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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

정순왕후 간택 일화와 정순왕후의 일생, 그녀의 악행들

영조 계비 정순왕후 간택 일화 -  네가 돌면 되지 않느냐?


이산 정순왕후
조선 제21대 영조께서는 첫째 왕비 정성황후 서씨(貞聖王后 徐氏)와 연잉군(延礽君) 시절 11살 때(1704년)  13살의 달성 서씨와 가례를 올리고 서씨는 혼인한 후 왕위에 뜻이 있던 영조와 동고동락한 사실상의 동지였다.

경종 시절 서씨의 조카 서 덕수가 노론 4대신<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중추부판사 조태채(趙泰采), 중추부영사 이이명(李頤  命)>이 연잉군을 국왕으로 추대했음을 전하고 또 이 때문에 사형까지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서씨의 친정은 영조를 즉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드디어 경종 4년 소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위기를 넘어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히도 정성왕후 서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영조는 결국 세 명의 후궁들에게서 2남 7녀를 낳았느데 제1후궁인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와 두 명의 옹주를, 제2후궁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와 화평옹주, 화순옹주를, 제3후궁인 귀인 조씨가 화유공주를, 마지막 후궁인 숙의 문씨가 화령옹주와 화길옹주 등을 낳았다.

일곱 명의 딸 중 맏딸은 유아기 때 사망했고, 둘째 딸 화순옹주는 남편 월성위가 죽자 그 뒤를 따라 굶어 죽었다. 다섯째 딸 화협용주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첫아들인 효장세자도 영조가 즉위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열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다음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둘째 아들 사도세자였다.

서씨는 후궁들의 몸에서 난 소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도세자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쏟으며 돌보았다. 그러기에 만일 서씨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면했을 지도 모른다.

1757년 2월 왕비 정성왕후가 소생이 없이 66세를 일기로 먼저 세상을 뜨자 영조는 장차 자기도 홍릉[弘陵] 왕비 옆에 묻히고자 에 허우(虛右:오른 쬭에 자리를 비워두는) 제도를 쓰도록 하였을 정도로 애통해했지만,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정순왕후(貞純王后)의 揀擇(간택)에 얽힌 逸話(일화)! 

어린 시절 유명인 이야기에 종종 등장했던 왕비 간택 이야기의 유명한 일화가 악덕 왕비 정순왕후인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녀는 뒤에 악명을 끼쳤지만 머리만큼은 명석했던 모양이다. 후일의 악행이 없었다면 아주 현명한 왕후로 영원히 역사에 남았겠지만 알고 보는 것이라 순수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1.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당시 왕비 후보는 10명.  드디어 간택의 날. 여러 양반가의 처녀들이 선을 보기 위해 궁녀가 안내하는 방에 들어갔다. 방에는 방석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처녀들의 아버지 이름이 쓰여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영조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앉아 있는 여러 처녀 가운데 어찌된 일인지 김한구의  딸만이 앉아 있지 않고 서 있었다. 궁녀들이 다가가서 서 있는 규수의 귀에다 대고 재촉을 하였으나, 그 처녀는 여전히 서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영조는 직접 물었다.
“다른 처자는 아버지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아서 판단하기 좋게 하는데 김한구의 딸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그대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여 앉지를 못하는고?”

그 처녀는 궁녀에게 가만히 귓속말을 하였다.
“아무리 간택하는 자리라고 하지만, 방석 위에 어버이의 성함자(姓銜字)를 써놓았으니 그것을 어떻게 깔고 앉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이름이 수놓인 것은 바로 아버지가 아닌가?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는 불효라는 말이다. 왕비가 안되어도 좋다. 효녀만 되면 된다. 효녀 이름이 밖에 크게 소문나지 아니하여도 딸로서 도리만 다 하면 된다. 왕비 이전에 딸노릇하는 딸이 되겠다는 말이다. 영조는  이것을 알고 묵묵히 있었다. 속으로는 갸륵하기도 하고 맹랑한 대답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2.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이 드는고?

