력가- 이인자. 그들이 만든 역사에 대한 이야기.

이인자로서 닦은 기반을 발판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왕건,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조선판 내각주의자 정도전, 당 태종의 원정을 좌절시킨 고구려의 거인 연개소문,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손꼽히는 한명회 등 역사의 또다른 주인공 19명의 삶을 조명한 책.


내시
내시
이정우 지음 | 관동출판사

일곱 분의 군주를 모신 충신 내시 김처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린 이정우의 역사소설 『내시』상 권. 희대의 폭군 연산왕에게 올바른 군왕이 되기를 수없이 아뢰다가 결국, 연산왕의 칼날아래 목숨이 끊어지면서도 충언을 아뢰었던 내시 김치선의 애환과 삶의 고뇌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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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의 김처선 - 실제로는 일곱 임금 거쳐.. 연산군에게 직언했다가 극형



왕과 나 김처선
왕과 나, 김처선
이수광 지음 | 눈과마음

SBS 대하사극 '왕과 나'의 주인공, 김처선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 (왕과 나의 원작이 되는 소설) 조선시대, 숙명적으로 내시가 되어 상처 받은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급변하는 정치 현장에서, 암투가 치열한 구중궁궐에서 비록 자신의 몸은 거세를 당했지만 인생마저 거세당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는 내시들의 학문, 야망, 사랑을 치열하게 다룸으로써 그들의 세계를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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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나 연산군 폭군 이끄는 세기의 간신 김자원 등장으로 눈길 
(몇몇 기사에는 김처선의 라이벌이라고 하지만 절대 아님.
김처선은 나이로나, 품계로나 김자원에게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음.)


왕과 나의 김자원...이건 너무 잘생겼잖아;; 전혀 간신배 이미지가 아닌 걸~!!

왕과 비의 연산군(안재모)와 쩔쩔매는 김자원



덧1. 내시와 궁녀는 몇 년전부터 꼭 읽고 싶은 책 중 하나였다. 올해가 가기 전엔 읽을 수 있을까?ㅋ
덧2. 김자원은 권력형 간신이라기보다는 주인 비위 잘 맞추는 개;;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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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극 역사상 가장 많이 다뤄진 왕은 누구일까? 조선왕조 비운의 왕인 10대 연산군과 14대 광해군, 19대 숙종이다. 세 군주는 모두 장녹수, 김개시, 장희빈이라는 희대의 요부를 만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드라마틱한 소재의 왕으로 각광받아왔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로 어릴적 어머니(폐비 윤씨)를 잃고 외톨이로 자라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2번에 걸친 사화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 또 그로 인한 폐륜 등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실록이 아니라 일기라는 초라한 이름으로 남아있는 연산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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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역대 연산군에 대해서 써보고 싶은 욕심은 있었으나 차마 엄두가 나지 않던 차에 아주 좋은 게시물 하나를 발견했다. 이글루 블로그의 이준님이 쓰신 '역대 연산군 모음집'이라는 글인데 내가 쓰려던 주제와 제목까지 거의 똑같다.ㅋ 여기에 사진과 영상을 적당히 덧붙여서 보는 재미를 더하고자 한다.



역대 연산군(?) 모음집 -_-

1. 연산군을 다룬 최초의 괜찮은 작품은
박종화씨의 "금삼의 피" 원작 '폭군 연산'이 있지요. 여기서는 신영균씨가 우리들의 연산군으로 나와서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사실 신영균씨가 의외로 연기를 잘하는데 이쪽은 영 매너리즘이었고 (세트도 압박) 다만 폭군이 된게 어머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이라는 월탄 선생 전통의 해석으로 나갑니다.

처음에 신영균인줄 알고 잘못 가져온 이미지(김진규)

신영균의 연산군


역시 압박중에 하나는 연산군 졸개 내시가 무려 "김희갑"이었고 -_-;;;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낀 연산이 자신이 죽인 모든 사람들을 사면 복권하고 장녹수같은 쪽을 내쫓고 충신들을 다시 쓰려고 마음먹은 바로 그날 중종반정이 일어난다는 설정이지요 -_-;;;; 그래서 반정때 도망가면서 "내일 아침만 된다면.... " 운운하는 대사가 꽤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옛날 영화라, 므흣빵빵은 기대 안하시는게 좋지요 -_-;;;


2. 조선왕조 5백년 "설중매"에서의 연산은 견미리씨의 전남편 임영규씨가 했습니다. -_-;;; 성종은 국영방송판 대조영에서 보장왕을 하시는 길용우씨였지요. 항상 나라위해 머리쓰다 과로사한 성종의 아들인데, 어릴때부터 트라우마에 빠져 있는 쪽으로 나옵니다.

문제는 다음부터 나올- 신영균씨도 마찬가지지만 - 연산처럼 "첨에는 잘 나가다가 나중에 맛이 가는" 타입이 아니라 첨부터 개념 없는 아새퀴로 나와준다는 점이죠. 조선왕조 5백년 사상 - 사실 뭐 광해군 이희도도 꽤 폭군이 아니라 개념있는 임금으로 그렸으니- 최악의 캐릭터로 자리 잡을 정도이지요. 원작(그러니까 신봉승씨의 대하 소설)에 나오는 므흣빵빵은 안 재현했지만 재상들을 졸라 패고, 기생 이름 아니면 "폐비"라는 이름으로 시를 지으라고 협박치는 건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악의 캐릭터


장녹수는 이미숙 아줌마가, 김처선은 박규채 옹이 열연을 했습니다.- 박규채옹이 죽는건 실록을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3. 영화 "연산군"이 제작될때 연산군을 무려 "이대근" -_-;;씨가 한다고 많은 솔로들이 가슴을 설렌적이 있었죠. 그러나 이게 낚시 중에 낚시인게 장녹수가 "강수연"이라는 점입니다. -_-;;; 강수연이야 영화에서 노출을 극히 싫어해서 씨받이 조차도 국내판과 해외판을 따로 편집할 정도였죠. 그러니 뭐 재대로 된 "그림"이 나옵니까 -_-;;;

여기서는 연산이 완전히 "부처님 가운데 도막"인데,  폐비 사사 사건을 수사하는게 무려 "장녹수"이고 그걸 수사하려는데 유력한 증인이 "선왕의 후궁"이 보낸 자객에게 수리검으로 살해당하는 압권도 보여줍니다. -_-;;; 후궁들을 손수 박살은 내는데 나중에 어느 노 대신을 팽형(진짜 삶는게 아니고 삶는 것처럼 하고 그냥 놔두는 형벌) 하려는데 대신이 자살하니까 끌어안고 울부짖습니다. 마지막은 폐위된후 (강화도는 안가고) 모친의 묘 앞에서 통곡하는 변강쇠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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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실 안 알려졌지만 "연산일기"라는 걸작도 있지요. "왕의 남자"에서의 연산군이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신분들은 이 작을 안봤다고 자수하는 셈입니다. 사실 정진영씨의 연기 이전에 유인촌씨가 이 연기를 했거든요-_-;;; 감독은 무려 임권택 감독입니다. 여기서 앞부분은 "신료의 방해"로 인해서 자기의 큰 뜻을 펼칠수 없는 젊은 쾌남아 연산을, 나이가 들고 비밀을 안 후부터는 조금씩 미쳐가서 결국 칼리귤라 사촌으로 변신하는 모습이 극렬하게 나오지요. 맛이 간후부터는 "후회"라는것도 없지만 뭔가 쫓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진짜 광기 어린 연산군, 유인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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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쫓겨난 후에 아버지의 유령 - 나오지는 않지만 - 에 덜덜 떨면서 화면을 응시하는게 마지막 장면이지요.

이 작 자체의 문제는 "유인촌"씨의 연기에 가린 나머지 다른 사람의 연기가 팍삭 죽었다는 점입니다. 내시 졸개를 무려 "김인문"씨가 했고 - 이 사람은 중종 반정 전에 연산군에게 홧김에 꼬치가 되버립니다.- 장녹수는 소시적 에로배우가 했지요(-_-;;;) 의외로 잔인하기는 잔인해서 참수장면이 그대로 나오고 신하들 모아놓고 방아찧으라는 장면과 찧기 싫으면 내가 찧겠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김처선이 이거 말리다가 죽습니다) 아, 그리고 방아장면은 안 나와도 방에서 돈 없어서 옷을 하나도 안 입은 여햏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춤추는 장면은 나와줍니다.-_-


5. 국영방송 사극에서의 연산군은 이덕화 옹이 주연한 한명회에서의 이민우장녹수에서의 유동근씨가 열연했지요. 한명회야 뭐 연산군은 한명회 사후에 나오니까 별 비중은 없고(명령 내릴 때 북치는 압박) 소리 지르는게 일입니다. -_-;;

19세의 어린 나이로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이민우



드라마 장녹수 오프닝
 


유동근씨는 좀 중후한 연기를 보여주는 편이지만 광기는 유인촌씨에 비해서는 영 아니었죠. 말년에 사이코가 된후에는 자신의 멸망을 항상 생각하는 그런 타입으로 변하지만 "완전히 미친"쪽은 아닙니다.

역시 어린 나이(20세)에 놀라운 연기, 왕과 비의 안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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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왕의 남자"의 정진영씨는 개인적으로 유인촌씨 다음에 가장 연산군 연기를 잘했다고 봅니다.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에서의 해석을 그대로 살려서 서브스토리인 "공길" 이야기를 넣은거에요. 광기와 고민, 사모곡이 적절히 조합된 최고의 연산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태조께서 입으시는 푸른 옷을 입는지는 미스테리) 사실 석류 낭자나 안습 장녹수보다도 연산의 연기가 죽었다면 영화 자체가 훨씬 질이 떨어졌을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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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연산이 두 후궁을 죽이는 장면은 실록이나 연려실기술의 "퍼포먼스"가 있지요. 어린이들 보는 책은 정서상 "연산이 손수 박살냈다" 식으로 그립니다. (이대근이 주연한 영화나 왕의 남자 - 뭐 이건 칼이지만 -  는 그렇게 그립니다.) 조선왕조 5백년 부분의 그 장면은 제가 못봤는데 신봉승씨의 원작에서는 죽이고 "다 벗기"고 뼈와 살을 분리시킵니다(말 그대로) 연산일기는 벗기는 걸 빼고는 퍼포먼스를 그대로 합니다.

