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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 6권 - 연산군편 참조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 윤씨(尹氏)의 폐사(廢死)



숙의(淑儀) 윤씨는 증 좌의정(贈左議政) 기묘(起畝)의 딸이며 성화(成化) 병신년에 연산군(燕山君)을 낳았고, 이해 8월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 정유년에 어떤 사람이 감찰상궁(監察尙宮)의 집안 사람이라고 거짓 일컬으면서 권숙의(權淑儀)의 집에 투서를 하였다.

숙의가 그 투서를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글에 “엄 소용(嚴昭容)과 정 소용(鄭昭容)이 장차 왕비와 원자(세자로 봉하기 전의 맏아들)를 해치려고 한다. ……” 하였다.


임금은 왕비의 방에서 작은 주머니에 든 비상과 작은 상자 속에 간수된 방술[方穰]하는 서책을 보았다. 임금이 왕비에게 물으니, 삼월(三月)이란 여종이 친잠(親蠶)할 때에 올린 것이라 했으나, 후에 삼월이 제가 쓴 것이 아니라고 공초(供招)하였다.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하려고 조정에 의논하니 영의정 정창손은 강력하게 간할 수 없었다.



임금은 왕비를 빈(嬪)으로 강등하여 책봉하고 자수궁(慈壽宮)에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승지 이극돈과 임사홍이 힘써 간하다가 중지하였다.삼월이란 여종은 목을 매어 죽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곤장을 치고 귀양 보내었다. 대간은 부부인(府夫人) 신씨(申氏)
윤비(尹妃)의 어머니이다. 도 중궁의 일에 참여하여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써 부부인의 직을 삭탈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후에 임금은 중궁이 외부 사람과 서로 통을 하는 것을 보고 즉시 정원을 시켜 금지시켰다. 《야언별집》


○ 돈녕부 참봉인 윤우(尹遇)와 선전관 윤구(尹遘)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 무술년에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위하려고 하니, 허종(許琮)은 진황후를 폐한 한 무제(漢武帝)와 맹황후를 폐한 송 인종(宋仁宗)의 실수를 들어 그 옳지 않음을 힘써 진술하였다. 《명신록》


○ 무술년에 임금이 윤구를 불러 묻기를, “전토의 송사는 맡은 관청이 있는데, 네가 어찌 너의 어머니를 시켜 중궁에게 간청했느냐?” 하니, 윤구는 “그것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후에도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때는 네가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나는 마땅히 너에게 죄 줄 것이다. 중궁은 국모이므로 사사 일로 청할 수 없는 법이다.” 하였다.


○ 경자년 10월에 윤비(尹妃)는 죄를 지어 폐출되었다. 11월에 숙의 윤씨(尹氏)를 승격시켜 비(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로 삼았다.




처음에 윤비가 원자를 낳아 임금의 사랑이 두터워지자 교만하고 방자하여 여러 후궁들 양가(良家)의 엄씨(嚴氏)와 정씨(鄭氏) 을 투기하고 임금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났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 소혜왕후(昭惠王后) 가 크게 노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돋구어 외정(外廷)에서 대신에게 보이니 윤필상(尹弼商) 등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의견을 아뢰어 윤비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치도록 하였다. 《기묘록》






○ 이때 임금이 장차 중궁을 폐하려고 위엄이 진동하니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손순효(孫舜孝)가 소를 올리기를, “예(禮)를 상고하건대, 부인에게 일곱 가지 내쫓길 나쁜 일[七去之惡]이 있으니 첫째는 자식이 없으면 내쫓기고, 둘째는 질투하면 내쫓긴다 했습니다. 두 가지를 비록 다 가졌더라도 만약 세 가지 내쫓기지 않을 일[三不去]이 있으면 옛사람은 오히려 용서했는데 한 가지 내쫓길 것만 있고 여섯 가지 허물이 없는데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물며 원자의 모후를 단 하루 동안이라도 궁벽한 여염집에 있도록 하겠습니까. 왕비 윤씨는 일찍이 만복의 근원을 받아 홀로 아들 많이 낳는 경사를 얻었는데, 하루아침에 여염집에 물러가 있게 하고 또 공봉(供奉)할 물자까지 끊어버렸으니 비록 자기 허물로 인한 것이지마는 그렇듯 전하께서 박정해서야 되겠습니까.군신과 붕우 사이에 있어서는 은혜가 의리보다 앞서야 될 것입니다. 훗날에 원자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전하께서 어찌 후회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동문선》 ○ 《명신록》에는, “손공(孫公)이 소를 올려 극력 말하고 또한 통곡하였다.” 한다.



○ 이해에 한명회 등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 아뢰기를, “계비(繼妃) 윤씨는 성품이 패려(悖戾)하여 국모의 덕이 없고 과실이 많아 신민의 바람을 크게 잃었으므로, 부득이 신(우리나라 임금이 중국 황제에 대하여 자기를 ‘신’이라 하였다)의 조모 윤씨(尹氏)와 신의 어머니 한씨(韓氏)의 명을 받들어 폐하여 친정에 내보내고, 부실(副室) 윤씨(尹氏)로써 처를 삼았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계비의 고명(誥命)과 관복을 주옵소서.” 하였다. 《고사촬요》ㆍ《조야기문》



○ 계묘년에 대사헌 채수(蔡壽)가 경연에 입시하여 교리(校理) 권경우(權景祐)와 더불어 아뢰기를, “폐비 윤씨는 비록 폐위되었으나 일찍이 전하의 배필이었는데, 지금 여염집에 거처하고 봉양도 군색하니 청컨대, 따로이 집 한채에 거처하게 하고 관에서 일용 물자를 공급해 주소서.” 하였다.임금은 크게 노하여 그들이 원자에게 아첨해서 훗날을 바란다고 하며 공경들을 전부 모아 채수(蔡壽)를 국문하였으나 채수는 그대로 대답하고 굴복하지 않았다. 또 의금부에 가두어 국문하였으나 채수는 역시 전과 같이 대답하였다. 마침내 그를 놓아 주고 죄주지 않았으며, 3년 후에 비로소 임용하였다. 《명신록》ㆍ《국조기사》