그리하여 다시 간택이 진행되었는데 영조가 규수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넘기 힘든 고개가 무슨 고개인가?”

한 규수는 "대관령고개입니다."
다른 규수는 "추풍령고개입니다."라고 하는 등  높은 산과 고개의 이름을 말하였다.

그러나 김한구 딸은 "보릿고개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답하였다.

이유를 묻자, “봄에 곡식이 떨어져서 보리가 나올 때까지 배고픔을 참고 넘어야 하는 고개인 보릿고개가 가장 힘들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보리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끼, 아니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리고개이니 백성들에게는 그 어떤 고개보다 넘기 힘든 고개가 보리고개일 것이다. 가난을 신물나게 겪어본 사람만이 보리고개가 가장 힘이 든 고개라고 할 것인데 바로 이 김처자가 그리 말을 한 것이다.

(※실제로 그 김규수는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몰락한 양반의 딸로 충청도 서산 당진 홍성 쪽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살다가 못 살아서  서울에 가면 아는 사람 연줄로 좀 벼슬이나 살까 한 아버지 뜻을 따라 가마를 빌려타고 보모랑 같이 서울에 왔는데 도중에 노비와 숙식비가 없어서 갖은 봉변을 다 당하고 급기야는 벼슬을 살러가는 초행원님에게서 돈 좀 얻어  가죽옷도 얻어 입고 한겨울에 상경을 한 적이 얼마 전에 있었다. 그렇게 빈한한 김한구는 어찌어찌하여 벼슬을 살고 마침내 그의 딸이 이 간택에 뽑히게 된 것이다.)

모름지기 나라의 국모인 왕후가 되려면 백성이 겪는 그 고통이라는 대명사인 보리고개를 알아야 할 것이다.
 

3.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제일인고?

영조의 질문이 계속 되었다. “그대들은 무슨 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가?”

이번에도 다른 처자들은 '첫번째 간택 규수는 목련꽃이라고 하고, 두번째 간택규수는 연꽃 등 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꽃을 들었다.

그런데 김한구의 딸은 다른 말을 하였다.
“목화가 가장 좋으니, 옷을 지어 온 백성을 따뜻하게 입힙니다.” 

목화꽃이라? 이 꽃은 화사하고 예쁜 꽃은 결코 아니므로 일반 상식으로는 맞는 답이 아니라고 하겠는데, 그 꽃이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는 왕비라도 백성이 헐벗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왕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4.
영조가 다시 묻기를 “무엇이 가장 깊은가?”라고 하자 대부분의 처녀들은 ‘산’ ‘물’을 들었으나
김한구의 딸은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물건은 깊이를 헤아릴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답을 하였다. 


이리하여 경주 김씨 김한구 딸이 영조대왕 말년에 계비가 되었으니 정순왕후다.
 

<원문>

何物 最深      무엇이 가장 깊은가?

人心 最深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物心 可測      물건의 마음은 헤아릴 수 있으나,

人心不可測也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정순왕후는 왕비로 뽑힌 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 오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말했다고 한다.


열 다섯(!!!) 어린 나이에 왕비의 체통까지 생각할 만큼 만만치 않았던 여인.


1759년(영조35년) 초여름 6월, 창경궁. 66세의 신랑 영조와 1745년 11월 10일 여주 고을에서 태어난 15세의 신부, 오흥 부원군(鰲興 府院君) 김한구(金 漢耉)의 큰 딸, 경주김씨가 혼례를 올리고 정순왕후로 책봉된다.  임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처녀만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법도에 따라 열다섯 꽃다운 처녀가 노인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영조는 1776년 승하하셨으니 그녀는 참 오랫동안 혼자서 여왕과도 같은 지위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그 부인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던 신부.