실록대로 연산군을 찍으면 한국판 칼리귤라가 나올듯 하지요 -_-;;;;

유인촌씨는 서울방송 개념 사극 임꺽정에서도 첫회에 연산군으로 나와서 철퇴로 후궁을 박살내줍니다. (임꺽정의 애인 기생이 장녹수의 딸이라는 설정이 있지요)

의외로 궁중 므흣물은 연산군 이야기가 아니라 이두용 감독의 "내시"이지요. 원래 신상옥 감독이 만든 작품(박노식-신성일이 나옵니다.)인데 감독이 공화국에 간 후에 이두용 감독이 에로 에로로 만들었지요. 여기서 무려 길용우씨가 절대 정력의 왕으로 나와서 이미숙씨에게 허무하게 죽습니다. -_-;;;

왜 연산군마저 살리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기사 역시 "왕권강화"와 실록 운운인데 연산군 미화하는 분들의 공통점은 "실록은 졸라 허술하다"는 겁니다. 실록이나 다른 조선시대 기록을 교차검증 안하시는 건지 뭔지 -_-;;

그리고 박정희는 그렇게 싫어하시는 분들이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이나 할 이야기를 연산군 미화때 동원하는건 뭔지, 이환경씨처럼 제국이면 하악하악인가? - 글구보니 국영방송 장녹수도 좀 이런쪽이었고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연산군 미화 책은 소시적 이x 범의 원균 정론만큼이나 아스트랄의 영역을 넘나드는 책이지요. 두 후궁은 사실 연산이 죽인게 아니라 "자살"했는데(왜?) 후세 사람들과 사관들이 연산이 죽인걸로 조작했다는 - 근데 자살했다는 기록도, 전설도 없잖아? 실록의 일시 추정 - 헉 김전일?!! - 으로 봐서 죽인게 아닌데 죽었으니 자살이라는 논리- 스토리는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듯.



현재 방영 중인 SBS 사극 왕과 나에서 얼마 전에 연산군이 태어났다. 성인 배역을 누가 맡을 지는 모르지만 역대 연산군의 명성에 맞는 연기자가 탄생하길 바란다. 장성한 연산군이면 유인촌 수준, 젊은 연산군에 이민우 수준이면 내 욕심이 너무 과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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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를 보다가
제가 생각하는 완소장면들을 모아보고 싶다.. 는 생각이 들어서 몇 장면 모아 봤습니다..
홈에 올렸던 걸 그대로 복사해서 가져와서 좀 반말일색이지만 너그럽게 봐주세요^^;






역시 공길의 첫 등장을 빼놓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극장에서 울려퍼지던 탄성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처음 본 공길이 너무너무 예뻐서
'뭐야... 예쁜 남자 배우를 보니 뻔한 영화다...'
라는 선입견도 좀 가졌더랬다-_-;







장구치는 공길이 너무너무 예쁜 장면.
이 모습을 보고 나도 장구를 쳐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뱅글뱅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쁘기도 하지만
장생과 맞춰놀고 있는 이 모습이 더더욱 좋음.








그리고 설매재의 개망초 꽃.(개망초꽃이 맞던가...)
하얀 꽃송이들도 너무너무 예뻤고,
나란히 걷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도 인상깊었다.
장생의 뒤를 말없이, 후회스런 마음으로 걷고 있는 공길의 모습이
정말로 애처롭게 보였던 장면.








장생이 너무 귀여워서 맘에 들었던 점쟁이 씬~
장생의 이런 능청스러움이 사랑스럽다;ㅁ;
사실 dvd에서 추가된 영상들은 죄다 좋담~








그리고 이 장면....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둘이 풍물소리를 듣고 뛰어가는 이 장면이 너무 좋다..
뭐랄까, 왠지 가슴이 벅차오른달까?
저렇게 기쁜 얼굴로 달려가는 둘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녹수의 저 의연하고 도도한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보면서 생각한 거지만,
강성연이나 정진영은 이목구비가 큼직하고 뚜렷해서 그런지
눈썹이나 입꼬리의 미세한 움직임이 큰 표정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표정 연기가 정말 일품~
감우성은 얼굴근육의 움직임보다는 대사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멋진 배우인 것 같고~







어찌 이 장면을 빼놓을 수 있을까....
말이 필요없는 서방 각시 놀이ㅜ_ㅜ








몽롱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많은 문들을 거쳐 걸어가는 공길이의 저 뒷모습도 너무 좋고...
무엇보다 저 큼지막한 리본이 예뻐서
저것이 바로 다른 광대들하고 비교되는 공길이의 포스라고 생각했었다;;
이 장면 뿐만 아니라
공길이가 연산의 손에 이끌려 수많은 문들을 거쳐 지나가는 장면도
볼 때마다 두근두근하다.
처음 영화볼 때 굉장히 가슴 졸였던 씬:D







영화 전체를 통틀어
공길이 가장 예쁘게 나왔다고 생각하는 장면.
아기자기한 저 꽃,나비 소품도 너무 사랑스럽다~







처음 볼 때는 공길이의 어깨밖에 보이지 않았지만-_-
보면 볼 수록 녹수 쪽에 집중해서 보게 된다.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가차없이 버림받은 녹수.
자신의 고집으로 공길을 잡아두고 싶은 연산.
연산이 허락하는 가운데서 떠나고 싶은 공길.
세 사람의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장면...
(사실 연산에게 말하지 않고 얼마든지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육갑이 죽자 나머지 광대들은 전부 다 나갔고..
그럼에도 공길이 나가지 못했던 것은 연산이 허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지 않을까...
약속을 받고 나가고 싶은던 거라고 생각한다.
어린애같은 연산을 차마 두고 나갈 수 없어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볼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오는 장면.
장생은 어떤 심정으로 저 줄을 끊으려 하고
공길은 어떤 심정으로 막으려 했을지...
막연하게 그저 안된다고, 그만하라고
울부짖는 공길을 보면 가슴이 막막해진다.





처음 영화를 보고...
이 장면부터 눈물이 났던걸로 기억한다.
장생이 금붙이 이야기를 할 때는 저 상처가 저런 의미구나..
하고 단순히 생각했었는데
금붙이를 자기가 훔쳤다고 고백하는 공길을 보고 나니...
두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고 생각하며 부데껴왔을
그 길고 긴 세월의 깊이가 느껴져서..

그야말로 안구에 대 해일이!!!ㅜ_ㅜ





너무 좋아하는 장면..
이때 흐르는 bgm도 너무 좋고,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저 연산의 표정도 너무 좋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연산을 보듬어주는 녹수도 너무너무 좋고...
'미친놈.' 이라는 대사를 듣고
온 몸이 찌릿 했던 기억이 난다.





장생의 흙묻은 발을 보니
그야말로 가슴이 후벼지는 기분이더라.
왕보다도 더 왕같았던 사람의 마지막이
저렇게도 초라하구나... 하는 생각에.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따위 생각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렸지만;
역시 장생은 왕보다도 더 왕같은 사내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장면도 너무 좋담...
줄의 퉁김을 통해서 서로를 확인하는 두 사람.
이것 역시 말로 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ㅜ_ㅜ





그리고 영원히 잊지못할 마지막 비상.

쭉 모아놓고 보니 다른 분들도 모두 좋아하시는 장면이라 좀 식상하지만...
근 몇개월 동안 ost만 들어도 눈물이 나게 만든 왕의 남자를 어찌 잊으리오~~


출   처: 왕의 남자 / 카페 / *리겔* / 2007.05.20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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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화 오프닝 장면에서, 공길은 싫은 것이 분명한데도 억지로 양반에게 몸을 팔러 가고, 심지어 무리 중에 어떤 사람은 공길에게 몸을 팔 것을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장생을 빼고는 아무도 공길의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너무 한 것 아닌가요?

A. 남사당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구성된 유랑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상 정확한 설명은 없습니다만 공길에게 몸을 팔 것을 강요한 사람은 공길이 속해 있는 남사당 패의 꼭두쇠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꼭두쇠는 무리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패거리 식구의 처우에 관련된 모든 처결을 할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패거리 중에 섞여 있기 위해서는 누구도 꼭두쇠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공길이 몸을 팔 경우 양반에게서 많은 노자돈과 음식이 나올 것을 장생을 제외한 패거리 전원이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 사실을 다 아는 공길로서는, 싫어도 양반에게 몸을 팔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길이 양반에게 몸을 팔아 그 댓가로 패거리를 먹여 살린 것이 자주 있는 일이라는 것은, 공길이 팔아 먹고 사는 것 이제 좀 그만두라는 장생의 일갈이나 양반에게 팔던 몸뚱이 이젠 왕에게 팔겠다는 거냐는 장생의 빈정거림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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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길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장생을 구타하는 꼭두쇠를 낫으로 찔러 죽이고 맙니다.

당황한 둘은 무리에서 도망쳐 한양으로 가는데요. 남사당패는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조직이었을까요?

A. 그렇지 않습니다. 패거리에서 도망치는 것은 남사당으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동입니다.
남사당의 패거리가 된 자는 몇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 규칙이란 무리 중에서 있었던 일을 다른 곳에 말하고 다니지 말 것, 놀이 중에 얻은 수입을 혼자 빼돌리지 말 것 등인데 그 중 가장 엄하게 다스려진 죄가 패거리에서 무단 이탈하여 함부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남사당 은어로 '망도'라 하며, 잡힐 경우 죽을 수도 있는 중죄에 해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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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남사당에는 공길처럼 여자 역할을 전문으로 맡는 배우가 있었나요?

A. 있었습니다.
남사당에서는 처음 패거리에 들어온 사람(대부분 어린이들입니다)을 삐리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패거리의 가장 말단에 배치되어 잔심부름 및 잡일을 맡아 하였고 자신의 전문 연희가 정해지는 가열로 승급하기 전까지는 치마 저고리에 댕기를 들이고 여장을 하였습니다.

이들 삐리들은 행색만 여자였던 것이 아니라 패거리 중에서도 실제로 여자 노릇을 하였는데, 가열 이상 성인 패거리들과 한 명씩 짝을 지어 남색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이때 가열 이상이 대부분 남자 역할을 맡았으므로 숫동모라 하고, 여자 역할을 맡는 삐리들은 암동모라고 불렀습니다) 삐리의 수는 언제나 가열 이상 성인 패거리의 수보다 모자랐으므로, 패거리 전원이 짝을 지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남사당 내에서 남색에 관한 규율은 매우 엄격하여, 무리의 우두머리인 꼭두쇠라 할지라도 한 사람 이상의 암동모를 거느릴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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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공길이나 장생 같은 광대들의 신분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A.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한 계급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상 광대는 백정, 화척, 기생, 무당 등과 같이 천민에 속하는 계급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사당패는 광대 중에서도 가장 천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남사당패를 일러 흔히 '불가촉(不可觸)의 천민'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양인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정도로 천한 계급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것은 남사당이 유교 사회에서 중시하는 농업 등에 종사하지 않고 남에게 여흥을 팔아 연명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색 및 집단 혼숙 등 당시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패륜을 저지르는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사당은 양인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허가 없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양인들로부터 구타 및 모욕등을 당해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광대들을 핍박한 대부분은 양반이 아닌 농민이나 천민 계급이었다고 합니다.