이때 경우는 동궁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아뢰기를, “아들이 동궁이니 어머니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여염집에 거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크게 노하여, “그가 세자에게 몰래 붙어서 훗날에 은혜 받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여 국문하게 하였다.경우는 조금도 꺾이지 않은 채 사리대로 말하고 정성을 털어놓아 역대의 군주들이 폐비를 대우한 일을 인증(引證)하면서 말이 더욱 간절하니 임금은 이에 노염을 풀고 그 관직만 파면시키었다. 《패관잡기》ㆍ《부계기문》



○ 기유년 여름 5월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이때 경상 감사 손순효(孫舜孝)가 울면서 소를 올려 극력으로 간하였다.




윤씨는 폐위되자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궁중에서는 훼방하고 중상함이 날로 더하였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더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그 내시를 시켜, “윤씨가 머리 빗고 낯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대답하게 하였다. 임금은 드디어 그 참소를 믿고 죄를 더 주었던 것이다. 《기묘록》



○ 윤씨(尹氏)가 폐위된 후에 임금은 항상 언문(諺文)으로 그 죄를 써서 내시와 승지를 보내어 날마다 장막을 사이에 두고 읽어 그가 허물을 고치고 중궁에 복위되기를 바랐으나 윤씨가 끝내 허물을 고치지 않으므로 마침내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이 왕위를 이어받자 그 당시의 승지들을 모두 죽였는데, 채수는 언문을 알지 못하므로 홀로 죽음을 면하였다. 《파수편(破睡篇)》


○ 죽음을 내리는 전지에 이르기를, “폐비 윤씨는 성품이 본래 음험하고 행실에 패역(悖逆)함이 많았다. 전일 궁중에 있을 때 포학함이 날로 심하여 이미 삼전(三殿)에게 공순하지 못했고 또 나에게도 행패를 부리며 노예처럼 대우하여 심지어는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으나, 오히려 이것은 사소한 일이다. 그는 일찍이 역대 모후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던 일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였고, 또 항상 독약을 품 속에 지니기도 하고 혹은 상자 속에 간수하기도 했으니, 그것은 다만 그가 시기하는 사람만 제거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장차 나에게도 이롭지 못한 것이었다.



일찍이 혼자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게 되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하니, 이것은 종묘와 사직에 관계되는 부도한 죄이다. 그런데도 차마 대의대로 처단하지 않고 다만 폐하여 서인을 삼아 사제(私第)에 있게 하였더니,지금 외부 사람들이 원자가 점점 커가는 것을 보고는 앞뒤로 시끄럽게 이 문제로 말을 하니 비록 지금은 그다지 걱정할 것이 못 되지만 훗날의 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만약 후일에 그의 흉험한 성질로 국권을 잡게 된다면 원자가 비록 현명하더라도 중간에서 어찌 할 수 없게 되고 발호(跋扈)하는 마음은 날로 더욱 방자하게 될 것이니, 한(漢) 나라 여후(呂后)와 당(唐) 나라 무후(武后)의 화를 멀지 않아 보게 될 것이므로 나는 생각이 이에 미치면 매우 가슴이 선뜻하다. 지금 만약 이럭저럭 넘기고 큰 계획을 결정하지 않아 후일 나라 일이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뉘우쳐도 어찌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漢)의 무제(武帝)도 오히려 만세의 계획을 위하여 죄 없는 구익부인(鉤弋夫人)을 죽였는데 하물며 이 음험한 사람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음에랴.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죽게 하노라.” 하였다. 《소문쇄록》




○ 20일에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폐비의 죄악은 사책(史策)에 밝게 나타나 있으니 국민이 함께 분개할 뿐만 아니라 천자께서도 폐위를 허용한 것이다.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좋은 사람을 배필로 얻지 못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의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되고 아래로는 신민의 큰 기대를 저버렸으니 부끄러운 마음 헤아리기 어렵도다. 천지 신명과 조종의 도와주심에 힘입고 삼전(三殿)의 간절하신 말씀을 받들어 내 몸은 이미 당(唐) 나라 중종(中宗)의 화를 면하였고 진(晋) 나라 가후(賈后)의 죄를 처단하였으니 이것은 대신들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바이다. 나는 지금도 전일을 생각하고는 밤중에 탄식하면서 홀로 앉아 잠못 이룬 지가 몇 날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비록 그에게 영영 제사를 끊더라도 영혼인들 무엇이 원통하겠으며 난들 무엇이 불쌍하랴마는,다만 어머니(윤씨)가 아들(원자) 덕으로 영화롭게 됨은 임금이 주는 은혜이고, 훗날의 간악함을 예방한 것은 임금이 해야 할 정책인 것이다. 동궁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어찌 가엾지 않으리오. 이제 특히 그의 무덤을 ‘윤씨의 무덤’이라 하고,묘지기 두 사람을 정하여 시속 명절 때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여 그의 아들을 위로해 주고 또 죽은 영혼도 감동하게 할 것이니, 내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바꾸지 말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라.” 하였다. 《소문쇄록》




폐비에게 사약을 내릴 때 이세좌(李世佐)가 대방승지(代房承旨)로서 약을 가지고 갔다.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그 아내와 한 방에 자는데, 그 아내가 묻기를, “듣건대 조정에서 계속하여 폐비의 죄를 논한다 하더니 결국은 어찌 될까요?” 하였다. 세좌(世佐)가 “지금 이미 약을 내려 죽였다.” 하니 아내는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에 보복을 않겠는가. 조정에서 장차 세자를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하더니, 연산군 갑자년에 세좌는 그 아들 수정(守貞)과 함께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송와잡기》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

