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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이자 스승이었던 학문정치의 주역, 정조

출처:
디씨인사이드 이산갤러리

너무 좋은 자료라서 모두 함께 보고 싶어서 디씨 이산갤에서 퍼왔습니다.
(디씨 자료는 아시다시피 검색이 잘 안되거든요.)

정조 (正祖) [1752 ~ 1800] [1776.03 ~ 1800.06]
조선 제 22대 왕

前 왕자, 後 왕세손
휘 : 산(蒜)
자 : 형운(亨運)
태어난 곳 : 1752년 9월 22일 창경궁 경춘전
승하한 곳 : 1800년 6월 28일 창경궁 정침
아버지 : 사도(장헌)세자(후 장조, 영조의 제 2왕자) [1735 ~ 1762]
어머니 : 혜경궁 홍씨(후 헌경왕후) [1735 ~ 1815]



◎정치이념

1.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여 왕권강화
2. 재야의 선비와 백성을 적극 포용하여 지방사회의 동요를 막아 사회통합을 강화함으로써 백성을 중핵에 둔 사민국가를 확립
3. 과학기술과 상공업, 그리고 경쟁적인 시장경제가 발전하던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여 농업과 상공업이 병진하는 전향적인 경제질서를 구축하는 일
4. 스스로 군주이자 스승이기를 자처



◎업적

1777년
: 대고의 형식으로 자신이 펼 왕정의 중요 분야를 민산, 인재, 융정, 재용 등 4개 분야로 크게 나누어 제시함
            민산을 일으키기 위해 민은, 즉 민의 폐막부터 없애야 한다는 신념 아래 즉위 직후 각 전궁의 "공선정례"를 고쳐 궁방의 법외 납수분을 호조로 돌리고, 궁방전의 세납도 "궁차징세법"을 폐지하고 본읍에서 거두어 호조에 직납하도록 바꾸어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임. 또한 감사. 수령들로 하여금 민은을 살피는 행정을 강화하도록 함
            어사 파견을 자주하여 악법을 잘라내고 무고를 펴도록 함
            지방의 상급 향리들까지 소견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물음
            융정은 기존 5군영보다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중심으로 병력을 강화하고 서해의 해방을 위해 교동의 통어영과 강화도 경영에 힘씀      
1781년 :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음
             각신들은 이때부터 문한의 요직들을 겸하면서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인 초계문신 강제도 주관함



초계문신제 : 조정의 37세 이하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 → 규장각이 이를 주관하게 하여 왕정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신하들을 확대해 나감

결과 : 근 20년간 10회 시행하여 100여 명을 배출함

1782년 : 서운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달력을 계산하여 천세력을 미리 편찬, 간행하게 함
1783년 : 장용위을 창설함
1791년 : 장용영을 창설함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 감에 따라 "신해통공"의 조치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없애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함
1792년 : [경림문희록]을 간행함 ; 한성부        
1793년 : 현륭원 참배를 계기로 비변사로 하여금 [원행정례]를 저술하여 원행의 절차, 행렬 규모와 의식 등을 정례화 함
            [교남빈흥록]을 간행함 ; 영남
1794년 2월말 : 수원에 수원화성을 건설하여 국방을 튼튼히 함
                     오늘날 1996년 세계문화유네스코에 선정, 1796년에 완성됨  
1794년 : [관동빈흥록]을 간행함 ; 강원도  
1795년 : 잔치의 모든 사실을 [정리의궤통편]으로 남김
            [탐라빈흥록]을 간행함 ; 제주도
            [풍배빈흥록]을 간행함 ; 함흥
            어머니 회갑연을 아버지의 원소가 있는 화성유수부에서 열어 전국의 노인들에게 두루 혜택이 돌아가는 조치를 내리기도 함
1796년 : 화성 북쪽의 만석거와 대유둔을 축조함, 안양시에 만안제를 축조함        
1797년 : [만천명월주인옹자서]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공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임
1798년 : 화성 남쪽의 만년제를 축조함  
1799년 : 아버지 장헌(사도)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 3책을 남기고 자신의 저술, 강론 등도 수년 전부터 각신들에게 편집을 명하여 생전에 [홍재전서]를 완성함
             화성 서쪽의 축만제를 축조함
1800년 : [관북관서빈흥록]을 간행함 ; 평안도

이처럼 각각의 빈흥록을 간행하여 도과(소과의 별칭)의 새로운 전범으로 삼고자 함, 무과에서도 몇 차례의 경과를 통해 다수의 출신들을 배출하면서 [병학통 1785년], [무예도보통지 1790년] 등 정예병 양성에 필요한 병서들을 편찬, 보급함



◎이 밖의 치적들
 
1792년 : 서울 선비들의 사대주의적 작태와 사치풍조를 막기 위해 "문체반정"을 폄
1795년 ~ 1798년 : 용인, 안산, 진위, 시흥, 과천의 군대 1만 3천여 명을 외영에 합속시켜 일종의 지역방어체제인 협수체제를 구축함
동쪽은 창룡위, 서쪽은 화서위, 남쪽은 팔달위, 북쪽은 장안위, 중앙은 신풍위가 맡아 이 이름들은 모두 화성의 4대문과 행궁의 정문에서 따온 것임
1795년에 화성행차시에 화성에 거의 4,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두 차례나 실시함
→ 국방상의 뜻만 아니라 왕이 화성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로 풀이됨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수원화성을 건설하면서 서울을 호위하는 남방의 요새지를 구축함
북 : 북한산성, 개성일대 : 대흥산성, 서쪽 : 강화도성, 문수산성, 동쪽 : 광주 남한산성 그리고 수원화성을 건설함으로서 서울외곽방어체제의 완결을 의미함

정조는 혜경궁 홍씨 회갑연 때의 화성 행차를 왕실의 내탕금으로 충당했으며 화성의 도시 주변에 모범적인 수리시설과 농장(둔전)의 건설에도 순수 왕의 사유재산인 내탕금을 투자함으로서 백성들에게는 돈 한 푼 내지 않도록 함
재위 중에 치세의 방향 모색과 관련하여 규장각을 통해 어정, 어명으로 저술사업을 벌여 근 150종의 산저술들이 이루어짐