이 나이 어린 신부는 경주 김씨 정순왕후의 친정은 사도세자에 적대적인 노론 벽파 집안으로 아버지 김한구(漢耉)의 사주를 받아, 나 언경(羅彦景)이 사도세자의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여 사도세자를 서인(庶 人)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하고, 정순왕후는 당연히 사도세자의 아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보위에 오르는데 정순왕후는 정조의 왕권에 심각한 위협이되는 정치적 정적이였다. 정조는 의문사를 당하게 되는데 정순왕후가 독살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당쟁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에 반대하는 벽파 (僻派)를 항상 옹호하였으며, 훗날 정조가 승하하고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소생으로 11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는데 이때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정국의 태풍의 핵으로 등장하게 된다.


1801년 1월 10일 용상 아래에는 모든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용상에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의 11살 난 순조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긴장된 분위기를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렴 뒤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천주교)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과 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려져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
五家作統(클릭)을 닦아 밝히고, 그 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을 시행하여 진멸(盡滅)함으로써 유종이 없도록 하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였다. 김씨는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시작해, 정국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서학(西學)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이는 마치 조선의 신분 체제 를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순왕후 김씨와 뜻을 같이 하는 노론 벽파가 반대당인 남인들과 일부 노론 시파를 탄압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왕권과 다름없는 정치력을 행사, 국왕과 똑같은 권위에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여, 본인 스스로도 여주. 여군, 여자 국왕을 자처할 정도였던 여인! 그 여인이 바로 경주 김씨 가문 출신의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그녀의 행적으로 봐서 권력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부질없는 권력욕 탓에 그녀 사후에 친정가문이 멸문을 당하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순왕후가 죽자 그녀의 친정인 경주 김씨 일문은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안동김씨 집안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안동 김씨 집안의 견제를 받아 곧 멸문지화를 당한다.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1805년{순조 5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정순왕후는 말기 조선이 망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야말로 조선의 진정한 악의 축이었다.

그녀는 반대당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숙청을 하고 천주교도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면서 권력을 굳건히 다져나갔다. 그녀의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정치권력에 대한 야심이 컸고, 사도세자와 정조의 죽음에 까지 깊숙히 개입되었으며, 개혁군주 정조가 이룩한 모든 업적을 파괴를 위해 전력질주했다고 볼 수 있다.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남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 남인들은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였던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신서파라 한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김씨와 손잡고 서학을 뿌리 뽑는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공격했던 노론 벽파 중심의 정치 세력을 공서파라 부른다.

수렴청정하는 동안  벽파인 공서파(攻西派) 등과 결탁, 정치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시파(時派) 등의 신서파(信西派)를 모함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 등 간부들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丁若銓)·약용(若鏞)형제는 전라도 강진 지방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恩彦君=강화도령 철종의 부친)과 그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 되었다.

남인계 시파와 종교상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는데 앞장을 섰는데 특히 천주교도들의 대학살로 몰았던 신유옥사(辛酉獄事) 후에 사교(邪敎)의 뿌리가 뽑혔다고 축배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정조가 길러놓은 인재들을 모두 죽여 버렸고 '조선개국 - 사화, 임진왜란, 병자호란 - 북벌 준비 전념 - 이어지는 영정시대'는 그야말로 문예중흥기였었는데, 그녀 덕분에(?) 실학은 재야로 묻히고 겨우 명맥만 유지할 지경였으렸다. 영조와 함께 찬란한 문화부흥기를 이뤘던 정조의 노력을 그녀는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조선이 급속히 몰락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 게다가 정순황후 이후 수렴청정과 세도정치가 관습처럼 자리 잡아 정치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정순왕후에서 비롯된 세도정치 시대에 왕들은 숨을 죽이고 구석에 숨어있었으며 왕비들은 외척을 앞세워 전권을 휘둘렀다. (정말 화가 나는 대목이다.)