일찍이 성종(成宗) 기유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는데, 폐출되어 사약을 내린 일은 성종조에 나와 있다.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므로 건원릉(健元陵)의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연산주의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리니 폐주는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보고 성을 내어 그 당시 의논에 참여한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기묘록》





윤씨가 죽을 때에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흰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전하여 뒤에 폐주에게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 <파수편>



○ 윤씨가 폐위된 뒤에 폐주가 세자로 동궁에 있던 어느 날, “제가 거리에 나가 놀다 오겠습니다.” 하므로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 때 대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네가 오늘 거리에 나가서 놀 때 무슨 기이한 일이 있더냐?” 하니 폐주는 “구경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소를 따라가는데,그 어미소가 소리를 하면 그 송아지도 문득 소리를 내어 응하여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 있으니 이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슬피 여겼다. 대개 연산군이 본성을 잃은 것은 윤씨가 폐위된 데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왕위에 처음 올랐을 때는 자못 슬기롭고 총명한 임금으로 일컬어졌었다. 《아성잡기(鵝城雜記)》



○ 병진년 봄에 폐비 윤씨를 복위하고 무덤을 옮기려고 의논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 재상들에게 의견을 수렴하게 하였는데 잔혹하게 사람을 마구 죽이므로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였다. 예조 참판 신종호(申從濩)가 홀로 의논을 주장하기를, “폐비가 선왕(성종)에게 죄를 얻어 유교(遺敎)가 지금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구익부인(鉤弋夫人)이나 견후(甄后)와 같은 처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니 의논이 매우 올곧았다. 비록 임금의 위엄이 무서웠으나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니 포악한 폐주로서도 죄를 주지 못하였다. 《부계기문》 《소문쇄록》


사당과 신주 세우기를 의논할 때 신종호가 옛날 제도를 근거로 들어 아뢰기를, “장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신주를 만들어 귀신을 편안하게 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받드는 법입니다. 윤씨가 전하를 낳아서 길렀으니 마땅히 사당을 높여서 받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왕께 죄를 얻었으니 예를 상고해 보면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삼가 살펴보건대, 한 나라 소제(昭帝)의 어머니 조첩여(趙婕妤)는 그를 위하여 원읍(園邑)을 두고 또 장승(長丞)을 시켜 지키기를 법대로 하였지마는 사당을 세웠다는 것은 상고할 데가 없습니다. 위현성(韋玄成)의 전기에, ‘효소태후(孝昭太后)의 침사원(寢祠園)을 수리하지 말라.’ 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다만 침사만 있고 서울에 사당이 없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위 나라 명제(明帝)의 어머니 견후(甄后)는 신하들이 주(周) 나라 강원(姜嫄)의 예(例)에 의거하여 따로 침묘(寢廟) 세우기를 청하니 그 의견을 옳다 하였습니다. 대체 강원(姜嫄)은 제곡(帝嚳)의 비이고 후직(后稷)의 어머니였습니다. 주 나라에서 후직을 높여서 시조를 삼았으니 강원(姜嫄)은 배향할 데가 없으므로 특별히 사당을 세워서 제사 지냈던 것입니다. 견후와 강원은 그 일이 같지 않은데 끌어다 보기로 삼았으니 대개 당시에 억지로 끌어댄 말이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한 무제(漢武帝)와 위 문제(魏文帝)는 모두 유교(遺敎)가 없었으니 지금의 일과는 같지 않습니다. 폐비는 이미 종묘와는 관계가 끊어졌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써 예를 어겨서는 안될 것입니다.비록 사당과 신주를 세우지 않고 묘에만 제사 지내어도 효도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의논이 비록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다른 여러 의논이 능히 이 의논을 누르지는 못하였다. 《소문쇄록》

○ 이때 사당 세우는 문제를 의논함에 있어 대대적으로 위협을 가하여 아랫사람의 입을 막으니, 임금의 하고자 하는 일을 감히 거스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리 권달수(權達手)는 분개하여, “이것은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홍문관에서도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니 폐주가 노하여 그들을 모두 곤장을 쳐서 귀양 보내었다.



○ 사묘(私廟) 지금의 종부시(宗簿寺) 를 세워 제사 지내는 것은 원묘(原廟)와 같이 하고 그 무덤을 높여서 회릉(懷陵)이라 하였다. 지금은 묘의 석물은 없어지고 돌난간만 남아 있다.

폐주가 폐비를 위하여 효사묘(孝思廟)를 세우니 대사헌 김심(金諶)이 여러 대관(臺官)을 거느리고,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고집하여 뜰에서 10여 일이나 버티고 섰으나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이에 폐주가 “전 대사헌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정의를 알았는데 그대는 홀로 알지 못하니 어쩐 일이냐?” 하니,김심은 “전 대사헌은 다만 어머니가 있는 것만 알고 아버지가 있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는데 그 당시의 세론(世論)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 폐주가 그 어머니 윤비(尹妃)의 묘를 봉하여 회릉이라 하였다. 대사간 강형(姜詗)이, “선왕께서 금하신 것입니다.”고 간하니 폐주는 매우 노하였다. 갑자년 봄에 이르러서 그 전에 법을 들어 논하던 자를 다 죽였는데 강형의 집은 일족을 남김없이 멸망시켰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계해년 봄 2월에 ‘왕비를 폐하다[廢妃]’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야언별집》○ 갑자년 봄에 폐주는 어머니 윤씨가 내쫓겨 죽은 것을 깊이 한하여 선조(先朝 성종조)의 옛 신하들을 거의 다 죽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 조에 상세하다. 또 윤씨를 높여 그 휘호를 극진히 올리고자 하여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지당합니다.” 하였다.