양인과 거주를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사당패는 전국을 유랑해 다니지 않을 수 없었고, 경기도 안성 및 경남 진양(현재의 밀양) 지역등 일대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그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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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장생이나 공길과 같은 광대들은 여자와는 같이 다니지 않는 것 같은데요.

원래 광대패에는 여자가 없나요?

A. 남사당패에 여자가 거의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남사당이 특별히 여자를 천시해서라기보다는, 유랑이 잦은 남사당의 생활 특성상 남성에 비해 체력이 약한 여자가 무리에 끼어있을 경우 신속한 이동이 힘들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이 독신 남성들로 구성된 패거리에 소수의 여자가 끼어 있을 경우, 그들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에 들면서 남사당패에도 여자가 한 두 명씩 섞이기 시작했는데 이때 여자들이 주로 맡았던 배역은 어름산이(줄광대)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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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화 마지막쯤에서, 장생이 줄 위에 앉아 연산군을 희롱하며 하는 재담 중에 '기생들 요분질도 심드렁해지니 사내놈과 비역질을 일삼는데, 이 비역질이 예사 비역질이 아니라 쌀이 나오고 비단 옷이 나오고 벼슬까지 나오는 비역질이더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비역질이란 정확히 어떤 뜻인가요?

A. 비역, 혹은 비역질이란 남성 간의 성교를 뜻하는 순 우리말입니다. 반대로 여성간의 성교는 밴대질이라고 합니다.

남사당 사이에서는 '비역을 출하다'는 등으로 사용하며, 주로 삐리나 외모가 반반한 남사당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머슴이나 한량 등의 남성에게 몸을 파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때 받는 몸값을 남사당 은어로 허우채(解衣債의 변형)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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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육갑은 조정 중신들의 공길 살해 계획에서 공길을 살려내고 대신 활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 장면을 보면 달구지에 거적으로 덮은 시신을 두 사람이 밀고 나가는 것이 전부더군요. 왕의 총애를 받던 광대인데, 장례는 왜 그렇게 초라한가요?

A. 남사당 및 광대는 장례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광대의 경우는 평장(平葬)이라 하여 봉분을 만들지 않고 땅에 시신을 매장할 수 있었지만, 광대보다도 천대를 받은 남사당의 경우는 땅에 시신을 묻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사당은 대부분 천장(川葬)이라 하여 흐르는 강물에 시신을 띄워 보내거나, 깊은 밤을 틈타 몰래 시신을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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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작중 공길이 연산을 위해 하는 인형놀이가 있습니다.
손가락을 끼워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으로 현대의 인형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더군요. 남사당들은 정말로 그런 인형을 가지고 연희를 했나요?

A. 남사당 놀이 가운데는 '인형극'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남사당 놀이는 풍물(흔히 말하는 농악), 버나(접시돌리기 비슷한 묘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인형극)로 구성되는데, 이 중 덜미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인형극입니다. 특히 그 중에 등장하는 상좌 인형은 작중 공길이 사용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이용해 연희하는 포대괴뢰 형식입니다. 남사당은 놀이에 필요한 모든 소품-인형, 탈 등-을 모두 직접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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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화로 살판 이란?
며칠전 왕의 남자 삭제 장면에 관한 기사를 보니, 화로살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화로살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A. 살판의 한 종류로서, 화로를 안고 넘는 재주를 말합니다
.
남사당의 살판은 현대의 덤블링에 가까운 땅재주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뒷곤두, 앞곤두, 번개곤두 등의 기예를 연희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물건을 들고 재주를 넘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하였는데, 이 때 드는 물건의 종류에 따라 칼살판, 대접살판, 화로살판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화로살판은 벌겋게 불이 붙은 숯불을 담은 화로를 들고 재주를 넘는 것으로, 살판쇠의 기예가 출중하지 않으면 재주를 넘는 중 화로에 담긴 숯불이 쏟아져 큰 화상을 입을 수도 있는 위험한 묘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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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남사당패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조선시대의 남사당은 과연 사람들에게 어느 만큼 인기가 있었을까요?

A. 남사당은 한국적 연예인의 원형입니다.
조선 시대만 해도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보고 웃을 수 있는 오락거리는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그들에게 있어 가끔씩 보는 남사당의 각종 기예들과 재담 등은 실로 신기하고 흥미로운 구경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남사당은 회갑연 등 각종 잔치에 불려가 흥을 돋구기도 하였고 소작농들을 다독거리는 양반 지주의 회유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왕실에서조차도 경사가 있을 때는 가끔 광대를 궁으로 불러 그 놀이를 보며 즐겼다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남사당은 오늘날의 연예인과 비슷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남사당 재인 중 한 사람인 바우덕이의 경우는 그녀가 자주 들렀던 안성 지방 인근에 '사또 이름은 몰라도 바우덕이 이름은 안다'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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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사당에는 절대 여자는 없었다?

X. 사실이 아니다.
원래 남사당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사당패라 하여 남사당이라고 불렀지만 (반대되는 의미에서 여사당이라는 집단도 존재하기는 했다)
조선 후기에 들면서 패거리에 한 두 명의 여자가 끼이는 경우가 있었다.

2. 남사당의 꼭두쇠는 투표로 뽑았다?

O
. 사실이다.
남사당은 신분이 천하기는 해도 매우 민주적인 조직으로서 꼭두쇠는 반드시 패거리 전원의 투표를 통해 뽑았다. 이렇게 선출된 꼭두쇠의 권한은 절대적이었으며 노쇠하거나 패거리의 신임을 잃어 꼭두쇠의 자리를 수행할 수 없을 때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3. 남사당은 모두 여장을 했다?

X
. 사실이 아니다.
노천명 시인의 '남사당'에 나오는 것과 같은 여장은 남사당 패거리 중에서도 신입 단원인 '삐리'들만이 하는 것으로서 삐리들은 여장을 하고 여자가 없는 무리 중에서 여자 노릇을 하였다.

4. 남사당은 죽으면 땅에 묻혔다?

X
. 사실이 아니다.
조선 시대의 남사당은 천민 중에서도 천민이었던 관계로 지주들의 반대가 심하여 죽어서도 땅에 묻힐 수 없었고 천장(川葬)이라 하여 사체를 흐르는 개천에 띄워 보냈다. 남사당이 아닌 재인청 소속의 일반 광대들은 평장(平葬)이라 하여 봉분이 없는 편평한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5. 남사당 내에서는 동성애가 성행하였다?

O
. 사실이다.
남성들로만 조직된 남사당 내에서는 어쩔 수 없는 동성애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신입 단원인 삐리가 여자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여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암동모'라고 하며 남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숫동모'라고 한다) 삐리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절반을 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패거리 전원이 짝을 맺을 수는 없었다고 하며 비록 꼭두쇠라 하더라도 한 명 이상의 암동모를 거느릴 수 없었다.

6. 남사당은 자연발생적인 유랑집단으로, 내부에 아무런 규율이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X
. 사실이 아니다.
남사당의 내부 규율은 몹시 엄하고 일사불란하였으며 이를 지키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무리에서 추방되거나 그에 응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남사당 패거리 내에서 행해지는 벌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잔대미 공사'라는 것으로 잘못을 저지른 자를 멍석에 말고 벅구잽이들이 돌아가며 매를 치는 것이었다.

7. 남사당패는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유동적인 조직이었다?

O
. 사실이다.
놀이 허가가 잘 나지 않고 양식 조달이 여의치 않은 겨울이 되면 아예 무리 자체가 해산하여 각자 구걸 및 걸식으로 연명하다가 다음해 봄에 다시 뭉쳐서 패거리를 재건하는 일이 매우 잦았다고 전한다.


http://blog.naver.com/baudeogifes(
안성바우덕이축제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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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당한 자들, 그러나 카리스마가 있었다"

또다른 '왕의 남자' 내시... 역사학자 박상진씨가 말하는 오해와 진실  최육상(run63) 기자   
 
▲ 영화 <왕의 남자>의 한 장면. 영화에서 처선(장항선 분)은 연산 곁에서 충심을 다하는 내시로 그려진다. ⓒ 이글픽처스
연산: "처선아, 처선아. 내가 왕이 맞느냐? 선왕이 정한 법도에 매여 사는 내가 왕이 맞냔 말이다."
처선: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큰 사냥을 하시기 위해서는 발자국 소리를 죽이는 법이옵니다."
-영화 <왕의 남자> 중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내시는 가늘고 징그러운 목소리를 지닌, 수염도 나지 않은 남자 아닌 남자로 혐오 혹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내시 '처선'은 달랐다.

<왕의 남자>는 가장 비천한 존재인 광대 장생과 공길이 가장 존귀한 임금 연산군을 상대로 벌이는 한판 연희를 풀어낸 영화다. 여기에서 장항선이 연기한 내시 김처선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극을 이끌어 가는, 이른바 '무대총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폭군이지만 자신이 모셔야 하는 임금이기에 떠날 수 없었던 처선은 광대를 궁으로 끌어들이는 모험을 감수하며 연산과 나라를 바로잡기를 시도한다.

비록 그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처선은 자결을 선택하지만 그는 임금을 모시는 데 충실한, 충직한 내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처선으로 분한 배우 장항선의 무게감 있는 연기가 어우러지면서 처선은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점에서 영화 <왕의 남자>는 '예쁜 남자' 이준기의 재발견인 동시에 '카리스마 있는 내시' 장항선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 속 실제 내시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왕을 가장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내시를 흔히 왕 뒤의 숨은 권력자라고 한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왕조 교체기마다 환관이 득세하며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비서실장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하지만 내시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지난 1월 26일, 내시와 궁녀들을 연구한 역사학자 박상진씨를 만나 그 궁금증을 풀어봤다. 박씨는 지난 해 <내시와 궁녀>(가람기획)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다음은 박상진씨와 나눈 일문일답.