문장에 관한 것으로 [사원영화], [시악화성], [팔자백선]등 다수 저술이 이루어짐
경학에 관한 것으로 [경서정문], [역학계몽집전]등을 저술함
사서로 [송사전], [사기영선]등을 저술함
불서로 [범우고]를 저술함
지리서로 [도리총고]를 저술함
축정서로 [성제도설]를 저술함
왕조의 의례관계로 [속오례의]등 수다한 저술이 이루어짐
[이충무공전서], [김충장유사], [임충민실기], [양대사마실기]등을 편찬,간행함
왕조 전기에 만들어진 [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를 합쳐 [오륜행실도]로 편찬, 간행하게 함
향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각종 의례들을 종합 정리하여 [향례합편]을 펴냄
이렇게 많은 저술들의 출판을 위해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 여러가지 자체의 활자를 80여 만자 이상 만듦
규장각으로 하여금 중요한 정사를 매일 기록하게 하여, [일성록]이라는 새로운 연대기 작성을 시작하게 하고, 경연 석상에서 한 말은 참석자들이 기록하여 [일득록]으로 편집됨



◎다른 군주들과 달랐던 정조의 즉위 과정

정조가 등극했던 1776년은 바야흐로 당쟁이 격화되었던 시기로 말 그대로 갈때까지 간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정조가 성군 세종,성종과 비슷한 경향으로 르네상스를 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들과는 달리 불안한 형국속에서 정치를 펼쳤다.

왕세제 금이 즉위하면서 탕평책으로 한 때 두 당파를 조절했지만,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다시 노론이 형국을 이룬 상황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들은 그의 아들 세손이 즉위하는걸 막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우선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을 비롯하여, 홍봉한, 정순왕후, 김귀주, 정후겸, 화완옹주 등 세손을 제거하려는 세력이 조정 곳곳에 있었고, 세손은 하루하루를 고통과 불안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아들 세손을 제거하자는 노론의 제의에 반대하면서 세손은 어머니와 할아버지 영조, 그리고 충신을 맹세한 홍국영의 보호속에 운명의 1775년 12월을 맞이한다.

1775년 12월 겨울... 영조가 승하하기 3개월 전이었다. 당시 영조의 나이 82세...더이상 생에 집착할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온갖 풍파를 겪었던 그가 아니던가. 손자 세손의 나이는 어느덧 장성하여 24세가 되었다. 영조는 집경당으로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영조 자신은 힘이 없고 지쳐 세손에게 기대어 누워 있을 정도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던 상태였다.

영조는 이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하고 있었다.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은 신하된 자로서 받들 수 없다며 극구 반대했고, 홍인한 뿐만 아니라 영의정 한익모 등 여러 대신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영조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하겠다고 다시 한번 선언하자 홍인한은 무엄하게도 절대 그 청을 받들 수 없다며 극구 반대했다.

영조는 결국 승지를 불러 전교를 쓰게 했으나 홍인한이 쓰지 못하도록 막았고, 전교를 읽어보라고 하였으나 홍인한은 끝내 거부하였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자 결국 영조는 노련하게 군사들을 동원하겠다고 했고, 영의정 한익모가 반대하자 영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대신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즉시 순감군을 동궁에서 수점하도록 넘겨 세손을 보호했다.

또한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숙부인 홍인한에게 세손의 대리청정을 방해하지 말라는 언문 서찰을 보냈으나, 홍인한은 온갖 방법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세손이 영조의 눈밖에 나도록 할 참이었다.

홍인한을 비롯한 숙의 문씨, 문성국, 정후겸 등은 사도세자 때와 같은 방법으로 세손에 대한 허위사실을 퍼뜨렸고, 이들은 세손을 대신할 소론 계열의 젊고 강직한 부사직 서명선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려 홍인한을 탄핵한다. 그러자 홍인한도 부사직 심상운으로 하여금 상소를 쓰게 하였고, 이제 영조가 어느 편을 들어줄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결국 영조는 세손의 손을 들어주며 심상운을 처벌하고 세손의 대리청정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해 주었다.

세손의 대리청정이 1776년 3월까지 계속될 무렵, 영조는 83세의 나이로 결국 세손 곁에서 승하했다.  11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그가, 이제 어느덧 25살의 건장한 청년이 되어 그만의 철학이 담겨있는 정치를 펼칠 시대가 드디어 오게 된 것이다.



◎다른 군주들과 다른 정조의 업적

* 규장각 설치

당시 조정은 노론세력들로 가득차 있었고, 소론이나 남인 등 소수 정당들은 조정에 나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과거시험은 부정부패로 얼룩져 더이상 시험으로서의 의미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정조는 규장각이라는 새로운 문한기구를 설치하여 종전의 문한기능과 비서실의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강력한 친위문신세력을 양성하고 이를 개혁정치의 선도적 중심기구로 활용하였다.

재위 5년째이던 1781년 이후에는 초계문신 제도에 의해 규장각에서 기성관료들을 재교육시켰다. 정조는 주기적으로 규장각에 나아가 직접 이들을 가르치고, 시험을 치르고, 글을 지어바치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책노선을 따르는 친위세력을 양성하였는데, 정조가 승하 할때까지 초계문신으로 뽑힌 사람은 모두 138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나서 재위 6년 이후이던 1782년 부터는 각 도의 인재들을 현지에서 발탁하는 별시문과를 자주 시행하여 정치권의 대폭적인 물갈이를 시도했다.

* 백성들을 위한 정치

정조처럼 백성을 사랑한 군주도 드물다. 정조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위해 몸소 그들을 만나려고 행차를 즐겼다. 말만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여타 군주와는 달리, 직접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헤아린 군주였던 것이다.

정조는 화성 건설 때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에게 계절에 따라 의복을 하사하고 최신식 공구를 제작하여 배려를 했을 뿐만 아니라 피해가 없도록 최고의 품값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 때문에 민가를 헐게되자 그곳의 백성들 모두에게 충분히 보상까지 해주었다.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때에는 그곳에 사는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고, 가난한 자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으며, 자신이 직접 인재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런 점들을 보면 정조가 얼마나 백성들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 조선 최대의 정치 이벤트 화성 행차와 화성 건설

정조는 화성을 신도시로 건설하였다. 화성 주민에게는 요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하고 주변 상인이나 장인들에게도 여러 가지 혜택을 주어 화성에 모여 살게 하도록 함으로써 상공업 진흥을 촉진시켰다. 이제 화성은 살기 좋은 신흥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화성의 신도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원래 그 자리는 효종의 무덤 자리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남아있다가 후에 정조가 그곳에 대신들의 지지를 얻어 아버지의 묘로 정하면서 이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덤을 옮겨서 화성을 건설한것이 아니라 화성 건설을 미리 생각해두고 무덤을 옮긴 것이다.