응교로 있던 이행(李荇)이 동료들과 의논하고, “추숭(追崇)하는 전의식(典儀式)을 예에 있어 이미 극도로 다했는데,지금 다시 더 올릴 수 없습니다.” 하니, 폐주가 크게 노하여 잡아서 국문하게 하고 의논을 먼저 주창한 사람을 장차 사형에 처하려고 하니 이를 면하려는 이들은 힘써 변명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이때 응교 권달수(權達手)는 밖에서 잡혀 나중에 들어 와서는, “먼저 말한 사람은 나요, 이행(李荇)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권달수는 죽음을 당하고 이행은 곤장을 맞고 충주(忠州)로 귀양가게 되었다. <용재행장>



앞서 권달수가 폐비의 사당 세우는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라고 솔선해 말했는데 그 뒤에 폐주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였다. 홍문관과 대간 중에서 그 의논을 먼저 발언한 자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여 지나간 일을 다시 조사하여 먼저 말한 사람을 캐내어서 날마다 가혹한 형벌을 가하니 모두 먼저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어 땅 밑의 송장을 파내어 관을 쪼개게 하면서까지 자기의 죽음을 구차스럽게 면하려고 했는데,홀로 권달수만은 자기가 했다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은 동료들을 저버리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대간 가운데 먼저 말한 사람과 함께 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데 옥리(獄吏)가 그를 불쌍히 여겨, “홍문관과 대간 양편이 다 죽는 것보다는 한편이 책임을 지고 한편은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니, 사헌부의 관원은 옥리의 뜻을 받아 들여 다시 “홍문관이 사헌부보다 먼저 말했다.”고 하였다.이에 권달수는 눈을 부릅뜨고 한참 눈여겨 보면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네가 과연 나를 본받을 수 있으랴.” 하고 즉시 붓을 휘둘러 공초를 쓰기를, “불초신 달수가 감히 이 말을 했으므로 구차히 숨겨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고 하였는데 다 쓰고난 뒤에는 얼굴빛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술을 주니 다 마시고는 형벌에 나아가는데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용천담적기》





권세도 없는 일개 궁인이었던 폐비 윤씨의 왕비 간택도 그렇지만 그녀의 폐출, 사약으로 인한 죽음에 조선시대 최악의 패륜 군주이자, 최초된 폐출된 왕인 연산군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큰 충격이었는지 전해지는 이야기도 참 많다.



2007/11/09 - 연산군 이야기 (성종, 폐비 윤씨 이야기 추가)
2007/11/09 - 폐비 윤씨 이야기 - 그녀는 왜 폐비가 되었나?
2007/11/09 - 비운의 왕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
2008/03/11 - 연산군의 광기를 깨우는 폐비 윤씨(금삼의 피)에 대한 진실은?
2008/03/24 - 폐비 윤씨가 쫓겨난 진짜 이유는? (부제: 폐비는 인수대비 때문에 쫓겨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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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 VS 인수대비는 정말로 라이벌이었을까?

폐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아니라 성종에게 미움받아서 쫓겨났다!??

인수대비와 폐비 윤씨


연산군을 다룬 그 동안의 많은 작품들에서처럼 인수대비(전인화)는 이번에도 폐비 윤씨와 가장 대립하는 인물로서 폐비를 궁 밖으로 내치는 장본인이며, 흔히 폐비 혹은 연산군과 역사의 라이벌로 비유되기도 한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폐비 윤씨의 강한 성품에 불만을 품었고, 폐비 윤씨를 끊임없이 압박하며 미워했다. 인수대비는 이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그녀를 사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인수대비가 임금 성종과 왕실 최고 어른이자 막후 실력자인 시어머니 정희대비(양미경)를 제치고 며느리와 극단적인 대립각을 세우며 파국을 주도했고, 결국은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폐비를 사사시켰다는 것' 모두를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고, 드라마는 패자의 편이라 양쪽 모두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기에 사건과 기록의 이면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폐비 윤씨를 죽음으로 내몬 역사 속 주인공은 과연 인수대비였을까?

일개 후궁에서 일국의 국모로 승천하다

폐비 윤씨(구혜선) 중전 책봉식


조선 초기 친여식이나 집안 여식을 후궁으로 들이는 것은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로 간주되었다. 때문에 유력한 친지나 집안 권세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입궁한 간택 후궁들은 명문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성종의 간택 후궁으로 가장 먼저 입궁한 폐비 윤씨 역시 고려 시대때부터 꾸준히 벼슬을 해온 양반 가문 출신이다. 폐비 윤씨의 부친 윤기견은 집현전에 출입할 만큼 경서와 문학에 밝았고 판봉상시사의 벼슬까지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윤씨의 어머니 신씨는 윤기견의 둘째 부인으로 태종을 도운 공신 '신숙주'를 배출한 고령신씨 가문의 여식이다. 폐비윤씨가 입궁 당시 내명부 종2품 직위에 해당하는 숙의(淑儀)의 첩지를 받은 것은 '상등급(上等級) 사대부집안' 출신으로 대접받았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

파평윤씨 명문가 출신의 정현왕후 윤씨는 같은 해 6월에 입궐했는데 그때 나이 12살로 통상적인 간택후궁의 나이보다도 더 어렸다. 그녀의 부친 윤호는 당시의 권력을 움켜쥔 실세인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양미경)의 조카뻘이 됐다. 두 숙의 윤씨가 입궐하던 당시 성종에겐 이들보다 앞서 승은을 입은 후궁, 엄귀인과 정소용이 있었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한명회에 의해 간택 후궁으로 등장한다.)


숙의 윤씨(폐비)는 아들을 낳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성종의 후궁인 소용 정씨와 엄씨였다. 소용 정씨는 초계정씨로 역시 명문가의 여식이고, 소용 엄씨는 영월 엄씨로 소용 정씨와는 소꿉친구이며 중인 집안의 여식이었다. 미색으로 따진다면 정소용쪽이 훨씬 더 미려했으며 소용 엄씨는 그저 그런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고 한다. (그럼 집안도 정소용이 좋고 미색도 뛰어난데 왜 엄귀인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는겨?)