"장항선이 연기한 처선, 연산군 때의 실존 내시"

▲ 내시에 대한 연구를 해온 박상진씨.
ⓒ 최육상
- <왕의 남자>에서 장항선씨가 연기한 내시 '김처선'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김처선은 <연산군일기>에 등장하는 실존인물로 대표적인 충신 내시입니다. 어느 날 연산군이 직접 춤을 춘 '처용무'의 내용이 무척이나 음란한 것을 보고, 처선이 '지금껏 네 분의 선대왕을 모셔왔지만, 주상 같이 무도한 임금을 본 적이 없다'고 직언을 했다가 '왕을 능멸하려 든다'며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죠. 영화에서는 자살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기록은 그렇지 않아요."

- 내시와 환관은 어떻게 다른가요?
"내시는 고려 중기 이전까지만 해도 거세한 환관이 아닌, 과거에 급제한 명문가 자제들로 구성된 최고 엘리트 관직이었어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해동공자 최충의 손자 최사추, 주자학을 도입하고 성균관의 진흥을 꾀한 안향, 청백리로 유명한 임개 등이 내시직을 역임한 인물들이죠. 고려 조정에서 내시 출신 관료 중 재상에 오른 인물만 무려 22명이나 되었으니 내시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던 내시가 고려 중기 이후 원나라의 환관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거세된 남자들인 환관들로 대체됐어요. 고려 말인 공민왕 때에는 121명의 정원을 가진 정2품 관아인 독립적인 내시부를 두게 됐고요. 조선에 와서는 인원을 좀 더 늘려 140명의 내시부라는 거대한 관청이 설립될 정도로 내시제도가 번성했죠."

- 내시는 관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네요.
"정리하면 환관(宦官)은 시대를 불문하고 남자의 성이 상실되고 관직에 있는 자이고, 내시는 성 상실과는 관련이 없는 관직을 말합니다. 고려 때는 내시와 환관이 분명히 구분됐는데, 조선에 이르러 내시와 환관이 동일해지는 바람에 개념상의 혼란이 생긴 겁니다. 고려의 내시가 왕명을 받드는 '공식 비서관'이었다면, 조선의 내시는 환관들로 왕의 개인적인 명령을 전하는 '사설 비서관' 성격이었죠."

박상진

1963년 예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한국철학(문학석사)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서울시 사료조사 위원, 은평향토사학회 부회장, 서울문화사학회 회원으로 있으며 꾸준히 우리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짝짓기로 배우는 세계사> <한국의 로맨스> <에피소드로 본 한국사> <베일 속의 한국사> 등이 있고, 역서로는 <평성부원군 충렬공실기> <한성주보> <조선조 영의정 박원종 연구> 등이 있다.
-<내시와 궁녀> 소개글에서
- 중국의 환관제도를 받아들였다고 하셨는데 중국의 환관과 우리의 내시는 어떻게 다른가요?
"중국의 환관은 말 그대로 거세돼 관직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서경>에 의하면 중국에는 국부를 거세하는 궁형(宮刑)이 있었는데, 사형 다음가는 형벌이었어요.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이나 중국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연년 등이 궁형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죠. 많게는 1만3천 명, 적게는 3천 명 정도의 환관이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에게 궁형을 내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의 내시는 고려 때 국왕의 최측근 엘리트 집단에서 출발했죠. 물론 그때도 거세한 환관이 있었는데 불과 10여 명에 불과했어요. 그러데 원나라 간섭기에 원나라에 바쳐진 고려의 환관들이 수완을 발휘하면서 원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죠. 그 후 환관들은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고국인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각종 비리를 일삼으며 교만해집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고려 초의 내시가 고려 중기 이후 환관들로 대체된 겁니다."

충신 내시 김처선, 간신 내시 김자원

▲ 내시들의 일화를 담은 <내반원기> 중 '김처선'과 관련된 내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사본.
ⓒ 최육상
- 내시들이 힘없는 왕 뒤에 숨어서 국정을 뒤흔들었다는 좋지 않은 인식도 있습니다. 내시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나요?
"조선은 조금 덜하지만, 고려 때는 막강했죠. 특히 원나라에 가 있던 고려 출신의 환관들의 세도는 말도 못해요. 황제 다음의 지위에 있던 승상을 마음대로 부릴 정도의 권세를 가진 고용보(高龍普)나 원나라 조정에서 봉사하며 충선왕을 귀양 보낸 고려인 출신의 원나라 환관 '임빠이앤투그스(임백안독고사)'가 대표적이에요."

- 내시 중에도 충신과 간신이 있었을 텐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누가 있나요?
"앞서 말한 대로 김처선은 문무 양반관료들도 하지 못하는 직언을 임금이었던 연산군에게 하는 충신이었습니다. 반대로 김자원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간신 내관이었습니다. 김처선은 임금의 수라상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종 2품 상선 내시였고, 김자원은 왕명 출납 등을 담당하는 정 4품 상전 내시였습니다. 직책은 김처선이 높았지만 영향력은 김자원이 더 컸죠.

선조 때 내시 이봉정은 글씨를 잘 쓰는 명필가로 유명했는데, 선조 곁에 머물면서 선조의 필법을 흉내 내기도 했어요. 선조가 부채에 어필로 직접 쓴 시를 하사 받기도 했으니까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죠."

- 내시들의 일상생활은 어땠나요?
"사람들은 내시가 궁 안에서만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내시들의 관서인 내시부(內侍府)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위치했어요. 또 오늘날 종로구 봉익동, 운니동 일대, 은평구 신사동, 응암동 일대, 서대문구 연희동, 가좌동 일대, 양주, 고양, 남양주, 과천, 용인, 안양, 파주 등 거의 수도권 전역에 걸쳐 거주했어요.

내시는 크게 궁에서 먹고 자는 장번(長番) 내시와 출퇴근하는 출입번(出入番) 내시가 있는데, 장번 내시도 일정 기간 근무하고 나면 나갈 수 있어서 궁 밖에 가정을 두고 일반인들처럼 생활했어요. 내시들의 묘도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도봉구 쌍문동, 노원구 월계동, 고양, 양주, 남양주, 파주 심지어 평안남도 강동, 경상북도 풍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국에 산재해 있는 걸요."

내시도 음경은 있었다, 아내 두고 성관계도

- 사람들이 내시들의 성생활을 무척 궁금해 합니다.
"사람들이 내시는 거세된 자로 아는데, 고환만 없었을 뿐 음경은 있었기 때문에 성관계가 가능했어요. 반면 중국의 환관은 음경과 고환이 모두 없어 불가능했지요. 이는 원로 향토사학자 김동복(77)씨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는데 내시의 성관계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예요.

김씨가 어릴 때 노인들한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고종 34년(1897년) 갑오경장으로 내시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영등포 쪽 '용추'라는 연못 옆에 내시를 양산하는 움막 시술소가 있었다고 해요. 당시 음경은 남겨 놓고 고환만 제거했는데 비명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주로 비 오는 날 천둥번개가 칠 때 했다는 거예요. 김복동씨가 어렸을 때 옆집에 내시의 아내가 살았는데 김씨의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 박상진씨가 2005년 펴낸 <내시와 궁녀>.
ⓒ 가람기획
- 원래 환관은 궁녀들과의 문란한 성생활을 방지하기 위해 거세한 것 아니었나요? 그런 내시가 성관계가 가능했다니 좀 의아하네요.
"내시의 성관계 유무는 당시 내시들이 아내와 첩을 뒀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음경 자체가 없었다면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었겠느냐 이거죠. 김동복씨가 들은 내시 부인들의 대화를 보면 성관계가 가능한 내시들도 사정을 못하는 괴로움 때문에 목덜미와 어깨를 깨물어 아내들이 무척 괴로워했다고 해요. 그래서 내시 아내들 대부분이 6개월을 못 견디고 야반도주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거죠. 내시의 계보를 잇는 양자(養子) 제도는 정자를 생산할 수 없었기에 당연했던 거고요."

- 지난해 <내시와 궁녀>라는 책을 펴내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2003년 북한산에서 내시의 집단묘역 45기를 처음으로 확인하고 세상에 알렸어요. 그 뒤 내시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딜 가도 관련 서적 하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시와 궁녀에 대해 파고든 거죠. 내시의 일화를 담은 <내반원기>와 내시들의 개인문집,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경국대전> 등 정사와 야사, 법전 자료집 등 100여 종의 문헌과 자료를 2년 정도 수집하고 분석했습니다."

연산군에게 죽임당한 김처선 vs 반정 앞두고 도망간 김자원

나라가 어수선할 때 충신과 간신은 둘 다 빛을 발하면서도 명암을 달리한다. 영화 <왕의 남자>의 배경인 연산군 때 공교롭게도 이들을 각각 대표하는 조선의 내시가 모두 등장한다.

극중 연산군의 곁에서 공길과 장생을 돌봤던 김처선은 내시를 대표하는 충신이다. 그는 연산조에 성종릉인 선릉의 시릉관(侍陵官)을 지내고 140명을 통솔하는 내시부의 수장인 판내시부사로 있었다.

어느 날 연산군이 스스로 지어낸 처용놀이를 하며 온갖 음란한 짓을 다하자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연산군에게 바른말로 직언한다.

"전하, 처용무를 중지하시옵소서."
"뭐라, 네 지금 뭐라 했느냐?"
"전하, 이 늙은 놈은 세조대왕으로부터 무려 네 임금을 섬겨왔사옵니다. 또한 경서와 사서를 읽어 대강 통하오니 일찍이 전하와 같은 놀이를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사옵니다. 속히 처용무를 중지하시옵소서."
"뭐라, 고금에 나 같은 자가 없었다? 그래,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로구나. 죽는 게 소원이라면 네 원대로 죽여주마."

화가 치민 연산군은 처선을 향해 활을 당겨, 그를 죽였다.

한편 김자원(金子猿)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인도한 대표적인 간신이다. '원숭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남의 눈치를 잘 살피고 말주변이 뛰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데 능했다.

그는 성종과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아 오랫동안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 내관으로 있을 수 있었다. 비록 품계는 4품에 지나지 않았으나 왕명을 사칭하여 위세를 부리는 일이 종종 있었고, 말 한마디에 벼슬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위세를 떨쳤다. 나주 출신인 그를 위해 나주 관아에선 여러 채의 집을 지어주기까지 하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계집종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처족이 궐내의 각 색장(色掌)에 많이 소속되어 그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 마치 옛날 당나라의 권신 환관 고력사와 같았다고 한다. 결국 반정으로 연산군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한 그는 왕을 속이고 바깥 동정을 살핀다는 핑계로 달아나 숨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그를 <조선왕조실록>은 간신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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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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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셜록홈즈님의 블로그 : http://blog.daum.net/s203039/6725428

===> 이게 원 출처인줄 알았지만 그도 또한 아니고, 이 분도 출처를 안밝혀서 원래 출처는 알 수 없음....ㅠㅠ


조선의 3대 요부, 장녹수와 장희빈 그리고 정난정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될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 중 임금의 사랑스러운 애첩이었던 장녹수와 장희빈은 궁궐 깊숙한 곳에서 '왕실 정치' 를 했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비슷한 점을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장녹수와 장희빈, 이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들 중 누가 더 조선조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는가?