또한, 그는 화성행차를 이용해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 3,000여 명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업적과 위용을 백성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노론을 견제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효도까지 하려했던 것이다. 정조의 화성건설과 화성행차는 말 그대로 조선 최고의 정치 이벤트이자 조선 건축기술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역대 군주중 최고의 저작

정조는 국왕이기에 앞서 상당한 수준의 학문을 갖춘 대학자였다. 그의 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은 [홍재전서]이다. 정조의 개인 문집인 이 책은 총 분량이 184권인데, 학문이나 문장으로 명성을 날린 사대부의 문집이 20~30권 정도에 머물렀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의 저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조의 저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조는 청년 시절부터 저술을 시작했는데 평생토록 그가 편찬한 책은 2,500권, 그가 내린 지침에 따라 신하들이 편찬한 책은 1,500권에 이른다. 그렇다면 정조가 이처럼 동서고금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저작을 남길 수 있었던 바탕은 무엇일까.

정조는 어릴 때부터 대학자가 될 소질을 보여주었다. 첫돌을 맞은 정조는 붓과 먹을 가지고 놀고 책 읽는 시늉을 하였으며, 좀더 자라서는 효자와 공자의 일생을 그린 그림을 보며 흉내내기를 좋아했다. 정조의 교육은 네 살때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정조는 날이 밝기전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하고 책을 읽었는데, 그가 얼마나 독서에 열중했던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너무 일찍 일어나지 말라고 타이를 정도였다. 정조는 4살 때 [소학초해]를 금방 끝내버렸다. 어린 손자의 뛰어난 자질을 본 영조는 이례적으로 세손 정조에게 서지수, 김양택을 왕손 교부로 임명하여 [동몽선습]을 가르치게 하는 등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이 결과, 정조가 즉위할 때인 25살인 그는 이미 학문적으로 완숙기에 접어들어 신하들과 인재들을 가르칠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스승이기를 자처했다. 그만큼 정조는 학문에 자신이 있었다. 그야말로 군주가 되기 위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지 않았던가.

정조가 승하하던 1800년, 왕세자 공이 즉위했지만 정국은 또다시 노론 벽파세력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정순왕후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조가 그동안 일구었던 정책들은 또다시 노론의 입맛에 맞게 변하고 말았다. 정조 승하이후 조선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점을 감안하면, 조선 후기 정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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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계비 정순왕후 간택 일화 -  네가 돌면 되지 않느냐?


이산 정순왕후
조선 제21대 영조께서는 첫째 왕비 정성황후 서씨(貞聖王后 徐氏)와 연잉군(延礽君) 시절 11살 때(1704년)  13살의 달성 서씨와 가례를 올리고 서씨는 혼인한 후 왕위에 뜻이 있던 영조와 동고동락한 사실상의 동지였다.

경종 시절 서씨의 조카 서 덕수가 노론 4대신<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중추부판사 조태채(趙泰采), 중추부영사 이이명(李頤  命)>이 연잉군을 국왕으로 추대했음을 전하고 또 이 때문에 사형까지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서씨의 친정은 영조를 즉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드디어 경종 4년 소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위기를 넘어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히도 정성왕후 서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영조는 결국 세 명의 후궁들에게서 2남 7녀를 낳았느데 제1후궁인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와 두 명의 옹주를, 제2후궁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와 화평옹주, 화순옹주를, 제3후궁인 귀인 조씨가 화유공주를, 마지막 후궁인 숙의 문씨가 화령옹주와 화길옹주 등을 낳았다.

일곱 명의 딸 중 맏딸은 유아기 때 사망했고, 둘째 딸 화순옹주는 남편 월성위가 죽자 그 뒤를 따라 굶어 죽었다. 다섯째 딸 화협용주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첫아들인 효장세자도 영조가 즉위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열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다음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둘째 아들 사도세자였다.

서씨는 후궁들의 몸에서 난 소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도세자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쏟으며 돌보았다. 그러기에 만일 서씨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면했을 지도 모른다.

1757년 2월 왕비 정성왕후가 소생이 없이 66세를 일기로 먼저 세상을 뜨자 영조는 장차 자기도 홍릉[弘陵] 왕비 옆에 묻히고자 에 허우(虛右:오른 쬭에 자리를 비워두는) 제도를 쓰도록 하였을 정도로 애통해했지만,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정순왕후(貞純王后)의 揀擇(간택)에 얽힌 逸話(일화)! 

어린 시절 유명인 이야기에 종종 등장했던 왕비 간택 이야기의 유명한 일화가 악덕 왕비 정순왕후인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녀는 뒤에 악명을 끼쳤지만 머리만큼은 명석했던 모양이다. 후일의 악행이 없었다면 아주 현명한 왕후로 영원히 역사에 남았겠지만 알고 보는 것이라 순수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1.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당시 왕비 후보는 10명.  드디어 간택의 날. 여러 양반가의 처녀들이 선을 보기 위해 궁녀가 안내하는 방에 들어갔다. 방에는 방석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처녀들의 아버지 이름이 쓰여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영조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앉아 있는 여러 처녀 가운데 어찌된 일인지 김한구의  딸만이 앉아 있지 않고 서 있었다. 궁녀들이 다가가서 서 있는 규수의 귀에다 대고 재촉을 하였으나, 그 처녀는 여전히 서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영조는 직접 물었다.
“다른 처자는 아버지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아서 판단하기 좋게 하는데 김한구의 딸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그대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여 앉지를 못하는고?”

그 처녀는 궁녀에게 가만히 귓속말을 하였다.
“아무리 간택하는 자리라고 하지만, 방석 위에 어버이의 성함자(姓銜字)를 써놓았으니 그것을 어떻게 깔고 앉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이름이 수놓인 것은 바로 아버지가 아닌가?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는 불효라는 말이다. 왕비가 안되어도 좋다. 효녀만 되면 된다. 효녀 이름이 밖에 크게 소문나지 아니하여도 딸로서 도리만 다 하면 된다. 왕비 이전에 딸노릇하는 딸이 되겠다는 말이다. 영조는  이것을 알고 묵묵히 있었다. 속으로는 갸륵하기도 하고 맹랑한 대답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2.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이 드는고?

그리하여 다시 간택이 진행되었는데 영조가 규수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넘기 힘든 고개가 무슨 고개인가?”

