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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107

[펌] 무엇이 인수대비를 20대에 권력의 핵심으로 만들었는가 출 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 이야기♤ / 블로그 / 냐하하하~ / 2006.08.14 [원문보기] 왕도와 치도가 근본을 이루었던 500년 조선사회에서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대비의 위엄을 누렸던 여인, 소혜왕후. 16살의 어린 나이에 당시 수양대군 이었던 세조의 맏며느리로 들어가, 시아버지 세조와 그 무리들이 지배했던 격동의 세월 속에서 한씨의 처세술은 과연 어떠하였는가. 조선조 가장 학식이 높고 유려했던 정치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소혜왕후의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정치감각● 소혜왕후가 20대에 겪었던 풍파는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뒤, 그의 맏며느리였던 한씨는 당당히 세자빈의 자리에 올라 "폭빈" 이라는 별명까지 받.. 2007. 11. 9.
[드라마의 이해 - 왕과나] '안방의 제왕' 인수대비 - 이덕일 [드라마의 이해 - 왕과나]'안방의 제왕' 인수대비 ( 이덕일·역사평론가 )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남존여비 강요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즉위한 1455년, 만 열여덟 살의 며느리 한씨도 비로소 세자빈이 됐다. 결혼 당시 남편은 대군 아들에 불과했으나 그녀는 이때 이미 시아버지가 임금이 되기 위한 포석으로 자신을 며느리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수대비(1437~1504)의 아버지 한확(1403~1456)은 조선 제일의 중국통이었다. 태종 17년(1417) 명나라에 공녀로 간 그의 누나가 황제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덕분이었다. 성조는 한확에게도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란 벼슬을 내리고,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했을 때는 조선인인 그를 사신으로 임명해 고명(誥命)을 줄 정도로 총애했다. 수양대.. 2007. 11. 9.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왕의 남자 이야기 (남사당패에 대한 Q&A) Q. 영화 오프닝 장면에서, 공길은 싫은 것이 분명한데도 억지로 양반에게 몸을 팔러 가고, 심지어 무리 중에 어떤 사람은 공길에게 몸을 팔 것을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장생을 빼고는 아무도 공길의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너무 한 것 아닌가요? A. 남사당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구성된 유랑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상 정확한 설명은 없습니다만 공길에게 몸을 팔 것을 강요한 사람은 공길이 속해 있는 남사당 패의 꼭두쇠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꼭두쇠는 무리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패거리 식구의 처우에 관련된 모든 처결을 할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패거리 중에 섞여 있기 위해서는 누구도 꼭두쇠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공길이 몸을 팔 경우 양반에게서.. 2007. 11. 9.
송도삼절 황진이의 일화와 시 - 30년 생불을 파계시킨 그녀의 매력 노래와 춤과 시로 당대의 문장가들과 세도가들을 무릎 꿇게 했던 황진이. 기녀이기 전에 철학자요, 예술가의 삶을 살았던 그녀는 동서고금을 통해 몇 안되는 여장부였다. 30년을 수행한 지족선사를 하룻밤에 파계시킨 미모, 화담 서경덕과의 우정, 그녀가 그리워한 벽계수, 당대의 가인 송순과의 만남,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무덤에 술을 올렸다 하여 관직헤서 파면당한 벽파...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며 아직도 우리의 마음속에 맴돌고 있다. 황진이가 기녀가 된 까닭 비록 황 진사의 서출로 태어난 그녀였지만 어느 여염집 여자아이보다도 총명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황진이가 집을 뛰쳐나가 기생이 된 까닭은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다. 황진이가 사는 마을의 한 총각이 먼발치에서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는 그만 .. 2007.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