왕의 남자 장녹수 강성연



장녹수 - 미천한 출신, 그리고 야망.


장녹수와 장희빈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신분 상승에 대한 지독한 야망을 감추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은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19년에 충청도 문의현령까지 지냈으나 더 이상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었고 신분도 노비출신으로 천인 중 천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면 자녀는 자동으로 천인이 되었으며, 그 자녀의 소유권은 모계를 따라 가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장녹수는 태어날 때부터 '노비의 딸' 로 평생을 노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신분도 미천한데다가 가난하기까지 했던 장녹수의 젊은 시절은 비참하리라만큼 불행했다. 제안대군의 종과 결혼해 아기까지 낳았던 장녹수는 돈을 벌기 위해 여러번 몸을 팔았고 돈에 쪼달리자 가정을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가정을 버린 장녹수는 몸을 파는 천기의 수준에서 벗어나 술과 기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정식으로 기생으로 데뷔했다. 뛰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앳된 외모와 여성스러운 애교를 지니고 있었던 장녹수는 단박에 명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연산군의 눈에 띄어 궁궐로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실록에서 '자못 아름다웠다'라고 전하는 유일한 여인, 장옥정

희빈 장씨 얼굴 상상도.



장희빈 - 숙종을 유혹하다.

극적으로 궁궐에 들어간 장녹수에 비해 장희빈(장옥정)의 입궁은 철저히 계산적이었다. 장옥정의 숙부 장현은 실록에 "국중의 거부" 라고 기록될 정도로 대단한 부를 모은 인물이었지만 어머니가 노비출신이었던 까닭에 그녀는 천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비로서 어미가 겪은 설움과 치욕을 보고 자란 옥정은 천인 딱지를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사회는 '서인'과 '남인' 의 정쟁이 극에 달았던 때였고 남인에 몸을 담고 있던 옥정의 가문은 남인을 위해 옥정을 궁녀로 입궐시킨다.

당시 궁궐은 남인이었던 장렬왕후(대왕대비) 와 서인이었던 명성왕후(대비)의 기 싸움이 한창이었던 때였고 장렬왕후는 옥정을 숙종에게 소개시킴으로써 정권획득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 타고난 미모와 매력을 가지고 있던 옥정은 20살 혈기왕성한 숙종을 유혹하는데 성공했고 그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다.

숙종의 사랑을 받게 된 옥정의 위세는 자못 등등했으나 당시 궁궐 최고의 권력자이자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명성왕후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명성왕후는 옥정을 "요악하고 사악하며, 덕이 없고 천하다." 라는 명목으로 궁궐 밖으로 쫒아냈고 서운해하는 숙종을 위해 민유중의 딸을 중전으로 간택한다.

이가 바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였다.


장녹수 - 왕을 가지고 놀다.

왕의 남자 장녹수, 연산군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연산을 가지고 논 것은 장생과 공길이었지만 실제로 연산을 가지고 놀았던 것은 장녹수였다. 그녀는 왕이라는 자리에, 궁궐의 법도에 지겨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연산을 가장 세속적이고 천박하게 만들어 놓는 특별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연산의 불행한 가정환경을 잘 알고 있던 녹수는 연산에게 '엄마' 와 같은 존재로 다가갔다. 이미 예전부터 그녀는 남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남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지독히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녀는 연산에게 "야, 이놈" 등의 상소리를 해댔고 그를 조롱하기도 했으나 연산은 그런 녹수의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녹수는 연산에게 '첩' 그 이상의 존재였다. 연산의 왕비였던 신씨는 엄숙하며 상당히 정숙한 인물이었고 연산은 그런 신비를 '왕비' 로써 존중했다. 연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일에 광분해 칼을 들고 대비전에 쳐들어 갔음에도 대비를 쳐 죽이지 못했던 것은 대비전 앞에 중전 신씨의 가로막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정숙하고 위엄있는 신씨에 비해 녹수는 과하리만큼 본능에 충실하며 연산의 몸과 마음을 모두 품어냈다. 연산은 어떤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웃었고 그녀에게 놀라울만큼 많은 재물을 하사했다. 녹수의 집을 건축할 때 대간을 보내 감독을 시킨 것이나 내시와 승지 등에게 그녀의 가마를 뒤따르게 했다는 기록은 당시 녹수의 권세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비록 장녹수는 연산의 총애에 비해 인사 청탁에 적극적인 모습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종친과 조정관료들의 굽신거림을 받았고 뇌물과 투기, 재산모으기에는 혈안이 되어 있었다. 천한 출신의 기생이 임금의 비호 아래 갖은 이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조선사회가 용납할 수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서오릉(장희빈의 묘)


장희빈 - 중전의 자리에 오르다.

장옥정의 재 입궁은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의 승하 이후에 이루어졌다. 인현왕후는 장옥정을 그리워하는 숙종을 위해 장옥정의 재입궁을 손수 지휘했다. 살아 생전 명성왕후가 했던 "장옥정은 덕이 없고 사악하니 조심해야 할 것이오." 라는 경고를 무시했던 것은 인현왕후의 가장 큰 실수였다.

궁궐에 다시 들어온 장옥정은 놀라우리만큼 초고속 승진을 했다. 석녀였던 인현왕후에 비해 자식복까지 있었던 장옥정은 숙원, 소의의 자리를 거쳐 정 1품 '빈' 의 자리에 올라섰고 자신의 아들을 세자의 위치까지 밀어 올리며 기세 등등한 위엄을 누렸다.

장희빈의 성공은 곧 남인의 성공이었다. 남인은 장희빈의 비호 아래 정권을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곧 서인의 심볼마크 였던 인현왕후를 폐위 시키는데 성공한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와 세자의 어머니라는 이점으로 민비의 뒤를 이어 중궁전 주인자리를 꿰차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장희빈과 오라비인 장희재의 포악함은 극에 다달았다. 장희재의 집 앞은 뇌물과 각종 재물을 바치기 위한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뇌물의 값에 따라 벼슬이 나누어졌다. 인사청탁에 소극적이었던 장녹수에 비한다면 장희빈은 적극적일 정도로 매관매직에 혈안이 되있었다.

이 또한 남인 정권의 묵인이 있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장녹수와 장희빈, 같은 점과 다른 점.

그렇다면 사랑을 이용하여 조선을 자신의 치마폭 속에 놀렸던 장녹수와 장희빈 중 누가 더 권력의 중심에서 조정을 좌지우지 했을까?

여러가지 정황을 살펴볼때, 판정승은 "장녹수" 이다. 장녹수는 혼군인 연산군을 이용해, 임사홍 등과 결탁하여 사화를 일으키고 인수대비를 결국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 당시 최고의 정권자였다. 다만, 장녹수가 그렇게 정권을 뒤흔들 수 있었던 것도, 대궐의 큰 어른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 인수대비를 죽음으로 몰아 간 것도, 모두 연산군이 폭군 이자 광인 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부귀영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장희빈은 숙종을 통해 신분을 초월하고 왕비의 자리에 올라갔지만 장녹수와는 달리 도리어 막판에는 숙종에게 이용당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장희빈은 남인의 거두를 자처하며 정권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는 했으나, 훗날 날이 가면 갈수록 숙종에게 역이용 당해 환국의 구실로 가차없이 버려졌다.

다만, 장희빈 역시 요화인지라 숙종의 총애가 하늘을 찌를 때의 그 부귀와 영화는 장녹수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장녹수가 그저 연산군의 애첩이었다면, 장희빈은 한나라의 국모요, 국왕의 지어미요, 훗날 임금의 어머니로써의 위세 또한 누려 보았으니 궁궐에서의 위세가 권력에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를 위해 정적인 인현왕후를 비롯하여 앞길을 막는 자는 저주나 모함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가차없이 내려친 인물이었다. 이에 비한다면 장녹수는 후궁의 직위나 국모의 자리보다 현재 보장되는 부귀와 영화를 철저히 즐기는 인물이었다.

즉, 장희빈이 철저하게 숙종의 승하 이후를 계산하여 자신의 부귀영화를 길게 계산하는 미래지향적 인물이었다면 장녹수는 미래 보다는 현재의 위세를 더욱 중요시 하는 현재지향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장녹수와 장희빈의 죽음의 결말도 달라졌는데 장녹수는 그렇게도 자신이 철저하게 이용했던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처참하게 칼질을 당하고 그 시체 또한 백성들의 침과 가래, 돌맹이 세례를 받아 까마귀 밥이 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은 그토록 사랑했던 지아비인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아 목숨을 끊었고 그 시체 또한 세자의 모후라는 이유로 대빈묘에 안치되어 끝까지 예의를 갖춘 보살핌을 받게 되었으니 장녹수와 장희빈의 비참한 결말은 이토록 궤도를 달리했다.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묘가 있는 서오릉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미인을 탐낸다고 한다. 뛰어난 여성적 매력으로 한 시대를 휘어잡은 그녀들은 대단한 난세 속에서 최고의 권력자였던 '왕'을 휘어잡았던 단 한명의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비참하게 파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시대는 영웅을 소명하고 시기가 지났을 때 가차없이 버린다." 는 만고불변의 진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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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군의 역사가 파란만장할 수 밖에 없기에 연산군과 광해군은 드라마나, 영화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시대극 소재 중 하나이다.  재미있는 것은 광해군을 배경으로 왕의 여자라는 드라마가, 연산군을 배경으로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각각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장녹수와 김개시에 대해 알아보자. (출처: 파란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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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궁녀들 주에서 명성을 떨친 예는 아무래도 평범한 궁녀로 입궁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후궁이나 왕비의 자리에 올랐거나 후대 왕을 출산한 경우다.

예컨대 숙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경종을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쫓겨난 장희빈, 숙종의 무수리로 들어갔다가 훗날의 영조를 출산한 최숙빈, 고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영친왕을 출사하고 황귀비(皇貴妃)까지 오른 엄비 등이다. 장희빈, 최숙빈, 엄비 등은 궁녀 출신이라고 해도 후대 왕을 출산했으므로 평가가 조심스러웠다.