한 규수는 "대관령고개입니다."
다른 규수는 "추풍령고개입니다."라고 하는 등  높은 산과 고개의 이름을 말하였다.

그러나 김한구 딸은 "보릿고개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답하였다.

이유를 묻자, “봄에 곡식이 떨어져서 보리가 나올 때까지 배고픔을 참고 넘어야 하는 고개인 보릿고개가 가장 힘들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보리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끼, 아니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리고개이니 백성들에게는 그 어떤 고개보다 넘기 힘든 고개가 보리고개일 것이다. 가난을 신물나게 겪어본 사람만이 보리고개가 가장 힘이 든 고개라고 할 것인데 바로 이 김처자가 그리 말을 한 것이다.

(※실제로 그 김규수는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몰락한 양반의 딸로 충청도 서산 당진 홍성 쪽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살다가 못 살아서  서울에 가면 아는 사람 연줄로 좀 벼슬이나 살까 한 아버지 뜻을 따라 가마를 빌려타고 보모랑 같이 서울에 왔는데 도중에 노비와 숙식비가 없어서 갖은 봉변을 다 당하고 급기야는 벼슬을 살러가는 초행원님에게서 돈 좀 얻어  가죽옷도 얻어 입고 한겨울에 상경을 한 적이 얼마 전에 있었다. 그렇게 빈한한 김한구는 어찌어찌하여 벼슬을 살고 마침내 그의 딸이 이 간택에 뽑히게 된 것이다.)

모름지기 나라의 국모인 왕후가 되려면 백성이 겪는 그 고통이라는 대명사인 보리고개를 알아야 할 것이다.
 

3.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제일인고?

영조의 질문이 계속 되었다. “그대들은 무슨 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가?”

이번에도 다른 처자들은 '첫번째 간택 규수는 목련꽃이라고 하고, 두번째 간택규수는 연꽃 등 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꽃을 들었다.

그런데 김한구의 딸은 다른 말을 하였다.
“목화가 가장 좋으니, 옷을 지어 온 백성을 따뜻하게 입힙니다.” 

목화꽃이라? 이 꽃은 화사하고 예쁜 꽃은 결코 아니므로 일반 상식으로는 맞는 답이 아니라고 하겠는데, 그 꽃이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는 왕비라도 백성이 헐벗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왕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4.
영조가 다시 묻기를 “무엇이 가장 깊은가?”라고 하자 대부분의 처녀들은 ‘산’ ‘물’을 들었으나
김한구의 딸은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물건은 깊이를 헤아릴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답을 하였다. 


이리하여 경주 김씨 김한구 딸이 영조대왕 말년에 계비가 되었으니 정순왕후다.
 

<원문>

何物 最深      무엇이 가장 깊은가?

人心 最深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物心 可測      물건의 마음은 헤아릴 수 있으나,

人心不可測也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정순왕후는 왕비로 뽑힌 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 오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말했다고 한다.


열 다섯(!!!) 어린 나이에 왕비의 체통까지 생각할 만큼 만만치 않았던 여인.


1759년(영조35년) 초여름 6월, 창경궁. 66세의 신랑 영조와 1745년 11월 10일 여주 고을에서 태어난 15세의 신부, 오흥 부원군(鰲興 府院君) 김한구(金 漢耉)의 큰 딸, 경주김씨가 혼례를 올리고 정순왕후로 책봉된다.  임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처녀만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법도에 따라 열다섯 꽃다운 처녀가 노인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영조는 1776년 승하하셨으니 그녀는 참 오랫동안 혼자서 여왕과도 같은 지위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그 부인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던 신부.

이 나이 어린 신부는 경주 김씨 정순왕후의 친정은 사도세자에 적대적인 노론 벽파 집안으로 아버지 김한구(漢耉)의 사주를 받아, 나 언경(羅彦景)이 사도세자의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여 사도세자를 서인(庶 人)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하고, 정순왕후는 당연히 사도세자의 아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보위에 오르는데 정순왕후는 정조의 왕권에 심각한 위협이되는 정치적 정적이였다. 정조는 의문사를 당하게 되는데 정순왕후가 독살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당쟁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에 반대하는 벽파 (僻派)를 항상 옹호하였으며, 훗날 정조가 승하하고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소생으로 11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는데 이때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정국의 태풍의 핵으로 등장하게 된다.


1801년 1월 10일 용상 아래에는 모든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용상에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의 11살 난 순조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긴장된 분위기를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렴 뒤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천주교)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과 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려져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
五家作統(클릭)을 닦아 밝히고, 그 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을 시행하여 진멸(盡滅)함으로써 유종이 없도록 하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였다. 김씨는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시작해, 정국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서학(西學)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이는 마치 조선의 신분 체제 를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순왕후 김씨와 뜻을 같이 하는 노론 벽파가 반대당인 남인들과 일부 노론 시파를 탄압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왕권과 다름없는 정치력을 행사, 국왕과 똑같은 권위에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여, 본인 스스로도 여주. 여군, 여자 국왕을 자처할 정도였던 여인! 그 여인이 바로 경주 김씨 가문 출신의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그녀의 행적으로 봐서 권력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부질없는 권력욕 탓에 그녀 사후에 친정가문이 멸문을 당하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순왕후가 죽자 그녀의 친정인 경주 김씨 일문은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안동김씨 집안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안동 김씨 집안의 견제를 받아 곧 멸문지화를 당한다.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1805년{순조 5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정순왕후는 말기 조선이 망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야말로 조선의 진정한 악의 축이었다.

그녀는 반대당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숙청을 하고 천주교도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면서 권력을 굳건히 다져나갔다. 그녀의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정치권력에 대한 야심이 컸고, 사도세자와 정조의 죽음에 까지 깊숙히 개입되었으며, 개혁군주 정조가 이룩한 모든 업적을 파괴를 위해 전력질주했다고 볼 수 있다.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남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 남인들은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였던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신서파라 한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김씨와 손잡고 서학을 뿌리 뽑는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공격했던 노론 벽파 중심의 정치 세력을 공서파라 부른다.

수렴청정하는 동안  벽파인 공서파(攻西派) 등과 결탁, 정치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시파(時派) 등의 신서파(信西派)를 모함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 등 간부들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丁若銓)·약용(若鏞)형제는 전라도 강진 지방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恩彦君=강화도령 철종의 부친)과 그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 되었다.

