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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107

폐군의 여인들: 장녹수와 김개시 - 공통점과 차이점은? 장녹수는 연산군을 어떻게 사로잡았나? ※폐군의 역사가 파란만장할 수 밖에 없기에 연산군과 광해군은 드라마나, 영화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시대극 소재 중 하나이다. 재미있는 것은 광해군을 배경으로 왕의 여자라는 드라마가, 연산군을 배경으로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각각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장녹수와 김개시에 대해 알아보자. (출처: 파란블로그) ====================================== 조선 시대의 궁녀들 주에서 명성을 떨친 예는 아무래도 평범한 궁녀로 입궁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후궁이나 왕비의 자리에 올랐거나 후대 왕을 출산한 경우다. 예컨대 숙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경종을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쫓겨난 장희빈, 숙종의 무수리로 들어갔다가 훗날의 영조를 출산한 최숙빈, 고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영친왕을 출사하고 .. 2007. 11. 9.
비운의 왕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 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묘수난의 서삼릉(3) 서삼릉 비공개 지역에 숨어 있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1445-1482)의 회묘를 볼 때마다 김영임이 부르는 '회심곡'의 구슬픈 가락이 묘 주변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폐비 윤씨 회묘의 겉모습은 왕릉과 다름없다. 오히려 웬만한 왕릉보다 외관상으로는 훨씬 훌륭하다. 묘에서 능으로, 능에서 다시 묘로 격하된 폐비 윤씨의 슬픈 운명이 죽어서도 서삼릉 비공개 지역 끝자락에 숨어서 이렇게 눈물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연산군의 정성 때문인지 조선전기 양식을 따르고 있는 회묘의 석물은 웅장한 무인석과 문인석, 석호와 석양도 뛰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두 문인석의 얼굴은 한결같이 어둡고 슬픈 표정이다. 마치 폐비 윤씨의 한맺힌 한삼 자락의 슬픔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2007. 11. 9.
폐비 윤씨 이야기 - 그녀는 왜 폐비가 되었나? 몇 년 전에 미니홈피에 있던 글이라서 어디까지가 원글인지, 정확한 출처인지 기억이 안납니다. 문제가 생기면 삭제하겠습니다. 알려주세요.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 폐비윤씨의 비극을 정확히 이해할려면 이야기는 좀 더 위로 올라가야돼. 때는 세조.(세종의 차남.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지. 왕이되기전엔 수양대군으로 불렸슴) 세조에겐 아들이 둘 있었는데 첫째가 당연히 세자.(조선의 왕위는 장자승계원칙) 그런데 이 세자가 젊어서 병으로 죽고 20대의 세자빈은 애딸린 청상과부가 됐지. 왕실 법도에 따라 세자빈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그리고 세조의 두번째 왕자가 다시 세자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아.(얘가 예종) 그런데 예종이 왕위를 이어받고 얼마 안되서 죽어. 당연히 다시 왕위를 이어야하는데 .. 2007. 11. 9.
연산군 이야기 (성종, 폐비 윤씨 이야기 추가) 출처는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일단 출발점이 되는 성종 성종의 도학 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 (1457-1494, 재위 기간 1469년 11월-1494년 12월, 25년 1개월) "성종은 치세에 능했다.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 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해나갔다. 그 결과로 그는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뜻의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었을 만큼 조선 개국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 성종이 편전을 장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성종은 우선 조정의 서무 결재에 원로 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또한 2년.. 2007. 11. 9.