이에 비해 궁녀로서 왕의 총애만 받고 후대 왕을 낳지 못했던 장녹수(張綠壽)와 김개시(金介屎)는 온갖 비난을 받아야했다. 특시 장녹수와 김개시(개똥이)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기에 그 비난이 더더욱 심했다. 역설적으로 갖은 비난을 받다 보니 장녹수와 김개시는 조선 시대 궁녀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고 한다. 가비란 집안의 여자 종을 말한다. 제안대군의 여자 종이었다는 뜻이니 장녹수는 사노비(私奴婢)였던 셈이다.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가비가 된 내력은 대군의 가노(家奴), 즉 남자 종에게 시집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좀더 생각해 보면 약간 애매한 부분이 나타난다. 장녹수가 원래 노비 출신이었는지, 아니면 남자 종에게 시집가서 노비가 되었는지 불분명하다. 이는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張漢弼)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장한필은 문과에 합격하고 문의 현령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아버지 쪽으로 본다면 엄연히 양반 가문의 딸인 장녹수가 어찌하여 제안대군의 남자 종에게 시집을 갔단 말인가.

실마리는 아무래도 장녹수의 어머니 쪽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장녹수의 친언니 장복수(張福壽)가 내수사의 여자 종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장녹수의 아버지는 양반 관료였지만 어머니는 노비, 그것도 내수사의 노비였다는 얘기가 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내수사의 여자 노비였으므로 그 자손들도 어머니를 따라 자연히 내수사의 노비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녹수도 근본은 내수사 노비였다고 보아야 한다. 장녹수가 다른 곳이 아닌 제안대군의 가노와 결혼한 것도 결국은 장녹수가 내수사 노비였기 때문이다.

제안대군에게 소속된 노비들은 궁방(宮房)노비인데, 궁방 노비는 대부분 내수사의 노비 중에서 충원된다는 사실에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장녹수는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몸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장녹수 자매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장한필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남편도 없이 어린 자매를 데리고 얼마나 어렵게 생활했을지 짐작이 간다.

장녹수는 궁녀로 입궁하기 전에 이미 아들까지 낳은 상태였다. 나이도 서른이 넘은 데다 얼굴이 썩 예쁜 편도 아니었다. (실제 얼굴은 전해지지 않으나 실록에 전함.) 단지 노래와 춤에 능했으며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은 소리를 내는 개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장녹수는 예능 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셈이다.

이런 소문은 연산군에게도 들어갔다.

연산군은 조선 시대의 왕들 중에서 예술적인 기질이 가장 뛰어난 왕이었다. 그랬으니 연산군이 노래와 춤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당연히 장녹수를 만났을 것이다. 실제로 장녹수의 노래와 춤은 연산군을 매료시킬 만큼 뛰어났던 모양이다. 눈에 확 띄는 미녀도 아니고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 그것도 연상인 장녹수를 연산군은 딱 한번 보고 바로 입궁시켰다고 한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연산군 8년(1502년)에 종4품의 숙원(淑媛)이 되었다가 1년 후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으로 올랐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이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매혹되었기에 가능했다. 연산군은 장녹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고, 둘 사이에 영수(靈壽)라는 딸까지 낳았다.

장녹수와 연산군이 그토록 빨리 가까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 두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장녹수와 연산군은 예술적 교감이 가능했다. 춤과 노래에 뛰어난 장녹수와 예술을 사랑하는 연산군. 얼굴, 나이와 신분을 초월하여 두 사람을 이어 준 끈은 바로 이 예술적 교감이었다.

둘째, 모성애에 목말라하는 연산군의 갈망을 장녹수가 체워 주었다. 장녹수는 아버지 없이 자란 반면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랐다. 이렇게 자란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갈구했을 것이다. 특히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난 후 생모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치는 연산군의 모성애를 연상의 장녹수가 채워 주었다.

예컨대 "(장녹수는) 왕을 조롱할 때는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했고, 왕을 욕할 때는 마치 노예를 대하듯 했다. 다 자란 성인인 연산군의 이런 행동이 정신장애로 보이기도 하지만 연상의 연인에게서 모성애를 갈구하는 가엾은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실제로 장녹수의 영향력이 가장 높았던 것은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복수하겠다고 갑자사화를 일으킨 시점이었다.

그런데 장녹수는 왕의 총애로 얻은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무절제하게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으며, 유별나게 재산에 욕심을 부려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던 것이다.

그것이 장녹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보면 뛰어난 예술가로 평가할 수도 있다. 노비의 신분에서 후궁까지 올랐으니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녹수가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권력을 쥐자 사람들은 공인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했다.

이름 없는 노비일 떄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것으로 충분했지만 왕을 좌우하는 권력자가 된 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절제하고 왕의 권력을 절제시켜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녹수는 이런 점에 전혀 무신경했거나 무능력했다.


반면에 김개시는 장녹수와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예술적 재능만 있고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에는 취약했던 장녹수와 전혀 달랐다. 김개시는 노래나 춤이 아니라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게다가 장녹수는 입궁 후 곧바로 후궁이 되었지만 김개시는 어렸을 때 입궁하여 상궁까지 올랐을 뿐 정식 후궁이 되지도 못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하면 김개시는 '천예(賤隸)의 딸' 즉 천한 노예의 딸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김개시는 노비의 딸이었으므로 당연히 노비의 신분이었다. 궁녀로 입궁한 후에도 주로 공노비인 내수사 출신의 궁녀들과 어울렸다. 게다가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고 한『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김개시는 장녹수와 달리 어린 나이에 입궁했다.

김개시가 비숫한 시기에 입궁한 변상궁에게 "우리는 아이 때부터 함께 살다가 우연히 사이가 멀어진 게 아닌가?" 라고 말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김개시는 애초에 훗날의 광해군이 되는 동궁 소속의 궁녀로 입궐했다.

광해군이 열여덟 살 때 세자에 책봉되었으니 김개시는 그보다 어린 나이에 입궁했을 것이다. '아이 때'라는 말로 추정한다면 조선 시대 여자의 성년나이인 열다섯 살 전으로 짐작된다. '아이 때' 동궁 나인으로 입궐한 김개시는 청년 광해군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선조의 나인이 되었다. 글도 잘 알고 문서처리에도 능숙한 김개시의 역량이 발탁 사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김개시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다시 광해군의 지밀 나인으로 옮겼다. 광해군은 자신의 궁녀를 데려온 것이지만 김개시가 아버지 선조를 모셨던 궁녀인 만큼 비난의 소지가 적지 않았다.

광해군이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김개시를 옆에 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째는 세자 시절에 맺은 인연이었다.

둘째는 궁중에서 자신을 위해 성심으로 충성할 궁녀, 그것도 똑똑한 궁녀가 필요해서였다.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만들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제조 상궁으로서 당대의 실력자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당시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한 실세였다.

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권력을 틀어쥔 김개시는 오직 광해군만을 위해 충성했다. 광해군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중에서 온갖 악역을 떠맡은 궁녀가 바로 김개시였다.


당시 광해군을 위협하는 최대의 인물이 인목대비 김씨였는데, 김개시는 인목대비를 무력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인목대비의 궁녀들을 회유하여 첩자로 활용하기도 하고 사건을 조작하여 인목대비에게 덮어 씌우기도 했다.

광해군 5년(1613년)에 계축옥(癸丑獄)으로 인목대비의 친정을 멸문시킨 후 저주 사건(咀呪事件 :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사건)을 제기해 인목대비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간 주동자도  김개시였다.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없애려고 했다. 광해군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악역을 떠맡았다. 김개시의 끈질긴 공작에 의해 인목대비는 기어이 서궁에 유폐되고 말았으며, 그 이후에도 죽음 직전까지 몰리는 수난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김개시는 온갖 술수와 모함을 일삼는 정치꾼으로 변해 버렸다.


출처: 파란 블로그에서 펌.
http://blog.paran.com/desireu/744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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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일단 출발점이 되는 성종

성종의 도학 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
(1457-1494, 재위 기간 1469년 11월-1494년 12월, 25년 1개월)

"성종은 치세에 능했다.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 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해나갔다. 그 결과로 그는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뜻의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었을 만큼 조선 개국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 성종이 편전을 장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성종은 우선 조정의 서무 결재에 원로 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또한 2년 뒤인 1478년에는 참판 이하의 모든 문무신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 현상을 막았으며, 임사홍, 유자광 등의 공신 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 출신 신진 세력들의 진로를 열어 주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고려말의 대표적 학자인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진 사림 세력은 왕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이 주축이 된 훈구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조금씩 후퇴하였다. 성종은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또한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성종은 이런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도학 정치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그 일환으로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1489년에는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하다'는 내용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보냈는가 하면, 1492년에는 도승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고, 일정 숫자의 사찰만을 남긴 채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였다. 한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심지어 경학이나 강의에만 능해도 관리로 등용하거나 자신의 벗으로 삼기도 했다."

"성종은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 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였다. 그 결과 조선 초부터 끊임없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조선 백성들은 개국 이래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성종에 대한 좋은평가


"하지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 퇴폐 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 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상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를 알게 해준다."

결국 폐비윤씨-연산군으로 내려오는 비극적인 일들은 성종의 잘못도 크다고 할수있네!!
여자를 너무 밝혔어 ㅡㅡ;

다음은 영화에서 사고사 처리되는 인수대비,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연산군이 머리로 받아서 죽었다는데 머리가 꽤 단단했나 보지 ㅋㅋ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1437-1504)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성종의 계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이 사건으로 후에 연산군이 폐비사건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하자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덕종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다음은 폐비윤씨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에는 극약인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 뻔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었던 적이 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이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 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되고 만다."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계비 정현왕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오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니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위에 기록을 잘보면 인수대비가 윤씨를 모함했다는데 아마 이 여자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때부터 꺼림직했을꺼야 ㅋㅋ 사실 저런상황에서 연산군이 진실을 알면 인수대비는 죽을수밖에 없는거지. 조선왕조를 보면 친족끼리 죽이는건 예사로 있는일이더라구 권력을 위해서라면 내생각인데 아마 인수대비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기전까지 연산군을 제거하거나 최소한 왕자리에는 못앉히게 노력했을꺼같아.