남인계 시파와 종교상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는데 앞장을 섰는데 특히 천주교도들의 대학살로 몰았던 신유옥사(辛酉獄事) 후에 사교(邪敎)의 뿌리가 뽑혔다고 축배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정조가 길러놓은 인재들을 모두 죽여 버렸고 '조선개국 - 사화, 임진왜란, 병자호란 - 북벌 준비 전념 - 이어지는 영정시대'는 그야말로 문예중흥기였었는데, 그녀 덕분에(?) 실학은 재야로 묻히고 겨우 명맥만 유지할 지경였으렸다. 영조와 함께 찬란한 문화부흥기를 이뤘던 정조의 노력을 그녀는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조선이 급속히 몰락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 게다가 정순황후 이후 수렴청정과 세도정치가 관습처럼 자리 잡아 정치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정순왕후에서 비롯된 세도정치 시대에 왕들은 숨을 죽이고 구석에 숨어있었으며 왕비들은 외척을 앞세워 전권을 휘둘렀다. (정말 화가 나는 대목이다.)

이후에 흥선대원군이 등장하여 수많은 개혁을 이루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지만 이미 조선은 말기암 환자처럼 대수술을 해도 새로이 태어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있었고... 그리하여 우리가 치를 떠는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치욕을 겪게 된다.

참조글 : 
http://cafe.daum.net/apt77/6Fj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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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이야기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이 글을 얼마 전에 발견해서 비공개하고 있다가 지금은 승복이님의 블로그가 아예 사라져 버린 관계로 공개처리했습니다.


이제는 원로 축에 끼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동시에 조선 시대 사극을 들고 오고, 김종학이 판타지 사극을, 정하연이 이방자 여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대극을, KBS에서는 <대조영> 의 후속작으로 <세종대왕> 을 제작할 준비를 마치면서 2007년 하반기와 2008년 상반기는 때 아닌 '사극' 열풍이 불어 닥칠 전망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방송됐던 사극들은 어떠한 인물들을 주로 다뤘을까. 재미로 알아보는 대한민국 사극의 단골 손님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후보 1.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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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극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흥행카드' 라고 한다면 단연 연산군이다.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고 고아와 마찬가지로 자라나며 삐뚤어지기 시작한 연산군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 주위를 둘러 싼 권력 암투와 2번에 걸친 사화, 요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폐륜 등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담아내며 사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갖췄다.  

1962년 영화 <연산군> 에서 신영균이 열연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 이 후로, TV판 '연산군' 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971년 TBC <사모곡> 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때 연산군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배우는 바로 우리에게 <사랑이 뭐길래><딸 부잣집> 등으로 친숙한 배우, 김세윤. 김세윤의 뒤를 이어서는 1985년 MBC <조선왕조 500년-설중매> 에서 임영규가 연기한 바 있고, 1987년에는 영화 <연산군> 에서 배우 이대근이, 1994년 KBS <한명회> 에서는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 이민우가 연산군을 맡아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1년 뒤인 1995년 KBS <장녹수> 에서는 유동근이, 1999년 KBS <왕과 비> 에서는 안재모가 각각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로 안방 극장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가장 최근에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는 영화배우 정진영으로 1000만 관객 돌파의 신화를 낳은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어머니를 잃고 광기 어린 영혼을 소유하게 된 연산군 역을 실감나게 연기해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는 누구일까.

시청률로만 따지고 보자면 <왕과 비> 의 안재모로 그 당시 최고 시청률이 44.3% 를 기록했을 정도. 녹록치 않은 경력을 지닌 연기파 채시라와의 연기대결은 <왕과 비> 의 사상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데 1등 공신이라 할 만하다.


후보 2. 장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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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하면 떠오르는 여자하면 당연히 장녹수다. 연하의 연산군에게 장녹수라는 존재는 아내이자, 첩이었고, 어머니였다. 연산군 시대의 개막과 함께 그를 파멸로 이끌고 결국은 자신까지 돌무더기 무덤 속으로 들어간 시대의 요부.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지금까지도 연산군과 함께 한국 사극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 '요부' 를 실감나게 그려 낸 인물은 누가 있을까. 1971년 <사모곡> 에서 김세윤과 호흡을 맞춘이는 이제 원로 배우 소리를 듣는 고은아이고, MBC <설중매> 에서는 '섹시배우' 이미숙이, 영화 <연산군> 에서는 강수연이 장녹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자타공인 최고의 장녹수는 KBS <장녹수> 의 박지영으로 유동근과의 연기 앙상블이 빛났을 뿐 아니라 장녹수가 살아 돌아온 듯 한 실감나는 연기력으로 대내외적인 찬사를 받았다.

19999년 <왕과 비> 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故 이혜련이 안재모와 호흡을 맞춰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고, 작년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배우 강성연이 '녹수' 역을 맡아 남성 중심의 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뽐내는 등 수많은 스타들이 장녹수라는 캐릭터를 거쳐갔다. 연산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본 것은 장녹수가 아니라 수근비였으나 여전히 장녹수라는 인물은 스타들이 탐을 내는, 연산군과 운명을 같이 한 '매력' 있는 '여성' 인 셈이다.


후보 3. 인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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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이 등장했으니 '인수대비' 가 없을 수 없다.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지만 '폐비 윤씨' 의 사사사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연산군과 인수대비는 조선 500년 역사 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폐륜으로 그 끝을 맺었다. 20대에 청상과부가 되어 잠저로 나온 뒤, 예종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밀어 올리고 훈구파와의 강력한 결탁으로 성종 시대를 안정을 추구했던 한 여걸의 죽음이 그토록 비참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이자 아픔이다.

우리에게 '소혜왕후' 라는 이름보다 '인수대비' 라는 이미지로 더욱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 이 캐릭터는 지금까지 수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거쳐갔다. 이제는 영원한 배우로 기억되는 황정순 선생을 비롯해 영화 <연산군> 에서는 중견배우 정혜선이, <설중매> 에서는 고두심, <장녹수> 에서는 반효정, <한명회> 에서는 김영란, <왕과 비> 에서는 채시라,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윤소정 등이 열연했다. 특이한 점은 정혜선이나 고두심, 채시라 등의 여배우들이 모두 20~3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역을 소화했다는 것.

인수대비의 파란만장한 삶을 20대부터 그려내려다 보니 비교적 젊은 배우를 기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테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으로 보자면 모두 자타공인 '연기파' 들이 이 역을 거쳐갔으니 인수대비야 말로 '연기파 제조기'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에게 지금까지도 소중한 교훈을 남기고 있는 모양이다.