그로부터 얼마 후 공혜왕후가 승하하며 교태전 자리가 비자 유일하게 회임 중에 있던 폐비 윤씨가 중전에 오른다. 후궁에서 세자빈이나 중전을 삼을 때 먼저 자식의 유무, 나이의 고하 등을 따져 간택한다는 세종조 관례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때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내린 교서에는 폐비 윤씨의 후덕함과 겸손함이 왕비의 자질에 적합하다고 적었지만 내심 자신의 가문 출신인 정현왕후 윤씨가 중전자리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뒷 이야기는 추후 조사 예정)


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폐비 윤씨는 중전에 오른지 석달만에 원자(연산군)를 낳으며 권력이동의 축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왕의 생모, 대비가 될 사람이라는 것만큼 막강한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일부 사서에선 상등급 사대부집안 출신이지만 자신을 뒷받침해줄 조정 세력이 미미했던 폐비 윤씨가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 과도한 애정과 집착을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폐비 윤씨는 왕비가 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성종 8년 4월 덕종(성종의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숙의권씨 처소에서 왕의 후궁 엄씨와 정씨가 중궁과 왕자를 모해하려 한다는 투서가 발견되면서부터 몰락의 길로 걷기 시작한다. 당시 사건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미진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때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측은 두 후궁을 적극 감싸는 한편 원자를 중전에게서 빼앗아 궁밖으로 보내 버린다. 성종은 중전을 폐비시켜 빈으로 강등시킨다는 교지를 내리지만 대신들은 벌떼같이 달려들어 원자를 낳은 왕비를 폐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라며 반대해 철회된다. 이는 원자를 낳은 지 4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므로, 폐비 윤씨가 권력을 탐해 일어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폐비 윤씨가 대군을 낳은 2년 후 일단락됐던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지며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결국 성종 10년 6월 윤씨는 중전에서 폐출돼 사가로 쫓겨났다.

왕과 나 폐비윤씨(구혜선) 폐출 장면

왕실의 윗전이었던 정희왕후는 원자가 사가에서 폐비와 만나지 못하도록 폐비가 폐출되는 날, 피접을 위해 궁 밖에 나가 있던 원자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한편 아직 100일도 채 되지않아 어미와 유모의 손길이 필요했던 둘째 대군을 손도 쓰지 못하게 해 5일 뒤 사망에 이른다. 성종은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에 숙의 권씨를 새로운 후궁으로 간택하여 입궁시킨다. (정희왕후는 '왕과 나'나 '왕과 비'에서처럼 인정많고 자애로운 시할머니가 아니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인수대비가 폐비 축출에 관여되지 않았다고 볼 순 없지만 당시 권력의 실세인 정희왕후나 성종의 뜻이 컷을 가능성이 많다. 기록을 살펴보아도 인수대비가 여러 사안에 의견을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성정을 간섭한 것은 정희왕후 승하 이후다. 또 왕비의 투기든 후궁들의 이간질 때문이든 왕과 폐비 윤씨 간의 언쟁이 잦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성종-폐비 부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폐비 축출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 역시 실록에 정씨의 오라비를 속량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그 출신이 천민이기에 중전자리를 노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얘기다. 이들이 폐비 윤씨를 향한 성종의 총애를 질투할 순 있지만 중전을 탐탁치않게 여긴 삼대비의 총애를 기반으로 자의든 타의든 중전폐출의 선봉에 섰을 것으로 보여진다.


성종은 왜 폐비윤씨를 버렸나

성종은 조선조를 통틀어 부인이 가장 많았던 왕 가운데 한명이다. 성종은 공혜왕후 한씨와 폐비윤씨 정현왕후 등 계비 2명, 그리고 9명의 후궁 등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신하들중엔 왕이 후궁을 너무 많이 두는 것에 대한 우려의 상소를 올린 사람도 있을 만큼 여자를 좋아했던 정력가이다. (어우동과의 로맨스에서 이생원이 진짜 성종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성종이 그만큼 여자를 좋아했기에 그런 얘기도 떠도는 것이겠지.) 성종의 이런 성향들이 실제 폐비 윤씨의 투기로 이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가정의 분란을 끊이지 않게 한 원인이 됐고 이는 부부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폐비의 사사가 성종의 의지였는지 인수대비의 뜻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기에 폐비 윤씨를 다룬 사극마다 해석이 분분하다. 이덕화가 주인공인 드라마 한명회(1994년)에서는 인수대비(김영란)도 폐비(장서희)를 싫어했지만 무엇보다 성종(박진성)이 폐비에 대해서 냉정하게 돌아선 것으로 표현했고, 박지영, 유동근 주연의 장녹수(1995년)에서는 성종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지만 인수대비(반효정)의 의견이 강했던 것으로 표현했다.

왕과 비(1998년)에서는 성종(이진우)이 굉장히 미화되어 성종은 폐비, 사사 둘 다 원치 않았으나 인수대비(채시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 폐비를 사사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최근작 왕과 나(2007년)에서도 성종(고주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인수대비의 명을 따른 것으로 나온다.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는 성종은 중전을 폐출시키던 당시 폐비에 대한 증오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폐비가 끝까지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던 방술책 문제에 대해 배후 조사를 청한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중전이 후궁 측을 모함한 것으로 몰아간 비상과 투서에 대해서는 중궁전의 궁녀들을 고문한 끝에 원하는 답을 들은 후 참수했다.

또 성종은 중전의 폐위문제에 대해 대간과 성균관 유생 65명이 죄도 명확하지 않은 중전을 폐비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상소를 올렸음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폐출돼 사가로 나간 폐비에게 일절 도움을 허락하지 않는 냉정함을 보였다. 심지어 폐비 윤씨가 폐출되기도 전 후궁간택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며 윤씨를 사사한 다음날에는 그의 일가 모두를 매우 혹독한 지역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가족과 떨어져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폐비는 기초 식량조차 부족했고 백성들은 가엾다고 그녀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성종은 이조차 금지시키고 벌을 내려 폐비를 내외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다고 하니 폐비 사사에 성종의 뜻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폐비 사사 후에도 성종은 여전히 폐비를 용서하지 못하는 인상을 보여주었는데, <성종실록> 성종 20년, 5월 16일자에 이 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옛날 일을 생각하면 한밤중까지 두려워하며 홀로 앉아 잠못 이룬 날이 그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비록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혼령에게 어찌 원통함이 있겠으며, 내가 어찌 불쌍한 생각이 들겠는가?"