 

다음으론 주인공 연산군

그전에 "성종은 도학을 숭상하고 스스로 군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가 넘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호기는 그의 가족관계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30명에 가까운 자식들을 얻었다. 결국 이런 호기가 평지풍파를 예고하는 불씨를 낳고 말았다. 그 불씨가 바로 희대의 폭군 연산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는다 여자 너무 밝히지말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세자 융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출 당해 사사된 사실을 모르고 자라났다. 융은 윤씨가 폐출될 당시에 불과 네살바기 어린 아이에 불과했고, 또한 성종이 폐비 윤씨에 대한 사건을 일체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자 융은 어머니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인 줄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천륜은 속일 수 없었던지 융은 정현왕후 윤씨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 물론 정현왕후 역시 폐비의 자식에게 사랑을 쏟아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 인수대비는 융에게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이 고울 리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에게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융의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었다." 세자 융이 곧 연산군인데 역시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군 자기 생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다니 참 뭐라 할말이 없다.

아. 그리고 역시 인수대비는 세자책봉에 반대를 했네.

"성종은 이런 성격을 가진 융을 탐탁치않게 여겼지만 1483년 그를 세자로 책봉한다. 이때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그를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행한 어린시절을 겪고 자란지라

"성종과 주위 사람들이
세자의 다소 포악한 성품을 우려했던 일화들이 야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다음의 두 가지다.
 
성종이 어느 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 등을 핥아댔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죽여버렸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이다. 융에게는 허침과 조자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조자서는 엄하고 깐깐한 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융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자주 수업 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자서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조자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자서는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융의 이 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다.
융은 왕위에 오르자 조자서를 가장 먼저 죽여버렸던 것이다."



연산군의 등극과 광적인 폭정
(1476-1506, 재위 기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박원종의 반란으로 폐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연산군도 처음부터 이랬던건 아니란다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 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의 바로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화 정책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심지어는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의 이 같은 사치 행각은 결국 국고를 거덜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하려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이에 반발하여 왕과 대립하며 연회를 줄이고 국고를 아낄 것을 간청한다. 이때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 윤씨 사건을 연산군에게 밀고하게 된다."

임사홍이라는 사람이 연산군한테 폐비윤씨 사건을 밀고했다네. 그럼 그전까지 연산군은 정말 몰랐다는소리??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가 폐비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내막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임사홍의 밀고로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살생극을 자행한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 갑자사화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사람 세력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부당한 공신전 몰수 행위를 비판하며 향락적인 궁중 생활에 제동을 걸었던 중신들이었다. 이때 연산군은 대신들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머리를 받아 절명케 하는가 하면, 윤씨 폐출에 가담한 성종의 후궁들과 그 자손들, 그리고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그는 막상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 이어지자 민심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급기야 1506년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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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여인, 장녹수. 그녀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출처: 네이버 오픈사전

연산군의 여자관계를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여인이 장녹수이다.

포스터는 옹녀+변강쇠해도 되겠다.ㅋㅋ



연산이 분노했던 그대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임금의 황음 내지는 못된 첩이 한 인간과 나라를 망친다는 식의 역사이해를 가져 왔다. 바로 그런 역사관에 의해 연산시대의 악녀로 자리매김된 여인이 장녹수이다.

장녹수는 연산군 8년 3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연산이 승지에게 그녀의 부친 장한필의 내력을 조사시켰다는 기록인데, 이 해부터 장녹수에게 빠졌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이 때쯤 연산과 장녹수가 만났던 것같다.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은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19년에 충청도 문의현령까지 지냈다.

그러나 더 이상 크게 출세하지는 못한 것 같다.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었고 신분도 천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면 자녀는 자동으로 천인이 되었으며, 그 자녀의 소유권은 모계를 따라 가도록 되어 있었다.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종과 결혼하고, 제안대군의 여종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친도 제안대군의 종이 아니었나 싶다.
 
장녹수의 젊은 시절은 불행했다. 가난하고 신분도 천한 여인이라 몸을 팔아서 생활했고 결혼도 여러 번 했다. 그러다가 제안대군의 집 종과 결혼했다. 아들 하나까지 낳았는데, 이 가정도 힘들었던지 다시 생활전선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닥에서 몸을 파는 수준에서 벗어나 노래와 춤을 배워 정식으로 기녀생활을 했다.
 

희대의 바람둥이를 매혹시킨 장녹수의 매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과 장녹수 (정진영, 강성연)


의외로 그녀 탁월한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실록에서는 그녀가 그냥 중간 수준의 얼굴이라고 표현했다.나이도 연산보다 두세 살 이상 많았다. 그러나 30대에도 16세의 앳된 소녀처럼 보일 만큼 동안이었던데다 영리해서 남자의 뜻을 잘 맞추고, 아양 떨고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연산이 남다르게 총애한 여성은 장녹수 외에도 많았다.

그러나 장녹수는 그들 중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별한 역할을 했다. 연산은 장녹수를 거의 아내처럼 대우했다. 연산의 왕비 신씨는 신승(숭)선의 셋째 딸이었다. 연산과 신비의 사이는 좋았다. 연산은 신씨(훗날 폐비됨)를 현모양처요 훌륭한 국모로 인정하고 존중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왕과 왕비의 사이였다. 연산이 국왕이 아닌 세속적 인간으로 돌아올 때는 장녹수가 그의 아내가 되어 주었다.  때로 장녹수는 연산을 어린아이같이 조롱하고 연산을 학대하며 욕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일을 기록한 사람은 혀를 찼지만, 연산은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고, 그런 세계를 맛보고 싶었던 것같다. 

남자 홀리게 생긴 요부 장녹수의 이미지


그러나 섣불리 연산에게 그런 공간을 연출했다가는 당장 국왕 능멸죄에 걸렸을 것이다. 그 역을 감당하기에는 아주 특별한 매력과 재능이 필요했다. 아마도 장녹수는 오랜 창녀생활을 통해 남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하고 충족시켜 주는 재능을 터득했던 것같다. 연산이 아무리 화가 났다가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며 웃었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는가!

섹시한 강수연씨. 실제 영화 속에서는 아주 조신했다고 함


사적인 청탁과 인정을 배제하기는 불가능한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녹수가 인사나 이권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개입한 것 같지는 않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위에서 하던 부정들은 과거부터 종친과 훈구세력들이 늘 해오던 일들이다. 수령이나 하급관직은 몰라도 녹수의 청탁으로 고위직에 올랐다는 사람도 다 종친이나 관료들이었다.

그녀의 친척 중에서 제일 출세한 사람이라면 형부 김효손인데, 연산군 10년 이전에는 겨우 7품 무관직인 사정(司正)을 받았을 뿐이다. 6품과 7품은 질적 차이가 있어서 7품 이하는 정치적 비중이 거의 없는 단순 행정 또는 실무직에 해당하며, 서리 출신들도 여기까지는 많이 진출했다.

연산군 10년에서 12년 사이에 김효손은 벼락승진을 해서 정3품 당상관까지 올라갔다. 아마도 이 조치에 대해 많은 관료들이 상당히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녹수의 일가로서 출세한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는 점은 고려해 줄 만하다. 녹수의 집을 건축할 때 대간을 보내 감독을 시킨 것이나 내시와 승지 등에게 그녀의 가마를 뒤따르게 한 것 등도 그녀의 청탁이 아니라 연산이 항상 궁리했던 '관료 길들이기'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의 남자 장녹수 이미지

 그러나 관료들은 종친과 고급관료가 천인 출신의 계집에게 굽실거리고, 사족의 집과 땅이 그녀의 손아귀로 들어가며, 그녀의 종들이 자신들의 종을 우습게 보고, 상권, 노비, 토지 등의 이권다툼에서 자신들을 이기고, 자신들의 이권을 앞서서 채가는 현상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행위였고, 왕이나 세상 사람들이 기억해서는 안 되는 전례였다.

그녀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녹수와 전비 등은 당일로 군기시(지금의 서울시청과 서울신문사 사이)앞에 끌려가 처형당했다. 많은 후궁들 중에서 녹수와 전비가 비난과 처형의 대상이 된 것은 그녀들의 재산이 많았던 탓도 있지만(그 중 상당수는 연산이 공신, 관료들로부터 빼앗은 것들이다), 그녀들의 출신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들의 진정한 죄는 자신들의 주제로서는 참여해서는 안 되는 특권에 참여한 죄였을 것이다. 장녹수는 미인도 아니면서,또는 미천한 출생인 집안이였기에 남달리 신분에 대한 애착이 강했을 것이다. 또한 연산군은 어릴 때 자신의 어머니가 비참하게 죽은 것과 할머니를 비롯한 주위에 대한 냉대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이 서로 서로 간에 깊은 관계를 맺을수 있었던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아무튼 연산군은 희대의 폭군이었다.
하지만 녹수는 희대의 악녀도 아니었고, 가슴 깊이 원한 맺을 정도로 사무친 그 무엇도 없다. 다만 천박한 그 자체가 오히려 연산이 바라보는 미였는지도 모른다.

클릭하면 크게 나와요~

왕의 남자 장녹수(강성연)과 연산군(정진영)


그 시대는 그 시대 나름대로 특징이 있듯이 연산의 시대의 인물로서 손색함이 없었던 여인이 바로 장녹수가 아닌가 추측한다. 

출처: 네이버 오픈 사전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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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조선이야기] 일곱 임금 거친 환관 김처선의 비극

세종 말년부터 연산군 때까지 세력다툼에 치여 죽을 고비 수없이 넘겨
연산군 폭정에 맞서 직언했다 사지 찢기는 극형… 최근 드라마로 부활


최근 한 공중파 방송에서 조선 초 환관 김처선(金處善)의 스토리를 극화한 드라마를 시작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배우 장항선씨가 연기했던 바로 그 환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극용 인물로는 대단히 성공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실제 행적도 흥미진진한 데다가 생존시기도 세종 말년부터 연산군 때까지 파란만장했던 격동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극적 상상력이 적절하게 가미될 경우 우리는 오랜만에 멋진 팩션을 만나게 될 듯하다.