후보 4.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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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최고의 간신이자 사육신과 대비되는 조롱의 대상이면서도 왕권이 약화되던 단종시대를 철인군상과 같은 의지로 뒤엎고 결국은 성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명신(名臣)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린 한명회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평가 되면서 그 역사적 명성을 달리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사육신 띄우기' 로 명성에 흠집을 냈던 한명회는 이제야 제 위치를 찾으며 역사적으로 받아 마땅한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이 유명한 칠삭동이를 맡은 배우들은 정진, 이덕화, 최종원 등. 특히 정진 같은 경우에는 70~80년대 문화를 향유했던 사람들에게 최고의 '한명회' 로 기억되는 인물로 지금 보아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다. 이덕화는 자타공인 가장 유명한 한명회로 회자되는 배우로서 신봉승이 쓰고 그가 타이틀롤을 맡았던 드라마 <한명회> 는 여전히 KBS 가 자랑하는 사극 중 하나로 남아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안목도 달라진다. 미래의 한명회는 우리에게 또 어떤 인물로 기억 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공과' 를 둘째치고서라도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한명회' 라는 이름이 미친 거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리라.


후보 5.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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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여자가 아닌 다음에야 후세에 그 이름이 남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천한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일진대 오직 단 한사람, 명월 '황진이' 는 그러한 평가를 거부한다. 양반 출신의 여성으로 태어나 기생의 길을 택한 여자.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 로 불리우는 조선 최고의 여성 문학가. 벽계수를 골탕 먹이고 지족선사를 파계시키며 세상을 발 밑에 둔 여성. 그것이 바로 기생 황진이의 정체다.

요부의 이미지와 순결한 문학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황진이는 1957년 영화 <황진이> 에서 처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대한민국 최초로 황진이를 연기한 이는 전설의 스타 도금봉. 그 이 후, 강숙희,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 등이 그 뒤를 이으며 이 매력적인 기생 아니, 시인의 일생을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담아내고 있다.

최근 영화 <황진이> 가 개봉되면서 송혜교의 '황진이' 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개인적으로 한마디 덧 붙이자면, 영화 자체의 매력과는 상관 없이 송혜교는 그 위치에서 충분히 잘 해냈다. 송혜교의 황진이가 하지원의 황진이보다 매력적이지 못했던 까닭은 하지원이 송혜교보다 월등히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황진이에 대한 작품의 접근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송혜교는 <황진이> 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 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후보6. 김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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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광해군,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사랑한 여자였던 김개시는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쟁의 역사 속에서 그 요망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선조의 독살설과 인목대비에 대한 핍박, 광해의 실책에 모두 관련되어 있는 김개시는 일개 상궁의 신분으로 대북 정권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정사를 좌지우지한 요화였으니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테지만.

이 요화를 연기한 이는 <회천문> 의 원미경, <서궁> 의 이영애, <천둥소리> 의 이주화, <왕의 여자> 의 박선영 등이고 이들과 함께 광해군을 연기한 이는 이희도, 김규철, 김주승, 지성, 김개시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적 입장에 서 있던 인목대비는 권재희, 이보희, 이현경, 홍수현이 열연했다. 개인적으로 <서궁> 의 이영애와 이보희의 연기는 나름대로 재밌게 본 편이다.


후보 7.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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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글에서 자주 했고, "역대 장희빈" 에 관한 글까지 이미 쓴 상황에서 더 할 말이 무에 있을까 싶으랴만은 해도 해도, 봐도 봐도 재밌는 것이 바로 '장희빈' 이다. 1대 김지미, 2대 남정임, 3대 윤여정, 4대 이미숙, 5대 전인화, 6대 정선경, 7대 김혜수로 이어지는 장희빈의 역사는 곧 한국 사극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장희빈> 이 만들어 질 때는 항상 '장희빈을 재평가 하겠다.' 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지만 결국은 '현모양처' 인현왕후와 '악녀' 장희빈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시청자의 이목을 끈다는 것. 아직도 장희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악녀와 요부' 라는 차원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장희빈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려 했던 김혜수의 <장희빈> 이 나중에서는 그저 '독한 여자' 로만 기억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장희빈은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이미 역사라는 차원을 넘어서 한국 사극에서 가장 '쓸 만한' 캐릭터로 자리 잡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인물이다. 여자vs여자의 싸움에, 선과 악이라는 극명한 대립을 즐겨하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굳이 거스르면서 바꿀 필요는 없다. 장희빈에 대한 재평가는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학계에서 하면 될 일이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그렇다면 이들과 호흡을 맞춘 인현왕후는 누가 있을까. 1대 도금봉을 시작으로 2대는 태현실, 3대 김민정, 4대 이혜숙, 5대 박순애, 6대 김원희, 7대는 박선영이 맡았다.


후보 8.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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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 문학의 정수라고 일컬어 지는 <한중록> 의 지은이로 유명한'혜경궁 홍씨' 는 지금껏 정치적인 이유로 남편 사도세자를 여읜 비운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오히려 사도세자의 구원 요청을 차갑게 외면한 것은 바로 혜경궁, 그 자신이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남편에게 -그것도 정략결혼을 한 남자에게- 그녀는 사랑도, 애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버리는 대신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올인'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에도 사도세자의 씨앗인 정조를 그대로 왕위에 올린 이유는 혜경궁 홍씨의 강력한 의견 표명이 단단히 한 몫을 거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버리되 자식까지는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은 정조를 제거하려는 친정 집안의 움직임에 격렬히 반대하고 정치적 공세를 펼침으로써 마침내 '정조시대' 를 열어제쳤다.

정조 시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일에 관련해 자신의 가문인 풍산 홍씨가 풍비박산 나게 되자 그녀가 꺼내든 카드가 바로 그 유명한 <한중록> 임은 이미 유명한 사실. '한가한 날의 기록' 이라는 뜻의 <한중록> 은 끊임없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친정을 옹호함으로써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 돌파구 역할을 했다. 재밌는 것은 <한중록> 을 쓰던 혜경궁 홍씨의 나이는 이미 70 줄이었으니, 그녀야 말로 영조와 정조 시대를 관통하는 진정 노회한 정객이었던 셈이다.

이야기로 잠시 딴데로 새버렸는데 다시 돌아와서 '혜경궁 홍씨' 를 맡은 여배우는 누가 있을까? MBC <안국동 아씨> 의 김영란을 시작으로, <한중록> 의 최명길, <하늘아 하늘아> 의 하희라, <대왕의 길> 의 홍리나 등이 바로 혜경궁을 연기한 배우들이다. 