이후에 흥선대원군이 등장하여 수많은 개혁을 이루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지만 이미 조선은 말기암 환자처럼 대수술을 해도 새로이 태어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있었고... 그리하여 우리가 치를 떠는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치욕을 겪게 된다.

참조글 : 
http://cafe.daum.net/apt77/6Fj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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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려옹 2008.04.08 15:41

    뛰어난 머리를 어디에다 쓰냐의 문제 아니겠습니까??ㅋ
    모 정순왕후는 별문제 없이 즐겁게 살다가 자기 만족하면서
    죽었겠죠.ㅋ

  • Favicon of https://donzulog.tistory.com BlogIcon 돈쥬찌 2008.04.08 16:23 신고

    ㅋ 전 저 분이 너무 연기를 잘하시는거같아요 너무 악랄하게 잘하시는듯 ㅋㅋ

  • 곰삼촌 2008.04.08 18:57

    요즘 이산을 재미있게 보고 있는 중인데 상세한 내용을 읽으니 더욱 이해가 잘 되는군요. 박식한 내용 잘 읽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s://byh8023.tistory.com BlogIcon 카렌♪ 2008.04.08 21:50 신고

    그 떠돌던 말들이 정순왕후 간택 일화에서 나온 말이었군요 ^^;

  • Favicon of https://meloyou.com BlogIcon 멜로요우 2008.04.09 00:50 신고

    정순왕후...
    가만 보면 조선 역사를 실질적으로 뒤흔들 었던 인물은 여자들이 더 많았던 것 같은;

  • 이도형 2008.04.09 07:29

    정순왕후의 그런평가는 사실 과장된 것이지요
    실록에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정조는 개혁군주도 근대화를 꿈꾸었던 군주도 아닙니다
    그냥 왕권강화를 하려했던 군주일 뿐입니다
    그리고 세도정치는 홍국영에서 시작된 것으로 정순왕후와는 무관하며
    정순왕후는 몇 년 하지도 못했습니다
    세도정치 책임은 정순왕후가 아닌 순원왕후에게 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천주교는 세종대왕이 오신다 하더라도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군 여주 표현도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라기 보다는 그녀가 얼마나 불안한 권력을 가졌는지에대한 표시로 보입니다
    안정된 권력을 지녔다면 그런 무리한 표현을 둘 필요도없겠지요

    • Favicon of https://blutom.tistory.com BlogIcon 파란토마토 2008.04.10 09:43 신고

      이도형님,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네.. 정조도 한계가 있었겠죠. 개혁이라는 것도 거창한 꿈을 가지고 했다기보다는 그냥 문제점을 하나하나 개선하려던 것 뿐이었으니 개혁군주라고 말하기엔 무리였을지도 몰라요. 왕권강화는 그의 일생에 걸친 작업이었겠지만요. 전 솔직히 예전에 정조가 참 매력없는 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요즘에 하도 정조 열풍이 불어서 조금 달리 보이고 있습니다. 세도 정치는... 다 똑같은 악질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천주교는 박해받는 거 이해됩니다.

  • 이도형 2008.04.09 07:36

    아 그리고 보릿고개는 저 시기 없었던 말이지요
    실제 보릿고개는 일제 강점기 후반기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조선시대까지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세자 죽음은 그녀 탓이라기 보다는 무서운 부인 혜경궁의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사도세자의 관서미행을 말한 것도 혜경궁이니까요
    또 하나
    정성왕후와 영조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야사가 전하는데
    두 사람의 첫날 밤
    영조가 정성왕후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합니다
    손이 참 곱소
    정성왕후 왈
    제 어미가 일을 시키지 않았서 그렇나이다
    속으로는
    아무것도 몰라요 식의 겸손의 말이었겠지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영조는 손을 놓았고, 이후 거의 그녀를 찾지 않았다 합니다
    왜?
    영조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하고 싶었다네요
    '그래 우리 엄마 무수리다 어쩔래!'