실록에 김처선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단종 1년(1453년) 10월 13일자다. “경상도 영해에 귀양 가 있던 김처선을 석방하라.” 이때는 수양대군과 한명회·권람 등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직후였다. 이를 통해 볼 때 김처선은 김종서 등과는 반대쪽에 섰던 인물로 보인다. 4개월 후인 단종 2년 2월 19일 김처선은 고신(告身)을 돌려받아 환관에 복귀했다. 고신이란 일종의 관리자격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1년 후인 단종 3년(1455년) 2월 27일 김처선은 수양의 동생 금성대군 이유가 단종복위운동을 펼친 데 참여했다가 발각돼 고신을 빼앗기고 고향인 전의(全義)의 관노(官奴)로 전락한다. 그러나 처형을 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 열성적인 가담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만 해도 환관 중에서는 엄자치가 가장 유명했다. 엄자치는 세종으로부터 가장 큰 총애를 받은 환관이었다. 이후 계유정난에 참여해 공신에 책록됐던 엄자치는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며 사육신과 같은 길을 걷다가 세조에 의해 죽게 된다. 김처선은 2년 후인 세조 3년(1457년) 8월 18일 세조의 특명으로 관노의 신분에서 벗어났고 세조 6년(1460년) 5월 25일에는 뒤늦게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된다. 큰 공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계유정난에 김처선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조와 김처선은 서로 궁합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제대로 시종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국문을 당하거나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세조 11년에는 희한한 사건에 연루돼 목숨을 잃을 뻔했다. 덕중(德中)이라는 궁녀가 남몰래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 이영의 아들 구성군 이준을 흠모하다가 환관 최호와 김중호를 통해 한글로 된 언문연서(諺文戀書)를 보냈다가 임영대군과 구성군의 밀고로 발각되는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덕중은 말할 것도 없고 최호와 김중호까지 사형을 당했다. 이때 김처선도 간접적으로 연루된 듯하다. 그러나 죄가 중하지는 않았는지 세조는 용서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종이 즉위해 본격적으로 친정(親政)을 시작한 성종 8년(1477년) 다시 김처선이라는 이름이 실록에 등장한다. 이때부터 김처선은 주로 왕명을 비밀리에 받드는 중책을 맡았다. 김처선은 품계가 계속 올라 자헌대부에까지 올랐다. 자헌대부는 정2품에 해당하는 대단히 높은 관작이다.

1494년(성종 25년) 성종이 승하했을 때 김처선은 내시 중에서는 최고위직인 시릉내시를 맡았다. 시릉내시란 왕의 무덤을 돌보는 내시를 뜻하는 것으로 살아 있을 때 성종의 무한총애를 받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만 따져도 김처선은 그 사이에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 여섯 임금을 모셨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세종 말이나 문종 때 대궐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김처선은 어려서부터 성장과정을 곁에서 모두 지켜보았던 연산군을 모시게 된다.


연산군이 폭군화하는 것은 대략 재위 10년을 넘기면서부터였다. 그 때문인지 10년간 김처선에 관한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가 연산군 10년(1504년) 7월 16일 연산군은 “내관 김처선을 하옥하라”는 명을 내린다. “김처선은 무례한 일이 있었으므로 죄를 주어야 하나 도설리가 없으니 우선 장100대로 대신하라.” 도설리(都薛里)는 내시부 소속으로 궁궐의 음식을 맡아보던 설리를 관리감독하는 우두머리를 뜻한다. 중벌을 범했으나 일단 궁궐의 음식을 주관해야 하니 곤장100대로 대신하겠다는 뜻이다.

정확히 김처선의 ‘무례(無禮)’가 어떤 행위를 말하는지는 실록에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맥락으로 볼 때 광기를 보이기 시작하던 연산군에게 직언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김처선으로서는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살펴야 하는 본분에 충직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리고 9개월이 지난 연산군 11년 4월 1일 ‘환관 김처선을 궐내에서 죽이고 아울러 그의 양자 이공신도 죽였다’는 짤막한 문장이 나온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김처선은 폭군 연산군의 미움을 사 죽게 된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산군이 내린 가혹한 후속조치들을 보면 김처선은 죽기를 각오하고 연산군의 광폭한 행동에 제동을 걸려 했음이 분명하다.

다행스럽게 죽게 된 이유와 관련해 딱 한 줄 나온다. “술에 몹시 취해 임금을 꾸짖었다.” 그 대가는 컸다. “왕이 직접 그의 팔다리를 자르고 활을 쏘아 죽였다.” 가산을 몰수당했고 고향 전의도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7촌까지의 친척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김처선을 죽인 연산군은 이틀 후 ‘어제시(御製詩)’까지 지었다. 그 중에 자신이 김처선에게 당한 봉변은 “바닷물에 씻어도 한이 남으리”라고 썼다. 그런 광기는 6월 16일 “관리와 무신 중에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자는 모두 고치도록 하라”는 명에서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7월 14일에는 절기를 나타내는 처서(處暑)에도 김처선의 처(處)자가 있다는 이유로 조서(暑)로 바꿔 부르도록 명했다. 술을 먹고 자신에게 직간(直諫)한 김처선을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7월 19일에는 모든 문서에서 ‘처(處)’ 자를 쓰지 말할 것을 명했다. 선(善)자는 워낙 많이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처 자만 쓰지 못하도록 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해 12월 오늘날의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사인(舍人) 성몽정이 문서에 처(處)를 썼다는 이유로 잡혀와 국문을 당했다. 다행히 성몽정이 그 글자를 쓴 때가 7월 19일 이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성몽정은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성담년의 아들인 성몽정은 이 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4등에 책록되고 훗날 대사헌에까지 오른다.

연산군은 생각할수록 김처선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듬해인 연산군 12년 3월 12일 “김처선의 집을 흔적도 없이 파내고 그곳에 못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의 죄명을 바윗돌에 새겨 땅속에 파묻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해 9월 연산군은 반정으로 왕위에서 내쫓겼다. 그리고 중종이 즉위했다.

그해 11월 24일 사헌부 헌납 강중진이 글을 올려 “모두가 폐주에게 아부 아첨할 때 김처선 홀로 직언을 하다가 죽었으니 포상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중종은 왜 김처선의 ‘복권’과 명예회복에 반대한 것일까? 중종 7년 12월 4일 ‘삼강행실’ 속편을 편찬하던 찬집청에서 김처선의 사례를 삼강행실 속편에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를 묻자 중종은 이렇게 답한다.
“김처선은 바른말을 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술에 취해 실언을 한 것이기 때문에 수록할 필요가 없다.”


김처선의 명예회복은 250년이 지난 1751년(영조 27년) 2월 3일 영조에 의해 이뤄진다. 영조는 이날 “내관 김처선이 충간(忠諫)을 하다가 죽게 됐다는 것은 내 일찍이 아주 익숙히 들었다”며 정문(旌門)을 세워 그의 뜻을 기리도록 하라”고 명한다. 이런 생애를 살았던 역사 속 김처선이 드라마 속에서는 어떻게 그려질지 벌써 궁금하다.



세계사 연표
1455 세조, 단종 몰아내고 즉위
  영국, 장미전쟁 발발
1456 성삼문ㆍ박팽년 등 사육신 처형
1479 에스파냐 왕국 성립
1485 성종, ‘경국대전’ 완성
1492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1494 연산군 즉위
1498 바스코 다 가마, 인도 항로 개척
1506 중종반정


/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대우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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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왕의 남자, 내시 김처선

 

■ 방송 : 2007. 9. 22 (토) 20:10~21:00 (KBS 1TV)
■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 연출 : 송철훈 PD
■ 작가 : 정종숙


"처(處)자는 김처선의 이름이니
이제부터 모든 문서에
처(處)자를 쓰지 말라."



1505년 4월 1일,
연산군은 내시 김처선을 처참하게 죽이고
'처(處)자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도대체 연산군과 김처선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보필했던 내시 김처선.

그는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왕을
목숨 걸고 지켜내었던
진정한 "왕의 남자"였다.


▣ 영화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연산군의 곁에서 평생을 걸고 눈과 귀어 되어주었던 영화<왕의 남자>의 김처선.
단종부터 연산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며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보필했던 내시 김처선.
그는 왕의 그림자로서 왕을 독살할 수도, 왕의 생명을 지켜낼 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내시부의 최고 수장, 상선내시였다. 지금 '내시 김처선'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 傳"에서는 '조선왕조실록', 내시부 지침서 '내반원기' 등의 사료와 전문가 인터뷰를 바탕으로 내시의 전문 직업적 면모를 파헤치고, 김처선이라는 인물의 실체를 밝혀낸다.


왕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아는 유일한 남자, 김처선

단종부터 연산군까지 다섯 분의 임금을 모셨던 내시, 김처선. 성종과 연산군 대에는 왕의 건강을 돌보고, 그의 지시와 명령을 전하는 상선내시로서 임금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상선내시는 왕의 신임을 받아야만 오를 수 있는 최고위 자리였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신하로서 왕을 대신해 성종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시릉내시로 근무한 김처선. 그는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받는 내시부의 최고 수장이자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왕의 그림자였다.



왕의 독이 될 것인가. 왕의 생명이 될 것인가!

폐비 윤씨 사건 이후 연산군은 기생들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날마다 흥청망청 잔치를 벌였 고,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모질어 벼 수확을 하러 금표(군사훈련지역이나 왕의 사냥터에 세우는 일반인 출입 금지 표지문)안으로 들어왔다가 처형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특히 연산군은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내시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 내시가 승명패를 차고 지나갈 때에는 신분에 상관없이 말에서 내리게 했다. 그래서 권력을 얻은 내시들 중에는 대낮에 공공연히 뇌물을 받는 이도 있었다.

조선왕조 역사상 유례없이 왕이 내시에게 막강한 권력을 실어주는 상황 속에서도 김처선은 변함없이 내신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오늘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하거라."

口是禍之問 舌是斬身刀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연산군은 "신언패"를 관리들의 목에 걸고 다니게 하고, 말을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였다. 왕명에 반하는 말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하들은 연산군의 비행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이 자신의 향락생활을 감추기 위해 궁궐담을 점점 높이 쌓아가는 가운데 김처선은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왕을 위해 마지막 충성의 길을 선택한다. 내시의 본분은 왕을 바른 길로 모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양아들이 있었던 김처선. 1505년 4월 1일, 그는 가족에게 유언을 남긴 채 목숨 걸고 왕의 앞에 선다.

"이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지만은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백성들을 생각하시어 바른 정치를 펴셔야 합니다."




연산군의 광기어린 보복,
      김처선에 대한 모든 흔적을 없애버리다.




[전의면 옛지도
- 김처선의 집을 파헤쳐 연못을 만든 흔적]
왕의 손에 처참하게 죽은 김처선. 그의 직언에 분한 연산군은 김'처'선(金處善)의 '처(處)'자 사용 금지령을 내린다.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사람은 모두 이름을 고쳐야 했고, 공문서에 '처'자를 사용했다가 국문을 당한 이도 있었다.

또한
김처선이 나고 자란 전의현을 조선의 행정구역에서 없애버리고, 그의 고향집을 파헤쳐 연못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연산군은 처절하게 김처선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없애버리고자 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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