이런 마당에 폐비의 불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오직 인수대비였다는 것은 여자에게 뒤집어 씌우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관들과 이를 무분별하게 영상화한 작품들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성종이 그토록 총애했던 폐비 윤씨를 미워하게 된 연유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용안에 상처를 냈다는 것은 성종 스스로 발표했던 교서에도 없던 내용이며 투기를 심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실록이 분명한 설명을 해주지 못 하고 있다. 비상사건 역시 명확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종은 처음에 그녀를 사랑했으나, 나중에는 열렬히 미워했다는 슬픈 진실이다.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서 필요한 말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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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이야기 (성종, 폐비 윤씨 이야기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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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랜만에 이산이나 왕과 나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볼 마음이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산이 지겨워서 왕과 나로 돌렸는데... 왕과 나는 지루한데다 유X하기까지 했거든요..ㅡㅡ;


어쨋든 왕과 나...

연산군에 대한 기대감 하나로 욕하기를 늦춰왔는데..
오늘 자 보고 완전 포기... 했습니다.

기대 끝.


왕과 나는 시청률 불패인 연산군을 가지고도 어찌 이리도 재미없게 만드는지... 위기감은 커녕, 드라마로서의 아무 클라이막스도 못 만들어내고.... 정말 지겹더군요.

'왕과 나'팀이랑 SBS 사극팀은 이 드라마 끝나면 1년 간 산에 들어가서 도 좀 닦고 내려왔으면 좋겠네요.

밋밋해빠진 연출,

역사적인 사실까지 다 바꿔서 시작해놓고도 인물에 아무 매력도 없고, 사건에는 개연성도 없고, 기대감조차 없는 지겨운 대본,

눈에 힘만 주면 카리스마 생기는 줄 아는 연기자들,


10년 전의 왕과 비보다도 더 촌스러운 한복 때깔과 디자인,


전부 무릎꿇고 앉아 있어도 오골오골 부딪힐까봐 불안한 조잡한 세트장......


정......... 말............... 대. 략. 난. 감.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연산군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미 익히 보셨으리라 믿습니다만...
제가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이라 왕과 비에서 몇 장면 추려보았습니다.


우선 연산군이 폐비 윤씨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는 장면입니다.

실록에는 연산군이 성종의 묘비문 문제로 우연히 폐비의 존재와, 자신의 생모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적혀져 있습니다. 그전에는 폐비의 일을 100년간 거론치 말라는 성종의 명 때문에 폐비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것이죠. 그 때 얼마나 실망이 컸는지 연산군은 저녁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죠. 지금의 대비(정현왕후)가 자신의 친모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동안 속아서 살았던 것에 대한 억울함, 20년간 자신을 향한 왠지 모를 수근거림, 늘 거리감 느껴지는 성종의 태도, 왠지 모르게 포근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정현왕후의 품, 진성대군만을 이뻐해주던 인수대비의 태도 등...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해답이면서 원통함과 분노가 터져나오는 순간인거죠.


왕과 비에서 폐비 윤씨에 대해서 물어보는 연산군(안재모)

"폐비에겐 아들이 있었다지요.?"
"폐비가 누구냐?"


라는 대사에서는 소름이 쫙~~~~~~ 끼칩니다.

이 짧은 대사에서 안재모가 어찌나 서늘하게 잘 해주시는지 그 당시의 위기감이 고대로 느껴지면서
안재모에게 마구 마구 애정이 솟아납니다.




안재모 뒤에 납작 엎드린 내시가 김자원으로, 지금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난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사는 효령대군 역으로 나오는 분입니다. 정하연 작가님이 쓰신 드라마 장녹수나 왕과 비에서의 김자원은 그리 간신배 같지는 않고, 그냥 주인의 명에 고대로 따르면서 적당히 비위 맞출 줄 아는 귀여운 내시였습니다. 저는 연산군과 김자원의 귀여운 장난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왕과 나에서는 내시 김자원도 너무 비호감으로 그리더군요. 전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것이.. 아무리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지만 그렇게까지 캐릭터를 재수없게 묘사할 필요가 있는지..;; 유동윤 작가님은 도대체 왜 항상 아주 나쁜 놈이 있어야 사건 진행이 가능한 지 모르겠어요. 정상적인 인물들이 필연적으로 엮이면서 사건이 진행되어야 흥미진진할 텐데, 날 때부터 나쁜 놈이 일을 저지르고 나머지 인물들이 속아서 사건이 발생하는 패턴이 50회 째 반복되고 있으니 드라마에 힘이 안생기지요.


그로부터 10년 후,
금삼의 피는 야사에서만 전해지지만 사극에서는 극적 재미를 위한 필수 요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으로 성장하였고,
왕권과 함께 자라지 못한 양심은 폐비 윤씨의 피를 본 순간 시커멓게 변해서 폭발해 버렸습니다.


금삼의 피를 보고 우는 연산군 동영상




확실히 이 장면은 참 표현하기 힘든 장면인 것 같습니다.

안재모의 연기도 놀라웠지만 약간.......은 좀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고...
왕과 나의 정태우는 뉴스에서 하루 종일 '정태우의 광기 연기' 어쩌구 떠들더니..ㅡㅡ;;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피묻은 적삼을 보고 분노와 광기가 일시에 폭발하는 장면은
안보던 사람도 끌어당길 수 있는 부분인데.... 심하게 밋밋하더군요. 광기 연기는 커녕 목소리에 힘을 잔뜩 넣어 억지로 울려고 노력하는게 너무 표시가 많이 나서 시종일관 눈에 힘줄 생기도록 애쓰고 있는 정태우가 불쌍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정태우 광기어린 눈빛 연기
정태우 연산군 광기어린 눈빛 연기


폐비의 마지막 부탁인 금삼의 피를 원자(연산군)에게 전해달라는 유언도 야사에만 전해오는데... 야사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흥미진진한 건 사실입니다.