    • 달려옹 2008.04.09 08:35

      보릿고개는 실록에 꽤나 여러번 나오는 말인데요...

    • Favicon of https://blutom.tistory.com BlogIcon 파란토마토 2008.04.10 09:46 신고

      이도형님 정성왕후 손붙잡고 한 얘기는 저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네요. 근데 기록을 찾아본게 아니라 어디선가(책인지 인터넷인지..;;) 읽은 얘기라서 확신이 안듭니다. 어떤 책에 나오는지 좀 알려주실래요? 이렇게 막연하게 들어서 알고만 있고 어느 책에 나오는지 모르니까 너무 답답해서요...

  • 이도형 2008.04.10 10:16

    저 역시 그 에피소드
    소설 혼불에서 읽었습니다
    그 작가분이 거짓말 안 했을 것이라 믿고 있지요
    저 역시 답답합니다
    야사가 한 둘이 아니니
    아 그리고 세도정치 하면 팁하나
    조선왕조오백년 대원군 편에 안동김씨의 전횡이 나오는데
    문제는
    안동김씨 전원이 다 개념있는 정치가로 나옵니다
    개념도 있고 정세관도 있고
    단지 대원군과 달랐던
    그런 정치가로 나오지요
    참 보기 뭐했지요

    • Favicon of https://blutom.tistory.com BlogIcon 파란토마토 2008.04.14 07:34 신고

      아.. 그렇군요.. 저도 야사집 가끔 찾아보는데요.. 출처를 알 수 없는 야사들은 이제 별로 반갑지도 않아요.ㅠㅠ 어릴 때야 그냥 읽고만 있었지만..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은 출처가 없으면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져서요.. 혹시라도 아시는 출처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저 연산군과 폐비윤씨 관련 야사는 거의 다 찾았었는데.. 다른 것도 다 찾았으면 좋겠어요. 조선왕조 오백년;;; 그런 놀라운 내용이 있었군요.. 안동김씨..............

  • 2008.04.10 13:40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s://blutom.tistory.com BlogIcon 파란토마토 2008.04.10 09:34 신고

      아이쿠. 쑥스럽습니다. 이러지 마세요.ㅋ 전 그냥 저 아는 조금의 뼈대에 이것저것 검색을 통해서 살을 붙일 뿐인걸요. 정순왕후 일화는 특히 그랬습니다. 이건 뭐.. 기록을 찾아봐도 어디서 찾아야될지를 모르겠더라구요. 실록이나 야사서 찾는 것도 어느정도 기초 정보가 있어야 찾기가 쉽지.. 저같은 일반인이 알아내기란 참 힘들어요. 암튼 격려 감사합니다.

  • 천년목 2008.04.10 17:49

    정조에게 원한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처음부터 흑심을 품었다는 자체도 이해가 안가구요..
    그렇게 강력하게 나갔었으면 아예 가식은 떨지말지 왜 그랬는지 참.. 정순왕후 김씨.. 알 수 없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네요 정말.. 미워하려 마음 먹으면 잘해주고 살갑게 대하려 그러면 꼭 독기 품게 만들고.. 속 마음을 좀체 알 수가 없는 것 같아요..

    • Favicon of https://blutom.tistory.com BlogIcon 파란토마토 2008.04.14 07:35 신고

      그렇죠? 전 정순왕후에 대해 안좋은 글을 넘 많이 읽어서 그런가.. 이도형님이 아무리 그게 과장이라고 해도 정순왕후는 당최 정이 안가네요.