후보 9.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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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이라는 빛나는 이름과 '쇄국' 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동시에 쓰고 있는 인물, 흥선 대원군. 상가지구로 시작해 조선말 가장 혁신적인 개혁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의 삶은 드라마로 그려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권불십년' 이라는 말처럼 10년만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끊임없는 정치적 재개로 결국은 을미사변이라는 역사적 책임을 떠 맡을 수 밖에는 없었던 사람. 

대원군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카리스마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로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의 김승호를 비롯하여, <민비> 의 김성원, <풍운> 의 이순재, <대원군> 의 임동진, <찬란한 여명> 의 변희봉, <명성황후> 의 유동근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이순재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연기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바로 <풍운> 을 꼽기도 했는데, 그 만큼 대원군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후보 10.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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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가 나왔으니 며느리가 빠질 수 없다. 바로 '명성황후' 가 그 주인공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였던 그녀는 1895년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시해당하기 직전까지 조선 정계를 쥐락펴락 했던 진정한 여걸이었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적에서는 '공' 보다 '과' 를 더 많이 찾을 수 밖에 없겠으나, 그녀의 죽음과 함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은 명성황후라는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영향력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리했고, 드라마에서도 여과없이 반영 됐다. 그러나 대부분 드라마들은 명성황후에게 있어서 '관대한' 시각을 가졌을 뿐더러 미모의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에 앞장 선 편이다.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에서 원로배우 최은희가 김승호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대중문화사에 등장한 '명성황후' 는 <민비> 의 김영애가 그 바통을 이어 받으며 브라운관에 진출했고, 다시 한 번 김영애가 <풍운> 에서 열연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영애 이 후에는 <대원군> 에서 연기파 김희애가, <찬란한 여명> 에서는 하희라, <명성황후> 에서는 이미연, 영화 <한반도> 에서는 강수연이 맡았다.

지금 젊은 층에게 가장 사랑받는 명성황후는 이미연으로서 그 동안의 강인하고 독한 이미지를 순화시키고 마치 멜로물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을 투영함으로써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조선으로.

최근 <주몽><대조영> 의 경향으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를 벗어난 '탈조선화' '반조선화' 현상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고려 시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태조 왕건> 이 후에, <제국의 아침><무인시대><신돈> 등은 고려시대를, <주몽><연개소문><태왕사신기> 등은 고구려를, <대조영> 은 발해를 다룸으로써 조선이라는 시간을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의 움직임을 보면 한국 사극은 다시 '조선' 을 주목하고 있다.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왕과 나>, 정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리려는 <이산 정조>,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등은 이미 편성이 거의 확정 된 상태로 'Come back 조선' 을 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과 비><신돈> 의 정하연과 <내 남자의 여자> 에서 열연중인 김희애가 손을 잡고 <비운의 이방자 여사> 를 준비중이어서 또 다른 근대사의 비극을 보여 줄 참이다. 왜 그들은 다시금 조선에 주목하기 시작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조선' 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시청자들에게 긴밀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연산군, 장녹수, 인수대비, 장희빈, 정난정, 영조, 정조, 혜경궁, 대원군, 명성황후 같은 인물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친숙도는 이미 40여년간 지속되어져 왔으며 그것이 비록 '식상' 하다고 할지라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 올 수 밖엔 없다. 한국 최고의 사극 감독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닳고 달은' 연산군과 정조를 들고 나온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사극들은 조선으로 컴백한 것일뿐 인물에 컴백한 것 같지는 않다. <왕과 나> 도 연산군이 아닌 김처선이 주인공이고, <이산 정조> 도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영조나 사도세자, 혜경궁이 아니라 바로 정조의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기 ?문이다. 친숙한 배경과 신선한 캐릭터로 무장한 2007년 사극들. 그들은 과연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한국 사극의 역사, 그 역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다,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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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엇갈린 정조 평가, 사료로 보면

정적과도 손잡은 '타협의 명인'
노론 독재체제에서 집권… 주자학 유일사상에서 벗어나 사상적 다원화 추구
실용과학에 관심 많아… 이가환과 대화 나누며 “지구는 둥글다” 주장도
일체의 잡기 외면한 채 수양에 힘써… 비단옷 대신 무명옷 입고 백성 걱정


정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정조를 주제로 한 저술·드라마가 잇따르고 있다.

▲ 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 / photo 조선일보 DB

정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정조를 주제로 한 저술·드라마가 잇따르고 있다.

근래 정조(正祖)에 관한 각종 저술, 드라마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에 따라 정조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 일부에선 “시대를 앞서 간 계몽군주”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에선 “저 혼자 잘난 헛똑똑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정조의 참모습일까. 중립적 입장에서 사료에 담긴 기록을 바탕으로, 그러나 사료의 한계도 감안해가며 임금 정조의 실상을 살펴봤다.

정조에 대한 기본적 사료로는 ‘정조실록’을 들 수 있다. 정조가 증자(曾子)의 일일삼성(一日三省)의 뜻을 취해서 작성한 ‘일성록(日省錄)’과 정조가 또한 매일 반성하는 뜻에서 자신의 언행을 기록하게 한 ‘일득록(日得錄)’ 등도 기본 사료이고, 규장각 일기인 ‘내각일력(內閣日曆)’도 기본 사료이다.

그러나 이런 관찬사료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부분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정조실록’은 정조 사후 정치적 반대파인 노론벽파가 집권하면서 작성되었다는 문제점이 있고, ‘일성록’은 일부 내용이 의도적으로 잘려나갔다는 문제점이 있다. 물론 정치적 반대파에 의한 의도적 왜곡이다. 따라서 이런 사료들을 이용할 때는 작성자의 정치적 의도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하며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나 정약용의 저술 같은 개인 기록들로 보충해야 한다. 

먼저 정조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도세자 문제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쪽에서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이란 ‘팔자흉언(八字凶言·여덟 자로 된 흉언)’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래서 영조는 세손을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10세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란 허물을 씻어주었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 당일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신 것이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0일)라며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스스로 천명했다.