폐비 윤씨(김성령)가 금삼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는 동영상

"어머니.. 울지 마세요.
원통해도 나는 웃으면서 죽습니다.. "  섬찟한 장면이지요.



이 동영상에서 폐비에게 차마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인물이 불운한 신하 이세좌입니다.


이게 끝.



오늘같이 글짧으면
뭔가약간 찜찜하나
이런날도 있어야지
그래야지 나도살지
쓰는사람 편리하고
독자역시 즐거운글
1 분만에 쓰고읽어
너도나도 시간남네
이런글을 많이늘려
우리같이 놀아보세
남는시간 잘굴려서
어화둥둥 놀아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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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계신 신사숙녀 언니옵하 누나형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드디어 왕과 나에 성인 연산군이 등장합니다.. 제가 이 날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지요.. 흑흑.ㅠㅠ
왕과 나에 연산군이 등장하려고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나봅니다. 
마치 10년 만에 보는 님 보듯 두근두근하는 내 심장 같으니라구~ 음하하..

역대 연산군 모음 - 최고의 연기력과 광기를 보여주는 연산군역 배우들 모음

위에서부터 정진영, 정태우, 임영규, 이민우, 유인촌, 유동근, 안재모, 신영균



연산군은 조선왕조 아니 우리나라 전 역사를 다룬 사극에서 주인공으로 가장 자주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여러 연산군들끼리 연기 비교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실은 역대 연산군으로 투표를 하고 싶었는데 왕과 나 연산군까지 포함을 시켜야한다는 요상한 사명감에 사로잡혀서 여태까지 아기다리고기다리었습니다. (30년도 더 된 유머죠. 눼눼. 죄송합니다.) 다른 작품에서의 내시 김처선과 김자원도 비교해보세요~

우선 객관적인 선택을 위해서는 작품과 캐릭터 성격에 대해서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각자의 매력이  흘러 넘쳐서 고르기 힘듭니다.

먼저 오래전 영화에서 활약해주신 신영균 연산군..
광기는 별로 안보이는 신영균 연산군


당시 사극은 뭐 옷을 찰흙으로 만들었는지.. 왠 한복 색깔이 저리 눈부신 보라색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고증까지 잘 하기가 쉬웠겠습니까? 고증 따윈 필요없어~ 적당히 이해하시면서 봐주시고요.

저 때는 조선왕조실록이 국역 완역되어 있지도 않았고, 지금에 비해서 영화 제작 환경도 나빴기 때문에 고증을 따지는 건 저한테 '이효리 춤 따라하면서 표정까지 뇌쇄적으로 지으라'고 하는 요구와 같다고 봅니다. 어쨋든 이 분의 연산군 연기는 과잉된 듯한 느낌이면서도 확 폭발하는 부분이 없으니 좀 갑갑합니다. 딱히 나쁘다고 생각은 안하지만 특유의 구식 연기 스타일 때문에 몰입은 상당히 힘드네요.


유인촌씨는 왕 역할을 도맡아 하셨던 분인데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라는 영화에서도 활약해주셨고, 저는 잘 모르지만 연극에서도 연산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SBS 드라마 임꺽정 초반부에서도 연산군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다음은 각각 영화 연산일기와 임꺽정에서의 유인촌씨입니다.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에서의 연산군 유인촌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에서의 연산군 유인촌(갑자사화 일으키기 전 문제의 술 따르는 장면이죠.)



연산군 연기 좀 봤다~~ 하시는 분들은 이 연기를 보고 최고라고 감탄에 감탄을 하시더군요.  


자원아, 활을 준비해라. 조선 최고의 활에 독화살을 재어서
우리 어머니를 죽인 원수들의 가슴에 피꽃을 피우자.  피꽃을.

뭬야? 그 놈 초상 끝나는 대로 사약 한 사발 퍼 멕여라.
우리 어머니가 먹고 죽은 펄펄 끓는 부자탕을 그 놈 아가X에 ㅊ넣으란 말이다!

소름이 쫙 끼치는 대사들입니다...


금삼의 피를 보고 통곡하는 안재모 연산군..
(야사서 파수편에는 금삼의 피를 본 임금이 그 천을 부여안고 밤낮으로 통곡했다고 나옵니다.)

저는 좋고 안좋고의 판단은 보시는 분들께 맡기고 제 느낌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유인촌씨의 연기는 감정의 진폭이 굉장히 큽니다. 뒤에 보실 유동근 연산군이 너무 정적이라서 실감이 안나고, 젊은 연산군 이민우(당시 19세), 안재모(당시 20세)의 연기가 너무 폭발적인 쪽에 치우친 느낌이라면 유인촌씨 연기는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진짜 맛이 살짝 간 느낌이라고 할까요? 최근에 연산군 중에서는 정진영씨의 연산군이 유인촌씨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실록에 쓰여진 연산군의 행동들을 토대로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몇 가지만 살펴봐도 갑자사화 당시 그는 이미 제대로 미친 X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자신을 욕할까봐 두려워하여 궁녀들이 웃는 것도 싫어했다고 합니다. 신언패를 채우고, 훈민정음 사용금지를 시킬 정도로 심한 언론 탄압을 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을 아무도 못믿으니 모든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그게 뜻대로 안되면 죽이고.. 어제까지 사랑하던 여인을 그 다음 날 찢어죽이고, 그런 식이죠. (편집증, 경계선 인격장애, 사회성 부족, 자기애적 성격장애, 애정결핍, 의존적 성격장애 등 다수 짐작 가능)

김처선에게 그가 그렇게 가혹했던 것도 그런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릴 때부터 마음 붙일 곳 없던 연산군이 김처선을 믿고 의지했기에 김처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렇게 뼈아팠던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김처선에게 활화산같이 분노를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연산이 장녹수를 그렇게 사랑한 것, 월산대군 부인 박씨에게 의지한 것 등을 보면 그는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연산군을 굉장히 단순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냥 원래 천성이 나쁜 놈, 섹스에 미친 놈 정도로만 몰아갔거든요. 그러나 현대의 사극작가분들은 연산군 행동의 배후 심리를 추측하여 대본을 쓰신 것입니다. 그 당시 연산군이 단순하게 나쁜 놈이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고, 정신병적인 문제가 일시에 폭발하여 그리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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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각에서 보니까 각 작품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더라구요.