      천년목님, 요즘 시험기간이시겠네요. 공부는 많이 하셨나요? ^^

  • 천년목 2008.04.14 10:50

    시험 기간은 아니구요.. 저는 공부하는 것 보다 노는 게 익숙해요.. 다른 아이들 처럼 저도 평범하거든요.,
    학교를 근 11년째 다니고 있는데 저는 공부는 씨알도 안 먹혀요 정말... 5월 달에 중간 고사가 있는데요..
    그때까지는 저도 잠수 타게 될 지도 몰라요.. 그저 역사 타령이나 하면서 공부하는 게 백배 낫겠지만요..ㅠㅠ
    혹시라도 '역사'애 대해서 궁금하면 밤에 어머니한테 여쭈어 보거든요? 근데 그게 완전 수다 수준으로 가요..
    특히 단종부부 이야기랑 연산군이랑 폐비윤씨하고 인수대비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수양대군도요!) 이야기할때마다 참 재미있어요.. ㅎㅎㅎ

    • Favicon of https://blutom.tistory.com BlogIcon 파란토마토 2008.04.14 23:54 신고

      ㅋ.. 애들은... 다 그렇긴 하죠.. ㅋ 근데 5월이 중간고사면 정말 늦네요. 보통은 4월 말이던데.. 어쨋든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죠^^ 저는 제 주위에 역사에 대해서 말할 사람이 너무 없어서 블로그 아니면 숨 막혀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어머니랑 그런 얘기를 자세히 하시다니 부럽네요^^ 재밌겠어요!

  • Favicon of http://meffect.tistory.com BlogIcon 달빛효과 2008.04.14 16:46

    저도 이산 방영 초기에 저 에피소드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당시 왜... 정순왕후의 반전 있었잖아요..ㅋ)
    솔직히 그 인물이 그 인물이라고 믿기가 힘들더라구요..ㅎ
    너무 상반되는 이미지잖아요..ㅡㅡ;
    똑똑하고 현숙한 여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권세에 한맺힌듯한 독한 여인;;;
    아무튼 정순왕후라는 존재가 조선 말기에 조선에 도움은 커녕 해악을 끼쳤다는 점은
    정사든 야사든 통틀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정조는 개혁군주이든 왕권강화군주이든 조선에 해를 끼치기보다는 좋은 일들을 많이 했던 군주였고...
    무엇보다, 당시 나라의 구조상 나라는 왕이 다스려야 큰 잡음이 없는 구조였을텐데...
    정실의 죽음으로 어린나이에 들어온 계비 손에 들어가는 구조는 그닥 바람직하지 않았다고 보여요...
    정말 정순왕후의 조선말기에 끼친 영향은 으...ㅡㅡ;

    • Favicon of https://blutom.tistory.com BlogIcon 파란토마토 2008.04.14 23:57 신고

      이산외에도 한성별곡 등에서도 정순왕후의 비중은 상당하죠... 저도 역사에 통달한 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조금 조금씩 주워읽고 들은 것을 모아서 공부하는 수준이라서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요. 아.. 갑갑해.. 역사 전공하신 분들이 이런 거 재미있게 조라좔 써주시면 참 좋을텐데..그죠?? 정조는... 뭐 요즘 붐이라 할 정도의 대단한 왕은 아니라도 좋은 왕이었음은 틀림없는 거 같아요. 그나저나 대왕세종은 그 전에 한참 기대했는데 한동안 넘 재미없길래 아예 안봤는데.. 그 뒤로 어째 됐는지 궁금하네요.

  • 이도형 2008.04.14 23:47

    정순왕후의 실제 권력을 잡은 청정기간은 5년 정도입니다
    그녀가 잘 한 일도 많지요
    흠이라면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정조와 척을 진 것 일뿐이지요
    마치 전 유림의 사랑을 받았던 인종과 척을 진 덕에 문정왕후가 천하 몹쓸 년으로 찍혔듯이요
    실제 가장 큰 문제 시기는 안동김씨 들이었고요
    정순왕후는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리 심한 욕은 안들었을 것입니다

    • Favicon of https://blutom.tistory.com BlogIcon 파란토마토 2008.04.14 23:52 신고

      흠......... 이도형님.. 저보다 훨씬 역사나 역사극에 대해서 많이 아시니까 늘 이것 저것 말씀해주시는데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정보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막연하게 말씀하시니 너무 답답해서요. 저번에도 정순왕후에 대해 좋은 쪽으로 말씀하시던데요,,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 이도형 2008.04.15 00:00