"과인은 세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노론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정조(출처: MBC 이산 홈페이지)

그러나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벽파를 적대시하는 대신 포용에 나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영조의 유훈 때문이었다. 영조는 죽기 직전 세손 정조에게 “임오년의 일(사도세자가 죽은 사건)은 의리상 충분히 옳은 것 같더라도 이는 곧 나를 모함하는 것으로서, 단지 나에게만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너에게도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1일)라면서 사도세자 문제를 제기하는 자는 “왕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조가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면 노론벽파는 선왕의 유훈을 어긴 것으로 쿠데타의 명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는 사도세자를 살해한 노론벽파 전체를 적으로 돌릴 경우 정상적인 정국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사도세자 사건을 없던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정조는 노론벽파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즉위에 성공했는데,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세력과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이 동일한 정치세력이었다.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나 혜경궁 홍씨의 숙부 홍인한, 대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그래서 정조는 사도세자 문제를 가지고 이들을 처벌하기보다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혐의로 처벌했다. 그래서 소기의 정치적 효과를 거두면서도 선왕 영조의 유훈은 위배하지 않는 운영의 묘를 살린 것이다.

정후겸의 최후 (사진 출처 MBC 이산 홈페이지)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타협하는 것은 초인적 인내가 필요했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병석에 누웠을 때 “두통이 많이 있을 때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가슴의 화기는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얼굴을 맞대고 정치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구선복(具善復)이다. 그는 영조 때부터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른바 숙장(宿將)으로서 사도세자 사건에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를 계속 훈련대장, 병조판서 등 군의 중요 보직에 임명하다가 재위 10년(1786년)에야 다른 역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처형한 후 이렇게 말했다.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經筵)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가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정조실록 16년 윤4월 27일)

정조는 재위 13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소를 수원 화성을 옮겨 현륭원으로 삼고 자주 능행(陵幸)했는데 현륭원에 참배할 때면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조실록 18년 1월 20일)고 할 정도로 부친을 애도했다. 그러나 정조는 부친을 위한 최고의 복수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조실록’이나 ‘일성록’ 등의 관찬사료에는 보이지 않지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정조가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칠순이 되는 갑자년(1804년)에 왕위를 순조에게 물려주고 상왕 자격으로 화성으로 가서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려 했다고 전한다.

▲ 정조의 초상 / photo 조선일보 DB

원래의 소원을 이루어 마마(혜경궁)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평생에 사도세자께 자손으로 이루지 못한 통한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내가 선왕의 하교를 받아 이 일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원통하나 이것 또한 의리요, 왕세자가 나의 부탁을 받아 내 소원을 이루어내어 내가 못한 일을 내 대신 행하는 것이 또한 의리입니다.”(한중록)

정조 자신은 선왕의 유훈을 받았으므로 사도세자 추숭사업에 나설 수 없지만 아들 순조가 할아버지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는 것은 영조의 유훈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또한 정조는 ‘지금 신하들이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안 하는 것도 의리이고, 훗날 신하들이 추숭사업을 하는 것도 의리’라고 말했는데, 이는 사도세자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추숭을 반대하는 세력의 입장도 감안한 것으로서 바로 이 부분이 정조와 집권 노론이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정조는 이런 타협을 통해 조성된 왕권으로 미래를 지향했는데 이 부분이 바로 정조의 진면목이다.

정조 즉위 당시 조정은 노론 일당독재 체제였고, 노론의 정치이념이던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였다. 정조는 일당체제를 다당제로 바꾸고, 주자학 유일사상을 다원적 사상 체제로 바꾸어야 조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조가 다당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호대법(互對法)이었다. 호대법은 이조판서가 노론이면 참판은 소론, 참의는 남인을 임명해 상호 견제하게 하는 인사방식이었다. 그러자 노론은 남인들을 서학(西學·천주교)을 신봉하는 신서파(信西派)로 몰아 제거하려 했다. 서학이 사학(邪學)이라며 국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노론의 논리를 뛰어넘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정학(正學·성리학)이 밝아져서 사학(邪學)이 종식되면 상도(常道)를 벗어난 이런 책들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사람들이 그 책을 연(燕)나라, 초(楚)나라의 잡담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 그러니 근원을 찾아 근본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바로 급선무에 속한다.”(정조실록 12년 8월 6일)

정조는 이처럼 천주교는 국법으로 단죄할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 바로 서면 저절로 소멸된다는 논리로 사상 탄압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조는 조선의 성리학을 약화시키며 다원사상 체제를 지향했다. 정조가 자신을 성리학자로 자처한 것은 실제 그가 성리학자여서가 아니라 노론과의 이념 논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서양 과학지식의 습득을 통해 성리학이 이미 낡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는 재위 16년(1792년) 부친상으로 낙향해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정약용에게 정조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주며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계를 고안해보라고 했다고 전한다. 예수회 선교사이자 과학자였던 테렌츠(Terrenz.J, 중국명 등옥함·鄧玉函)가 지은 ‘기기도설’이 바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역학(力學)의 원리에 관한 책이었다.

‘정조실록’ 2년(1778년) 2월 14일조에는 정조가 천재로 유명한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 이가환(李家煥)과 논의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수준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일득록’에는 정조가 “땅이 둥글다는 설은 ‘주비경(周?經)’에 처음 보이는데 혼천(渾天)의 논리로 징험해보면 땅이 둥글다는 것이 분명하다. 남쪽으로 200리를 가면 북극이 1도 낮아지고 남쪽의 별이 1도 많이 보이며, 북쪽으로 200리를 가면 북극이 1도 높아지고 남쪽의 별이 1도 적게 보인다. 만일 땅이 둥글지 않다면 어떻게 그러하겠는가”라며 지구가 둥글다고 말한 사실이 전해진다.

정조는 초인적 의지로 자신의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일체의 잡기를 멀리했다.

“나는 음악이나 여색(女色), 사냥 등은 좋아하는 것이 없고, 즐거워할 만한 인간사로는 국정을 하는 여가에 두세 문사(文士)와 경전(經典)을 이야기하고 시(詩)를 말하며, 옛일을 토론하고 지금의 일을 증험하여 심신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일득록)

또한 정조는 검소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대체로 사람은 일용(日用)하는 의복이 한번 화려하게 되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내가 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 사람이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정조의 이런 검소함은 확고한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 각신(閣臣) 김조순(金祖淳)에게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은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정치철학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

“임금 노릇 하는 도리에 대해 여러 성인(聖人)이 말한 것이 지극하다.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고, 둘째는 조상을 본받고, 셋째는 백성을 사랑하고, 넷째는 어진 이를 높이는 이 네 가지 일이 곧 임금으로서의 훌륭한 절조이다.”(일득록)

이 시대 왜 정조가 다시 부각되는지를 잘 말해주는 구절들이 아닐 수 없다.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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