유인촌씨의 연산군은 경계선 인격장애 + 자기애적 인격장애, 유동근씨의 연산군은 편집증 + 애정결핍 + 자기애적 성격장애, 이민우, 안재모의 연산군은 편집증 + 경계선 인격장애, 정진영씨의 연산군은 애정결핍 + 사회성 부족 + 의존적 성격장애 + 피해망상증 등이 보였습니다.
(제 눈에는 그랬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전혀' 아닙니다. 이에 대한 토론을 원하시면 댓글을 남겨주세요. 틀린 점 지적이나 올바른 정보 또한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광기어린 눈을 번득이는 안재모 연산군과 김자원


유동근씨는 역시 실망을 시키지 않는 연기자입니다. 얼마 전에도 우연히 재방으로 장녹수를 잠깐 봤는데 10년이 넘은 연기임에도 어색함이 없으시더이다. (※드라마 한명회에서의 성종, 폐비 윤씨, 인수대비 연기, 장녹수에서 박지영씨의 장녹수, 인수대비의 연기는 전 조금 어색했어요. 뭔가 구식 연기라서 민망하더라구요. 다른 배역의 연기와 당시 상황 묘사, 스토리 전개까지 다 따졌을 때 현재 왕과 비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상을 보고 나면 폭군 연산군이 불쌍해보일 것입니다.


유동근의 연산군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외로워하며, 스스로에 대한 불신으로 괴로워하는 연산군입니다. 폐비의 자식이라는 것에서 오는 상처와 열등감, 폐비를 신원시키고 폐비의 복수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마음은 늘 허전합니다. 갑자사화가 끝난 후 평화가 찾아올 줄로 기대한 신하들은 연산군의 향락과 폭력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져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폭발력을 너무 안보여주는게 좀 아쉽습니다. 유동근씨는 무슨 주문을 받았는지 너무 절제를 하십니다.
확~ 폭발해줘야 할 시점에도 조곤 조곤 속삭이면서 타이르듯 말을 하거든요.

늙은 내관의 말처럼 공포가 대궐 안팎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연산 자신이 그 공포의 희생자였으니...

장녹수 보고 있으면 연산군은 성군 같고, 정귀인 엄귀인이 임금한테 바락바락 대들어서 맞은 것 같다니까요. 설마 연산군이 저 장면에서 정귀인한테 곱게 타일렀겠습니까? 이민우, 안재모는 이럴 때 확 폭발을 해주니까 시원하더군요.  위의 동영상과 비슷한 부분입니다. 안재모의 연산군과 유동근 연산군이 거의 똑같은 대본으로 어떻게 표현을 하는지 비교해보세요. 간신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내시 김자원도 여기서는 그닥 나빠보이지 않습니다.

안재모 연산군에게 충언을 고하는 김처선 동영상 (삭제됨.


이민우는 한명회(1994)에서, 안재모는 왕과 비(1998)에서 귀신같은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글 쓰기 전까지는 안재모 연산군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글쓰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안재모, 이민우는 광끼(광기)가 너무 안보였다는 점에서 -1점. 연산군이 너무 정상적으로 보였거든요. 그냥 정상인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길길이 날뛰는 것으로 보였을 뿐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문제적 인간으로는 안보이네요.

한명회에서 엄귀인, 정귀인, 인수대비 찾아가서 행패 부리는 이민우 연산군


한명회 연산군에서 짧게 지나간 장면을 왕과 비에 두 영상으로 나누어 보여드리겠습니다.

 


 


연산군 폭발씬에서 꼭 나오는 세 장면: 금삼의 피 확인, 이세좌한테 술 따뤄주기, 인수대비한테 술 따뤄주기에서 가장 유명한 금삼의 피는 실록에 안나옵니다. 월탄 박종화 작가님의 소설 금삼의 피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이는 야사에만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사극은 정사와 야사를 섞기 때문에 이 장면도 흥미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들어가지만요.

금삼의 피


이 장면 말고 나머지 두 장면은 실록에서도 나옵니다. 인수대비에게 정귀인, 엄귀인의 아들을 끌고 간 연산군이 술을 따르라고 시키면서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 연산군일기에 적혀져 있습니다. 성리학을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알던 조선시대에 저런 짓을 하다니 연산군은 잘잘못을 떠나서 쫓겨날 만 했다고 봅니다. 윗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그의 행동이 결국 자기 무덤을 제 손으로 판 것이죠.


한편, 정진영씨를 보십시다.

왕의 남자 정진영 연산군 강성연 장녹수


저 눈빛 보이시죠?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저 눈빛, 무언가를 찾아헤매는 불안해보이는 행동이 딱 제대로 정신 나간 인간 같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에 이 부분이 너무 적응이 안되서 정진영씨 연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폭군을 왜 정신병자로 만들어놨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ㅋㅋ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그 시점에 연산군은 이미 맛이 갔다고 보는게 정확한 것 같습니다. 정신병 때문이든,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든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의 눈빛 아닙니까?


아.. 한 명을 선택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려.. 흑흑..ㅠㅠ

그래서~~
저같은 괴로움을 겪으실 여러분을 위해서 복수 선택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참고로 하시고 투표도 하시고 결과도 재미있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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