    실제 그녀 수렴청정시기 관노비 해방이 있었지요
    그 외에도 왕권 강화나 민생 안정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불과 5년 밖에 정권을 잡지 못한 그녀가 조선 후반기 전체를 말아먹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납득이 안 가는 것이지요
    정조와 척을 졌다는 이유 만으로 그녀는 받아야 할 욕 이상의 욕을 먹고 있지요
    물론 그녀가 욕을 좀 먹기는 해야 하지만 이산에 나오는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음 대왕세종 말씀 드리면
    세종대왕은 엄마친구아들에서 백성의 죄를 지고 가는 예수님 단계로 승급했지요
    임진왜란+911테러+갑신정변+김용의난+왕자의난을 연상시키는 고려 황실 부흥 집단의 테러와
    그들도 다 백성이며 그들이 왜 일어났는지를 생각해야 하며 우리 역시 20년전에는 반역자였다고 외치는 세종대왕
    덕분에 실록에도 없느 경성부 유배까지 가시는 우리의 충녕대군....

    • Favicon of https://blutom.tistory.com BlogIcon 파란토마토 2008.04.15 00:00 신고

      아.. 실제 정권을 잡은게 5년 정도였군요.. 흠...... 그동안 읽은 책에서는 정순왕후가 항상 안좋게 나오던데.. 하긴 구체적인 행적은 저도 잘 모르니 딱히 그렇다고 할 수도 없네요.. 흠.. 그렇지만 이산에 나오는 건 좀 오버라고 저도 생각했습니다.ㅋ 아무래도 이산이 왕과 나처럼 심한 왜곡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보니까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세뇌당한 사람들이 많겠죠? ^^ 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정순왕후나, 그 외 이도형님이 지적하신 부분에 대해 좀 더 찾아봐야겠어요. 아.... 학교 다닐 때 역사책 좀 더 읽어놓을 걸.. 그때도 바쁘다는 핑계로 늘 쫓기듯 살았는데.. 이젠 그 시간은 커녕, 책 구경도 하기 힘들어서요..ㅠㅠ

  • 이도형 2008.04.15 00:08

    수렴청정을 한 왕비가 다섯이지요
    정희왕후 문정왕후 인순왕후 정순왕후 신정왕후
    이 중 정희왕후 인순왕후 신정왕후만이 욕을 안 드시지요
    문제는 이 세 분의 경우
    그녀들이 없어도 왕좌는 유지되었고 정사가 잘 돌아갔다는 것이지요
    정희왕후에게는 신숙주 한명회
    인순왕후에게는 사림들
    신정왕후에게는 이하응씨가 있었지요
    욕 먹는 두 사람의 경우는 그녀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종사가 위험해질수도 있는 상황이었지요
    두 여인 모두 할 의지는 컸다고 봅니다

    시대도 좋지 않았고 그녀들도 잘 하지 못했고

  • 천년목 2008.04.22 21:39

    조선의 가여운 왕비가 세명이 있었대요.. 그게 동명이인 정순왕후 송씨랑 김씨이고 하나는
    기견의 딸 폐비 윤씨였는데 물론 셋이 똑같이 불행하긴 했지만
    정작 한 사람은 지아비 잃고 서럽게 살아서 동정 받았는데 나머지 두 사람은 권력에 혈안이 되서
    지아비를 너무 사랑해 투기심이 많은 나머지 죽어서도 살아서도 욕먹고..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해요..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보이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의 정순왕후 김씨나 폐비윤씨는..
    정을 줄레야 줄 수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 Favicon of https://blutom.tistory.com BlogIcon 파란토마토 2008.04.24 10:50 신고

      저도 그래요. 사실 폐비윤씨가 죽어갈 때는 그녀의 심정에 동화되어서 가엾다는 생각이 들면서 우습게도 마구 마구 우울해지기까지 했는데 며칠 후에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그녀는 너무 용감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ㅋ 지아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랬다지만 어쨋든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한 사람이 그렇게 가볍게 행동해서는 안되었는데 말입니다.

  • 런던콜링 2008.05.04 04:18

    노팅힐 보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ㅎ 정순왕후..사도세자 이야기 읽으면 꼭 관심 가는 인물이죠..
    드라마에선 잘 안 다뤘지만 10살 연상의 아들과의 관계가 참 복잡미묘했을듯;
    근데 아마 왕족의 법도라는 건 드라마와 달리 아무리 적이라도 끝까지 거짓된 미소로 일관하는 거였겠죠?
    한편으론 완전히 피지도 못한 15살에 66살짜리 노인한테 시집가서 30대 초반에 과부된 걸 생각해보면 이 여자가 권력에
    집착할 수 밖에 없겠다는 공감도 사실 들고요. 물론 위의 얘기를 보면 그전부터 성격이 좀 그랬던거 같긴 하지만;;
    제 생각에는 혜경궁도 상당히 미스터리가 많은 인물인데 드라마에서 너무 단편적으로 다뤄서 좀 아쉽네요.

    • Favicon of https://blutom.tistory.com BlogIcon 파란토마토 2008.05.11 13:13 신고

      그렇겠죠?? 설마 드라마에서처럼 당돌했을라구요. ㅎ 아들도 그렇고.. 겨우 10살 정도(?) 어린 손자에게도 그렇고.. 정순왕후도 여러가지로 입지가 참 곤란했을 것 같습니다. 암튼 이산이 이야기 잘 끌어갔으면 좋겠는데 요즘 질질 끈다~ 왜곡이다 해서 말이 많더군요.

  • 난나난 2008.06.04 09:02

    정순왕후가 악비인건 사실이지만.. 그것을 키운 건 영조와 권세를 오랫동안 누리려는 노론벽파.. 15세의 어린나이에 간택되어 구중궁궐에 앉아 믿을 수 있는 곳이라곤 혈육들 뿐일것이고 그러다보니 권세에 눈이 먼 집안 어른들의 장단에 놀아났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어렸을땜 현명했지만 한쪽언로에만 의지한채 그들의 온갖 아첨과 아부에 오만해졌을것이고.. 권력은 손안에 있겠다.. 그냥 휘두른것이지. 그로인해 조선의 역사가... 어쩌면 정조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조선말엽의 비운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 Favicon of https://blutom.tistory.com BlogIcon 파란토마토 2008.06.05 01:00 신고

      네,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노론에서 오죽 못된 짓을 많이 가르쳤겠습니까? 다 늙어서 빛이 꺼져가는 영조를 바라보면서 노론 집안의 정순왕후가 얼마나 불안했을지는... 안봐도 뻔하네요. 그러니 권력에 집착했을 것이고 모든 것을 바쳐서 권세를 잡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렇게 정조와도 틀어진 것이겠죠. 답답하네요. 암튼.. 댓글 감사합니다.

  • 남기남 2008.08.16 17:03

    이론 황당 시츄에이션....

    정순왕후 때문에 조선이 몰락했다?

    메스컴의 영향이 참 무섭져??

    한중록은 일기형식이지만 남이 보길의식해서 쓴 글이니..

    이점 염두하고 읽어야하구..

    이런 글쓸땐 개인적 감정 이입이 최소한이 될길 바랍니다.... 비약이 넘 심하셔~~

    TV가 참 영향력있써여.. 그쳐?

  • 어허허 2009.02.09 18:33

    오늘 신문기사제목...

    "다혈질의 막후정치가 정조"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2090382&top20=1

    드라마보구 생각없이 글좀쓰지마! ,, you같은 stone들보면 짱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